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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m:age] 멜로드라마의 정의
"어쩌다 만난 옆 사람에게 멜로드라마적인 스토리를 어떻게 정의하겠느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는 당신에게 그것은 칼부림이 일어나고 간발의 차로 달아나는 폭력과 유혈로 가득 찬 터무니없는 모험들의 짬뽕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드레더릭 테이버 쿠퍼 (1906)
"멜로드라마는 (…) 피비린내가 나야 한다" 『하퍼스 위클리』(1890)
"혹자는 멜로드라마가 여러 방식으로 범죄 개발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 속엔 상당수의 범죄, 즉 한두 건의 살인, 몇몇 강도 행각 그리고 온갖 종류의 폭려고가 그런 유의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 이것이 멜로드라마의 토대이다."
"멜로드라마는 (…) 극심한 비탄, 위험천만한 상황들, 스릴 넘치는 구조, 연극적이고 선정적인 허풍, 서스펜스와 예기치 않은 일로 (…) 이루어지는 연극이다." 윌리엄 다이 (1919)
위 인용문은 20세기 초반 연극·영화계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정의하는 내용이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드라마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제 갓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멜로드라마’의 정의는 완전히 달라졌다. 시대에 따라 한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거기에는 고스란히 시대가 녹아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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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종이잡지의 폐간과 온라인 잡지의 창간, 그리고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
무언가 2010년대의 추세를 이것저것 많이 가져왔지만 사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전형적인 헐리웃 드라마다(개인적으로는 이걸 ‘헐리웃 신파’라 부르고 싶다). 전형적이라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주제와 이야기 구조를 원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형적인 서사와 표현을 가졌다 하더라도 다른 작품과 이 작품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은 있어야 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사실상 원톱) 주연 배우이자 연출가인 벤 스틸러는 월터(벤 스틸러 분)가 하는 독특한 상상이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상상은 ‘월터’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잡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상이 서사 구조에서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필름과 션(숀 펜 분)의 행방이다. 그리고 월터가 션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면서 월터의 상상은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월터라는 인물은 아직 변하지 않았는데 그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특성이 먼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션을 쫓는 월터의 행적은 지나간 그의 상상이 반영된 결과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의 상상과 이후에 펼쳐질 스펙타클한 현실은 별 상관이 없다. 굳이 하나를 찾자면 마지막에 월터가 새 보스에게 속 시원한 말을 내뱉는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결국 월터의 상상이 하는 역할은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서사의 초반부에 시각적인 스펙타클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 월터는 대부분의 전형적인 주인공이 그런 것처럼 소심한 남자에서 용기있는 남자로 변한다. 그렇다면 월터를 변화시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그가 (『라이프』를 이해하지 못하는) 새 보스(애덤 스콧 분)에게 항변했던 것처럼 그는 이 일에 어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도 마지막에는 그것에 주목한다.
사실 이 영화는 소심남의 소심 극복기, 내지는 시각적 스펙타클 즐기기가 아니라 이제 곧 사라질 어떤 일과 그것이 이루어낸 성취를 곱씹어 보는 과정이 돼야 했다. 종이잡지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지금, 종이잡지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래서 그 시대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추억을 만들어준 그들과 그 매체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하는 영화가 돼야 했다.
월터가 션의 필름을 찾기 위해 너무 엉뚱한 길을 너무 멀리 돌아갔던 것처럼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도 문제의 그 마지막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너무 멀고, 너무 엉뚱한 길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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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당통의 죽음

극작 : 게오르그 뷔히너 연출 : 가보 톰파
일단 무대와 배우들의 의상이 좋다. 배우들의 의상은 아주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자람의 의상이 마치 미국의 재즈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튀어나온 소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무대는 딱히 어느 시대라고 말할 수 없다. 의상처럼 2013년의 현재를 연상하게 하지도 않고 당통과 로베스삐에르가 살았던 18세기 말의 프랑스는 더더욱 아니고...
연극 <당통의 죽음>은 인물들에게 현대의 의상을 입힘으로써 당통과 로베스삐에르의 충돌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무대가 어느 시대에도 묶이지 않음으로써 '당통의 죽음'은 인류사 곳곳에서 수 차례나 반복되어 왔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배우들이 마이크를 쓴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노래를 하는 이자람 때문에 다른 배우들도 마이크를 쓴 것 같은데 차라리 그녀 혼자 마이크를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당통과 로베스삐에르가 오로지 육성만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드러냈다면, 두 배우가 객석에 앉은 관객을 향해 정열이 넘치는 연설가처럼 두 역사적 인물의 가치관을 드러냈다면... 난 이 연극은 반드시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행동의 충돌, 사건의 충돌이 아니라 가치관의 충돌에 대한 연극이기에... 이상하게도 마이크를 쓰는 연극을 보면 목소리는 뚜렷이 들려도 그 메시지의 울림은 오히려 작은 것 같다. 때문에 연극의 울림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했다.
관련해서 아쉬운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각색 과정에서 두 중심 인물의 가치관을 보좌해줄 많은 대사들이 잘려나가면서(이 점은 공연 시간 문제로 어쩔 수 없으리라) 상대적으로 까미유와 루실의 이야기가 너무 부각되었다. 차라리 완전히 텅 빈 무대에 등장하는 로베스삐에르의 모습으로 연극을 끝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면 연극 <당통의 죽음>은 칭찬할 점이 훨씬 더 많은 연극이다. 뒷벽에 투사되는 영상의 사용도 훌륭하고, 몇몇 장면의 조명도 인상적이다. '새로운 연극'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국내에서 보기 드문 연극인 것만은 사실이다.
(제발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다수의 한국 연출가들은 반성 좀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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