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미완
탄환과도 같은 마음을 받아들었다.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한두 걸음 물러났다.
새벽을 알리는 개는 도로 너머에서 뒤틀린 소리로 울었고
어둠을 벗어 독야청청하는 작은 방안엔
아무도 불러 들인 적 없는 가지런한 생계의 문제가 있었다.
오늘은 하루를 먹어 보았다.
그래, 나는 헐거운 창틀만큼의 사람. 닫아도 배여 들어오는
물어도 물어도 다물어지지 않는
감미로운 감상의 기억에 마구 비웃어지곤 하는 일.
살아가고 싶을 때 나는 암묵히 레일을 밀어 보았다.
바퀴처럼 속으로만 굴러 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등 뒤로는 바람에 젖어 부예진 유리를 넘어선 해의 광선이 들어 왔다.
이것이야말로 모진 각도가 아닐까?
무너지는 일마저도 나의 일이 아니었다.
0 notes
Text
6:09
물방울 속에서 팽이처럼 돌고 싶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생활에 지치고, 졸음의 무게에 허리를 접힌 한낮. 사생결단의 문제보단 아주 사소한― 뭐 올리브를 먹느니 말린 콩이나 피클을 먹느니 아님 짠지를 먹느니, 하는 일들이 차라리 제겐 더욱 중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힘겨운 진동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와, 그 끝의 떨림, 그리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팔의 탄력 같은 것. 잡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죽어도 잡고 싶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누구의 말 한마디에 액체처럼 녹아 무너지고 싶었습니다.
어느 햇빛은 나를 관통하고 어느 햇빛으로는 내가 관통합니다. 풍경이 때로는 나를 죽이려 드는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아주 뜬금없는 낯섦 속에서 아주 익숙한 느낌을 잘도 발견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익숙하게 체화되었기 때문에 내 깊은 맨틀 속에 바보처럼 잊어 두었던 오래된 기억을. 그런 희뿌연 감각을. 친구에게는 연습도 하지 않은 채로 슥슥 갈겨 편지를 썼습니다. 파란 하늘 밑에 빈손으로 서 있을 너의 모습이 그려져. 참 묘하지, 낯선 지역과 낯선 옷과 낯선 생활, 그래도 그대로의 구름과 해와 하늘이라는 건.
경이로운 날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결심에 도리어 불타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날들. 나를 뒤흔드는 것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는 내가 알았던 사랑이 분명 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데, 뒤흔드는 것 모두가 사랑인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책장을 덮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취미는 도망, 특기도 도망, 누군가 물어보면 그리 대답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쓸쓸한 얼굴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하나의 공명과도 같은 엉터리의 읊조림이었습니다.
.
청중 없이 만들어진 노래들을 오래도록 듣습니다. 내가 위로를 받는 지점이란 바로 그 날것의 감각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멜로디가 깍지손처럼 겹쳐지고, 그것이 한 키가 아닌 반 키를 낮추거나 높일 때의 미묘한 예각. 음으로부터 오는 이상한 오한. 아. 내 삶을 떠올리면 종종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희망은 가졌지만 믿음을 가지진 못했다. 그러니까 어떤 가볍고 미묘한 예감 만이 내게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배를 띄워 기도를 하겠지만 뱃머리를 부여잡고 헤엄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쉼 없이 배를 바라보겠다. 이어 그런 다짐을 한 것은 반대의 오기라기보다는 오히려 태생적으로 타고난,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솔직한 생존 방식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하여 나의 양식이란 모두 납작한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들었을 노래들. 그때 읽었다가 다시 내게로 온 시집들. 거기에 비뚤게 그려진 연필의 얕고 약한 선들. 내 사랑의 모양이란 그런 무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음식보다 감사한 것은 음식의 온기이고, 날씨보다 감사한 것은 날씨의 변화이고, 향기보다 감사한 것은 향기가 담고 있는 감상이나 시간이라는 것. 자세히 들여다 보는 모든 생명 안에 나를 살게 하는 미묘한 반음이 있다는 것. 나의 배는 아직도 이렇게 산 채로 있었습니다.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족한 것은 나의 옛날들만이 아니었습니다.
0 notes
Text
5:28
너무 자세하게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을 비튼다. 고리 같은 정반합. 달팽이네 거실을 배회하는 생활. 온통 바깥만을 생각해 놓고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혹은 허상에만 점철되어 살면서도 지금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0 notes
Text
하루의 우연
하나. 반 년만의 긴 등굣길. 학교 쪽문에 내려 수의대를 지나 미대까지 걸어오며 이런저런 들꽃들을 본다. 꽃다지, 별꽃, 산까치, 라벤더, 솜방망이 같은. 오늘은 이 작은 들꽃 몇 송이를 집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작고 가는 아이들을 별처럼 모셔놓으면 아주 좋겠다고. 그러곤 멍하니 교실에 와 앉아 있는데, 불쑥 들어와 내 코에 뭘 들이미시는 선생님. 향기 좋지, 하신다. 엄마가 거실에 자식처럼 키워 놓은 자스민 냄새 같아, 하는 생각에 아아 좋네요- 하며 아찔해하고 있는데, 때죽나무. 한 마디 하고는 내게 꽃을 건네신다. 하얀 방울 같은 꽃이 두 개 달려 있는 모양.
둘. 수업 시간 내내 졸고선 초콜릿을 사 먹으러 가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뭐지, 가방을 올려 놓은 의자에 우산이 걸려 있다. 이거 내 거잖아. 집에 하나 남은 걸 강의실에 또 버리고 왔다고 속상해했던 건데, 한 주가 다 지나도록 내가 늘 앉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얼까? 화요일부터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월요일이 다 가도록 주인 없는 우산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우산을 보며 딴 생각을 품었거나 혹은 품을 생각조차 없었던, 어느 쪽이건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아준 사람들은.
셋. 늦은 점심을 먹고 부랴부랴 뛰어 가는데, 전인권 무료 콘서트, 미술관, 선착순 200명, 하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 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가수 전인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가야겠어서 온갖 할 일들을 미루고 포복해 있는다. 그리고 간신히 172번 티켓을 받은 나, 지하의 화장실에 들렀다가 일 층으로 가는 엘레베이터를 타자마자 전인권 씨를 발견한다. 엘레베이터 뒤쪽 중앙에서 작은 삼촌 얘기를 하고 있다. 마구잡이로 묶은 흰 머리, 어두운 선글라스, 스트라이프와 단색이 섞인 검정색 조끼와 자켓, 배기한 청바지, 노란 리본 배지. 놀란 입을 다물고 늦은 콘서트 장에 들어가, 운 좋게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공연을 본다. 노래를 듣는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째째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이 무겁고 뜨거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온 누리에 넘실거리는 바다를 생각한다.
0 notes
Text
-
어떤 밤에는 생활이고 싶지 않았다. 접힌 종이만 같고 싶었다. 홀로 파수하는 방에서 시간은 꼭 가루처럼 흩날릴까. 나는 시간을 흩뿌렸을까, 아님 흩날려가는 시간을 방관했을까. 모르는 길에서는 섬광처럼 밤이 깊다고 했다. 만사의 귀퉁이가 닳아 둥글어지는 모양을 모두가 해결이라 부르는 것이 싫었다고도 했다. 구석구석까지 날카롭자, 우리. 지나간 일들 무엇에든지 언제까지나. 그러면 어제의 예각으로 오늘의 결점을 도려낼 수 있을 테니. 허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버겁고 무거웠다. 견디는 견뎌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론지도 모르게 흩어져 사방에 비추는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 그것을 어떻게 말했어야 옳을까. 어떻게 말하는 편이 너와 나를 각각 강인하게 했을까.
새벽에는 짐을 싸겠다고 마음먹었다. 홀로였고 뜨는 해가 코앞이었으나, 하루의 동강은 아직이었던 새벽. 딱 그만큼의 상태. 아가야. 얘야. 시간도 부서지면 입자가 된단다. 풀풀 날려 내려앉는 곳이 우주의 어느 곳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렇기에 더더욱 잘려선 안 될 밤들도 있는 거라고 소리 높여 생각했다. 그건 꽤나 자주 있는 밤이라고도. 그렇다. 아무 안아줄 이 없이도 도피하는 생명들도 세상엔 있는 것이다. 습관처럼 습성처럼 날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비들도 있는 것이다. 그렇담 흐르는 물은, 썩어가는 태양은, 비린 껍질은, 모래 묻은 소라는, 자갈은, 하물며 사람은. 하물며 지내는 일이 견디는 일이어서 맨발 소리에도 놀라는 우리는.
0 notes
Text
네오 (1)
생각보다 가스비가 많이 나와서 고지서 들고 멍때리는데, 네오가 와서 왜, 뭔데, 한다. 가스비가 너무 많이 나와. 보일러 잘 끄고 살았는데. 화초처럼 시들하게 중얼거렸더니,
너무 많이 끈 거 아냐?
하고 묻는 네오. 많이 끄면 많이 아끼고 좋은 거지 ‘너무’ 많을 건 또 뭐람.
열심히 끄는 게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대. 다시 켤 때 힘이 엄청 든다고. 미미하게라도 꾸준히 켜고 사는 게 낫다더라.
아. 그런가. 역시 살림꾼 네오, 절로 끄덕이게 된다. 보일러는 그렇담 언제나 꾸준히인가? 꺼졌다 켜지는 일은 힘드니까, 언제나. 꾸준히. 실온으로. 어쩐지 평화로운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이도가 높아 보이냐.
근데 그렇게 추웠나 보네, 이 봄에.
그러게. 나는 추위를 워낙 잘 탄다. 한 여름에도 무거운 이불을 덮고, 열대야가 오기 전까진 매일 빨간 핫팩을 안고 잘 만큼. 왜 그러지, 너의 어디가 그렇게 시린 거니? 쪼그려 앉은 내 옆으로 네오가 우뚝 다가와 선다. 네모진 발가락을 뚫어져라 보는 얼굴. 하얀 목화솜 같아. 너의 정갈한 콧대, 가벼운 온화함이. 소리 없는 숨이.
��찮아 오늘은 그러면. 높게 켜고 자자. 그렇게 말하며 네오는 바퀴 같은 등을 둥글려 자기 속으로 파고든다. 창틀로는 약한 한기와 함께 빛이 새어 들고, 가루 같은 한밤의 공기가 방 안에 가득. 네오야. 정말이지 너는 실온 같은 사람. 어쩌면 딱 그만큼의 온도를 자연스럽게 가졌을까.
허공을 본다. 물처럼 흐르는 잠옷의 감촉이 꼭 하양 같다고 생각해. 내가 보냈다가, 공중을 돌았다가, 다시 사방에 퍼져 너에게 닿는 얌전한 감촉. 사탕처럼 조금씩 젖어가는 살. 이번엔 춥지 않은 밤일까? 그런 기대에 버튼을 눌렀으니 온밤 동안 우리는 꾸준할 것이다. 언제나 꾸준한 실온, 그리고 네오. 누구의 추운 봄을 가만 짐작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진 당신은.
0 notes
Text
틀림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것들에 대하여
내겐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잃어버리고 마는 것들이 있다. 우산, 후불 교통카드, 주머니에 넣은 틴트나 립스틱, 귀걸이, 그리고 필름카메라. 웬만한 건 그렇게 잃어버리는 성격이 아닌데도 손에 홀랑 들고 다녀야 하는 이것들은 어쩐지 툭하면 잃어버린다. 툭하면 잃어버린다, 하는 것은 온전히 집에 들고 돌아오는 횟수보다 어디엔가 놓고 오는 횟수가 더 많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도 엠티를 갔던 숙소에 필름카메라를 두고 와서 꽤나 애를 먹은 일이 있었다. 나오는 길에 몇 번이나 빈 방을 점검하고 빗이나 칫솔이나 슬리퍼 같이 다시 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들은 꼼꼼히 가방에 챙겨 왔는데, 놀랍게도 그 특별한 아이는 방구석 어디엔가 처박아 두고 온 것이다. 서울대입구역에 도착하고 벌꿀아이스크림을 사 먹겠다며 가방을 뒤적거릴 때가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내 필름카메라. 가방에 없잖아!
웃긴 일이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 유니크한 엔티크 아날로그 체리셔블 카메라가 없어졌는데도,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그냥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지. 연속 세 번째였으니까. 그해 여름 나는 이미 집에서 그 아이를 잃어버렸었다. 집에서 잃어버렸다 하기도 뭐한 게,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고 단념했던 걸 서랍 깊숙한 곳의 캠코더 가방 안에서 뜬금없이 발견했으니까. 참 나. 잃어버린 것도 2주만에 알아차린 주제에 겨우 캠코더 가방이라니. 콧방귀 뀌고선 다음날 실로 오랜만에 카메라를 재개시 하자마자 점심 먹으러 간 일본 가정식집에 버리고 왔다. 그리곤 혀를 내두르며 냉큼 찾아온 그 아이를 다다음날 엠티에 들고 갔는데, 거짓말처럼 또 이 사단이 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물건이라는 게 참 주인 마음을 아는 것 같다. 잃어버림 직하다, 싶으면 백발구십중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 잃어버림 직하다는 것은 즉 애정이 떠 버렸다는 것. 필요를 잊었다는 것. 스물한 살엔가 자주 쓰던 미러리스 카메라도 그런 식으로 잃어버렸다. 쨍한 색감이니 평평한 원근이니 초점이니 다 맘에 안 들어, 하고 생각하게 되자마자 미대에 도둑이 들어 내 사물함을 뒤졌다. 학교를 사 년이나 다닐 동안 도둑이 든 건 딱 한 번뿐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얄짤없을까? 필름카메라도 그렇다. 첫 인화된 사진을 받아보고 완전히 실망해서, 이 정도의 결과라면 찍어 봤자 별 의미가 없겠다고 몇 번 생각했더니만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는 자꾸 도망가는 것이다. 웃겨. 끈질겨. 그런데 그럴 만도 해. 그렇게 생각했다. 만오백 원이나 되는 필름카메라의 착불비를 울며 겨자먹기로 내면서, 업보다, 이건 너의 업보다 지영아. 하고.
뭔가를 정 간직하고 싶다면 역시 애정이란 것을 가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일을 자꾸 겪으니 이 귀신 같은 자각 능력 이 존재에게 기본적으로 탑재된 본능처럼 느껴진다. 하기야 이런 식으로 잃어버리게 된 것이 비단 물건들뿐만은 아니었지. 내가 관심을 주지 않게 된 순간 잃어버린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백발구십중이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사람들은. 서랍 속에도 캠코더 가방에도 단골 일식집에도 다시 없을 그들은. 아마 잃어버렸다는 자각이나 다시 찾아오고 싶다는 나의 애정이 늦게라도 들지 않는 이상 누구도 제 발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얄짤없는 잃어버림이란 정말이지 무서운 것이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