#강박증 여자
Explore tagged Tumblr posts
Text
결벽증 특징과 대처법 연애 직장관계에서 유의할 점
결벽증이 있는 여성을 이해하지 못해 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깔끔한 성격이 아니라, 불안감에서 비롯된 강박적인 행동일 수 있기에,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결벽증 여자’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애, 직장생활, 심리적 특징을 요약하고 비교 분석표로 쉽게 설명해드립니다. 결벽증 특징과 대처법 연애 직장관계에서 유의할 점 결벽증 특징과 대처법 연애 직장관계에서 유의할 점결벽증 여자 특징과 강박증과의 차이결벽증 여자와 연애할 때 주의할 점결벽증 여자 직장동료와의 관계에서 유의할 점결벽증 여성이 겪는 심리적 고통과 치료 접근결벽증 여자에 대한 오해와 현실요점정리 결벽증 여자 특징과 강박증과의 차이 결벽증은 흔히 청결에 대한 집착으로 오해되지만…
0 notes
Text


출빌하기 전 던킨가서 스트로베리랑 바바리안, 콜라사서 왔는데 하마터면 배낭 안가지고 비행기 탈 뻔 했다. 어떻게 배낭을 던져놓고 탑승할 생각울 했을까? ㅎ
타기전에 맞은편 벤치에 여자둘은 뭔 자존심 때문인지 그렇게 싸우드만 비행기 옆좌석 여자둘은 진짜 쉬지않고 떠든다. 둘다 adhd 있는것 같다. 비행기 뜨고 콜사인 나자마자 옆에애는 테이블을 펴더니 가방에 화장품을 다 꺼내더니 분장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친구들이네 ㅎ pm6:16
콜라에 종이빨대는 꽂으면 무조건 튀어나오는구나! 이스타는 구르마 잘 안끌고 다닌다. 냅킨이랑 물티슈 좀 받을라니까 코빼기도 안보이네! 이 와중에 옆에 여자는 하이네켄 마시면서 계속 화장한다. 계속 키득키득 거림 ㅋ 눈썹 그리는데 왜 내쪽으로 얼굴 확 돌릴끼? 홱 돌렸다가 그었다가 홱 돌렸다가 그었다가… 재밌는 친구네.
일주일 여행은 무언가를 바꾸기는 너무 짧은 시간이긴 하다. 끊임없는 생각과 강박증상을 좀 내려놓고 오는 여행이 됐으면 한다. 요즘 특히 심각한 증상이 에스컬레이터에서 mz들 이어폰 꽂고 길막하거나 아짐아재들 노가리 까면서 두줄서면 왜그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이 모든게 술때문에 망가진 몸 때문 이라는거 안다. 수완나품 내리면 아마도 서서히 회복이 되지 않을까?
이스타 화장실 역대급이네. 작기도 작지만 무슨 벽을 아치로 만들어서 오줌 싸는데 허리 제끼고 눴다. ㅋㅋ 재밌네! pm6:58
준비하면서 산타나 전집 아이폰에 넣는걸 까먹었다. 파일 다 받아놓고 그걸 까먹었네! pm7:11
6.토 수완나품-돈므앙/ 7.일 돈므앙-치앙마이/ 8.월 치앙마이-치앙라이(오토바이픽업)-푸랑카/ 9.화 푸랑카-파야오/ 10.수 파야오-아카빌리지/ 11.목 아카빌리지-치앙라이(오토바이반납)-치앙마이/ 12.금 치앙마이(13:35)-방콕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스케줄인데 강박증 때문에 수도없이 되뇌인다. 술때문에 조절중추가 고장난 듯! pm8:35
옆좌석 여자 아까 화장한 이유가 있었네. 한참 떠들고 친구랑 넷플릭스 보다가 지금 골아떨어졌다. 미간이 넓은 물고기과인데 비행기 불꺼지니까 예뻐보인다. 안속는다. 화장빨! pm8:40
그저께 밤에 막걸리 마시다가 염‘s한테 전화걸 뻔했다. 누나한테도 나가기 전에 전화걸려다가 아무한테도 연락안하고 나왔다. 이번 여��은 체력, 정신은 최하지만 뭔가 새롭다. 나오기 전에 부산여행 간거 아빠 추모공원 간거 해가지고 겨우 편집 다해서 유투브 올렸다. 그 여행도 그렇고 이제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내 앞가림만 하자! 좋은감정도 내가 만든것 아니면 끼일생각 하지말자! pm9:22
도착^^ 10:00 셔틀타고 돈무앙으로 가는중…
0 notes
Text
Zoo - Zoo on the LADEAT BEATS : ESSENTIALS
Zoo – Zoo on the LADEAT BEATS : ESSENTIALS
Zoo – Zoo on the LADEAT BEATS : ESSENTIALS Released: 2022-06-11 Genre: Rap/Hip Hop TRACK LIST: 01. 새삶스럽게 02. 연화리 바닷가 03. Be cocky 04. 남의 여자 05. Will you go out with me? 06. 갑자기 07. FEEL LIKE YE! 08. 미안하지만 09. 존귀함 10. 강박증 2 MP3 320Kbps . . FLAC 16B-44.1kHz

View On WordPress
0 notes
Text
아이유 제제- [선은 지켜야 한다.]
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iownagirl.xyz/%ec%95%84%ec%9d%b4%ec%9c%a0-%ec%a0%9c%ec%a0%9c-%ec%84%a0%ec%9d%80-%ec%a7%80%ec%bc%9c%ec%95%bc-%ed%95%9c%eb%8b%a4/
아이유 제제- [선은 지켜야 한다.]
//
[D-eye] “I.프로듀서.U”…아이유, 아티스트의 강박증
“I.프로듀서.U” 역발상이었다. 모두가 ‘제제’를 말할 때, 아이유는 ‘밍기뉴’를 바라봤다. “여자 나무(밍기뉴)가 보는, 매력적인 제제의 이야기…
news.nate.com
//
아이유 놓고 지식인들까지 ‘설전’…일이 커졌다
[OSEN=박소영 기자] 당사자의 해명과 사과에도 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 설전이 이젠 지식인들의 의견 대립으로 이어지…
news.nate.com
//
아이유 ‘제제’ 논란에 결국 ‘음원 폐기’ 서명운동 시작
[OSEN=박소영 기자] 아이유의 신곡 ‘제제’와 관련된 해석 논란이 연일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누리꾼들이 음원 폐기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6일 …
news.nate.com
인터넷에서 난리길래 봤더니 일이 많이 커졌네 몇일전에는 표절때문에 난리더니..
이제 거품빠지나보네.. 인기는 어느정도 거품이있을수밖에없어. 하지만 아이유가 그또래 여자아이돌중에서 노래는잘했지. 끼도 많고.
이런애들은 왜이렇게 다들 하나같이 여우란말인가.. ㅉㅉ 뭔가 노래좀되고 귀엽다싶으면 다들 요물스러워.. 하긴 그런 끼와 여우짓과 가식이 없으면 저 생활을 어찌 견디겠는가…
그렇다고 뭐 딱히 보컬로서 와 대단해 라는걸 절대로아니니 오해말길. 그또래 아이돌중에 단연잘한다는거지.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만.
그리고 아이유측 변명과 핑계때문에 너무 짜증이나서 내가 웬만하면 포스팅안하려고했는데 해놓고 비공개로해놨는데 몇마디좀 하고싶어서 그냥 공개한다.
그냥 잘못은인정하고 조용히 자숙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했는데. 핑계가 너무 말장난이네. 모티브만 따왔고 제제란 제3의 인물이라?? 놀고있네. 그럼 처음부터 제제라고 제목을짓질말아야지. 어디서 자꾸 말장난이야.. 사람열받게진짜.. 그냥 잘못한거면 잘못했다. 인정하면깨끗할일을. 사람들이 당신네들 발바닥아래에 있는거같냐? 어떻게 저따위 핑계도 변명이라고 할수가있지? 난 저게 더 짜증나고 더 열받아.
여튼 저 허지웅과 이외수 그리고 소원작가등.. 진중권의 발언들.
난 다 일리가있다고본다.
작품은 작품그자체로. 원작을 훼손하지않는 한에서 건드려야한다는것에 공감.
허지웅이 말한
“출판사가 문학의 해석에 있어 엄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문학은 해석하는 자의 자유와 역량 위에서 시시각각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제제는 출판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맞는말이긴함. 근데 여기선 말장난같은 말이라고 느껴짐.
그 문학을 해석함에 앞서 오리지널에 대한 예의를 지켜줬더라면.
최소한 제제라는 아이의 아픔. 그리고 순수한 동심. 이것만은 건드리지않았으면 하는거다. 이것때문에 아이유의 제제노래들어봤는데 곡도 뭐 그냥그렇고..작곡은 누가했는지모르지만 뭐 저런곡을 갖다쓰냐..잘나가면서..ㅉㅉ작곡가가 누군진모르겠지만 작곡재능이 개뿔도없어.. 저딴곡을 잘나간다하는가수에게 팔아먹을수있다니.놀라울따름이다.
암튼 가사는 들으면서도 이건아닌데.. 라는생각이 들었음. 아니 더럽다는말이나 교활하단말을 왜..
학대당한 어린아이의 아픔을 안다면.. 그 공감을 느낀다면. 그런식으로의 해석은…못할텐데..내가 제제라면. 난 동화책 뚫고나왔을거같은데. 내가 글쓴 작가라면 관뚫고나왔을거같다. 이 소설이 모르긴해도 전세계적으로 모르는사람이 없을텐데.. 그럼 이건 국제적망신살일수도있는일인데..
단. 그래도된다면 그건 3류 동인지. 알지? 동인지. 우리가아는 애니매��션을 성적인것으로만 묘사해서 만든 동인지들. 절대 공중파로 나올수없는. 그런동인지라면 모를까. 근데 공중파에서 모두가 보는 대중들이 보고듣는데 그러는건안된다. 혹시모를 자라나는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성가치관을 심어줄수있기에.. 발상이 기발하다쳐도 기본적으로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좋은영화를보고 좋은 음악을듣고 사람마다 해석과 또 느끼는게 다른것처럼 각기 다른해석이 나올수있는거다 자기관점에따라. 그럼 거기서 여러 다른색의 이야기가 만들어질수있는거지만.
최소한 원작이 의도한바를 훼손하거나 나쁜쪽으로해석하거나 성적인것으로 더럽히는건 이건 오리지널에대한 예의가아니지.. 넘어선안되는 선이란게 분명 있다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그건 예술이라고 표현의자유라고해서 예외는아니다. 모든것에 넘어선안될 선이라는게 나는 있다고 믿는다.
만일에 내 작품을 저렇게 멋대로 내의도와는 관계도없이 멋대로 해석했다면 그것이 공중파에서 잘나간다하는 가수가 저렇게 대놓고 내놓았다면. 나라면 고소하고 ���리났다. 내가 원하는 내가 의도한 이야기가있는데 그것을 멋대로 훼손한거니까. 그냥 자기블로그나 개인미니홈피에다 혼자 멋대로 상상을하며 끄적이는거야 그건 모르겠지만. 대중들앞에 서는사람은 그만큼 많은이들에 영향을 미친다는걸 안다면. 뭐든 선은 지켜야한다는거다.
마치 내가 고등학교때봤던 “잔혹동화” 아는사람있으려나? 나 그책샀는데 집에있을것임. 3편까지봤나? 우리가아는 수많은 동화들을 성적이고 더러운관점에서 재해석한동화책임. 그게 생각난다. 내용들이 성적이고 좀 더럽고 별로임. 그래서 보고나서 다시손이안감. 잠깐 화제는될지몰라도 오래도록 사람가슴에 남을수없음.
0 notes
Text
베를린 샤우비네의 거장들 : <엘렉트라>와 <세일즈맨의 죽음>
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askgirlsmeet.biz/%eb%b2%a0%eb%a5%bc%eb%a6%b0-%ec%83%a4%ec%9a%b0%eb%b9%84%eb%84%a4%ec%9d%98-%ea%b1%b0%ec%9e%a5%eb%93%a4-%ec%99%80/
베를린 샤우비네의 거장들 : <엘렉트라>와 <세일즈맨의 죽음>
2007년 가을에 말로만 듣던 베를린 샤우비네의 연출가와 배우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국립극장에서 기획한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에서 그리스 국립극장의 단원들을 이끌고 내한한 살아있는 베를린 샤우비네의 전설 페터 슈타인(Peter Stein)의 <엘렉트라>였고 다른 하나는 국제서울공연예술제에 벨기에 출신의 중견 연출가인 루크 퍼시발(Luk Perceval)이 베를린 샤우비네를 직접 이끌고 참여한 현대의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이 두 작품은 고전극과 현대극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샤우비네의 힘을 극명하게 느끼게 해 준 보기드믄 수작이었다.
1. 페터 슈타인의 <엘렉트라> : 문학적인 연출가
일반적으로 극텍스트로부터 시작되는 연출가의 작업이 문학적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현대에 들어와 연출가가 고전을 과감하게 자르고 편집하여 자신의 연극적 이념에 맞추어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키는 경우라도 연출가가 문학에서 탈피하기는 힘들다. 특히 언어의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때 연극의 문학성은 더욱 부각된다. 배우의 대사가 그러하고, 무언극의 경우라도 언론이나 평론가들의 연극 관련 행위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문학과의 어쩔 수 없는 끈을 의식한 까닭에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연출가들 가운데는 문학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현대 연출이 지니는 하나의 성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현재 독일 연출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슈타인의 경우 철저한 작품 분석을 통해 원작을 가능한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색을 입히는 작업에서 독보적이다. 이번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엘렉트라>도 그러한 그의 연극적 작업관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흔히 평론가의 임무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나 공연의 진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줏대를 상실한 채 거장의 작품에 대해 일방적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습관이 있다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실 대중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연출가의 작품이 공연되면 누구나 관심을 갖게 마련이고 웬만해서는 명망 있는 연출가의 연극을 비난 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번 공연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과시했다는 식으로 그를 칭찬하는 것이 평론가의 판단 미스나 실수에 대한 위험부담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슈타인의 경우는 그의 명성에 걸 맞는 공연으로 훌륭한 무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의 참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 주면서 무게가 있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기에 마음껏 칭찬을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이 공연을 보면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그의 연출력이었다. 연출력이란 넓게는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장치 조명과 음향을 다 포괄하지만 이들 무대언어를 하나하나를 분리시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무대를 관조하면서 과연 연출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대에서 제대로 표출이 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그가 이번에 보여 준 문학적 무대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원작에 대한 존중이 철저하다. 고전에 메스를 가하지 않고서 자신의 혼을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텍스트 분석에 철저하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엘렉트라>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복수는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크게 특이할 것도 없다. 그러한 무대에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엘렉트라라는 개인의 고통일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의 칼 끝이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나아 준 어머니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복수의 신념은 그만큼 갈등을 야기 시킨다. 어찌되었던 <엘렉트라>는 엘렉트라를 중심으로 그녀와 타인들과의 갈등, 특히 동생과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는데 ��로 독백을 통해 혹은 코러스에게 전하는 말로써 드러난다. 그러므로 조명과 의상, 합창 같은 무대언어는 섬세하게 짜인 고급의 옷감처럼 유연하지만 철저하다. 그것들은 엘렉트라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러스의 섬세한 동작은 소리와 더불어 개인의 내적인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고 부피화 시켜 삼차원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불균형과 균형의 집단적 움직임으로 폭과 깊이를 무한히 확산시키는 것이다. 원작에 손대지 않으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연출가의 야심은 상당한 독서량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임에 틀림없겠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슈타인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무대에는 상징이 풍요롭고 일목요연하다. 상징의 일목요연은 바로 텍스트의 철저한 분석에서 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상징의 풍부함은 문학적 무대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상징으로 검은 색 옷과 흰 색 옷의 대조가 있다. 코러스의 흰 색 의상에 둘러싸인 검은 의상의 엘렉트라는 시종여일 빗자루 질을 해댄다. 그녀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살인자인 어머니와 정부인 아이기스토스가 권력을 손아귀에 쥔 채 아버지의 침실에서 희희낙락대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에 가슴을 쥐어짠다.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직 외지에 나가 있는 동생 오레스테스만이 돌아와 아버지를 복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의 검은 옷은 심장이 터질 듯한 그녀의 고통을 상징한다. 검은 색은 검게 타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자 온통 세상에 만연해 있는 더러움과 추악함이기도 하다. 그러한 검은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엘렉트라는 강박증 환자처럼 하염없이 빗자루를 움켜쥔다. 떨쳐 버리고 싶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비극적 행동이 빗자루 질이라는 상징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보라, 어느 순간 엘렉트라는 넝마 같은 검은 옷을 던져 버리고 순백의 흰 옷으로 바꿔 입는다. 검은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다음 자신을 몸을 구석구석 씻어 내리는 행위도 빗자루 질과 같은 의미이다. 검은 것을 완벽하게 씻어내려는 동작은 고통을 혹은 악을 털어내려는 동작인 것이다.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흰 색으로 변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레스테스에 의해 공정한 복수가 이루어져 순수한 세상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무대 장치만 해도 상징성이 풍부하다. 무대 안쪽 정중앙에 제단처럼 쌓아진 검은 문과 그를 둘러싼 알루미늄 질감의 차가운 벽은 그 벽 너머에서 자행될 복수의 장면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암시하고 무대에서 그 암시는 물과 불이라는 생명의 기원, 물질의 기원을 표출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부분과 보이는 부분의 균형을 이룬다. 현대 무대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살인 행위가 결코 무대에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고전 비극의 이론을 존중하는 연출가의 태도, 오직 피 묻은 칼로 복수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행위 역시 연출가의 문학적 태도이다.
셋째, 장면마다 그 감각적 아름다움을 위한 연출가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진다. 소문만 들었지 직접 접하기는 처음인 이번 공연에서 슈타인은 무대 미학을 추구하는 연출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균형미에서 드러나거나 또는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의 적절한 조화에서 발산되었다. 합창과 동작에 있어 코러스의 적절한 활용, 그녀들의 자유로운 소리와 의상과 동선은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 들어있는 엄격성과 규칙미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코러스의 소리와 군무는 짜임새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하게 구조화되어 있고 통일성이 없는 것 같지만 치밀한 연출 속에서 분명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는 코러스의 비대칭적 동작은 슈타인의 연출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다. 하나의 어긋남이 불쾌한 불균형을 초래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을 배가한다. 꽃잎 하나가 떨어짐으로써 전체 꽃잎이 돋보일 수 있는 광경이다. 시종여일 비슷한 장면은 많으나 똑같은 장면은 없어 보이는 그녀들의 합창과 동작은 이 연극의 진수이다.
충격적이거나 크게 두드러진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이념과 원작의 모든 것을 보여준 연출가의 인내력이 돋보인 <엘렉트라>였다.
2. 루크 퍼시발의 <세일즈맨의 죽음> : 깊은 연구의 결과가 자아낸 기막힌 상상력
작품은 연출가를 잘 만나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 이 뿐만 아니라 연기자와 배역, 연출과 배우 등 소위 궁합이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번 경우는 작품과 연출가의 궁합이 기막힌 경우이다. 몇 번을 보았지만 별 다름 특징이 없었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과연 이 작품이 그토록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 이 작품이 과연 명작임에 틀림없음을 가슴 깊이 확인하였다. 그만큼 샤우비네의 공연은 새로웠으며 완성도가 높았다. 흔히 잘 알려진 작품을 접하게 되면 속으로 “과연 너희들은 어떻게 만드는가 한번 볼까”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현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보면 이번 공연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베를린 샤우비네와 그 배우들 자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무대에서 특별한 깜짝 쇼도 없었고 놀랄만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 내내 관객을 깊이 있게 흡입시켰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적절한 리듬감을 살린 탓인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러한 광경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환상적인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고 기발한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닌데… 한 마디로 그것은 ‘해석의 힘’이었다. 앞서 슈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석의 힘’은 샤우뷔네의 두 거장이 보여준 강한 능력이었다. 꾸준히 깊이 있게 연구된 연극, 연구와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된 연극이 진정 가치 있는 연극임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이토록 강력하게 다가온 것은 진정 연출의 힘, 해석의 힘, 연구와 상상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갑작스런 권위가 추락되고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는 우리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클로즈업되어 강조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는 현대성이자 시사성이기도 하다. 연극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연출가는 왜 성을 과장해서 드러냈는가? 벌거벗은 몸, 강조된 여자의 가슴, 아슬아슬한 성 행위 장면, 동성애 등이 확장되어 무대에서 제약 없이 펼쳐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저 눈요기로 그렇기 에는 작품이 깊이가 있고 논리적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그렇다, 성은 욕망이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욕망, 사회적 신분에 대한 욕망, 경제적 욕망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욕망이 성이라는 문으로 표출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욕망은 살찐 자들의 잉여와 결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깃간의 돼지고기처럼 풍성한 듯 보이는 배우들의 잉여적 살덩이는 사회에 의해 욕망이 꺾긴 혹은 사회에 의해 도살된 자들이다. 잉여적 결핍은 무대 안쪽의 숲과 빈약한 나머지 무대의 대립으로도 표현된다. 무성한 숲은 살덩이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숲이다. 헐벗은 중앙 무대와는 달리 배경을 이루는 숲은 무진장 풍요롭다. 그 극한 대립은 젊은 시절 세일즈맨으로서 아버지가 품었던 욕망과 현재의 메마른 운명, 모든 것이 잃고 고독과 분노만이 치미는 이중적 운명, 실패한 욕망의 극단 대립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충만과 공 사이에서 극한 대립이 생겨난다.
무대 안쪽 반 이상을 화분들로 채워 숲을 만들고 나머지 부분은 3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 그리고 TV 수상기가 전부인 무대는 단순한 것 같지만 갖가지 코드가 숨어 있다. 그 코드는 대략 이중적이며 이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옷을 입음과 벗음. 등장인물들은 처음에는 옷을 벗은 형태이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상황에 맞게 점점 옷을 챙겨 입는다. 그렇다. 자가용과 마찬가지로 옷은 사회적 신분이자 욕망의 특징이 있다. 또 하나 남자가 입을수록 여자는 벗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면 그만큼 권력이 생겨나고 여자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지배당하는 여자, 욕망의 대상인 여자로서 옷을 벗는 것이다. 옷은 사회적 욕망이고 벗음은 인간적 욕망일까?
소파는 권위의 상징이자 밥줄의 상징이자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이 소파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풍요의 숲에서 메마른 무대로 나오는 것은 아버지의 종말에 대한 비극을 보여준다.
이번 공연들을 접하면서 우리 연극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만들 수 없는 걸까? 국내에서 제작된 이런 공연은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는 없는 걸까? 국내 극단 중에는 수많은 연구와 각고의 노력을 하는 극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고민과 연구 열정은 서양 어느 극단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국립극단이나 샤우뷔네가 보여 준 ���준의 연극을 순수 국내 극단에서 제작한다는 것은 아마 굉장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양인들의 연극에 대한 전통은 수천 년에 걸쳐 적어도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세기 남짓한 우리의 신연극의 역사를 감안할 때 서양 연극의 전통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사실 연극계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 3세계권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권의 연극도 이런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다. 2007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만난 인도의 <아라비안 나이트>나 우즈베키스탄, 인도, 이란이 공동 제작한 <비극의 여인들> 역시 전반적으로 수준이 미미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1895년이라는 영화 탄생의 년도가 명시되어 있는 영화의 경우 서양이 일찍 출발을 하긴 했지만 연극과 같은 뿌리 깊은 전통은 없다. 따라서 한국영화나 중국영화나 일본영화가 비록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발달된 하이테크놀로지와의 연계 및 인재 양성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서양영화를 못 따라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그들의 수많은 이론과 실제, 꾸준한 연구와 실험, 실패와 도약의 단계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만큼 그들을 따라잡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영화와는 달리 연극에는 번역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연극이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며 그만큼 연극 선진국에 종속되기 쉽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그렇다면 패배의식에 젖어 있어야만 하는가!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다음의 질문을 토대로 연극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연극적 영역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 가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로의 회귀나 보수주의적 개념으로 가자는 것이 결코 아니라 진보적 차원에서 미래 지향적 차원에서 과거의 전통연극을 철저히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연극, 우리의 옷을 입힌 연극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극의 양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영화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과 지형을 배경으로 하듯이, 한국식 사고, 언어, 풍습 심지어 옷과 먹을거리 등 한국적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극작가에 의해 창작된 연극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서양 연극과 우리의 전통 연극을 적당히 얼버무려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작품인가가 아니고 작품을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으로 소화시키느냐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극단 목화, 미추, 우투리, 연희단 거리패 등의 연극은 어느 정도 자신의 색깔을 지니면서 한국적인 문화와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번역극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이들의 연극에는 한국인의 표정과 몸짓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연극에 대한 꾸준한 접촉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열린 개념에서 우리의 과거 연극적 형태를 연구하고 범세계적 차원에서 우리의 것을 개발한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가을에 만난 샤우뷔네 거장들의 연극은 이처럼 연극에 눈 뜨게 하면서 내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충격적인 연극이었다.
우리가 일본 전통 연극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본에 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서양 연극을 배우기 위해서는 서양 본거지에 가는 것이 좋다. 연출도 그렇고 배우도 그렇고 무대 예술가를 포함한 스태프도 그렇다. 그런데 서양 연극을 하는 우리의 배우 가운데 직접 서양에서 공부한 배우들은 많지 않다. 그들은 서양에서 공부한 연출가나 학교의 선생에게 배울 뿐이다. 자 이렇게 되면 문제는 연극학자나 연출가들에게로 넘어간다. 그들은 과연 서양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들이 생각하는 서양 연극의 개념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연극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연극인가? 그들은 과연 연기자들을 제대로 길러내고 있는가?
한편에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티비 드라마나 영화는 그래도 수준이 있지 않는가? 서양의 유수한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기도 했고 감독상을 수상한 적도 있지 않는가? 또 티비 드라마는 한류를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기계와 접목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안 됐을 때 컷 할 수 있는 경우와 평소의 연구에 의해 우러나오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부족한 점을 기계를 통해 메울 수 있는 티비 드라마나 영화는 연기에 있어 부족한 점이 어느 정도 커버가 되지만 맨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연극은 소위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자기 실력대로, 자신의 능력대로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하는 연기는 그 연기자 본인의 연기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티비 드라마가 수준급이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연기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동안 축적된 고급 기술 덕택이 아닐까!
연극학자로서 극텍스트 분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나 역시 극텍스트 분석에 심혈을 기울이고 그 동안 많은 경력을 쌓아 왔지만 서양 학자들의 분석 능력과 방법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은 철저하고 치밀한 분석을 그들은 보여준다. 그들의 분석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연극학자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만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받았던 분석적 교육, 넓고 깊은 독서량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흉내만 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
<공연과 이론> 2007년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