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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but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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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실험

자혜

밀가루를 끊었다. 빵과 면을 먹지 않은 지 3주가 흘렀다. 밀가루를 끊은 첫 주 주말에 집에 갔을 때 엄마가 떡국과 함께 준 만두(만두피)를 먹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정말 약간이라도 밀가루가 섞인 음식을 먹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밀가루가 섞인 어묵도 먹지 않았다. 게다가 튀김도 끊었다. 기름에 볶은 것과 튀긴 것의 차이가 뭐냐고 물으면 좀 난감해지기는 하는데, 대충 기름에 퐁당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거나 튀김옷을 입고 있는 걸 튀김이라 생각하고, 그런 정의에 부합하는 음식들은 먹지 않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할머니께서 집에 사두고 가신 커다란 봉지 안의 견과류들과 함께 찾아왔다. 나는 과제와 스트레스에 둘러싸인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늦게 들어갔는데 과제까지 더 해야 하는 재양의 날이 찾아왔다. 배가 고프기만 했거나, 과제만 더 해야 하는 거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 날은 자제력을 유지하며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게 너무 벅차고 고된 일처럼 느껴졌다. 점심도, 저녁도 못 먹어서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데 늦었으니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애잔했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사는 거지?’ 회의적인 생각들이 불어 닥쳤다. 그래서 밤늦게 과제를 하다 말고 아몬드와 캐슈넛이 들어있는 봉지를 뜯었다. 캐슈넛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그것은 먹는 게 아니라 털어 넣는 행위였다― 고소한 맛과 씹히는 식감, 통제력을 놓아버리는 느낌이 주는 오묘한 감정이 내가 계속 그 행동을 이어가도록 부추겼다. 손이 자꾸 갔다. 식도로 아몬드와 캐슈넛이 올라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먹었다. 새벽까지 그렇게 계속 과제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또 늦은 밤에 과제를 하면서 견과류를 먹었다. 며칠 뒤에도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나는 그 많던 견과류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하다. 몸무게가 늘었다. 그래서 밀가루와 튀김을 끊기로 결심하게 된 거다. 견과류를 먹고 몸무게가 늘었는데 왜 거기서 나는 밀가루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걸까? 그건 밀가루 끊기에 관한 칼럼을 내가 읽다 말고 몸무게를 쟀기 때문이다. 쓰면서 보니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이다. 3주 전 즈음에 그런 일이 있었다. 어쨌거나, 무엇 때문이었건 결심은 이미 해버렸고, 나는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2kg이 빠질 때까지 밀가루와 튀김을 먹지 않겠다는 결심을 플래너에 적고 그 결심을 이어나가고 있다.

밀가루를 끊고 내가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살이 빠졌다거나 피부가 좋아졌다거나 속이 편해졌다거나 하는 누구나 기대할만한 그런 것들이 아니다. 견과류를 먹기 전으로 몸무게가 돌아오긴 했지만 2kg은 아직 안 빠졌고, 피부는 그냥저냥 원래 그 상태고, 위장 건강도 마찬가지다. 대신 생각지도 않던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건 ‘내가 밀가루를 먹고 싶단 생각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길벗 멤버들은 잘 알겠지만, 나는 정말 밀가루 음식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밀가루 음식들을 못 먹게 되면, 다시 밀가루를 먹고 싶단 열망 때문에 단식을 해서라도 살을 단기간에 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굳이 밀가루 때문에 2kg 감량을 빨리 이루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kg가 안 빠지면 그냥 밀가루를 계속 먹지 않고 살면 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물론 알게 모르게 밀가루가 들어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지금 ��장 빵이나 면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밀가루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기 때문에, 애써 평생 면과 빵을 평생 먹지 않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정말 빵이나 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빵을 먹고 싶단 생각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나의 특성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던 것이, 정말 쉽게 증발해버렸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이렇게 밀가루 음식에 대한 갈망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밀가루 음식을 입에 대는 순간 다시 그 맛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빵과 면을 찾게 될까. 그래서 나는 요즘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가 오늘은 밀가루를 먹을 수 있는 날인지 확인하며, 밀가루 실험을 완성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밀가루가 안 들어간 맛있는 음식들이 무지 많아서 체중 감량이 요원한 게 함정.

#밀가루끊기 #빵덕후 #길벗 #kill-but #Ja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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