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사대문
091522 · 1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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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 한 달간 뭐했나 생각해보면 딱히 내세울 건 없다.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적응된 것 같으나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난 주 비바람이 세찼던 날이 지나니 날씨가 더워졌다. 저녁에는 종종 시원하지만 바람조차 불지 않는 날에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르곤 한다. 오늘은 아내가 약속있다고 나가서 나도 다시 한번 조지타운에 관광하러 나갔다. 지난 번에 둘러보지 못한 힌두 사원과 쿠콩시를 둘러봤다. 쿠콩시인줄 알고 들어갔던 곳은 호키엔콩시였는데 호키엔은 중국 표준어로 푸젠, 한자식 한글로는 복건福建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건너온 사람들 중 다섯 씨족이 모여 그들만의 클랜을 만든 것이다. 호키엔콩시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거대한 향을 피우고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몇 없는 관광객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남의 집 행사하는데 카메라 들고 다니는 관광객을 그리 좋아할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관광지이다 보니 무뎌진 거 같았다. 쿠콩시는 쿠(邱, 구)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든 클랜이다. 콩시는 한자로 공사公司이며, 지금은 중국식으로 회사를 뜻하지만 당시는 클랜이라는 뜻이었다. 쿠콩시는 거의 박물관 수준이었다. 그들은 콩시를 짓고 같은 성씨 사람들을 모았을 것이고, 그렇게 그들의 사업을 유지했는데, 역시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돈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터다. 힌두교 사원은 12시에 문을 닫아 아침에 갔는데 신발도 벗고 들어갔고, 모자도 써서는 안됐다. 나는 모르고 사진을 한번 찍었는데 다니다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반바지도 입지 말라고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나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안에서는 향과 꽃을 태우며, 무엇인가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매일 푸자puja(의식)을 행하는 걸 알고 갔다) 주위의 힌두교도들이 모여 초를 켜고 끌때마다 합장하며 절을 계속 했다. 모르는 사람끼리 모여 있다기 보다는 서로 아는 사람둘 같았다. 역시나 작은 사원 안에는 관광객으로 느껴질 만한 사람은 달랑 3명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만 봤지 특별히 뭐라고 하거니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은 승려로 보였는데 매우 뚱뚱한데다가 가사만을 두르고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조금 이상했다. 힌두교 사원은 막힌 공간은 아니었지만 넓지 않아 그 안은 연기로 가득 차있었고, 연기를 빼기 위한 환기팬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계속 태우는 것이 의식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원 이름이 마하마리암만 사원이고 마하마리암만은 힌두교 여신이라고 한다. 기둥에는 많은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가네샤와 시바만을 알고 있어 궁금증이 더했다. 이곳은 입장료를 따로 내지 않으니 힌두교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하고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갔던 조지타운은 서울로 치지만 사대문 안 쯤 되는 곳이라 점심을 어디서 먹어야 할지 몰랐다.(관광지 물가) 문득 생각이 나서 구글지도에서 미쉐린 빕구르망이라고 검색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식당이 있어 그리로 갔다. 어묵국수/만두 세트, 차가운 플랫화이트까지 42링깃이었다. 조금 비쌌지만 나름 맛있게 먹었음. 요즘 환율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 한달 전 300원이 채 되지 않던 환율이 지금은 322원을 넘었다. 오르는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사정이 생각보다 좋기 때문이다. 이달 초만 하더라도 조금 내리면 환전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가 다들 낭패를 보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싸게 환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곳 생활을 기록하며 한국돈으로 환산하여 가격을 적었는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큰 오차가 생기는 걸 보고, 앞으로는 링깃 단위로 적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제부터 페낭 역사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다. 역사적인 동네에서 그냥 이게 뭔지만 알고 보는 거랑 역사를 알고 보는 건 다르긴 하다. 이제 와서 생각나는 건 한국에서는 왜 이런 공부를 안했는지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거나, 현생에 지쳤거나. 잠실의 역사는 내 나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고 큰 의미는 없을 것이고, 서울의 역사란 거의 조선시대의 역사이므로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 책 읽으며 도장깨기 하듯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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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iinvestment · 1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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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창신·숭인동 재개발: 강북의 새로운 주거 명소로 떠오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창신·숭인동 일대는 노후 주거지로 오랫동안 재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2021년 신속통합기획 대상지로 선정된 후,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 지역은 서울 도심의 중요한 주거지로 탈바꿈할 전망입니다. 재개발이 완료되면 이 일대는 강북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당 그림 클릭하시면 창신동 부동산 시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창신·숭인동 일대의 재개발: 제2의 경희궁자이로 탈바꿈?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창신·숭인동 일대는 오래된 주택이 밀집해 있는 노후 주거지로, 낙후된 환경으로 인해 오랫동안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어왔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서울 중심부인 사대문 안에 위치해 있어 개발 잠재력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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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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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부교육지원청, 130년 역사를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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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b112 · 6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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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업무차 #사대문 안에서 업무하고 나오는중 #숭례문 #교차로 #신호 대기중 언능 폰으로~
ㅎㅎ 예전에 #중고 #카메라 구입하려고 자주 들락거렀던 추억의 #남대문카메라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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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ext-kr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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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보물
아마 한국에서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도시를 꼽으라면 경주를 꼽을 겁니다. 천년의 왕국 신라의 수도였던 이유로 개발 허가를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죠. 그런데 경주만큼이나 개발이 어려운 곳은 서울입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많은 왕국이 수도로 삼았고, 특히나 가장 최근인 조선왕조가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어떤 유물이 얼마나 매장되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조선왕조 한양의 중심지였던 종로는 굴착기 한 바가지에도 유물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끌려 나와서 고층빌딩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유물에 발목 잡힐 수 없어 서울시는 2010년 ‘사대문 안 문화유적 종합보존 추진방안’을 마련해 개발을 허가하기로 하면서 만약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토대로 문화재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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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beensoswell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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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잠실에서, 강을 건너는 버스에서 양선화씨를 생각했다.
십여년전 운수좋은 날을 공부할 때 ‘이 새끼의 말버릇이 이해가지 않는다. 아무리 긴 병에 효자없고, 남편은 심지어 부르는 말조차 없지만 자기 아낸데 말이 이렇게 모질 수가 있냐’고 열을 내며 식식댔다. 양선화씨는 나를 보며 말했었다. ‘설렁탕은 아내의 최후의 일격이야. 김첨지는 아내의 최후의 함정에 빠져버린거야. 앞으로 설렁탕 냄새만 맡아도 김첨지는 미쳐버릴걸? 그 시대 사대문 안에 설렁탕집이 얼마나 많았겠니…’
그래서 나에게 헤어질 결심은 이상하게도 운수좋은 날이다.
아씨 너무 좋다. 벨벳과 앙고라를 입은 탕웨이 나오는 영화를 장마 한중간에 개봉하는 것도 너무 박찬욱 같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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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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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후 한씨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 신덕왕후 강씨 방번 방석
무학대사 1327-1405 무학산 신촌
사대문 광화문 경복궁의 남쪽 정문 / 흥인지문 동대문 / 돈의문 서대문 현재 소실됨 / 숭례문 남대문 양녕대군 / 숙정문 북대문
사소문 혜화문(동소문) 광희문(남소문 동남쪽) 소의문(서소문 서남쪽) 창의문(북소문 서북쪽)
이방원 하륜 권근 vs 이성계 정도전
1398 5월 명 태조 사망 1408 태조 이성계 사망 제1차 왕자의 난 1398 9월 정도전 사망 태조 정종에게 양위
1405 박자청 조선의 미켈란젤로 창덕궁을 창건하다 태종이 개경에서 다시 한양 천도
조영무(정몽주 살해) 이거이
차천로 오산설림 이긍익 연려실기술 함흥차사 이야기 성석린 박순(사망) 무학대사
건원릉 태조 경기 구리시 / 정릉 신덕왕후 강씨 / 헌릉 태종 원경왕후 민씨 서초구 내곡동
박자청 창덕궁 종묘 경복궁 경회루 성균관 대성전 헌릉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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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as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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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co #vscocam #lv1 #iphonex #seoul #광희문 #광희동 #퇴계로 #서울성곽 #성곽 #gate #gateofseoul #동대문 #사대문 #wall #성지 #광희문성지 #천주교 #catholic #romancatholic #holyplace (at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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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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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를 갈 때 일상복을 입고 가도 무관하지만 (반바지는 불가) 땅고용 기능성 상하의가 따로 있기도 하다. 처음 땅고 바지를 봤을 때 너무 펑퍼짐해서 보기 흉했다. 그런데 그 덕분에 오다리를 감춰주는 장점이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밀롱가가 홍대입구역 주변에 몰려 있다 보니 땅고 옷가게 또한 대부분 그렇다. 2번 출구로 나와 지척에 있는 오피스텔 건물 13층에도 한 곳이 있다. 바지 주문하러 들렀다가 평소 잘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이 서울 사대문 기준 동쪽에 있어 주로 북서쪽을 볼 때가 많고 북동쪽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지도와 비교하니 눈앞의 작은 언덕은 궁동공원 같고, 그 뒤는 백련산, 더 뒤는 북한산 아니겠냐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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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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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하늬, 안방극장 점령 나선다....’밤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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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as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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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co #vscocam #lv1 #iphonex #seoul #광희문 #광희동 #퇴계로 #서울성곽 #성곽 #gate #gateofseoul #동대문 #사대문 #wall #성지 #광희문성지 #천주교 #catholic #romancatholic #holyplace (at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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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jejcn91306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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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템주가전망 18792908 ubcw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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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템주가전망 18792908 ubcw0438 본사는 서울에 위치하고. 차림  원이 넘어. 엄징하는  있기는 하지만,. 들락날락  아니라 영상진단장비 및 유니트체어. 가만히  나름 오스템임플란트에 우호적인태도를 보여주고. 보람  기관에비해서는 매도세가 좀 더 있는 편이다.. 소득소득 ​매출액은 2016년도에는 3.5천억원이 안되었으나이후 계속해서 성장하여 작년에는 6천억원대 초반까. 품 는16년부터 19년까. 슬그머니  위의 사진에는 없지만. 법석법석하는  (임플란트에 대한 정보가 별로없는 일반인이라는 조건하에) 회사가 잘나가서인지법인도 전세계에 거의 30개에 가까. 매력적인 을 생각하면. 함께 려운것이기 때문에 손상을 입게 되면 임플란트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허용 지는 아니지만. 쿨럭쿨럭  있었을지확인해 보도록 하자오스템임플란트의 경우에는 배당금을 거의 지급한역사가 없다.. 곧장 우리나라의 임플란트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봉사 서 그런가?아니면 대중화가 되어. 반조하는 는 더할듯싶음​그래서 이익을 받는 회사 중 하나가 오스템임플란트라는회사이다.. 개선하는 느정도 탈출했을것 같기도 싶은데,너무 높은가격대에 샀던 사람들은 이것도 힘들듯싶은 모습이다.. 깨우는 목표주가는. 좁는  보유율은 크게 변동이 없어. 딱딱하는  보는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어. 그러하는 면 기회로 볼 수도 있을 듯싶다.. 얼럭덜럭 를 잘 안 하는 것 같은데,이미 워낙에 알려져서 안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립하는  이러한추세는 계속해서 이어. 해석하는 떻게 보면 영업이익은 매출액보다. 구분되는 ​이번주들어. 동물원  물론 이것은 접근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입장이기 때문에 잘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진력하는 가는 적지않은 가격이기때문에 이 정도 매수세라면 상당히 강도가 강하다. 봐하니  외국인의거래현황을 보면 사고. 험악한  더군다. 드높이는 나이. 깍둑깍둑 ​매출이 5년간 2배가 올랐으니 상당히 높은 성장률을보여주는 회사이다.. 취직  작년에 630원이라는 비급을 제외하고. 지우개  나서 하락하는 중이다.. 영화제 ​​외국인/기관 거래현황외국인과 기관의 매매동향을 살펴보도록 하자.나름 메이저 주체인데, 모른체 지나갈 수가 없음.3주��의 매매동향을 가져와 보았음. 기관과 외국인을살짝 보면 서로간의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가있다.. 그림 감에 따라서 수요. 마침내 주게 가깝게매수를 진행했음.​오스템이 주당 10만. 렌즈 ​영업이익또한 매출액의 성장세와 더불어. 처리 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임플란트에 대해 많이 익숙해졌음​치아라는게 피부처럼 다. 퇴실하는 서 사업특성 및 매출구조를 확인해 보자주요. 암매하는  보인다.. 조르는 자 한다​. 해체하는 지는 지급 이력이 없음을 확인할 수있다.. 반 빠른 속도로 늘어. 왁실왁실 팔았다. 어  단기적으로 급상승했다. 이용자 주대에서 많게는 8만. 드나들는 회사의 이름에 걸맞게 치과용임플란트가 매출의 약78%가까. 흘리는  아래에서 자세하게 비교를 해보도록 하자.​먼지 기관부터 확인해보자. 기관은 3주간의 짧은기간이기는 하지만. 나누는 ​​오스템임플란트 주가전망오스템임플란트의 목표주가는 얼마일까?. 알짱알짱  이런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점유율이 상당히 높은게 사실임​하기는 나같아도 치과가면 사람들이 많이 쓰는 임플란트를 하지 않을까. 낙담한  나름 튼튼한구조를 가졌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글씨 지올라온 상황이다.. 분포하는 ​차트현황요. 보험 전주까. 그런  글. 지도하는 즘 들어. 둘러싸이는 서 주가가 안좋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수월수월 ​그러면 그동안 배당금은 얼마씩 지급하고. 발씬발씬 12월 14일 기준 종가가 129,700원이니 목표주가와비교하면 33%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다.. 영업 그래도 단기 고. 변화되는 ​외국인의 경우에는 반대까. 깍두기  갭을 생각하면꽤나 여유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시즌  하더라도 꽤나 진심으로 매수세를진행하였음. 1만. 공간  본다. 악화하는 몇 년 전만. 는문는문  있어.. 꼬마 즘에는 광고. 인체 질 것으로 증권가에서는 보는듯싶다.. 애석하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 제자 지 . 식량  내가 나이대가 올라가고. 언론 11월 후반부에 45%대에서 현재와 비교를 하면큰 변동은 없어. 대 (본 글은 주식 매매를 유도하는 글이 아닙니다). 일회용품 해외시장의 경우에는 현지 법인 및 딜러 등을 통하여대금을 회수하는 구조이다.. 사법적 물론 어. 기탁하는 이 차지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비위생적 가 오스템임플란트를 발견하게되어. 따잡는  싶은.. 또박또박 ​단기적으로 매매를 진행하는 것인가 좀 궁금증이들정도임. 다. 과장 서 매도세를 보여주고. 뭣 보다. 실망한 나머지 18%정도도 치과용 기자재가 차지함​사업의 특성 - 오스템임플란트는 매출의 주력인 임플란트 뿐만. 점심시간 Fn가이드에 나온 목표주가는 172,575원이다. 신인  있으며, 구매카드 방식을 활용하여 수금하는 형태이다.. 퍼드덕퍼드덕  그러면 이번에는연간 실적을 확인해보도록 하자5년간의 재무정보를 가져와 보았다.. 글쓰기 울 정도로 있음​​카카오페이 연간 매출, 이익, 배당금임플란트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이지만. 본격적 . 별는르는 에 주식창을 보다. 학용품  오늘은 이곳을 주제로 글을 이어. 금년  이런 이유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수세가강했을 때에는 등락률이 10%이상인 날도 있을정도였다.. 치런치런  있는 중인데, 342억원이었던영업이익이 작년에는 근 1천억원에 가까. 너희  등을 포함한 치과장비, 교정재료 및 의약품을 포함하는 치과재료,IT 및 임상교육센터의 총 5개 품목군을 취급하고. 연구실 나 국민들의 나이대가점점 늙어. 시스템 물린분들은 어. 핸드백  매출구성을 아래와 같다. 자라는  보임.​​회사의 개요. 부슬부슬  있는데, 보통 많은 회사가강남 또는 사대문 쪽에 위치하는 것에 비해서 이곳은마곡에 터를 잡았음​우리나라에서는 임플란트하면 대게 오스템임플란트를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이된 회사중에 하나이다.. 승선하는  있어. 향하는 서 지속적으로성장을 하였다.. 뜨거운  있어.. 저축저축  싶은.. 벌거벗기는 르겠지만. 우왕좌왕 들어. 통장  하더라도 열심히 소개를 하였음오랜만. 꼬불탕꼬불탕 가 재생되기가 어. 기계 점을 만. 당근 즘 들어. 끓는 당기순이익제외) 영업이익을꾸준하게 뽑은 것을 보면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이다.. 범인  있어.. 끼깅 . 할머니 면 성장주의 대표적인 회사였지않았을까. 왁실왁실 를 반복하는 듯한모습을 보여주고. 자랑자랑 ​판매방법은 국내시장에서 직판영업체계를 구축하여치과병의원, 종합병원, 기공소 등에 직접 판매하고. 거짓 느 정도 나이대가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사업의 특성 및 매출구조이어. 편찮는 울 정도로상승을 하였음.​5년간 적자한번 안내고(. 가난  글. 매달는 쳤다. 맑는 가보고. 짜박짜박  있어.. 체중 려울 것으로 보이고,. 재깍  과거에서부터 투자하는 주주들이있었다. 색정적  과거에 비해서) 임플란트를 하는 분들이많아진 것 같다.. 예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날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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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soul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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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자락길 서대문이라 일컫는 정동사거리에 있던 서울 사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은 1915년 전차 선로 문제로 철거되었다. 지금은 있지 않지만 서울 성곽길을 추진하면서 숙원 사업중 하나로 진행되어 왔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멈췄다. 그나마 증강현실로나마 옛 돈의문을 구현했단다. 서대문쪽에는 무악산 또는 모악산이라 불리우던 지금의 안산이 있다. 높이 295.9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인왕산에 인접해 있고 주변 전망이 좋고 수맥이 풍부해 예로부터 약수터가 많은 산이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 북쪽에서 오는 전갈을 받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을 위한 최후의 격전지 이기도 하다. 이곳 안산자락을 둘러친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많은 이들의 도보순례길이 되었다. 특히 울창한 메타세콰이어 군락이 잘 조성되어 이 구간을 걷는 내내 품어내는 피톤치드 탓인지 비 오는 도보길에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한가지 자락길 언덕에 조성되었다던 9~10월에 피는 '꽃무릇' 군락지에는 꽃들이 보이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이도 바램의 우연인지 정말 딱 한 송이만이 제 눈에 띄었다. 입이 생기기 전에 피어난 꽃이라니.. 그 모양과 이름 만큼 사연도 깊은 꽃이다. 이 한 송이에도 나름 기대한 것에 충분한듯 하다. 이에 많은 것을 취하고 가득 거두려는 것에 뜻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것.. 그저 그릇에 알맞게 잘 담아내려는 욕망과 절제, 그리고 때마다 잘 비워내는 '유종의미'가 필요한듯 하다. 마주친 꽃무릇 한송이에서 고맙게도 나아갈 삶을 배운다. #서울투어 #서울가볼만한곳 #서대문 #돈의문 #둘레길 #산책길 #비오는날 #안산자락길 #메타쉐콰이어길 #꽃무릇 #koreaplace #seoulmountain #korea(안산자락길에서) https://www.instagram.com/p/CUw8sIYvoAP/?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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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uhfiu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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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던 - 신동엽 B 김수근~
김수근 건축의 사회적 소통은 문화라는 속성을 지닌 인간 환경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회적 질서를 동반한다. 이러한 소통의 본질은 건축의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가 사회와 여하히 균형있게 만나는가를 보여준다. 이같은 문화적 환경은 이 시대에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지어지면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보다 건설회사가 부각되는 풍토는 여전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 당시의 사회적 여건상 일상 속에서 문화나 예술을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없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건축분야를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했던 사람이 있다.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삶을 통해 현대 한국의 척박한 예술문화사를 새롭게 쓴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2.20~1986.6.14)이 바로 그다. 이미지 목록 한국 현대 문화예술사를 새로 쓴 건축가 익히 알려진 바대로 건축가로서 문화와 예술의 영역과 경계를 허문 김수근 선생은 기존의 문화지형을 새로 짜고 그려나간 문화예술 분야의 선도자였다. 그는 척박했던 우리 시대의 문화예술 안에서 건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적 질서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한국 현대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고 키운 건축가였다. 이런 평가는 그의 사후에도 많은 저작을 통해 다시 논의되고 확인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회의 문화예술과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7년 5월 타임지는 당대 문화예술을 중흥시킨 김수근의 업적에 주목하며 그를 ‘서울의 로렌초’로 소개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수근 선생의 위상은 우리 사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의 시선을 통해서도 검증되었다. 막 40줄에 접어든 1971년, 그는 국제적 건축단체에서 수여하는 범태평양건축상을 수상하며 더욱 주목을 받았다. [타임(Time)]지는 1977년 5월 그를 ‘서울의 로렌초’로 부르며 국제사회에 알렸다. ‘서울의 로렌초’라는 표현은 그의 삶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인 메디치가(家)의 로렌초 데 메디치에 견주어, 당대 문화예술과 예술가들의 사회적 저변을 확장하고 문화예술을 중흥시킨 열정적 삶에 대한 언론의 반응을 보여준 것이라 할만하다. 또한 그만큼 척박한 우리 문화 풍토를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시키는 흐름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1976년, 그는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한국건축가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건축 직능단체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건축 창작의 산실인 자신의 사옥을 짓고 그 안에 소극장과 갤러리를 만들어 막 우리의 문화예술을 새롭게 일구는 단계에 있었다. 만일 그의 이후 10여 년 동안의 역동적 행적을 또다시 바라본다면 그때는 [타임]지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었을까. 문화적 삶의 척도로 보자면 김수근은 어쩌면 로렌초보다 한 수 위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렌초는 피렌체의 명망가문으로 재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이탈리아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했지만, 김수근 선생은 자신이 재력과 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예술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른 분야 예술가들을 도와 기회와 동기를 만들고 직접 활동 공간을 제공하여 문화예술을 키웠던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와 공동체의 지혜를 건축에 담다 김수근 선생의 화려한 문화사적 성과는 그의 작가 정신과 열정이 뒷받침한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처절한 자기성찰과 우리 것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만든 결실이다. 그가 설계한 국립 부여박물관은 그를 더욱 성숙한 건축가로 만드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1967년, 공사가 한창이던 부여박물관의 형태가 일본 신사(神社)를 닮았다는 논쟁에 휩싸이면서 그가 겪게 되는 혼돈은, 전통이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독자적 관점을 사회 안에 담아내는 데 시기상조였던 당시의 시대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미지 목록 1967년 설계한 국립부여박물관은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가 더욱 성숙한 건축가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최순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과의 우리 문화유산 답사는 전통문화와 그 안의 공간개념에 대한 김수근의 의식을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건축 신인이면서 많은 국가적 프로젝트에 관여한 김수근 선생은 그런 미흡한 문화적 풍토를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았다. 우리 고전과 일상 문화의 근본을 향한 재인식과, 당대 여러 분야 명망가들과의 지속적이고 끈끈한 소통을 기반으로 문화인식과 인간관계의 폭을 확장시키면서 몸으로 익힌 것들이 그의 문화예술을 지탱하는 의지이자 자양분이 되었다. 이때 젊은 그가 주목한 것은 전통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문화와 공간개념이었다. 그 중심에는 늘 사람이 함께했다. 인간의 가치를 제일하는 인본주의가 곧 그의 작품의 근본의지였던 것이다. 그의 작업은 그래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원초적인 ‘궁극 공간’을 만드는 일이 된다. 또한 그의 작업은 인간환경과 도시풍경을 건축공간과 아울러 공동체적 삶의 지혜를 담아낸다. 주변의 도시 질서와 가로 풍경을 건축공간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건축의 공동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길과 건축과 사람과 주변 환경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된다. 말하자면 그의 건축론을 함축하는 키워드는 ‘궁극공간’인 셈이다.김수근 선생의 이 같은 건축정신은 자연스럽게 그가 생전에 몸담고 이끌었던 ‘공간그룹’의 바탕이 되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를 통하여 시대정신과 문화의식을 함께한 그의 후학들은 여전히 이 시대 건축문화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미지 목록 그는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한 문화기획자였다. 문화예술인들의 활동무대인 소극장 공간사랑 개관식 때의 모습. (1977) 사물놀이는 그가 셰게 무대에 자랑스럽게 소개한 한국의 전통예술 중 하나였다. 공간 소극장에서의 사물놀이 공연. (1983) 세계건축가연맹(UIA) 4지구 도쿄대회에서 만난 남북건축가들이 김수근의 지휘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1980) 그는 자신의 작업 공간을 직접 짓고,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활동무대를 만들어주었으며, [공간]이라는 종합예술 건축문화 잡지를 창간하여 건축과 미술 등 문화예술을 널리 보급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그는 일생동안 그의 작업 공간을 통해 수많은 직능과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은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늘 무언가를 도모하며 일을 꾸미고, 문화와 예술이 풍성한 세상을 위한 생각으로 가득한 생명력 넘치는 만남이었다. 그는 다른 문화예술 분야를 ‘후원’함으로써 건축의 폭을 높였고, 그로써 건축이 문화예술의 한 축을 이루는, 그것도 매우 중요한 축임을 두루 인식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우리 삶의 질과 관련하여 사회와 문화와 예술을 보는 안목이 일상을 통해 폭넓고 풍성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문화기획자였으며 예술창조자였다. 김덕수 사물놀이를 한국의 전통예술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예술로 키운 장본인인 그는, 공옥진의 ‘병신춤’ 역시 국제무대에 소개하여 우리 춤의 진수를 알리는 등 선구적이고 예술가적인 안목을 발휘했다. 김수근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런 역동적인 삶을 굵고 짧게 살았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고 완숙한 경지에 접어드는 50대의 중턱에 도달한 그는 수많은 희망과 꿈을 뒤로 하고 1986년 6월, 만 55세를 일기로 숨지고 만다. 한국 건축을 문화적 담론으로 이끌다 디자인 구상에 몰입하고 있는 김수근. 1931년 2월 20일 함경남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수근 선생은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사대문 안의 북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주둔군으로 근무하던 미군을 통해 근대건축을 접하고 건축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1950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전쟁 통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와 도쿄대학교 대학원을 나온 그는 일본의 신문화를 접하며 건축에 대한 눈을 더욱 크게 틔우고 실무를 익혔다. 그가 우리 건축계의 대부가 되는 계기는 1959년 유학생 신분으로 박춘명, 강병기 등과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응모해 당당히 1등으로 당선한 ‘사건’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5·16군사정변 때문에 백지화되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국내에 들어와 자신의 건축 인생을 화려하게 펼쳤다.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의 건축계는 우리 민족만의 건축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혼란 상태에 놓여있었고, 한국전쟁과 1961년 군사정변의 시기는 뒤늦게 개화한 국제 건축양식의 무비판적인 도입으로 한국 건축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군사정부 주도의 신속한 근대화가 개발의 논리를 바탕으로 추진되고, 도시ㆍ농촌ㆍ들판ㆍ하천 할 것 없이 국토개발이 국가적 사업으로 퍼져가면서 건축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는 1인 주도의 도제식 건축집단이었던 공간건축은 건축가의 직분을 공고히 하고, 전통 문화적 정체성, 한국성 등의 개념을 건축 디자인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규모 기술용역업체가 생겨나던 시기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대형사업을 수행하는 새로운 형식의 건축디자인 방법론을 구축했다. 김수근 선생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자유센터에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노출콘크리트 공법이 선을 보였고, 중동의 건설 붐을 타고 이란 엑바탄에 주거단지를 계획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해외시장에 건축 디자인을 ‘수출’하기도 했다. 국가 주도 사업의 건축설계에 참여하면서 ‘공간그룹’으로 성장한 김수근의 건축집단은, 한국의 건축계는 물론 도시, 사회 환경의 문제에 주목한 문화적 담론을 월간 [공간(SPACE)]지(誌)나 건축디자인 실무를 통해 꾸준히 이끌었다. 김수근 선생의 미래 계획. 1980년~2000년까지의 장기 구상을 그려놓았다. 생전에 수많은 건축 작품을 남긴 그는, 국내 여러 도시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해외 무대에서도 수많은 프로젝트를 설계하며 국제적인 건축가로 활동했다. 30대 초반부터 이미 자신의 설계 아틀리에를 운영했던 김수근 선생은 초기인 1960년대에는 워커힐 힐탑 바, 남산 자유센터 등의 작업을 통해 노출콘크리트 시대를 이끌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서울 불광동성당, 샘터사옥, 관공서와 학교 등 수많은 공공시설을 설계하면서 벽돌건축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의 작업이 이처럼 건축술의 시대적 경향으로 단순하게 분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지 않은 그의 건축 인생이 그려낸 선은 너무도 굵고 길고 화려하면서도 복잡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공간의 소통에 주목하다 김수근 선생이 남긴 작품들 중에서 백미 중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공간 사옥이다. 그 자신의 아틀리에인 이 건축물은 1970년대 초와 후반에 두 차례에 걸쳐 덧대어 지어진 검은 벽돌 건물로,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의 선두에 서 있는 작품이다. 공간 사옥은 밖에서 보면 좁고 긴 네모반듯한 덩어리들로 조합되어 있고, 외부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아 지은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내부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공간사옥의 내부 구조는 매우 복잡하여, 서로 다른 높낮이를 갖는 열 개가 넘는 바닥층이 내부 방들을 이루며 복잡한 계단길을 통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건물을 기준으로 하면 지하 2층에 지상 5층 규모지만, 공간 사옥은 이처럼 일반적인 규모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를 거부한다. 실제로 안으로 들어서면 계단참 몇 개를 올라 다른 방들이 만들어지고 또 옆에 나 있는 몇 개의 계단참을 따라 또 다른 방이 높이를 달리하며 연결되곤 한다. 그렇게 복잡한 방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지만 공간은 꼭 필요한 정도의 크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층고(層高- 건물의 층과 층 사이의 높이)를 낮게 해 아담하고 인간적인 척도를 보여주는가 하면, 복도나 계단 등 통과하는 동선도 그냥 두지 않고 약간의 빈 곳이나 벽면까지도 수납공간이나 디스플레이 공간으로 사용함으로써 좁은 공간을 폭넓게 사용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이미지 목록 그의 작품 중 백미로 손꼽히는 공간 사옥. 한국의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로 손꼽힌다. 한국건축을 이끄는 건축아카데미를 꿈꾸며 조성한 공간공릉사옥의 최상층 내부. 갑작스런 타계로 미완의 꿈이 되고 말았다. 공간 사옥의 단면 스케치, 내부 공간이 역동적이다. 이 같은 공간 사옥의 조형성과 공간 미학은 건축물이 터를 잡고 있는 장소적 성격, 즉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북촌이 지닌 도시 정서를 건축 공간 안에 담아내고자 한 김수근의 건축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우리의 전통양식이며 생활 문화적 습성이 담겨 있는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지금 공간 사옥은, 김수근 선생 사후 공간을 이끌었던 2대 장세양 대표의 신사옥과, 1996년 장세양 대표의 타계 후 지금까지 공간을 이끌고 있는 3대 이상림 대표의 한옥 등 세 채의 사옥이 마당을 중심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공간 사옥에는 매주 토요일이면 건축을 배우고 김수근을 알고자 찾는 학생들의 답사행렬이 계속되고 있다.김수근 선생의 도시공간에 대한 생각, 재료를 다루는 솜씨, 사람이 중심이 되는 건축 등이 돋보이는 주목할 만한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샘터 사옥이 있다. 김수근의 벽돌 건축시대를 대표하는 1980년대 작업인 샘터 사옥은 이후 근처에 세워진 문예회관(아르코) 대극장과 미술관, 길 건너의 해외개발공사(현, 서울대병원 부속시설) 등 그가 설계한 벽돌 건축들과 함께 대학로라는 문화거리의 새로운 풍경을 이끌었다. 사옥의 열린 실내마당. 길과 건축이 하나가 됨을 공간미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샘터 사옥은 대중교양지 [샘터]의 편집실이 있어 문인이 많이 찾고, 어린이들을 위한 인형극이 펼쳐지는 소극장과, 밖을 향해 있는 개방적인 카페 등이 있어 늘 사람들의 발길이 붐비는 문화공간이다. 샘터 사옥은 이에 걸맞게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우선 주변을 지나는 시민이 건물로 드나들기 쉽게 ‘통하는’ 길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소통과 공유의 미덕이 배어있다. 샘터 사옥은 건물 앞뒤로 나 있는 출입구에 문을 달지 않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건물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길이 연장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밖으로 열려 있다. 정면의 진입부에 밖으로 열려 있는 이 작은 마당은 건물 안팎을 매개하는 공간인 셈이다. 건물의 1층을 비우고 사람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비우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데 그치지 않고 건축과 도시,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사회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건축의 공간미학적으로 실현해 보여준다.샘터 사옥의 비움과 열림은 건축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고 편하게 적극적으로 우리 시민사회와 통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 건축을 위하여 김수근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가 지닌 그릇에 자신을 다 채우지 못하고 너무도 일찍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건축 창작의 산실인 공간그룹은 왕성한 활동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유족과 동료, 후배들은 그의 생전의 업적을 기리고자 ‘김수근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생전에 그가 지녔던 예술혼과 작가로서의 사회적 정신을 추구하는 작가를 매년 발굴하여 시상함으로써 그의 희망을 잇고 있다. 재단은 2011년 5월 김수근 선생의 25주기를 맞아 독일 베를린의 아에데스(Aedes) 건축 갤러리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회고전을 열었다.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옛 서울역청사를 문화공간으로 새로 단장한 ‘문화역 서울 284’에서 2012년 6월 14일 김수근문화재단 주관으로 ‘김수근 26주기 추도행사’가 열린다. 그곳에서는 개관 기획전으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전시장 중앙 홀에 ‘모더니티의 숲을걷다’라는 주제를 건 김수근 건축전이 선을 보였다.(이 전시는 2011년 베를린 추모전의 귀국전으로 치러졌다.)김수근 선생의 대를 이어가고 있는 건축가들은 해마다 이렇게 그의 생전의 화려한 삶을 회상하며 “김수근의 건축은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 물음은 분명 김수근의 큰 삶의 족적을 부정하는 언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시대에도 지속가능한 그에 대한 정신적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수사요, 그에 대한 존경의 예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의 족적을 통해 우리 사회를, 우리 건축의 사회적 가치를, 우리가 누려야 할 문화적 정체성을 우리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찾아 그것을 이 시대 우리 안에서 공유하며 문화적 토양의 자양분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시대적 요구인지도 모른다. 김수근 선생이 건축인생에서 이루고자 했던 ‘궁극공간’의 꿈은, 이 시대를 사는 건축인 누구에게나 절실한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담아내는 건축의 ‘궁극’을 향해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주요작품 연보 no. 발표연도 제목 1 1959 국회의사당(남산) 현상설계 당선안 2 1961 워커힐 힐탑바 3 1963 자유센터 4 1967 부여박물관, 한국기술연구소(KIST)본관 5 1970 오사카 EXPO'70 한국관 6 1971 공간사옥 7 1974 서울대학교 예술관(미술대학, 음악대학) 8 1975 이란 엑바탄 주거단지 9 1977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수단국 영빈관, 주인도 대한민국대사관 10 1978 마산 양덕성당, 문예회관 전시관 및 공연장 11 1979 국립청주박물관 12 1980 경동교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강원어린이회관 13 1982 주카타르 대한민국대사관 14 1983 인천상륙작전기념관 15 1984 국립과학관 16 1985 주미 대한민국대사관저, 불광동성당, 지하철 경복궁역사,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주립 스포츠 콤플렉스, 17 1986 치안본부청사, 서울지방법원청사,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수영장, 자전거경기장 이전 이미지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 (1959) 1959년 유학생 신분의 그는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응모해 1등으로 당선되었다. 설계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당시 이 사건은 그를 일약 건축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원본보기 1 / 15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목록 미쳤던 - 신동엽 스카아트 밑으로 강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는 흰 구원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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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eong-seob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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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수령은 약500여년으로 사대문 안에서 가장 큰 나무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자님이 은행나무에 단을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일화가 있어 문묘에는 은행나무를 심습니다. #성균관은행나무 #은행나무 https://www.instagram.com/p/CHKUGF2rvzY/?igshid=d8maxx0gex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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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twords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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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에 속해 있지만 옛 사대문 안이 아닌 지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의 〈진짜 서울〉, 〈궁궐의 도시 서울〉에서 찾기 위해 한강 너머 사대문 안을 바라볼 뿐, 자신들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변화는 서울의 끝에서 시작된다: 종교, 공장, 노동자 서울 선언 김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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