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살해 사건 조사를 위해 광부의 말로에 왔다. 이제 다음 할 일은 친절한 이웃에게 정의단이 어딨나 물어 보… 응?
탐문할 대상을 찾아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신문팔이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주의를 낚아챈다. 사건 끝낸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새 호외가 나오네. 코르도나 신문사도 참 빨라.
기사에 따르면, 마그다는 15년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게임 속 시대 배경 기준으로 형량이 높은 쪽일까, 낮은 쪽일까. 정상참작을 받아서 그 정도라면 너무한 판결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고의성 짙은 계획 살인이라,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으니.
한편, 세상은 그녀가 그래야만 했던 속사정보다, 그녀 집안의 재산이 어떻게 될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다.
씁쓸한 현실 고증.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신부 살해 사건 조사. 마음씨 좋은 동네 조폭한테서 정의단이 있는 곳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위치는 광부의 말로 카펜터 가 남쪽 끝, 마지막 집 두 채의 뒷마당. 믿기 어렵지만, 정의단은 그곳에서 극빈자들에게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갱단이 대체 무슨 이유로 빈민 구제 같은 걸 하고 있을까. 뭔가 음흉한 속셈이 있을 게 뻔하다 의심부터 하면서도, 어떤 자들일까 호기심이 인다. 갱단이라는 정체성에 안 어울리게, 이름에다 떡하니 '정의' 같은 단어를 붙여 놓은 것도 그렇고. 어쩐지 평범한 동네 깡패들과는 다를 듯한 예감이다.
정의단이 운영하는 쉼터 방문 전, 혹시 몰라 변장을 한 번 더 바꿔 본다. 아무래도 낯선 경쟁 조직원보다야, 밥 얻어 먹으러 온 동네 거지가 환영받기 쉽겠지?
자, 그래서 카펜터 가 남쪽 끝은 어디냐 하면
바로 이 언저리. 신문팔이 소년을 만났던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길이 그닥 복잡해 보이지 않아서 금방 찾겠거니 했더니, 이런 데서 또 헤맬 줄 몰랐네. 예상보다 훨씬 위쪽이었잖아. 그 조폭 아재, 길을 가르쳐 주려면 좀 똑바로 가르쳐 줄 것이지. 아무리 내 방향 감각이 꽝이라지만, 이건 살짝 억울하다.
정의단의 거점 겸 쉼터. 계단을 오른 다음 왼쪽 통로를 따라서 쭉 안까지 들어가 본다.
통로 끝에 또 다른 조직원 한 명이 서 있고, 그 뒤에 문이 하나 나온다. 남루한 거지 행색의 셜록을 따스하게 맞이하는 문지기. 위장일까, 진짜일까.
설령 빈민 구제 뒤에 위험한 덫이 있더라도, 셜록쯤 되면 무사히 피할 수 있겠지.
그럼 사양 않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쉼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존이 다급한 목소리로 셜록을 부른다. 뭐? 여기 응급 환자가 있다고?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한 남자가 마른 기침과 함께 힘겨운 숨을 내쉬고 있다. 거기에 파랗게 변한 손톱 빛.
셜록은 남자의 증세가 천식 발작인 것 같다고 판단한다. 그 말에 얼른 뭐라도 해 보라며 셜록을 재촉하는 존.
아, 알았어, 알았어. 그렇잖아도 이제 막 움직이려던 참이야.
천식 환자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주변을 둘러본다. 우선 남자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공간부터.
여기는 창고인가? 안에 옷가지가 되는대로 쌓인 선반과 식자재, 오리 같은 동물들이 보인다. 아마 빈민들에게 제공할 요량으로 비축해 둔 물자일 것이다. 그런데, 셜록의 말처럼 정의단은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일개 갱단이 이런 사업을 벌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지.
하지만, 내 삐딱한 의심과 달리 정의단은 의외로 선한 동기에서 빈민을 돕고 있는 듯하다.
식자재 맞은편 탁자 위에 조직의 법이 적힌 쪽지가 있다. '무력한 자를 돕고 약한 자를 보호한다.' 흠…
그러니까, 있는 자들에게 빼앗아서 없는 자들을 돕겠다 이건가. 설마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갱단을 만들지는 않았겠고. 평범한 뒷세계 조직이 이렇게 변한 데는 분명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정의단 두목을 만나면 사연을 들을 수 있으려나.
이런 생각을 품은 채 약을 찾아 계속 건물 안을 탐색 중. 이번에도 존이 셜록의 움직임보다 한발 빨랐다.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셜록. 분위기상 이곳은 빈민 치료에 쓰이는 공간인 것 같다.
작은 탁자 위에 약병 몇 개와 물컵 등이 놓여 있다. 에테르? 어디서 마취 얘기 나올 때나 가끔 듣던 단어인데. 아무튼 이걸로 그 남자를 구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필요한 약을 챙긴 뒤, 사건 조사를 위해 방 안을 마저 둘러본다. 짐작대로 위생 관리 같은 문제가 역시 없지는 않은 듯. 그래도 착실히 기록까지 남긴 걸 보니, 마지못해 시늉만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정도면 빈민 구제에 나름 진심이라 여겨도 좋지 않을까. 이 갱단의 정체가 한층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제 아까 그 남자에게 약을 갖다 주고,
두목을 만나러 갑시다.
진료실을 지나 더 깊숙한 곳까지. 마침 두 조직원이 자기네 두목에 대해 뭔가 수근수근 떠들어 대고 있다. 셜록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정리하자면, 정의단 조직원 일부가 어떤 이유에선지 독단으로 신부를 살해했고, 두목은 그 일을 문제 삼아 그들을 처벌할 예정이며, 그래서 정의단에 빈 자리가 생겼다는 얘기군. 두목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지 알겠다.
좀 전의 두 조직원이 등지고 선 곳에 문이 하나 있다. 문을 여니, 한 남자가 두목은 바쁘다며 셜록을 ��는다. 생각보다 금방 찾았네.
셜록이 긴급한 문제로 꼭 두목을 만나야겠다고 하자, 남자는 오늘 투기장에서 결투가 있을 예정이라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의단 창고에서 주웠던 쪽지에 투기장 얘기가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예상대로, 신부 살해 조직원들이 그곳에서 심판 받을 예정임을 남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쩐다?
안 통할 게 뻔하지만, 우선은 제발 만나게 해 달라 매달려 볼까?
꿈은 진작에 깼고요, 그쪽이 뭐라고 나올까 궁금해서 그냥 한번 찔러 본 거랍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갱단에 일손 부족하시다면서요. 참신한 알바생, 안 필요하신가?
어머머, 이 아저씨 말하는 것 좀 보게. 뼈만 남았다니.
허름한 넝마 뒤에 숨은 저 근육이 안 보이시나?
얕잡아 보는 남자에게, 셜록은 그래도 내가 총에는 빠삭하다며 자신이 조직에 걸맞은 인재임을 주장한다. 그보다 웃통 벗어서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빠를 것 같은데.
남자는 셜록의 주장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듯 오른쪽의 병을 쏴 보라고 한다.
남자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 빈 병이 진열되어 있다. 총으로 이 병들을 다 맞추고 나니, 그는 그제야 셜록이 쓸 만하겠다 판단했는지 길을 비켜 준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중절모 차림의 한 남자가 의자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인다.
바쁘다더니, 할 일이 산더미라던 것치고는 매우 한가해 보이는군. 휴식을 방해 받아 심기가 언짢아졌는지, 남자는 퉁명스런 말투로 셜록을 맞이한다.
셜록은 그에게 사과하는 한편, 자신이 그를 만나러 온 외부인임을 넌지시 알린다.
빨리 용건을 말하라 재촉하는 두목에게 셜록은 신부 살해 사건 때문에 왔다고 밝힌다. 두목은 신부의 죽음이 끔찍한 일이었다며, 그들이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답한다. 조직 차원에서 벌인 일이었다면 골치 아팠을 텐데, 두목은 무고해 보여 다행이군. 생각보다 쉽게 사건의 진상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럼, 이제 하나씩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 볼까.
첫째, 조직원들이 신부를 해친 이유. 뜻밖에도 원인은 신부에게 있었다. 그런데, 신부씩이나 되는 사람이 뭣하러 갱단의 식량에 손을 댔나 모르겠네.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아니면 두목의 말처럼 썩은 사과라 그랬는지.
그래도 두목은 신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부하들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같은 적을 두고 싸우던 사람인데 피를 볼 필요까지는 없었다며.
같은 적 누구요?
갱단이라고 신념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확실히 갱단치고 독특한 신념이기는 하다. 빈민 구제에 소요되는 자금 문제를 생각해 봐도, 정의단이 이런 일을 하게 된 데는 분명 다른 누군가의 입김이 있지 않았을까. 동기를 물어 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선택지에 그 질문이 없다. 할 수 없지. 당장은 사건에 집중할밖에.
다음으로, 두목에게 신부 살해범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물어 보자. 아까 들은 투기장 얘기에서 대충 짐작은 간다만.
역시 두목은 그자들을 투기장에서 죽일 심산이었다. 셜록이 그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자, 두목은 놈들이 자초한 일이라며 불쾌해 한다. 셜록은 그에 맞서 그자들은 체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목숨 걸고 싸우게 하는 건 야만적인 행위일 뿐, 감옥에서 죄값을 치루게 하는 편이 옳다며.
그 말에, 두목은 셜록더러 직접 투기장에 내려가 담판을 지으라고 한다. 즉슨, 놈들을 데려가고 싶으면 힘으로 꺾어서 끌고 가라는 얘기. 듣자니, 두목은 부하들이 감옥에서 험한 꼴 당하다 죽는 것보다, 투기장에서 끝을 맞이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조직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하들을 아껴서 내린 결정일지도.
여기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셜록.
두목의 제안을 받아들여 투기장에서 싸워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우선은 거부해 보자.
셜록은 당신의 뒤틀린 정의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고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 말에, 두목은 내 시간 그만 잡아먹고 당장 꺼지라며 셜록에게 으르렁. 다시 말을 걸면, 두목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꺼지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엥, 이게 뭐여. 이번 사건 이대로 끝난 겨?
뭔가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수첩을 열어 확인해 보니 정말 이러고 끝이었다. 허탈하네.
썩 내키지 않지만,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투기장에서 셜록이 승리를 거두면, 두목은 약속대로 자기 부하들을 경찰에 넘기는 데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셜록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듯.
위쳐 3에서도 비슷한 대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게롤트가 살쾡이 교단의 그 위쳐를 보내 줄 때 했던 말이었던가.
아무튼, 셜록은 두목에게 우리 둘 다 심판자는 아니라는 말을 남긴 뒤 자리를 뜬다.
사건 종결.
자, 이 정도면 기분 전환은 할 만큼 했으니, 슬슬 메인 퀘스트로 돌아가 볼까.
보겔이 코르도나 수도원 건너편 만치오스 저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 여우 같은 화랑 주인, 과연 이번에는 무슨 속내로 셜록을 찾는 것일까.
생각하니 찝찝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지만,
일단 출발.
참. 그런데, 코르도나 수도원이 어디였더라?
14 notes
·
View notes
⸺그날 아침 그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봄을 실감케 하는 부드러우면서도 냉기를 머금은 햇살이 이리저리 빛의 얼룩을 던지고, 두꺼운 구름이 그들의 머리 위를 덮고서 때로 낮게 드리워졌다가 때로 검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천천히 흘러갔다. 이유 없는 설렘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낡고 빛바랜 색이었다. 더 이상 호흡을 하고 있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탄력을 잃은 그 피부 밑에는 늘 새로운 따뜻한 피가 힘차게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물이 조금 불어난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하늘에서 보면 하나의 가는 다리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장소에 있으면서 길고 긴 꿈을 꾸고 있는 작은 요새이고 제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직 보지 못한 ‘그녀’를.
/아침의 학교는 왜 이처럼 모든 죄를 씻은 듯이 새로워 보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헸다. 공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넘칠 듯한 생기가 쨍한 감촉으로 다가와 온 세상이 새로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에 거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앞으로 긴 1년 동안의 일을 생각하면 어릴 때 천식 발작을 일으키던 밤의 기억이 이중으로 겹쳐 뇌리를 스쳤다. 발작이 시작되기 직전에 다가오던 그 확신과 체념과 절망이 뒤섞인 예감이.
모두들⸺지금까지의 사요코들도⸺이처럼 공포인지 흥분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안고 오로지 혼자서 극복해온 걸까.
실제로 과거 다섯 명의 사요코 가운데 세 사람이 ‘실패’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무거운 공포에 짓눌린 나머지 스스로 사요코임을 폭로해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가 사요코인지 전혀 몰랐던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무언의 사요코가 하필 자신에게 그 열쇠를 건네주다니…….
‘그녀’는 꽃다발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로 묶은 꽃줄기가 마치 철사처럼 단단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녀’는 그때까지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한 의문을 다시 떠올린다. 왜 이런 관습을 계속 지켜나가는 걸까. 맨 처음 ‘사요코’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시작한 걸까.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누가 볼세라 살금살금 현관으로 들어갔다. 노후한 학교 건물의 현관은 유난히 어두워 들어간 순간에는 캄캄하다는 생각이 든다. 복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낡은 신발장에서 나는 곰팡내가 코를 찌르면서 몇 주 만에 분주하고 떠들썩한 학교생활로 돌아왔음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코에 익숙한 냄새와 함께 ‘그녀’는 또 하나의 다른 냄새를 맡았다. 먼지가 쌓인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냄새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
‘꽃향기인가?’
잠시 꿈속에라도 들어온 듯한 기분으로 걷고 있는데 다음 순간,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이런 시간에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것은 자신이 ‘사요코’임을 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날 이 시간에 이런 꽃다발을 들고 학교 안을 어슬렁거릴 사람은 ‘사요코’ 밖에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 게임을 지금 여기서 끝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년 동안, 아니 졸업을 한 이후에도 ‘얼빠진 사요코’⸺첫날 정체를 들켜버린 사요코⸺라는 오명��� 두고두고 남길 것이 분명하므로.
‘하지만 그건 그���고 정말 괘씸한 녀석이다.’
‘사요코’의 모습을 보려고 하거나 알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터부이고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어차피 전교생이 공범인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서 일단 ‘범인’은 놓쳐야 한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 전까지 쭈뼛거리며 자신의 무거운 책임에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교문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너왔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발걸음을 빨리 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복도와 계단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차가운 공기에 싸여 있다.
‘2층이다.’
실내화로 걸어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타닥타닥 들린다. 발소리는 침차한 리듬으로 굳이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구지? 신입생인가? 설마…….’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걷는다.
쏴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는 금이 간 벽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참 위로 뻥 뚫린 창이 보이고 밝고 쌀쌀한 봄날의 공기가 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현관에서 맡았던 것과 똑같은 달콤한 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2층 복도를 빠끔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을 누군가 움켜쥐는 듯했다.
긴 머리를 한 소녀가 똑바로 이쪽을 향한 채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치 거기서 ‘그녀’가 들여다볼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히익!”
‘그녀’의 목구멍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르는 얼굴이다. 훤칠한 키에 눈동자가 커다란, 총명해 보이는, 그리고 어딘가 불길한 얼굴.
신입생은 아니다. 같은 또래의 소녀다.
무엇보다 ‘그녀’가 놀란 것은 그 소녀가 붉은 장미꽃을 한아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 달콤한 향기가 장미향인가……. 하지만 왜 이 아이가 ‘붉은 꽃다발’을 들고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서 있는 거지?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뇌리 한쪽으로 말을 찾으면서 ‘그녀’는 다시 소녀가 돌고 있는 새빨간 장미를 꽂은 화병을 보고 얼어붙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저건…… 저 꽃병은…… ‘그녀’가 지금 자신이 가진 ‘그 열쇠’로 열고 꺼내려고 한 그 꽃병이 아닌가. 붉은 매화 무늬를 넣은, 일본화풍의 도안이 그려진, 화려한 인상을 주는 커다란 꽃병. 분명히 바로 그 꽃병이다. 어떻게 꺼낸 거지? 대체 누구지, 이 아이는?
꼼짝 않고 이쪽을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서 있던 소녀는 이윽고 빙긋이 웃어 보였다. 꽃이 피어나는 듯한 화사한 미소였다. 평범한 상황에서 봤다면 이 소녀가 보기 드문 미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너도 붉은 꽃을 꽂으러 온 거야?”
소녀는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어디서 어떻게 ‘그녀’의 공포를 부채질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던지고 허둥지둥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어딘가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계단이 녹아내리듯 뭉클하게 구부러진다. 어안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계단참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녀’는 그 일그러진 풍경 속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남겨진 소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인사가 저렇담.”
소녀는 불쑥 한 마디 중얼거리고 발밑에 흩어진 붉은 튤립을 내려다보다가 자기가 안고 있는 빨간 장미를 들여다보았다.
“아까워라. 모처럼 가져온 튤립이…….”
흩어진 꽃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긴 머리칼이 등에서 얼굴로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얼굴을 든 다음 순간 소녀의 얼굴은 조금 전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