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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
happyaira80 · 8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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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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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아트쇼 2022: 아트+테크, 쏘다’, 5월 4일 수원컨벤션센터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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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gdixxx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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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What’s Reebok ④ Reebok X Collaboration - Thisisneverthat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리복 클래식(Reebok Classic)은 항상 새로운 도전과 문화적 움직임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30년 전 발매된 헤리티지 제품을 복각해 레트로 문화를 만들어내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탄생시킨 기술력을 제품에 접목하여 피트니스 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협업으로 새로운 가치들을 생산해내며 트렌드의 방향점 구실을 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리복 클래식의 협업 리스트를 살펴보면 그 면면이 화려하다. 베트멍(Vetements), 팔라스 스케이트보드(Palace Skateboards)와의 스트리트한 감성의 협업 컬렉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키스 해링(Keith Haring)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까지.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이끈 리복 클래식이 국내 브랜드와 첫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을 발매하며 또 다른 도전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협업 파트너는 국내 패션 브랜드, 도메스틱 패션 업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디스이즈네버댓(Thisisneverthat)이다.
1. 리복 클래식 X 디스이즈네버댓
리복 클래식은 로컬 브랜드와의 새로운 콜라보레이션 파트너를 물색하던 중 디스이즈네버댓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디스이즈네버댓은 특유의 로고, 네임 브랜딩으로 스트릿 패션 씬의 젊은 마니아들의 총애를 받는 브랜드 중 하나다. 스테디셀러인 티셔츠와 함께, 코트, 패딩, 액세서리 등 제품군을 막론하고 완판의 완판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기에 리복 클래식의 국내 브랜드와의 첫 협업에 디스이즈네버댓은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2016년 봄부터 준비된 리복 클래식 X 디스이즈네버댓 벡터 패키지 컬렉션이 드디어 발표되었다. 클래식 헤리티지와 유스 스트리트 컬쳐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2. 벡터(Vector) 패키지 컬렉션
리복 클래식 X 디스이즈네버댓 벡터 패키지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인 룩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해당 컬렉션은 컬러 조합의 특성을 미리 연구하여 완성도 있는 색감 배열을 보여줄 뿐 아니라 최근 패션 트렌드인 올인원(All-in-One), 톤온톤(Tone-on-Tone)의 적합한 스타일링을 동시에 제시한다. 컬러뿐 아니라 어패럴, 신발, 액세서리 등 다양한 제품군을 조합할 수도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채로운 연출을 통해 개성 있는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유니크한 스트릿 스타일을 꾸려갈 수 있다는 얘기다.
3. 제품 특징
이번 협업 컬렉션은 리복 클래식의 라지 사이즈 벡터 로고를 메인 컨셉으로 곳곳에 디스이즈네버댓의 브랜딩이 더해졌다. 제품의 컬러링 또한 눈에 띈다. 색의 교차, '컬러 블록'을 활용한 플리스 제품과 트레이닝 팬츠 그리고 라지 벡터 로고가 깔끔하게 프린팅된 맨투맨, 스포티 캡으로 입체적인 컬렉션을 보여준다. 위의 제품들은 모두 두 가지 색상으로 구성되어 넓은 선택의 폭 또한 제공한다.
리복 클래식의 헤리티지 스니커즈 또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랜차이즈 모델 중 하나인 클래식 레더(CL Leather) 라인이 클래식 레더 디스(CL Leather This)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스니커즈 제품은 컬러풀한 의류 라인과의 조화를 위해 크림, 그레이 등 톤 다운된 미색을 사용하며 한층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으로 디자인되었다. 신발의 혀 부분, 미드솔, 힐캡 등에 리복 클래식과 디스이즈네버댓의 로고가 브랜딩 되어있으며 천연 스웨이드 소재를 사용하여 높은 보온성과 부드러운 착화감을 자랑한다. 또한 신발 끈의 반복적인 유니언잭 로고 디테일을 통해 시각적인 재미를 더했다.
4. 스트릿과 레트로의 만남
리복 클래식과 디스이즈네버댓의 협업 컬렉션은 스트릿 무드와 리복 클래식의 트렌디한 레트로의 만남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90년대의 상징적인 벡터 로고와 스트릿 내음이 감각적으로 풍기는 독특한 제품으로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의 컬렉션을 구성했다. 이러한 리복 클래식과 디스이즈네버댓의 만남은 11월 13일(의류 라인)과 같은 달 27일(스니커즈)에 무신사(Musinsa) 온라인 스토어 링크와 디스이즈네버댓 공식 홈페이지 링크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추가로 리복 타임스퀘어점, 하남 스타필드점, 문정점, 동성로점, 경성대점 등 리복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11월 27일(의류 라인)과 12월 11일(스니커즈)부터 해당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보다 쉽게 입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커머셜한 컬렉션을 원한다면 절대 놓치지 마시길.
글 l MANG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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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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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판에 분필로 그려낸 작품…'예술이 된 낙서' 키스 헤링
광고판에 분필로 그려낸 작품…'예술이 된 낙서' 키스 헤링
▶영상 시청
<앵커>
이번 주 볼만한 공연과 전시 소식 김수현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기자>
[DDP ‘키스 해링’ 전]
단순한 형태에 굵은 선, 밝은 원색으로 친숙한 키스 해링의 작품들은 낙서 그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1980년대 뉴욕의 거리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팝 아트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키스 해링의 작품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지하철역 광고판에 분필로 그렸던 지하철 드로잉 시리즈 등 초기작에서부터 에이즈로 사망할 때까지 작업했던 다양한 장르의 작품 170여 점이 전시됩니다.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념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던 키스 해링의 삶과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금호아트홀 신년음악회 : 2019 상주음악가 박종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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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liz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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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홈쇼핑, 팝아티스트 '케니 샤프' 작품 판매
롯데홈쇼핑, 팝아티스트 ‘케니 샤프’ 작품 판매
롯데홈쇼핑(대표 이완신)은 이달 27일 오전 1시 10분부터 문화 콘텐츠 전문 프로그램 ‘더 스테이지’를 통해 미국 팝아트의 황제 ‘케니 샤프’(Kenny Scharf)의 작품을 판매한다고 24일 밝혔다. ​‘케니 샤프’는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와 함께 앤디 워홀 이후의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살아 있는 팝아트의 전설이다. 뉴욕을 비……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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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youfashion-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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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가 향한 곳은? 지난 5,6일 열린 '2017 글로벌 아트 콜라보 엑스포'❤️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등 유명 예술 작가들과 협업해온 앱솔루트(@absolutvodka)의 특별한 프로젝트 때문입니다☝🏻앱솔루트가 후원하는 행사장을 가득 메운 100인의 한국 작가들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죠👩🏻‍🎨👨🏻‍🎨 앱솔루트는 100인의 작가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오늘 밤 '앱솔루트 아티스트 파티'를 연답니다🕺🏻🎵 앞으로 작가들의 개인전마다 앱솔루트 보드카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한국 작가들을 후원할 예정이라는군요🍾 작가들은 대형 앱솔루트 모형 위에 이틀 간 릴레이로 라이브 페인팅을 진행했는데요🖍 100인 100색 예술혼이 묻어나는 작품은 어떻게 완성됐을까요? 영상으로 만나보시죠🔍어떤 페인팅이 눈에 들어 오시나요? "언제 한 잔 합니까"가 시선을 확 잡아 끄는군요🥃 (🎬✍🏻Gukhwa Hong) _ #앱솔루트 #앱솔루트보드카 #100인의아티스트 #아트 #아트콜라보레이션 #ABSOLUT #ABSOLUTVOD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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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wchu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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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of KIAF #13
키스 해링 Keith Haring
Man Stretching Radiant Baby 1983
Men, Pyramid, Double Headed Dog 1983
Black marker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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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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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해링은 상당한 인정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미국의 시장이 반응하기 오래 전서부터 수집되어왔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1989년을 지나 1990년으로 가면서도 나의 작품이 여전히 미국의 미술 기관과 미술관 세계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나는 그 거부가 기쁘다. 왜냐하면 내가 대항해서 싸울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지자들은 미술관이나 전시기획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적이 없다. 나의 지지자는 대중이었다." 한편으로, 보통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해링에게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서 고통받기도 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작품이 느리게 인정받은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해링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나��에야 인정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일은 내가 여기에서 감사할 수 없을 때 일어날 것이다." 그의 말이 옳았다. 해링의 사후에 그의 탁월한 중요성은 미술계에서 인정받았으며, 그의 작품들이 중요 전시회에서 명예를 얻었다.
1989년 여름에 해링은 산 안토니오 교회 외부 벽화의 제작을 위탁받아 이탈리아의 피사로 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공 작품이 되었다. 해링은 피사에서의 체류가 자신의 경력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의 높은 관심을 고려해서 벽화 <투토몬도>를 제작했다. 해링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대형 인물과 동물은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을 결합한 것이다. 이 벽화는 삶에 대한 해링의 마지막 찬가였다.
생전에 해링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설립했으며, 그의 비서 줄리아 그루언이 해링이 해왔던 것처럼 그 재단을 계속 운영해야 한다는 특별한 의지를 표명했다. 해링의 소망에 따라 어린이 자선을 위한 특별 후원과 에이즈와 싸우기 위한 조직이 생겼다. 재단의 예술적인 목표는 더 많은 대중에게 키스 해링, 예술가, 한 남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회와 다른 기획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해링이 작업실에서 제작한 마지막 작품은 1989년 11월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는 그의 에너지와 예술적 활동이 고스란히 유지되던 시기였다. 진정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작가의 일생 동안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모든 공포를 조롱하는 듯한 활기찬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자는 대형 캔버스에서 해링의 전형적인 인물들이 팔을 활짝 벌리고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환호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일종의 숭배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숭배와 찬양의 몸짓으로 그들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다. 변화가 거의 없는 넓은 색면은 인물과 배경, 인물과 인물 사이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어 작품의 인상을 강화시킨다. 외곽선 위에 다른 색채로 이어지며 덧칠해진 짧은 붓질들은 화면 전체에 걸쳐져 있으며, 명확한 화면은 그 아랫부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우아한 베일을 닮은, 흐르는 물감으로 마무리되었다. 회화적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일종의 예술적 이력서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해링의 기술적 실험이 종합되어 있다. 화면을 채운 선은 해링의 초기작인 비닐 방수포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화면 전체에 그려진 그림문자는 상형문자 같은 상징에 대한 해링의 애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흐르는 물감은 해링의 '방울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86~90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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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몬도Tuttomondo,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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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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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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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링의 놀라운 느긋함과 자기 과신은, 병에 대한 진단 이후 변화한 죽음의 추상적인 관념에 직면했다. "1980년대 내내 나는 항상 내가 에이즈의 후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뉴욕의 구석구석에는 온갖 종류의 난잡한 행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일부였다." 1988년 중반에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해링은 자신의 몸에서 보라색 반점들을 발견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에이즈로 추정되는 첫 번째 징후를 진단받았다. "우선, 당신은 완전하게 파괴된다. 당신은 굉장히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비록 내가 아무리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을지라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당신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가장 처음 하는 행동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나는 동쪽 아래편의 이스트 리버로 넘어가 울고 또 울었다." 이후에 해링의 작품들에서는 더 강한 날카로움과 심오함이 표현되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 사로잡힌 그의 개인적인 환경은 예술적 에너지를 손상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 이상의 생기를 제공했다. 마치 자신의 운명에 대항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해링은 엄청난 활력을 담긴 작품을 제작했다. 1989년에 제작한 <침묵=죽음>처럼 일종의 선전 활동 같은 특성을 지닌 작품들이 그 예에 속한다. 관람자는 검은색 배경에 뚜렷하게 대비되어 그려진 분홍색의 삼각형을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눈, 귀, 입을 교차적으로 막은 은색 외곽선의 인물들은 분홍색 삼각형 위로 그물같이 퍼져 있다. 관람자에게 인내, 무지, 침묵에 대항해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예리한 작품이다. 주제적으로, 이런 관련성은 에이즈 반대 포스터에서 다시 나타난다. '침묵=죽음'의 진술은 '무지=공포'라는 그 이상의 표어로 논리적으로 확장되었다.
1989년에 그린 2면화 <무제(제임스 앙소르를 위해)>에서, 해링은 이미 자신의 몸은 죽음에 이르도록 운명지어졌지만, 자신은 예술에서 영원한 삶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시각화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된 2개의 패널은 해링의 초기작인 지하철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첫 번째 패널에서, 화단에 정액을 사출하고 있는 해골은 손에 반짝이는 열쇠를 들고 있다. 옆의 패널은 죽음의 정자가 꽃들을 자라게 하고, 해골이 이를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작품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다. 예술은 나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에이즈 바이러스 양성반응을 진단받은 이후, 해링은 삶의 방식을 바꿨다. 성생활보다 건강에 더 많은 관심과 중요성을 두었다. 그는 점점 약해져가는 에너지를 지적 자극을 주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해링은 당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주안 리베라와 헤어졌다. 더 이상 연인에게 구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해링은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동료인 길 바스케스와 정신적인 우정을 나눴다. "이제 이것은 내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도전이 되고 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돌보는 우정을 갖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발견하고 있다." (81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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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죽음>,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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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공포, 침묵=죽음>,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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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앙소르를 위해>,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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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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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남용은 해링에게 더욱 의미 있는 주제였다. 그는 캠페인, 벽화, 포스터를 통해 마약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밝혔다. 이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과 1980년대 마약 문화와 마약으로 인한 전염병을 목격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고속도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광고판처럼 보이는 거대한 벽에, 해링은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마약은 독약이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밝은 오렌지색 벽화를 제작했다. 그가 교육용으로 사용한 또 다른 매체는 포스터로, 이는 해링의 전형적인 회화 언어와 함께 그의 메시지가 담겨져 무료로 배포되었다. 해링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희생자들은 마약 남용으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88년 여름에 장 미셸 바스키아는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친구이자 미술가로서 해링은 바스키아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를 위해 예술적 기념물을 제���했다. 같은 해 제작된 <장 미셸 바스키아를 위한 왕관 더미>에서 해링은 테두리에 빨간 선을 두른, 마치 경고 표지판 같은 삼각형의 캔버스를 사용했다. 중앙은 하얀색과 검은색의 왕관 더미로 채워져 있다. 해링은 장 미셸 바스키아의 태그였던 3개의 꼭짓점을 가진 왕관 상징을 통해 친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1980년대까지 대중들의 의식에서 에이즈 주제는 견고한 참호 속 깊이 숨겨져 있었다. 상대를 자주 바꿔가며 쾌락을 좇는 성생활은 더 이상 안전하지도 않으며, 육체적 욕망도 아닌, 오로지 파괴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사실이었고, 해링도 자신이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이미 많은 친구와 지인을 에이즈로 잃은 상태였고, 자신 역시 이 병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삶은 매우 연약하다. 죽음과 삶을 나누는 경계선은 굉장히 예민한 선이다. 내가 그 선 위를 걷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에이즈의 잠재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는 해링의 생활 습관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성생활을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안전하거나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섹스만을 했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것에 대해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일들이 아직도 여전히 존재했다. 나는 어느 정도 활동적인 생활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1985년이 되자 에이즈는 뉴욕을 변화시켜버렸다." 해링은 자신이 언제 에이즈의 희생자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생애 마지막 시기에 에이즈 주제를 점점 더 많이 다루었다. 이 작품들은 다른 사람들을 같은 운명으로부터 구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그들의 충동을 억제시키고자 한 그림이다. 1985년에 그린 대형 작품 <에이즈>는 인상적이고 통찰력 있는 작품이다. 중앙에는 죽은 자를 데려가는 괴물의 머리가 있다. 그 괴물은 부정적인 빨간 색의 십자 표시가 몸에 그려져 있는데, 희생자들의 다양한 성적 욕망에게 그 자신을 제공하며 그들을 손으로 더듬고, 껴안고, 핥으면서 선동하고 있다. 희생자들은 죽음 속에서 절정에 달한 희열로 자신을 이끈다. 눈이 십자 표시로 지워진 두 인물은 자신들의 성기에 의지해 거꾸로 매달려서 튀어나온 혀를 무기력하게 땅에 끌고 있다. 위쪽에 그려진 날개 달린 죽은 이의 머리가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65~75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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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은 독약이다>,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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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를 위한 왕관 더미>,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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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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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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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링의 작품이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얻기까지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미술 단체가 아니라, 바로 예술가 자신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를 기존의 미술 환경을 거부하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해링은 미술관과 화랑의 벽을 뛰어넘어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대중을 향해 다가섰다. 그는 확대된 자신의 예술을 지속적으로 보급하는 매개자였다. 해링은 발명가, 운동가, 관리자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다른 유명 미술가들과 함께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또한 사업가적 수완도 있어서 미술시장에서 자신을 어떻게 내세워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해링은 작품의 상품화를 그의 예술의 중요한 요소이자 20세기의 최신 경향으로 보았다. 예술적 기념품에 대한 요구에 반응해, 해링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신의 예술이 매매되는 상품이 될 수 있음을 표명했다. 그 결과, 그의 도상 언어는 매우 단시간 내에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 1983년에 이미 해링 작품의 불법 모사품이 포스터와 티셔츠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해링이 1986년 맨해튼에 첫 번째 '팝 숍'을 연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상점에서는 해링과 그의 몇몇 친구들이 디자인한 상품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상표로 만들어 판매했다. 해링은 이런 행위를 예술가의 추가적 발언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예술을 대중에게 개방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거였다. 또한 상업적 의도를 숨기지 않은 채 일상의 사물로서 항상 존재하도록 하는 거였다. 해링은 상업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일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예술과 상업주의 사이의 길이 매우 좁은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중들이 반응하는 사물을 만들고 보는 일이다. "내가 정말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중들이 반응하는 사물을 만들고 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일들은 전부 다 어렵다. 나는 새로운 관점을 갖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을 만들고, 대중의 시각에 충실한 작품을 팔기 위해서 새로운 태도를 갖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런 노력을 그저 더 많은 작품을 팔기 위한 광고로만 보았다. 나는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두렵다." 그러나 해링은 상업적 측면에서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공유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싶어했다. 전통적인 예술 작품의 상품화가 원본에 기초하는 반면, 해링은 상업적 상품을 위한 모티프를 발전시켰다. 오늘날 해링의 이름은 상품의 성공을 보장한다. 그가 제작하는 것은 전 세계로 팔렸고 모방되었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마케팅하는 일이 무엇과 관계되어 있으며, 어떻게 이를 실행하는지, 키스 해링은 앤디 워홀의 실례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워홀의 '공장' 이후에 '팝 숍'의 설립은 그 이상의 훌륭한 창안이 실행된 것으로, 예술의 복제 가능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할 것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예술가가 세운 것이다. 해링은 화랑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다뤄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화상이 되길 원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성실성을 유지하며, 거리에서의 진실성을 보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로 매우 다른 개성과 삶의 태도를 가졌��� 이 두 예술가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해링은 팝 숍에서 '돈 버는 일'에 매우 제한적인 관심을 가졌고, 수입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기부했다.
해링과 워홀의 첫 만남은 뉴욕의 펀 갤러리에서 열린 해링과 LA II의 전시회 개막식에서 우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앤디 워홀은 사회 현상에 대해 일종의 지진계 역할을 하는 뉴욕의 엘리트 협회의 회원이었다. 그가 흥미를 갖는 것이 자동적으로 대중들의 흥밋거리가 되고는 했다. 해링과 워홀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인정, 존경, 예술적 교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진실한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우정은 서로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부터 공동 기획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여전히 젊은 예술가였던 해링에게 앤디 워홀 같은 타인과의 교류와 그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다. 반대로, 워홀은 해링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의 대안예술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이를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했다. 앤디 워홀의 모습은 해링의 작품에서 여러 범 등장했다. 해링은 친구를 위해 '앤디 마우스'를 창안했다. 이것은 미키 마우스의 모습에, 앤디 워홀의 특징적 외향을 상기시키는 선글라스와 가발을 더한 모습이다. 수차례 복제되었던 이 모습은 1985년에 대형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해링은 그의 친구들, 문자 그대로 미키 마우스의 손에 높이 들려져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미국의 표상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은 성조기의 별과 줄무늬를 연상시킨다. 같은 해 그린 드로잉에도 이와 동일한 존경을 표현했다. 쥐의 귀에 그려진 달러 표시는 앤디 마우스 모티프를 보충한 것이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광선의 후광은 들쭉날쭉하다. 월트 디즈니의 상품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결합함으로써 해링은 그의 친구를 동일한 도상의 지위에 위치시켰다. 워홀의 예술적 특성의 실질적인 마케팅은 명성과 영광을 동반했다. (47~51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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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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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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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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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의 부정적 결과를 지적하고 있는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절박하며 무시무시하다. 해링은 탐욕스러운 괴물과 뿔 달린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는 기괴한 이야기를 창조했다. 반대로 인간은 작고 부수적인 역할로, 머리가 사라져서 순종적인 존재로 변형되었다. 또한 그는 기술의 지배를 머리가 컴퓨터로 된 절지동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공학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체해왔다. 해링은 자신의 작품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상징은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들이 조화되거나 서로를 배격하면서 혼합되면 때때로 모순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것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처럼, A에서 B로 가는 명백한 해답은 없다······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존재한다. 꿈에서처럼, 어떤 일은 이해되며 또 어떤 일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는 함께 현실을 나타낸다. "
해링 작품의 주제 성향은 일반적이거나 사회비평적인 측면으로 제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춤과 같은 개인적 관심사의 기록으로도 볼 수 없다. 춤과 음악은 해링에게 있어 창조의 필수 요소였다. 그는 작업실에서 일할 때,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힙합 음악을 듣곤 했다. 또한 해링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클럽인 파라다이스 거라지에 가는 것이 주말 의식의 하나일 정도로 매우 열정적인 춤꿈이기도 했다. 외국 여행을 갈 때면 가능한 한 토요일 저녁 시간에 맞춰 뉴욕으로 돌아오게 일정을 짰다. 작품의 춤추는 장면들은 이런 열정에 대한 증거이다. 해링의 작품들은 힙합, 브레이크 댄스, 일렉트릭 부기 정신에 대한 반영이다. 1983년에 제작한 <무제>가 가장 대표적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인물의 움직임은 일렉트릭 부기의 시종일관된 전이를 회화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경우라면 우아한 곡선으로 그려졌을 인물은 여기에서 지그재그 선으로 표현되었다. 평범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선들은 빛의 번쩍임으로 묘사되면서 다시 한 번 전기와 관련된 주제임을 강조한다.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곡예사 같은 뒤틀림에 사로잡혔던 해링의 인물의 모습은 음악 소리로 옮겨진 듯하다. 실제로 인물은 브레이크 댄스 자세에 기초한 것이다. 이 춤의 가장 큰 특징은 파도가 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춤추는 사람이 팔을 통해 다음 사람에게 이어지는 듯 보인다. 그 밖의 특징으로는 헤드스핀과 물구나무서기 등이 있다. 또한 해링의 작품에서 상호 융합된 형태로 묘사되었듯이 브레이크 댄스는 춤을 추는 2명이 쌍방향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능한 춤이기도 하다. (44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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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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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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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검은 종이에 초크로 선을 긋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계속 이어지는 선이다. 초크를 사용한다면, 무엇을 그리든 붓에 물감을 바르기 위해 그리는 것을 멈출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연속적인 선, 그래픽적으로 매우 강한 선이다. 그리고 시간의 한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작업해야 하고 수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실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하철은 해링의 표현대로 그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분명한 선과 관련된 실험과 변형을 많이 했다. 작업 순서는 항상 동일했다. 먼저 뼈대를 그리고 나서 몇 개의 선만으로 스케치했으며,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UFO와 관련된 주제, 해링의 개, 변형된 윤곽선 인물 등 간단하면서 이해하기 쉬운 모티프 연작을 발전시켰다. 이전의 연속 만화 같은 짧은 그림이나 지하철역 여기저기에 그렸던 이야기들의 구성과 달리, 이 드로잉들은 독립적으로 완결되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해링의 지하철 드로잉이 그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취약성 때문에 손상되거나 낙서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링은 비어 있는 공간 틀에 적합하도록 모티프들을 수정했다. …
대중에게 학습 과정을 제시하듯, 해링은 작품 속 인물들을 간단한 이해의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소개했다. 작품의 회화 구조는 뛰어나 말을 타고 지나쳐가는 대중이 단순한 모티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키스 해링은 새로운 것에서조차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기호들의 축적을 그리거나, 그것의 조합을 최소한의 범위에서 변화시켰다. 그는 기호들을 배열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기본 단위로 보았다. 이 섬세한 드로잉들은 거대한 광고 포스터 사이에서 그 흐름을 중단시켰지만, 상업적 목적의 메시지는 담고 있지 않았다. 때때로 해링은 광고와 밀접한 내용을 암시적으로 다루었다. 이런 혼란은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7쪽)
자신의 첫 드로잉들이 뉴욕의 지하철망을 뒤덮었던 직후, 해링은 작품 판매로 인한 첫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이 화상으로 활동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수집가들의 잦은 방문으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적당한 화랑을 찾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화랑을 운영하고 있던 토니 샤프라지가 1982년에 해링의 뉴욕 화상이 되었다. 해링은 2년 전에 그의 보조원으로 약간의 수입을 올린 적이 있었다. 둘이 함께 1982년 10월에 열 계획인 해링의 첫 번째 대규모 개인전을 기획했다. 여태까지 드로잉에만 집중했던 해링은 처음으로 대형 회화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했다. 전시 준비를 하면서 그가 발견한 비닐 방수포는 그림의 이상적인 화면이 되었다. 공업용으로 생산된 보호용 천은 해링이 원하는 어떤 사이즈도 가능했으며 또한 반짝거리는 색의 표현도 가능했다. 방수포는 모서리에 있는 규칙적 간격의 구멍으로 벽에 걸기 쉬웠고 운반도 용이했다. 해링은 제작이 빠르고 잉크 방울이 거의 떨어지지 않는 특별한 비닐 실크스크린 잉크를 사용해 방수포에 작업했다. 그가 처음에 이런 화면을 택했던 것이 기술적이거나 미학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나와 토니는 1982년 10월에 토니의 새로운 화랑에서 내 첫 개인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이 전시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다. 나는 드로잉 작품만을 제작해왔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이 전시를 위해, 여태까지 그리지 않으려고 홀로 저항해왔던 대형 회화 작품을 그리고 싶어졌다. 저항했던 이유는 바로 캔버스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캔버스가 나를 방해한다고 느꼈다. 캔버스는 손대기 전에 이미 얼마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종이에 작업할 때처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종이는 소박하고, 완전하게 이용 가능하며, 비싸지 않다. 캔버스는 내게 이 모든 역사적인 일을 의미했다. 그리고 단지 나는 심리적으로 캔버스로부터 차단되었다."
첫 번째 전시도록이 만들어진 이 전시를 위해, 키스 해링은 본래의 장소에서 제작되는 작품의 원칙을 따랐다. 그는 비닐에 그린 드로잉과 작품들의 배열과 함께, 또한 화랑의 벽면을 전면균질의 개념에 따라 자신의 전형적인 인물과 선적 요소로 덮었다. 해링은 뛰거나 춤추는 인물이 그려진 띠 모양의 부분과 기는 아기, 미키 마우스와 스머프 드로잉 사이에 비닐 그림들을 걸었다. 이 작품들의 모티프는 지하철 드로잉에서 발전한 것이다. 작품들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그래픽적인 구조를 지녔으며, 이해하기 쉬운 주제에 다시 한 번 초점이 맞추어졌다. 광선의 후광에 둘러싸여 포옹하고 있는 두 인물과 춤추는 개의 모티프 등이 이에 해당한다. 회화 작품들도 그의 드로잉 작품과 동일한 진행 순서에 따라 제작되었다. 해링은 처음에 그림을 위한 틀을 그리고 나서, 같은 폭의 붓질 몇 번만으로 구체적 내용을 스케치했다. 지하철 드로잉이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를 강조했다면, 비닐 방수포는 다양한 색의 사용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링은 외곽선과 색면을 구별할 수 있는 최소의 물감만으로 작업했다. 로이 릭텐스타인, 로버트 라우셴버그, 솔 르윗, 리처드 세라, 프랜시스코 클레멘테가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해링의 명성은 공식적이고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29~30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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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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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휴스턴 스트리트에 있는 해링의 벽화,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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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키스 해링' 전시, 198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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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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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여러 매체들을 사용해 작업을 했던 해링은 또다시 드로잉, 그리고 더 영구적인 종이 작품의 제작에 대해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1980년 여름에 우선 드로잉에 관심을 집중했다. 해링은 종이 두루마리와 먹물을 이용해, 그의 전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갖춘 첫 번째 드로잉 연작을 제작했다. 이런 초기 드로잉 가운데 하나는 교육용 포스터처럼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다. 관람자는 그림문자로 축약된 원자로, 피라미드, 컴퓨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현재, 과거, 미래를 나타낸다. 아랫부분에는 사람과 동물이 구분되어 있는데, 여기서 동물은 개로 상징되었다. 스프레이 물감으로 강조한 빛나는 후광은 각각의 상징을 둘러싸고 있다. 해링은 이 작품을 '빛을 내는 에너지'라고 ���개했다. 이 작품의 정확한 기원과 목표는 다음 시기의 드로잉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사람과 사물을 싣고서 특별한 힘으로 궤도를 도는 UFO는 에너지 광선을 방사하고 있다. 첫 번째 드로잉에서 UF의 광선이 임신한 여자를 내리쬐어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으며, 흥분한 군중들이 빛을 내는 아기를 받아들고 있다. 광선에 닿은 것들은 모두 빛을 내며, 그 빛은 후광의 형태로 묘사된다. 각각의 드로잉은 구별된 화면으로 다시 세분화되는데, 각 화면은 통합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비행접시 모티프를 다룬 이 이야기는 돌아다니는 인물, 아기, 개, 그리고 사람과 동물 사이의 성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광선의 힘의 오용과 그에 대한 즉각적인 대가와 처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빛을 내는 후광은 긍정적인 특성과 함께 특별한 에너지로 해석되며, 방사능 같은 물질과는 혼동되지 않는다. 해링에게 이런 이미지의 발전은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 이미지들이 생긴 이후에 모든 것이 앞뒤가 맞게 되었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15~18쪽)
1980년 겨울에 해링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 기관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을 위해 다시 한 번 도시 환경을 선택했다. 해링은 마커펜만을 이용해 광고 포스터를 바꾸기 시작했고, 낙서 화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고유한 태그를 작품에 남겼다. 이 태그들은 화가의 서명을 연상시키는 약어를 포함함으로써 작가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피츠버그에서 온 젊은 청년 해링은 뉴욕의 거리에서 낙서미술을 처음 보고는 곧바로 매료되었다. 그는 스프레이 물감을 다루는 예술가들의 뛰어난 재능을 찬미했고, 대중 속에서 모든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에게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이 불법 행위에 공감했다. 해링은 자신의 전형적인 도상 언어를 통해 기존의 태그들에 반응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서명으로 동물 형상을 선택했는데, 이는 점점 주둥이가 모난 개의 모습을 닮아갔다. 또한 기는 아기의 전형에서 발전된, 네 발로 기는 사람의 형태를 디자인했다. "'아기'가 나의 로고나 서명이 된 이유는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긍정적인 경험이 바로 아기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연작에서 그려지기도 하고 병렬되기도 하며 때에 따라 다른 의미와 함께 다양하게 혼합되면서, 해링의 태그는 낙서화가들이 태그를 남겼던 바로 그 장소에 남겨졌다. 해링은 그런 장소에서 자신의 파편인 태그를 남김으로써 낙서화가들과 접촉해 그들에게서 인정받고자 했다.
해링이 뉴욕의 낙서미술에 진정으로 속했던 적은 없지만, 그는 오늘날까지도 뉴욕 낙서미술의 신화와 관련되어 언급된다. 그는 스프레이 물감으로 작업하든 대신, 낙서가 지니는 소통의 힘을 작품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해링은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을 개발했다. 다시 말해 미술과 문화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의 폭을 넓히고자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지닌 독창성의 잠재력을 인식하기 시작해 이를 더욱 강화시켰다. 거리 풍경은 빠르게 그의 도상에 포함되었고, 모방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해링은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그림을 수정하는 유머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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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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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모다가 기획한 뉴욕 뉴 미술관의 대규모 전시를 위한 드로잉,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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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링의 작품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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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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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16일 이른 아침, 키스 해링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생을 마감했다. 해링은 거대한 드로잉 작품과 회화 작품, 벽화와 조각 작품들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티셔츠와 포스터를 남겼다. 이 작품들은 모두 '말년의' 작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가 10년 동안 생산한 광범위한 유산이다. 해링은 젊은 나이였지만 요절했을 때 이미 동료화가와 비평가들에게 인정받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축복받은 예술가였다. 해링은 짧은 생애 동안 명성을 얻고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국제적으로 인기를 끈 미국 작가였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해링은 자신의 개성과 예술을 단일한 실재로 통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해링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선이다. 그의 작품에서 선은 대상의 본질에 충실하도록 형식적으로 축약된 것으로, 화면의 한정된 공간 안에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은 항상 연속적이며, 우연의 법칙을 따르고, 외곽선이 되어 형상을 이루고 결국에는 상징이 된다. 무엇보다도 관람자는 작가가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짧은 순간의 응시만으로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해링의 작품이 가지는 특별한 매력은 이런 강렬한 그래픽 양식을 거대한 상상의 세계와 결합한 작가의 능력이다. 작품 속의 인물이나 형태는 연속적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창조물로 변화하는데, 이는 소묘가이자 화가, 조각가로서 해링이 지닌 작가적 능력을 증명한다. 관람자는 해링의 양식이 작품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링의 새로운 도전을 향한 지속적 탐구는 작품의 변화하는 화면과 관련된 실험이 병행되었다. 작가가 선택한 화면이라면 어떤 것이든 벽이나 옷가지, 자동차나 비행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이 또는 캔버스, 가공되지 않은 면이나 비닐 등에서 해링만의 특징이 완벽하게 위력을 나타냈다. 공식적으로 계획된 프로젝트에서도, 자발적으로 제작한 벽화 디자인에서도, 해링의 선은 스케치나 습작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관람자는 해링의 작품 화면에 어떠한 실수나 수정, 비율의 비대칭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무의식성과 확신이 가장 주요한 요소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해링의 티셔츠를 입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작가의 양식적 특징을 인지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것은 진실이다. '해링의 예술에 익숙해지는' 단계는 간단했다. 그것은 해링의 작품 중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링은 주변에서 본 것들을 모사하고 통합했으며, 당대의 민감한 쟁점에 대한 확고한 직관으로 미국 사회를 관찰했다. 그는 시대정신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춘 예술적 진술을 유포하기 이전에, 일상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가공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해링은 생산자인 동시에, 특정 세대 특정 생활방식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툰과 만화를 보며 성장했기에, 미국인의 '본심'을 파악할 수 있는 예리한 감각을 개발하는 데 최고의 전제조건을 누린 셈이었다. 해링은 스파르타식 예술 수단으로, 텔레비전 매체의 노출된 지위라는 보편적인 양상을 지적하는 데 성공했다.
키스 해링은 독학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로 양성되었고, 스스로도 예술가임을 인식했다. 그리고 미디어 시대가 막이 오를 무렵, 뉴욕의 클럽과 파티 현장의 불명예스러운 명성으로부터, 소비 사회의 요구로부터 발생된 이익의 수혜자였다. 해링은 경력을 쌓기 시작할 때부터 주류 미술계와 거리를 두었다. 또한 그것이 무산될지라도, 미술시장의 법칙을 위반함으로써 당대의 문화적 전통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화랑의 보호 아래서 활동하는 대신, 공공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녔다. 뉴욕의 지하철역 벽의 빈 광고판과 당시 막 싹을 틔웠던 거리의 낙서미술에 대한 지식이 이에 포함된다. 이런 종류의 예술로 해링은 빠른 기간 안에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랑을 받는 젊은 영웅이 되었으며, 1980년대 미국의 상징이자 화신이 되었다. 그의 그림과 기호는 동시대의 메시지이자 그것이 상징하는 문화를 대표하는 고정물이 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는 어떤 심오한 내용적 암시 없이도, 대중적 광고의 화려한 표현과 자신의 예술을 통합하는 방법을 알았다. 문자적 전달과 관련된 그의 작업 방식은 코카콜라의 광고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간판이 작품의 화면 역할을 한다. (7~8쪽)
키스 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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