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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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La colegiala) 노래에 관한 메모
얼마 전 하이페리온 앙상블에서 루벤 펠로니가 노래한 '여학생 & 미국인이 되고프냐 메들리'를 링크한 김에 잠깐 덕질력이 발동돼서.
'여학생'은 1935년에 만든 '남자를 타도하라(=Abajo Los Hombres)'라는 페미니즘 계열 영화 주제곡이었고, 작곡자는 안또니오 마타스(Antonio Matas)란 인물이고 '안또니오 마타스와 리듬들(=Antonio Matas Y Su Ritmo's)'이란 악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왠지 '인순이와 리듬터치'가 떠오르네)
영화에 직접 출연해 노래한 가수는 까르멜리따 오베르트(Carmelita Aubert)란 분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912년에 태어났다. 영화 제작자는 발렌틴 곤쌀레스(Valentín R. González)라는데 'CNT-FAI'라는 아나키스트 연합에서 활동할 정도로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 영향이 아닐까 싶은데 오베르트 역시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페인 정부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 원곡이 따로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한 '성 제임스 병원(=St. James Infirmary)'. 다른 제목으로 '도박꾼 블루스(=Gambler's Blues)'. 마타스가 표절한 건지 다른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서도.
끝으로 AI에 요청한 '여학생' 가사 전문. 참고로 하이페리온 앙상블 가사와는 다르다. (남자 가수가 부를 수 있는 내용이 아님)
-=-=-=-=-=-=-=-=-=-=-=-=-=-=-=-=-=-=-=-=-=-=-=- Yo soy una pobre colegiala, que jamás salí de su pasión, por doquier y siempre tuve a gala, ser la dueña de mi corazón. 나는 가난한 여학생, 한 번도 내 열정에서 벗어난 적 없어. 어디서든, 항상 자랑스러웠어. 내 마음의 주인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Estudié la físigeografía, la retórica cursé en un mes, del violín conozco la armonía, y además un poquito de francés. 지리와 물리도 공부했고, 수사학은 한 달 만에 끝냈어. 바이올린의 화성도 알고 있고, 거기다 불어도 조금 할 줄 알아.
Nunca tuve amores, del amor no sé el sabor, pero quiero a un hombre, que me diga qué es amor.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사랑이 어떤 맛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걸 알려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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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DONGHYUN in MBZ Company Twitter Update ~
자경 Jagyeong | #Donghyun
musical <아나키스트 Anarchist>
2025.01.14-04.06
Cr: mbz_compan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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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금지된 책’ 금서들 모음
세계의 ‘금지된 책’ 금서들 모음 #금서리스트 #세계의금지된책 #출판검열 #역사속금서 #정치풍자문학 #금서배경이야기 #금서추천 #금서란 #세계문학금서 #표��의 자유 읽는 것조차 금지당한 이야기들 책은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기도,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정 책이 한 사회에서 ‘읽어선 안 될 것’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그 책은 ‘금서’가 되죠. 오늘은 전 세계에서 실제로 금지되었던 책들, 그리고 그 이유를 한 번 훑어보려 합니다. 1. 《아나키스트 요리책》 작가: 윌리엄 파웰 국가: 미국 금지 사유: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무기, 폭탄 제조법 수록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출판은 허용되었지만, 실제 테러 사건에 인용된 이후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책입니다. 2. 《악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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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나키즘 은 개인의 자주와 자유를 추구하고,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 자연생태적인 인간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학 문적 사상과 이론, 체제와 이즘이 명멸했지만 아나키즘만큼
21세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이고 대안적인 학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에서 보듯이 아나키즘은 절대적 교의를 부정한다. 이 처럼 아나키즘은 인간이 가지는 절대자유 이외의 일체의 교의 를 부정한다. 따라서 그 특성상 아나키즘을 하나의 이론이나 유형으로 도식화하여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 지만 아나키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유형을 정리할 것인가 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주성과 공동체라는 문제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의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아나키즘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면, 크게 상호주 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및 현대적 아 나키즘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상호주의(Mulualism)는 진정한 자유로운 노동시장이 있 다면, 반드시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프루동의 주저(품) 『소유란 무엇인가』 에 잘 나타나 있다. 프루동은 아나키에 의거한 권위는 질서의 적 이며, 소유와경쟁은전제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에게소유 (권이란정의롭지못한것이다. 즉, 소유(권)은어떠한경우라할지라도개인의자유를제한할수없으며, 소유를토대로하는어떤통치도, 어떤공적경제도, 어떤행정도가능하지않다. 프루동은, "소유는타도되었다!"고 선언하면서 공유와소유의종합이라할수있는 '제3의사회형태'를 '자유로 제시 하였다. 프루동의 상호주의는 그가 말년에 쓴 저서 『연방의 원 리 및 혁명당의 재구성 필요성에 관하여(Du Principe federatit et
de la nécessité de reconstituer le Parti de la Révolution) = €0o
연합주의(Federalism; Federalism)로 발전하여 러시아의 미하일 바 쿠닌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상호주의는 바쿠닌과 그 추종 자들에 의해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변용• 발전하였다.
둘째, 개인주의적아나키즘(Individual anarchism)은 어떠한 결 사체로부터도 독립된 개인의 자유에 중점을 두는 사상이다.
즉, 모든 집단• 사회• 전통 • 이념 등의 일체의 체제(시스템)에 의한 결정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의사를 강조한다. 이 의미 에서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사상의 선 구자는 헤겔좌파 출신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다. 그는헤겔의 '절대정신'에입각하여 '유일자=개인'의절대자유를주장하였다. 그 외 윌리엄 고드윈, 벤자민 터커(Benjamin R. Tucker), 조지아 워렌(Josiah Warren), 로버트 폴 볼프(Rober Paul Wor) 등 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주장한 사상가로 분류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에 따라 자본주의적 아나키스트(Anarcho-capitalist), 최소요구주의자(Minimalist), 리버테리언(Lberarian) 등으로 불리 기도 한다.
셋째, 사회주의적아나키즘(Socialist anarchism)
프루동이주장한지배와권위에더하여자본에대항하여노동자들의결속과결합강조
모든형태의임금제도를공격(사유재산의폐지와생산수단의공유는물론)
“그능력에따라각자에게”를 “그필요에따라각자에게”로라는슬로건
각자의욕망에따라누구라도공동의창고에서필요한것을가질수있도록하는코뮌주의사상부활
Collectivism, Mutual Aid, Anarcho-communism, Anarchy-syndicalism등이이에포함된다
넷째, 현대적아나키즘(Modern anarchism)
위의세가지유형의아나키즘은전통적아나키즘이다
평화주의적아나키즘은톨스토이주의라고불리기도한다.
낯설고불온하며, 위험한사상으로인식되고있다.
아나키즘은그��느정치이념보다비정치적이다.
누구의지배도받지말고누구도지배하지마라
"권위는 질서의 적"이라는 그의 사상은 "소유와 경쟁은 전 제적”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프루동에게 있어 소유권은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만일 소유(권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권리는 정의롭지 못 한 것이다. 물론 프루동도 소유와 경쟁이 가지는 유효성과 필 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소유와 경쟁이 특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 은 1840년 출간된 주저(초) 『소유란 무엇인가(Quest ce que la propriete?)』(이하, 「소유,)에 잘 나타나 있다.
「소유』에 언급된 이 말은 '최초의 아나키즘이론가'인 프루
동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회자되 고 있다.
소유란 무엇인가
프루동은 "소유는 불가능하다"란 제 목 아래 『소유』 제4장에서 "소유는 물 리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불가능하 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논 증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표지
"공리: 소유란 소유자가 자신의 표찰을 붙인 사물에 대해 행사하는 불로수득
권(droil daubaine)이다."를 내세우고, 이를 논증하기 위하여 열 가지 명제를 제시��다.
첫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 (#)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가 용 인되는 곳에서 생산은 효용가치 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 이다.
세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이 일정 한 경우 생산은 소유가 아니라 노동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 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회는 소유에 의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압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자신이 취득한 것을 소비함으로써 잃어버리고, 저축함으 로써 폐기해 버리며, 자본화함으로써 생산에 적대하기 때 문이다.
여덟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의 축적력은 무한대인 반면 소유가 작용을 미치는 수량은 제 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소유에 대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열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평 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프루동은 위의 열 개의 명제를 통하여 그가 내세운 공리를 논증하면서, “소유는 불가능하다.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 결론에 덧붙여 "우리는 소유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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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 ... 난 폭력을 좋아하진 않지만... 사상적으로는... 아나키시트에 가깝긴 하다... ... 그래도 김원봉은 너무 큰 인물이라서... 부담스럽군...ㅡ,.ㅡ ... . . . #약산 #김원봉 #아나키스트 #너무 #큰인물이라서 #부담!(Jeju에서) https://www.instagram.com/p/Bs518_jHIuZ/?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rq9sephqw5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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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신자유주의 짱짱맨 #아크릴led사인 #아크릴네온사인 #네온사인제작 #아크릴pop #포인트사인 #창문간판 #돌출간판 #룸넘버 #led아크릴간판 #아나키스트 #신자유주의 #박근혜 #애견미용 #골프존 #번호판led(양재시민의숲어딘가에서) https://www.instagram.com/p/CJGG-B6FntP/?igshid=14luf9dewha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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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 2007.02.15 - 2017.05.30, Director, City Rehab Center. . (다들 이미 알더라) 사실, 한 달 전, 6월 1일에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그곳을 #떠났습니다. 벌써 한 달이 되었네요. #일희일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늘 하던 대로,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아무일없는것처럼. 원래 하던 일 하면서... . 한 달 동안, 전혀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실패 했습니다. 하루 8시간을 들이던 일이 빠졌는데도, 무슨 놈의, 영양가 없는 그놈의 일들이 그렇게 몰려 오는지... 더 바삐 지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효우겅듀 유치원 바래다 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 #10년. 32세 - 42세. 촛불 마냥, 바람 앞에 위태롭기만 했던, 하지만 10년 동안 꺼뜨리지 않았던 그 불꽃을 껐습니다. 나의 30대 를 보낸 그곳을 #떠남. . #야생 에 돌아 왔습니다. 전 원래가 #아나키스트 같은 #허세돌이였어요. 고향으로 돌아 왔어요. 깨끗이 처리 못한 똥꼬와 똥은 찜찜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나이기에 그대로 안고 갈랍니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저항 하지 마라! 너와 네 동료의 존재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두어라. #방관 해라! 그들이 너를 이용하도록. #침묵 해라! 그들이 너와 네 동료를 함부로 다룰 수 있도록." #끝. #끝줄. #다음이야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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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정치인류학자인 제임스 스콧의 신작 <농경의 배신>, 서론만 읽어도 전율을 멈출 수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묻자. “역사학이란 우리가 당연히 여기기 쉬운 것들이 어떻게 지금처럼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전복적인 학문이다. 심층 역사의 매력은, 예를 들면 산업혁명, 마지막 최대 빙하기, 혹은 진을 형성하게 된 수많은 우발적 사건을 밝혀냄으로써, 아날학파 초기 세대의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말한, 단순한 공적 사건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장기적 과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요청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층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요청은 한 생���종으로서의 인류 역사 전체에 달하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아날학파의 요청을 능가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내가 몸담고 있는 시대정신이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실증하는 시대정신이다. History at its best, in my view, is the most subversive discipline, inasmuch as it can tell us how things that we are likely to take for granted came to be. The allure of deep history is that by revealing the many contingencies that came together to shape, say, the Industrial Revolution, the Last Glacial Maximum, or the Qin Dynasty, it responds to the call by an earlier generation of French historians of the Annales School for a history of long-run processes in place of a chronicle of public events. But the contemporary call for “deep history” goes the Annales School one better by calling for what often amounts to a species history. This is the zeitgeist in which I find myself, a zeitgeist surely illustrative of the maxim that “The Owl of Minerva flies only at dusk." James C. Scott,<농경의 배신> #Book #Grain #History #State #Anarchism https://www.instagram.com/p/B6szoWIlS1i/?igshid=evjjaeqqe1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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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무산자들의 공생의 시도를 위해 가마가사키 코뮌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당신과 어떻게 투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 투쟁의 공간을 만남의 장소로 하자!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전략이며 실험이다. 일본 혁명 운동의 무덤. 지금 그곳에서 우리는 기획하지 않은 점거투쟁을 시작했다. 오사카 가마가사키. 한때 일본 최대의 요새바 (일용직 노동자들의 거리)였으나 90년대 버블의 붕괴와 함께 노숙자의 거리가 되어버린 이곳. 도심 곳곳으로의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빈민가. 자본이 노리고 있는 미래의 재개발 후보지. 빈민가와 번화가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성벽처럼 자리잡은 건축물이 바로 아이린 노동복지 센터, 통칭 센터이다. 센터는 값싼 노동력을 구하는 토목건설업자와, 그날그날의 밥을 위해 일을 찾는 일용직 노동자를 중개하는 노동시장으로 1970년대 오사카시정부가 지은 건물이다. 지난 3월 31일 우리는 이 곳을 점거했다. 내진보강이 필요하다는 구실하에 상업시설물로 리노베이션을 하기 위해 센터의 재건축 및 폐쇄의 계획이 발표된 것은 작년 2018년 여름.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이곳을 점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센터는 노동시장일 뿐 아니라 노동자와 노숙자가 비바람을 피하고 쉬어가는 곳으로 기능해왔기에 센터의 폐쇄계획에 대한 항의는 있었다. 노조와 시민운동조직들은 집회를 ��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재판투쟁을 준비해왔다. 이는 노동자와 노숙자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유지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는 오사카시 (현재 시장은 경제상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와 노골적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정당 유신회 소속)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정당성 이상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투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센터의 폐쇄는 저지되었다. 점거는 오늘��� 계속되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중요한 것은 그 원인과 경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직업활동가와 학자들의 사회경제적 분석, 예상, 논리를 뛰어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이런저런 이유와 요인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센터를 지키는 신체적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라는 것만이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이다. 다양한 신체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내걸로 시작한 이 점거에 걸려있는 진정한 내기는 우리가 어디로 함께 가는가라는 물음, 그것 뿐이다. 이 물음이야말로 몇십년간 기성의 일용직 노동자 운동/노숙자 운동이 만들어 온 정석과 지평을 뛰어 넘는 것이다. 가마가사키. 이 공간이 갖고 있는 힘은 일반사회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법한 일. 즉, 다른 존재들이 함께-다르게-있는다는 시도가 일상속에서 오랜 시간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가마가사키 주민 대부분은 종교인, 활동가, 범죄자, 일용직 노동자, 예능인, 노점상, 전-광부, 농촌에서 올라온 계절노동자, 퇴역한 자위대원, 낙오자 등의 “뜨내기"들이다. 이런 혼합 속에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다양한 뿌리를 가진 자들이 하나로 통합된 사상 없이 지금도 그 함께-다르게-있음을 살아가고 있다. 함께-다르게-있음의 힘은 가마가사키 여기저기에서 발휘된다. 90년대부터 이어져온 공동취사는 기독교인, 전일용직 노동자, 공원에 모인 사람들, 노숙자 운동의 지원자, 좌파 활동가, 아나키스트, 자원봉사를 하는 시민등이 함께 만든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있다가 불편하면 떠난다는 식이 아니라 문제 속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신체성이 나날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마가사키 바깥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것은 센터 대부분이 비어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센터의 폐쇄를 막고 점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노숙자와 이웃들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있지만 지역 사람들과의 왕래가 깊어졌다고 하긴 힘들다 즉 센터 점거라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아직 노숙자와 이웃주민들이 섞이는 함께-다르게-있음의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함께-다르게-있음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 호소문을 읽고 있는 여러분, 가마가사키 바깥에서부터 오는 분들이 그것을 가져와주길 원한다. 센터에서 자는 노숙자와, 구경오는 이웃들과, 혹은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무명의 사람들과의 함께-다르게-있기라는 실험을. 우리는 지금에야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만들어온 “뜨내기"와 관계를 맺는 역량을 활용해야한다. 단지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의 유지라라는 틀을 너머, 투쟁의 역량을 키우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시도하자. 어떤 우리 친구들이 말하듯, “파업의 주체가 노동자 계급이었다면, 점거의 주체는 누구라도 될수있다. 누구라도 주체가 ���다. 점거를 하기로 결정하고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질서에 맞서는 누구라도"이다. 센터폐쇄 저지 행동과 점거의 시작부터 젊은 프리카리아트들은 이 투쟁에 참여하고 점거 공간 속에, 일상 속에 함께 있는 삶을 시도했다. 가마가사키에조차 널리 퍼져있는 시민적 생활양식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와 맞서 도시에 사는 방법과 우리의 삶의 교차시키는것. 즉 새로운 일상=투쟁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공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계속 시도할것이다. 우리는 이 거대 건축물 안에 새로운 무산자들의 “마을”을 만들고 싶다. 센터 구석에 파란색 방수포를 깔고 그 위에 텐트를 몇개 설치해 수십명이 “견디고 있다"는 상태 이상의 것을 만들고 싶다. 100명을 위한 식사를 마련할 부엌을 건설하고 싶다. 어떤 젠더의 사람이라도 “그냥 여기 있다”고 말할수 있는 힘을 형성하고 싶다. 이 “공백”을 이용해 공유의 풍요로움으로부터 촉발되는 조직화를 하고 싶다. 스스로를 지원자나 활동가로 규정하고 억압된 자들을 대변하거나 대행하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모두가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투쟁을 하는 힘을 키워가고 싶다. 이 투쟁이 당신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의 의도를 넘어 어떻게 변해가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호소한다. 이 점거투쟁에 접속할 열정을 갖고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이 투쟁의 성공은 센터 점거의 지속이 아니다. 점거는 언제든 경찰에 의해 제거될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그들에게 물리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싸움은 이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가 갖고 있는 힘/국가를 품는 힘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마가사키 밖에 있는 친구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들고 이 투쟁에 찾아오는 것. 그렇게 이 투쟁속에서 시도되는 무산자들의 새로운 공생의 형태에 참여하고 또 다른 투쟁과의 예상치도 못했던 관계를 추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투쟁과 다른 투쟁이 만남으로서 형성해가는 힘이야말로 오늘날의 혁명성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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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2016 / 메리 잰슨 도로시 본 캐서린 존슨 /
로그 원 / 3 1 운동 태화관 정재용(학생) / 민중 / 혁명 /
해적 2014 / 역사 / 역할놀이 / 수양대군 성삼문 / 백이 숙제 / 이탁오(명) 분서 /
서울역 2016 / 암호화폐 / 바쿠닌(아나키스트) 사회주의 없는 자유란 특권이자 불의 이며 자유없는 사회주의란 야만이자 노예제라 확신한다 /
땐뽀걸즈 2017 / 거제도 조선소 / 다큐 /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코스모폴리탄) 사회주의 아나키스트(평등한 공동체) /
필로미나의 기적 2013 / 마틴 필로미나 안소니 / 종교 /
마나나의 가출 2017 / 조지아 / 추첨제 /
카르텔 랜드 2015 / 멕시코 미초아칸 지역 / 다큐 / 마누엘 미렐레스(의사) / 자경단 vs 카르텔 & 국가 /
소공녀 2017 / 미소 한솔 / 위스키 담배 남친 / 미니멀 라이프 /
밀그램의 실험 1961 권위에 의한 복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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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공산주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 Anthony Minnesota (@fluidefox) Jun 16, 2022 June 16, 2022 at 10:37AM via Twitter https://twitter.com/fluide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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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검은 깃발, 『일제하 한국 아나키즘 소사전』

오장환 엮음,
소명출판, 2016
-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멈춤 없이 항일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그룹들의 활동을 사전 형태로 정리한 1차 자료집.
- 책은 기본 개념, 아나키스트 활동가, 아나키스트 활동, 중요 문건까지 네 부로 나눠 정리하고 있다. 다만 내용은 꼼꼼한 정리, 예를 들어 개념에 대한 설명에서 깊이 있는 정리라기 보다는 간략한 요약 수준에 멈춘다. 그래서 개념 별로 논쟁적이거나 문제가 되는 부분 등이 조금 불만족스럽게 다뤄지기도 한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책이 1차 자료집, 운동사를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 참고할 사전 형태의 책인데, 정작 내용은 간략하다 못해 부족하다 싶은 방식이니 뭔가 형식과 내용 사이에 괴리가 심한 듯.
- 그래도 평소 접하지 못한 식민지 아나키스트들의 중요 문건을 읽어볼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다. 그리고 당대 사회주의자들의 접근과는 역시 참 다르구나 싶어져서 흥미있다. 대부분의 글이 '비참한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극적 묘소, 그리고 당연히 이런 절망적 상황을 뒤짚는 건 혁명 뿐이며, 이 혁명은 민중에 의한 투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는데, 이 투쟁의 방식이 테러로 귀결된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상황이 작동하지 않는 주체의 주관적 선택, 결단만이 중요하게 된다.
- 이리 저리 아쉬운 책이지만, 그래도 역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도 그렇겠지만) 정말 식민지 조선은 다양한 사상에 기반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싸웠구나, 정말 지치지도 않는구나 싶어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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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도바이러스 바이러스의 1과(科). 탄환모양을 한 데서 J.L. Melnick, R.M. McComb(1966)가 그리스어 rhabdos(막대)를 붙여 명명하였다. 바이러스입자는 60×80nm로 가늘고 길며 한쪽 끝이 편평한 탄환상이고, 피막 안쪽에 나선상(외경 18nm, 내경 10nm, pitch 7.5nm)의 뉴클레오캡시드를 함유한다. 게놈은 11,000~12,000염기길이의 외가닥RNA, RNA중합효소를 함유하며 감염 직후의 바이러스 mRNA합성에 관여한다. 적혈구응집능력, 용혈능력은 없다.세포질 내에서 증식하며 특유의 봉입체(封入體), 즉 네그리소체(Negri body)를 형성한다. 베시쿨로바이러스속(Vesiculovirus)의 수포성 구내염바이러스, 릿사바이러스(Lyssavirus)속의 광견병바이러스, 에페메로바이러스속(Ephemerovirus)인 소유행열바이러스 등이 같은 소속의 바이러스이다. 곤충바이러스(예를 들면 sigma virus)나 식물바이러스에도 이와 형상이 닮은 바이러스군이 있다. 아나키스트 4 이적선 게임 판타지 장편소설 - 이적선 로스펠 후작에게 말도 안 되는 퀘스트를 받은 시렌.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노력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그는 친구인 노상태에게 매크로를 받게 되고 하루에 10만 번의 검을 휘두르기 위해 매크로를 실행하고 잠을 자��데…. 깨어난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2억6천7백만…??? 그날부터 전설이 시작된다. 이적선 게임 판타지 장편소설『아나키스트』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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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다른 개체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법이나 서로 적대하지 않고 경쟁하는 법, 욕심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사용하는 법 등은 서로 경쟁하고 적대하며 약육강식의 밀림을 만들어온 인간에게 여러 시사점을 준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자연의 동물들에서 냉혹한 생존 경쟁과 적자생존만이 아니라 상호 부조를 확인하고 진화론의 방향을 수정하려 한 점도 인간 사회에 대한 걱정과 맞닿아 있었다.
그런 점에서 토머스 실리의 <꿀벌의 민주주의>(하임수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라는 책 제목이 참 참신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꿀벌에 관심을 둔 적도 없고 건축에서나 참고하지 정치와 민주주의가 꿀벌 세계에서 영감을 얻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대를 품고 책을 펴보니 꿀벌에 미친 생물학자 토머스 실리가 흥분할 만하다 싶을 만큼 꿀벌들은 나름의 의사소통 수단과 공동의 의사 결정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 <꿀벌의 민주주의>(토머스 실리 지음, 하임수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우리는 여왕벌이 꿀벌 세계의 지배자라 여기지만 여왕벌은 번식의 역할을 맡을 뿐, "벌집의 운영은 일벌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꿀벌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보금자리의 선택에서도 여왕벌은 지휘나 지도를 하지 않고, 유전적으로 선택되고 그렇게 길러진 정찰벌들이 선택을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찰벌'들'이 선택한다는 점이다. 많은 벌들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려면 서로 간에 의사를 소통하고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꿀벌에게 그런 어려운 과정을 밟을 방법이 있단 말인가? 실리는 '꿀벌의 춤'이 그 열쇠라고 얘기한다. 꿀벌이 8자 춤을 추는 횟수와 춤을 추는 시간으로 꿀벌들은 보금자리가 위치한 곳과 그 상태를 서로 소통한다. 정찰벌 각자가 찾아온 정보를 토대로 상대방에게 호소해서 하나의 대안을 결정한다.
실리는 이런 과정이 일종의 선거와 같다고 얘기한다. "여러 후보자(집터 후보지), 후보자들의 유세 경쟁(8자 춤), 상이한 후보자를 지지하는 유권자(특정 장소를 지지하는 정찰벌), 여전히 중립적인 유권자 집단(아직 어떤 장소도 지지하지 않는 정찰벌)이 있"기 때문이다. 실리는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나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꿀벌의 집단 결정을 '통합 민주주의(unitary democracy)'라고 부른다.
이런 비교를 통해 실리는 "그 원리를 배움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집단 결정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실리는 이런 꿀벌의 교훈을 다섯 가지 교훈으로 정리해서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교수 회의에 직접 적용했고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그 다섯 가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교훈 : 공동 이익과 상호 존중에 기초한 개인들로 결정 집단을 구성하라.
두 번째 교훈 : 집단적 사고에서 지도자의 영향을 최소화하라.
세 번째 교훈 :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라.
네 번째 교훈 : 논쟁을 통해 집단 지식을 종합하라.
다섯 번째 교훈 : 응집력, 정확도, 속도에 대한 정족수를 활용하라.
책의 많은 부분은 꿀벌 연구의 선구자인 마르틴 린다우어와 실리가 했던 실험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과학자들의 끈기와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꿀벌의 교훈을 인간 사회에 그리고 민주주의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단 실리 스스로 "꿀벌 집단을 단순히 수천 마리가 모인 낱낱의 개체가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 기능하는 하나의 살아 있는 독립체로 생각"해야 꿀벌의 독특한 생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꿀벌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어떤 사상이 탄생될까? 시스템적으로 연결된 유기적인 사회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전체의 이름으로 개체성을 부정하는 전체주의는 이런 구상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간 사회가 꿀벌 집단처럼 하나의 초개체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초개체가 과연 바람직한 상태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실리 자신도 꿀벌과 인간 사회의 결정 과정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각 개인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한 표를 행사"한다는 점이나 "꿀벌 집단의 정찰대가 마을 회의의 시민과 달리 논쟁 중에 이루어지는 정보 교환을 지켜볼 수 없고 그런 탓에 전 과정을 조망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꿀벌의 의사 결정을 인간 사회와 연결시키는 이유로 실리는 집단 행동의 통제권이 소수의 지도자가 아니라 다수의 구성원에게 분산된다는 점, 꿀벌들이 우호적인 경쟁을 벌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실리는 꿀벌들이 적대적인 경쟁이나 갈등을 거치지 않고 합의를 이룬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우호적인 합의인가? 실리는 합의 형성을 위해 자동적으로 논쟁을 중단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자기 주장을 펼치던 꿀벌들이 스스로 춤을 중단하는 현상('누수')을 긍정한다. 정찰벌들은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려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논쟁을 새로운 벌들에게 넘기는 현상을 보면서 실리는 "정족수 방식이 합의 방식과 달리 결정 속도와 정확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를 과학 커뮤니티에 대입해 실리는 "나이 든 과학자와 나이 든 정찰대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억지로 논쟁을 끝내는 반면 꿀벌은 아주 자동적으로 논쟁을 끝낸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사람이 조금만 더 꿀벌처럼 행동했다면 과학도 좀 더 빨리 진보했을는지 자못 궁금하다"고 얘기한다.
과학이 더 빨리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에서 합의를 위한 포기는 최상의 가치일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소수자들의 끈질긴 문제제기와 도전으로 발전해 왔다. 민주주의라는 꽃은 선거나 합의가 아니라 갈등과 충돌을 통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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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prabook.com/web/karl.polanyi/3732148#gallery ) <이탈리어판 서문_카리 폴라니 레빗> 여러 사회권과 지구적 공공재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아버지가 보편적인 기본 소득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경제적, 둘째는 사회적, 마지막이자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정치적인 이유다. 경제적 논리는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 번 반복된 바 있다. 굳이 케인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생계 자체가 힘든 사람들에게 기본 소득을 준다면 이들은 이를 소비재에 지출할 것이며, 따라서 생산자들에게 더 많은 시장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가속화되고 있는 기술 혁신의 속도로 볼 때, 광업과 제조업에서는 물론 운수업과 상업 등의 산업 활동에서도 필요한 노동 투입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는 지구적 규모에서 적용되는 진실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볼 때 임노동 고용에서 벌어들이는 소득만을 사회적 생산물 분배의 유일한 자격, 심지어 으뜸가는 자격으로 보는 것조차도 논리에 닿지 않는다. 갈수록 불안정해져가는 노동 시장의 성격을 볼 때, 기본 소득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당장 입에 풀칠을 할까라는 걱정으로 축 처지는 일 없이 안심하고 자신들의 경제 활동을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의 사회적 논리는 정의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는 것은 곧 사회 응집력에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적 생산물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서 협상을 이뤄내야 할 때 국가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경제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앞서 나갈 능력을 잃게 된다. 좀 더 평등하고 여러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사회들이 경제 성장 달성에도 더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널리 인정되고 있다. 경제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효과적인 경제 발전을 위한 자원의 동원은 궁극적으로 사회 응집의 정도와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정의의 정도에 좌우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정도가 높을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땀 흘려 노력하고 희생하면 그 결과로 사회적 생산물에서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를 얻게 될 것이���는 희망과 믿음을 갖게 하여 엄청난 활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기본 소득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의 자유'라는 문제를 걱정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르치던 1950년대에 그가 뉴욕과 캐나다 사이를 통근하면서 점차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게 된 문제가 있었다. 그가 '평균주의'라고 불렀던 획일성과 순응성의 경향으로, 이는 사람들이 사회의 지배적 여론 행세를 하는 견해들에 대해 반대하기를 꺼려하는 태도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이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술이 고도로 진보된 사회는 그 내부에 전체주의의 맹아를 품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글로 적었을 당시에는 아직 매체의 역할이 명확히 드러나기 전이었으며, 또 대기업들이 매체를 마음대로 통제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것처럼, 공식적인 관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질 경우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사실상 누구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도 아직 벌어지기 이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규범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것이 영국 고전 자유주의의 한 미덕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금리 소득의 혜택을 누렸던 특권적 상류 계층에게만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금리 소득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한 광대한 식민지와 방대한 해외 투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영국, 프랑스, 비엔나, 그리고 서유럽 전반의 이른바 '아름다은 시절 belle epoque'이었다. 이 시대는 위대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어디까지나 전체 인구의 일부만 향유하도록 한정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리스 고전 문헌과 친숙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경탄하여 사회 안의 독특한 한 영역으로서 경제를 발견한 공로를 그에게 돌린 바 있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노예들의 노동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그 가족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혜택을 누리고 살았으며, 그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문화적 표현이 사실상 특권적 엘리트들만 향유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폴라니는 창의성이 인간의 기본 속성이자 욕구라고 믿었으며, 또 그것을 행사할 역량은 인류 전체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민중문화popular culture란 보통 사람들의 지혜, 지식, 전승, 상식 등이 합쳐진 집단적인 것이었다. 이는 대중문화pop culture라고 알려져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사회마다 그 민중문화의 집단적 자원이 모두 다르게 마련이며 여기에 뿌리를 박은 각기 다른 민주주의를 창조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함축된 것이었다. 이는 폴라니가 1953년에 집필하여 몇 년 ��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바 있는 에세이 <장 자크 루소 : 자유는 가능한가?>에서 개진한 생각이다. 이 매력적인 짧은 글은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루소의 저작들 속에서 정부의 궁극적인 기초는 민중문화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지혜, 지식, 전통, 상식 등의 저수지에 두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고 있다. 그가 삶을 마치기 며칠 전에 손으로 쓴 노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봉건적인 나라의 핵심은 특권이며, 부르주아적 나라의 핵심은 재산 소유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나라의 핵심은 바로 사람들로서, 여기에서의 집단적 존재란 바로 문화를 함께 향유하는 공동체를 뜻한다. 나 자신도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p12~15) <경제, 기술, 자유의 문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내놓으려 한다. 자유로운 제도란 협동과 경쟁처럼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원리가 발현된 것에 다름 아니며, 이는 반대의 입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경제의 기술적·조 직적 측면들과는 독립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제도적으로 표출되는 형태는 개성, 인격, 성격 등에 대해 어떠한 보상을 설정하느냐로 결정된다. 제도들이 자유를 지향하는가 아닌가의 여부는 그 사회가 여러 종류의 공민적 자유 civic liberties에 대해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이, 교역 활동은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그가 말한 의미에서의 개인적 자유와는 별개의 문제다. 교역과 영리 활동을 조직함에 있어서 개개인들이 어떠한 자유를 누리는가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것 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제도를 둘 것인가의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후자는 한 사회가 지닌 전반적 문화의 문제이며, 그 사회의 문화가 어떠한 가치를 강조하는가는 경제적 요인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회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가는 경제적인 것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철학의 토론을 통해 결정할 문제다. 산업사회에 정말로 넘쳐나도록 풍부한 것 하나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를 이롭게 할 만큼을 넘어서는 양의 물질적 안녕이다. 만약 정의와 자유를 유지하고 삶에서 의미와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산에서의 효율성, 소비에서의 절약, 행정의 합리성을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한다고 해보자. 그래도 산업 문명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물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사가들이 철학자들에게 보내야 할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정의와 자유를 모두 추구할 만큼의 물적 여유가 있다. (p63~64) 이 모든 주장에는 분명히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기술과 생태적 환경은 인간 사회의 기본 구조에 결정적인 제한을 가하며, 이데올로기 또한 거기에서 깊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경제적 요인들이 문화에 그저 제한을 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화를 결정해버리는 일은 오로지 시장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일���니다. 경제가 사회의 모습과 형식을 결정해버리는 일도 오로지 시장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일입니다. 시장 사회에서 경제결정론은 거부할 길이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시장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보다 옛날 시대에 대한 묘사와 서술로서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서는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p69) 모두 알고 있듯이, 이 모든 종류의 소득은 시장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상이한 여러 시장들 즉 노동력, 자본, 토지, 그 밖에 각각 이 소유한 갖가지 것들의 사용권이 거래되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기업가의 경우에만 그들의 서비스에 직접 해당되는 시장이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리스크를 감내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것이 대규모 산업에서 혁신 기업가가 사라지고 대신 안전하게 봉급을 받는 경영자가 들어서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경제의 성격을 더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다. 나의 논점은, 우리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우리가 '경제적 동기들' 이라고 부르는 것, 즉 굶주림에 대한 공포와 이득에 대한 희망에 완전히 기대고 있다는 우리의 가정이 옳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굶주림과 이득을 경제적 동기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곧 삶의 경제 영역을 새롭게 조정하고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미리 꺾어버리는 짓이 아닐까? 이 점을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해야만 한다. 시장경제가 여러 물질적 재화의 생산 및 분배를 담당하게 되어 있으며, 또 이 시스템의 작동을 보장하는 것은 굶주림과 이득(그 정확한 의미는 인위적으로 규정된다.)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경제적 동기라고 부르는 것도 정당한 일이다. 우리 경제 시스템의 작동이 사람들이 갖는 이 두 가지 동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따져보아도 과연 이 두 가지를 경제적 동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것들인가? 미학적 동기들이 미학적이며 종교적 동기들이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의미에서도 그러한가?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동기가 성질이 분명한 어떤 경험에서 나온 결과이자 또 그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굶주림이란 본질적으로 전혀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누군가 굶주리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이를 해결하기 ��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가 고프다는 것에서 우회생산을 조직할 방법이 나오는 것은 분명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굶주림 때문에 그 사람이 혼자서 강도질을 벌이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경제적 활동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뇌에서 생겨나는 이득에 대한 충동 또한 특별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이득이라는 생각, 또 그에 대한 강력한 충동이라는 게 설령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이런 것들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 및 분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일종의 정교한 경제적 메커니즘이 나타나서 그 둘 사이에 무슨 연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면 물론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그렇게 되면 애초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만다. 이 문제는 대단히 현실적인 중요성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경제 시스템이란 필연적으로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굶주림과 이득이 경제적이라고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의 경제적 동기들에 근거하여 굴러가게 되어 있다고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행동의 자유를 협소하게 만드는 이보다 더 끔찍한 논리도, 이보다 더 비과학적인 논리도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이에 따라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기술과 사회 정의라는 기준에 적응하도록 변형시킨다는 과제 또한 이제 전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p81~83) <제도의 중요성> 과거에 전쟁이 없었던 시대가 여럿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전쟁을 모르는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사이비 현실주의에서 사이비 이상주의로 이야기를 옮겨보겠습 니다. 이상주의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것만으로는 전쟁 없는 시대를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의 기대를 품는 종류의 이상주의로는 오히려 더더욱 그런 시대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사실상 지난 30년간은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식의 이상주의가 지배했던 시대였으며, 우리 시대에 여러 번 그것도 전대미문의 규모로 세계대전이라는 참사가 벌어졌던 것 또한 바로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근대사에서 양심적 전쟁 거부 운동이 실질적으로 출현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종류의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상주의는 1) 전쟁이라는 것 자체도 하나의 제도이며 또 제도로서 여러 기능들을 갖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2) 전쟁을 잘못된 정신 상태나 기질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며, 3)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고 봅니다. 즉, 전쟁이 빚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이윤을 얻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지만, 전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이상주의는 철학적으로 볼 때 모든 기본적 사실들조차 무시한 추상적인 이상주의이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위험을 불러오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p111~112) 집단 간의 이익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가운데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일정한 영토를 갖는 집단들 사이에서는 국경선의 문제가 그 하나가 될 것입니다. 자유주의적인 이상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순전히 허구적인 성격을 가진 것임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이는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도를 연구하는 이들 말고는 그 누구도 국경선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도대체 왜 그걸 놓고 그 난리법석을 피우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고로, 그 끔찍한 과정 전체를 초래한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 결과들 또한 허구적인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이는 사랑의 인격적 측면이란 순전히 관습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으며, 결혼을 해봐야 사랑에 따르는 문제들은 그대로 존재하므로 결혼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상당히 미성숙한 유형의 자유연애 사상을 내건 아나키스트 사이비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을 보자면, 이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의 국경선에 대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는 사람들이 옳습니다.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누가 그 공동체 성원이며 누가 성원이 아닌지의 문제가 최소한 한 세대 이상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면 그 공동체의 핵심 기능들은 그 어떤 것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공동체들은 국가를 단위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 공동체가 만족스럽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일정한 충성심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공동체 소속이며 누가 소속이 아닌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떻게 충성심을 갖는 시민들을 길러낼 수 있겠으며 또 그들이 충성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영토를 갖는 집단들의 경우에는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국경선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성격을 가진 공동체라면 그 국경선이 확정되고 이에 대한 분쟁의 위험에 대해 안심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법과 질서, 안전과 안보, 교육과 도덕, 문명과 문화 등을 전혀 제공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국경선에 대해 위협이 가해진다면 그 공동체는 정상적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며 문명적 삶의 모든 형태들이 멈춰버리게 됩니다.그런데 국경선이란 항상 이를 마주한 두 나라 모두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는 두 나라 모두에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국경선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정이 내려져야만 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제도가 없다면, 문명적 삶의 형태들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종류의 이상주의는 전쟁을 대체할 제도를 찾아내는 일 또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왜냐면 그러한 대체물은 어떤 것이든 반드시 새로운 종류의 충성심을 내포하게 되어 있으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 질서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불러일으키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현실의 과제에 실제로 직면하여 이를 해결하겠다고 떨쳐나서지 않는 한 이러한 도덕적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상주의적 평화주의자들은 그저 우리가 편견을 벗어던지고 몇 가지 환상을 쫓아내고서 자신들이 품고 있는 계몽된 평화의 열망에 모두 다 동참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게 어디 놀라운 일일까요? 전쟁은 하나의 제도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몰인격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병사들도 적군을 인간적으로 증오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이는 계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적 증오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빗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전쟁을 인간적 문제라고 보는 것인가요? 인간 세상의 사실들은 제도적 사실들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에만 인간적 사실이 됩니다. 법원의 판사를 보면서 그가 판결을 내림에 있어서 몰인격적인 태도를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이는 우편배달부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배달부가 설령 인간적으로는 옆집이 아니라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고 해도 옆집 주소로 배달되어야 할 편지를 당신에 게 주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요. 이 모든 이야기는 아주 당연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라는 사실에 막상 부닥치게 되면 이를 망각하고 전혀 다른 색조의 주장을 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모두 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 상황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저 사람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있기만 하다면 분명히 우리가 그 사람한테 아무 악감정을 가질 리가 없지 않겠는가? 국제적 상호 이해란 나라들 사이의 상호 이해이며, 나라는 또한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개인들 사이에 상호 이해를 증진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또한 나라들 사이에도 상호 이해가 생겨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제도라는 것의 성격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또한 하나의 제도입니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군대, 국가, 정부 등의 제도들뿐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처사입니다. 사라들이 이렇게 전쟁에 맞닥쳐 껄껄매다가 너무나 자명한 상식적 사실들조차 무시하고 마치 국제 관계에서 무슨 '인격적' 요소 따위가 있다고 상정하여, 거기에 미신적인 희망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고도 슬픈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노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면, 전쟁이 필요 없도록 해줄 다른 제도들을 수립할 유일한 기회도 잃게 되고 맙니다. 나의 논지에 한 매듭을 짓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예를 들어 보여드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즉, 전쟁이란 인간의 약함이나 질투심이나 서로 간의 증오심 혹은 그 밖의 형태의 오류나 오해에서 반드시 야기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는 원치 않는 전쟁이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재앙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음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p118~121) 평화의 열쇠는 이렇게 정책에 있습니다. 국제적 상호 이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은 바로 정책입니다.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바로 정책의 여러 법칙들입니다. 1. 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원하지 않는 전쟁을 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경우 대단히 중대한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 지구의 거의 4분의 3에 이르는 지역이 진공 상태로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2. 정책의 두 번째 목표는 모든 전쟁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원자력 에너지가 사용 가능하게 된 오늘날, 전쟁이란 곧 지구 전체와 그 위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위협이라는 점은 명명백백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의 대립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정책이란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냐는 문제이며, 그 상황에서 이런저런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냐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결정적인 문제는 누구의 이익이냐 또 어떠한 상황이냐는 것이 됩니다. 동체의 경우 단순히 목숨을 이것이 바로 정책의 도덕적 문제입니다. 생존의 단위가 되는 것은 누구인가? 그 생존이란 무슨 뜻인가? 인간 공동체의 경우 단순히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 생존의 정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의 정체성은 바로 그 삶의 방식으로 정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라는 것에도 이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세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곧 스스로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러시아가 세계를 보는 방시과도 또 영국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도 다릅니다. 정책이란 곧 특정 상황에서 특정 개인들의 이익에 대한 정의를 함축하는 것이며, 또 이에 입각하여 내리는 결정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정책 형성의 전 과정에서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두 부분 모두에서 도덕적 문제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정책'이라는 말�� 성립할 수 없는 형용 모순입니다. '그 자기중심적’의 ‘자기’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또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인가요? 이게 문제가 되는 질문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 세계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세력들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큰 질문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달성할 수 있는 정책들은 그 다음에야 비로소 정식화 될 수 있게 됩니다. a. 국내에서 온 나라를 통일시킬 것. b. 국외에서 동맹국들을 확보할 것. 자기 공동체만의 이기적인 이익을 다른 나라들이 지지해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힘을 불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의 지지가 필수입니다. 이것이 19세기 영국 정치의 비밀이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적용되는 진리이며,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분별 있는 현실주의란 도덕적·정신적 사실들 또한 현실적인 것으로 발아들일 줄 아는 현실주의입니다. 이는 정치의 기틀을 이루는 기초적 현실입니다. 감상적인 이상화는 사실을 왜곡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그(녀)의 여러 문제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사랑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나라를 사랑한다면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랑이 줄어들 리는 없습니다. 강연을 시작할 때 여러분께 내 이야기가 보통의 뻔한 이야기로 끝을 맺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아마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국제적인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p124~126)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기본적 특징은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에 과범위한 경제적 재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이러한 재조정은 가진 나라들과 가지지 못한 나라들 사이의 것이라기보다는 지구상의 모든 다양한 나라들 사이의 재조정이며, 그것도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국내 정치의 주된 임무는 국제 경제 영역에서 큰 재조정이 벌어질 때마다 그것이 가져올 대규모의 부담(사실상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에 대처할 수 있는 사회 조직을 자기 나라에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궁극에 가면, 사회의 계급 구조가 국제 경제의 재조정에 장애물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오직 여러 초월적 이상을 공유하며 긴밀하게 통합된 공동체들만이 대규모의 경제��� 희생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의 도래를 불가피하게 만들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각국이 싸우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국제적인 평화 질서의 수립에 결실을 볼 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그 질서의 제도적인 기초를 다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제적 삶을 일반 민중들의 통제 아래에 두고, 이를 통해 재산 소유에 따른 사회의 균열을 없앰으로써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적 국민국가들을 실질적인 공동체들로 변형하는 것이다. (p137) 저를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만, 이는 명확히 제한적인 의미에서일 뿐입니다. 오늘밤 저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솔리니는 평화주의에 대한 파시즘의 입장을 이렇게 언명한 바 있습니다. “평화라는 해로운 공준에 근거를 둔 모든 ��리는 파시즘에 적대적이다." 무솔리니가 여기에서 '평화라는 해로운 공준'이라 비난하고 있는 교리를 저는 굳건히 지지합니다. 이는 평화는 '선한 것'이라느니 따라서 그것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느니 하는 이상주의 혹은 감성적 주장(또 이와 똑같이 무의미한 여러 다른 주장)이 아닙니다. 이 공준은 인간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는 현재 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적·경제적 진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봉하는 것은 바로 이 특정한 진단입니다. 이 진단에 따르면,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에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현재 투쟁의 핵심에는 바로 전쟁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지지하는 이를 평화주의자라고 부른다면, 저는 확신에 찬 평화주의자입니다. 오늘밤 저는 이 점을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만약 평화주의라는 말을 '싸우지 마라' 라는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본다면, 저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제도가 설령 언젠가는 폐지된다고 할지라도, 제가 행한 진단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부터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드리운 전쟁의 위험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현실에서 항상 전 세계에 걸친 상호의존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치적 형식 또한 필연적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문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구 위의 모든 나라들이 정복과 복속을 통한 세계 제국의 틀 안에서, 혹은 국제적 협력을 통한 세계 연합의 틀 안에서 그 나라들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한 정치체의 구속력 안에서 자리를 잡아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평화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무수한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그 규모도 갈수록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경제적 상호의존입니다. (p141~142) 우리의 주장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인간 생활의 국제적 조직은 반드시 복구되어야 하며, 이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구는 종래의 기초 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자기 나라의 경제 체제가 통제 불능의 국제적인 힘들이 마구 짓밟고 다니는 축구장이 되도록 허락할 정부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경제 체제가 지속되는 한, 새로운 기초 위에서 이를 조직하는 일 또한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현대 계급 사회는 국제적인 협력을 확립하는 데에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희생을 떠맡을 수 있을 만큼 경제 영역에서 높은 수준의 통일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역적이고 영웅적인 결단이 없다면 그러한 노력은 시작도 할 수 없으며, 또 거의 극복 불능의 여러 장애물들에 막혀 성공을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웅적 결단의 도덕적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정한 공동체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봉착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제 영역에서 여러 나라의 세계 연합을 확립하는 과정은 느릴 수밖에 없으며, 이 사실은 그 연합이 최종적으로 완성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국내 영역에서는 우리의 현존하는 경제 체제를 진정한 경제적 공영체economic commonwealth로 바꾸어야 합니다. 세계 연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 하며, 그러한 대가를 치를 능력과 의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러한 공영체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국제 문제가 계속 국내 문제를 주도해야 하는 이유가 ���기에 있습니다. 국제 협력에 반대하는 강대국들은 다른 나라들에게 자기들의 제국주의 전쟁을 강요할 것입니다. 이유야 무엇이던 국제 체제 쪽을 선호하는 강대국들은 그렇게 반대하는 강대국들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경향을 띠게 될 것입니다. 국제 협력이라는 해법으로 나가려는 노력은 이렇게 고통스럽고 또 오래 걸리는 과정이 될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의 현존하는 경제 체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협동을 일궈낼 단위로서는 본질적으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숙명적인 요소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경제 협력을 국제적 규모에서 이루어낸다는 것은 초미의 절박한 과제로서,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국제 체제도 작동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나라가 전쟁과 고통스런 패배와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치르는 승리 등을 거치면서 진정한 경제 고영체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인간적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국제적 정치 질서에는 전혀 가까이 갈 수가 없을 것이며, 그 진전은 바로 그러한 진정한 경제 공영체로의 전환에 비례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p149~151) <사회과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국가 지도자가 단순한 정치가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객관적 사오항에 대해 더 뛰어난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여론 환경에 대해서도 더 뛰어난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도 일반 정치가도 표면상의 여론이라는 영역에서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한계를 갖습니다만, 국가 지도자의 경우에는 표면상의 여론에 근거하여 행동하더라도 그 목적은 상황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이는 모든 정치가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정치를 넘어서는 더 큰 목적들 또한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 지도자는 부분적으로는 여러 조건이 바뀌기 전까지도 공공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다면) 여러 조건에 있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도 자신의 권력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론 환경을 움직이는 데에는 충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여러 정치적 자극이 낳는 효과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내고 마침내는 긍정적인 여러 반응의 봇 물이 터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p208)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의 평민들을 군비 무장의 ‘함정’에 빠뜨렸던 덕에 아테네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게 곧 입증되었다고 한다면, 아리스티데스가 자신의 지도 아래에 초석을 닦아 건설했던 제국은 모든 헬레네 세계국가들의 진정한 안보 연맹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록 그의 후임자들 손에서 이 거대한 동맹체는 아테네가 다른 동맹국들을 지배하는 체제에 가깝게 변질되었고 이것이 결국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는 아리스티데스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러한 2천5백 년 전의 정치가 및 국가 지도자에 대한 나의 설명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 초의 미국이라는 환경으로 가봅시다. 여기에서 경제 붕괴가 불러온 사회 전체의 심리적 공황과 파국을 피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또한 1930년대 후반의 경우 교묘한 책략과 현명한 판단력을 발휘하여 고립주의에 젖어 있는 미국의 대중들에게 국제적인 과제를 떠맡을 준비에 나서도록 했던 것은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록 너무나 과소평가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히 기적이 일어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비밀은 바로 정당 정치인에 불과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국가 지도자로 변모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이 항상 똑같이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공 여론의 심층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당장의 위험과 미래에 다가올 위험이라는 객관적 상황에 대해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국가 지도자가 이 다가오는 변화를 감지하고, 혹시 재난이 이미 진행중이라면 그 위기를 극복할 여러 가능성들을 판별해냅니다. 국가 지도자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은 미약한 정치력이라도 이를 지렛대로 삼아 현실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을 때까지 객관적 상황 자체를 바꾸어낸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공공 여론의 심층에는 역사를 움직이는 여러 힘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깨워낼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표면의 공공 여론을 다루는 것에만 급급하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해봐야 정치가일 뿐입니다. 단순한 정치가를 넘어 국가 지도자가 되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방금 보았듯이 묵직한 내용의 대답이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유형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사회학적 시각을 갖춘 여론 조사가들의 작업에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p241~215) 주제와 방법에 있어서 변화가 나타나게 된 이유들 베버가 서거한 뒤 30년 동안,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전 세계의 경제 조직은 환골탈태의 변형을 겪어왔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지각변동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결코 이것들만이 원인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확립된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이 전면에 강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게 아니었다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만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 시장이라는 경제 조직은 모든 경제 활동이 시장을 통해서 조직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소비재는 그것을 시장에 판매하여 얻을 수 있는 소득으로 인해 시장에 나타나게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매하며, 이는 그들이 시장에 다른 것들을 판매하여 얻은 소득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2. 이러한 시장 시스템은 토지, 노동 등의 여러 생산요소들 또한 시장을 가지게 되며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재산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라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면 됩니다. 3. 이렇게 생산요소들 또한 시장을 갖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자기조정 시장 체제가 출현합니다(시장경제). 그 결과 자본은 수익성에 따라서 하나의 투자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이동할 수 있으며, 더 높은 이윤을 달성한다는 목적으로 여러 생산요소들을 판매하며 또 (원리상) 재결합시키게 됩니다. 4. 인간과 자연까지 시장의 자기조정 체제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물론 유토피아적 발상입니다. 그런 시스템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인간도 자연도 파괴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사회가 취한 자기 보호의 조치들과 한데 어울려 작동하기도 했습니다(이중 운동). 1) 공�� 입법과 노동조합, 2) 농산물 관세와 토지 입법, 3) 관리 통화 제도, 이 세 가지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기 보호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자기조정 체제를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는 민족주의를 함축하고 있었으니, 이는 국제 무역 시스템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에 대해 (영국이라는 최강국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나) 정치체들이 취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5. 시장경제에서는 교역과 화폐가 시장을 통해서 또 시장 안에서 조직됩니다. 교역이란 시장을 통한 재화의 이동이며, 화폐란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교환 수단입니다. 하지만 교역과 화폐는 시장의 기능으로서, 이들이 함께 교환학의 세 기둥catallactic triad을 이룹니다. 시장경제란 이들을 부속물로 동반하게 되어 있기에, 시장경제가 무너지게 되면 세계경제와 연관된 제도적 장치 모두가 하나의 환골탈태의 변형을 겪게 됩니다. 교역, 화폐, 시장은 이제 그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는 우리 경제의 정치학과 경제 이론에 가장 위험한 위기가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p220~221)
하지만 말리노프스키는 민속지 기록자들과 인류학자들의 접근법에 전통적으로 깔려 있던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눈부신 공격을 감행했으며, 여기에서 원시 사회의 경제학이라는 사회인류학의 새로운 분과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누구보다도 경제사가들이 지극히 큰 관심 을 가질 만한 분야입니다. 신화에나 나오는 저 '개인주의적 미개인' 이라는 관념은 이제 죽어 땅에 묻히게 되었고, 그 대극에 있던 '공산주의적 미개인' 이라는 관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개인들의 여러 제도와 우리 제도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심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공동체적 소유라는 것도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다지 특출난 것이 없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토지가 부족이나 씨족의 소유였던 것은 맞습니다만 그 '공동체 소유'라는 용어의 내용을 거의 공허하게 만들 정도의 개인적 제권리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졌습니다. 마거리트 미드는 이것을 인간이 토지를 소유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일정한 면적의 토지에 '귀속'하는 것이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개개인들에게 부여된 자의적 처분권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양의 땅뙈기를 경작하는 개개인들의 책임과 약속입니다. 개인적 소유이든 공동체 소유이든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 재산이라는 관념 자체를 적용할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토지 소유권이라는 말 자체도 별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트로브리안드 제도 사람들 또한 분배는 대개 선물과 답례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그 행위가 벌어지는 사회학적 상황에 따라서 여덟 개의 다른 종류로 구별하기로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는 비경제적 종류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 묻어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제도적으로 구별된 별개의 경제 시스템(여러 경제 제도의 네트워크)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노동도, 여러 물건의 처분과 분배도 경제적 행동 동기로, 즉 이익이나 지불을 목적으로 혹은 자기 혼자만 굶주림에 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굶주림과 이득이라는 개인적 행동 동기로 빚어지는 행위 특징들의 총합을 경제 시스템이라 일컫는다면, 모종의 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말의 뜻을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된 행동 특징들로 보아야 하며(이것이 경제사 연구와 관련이 있는 유일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으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이는 그저 그 밖의 다른 비경제적 제도들이 작동하는 데서 나오는 부산물이었을 뿐입니다. (p228~230) 이렇게 전체적인 결론을 추려보면 그 결과가 참으로 헷갈립니다. 고대 사회의 식민지, 전쟁, 계급 등은 결코 현대적 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교역과 화폐의 사용은 근대 초기 정도의 규모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은 상당히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시주의자들이나 그 적대자들이나 공히 범했던 오류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현대성’과 ‘원시성'의 문제는 교역이나 화폐가 아니라 시장 메커니즘의 존재 여부로 판가름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한 사회가 '현대적'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시장 제도들의 영향력이 한 공동체의 전체 문화, 특히 경제생활에 얼마나 깊이 침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시장의 여러 제도는 시장적인 성격을 갖는 구체적 동기와 상황들, 기술과 문화적 특징들과 불가분으로 얽혀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생활에 나타나는 투기와 광고, 숨통 끊기 가격 경쟁과 각종 로비 등과 같은 뚜렷한 현대적 특징들은 바로 시장 시스템의 효과와 부산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 '현대적'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애매하거나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현대적이란 말은 시장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특징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또 우리가 마땅히 예측할 수 있는 바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현대적인 생산 조직이란 곧 시장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사회 계급들이란 특정한 시장에서 결정되는 각종 소득을 통하여 형성된 계급들입니다. 또 현대의 사회적 투쟁이란 경제적 계급들, 즉 시장 계약에 의해 그 지위가 결정되는 집단들 간의 투쟁이며, 여러 갈등 또한 그러한 시장 계약을 둘러싼 갈등입니다. 뷔허가 자급자족적 오이코스를 언급할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모든 이야기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로트베르투스가 자신의 오이코스 개념에 적용한 기준이 바로 이 교환과 시자으이 부재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이 원시 사회의 원시적 성격을 주장하면서 뜻했던 바는 그저 모종의 단일한 시장 시스템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지만, 로트베르투스도 뷔허도 이러한 자신들의 결론을 명시적으로 내걸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교환의 여러 제도라는 포괄적인 개념 안에 교역, 화폐, 시장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제도적 분석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이들은 교역, 즉 먼 곳에서 재화를 획득해오는 행위를 시장과 다른 것으로 구별하는 작업도 하지 않았고, 교환과 무관한 여러 화폐 용법을 시장과 분리하는 작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 가 지를 하나의 제도적 삼위일체로 융합시켜버렸습니다. 그 결과 노동 분업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교역, 화폐, 시장이 한꺼번에 따라붙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의미론상의 약점은 화폐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교역의 존재도 가정할 수 있으며, 또 교역이 나타났다면 항상 시장의 존재 또한 가정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다시 이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여러 사실들 특히 조직화된 시장의 존재 여부와 같은 결정적인 사실들에 대해서조차 확실히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p248~249) 여기에 고대사의 새로운,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시장이라는 방법의 탄생지가 바빌로니아가 아니라 그리스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경제 활동의 통합에 있어서 나타나는 시장적 형태와 비시장적 형태의 문제는 초점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한 비시장적인 방법은 상호성과 재분배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둘을 묶어서 짧게 계획경제라고 부르겠습니다. 시장적 요소들과 계획경제의 관계 또한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바빌로니아의 여러 경제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가가 그 시험대가 될것입니다. 이집트보다 메소포타미아가 더 부각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 활동은 엄청나게 증가하는 가운데(그 활동에는 교역과 화폐 사용은 물론 넓게 보아 영리적 거래에 해당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오히려 시장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였으니까요. 따라서 새로운 경제사학의 개념적 도구들의 설명력을 보여주는 시험대는 메소포타미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폐의 예만 따져보겠습니다. 시자잉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국내 경제에서는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화폐가 거의 쓰이지 않은 상태인데, 가치표준으로서의 화폐는 말할 것도 없고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까지도 쓰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밖에도 대답을 기다리는 비슷한 성격의 문제들이 여럿 있습니다. 초기 바빌로니아, 즉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서는 은(銀)이 가치표준으로서 기능했지만, 신전의 회계는 경제의 핵심 부문에서 지불 수단이었던 보리를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사실상 보리는 조세, 지대, 임금 등에서 유일한 지불 수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세겔의 은에 대해 여러 재화들의 일정한 양을 등가로 선언하는 법령들에 나타나는 등가 관계는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등가 관계에 대해 그토록 놀라울 정도로 안정성을 지켜냈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등가 관계를 안정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현실의 측량 표준 자체를 바꾸어 가면서까지(이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적 안정성을 지켜내려 했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덧붙여서, 도량형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작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고안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문제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문제들에 만족스러운 답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지식의 한계를 예단하지 않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정도는 지금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경제가 시장경제의 완성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움직여왔다는 식의 전통적인 세계상으로는 과거를 만족스럽게 파악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시장의 요소들은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 계속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으며, 통합해야 할 영토가 갑자기 팽창할 경우에는 시장 조직이 실패를 겪게 되고 비시장 요소들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역사의 여러 다양한 시대에 시장 요소들과 비시장 요소들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또 가장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크게 보아 비슷한 문제가 다시 인류에게 제기된 현재 ���리고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도 큰 중요성을 갖는 문제입니다. 고대사 연구는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 문제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개념 작업 도구들을 담은 상자의 하나임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p262~264) <위기와 전환> 오늘날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자유가 아닌 독점이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독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 경제의 결과물"이 아니며, 오히려 바로 이것이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형성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 사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오늘날의 이른바 경쟁이라는 것을 그 대립물, 즉 재산 소유 계급에 의한 무소유 계급의 착취로 전화시키는 것 또한 바로 이 "경제외적인 힘"(마르크스)인 것이다. 잉여가치는 자유시장경제의 가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모순을 이루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강제력에 기초한 재산 소유가 자유로운 경제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의 생각은 오이게 ㄴ뒤링의 다음과 같은 인용문에 처음으로 포착된 바 있다. '노예제와 임금 결박과 같은 제도들은 폭력에 기초한 재산 소유와 쌍둥이처럼 엮여 있으며, 이것들은 사회-경제 체제를 구성하는 헌법적 형태로 순수하게 정치적 성격을 가진 것들로서 간주되어야 하거니와, 지금까지는 오로지 자연적 경제 법칙의 결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틀로서만 여겨져 왔다.' (p270~271)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라고 할 정의롭지 못한 경제적 구성 그리고 이를 떠받치는 착취 등은 모두 노동의 진정한 자유에 여러 제약이 가해진 결과물들이다. 자본주의의 2차적 문제들 또한 이와 동일한 근원에서 생겨난다. 잉여가치에서 완전히 해방된 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은 생산과 분배를 조화롭게 규제하는 장치로서 가능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합당한 임금 이외에 그 이떤 '사업가이 이윤'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은 오직 등가의 노동가치만을 실현할 뿐 은페된 잉여가치를 실현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경제 위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이 사회적 필요욕구와 상충되도록 만드는 '이윤 경제'의 여러 변태적인 형태 또한 사회의 이익을 보장하는 탁월한 장치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렇게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협동이 협업의 일반적 형태가 된다. 생산과 소비는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맺는 구조 안에서 다름 아닌 시장에 의해 조직될 것이며, 유통 과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중간 거래, 투기, 그 밖의 모든 기생적 행태들은 완전히 배제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제 기계적이 아닌 유기적 형태로 조직될 것이다. 사회의 모든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 생산, 그리고 자기가 속한 협동적 사업체들의 좁은 범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신이 처한 환경에 비추어 개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들은 생기 넘치는 직관으로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협동적인 이타주의의 충동을 둘 다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충동들을 계속해서 재검토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자신의 인격 전체를 쏟아부어 그 충동을 보존하고 또 풍부하게 키워나갈 것이다. 경제 위기의 두 번째 원천인 시장에서의 조직화의 결핍은 이렇게 유기적 방식으로 시정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체 유기체를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세포라고 할 능동적 개인을 파괴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착상에서 보자면, 이러한 사회적 삶의 상은 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유기적 실체를 떠올리게 한다. 경제란 살아 있는 과정이며, 제아무리 정밀하게 천재적으로 착상된 것이라고 해도 그 어떤 기계적 장치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통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여러 필요욕구, 능력, '사회의' 여러 이익을 결정하고 또 이것을 기초로 삼아 이에 조응하는 시스템을 세우겠다는 희망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해봐야 개인들이 지닌 여러 필요욕구에도, 그들의 다양한 능력에도, 또 그들의 이익에도 전혀 부응하지 못한다. (p271~272) '통계에 의한 결정'이라는 방법은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측량하는 것은 그 크기와 양에 따라 수가 결정되는 사물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 여러 상품, 노동시간, 토지 단위, 농산물 생산량, 마력 따위는 '숫자로 셀' 수 있지만,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욕구와 능력, 작업 강도와 질, 토지의 비옥도, 어떤 발명이 가져올 여러 기술적 가능성 등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살아 움직이는 경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이러한 요인들뿐이다. 경제의 촘촘한 혈맥 조직에는 숫자로 분석할 수 있는 시장을 불빛으로 삼아 명쾌하게 조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실제 경제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정신에서 명료하게 의식으로 떠오르는 부분을 우리의 무의식적 정신 유기체(의식은 이것의 기능일 뿐이다.) 안에 숨어 있는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장은 말 그대로 특수한 감각기관이어서, 이것이 없다면 경제의 순환 시스템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그 지각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할지의 여부는 바로 자유로운 가격 형성에 달려 있다. (p273)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시장을 수단으로 삼는 방법으로, 시장은 무수한 가격들이 엮어내는 복잡한 거미줄의 중심에 서서 사��들의 필요욕구에 맞는 재화를 내어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시장을 활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경우에는 직접적인 배분이 이루어진다. 현실은 전자이며, 후자는 국민경제에서나 세계경제에서나 가능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 가격 형성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비록 이론상으로는 인간적 가격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해도, 이때의 가격은 현존하는 여러 필요욕구에 대해 현존하는 여러 재화가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표현하는 분배 지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 가격은 유동적인 지수일 뿐 현시된 여러 필요욕구와 현시된 노동의 노고를 보여주지 못하며, 대신 그러한 현시된 모습들 배후에 숨어 있는 필요욕구와 노동 수입의 변화의 모멘트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들 자체는 현실에 존재하는 양이 아니라 경제의 유기적 생활 과정에 나타나는 미분값들 일 뿐이다. 이러한 가격은 현실에 나타날 때에는 규칙적이고 비교적 일관된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 가격이 순전히 기능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가려진다. 가격이란 상품이 갖는 성격이 아니라 생산자들 사이의 여러 관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양상은 무수한 경제 세포들이 빽빽하게 엮어내는 거미줄로 가려져, 우리는 오로지 그것들이 통합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결과가 바로 가격이다. 통계에 따라서 여러 가격이 스스로를 규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공장의 여러 설비에 맞춰 자기 팔에 감은 혈압계가 오르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짓이다. 그리고 시장경제와 시장이 없는 경제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있을 수도 없다. 이는 마치 사람의 수족을 다 잘라 모아놓고도 그 하나하나에 계속 피가 힘차게 돌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협동적 사회주의가 시장경제와 동의어가 되는 이유다. 이때의 시장경제란 잉여가치의 수탈을 여러 상품의 가격 안에 은폐하는 현장인 자본주의적 이윤 경제의 무정부적 시장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 생산물이 등가 관계로 교환되는 유기적 구조를 갖춘 시장이다. (p274~275) 그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적 건설을 위해 실제로 쓸 수 있는 수단들을 간단히 나열해보고자 한다. 1. 경작 가능한 토지를 경작하고자 하는 의사와 능력을 가진 모두에게 무상으로 배분하는 완전한 토지 해방 2. 모든 농업 노동자들에게,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대규모 사업체로 조직한 모든 형태의 생산자 협동조합 및 여타 협동조합들에게 완전한 재산권을 보장할 것. 3. 이에 상응하는 대규모 산업 기업체들을 조직된 경제의 여러 기관들로 대표되는 만인의 경제적 자치로 이전할 것. 유기적인 경제적 자치 (평의회와 주민회의 시스템)와 만인의 민주적 대의제를 완벽하게 분리할 것. 후자는 경제를 교란할 권리를 전혀 갖지 않을 것. 4.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완전한 유기적 평등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동등하게 대표되는 형태의 대의제만을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한다. 생산적 노동력과의 자유로운 임금 협정. 5. 모든 가격 및 임금의 규제, 토지의 징발과 분할 Requisitien und Rayonierung, 모든 관세와 쿼터, 여타 자유 시장에 대한 모드 완전히 중지할 것. (p279~280) [민주주의에 대한 파시즘의 도전] 이러한 긴급 상황이 전개되던 과정에서 각국의 민중 정부는 산업체제에 대해 대대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경제 체제라는 것이 외부의 간섭을 흥정을 통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곧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의 경제 체제는 여러 면에서 그 작동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지만, 거기에다가 간섭까지 받으면 그 작동이 장기적으로 더욱더 불만족스러워집니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체제 아래에서는 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종종 그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들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업을 해결하려고 취한 조치들이 오히려 실업률을 더 높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긴급 상황으로 인해 자유주의 경제학은 더 이상 계속 적용될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해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산업 지도자들이 민중 정부에 적대적으로 되어 민주적 정당 체제의 권위를 잠식하려 들게 됩니다. 그리고 대규모 독점 자본big business은 그 대안으로서 자신들 스스로의 정부를 제안합니다. 산업의 우두머리들captains of industry, 즉 자본 소유자들 및 그들이 임명한 경영자들이 사회 문제를 직접 관리하는 것입니다. 민주적 의회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고 비상 입법을 법령화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적 조치들까지 지향하는 경향을 띠니까요.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정치적 메커니즘도 산업의 메커니즘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회 전체가 옴짝달짝 못하는 교착 상태에 처할 위협을 받게 됩니다. 정치 체제와 산업 체제 양자 모두가 급작스럽게 붕괴하는 게 아니냐는 공포가 전 국민을 사로잡게 됩니다. (미국에서처럼) 만약 금융과 대규모 독점 자본의 지도자들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태라면 이 운동은 여러 정치 세력의 독재를 지향하게 됩니다(이것이 뉴딜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만약 민중 정부가 힘을 잃게 되면, 이 운동은 자본주의 기업과 산업체 소유자들의 독재를 지향하게 됩니다. 파시즘이 출현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은 파시즘입니다. 민주주의로 경제 체제에 효과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그래도 경제 체제에 대한 간섭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도전의 내용입니다. 파시즘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p326~327) [파시즘의 해결책] 파시즘의 특징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져오는 변화에 드러납니다. 파시즘을 연구하는 데에 열쇠가 되는 것은 파시즘 운동이 아니라 파시즘의 여러 제도입니다. 이를 연구하면 민주적 제도들이 폐지되거나 활동을 멈추어버린 현대 사회의 그림이 드러납니다. 일하는 민중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산업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 조직들 모두가 폐지된 상태입니다. 산업 영역에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소유 체제는 지속됩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또한 유지됩니다. 파시즘의 본질적 주장은, 이러한 조건에서라면 자본주의에 대해 흔히 나오는 세 가지 주된 불평불만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거래의 침체와 경제 계획의 결여, 피고용자들의 고용 불안, 정당화될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소득격차가 그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파시즘이란 자유, 평등, 평화를 영구적으로 제거한다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개혁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일단 노동계급의 영향력이 제거되고 나면, 자본주의적 산업과 국가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표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이른바 법인 단체주의 자본주의로 대체되며, 민중적 민주주의는 파시즘 국가로 대체됩니다. 이것이 바로 법인 단체주의 국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앞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이 법인 단체주의가 아직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파시즘 국가가 과연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산업에 간섭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전쟁 산업의 팽창입니다. 즉 어떤 체제나 궁극적 해결책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독일은 어떨까요? 1933년 신분제 국가를 향한 운동은 중지됩니다. 정책......전쟁 산업의 시대. 조직의 원리들은 모호하지만 경쟁적인 것이며, 어떤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시즘의 도전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1. 기술적 혹은 조직적인 도전 : 이 세 가지 면에서 파시즘은 과연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을까요? 2. 정치적 도전 : 제국 건설이라는 것이 과연 평화의 문제를 해결할 해법이 될 수 있을까요? 3. 도덕적 도전 : 과연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감수할 수 있을까요? (p327~329) [금융 공황이 가려버린 사회주의의 전망] 1 시장경제에서 비롯되는 여러 위험은 바로 시장경제의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한 사항들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결과이다. 이러한 사항들 중에는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전통적 장치들의 철폐도 포함되어 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 체제에서는 농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에서 관습과 법률이 그러한 안전장치를 제공하였고, 산업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를, 농민들에게는 토지의 경작권을 안전하게 보장해왔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는 전통적인 노동과 토지의 조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유로운 경쟁적 시장이라는 발명품이 들어섰다. 이 독특한 제도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격변으로 인하여 사회 존속의 기본 요소들(인간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이 학대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쟁적 노동 시장이든 부동산 시장이든 아무 견제 없이 기능하게 내버려둘 경우 인간은 물론 인간의 환경까지도 파괴하게 되어 있다. 인간과 환경을 마치 상품들, 즉 내다 팔기 위해 생산된 물건인 양 여기는 모종의 독특한 허구가 벗어날 길 없는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다. 노동 시장의 메커니즘을 홀로 작동하게 내버려둘 경우 전면적인 파괴가 벌어질 위험이 생겨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 노동을 하나의 상품으로 다룬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내다 팔기 위해 생산된 것인 양 취급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이란 인간의 한 활동이며, 고유한 의미에서의 상품과는 아무런 닮은 점이 없다. 이는 인간이 심리적, 생리적, 도덕적 존재로서 갖는 여러 기능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노동을 담고 있는 인간 존재 자체가 '내다 팔기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의 '공급' 또한 판매를 위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일련의 동기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동의 판매'라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무수한 여러 허구를 전제해야 한다. 우선 모든 개인을 노동하는 자들과 임금을 주면서 일을 시키는 자들 두 편으로 나누는 제도가 잇으며, 인간 세상의 유용한 활동이 이 제도를 통해서만 벌어지도록 세상 질서를 조직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마치 '노동'이라는 상품이 있어서 그것이 노동자에게서 구매자로 이전되는 것인 양 해석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가정들이 허구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특정한 계약의 주체로 정의하는 법적인 허구나, 또 '노동'이라는 상품을 희소하고 유용한 사물로 보는 경제적인 허구나, 그 자체로는 실제의 세계와 무관하게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 시장이라고 묘사되는 조직이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따를 때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가이다. 그 요구대로 따르게 되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신의 '노동'을 대상으로 삼고서는 팔아서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 여기는 만큼의 노동시간(12시간이든 14시간이든 16시간이든)을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판매하는 계약을 맺도록 행동하게 된다. 한 사람의 거래자라는 입장에 놓인 아이에게 자신의 노동이라는 상품이 언제 어디서 어떤 조적으로 인도되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거래자 자신은 스스로 소유한 재화에 따라 붙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그 재화의 운명을 고스란히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고 썩어 없어진다 해도 말이다. 비록 똑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바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체제를 수용한 여러 도시의 민초들은 불과 한 세대 정도 만에 인간의 꼴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거니와,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토지도 마찬가지다. 일단 땅을 조각조각 잘라 거기에 결부된 여러 권리들, 즉 임차, 임대, 매도의 무제한의 권리는 물론 토지의 무차별한 사용, 비사용, 남용의 권리까지 함께 개인들에게 나누어주어 자기들 이윤을 위해 맘대로 처분할 수 있게 하면 토지는 끝장이 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토지 소유자, 점유자, 그 위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모두 파멸하게 되며, 그 토지를 둘러싼 여러 자원들, 즉 토양의 '파괴할 수 없는' 힘은 물론 농촌의 기후, 건강, 안전까지 모두 파괴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토지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다 팔기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연의 일부이다. 부동산 시장에 토지의 운명을 내다 맡기게 도와주는 그러한 법적·경제적 허구는 노동의 경우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법적, 경제적 허구와 전체적으로 유사하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토지란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벌어지는 장이고 인간 생명의 원천이며 안심할 수 있는 장소다. 인간은 땅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흙 속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토양 그 자체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취급당하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어디서나 토양은 과도한 경작과 목축으로 침식당하고 벌겋게 맨살이 노출되며 메마른 부스러기 흙으로 변해버려, 모든 지역이 개간 이전의 숲, 늪지대, 사막 등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토지라는 자산이 쓰레기가 되어가면 사람들 모두의 미래가 어두워진다. 여러 자원을 외국에 넘겨주게 되면 국가의 안보도 위협당한다. 토지 보유의 여러 형태가 경작자의 안정된 정착과 건실한 가정과 건강한 삶의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가면서, 국민 전체의 삶의 힘은 이로 인해 잠식당하고 결국 졸아들고 만다. 자유 농민층이 자투리땅밖에 없는 영세농 혹은 축 늘어진 무기력한 프롤레타리아의 상태로 강등되어버린다는 것은, 곧 그 민족은 끝장이 났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과 긴밀하게 삶을 영위하게 되어 있으므로, 토지에서 나오는 것들의 경제적 운명을 토지 위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창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하지 못하면 농업 자체가 파괴되고 말 것이다. 경제에 대한 개입주의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장의 작동에 대해 외부에서 간섭을 행한다는 것이 사회 전체가 보여준 대응이었으며, 이는 시장의 작동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들에 맞서 사회 조직체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간섭들 중 일부는 정부 기관이나 입법 기관에서, 또 어떤 것들은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과 같은 자발적 결사체들에서 기인하였으며, 또 어떤 것들은 교회나 학술 단체, 언론 매체 등과 같은 공공 여론이나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기관들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노동에 관해서 보자면, 이러한 가지가지의 개입으로 인해 각종 공장법, 사회 보험, 최소한의 교육 및 문화, 지자체가 조직하는 거래, 다양한 형태의 노동조합 활동들이 생겨났다. 토지에 있어서는 보호주의의 개입이 토지 관련 법률들, 농업 관련 법률들, 가옥 및 임대차 관련 법률들, 여러 형태의 농업 보호주의 등과 같은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이러한 규칙들, 규제들, 제한들, 비시장적 활동들이 갖는 사회적 유용성은 바로 노동과 토지, 즉 인간과 자연을 되돌릴 수 없는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2 보호주의의 개입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이며, 그로인해 불이익을 얻게 되는 것은 주로 경제이다. 보호주의의 개입은 인간과 자연환경의 파괴를 막아 사회 조직을 강화하지만, 이로 인해 사회로 돌아오는 배당금이 줄어들 수 있다.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 산발적이고 마구잡이로 개입이 행해지면 시장 체제의 작동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악화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에 대한 개입이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사회 보호와 경제적 이익을 결합시키는 경우에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그런 조치들을 슬쩍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시장에는 곧바로 신뢰의 위기가 나타나며 전체 시스템까지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게 노동계급 정치의 여러 형식과 기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배계급은 시장 체제를 민중적 민주주의의 성장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기제로 활용했고, 민주주의의 권력이 사회주의적 해법들을 밀어붙이려고 할 때에는 더 강력하게 방어기제를 들이댔다. 민중적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내에서 그 위상이 모호해진 것은 주로 이러한 상황이 낳은 결과였다. 시장의 활동은 광범위한 여러 반작용을 불러일으켰고, 또 대중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도록 하라는 강력한 민중적 요구를 낳기도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서 얻어진 권력을 활용하려고 하면 이는 시장 메커니즘의 본성에 의해 큰 제약과 마주치게 되었다.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개입과 간섭은 사회적 견지에서 보면 제아무리 시급한 것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적으로 유용한 계획적인 간섭과 개입 조치들은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점진적인 작은 개혁은 시장의 작동에 훼방을 놓는 해로운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공공연한 사회주의적 해결책들은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었는데도 완전히 배제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비록 민중적 민주주의의 여러 세력과 힘들이 놀랄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힘이 제한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331~336) - 칼 폴라니 , '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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