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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xymagick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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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2 vixx interview | daum.net
*interview undercut
VIXX "Three member comeback. I'm sad that you can't be with Cha Hakyeon" [Star picture]
VIXX is back as a three-member group.
VIXX, who announced the brilliant return of the original concept idol through their new album 'CONTINUUM', recently conducted a photo shoot with @ Star. In the pictorial released on December 22nd, the members showed off their mature ‘adult sexiness’ charm and showed off their skills as ‘pictorial masters’.
This is the comeback we have been waiting for. K-pop fans are responding enthusiastically to VIXX, who returned after a gap of 4 years and 2 months. After working as a six-member group, there must have been a lot of pressure because the three of us had to fill the stage. Regarding this, the members said, “We felt a lot of pressure because we were standing on stage under the name of VIXX. “Because the three of us had to fill in the work that six of us had done, we pushed ourselves to practice to fill the empty space,” he said.
When asked about his satisfaction with the result of this album, Leo said, “96 points,” and explained, “The reason I subtracted 4 points was to express my regret that Hak-Yeon was unable to be with us this time.”
It has already been 12 years since his debut, and VIXX, who is now a senior in the idol world, also shared his thoughts on performing on a music show for the first time in a long time. The members said, “A challenge culture has emerged. “They were filming the challenge here and there, and it was really interesting because it was a culture that didn’t exist when we were at the peak of our activities,” he said.
Regarding the most memorable reaction during comeback activities, he mentioned, ‘VIXX tore it apart.’ Member Ken said, “I really liked the comment saying, ‘I tore it up.’ “It was fun and a huge compliment, so I felt really encouraged,” he said, expressing his happiness.
Meanwhile, more pictorials and interviews of VIXX can be found in the January 2024 issue of @ Star
빅스 “3인조 컴백, 차학연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 [스타화보]
빅스가 3인조로 돌아왔다.
신보 'CONTINUUM'을 통해 원조 컨셉돌의 화려한 귀환을 알린 빅스가 최근 앳스타일과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12월 22일 공개된 화보에서 멤버들은 무르익은 ‘어른 섹시’ 매력을 가득 뿜어내며 ‘화보 장인’의 면모를 과시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컴백이다. 4년 2개월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빅스에 K팝 팬들의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6인조로 활동하다가 셋이서 무대를 채워야 해서 부담감도 컸을 터. 이에 대해 멤버들은 “빅스의 이름을 걸고 무대에 서는 거라 중압감이 컸다. 여섯 명이서 하던 걸 셋이서 채워야 하다 보니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연습량으로 밀어붙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앨범 결과물의 만족도를 묻자 레오는 “96점”이라며 “4점을 뺀 건 학연이 형이 부득이하게 이번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점수”라고 설명했다.
어느덧 데뷔 12년 차, 이제는 아이돌계 대선배가 된 빅스는 오랜만에 음방 활동을 한 소감도 전했다. 멤버들은 “챌린지 문화라는 게 생겼더라. 챌린지를 여기랑 찍고 저기랑 찍고 그러던데, 저희가 한창 활동할 때는 없던 문화라 되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컴백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에 대해선 ‘빅스 찢었다’라고 언급했다. 멤버 켄은 “‘찢었다’라는 댓글이 그렇게 좋더라. 재밌으면서도 엄청난 칭찬이라서 되게 힘이 났다”며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한편, 빅스의 더 많은 화보와 인터뷰는 앳스타일 2024년 1월 호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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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bap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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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goods_Global Twitter / official_kgoods_global Instagram update:
약 4년만에 활동개시를 알린 정대현의 PHOTO BOOK ‘SIX VISION’이 발매 됩니다 👏👏👏 ‘SIX VISION’은 앞으로 어떤 음악과 활동을 보여줄지 궁금증과 기대를 가지고 팬분들의 이미지를 토대로 정대현이 선택한 6가지의 음악 장르를 테마로 촬영한 PHOTO BOOK 입니다 📸 📆 판매 : 04/30 ~ 05/13 📦 발송 : 06/14 순차발송 ✅ 구입 : official-kgoods.com http://english.official-kgoods.com #정대현 #JUNGDAEHYUN #郑大贤 #チョン·デヒョン #PHOTOBOOK #SIX_VISION #B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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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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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유난히 애쓴 날의 그림들
이반 아이바좁스키 필사의 노력이 부질없다 하더라도 / 최고의 해양 화가 러시아 낭만주의의 핵심적 인물 / 17 18c? 신고전주의(프랑스 대혁명 때) 18c 말 낭만주의(개인의 감정표현 색채 중시) 19c 인상주의 야수파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 부모님이 재단사와 재봉사 복식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았음 / 인상주의와 결별 / 알린 샤리고(부인 모델) 동료 모네 시슬리 화상 뒤랑 뤼엘 후원자 사교계 유명인 샤르팡튀에 부인
귀스타프 쿠르베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 신고전주의 앵그르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 2월 혁명(입헌군주제 붕괴) 막시즘 사실주의 / 마네 모네의 롤모델이 됨 기존체제 부정 새로운 시도
라울 뒤피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짓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 밝음을 쫓은 화가 /
폴 고갱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 역마살 인상주의에 회의를 느낌 종합주의 양식(중세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평면적 구성) 종교화 물질 문명에도 회의 / 타히티
빈센트 반 고흐 죽음은 별을 향해 떠나는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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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복수 3화 3회; (_e03)_무료보기 11/16
3인칭 복수 3화 3회; (e03)무료보기 11/16
3인칭 복수 3화 (2022년 드라마)[ FULL HD 1080p 4K] 3인칭 복수 3화 (2022) 풀 버전 | 4K UHD | 1080P FULL HD | 720P HD | MKV | MP4 | DVD | BLU-RAY | ⭐⭐⭐🅕🅤🅛🅛 🅥🅔🅡🅢🅘🅞🅝 👇👇👇👇👇🅒🅛🅘🅒🅚 🅗🅔🅡🅔⭐⭐⭐ 3인칭 복수 3화 전체 드라마 2022 HD | 𝟜𝕂 𝕌ℍ𝔻 | 𝟙𝟘𝟠𝟘ℙ 𝔽𝕌𝕃𝕃 ℍ𝔻 | 𝟟𝟚𝟘ℙ ℍ𝔻 | 𝕄𝕂𝕍 | 𝕄ℙ𝟜 | 𝔻𝕍𝔻 | 𝔹𝕝𝕦-ℝ𝕒𝕪 |
↓ 3인칭 복수 3회 다시보기 ↓
third person revenge Episode 3
오픈 2022.11.09. 채널 디즈니+ (수) 오후 5:00 쌍둥이 오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아 나선 ‘찬미’와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 복수 대행을 시작한 ‘수헌’이 인생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高자극 하이틴 복수 스릴러
디즈니+ <3인칭 복수>는 쌍둥이 오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아 나선 찬미(신예은)와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 복수 대행을 시작한 수현(로몬)이 인생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高자극 하이틴 복수 스릴러 드라마입니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쌍둥이 오빠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미스터리와 함께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데요. 또한 하이틴이라는 장르에 복수 대행이라는 파격적이고 강렬한 소재가 섞여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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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찬미 역을 연기한 신예은은 2018년 웹드라마 <에이틴>으로 데뷔하면서 1020세대 워너비로 등극한 배우입니다. 이후 <경우의 수>, <유미의 세포들 시즌2>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디즈니+ 스릴러 드라마 <3인칭 복수>의 예고편 속 옥찬미가 학교에서 쌍둥이 오빠의 죽음과 마주하면서 보여주는 연기는 슬픔과 후회라는 감정을 단 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감정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을 쫓기 위한 결연한 의지, 예상하지 못한 진실에 격정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한 연기와 총을 들 수밖에 없던 비참한 현실에 내몰린 모습을 보면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사격선수 출신으로 사격 액션은 물론 진실을 추적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보다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통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의 탄생을 알린 로몬. <3인칭 복수>에서 돈과 정의를 위해 복수 대행을 시작한 지수헌 역을 연기했습니다. 훤칠한 외모는 물론 운동까지 잘하며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용탄고 인기남으로 홀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억울한 친구들의 복수를 대행하는 비밀스러운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로몬이 연기하는 지수현 캐릭터 역시 단순히 생활비를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닌 무엇인가 큰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캐릭터로 옥찬미(신예은)와 함께 쌓아 나갈 서사와 동시에 로몬이 그려낼 액션 그리고 찬미와 함께 알게 되는 진실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고 행동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모든 진실의 조각이 맞춰졌을 때 복수 대행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복수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게 생각됩니다.
복수 대행이라는 장르와 하이틴 요소가 결합되어 高자극 하이틴 복수 스릴러라는 장르의 새로운지평을 연 <3인칭 복수> 작품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지 기대가 큽니다.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일깨워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복수라는 과정을 행하면서 진실에 접근할수록 강타하는 서스펜스와 다양한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찾아냈을 때의 짜릿함과 통쾌함까지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고편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쌍둥이 오빠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학교라는 보호받아야 공간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과 관련해 진실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있어 진실을 숨겨야만 했을까?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은 어떤 것인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진실이 얼마나 충격적일지 두렵기만 합니다. 19살의 나이에 복수를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가혹한 현실에 내동댕이 처진 찬미의 심정으로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즈니+ 스릴러 드라마 <3인칭 복수> 순수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모습의 옥찬미(신예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강렬한 캐릭터 지수현(로몬)의 활약. 쌍둥이 오빠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찬미의 시점에서 같이 따라가면서 과연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을까 추리해 보는 재미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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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스트리밍 ♢♢♢
스트리밍 미디어는 공급자가 전달하는 동안 최종 사용자가 지속적으로 수신하고 제공하는 멀티미디어입니다. 스트리밍 동사는 이러한 방식으로 미디어를 전달하거나 획득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설명 필요] 스트리밍은 매체 자체가 아니라 매체의 전달 방법을 나타냅니다. 대부분의 전달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스트리밍(예: 라디오, 텔레비전, 스트리밍 앱)하거나 본질적으로 비스트리밍(예: 책, 비디오 카세트, 오디오 CD)이기 때문에 배포된 미디어와 전달 방법을 구별하는 것은 특히 통신 네트워크에 적용됩니다. 인터넷에서 콘텐츠를 스트리밍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연결에 충분한 대역폭이 없는 사용자는 콘텐츠의 중지, 지연 또는 느린 버퍼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호환되는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이 없는 사용자는 특정 콘텐츠를 스트리밍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라이브 스트리밍은 라이브 텔레비전이 텔레비전 신호를 통해 전파를 통해 콘텐츠를 방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라이브 인터넷 스트리밍은 소스 미디어 형태(예: 비디오 카메라, 오디오 인터페이스, 화면 캡처 소프트웨어), 콘텐츠를 디지털화하기 위한 인코더, 미디어 게시자, 콘텐츠를 배포 및 전달하기 위한 콘텐츠 전달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라이브 스트리밍은 종종 발생하지만 원래 지점에서 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트리밍은 최종 사용자가 콘텐츠를 보거나 듣기 전에 콘텐츠에 대한 전체 파일을 얻는 프로세스인 파일 다운로드의 대안입니다. 스트리밍을 통해 최종 사용자는 전체 파일이 전송되기 전에 미디어 플레이어를 사용하여 디지털 비디오 또는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 재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트리밍 미디어"라는 용어는 라이브 자막, 티커 테이프 및 실시간 텍스트와 같이 비디오 및 오디오 이외의 미디어에 적용될 수 있으며 모두 "스트리밍 텍스트"로 간주됩니다.
♢♢♢ COPYRIGHT ♢♢♢
저작권은 일반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창작물을 복제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소유자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지적 재산입니다. 창작물은 문학, 예술, 교육 또는 음악 형식일 수 있습니다. 저작권은 창의적인 작업의 형태로 아이디어의 원래 표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아이디어 자체를 보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작권은 미국의 공정 사용 원칙과 같은 공익 고려 사항에 따라 제한됩니다. 일부 관할 구역에서는 유형의 형식으로 저작물을 "고정"해야 합니다. 이는 종종 여러 저작자들 사이에 공유되며, 각 저작물은 hMy Hero Academia: World Heroes' Mission 저작물을 사용하거나 라이선스할 수 있는 일련의 권리이며, 일반적으로 hMy Hero Academia: World Heroes' Missioners의 권리라고 합니다. [더 나은 출처 필요] 이러한 권리에는 종종 복제, 파생물에 대한 통제, 배포, 공연, 저작자 표시와 같은 저작인격권이 포함됩니다. 저작권은 공법에 의해 부여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영토권"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특정 주의 법에 의해 부여된 저작권이 특정 관할권의 영역을 넘어서 확장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 유형의 저작권은 국가마다 다릅니다. 많은 국가, 때로는 대규모 국가 그룹에서 작업이 국경을 “초과”하거나 국가의 권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적용할 수 있는 절차에 대해 다른 국가와 합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저작권의 공법 기간은 관할권에 따라 작성자가 사망한 후 50년에서 100년 사이에 만료됩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저작권을 설정하기 위해 특정 저작권 절차가 필요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정식 등록 없이 완성된 작업의 저작권을 인정합니다.
♢♢♢ 드라마 /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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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7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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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주희, ‘강렬한’ 홀터넥 수영복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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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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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Sati)와 바디풀니스"
땅고 전용 페이스북 계정의 '알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닉네임이 'Sati'라고 돼 있는 미녀가 뜨길데, 얼마 전 한 밀롱가에서 만났을 때 다짜고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그 사띠인지?"라 물었더니 맞다고 하시네. 그러고보니 "사띠" 어감이 여성적으로 보이긴 한다.
사띠는 불교 용어이긴 하지만 요가 수련자도 가끔 언급할 때가 있고, 틱낫한 스님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면도 있고, 개인적 몸공부에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개념이라 이참에 겸사겸사 정리해 놓으려고.
1999년에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타'란 책이 나왔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아마도 2000년대 중반에 처음 봤던 거 같다. 제목부터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등의 한문 불경과 달라 낯설었고, 내용은 더 이상했다. 그럼에도 이른바 "최초 불설"이라고 하니 보자마자 관심이 갈 수밖에. 이걸 읽은 적 없을지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소설 제목은 많이들 알텐데, 숫타니파타에 반복해서 나오는 어구를 인용한 것이다.
제국주의 영국이 오랜 세월 인도를 식민 지배한 덕분(?)에 불교 연구를 선도했던 시기가 있었다. 스리랑카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불전이 내려오고 있단 것도 영국 학자가 세상에 알린 거로 앎. 보통 '남방 상좌부 불교'라고 하고, 한자나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빨리어'로 기록한 경전을 "니까야"라고 부른다.
한자 문화권에선 방대한 불전을 분류하기 위해 '교상판석'이란 기준을 세웠는데 간단히 말해 화엄경을 제일 수준 높은 경전으로 높이고, 아함경은 제일 말단에 놓았다. 그런데 니까야 다섯 묶음 중 네 개가 아함경과 상당 부분 합치한다는 게 밝혀지면서 외려 아함경이 불설에 가까운 거였고, 대승 경전은 후대에 쓰인 소설이란 게 드러나버린 거.
'숫타니파타'는 아함경에 없는 다섯 번째 니까야 중 일부 내용이다. 참고로 빨리어 숫타(Sutta) = 산스크리트어 수트라(Sutra) = 한자 경(經).
덕후의 나라 일본은 빨리어 경전 전체를 한역해 '남전 대장경'이란 제목으로 출판했고, 법정 스님은 이걸 다시 한글로 번역한 거. 다시 말해 원본 아닌 번역본을 중역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남방 불교 붐이 일어났단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불교 수행은 '간화선' 뿐인 거로 알다가 새로운 게 등장하자 몇몇 한국인은 미얀마로 날아가 남방 불교 수련법을 체험하고 돌아와 국내에 퍼뜨렸고, 이 과정에서 사마타(samatha = 止), 위빠사나(Vipassanā = 觀), 사띠(Sati = 念) 같은 빨리어 전문용어가 두루 퍼지게 된 게 아녔을까 함.
나는 위빠사나 수련을 해 본 적은 없고 주요 몸공부 방편으로 태극권과 요가를 하는 인간이라 저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내밀한 의미까지 알진 못한다.
개인적 수련을 통해 알게 된 거에 근거해 재해석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말하자면 실용 측면에서 사띠 하나만 잡고 가도 될 거로 봄.
그 전에 문제점 지적부터. 사띠를 영어로 "마인드풀니스"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말로 "마음 챙김"이라고 하던데 처음엔 별 생각없이 따라 썼지만 갈수록 맘에 안든다. 내가 보기엔 '뇌'를 써서 마음을 제어한다고 오해할 소지가 다분해 부적절한 오역으로 보인다.
'명상'이 '사색'이 아니듯, 마인드풀니스 또한 그렇다. 어떤 책에선 "마음 챙김" 대신 "알아차림"이라고 했던데 이게 훨씬 낫다.
'사띠'의 대표적 용례는 안반수의경에 나오는 '아나빠나사띠'라는 호흡 수련법이다. 이것도 "들숨(=아나) 날숨(=빠나) 챙김(=사띠)"이라고 번역하던데 정확히는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매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몸공부"라고 해야 하지 않나.
대개 한국 사람은 '호흡 수련 = 단전 호흡'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반면에 아나빠나사띠는 코에서 들숨날숨을 알아차리는 방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각성'이 중요하다. 사과를 눈으로 보기만 한 채 맛을 상상하는 것과 사과를 직접 먹어 본 기억을 갖고 맛을 떠올리는 것이 하늘과 땅 차이이듯, 각성 전 행하는 아나빠나사띠와 최초 각성을 체험한 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들숨날숨 알아차림은 사띠의 일부분일 뿐 여러가지로 응용할 수 있다고 봄. 가령 '중론'에는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이 있다. 걷기도 알아차림의 아주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허구한 날 감과 옴만을 관찰하면 지겨우니까 태극권 수련을 끼워 넣은 거.
심지어 푸시업도 내려가고 올라올 때 호흡, 근육, 관절의 매순간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단순히 대흉근이나 키우는 근력 트레이닝이 아닌 사띠로 전환할 여지가 매우 많고,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허구한 날 푸시업만 하긴 지겨우니까 요가를 하는 거.
2021년 개인 출판한 '몸 길 빔'이란 책에서 몸공부의 궁극은 결국 마음공부란 점을 강조하고자 마인드풀니스를 우라까이해 바디풀니스(Bodyfulness)라는 말을 만들어 넣었고 올해 쓴 '댄서스 하이'에도 인용했다.
어째서 혼자 운동할 때보다 땅고출 때 트랜스 상태로 더 쉽게 빠지는지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기 위해 합(合)을 맞추는 과정에서 바디풀니스 + 마인드풀니스 상호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 아닐까 추측. 여기에 음악까지 더해지니 증폭이 일어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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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songarchive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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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Twitter Post
BADVILLAIN_BPM: [#BADVILLA_ON] 📸 240720 제 27회 보령머드축제 개막식 축하공연 K-POP SUPER LIVE 완료✨ 화려한 무대로 축제의 개막을 멋지게 알린 배드빌런😈🚀 너무 뜻깊고 즐거웠던 첫 행사! 함께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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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xquinn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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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lie World Tour 'Our FLOWERLD (Belllie've You)' EUROPE in MUNICH 📸
유럽 투어의 첫 시작을 알린 뮌헨✨
힘찬 함성과 응원으로 반겨줘서 고마워요!
베를린 빌리브도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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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편 4기 1화 자막 무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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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편 4기 1화 자막 무료보기 Chapter 1: 결전의 예감
태초부터 존재했던 이야기. 인간과 괴물이 공존하는 세계. 그리고 귀멸의 칼날을 가진 자들, 귀살대. 이들은 밤마다 사무라이들처럼 검을 뽑아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달랐다. 이번 훈련은 어둠의 군주, 키부츠지 무잔과의 결전을 대비한 것이었다. 최강의 검사 주와 그의 동료들은 더 강력하고 단결된 힘을 필요로 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 키부츠지 무잔을 물리치는 것뿐이다." 탄지로의 목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그의 눈은 단호하게 이들의 미래를 비추었다.
《합동 강화 훈련》의 시작을 알린 채 우정과 결의가 굳건히 어우러진다.
Chapter 2: 과거의 상처
하지만 그들이 함께 결심한 이 순간은, 각자의 과거와 부딪히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주의 눈엔 언제나 하나의 그림자가 떠오르곤 했다.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울리게 했다.
"과거에 대한 후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탄지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주는 자신의 과거를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의 아픔이 여전히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왔다.
그리고 탄지로 역시도 자신의 과거에 마주쳤다. 가족을 잃은 아픔은 그의 심장을 온통 불태웠다. 하지만 그 아픔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Chapter 3: 우정의 결속
그러나 이들의 결의는 강했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들의 우정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함께 이 모든 것을 이겨낼 것이다." 탄지로의 목소리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귀살대다. 우리는 하나다." 주의 대답은 확고하고도 따스했다.
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편 4기 1화 자막 무료보기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품고 있었다.
Chapter 4: 새로운 훈련의 시작
《합동 강화 훈련》의 시작은 곧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이해하고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연결된 마음에서 나온다." 이들의 훈련은 단순한 신체적인 힘만이 아니라, 그들의 결속과 우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결전의 준비를 마치고 키부츠지 무잔에 맞서기 위한 최강의 귀살대로 거듭났다.
Chapter 5: 결전의 시간
마침내 그들은 키부츠지 무잔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들의 결의는 더 강해졌고, 우정의 끈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검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키부츠지 무잔의 힘에도 불구하고, 귀살대는 단합하여 맞서 싸웠다.
결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의 결의와 우정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키부츠지 무잔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았다.
Chapter 6: 새로운 시작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귀살대는 더욱 강력하고 통일된 힘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고, 그들의 결의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함께 더 강하다." 이들의 우정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위해 함께 나아갔다. 마치 하나의 가족처럼.
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편 4기 1화 자막 무료보기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여정은 항상 새로운 도전과 결정을 안겨줄 것이다.
《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은 그들의 용기와 희생, 우정과 결의를 의미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원한 용기와 희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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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draw · 6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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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bap · 26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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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NGLE LIST: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 모바일 게임 모델 발탁 BANG&JUNG&YOO&MOON selected as mobile game models
그룹 B.A.P 출신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이 모바일 게임 회사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다.
27일 MA엔터테인먼트는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이 모바일 게임 개발사 ㈜버드레터의 '빌런즈: 로봇 배틀로얄' 광고 모델로 발탁되어 컬래버레이션 게임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지난 8일 첫 EP 'CURTAIN CALL'을 발매하며, 6년 반 만의 컴백을 알린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은 활동 당시 네 멤버를 닮은 마토키 캐릭터를 함께 선보였다.
캐릭터를 활용한 이색적인 세계관과 차별화된 콘셉트가 멤버들의 음악적 아이덴티티와 존재감에 힘을 실으며 글로벌 음악팬들의 높은 관심을 이끌었다.
이에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은 캐주얼 4분 배틀로얄 게임 '빌런즈: 로봇 배틀로얄'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그룹 내의 이색 세계관을 한층 확장하며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네 멤버의 마토키 캐릭터가 등장하는 '빌런즈: 로봇 배틀로얄'은 오는 28일 게임 업데이트를 통해 전 세계로 공개된다. 네 명의 마토키 캐릭터는 게임 내 빌런들과 뜨거운 액션 경쟁을 펼치며, 컬래버레이션을 기념한 여러 이벤트로 수많은 유저와 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은 지난 8일 첫 EP 'CURTAIN CALL'을 발매하고 가요계에 6년 반 만에 컴백했다. 최근 '2024 THE LAST FAN-CON 'CURTAIN CALL''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난 24일 일본을 시작으로 대만, 홍콩에서 아시아 투어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은 '빌런즈: 로봇 배틀로얄'과의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이벤트로 아시아 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사진=버드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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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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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부터 된장찌개까지… 튀르키예서 알린 ‘한국의 장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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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6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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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타이핑"
내 생계형 직업이 일용직 개발자임. 새 흐름에 적응하고자 작년 초부터 틈틈이 고(Go)언어와 파이썬을 삽질한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거 같다.
두 언어 공통 '덕 타이핑(=Duck Typing)'이란 개념이 나오더만. 처음엔 개발자 유머 같은 건가 했는데 공식 용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고언어 문법책을 보던 중 유래 설명해 놓은 걸 봄.
"덕 타이핑이라는 이름은 미국 시인 제임스 윗콤 릴리(James Whitcomb Riley, 1849- 1916)가 썼던 다음 글귀에서 유래가 됐습니다.
만약 어떤 새를 봤는데 그 새가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날고, 오리처럼 소리 내면 나는 그 새를 오리라고 부르겠다."
오리처럼 걷고 날고 소리 내는 게 오리 말고 뭐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학습되지 않은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깡통이기 때문에 전후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해 놓지 않으면 오리인지 닭인지 못 알아먹는다. 그래서 중간에 '인터페이스'란 걸 만들어 놓고 두 새에게 각각 "소리 질러!"라고 명령하면 오리는 꽥꽥하고 닭은 꼬끼오하도록 융통성 있게 프로그래밍 하는 거를 덕타이핑이라 하더만.
이를 땅고에 적용하면 전통을 계승한 땅고를 '클래식'이라 했을 때 덕 타이핑을 응용해 "그것이 본래 뭐였든지 간에 두 사람이 땅고 음악에 맞춰 함께 걷거나 회전하거나 멈출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땅고라 부르겠다"는 걸로 '누에보'를 정의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거.
피아졸라 등장과 더불어 음악 영역에서 클래식과 누에보가 처음 충돌한 사건은 이젠 꽤 오랜 과거가 돼 버렸지만, 춤 영역에선 한참 늦은 1983년 이후부터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거 같다. 뭣보다 1976~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악명 높은 '더러운 전쟁'으로 인해 폭력과 억압이 극에 달한 상태였거든.
구스타보 나베이라(Gustavo Naveira)는 1990년대에 '땅고 탐구회(=Tango Investigation Group)'란 단체를 결성해 새로운 동작과 지도법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땅고 누에보란 흐름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97년 개봉한 영화 '탱고 레슨'에 파블로 베론과 함께 출연했다. 처음 시청할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누에보 스타일을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성과라고 봐도 될 것 같다.
2009년에 '뉴 탱고(New Tango)'란 책을 썼다는데 소량을 개인 출판한 한 듯 현재 아마존에선 검색이 안 된다.
나는 피아졸라 음악은 좋아해도, 누에보 땅고 춤에 관해선 지금도 그다지 흥미가 없다. 우선 자신이 땅고 댄서가 전혀 아니고, 밀롱가에서 노는 목적만을 추구하기 땜에 굳이 필요를 못 느낌.
그렇다 보니 누에보 춤 자체를 오해한 면이 있었다. 즉 고탄이나 바호폰도 같은 일렉트로니카 음악 틀어놓고 추는 거를 누에보라 부르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재에도 세계를 순회 중인 로레나-장삐엘 커플의 춤을 누에보로 분류하는 거를 보고 내가 뭔가 단단히 착각했었구나 뒤늦게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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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에서 땅고 아닌 음악에 맞춰 땅고 스텝을 이용해 추는 거를 AM(=Alternative Music)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불현듯 전혀 다른 춤판에서 땅고만으로 적응할 수 있을지 호기심이 생김.
키좀바(Kizomba)는 아프리카 앙골라 해변에서 발원한 춤으로 기본 동작을 보면 땅고 변종이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본래 뭐였든지 간에 두 사람이 키좀바 음악에 맞춰 함께 춤추면 나는 그것을 키좀바라 부르겠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겠냐는…
땅고 출 줄 아는 여성과 키좀바 음악에 맞춰 추는 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고, 키좀바만 출 줄 아는 여성과 땅고밖에 출 줄 모르는 남자가 만났을 때 어떤 무규칙 이종 댄스가 나올지 궁금한 거. 관건은 척추 꿀렁꿀렁 + 골반 씰룩씰룩을 기본 장착하신 여성에게 잘 맞출 수 있을까라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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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jazz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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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재밌게 읽은 개발 도서 5권 소개:
- <클린 코드 이제는 파이썬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파이썬 책은 초급 도서 시장만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중급 도서가 없는 게 아니다. 이 책은 파이썬 좀 하는 사람이라면 <이펙티브 파이썬>과 함께 반드시 읽어야 할 좋은 내용으로 가득하다.
- <리팩터링 2판>: '리팩터링'이라는 단어를 전 세계에 알린 명저가 20년 만에 2판으로 돌아왔다. 주 언어로 자바 대신 자바스크립트를 택했고, 이제는 리팩터링을 모두가 알고 있다 보니 그때만큼의 강렬함은 덜하지만 그래도 코딩 좀 한다는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원칙 정도는 줄줄 꿰고 있어야 한다.
- <구글 엔지니어는 이렇게 일한다>: 이 책은 부제가 모든 걸 말해준다. '구글러가 전하는 문화, 프로세스, 도구의 모든 것'. 전 세계 모든 기술 기업은 이 책에 등장하는 개발 문화, 프로세스, 도구를 한 번쯤 참고할 필요가 있다.
- <머신러닝 시스템 설계>: 딥러닝계에서 스탠퍼드가 낳은 2명의 걸출한 해커를 꼽으라면 안드레이 카파시와 함께 이 책을 쓴 칩 후옌을 꼽고 싶다. 머신러닝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프로덕션 중심으로 설명하는데, 머신러닝을 실무에 도입하고 싶다면 이 책은 그전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 <머신러닝 시스템 디자인 패턴>: 앞서 책이 거시적인 관점을 다룬다면 이 책은 일본서 답게 미시적인 관점에서 실용적인 부분에 집중한 책이다. 마찬가지로 머신러닝을 실무에 도입하고 싶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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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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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문화
Niklas Luhmann, Christian Morgner (ed.), Margaret Hilley, Christian Morgner and Michael King (trans.) The Making of Mean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번역 – 조은하, 박상우
1.
왜 사회 과학은 이론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개념에 동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충분한 시도들이 있었다.[1] 심지어 수많은 개념화와 상이한 정의들에 대한 개요도 있다.[2]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개념에 의해 다뤄지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행위의 상징적 기초(Parsons)부터 인간의 창작물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전자 기계나 몸에 새긴 타투, 고급 문화 그리고 모든 문화, 가장 고대 부족의 문화, 현대 사회의 문화까지 다룬다. 만일 문화의 생물학적 개념을 더한다면, 그것은 모든 교육된 행동을 지시하고, 사회생물학, 진화론 그리고 비유전적 전달 문제를 통해 사회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3] 사회적인 어떤 경계들 안에서도 문화 개념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른 대상들과 영역과 대조되는 세계의 존재론적 영역으로서, 어떤 특별한, 분류가능한 대상들의 집합으로서 문화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개념의 완전한 범위는 과학적 개념들이 요구하는 간결함에 모순된다.
물론 확실히 구별을 통한 개념 형성 없이 할 수는 없다. 이 개념들이 배제한 것, 그들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구별이 주요 문제들, 예를 들면 하늘과 땅, 혹은 문화와 자연을 기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 그렇지만 일차적 관찰이 작동하는 영역으로부터 제2계 관찰로 개념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관심은 대상의 세계를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이고 어떻게 관찰자가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는지 문제에 대한 특정한 형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 만으로는 물론 충분하지 않다. 문화의 경우 우리가 다루려는 제2계 관찰의 형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적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시 한번 이 특별한 초점은 갈림길에 이어진다. 행위 개념에서 문화 개념을 끌어내고 문화가 모든 행동의 필수적 구성부분을 구성한다고 제시하는 Parsons와 같은 방식으로 이론적 추론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개념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이 개념을 통해 다른 것들 속에서 문화를 관찰한다. 우리는 다른 길, 즉 역사적 분석의 길을 선택하고자 한다.
문화의 개념이 19세기 후반에 비로서 그것의 현대적 사용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많이들 주장된다. 문화 개념을 위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가정될 수 있는 상징들과 기호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언어학적) 기호의 일반 이론-기호학-은 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전 세계는 이미 인공적 기억의 이론에 대한 극히 정제된 이론을 발전시켰다.[5] 이 이론은 무엇이 성취될 만한 기억인가-즉 문화의 전달-를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주제적이고 도상적 재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그렇게 하기 위한 문화 개념이나 심리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 수행 사이의 어떤 차이를 그릴 필요는 없다.[6] 기억의 능력을 개선하기위한 이런 기호 조작의 인공성은 이미 숭배 이미지에 대한 종교적 묘사와는 분명하게 다르다.[7] 또한 숭배 이미지가 단순히 이미지의 도상적 타당성을 사용하는 환상 즉, 시뮬라크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수반되는 의심에서 차이가 난다. 초기 근대에 이런 전통의 두 가지 노선은 끝이 난다. 부분적으로는 인쇄술의 결과로, 시스템으로서 예술의 차이화에 의해. 시스템으로서 예술은 자신의 범주, ‘예술의 새로운 아우라로 신성한 것의 오래된 아우라를 교환하는 것’에 따른다.[8] 처음에는 상징과 기호의 사용의 넓이를 커버할 수 있는 후속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다. 단지 기호의 사용에서 새로운 자유만을 강조했다. 부분적으로는 concettismo[9]와 가장/위장(simulation/dissimulation)에 대한 17세기 논쟁에서, 부분적으로는 수학적 기호에서 변수의 도입에서, 즉 숫자와 수리적 관계에 대한 오래된 상징적 이해에 종언을 알린 새로운 대수학에서. 그래서 유인자로서 행동하는, 즉 18세기가 마침내 문화로서 지시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공백이 여기서 발생한다.
특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문화/양성(cultivation)의 개념이 취향(taste)의 절대적 개념을 대체했다.[10] 취향에 대한 어떤 객관적 범주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 비평의 속박되지 않는 증식을 억제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서의 증가는 여전히 사회의 층위에 연결된 개념이 더 낮은 계층에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논제의 개념에서 이는 더 이상 예술과 매너에서 ‘아름다운 환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의역될 수 없는 관심들을 포함하기 위한 확장을 필요로 한다. 계몽의 썰물을 따르면서, 이제 본성상 개인적인 것으로 고려되는 생각과 감정들의 군집을 위한 사회적 개념을 어떻게 찾는지에 대한 것이 문제다. 문화에 대한 이런 관심의 출발은 동시에 전-계몽적 유럽의 수사학이 종언을 고했음을 나타낸다.
어떻게 기호가 기능을 하고, 그것들이 역사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고 그 기능을 채울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더욱 더 의심스럽게 된다. 포커스는 개입 변수로서 언어로 이동한다. 첫째로, 어떻게 언어가 사용되는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부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회 영역에서 제2계 관찰로 전환되어지는 시기다. 그리고 개념들의 전사가 무엇이건, 이를 위한 개념들이 일차적 중요성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이는 비밀스러운 지배자, 법관, 혹은 적어도 정치의 관찰자로서 공공의 의견에 대한 개념에 적용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자연법을 대신하고, 관찰적 법률 제정에 대한 시맨틱, 능력과 절차를 제공[11]하는 헌법의 개념에 적용된다. 적어도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개념에 적용된다.[12] 그것은 어떻게 관찰되는 관찰자들이 (어떤 이유건) 그들이 받아들였던 생각에 의해 이끌려지는지를 관찰한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검토한다면, 필연적으로 추출하기 원하는 것을 개념에 넣게 되는, 행위 개념에서 끌어낸 것보다는 더 적합한 문화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지점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검토해야 할 첫번째 주제는, 지역적, 역사적 관찰 지평의 확장과 함께 18세기는 상대적 관심을 키웠고, ‘흥미 있는(interesting)’ 비교를 통해서, 그 당시 ‘재치(wit)’라 불리던 것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 재치는 떨어져 있는 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13] 과학과 예술에서 주제와 성취에 대한 오랜 논쟁, 가장 최근에는 유명한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는 혁신과 고유성 개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궁극적으로 토론은 전통 혹은 혁신 중 하나에 우위를 줄 필요를 지시하는 스톱 사인 아래서 멈추게 되었다. 전통적인 주제와 지식의 저장고를 카피하는 것만은 가능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것들을 반복하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14] 이런 상황에서 비교의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화하는 관점은, 동시에 더 많은 문제가 출발될 수 있는 더 나은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활력을 되찾는 효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비교는 이 전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다른 유럽 국가에서 귀족의 탄생을 만들어 내기 위한 다양한 범주 사이에서의 비교 같은 것. 그것은 무엇보다 귀족성을 인식하고, 위계와 평등성을 정의하는 법적, 정치적 관심에 기여한다.[15] 18세기에 이런 비교의 관심은, 일반적인 비교의 주제들로부터 추출되어 혼자 서게 된 문화 개념의 돋보이는 것에 대해 반대되어 더 넓고 깊어진다.
조응 하는 변화가 역사적 인식 영역에서 관찰된다. 적당한 수준에서 한계 안에서, 역사의 지식은, 귀족에 대해, 연설가에 대해서, 다양한 작업 영역의 예술가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기대되어졌다. 그렇지만 이익이 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되는 역할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너무 많은 불필요한 박학, 과한 관심과 과시하는 지식에 대한 경고가 존재해 왔다. 이런 변화가 18세기 중반에 신속하게 이뤄졌다.[16] 이제 쌓이고, 검토되고,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조직된 것은 공공의 혹은 장인적 역할들에 대해 필요한 것을 넘어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인쇄를 위해서 생산되었다. 그것은 문화로서 가시화되었다. 심지어 이제 종교도 문화적 현상으로서 비교될 수 있었고, 묵시적 혹은 공공연히(Lessing의 Nathan) 그것에 의해 동등한 것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 종교 개념 자체를 문제삼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종교의 이전의 궁극적 관련성을 상대화 한다. 종교는 의미적 혁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에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문화가 메타 레벨에 위치한다. 이 메타 레벨은 선행한 것들의 관계들을 고려함에서 비결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고, 그들이 말하는 ‘가치들’의 다양성과 상이한 우선성을 양립한 채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문화는 위계적으로 우위에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계승자(비록 헤겔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신 자신보다도 종교의 필요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지만)로서 극점의 위치들을 뒤섞는 것에 의해서 의의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문화를 더 일반적인 기호 사용의 관점에서 언어로 환원하는 언어에 대한 관심의 발전은, 이런 같은 트렌드의 한 부분이다. 이제는 문제가 되는 객관적 지시대상에도 불구하고 혹은 정확하게 그 때문에 언어에 주어지는 새로운 관심은 모두 분노가 된다. 이것이 아마도 낭만주의 예술 이론에서 시의 지배가 뿌리를 내린 이유이고, Kant가 ‘개념 없이 단순한 감각을 통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음악은… 문화보다도 더한 향락이다’[17]라는 의견을 제안하기까지 한 이유다. 어떤 경우에서 언어와 관계된 노력들은 더욱 더 문화들을 비교하는데 관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언어들은 서로 번역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들의 직접적인 본성을 통해서 언어 비교를 장려한다. 그들은 단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말을 다룰 뿐만 아니라, 더욱 더 글쓰기를 다룬다.[18] 이는 쓰여진 언술들이 사회적 제약이 덜한 채 자유로운 방식으로 형식화될 수 있고, 더 강하게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람들이 행동하고, 또한 그들이 인식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회적 상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이 쉽게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19] 관찰에서, 우리는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비교는 우리가 더 많은 복잡성을 발생할 수 있는 삼극체적 조작(triadic operation)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훨씬 더 멀리 가는 파급 효과를 가진 정보다. 비교되는 아이템들을 서로 구별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차이의 동일함, 즉 차이에도 불구한 유사성을 보장하는 비교의 관점이 선택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삼극체적이다.[20] 어떤 것이 다른 것 안에서 같은 것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반성을, 그래서 (그것을 실행하게 되자 마자) 더 큰 추상,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비교 지점의 필연적인 우발성의 인식을 장려한다. 비교의 지점들은 이미 다른 관찰자일 수도 있는 관찰자를 대표한다. 그래서 사회적 속성의 문제들은 하나의 다른 층위, 즉 문화적 통찰의 층위에서 등장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제2계 관찰의 층위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면 문제는 이렇다. 누가 비교하고, 어떤 목적으로 비교하는가?
밀집된 그리고 확장된 비교에 대한 관심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리고 이어지는 반성에서의 관심, 그리고 반성에 대한 반성(특히 Kant, Fichte와 낭만주의)은 우리의 역사적 가설에 따르면 문화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관심의 등장을 다루는 어떤 것을 가지게 ��다. 개념적 선명함에 대한 의존 없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은 관찰과 기술을 위한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문화의 이해를 전달한다. 비교에 대한 관심은 이전 사회가 그 자신과 세계를 정의하던 모든 본질과 자연 형식들을 정복하고 상대화 한다. 18세기에 가시화 된, 그리고 처음으로 진보로서 가시화될 수 있는 사회 변화에 비추어, 이런 본질들의 코스모스 그리고 종과 형에 대한 배열은 어쨌건 버려져야만 했다. 이제 새로운 의심들 때문에, 무엇보다 지식, 도덕, 취향의 판단과 관련해 필수적인 노력들은 더 이상 오랜 분류에 맞추고, 그것에 통합되어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형이상학(Kant) 혹은 새로운 신화학(소위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랜 시스템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저자들과 특히 Friedrich Schlegel에서)에 대한 추구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공하지 않은 채 이 욕망의 대상에 대한 웅변적 표현들을 제공한다. 잠시동안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요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그러나 그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는 경험을 반영한다.[21]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재구성되는 사회는 아직 적합하게 기술될 수 없었다. 종합에서의 모든 노력을 주체로 이동하는 초월론 그리고 독일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대략적인 관념론(approximative idealism)’과 떨어져, 대립 자체를 표현하는 공리주의적 혹은 유물론적 징조를 가진 급진적 서유럽 개인주의는 오래된 분류와 연결을 부식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현은 이런 추상이 예술, 시, 그리고 미학과 마침내 사회에 대한 관심-댄디의 경멸스러운, 자기-치장의 이미지-를 생산하며, 언어적 의미에서 ‘흡수할 수 없는 채’로 남아있는 것을 확산한다. 기호에(상징, 언어, 대본 그리고 그들의 배가)에 대한 갱신된 관심은 기대되는, 17세기의 혼란, concettismo, 위장과 비틀기, mannerism등을 줄일 하나의 표현 수준을 찾았다. 문제는 더 이상 존재와 외양 사이의 차이를 해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론을 통해서 이런 차이를 통제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또한 여전히 긍정되고, 또한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나타내 지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착란(confusion)’에 대해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 이상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단지 역사가 되었다면, 이제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을 문화 내에서, 태초에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한 이래 인류학적 불변성 속에서 형식의 교체로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 언어 사용은 그렇지만 비교에 대한 관심에 의존하는 문화 개념을 만들어 내지 않고서 이 변화를 따른다. 스스로 문화 개념이 일종의 Kollektivsingular(‘집합적 단일성collective singular’; Koselleck)으로 자신의 삶을 취하는 것에, 그것을 어떤 다른 것에 대한(Cicero의 cultura animi와 같은, 도야된 것에 대한) 지시로부터 떼어내는 것에, 그것은 인간 발전의 한 차원, 그 자체 유효한-말할 수 있는- 삶의 양식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이제 어떤 속성 없이 수행된다.[22] 영국에서, 이 문화의 개념화는 진보의 가장 문제적 형식으로 보이는 산업 발전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23] 프랑스 혁명의 변화를 피할 수 있는, 구 사회 질서의 전통으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풀려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정식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두 경우모두, 동시에 문화(혹은 도야)는 사회적 위치와 연결된 새로운 속성, 더 이상 탄생을 언급하지 않지만, 추가로 산업적 생산을 통해서 획득한 부에 의해 완전하게 결정되지도 ��는 속성을 형성한다. 역사적 지역적 개념에서 문화적 비교 지평의 확장은 분명히 보이고, 통합된다. 그렇지만 사회적 진화의 이행 단계는 아직 ‘인간 존재’의 개념에 대한, 그래서 성층화에 대한 지시로부터 분리된 사회적 개념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문화 개념의 이점은 적지 않게 실증적 지시 대상, 즉 고상한 관념화를 피할 수 있고, 만일 그와 만나면, 다시 문화적 현상으로 그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존재’의 개념은 그 자체 너무 추상적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삶과 죽음을 완전하게 무시할 수 있고, 문화적 형식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형식의 전환은 문화적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어째서 18세기 후반에 비교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으로 보았는 지에 대한 이유다. 문화 -미래, 수요, 그리고 조응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열려 있는-는 그래서 범위 안에 항상 존재했던 자연적 인간의 완전성에서 구별되는 완전성의 형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전제들의 전체적인 검토는 또한 이런 관찰의 수준이 단지 형식이 변화할 때에만 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오직 18세기에 등장하고 그리고 나서 보편적이 된 하나의 개념임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문화는 역사와 지역적(‘민족 국가적’) 차이를 비교 재료로 통합하는 전역적 프로젝트이다. 문화 개념은 국민 국가의 개념을 증가시킨다. 문화의 개념을 통해서 민족 국가/국민 신분 개념은 향상된다. 사실 심지어 그것은 현대적, 강조된 버전 안에서 만들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24] 이런 관점에서, 문화는 항상 존재했던 어떤 것의 외양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이전의 존재론적 그리고 범주적 불변성, 동일한 척도로 과거와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그것을 해체하고 동시에 대체한다.
이 모든 것에 따라 문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복제하는 이중화(a doubling)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푸는 것이 불가능한, ‘정체성’의 문제를 정식화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하게 그것이 문제화되는 방식이다.[25] 누군가가 칼로 스스로를 베고, 신에게 기도하고, 바다에 가고, 계약을 맺고, 대상물을 꾸미는 일들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추가로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을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현상과 비교한다면 2차적으로 관찰되고 기술될 수 있다. 문화는 모든 현상의 재조합을 위한 개방된 지평을 제공하면서 모든 현상을 분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별 경우를 넘어서서 진행되는 결과를 가진다. 한번 분해되고 재구성되어지는 것은 대상의 사용에 대한 적절성에 대한 타협 없이 반복해서 분해될 수 있다. 인식의 직접적 행위와 문제에 대한 도덕적 접근은 유지된다. 무언가를 안다고 믿는 것, 도덕화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해가능한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것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능하다. 저주가 문화적으로 제한된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고 이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되지 않고 저주할 수 있다. 사회는 단지 두 레벨, 즉 일차적 양식과 이차적 양식 안에서 병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가능성을 준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간섭에도, 조합들이 가능함에도,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는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그런 특별한 기호, 인용, 아이러니, 패러디로서 표시될 필요가 있다.
3.
그래서 문화는 이런 분해와 재구성을 버티지 않으면 안 되는, 다양하게 변하는 시장 조건들 아래에서 조차, 혹은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익이 계산되고, 초월적 전망을 가지고 여전히 발견될 수 있는 종합을 제공하는 불변성의 원리들을 찾는 과정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체가 아닌 원리 위에서 수정되는 앞서의 (독창적) 정신성의 이런 지지가, 비교의 대상, 그리고 복잡성에 더 적합한 다른 조직의 방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의 대상이 되는 문화 현상일까?
높은 효율성, 비위계적 조직을 위한 모델을 찾는 것은 뇌의 신경생리학이나 혹은 더 정확하게는 기억의 가능성을 위한 뉴론의 조건을 고려하도록 한다. 뮤즈를 염두에 둔 전-계몽적 유럽 전통은 기억을 언급할 때 밀랍판의 은유를 사용했다. 이 밀랍판 위에 문자들이 새겨지고, 보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인상[26]을 만들어 내는 어떠한 사건 없이 이런 방식으로 학습되고 기억된다.[27] 인상이 다시 삭제되는 것이 가능한 사실 쉽게 되는 것도 정확하게 이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구조는 복잡한 구별을 필요로 한다. 즉 두 가지 종류의 물건, 밀랍과 첨필이고, 그것 중 어떤 것도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Plato가 상세하게 설명한 것처럼[28],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 없이 구별을 그릴 수 있는 능력과 인쇄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특질 모두를 설명한다. 인상들의 한계는 그들을 구별하는 것을 가증하게 하는 조건이자 동시에 다른 기억의 기억들이 달라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기억은 다른 사건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것에서 사회 시스템으로 기억의 비위계적 구조의 사고를 이동하는 것은 이미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렇지만 밀랍의 은유는 여전히 내적 조직의, 기억의 조작 양식의, 자기 삭제와 자기 확인의 문제를 방해한다. 이에 대한 여지는 더 나아간 구별, 위계와 이단성의 구별에 의해 생산된다.[29] 위계적 질서는 이행적으로 구조화된 위계(즉 ‘이상한 고리’ 없는 하나의 위계)에 부과된 복잡성의 장벽을 넘어서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이 질서의 손실로 이어질 지 아닐지는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따른다면 기억이란 무엇인가? 뇌와 문화를 비교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의식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재생산 하는 것으로 기억의 일상적 이해를 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별한 능력에 대한 이런 극히 좁은 개념은 신경생리학적 (혹은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생물학적) 목적에 적합하지 않고, 사회 시스템의 기억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회 시스템의 기억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부정하게 하는 유혹으로 이끈다. 의식이 의식적으로 기억으로 경험한 것[30]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억의 기능이나 그 가능성의 조건 모두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구성하고 사용하는 것은 시스템의 특별한 능력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스템이 생산하는 기본적인 오토포이에틱한 조작 방식의 부산물, 시스템이 그것의 조작을 시간화 하는 한, 즉 나타나고, 나타나는 중이며, 곧 사라지는 사건들의 형식 속에서 자신의 조작을 생산하는 한, 시스템이 의존하게 되는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부산물로의 기억은 시스템의 조작 양식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실현되야 하고, 따라서 나타나는 현재 안에서만 사용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스템의 과거나 미래에 대해 작동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어떤 것을 찾아서 과거로 파고들어갈 수 없고, 그것을 표면으로 들고 나올 수 없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제약된 기억의 조작에 대한 조건은 이미 존재상 뉴론 수준에 있고, 더욱이 의미가 요구되는 증거 속에 존재한다. 우선적으로 이 조건은 물질적 그리고 지시적(종종 ‘상징적’이라 이야기하는) 조작의 병렬적 사용에 놓여 있다.[31] 물질적 개념으로, 조작(심지어 가장 높은 수요가 ‘의미’를 만드는 것일 때조차도) 세계 속에 하나의 홈을 만들고, 차이를 만든다. 이런 조작들은 그것들이 그들 자신보다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자 마자, 그리고 이 타자를 그 자신과 연결하자마자 지시적 효과를 가진다. 기억을 형성하는 시스템에서, 이는 자기-언급과 이질적-언급(hetero-reference) 사이를 지속적으로 요동치게 한다. 지속적인 물질화 없이, 예를 들어 잉크가 없는 펜을 가지고 쓸 때[32], 거기에 어떤 메모리도 없을 것이고, 세계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스템이 어떤 지시 대상 없이 작동하고, 어떤 것에도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대신에 단순히 그것이 그 순간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가 적용된다. 물질화와 언급적 수행 사이의 차이가 그 시간-의존적 오토포이에시스의 조건으로서 시스템에 부과되는 방식은 진화적 성취를 통해서 증가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럴 커뮤니케이션이 글쓰기에 의해 보완될 때처럼. 이에 기반한 해법들은 시스템의 기억 능력의 확장을 결정한다. 물론 이 능력은 환경이 충분한 다양성을 제공할 때만 사용될 수 있다.
기억을 사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매 순간 새롭게 재생산하기 때문에, 기억은 어딘가(예를 들어 ‘밀랍’에) ‘저장되는’ 가능한 기호들의 항구적 집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거대한 조작적 능력들이 항상적으로 풀려날 수 있고, ‘재-포화(reimpregnate)’ 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33] 이런 이유 만으로, 기억은 적절하게 조직화 되는 한 과거의 것들이 저장될 수 있고, 다시 검색될 수 있는 일종의 아카이브로는 인식될 수 없다. 기억 이론은 단순하게 시간을 전제할 수는 ��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풀어 놓기 위해서 처음 장소에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은 연속적으로 잊혀진 것과 기억하는 것 사이를 구별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풀어 놓기 위해서는 항상적으로 잊는 것을 구조적으로(즉 기억 자체에 의해) 강요 받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시스템이 완전하게 붙잡는 것에 이르기 때문이다.[34] 그렇지만 이런 억압 행위는 예외적인 경우에서 억제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외적인 혹은 내적인 이유로, 정체들을 응집하고, 필요할 때 그것을 불러내기에 적절하다. 기억하는 것은 그래서 반성적 성취다. 그것은 억압의 억압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시스템이 스스로를 현재에 맞춰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이런 대단히 선택적인 재호출은 단지 필요할 때 기억하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이 반드시 기억이 환경적 자극에 응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것이 또한 그런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이 시스템의 지속적인 적응에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종종 이미 재호출된 것은 호출하기가 더 수비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혹은 생태적 조건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응축된 의미를 선호하고 반복함으로써 기억은 어떤 패턴에 고정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이런 패턴에 대한 약속은 동시에 어떤 종류의 시스템도 익숙해진 이전의 패턴을 승인하는 동일한 형식 위에서 환경에 의해 관찰되고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래서 기억은 모든 시스템의 조작에 대해 하나의 효과를 가진다. 그리고 기억이 원래 있던 시간과 장소와 함께 재호출되는 과거의 색인에서 기억되는 조작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서로 떼어내서 데이터를 조직하는데 관계되는 시간-기반 도식이 없을 때조차 그리고 특히,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35] 이것은 기억이, 과거가 쓸모 없어졌다는 것을 주목하는 데 실패하고, 현상을 통제에 대한 환상을 제공하며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미래의 개념, 어떤 미래 상태나 사건의 선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재에 관계된 조작, 혹은 생물학적 개념을 사용하자면 직접적 상관 관계[36] 혹은 기대 반응이면 충분하다.[37] 물론 하나의 시스템이 현재와 과거를 구분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한 동기화를 위한 조망은 고려할 만큼 확장된다. 미래를 향한 이런 지향은 확실히 문화 의존적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미래의 평가에 의존하게 하는 리스크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다시 한번 이것은 기억이, 어떤 시스템이 관계되더라도, 보상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것은 모든 조작의 일시적 본성을 보완하고, 결과적으로 잊혀진 것과 기억하는 것 사이의 구별에서 가능한 선택의 자유를 높은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4.
여전히 문화의 역사적 개념을 위한 중요한 구성물들이 부족한다. 문화란 사회 시스템의 기억이고 특히 사회의 시스템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38] 다른 말로 하자면 문화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재귀성에 대한 의미 형식이다.[39] 그러나 현대적인 문화 개념의 기초 위에서만 이렇게 이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의 모든 출발들은 이미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 사회 시스템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혹은 어떤 단어이건)라는 사고의 도움으로 이 사건들의 상태를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그것들은 세계가 자신에게 보여지는 그대로 신뢰해야만 했다. 그것은 존재와 외양, 혹은 진실과 오류 혹은 기만과 같은 명백한 구별의 수단을 통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구별들은 그것들의 ‘강한’ 쪽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그려진다. 그것들은 존재 혹은 진실과 같이 구별의 한 쪽을 구별 자체를 이끄는 요소로 사용해서 위계적으로 개념화된다. 외양은 어느 정도 실제처럼 보여야만 하고, 오류의 정식화는 그 자체로 진실의 언술이다.
‘문화’ 개념은 문제에 대해 이런 해법을 우선하고, 그것을 우발성으로 놓아 자신과 모든 것을 관찰한다. 반성이 필요한 것(보편적으로 유용한 가치들과 같은)을 찾으면 찾을수록, 결과적으로 우발성(예를 들어, ‘가치 사이의 트레이드 오프’)을 더욱 많이 생산한다. 결과적으로 이전에 양식 이론에 의해 포착되고 ‘필수적인’ 혹은 ‘불가능함’으로 표상되었던 것들은 이제 동의를 요구하게 되었고, 조응하는 수요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비교되어지는 것은 그래서 또한 다른 방식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그래서 우발적이라는 개념을 수반한다. 이런 힌트를 따를 때, 우리의 시선이 다른 형식을 비추거나 다른 가능성을 비출 때 언제나 문화가 존재에 들어선다. 이것이 문화가 출발부터 우발성의 결함에 고통받는 이유이다.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 즉 축구 경기를 의도적으로 따르든가 혹은 꽃병의 장식을 찬미할 필요가 있다. 어떤 놀라움도 그래서 감탄(admiration) 혹은 놀라움의 형식 안에서 표현되지, 특별한 모습의 상대적 정체화 혹은 형식의 특정한 선택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는 시도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탄과 놀라움은 단지 우리들에 의해서 회고적으로 문화로서 기술되는 경험의 ‘전(前)문화적(precultural)’ 형식들이다. 그래서 낭만주의(특히 Ludvig Tieck)가 아이러니한 방식 속에서만 연속적인 감탄/경이/놀라움/공포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40]
회고적으로 본다면, 비교는 문화를 발생하지만 아직 문화의 개념이나 문화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발생하지는 않는다. 거기서 문화가 다뤄지고 논의되는 커뮤니케이션 레벨의 가능성 만이 현상을 그룹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발생한다. 그것은 다시 비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래서 이는 먼 세계들, 역사적 문화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에소테릭한, 엑조틱한, 먼, 그리고 원초적인 것, 특히 예술로서, 그리고 정통적이지 않은 지성으로서 새로운 매력을 포함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비교될 수 있는 모든 것 사이의 비교가 상대화 될 때,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계를 정의할 수 있었던 존재의 묶여진 형식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때. 이것은 어떤 제한 역시 역사를 돌아보면서 문화가 정식화 되고, 세계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관점에서부터 오는 역사적 상황이다. 문화의 절합과 형식화는 비교 관찰의 기초 위에 반성을 통해 불변적 형식들을 대체한다.
이 비교 관찰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에서의 차이에 다리가 놓여진다. 문화가 하나의 주제가 되는 방식은 그것의 출발점으로서 유럽을 가진 하나의 세계 사회가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문화는 어떠한 장소와 어떠한 시간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반성은 여기서 지금 이뤄져야 한다. 즉 현대 유럽에서. 현대 유럽은 스스로를 비교를 만들어 냄으로써 비교 속에서 긍정한다. Schiller의 개념에 따르면, 현대 문화는 무드 상 ‘센티멘탈리스트’이다. 그리고 이 현대 문화만이 오래된 문화들을 ‘소박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Hegel은, 고전 예술이 그 당시가 아니라 오직 지금에만 그처럼 인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으로’ 상징적이라고 이야기한다.[41] 
문화의 신격화는 사회 기억의 재질서화로 이끈다. 물론 글쓰기의 도움을 통해서. 앞 부분에 언급되었던 모든 기억의 특징들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현재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되는 것과 잊는 것 사이의 진행중인 구별은 그 자신의 시간 위에 기반하고, 과거와 미래의 비현재적 시간 지평을 가로질러 자신의 증류법을 배분한다. 이 과정은 재귀적이고, 그 자신의 시스템의 산물처럼 역사의 결과물들을 투입물로서 시스템 안으로 돌려 넣는다. 스스로를 위계의 꼭대기에 놓아 둘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작하는 유연한, 위계적 수준에서, 더 이상 고정점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훨씬 나아가는 비교를 위해 의미를 제공하는 범위에 유용함을 입증하는 일반화는 통제한다. 신성한 대상들, 시간과 지역에 따라 범주화되는 대상들은 예술로서 박물관 안에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요하다면 그 자신의 도플갱어(doppelgänger)로서 이해될 수 있다.  
고유함과 비교 불가능함의 의미에서 정체성, 진정성, 진실성 그리고 독창성 등은 문제 있는 개념들이 된다. 이는 비교 가능성의 보편성에 대한 대가가 치러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되는 대상들로 표시된다. 이제 이것은 자기-배양(self-culturing) 속에서 사회가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가장 확고하게 스스로에 의해 채택되는 차이의 개념들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것들이 그들 자신에게, 분리된 실체로서 개인에 대해 적용될 것임을 안다. 사회에 대해서 이것은 대조의 형식들이다. 거기서 그 자신으로부터 희망 없음, 아포리아, 리얼리티는 숨겨진다. 이것 중의 어떤 것, 아이덴티티, 진정성, 진실성, 독창성, 고유성 등은 커뮤니케이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시도는 그 자신을 해체한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적 요소는 수행적 요소, 발화에 의한 정보에 의해 반박되기 때문이다. 이는 개별적 사안에서 누군가가 정직하게 행동하는지 아니면 위선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심을 던질 뿐만 아니라, 정직과 위선을 구별하는 가능성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이 가능성이 커뮤니케이션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은 그들이 어떤 것을 다루는 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후에 그들이 사실상 기만적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42]
따라서 문화의 시맨틱은 우발성으로 커뮤니케이션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덮는다.[43] 그것은 모든 ‘필수적인’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을 풀어 놓는다. 그리고 이것 역시 왜 문화가 단지 현대 사회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현대 사회만이 스스로를 구조적인 우발성으로 반성할 수 있는,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반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첫번째 사회다. 진정성에 대한 모든 주장은 커뮤니케이션 불가능성으로 철수하거나 혹은 어떤 사람 혹은 그룹들, 인정 혹은 분파들의 특이점으로 다뤄진다.[44]
시간적 차원에서, 이는 끝 없는 미래, 시작도 끝도 없는 미래, 알려진 것 위에 기반한 모든 조작이 지연되는 미래로 문제들을 지연시키는 것에 해당한다.[45] 이런 미래는 그렇지만 잠복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한 미래를 포함한 세계는 관찰 불가능한 것, 심지어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음을 보장한다. 이는 시스템의 구별과 정체화에 대한 어떤 저항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
5.
문화가 비교하는 것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서 나아가지만 여전히 그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다른 시간, 다른 나라, 다른 ‘세계들’을 잠식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안에서 비교, ‘비교의 제3자’의 관점을 고착시킨다. 문화는 그래서 반성에 의해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반성을 조건 짓는 자기반성에 의해 구별된다. 따라서 그것은 유럽적인 것,을 적어도 출발점에 남겨둘 수 있다.
1800년대, 이는 그 당시 나이브한 역사적 유럽 중심주의를 분명히 인식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합리성의 사고나 인권, 국가,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개념처럼 세계적으로 유용하다고 오늘날 가정되는 다양한 개념들에 영향을 미��다. Husserl의 비엔나 ��의(1935년 5월 7일, 10일에 열린)는 회고해 본다면 놀랍게 보이는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상황이라는 면에서 이해될 만한데, 그의 관심은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만 구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미 출발점에 놓여 있었던 인간 이성의 telos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통해서.[46]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사회의 조건 아래서, 이런 포스트 식민주의적, 문화적 제국주의는,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에 대한 어떤 대체물도 사회는 가지지 않은 채 모순과 거부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정치적 그리고 이데��로기적 사용은 소박함을 갖춘 지도적 문화 원리들을 다시 주입하고, 그것들을 비교와 반성을 포기하면서 충돌과 교란된 변수들로 변형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만을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즉 시간적 관점에서, 비교를 수행하는 문화로 지시 대상을 돌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를 출발점으로 삼고, 그리고 나서 각각의 경우에 그것이 수행되어지는 현재 속에서 비교를 위치한다. 우리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전통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들을 환영하건 아니면 싸울 수 있는 한 우리는 문화를 가져왔다.[47]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래 된 우리의 문화는 새롭게 보이고, 반면에 글쓰기를 통해서 작동되는 초기 사회의 어린 문화들은 오랜 문화로 나타난다. 이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진보의 사고(그 자체 오래 된) 속에 여전히 뿌리를 두고 있다. ‘post-‘나 ‘neo-‘ 같은 전치사의 증가는 하나의 한계에 도달 했음을, 그리고 이 한계는, 주문 잔고처럼, 모든 것을 post-ism이나 neo-ism으로 바꾸며, 오래 된 것보다 새 것이 좋다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상업적 그리고 지적 광고 양 쪽으로 사용 돼야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즉 어떤 경우에도, 비교 관찰은 단지 현재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이런 시간적 자기 언급의 필연성에 대한 더 추상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문화, 이중화, 비교라면, 그러면 조작적 닫힘의 문제는 이 수준에서 해결될 필요가 있다. 그 경우에 문화는 사회가 구별되는 내적 재귀와 외적 언급을 통해 ‘이중 닫힘(double closure)’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48] 예측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시간적 차원이 공간적 차원보다 전체적으로 특히 경계가 정해진 지역들, 국민 국가들, 그리고 인종들을 통해서 복잡성을 다룰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적어도 모든 차이화된 기능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욱이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 비교는 서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역들과 덜 사회적으로 유리한 혹은 불리한(‘발전의 필요’로서 지시되는)지역들을 골라내는 매우 특별한 의미 만을 가진다. ‘문화’의 의미적 운반이 산업 혁명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의 무모함에 대해 논쟁을 하기 시작하는 반면, 오늘날에는 현대 사회의 진화적이고 구조적인 있을 것 같지 않음(improbability)을 조망하는 지역적 비교를 사용하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을 수 있었다. 이는 문화가 오늘날 제공하는 상징적(결합적) 측면[49]을 표상하는 것 만이 아니라 타자, 이 같은 문화의 악마 같은(분열된)[50] 측면을 반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문화는 관찰자의 관찰을 위한 하나의 관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미 존재한 현상으로 관찰을 이끈다. 물론 관찰된 관찰자는 또한 미래에 그들의 관점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다. 이런 우회를 통해서 미래가 그림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는 특히 현대 사회에 적용된다. 그것은 문화 자체의 관찰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기 관찰, 즉 문화의 개념에도 적용된다. 문화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에 관계된 역사적 개념으로서 문화를 드러낸다. 그래서 ‘문화’를 대상과 같은 레벨 위의 한 사실로 고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다른 대상으로부터 문화적 인공물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이를 시도하려고 했던 모든 정의의 실패, 그리고 스스로의 역사적 분석은 보편주의적 관점의 ‘문화’가 사회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공한다.  
  
[1] 가장 유명한 예로는, 문화와 사회 시스템 개념에 대한 Alfred L. Kroeber와 Talcott parsons 사이의 논쟁을 보라.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3 (1958), pp. 582-583. 또한 Alfred L. Kroeber and Clyde Kluckhohn, Culture, New York 1963.
[2] 예로 Alfred L. Kroeber and Clyde Kluckhohn, Culture: A Critical Review of the Concepts and Definitions, Papers of the Peabody Museum, American Archeology and Ethnology 47:1 (1952), pp. 1-223; Leon J. Goldstein, On Defining Culture, American Anthropologist 59 (1957), pp. 1075-1080; Albert Carl Cafagna, A Formal Analysis of Definitions of Culture, in Gertrude E. Dole and Robert L. Carneiro (eds), Essays in the Science of Culture in Honor of Leslie A. White, New York 1960, pp. 111-132; Leslie A. White, Definitions and Conceptions of Culture, in Gordon J. DiRenzo (ed.), Concepts, Theory, and Explanation in the Behavioral Science, New York 1966, pp. 91-110.
[3] E. g. Robert Boyd and Peter J. Richerson, Culture and the Evolutionary Process, Chicago, 1985.
[4] 만일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런 구별을 특별히 다시 한번 포착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별의 다른 편에 따른 어려움에, 자연 개념에 따른 문제들로 달려들게 될 것이다. 게다가 또 Niklas Luhmann, Über Natur, i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vol. 4, Frankfurt am Main 1995를 보라. 물론 Odo Marguard가 제안한 것처럼, 문화와 자연 사이의 구별을 문화로 재-진입함으로써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가능성도 남아 있을 것이다. Zur Bedeutung der Theorie des Unbewußten für eine Theorie der nicht mehr schönen Künste를 보라. Odo Marquard, Aesthetica und Anaesthetica: Philosophische Überlegungen, Paderborn 1989, S. 35-46에 재출판으로부터 인용되었다. Freud로부터 100여년 전,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은 ‘정신’을 생산함으로써 그 자신을 넘어서다고 가정했다. 대표적인 예로서 Karl Philipp Moritz, Das Edelste, Schriften zur Ästhetik und Poetik, Tübingen 1962, S. 13-19에서 인용.
[5] Frances A. Yates, The Art of Memory, Chicago, 1966을 보라.
[6] 그렇지만 무너진 홀 안에서의 위치에 기반한 가수 Simonides의 죽음의 식별이라는 기반 이야기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한다.
[7] 이 주제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은 Hans Belting, Lik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 trans. Edmund Jephcott, Chicago, 1994.
[8] Belting, Likness and Presence, p. 484
[9] 편집자 주 – Concettismo는 ‘conceptism’의 이탈리아어. 이는 스페인 바로크에 유래한 특징적인 문학 스타일을 지칭하며, 또한 17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 스타일은 재치 있는 은유, 패러독스, 그리고 말장난의 사용으로 특징된다. 
[10] 이런 방향으로 이뤄진 세기 후반에서의 변화에 대해서는 Joan Pittock, The Ascendancy of Taste: The Achievement Joseph and Thomas Warton, London 1973을 보라. 다음 장에 반성과 관련해서, Thomas Warton이 영국 시에 대한 확장적인 비교 역사적 연구를 출판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 History of English Poetry, 4 vols., 1774-1789.
[11] 이에 대해서는 특히 Niklas Luhmann, Verfassung als evolutionäre Errungenschaft, Rchtshistorisches Journal 9 (1990), pp. 176-220.
[12] Antoine Louis Claude Destutt de Tracy, Eléments d’idéologie, 5 vols., Paris 1801-1815, reprint Stuttgart 1977에서의 원래 의미에서.
[13] Jean Paul, Vorschule der Ästhetik, Werke vol. 5, München 1963, S. 169에서의 전체적으로 막연한 이 정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 없는 비판. (비록 정확하게 그것이 트릭이지만!) 그렇지만 p. 201에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Der Witz ... nimmt an keinem Wesen Anteil, sondern nur an dessen Verhältnissen; er achtet und verachtet nichts; alles ist ihm gleich, sobald es gleich und ähnlich wird; ...” (재치는… 어떤 존재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존재의 조건만을 다룬다; 그것은 어떤 것도 존경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재치에게는 비슷하거나 유사한 한에서 모든 것은 같은 것이다.)
[14] 상세하게는 고려할만한 차이를 가진. 그래서 독서와 독자를 반영하는 소설의 상대적으로 전통에서 자유로운 수행보다는 시의 전통에 이끌린 이론에서 더욱 그렇다.
[15] ‘문화’의 발명 이전에 비교를 위한 다른 맥락은 소위 의식(儀式)학(the science of ceremony)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Friedrich Wilhelm von Winterfeld, Teutsche und Ceremonial-Politica, Frankfurt-Leipzig 1700; Johann Christian Lünig, Theatrum Ceremoniale Historico-Politicum, 2 vols. Leipzig 1719-20.
[16] 영국에서 회화, 음악 그리고 시 영역에 대해서는, Lawrence Lipking, The Ordering of the Arts in Eighteenth Century England, Princeton, NJ 1970, introduction pp. 6ff.
[17] 그래서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2013, § 53.
[18] 특히 낭만주의에서. 하나의 예를 들자면, Ludwig Tieck의 초기 소설 William Lovell은 글쓰기로 주어진 사고들, 즉 주요 캐릭터와 보조 캐릭터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로만 이뤄져 있다. 인쇄된 텍스트는 그 자체 글쓰기일 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을 글쓰기를 이중화한다. 일종에 형식 안으로 형식의 재진입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의 쓰여진 의견들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의견들은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변하고, 작가의 내러티브에 독립되어, 어떤 사회적 규칙에 의해 통합되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vorüberfliegender Gefüle’ (떠다니는 감정들)의 충동 하에서 행동한다. 그것은 (공유된) 이성에 의해 ‘in eins zu schmelzen’(하나로 녹아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고딕 노벨의 보통 문채(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 배후에서 비밀리에 당겨지는 줄들)는 사용되고 동시에 아이러니에 의해 가치를 잃는다. 의견들은 결말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혹은 잘해야 기적적인 것, 숭고한 것, 그리고 공포스러운 것이 최종적으로 현세의, 전기적 설명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질 때에만 잘해야 그렇게 될 수 있다. 의미를 찾는 독자들은 그들 자신의 장치들에 남겨진다. 심지어 같은 시기 유행이 되었던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의해 조건이 정해졌던 ‘해석학’ 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에 의해 환상을 깨게 되었다. Ludwig Tieck, William Lovell, in Frühe Erzählungen und Romane, München 1963, p. 378의 인용을 보라.   
[19] 우리의 방법론적 접근은 전개의 일반적 과정을 뒤집는 비전통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 주제의 섬세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서 ‘검증’하는 이론적 가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차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등장하는 검증 가능한 사실적 언술에서 출발해서 그리고 나서 이론의 발전을 위해 이 언술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뒤바뀜은 인식론적 기반으로서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를 채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20] 이에 대한 방법론적 조건은 기능과 기능적 등가물과 같은 개념 하에서 발전되었다. Niklas Luhmann, Funktion und Kausalität, Soziologische Aufklärung vol. 1, Opladen 1970, pp. 9-30. 문화에 대해서 더 큰 중요성을 아마도 가지고 있는 삼극 구조(지시, 지시된 것 ‘해석자’로서의 기호)에 대한 동일한 사고는 기호학에서 발견될 수 있다. Niklas Luhmann, Sing as Form, Dirk Baecker (ed.), Problems of Form, Stanford, CA 1999, pp. 45-69. 우연히 모든 수학적 방정식은 방정식의 양 편에서 구별되는 것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21] ‘Aus der matten Wirkung der Mythologie auf die neuere Dichtkunst, und so aller Götterlehren, der indischen, nordischen, der christlichen, der Maria und aller Heiligen ersieht man die Wirkung des Unglaubens daran’ (더 최근의 시학에 대한 신화학의 희미한 영향, 모든 신성한 가르침, 인디언, 노르딕, 기독교,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 [비교의 관점을 지적한다. N.L.]의 희미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잇는 믿음의 부족의 효과를 본다) Jean Paul, Vorschule der Ästhetik, p.73.
[22] 라틴과 독일에서의 발전의 요약에 대해서는 Hans Peter Thurn, Soziologie der Kultur, Stuttgart 1976, pp. 10ff. 유사한 명명화 과정은 국가 개념에 대해서 이전에 삼세기에 걸쳐 발생했었다. 그래서 이런 언어적 가능성들이 반드시 새것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의 개념을 포함해서 1800년대 경에 더욱 자주 사용되게 되었을 뿐이다.
[23] 그래서 Raymond Williams, Culture and Society 1780-1950, Penguin, Harmondsworth, Middlesex, 1961판 본에서.
[24] 이에 대해서는, Bernhard Giesen (ed.), Nationale und kulturelle Identität: Studien zur Entwicklung des kollektiven Bewußtseins in der Neuzeit, Frankfurt 1991에 실린 논문들을 보라.
[25] Jacques Derrida, L'autre cap: Mémoires, réponses, responsabilités, Liber (le Monde edition) 5 (October 1990), pp.11-13 (11): ‘Le propre d'une culture, c'est de n'être pas identique à elle-même’ (문화의 구별은 그 자체 동일하지 않다)
[26] 이 중요한 추가는 Aristotle, Peri Psyches 424 a 18-20
[27] Plato, Theaeteus Cff.
[28] Socrates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Theaeteus 192 A-C.
[29] Warren S. McCulloch, Embodiments of Mind, Cambridge, MA 1965.
[30] 이는 심리 실증적 연구가 취하는 전형적인 접근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Ulric Neisser and Eugene Winograd (eds.), Remembering Reconsidered: Ecological and Traditional Approaches to the Study of Memory, Cambridge, 1988.
[31] 세포와 시스템에 대해서, Howard H. Pattee, Cell Psychology: An Evolutionary Approach to the Symbol-Matter Problem, Cognition and Brain Theory 5 (1982), pp. 325-341
[32] Dostoevsky에서 처럼, 희미한 마음(a Faint Heart)
[33] 그래서 Heinz Förster, Das Gedächtnis, Vienna 1948. 또한 Heinz von Föerster, Quantum Mechanical Theory of Memory, in Heinz von Föerster (ed.), Cybernetics: Circular, Causal, and Feedback Mechanisms in Biological and Social Systems: Transactions of the Sixth Conference March 24-25, 1949, New York 1950, pp. 112-134
[34] Heinz von Föerster, Quantum Mechanical Theory of Memory는 특히 이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Karl E. Weick, The Social Psychology of Organizing, New York 1979, pp. 205-231
[35] 예를 들어 Heinz von Föerster, What is Memory that it May Have Hindsight and Foresight as weil?, in Samuel Bogoch (ed.), The Future of the Brain Sciences, New York 1969, pp. 19-64.
[36] 그래서 Gerd Sommerhoff, Logic of the Living Brain, London 1974, pp. 73 ff
[37] 그래서 Robert Rosen, Anticipatory Systems: Philosophical, Mathematical and Methodological Foundations, Oxford 1985.
[38] 예를 들면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 (그러나 잊는 것보다는 기억하는 것에 더 무게를 부여하면서), Aleida Assmann and Dietrich Harth (eds.), Mnemosyne: Formen und Funktionen der kulturellen Erinnerung, Frankfurt 1991; Jan Assmann, Cultural Memory and Early Civilization, Cambridge 2011; Aleida Assmann, Arbeit am nationalen Gedächtnis: Eine kurze Geschichte der deutschen Bildungsidee, Frankfurt 1993.
[39] Karl Weick은 이에 대해서 ‘집합적 마음’ 개념의 변형을 선호했다. 이 ‘집합적 마음’은 어떤 본질적 실체로서 상상되어서는 안되지만, 참여자의 의식이 접근 불가능하게 남아 있는 상호작용의 교차를 통해서 발생되고 유지될 수 있다. Karl E. Weick and Karlene H. Roberts, Collective Mind in Organisations: Heedful Interrelating on Flight Desks,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38 (1993), pp. 357-381. Daniel M. Wegner, Ralph Erber and Paula Raymond, Transactive Memory in Close Relationship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1 (1991), pp. 923-929에서는 ‘자연적’ 커플이 인공적으로 묶인 하나보다 기억하는데 더 좋은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를 독립 변수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차이를 도입하면서, 순수하게 심리학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40] admiratio에서 자극(irritation)으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Niklas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vol. 4, Frankfurt am Main 1995, pp. 55ff.
[41]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vol. 1, Werke in zwanzig Bänden, vol. 13, Frankfurt 1970, pp. 393 ff.
[42] Tieck, William Lovell, p. 549에서 윌리엄 로벨에 의해 에밀리아가 유혹되는 장면을 보라. ‘Oh! man rede mir doch künftig nicht von Menschen, die sich verstellen. Was ist Aufrichtigkeit in uns? (오! 미래에는, 진의를 숨기는 인간 존재들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요. 우리에게 정직이란 무엇인가요?)
[43] Dean MacCannell and Juliet F. MacCannell, The Time of the Sign: A Semiotic Interpretation of Modem Culture, Bloomington Ind. 1982, pp. 29에서는 ‘인간은 문화를 통해 모든 필요한 의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쓴다. 이로부터 문화는 결코 진정한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고, 오직 반성을 통해서만 등장한다는 것이 이어진다. (p. 73)
[44] 그래서 Niklas Luhmann and Peter Fuchs, Reden und Schweigen, Frankfurt 1989를 보라. [역자 주: 서론의 영어 번역은 New German Critique, 61 (1994), pp. 25-37에서 Speaking and Silence로 출판되었다]
[45] Niklas Luhmann, The Future Cannot Begin: Temporal Structures in Modem Society, Social Research 14 (1976), pp. 130-152
[46] 유럽적 맥락을 넘어서 문제를 비교하는 것은 거의 언급할 가치가 없이 경계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때문에 우연히 격렬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Ziguner, die dauernd in Europa herumvagabundieren’ (유럽을 계속 떠 돌아다니는 집시)는 이 유럽적 맥락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 존재의 모든 다른 그룹들은 그들 자신의 지적 자기-보전의 이름 하에 유럽화될 것이다. ‘während wir, wenn wir uns recht verstehen, uns zum Beispiel nie indianiseren werden’ (반면에 우리가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를 들어 인도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dmund Husserl, Die Krisis des europäischen Menschentums und die Philosophie, Husserliana vol. VI, Den Haag 1954, pp.314-348 (p. 319와 320 인용)
[47] Karl Mennheim은 이를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구별에서 표현했다. 전통주의를 통해(물론 그 자체 현대적 개념인) 관례적인 것의 반성 되지 않은 연속성을 표현했다.
[48] 이중적 닫힘 개념에 대해서는 Heinz von Foerster, Observing Systems, Seaside CA. 1981, pp. 304ff. 그리고 Heinz von Foerster, Für Niklas Luhmann: Wie rekursiv ist Kommunikation?, Teoria Sociologica 1:2 (1993), pp. 61-88 (78 ff.). 또한 Dirk Baecker, Die doppelte Schließung der Organisation, Teoria Sociologica 1:2 (1993), pp. 147-187.
[49] 그래서 강하게 확산되는 견해는, 무엇보다도 더 상호주의적 (행위 이론) 개념과 의미론적 상징적 (문화) 개념 사이의 주된 논쟁이 문화의 이런 상징-관계된 정의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더 최근의 설명에 대해서는 Bernhard Peters, Die Integration moderner Gesellschaften, Frankfurt 1993, pp. 67ff. 그리고 Raymond Williams, The Sociology of Culture, New York 1982.
[50] 역자 주 – 여기서 루만은 고유의 그리스적 의미 ‘함께 가져오다’와 ‘나누다,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symbolical’과 ‘diabolical’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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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bap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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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서울: 6년만에 뭉친 ‘B.A.P 출신’ 방용국→문종업, 감격의 눈물 “감개무량…마지막 아냐”[SS현장] B.A.P's Bang Yongguk → Moon Jong-up, united for the first time in 6 years, shed tears of emotion "Impressed...It's not the last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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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정하은 기자] 비에이피(B.A.P) 출신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이 다시 뭉쳤다.
비에이피 출신 방용국, 정대현, 유영재, 문종업이 6년 만에 뭉쳤다. 4인조로 새로운 출발을 알린 이들은 8일 첫 EP ‘커튼 콜(CURTAIN CALL)’을 발매한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이날 서울 강남구 일지아트홀에서 미디어 쇼케이스를 열었다.
2017년 여덟 번째 싱글앨범 ‘에고(EGO)’ 이후 돌아와 오랜만에 무대에 선 멤버들은 “감개무량하다”, “떨린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은 질의응답 중 눈물을 보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다시 뭉친 감회를 전했다.
정대현은 “3년 가까이 공백기를 보냈다. 많은 고민을 하던 와중에 종업과 같은 회사 식구가 되면서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유영재는 “올해 5월 전역 후 멤버들과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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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업, 정대현, 유영재, 방용국은 지난 2012년 싱글 ‘워리어’를 발매하고 비에이피로 데뷔했으며, ‘대박사건’, ‘원 샷’, ‘1004’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매하고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2014년 정규 1집 발매 후 당시 소속사 TS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 분쟁으로 법정 공방을 겪었으며 결국 이들은 2019년 모든 멤버가 계약이 만료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해체 수순을 밟았다.
상표권 문제 등으로 이번 활동은 비에이피로 활동하지 못하게 됐다. 유영재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팀명으로 활동했는데 새로운 팀 이름으로 활동하긴 어려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대현은 “새로운 팀명보단 차라리 우리 이름으로 대중을 만나고 팬들을 만나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변함없는 팀워크를 보여주며 그룹 활동 의지를 다진 이들은 6년 만에 팬들 앞에 함께 서게 됐다. 방용국과 유영재는 각각 다른 소속사에 몸담고 있으며 정대현과 문종업은 MA엔터테인먼트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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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군 복무 중인 멤버 젤로는 이번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젤로에 대해 문종업은 “젤로도 멀리서 응원하고 싶다. 다음에는 함께 하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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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곡 ‘곤(Gone)’은 한층 무르익은 퍼포먼스와 팀워크를 느낄 수 있는 곡이다. 팬들을 추억하는 마음과 소중한 지금 이 시간을 생각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가사에 담았다. 방용국은 “무대 위에서 팬들에게 들려드리면 행복할 거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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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은 오는 17~18일 양일간 서울 KBS아레나에서 ‘2024 더 라스트 팬 콘 커튼 콜’을 연다. 이는 2018년 ‘B.A.P 콘서트’ 이후 6년 만의 공연이다. 서울에서 팬들을 만난 후 이들은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 아시아 투어도 개최한다.
팀으로서 활동 계획에 대해서 방용국은 “이번 앨범의 콘셉트가 비에이피 활동을 할 때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은 앨범의 연장선이었다. 그때 앨범의 기획안이 6~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낸 앨범은 아니다. 언제든지 또 새로운 활동으로 팬 여러분들에게 인사드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했다.
방용국은 “멤버들과 어린 나이부터 성장해오는 과정을 함께 하다 보니 저희의 청춘 자체가 비슷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활동을 통해서 지난 추억들을 공유하고 회상할 수 있는 앨범이 됐으면 좋겠고 그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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