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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ony Balerdi
- <Burnt(2015)> - 논커플링. 토니 발레디 편애글 "네가 사랑하는 것은 뭐니, 토니?" 토니는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야기를 놓쳤을 때 그가 보이는 버릇에는 반문이 빠져 있었다. 직업적 이유에서든 성장 배경에서 유래했든 토니 발레디의 의사소통의 많은 부분은 제스추어와 눈짓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테라피스트는, 그러므로, 열 아홉살 때부터 자신의 앞에 앉아 매주 일요일을 보낸 이 젊은 남자의 눈짓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질문을 반복하는 대신, 그녀는 잠자코 물만 마셨다. 결국 포크를 내려놓은 토니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정말로 사랑하는게 뭐냐는 거였단다, 토니." "글쎄요, 이런 시간들이요? 적당한 소음 속에서 편안하게 식사하고 볼에는 햇빛이 떨어지는?" 정말로, 봄이었다. 두 사람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옥외 테라스에 앉아 토니가 가져온 크로아상을 얇게 썬 차가운 햄과 버터에 볶은 브뤼셀 싹양배추를 곁들여 늦은 아침으로 먹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므로 토니는 지금의 이 순간을 조금 더 '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내담자와 상담자간의 대화가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두 사람의 한가한 일요일 오전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로스힐드는 발레디 가문의 도련님이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자신의 포지션을 수정한 모양이었고, 토니는 그녀가 예의 은근한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을 보고 넵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말했다. "제가 지금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토니, 넌 늘 비밀이 많은 고객이었고 지금도 그래." "제가 유별난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너에게 이 주제가 대화하기 곤란하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선생님과 이야기하면 늘 이렇게 긴장하는 때가 오게 되네요."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널 긴장시키는 것들을 달래고자 하는 거지." 토니는 인정한다는 듯 넵킨을 접어 테이블 한 켠에 고이 내려두었다. 로스힐드는 만 32세의 남자가 손을 모은채 말을 정리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을 고르고 생각에 잠겼지만 토니 발레디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고객들 중 가장 신중한 사람에 속했으므로 평균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의 생각에 잠긴 얼굴은 사색 보다는 일종의 참회를 준비하는 얼굴이라, 로스힐드는 반 정도 음식이 남아 있는 접시를 더 손대지 않고 한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 두었다. 멀리서 경적이 몇 번 울리고, 마침내 토니가 말했다. "저는 실연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 전에 내게 말해 주었었지." "저는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어떤 것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알아요.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그런 사실들과 같이 살아가는 게 편해졌죠." 토니의 말속의 모든 대명사들의 조심성에서 로스힐드는 자신의 내담자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기 어려워졌다. 평소보다 조금 창백한 얼굴일 뿐 별 다르지 않은 얼굴로 나타나 예의바르게 지난 상담일에 오지 못했던 것은 위세척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처럼 토니 발레디는 조심스럽고 차분할 수록 예상에서 빗나갔다. 그러므로 뒤에 이어지는 말에 로스힐드는 또 다시 내색하지 않고 놀라고 말았다. "저는 가질 수 없는 걸 좋아하는걸 좋아해요. " ** 새 시트를 깔아놓고 직원이 나가자 토니는 손수 시트 방향을 바로잡고 돌아온 세탁물들을 정리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회색과 흰색 티셔츠들만이 즐비한 속에서 푸른색 셔츠가 딱 한벌 누워 있었다. 사이즈를 적어 보내준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토니는 아담이 그 셔츠를 입고 조금 불안하게 시선처리를 하며 신선한 버섯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토요일 아침 방송의 화면까지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굳이 푸른 색을 고른 것은 - 토니는 생각을 이어나가지 않으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만 일어나." 짧은 복도를 걸어 나타난 아담은 노상 걸치고 다니는 가죽 재킷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토니는 그 위로 삐죽 올라온 푸른 이파리들을 보고 아담이 시장에 들렀다 왔으리라 짐작했다. 토니가 셔츠를 치운 자리에 아담이 걸터앉더니 콧소리를 냈다. "왜 서서 졸고 있어?" "부엌으로 바로 가지 않고 왜 여기로 와?" "더워서. 샤워 하고 갈거야." 그제야 토니는 아담의 관자놀이 언저리에 맺힌 땀을 발견했다. 밖이 그렇게 더웠던가? 확인이라도 하듯 토니는 커튼이 이미 젖혀진 창 밖을 내다보았다. 햇빛이 만연하고 반팔 차림의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재킷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두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방금 간 시트야. 옷은 다른데다 좀 걸어." "여긴 일단 너희 집이 아니잖아." "위생적인 면에서의 충고야." "감기 걸리지는 않을게." 이젠 티셔츠를 벗으면서 아담이 욕실 쪽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났다. 토니는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가죽재킷을 집어 벽의 옷걸이에 걸었다. 하도 오래 입어 목덜미 근처의 색이 바래고 옆구리 끝단에는 알수없는 자국이 나 있었다. 벗겨진 자국을 보며 아무래도 새 걸 사야 할텐데, 하고 토니가 생각하는 와중에 아담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너, 아버지하고는 얘기 했어?" "아니, 아버지는 아직 중환자실에 계셔." "영감쟁이가 그래도 너한테 칭찬 한가닥은 하고 죽어야 할텐데." 토니는 불현듯 두 사람이 함께 장뤽의 뒷마당에 서 있던 어느날 밤을 떠올렸다. 아담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결국 토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미국인이 그 곳에 도착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았던 날이었을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토니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아담은 그 후로도 거의 매일, 셀수도 없는 많은 이유로 화가 나 있었으므로 토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기억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토니는 특별히 그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아담의 주변에서 토니는 무형의 불길이 내내 머물러 있다가 왈칵 점화하는 것을 보며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그의 주변의 모든 것은 정리되고 안온했다. 아무도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만지거나 먹지 않았다. 예의와 정렬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아담은 처음으로 그가 접한 무질서였다. 아담이 다시 먼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1년째야. 너희 치료사가 너희 집에 말 안 해주면 진짜 찾아갈거야." "알고 있어." 뭐? 아담이 반문했으나 토니는 대답하지 않고 세탁물들을 정리해서 아담의 가방 안에 다시 잘 챙겨 넣어주었다. 핸드폰과 자질구레한 이런저런것들 사이로 빨간색 종이로 만든 꽃이 보였다. 토니는 그 서투른 솜씨를 조금 만져보다가 다시 가방안에 잘 넣어주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가운 차림의 아담이 나왔다. "진짜야. 너 어제 신문 안 봤어? 널 조련사라고 불러." "흠, 그래. 오려서 스크랩북에 넣어두었지. 릴리를 만났어?" "뭐?" "릴리. 헬렌 딸 말이야." "아, 데려올 사람이 없다고 해서, 데려와 줬어."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뒤통수가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니는 희미한 샴푸 냄새와 뜨거운 기운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천천히 흐려지는 느낌을 따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담은 토니가 정리해둔 옷 중 한벌을 꺼냈다가 순간 다시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토니는 눈썹만 들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담은 눈가를 찌푸렸다가 말했다. "리스가 나한테 예전에 오믈렛 만들어준 이야기 했지." "그래. 들었어." "꽃을 보낸건 너지?" "그래." "왜 그랬어?" "내 레스토랑의 직원이 벌인 난동이니까." "아니, 내 말은, 넌 내가 밉지도 않냐." 하하, 토니는 드물게도 소리내서 웃었다. 아담 존스가 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아담은 계속 토니에게 물었다. "너, 날 이용해서 성공할수 있어서 레스토랑에 데려왔잖아. 그럼 그 정도로만 해 둬. 내가 아침 만들어 줄까, 했던거 기억 하잖아?" "아, 아담 존스." 토니는 마치 그를 흉내내기라도 하듯 아담의 어깨를 조금 세게 쳤다. 가운이 푹신해서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토니는 두꺼운 천 아래로 아담의 어깨 윤곽만을 느낄 뿐이다. 지금 나가면 덥겠지, 재킷을 벗어야 할까. "넌 어서 나이가 들어야 돼. 한 쉰쯤, 예순쯤 되어서, 그러고 나면 이 이야기를 다시 하자." "무슨 소리야, 뚱딴지같이." "네 흉내를 내 본거야. 내일 보자." 토니는 더 아담을 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만 들렸다. 그는 손잡이에 걸린 방해하지 말란 팻말을 한번 더 확인해본 뒤 그 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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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for fun, my friends n I have an idea if Seb didn't name the fandom as a winter's children, what would be awesome like finenuts. If ur interested, plz v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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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honest as a young boy can be 2
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 스티브는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50이 채 되기 전에 꼭 어깨 위로는 팔이 둘러진다. 희미한 기름냄새와 함께 눈 앞으로는 사과가 들이밀어진다. "이제 와?" "너도?" "그래." 스티브는 버키의 손에서 사과를 받아들었다. 버키는 바톤터치를 하듯 스티브의 손에서 책을 받아들고 휘적거렸다. 사과는 윤이 나고 조금 미지근하다. 마치 오래 손으로 감싸들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스티브는 버키를 올려다보고, 그가 책의 표지를 살피는 모습에 말을 걸었다. "읽을래? 재미있던데." "글쎄... 난 영 재미를 못 붙이겠던데." "책에? 아니면 역사가?" "그냥 나는 영화가 더 좋다고 해두자." 스티브는 사과를 쪼개려다 그만두었다. 버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표지가 떨어지고 책장이 나달나달해진 책 몇권이 깔려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짧은 학교 생활 동안 스티브 만큼이나 순회 도서관 카드에 사서의 사인을 많이 받은 사람은 버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찍 학교를 떠난 뒤부터 그는 책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스티브는 버키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자, 이것 좀 쪼개 봐. 하루종일 글을 썼더니 손이 아파." "너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네." "늦었으니까." 버키는 책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사과를 쪼개려 끙끙거렸다. 스티브는 버키가 뒤에서 힘을 쓰는 소리를 들으면서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고 등을 켰다. 사과가 쪼개지는 소리가 나고 사과 향이 났다. 스티브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어서 들어와, 배고프다." "오늘 저녁은 뭔데?" "어제랑 똑같지." 스티브는 버키가 내미는 사과 반쪽을 자연스레 받아들고 다른 손으로는 벽장을 열어 스프 통조림을 꺼냈다. 버키는 사과를 씹으며 서랍을 열고 빵을 썰었다. 나무 식탁 위에 그릇 놓이는 소리 너머로 스티브가 말했다. "오늘 한가하면 저것 좀 읽어줘. 눈도 아파." "뭐? 너 고작 스프 한 그릇으로 날 어디까지 부려먹을 셈이야?" "사과 나눠줬잖아. 어서 일 해." "이 나쁜 놈아." 스티브는 가스 스토브에 불을 켜고 스프를 냄비에 부으며 괜히 대답하지 않았다. 버키가 빵 봉투를 다시 오므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서랍이 열렸다 닫히더니 식탁 의자가 바닥 위를 긁는 소리가 났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버키가 느른하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소리내지 않고 웃으면서 스프를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 "버키, 한가해?" 스티브는 반쯤 열린 문을 노크했고, 버키는 슬쩍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다른 손에는 종이 봉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버키는 수첩을 덮고 신문을 치워 스티브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으, 춥더라, 스티브는 침대 위에 깔린 담요 아래로 오른손을 밀어넣었다. 버키가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눈은 좀 그쳤어?" "아니, 내일까지는 찔끔찔끔 내릴 거래." "아, 그래." "왜?" "이 날씨에 용케 나가서 이런걸 사오는구나." 버키는 사과를 꺼내 흔들었다. 스티브는 못 들은 척 사과를 받아들더니 반을 쪼개 버키에게 내밀고 남은 반쪽을 깨물었다. 방 안에서 울리는 와삭거리는 소리가 군침이 돌게 만들어 버키는 따라하듯 사과를 먹었다. 스티브가 우물거리다 말고 눈짓으로 신문을 가리켰다. "내 사진 없을텐데."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너 세럼 맞고 나더니 평소보다 잘난척이 더 심해졌어." "- 라고 왕년의 수배자가 말했습니다." "하, 누구는 수배자가 아니고?"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버키는 킥킥거리면서 헤드에 등을 기댔다. 빈 봉투가 담요가 당겨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티브는 사과를 문 채로 봉투를 집더니 사과씨를 안에 털어넣었다. 버키는 사과를 마저 삼키고 물었다. "무슨 책이야?" "샘이 추천해줬는데 예전에 읽다 말았거든. 이제 좀 읽어보려고." 노인과 바다, 스티브가 책을 들어올리자 버키는 소리내서 제목을 읽더니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바다 위에 흉터처럼 떠 있는 조각배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었고, 버키는 스티브를 따라하듯 사과씨를 봉투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데?" "아직은 몰라. 일단 고기를 못 잡는 노인이 나오는 것 까진 봤어." "어디 보자." 스티브는 버키에게 책을 내밀고 봉투를 접어 침대 아래로 내려둔 다음 그의 다리 곁에 모로 누웠다. 버키는 용케 한 손으로 책을 펴서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는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스티브는 읽다 만 소설의 노인처럼 해변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 바다에서는 비린내가 났었지, 그의 생각이 오래 전 군수공장 뒷마당 어드메를 헤매고 있는 사이 버키가 짧게 웃음 소리를 냈다. "야, 디마지오가 나와." "그래? 왜?" "읽어줘?" 버키는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느릿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위대한 디마지오를 고기잡이에 한번 데려가고 싶었는데, 노인이 말했다, 그 선수의 아버지도 어부였다고 하더구나....스티브는 버키가 읽는 것을 멈추자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키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얼굴에 받는 채로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가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저도 모르게 조르듯 버키를 불렀다. "버키, 버키." "...음?" "계속 읽어줘." 푸른 잿빛을 띄는 눈동자가 다시 스티브에게로 내려왔다가 책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이제 팔로 몸을 괴고 누워 그가 노인이 꾸는 황금빛 바닷가와 갈색 산에 대한 꿈에 대한 구절을 읽는 것을 들었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묵독으로 바뀌고 스티브는 버키의 무릎과 그 위에 삐죽 솟아 오른 책표지를 바라보다 이제 자신이 신문을 끌어다 읽기 시작했다. 그는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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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honest as a young boy can be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눈을 감는다. 잠이 들기 전에 하는 행동들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스티브에게는 그랬으므로, 버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담요를 어깨 위에 두르고 베개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엎드려 있는 것을 밤에 발견 했을 때 스티브는 당황해서 이유를 물었다. 버키는 너무도 평온하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자. 스티브는 다시 말했다.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며 어둠이 일렁거리고, 스티브는 버키가 베개에 팔꿈치를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천천히 알아보았다.
"등을 대고 누워야 몸이 쉴 것 아니야." "지금까지 문제 없었어, 그럼 괜찮은 거지."
스티브는 그만 할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몸이 불편하다, 척추 건강에 좋지 않다, 피가 쏠린다 등의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어둠 속의 버키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으며, 스티브는 아자노에서 버키를 발견한 이후 그런 순간에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스티브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그만 수굿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잠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에 얼굴을 마주할 때 마다 스티브는 어두운 방 안에서 담요 뭉치마냥 구겨져서 잠이 든 버키의 등과 어깨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스티브가 똑바로 누워있는 버키를 보며 생경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의로 누운 것은 전혀 아니다. 버키가 동면에 들어간 지는 1년이 조금 넘은 때였고, 와칸다의 모종의 사태로 - 트찰라는 자세한 설명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 버키의 동면 상태를 유지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냉동탱크에서 생명 유지 장치만 켠 채로 버키는 대륙을 가로질러 옮겨졌고 스티브는 독일에서 버키를 만나게 되었다. 흐리고 추운 공기를 가로질러 걷는 내내 스티브는 조급함에 잠겨 있었는데, 정작 침대에 누워 의식을 잃고 있는 버키와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차분해지고 말았다. 함께 동행했던 의료진들은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고, 한 명만이 남아 스티��를 기다렸다가 버키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심박수와 혈압, 약물의 수치 같은 것들. 어쨌거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만 제외한다면 버키는 건강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동면을 오래 유지해주지 못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트찰라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도 많았고, 묻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스티브는 가지런히 내려 감겨 있는 버키의 눈꺼풀을 바라 보며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가 깨어나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마음 속의 또 다른 스티브가 경고했지만 그는 듣고 싶지 않아 자꾸만 생각의 갈래를 틀었다. 주로 여기서 멀고 상관없는 것들로 생각이 자꾸만 달려가던 중에,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바닥에 향해 있던 시선을 버키에게로 돌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왜?" "와칸다에서 널 더 이상 재우기 어렵다고 했어." "왜?"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고 했어."
버키는 스티브의 설명에 의외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버키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이불을 만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 손을 쓰고 싶었는지 왼쪽 어깨도 조금 움직이다가 문득 멈추었다. 버키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탁했다.
"여기는 어디지?" "독일." "베를린 같네." "그 때보다는 상황이 낫잖아." "넌 지금도 도망자잖아."
스티브는 실소를 지으며 침대에 어깨를 기댔다. 버키는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스티브를 보���가, 불편했는지 몸을 틀어 모로 누웠다. 스티브는 문득 강한 데자뷰를 느꼈다. 심지어 추위와 희미하게 늘 감돌던 목 부근의 통증, 얼어붙은 발이 버키의 품에 닿으며 녹을 때의 감각까지 한꺼번에 찾아왔으므로 그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아픈, 아픈 곳은 없어?" "괜찮아." "뭘 하고 싶어?"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아직 잠도 덜 깬 것 같고." "커피라도 마시겠어?"
스티브는 침대 가에서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창에 쳐진 커튼을 조금 젖혀 보았다. 그 사이 눈이 한창이었다. 함박눈은 시야에 잔상을 남기며 흘러 바닥에 쌓였다. 그가 잠시 창가에 서 있는 사이 뒤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버키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소리였다. 팔 하나로는 균형을 잡기 어려웠으므로, 그는 반쯤 복근과 허리 근육으로만 몸을 일으키다시피 해야 했다. 스티브는 여전히 커튼을 잡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숨을 내쉰 버키가 스티브를 보더니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너 왜 그래?" "뭐가?" "왜 그런 얼굴이야?"
스티브는 여전히 데자뷰 속에서 멍하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네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I feel like you will be gone. 혀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그는 자신의 대답을 알아차렸고, 황급히 그 대답을 어떻게든 주워담아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버키는 고개를 저어 그의 시도를 말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으므로 스티브는 역시나 현실감을 또 잃어버리고 말았다.
"넌 덩치가 커도 달라지는 게 없구나." "뇌 개조를 받은 게 아니라니까." "하, 그래. 이리 와."
스티브는 버키가 가리키는 대로 다시 침대로 돌아왔고, 버키의 옆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버키는 스티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턱짓을 했다.
"좀더 가까이 와. 내가 기댈 수 있게." "뭐? 뭘 하려고 그래?" "잠 좀 자게, 어깨나 좀 대 봐. 졸린 데 누워 있으니까 영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버키는 스티브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스티브는 등을 어정쩡하게 굳힌 채로 잠시 앉아 있었지만 , 버키의 숨소리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자 팔을 버키의 어깨로 둘러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채로 함께 헤드에 등을 기댔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가로등이 켜졌다. 스티브는 버키의 머리에 볼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이 그칠 때 까지는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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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in a dream
에그시는 파리의 어느 호텔 스위트 거실에 있었다. 얻어맞은 곳이 좀 아프긴 했지만 견딜만 했으며, 이제 늘어진 시체의 다리 아래에 깔린 부서진 랩탑에서 하드디스크를 수거한 참이었다. 다행히 새어나갈 뻔 한 설계도는 그 직전에 무사히 에그시의 손 안에 돌아왔다. 멀린이 미션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때 다국적 군수사업체의 분열에 대해서 한참 설명을 해줬던것 같지만 에그시는 세세한것 까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정치는 스파이가 할일이 아니잖아. 에그시는 허리의 권총집을 갈무리하고 하드디스크를 속주머니에 넣은 다음에 블레이저 단추를 다시 잠궜다. 그리고 피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에그시는 물론이고 멀린도 몰랐던 점은,랩탑이 외부 충격으로 파괴되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폭발하도록 장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그시에게는 불행하게도 호텔방 안에는 불과 열에 노출되면 순식간에 타오를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에그시가 안경 다리를 건드려 멀린에게 보고하려는 순간 랩탑은 폭발했다. 거실과 미니바 사이를 구분하던 유리벽이 열기와 함께 터져나오면서 에그시를 덮쳤다. 에그시는 미처 어찌해볼 틈도 없이 두꺼운 유리조각들과 함께 벽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불을 끄기 위에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뭔지 모를 불길이 너무 거셌다. 에그시는 숨이 막히고 머리가 멍한채 바닥에 누워서 열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안경에서는 멀린이 뭐라고 한참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피가 흐르는지 머리 아래가 축축해지고 시야가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데, 그는 지난번이랑 달리 유언도 못 남기고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해리나 아버지가 그랬듯이. 에그시는 좀 억울했지만 금방 체념하고 말았다. 더 억울해 할수도 없었던 것이, 그 이후 그의 의식은 그대로 꺼져 버렸기 때문이다.
*
"데니스 오빠, 일어나."
에그시는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에밀리'가 뾰로통한 얼굴로 에그시의 볼을 꾹 찌르더니 일어나라고 재촉을 했다. 에그시는 잘못 자는 바람에 뻐근해진 목과 어깨 때문에 끙끙거리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자기 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지 더 보이스 재방송 소리가 들렸는데, 에그시는 뒤통수를 긁고 끌려올라간 옷을 추켜내렸다.
"엄마는?" "아줌마 나갔어. 전화 받아봐."
에그시는 비척비척 부엌 벽에 걸린 전화를 받으러 걸어갔다. 꿈이 어수선하고 뭔가 자기가 잊어버린것 같은 기분인데 그게 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금 자고 일어나서 목이 마르고 머리가 멍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에그시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스보, 머리는 좀 괜찮아? "예, 뭐." - 뇌진탕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이라도 병원에 검사 받아봐. 알았지? "그것때문에 전화한 거예요?" - 아니, 음.... 비번일때 전화해서 미안한데, 알이 급하게 빠질 일이 생겼어. 애가 아프대. "어... 그래서 내가 가야 돼요?" - 그래, 와서 대신 근무좀 해줘. 나중에 교대 해준대. "알았어요.애는 많이 아파요?" - 열이 나서 병원에 갔다는데, 이따가 전화해 준다더군.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에그시는 전화를 끊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다음 에밀리가 먹다가 놔둔 토스트를 마저 먹었다. 차까지 한잔 마시고 나니까 정신이 좀 들었고, 그는 겉옷을 챙기면서 거실을 향해 소리쳤다.
"데이지, 문단속 잘 하고 있어." "이상한 이름 부르지 마-" "알았어, 문단속 잘 하고 있어."
에그시는 문을 닫고 나와서 소방서로 걸어가면서 점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언제 데이지가 저렇게 컸지, 그런데 데이지가 아니라 에밀리라니 이름을 바꿨나, 근데 소방서라니, 여긴 우리 동네도 아닌것 같은데, 영국이긴 한가.... 하는 생각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주한 머리와 달리 몸은 익숙하게 공용주택단지를 빠져나와서 길을 건너고 교차로를 지나서 소방서로 향했는데, 출동 준비중인지 마당은 온통 뛰어다니는 소방관들로 붐볐다. 에그시 역시 서둘러 사물함을 찾아가서 척척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내려와서 산소통을 넘겨받고 차에 올라탔다. 주택가에 화재 발생, 근처에 카펫 공장이 있어서 자칫하면 대형사고가 될 수 있으니 정신 단단히 차려. '케브'가 경고를 했다. 에그시는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난 저 사람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는데, 또 아는 것 같아. 기화가 어쩌고 발화점이 어쩌고라니 이건 뭐지? 꿈을 꾸나? 화재 현장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는 순간 에그시의 시야에는 불길이 창문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오는게 보였다. 그 순간 그의 시야는 하얗게 변했다. 호텔방은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으며, 자신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관자놀이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있었으며, 고개를 돌리자 도끼를 든 지기가 문으로 뛰어가는게 보였다. 그 때 누군가 그의 등을 세게 쳤다. 고개를 들자 롭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안에 못 들어가겠으면 주변 사람들 통제하고 있어." "어... 내가 많이 다쳤었어요?" "뒤통수를 세게 박긴 했지. 영 기억 안 나나 보네, 아스보. 네 목뼈가 부러진건 아닌가 했다고."
롭은 그 말을 뒤로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에그시는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기를 데니스, 혹은 아스보라고 부르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꿈을 꾸고 있든지, 아니면 불길에 휩싸인 호텔방과 지금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났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에그시는 일단 아까 롭이 말한대로 불을 구경하려고, 혹은 안에 가족을 둔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하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굴리기는 커녕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에그시는 아는게 전혀 없었고 현장은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다른 대원들이 데려온 환자에게 물을 갖다주러 부산하게 움직이던 차에 에그시는 인파 속에서 문득 해리를 본 것 같았다. 물론 그가 기억하는 해리와는 달랐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가 아니라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잘 맞지 않는 코듀로이 재킷을 입고 안경은 안 쓴 해리 하트. 물병을 쥔 채로 에그시는 허리를 세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환영처럼 스쳐 지나간 낯익은 얼굴은 영 보이지 않았다.
*
에그시는 퇴근까지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다른 대원들은 에그시가 '다쳤고' 그래서 말이 없다고 봐 주는 것 같았다. 에그시는 아니면 원래 자기가 좀 아웃사이더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었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그시는 오랜 생각 끝에 어쩌면 킹스맨이 전복 위기에라도 놓이는 바람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요원들이 기억을 수정받고 뿔뿔히 흩어져 잠복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 킹스맨은 기본적으로 스파이 조직이었으므로 그럴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니스 세버스-에그시는 그걸 자기 신분증을 보고 알았다-라는 이름의 소방수로 위장하고 살고 있었다가 이제 기억이 났는지도 모른다. 죽지는 않았구나, 에그시는 안심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킹스맨으로 돌아갈수도 있고 엄마랑 데이지를 만날수도 있지. 그는 그런 생각을 했어. 하지만 그 가설은 당장 샤워하러 들어가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단 있어야 할 흉터같은게 전혀 없었다. 성형수술이라도 받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씻는 내내 에그시는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길에 본 대원 혈액형 리스트에 있는 건 자기 자신이 기억하는 혈액형이 아니었으므로 에그시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좀 더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에그시는 그와 같이 사는 엄마와 진짜 동생이 아니지만 동생처럼 같이 사는 에밀리, 그리고 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방을 뒤져보면서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어릴때의 사진과 신체검사 기록으로 미루어 볼때 분명히 이 몸은 데니스 세버스였다. 하지만 에그시는 한편으로 이게 킹스맨이 주도면밀하게 조작해서 만들어놓은 기록일 뿐이고 자신이 흉터를 찾지 못하는 것은 사실 수술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게 맞는 생각이고 데니스 세버스라는 걸 믿는것 자체가 바보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주의를 아무리 기울여봐도 자기를 감시하거나 수상한 낌새같은건 전혀 눈치챌수가 없었다. 에그시는 데니스 세버스로 살아가기 시작했지만, 시험삼아 비번인 날이 오면 슬쩍 자기가 알고 있는 곳으로 가 보곤 했다. 처음부터 살던 동네로 가면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처음에는 유명한 곳부터 가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빅밴이라거나 대영 박물관처럼 사람들이 많아서 함부로 공격당하기 어려운 곳들을 골랐다. 그렇게 슬슬 움직이는 범위를 넓혀가던 차에, 에그시는 마침내 블랙 프린스에 가보기로 했다. 마음같아서는 섀빌로의 킹스맨으로 가보고 싶었지만, 거기 갔다가 총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에그시는 기억하는대로 튜브를 타고 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에는 블랙 프린스가 없었고, 다른 이름의 펍이 서 있었다. 기웃기웃 들여다보니 바의 주인도 달랐고, 내친김에 어슬렁거리면서 둘러봤더니 주변 건물들도 전혀 달랐다. 심지어 그가 살던 주택단지조차 없었다. 에그시는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아무리 킹스맨이 비밀 스파이 집단이라지만 이렇게 거리와 건물 전체를 바꿀수 있지는 않을거야. 그럼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에그시는 하얗게 얼굴이 질린채로 거리에 서 있다가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다. 진짜 '나'는 내가 아닌가? 그날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너 괜찮냐, 아스보?" "어, 어...괜찮아요." "진짜 병원 안 가봐도 괜찮겠어?"
지기가 소파에 멍하게 앉아있는 에그시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자, 하고 젤리 봉지를 던지고 갔다. 에그시는 고맙다고 웃었다. 데니스 세버스인 자신은 붙임성이 없었는지 에그시가 그렇게 행동할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처음에는 희안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머리를 다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으나 처음보다는 훨씬 잘 지내게 되었으므로 에그시는 신경쓰지 않았다. 에그시가 젤리를 먹으면서 다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리틀 알이 한숨을 쉬면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요?" "왠 아저씨가 벌써 세번째나 신고를 했는데 전부 허위신고야." "허위신고는 아니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환풍기 근처에서 주전자를 태우면서 신고를 해?“ “지난번에 큰 화재가 날뻔 했던 공장 근처에서 자꾸 신고가 들어오는데 저런 식으로 사소한 것들이라 피곤하다니까. 한번만 더 저러면 경찰에 넘겨야 할지도 몰라.”
롭의 말을 들으며 에그시는 그 때 문득 해리인지, 혹은 해리를 닮았을지 모를 그 사람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다음 비번인 날 다시 그 동네로 나가보았다. 전소까진 아니었지만 크게 탄 주택은 한창 보수공사중이었고, 공장 앞에는 큰 트럭들이 몇 대 서서 물건을 나르느라 바빴는데 에그시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질이 별로 안 좋아보이는 에그시 또래의 남자나 여자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아니면 어린 애들이나 할머니들이 보였을 뿐 에그시가 찾는 사람은 통 보이지 않았다. 에그시는 뒷머리를 긁다가 담배를 물고 뒷골목쪽에 몰려 서 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이봐, 불 좀 빌릴 수 있을까?" "뭐야?" "워, 진정해. 내가 라이터를 잃어버려서 그래."
개중 하나가 라이터를 켜서 대줬고, 에그시는 인사를 하고 잡담을 던져가면서 그 틈에 섞여들었다. 천천히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하자 에그시는 얼마전에 여기에 불을 끄러 왔었다는 말은 쏙 빼고,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는 남자랑 사업관계가 있는데 자기가 그 심부름을 하러 왔다고 말했다. 에그시는 괜히 비밀스러운 걸 이야기하듯 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이 일이 꼭 마피아 관련이라고 착각이라고 하는 것 같았고, 자연스레 목소리가 어두워지고 눈이 빛났다. 에그시는 자기가 흘긋 본 그 사람의 행색을 설명하면서 혹시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이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하고 한참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있던 남자를 제대로 떠올렸다.
"혹시 찻주전자 스티브 말이야?" "찻주전자?" "그래,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차 한잔 해도 되냐고 집에 무작정 들어가려고 하고, 오죽하면 외판원도 그 집에는 안가. 한번 붙잡히면 한두 시간 앉아서 이야기하는 걸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에그시는 그 스티브라는 사람이 다른 아파트 2층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는 해리가 죽었다는걸 알고 있었다. 총을 맞는 광경은 필요 이상으로 생생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기 자신도 온전히 스스로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어쩌면 해리를 닮은 그 사람도 진짜 해리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실은 에그시는 자기 눈에 익은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에그시는 적당히 그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알아낸 주소로 찾아갔다. 계단을 올라가자 검은색으로 칠한 현관문이 보였다. 에그시는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지만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는데, 집을 비운것 같았다. 에그시는 벽에 기대서서 그를 기다렸고, 더 오래 기다려도 안 오면 아무래도 다시 찾아올 요량이었다. 연락처라도 남겨놓을 메모지라도 갖고 올걸 그랬다고 에그시가 좀 후회를 하고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어둑한 계단목으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좀 어색해보이지만 자기 딴에는 잘 차려입으려고 애쓴 옷차림이었고, 해리 하트일때와 달리 표정이 차갑고 엄하지 않았던데다 살이 좀 오른것 같았지만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만큼 해리와 닮은 사람이었다. 에그시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고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자세를 고쳤다. 스티브는 계단을 올라올때만 해도 에그시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것 같았다. 하지만 곧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변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고 걸음이 멈췄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건 에그시였다.
"해리...? 해리 맞아요?" ".....오 세상에."
그는 대답 대신 신음처럼 중얼거리면서 손에 든 비닐 봉투를 떨어트렸다. 눈 앞에 있는걸 믿을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에그시는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스티브-해리는 가까이 다가온 에그시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마치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손길은 조심스러웠다가 놓칠수 없다는 것처럼 점점 힘이 들어갔다. 에그시는 인상을 찡그렸다.
"해리, 아파요." "그게 상상이 아니었단 말이지? 진짜로 그렇단 말이지?" "해리, 진정하고 날 좀 안에 들여보내줘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그래, 그래...들어가야지. 들어가자. 가서 이야기하자."
에그시는 그가 떨어트린 비닐봉투를 들고 열리는 문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엉망 진창이었다. 찢어진 신문지와 오려낸 잡지에다 텔레비전이 켜져서 내내 돌아가고 있었으며 벽에는 온통 실로 가득히 연결해 놓은 사진들이 붙어 있었는데 에그시는 벽 한켠에 검은색 장우산이 기대져 있는걸 발견했다. 에그시는 스티브가 문을 잠그는 사이 반사적으로 그 장우산을 집어들어 펴 보았지만 평범한 우산이었다. 에그시는 실망했고, 우산을 접다가 해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에그시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해리가 맞다고 확신했다. 아마 블랙 프린스가 없다는 걸 발견했을 때의 자기 얼굴 사진을 찍어놨다면 지금의 해리와 얼굴이 똑같았을 테니까. 해리는 에그시가 든 우산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스위치도 없더구나." "킹스맨 우산을 아무데서나 팔겠어요?" "저건 내가 쓰고 있던 우산이야. 길에 쓰러져 있다가 비 때문에 깨어났지."
해리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에그시에게 손짓을 해서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두 사람은 좁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고, 에그시는 문득 해리의 손을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깨어날 때 혼자가 아니었고, 진짜는 아니지만 가족들과 같이 있었지만, 해리는 이 좁은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에그시는 조심스럽게 해리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살짝 다독였다가 손을 치웠다. 해리는 손등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그 교회.... 발렌타인 말이다." "알아요, 해리. 그건 다 해결했어요. 사람들이 좀 죽긴 했지만, 발렌타인은 제가 죽였거든요." "그게 망상이 아니란 말이지? 칩이며, 킹스맨이며, 하트 가 말이다." "하트 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고 당신이 죽어서요. 그건 모르겠지만 킹스맨은 진짜인것 같아요." "같아요?" "얼마전까진 저도 그게 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여기 있잖아요. 좀 달라보이긴 해도....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해리는 에그시를 바라보더니 네 얼굴이 좀 달라졌구나, 하고 말했다. 그건 에그시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해리는 자기 이름이 스티브 피니간인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다. 신분증도 그렇고, 호주머니에는 아파트 키가 있었다고. 경찰이 날 여기로 데려다줬지, 해리는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는 모든 루트를 동원해봤지만 킹스맨으로 돌아갈수 없었어." "해리, 그것보다요, 당신은 죽었어요. 내가 봤는걸요. 나 혼자 당신 장례식에 참석한게 아니예요. 다 갔다구요." "내 시체를 봤니?" "Fuck, 당연하죠. 머리에 난 저놈의 구멍 메꾸고 화장하느라 장의사가 고생 좀 했다고 멀린이 그랬어요. 농담 정말 못하지 않아요?" "잭은 유머감각이 없었지."
해리는 놀랍게도 피식 웃었다. 에그시는 거기서 웃음이 나오냐고 말할뻔 했다가 입가를 가렸다. 뭔가 생각이 날것 같았고, 그것은 너무 말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해리는 에그시가 말을 할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있잖아요, 해리. 사실은 나도 죽은것 같아요. 저 불타는 호텔방에서 머리가 깨져서 누워 있었거든요......" "양다리라도 호되게 걸쳤니?" "씨발 그렇겠어요? 무슨 군수 사업체가 설계도를 빼돌리려고 했는데 그걸 수거해오다가 잘못됐어요. 까딱없이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드니까 여기서 자고 있었다구요. 사람들 말로는 내가 머리를 심하게 박아서 기절했었대요."
해리는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에그시는 하얗게 질려서는 여전히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여긴 어쩌면 지옥같은 건지도 몰라요 해리.... 힘없는 중얼거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둘은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자신들이 기억하는 것들이 일단 허무맹랑한 꿈같은건 아니라는건 의견의 일치를 봤다. 알고 있는 인물도 같고, 장소에 대한 기억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해리는 블랙 프린스가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에그시는 해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벽에 실로 얽기설기 연결해놓은 것들이 의미가 없는 낙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해리는 자기 기억속에 있는 모든 장소를 다 가보려고 했고 모든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실제로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블랙 프린스도 그 중에 하나였다. 에그시는 해리의 행동력에 적잖이 놀랐다.
"거길 다 가봤다고요?" "너랑 달리 나는 시간이 남아도니까 말이다." "오... 이제 처지가 뒤바뀐 건가요, 백수 나으리?" "천만에, 난 연금 생활자라고. 정부가 날 먹여살리지."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결론의 우울함은 바뀌지 않았다. 두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세상은 지금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해리 하트는 에그시가 죽은걸 확인했고, 에그시는 '게리 언윈'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여기는 지옥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킹스맨 조직이 솜씨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위장을 한걸까. 에그시는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를 해 줬지만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내 죽음은 사전에 예고된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고 킹스맨이라는 조직이 사라져야 할 이유도 없지." "하지만 그때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해리. 대통령이며 수상이며 다 머리가 날아갔었어요. 존나 카오스였다고요. 온 지구가 투표하고 개표하느라 정신없었을걸요." "에그시, 어쨌든 난 죽었잖니. 네가 확인했다면서."
그건 그렇죠. 에그시는 차를 마시다가 문득 해리를 바라보았다. ��� 사람은 오랜 이야기 끝에 지쳐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해리는 소파에 앉아 있고, 에그시는 식탁 의자를 끌어와 기대 앉아 있었다. 소파는 2인용의 좁은 소파였고 차마 에그시는 해리 곁에 끼어앉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해리는 에그시의 시선을 받자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러니?" "나 지금쯤 어깨에 멍들었을걸요." "사과를 원한다면 미안하구나." "왜 그랬어요?" "네가 진짜인지 알수가 없더구나. 난 이제 슬슬 내가 망상병 환자인걸 인정하려던 참이었지." "미안하네요.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다시 불편하게 해서." "이제 어쩔 셈이지?" "뭘 어쩌긴요...."
에그시는 찻잔을 쥔 채 팔을 축 늘어트렸다. 정말 어쩌긴, 그냥 살아야 하는것 아니겠어? 에그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스파이로 화려한 삶을 사는것 자체가 에그시에게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체념해야하는건 사실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에그시는 인생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에 큰 불만은 없었다. 솔직히 킹스맨이 되기 전보다는 지금의 상황은 예전보다 훨씬 나았다. 일자리도 있고, 엄마를 때리는 아빠도 없었다. 진짜 엄마는 아니었지만. 에그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해리 눈치를 봤다. 아마 해리는 지금 절망적일것이다. 내 앞에서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에그시는 차를 홀짝거렸다.
"해리가 내려주는 차를 다시 마시게 됐다니 감동했어요." "그렇게까지 기억해주다니 눈물이라도 날 것 같구나." "농담이시죠?" "당연히 농담이지."
에그시는 해리가 소리내지 않고 차를 마시는 꼿꼿한 옆모습에 좀 감탄했다. 후줄근한 차림에 머그잔으로 차를 마시고 있지만 칼같은 수트 차림에 비싸보이는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게 떠오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에그시는 빈 찻잔을 개수대에 놓고 마침 있는 메모지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와 주소를 써서 해리에게 건네주었다.
"전 곧 출근이라 가야돼요. 연락처는 써놓고 갈게요." "그래, 잘 보관해 두마." "다음에 올때는 뭐라도 사 올까요?" "네 마음대로 하렴."
해리는 에그시를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에그시는 그냥 쑥 나오려다가 말했다. 해리, 그때 화장실에서 한 말은 다 진심이예요. 해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희미하게 웃더니 지각하지 말라고 에그시를 보내주었다.
*
에그시는 또다른 자신을 탓했다. 왜 하필 소방관이 되려고 한 걸까? 그만큼 일이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뭔 놈의 사고는 그렇게도 자주 일어나는지 몰라. 게다가 불 뿐만이 아니라 소방서가 하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나무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해주고 길 잃은 애를 집에 데려다주는 일도 있지만 프레스기에 손이 끼었다거나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다쳤고 죽기도 많이 죽었다. 여섯살짜리 남자애가 자전거를 타다가 차사고가 난 현장에 갔다오던 날 에그시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샤워할 기운도 없이 앉아 있다가 겨우 옷을 갈아입었고 나오자 똑같이 기운이 없어 보이는 지기와 알이 맥주한잔 하자며 에그시를 불렀다. 셋은 근처 펍에 오종종하게 앉아 맥주를 마셨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자기 주변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에그시의 핸드폰이 울렸다. 해리였다. 에그시는 펍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해리?" -금방 받는구나. 바쁠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퇴근했거든요." -집에 갈 거니? "그래야겠죠?" -우리집에 오지 그러니. "진짜로요?" -그래. 뭐든지 하겠다고 그러지 않았니? "해리, 좀 큰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가볍게 숨소리가 들렸지만 에그시는 해리가 웃는다는걸 알았다. 에그시는 그럼 좀 있다가 가겠다고 대답했고, 부리나케 다시 펍으로 들어가서 급한 일이 있다며 대강 얼버무렸다.
“야, 회복력좀 봐, 어린애는 달라.”
지기와 알이 웃으며 그를 놀렸다. 에그시는 웃어넘기고선 감자튀김이랑 맥주를 사서 해리네 집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해리는 안 먹을지도 몰랐지만, 에그시는 그가 먹지 않고 밀어놓는 광경을 쉽게 상상할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빈손으로 가는게 싫었다. 해리는 냄비에서 뭔가 젓고 있다가 에그시를 맞았고 놀랍게도 맥주병을 사양하지 않았다. 에그시는 부엌으로 가서 뭘 하나 들여다보았는데, 솔직히 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해리는 그게 코코뱅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제 시작해서 조금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에그시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많이 오래 걸려요?" "맛에 시간을 투자하는걸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에그시." "신사답지 못하다는거죠,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에그시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해리가 갖다놓은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해리의 등을 보다가 하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몸도 지친데다 맥주도 마셨고, 잠시 좋아졌지만 힘들어진 마음도 에그시를 졸게 만들었다. 결국 에그시는 잡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다가 팔걸이에 완전히 이마를 대고 잠들었다. 해리는 이제 뜸을 들이기 위해 냄비위에 뚜껑을 덮고 돌아섰다가 그런 에그시를 보고 어깨 위에 담요를 둘러 덮어주었다. 아무래도 젊은이는 많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
에그시는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고 손가락도 까딱할 힘이 없었다. 힘도 없긴 없었지만 일단 온 몸이 너무너무 아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살이라도 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머리랑 목, 코가 너무 아팠는데 꼭 뭔가 차갑고 굵은 것으로 목을 꿰어 놓은 것만 같았다. 에그시는 엄청 애쓴 끝에 실눈을 뜰 수가 있었다. 뿌옇고 잘 보이지 않는 시야에는 흐릿하게 숫자같은게 보였다. 모니터인것 같은데, 하고 에그시는 생각했다가 그게 심전도를 체크하는 기계라는 걸 깨달았다. 해리가 대학에서 기절해서 실려왔을 때 있던 병실에 그 기계가 있었는데 그거랑 똑같이 생긴것 같아. 왜 이런 꿈을 꾸는걸까, 하고 에그시는 생각하다가 목이 너무 아파서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꿈이 아닌것 같아....
"맙소사, 에그시. 정신이 드니?"
덜컹 하는 소리가 났던것 같은데, 시야 안으로 록시의 얼굴이 보였다. 에그시! 록시가 비명처럼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때 에그시의 눈꺼풀은 도저히 버틸수가 없었다. 더 눈을 뜨고 싶었고 이게 꿈이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그시는 다시 눈을 감았고 소리가 멀어져가는걸 답답해했다. 록시가 정신차리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 대신 좀더 다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이 이마를 쓰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잡아 흔드는 것도.
"일어나렴, 에그시. 저녁이 다 됐단다."
에그시는 눈을 떴다. 목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보글거리는 소리와 윗층의 희미한 소음이 들리고, 해리가 녹색 스웨터 차림으로 소파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에그시는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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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requited - Requited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피어스는 아직도 가끔 그 감정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난감해하곤 한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사진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곱슬한 머리카락이 이마 앞으로 내려와 있고, 눈썹가에 드리운 그림자와 반쯤 감긴 눈꺼풀과 코를 따라 시선을 내리면 연갈색의 제복이 보이는데, 흑백 사진이므로 원래 그 곳은 해가 비쳐 밝은 파란색일 것이다. 그리고 손등, 하얗게 빛나는 손등은 권총을 쥐고 있다. 피어스는 처음에 그는 권총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다음 해 대학 도서관에서 그 사진의 원본을 본 뒤에야 그의 시선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어스는 그의 시선을 상상해보았다. 금발의 뒷머리와 푸른 유니폼에 반쯤 가린 목덜미 같은 것이 보이리라, 차갑고 습한 공기와 폭격으로 무너진 벽돌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 제임스 반즈가 스티브 로저스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 지에 대해 피어스는 오랫동안 가늠해보았고, 곧 불쾌감을 느꼈다. 그의 간절함과, 또 대답받지 못한 마음들에 대해서.
왜 그는 너무 먼가?
피어스는 자주 제임스 반즈의 상반신 사진을 생각했다. 그의 고향집에는 그가 대학을 가기 전까지 쓰던 방이 그대로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열광해서였다면, 그 문제의 사진을 보게 된 이후는 막연한 열기 때문에 피어스는 하울링 코만도즈와 특히 제임스 '버키' 반즈에 대한 자료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종종 책을 보다 잠들었고, 가족들은 그가 전쟁사에 대한 관심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
처음으로 자위를 했을 때 피어스는 그 사진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계속해서 그 사진의 흰 이마와 곱슬머리, 손등은 곧장 피어스를 발기하게 했다. 침대에 누워서, 혹은 욕실에서 피어스는 눈을 감고 손을 움직이며 자꾸만 죽은 사람을 생각했다. 다시는 만날수 없을 것임에도 그의 자위의 대상은 제임스 반즈에서 머물렀다. 심지어 가족 몰래 만나는 사람이 생기고, 그의 집에서 아무도 없는날 서툴게 첫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피어스는 자꾸만 버키를 생각했다. 브루넷의 그 선배는 - 피어스는 그 후로도 주로 연상의 남자와 사귀었다 - 피어스가 자신의 안으로 삽입해 들어오자 가늘게 신음하며 잘한다고 칭찬했다. 피어스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귓가에 입술을 부비며 지미, 하고 불렀다. 처음으로 부르는 애칭이었고, 피어스는 자신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더 흥분됨을 느꼈다. 선배는 피어스가 허리짓을 크게 하자 견딜수 없다는 듯 신음하며 배게를 움켜쥐었다. 젖히는 목선을 따라 피어스는 입술을 누르고, 그 모습은 계속 꿈에서 제임스 반즈의 모습으로 재생되었다. 피어스는 한동안, 사실은 자주, 꿈에서 버키와 섹스했다. 그것은 판타지이자 그의 오랜 동기가 되었다. 제임스 반즈가 사랑했을, 혹은 늘 추구해 왔던 남자처럼 되고 싶다. 그는 늘 그것을 좇아 일생을 보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흘러 그가 동구의 한 지하시설에서 멍한 시선의 제임스 반즈와 마주했을때 얼마나 놀랐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피어스는 오래 외교관으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 가까스로 표정을 숨겼다. 소련의 하이드라 지부는 이제 쪼개지는 소련을 따라 내부 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고, 시베리아의 시설은 자연스럽게도 폐쇄의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너무 강력해서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전투기계들 사이에서 제임스 반즈는 어쩌면 무표정일수도, 혹은 멍한채 서서 러시아어 대화를 듣고 있었다. 들었다? 피어스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정했고 ,비로소 말했다.
"윈터 솔져는 미국이 인수하지요. 미국군은 전 세계로 파병되니 분쟁지역으로 움직이기는 훨씬 수월할 겁니다." "그럼 관련 시설까지 함께 인수할거요?" "이 시설 전체를 옮기면 너무 눈에 띌 테니, 신체 유지에 관련된 것만 이동시키는게 어떻겠습니까?"
피어스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는 그들의 대답은 들은척 하지 않고 반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어딘지 알 길이 없는 바닥 어딘가를 ��라보고 있던 시선이 피어스가 고개를 들자 천천히 이동해 피어스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금발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이라고 피어스는 짐작했다, 반즈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피어스는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사진에서와 달리 그는 회청색에 가까운 청록색 눈동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어스는 여전히 표정을 담담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고생이 많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겠나?"
반즈는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아무 말 없이 여전히 피어스를 바라보았다. 피어스는 그의 입술에 입맞추고 싶은 충동과 그의 머리카락를 쥐어잡아 바닥에 쓰러트리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여전히 반즈와 눈을 마주한 채 피어스는 두 충동 모두를 잠잠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완전히 마음이 가라앉자 뒤에 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죠."
돌아선 채로도 피어스는 반즈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음을 느꼈다. 피어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마침내 평생 쫓은 것을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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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boy No cry
*리퀘였던 것으로 기억. 오래전 글인데 백업을 안한듯
빵 때문이었다. 버키는 스티브에게 제빵소 뒷구멍을 알려주었다. 새로 가마를 만들면서 담장을 넓혔는데, 비가 잦아 벽돌과 벽돌 사이가 제대로 붙지 않았다. 버키는 귀퉁이의 벽돌을 잘 두드리면 이어진 부분이 통째로 문처럼 떨어져 나온다는 것을 알아냈다. 버키는 어느 날 오후 스티브를 몰래 그 뒤로 데려가 어떻게 들어가는지 보여주었다. 버키가 배를 끌고 구멍을 통과하자 스티브는 그 앞에 서서 그러면 안 된다, 어서 나오라고 소곤거리다가 결국 따라 들어왔다. 둘은 생쥐들처럼 제빵소를 돌아다녔다. 선반 아래를 기어가고 기둥 틈새를 빠져나와 화덕 근처에서 빵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았다. 밀가루 반죽이 숙성되면서 나는 냄새는 비리고 차갑고 축축했지만, 불을 거치면 마법처럼 냉기는 사라지고 따뜻한 담요 같은 공복감이 목 주위를 감싸고 코를 스쳐 배에 고였다. 어른들과 꾸지람을 걱정하던 스티브도, 괜찮다고 재던 버키도 조용하게 만드는 온기였다. 곧 팔에 털이 가득한 남자가 들어와 화덕을 열고 빵을 선반에 우르르 쏟아냈다. 그는 열기로 땀을 흘리고 방금 반죽을 하고 오느라 눈썹에 밀가루가 묻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굶주림에 연신 배에서 쪼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는 남자아이 둘이 겨드랑이와 바지 허리춤에 되는대로 빵을 끼워 넣고 빠져나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구멍을 통과하고 문을 잘 닫은 다음 둘은 줄달음쳐서 공원 구석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목이 막힐 때 까지 빵을 찢어 먹은 다음 수돗가에서 물을 마셨다. 갓 구운 빵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버키는 스티브가 빵을 둘로 쪼개 냄새를 맡으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대단히 행복해졌고, 저녁 때 먹으려고 주머니안에 챙겨 놓은 빵조각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챙겨온 빵을 전부 스티브에게 안겨준 뒤 헤어졌다. 하지만 빵 속은 마냥 부드럽지 않고, 뭉치면 단단해지고 물에 담가 놓으면 뚱뚱하게 부풀기 마련이라, 스티브는 버키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복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소화를 잘 못 시키던 속이라 배가 아픈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소보다 훨씬 심해져갔다. 스티브는 결국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현관문 앞에서 허리를 접은 채 쓰러졌다.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을 집에 돌아오던 옆 집 사람이 발견했고, 의사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냥 체한 겁니다. 관장을 좀 하고, 물을 많이 마셔야겠어요."
스티브는 양동이 채로 물을 들이켜야 했고, 다리를 벌리고 좌약을 밀어 넣는 동안 통증에 덜덜 떨었다. 의사는 스티브의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때까지 스티브가 용변을 참도록 했다. 그렇게 두 번을 반복하자 스티브는 눈앞이 서서히 멀어지는 걸 느꼈다. 이제는 의사가 배에 겨자를 바르고 다시 좌약을 밀어 넣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자꾸 뱃속이 출렁거리고, 사지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배는 점점 더 둥글게 부풀었고 의사가 급하게 전화를 하러 간 사이 스티브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버키는 새벽에 그 소식을 들었다. 스티브가 품에 안고 있었던 많은 빵이 올만한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제빵소 사장은 버키의 양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갔고, 양아버지는 버키를 때렸다. 버키는 뺨이 부풀고 등에 혁대자국이 났지만 울지 않았다. 버키는 화난 아버지도 제빵소 사장도 무섭지 않았다. 다만 스티브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양아버지의 말은 무서웠다. 버키는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다가, 창문 유리를 고정시켜둔 못을 손톱으로 잡아빼고 집을 빠져나왔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스티브의 집으로 달려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버키는 미처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냉기에 떨기 시작했다. 하얗게 변한 스티브가 흡혈귀처럼 관 속에 누워 눈을 감고 있을 것 같았다.
"너 버키 아니니?"
버키는 사라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릿수건을 손에 쥔 사라는 버키가 창백하게 질린 채로 덜덜 떨면서 자신을 올려다보자 한숨을 쉬었다. 현관 앞 계단의 핏자국은 버키의 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라는 버키의 머리를 수건으로 세게 때렸다. 버키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스티브 방에 가서 신발 신고 나와라." "부인, 스티브는……." "지금 스티브에게 갈 테니까, 빨리 신고 나와. 병원에는 맨발로 갈 수가 없어."
버키는 사라의 뒤를 따라 병원으로 가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스티브의 신발은 조금 작아서 버키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신발 뒤를 꺾어 신어야 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발바닥에 신발이 부딪쳐 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한참 길을 걷고, 전차를 탄 뒤 병원에서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말을 탄 경찰을 구경하거나 전차 승강구에서 표를 받는 직원에게 표 쪼가리라도 얻어 보려고 했을 버키였지만 지금은 사라의 뒤를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또 때리겠지, 짤막한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신문을 겨드랑이에 낀 남자들이나 흰 옷을 입은 간호사들,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환자들을 지나 두 사람은 소독약냄새가 나는 아이보리색의 로비로 들어왔다. 사라는 창구의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버키는 그 뒤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짧은 손톱을 이빨로 잘근거렸다. 이야기가 끝나자 사라는 버키에게 손짓했다.
"난 지금부터 의사를 만나야 하니까, 너 먼저 병실로 올라가렴." "어...어디로요?" "저쪽 복도 끝에 있는 병실로 가면 된다. 10인실이야."
사라는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면서 혀를 차 버키를 걷게 했다. 버키는 입술을 씹으면서 복도를 걸었다. 매끄럽고 빛나는 복도였다. 버키는 자기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걸음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병실은 금방 가까워질것 같으면서도 도착하는데 한참 걸렸다. 마침내 병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열려 있고, 양 쪽으로 늘어놓은 열개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스티브의 머리카락이 구석에 보이자, 버키는 신발을 벗어 쥐고 후다닥 병실을 뛰어 가로질렀다.
"스티브, 스티비. 나야, 나 왔어."
버키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가 멈칫거렸다. 스티브는 손등에 노란 튜브를 매달고 잠들어 있었다. 다리 사이에도 노란 튜브가 끼워져, 얇은 천으로 만든 입원복이 끝을 겨우 가렸다. 튜브 위에 달린 병은 세 개나 됐다. 버키의 손에서 신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물어뜯어 손톱 끝이 너덜거리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스티브의 코끝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숨이 느껴지자 버키는 다시 조심조심 손가락을 치웠다. 머릿속이 찡해지는가 싶다가,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게 기어올랐다. 버키는 손바닥으로 얼른 얼굴을 가리고 헉헉 숨을 들이쉬었다. 꽉 눌린 눈 안에 별이 부서지고, 습기가 가득 차올랐다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스티브. 미안해……."
사라가 의사에게서 포도당 정제를 받아 병실에 들어왔을 때 버키는 내내 미안하다고 뇌까리면서 울고 있었다. 딸꾹질을 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거리면서도 아홉살짜리는 고집스레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동그라진 갈색 단화 옆의 발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
"버키, 저녁 먹으러 와."
스티브는 버키의 방문을 가볍게 노크했다가 문을 열었다. 버키의 방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창문에 커튼을 내리고 불을 끈 채로 바닥에 앉아 있던 버키가 벌떡 일어섰다. 스티브는 버키의 온 몸이 긴장했다가 자신임을 확인하고 스르르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저녁 먹자, 별거 없지만 끼니는 거르면 안 되지."
버키는 스티브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뉴욕의 폐기된 지하철 구석에서 스티브를 만났을 때는 의외로 순순히 그를 따라왔다. 자신의 가치가 버키의 친구가 아니라 기억의 단서에 불과하다고 해도 스티브는 버키를 예전처럼 대했다. 어차피 그것 말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스티브는 버키를 집으로 데려와 현실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다. 스티브는 버키에게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예외로 두었다. 버키가 살아있다는 감각이 그 때만큼 와 닿을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길에 막 빵을 굽길래 사왔어. 스프에 찍어먹자. 버터 바를래?"
스티브는 버키가 식탁 의자를 빼서 앉겠거니 짐작하고 부엌에서 스프를 뜨다가 조용함에 국자를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버키는 식탁 한가운데에 스티브가 놓아 둔 빵을 보고 있었다. 구운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버키가 갑자기 식탁을 짚고 고개를 수그렸다. 스티브는 스프 그릇을 내려두고 버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버키는 덜덜 떨고 있었다.
"버키?" "미안해, 스티브."
습기 어린 목소리가 중얼거리고, 식탁 위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버키는 훌쩍거리고, 곧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앞뒤 없이 어린아이처럼 온 감정을 쏟아내는 울음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스티브. 버키는 울음소리에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내내 스티브에게 사과했다. 스티브는 버키의 등에 손을 얹고 서 있다가 팔을 잡아 올려 품에 안아주었다. 괜찮다는 말은 어차피 체온이 다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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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CW SPOILER

사진출처 instagram @asmitaparelkar
스티브는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빗방울이 창틀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 창틀은 속이 비어 비가 떨어지면 소리가 울려 방 안에 잔향이 남았다.
"무슨 생각 해?" "그냥...빗소리 들어." "로맨틱하긴."
목에 입술이 닿았다. 버키는 춥다고 웅얼거리며 스티브의 몸을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버키의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스티브는 쭈뼛거리며 버키의 팔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너 집은 정말 안 가봐도 되는거야?" "내가 가길 바라는거야? 널 이렇게 두고?"
스티브의 얼굴이 버키의 무릎이 자신의 허벅지를 누르는 감각을 따라 붉어졌다. 자연스레 어젯밤의 광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시선이 팔을 괴고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스티브는 무안해져서 시선을 천장 구석에 묶어둔채로 말했다.
"몇 달만에 온 거잖아. 내가 널 보기 싫다는게 아니야, 버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족들도 나만큼이나 널 보고싶어할거야." "그래, 하지만 너처럼 집에 혼자 앉아 내 생각을 하진 않을걸." "그만좀 만져." "알았어, 미안..싫었어?"
자꾸만 볼이며 귀 언저리를 건드리는 손을 고개를 꺾어 거절하자 이제는 입술에 볼에 닿는다. 스티브는 뻐근함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집 밖의 배관용 파이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버키는 침대 밖으로 내려가는 스티브의 팔꿈치를 자연스레 잡아주며 저도 몸을 일으켰다.
"야아, 미안해." "빨리 나와서 옷 입어. 너희집 가자." "스티브."
스티브는 돌아보지 않고 의자에 걸린 셔츠를 어깨 위로 걸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속옷을 주워입었다. 샤워는 다녀와서 해도 될 것이다.한숨 소리가 나고, 이불이 걷히더니 어깨로 묵직한게 와락 떨어졌다. 둥근 군복 단추가 어둑한 방안에서도 용케 빛났다. 뒤를 돌아보자 역시 셔츠를 꿰어입던 버키가 싱긋이 웃어보였다.
"입고 있어. 너 그러다가 감기들어." "그게 걱정되면 내가 자게 좀 내버려두지 그랬냐." "넌 나 석달만에 보면서 뽀뽀한번 안 하고 싶든?" "그걸 뽀뽀라고 한다면야." "우리 박사님이 아는게 느셨어."
버키는 스티브를 당겨안았다. 아직 바지를 입지 않아 선득해진 허벅다리가 맞닿는대로 스티브는 내버려두었다. 군복 재킷 아래로 들어온 팔이 허리를 꼭 감아안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졸랐다.
"빨리 말해줘. 그럼 뽀뽀가 아니고 뭐야?" "야, 좀. 옷이나 먼저 입어라." "말해주면 입을게-"
스티브는 바싹 깎은 버키의 머리카락이 얼굴과 맞닿은 부분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길었던 때와, 둘만 남은 골목에서 키스를 조르던 초여름의 야구장을 생각했다. 막연하게 부족하지만 거절을 얻어맞지 않던 시간들이었다. 버키의 손이 스티브의 뒤통수를 감쌌다. 장난처럼 조르던 것이 없던 일이기라도 한 양, 버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스티브를 불렀다.
"괜찮아, 스티브?" "그래. 괜찮아." "제발 부탁이니까 혼자 견디지마. 알았지?"
그래, 스티브는 그 대답이 버키를 안심시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버키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든지(스티브는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말을 지웠다) 자신의 수많은 통증들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삶은 혼자 견디는 것이기에.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 버키는 상처받을테니까, 스티브는 더 말하지 않고 버키를 마주 안아주었다.
*
미안해.
스티브는 불투명한 유리관 너머에서 사과했다. 나는 늘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네. 그는 한 발짝 관으로 더 다가가, 이마를 차가운 표면에 댄 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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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Aid Kit
*CA:CW SPOILER
버키는 계단을 올라갔다. 약국에서 나올 때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제 빗방울이 하나 둘 돋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금 비가 와서 다행인가 싶다가도, 버키는 집 안에서 기다릴 광경을 생각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건 비가 오든 안 오든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지. 고개를 젓는 서슬에 약봉투가 부스럭거렸다. 안에는 연고와 반창고, 그리고 콜라 한 병이 들어 있었는데 버키는 스티브가 그걸 마실수는 있을지 좀 의심스러웠다.
"스티브, 나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보이는 식탁에 엎드려 있던 스티브가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코피가 번졌던 셔츠 소매는 언뜻 거뭇해 보였지만, 버키가 다가가자 아직 붉은기가 남아 있었다. 봉투를 내려놓고 의자를 가까이 끌어온 버키는 스티브가 봉투 안을 들여다보게 내버려 두고 저는 물을 뜨러 다시 싱크대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자고 있었어?" "아냐, 그냥 엎드려 있었어." "다리는 좀 어때?" "음.... 아직까진 좀 아픈데 괜찮은것 같아."
버키가 냄비에 물을 받아 오자 그 사이 스티브는 등받이에 기대앉아 바짓단을 걷어올려 보고 있었다. 가는 장딴지에는 크게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구두로 밟힌 자국인걸 아는 버키는 한숨을 쉬며 이제 냄비 안에 함께 가져온 수건을 적셔 건네주었다.
"자, 이걸로 얼굴 닦아. 그리고 다리 여기 얹어." "나 혼자 할수 있다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엎드려 계시는군요. 로저스씨."
무릎 위로 다리를 끌어당겨 얹자 스티브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버키가 시킨대로 순순히 핏자국이 남은 얼굴을 물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냈다. 멍자국 위에 연고를 문지르던 버키가 움찔 물러나는 다리를 다시 잡았다.
"아파도 좀 참아." "안 아파, 아야." "미안." "너 안 미안하지." "어떻게 알았냐."
마저 연고를 다 바른 버키는 긁힌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스티브는 다리를 다시 내리려는 듯 움츠렸지만, 버키는 그대로 다리를 자신의 무릎위에 올리게 해둔채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야, 얼굴 닦으랬더니 뭐 하고 있냐." "뭐, 아직 남았어?" "여기 그대로 있네."
스티브는 버키가 입가를 건드리자 인상을 썼다. 핏자국을 지우던 버키는 스티브의 반응을 보고 손길을 조금 늦추었다. 자전거 벨소리가 가까워지다 멀어지는데 버키가 불쑥 물었다.
"너 내가 거기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뭘 어쩌긴 어째, 사과받을때까지 버틸 거였지." "스티브, 너 그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 좀." "그리고 넌 날 또 찾아 올 거잖아. 난 그걸 믿는 거지."
버키는 머쓱하니 손길을 멈추었다. 가끔 스티브가 이렇게 머릿속을 다 열어보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면 열일곱살은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할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서 버키는 차라리 얼굴을 벅벅 문질러 버리는 길을 택했다. 스티브는 정말 아팠는지 버키의 어깨를 밀고, 얼마 뒤 콜라를 마시다가 또 터진 입속이 아파 한참을 끙끙거렸다.
*
"벅, 목 좀 들어 봐."
스티브는 퀸젯 해치가 닫히는 소리 때문에 목소리를 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기지를 나오는데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둘은 퀸젯 안에 들어오자 조종석 근처의 벤치까지 채 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나마 기력이 남은 스티브가 아예 바닥에 누워버린 버키의 머리 아래로 다리를 받쳐 괴어주고 헬멧을 벗었다.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땀이 고이고 피 냄새까지 섞여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 헬멧을 조금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기계들 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 공간에서 텅, 하는 소리는 크게 울렸다. 스티브가 한숨섞어 숨을 내쉬며 유니폼 목깃 부분의 여밈을 풀때 눈을 감고 누워 있던 버키가 고개를 움직였다.
"어쩔 셈이야, 이제." "일단 여길 떠나야지." "어디로...?"
스티브는 대답 없이 유니폼을 마저 벗어 뭉치더니 배게처럼 만들어 버키의 머리 아래에 괴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들이 등이며 배를 쑤셔대는 통에 스티브는 조종석에 기대앉으며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흘렸다가 겨우 조종간을 잡고 스위치를 켜서 이륙했다. 항로 설정을 어디로 해야할지 머뭇거리던 그는 막연하게 인도양이라고 입력해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퀸젯은 매끄럽게 방향을 바꾸어 날았지만 스티브는 비틀거리며 겨우 서랍에서 구급약통을 꺼내 버키에게 돌아와 끙끙대며 자리에 앉았다.
"뭐야." "뭐긴, 약통이지."
스티브는 버키의 겉옷에 달린 지퍼를 내리고 옷깃을 젖혔다. 스티브 자신도 그렇지만 토니의 아머에 얻어맞았던 버키의 턱이며 상체 이곳 저곳은 전부 벌써 멍이 오르고 터져서 피가 맺혔다. 하물며 걷어차인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라 스티브는 잠시 버키의 이가 빠진건 아닌지 걱정을 하며 식염수팩을 꺼냈다. 원래는 링겔용이겠지만 물병도 꺼내기 힘든 지경인 슈퍼솔저는 팩의 끝을 이로 물어뜯어 구멍을 내고 버키의 얼굴이며 상체에 뿌려 상처를 씻어냈다. 좀 차가웠는지 버키는 움찔거렸지만 대개는 조용히 스티브가 거즈로 물기며 피를 닦아내도록 얌전히 누워 있었다. 스티브는 괜히 그게 속상해서 거의 빈 식염수 팩을 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버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로 향하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어디 또 다른 곳이 아프진 않아?팔이라던가, 다리라던가." "아직까지는."
버키의 깡뚱한 왼팔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스티브는 버키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입가를 굳히는 것을 보다가, 꿰던 실을 마저 꿰고 제일 크게 터진 옆구리의 상처 끝을 핀셋으로 잡아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미안, 아무래도 마취제의 정량을 모르겠어. 조금만 참아." "뭐, 하....아, 아야." "아야?"
버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스티브는 손을 멈추었다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거리며 웃고 말았다. 스티브는 다시 상처를 꿰매면서 말했다.
"이건 아픈가봐." "바늘은 따갑네." "다섯 바늘은 꿰매야겠어." "너는 못 꿰매줘서 어떡하지." "이따 거울이나 들어주든가."
실을 자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소염제와 연고를 바르는 단순한 동작들 속에서 스티브는 잠시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언제인지를 잊어버렸다. 그저 또 둘 뿐이고, 누군가가 다쳤으니 약을 바르고 놀림섞인 핀잔을 준다. 일상으로 돌아왔네,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콜라라도 마셔야지.
"스티브." "음?"
연고통을 든 손등에 장갑의 손바닥부분이 닿았다. 스티브는 이마에 연고를 바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핏기가 옅은 얼굴이 슬며시 웃었다.
"딴생각 그만 하고 이제 너나 약 발라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
스티브가 반문하려던 그 때, 퀸젯의 조종간 쪽에서 소리가 났다. 무감정한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스티브는 그게 토니의 메시지일지, 혹은 정부의 체포를 알리는 메시지일지를 가늠하며 일어섰다. 낮은 목소리가 기내를 울렸다.
[로저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지금 나는 베를린으로 가는 중이네. 지모라는 자를 정부에 넘기기 위해서고,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는 자신의 죄과를 치룰 것이고, 나는 그 과정이 제대로 집행되도록 내 눈으로 지켜볼 것이다.]
버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으면서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스티브는 그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을 알아보았다. 스티브는 버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와 토니 스타크와의 싸움에 내가 끼어들 권리는 없다. 나는 내 신민들을 지키는 왕이지, 세상의 수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네의 친구를 죽이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었지. 그것은 복수에 눈 먼 나의 과오다. 그러니 그 책임을 지고 싶군.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할수 있는 모든 것으로 자네들의 안전을 보장하려 한다. 이 메시지와 함께 보낸 좌표로 와 주었으면 한다. 물론 자네들은 거절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반즈에게 내가 보내는 사과이기도 하니 그가 결정의 우선권을 가졌으면 한다. 앞으로 48시간동안 답변을 기다리도록 하지.]
메시지가 끝나자, 스티브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버키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버키는 반면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조종석쪽을 보다가 다시 스티브를 보았다. 스티브는 쓰려오는 팔꿈치에 아이스팩을 가져다 대며 버키의 시선을 받았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결정하기를 바라?" "결정권은 네게 있으니까."
버키는 대답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이 보이지 않고, 스티브는 버키가 순간 무슨 말을 자신에게 할 지 알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예상이나 확신이라기보다는 데자뷰와 같았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네 생각대로 하고 싶어."
버키는 스티브가 아이스팩을 느리게 내려두고, 마른세수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깨를 완전히 늘어뜨리고, 손에 얼굴을 반쯤 기대다시피한 채로 스티브는 버키를 바라보았다.
"내 선택이 이번에도 또 잘못될 수도 있어." "난 걱정 안 해."
버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스티브는 또 다시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다. 먼지내 속에서 콜라병을 든 친구가 웃는 풍경 속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럼 네가 바라는대로 할게. 스티브 속의 열 여섯살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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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Bucky - Journal
* https://twitter.com/ecof06/status/727052712324403200 이 트윗의 연장선
* CA:CW 결말 이후
!!!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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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년 00월 00일
안녕, 버키.
부쿠레슈티의 아파트에 다시 갔었다. 사람은 살지 않고, 수색을 했었는지 안은 어질러져 있더라. 쓰레기 더미와 내려앉은 벽 사이에서 이 노트를 찾아냈어. 아마 수색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거겠지. 다행이야.
처음에는 이걸 그대로 네게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난 네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알아도 주소는 정확히 모르고, 또 이걸 부칠만한 틈이 나지 않았어. 그래서 보낼 여력이 될 때까지 여기에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네 흉내를 낸다고 생각해도 좋아. 다만 네가 깨어났을 때, 또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걸 보면 네가 잠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겠지.
요즘 우리가 지내는 곳은 전파가 닿지 않아서 다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랭과 바튼이 제일 말이 많아. 이런 상황인데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웃음을 참을수가 없어.저렇게 이야기하는게 둘의 모두의 대한 배려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미안스러운데도 말이야. 몇 개쯤은 기억했다가 말해줄게.
XX년 00월 00일
안녕,버키.
지금 나는...글쎄, 어디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곳에 있다. 캐나다 어딘가의 지하라고만 말해둘게.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이 - 그 사람도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 말하자면 길어 - 지낼 곳을 만들어주었어. 아직 마음대로 밖에 나갈수는 없지만, 하루에 두세번씩 장소를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은 큰 장점이야. 꽤 넓은 곳이고, 방이 많아. 각자 자기 방을 정하러 다니느라 좀 떠들썩했다. 각자 쉬고 나면, 이제부터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정해야겠지. 나도 잠을 좀 자고.
XX년 00월 00일
일을 하러 더운 곳에 갔었다. 에콰도르라는 곳이야.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 뱃속에 약을 넣고 팔아버리는 조직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 그 조직의 작업장은 멀리서 보기에는 평범한 창고처럼 보였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주변에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고, 뜨거운 공기만 조용히 고여 있는데.... 우리는 완다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 애는 그런것까지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살아남은 아이들과 잡힌 남자들을 모아 경찰에 넘길때 완다는 울고 있었어. 아마 다 봐버렸겠지.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범죄가 없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갈수록 사람들은 왜 잔인해지는걸까?
XX년 00월 00일
버키,
불법 무기 거래를 막으러 갔었어. 그 나라에는 사막이 있고, 우리가 갔을 때는 밤이라 추웠어. 사람들을 끌어내 무릎꿇리고 증거품을 챙기고 있는데 토니가 왔었다. 그가 곤란해지는걸 보고싶지 않아서 우리는 서둘러서 그 자리를 떠났어. 우리가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무릎 꿇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우리보고 어벤저스가 아니냐고 했지. 나는 잠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완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완다가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네가 여기 있다면 난 너무 생각이 많다고 웃겠지.
xx년 00월 00일
버키,
나는 지금 네 앞에 있어. 너는 얼굴이 창백하고 관을 셀수도 없이 매달고 있다. 네 심장이 멎었다는 말을 들은게 지난 밤이었지. 곧장 비행기를 타고 여기로 왔지만 다섯시간이나 걸렸어. 그 사이 네 심장은 다시 멈추었다가 돌아오고...내가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수치가 안정되어 간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나는 지금도 너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다.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와 함께...
xx년 00월 00일
이집트 국경에서 전쟁이 났다. 가야 해. 네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널 원망할수 있을까.
xx년 00월 00일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 눈에 안 띄는 옷을 입고 무너진 건물들을 부숴서 사람들을 구해. 폭탄이 날아올 만한 곳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소로 옮겨주고 물과 식량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국경 없는 의사회라는 조직과 가끔 마주치는데,모두가 의사고 동시에 민간인이라는 것을 알아서 놀랐다. 세상에는 영웅이 아주 많아. 그들은 방화관제 때문에 흐린 전등을 달고 수술을 하고 사람들을 살려. 전에 네가 돌아올만한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린것 같다.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직 여기엔 좋은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좋은 것들도.
xx년 00월 00일
종전이 이뤄졌다.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어벤저스가 수송을 돕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어. 좋은 소식이야.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랭의 딸을 잠시 만나러 들렀어. 아직 어리고, 랭을 아주 좋아해. 랭은 딸의 과자 크기를 키워주고 엄마에겐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딸이 그걸 다 먹기전에 그녀가 먼저 발견할것 같더군. 그렇게 서로를 좋아하는 부녀지간이 헤어지는 걸 보는 건 안타까운 광경이었어.
xx년 00월 00일
네 신장이 멈췄다는 소식을 들었어. 네가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xx년 00월 00일
버키, 신장이 회복되고 있다고 해. 네게 가보고 싶다. 하지만 이 곳은 지구 반바퀴나 떨어져 있어. 그리고 납치된 사람들이 짐처럼 냉장트럭 속에 갇힌 채 운반되고 있다. 샘이 놀라울만큼 능숙하게 사람들을 달래고 있어.
xx년 00월 00일
지금 널 보러 가. 돌아와줘서 고마워.
xx년 00월 00일
버키.
제임스 반즈는 침대 곁 벽에 머리를 대고 졸고 있는 스티브의 무릎에서 노트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집어들었다. 본래 검은색인 표지에는 흠집이 여럿이었다. 그는 호흡기 관에 거슬리지 않도록 침대 가장자리 기둥에 노트를 기대놓고 스티브의 글을 읽은 뒤, 잘 덮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노트가 있던 자리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가 스티브에게 덮어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따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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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Bucky - White Christmas
크게 차가 덜컹거리면서 스티브는 잠에서 깨어났다. 공병대가 서둘러 다듬어둔 진격로에는 잔돌이 많고, 산 허리를 자른거라 커브가 급하고 깊었다. 스티브는 오랜만에 입은 정복 자락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세를 고쳤다. 건넛편에 앉은 버키에게 반사적으로 시선이 갔을 때는 구겨진 모포가 제일 먼저 보였다. 녹색 모포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버키는 코를 골고 있었는데, 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묻히긴 해도 충분히 들을만큼 컸다. 가장자리에 불편하게 기대앉은 것이 보는 자기가 불안해 스티브는 버키의 발을 건드려 그를 깨웠다. 버키는 튀듯이 놀랐다가 모포를 끌어내리면서 투덜거렸다. "깨우려면 좀 얌전하게 깨우던가 이게 무슨 짓이야." "너 그러다가 떨어질까봐 미리 깨워준거지." "잠 좀 자려니까...." 버키는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손으로 만져 모양을 고쳤다. 차가 흔들거리는 서슬에 모포가 바닥으로 미끄러지자, 스티브가 대신 버키의 모포를 둘둘말아 무릎 위에 얹었다. 버키가 기지개를 켰다가 늘어지듯 앉았다. "얼마나 남았어?" "도착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은 남았어." "너 너무 일찍 깨웠다니까, 나를." "그럼 이리 와, 나한테 기대." "스티비 보이가 내 베개 노릇을 해준다 이거지." 버키는 킥킥 웃더니 트럭 위 가장자리를 짚고 자리를 옮겨 몸을 던지듯 스티브 곁에 앉았다. 그리고 어깨에 뒤통수를 기대더니 문지르면서 자세를 잡고 다리를 쭉 뻗으면서 모포를 끌어갔다. "아, 딱 좋다. 너 또 치사하게 깨우지 마라." "지레 깨지나 마시지." 대답 대신 버키는 웃음을 흘리는 채로 눈을 감았다. 서티브는 잠시 뻣뻣하게 허리를 버티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 버키가 기대기 좋도록 해 주었다. 트럭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하울링 코만도도 일단은 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전선을 이동해서 싸운다 한들 군이 정한 전투 기간을 넘기면 휴가를 위해 후방으로 가는 것이 규칙이었다. 모든 대원들이 한 번씩 다녀온 것이 휴가이지만 스티브는 다른 대원들에게 양보하고 지금까지 가지 않았다. 버키도 역시 계속 남는 걸 택해서, 결국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다른 부대원들이 등을 밀어 둘을 후방으로 보냈다. 다소 요란한 인사를 받으며 탄 트럭이 이것이었다. 버키는 다시 가늘게 코를 골기 시작하고, 스티브도 고개를 포장에 기댄채 눈을 감았다. 후방에서 뭘 하지, 하는 고민이 잠시 스쳐지나가다 잠기운에 잠겨버렸다. * 늦은 저녁으로 군 보급품에서 나왔을 햄과 으깬 감자를 먹은 뒤에는 당연히 술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했던 모든 즐거운 것들은 너무 멀리 있고 희미했고 불가능했다. 스티브는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서, 위스키에 얼음을 부탁하는 버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르고, 밖에서 들어온 병사가 눈이 온다는 말을 하는게 들렸다. "무슨 생각 해?" "음, 그냥. 눈이 온다니 춥겠네, 그런 생각." "그래, 너는 늘 추위를 많이 탔지." "아니, 내가 춥다는 건 아니고...." 버키는 놀란듯이 스티브를 바라보다가 아하, 하고 웃었다. 곧 주먹이 스티브의 어깨에 가볍게 와 닿았다. "가끔 네가 더이상 꼬맹이가 아니라는걸 잊어버려." "나도 처음에는 어색할 때가 있었으니까 이해해." "뭐? 언제. 말해봐." "어...." 술기운이라도 도는지 버키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스티브는 스스럼없이 기대는 버키의 어깨에 따라 어깨를 맞추면서 웃었다. "볼일 볼때 말이야, 변기랑 내 엉덩이랑 너무 멀더라고." "야- 그건 적응하기 힘들겠다.또 없었어?" "방금 되게 우리 엄마같았던거 아냐." "뭐가, 또 없었어? 우리 스티비?" 스티브가 취하지 않고, 여기가 전쟁터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평범한 친구 둘이 취해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며 버키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스티브 역시 점차 멍하게 반쯤 빈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앉아있기만 했다. 안주용으로 주인이 건네준 땅콩을 다 까먹고 왁자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한 떼의 군인들이 나간 뒤에도 자리를 지키던 둘은 주인이 문을 닫는다고 말 한 뒤에야 비로소 술집을 나왔다. 눈은 그 사이 발목 높이까지 쌓이고,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발밑이 미끄러워 둘은 조금씩 비틀거리며 걸었다. 스티브가 발 밑을 잘못 보고 크게 휘청거리자, 뒤따라 오던 버키가 킥킥거리며 놀렸다. "대장님 그러다가 엉덩이 깨진다?" "그만해. 아, 숙소가 어디였지?" "모르겠는데...저긴가?" "저기 맞나보다." 졸음을 참고 있던 직원은 눈에 젖고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두 사람에게 열쇠를 내주며 바닥의 카펫이 젖지 않도록 조심해달라고 부탁했다. 많은 군인들이 취하면 바닥에 누워 자버린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 안 취했는데, 아주 멀쩡하다고요. 그렇지 스티브?" "조심하겠습니다." "부탁 좀 하겠습니다. 곰팡이도 슬지만서도 그렇게 자면 감기에 들어서 앓는다고요." "이 자식은 아프지도 않는다니까요. 왜냐하면-" "자자, 가자 벅." "밀지 마. 씨발, 춥네." 스티브는 버키를 부축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트윈 베드룸 안의 공기는 밖에 비하면 따뜻했지만 여전히 싸늘했다. 스티브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고 버키를 침대에 앉혀주었다. "문 닫아, 스티브. 추워." "그럼 그 동안 라지에이터좀 켜줘.옷도 말리게." "이거 스위치가 어딨냐..." 스티브가 문을 잠그는 동안 버키는 휘청거리기는 해도 용케 라지에이터를 켜고, 부츠를 벗어다가 바닥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더니 침대 위에 누웠다.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공처럼 말고 누운 뒷모습을 보고 스티브는 웃음이 났다. 양말 바람인 뒤꿈치 옆에 걸터앉아서, 스티브는 눈을 감은 버키의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주었다. "샤워하고 자, 버키." "졸려..." "뜨거운 물에 씻으면 잠도 더 잘 오고 따뜻할걸." "네가 씻겨줄거면 내가 고려해보지." "네가 어린애냐? 데려가서 씻겨주게, 무거워." "넌 이제 6피트가 넘잖아, 그럼 나 하나쯤이야 충분히 씻기겠지. 네 망할 방패보다 내가 덜 나가겠다." "알았어, 벅. 늦었으니까 옷이라도 벗자." "오, 옷은 벗겨 주시는거야?" "그래. 자비로우신 로저스가 벗겨주신다." 버키는 킥킥 웃으면서 스티브가 껴입은 외투를 벗기기 쉽도록 팔을 뻗어주었다. 그러다 버키는 자연스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스티브가 외투를 갈무리하는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스티브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버키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행복하냐, 스티브." "음...아마도 그런것 같은데." "내가 전에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 "뭐, 어떤말 했었지?" "넌 입대 말고는 할 일이 없다던거." "아, 그거." 버키는 가물거리는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가 이대로 잠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외투를 손에든채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느라 버키의 가슴팍이 크게 솟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그런 말 해서 미안해." "괜찮아, 어차피 속상하지도 않았고." "넌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녀석이거든. 그걸 알아야 돼." "그 말은 고마운데 좀 간지럽다." 쑥스러움에 웃는 스티브를 따라 버키도 웃었다. 매트리스 위로 다리를 되는대로 떨군 버키는 스티브가 짚고 있던 손 위에 장난스레 입술을 부비더니 그 위로 옆머리를 대고 누워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좋아." "뭐가 좋다는거야? 여기가?" "네가 행복하다는게 좋다고." "벅?" 버키는 대답 없이 조용해졌다가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차마 손을 빼지 못하고, 라지에이터가 방안 공기를 어느정도 데워줄 때 까지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버키의 베개 노릇을 했다. 눈은 계속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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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PM
스티브는 포치에 서서 튼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레몬 나무에 매달린 주먹만한 레몬이 바람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이마를 드러냈다 가렸다. 하늘 위에는 바람이 거센지, 정원을 비추는 햇빛은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둥글둥글 구멍이 났다. 모양을 내서 잘라놓은 사철나무 아래 벤치로 내려가 앉은 스티브는 책을 펴고 옆구리를 등받이에 기댄 채 다리를 쭉 뻗었다. 평원을 달리는 몽골의 군대의 이야기로 돌아갈 참이었다.
"요, 스티브!" "안녕."
스콧이 버키 손에 쥐어진 리드 줄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정원으로 들어왔다. 버키가 줄을 놓아주자, 개는 스티브가 책을 덮기 무섭게 달려들어 스티브의 허벅지와 손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스티브가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이 다가온 버키는 스콧의 꼬리를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이젠 괜찮아?" "응, 검사 끝났대." "병원은 안 가도 돼?" "그런것 같던데. 엄마가 방을 청소하고 있어서..." "학교는 오는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 "네가 오면 좋을텐데."
벤치 아래 잔디 위에 버키는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으깨지는 잔디에서 나는 냄새를 따라 스콧은 버키의 얼굴과 손을 핥은 뒤 정원을 코로 쑤석이기 시작했다. 두 열살은 그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유행하는 작은 그림 딱지나 누군가 성공시킨 덩크슛 같은 이야기 끝에, 스티브가 버키에게 물었다.
"냉장고 안에 브라우니가 있어. 같이 먹을래?" "먹어도 돼?" "엄마가 먹고 싶으면 조금만 꺼내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 "그럼 스콧도 데려가자. 스콧! 이리와."
버키는 어른들처럼 입으로 소리를 내며 개를 불렀다. 스콧의 꼬리는 곧 휘휘 흔들렸지만 울타리 구석에서 땅을 파는게 즐거웠는지 개는 도저히 오지를 않았다. 결국 둘은 개를 그대로 놓아두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아래칸에 들어 있던 브라우니 통을 꺼냈다. 스티브가 락엔락 뚜껑을 여는 사이, 칼을 가져온 버키가 의자를 딛고 올라섰다.
"이만큼 자를까?" "그래, 접시 갖고 올게."
버키는 신중하게 칼 끝으로 브라우니를 몇 번 찔러본 끝에 사각형으로 브라우니를 도려냈다. 스티브가 가져온 플라스틱 접시 위로 옮기면서 끝이 좀 부서졌고 바닥에 엄지손톱만한 조각을 몇 개 흘리긴 했지만 먹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스티브가 그 동안 우유를 따라 왔고, 둘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포크로 브라우니를 잘라 먹었다. 그리고 난 뒤에는 거실로 가서, 스티브의 아버지가 사다놓은 체스판을 꺼내 체스를 두다가 나중에는 그걸로 전쟁놀이를 했다.
그리고 2층 청소를 마치고 내려온 로저스씨는 활짝 열린 냉장고와 마찬가지로 미처 뚜껑을 덮지 못한 우유통과 브라우니통, 초콜릿으로 찐득찐득해진 칼을 발견했다. 부엌 바닥을 핥느라 여념이 없는 스콧을 거실로 쫓아내고 정리에 바빠진 그녀의 뒤로 소파에 나란히 기대 잠든 금발과 갈색 머리통이 슬쩍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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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니까
다른 시간을 살면서 스티브가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것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를 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처음 물건을 사러 갔던 날 자신의 키와 맞먹는 진열대들을 앞에 두고 스티브는 무엇을 집어야 할지 한참을 막막해했다. 치약 하나를 사려고 해도 스무개가 넘는 브랜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낮은 가격의 물건을 사던 스티브는 점차 다른 것을 카트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광고를 보고, 혹은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훈련중 누군가가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물건을 고를 줄 알게 된 것이다. 진열대 앞에서 머무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간식거리를 사러 갈 때면 스티브는 여전히 수많은 브랜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섯살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거냐며 샘은 웃었지만 스티브도 정확히 자신의 망설임의 정체를 몰랐다. 눈 딱 감고 전부 다 사버려야겠다고 생각해도 손이 잘 나가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다고 불편할 정도는 아닌지라 그의 버릇은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사기 시작한 뒤에도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카트 손잡이에 팔꿈치를 괴고 수많은 초콜릿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나 벨기에의 이름을 붙이고 있거나 동물을 그려 붙인 포장지, 심지어 수퍼 히어로 초콜릿(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 삽화가 그려진 것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가 아이언 맨 그림을 보고 피식 웃었다)까지. 스티브는 이 많은 초콜릿이 유통 기한 안에 팔리기는 하는건지 궁금해졌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초콜릿 공장에서는 계속 초콜릿을 만들 것 아닌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먹는 것일까.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생각을 다독거리고 허쉬 초콜릿을 몇 개 집어 우유와 주스, 호밀빵과 과일들 위로 내려둔 뒤 계산을 하러 갔다.
*
제대하면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아. 왜, 먹을만 하지 않아? 먹다가 이 부러지겠다.
스티브는 버키가 초콜릿을 크게 베어무는 것을 보다가 자신 역시 뚝 자른 한조각을 입에 넣고 녹였다. 아군과 합류하려면 트럭 짐칸 안에서 앞으로 네 시간은 더 버텨야 했다. 제각기 겨드랑이며 다리 사이에 손을 끼워넣고 기대 잡담을 하거나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차에 버키가 초콜릿을 꺼낸 것이다. 스티브를 포함해 코만도즈 중 몇은 초콜릿을 나눠 받았다. 덤덤이 콧수염을 쓸더니 말했다.
나는 제대하면 오히려 이 맛이 그리울 것 같은데. 난 설탕을 더 넣는다면 고려해 보겠어. 몸이 편하면 뭐든 맛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것도 맛있겠지.
동감이라는 듯 웃음소리가 낮게 깔렸다. 누군가 담배가 생각난다는 말을 하고, 곧 수런수런 코담배와 입담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가만히 웃고만 있는 스티브의 옆에서 버키가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넌 좀 안 자? 어제도 통 안 자던데. 괜찮아, 돌아가서 잘게. 그러다가 코피 흘리면서 졸지.... 아, 나는 좀 자야겠다.
망 잘 봐라, 로저스 대령님. 버키는 팔짱을 끼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스티브는 늘어진 담요를 끌어다 버키의 무릎을 덮어 주었고, 모든 사람이 잠이 들자 이상하게 굽어진 버키의 몸을 조심스레 당겨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왜? 아냐, 그냥 자라고. 흠, 스티비가 오랜만에 착한 일을 하네.
*
버키는 문을 닫고 들어와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솜이 나온 쿠션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그는 문득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낯익어 보이는 이름이 포장지 위에 적혀 있었지만 버키는 몇 번 소리내서 읽어보다 그만두었다. 그는 잠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포장지를 찢어 속엣것을 꺼냈다. 이리저리 냄새를 맡아보던 그의 오른손에는 초콜릿이 녹아 끈적거리기 시작했지만, 버키는 서두르지 않고 나름의 조사를 마친 뒤에야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걸 먹기 싫어 했던것 같아,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먹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달고 끈적해진 입술을 핥으면서 눈을 감았다. 잠을 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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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bastian Stan talked about his mix tape at Buzzfeed QnA, so I made it based on his answer and wanted to share with others. Enjoy!
+ I don’t know why but whole playlist itself didn’t show up so I put the link at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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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as/Jack - Tempering
계단은 스물 일곱개다. 잭은 열 세번째 계단에서 열 네번째로 올라가기 전까지의 계단목에서 늘 머뭇거렸다. 계단 위에 깔린 두꺼운 양탄자와 그 위에 빛이 떨어지면서 보이는 먼지는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처럼 시끄러운 음악 속에 서서 술 냄새를 맡고 있을때조차 햇빛은 연기처럼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그 열기 속을 서성이다 결국 계단을 올라가면 문이 열렸다. "왔구나, 조나단." 그건 잭이 멜빵을 내려야 한다는 신호였다. 아버지는 그 동안 책상에서 일어나 셔츠 소매를 걷어올렸다. 잭은 멜빵을 내리고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려놓은 다음 신발까지 벗고 양말 바람으로 소파 앞으로 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미스터 벤자민은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네가 왜 이렇게 하는지 너에게 이해시켰지?" "네, 아버지." "네 입으로 다시 말해보아라." "철은 담금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단한 사람이 되려면...." "말 뒤를 끌지 말아라, 조나단."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 되려면 맞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좋다. 엎드려라." 아버지의 무릎에 배를 깔고 엎드리면 손바닥 아래로는 소파의 가죽이 느껴지고, 옷에서 담배냄새와 함께 향수 냄새가 났다. 잭이 엉덩이를 들어올렸을 때 아버지의 손바닥이 그의 엉덩이에 닿았다. 따뜻하고 동시에 조금 거친 손바닥이 엉덩이와 허리 근처를 움직이면 잭은 긴장감에 엉덩이를 움츠렸다. "가만히 있어라, 조나단." 찰싹, 잭은 뺨을 때린 여자의 손을 잡고 웃더니 허리를 끌어안아 키스했다. 찰싹, 찰싹, 하고 손바닥이 엉덩이에 와 닿는 감촉이 자꾸만 느껴졌다. 뜨겁고 따갑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이 하체를 강하게 틀어쥐는 감각이었다. 그 손은 뱃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잭을 결국 울게 만들었는데 아버지의 바지는 그것 때문에 젖고 체온이 옮아 뜨끈뜨끈했다. 배가 너무 눌려 잭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의 아버지는 잭이 옷을 챙겨입고 나갈때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도련님?" "자기 가슴?" 여자는 웃으면서 잭을 뒤로 밀어 눕혔다. 아마 이름을 불러야겠지만, 잭은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렸으므로 적당히 입에 익은 말을 했다. "Ma'am, 살살 해주세요." "명령 받는 주제에 말이 많은걸." 배 위에 올라오는 묵직함이 여자의 것인지, 아니면 기억에 남은 무게감인지 잭은 구분하기 어려워했다.입술에 여자의 입술이 닿을 때 잭은 생각했다. 지금 와서 구분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다른 생각 그만 두래도." 여자가 바지 버클을 풀려고 할 때, 잭은 더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놀자. 집에 가." "뭐?" "못 들었어?" 여자를 밀어내고 잭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돌아앉아 잭은 담배를 찾아 물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여자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세워가지구 싫증을 내? 웃기기는..." "돈 받았으니까 그만하고 가." "갈거야.이건 놓고 간다." 옷을 갈아입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다가 문이 닫혔다. 잭은 버티듯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잘근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그리고 일어나서 옷을 벗었다. 바닥 위로 옷이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잭은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쁜 조나단, 나쁜 잭..." 바짝 선 페니스에서는 어느새 프리컴이 흘러 미끈거렸다. 잭은 페니스를 쥔 채 엉거주춤하게 침대에 엎드렸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를 움직이기를 반복하던 잭은 팔을 뻗어 아까 여자가 두고 간 패들을 찾아 쥐었다. "으으, 흐, 흐으..." 침대보는 눈물과 침으로 젖어 축축했다. 잭은 망설였고, 또 주춤거렸지만 결국 패들을 세게 휘둘렀다. 살 위로 패들이 아프게 내려앉고, 허리 근육이 강하게 수축했다. "하, 으으, 아버지, 아...!" 패들이 내려온 자리는 곧 벌겋게 자국이 남아 달아올랐다. 잭은 앞을 만지던 손을 이제 뒤로 가져가며 아버지를 불렀다. 움직이던 서슬에 패들에 손목이나 허벅지를 맞았지만 달아오른 호텔 방 공기 속에서 잭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사정해 페니스 끝에서는 정액이 길게 늘어지는데도 쾌감은 올듯 말듯 애를 태웠다. 잭은 한번 더 패들을 휘둘렀고, 곧 자신의 손가락을 뒤로 세게 조이면서 벌벌 떨었다. 젖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잭은 절정의 끝에서 아버지의 입김을 뒷목에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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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lyner Breakfast
스티브는 부엌의 불을 켰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형광등에 내쫓겼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어 물병과 함께 계란을 네 알 집어냈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벤치에 얹은 다음에는 당근과 양파,감자에 우유통이 뒤를 이었다. 종이로 싼 햄 덩어리가 얹어진 다음에야 스티브는 냉장고를 닫았다. 물을 따라 반 쯤 컵을 비운 뒤에는 볼을 꺼내 계란을 깨서 노른자와 흰자를 따로 담았다. 껍질을 아무렇게나 싱크대에 던져두고 손에 묻은 계란을 바짓자락에 문지른 그는 한꺼번에 모아놓은 흰자를 거품기로 세게 젓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볼에 거품기 닿는 소리가 빨랐다. 볼 안의 걸쭉한 흰자는 거품기를 따라 하얗게 부서져, 거품이 크림처럼 소보록하게 올랐다. 거품기를 그대로 볼 안에 꽂아 두고 스티브는 양파 껍질을 먼저 벗기고 당근과 함께 씻어 크게 토막을 냈다.칼로 숭덩숭덩 자른 토막이 좀 큰가 싶어, 그는 눈물을 찔끔 흘려가며 좀더 잘게 썰었다. 감자는 이미 껍질이 벗겨져 있어서, 스티브는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감자까지 완전히 다져 노른자와 함께 볼 안에 쓸어넣고 휘저었다. 야채가 거품을 건드리면서 푹푹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우유통 뚜껑을 열고 꺼진 자리 위로 기울였다가, 왈칵 우유가 쏟아져나오자 부리나케 치웠다. "음...뭐 괜찮겠지." 뚜껑을 닫은 우유통은 다시 냉장고 안으로 되돌아갔다. 스티브는 이제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켜더니, 버터를 조금 잘라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벤치로 돌아와 햄 포장을 열었다. 그는 어제 시장 정육점에서 낱장으로 잘라온 염장된 돼지고기를 조금 찢어 먹었다. 결대로 찢어지는 식감 다음으로는 짭짤하고 감칠맛이 돌았다.손가락에 남은 기름기를 쪽쪽 빨아 없앤 스티브는 햄을 두장 벗겨내서 양파 냄새가 남은 도마 위에 놓고 잘게 썰더니 마찬가지로 볼 안에 붓고 휘저었다. "아참참." 볼을 젓다 말고 그는 부리나케 냉동실 문을 열더니 빵을 꺼냈다. 꽝꽝 얼어붙은 식빵 덩어리를 벤치에 몇 번 두드린 그는 이미 썰린 빵 조각을 떼어내서 토스트기 안에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그리고는 햄을 정리해 냉장고에 넣으면서 아스파라거스도 몇 가닥 집어내더니,냄비도 꺼내 물을 붓고 불을 끝까지 올리더니 소금을 탔다. "타겠다, 타겠어." 버터가 완전히 녹은 프라이팬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안그래도 높지 않은 불을 더 낮추고는, 볼을 가져와 팬 위로 쏟아부었다.양철 지붕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팬 바닥에 닿은 계란물이 익는 냄새가 왈칵 퍼져나갔다. 스티브는 찬장 아래에서 늘 쓰던 접시들을 꺼내 뜨거운 물을 틀어 담구고, 가느다란 철제 받침대를 꺼내더니 아스파라거스를 그 안에 세웠다. 그리고 물이 끓기 시작하자 아스파라거스가 완전히 잠기도록 냄비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은 뒤 힐끔 시계를 보았다.탕, 토스트가 튕겨 올라왔다. "좀 서두를 걸 그랬나..." 스티브는 물에서 접시를 건져내 물기를 훔치고 토스트를 올렸다.그리고 반쯤 익은 오믈렛 팬을 살살 기울여 반으로 접더니 휙 뒤집었다. 뒤집개에도, 팬의 뒤집은 자리에도 계란물이 묻어나지 않자 스티브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얼른 아스파라거스를 삶던 냄비의 불을 끄고 받침대를 건져올렸다. "찬물...깜빡했네." 스티브는 수돗물을 틀더니 아스파라거스를 헹궈내고 토스트 옆에 나눠 올렸다. 냄비를 싱크대에 던지다시피 놓은 그는 다시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 아직 뜨거운 아스파라거스 옆에 조금씩 썰어 올려놓고, 식탁으로 접시를 가져가 올려놓았다. 갈색 식탁 위에는 과일접시가 중앙에 놓여 있고, 후추와 소금통이 땅콩버터와 함께 나란히 과일 접시의 발치에 서 있었다. 스티브는 과일접시를 마주보도록 접시를 올려놓고, 한 접시 옆에는 주스를 따라 놓아두었다.그리고 다시 가스렌지 앞으로 돌아가 불을 끄고, 두툼하게 부푼 오믈렛을 나무 뒤집개로 눌러 반으로 잘랐다. 포슬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반원 모양의 오믈렛이 쪼개졌다. "버키, 일어나." 스티브는 오믈렛을 접시 위에 나눠 담으면서 침실 쪽으로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빈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돌려놓고 가스 벨브를 잠근 다음, 식탁을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이불을 온 몸에 둘둘 감은 버키는 베개 아래에 머리를 묻은채 아직 깊이 잠들어 깨어날 줄 몰랐다. 스티브는 소리를 죽여 침대를 돌아가서, 버키 쪽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고 작은 숨소리가 소근거렸다. 스티브는 조금 더 버키의 얼굴과, 내려감긴 속눈썹과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을 관찰하듯 들여다보다가 손으로 볼을 만지작거렸다. "버키." 가로로 긴 눈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잠으로 초점이 흐린 눈이 스티브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음기를 띄었다. 스티브는 따라 웃었다. "일어나, 아침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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