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경아가주연에게
7yobian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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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송된 기억
발송된 기억    르미
   연아 안녕. 나 경아야. 언제나 편지의 시작은 어색한 것 같아. 어제까지 안녕하고 인사하고 놀고 게임 하고 웃었던 사이에서도 편지로 만나는 건 유독 간지러워. 처음 고양이를 만나 그 혓바닥의 까끌함을 느꼈을 때처럼. 같은 인사이고 같은 혓바닥인데도 느낌이 다른 거야. 싫은 건 아니고, 이걸 어떻게 대해야 할지 흠칫하게 돼.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지. 많은 인사를 종이로 건네고 답을 받는 시간 동안 말이야. 앞으로는 자주 편지를 쓰고 우리를 기록해보려고. 일기는 분명 소소하게 시작된 것인데 나한테는 곧 거창해져서 일상을 담지 못하고 거대한 일들만 담게 돼.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게 되고. 그렇지만 편지는 이미 발송해버린 것이라서 지울 수 없잖아. 좀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내 기억을 네게 위탁하는 거야. 가끔 나를 대신 기억하고 웃으면서 나를 이야기해주라. 이거 부담 주는 거 맞아.
연아 너와 저번에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 너는 평소에도 생각이 많아서 화제가 휙휙 바뀌는 동안에도 네 생각을 곧잘 정리해서 내게 나눠주잖아. 반대로 나는 공상은 많은데 온갖 데에 떠버린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해서 바로 대화하지 못하게 돼. 정보의 홍수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지. 그래서 나는 너랑 대화하고 방에 들어오면 뒤늦게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 그래야 생각을 정리해서 말로 꺼낼 수 있어. 네가 말한 나의 신중함은 나의 부족한 점에서 비롯된 거야. 누군가는 내게 자주 뒷북친다고 말하더라.
어쨌든 그때 얘기했던 도미노 이론 말이야. 하나가 잘 되면 잇달아 잘 되고 하나가 잘못되면 잇달아 잘못된다는 믿음. 누군가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 신념도 어쩌면 과도하게 긍정적인지 모른다고 말했었지. 현실에서는 첫 단추를 잘 끼운다고 해도 뒤 단추를 잘 끼운다는 보장이 없는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의 단추도 거의 제대로 끼울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결국엔 지금의 실패가 이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내가 앞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이 실패의 연장선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돼.
너는 그 실패의 기억이 너를 가끔 묶는다고 했잖아. 그게 너의 속에 결함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내 눈의 너는 항상 그 실패를 보고 아플 정도로 씹어내서 삼키는 사람이었어. 네가 소화할 수 없는 실패나 우울은 그것이 너무 비대해서였겠지. 누구나 한계치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건 네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는 거야. 유당불내증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소화할 수 없는 물질이나 기억이 있다는 거지. 아니면 글루텐처럼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오래 걸리는 것들도 있을 거야.
실패와 관련해서 집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요즘은 다양한 패션의 시대잖아. 내가 어쩌다 패션 유튜브를 봤는데 요즘은 일부러 단추를 어긋나게 채워 입기도 하더라.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입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내가 잘못 끼운 단추도 내가 의도한 대로 해석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리고 사실 옷은 너무 많잖아. 요즘은 심지어 패스트패션이라고, 환경에 도움이 안 되는 산업이 되었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물론 환경에는 패스트패션이 좋지 않은 거지만 내 실패에 대해서는 패스트패션을 추구해보는 게 어떤가 싶었어. 단추를 잘못 끼워도 나의 의도대로 해석해보고, 잘못 끼운 게 영 이상하면 다른 옷을 찾아 입어보는 거야.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나의 실패를 실패로 남지 않게 하는 거야. 나는 분명 실패했지만 그게 나의 영원의 실패는 아닌 거야. 우리도 그럴 거야. 우리는 어딘가에서 실패하겠지만 그게 우리의 평생은 아니겠지. 그게 나와 너의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를 영원히 얽지는 않을 거야.
이제 나는 가끔 큰 실패나 결함이 생기면 과감하게 리폼하거나 버려보려고. 물론 어렵겠지, 나 패션 감각이 완전 꽝이잖아. 그래도 해보려고. 나의 것과 너의 것을 합쳐도 보고. 잘라도 보고, 카라를 덧대보고, 단추를 여러 개 달아보고, 그것도 안 되면 다른 옷을 찾아볼 거야. 나는 그렇게 우리가 그것들을 입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
이런 말들을 네게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너와 핑퐁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 내게 예지 능력이 있어서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뭐 예지 능력이 없으니까 너와의 대화가 더욱 의미 있는 거겠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네가 상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서로가 말하고 싸우고 웃고 우는 중이니까.
첫 번째 편지라서 그런지 너무 딱딱하고 뒤죽박죽인 것 같아. 편지 쓰는 연습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해보지 못해서인가 봐. 글 쓰는 것도 습관이라던데 습관을 좀 들여봐야겠어. 과하게 진지한 편지를 받아줘서 고마워. 본가에서 얼른 출발할게. 주말에 보자. 내가 자켓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 가도 웃으면 안 돼.
   언젠가는 패피가 될 수 있겠지?
경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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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아 안녕. 나 경아. 사실 나 저번 편지를 보고 네가 웃거나 진지하다고 놀릴 줄 알고 잔뜩 쫄아 있었어. 물론 네가 누군가의 진심을 우스워할 사람은 아니지만, 저번 편지는 좀 심했잖아. 분명 종이에 편지를 썼는데 뚝딱뚝딱 목각 소리가 나더라고. 네가 내 앞에서 편지를 뜯으려고 들 때는 마음의 레고가 잔뜩 쏟아지는 것 같았어. 네가 내가 쓴 문장을 하나하나 낭독했다면 나는 그 레고를 다 맨발로 밟고 울었을지도 몰라.
너는 지금쯤 주은 언니랑 경유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 사실 조금은 부러웠어. 유럽에 가서 맛있는 걸 먹거나 돌아다니는 것보다도 여행을 친언니랑 간다는 게. 고등학생 때 너는 외동인 나를 부러워했잖아. 언니가 있어 봤자 싸우기만 한다고. 먹는 거로 싸우고 생활패턴이 달라서 싸우고 집안일로 싸우고. 친구를 데려오는 일도 멋대로 하지 못한다고. 나는 그때도 네가 언니와 여러 가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워했는데. 너는 언니와 싸우면서도 영화를 자주 같이 보러 가고 둘이서 외식하고 친구처럼 지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언니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네가 언니와 티격태격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게 부러웠던 것 같아. 역시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 잔뜩 궁금해하고 일반화하고 바라게 되나 봐. 연아 너는 아직도 외동이 부러워? 나는 여전히 네가 부러워.
너는 지금 유럽에 있고 네 숙소는 매번 바뀔 테니까 나는 그동안 여러 장의 편지를 써놓을 거야. 기왕이면 네가 간 각 나라의 엽서에다가 답장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 진심이야. 웃으면서 넘길 생각하지 마.
여행을 간 동안 유럽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납작 복숭아를 사 먹고, 네가 좋아하는 빈티지 필름 카메라를 잔뜩 구경하고 왔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평안과 일상을 기도하고 있을게.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뭣도 아니지만 여러 신에다가 내 바람을 이야기해볼게. 너와 언니에게 교통 지연도 차별도 맛없는 음식도 없기를.
   필름 인화하면 꼭 자랑해줘,
경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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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아, 좋은 오후! 나 경아야. 이렇게 편지 앞에 내 이름을 밝히는 게 반복되니까 괜히 생략해도 될 것처럼 느껴져. 그래도 내 이름을 꼭꼭 써다가 붙여야 다른 편지와 뒤섞이지 않겠지? 편지는 그 순간에도 물론 의미 있지만 아주 먼 훗날에 상자에 뒤섞인 것을 다시 볼 때 의미가 더 크잖아. 나도 가끔 중고등학교 때 애들이 써준 롤링페이퍼나 편지를 다시 보거든. 솔직히 그때만 썼던 유행어나 그때라서 쓸 수 있었던 날 것의 애정표현을 보면 웃기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해. 편지는 시절을 포착해서 담아두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귀여운 편지를 발견하면 종일 웃기고 좋더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연아 유럽에서 돌아오면 신발장에서 다섯 걸음을 걷고 왼쪽으로 돌아 열 걸음을 더 걸어. 그러면 오른쪽에 네 옷을 담아두는 장롱이 보일 거야. 장롱의 네 번째 서랍을 열고 찢어진 청바지를 들어서 그 밑을 보렴.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그림 작가의 포스터를 넣어뒀어. 네 방 빈 벽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왔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너는 그분의 그림 모두를 사랑하니까 아마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어제는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그리고 오랜만에 싸웠어. 뭐 크게 싸운 건 아닌데. 연아 나는 엄마를 습관처럼 사랑하고 있어. 나는 이게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 아마 평생 지울 수 없을 거라고 여겼어. 근데 엄마랑 떨어져 사는 5년간 습관이 어느 정도 사라졌나 봐. 엄마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돼. 엄마가 가진 생각이나 미련 같은 것들. 내게 투영해서 바라고 있는 도 넘은 기대 같은 것들. 그런 게 하나씩 보이고 명확해져.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아예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아마 평생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이건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진 숙명인 것 같기도 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게 됐어. 습관적 사랑은 습기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비가 오면 그 순간은 옷이랑 몸이 다 젖잖아. 근데 비가 평생 오는 곳은 없으니까, 결국엔 젖은 몸이나 옷은 마르게 될 거야. 나는 엄마 옆에 서서, 젖은 수건을 방 안에 매달고 있어. 특별히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내 옷이 눅눅하게 남아서 내가 그걸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게 하는 거야. 눅눅한 옷은 사람을 괜히 신경 쓰이게 하잖아. 옷에 어떤 냄새가 나는지 자주 맡게 되고. 원래대로라면 비가 그치고 언젠가는 맑아져서 하늘이 개고 건조해질 텐데. 그게 계절의 숙명인 건데. 나는 억지로 가습기를 틀고 젖은 수건을 걸고 방에 물을 뿌리고 있어. 습관적으로 엄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비단 엄마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옷이 말라야 하는 것 같아. 옷이 더이상 눅눅하지 않고 다 말랐는데도 내가 그걸 신경 쓴다는 게 진짜 관심이고 사랑인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마음이 메말랐다거나 사람이 건조하다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져. 마음이 축축하고 사람이 눅눅해지면 사랑은 금방 곪고 곰팡이 피는데. 곰팡이는 금세 전이되어서 다른 사랑도 쓰지 못하게 만드는데. 나는 사막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그래서 거실에 제습제를 하나 놔뒀어. 물먹는 하마 말이야. 여름이기도 하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포장지를 뜯지 않은 제습제를 놔두려고. 연아 우리는 서로를 건조하게 사랑해보자.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말이야.
나는 이제 밥을 먹을 거야. 오늘은 귀찮아도 든든히 챙겨 먹고 싶어서 닭고기를 우유랑 카레에 재우고 양념을 만들고 채소를 썰었어. 뭐 만드는 것 같아?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까 내가 답할게. 닭갈비야. 내일은 남은 닭갈비로 볶음밥을 해 먹으려고. 네가 없으니까 닭갈비가 왕창 남아서 볶음밥을 두 번 해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닭갈비 맛있겠지?
경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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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아 안녕. 나 경아야. 내일이면 네가 유럽에서,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날이야. 너는 미피 세상이라면서 여러 사진을 보내줬지. 네덜란드의 특산품은 풍차와 튤립과 미피인 걸까? 그렇다면 한국의 특산품은 뭘까? 찍어다가 정말 많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그게 아몬드랑 김 같아. 여러 가지 맛 아몬드랑 김이 명동에 한가득 진열되어 있더라. 네가 한국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뭐야? 나는 네 답이 열무국수나 냉면일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질래.
한국은 완전 찜통이야. 그래도 조금은 더 선선한 곳에서 찜기로 이동하는 네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네가 덥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네가 얼른 한국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이중적이지.
이때까지 메시지로는 전하지 못한 것들을 편지에도 마음에도 머리에도 가득 저장해뒀어. 나는 성정이 느리니까 아주 천천히 이야기해볼게. 그러다가 용량이 가득 차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지도 몰라. 그래도 언젠가는 다 이야기할 수 있겠지?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내일 네가 먹을 수 있도록 열무김치랑 낙지 젓갈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내일은 순두부찌개를 넉넉히 끓여서 남겨두고 갈게. 일하러 가�� 해서 너를 마중하거나 같이 점심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저녁은 같이 먹자. 양식 먹으러 가자고는 안 할게. 메시지로 양식 먹자고 한 장난의 답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웃겼어. 그 장난으로 너한테서 들을 일년치 욕을 다 들은 것 같아.
나는 자기 전에 조금씩 글을 써보고 있어. 연이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생긴 습관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적는다는 건 언제나 어려워. 모든 세계관을 촘촘히 짠 뒤에도 글을 쓰는 건 여전히 힘들어. 나의 시선이 그에 대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 내 치졸한 마음이 나를 그보다 상위에 두고 그를 동정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내 궁색한 마음을 다듬고 줄이는 중이야. 언젠가 좋은 글을 쓰게 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언제는 글도 써지지 않고 인물을 보는 내 시선도 옹졸해서 글을 그만둘까 싶기도 했어. 그런데 사실 어디에라도 있을 사람처럼 그 인물을 꾸며내서 살아 숨 쉬게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일도 마찬가지야. 종교가 탄탄해지는데도 수천 년이 걸렸는데 뭐. 지구가 태어난지 몇억 년이 지났는데도 평등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내가 며칠 만에 신처럼 모든 것을 꾸미고 직조하고 만들어내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언젠가 내 글이 부끄럽지 않을 때 즈음에 네게 내 글을 보여줄게. 지금 당장 글을 보여준다고 해도 너는 나를 비웃지 않을 테지만, 나의 열등한 마음이 네 이야기를 꼬아 들을 것 같거든. 언젠가는 네 글도 보고 싶다. 네가 그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네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 시각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
연아, 나는 이제 자야겠어. 내일 일찍 일어나서 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찌개를 끓인 김에 나도 아침을 챙겨 먹고 가려고. 내가 유럽에서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한식을 선사해볼게. 주은언니도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내일 집에서 보자. 일 끝나자마자 달려갈게. 언니도 너도 멀미 없이 도착하기를 바라.
   냉동실에 아이스크림도 있어,
경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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