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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재
textlab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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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영웅들의 전사(戰史), 『전남 유격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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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호
선인, 2008
- 남한에서 빨치산의 역사는 수많은 퍼스펙티브의 충돌 위에 놓여있다. 우선 구빨치라 불리는 남로당 출신의 빨치산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헌신적인 독립 투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민족 해방에 온 몸을 바쳤던 이들이라는 점은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될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 이후 그들이 선택한 통일의 경로가 민족적 비극인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것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물론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미 일본을 아시아의 병참 기지로 해서 한반도 38선을 중심으로 대 공산주의 전선을 구축하려던 맥아더와 미국 국방부를 중심으로 하는 매파의 전략 위에,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뿌리까지 축출하려는 이승만 등 친일파 잔재들이 만든 정부의 방침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반면 한반도에 영향력 있는 괴뢰 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스탈린의 전략 속에서 차례대로 토착 독립 운동 세력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던 김일성의 괴뢰 정부 역시 비극적 내전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온전한 통일 정부 형태의 독립을 꿈꿨던 사회주의자들의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불충분한 선택지 속에서 삶을 바쳐 자신의 믿음에 헌신했던 빨치산의 삶은 그래서 영웅적이었고, 동시에 지정학적 평가라는 면에서 정해진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시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이 영웅적 비극의 운명에 대해서는, 1948년 ‘대구 항쟁’에서 결코 무기를 잡지 않으려 했으나, 그리고 봉기의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궁지에 몰린 민중의 자발적 항거가 시작되자 결국 맨 앞에서 투쟁하고, 군경의 검거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 유격대에 참여해야 했던 이일재 선생의 회고록이 잘 보여줄 것이다.
- 그러나 이런 퍼스펙티브의 충돌 때문에, 무엇보다 남한의 폭압적인 반공 정부들 때문에 빨치산의 투쟁의 역사적 기록은 평가의 잣대 위에 오르기도 전에 우선 삭제되었다. 이 기록을 투명하게 다루게 된다면, 여기에 줄줄이 달려 수많은 남한 정부들의 죄악이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빨치를 만들었던 이승만 정권의 폭압적 통치와 불법 행위들, 그리고 6.25 시기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 군대에 의한 민간 지역 학살 사건과 무차별 폭격 등의 전쟁 범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빨치산 투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객관적으로 다뤄진 기록들이 먼저 만들어지고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전남 유격투쟁사』는, 간신히 문학의 형태로만 알려져 왔던 빨치산의 투쟁을 ‘전사(戰史)’라는 형태로 정리한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 이 책을 쓴 정관호 선생은 이일재 선생 같은 구빨치와는 달리, 함경도 출신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고, 이후 해방된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고 교원으로 있다가 6.25 전쟁과 함께 징집되어 군대에 참여했고, 50년대 말 남한 지역에 남아 빨치산 활동을 하다 54년에 체포되었던 북한 출신 빨치산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 그리고 다른 생존 빨치산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자료들을 최대한 모아서 전체 빨치산의 역사는 아니더라도 ‘전남 지역’의 투쟁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책의 핵심 부분인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의 투쟁사. 다음은 중요 전투의 기록, 마지막으로 빨치산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간단한 약력이다. 다만 관점은 구빨치의 관점에서 정리되었던 다양한 투쟁 기록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조선노동당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러다 보니 빨치산 투쟁을 식민지 시기 김일성의 무장 항일 투쟁의 계승으로 평가하는 관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최대한 역사적 기록을 충실하게 정리한다는 자세에 충실하다.
- 그러나 이런 큰 의의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책은 ‘전사’가 지니는 기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빨치산 투쟁’의 비극적 운명이 들어갈 틈이 없다. 오직 주어진 명령에 따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헌신적으로 투쟁한 투사들의 이야기, 그들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었는지, 그리고 열악한 게릴라전의 와중에도 ‘배우고 생각한다’는 사회주의자의 기본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는지에 대해 충실하게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이런 명령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적 검토를 담고 있지 않는다. 수많은 빨치산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며 벌이는 투쟁이 과연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정말 빨치산의 투쟁이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우세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는지, 지역 단위의 해방구를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이 0,1%라도 있었는지, 그저 이런 빨치산의 투쟁은 미국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김일성 정권에게 조금의 숨 돌릴 기회를 만들기 위한 희생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심지어 휴전 협상에서 빨치산들의 북한 송환 가능성을, 빨치산과의 연계 가능성을 부정한 김일성에 의해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관호 선생은 그런 일은 전사(戰士)의 역할이 아니라 역사가의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 역사의 충돌 속에는 수많은 비극을 담고 있다. 건조하게 정리한 역사적 사건들과 그것에 대한 평가의 안에는 너무 많은 사연들과 삶이 들어 있다.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개인의 선택이 그것 만으로 올바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남 유격투쟁사』는 그래서 읽는 내내 고통스러운 책이다. 건조하게 사건들을 나열할 수록, 책의 말미에 담긴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유격 투쟁에 참여했던 빨치산들의 이름과 한, 두줄로 정리된 그들의 역할과 운명에 대해서 보는 것. 아마 그렇게 건조하게 정리해야 했던 정관호 선생은 몇 백배는 더 깊은 회환을 품지는 않았을까? 이런 선생의 작업에 기반해 빨치산 투쟁에 대한 더욱 많은 자료가 정리되고, 그런 객관적 자료 위에 진정한 의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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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aqweasdzxc-blo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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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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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의 ‘화해’,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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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학고재, 2003
- 신념은 기억의 축적이다. 사소하고 개인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신념’이라는 이름의 정서로 자리잡는다. 술이 취하시면 털어놓던 박정희에 대한 아버지의 저주, “똑똑한 이라면 마르크스주의자지”라는 친척들의 당연하다던 이야기, 대학 시절 내가 흥얼거리는 ‘제헌의회가’를 듣고는 당신도 아는 노래라며 ‘적기가’를 부르시던 어머니. 이념도 뭣도 가지지 않았던 그저 장삼이사였던 이분들 마음 속에 깔린 심상은 내게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다. 미군 총에 죽을 뻔했던 외가 어른들의 분개나 북한군에 돌아가신 큰 이모부의 이야기도 남이건 북이건 민중들 모두가 겪어야 했던 일반적 고통 중에 하나일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은 많은 기억이 ‘반공의 요새’라 불리던 박정희 시대 일상의 삶 속 곳곳에서 경험되곤 했다. 혼재된 생각과 혼재된 기억들. 경험 못했던 식민지 조선과 6.25, 그리고 박정희 시대가 이렇게 삶 곳곳에 조각들로 흩어져 기억되었다. 
- 기억의 파편들을 이야기하는 건 이 파편들이 모여 ‘신념’이 된 원형적 경험 중 하나가 ‘김지하’였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다음 해 중학교 은사님 댁에서 펼쳐본 “오적’과 “고행…1974”은 수 많은 기억의 조각들로 하나로 구현된 어떤 삶의 태도를 제시해주었다. 그것은 공포와 동시에 동경 그리고 선택에 대한 어떤 삶이었다.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하나만으로도 ‘기존 전체주의 체제에 구멍을 뚫는 대단한 성취’로 여기는, ‘리버럴’보다도 우측에 있는 삶이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신념을 여전히 정서 속에서 버릴 수 없는 것은 이 때의 경험 과 선택 때문이다. 그래서 ‘김지하’는 애증의 대상이며, 그래서 외면했던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감정적 평가를 너머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그의 삶에 대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선택한 건 그의 회고록이다. 회고록 자체에 대해 진실성 여부를 문제 삼기도 하지만, 의문 자체가 어쩌면 회고록이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처럼 하나의 ‘자기-기술’로 말이다. 
- 회고록은 크게 세 층위 위에서 펼쳐진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시대 경험이다. 동학난, 식민지 소작 쟁의,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과 학살, 또 다시 이어지는 독재와의 싸움. 모든 경험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기억들과 얽혀 이어져 간다. 커다란 역사적 명명의 사건 밑에서 그것에 휘둘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죽음이 이야기된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증언하던 죽음과 삶의 시간과 공간을, 그는 수 십년에 걸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려낸다. 그래서 회고록 1권의 기억은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단절 “어느 날 그는 죽었다”로 마무리되어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최정운 교수가 『한국인의 탄생』, 『한국인의 발견』이라는 놀라운 작업을 통해 수행했던 19세기 이후 ‘한국인’을 만들어 냈던 집단 경험의 문학적 탐색을, 김지하는 삶의 기억 속에서 구체적 개인의 얼굴을 통해, 그래서 더 고통스럽게 그려낸다. 이런 경험의 축적 때문에 80년대 이후 그가 보여주는 한풀이, 초혼의 방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집단적 기억으로는 명명되었으나, 개인들에게는 강제로 덮여 버렸던, 드러낼 수 없는 이미 썩어버린 기억들을, 김지하 혹은 다른 수 많은 주체들이 한으로, 업으로 몸 속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두 번째 층위에서는 시대적 경험이 ‘반성적 사유’를 통해 형상화된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성사가 될까? 80년대 ‘좌파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는 자신이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믿었지만, 김지하의 시대는 남로당과 빨치산 그리고 6.25라는 ‘사회주의 혁명’의 도전과 실패를 몸으로 직접 경험한 이들의 시대였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미래를 위한 대안일 수도 있지만, 가장 처절한 패배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래서 김지하의 시대에서 ‘사회주의’는 언제나 ‘실패한 무언가’, 최소한 완전하지 못한 무언가다. 남로당이었던 아버지, 학교 은사 로선생 등 김지하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이 혁명의 길에서 세상을 떠나거나 살았어도 좌절하며, 패배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마치고자 했던 기억. 이들의 경험 위에 그가 서서 바라보는 건 그래서 사회주의 보다는 언제나 완성되지 못한 민족주의였다. 식민지 시기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이라는 경험이 자신의 이상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정,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갈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했던 역사. 이 모든 시대의 경험은 완성되지 못한 민족주의와 동일시되어간다. 말년에 그가 환빠류에 빠지게 된 것 역시 달성하지 못한 민족주의에 대한 갈급 때문일 것이다. 
- 박정희가 일종의 전도된 민족주의를 미친 듯이 떠들어 대며 자신을 정당화하던 때가 김지하가 그에게 가장 격렬하게 맞서던 시기라는 걸 생각하면, 대립을 가능하게 하는 지평 자체가 민족주의 위에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둘이 대립한 것은 ‘공동체주의’에 대한 이해 때문으로 보는데,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조선이 가진 ‘도덕 경제’의 구조와 제도는 지역 단위의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강화 재생산하는 형태였다. 공동체는 전쟁기에는 ‘군사 공동체’로 작동하고, 기근시에는 ‘구휼’의 기본 단위가 된다. 더 공부를 해야겠지만 공동체주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19세기, 공동체주의를 재구성한 것은 동학이나 남학과 같은 신흥 종교, 사상 운동은 아니었을까? 김지하가 끝없이 사색했던 건 이 밑으로부터의 ‘공동체주의’의 재현이었다. 그가 민족민중 문화운동이라 일컫던 것이나 이후 ‘생명 운동’이라 부르는 것 모두 밑으로부터의 공동체주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바라보는 공동체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개의 삶이 주인이 되지 않고, ‘공동체’가 독자의 생명을 가질 때 ‘전체주의’가 된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민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위해 개개의 삶은 기꺼이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본 식민지를 통해 들어온 제국주의의 파시즘, 민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주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를 바라보는 것은 실패한 사상 운동의 지평 위에서, 완성되지 못한 ‘민족’이 뿌리 깊게 내려온 ‘공동체주의’와 어떻게 만나는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풀릴 수 없는 대립도 민족주의라는 지평 위에 공동체주의가 전개되는 상해파와 디아스포라의 경험 위에서 무국적자, 국제주의의 공동체주의라는 이르쿠츠크파는 도저히 서로 닿을 수는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았던 마지막 층위 위에는 ‘운동사’가 펼쳐진다. 80년대 운동 경험의 영향권에서 쓰이고 연구된 남한 운동사는 언제나 ‘자의식 과잉’으로 가득차 있었다. 진정한 운동은 식민지 조선 이후에 80년대 비로서 재개되었다는 희한한 믿음이다. 김동춘 교수같은 사회사 연구자들이 천연덕스럽게 60년대 사회 운동은 지리멸렬했다고 기술한다. 박정희의 폭압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 시대는 누구도 숨을 쉴 수 없었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던 사회 운동의 ‘암흑 시대’일 뿐이었다. 빛나야 할 것은 80년대 잿더미에서 새로 시작된 대중적 사회 운동, 좌파 운동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6.25 전쟁이라는 사회 운동에서는 최악의 정치적 환경, 그리고 전쟁 이후 월북과 월남이라는 이동 과정을 통해 정리된 정치 세력의 편성, 여기에 초법적 박해를 용인했던 이승만 정권. 이런 상황에서도 4.19혁명이 가능했고, 빠르게 통일 운동, 좌파 운동이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정희의 반혁명 쿠테타가 벌어지고 서슬 퍼런 군부 통제 속에서도 불과 2년만에 사회 운동이 재건되는 것을 ‘공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오랜 혁명 전통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설명될 수 없다. 이일재 선생과 이수갑 선생의 평전처럼 일제하 ‘조선공산당’의 전통이 어떻게 60년대 이후까지 지속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와 연구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못지 않게 이런 맥락을 김지하의 회고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해방 후 남로당의 지휘하에 체계적으로 ��판했던 수많은 좌파 서적들이 60년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대중들에게 소비되는 것을 통해 사상적 전통의 강고함에 놀라게 되기도 한다. 전두환의 강력한 통제와 숱한 공안 사건이 터져나왔던 80년대 중반, 내가 처음 영문판 레닌 선집을 구했던 것을 생각해 봐도, 사회주의 운동 사상 운동의 전통이 더 폭 넓게 남아 있던 당시에는 더욱 많은 자료와 책들이 대중 속에서 소비되지 않았을까? 표면적인 공간 밑에서 말이다.  
- 비록 모든 것이 김지하 중심으로 전개된 것처럼 서술되기는 하지만, 회고록에서는 다양한 전위당 건설의 시도, 그리고 그것의 파괴에 따른 전체적인 전략의 변화들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장기전을 대비해 지역 중심으로 지역 운동, 부문 운동 조직들을 구축하고, 각 지역들간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 그리고 종교에서 다양한 조직들이 건설되고, 연대를 꾀한다. ‘전위당’이 불가능할 때 이들은 ‘통일 전선’에 대한 모색을 본격화한다. 이런 전략적 변화 과정은 60년대에서 70년대 운동 노선의 전환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운동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김지하의 회고록은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책에 대한 인상을 ‘삶과의 화해’라 한 것은 김지하 본인이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긍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모습을 통해 나도 나의 기억과 화해할 수 있었다. 김지하가 변절하지 않았냐고? 그가 수 많은 막말을 던지며 반동적 인사들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비판의 시간이 지난 후 시간은 시간으로써 흘러 보내야 할 것 같다. 특히 회고록을 읽는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완전할 정도로 삶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이에게 누가 엄정함과 정의를 요구할 수 있을까? 심진구 선생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역사는 잔인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걸 알면서도 또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기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놔두어야 한다. 한 걸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경의를 바쳐야 한다. 그런 경의 대신에 그가 고통으로 절규한다고 귀를 막으며 욕을 할 수는 없다. 슬프게 지켜볼 수밖에. 그렇게 그는 그의 삶에, 나는 나의 삶에 화해하는 것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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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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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해방의 최전선에서,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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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1925년 창건되어 불과 4년간 활동했지만, 노동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같은 부문 조직만이 아니라, 신간회와 근우회와 같은 통일전선조직까지 조선에서 일어났던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투쟁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했고, 계속되는 일제의 침탈에 의해 중앙 간부의 8~90%가 체포되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배출한 조직 역량을 통해 30년대 대중 투쟁의 현장에서 지도적 역량을 발휘했던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 7, 80년대 어쩔 수 없던 시대적 조건에서 주로 일본의 수사와 재판 자료를 기반으로 이뤄졌던 반동, 반공적 관점의 조선공산당 연구가, 임경석 교수와 같은 많은 차세대 연구자의 연구 결과들을 기반으로 새롭게 쓰이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문서들을 발굴하고, 특히 러시아 문서 자료들을 기반으로 조선 사회주의 운동 주체들이 작성한 다양한 보고서들을 통해 역사의 상에 대해 재구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짧게 활동하다 일제 검거에 의해 붕괴되어 변변한 활동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분파주의적 조선공산당의 이미지는, 참을 수 없을 가혹한 고문 수사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심문 투쟁으로 저항하여 조직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계 지도부에 의해 재빠르게 재건되었던 강고한 조직이자 정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대중 투쟁과 통일전선 구축에 헌신적이었던 조선공산등의 실체로 바뀌게 된다. 분파적 갈등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분파 활동을 극복하려는 지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눈에 띄며, 체포된 이들의 숫자만으로 영향력 없던 소수의 투쟁으로 폄하되던 것과 달리 다양한 대중조직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거나, 아니면 기존 대중조직 속에 들어가 세포���직을 구성해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돋보인다. 조선공산당이 학생 조직, 청년 조직에서 양성한 사회주의자들이 이후 30년대 대중 투쟁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조선공산당의 형식적인 활동 기간인 29년까지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이일재, 이수갑 선생 평전에서 봤던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당원이 지녔던 자부심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그러나 이런 헌신적 투쟁이 당사자들의 삶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읽는 것은 편하지 않다. 당을 책임졌던 책임비서 중 김세연, 차금봉은 옥사했고, 1차 책임비서는 폐인으로 출옥 후 결국 44년 사망, 2차 책임비서인 강달영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 사망한다. 마찬가지로 김철수는 45년까지 옥중에서 버티다 해방과 함께 풀려나게 된다. 결국 조선공산당에서 책임 당원이 된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엄혹했던 현실 속에서 변절을 당연시했던 많은 민족주의 운동가들의 모습과 참으로 다른 것이었다. 특히 국내에서 실효성 있는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없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이나 사실상 일본 총독부의 허가 아래 자치 운동을 했던 이승만류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가혹한 통제 상황에서도 대중과 함께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조선공산당 운동은 일본 식민지 시기 민족해방 투쟁의 중심에 누가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심훈의 시 「박군의 얼굴」은 1927년 박헌영의 출옥장면을 통해 이런 헌신적인 투쟁 속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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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남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내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서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헌영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 또한 어느 나라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그렇듯 초기 지식인, 인텔리겐챠 중심의 운동을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정당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였고, 그 결과 부문 운동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초기 지식인 중심의 사상 서클 운동 상황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회, 이후에 ML파까지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했고, 운동 노선을 놓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이후 분파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분파 지도자들의 노력은 충분히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 그러나 조선공산당 역사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아쉬운 점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연구가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운동에 대한 평가나 지침을 일단 ‘정답’처럼 전제하고 그에 따라 조선공산당 활동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볼세비키 활동과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과연 식민지 사회주의 운동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러시아 볼셰비키는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 때문에 반제운동을 벌이는 러시아의 한인 사회주의 활동을 주기적으로 제한하거나, 심지어 일제에 의해 희생당하는 상황을 방치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자국의 사회주의를 지키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후 지속적으로 세계 혁명의 지휘부로 자처하던 러시아 볼셰비키의 이런 전술적 태도를 용납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이 숱하게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분파 투쟁을 질책했으나, 정작 그 뿌리를 찾아보면 이 분파 투쟁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자 기억이 되는 ‘자유시 사변’의 책임이 러시아 볼셰비키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볼셰비키에 맞섰던 재러 유지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회의’를 이용하여, 정작 볼셰비키와 함께 짜르와 맞섰던 조선인 빨치산 부대를 통제하려 했던 건 볼셰비키 내부의 ‘좌익 공산주의자 분파’로 추정된다. 이들은 ‘국민회의’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파’를 결성하여 정작 먼저 결성되어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상해파’를 견제하였다. 조선공산당 3차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가 몇 번이고 분통을 터트렸던 ‘유태인 조직’이 바로 이들 분파였다. 이동휘의 상해파 노선을 인정했던 레닌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이르쿠츠크파를 자기 영향권 하에 두었던 이들 좌익 공산주의자 분파의 활동은 명백히 분파를 넘어선 ‘분파주의적’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분파주의적 행동, ‘자유시 사변’에서 희생당했던 이들에 대한 억울함 등이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를, 그리고 이후 화요회를 용인할 수 없었던 뿌리라고 본다면, 코민테른이 문제 삼았던 분파주의는 정작 볼셰비키 내부의 분파 투쟁이 그 출발점인 것이다.
- 게다가 이론적으로도 코민테른은 식민지 대중 투쟁에 대한 적절한 투쟁 노선을 제시할 능력이 없던 것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6차 코민테른이 보여주었던 ‘사회파시즘론’은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통일전선 운동을 무효화시키는 전략이었고, 7차 코민테른에서 디미트로프가 ‘인민전선론’을 통해 이를 번복할 때까지 식민지 운동을 후퇴시킨 셈이었다. 오히려 식민지에서 민족해방투쟁으로 단련된 운동 지도부들이 이런 코민테른의 논의를 적당히 무시함으로써 운동을 지켜냈던 건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또한 비밀 중앙당 조직에 대한 과도한 집착 역시 ‘일괴암적 볼셰비키당’이라는 ‘이념적 허구’일 뿐이다. 러시아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건설되고, 이후 볼셰비키당이 될 때까지 과정은 수많은 시행 착오, 분파 투쟁의 과정을 거친 후였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부터 전국적 지도 정당이 일괴암적으로 구성된 것처럼 가정하고, 그런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왜곡일 뿐이다. 레닌 조차도 전제 치하에서 당조직의 안정성을 위해서 ‘전국적 정치신문’을 통해 분산된 지역 사회주의 조직의 통일을 기도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외에 망명 지도부를 두는 것을 선택했음에도, 코민테른은 스탈린 노선에 따라 1국 1당주의와 비밀스런 당조직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그 지침에 따라 당조직을 건설하다가 많은 지도 역량이 희생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혁명 지도부를 만주나 상해에 두겠다는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도 1국 1당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해 결국 중국공산당이나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탈린은 헌신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나섰던, 그리고 사회주의의 진지라는 이유로 러시아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을 30년대 대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거나, 37~38년에 걸쳐 ‘일본의 앞잡이’라는 말도 안되는 죄명으로 숙청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들의 기준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 들어 일본에서도 노동파와 우노 코조 등 일본의 자생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에 대해 재평가하는 연구서를 보고 있지만, 남한 혁명 전통의 관점에서 오히려 러시아와 코민테른의 의사 결정 속에서 풍부하게 실천적 방침을 끌어내려던 조선공산당의 모습을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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