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thekoreanist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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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oF7nVHRsU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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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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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Tokugawa warship called Ataka Maru (from mifune map). It is an Atakebune ship.
Unknown author - Tokyo National Museum (東京国立博物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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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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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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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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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wback 2014. Kendo tournament. Seoul.
#latergram이거든
#latergram
#monochrome
#kendo
https://www.instagram.com/p/B-X7YZjnCy0/?igshid=15oozsqgsi6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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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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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문헌총록
『영인본(1969년 학문각 간행) 강주진 서문』 선조 조에 치른 임진왜란과 광해 조에 겪어야했던 병자호란의 양차에 걸친 남북(南北)에서 적의 침입으로 안일하고 외세에 의지해오던 조선사회에 자주사상이 움트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곧 실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실학사상가로서 정평이 있는 지봉 이수광의 뒤를 이어 알려지지 않았던 실학자 한 분이 있었으니, 이분이 곧 경와 ��휴선생이다. 김휴는 지봉보다 30년 뒤에 태어난 분인데 지봉의 지봉유설에 못지않은 큰 저작을 남겼으니 이것이 곧 『해동문헌록』이다. 경와(敬窩, 김휴선생 호)는 선조 30년(1597) 안동 천전동 의성(문소)김씨 일가에서 태어났으며, 누대로 문한과 관직을 이어받은 명문거족이었다. 이러한 친가의 학문과 학덕을 이어받았음은 물론, 외가와 처가까지 모두 퇴계의 학덕을 이어받은 가문이었다. 경와가 이렇게 문한(文翰)1)과 세록가문이었지만 관계(官界)로 진출하지 않고 학문에 진력하게 된 동기는 당시에 실세(失勢)하여 처지가 좋지 못했으며, 또 사화의 참상을 잘 알아 관로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학행있는 이를 널리 천거(薦擧)하라는 왕명에 좇아 공을 강릉참봉으로 천거하였으나 병(病)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두 차례 부과(赴科)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가환(家患)등으로 응시할 기회를 잃었다. 경와는 43세를 일기로 조졸(早卒)하였는데, 그가 장수 하였더라면 더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의 시문집, 도동록, 조문록 등을 묶은 경와집 4책(四冊)과 본 해동문헌총록을 남겨놓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 해동문헌총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해제의 집대성으로서 서지학사상 처음으로 뜻 깊은 거작이다. 최초로 서지학적 개념을 가지고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민족문화사적 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학자의 손으로 된 훌륭한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해제가 이룩되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지금에 와서 겨우 간행을 보게 된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바이다. 공의 족손 성택찬의 「경와공 행장」에 의하면 이 해동문헌총록이 화재를 만나 일부 소실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금 간행함에 있어 원본으로 사용한 몇 권은 천전동 경와 본가에서 보존되어 온 것인데, 이것은 과연 화재를 만난 흔적이 있어 경와 자필의 최고(最古)본의 책 주변이 소실되었으나 원문을 알아볼 정도로 불에 탄 흔적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완질(完帙)이 못되어 다른 사본을 합쳐서 이것이 완질이 되므로 원본을 삼아서 영인하게 된 것인데, 이 다른 사본은 필시 경와 자신 아니면 다른 집에서 여벌로 베껴두었던 사본을 태(台)본으로 해서 따로 필사해두었던 것이 남아 있던 것 같다.그것은 경와가 탈고되기 전에 초고본을 다른 학자들에게 보여서 교정과 교시(敎示)를 받은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원본초고본과 필사본을 이사람 저사람이 필사한 것이 산질본으로 수개 처에서 보존되어 내려왔다.그 중 경와종가에서 보존해온 경와 자필의 초고본 몇 권에 있는 자필의 문헌록서문에 의해서 밝혀진 이 책의 집필 편찬된 동기와 목적 및 기간 등은 ‘저자 서문’을 보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나,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경와가 스물 살 되던 해(1616년) 처가 쪽 인척인 여헌 장현광을 원당으로 찾아뵙는다. 당시 여헌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자로서 기호의 송시열, 송준길 등도 소시적에 이분을 찾아 올 만큼 명성이 높았고, 서애(유성룡)의 셋째 아들을 수학케 할 만큼 문명(文名)이 높았는데, 여헌은 경와에게 수권의 책을 보이면서, “이것이 ‘문헌통고경적고’인데 여러 경적을 소개한 것으로 이 한권으로 고금문헌의 성쇠를 손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문헌통고 중에서 경적만을 초출하여 부록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것으로써 일목요연하게 경적의 대략을 알게 된다. 지금 우리는 동방인으로 동방문헌을 꼭 알아야 한다. 말하고, 내가 군(휴)을 만나본 즉 박식하고 재량이 있으므로 우리나라 문헌을 정리하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군이 거주하는 군읍(안동,예안,영주,봉화,예천,영양,청송,상주,문경,선산)은 병화를 면한 서적이 잘 보관되어 있는 곳이 많으니 이것을 수집편찬하고 또 얻어 듣는 데로 이를 기록하여 하나의 문헌해제 같은 것을 편술하면 문헌을 충분히 밝힐 수 있고, 또 널리 참고로 삼을 수 있으니 그 저술의 공이야 말로 충분히 선인들의 대작에 못지않은 공적이 될 것이다.”라고 부탁 겸 당부했던 것이다. 경와는 선생님의 가르침과 그 뜻을 이어받아 노력할 것을 다짐한 이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가는 《도서해제》작업이 경와의 손으로 시작된 것이다. 낙동강 좌우 동서지방에 있는 명문대가에서 서책을 보관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 이러한 서책을 찾아다니면서 도서해제작업을 했다. 도서해제를 하자니 저서를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서책명과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적으로 지금부터 390년 이전인 까닭에 나려(羅麗)시대의 고서적도 지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때는 그 때대로 어떤 서책은 책만 있고, 저자가 불분명하고 또 어떤 책은 저서와 서명이 분명한데 실물인 책이 없고 해서 편술에 곤란을 느끼었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저자의 성격 행실과 저작 내용의 가치와는 별개로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옛 그 시대는 저자의 행적과 그 저작의 내용과를 별개로 볼 수 없을 때인 만큼 도서해제의 중요한 부분이 그 저작자의 행적을 밝히는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해 동안 수집 편술한 약간의 책 질이 되었을 때 그 이름을 『해동문헌록』이라하여 미탈고 된 채 이를 여러 선생에 보내서 좋은 교시와 교정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서 경와는 ‘문헌을 밝히는 데는 인물의 성쇠, 문헌의 고하, 세도승강도 알고 있어야 한다’ 는 여헌 선생의 교시를 받고, 이에 맞추어 다시 교정 보완했던 것이다. 「나려예문지(羅麗藝文志)」에 수록된 고려본만 하더라도 전체의 삼분지 일 정도의 숫자가 이미 경와의 이 해동문헌록에서 취급된 것이며, 이 해동문헌록에 수록된 670여종의 도서 중에서 고려본 이상의 고전적이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 좌우 동서근읍에 산재하고 있었던 풍부한 전적량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도 이지방의 이곳저곳에 대를 물려 전해진 서고의 것이 흩어져 나와서 권위 있는 도서관의 고전실을 채우고 있고, 고서 애호가들의 서재를 메워주는 고전의 보급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금상정예문」이란 책은 세계에서 활자발견의 가장 오랜 문헌이나 지금에 와서는 기록상으로만 접할 수 있어 당시의 실물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경와가 이 책을 다룬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이 책이 실존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예악(禮樂)류에 해제되어 있다.위로부터 신라의 최문창(최치원)으로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많은 인물과 저서가 있었는데, 저자도 거의 알 수 없거니와 저서도 모두 보존되지 못했다. 따라서 경와는 이 도서해제에서 서명만 기입하고 저자와 내용을 상기(相記)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경와가 해동문헌록의 작업을 착수한 것이 20세 되던 해에 여헌 선생을 찾아가 뵌 이후의 일인데, 이 책의 서문을 쓴 것이 41세 되던 해이므로 약 20년이 걸린 셈이다. 그가 43세에 서거한 점을 참작한다면 그의 필생의 사업이었고, 또 이러한 난사업으로 해서 건강을 상하게 한 점도 있으리라 믿어진다. 경와는 이 책을 탈고한 후에 참황(慙惶)하여 스스로 생각해 본 탈고 소감을 이 책 서문에 적어 두었다. 여기에 보면 대개 인물을 논하자면 먼저 기량과 지식을 가름한 다음에 그 사람의 문예를 논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작자는 반드시 그 사람의 행적을 먼저 살핀 연후에 문장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행적을 알려면 먼저 선ㆍ불선을 간파하여야 한다고 했다.수 천재(千載)의 많은 인물의 선, 불선을 총괄하여 일일이 되새겨 본즉 독서자 경와가 이렇게 인물에 치중해서 도서해제를 한 것은 실로 맹자의 유의에 쫒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경와는 작품과 작자의 관계, 즉 저자와 저작, 사람과 문장 등을 중요시 했던 것이다. 이로써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라이후 고려, 조선에 걸쳐 670여종의 도서해제를 완성하였다는 것은 한국서지학사적 최유의 대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저 고본은 사본(寫本)으로서 6권으로 되어있는 것을 일 책으로 합쳐서 간행하게 된 것이다. 1) 문한(文翰) : 문필에 관한 일, 문한서 : 임금의 명령을 글로 기초하던 관청, 1275년에 한림원을 고친 이름으로 뒤에 사림원으로 고쳤다. 조선 시대, 궁중의 경적, 사적 등을 관리하고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 저본 : 해동문헌총록 / 김휴 원저; 강주진 편저; 윤병태 색인 - 김휴 선생(1637년) 원저 해동문헌총록 영인본(학문각, 1969년)을 바탕으로 함. 2. 번역 - 원본 페이지를 그대로 글자크기도 대등하게 가로로 옮겼으며, 또한 한 단락별로 번역하여 한자원문과 쉽게 비교하도록 작성하였음. - 일반인들이 쉽게 비교, 열람할 수 있도록 가급적 직역(直譯)을 채택함. 3. 수록 : 「해동문헌총록」은 총 670종 옮겨 새김 [저본 : ~835쪽] - 목록 : 총 670여 책 4. 부호의 쓰임 - 좌측에 쓰인 숫자는 저본(영인본) 수록 페이지임. - 《 》; 〈 〉 : 서명(書名) ; 부서명 - ‘ ’ : 대화체, 인용문 5. 저본(필사본)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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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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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行錄(동행록) / 李殷(이은)
一帙(일질)
李殷知蔚州。爲倭寇誘脅。到對馬島。不屈節。島有一僧。稍解詩。殷題一絶示之云。蒼海疑無地。今朝忽見山。居僧淸且絶。相對一開顏。僧言於島魁。待之以禮。乃得生還。有東行錄一秩。
李殷國初人。以遺逸被薦。官至慶尙道觀察使。
이은(李殷)이 울주지사(蔚州知事;울산)를 지낼 때 왜구의 유혹과 협박을 당하여 대마도에 도착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섬에 중이 한사람이 있는데, 시를 좀 알기에 이은(李殷)이 시 한 절구를 지어 보이기를,
드넓은 바다엔 육지 없는 줄 알았더니 / 蒼海疑無地 오늘 아침엔 돌연 산이 보였네 / 今朝忽見山 거기 사는 중은 맑고도 뛰어나 / 居僧淸且絶 서로 웃음을 활짝 띄었네 / 相對一開顔
하니, 중이 대마도 괴수에게 말하여 정중하게 대접받고 이내 살아서 돌아왔다. 《동행록(東行錄)》 한 질이 전한다.
이은(李殷)은 국초에 인물로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었고, 벼슬은 경상도관찰사(종2품) 에 이르렀다.
해동문헌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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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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鵝溪集(아계집) / 李山海(이산해)  해동문헌총록
幷六卷(병육권)。箕成錄(기성록), 詩文(시문), 三卷(삼권)。鍾峴錄(종현록), 乞歸錄(걸귀록), 雙門錄(쌍문록), 街隱錄(가은록), 奉使錄(봉사록), 東門錄(동문록), 南郭錄(남곽록), 省墓北山錄(성묘북산록), 鷗浦錄(구포록), 杮田錄(전록), 鷗浦後錄(구포후 록), 壠上錄(롱상록), 露梁錄(로양록), 一卷(일권)。文(문), 二卷(이권)。
李山海所著。山海字汝受。牧隱之後。明廟朝登第。典文衡。官至領議政封鵝城府院君。松溪漫錄曰, 鵝溪李相公。年纔髫 齕。能書大字。求者坌集。書罷足濡墨汁。印迹紙尾。人尤異之。十三赴湖西鄕試爲解元。非天才能如是乎。目之曰神童。早登靑雲。聲名藉甚。纔踰不惑。位列九棘。不數年超陞弘化。五十作相。近世所罕。可謂才名同謀者也。
이산해 지음. 산해의 자는 여수,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명종 조에 급제하여 문형을 관장했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송계만록》에 이르기를, 아계 이 상공은 나이 겨우 더벅머리가 자랄 (7~8세)때 능히 큰 글자를 썼고, 이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종이 끝에 자국을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3세에 호서에서 향시(鄕試)를 보아 해원(解元, 향시의 장원)이 되었으니, 천재가 아니면 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그를 지목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일찍 청운(靑雲)에 올라, 이름이 매우 자자(藉藉)하더니, 겨우 나이 40이 넘자 반열은 구극(九棘)에 올랐고, 수년이 못 되어 뛰어 홍화(弘化)에 오르고, 50에 정승이 되었으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는 재주와 명예를 함께 꾀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주기] 又曰, 嘉靖丙申年間。大明人劉應箕。見執於倭寇在倭舡中。爲我國人所擒倒王京。作詩云,
또, 가정(嘉靖) 병진년(1536년) 무렵에 명(明)나라 사람 유응기가 왜구(倭寇)에게 붙잡혀 배 안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조선 사람이 사로잡아 한양에 왔다. 그가 시를 지었다.
只怨干戈不怨天 / 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離鄕去國路千千 / 고향 멀리 고국 떠난 길은 천리에 또 천리 愁纒病骨哀衰運 / 시름에 싸인 병골이 쇠한 운명 애달파 涙洒紅顔泣盛年 / 눈물이 홍안(紅顔)에 번지도록 한창 나이에 우는구나. 見月思歸西塞外 / 달 보며 서쪽 국경 밖으로 귀향할 생각하고 看雲心逐北堂前 / 언뜻 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려가는구나. 旄丘見葛何多日 / 모구의 칡을 보니 얼마나 많은 날 흘렀을꼬? 尾瑣孤身因此邊 / 지치고 외로운 몸 여기서도 곤하구나.
鵝溪公。少時次其韻云, 아계공이 젊어서 이 시에 차운(次韻)하여 지었다.
鯤海鯨波杳接天 / 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南荊迢遞幾三千 / 남쪽 형국(초 나���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流離異國惟孤影 / 정처없이 떠돌다 이국 땅에 외로운 모습인데 飄泊他鄕是弱年 / 나부끼다 머무는 타향 땅에 한창 젊은 나이로다. 蝶夢有時傳塞外 / 나비 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雁書無路抵家前 / 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구나. 知君夜夜思親處 / 알겠노라 그대가 밤마다 어버이 사는 곳 그리워함을 秋雨蕭蕭客枕邊 / 가을비 쓸쓸히 객 침상 가장자리 적시네.
劉時年十五六。鵝溪年十七八。年皆幼穉。詩已成章。自古早達者必夙成。鵝溪則今爲宰執。不知劉亦旣達耶。或云登第已久。未知其果然否也。
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조리(條理)가 섰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해동문헌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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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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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고려 말기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시화·잡록집 <역옹패설>을 디지털 콘텐츠로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역옹패설>은 4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제현이 1342년(충혜왕 복위 3) 56세에 환로(宦路)에서 은퇴하여 자기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한 책입니다. 전집(前集)·후집(後集)·습유(拾遺) 등으로 되었으며, 역사책에 보이지 않는 이문(異聞)·기사(奇事)와 경전(經典)·인물·시문(詩文)·서화(書畵) 등의 비평글과 함께 자신의 시문 약간과 책 끝에 이색(李穡)의 묘지명(墓地銘)도 실고 있습니다. 이제현은 고려 말의 시(詩)·문(文)·사(辭)의 대가였고 경사(經史)에도 두루 통달한 문호로서, 이 자료에 실린 역대 시문(詩文)에 대한 비평은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 준 요긴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집 이
“국가가 배반한 탐라(耽羅)를 치고 동쪽으로 왜(倭)에게 죄(罪)를 문책(問責)하며 정해년 근왕(勤王)과 경인년의 어구(禦寇) 때문에 용병(用兵)하는 것이 거의 二十년이 되었다. 선비들이 다 갑옷과 투구의 차림으로 활과 창을 잡았고,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는 열 사람 중 한두 사람도 못되었다. 선배(先輩)와 노성(老成)한 선비들은 다 죽어서 육적(六籍)의 전(傳)하는 것이 실낱같이 겨우 이어질 뿐이더니 대덕(大德) 말년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재상(宰相)이 되어서 국학(國學)을 수리하고 상서(庠序)를 수선하여, 이성(李晟)ㆍ추적(秋適)ㆍ최원충(崔元冲)등을 기용(起用)하여 경서(經書) 하나에 두 사람의 교수를 두고, 금학(禁學)2_30)을 개방하여 내시(內侍)ㆍ오군(五軍)ㆍ삼관(三官)의 七품(七品) 이하와 중앙과 지방의 생원(生員)에 이르기까지 다 와서 듣고 학습(學習)하게 하였다. 또 고 낭중 유함(故郎中 兪咸)의 아들로서 중이 된 자가 사주(泗州)에 사는데 사한(史漢)1_8)을 능숙하게 읽는다는 것을 듣고 역전(驛傳)으로 불러 올려 서울로 오게 하고 윤신걸(尹莘傑)ㆍ김승인(金承印)ㆍ서인(徐諲)ㆍ김원식(金元軾)ㆍ박이(朴理) 등을 보내어 그의 강설(講說)을 듣게 하였다. 이에 봉액(縫掖)2_31)과 진신(搢紳)2_32)의 차림을 한 무리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옛 일에 박식(博識)하기를 일삼게 되었다. 그 뒤에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이 덕릉(德陵)2_33)을 따라가서 중국 수도(首都)에 十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서적을 많이 구득(求得)하여 가지고 돌아왔으매, 나의 장인[外舅] 정승 국재 권공(菊齋權公)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구하여 판을 새겨서 널리 전파하니 배우는 자들이 다시 도학(道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연보
충정왕 원년(至正 九년 一三四九년) 기축, 六十三세. 二년(至正 一○년 一三五○년) 경인, 六十四세. 三년(至正 一一년 一三五一년) 신묘, 六十五세.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即位)하다. 아직 우리 나라에 돌아오지 않은 채 선생을 우정승 권단정동성사(右政丞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다. 선생이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으나 임금이 허가하지 아니하고 또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임명하였다. 선생이 법사(法司)로 하여금 각 도의 존무사(存撫使)ㆍ안렴사(安廉使)의 공적과 죄과(罪過)를 고핵(考覈)하게 하고 홍원철(洪元哲)을 보내어 평양도(平壤道)를 순문(巡問)하게 하였으며, 김용(金鏞)으로 왜적(倭賊)을 방비하게 하고, 허유(許猷)로 서북면찰방(西北面察訪)을 삼았으며, 배전(裵佺)ㆍ박수명(朴守明)을 행성(行省)의 감옥에 가두고, 노영서(盧英瑞)ㆍ윤시우(尹時遇)를 귀양 보냈으며, 한대순(韓大淳)ㆍ정천기(鄭天起)의 벼슬을 낮추었다. 그때 임금이 원나라에 있어서 두어 달 동안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선생의 처리하는 일이 일이 마땅하였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힘을 입어 안정할 수 있었다.
금 들으니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에 행성(行省)을 설치하여 중국 내지의 여러 성과 동일하게 만들고자 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것이 과연 정말이라면, 그 일이 세조 황제의 조서의 취지에 어떠하며, 열대(列代) 여러 황제의 생각하고 아끼던 뜻과는 어떠합니까. 엎드려 연전(年前) 十一월에 새로 내린 조서(詔書)의 조항을 읽어보니,『사악(邪惡)한 것과 바른 것으로 하여금 길을 달리하게 하여 천하가 편안하게 다스려져서 중통(中統)ㆍ지원(至元)의 치리(治理)를 회복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러한 덕음(德音)을 펴심은 실로 온 천하 사해의 복(福)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이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여러 대에 걸쳐 중국에 이바지한 공로가 저와 같고, 열대(列代)의 황제가 생각하고 아끼는 은혜가 이와 같은데, 지금 四백여 년의 왕업(王業)을 하루 아침에 폐절(廢絶)시킨다면 그밖의 한 치의 공로도 중국 조정에 이바지함이 없는 다른 나라들은 조정에서 장차 어떻게 처리 하려고 합니까. 또 그 중통(中統)ㆍ지원(至元)의 치리를 본받으라고 한 조서의 취지는 어떻게 받들려고 합니까. 다시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지방(地方)이 천리(千里)를 넘지 못합니다. 산과 내와 숲과 소택지(沼澤地)등 소용 없는 땅이 十분의 七입니다. 그 땅에 조세를 받아 보아도 운수(運輸)의 비용에도 모자랄 것이며, 그 백성들에게 공부(貢賦)를 징수하더라도 그 일을 위하여 설치하는 관리의 봉록에도 부족할 것입니다. 중국 국가의 용도(用度)에 비교하면 태산(泰山)과 작은 티끌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의 만분의 一도 이바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위에 더욱 땅은 멀리 떨어져 있고, 백성들은 우매하며, 언어(言語)가 중국과 같지 않아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중국과는 아주 판이합니다. 아마 이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의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니,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명한다고 하여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왜국(倭國)의 백성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터이니, 왜국이 만일 이 소문을 들으면 우리의 일을 가지고 자신들의 경계로 삼아 제 스스로의 좋다고 생각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전집
국가가 배반한 탐라(耽羅)를 치고 동쪽으로 왜(倭)에게 죄(罪)를 문책(問責)하며 정해년 근왕(勤王)과 경인년의 어구(禦寇) 때문에 용병(用兵)하는 것이 거의 二十년이 되었다. 선비들이 다 갑옷과 투구의 차림으로 활과 창을 잡았고,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는 열 사람 중 한두 사람도 못되었다. 선배(先輩)와 노성(老成)한 선비들은 다 죽어서 육적(六籍)의 전(傳)하는 것이 실낱같이 겨우 이어질 뿐이더니 대덕(大德) 말년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재상(宰相)이 되어서 국학(國學)을 수리하고 상서(庠序)를 수선하여, 이성(李晟)ㆍ추적(秋適)ㆍ최원충(崔元冲)등을 기용(起用)하여 경서(經書) 하나에 두 사람의 교수를 두고, 금학(禁學)2_30)을 개방하여 내시(內侍)ㆍ오군(五軍)ㆍ삼관(三官)의 七품(七品) 이하와 중앙과 지방의 생원(生員)에 이르기까지 다 와서 듣고 학습(學習)하게 하였다. 또 고 낭중 유함(故郎中 兪咸)의 아들로서 중이 된 자가 사주(泗州)에 사는데 사한(史漢)1_8)을 능숙하게 읽는다는 것을 듣고 역전(驛傳)으로 불러 올려 서울로 오게 하고 윤신걸(尹莘傑)ㆍ김승인(金承印)ㆍ서인(徐諲)ㆍ김원식(金元軾)ㆍ박이(朴理) 등을 보내어 그의 강설(講說)을 듣게 하였다. 이에 봉액(縫掖)2_31)과 진신(搢紳)2_32)의 차림을 한 무리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옛 일에 박식(博識)하기를 일삼게 되었다. 그 뒤에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이 덕릉(德陵)2_33)을 따라가서 중국 수도(首都)에 十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서적을 많이 구득(求得)하여 가지고 돌아왔으매, 나의 장인[外舅] 정승 국재 권공(菊齋權公)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구하여 판을 새겨서 널리 전파하니 배우는 자들이 다시 도학(道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jinýpřeklad:
나라에서는 배반한 탐라를 정벌하고 동쪽 왜(倭)를 문죄하여 정해년(1, 287년) 근왕(勤王)19)케 하고, 경인년(1, 290년) 왜구를 막기 위해 군사를 쓴지 거의 20여년, 다 무기와 갑옷을 입고 활과 창을 잡고 방책을 가지고 바로잡으니, 글을 읽은 사람 열 명 중 한 둘만 불가능했으나 선배 노 유학자들은 물고 나고(없어지고), 또한 육경이 전해진 것이 다 없어졌으나, 가는 실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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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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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抗倭图》的艺术特点
《太平抗倭图》,又名《关公退倭图》、《关帝君显神图》,明朝画家周世隆作。巨幅,纸本,设色,长224厘米,宽180厘米。此画人物多至四百五十余人,真实地记录了浙江沿海人民保家卫国的事件。
作品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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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抗倭图》,又名《关公退倭图》、《关帝君显神图》,
明朝
画家
周世隆
作。巨幅,
纸本
,设色,长224厘米,宽180厘米。此画人物多至四百五十余人,真实地记录了
浙江
沿海人民保家卫国的事件。
明世宗
嘉靖
三十一年(1552年),
倭寇
从海上登陆,侵扰
太平
(今
温岭县
),纵火焚近郊室庐,画中表现了
太平县
城百姓在城西北角奋勇抗击,倭寇惶逃走,有的拖尸而跑,有的抱头而窜,也有的背“竹编牌裹牛皮”的武器拥逼城下。远处的北山下,有倭寇在追逐妇女,有的在山径间扛抬抢劫来的家畜和酒坛。城中有少数官兵出巡,官僚、财主则在住宅前设置香案,向天祈祷。这与百姓的英勇奋战,形成强烈对比。最后
关帝
显圣,终于击退倭寇。建筑也是本画着墨最多之处,用力最深,不亚于人物的表现,是难得的研究明代太平地区建筑的重要资料。这幅作品现为
中国国家博物馆
收藏,并为当地人民所珍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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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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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抗倭图》的艺术特点
【内容提要】《太平抗倭图》与明代主流绘画样式完全不同,它没有采用传统的表现重大主题和纪实性题材所惯用的横卷形式,而是以民间“地舆图”的表现方式,将与整体事件相关联的各个情节安排在一个如同地图的整体框架之内,并由此展开相互之间的情节关系,具有较浓郁的民间绘画特性。该画的艺术成就以人物的表现为代表,虽然它不像完全意义上的人物画那样能够表现出人物的神情以及思想活动,而像山水画中的点景人物那样仅仅是简单的任务动态表现抗倭的主题,但人物众多,关系错综,是另类的明代人物画的代表作品。在整幅画中占据主要篇幅的建筑,着墨最多,用力最深,不亚于人物的表现,是难得的研究明代太平地区建筑的重要资料。
【关键词】抗倭 结构 情节 人物 建筑 民间属性
《文物》1959年第5期发表了王伯敏先生的《明代民间杰出历史画“太平抗倭图”》一文,并论说“画的内容是明嘉靖三十一年(公元1552年)五月太平(今浙江台州市所属的温岭市)邑人王庚等抵抗倭寇入侵的情景”,使得这张原本由浙江文管会收藏的非名家的民间绘画作品为世人所知晓,后来又调拨给刚开馆的中国历史博物馆,其理由大致是该画符合中国历史博物馆“中国通史陈列”以阶级斗争和农民起义为历史发展纲要的展陈要求。
正因为王先生的文章有该画作者为当地民间画工周世隆的结论,所以,此后的论述大都沿用此说[1]。然而,细读王先生的文章,王先生又明确地告知了所征引的资料中有与周世隆所作的《关公退倭图》不合的地方。实际上,周世隆所作的《关公退倭图》的内容,与今天所见的《太平抗倭图》(图一)并不相同。因此,也可以说,该画并非周世隆所作,画的内容也不是《嘉庆太平县志》[2]所载的明嘉靖三十一年(公元1552年)五月抗倭的历史。而王先生记忆中的太平县城关公庙内的画,可能还不是《嘉庆太平县志》中所记载的周世隆所作的《关公退倭图》。
现在能够引用的、也是王先生所征引的文献只有《嘉庆太平县志》。根据《嘉庆太平县志》卷八中的“日本寇边略”:“唐宋以来虽屡寇边陲,然鼠窃而已。驱之辄去。迄元至大二年始大寇,庆元路、火郡仪门及天宁寺。”洪武五年,寇温州乐清等县,十六年之后则是进犯不断。而史书中也有很多抗倭事件和抗倭名人的记载,比如抗倭名将张元勋(1533-1590)16岁时,倭寇侵犯台州,其父张恺散资聚众,力战阵亡。此后,他誓杀万贼以报父仇,成为浙江、福建、广东沿海一带著名的抗倭英雄。由此可以得知,这一地区曾经屡遭“寇”或“倭寇”的侵犯,那么,表现各个时期抗倭的绘画作品就有可能不仅是与某一个时间或某一个事件相对应的《关公退倭图》或《太平抗倭图》,应该还有其它。发生在中国东南沿海的倭寇侵犯与抗倭斗争是明代历史上的重要事件,基于现实的功用以及绘画的所长,就目前所知,历史上还产生了中国国家博物馆收藏的《抗倭图卷》[3],以及日本东京大学史料编篡所收藏的《倭寇图卷》等,它们都是明代的佚名作品。而将《抗倭图卷》、《倭寇图卷》与《太平抗倭图》联系起来考察和研究,不仅有益于《太平抗倭图》的研究,而且也便于了解中国古代绘画在表现重大历史事件中所并存的多样形式,特别有助于了解明代主流绘画样式与民间绘画样式在形式上的差异。
到目前为止,因为在已有研究成果的基础上还没有新的资料补充,以加强对作者、时代、事件等相关问题的进一步考证,所以,本文将着眼于《太平抗倭图》在艺术表现方面的研究。
《太平抗倭图》的结构
与《抗倭图卷》和《倭寇图卷》不同的是,《太平抗倭图》没有采用传统的表现重大主题和纪实性题材所惯用的横卷形式,而是采用可以悬挂的独幅立轴的方式,其明显的优点是能令人对所表现的整体事件一目了然,而不管主题和内容、时间和空间的复杂程度以及相互关系。可以想象,如果不是这样,而是采用横卷的形式(图二),像《抗倭图卷》和《倭寇图卷》所表现的那样,那么,也是非常精彩,因为《太平抗倭图》所表现的诸多精彩而独特的表现主题的部分,完全可以串联成一个具有特定时间和空间关系的横卷画面。
早在西周时期的《周礼》就有“九州之图”之说。《嘉庆太平县志》卷一“地舆志上”就首列“县境之图”、“县治之图”(图三),并云:“志以纪事,而先之以图。义亦如此,是故图县境也,事之所从出也。图县治也,事之所从���也。二图具,而志之事亦概可考矣。”这里所论的图与史的关系,非常好的说明了这种“地舆图”所特有的功用。可见至迟自西周出现的“地舆图”,发展到明代嘉靖时期仍然是主导记史或记事的基本方法之一,而中国一直绵延不断的“地舆图”的绘制传统,也为图像辨识体系形成了一种约定俗成的方法。所以,其结构以及特殊的透视处理和表现方法是世代相传。这种表现方法与同类型的西方绘画中的表现大相径庭,虽然中国的概念性与西方的科学性在哲学基础上的认识论中存有不同的方式,但在功用上却有着异曲同工的归途。
《太平抗倭图》在民间“地舆图”的基础上,以民间“地舆图”的表现方式,将与整体事件相关联的各个情节安排在一个如同地图的整体框架之内,并由此展开相互之间的情节关系,表现与主题相关的情节内容。“太平地三面皆山,唯东一面并海,形如仰釜”,与《嘉庆太平县志》所刊的“地舆图”相吻合,这就交代了倭寇来犯的主要路线。从《嘉庆太平县志》中得知,太平为“千室之邑,有街有巷有坊”。其“地舆志下·坊市”所载有:西巷,中阳园巷,小泉村,南四坊,北二坊,镇东桥市,鸣远楼市,温岭街,夹屿街,南监街,塘下街,泽库街,白牧爱坊,腾蛟起凤坊,四门,十字街,县前直街,宅前街。县东,名臣坊,继美坊,进士坊,联辉坊,解元坊,恩荣坊,承恩坊,司寇坊,贞节坊,节妇坊,神童门,联锦坊……另外,《嘉庆太平县志》卷八“外志”中还记载有大量的古迹、宅墓、寺院。可见这是一个繁华而有历史的县城。显然,在一个画面中不可能像“地舆图”那样尽其所能将它们一一表现出来。画工的选择一方面是基于地舆的实际,另一方面则是基于绘画表现题材内容的需要。
与《嘉庆太平县志》所刊“县境之图”中的方形县城格局不同的是,此图所表现城池的基本格局接近圆形,由围绕一周的城墙所决定。画面中有一条由北至南贯穿城池的河流,符合太平县北高南低的地形特征。作者把战事安排在能与崇山峻岭相连的画面的上部,因此,画面中的四个城门就处理成不对称的结构,中心也偏向了上方。作者以其高妙的艺术处理手法,将南北两个城楼处理成一高一低,东高西低,使得与街巷的内在结构相呼应,从而避免了地舆图的呆板格局,同时又与《嘉庆太平县志》所刊“县境之图”的内在结构相符合。与此相联系的是,因为这样的处理,加大了从北城楼到西城楼之间的空间距离,因此有可能将本画所表现的主题充分地在这一空间中展开。另外,拉近了南门与东门之间的距离,也就扩大了南门与北门内民居以及相关内容表现的空间,因此在缩小了南门与东门之间的空间之后,却得以在南门与东门之内重点突出“关公显圣”这一部分内容。上述的空间布局尽管可能与实际有出入,也不符合中国城池建设中方正和对称的基本章法,但是,却有利于作者去表现抗倭的主题,显示出作者的精心。现在的整体格局既有“地舆图”的一般规律,又合乎中国山水画的基本格局,在两者的结合中形成了该画在艺术上的基本特色。
近大远小,是透视学的基本规律,是西方绘画中必须遵循的科学法则,可是,中国绘画自古在处理透视关系中就打破了这一规律,出现了“人大于山”[4]的景象,因此,中国绘画美学成了完全不同于西方绘画的另一体系。《太平抗倭图》将全画的重点放在了画面偏上的位置,因为吸收了“地舆图”的表现方法,也就完全没有透视的限制,这是该画在结构关系中最突出的特点。
《太平抗倭图》的情节
与《太平抗倭图》的画面结构相关的是该画有着独特的情节表现方式,作者将许多叙述性的内容集中在同一个时间点上,使之同时呈现在太平县城这一空间范围之内,而在表现主题方面又有着值得玩味的多方面交叉的叙事结构。显然,在与主题内容相关的多方面的联系之中,丰富而多样的情节内容使得主题表现饱满而充分,观赏者能够从中获得一个立体的历史认知。在一个独幅画面中,作者实际上是把横卷分段表现的不同情节,集中到一个整体的空间范围之内,并通过内在的情节联系而呈现出全景式的表现。
全画按区块可以分为六个部分:
一、倭寇来犯。位于画面的上方如同表现太平自然的山水画远景,青山绿水层叠,民居散落,古塔耸立。在西北城外绵延起伏的山间道路上,倭寇持刀抢掠财物,绑架妇女,气焰嚣张。其中有倭寇用梯子抬着他们的头目,说明倭寇具有一定的组织。(图四)
二、民众抗倭。此为表现抗倭主题的核心部分,虽然没有处于画面的中心位置,却以人物众多、焦点突出而为人注目。分三部分,以弧形的城墙为界。城墙外是倭寇攻城,其中有被反击者的石块击中而死伤者,也有顶着门板、箱柜以防御石块而冒死强攻者。城墙上都是反击倭寇的男性民众,他们有的投掷石块,有的递送石块,有的瞭望。城墙内有的民众在递送石块,有的攀爬在梯子上往城墙上运送石块;而多数妇女则在下面砸石块,其中还有搬运、肩挑者。一派全民皆兵、众志成城的抗倭景象。(图五)
三、官兵护城。画面的右上部、城东门至北门的一段城墙上,守城的官兵或持刀、弓,或扛枪,还有头领骑马者,他们正走向西北边抗倭的民众。从地理位置上来看,倭寇来犯应该在东边,所以,官兵镇守东边城墙合乎情理。但整个地形是东低西高,因此,东边城墙高,而西边城墙低,从东边攻城显然不易。倭寇选择从西北方攻城,一方面躲过了官兵的防守,另一方面借助山势而选择了较矮的城墙。(图六)
四、城中祈祷。以衙门等官府建筑群为中心,表现闻听倭寇来犯的消息后,城中官员或官府中人的各种反应。其中有在县衙街对面的香案前跪拜祈祷者,还有正走出官府者。(图七)
五、奔走相告。画面下部的南城墙逶迤,民居杂处于街巷内。街巷内民众奔走相告,有的传递消息,有的准备上阵,还有的妇孺开门探望。(图八)
六、关公显圣。东城门内的儒学连接了太平的民间传说,《嘉庆太平县志》记载:“嘉靖三十一年壬子,倭寇从西南来,城几陷。忽儒学前樟木上见汉寿亭侯(关羽)像,旗帜林立,若统兵状。倭望见骇愕罗拜。邑人王庚乘之,用火攻,贼败走。”画面中的樟树上,关羽骑马被众士兵簇拥,面向发生战事的西北边。(图九)
这六个具有相对独立性的抗倭主题情节,通过内在的空间联系而结合到如同“地舆图”一样的画面中,天衣无缝,具有很强的整体感。这六个不同的情节内容都关系到主题的表现,所谓的“抗倭”既有直接的对抗和战斗,又有与之相关的其它内容,包括倭寇的抢掠,官员和民众的跪拜,以及“关公显圣”这样具有广泛民间影响的传说等,使得抗倭在一个更为宽阔的社会平面上展现了它的现实问题,从而表现了抗倭的重要意义。而在具体的表现中,有许多精彩的细节支撑,不仅丰富了画面的表现,而且也强化了所在单元情节内容的表现。
《太平抗倭图》的人物
《太平抗倭图》的艺术成就以人物的表现为代表,虽然它不像完全意义上的人物画那样能够表现出人物的神情以及思想活动,而是像山水画中的点景人物那样仅仅以简单的人物动态表现人物的基本动作和作为,比如山中的策杖行旅,一般人数较少,二三人加上书童而已。但是,《太平抗倭图》全画人物众多,据王伯敏先生统计有450人左右,这是极其少见的。而画面中这些众多的小小人物的表现以其多样性的变化,表现出了中国人物画传神写照的神采,也比较好地表现了抗倭的主题。它因其生动性成为明代人物画成就的一个特殊的个案,与《抗倭图卷》有异曲同工之妙。
《太平抗倭图》中的人物主要集中在“民众抗倭”这一部分,其中城墙上有近50人,他们在不同的位置发挥着不同的作用,有的拿着石块奋力砸向城外的倭寇,有的挥舞着棍棒、钉耙,有的挑着箩筐,有的两人抬着大石头,有的在城墙堞孔中张望敌情,还有的拿着棍棒来增援(图一○)。显然作者在对整个事件了解的基础上,把握了在城墙上抗倭的诸多细节,通过不同人物的动作及其相互关系,表现出了城墙上下、城墙内外与主题相关的不同景象。这之中除了表现出众多人物的动态之外,更重要的是表现出了彼此的关联,使得画面出现了生动的情景。城墙上抗倭主体人物的组合疏密得当,仅投掷石块这一动作就是姿态各异,可见作者具有较强的人物造型能力。而在具有相似性的动态表现中,挥刀执扇的倭寇,跪拜的官员或民众,传递信息的居民,都在一种有限的可能中尽可能地表现出了彼此的差异性,使得人物造型生动而有变化。
在具体的情节表现中,作者成组地表现人物之间的活动,使画面中的情节具有值得欣赏的诸多细节。如在“倭寇来犯”中,在山脚的一处民宅前,有的倭寇抬着抢来的酒坛,有的抬着抢来的家畜,而后面四个倭寇挟持一名露乳的妇女,都比较好地表现了与主题相关的倭寇带给民众的灾难(图一一)。而“民众抗倭”部分最为精彩,这之中人物的身份地位通过各自承担的工作而显现出来,普通民众在投掷石块的前沿阵地,书生在他们的身后搬运石块,而妇女则在城内墙根下敲打石块。他们之间的上下联系以三组人物来串联,一是书生与妇女在梯子的顶部直接传递装有石块的簸箕;二是书生向城墙下抛箩筐,下方一人作相接状;三是一女子正爬在梯子上向上攀登,准备接上面书生递下来的筐。通过这三组人物之间的联系,使得抗倭的战斗从城墙上延伸到城墙内。而城墙外倭寇的进攻又和城墙上反击的民众之间形成了一个敌我之间的呼应关系,倭寇中有陈尸山岗的,有被石块砸翻在地的,还有抱头鼠窜的,他们都与城墙上反击的太平民众有机地联系在一起。如此种种人物之间的呼应关系,表现出了画家在构思立意方面的匠心独运(图一二)。
因为该画是一个集大成的表现,所以,人物身份也在本画中得到了充分的表达。画面中的倭寇一手持刀一手执扇,而现实中的倭寇不可能一手持刀一手摇扇去抢掠,或者去攻城,这里只是以一种符号化的形象说明倭寇的身份。而在画面的具体表现中,对于倭寇的漫画化的处理手法也成为表现身份的一种方法。其他太平城中的官宦、官军、文士、市民等等也都以服饰的差异而表现出各自的身份(图一三)。
《太平抗倭图》的建筑
因为《太平抗倭图》是以民间绘制“地舆图”的方式来完成基本的构思立意,实现主题的表现,因此,它不可避免地要画出整个城区的主要和代表性的建筑,以显现它的地方性特征以及城区的基本规模,所以,建筑在整幅画中就占据了主要的篇幅,着墨最多,用力最深,不亚于人物的表现。
对于民间画工来说,这些建筑的绘制没有画谱的依据,又不像《嘉庆太平县志》中的“县治之图”所绘建筑那样大同小异,那么,所绘就必须参照现实的建筑,就必须有一个实地观察和记录(写生)的过程,只有这样才能把握建筑不同的内部结构和外部特征。如此来看,民间画工如何把立体的建筑呈现在平面之上,同时,还要在画面中表现立体的感觉;如何把看到的一座一座建筑串联成全城相互连通的整体建筑群,显然需要有相当的功力—即绘画的组织能力和建筑的表现能力。
建筑是构成地方文化生态的一个重要方面。在保卫家园的主题表现中,与家园直接相关的建筑,无疑会加深对于主题的表现。作者利用建筑来构成太平城区的整体布局,在建筑与街巷交织的城区结构中,建筑在其中的适合性的表现,是该画在表现建筑方面的一个重要的艺术特色。目前,借助于《嘉庆太平县志》可考的具有明确名称的建筑只有“儒学”,因为它和“关公退倭”以及樟树相联系。另外,根据《县志》的“县治之图”,可确定县衙在第四部分的中间位置,门外有牌坊,牌坊前设有一张燃着红烛的香案,众官员于此面对“关公显圣”的方向在案前跪拜,表示出他们与官府之间的关系。整个建筑背水朝南,前后四进,包括仪门、亲民堂、省观堂、郎官第,大致与“县治之图”相符。城内还有其他几处官府建筑,或有绘朱红太阳的照壁,或有朱红的门、柱,以区别于普通的百姓人家。
除官府建筑之外,以大小不等的院落构成街区而成为普通的居民区,这里虽然略感杂乱,但是街巷相通。受到街巷的限制,居民区的建筑并没有显示出鳞次栉比的秩序感,而是以其适合性的特点表现了太平建筑的地方特色。这些建筑家家户户不同,大都正门朝南,一部分街边的建筑则是门朝向街边。因为建筑的形制与规模和街巷有紧密的联系,所以,每户的院子都呈不规则的形状,不像人们通常见到的那种方形或长方形。或许这和绘画的表现有关,而实际并非如此。每户基本上都有院子,因此,除了正房和厢房之外,还有院门(图一四)。如果从绘画的艺术性方面来考察,目前画面上建筑规模的大小不等,形制的丰富多样,要远胜于那种规则性的表现,从而突出了城墙这一在整个画面中绕城一周且占显著位置的单体建筑,并有益于画面的主题表现。
需要指出的是,作者采用散点透视的方法来构造如此规模的城区确实有一定的难度,特别是对于民间画工来说,要解决画面中如此复杂的结构和透视关系相当不容易,因此,出现一些问题也就在所难免。在整个画面中,基本上都可以看到西山墙或西边的墙,而所有的处理大都不合透视关系。而关羽旗后面临街外围墙的圆形月亮门,以及画面上方山脚下民房西山墙上的圆窗,因作者不知如何画圆形门、窗的透视关系,出现了完全画反的现象。而东城墙上的涵洞,也看到了不该看到的另一面。如此等等,因为不合透视关系,或者无力画出立体的���觉,所以,有些建筑显现出歪或扭的情况。
虽然该画在建筑的表现方面有透视的问题,影响了它表现建筑的效果,可是,建筑与庭院之间丰富的结构关系却交代得比较清楚,成为我们今天研究明代太平以及江浙一带建筑的重要资料。在具体的表现中,画工注意到了建筑与街巷的结合,使得街巷在整体的布局上泾渭分明,而建筑由此表现出适合的建筑结构关系,也完全打破了“地舆图”的呆板格局。或许这正是画工的杰出才能所在。
《太平抗倭图》的民间属性
《太平抗倭图》的民间属性在王伯敏先生最初介绍该作品的时候就已经认定。然而在艺术上明确其具体特征,将有利用对该图的深入研究。
从明代绘画的整体风格来考察,与同类题材的《抗倭图卷》和《倭寇图卷》相比,《太平抗倭图》确实存在某些民间绘画的特性,因为它与这一时期所见的主流绘画样式完全不同,没有采用横卷的形式,而是以民间绘制“地舆图”的方式表现特定的时空关系。与这种民间特性相关的是,《太平抗倭图》在整体结构上表现出了它不同于历史上一般主题性绘画创作的特色,而与古代典籍或典籍记载中的“地舆图”有密切的关系。
该画也在一定程度上表现了与《县志》中所载的民间画工周世隆所作《关公退倭图》的关系,画面中的“关公显圣”部分(图一五),表现了民间传说中的关羽以及“关公退倭”的故事,使得原本应该以写实风格记录抗倭事件的表现方法,混杂了与写实风格不合的充满民间崇拜和想象的非写实因素,从而显现了它的民间性特质。
值得注意的是,全画在城门、建筑、旌旗等原本应该出现牌匾、对联等文字的部位,都没有具有标识性的文字,似乎可以说明画工在弱化其记事功能中的某些部分。这一点完全不同于《抗倭图卷》和《倭寇图卷》,也不同于同时期出现的一些表现重大历史事件的绘画作品。《抗倭图卷》和《倭寇图卷》不仅在旗帜上有年号,而且还有官军的番号,多方面突出了记事功能的表现。《太平抗倭图》只有一面旗帜上有一“关”字,以说明与当地民间传说中的“关公退倭”的关系。
另一方面,画工舍去城门和建筑牌匾上的文字,又不合“地舆图”的传统,使该画呈现出不能明确标识具体地域的“抗倭”概念,而关于“太平”的地理位置也不能完全从画面中认知,所以,所谓的“太平抗倭”中具体的“太平”这一地点的辨识,则是基于作品的流传才得以确认。按照“地舆图”的传统,以及此类记事性绘画的一般规律是通过特殊部位的文字书写提示,尤其是自汉代开始的“榜书”在明代还保留在历史画的基本方式中,它们可以明确一些具体的内容,然而,付之阙如只能作另外的解释和猜想:那就是画工不像文人画家那样懂得文字在绘画中的特殊作用,或者是因为画工缺少文字基础而失去利用文字的能力。
从具体的绘画能力方面来考察,建筑透视关系不准,树木表现单一,而画法稚拙,也都表现了民间特性的因素。
http://www.chnmuseum.cn/yj/xscg/xslw/201812/t20181224_36248.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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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장 稜杖
http://www.heritage.go.kr/heri/search/museumDetail.do?pageIndex=4&id=PS0100100100100010200000&s_query=&searchKeyWord=&pageNo=5_3_1_1&museumSearch=&o_level1=&n_level1=&c_level1=&m_leve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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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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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 大棍杖
http://www.heritage.go.kr/heri/search/museumDetail.do?pageIndex=4&id=PS0100100100100010100000&s_query=&searchKeyWord=&pageNo=5_3_1_1&museumSearch=&o_level1=&n_level1=&c_level1=&m_leve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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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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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 烙印
http://www.heritage.go.kr/heri/search/museumDetail.do?pageIndex=4&id=PS0100100100100010600000&s_query=&searchKeyWord=&pageNo=5_3_1_1&museumSearch=&o_level1=&n_level1=&c_level1=&m_leve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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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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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書樓船圖,국서누선도
조선의 국서를 싣고 일본의 강을 건너는 배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2017.10.31.)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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