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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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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에 대해서
최근 유튜브에서 필름 카메라 관련 영상을 몇 개 봤다. 사진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사진에서 공간감이 느껴진다는 부분이었다. 왜 그럴까.
내 예상이지만 아마도 한 광원에서 뻗어나간 빛이 일정하게 피사체들을 비추고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밝은 부분과 그림자 진 부분들이 그대로 필름에 담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장면을 디지털로 담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확실하진 않지만 요즘 디지털 카메라들은 자체적으로 이미지를 선명하고 깨��하게 담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이 들어간 것으로 안다. 특히 다이나믹 레인지를 구현하는데 인위적인 세팅값이 들어가는게 아닐까 한다.
사람의 뇌는 참 간사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물리적인 세상을 자연스럽게 감각으로 익히고 있다. 예를 들어 정지된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오르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뇌의 착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이 물리적인 감각을 필름 사진은 자극하는 것 같다. 특히 빛의 일관성. 자연스러운 빛의 하이라이트와 그림자. 셔터가 열리고 닫히는 짧은 순간, 그 물리적인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필름에 상을 맺혀 표면을 태운다. 있는 그대로의 순간이다. 이렇게 필름 위에 물리적으로 입혀진 빛의 정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뭔가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그 작은 사진 안에서 소위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사진이란 뭘까 라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사진이란 추억이자 기억이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진 또는 영상을 찍고 그 찰나를 보며 그 순간을 추억하는 일 뿐이다. 우리는 물리 공간에 있다. 우리의 감각으로 그곳을 인식하고 기억한다. 이미 말했듯 우리의 뇌는 간사하다. 인간의 뇌는 뛰어나지만 때론 쉽게 착각하고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특히 눈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풍경은 빛에 따라 그 색감과 느낌이 달라진다. 그 현장의 날씨, 그로인한 빛의 색감, 공기의 냄새, 그 공간을 가득 매운 소리들 등… 그 복합적인 감각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때로 잘 찍은 사진 한장을 보는 순간 그것은 마법처럼 내 기억을 자극하고 잊었던 감각들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 부분이 정말 마법같은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진에 담긴 색감과 빛의 느낌이 최대한 중립적으로 당시와 유사하게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기에 내게 있어서 요즘 유행하는 사진편집, 소위 감각적인 색감 편집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진이 디지털 세계로 넘어오면서 편집이 자유로워 졌고 그로인해 사람들은 하이라이트와 그림자의 억제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광원의 흐름을 방해하였고 과도한 채도표현과 채도 왜곡을 통해서 당시 현장이 가지고 있던 빛의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면 사진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한방의 임팩트가 있을 순 있겠지만 나처럼 그 현장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뭔가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 사진 편집에는 사람에 따라 목적과 의도가 담긴다고 생각한다. 높은 화��과 매끈하고 선명한 화질을 통해 뭔가 한방의 임팩트를 담고 싶다면 사진 편집의 방향은 이런 식으로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다지 이런 방향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내 방향만 맞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고민이자 개인의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요즘 새로운 카메라 구입을 고민하고 있다. 필름 카메라를 사면 좋을테지만 아직은 디지털 카메라를 사야할 것 같다.
눈여겨 보고 있는 포인트는 당연히 화이트밸런스이다. 당시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의 색감이 잘 측정되어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엔 필름 사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인데 광원표현이 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일체감 있는 광원표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디지털’ 치고는 그래도 최대한 공간감이 느껴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여러 작례들을 보며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인 것 같다. 나에게 딱맞는 카메라를 찾는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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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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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넉두리
요즘 새로 출시된 카메라가 많다. 니콘의 Zf, 하셀블라드의 907X & CFV 100C, 라이카의 SL3, 후지필름의 X100VI 등등...
그중 그나마 가격대가 저렴한 후지필름 X100VI를 살까 고민을 많이 했다가 결국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너무 과한 색감교정 때문. 후지 카메라를 사는 이유는 아마 필름 시뮬레이션 때문일텐데 이 기능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진의 색감이 사진을 촬영했던 그 현장 분위기와 많이 차이 나면 사진을 오래두고 보기 좀 껄끄러워진다.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감상하는건 좀 덜한데 특히 내가 찍은 사진, 내가 그 현장에 있어서 분위기를 기억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그날 느낀 빛, 온도, 색감 등 여러 정보가 기억에 남아 있���데 만약 그날 찍은 사진의 색감이 너무 많은 편집으로 틀어진다면 오래두고 보기 좀 그렇다.
사진은 좀 중립적이었으면 좋겠다. 최대한 그날 환경을 그대로 담았으면 한다. 특히 요즘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화이트밸런스이다. 그날 있었던 빛을 카메라로 측정하여 최대한 왜곡 없이 사진에 반영하는 것이다.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밝으면 밝은대로, 노을지면 노을진대로. 예전에 그레이카드를 사고 이를 통해서 커스텀화이트밸런스를 이용해 종종 사진을 찍는데 완전 만족하고 있다.
이런 중립적인 사진을 오랜시간 후 다시 보면 놀랍게도 그날의 현장감이 다시 기억나게 된다. 그날 빛이 어땠고 분위기가 어땠는지. 기억과 인지가 부드럽게 연결되는 순간이 좋다. 이게 요즘 내가 추구하는 사진찍기 인것 같다.
후지필름의 필름 시뮬레이션은 확실히 감상적이지만 위의 내 취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제일 눈에 밟히는 카메라는 하셀블라드이지만 너무 비싸서 나중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하셀블라드는 HNCS 라고 해서 하셀블라드-네츄럴-컬러-솔루션 이라는 기능이 있다. 유투브를 찾아보는데 특히 어려운 사진, 예를 들어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섞여 있는 현장을 찍는데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사진을 담아 주었다. 그 매력을 한번 느끼고 나니까 다른 카메라는 눈에 잘 안들어 오는듯.
그나마 제일 가능성 있는건 아마 니콘 카메라가 아닐까 싶다. 니콘 Zf는 이미 출시했고, 루머에 의하면 Z6 III 가 올해 출시될수도 있다고 하는데 여유가 되면 이 새 카메라와 50 mm 단렌즈 조합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하지만 가장 가성비 좋은 것은 아마 Z5를 사는 것일테니 좀더 지켜 봐야겠다.
사진을 찍는 목적에 따라 사진결과는 달라지겠지만, 내 목적은 경험의 아카이브이다. 내가 보고 느낀 그 현장을 저장해두는 것. 이를 위해서는 너무 과한 색감 보정이나 명암, 채도 조절은 기피하는게 좋은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셀블라드를 사게될 날이 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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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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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hfolge - Dietrich Bonhoeffer’ 생각 코멘터리 #1
값싼 은혜는 마치 우리에게 바겐세일로 던져진 상품같은 것이다. 툭 던져진 것이다. 은혜(Gnade)는 그보다는 더욱 깊게 우리 삶과 인생에 주어지고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현실은 그러지 못한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 죄를 참회하는 죄인의 모습을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죄를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은혜는 값싸진다. 은혜는 하나의 사건이고 삶에 관한 것이고 인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은혜가 죄인의 정당화가 아닌 죄의 정당화라면 이는 마치 은혜가 이론으로 작동하는 사변적인 것이 된다. 말로만 떠들고 행동은 없다. 즉 값싼 은혜는 죄를 참회한 인간에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상태를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쓰이는 일종의 도구, 장치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죄인의 상태를 깨닫고, 하지만 나의 죄인된 상태가 절망적일 때, 그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그 사랑을 통해 은혜를 입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 때에 비로소 십자가는 희망이 되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왜 은혜는 값싸질까.
이제 책 초반부이지만, 이 핵심적인 맥락이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현대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까? 죄로 인해 ‘나’는 죄인의 상태이다.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본인이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같이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세대에 자기 자신을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 정도나 될까. 요즘 사회 분위기를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롤 통해 전세계가 연결되어 있고 신속하게 소식이 퍼지는 시대이다. 실시간의 소식이 빠르고 많이 전달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즉흥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혹은 반대로 그 쏟아지는 소식들의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팩트체크하기 바쁘다.
즉 나보다는 남을 더 판단하기 바쁜 세상이다. 그러기만 해도 이미 충분히 바쁜 세상이다. 이런 중에 무슨 자아성찰인가.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내가 나를 알고 싶다는 의지가 피어날 수 있을까.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접근법이 아예 다른 문제이다. 본질이 다르다.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에서 은혜는 값싼 것일 수 있고 값지고 고귀한 것일 수 있게 된다.
무엇이 은혜인가. 은혜가 언급되고 이야기 되어져야 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어떠한 바탕에서 우리는 은헤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바른 장소에서 바른 맥락으로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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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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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
해당 영상 19:03초 부분.
내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마지막 오거가 비장의 부스터를 가동시키면서 "체커를" (첵카오) 이라고 했던 부분이 일부 오역이 있는 자막에서는 "체크아웃" 이라고 번역된 것.
나도 이 부분은 그냥, '와! 마지막 필살의 부스터!' 라는 생각만 하며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저 번역 부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이 장면에 굉장히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의 번역이 '체커를...' 이라고 번역한다면, 문맥상 오거는 레이서에게 '부스터를 당겨라 그리고 체커기를 거머 쥐어���.' 는 식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레이스 시작부터 한정되어 있던 부스터 횟수. 마지막 순간에 오거는 한계를 뛰어 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레이서에게 결정의 부스터를 선사한다.
과연 이것은 오거가 승리를 향한 레이서의 무한한 갈망에 대한 응답일까, 아니면 오거 자신도 사실 승리를 향한 갈망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질문은 아마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것이다. 미리 앞서 주인공 하야토와 아스라다가 보여준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그 서사의 긴 여정 마지막을 기존 하야토가 아닌 그의 라이벌 블리드 카가를 통해서 새로이 묘사하여 마무리 지은 것이 정말 인상 깊은 것 같다. 하야토가 보여준 고민과 여정이 제3자를 통해서 새로이 비춰지고 환기되어서 도리어 그 주제가 더욱 부각되는 효과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오거의 대사 "체커를..." 에서 그 모든 여정과 서사의 정점을 찍은 것이 아닐까 한다.
사이버 포뮬러의 마지막이 OVA SIN 으로 끝났기에 이 애니메이션은 영원히 내 마음에 속에 자리 잡은 애니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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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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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와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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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미국에서 UFO 관련하여 청문회가 열린 모양이다.
댓글에는 외계인에 대한 의견이 많이 오갔다. 이에 대해 뭔가 의문이 생겼다.
미확인 비행물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외계생물의 존재를 추측하는 것은 타당할까?
나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일단 미확인 비행물체의 정체부터 최대한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그것은 정말 외계로부터 온 것일까, 아니면 지구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만약 외계에서 온 것이라면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이 "그렇다면 정말 외계인은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외계인은 정말 존재할까? 내 생각은 이렇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발견된 것은 없다." 이다.
얼핏 들은 바로는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큰 몇몇 행성들을 추적하는 프로젝트가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지금 그 가능성이 있는 곳부터 추려서 제한적으로 탐구, 조사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주는 또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더 조사해야하는가?
아니 그 전에 우리는 지구탐사는 끝냈는가? 우리는 지구에 대해 전부 아는가?
뭔가 황당한 질문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도 떠오른다. 만약 UFO 를 보낸 것이 외계의 생명이 아닌 지구 내에 존재하는 다른 문명이 보냈을 가능성은…?
내가 지금 외계존재에 부정적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만약 훗날에 정말 극적으로 외계 문명에 대한 어떤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러면 외계존재를 긍정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 봐 맞지? 외계인은 정말 존재한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러면 나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 그것이 이제 발견되었다."
우리는 단지 '가능성'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태양계에 지구 같은 이런 장소와 존재한다면 우주의 다른 곳이라고 없을 이유는 없다.
다만 '가능성'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분야와 영역에 따라 다르지만, 너~무 확신을 가지고 가능성을 이야기는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만약 무언가가 발견되면, 그 발견을 토대로 다음 단계, 다음 논리, 다음 메커니즘으로 넘어가면 될 뿐이다.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의 발견 전과 후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최소한 이런 공통된 구분 속에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구분을 공유하지 않고 오가는 대화는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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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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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음
마음 먹는 것은 공짜인 줄 알았다.
긍정적인 생각, 미래에 대한 긍정, 편안한 명상, 목표를 향한 각오 등. 이런 행위는 나 자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행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가 한번은 소위 번아웃이라고 하는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는 이런 행위들도 최소한 마음이 받쳐져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깎아먹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눈치채지 못한 채 마음은 한���례 꺾여 버렸고 더 이상 좋은 생각들과 긍정적인 마음을 스스로 되뇔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런 표현이 있다. “마음 먹기 달렸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마음을 소중히 해라”
우리는 때로 무언가 해내기 위해,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그 일에 뛰어 든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면 과정은 비록 힘들었을 지라도 성취감을 통해 보상을 취하게 된다. 아니, 성취감이 보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요즘은, 뭐랄까. 스스로 마음을 먹는다기 보다는 내 마음에 허락을 구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 이러한 것이 필요하고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것을 해내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 같아. 좀 집중해서 해봐도 될까? 너무 길진 않을거야. 여기서 저기만큼만 하면 돼. 딱 집중해서 한번 해내면 될거야. 한번 해보자 응?
좀 웃기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음이 지쳐버리면 그 아무리 좋은 생각, 긍정, 명상, 번지르르한 각오가 전혀 속에 와닿지 않게 된다. 그저 피곤할 뿐이다. 마음에 오는 모든 신호가 피곤하다. 그 신호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꺾인 마음을 다잡고 회복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꺾이는 일은 소위 어떤 ‘큰 일’, ‘큰 사건’을 통해서 눈에 띄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면서 일상에서 해야하는 일들을 하다가 덜컥 찾아온다. 일상의 평범하고 당연한 일들을 하다가, 아니 정확하게 그 일들을 너무도 무심코 하다가 찾아오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않고, 그저 경쟁의 세상 속에서, 그 약간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지고, 그러나 동시에 돌봄과 휴식은 사라진 채, 그 무심 속에서 마음을 매일 꾸준하게 혹사시키다가 그렇게 찾아 온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 자신을 그렇게 특정 도식 안에 가둘 필요는 없다. 그것이 제아무리 ‘긍정’과 ‘목표’ 등의 소위 ‘멋지고’ ‘최선의’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다만 나에겐 휴식이 필요할 뿐이다. 휴식 속에는 긍정도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밝음과 어둠도 없으며 기쁨과 슬픔도 없다. 휴식 속에는 ‘나’라는 존재만 있을 뿐이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고요하게 느끼는 시간일 뿐이다.
지금의 ‘나’가 어떤 상태인지 그저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때 ‘나’의 상태는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때론 고요하고 때론 불안하며 때론 고양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뿐이다. “아 지금의 나는 이렇구나” 그것을 살펴줄 뿐이다.
마음 먹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마음을 먹기 전에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한다. 마음을 살피지 않고 마음 먹는 일만 반복하면 마음은 결국 무너져버린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이 첫 경험은 쓰렸고 참담했다. 그 경험으로부터 난 지금 회복되었을까? 아마 아닌 것 같다. 아마 ‘회복 중’ 상태인 것 같다.
요즘 내가 ���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복 중’인 것 같다. 문제를 발견했고 그간 내가 취한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고 이제는 그 문제를 고치는 단계이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아마 평생 함께 가져가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가 내게 주는 의미가 크다. 번아웃이라는 사건을 통해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의심해 보았다. 이를 통해서 ‘내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역시 아프고 병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존재를 깨달았으니 이제는 그 존재와 함께 살아갈 뿐이다. 소통하고 살펴주고 관심 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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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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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 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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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 박진영 편
킬링포트가 몇 개인가? 유재석도 그렇지만 박진영도 볼 때마다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그간 단지 인터넷의 밈에 불과했던 박진영의 비닐 바지와 2집 앨범명 딴따라의 맥락이 저와 같았다는 것이 참 신선했다.
맥락없이 보면 그저 우스갯거리였겠지만 무언가를 맥락 안에서 살펴보면 전혀 다른 것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 안에 어떤 생각과 정신으로 행동했는지가 그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그간의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 내면의 무언가를 밖으로 표현하는 소위 ‘아티스트’로서 ‘참 대단한 사건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자기 관리의 아이콘. 자주 내뱉는 말이 ‘아 죽겠다.’, ‘아 배고파.’였다고. 하기 싫은 것을 꾸준히 하는 것. 그것이 자기 관리이다. 이것에 백번 공감하는 유재석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박진영을 보면 생각이 참 꽉 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동 하나하나에 생각이 깃들여 있고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냥 혹은 괜히 하는 행동이 별로 없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반성하게 된다. 난 생각은 많은 편이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보��� 사람들이 다 그럴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잘 묶여 있을 때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생각은 나 자신을 강하고 내면을 건강하게 만든다. 삶은 대충 살아도 된다. 선만 넘지 않으면. 그 정도 가지고 옆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삶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언젠가 끝이 있고 그 순간 우리는 뒤를 돌아볼 것이다. 삶의 마지막이 된다고 해서 내 삶의 의미와 자아가 자동적으로 완성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집중해야한다. 내 삶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너무 하기 싫은 일이지만 매일 꾸준히 한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 조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은,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룬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올바르고 속이 꽉 찬 생각이 그 모습 그대로 행동으로 나올 때, 그것이 쌓이고 쌓여 형태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성공, 진정한 이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이 시작되었다. 긴 휴가도 끝나고 있다. 이제 다시 출근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수많은 수업내용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나도 내 삶에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 그것에 공허함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나는 내 일에 진심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심으로 임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그런 자세일 것이다. 
비록 ‘아 죽겠다’라는 말이 입에 떠나지 않을지언정, 이 하기 싫은 일을 악물고 계속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와 그 노력의 결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비록 어두컴컴한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심정일지라도 그 자리와 순간에 절망하지 않도록 터널 끝자락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빛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 의도를 저 명확하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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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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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의 순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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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투브에서 본 리뷰 영상. 아키라의 감독 작품으로 유명한 스팀보이의 한 장면이다. 이 할아버지도 과학자, 그의 아들도 과학자, 그의 손자도 과학자이다. 그런데 이 세 과학자들은 혈연이지만 그 성격이 모두 다르다. 할아버지는 위 대사에서 본 것처럼 과학은 “우주의 진리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아들은 말한다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진보에 기여해야만 한다. 힘이다. 그래 과학은 힘이다.” 그런 할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생각을 ‘오만함’이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작중에 나오는 주인공 손자 아이는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나아간다.
과학에 대한 할아버지의 생각은 지극히 순수하다. 어떤 다른 의도와 목적이 없다. 과학은 그저 이 우주에 놓여 있는 것 자체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만의 의도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이용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수단이다. 
할아버지의 저 대사는 참 흥미롭다. 과학은 우주의 진리를 해명하기 위한 것일 뿐. 그러면서 의문이 든다. 해명하고 나서는? 해명 이후에는 그 해명에 무슨 의미가 남는거지? 그냥 단지 ‘아~그렇구나’ 하고 끝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인류는 과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편의를 이루었을까? 최근 스마트폰의 등장까지 말이다. 우리 삶은 이런 기술적인 것에 이미 엄청난 의존을 하고 있을텐데. 이런 현실에서 단지 ‘과학은 우주의 진리를 해명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현실과 이상이 너무 부딪히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대사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목적의 순수성을 언제라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시작한 일이 언제라도 주변의 환경, 내 심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그맨 유재석 씨는 항상 말한다. 자신의 일은 웃음을 드리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자세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목적의 순수성에 항상 한결같기 때문에. 소위 위대한 일, 위대한 업적은 한결같이 이 순수성을 추구한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칭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순수하게 어떤 일을 추구할 때에만 ��기 자신은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 다른 불순한 요소들이 스며들어 어느덧 그 부차적인 것들이 주요한 것이 되는 순간 자기 자신은 억압되고 자유를 잃는다. 그 안에는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다. 늘 조바심내고 불안해지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어느 분야든지 자신이 속한 곳에서 늘 목적의 순수성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이것을 하는지. 그리고 가장 순수한 그 목적을 찾았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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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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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가 끝났다. 역대 가장 긴 장마로 뉴스는 온통 날씨와 그와 관련된 사고들로 채워졌다.
이 장마가 끝나고 뉴스는 다시 코로나에 집중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또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확진자가 백 여명 넘게 나오면서 비판이 일고 있다. 게다가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시기에 맞지 않게 대형 집회를 열어 시위를 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대형 집회를 금하고 있지만 막무가네다.
일부에서는 보수 진영에서 일부러 저런다고 한다. 문 대통령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그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서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 실패의 구도가 필요한데 전세계적으로도 한국이 선진적인 대응을 보이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것이라고 한다.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요즘 시대에는 분탕, 어그로가 넘쳐난다. 나 역시 이런 것에 익숙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처음 접하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게임 안이다. 온라인 게임을 하다보면 유저들 간 분탕, 모함, 어그로가 넘쳐난다. 처음에 도를 넘는 수준을 보고 경악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이것이 하나의 패턴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패턴이 파악되자 그렇게 놀라거나 경악할만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진리와 정의, 이성을 쫓아 사는 것은 정말 옛 이야기가 된 듯 싶다. 대신 요즘은 분탕과 어그로다.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이기도 하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패턴은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대로 접하게 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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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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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습득하는 유일한 방법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1msHbPWJ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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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언어를 배울 때 굳이 말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는 언어를 더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학습하기 위해서 말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내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등록했던 어학원은 이런 듣고 말하는 법을 중요시해 학생들에게 표현의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독일의 여타 다른 어학원은 보통의 언어교육 기관들이 그렇듯 문법교육과 읽기, 듣기, 연습문제 풀이를 반복하는 게 보통. 또는 시험대비 훈련이나)
나는 독일에 올 때 독일어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에서 그 흔한 독일어학원 A1, A2 과정도 수료하지 않았다. 그냥, 단지 학원에 가서 배우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 어학원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동료분들 중 독일어 기초를 준비하지 않고 그냥 오신 분은 단 한 분도 없었다. 그중에는 무려 B2 수준까지 독일어를 공부하신 분도 계셨다.
물론 어학원 A1 과정에서는 아주 기초가 되는 부분부터 상세히 다뤄주긴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고 느꼈다. 다른 동료분들은 어느 정도 듣고 바로 이해한 다음 넘어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내게는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못했다. 너무도 생소했고 조금 더 물리적으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더 들어보고 생각해보고 곱씹어보는 시간. 그러나 그 어학원 특성상 나는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의 질문을 듣고 내 생각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런 압박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 경험과 위 영상의 이론을 비교해보자면 내 초창기 독일어 수업은 아주 최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학원의 수업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언가 말을 해야만 했다. 자존감은 떨어지고 언어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상승했다. 어학원 특성상 그 교육의 끝엔 늘 시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열 곡절 끝에 C1 시험, DSH 시험 모두 통과하고 이제 어학 압박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다. 그러나 내 독일어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것이 나를 때로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영상은 내게 이런 점에서 꽤 유익했다. 초조할 필요 없다. 이해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살펴보자. 일상의 독일어, 뉴스의 독일어, 독일어로 된 여러 글. 천천히 듣고 읽으며 내가 이해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여유 있게 생각해보자. 그렇게 독일어로 된 논리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면 시키지 않아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압박도 느끼지 말자. 그저 듣고 이해할 뿐.
언어 자체를 무서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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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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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서거
2020년 7월 10일. 이미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던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다. 다소 충격적인 속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 시장은 미투 운동으로 인한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 몇 댓글을 읽어보니 성추행 혐의가 진짜가 아니었다면 굳이 자살했겠냐는 것. 박 시장 본인도 변호사 출신이기에 자신의 혐의를 반박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했을 터.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이 의심쩍어하고 있다. 그의 혐의는 진짜였던 것인지, 그리고 그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캘리그라피로 쓰인 유서에도 의문이 증폭된다. 캘리그라피란 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라는 뜻으로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을 뜻한다. 유서를 캘리그라피로 썼다? 이런 경우는 세상 접해본 적이 없기에 정말 당혹스럽다. 이게 정말 박 시장의 유서가 맞는 걸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많은 의문이 든다. 과연 진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성추행 혐의는 진짜일까? 진짜라면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 박원순 시장에 대한 미투 고발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까? 사회와 대중, 언론은 그의 죽음과 미투 고발 중에 과연 어디에 더 비중을 두게 될까? 많은 의문과 관심을 두고 이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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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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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파인만. 왜 자석은 서로 밀거나 당기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변.
“왜?”라는 질문 앞에 우리가 답변하기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설명.
답변은 언제나 항상 일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답변은 항상 질문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영상에서 질문자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물리학도는 아닌 것 같다. 물리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자석의 원리애 대해 질문했다. 왜 자석은 서로 밀어내거나 당기는지.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자력에 대한 진짜 원리를 설명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파인만 박사는 그저, ‘자석과 같은 이런 현상이 있다. 그걸 받아들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당신이 물리학에 조예가 깊다면 더 깊고 원초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현재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신에게 자석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려면 최소한 당신이 친숙한 개념들을 이용해서 이해시켜야 하겠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 스크린샷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난 당신에게 보다 더 친숙한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딜가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파인만 박사의 저 조언을 난 기억하고 싶다. 난 타인이 가진 소위 ‘친숙한 개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가진 한계이다.
진실 혹은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뭐 대수일까? 한 분야에 공부 많이하고 전문가가 됐다는 것이 뭐 대수일까? 물론 개인에게 또는 그 분야에 있어서 큰 의미가 남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늘 한계 마주하게 된다. 내가 가진 세계관과 저 사람이 가진 세계관이 같지 않다는 것. 저 사람에게 친숙한 개념이 무엇인지 난 알지 못한다는 것.
이 한계를 늘 인정하고 또 인지하고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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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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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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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의 질문이 흥미롭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고 모든 곳에 계시면서, “그런데 왜 소통하시는 방식이, 꿈 같은 걸 통해서냐는 거죠!”
그리고는 그는 ��차라리 이메일을 보내시면 더 좋을 것을!” 라며 장난섞인 어조로 말을 이어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방식이 보통 꿈이나 인사이트 같은 것으로 알고 사람들은 흔히 이것이 부정확하고 불분명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구별하기 힘들고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걸까?
꿈과 인사이트를 통한 깨달음과 이메일을 통한 분명한 이해 사이에는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가 있는걸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점은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는 그런 점에서 분명한 역할과 힘이 있다. 때로 주변의 물질적, 이론적, 논리적인 것들에 잠시 눈과 귀를 닫고 조용히 내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이것은 나 자신과 내 삶에 더 없이 중요하고 정확한 지표를 내려주기도 한다고 말이다.
아직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아이러니는 평생 우리 곁에 함께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얽혀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는 것 외에 우리 마음의 소리를 쫓아 살아가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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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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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쁜 사람
우리는 살면서 남들과 불화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 원하지만 때로 그것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오해로 시비가 붙기도 하고, 때로는 취객과 엮여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가끔은 예민해져 있는 사람과 대화중 말실수를 하여 크게 싸우기도 하고, 일로 엮여서 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내가 겪은 일화를 생각하다보면 정말로 내게 상처를 주는 진짜 나쁜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한 남자가 무뚝뚝하게 데스크를 지키고 있다. 그는 40-50대 즘 되어 보이는, 아직은 젊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평범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는 나를 잘 쳐다보지 않는다. 아침에 그를 만나면 최대한 내쪽에서 먼저 인사하려고 노력한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약간 밝은 톤으로. 그는 퉁명하게 대답한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내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때로는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때로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신문을 읽기도 한다.
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은 아침에 근무현장에 쓸 열쇠를 분배해주는 일이다. 우리는 총 6명의 동료가 있기 때문에 때마다, 업무마다 써야할 열쇠가 다르곤 하다.
한번은 동료들은 잠시 휴게소에 있고 나 혼자 열쇠를 받으러 간 일이 있다. 내가 열쇠를 받으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 데스크 위에 있�� 무전기를 손에 든다. 그리고는 휴게실에 대기중이던 내 동료에게 내게 주어야 할 열쇠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나에게 묻지 않는다. 나와 얘기해서 내가 받아야 할 열쇠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는다. 동료가 데스크로 다가와서 짧게 얘기한다. 동료 역시 황당하다. 나랑 직접 얘기하면 될 것을 왜 자기에게 묻냐는 것이다. 이 상식적인 행동을 그 남자는 하지 않는다.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의도적으로 나와 대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렇게 차가운 남자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상냥한 웃음을 자주 보여준다. 일하다가 우연히 목격하기로는 길 위에서 웬 여자와 즐거운 듯 대화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우연히 길을 묻는 여성에게는 세상 그렇게 친절할 수 없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상세히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이런 그의 모습에서 위선을 느낄 뿐이다.
세상에 정말 나쁜 사람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취하지도 않았고, 기분이 예민하지도 않으며, 나와 일적인 것으로 충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나를 어떻게 다룰지 스스로 결정했고 그 결정은 일관되지 않게 나를 다룰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의지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그렇게 다루는 것이야 말로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상대방이 어떻든 자신이 가진 신념과 자세로 타인들을 일관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것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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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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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서 언급된 것처럼 환경파괴는 느리지만, 사슬처럼 연계되어 이후에는 큰 파장을 일으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후변화의 문제를 보면서 ‘아 마치 이것은 쓰나미가 몰려오는 현상과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영상자료를 찾아보면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바닷물이 조용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빠져나간 바닷물들. 평상시와 그리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이 없는 해안가. 고요하고 적적한 그���의 분위기. 그러나 그 이후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쓰나미가 해안을 덮쳐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기후변화의 무서운 점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 느린 변화로 우리는 경각심을 놓치게 되지만 선을 넘어서는 순간 자연은 쓰나미 같은 파괴력으로 우리의 삶을 덮쳐올 것이다.
환경보호에 있어서 이 선을 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활동'을 하는 이상 결과적으로 지구의 자원을 깎아 먹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활동은 필히 환경을 파괴하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 있는 한 환경을 이롭게하고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지구의 자생능력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소위 마지노선이라고도 표현하는 이 환경 최후의 경계선은 인류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생명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이에 대한 더 큰 경각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경각심만 논하고 있는 우리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들 입장에서는 훨씬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참 비극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금 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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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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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불가능한 이유
유튜브에서 게임 중독 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영상을 보았다. 개판이 따로 없었다. 사실 그 영상에서 게임이 주제일 뿐이었지 우리나라에서 그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더라도 그 과정과 끝은 늘 개판이 되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왜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고 본다. 우리는 애당초 토론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토론하고 싶은 사람은 있던 걸까?
토론을 위해서는 늘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이고 둘째는 그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 자료는 토론자 양자 사이에 겹칠 수도 있고 갈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보겠다. 자료의 기반이 갈라지더라도 그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 납득이 된다면 상대를 설득할 수도 있겠다. 혹은 그 다루는 방식이 잘못된다면 도리어 비판받게 될 수도 있겠다.
똑같은 어느 자료, 예를 들어 어떤 통계, 인용, 증언, 논문, 과학적 고증 등의 자료를 토론의 양 진영이 함께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 자료들을 통해서 결국 본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그럴까? 서로 자료를 보는 방식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까 유튜브 영상에서 예로 들면, “게임을 하면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이 도파민은 마약을 할 때도 분비되는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게임은 우리 아이들을 망치는 위험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를 반박한 측은 이렇다. “도파민은 인간이 행복을 느낄 때 분비되는데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도파민은 분비된다. 게임을 통해 분비되는 양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며 마약을 통한 도파민 분비량과 비교할 게 못 된다.”라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만 봐도 게임 비판 측에서 내놓은 이 ‘도파민 자료'의 실효성은 이미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비판 측에서 과연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기 위해 준비한 저 자료를 쉽게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디 뒤에 가서는 또 저런 자료를 근거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가겠지. 이미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토론이 아닌 개난장판의 시작이다. 토론을 통해 합의된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는 긍정적인 부분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부터는 단지 유치한 진영 개판 싸움이 시작될 뿐이다. 내 편이나 네 편이냐.
하지만 만약 게임 비판 측이 그 의견을 수용하고 도파민 설은 잘못되었다고 수긍하는 쪽으로 토론이 진행된다면 어땠을까? 사실 게임중독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누구든지 이 ‘중독'의 문제에 있어서 경각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게임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게임을 옹호하려는 사람이나 모두 늘 긴장해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건강한 토론을 했다면 ‘진짜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차마 한 개인이 혹은 한 진영이 알지 못했던 중독 현상의 다양성, 입장의 다양성, 잠재된 위험의 실제성 등에 대해서 더 열린 관점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을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매우 실질적인 대안 방식, 합의 방안을 만들어 갈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자료를 다루는 방식,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에 통일된 입장이 필요하다. 공정하고 일관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더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이성으로 판가름 하는 세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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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nannte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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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고 무한한 우주를 관찰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속에 품고 있던 좁은 시각과 마음을 털어내곤 하는 것 같다. 무언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가 아무리 저런들, 우리는 지금 이곳 ‘여기’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우주라고 하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관찰 가능한 영역이 넓어졌다 한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이곳'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단지 ‘이곳'에서 저 무한한 우주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저곳'에서도 동시에 우주를 관찰할 수 있다면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감상이 좀 더 풍부해질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 그것은 불가능.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단지 ‘이곳'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존재임을 더욱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우주가 아무리 광활한들 지금 우리는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 마음 속에 우주를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넓은 마음, 다양함을 품는 여유 등. 마음 속 어딘가에 이 굉장하고 무궁한 거시적 관점을 품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미시적 이 세계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우리의 사회 그리고 이 지구. 우주가 아무리 굉장한들 우리가 관리하고 신경써야 할 것은 바로 이 땅, 이 나라, 이 사회, 이 마을, 우리의 이 지구이다.
김태희가 아무리 이쁜들 무슨 소용인가. 내 여친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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