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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clouddrawingnet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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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란? 화랑도의 유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도 란? 화랑도의 유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의 기원은 신라가 쇠퇴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들 중 일부를 원화(原花)라 하여 후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던 조직이라는 주장과 진덕여왕의 이름인 선덕의 연호인 '원화' 에서 나왔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두 가지 모두 확실한 근거 자료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진흥왕 때 설립됐다고 하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활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화랑이라고 하면 일반 민간인의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여러 면에서 의문점이 남는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화랑의 전신은 바로 낭도로 보고있으며 낭도가 곧 사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국선 또는 풍월주 등이 귀족회의체의 수장인데 반해 화랑도는 평민층의 자제들에게까지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청소년 수련회나 사회교육원 등의 역할을 했던 것이라 추측한다. 당시 화랑제도는 인재 양성과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학문·예술 등 다방면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지식이나 사상을 전하고 문화의식을 함양함으로써 한국문화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나아가 신라인 개개인의 정신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온 우리나라 고유사상 중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진흥왕 14년(553), 처음으로 6부의 젊은이들을 모아 조정에서 길쌈과제를 시켰는데 이를 상모야 라고 불렀다" 고 기록돼 있다. 또한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와의 일화를 말하기를 "천관은 내 마음 속의 여인이요, 유신랑은 여자의 사랑입니다" 라 한 구절이 전해오며 화랑 집단 가무놀이로서 가배등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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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8일
―이전에 핀 꽁초로 디스 오리진에 불을 붙여본다.
이모바이얼런스를 알기 위해선 먼저 스크리모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 이모바이얼런스는 스크리모의 아들뻘 정도 되는 장르니까.
―붉은 점이 입천장세포가 분열법을 하듯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래. 그렇게 날아가서 없어지는 거겠지.
스크리모는 90년대 헤로인과 허니웰이 시작한 이모의 한 갈래다.
이모 특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가사, 어둑하고 감성적인 멜로디로 이루어진 청사진 위에, 하드코어 펑크 특유의 달리는 듯한 스피드, 과격함과 스크리밍을 합쳐 스크리모만의 필사적인 감성이 완성된 것이다.
―나도 필사적이었다.
―폐가 썩어들어가든 뇌가 썩어들어가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길을 걷다 냅다 뒤져서 나를 알리든 아무 상관 없었다.
이모바이얼런스는 스크리모의 하드코어 펑크의 참여에 한술 더 떠 파워바이얼런스까지 참여했다. 파워바이얼런스는 그라인드코어의 사촌뻘 쯤 되는데, 그 특성에 걸맞게 뇌가 날아가는 듯한 폭력성을 지닌 장르이다.
어둑하고 감성적인 멜로디에 이 폭력성이 결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 혐오적이면서도, 마치 전장에서 죽기 직전인 병사가 살고 싶다고 발악하는 듯한 처절한 사운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보다 깊은 원초적 개념 중 하나는 내 머릿속을 무섭고도 달콤하게 휘젓기 충분한 힘을 지녔다.
―그것은 에밀 싱클레어라고 알려진 녀석이 쓴 데미안의 아브락사스처럼, 도덕적이면서 부도덕하고, 따스하면서 차갑고, 자신을 알리면서도 자신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나답지 않게 깊게 고민해봐도 모순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허니웰과, In/Humanity, Makara가 이모바이얼런스 나라를 건국하였고, 오키드, 페이지나인티나인, 제롬스 드림으로 이루어진 이모바이얼런스 삼대장은 광개토대왕, 근초고왕, 진흥왕 마냥 각자의 스타일로 전성기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모바이얼런스는 자신만의 개성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노래 길이는 3분을 넘기가 힘들어졌고, 기존의 정통 스크리밍에서 벗어나 밴드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크리밍을 개발했다. 그리고 블래스트비트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각자가 지닌 그 개념은 마치 슈퍼클래스처럼, 각자가 상속받아서 각자의 특성에 맞게 변형된다.
―잘 보듬고 다둬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 조잡하게 다뤄서 전체 프로그램을 망치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조잡하게 다뤄서 망가졌었다.
―너도 그랬었겠지.
캘리포니아의 파워바이얼런스와 그라인드코어 씬의 영향도 이모바이얼런스의 발전에 한 몫을 했다.
플로리다의 Reversal of Man이나 Combatwoundedveteran은 숨쉴 틈을 주지 않는 블래스트비트로 이모바이얼런스와 폭력적인 장르들의 갭을 한층 더 줄여 보다 불길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망가진 것을 변명해 보려고 나는 외부 세계를 조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소용없었다. 애초부터 서로 망가뜨린 이유가 달랐기 때문에, 내가 얻어온 변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모바이얼런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퇴하게 된다. 개성 넘치는 장르는 대체로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르가 준 충격의 기억들은 남아있어서, 후대에 퀴어코어같은 펑크 분파의 한 갈래에 참신한 영감을 주기도 하면서 명맥을 이어나간다.
―담배 연기는 날아가면서도 마치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고 싶어하듯이 냄새를 통해 주변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갈등이 자라남과 별개로 넌 내 몸에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했었지. 멀어져 감에도, 멀어져가는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붙들고 싶었던거야.
···
내 신경세포들은 하나하나 예민해져 가고 있었고, 내 정신은 나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리 가고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져 가고 있었다. 지구보다도 달나라가 내겐 더 와닿았다.
나는 지구로 달려갈려고 애를 썼다. 처음엔 반강제적으로, 현실이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현실이 해주는 이야기들을 이해했다. 현실은 내게 그만 일어나라고 말을 했다. 현실은 날 공감해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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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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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고양시 구파발 은평구 종로구 성북구 수유동 강북구 우이동 /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나한봉 비봉 향로봉 보현봉 형제봉 / 북한산과 진흥왕 순수비 / 북한산 / 북한산성의 문화유적 / 북한��의 사찰들 / 승가사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 추사 김정희의 진흥왕 순수비 재발견 과정 / 추사 김정희의 진흥이비고 /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 김노경 일행의 삼각산 기행시축 / 진흥왕 순수비 복제비 제작 / 사라진 비석 지붕돌을 찾아라
서울의 주산 북악산 조산 북한산 / 백운대 836.5m 인수봉 만경대 삼각산 / 우이동 진달래능선 북한산성 코스 / 북한산성 숙종 37년 1711 / 탕춘대성 홍지문 / 남한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 완성 / 중흥사 산영루 태고사 / 강남 봉은사 강북 도선사 청담 스님 / 화계사 동종(보물 제11-5호) / 북한산 ���쪽 은평구 삼천사(원효가 창건) 진관사(현충원 역할) / 진관사 수륙재(무형문화재 제126호) / 삼천사 마애여래입상(고려시대) / 승가사(신라 경덕왕 15년 756) 가파른 산길 석조승가대사좌상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한산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불교 유적 진흥왕 순수비 조망 가능 / 진흥왕의 신라 영토 확장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고대국가의 세 가지 조건 율령체계 종교 영토의 확장 / 추사 김정희의 진흥왕 순수비 재발견 과정 / 추사 김정희의 진흥이비고 /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 김노경(추사 김정희 아버지) 일행의 삼각산 기축시행 / 진흥왕 순수비 복제비 제작 / 사라진 비석 지붕들을 찾아라
순수비 척경비 진휼비 / 단양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 단양 적성비가 아니라 /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세개의 순수비 / 김정희 김경연 조인영 / 진흥이비고 북한산비 황초령비 / 마운령비 육당 최남선 / 비봉 복제비 2006 문재인 수석 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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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61968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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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다구리 #한쌍이 집을 지으시려나?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달려온 #산 #해발 500m 높이의 #바람은 엄청 시원했다. 오랜만에 #홀로산행 내나이 52에 #자축하며, 오른다. 아직 건강한 #신체를 같은거에 또한 감사함을 표해본다. 속된말로 벽에 똥칠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아쌀하게 자다 #엄마보러 가고픈 생각이 문득 든다.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모조품은 어디 갔는지 안보여 궁금하다. 내려오는길을 달리하여, 위험한곳에 계단을 설치해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천년고찰 #진관사는 언제보아도 푸근하다. 내 비록 40여년 아니, 100년도 못가볼 터이지만, 잘 보존해야 할것이다. 암튼, 나를 뒤돌아보게된 하루인지라~~(북한산국립공원에서) https://www.instagram.com/p/BzotkeHFwxb/?igshid=e81liuhq2t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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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eunghun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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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등산코스
내려가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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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nytrickster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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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6: Silla Dynasty Part 1 신라 (新羅) 
Silla 신라 (新羅), along with Baekje and Goguryeo, formed the Three Kingdoms of Korea. Silla was founded by Bak Hyeokgeose (박혁거세 거서간, 朴赫居世) in 57 BC. The kingdom of Silla stood until 935 AD. It lasted around 990 years and had 56 monarchs, making it one of the longest-running dynasties in human history. In this episode, we will be start by looking at the foundation of the dynasty and discuss some early rulers of Silla. Next, we will talk about the Three Kingdoms of Korea 삼국시대 and the interactions between them. Then, we will look at how Buddhism became state religion when a prophecy was fulfilled with a monk named Ichadon 이차돈. Finally, we will talk about Queen Seondeok 선덕여왕 and the bone rank system 골품제도, which segregated Silla society early throughout its history. Some more notable figures looked at in this video: King Beopheung 법흥왕, King Jinheung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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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ncriti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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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태후가계도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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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uhfiu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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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사 오늘 사회 시간에 대금에 얽힌 '만파식적' 설화에 대해 배웠어. 동해에 떠내려온 섬 위에 둘이 되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하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그걸 잘라다가 악기를 만들어 불었더니 가뭄엔 비가 오고, 거친 바다는 잔잔해지더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은한 대금 소리를 들으면 정말 그런 놀랍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상고 시대의 음악 - 우리 음악의 시작 노래와 춤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 인간이 처음 음악을 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연 속에서 생존했던 원시인들에게, 자연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을 거야. 음악은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노래와 춤'으로 신에게 평화와 풍요로운 삶을 빌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오래된 역사책에는 이런 음악에 대한 글이 남아 있는데,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의식을 지냈고, 동예에는 무천, 부여는 은정월(12월)에 '영고'라는 의식이 있었으며, 마한에서는 5월 파종과 10월 추수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사람들은 모두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으로 제를 올렸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봐. 제사장은 노래하고 사람들은 둥둥 북을 울리며 춤을 추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의 '굿'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거야.굿 무당이 신에게 노래와 춤으로 기원하는 의식우리나라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어. 제사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북이나 타악기겠지 생각했겠지만, 놀랍게도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의 위지 30권 '동이전'에는 변한과 진한에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변한 · 진한의 풍속은 노래 부르기와 춤추기를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즐겨한다. 그 나라에는 슬(瑟)이 있는데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고 그 악기로 타는 음곡이 있다"이 기록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가야금과 거문고의 원형이 된 고유의 현악기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아쉽게도 이 악기의 모양이나 연주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가야금과 거문고가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현악기를 사용할 정도의 발전된 음악을 가졌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슬 현악기의 일종. 나무 상자 모양에 25개의 줄을 얹어 연주하는 악기 삼국 시대의 음악 - 거문고와 가야금의 탄생 고분 벽화에 남아있는 고구려 음악 고구려 음악을 대표할 수 있는 건 바로 '거문고'야.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지금의 거문고와 거의 같은 모양의 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지.『삼국사기』에는 거문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고구려 제2재상인 왕산악이 진나라에서 보내온 칠현금을 개량하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그래서 이 악기를 '현학금'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나중에 '현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당시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음악과 문화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악단을 파견하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 음악이 얼마나 발전해 있었는지 알 수 있어. 또한 중국과 서역1) 등에서 들여온 악기, 춤, 놀이 등을 받아들여 우리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했어. 이렇게 고구려가 국제적으로 활발한 음악 교류를 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바로 고구려 벽화야. 황해도 안악 제3호분과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무용총, 장천 1호분, 집안 5호분, 덕흥리 고분, 태성리 고분, 팔청리 고분, 약수리 고분 등 수많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고구려의 음악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화려했던 백제의 음악 백제의 음악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너무나 적어. 일본의 역사서 『일본 서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사람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와 소년에게 기악무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때 미마지가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기악무는 현재의 '양주 별산대놀이'와 비슷한 형태였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일본에까지 음악을 전한 걸 보면 백제의 음악이 얼마나 발전되어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만 신라의 통일 과정에서 백제 음악에 관한 자료나 기록이 거의 사라져 버렸어. 하지만, 최근 백제 지역이었던 광주 신창동에서 백제의 현악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여덟 개의 줄을 가진 악기 형태였어.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 가야금, 거문고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백제의 현악기가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아주 소중한 유물이야.양주 별산대놀이 읽을 거리 고구려 고분 벽화로 보는 고구려 음악 고구려의 벽화는 고구려 음악사를 연구하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야. 황해도에 있는 안악 제3호분의 벽화는 꽤 높은 사람의 행렬을 그린 듯해. 말 위에서 북을 연주하는 사람, 팬파이프처럼 생긴 배소를 부는 사람, 짧은 나팔을 부는 사람, 작은 뿔 나팔을 부는 사람, 긴 젓대를 부는 사람 등 여러 가지 모양의 금속 타악기와 북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고구려 음악이 당시 얼마나 발전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귀한 벽화야. 신라와 통일 신라의 음악 - 통일 전과 통일 후의 음악 가야금과 향가, 아름다운 신라의 음악 신라 시대에는 '가야금의 시대'를 열었어. 가야금은 가야에서 탄생한 후 신라로 전승되었어. 진흥왕 12년에 왕이 전국을 돌며 백성을 살피던 중 가야에서 망명한 음악인 우륵과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했어. 이때, 감동한 진흥왕은 이들을 신라 국원에 정착시켰다고 해. 그리고 현직 관리였던 법지, 계고, 만덕 3명을 우륵에게 제자로 보냈어. 우륵은 이들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지. 그러나 제자들은 우륵의 음악이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표현이 자극적이어서 그의 음악을 5곡으로 줄였대. 이후 진흥왕은 우륵과 제자의 음악을 듣고 감동하여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음악으로 정했어. 신라의 고유한 노래인 향가는 6세기 말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통일 신라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고려 초기까지 이어진 신라의 중요한 전통이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음악원인 음성서(音聲署)도 이때 생겼어. 음성서에서는 각종 연주와 춤과 노래를 담당했어.가야금 가야에서 망명한 우륵이 12개의 가야금곡을 지었다.삼현, 삼죽의 시대, 통일 신라의 음악 통일 신라의 음악 문화는 한 마디로 '삼현 삼죽'이라고 할 수 있어. 삼현은 3개의 현악기인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를 말하고, 삼죽은 3개의 관악기인 대금, 중금, 소금을 말해. 통일 신라 때 삼현으로 연주한 곡이 584곡이고, 삼죽으로 연주한 음악이 모두 867곡이나 돼.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로 통일되면서 고구려의 거문고 또한 신라 음악으로 흡수되었어. 통일 신라에는 고구려의 왕산악만큼이나 유명한 거문고의 대가인 '옥보고'가 있어. 그의 음악은 송명득, 귀금 등의 제자들의 전수를 통해 전수되고, 이것이 바로 신라 거문고 음악의 뼈대를 이루었지. 또한, 통일 신라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음악 문화가 바로 범패야. 830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대사에 의해 보급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지.[삼현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삼죽 ]대금 중금 소금 통일 신라의 음악은 삼현 삼죽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음악 - 음악을 수입하다 고려 시대 음악은 아악, 당악, 향악으로 구분해.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향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전통 축제인 팔관회와 불교 축제인 연등회2)를 개최하여 백성과 왕이 함께 참여하는 국가적인 행사를 열었어.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음성서'와 비슷한 '대악서'를 만들고 그후 '전악서'라는 음악 기관을 만들었어. 고려 시대 음악은 성격에 따라서 아악, 당악, 향악으로 구분해. 아악은 송나라에서 들여왔는데 유교 의식 음악에 사용한 '대성아악(雅樂)'을 말해. 이때, 아악기도 함께 수입되었어. 아악기는 편경, 특경, 축, 어, 훈, 슬 등이 있어. 당악은 당나라에서 들여온 중국의 민속악이고, 향악은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나라 음악과 중국 수나라 이전에 들어와 우리 토착 음악으로 변한 모든 재래 음악을 말해. 읽을 거리 팔관회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때에 개최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국가를 위한 호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어. 너무 잦은 전쟁 속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나오자 진흥왕은 산천 용신제와 10월 제천행사 등을 불교 의식과 결합하여 사찰에서 팔관회를 개최하게 하였어. 이런 전통이 신라 시대에 계속 지켜지고, 후삼국 시대에 궁예도 팔관회를 태봉의 국가적 불교 행사로 도입하였고, 그 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태봉의 팔관회를 계승하여 918년 건국한 해 11월 15일에 팔관회를 개최하였어. 이후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어. 조선 시대 - 궁중 음악과 민속악의 전성기 조선 전기에는 유교적 음악이 크게 발달했어.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예와 악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 건국 초기의 음악은 :고려시대의 향악에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부른 형태가 많이 있어. 그리고 정도전과 하륜 등은 새 임금의 공덕을 노래로 지어 기리고, 이것을 음악과 춤으로 만들어 각종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행하게 했어.조선 음악의 전성기 세종에 이르러 박연, 맹사성과 같은 음악 이론가에 의해 활발한 음악 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특히 세종 대왕은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의 미흡한 점을 고쳐 아악3)을 정리했어. 세종 때 이렇게 아악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중국에서 수입하던 편경을 우리나라에서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세종 7년에 경기도 남양에서 희귀 재료인 경석4)이 발견되었고, 해주에서 율관의 단위가 되는 거서5)가 나온 데부터 악기 제작에 큰 힘이 되었어. 세종 대왕은 아악을 정비한 것 이외에도 [정간보]의 창안, [정대업], [보태평], [여민락]과 용비어천가> 등의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어.세조 때에는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 제례악으로 사용하고, 오음약보가 창안되었으며, 성종 24년(1493년) 8월에 『악학궤범』이 편찬되었지. 『악학궤범』은 율의 원리와 방법, 악기, 의물, 형체, 만드는 법, 춤추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음악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어.조선 후기의 음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 시대 음악에도 영향을 받았어.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민간 음악이 발달했다는 거야.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국가 중심의 음악이 축소되면서 백성들 사이에 즐기는 음악이 발달했어. 처음에는 가곡, 가사, 시조와 같은 성악 위주의 음악이 발달을 하다가 기악인 세악, 줄풍류, 대풍류와 삼현 육각 등이 발달했고, 그 후 판소리와 산조 등의 다양한 민속 음악이 발달했어. 또한, 당악과 아악 등의 외래 음악이 향악화되었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종묘 음악이 모두 사라질 정도로 영향을 주었어. 그래서 인조는 아악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악은 점차 쇠퇴하고, 남아있던 당악곡도 원형에서 벗어나 향악화가 되었어. The Lucky Ones - Cusk The Lucky Ones is a novel about creating and sustaining life during times of great transformation. The five people whose lives converge here are also haunted by family ? the longing for love, the struggle to connect. A young pregnant mother wrestles with utterly changed circumstances; a new father searches for a sign of the man he used to be; a daughter yearns for a lost childhood; and a mother reaches out in bewilderment to a child she can't fully understand. Accidental connections and overlapping relationships build a complex family portrait: all are linked by the elemental impact of children on adult lives. This profound evocation of family and its magnetic bonds reveals the mysterious forces that separate us from those we love and bind us to what we no longer understand. The Lucky Ones will stop you cold with its startling precision and power. Demonstrating a rare gift for illuminating 'the bustling concourses of life' without sacrificing emotional depth or complexity, this rare and stunning novel confirms Rachel Cusk's place among our most incisive wri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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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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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한국민속대관
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신라시대인지 임진왜란 대인지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상북도 경산 지방에 쳐들어 온 왜구를 한(韓)장군이 연희(演戱)를 가장해서 물리친 데에 그 연유를 두고 있다. 여장(女裝)한 남자 화랭이〔화랑(花郞)〕의 유풍에다 여원무(女圓舞) 등을 곁들인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놀이이다. 한 장군(韓將軍)놀이 - 2 Exorcism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산군(慶山郡) 자인(慈仁)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이 되면 토지(土地)의 수호신으로서 한종유(韓宗愈)라는 장군을 숭사(崇祀)하여 성대히 제전(祭典)을 올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 제전을 「한장군제(韓將軍祭)」라 불러 왔다. 이 제전이 단오절에 거행되므로 일명 「단오제(端午祭)」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 이 제전에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를 하므로 「한장군(韓將軍)놀이」라고도 한다. 이 한장군(韓將軍)의 이름은 자세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한종유(韓宗愈)라고 하는 이로서 어느 때 어디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왜구(倭寇)가 내습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한장군(韓將軍)이 그의 부하들을 버들못[柳池] 부근 골짜기에 매복시켜 놓고 계략을 꾸몄다. 그는 투구 위에 꽃으로 만든 꽃관(冠)을 쓰고 갑옷 위에는 여인(女人)의 복장으로 가장하고 그의 누이동생과 그 못가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어 산에 있는 적을 버들못 부근까지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적병이 접근하였을 때 복병(伏兵)으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케 하여 적을 무찔러 군민(郡民)을 구했다고 한다. 그 때 한장군(韓將軍)은 수많은 적을 베어 버들못에 던졌으므로 그 때 못물은 핏빛으로 붉었다고 전한다. 그 후 군민(郡民)이 그의 충성과 덕을 우러러 계림(桂林)이라는 동산에 사당(祀堂)을 세우고 해마다 큰 제사를 올려 왔다. 그런데 왜적(倭敵)을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이어서 이 날에 제사를 거행하여 왔다고 한다. 이 왜구(倭寇)는 고려 중엽 이후부터 조선조 초엽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지대에까지 출몰하면서 인명과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日本)[倭]의 해적이다. 이 왜구는 신라 때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수와 피해가 많지는 않았으나 고려 중엽 이후 갑자기 강성하여 심지어는 내륙에도 침범하여 조정에서까지 이 왜구문제로 부심(腐心)하게 되었다. 왜구는 왜국의 국내 사정의 변동에 따라 무사(武士)에서 전략한 자들이 주동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고려 말에 와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최영(崔瑩) 장군과 이성계(李成桂) 등이 내륙에까지 들어온 적을 쳐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왜구소탕(倭寇掃蕩)에는 병략가(兵略家) 최무선(崔茂宣)이 발명한 화약(火藥)과 화포(火砲)가 큰 효력을 발하였다. 왜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아 세종(世宗) 때에는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기도 하고, 혹은 삼포(三浦)[薺浦ㆍ 釜山浦ㆍ 監浦]를 개항(開港)하여 무역을 통해 회유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략질은 여전하여 조선(漕船)을 탈취해 가는 등 행패가 여전하였고, 나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큰 난리를 겪게까지 되었다. 한종유(韓宗愈)라는 사람은 고려 때에 있었으니 충렬왕(忠烈王) 13년(A.D. 1287)에 나서 공민왕(恭愍王) 3년(A.D. 1354)에 죽었다. 그는 시문도 능했고 좌정승(左政丞)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한장군(韓將軍)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기 때문이다. 『자인현읍시(慈仁縣邑詩)』 풍속편(風俗篇) 여원무조(女圓舞條)에는 만력시(萬曆時)(編者曰萬曆時云者誤甚 今傳羅麗之間) 유한장군실기명(有韓將軍失其名)(或云宗愈) 왜구거도천산(倭寇據到天山) 장군설녀원무(將軍設女圓舞) 전채지위화(剪彩紙爲花) 식이원관(飾二圓冠) 관변수오색지조(冠邊垂五色紙條) 여기매(與其妹) 개장녀복(皆粧女服) 명대일관(名戴一冠) 무어산하류제지내(舞於山下柳堤之內) 우설배우잡희(又設俳優雜戱) 왜구하산취관(倭寇下山聚觀) 장군습후자지소살심중(將軍襲後刺之所殺甚衆) 제방유석상유검흔(堤防有石尙有劍痕) 속전참왜석(俗傳斬倭石) 매당시일제수색적운(每當是日堤水色赤云) 읍인모기의(邑人慕其義) 건신사우현서록(建神祠于縣西麓) 단오일(端午日) 상녀원지제(象女圓之制) 사동남이인장여복대면무지(使童男二人粧女服戴面舞之) 우설배우잡희격고명금(又設俳優雜戱擊鼓鳴金) 호장착모대이제(戶長着帽帶以祭)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標其旗曰)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 우하동면육동송림동(又下東面六洞松林洞) 하북면마라동(下北面麻羅洞) 역립사례지(亦立祠禮之) 만력년간(萬曆年間)에 [編者는 말하기를 萬曆年間이라 한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니 이제 전하기를 신라와 고려 사이라고 함]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성이 한씨(韓氏)인 장군이 있었다[혹은 宗愈라고 함]. 왜구가 도천산(到天山)에 웅거하였다. 이 때 장군은 여원무(女圓舞)를 만들어 채색종이꽃을 갓 두개에 장식하고 갓 가장자리에 오색 종이조각을 드린[늘어뜨려] 후 누이동생과 함께 쓰고 여장(女裝)으로 변장하고 산 아래 버들제방 안에서 춤추었다. 또한 그는 배우(俳優)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니 왜구가 모두 산에서 내려와 구경했다. 이 때 장군은 틈을 타서 뒤로 엄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자가 심히 많았다. 그 제방에는 돌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돌에는 칼 흔적이 남아 있어 세상에서 전하기를 참왜석(斬倭石)이라 한다. 해마다 이 날이 돌아오면 방죽물이 붉게 변한다고 한다. 그 고을사람이 그 충의(忠義)를 사모하여 신사(神祠)를 고을 서쪽 산기슭에 세우고 단오일이면 여원무(女圓舞)의 제도를 본받아 사내아이 둘로 하여금 여복(女服)을 입히고 가면(假面)을 쓰고 춤추게 했다. 또 배우의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고 북을 치고 쇠를 올리면서 호장(戶長)이 사모관대를 하고 제사를 지내 해마다 폐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므로 이에 생긴 풍속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봉(崇奉)하고 있다. 그 기(旗)에 표시하기를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이라 하였고 또 하동면(下東面) 송림동(松林洞)과 하북면(下北面) 마라동(麻羅洞)에도 또한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왜적(倭敵)이 쳐들어 온 연대를 막연히 나려지간(羅麗之間)이라 했는가 하면 또 만력(萬曆) 때 라고도 하였다.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에서 1617년 동안이다. 우리나라 조선조 선조(宣祖) 6년에서 광해군(光海君) 6년까지에 해당한다. 여원무(女圓舞)는 해방 후에 간행된 『경산군지(慶山郡誌)』 상편(上篇)에도 거의 같은 기사가 실려 있고 참왜석(斬倭石)은 검흔석(劍痕石)이라 하였다. 검흔석(劍痕石) 좌현북일리(左縣北一里) 도천산류제방(到天山柳堤傍) 한장군참왜처검흔상재운이(韓將軍斬倭處劍痕尙在云爾) 검흔석(劍痕石)은 고을 북쪽 일리(一里)되는 도천산(到天山) 버들제방 가에 있는데 한장군(韓將軍)이 왜구를 벤 칼자욱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 하였다. 또 당시 왜구가 웅거하였던 도천산성(到天山城)에 대하여서는 동서(同書)에 도천산상(到天山上) 유토성지(有土城址) 왜병소축운이(倭兵所築云爾) 도천산(到天山) 위에는 토성 자리가 있으니 이는 왜병이 쌓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적(史蹟)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동서(同書)에는 북면마라동(北面麻羅洞) 우립일신당(又立一神堂) 일면지민(一面之民) 별제장군지매(別祭將軍之妹)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장산사명(標其旗曰獐山司命) 사시본현속장산시(似是本縣屬獐山時) 유창의자(有倡義者) 이무문가미(而無文可微) 작일신총(作一神叢) 심가개기(甚可慨己) 건륭을유(乾隆乙酉) 현감정충언(縣監鄭忠彦) 중수신당(重修神堂) 관급제물(官給祭物) 작축문(作祝文) 사호장(使戶長) 비례축지(備禮祝之) 축문왈(祝文曰) 모기섬적(謀奇殲賊) 의병위국(義炳衛國) 기문영미(杞文英微) 사민기적(史泯其跡) 무전여원(舞傳女圓) 토유여속(土有餘俗) 검흔불마(劍痕不磨) 완피제석(宛彼堤石) 일간고묘(壹間古廟) 영안의백(永安毅魄) 단양조두(端陽俎豆) 세이위식(歲以爲式) 조여유황(旐旟有煌) 금고질작(金鼓迭作) 자수상전(玆修常奠) 재구공축(載具工祝) 어이장사(御以長詞) 선이늠속(饍以廩粟) 신기보우(神其保佑) 영전읍택(永奠邑宅)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또 신당(神堂) 하나를 세우고 일면(一面)에 백성이 따로 장군의 누이동생을 제사지내어 해마다 폐(廢)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으므로 없애지 아니하고 계속 지내온 풍속이다. 이 제사는 아직까지 숭봉(崇奉)하며 거기에 표시하기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였다. 아마도 본 고을이 장산(獐山)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만한 문적(文籍)은 없고 신당(神堂)만 하나 남아 있으니 심히 애석한 일이다. 건륭(乾隆) 을유년(乙酉年)에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신당(神堂)만 중수(重修)하고 관가(官家)에서 제물(祭物)을 주고 축문(祝文)을 지어 주어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예(禮)를 다하여 빌게 하였다. 축문(祝文)에 하였으되, 기특한 꾀로 도적을 멸하고 빛난 충의(忠義)로 나라를 호위하였으되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고 상고할 만한 자취가 없도다. 여원무(女圓舞)가 전하여지니 그 지방에 남은 풍속이 있으며 칼 흔적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저 제방 돌에 완연히 남았도다. 한 칸 옛 사당(祠堂)에 길이 굳센 넋을 봉안(奉安)하고 단오(端午)에 제사드려 해마다 폐하지 않는도다. 깃발이 황황(煌煌)히 빛나고 징과 북이 번갈아 울리면서
연례의 전작(奠酌)을 드리고 또 약공(藥工)과 축문(祝文)을 갖추어 애오라지 긴 말로 빌고 관가(官家) 곡식으로 흠향케 하노니 신명(神明)을 보우(保佑)하여 길이 이 고을을 평안케 하소서. 하였다. 이 기록을 하면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한장군(韓將軍)의 누이동생의 사당이 있었고 그 고을사람들은 그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여 수호신으로서 숭배하여 왔다. 그 후 조선조 영조(英祖) 41년(중국 淸의 高宗 30년 乾隆 乙酉年 A.D. 1765년)에 그 고을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중수(重修)하고 제물 및 축문으로써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장산(獐山)이란 지명으로서 그 고을이 장산군(獐山郡)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자인(慈仁)이 경산군(慶山郡) 즉 장산군(獐山郡)에 속했던 것은 신라시대이고 조선조시대가 아니니 이로 미루어 보아 왜구(倭寇)가 쳐들어 온 것은 신라 때로 보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장산(獐山)이 신라 때 경산군명(慶山郡名)이었다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산현(慶山縣)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도 보인다. 본압량국(本押梁國)(一云押督) 신라기미왕취지치군(新羅祇味王取之置郡) 경덕왕개칭장산(景德王改稱獐山) 고려초개장산(高麗初改章山) 현종속경주(顯宗屬慶州) 명종치감무(明宗置監務) 충선왕초피왕혐명개금명(忠宣王初避王嫌名改今名) 충숙왕이국사일연지향승위현령(忠肅王以國師一然之鄕陞爲縣令) 공양왕이(恭讓王以) 왕비노씨지향륭위군본조(王妣盧氏之鄕隆爲郡本朝) 원래는 압량국(押梁國)었던 바 신라 기미왕(祇味王)이 이 고을에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장산(獐山)이라고 고을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초에는 다시 장산(章山)이라고 고쳤다. 현종(顯宗) 때는 경주(慶州)에 속했고, 명종(明宗) 때에는 그 곳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이 파천(播遷)하매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 하였다. 필자는 앞에서 왜구(倭寇)의 자인(慈仁) 침입은 신라시대라 했거니와 그 지방 고로간(古老間)에 전승되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천수백 년 전 임나(任那)[高靈]에 있던 대가야(大伽倻)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한장군(韓將軍)이라는 이가 단북동(丹北洞) 도천산성(到天山城)에서 적을 격파하고 군민(郡民)을 구한 데서 사당을 지어 제전을 거행하여 온다고 한다. 필자는 이 전승에 신빙성을 두면서 왜구의 침입을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로 보며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임나(任那)와 왜인(倭人)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의 구명에 의하면 임나(任那)라는 ���칭은 5세기 호태왕비(好太王碑)(A.D. 414)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나온 것이 가장 오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전(强首傳)에는 「신본임나가량인(臣本任那加良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서기 924년에 건립된 신라의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에는 「기선임나왕족(其先任那王族)」이라고 한 것이 보이므로 임나(任那)의 용례(用例)는 분명하고 따라서 임나(任那)의 존재도 확실하다. 일본(日本) 학자들은 이 임나(任那)를 「미마나」라고 부르거니와 변진지방(弁辰地方)에 근거를 잡았던 왜(倭)의 세력을 이르는 명칭이다. 당시 왜(倭)는 낙랑(樂浪)ㆍ 대방군(帶方郡)[지금의 南原地方]에 통교(通交)하면서 남해안에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들은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무역을 활발히 하였고, 점차 경제적 세력이 커지자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다. 수많은 왜인(倭人)이 이 지역에 드나들게 되자 그 중에는 그 곳에 정주(定住)한 자들도 생겼을 것이다. 그 간섭의 정도는 왜(倭) 세력의 강약에 비례되었을 것이다. 백제ㆍ 신라의 진출에 따라서 축출되었고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23년에 대가야(大伽倻)[高靈]의 침공으로 임나(任那)는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대가야(大伽倻)로 대표된 지방이 대체로 일본서 주장하는 임나(任那)의 제부락국(諸部落國)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 백제도 왜세(倭勢)의 발호로 인하여 백제도 흥기하자마자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왜(倭)와 백제의 중간 매개역할은 임나(任那)가 맡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나(任那)가 소멸할 무렵 왜(倭)는 회고적으로 말하기를, 백제(百濟)ㆍ 임나(任那)ㆍ 왜(倭)가 「삼문(三紋)의 강(綱)」[세 줄을 꼬은 동아줄]이라 비유도 하고 있거니와, 그 때 정세는 신라와 백제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눈부신 항쟁(抗爭)이 있었다. 여기에 단편적으로 엿보이는 「임나가라(任那加羅)」는 왜(倭)의 퇴수지(退守地)로 전쟁에 가담한 것 같다. 다만 그 실정을 파악할 자료가 결여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송서(宋書)』에는 서기 438년에 유사공헌(遺使貢獻)한 왜왕(倭王) 진(珍)이 「사특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지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特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之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하였음을 보아 여기에 임나(任那)가 끼어 있는 것은 역시 왜(倭)와 관계가 있었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후 일본(日本) 왕정(王廷)에서는 임나(任那) 부흥을 표방하면서 수대(數代)를 지낸 것도 임나(任那)가 일찌기 왜(倭)의 경제적 정치적 근거가 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임나(任那)는 당시 그 지역에 정주 내지 왕래한 왜인(倭人)들로써 한때 세력을 떨쳤던 무리들이 장산(獐山), 즉 자인(慈仁)까지 침입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 때 군민(郡民) 중에 한(韓)씨성(性)을 가진 힘센 장사가 용맹과 지혜로 왜구를 물리쳤을 것이고 군민들은 그를 추앙하여 장군이라 하고, 죽은 뒤에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왜구를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가 야외(野外)놀이가 한창인 봄철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므로 신라의 명일(名日)인 수릿날 즉 단오일에 제사를 거행해 왔다. 따라서 뒷날 왜적을 물리친 날도 단오날로 믿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1969년 봄에 경북지방 민속 재조사 때에 자인(慈仁)지방에서 특히 필자의 주목을 끈 한 출토품(出土品)을 보았다.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있는 자인중학교(慈仁中學校) 교정 확장공사 때에 땅속 암석 위 석총(石塚)에서 장군의 유골 및 유품으로 보이는 두개골과 투구와 갑옷 등 금속물(金屬物)이 출토되었다. 또 거기에는 천 3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伽倻)시대의 토기(土器) 몇 점이 나와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 곳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한(韓)장군의 유해도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이 무덤과 유골 등은 한(韓)장군의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는 한(韓)장군의 년대(年代)에 대하여 한 가닥의 암시를 발견하게도 된다. 한(韓)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그 지방 사람들은 한묘(韓廟) 또는 한장군묘(韓將軍廟)라고 한다. 현재의 한(韓)장군 사당은 계림(桂林)에 있는 진충묘(盡忠廟) 하나뿐이다. 2차대전 전인 1936년 7월에 필자가 처음 보았을 때는 한묘(韓廟)라 하고 북서동(北西洞) 면사무소 뒤쪽에 세워진 것을 이한묘(二韓廟)라고 하였다. 일한묘(一韓廟)에는 그 위패가 「한장군지신위(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고 이한묘(二韓廟)의 위패에는 「증판서한장군지신위(贈判書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한묘(二韓廟)는 일한묘(一韓廟)보다는 뒤에 세워진 것으로서 조선조 때 국왕이 장군의 공을 상찬하여 판서(判書)라는 벼슬을 추중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한묘(二韓廟)는 일제말(日帝末)에 일본인들이 허물어 없앤다. 1969년에 필자의 건의와 지방유지들의 활약 그리고 경산군(慶山郡)의 도움으로 이 한장군제전(韓將軍祭典)이 부활되었다. 1936년 필자의 첫 조사 때에는 이 제전이 단오 전후 3일간 계속되었다. 제전은 자인면(慈仁面)이 주최가 되고 제관(祭官)은 면장 또는 그 지방 유지 중에서 선정되었으며 제물(祭物)은 대체로 돼지ㆍ 닭(암ㆍ 수 두 마리)ㆍ술ㆍ 밤ㆍ 흰떡ㆍ 과일ㆍ 야채ㆍ 마른 생선 등이 사용되었다. 이 제전이 끝나면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두 남자가 색종이를 길게 늘어뜨린 꽃관(冠)을 쓰고 수 10개의 꽃가지로 장식한 옷을 입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바로 이 춤을 여원무(女圓舞)라고 하며 이 춤은 옛날 한(韓)장군이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여자복장으로 위장하여 버들못가에서 왜적(倭敵)을 유인할 때 추었던 춤이라 한다.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이 춤이 끝나면 이어서 이한묘(二韓廟) 앞에서 추고는 마친다. 다음에는 가장행렬이 진행되는데 조선조 때 현감(縣監) 복장을 한 가장(假裝) 현감이 가마에 타고 앞서면 그 뒤에 역시 가장(假裝)의 육방관속(六房官屬) 및 양반들이 수십 명 말을 타고 뒤따른다. 일한묘(一韓廟)ㆍ 이한묘(二韓廟)에 참배한 뒤 이어서 계림(桂林) 뒤쪽 진터[陣場]에서 기마(騎馬)싸움의 놀이를 한다. 계림(桂林) 언덕 위에서는 별도로 시문대회(詩文大會)의 백일장(白日場)과 젊은 부녀자들의 그네뛰기대회가 열리고 장터에서는 남자들의 씨름대회와 기생(妓生)ㆍ 광대(廣大)들의 소리와 춤, 재인(才人)들의 곡예(曲藝) 등이 열리어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청금상련(聽琴賞蓮) Banquet around a Lotus Pond with Gisaeng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35.3㎝, 세로 28.3㎝ 그린이 / 신윤복(申潤福) 소장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기생(妓生)이다. 지체있는 사람들의 술좌석에는 기생들이 불려 와서 권주가를 불렀다. 후원 연못 가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생들과 어울리는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중의 하나이다. 제비(祭費)는 면에서 경비를 부담하였고, 여흥의 민속놀이 비용은 상인(商人)과 요식업자ㆍ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놀이는 민속예술의 하나로서 무대예술화하여도 좋겠지만 자인(慈仁)고을 특유의 연중행사의 하나인데 자인면민(慈仁面民)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음의 하나로서 보존 육성할 만한 것이다. 이 민속놀이는 군민 전체의 생기진작(生氣振作)과 민중 감정을 융화시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AFMt0iMq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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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ashiri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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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 seen the drama Hwarang? Does it have any real relation to Korean history? I'm just curious.
My posts about Hwarang 화랑 花郞 (2016 KBS)https://bodashiri.tumblr.com/post/151990044981/hwarang-2016https://bodashiri.tumblr.com/post/154702787226/hwarang
I remember I checked out the first 2 episodes of Hwarang 화랑 (2016 KBS) and dropped it around episode 4 or 5 where the female lead is slowly realizing that the male lead may not be her real brother. I waited for people’s response on the final episode to decide whether I should watch the remaining episodes or not, but it was so negative that I finally gave up watching it. So, I don’t know how the story goes at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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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as far as I know, King Jinheung of Silla 진흥왕 (played by Park Hyung-Sik 박형식) is a real historical figure who existed during the three kingdom period of Korea (BC 1C ~ AD 668).  He was one of the greatest kings of Silla 신라 新羅 (Silla was one of the three kingdoms) and paved the first stepping stone fo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led by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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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mother (Queen Jiso 지소태후), his half-sister and wife (Princess Sukmyoung 숙명공주), and his political rivals are all historical figures. Hwarang system was also historically true. 
But the group of flower boys are all fictional characters including the male and female leads.  
Wikipedia : 
King Jinheung of Silla 진흥왕 眞興王 (526-576)https://en.wikipedia.org/wiki/Jinheung_of_Silla
Hwarang 화랑 花郞https://en.wikipedia.org/wiki/Hw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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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unhee1-blo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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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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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juking300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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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대 이런 선거는 없었다. 거대 양당이 초래한
그러나 4년 동안 사용될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의 토토사이트와 독도가 문부성이 23일 발표한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메이저사이트와 일본의 독도 강치는 오히려 역사적으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안전놀이터은 우리 신라 시대 진흥왕 이래 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스포츠토토를 성 부당한 독도 영유권 주장은 최근 일본 사회의 토토와 특히 정부는 일본의 이런 움직임에 외교적으로 단호히 맞서야 https://oyabungtoto.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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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61968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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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입니다. 그런데, 비봉위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모형이 없습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분, 답 부탁합니다.ㅎㅎ(북한산국립공원에서) https://www.instagram.com/p/BzmhPt4F9vs/?igshid=sfit8mo53l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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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가볼만한곳(종합)=7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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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가볼만한곳(종합)=7선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 가볼만한곳
(종합 = 7선)
지난여름에는 피서철을 맞아 제천을 찾는 피서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 주고자 각 코스별로 포스팅을 했고
이 글은 제천 가볼만한곳 7선을 세트로 엮은 글이 되겠습니다.
지난날 “충북 가볼만한곳[충북 관광지]종합”, “진천 가볼만한곳[진천 여행 8선]”, “단양8경 여행코스[단양8경 종합]” 등 
내 고향 충북에 대한 글을 이처럼 종합으로 묶어서 써 왔는데요.
그때마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읽어주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추억의 사진들을 꺼내서 제천 가볼만한곳 8선을 엮어 보겠습니다.
충청북도 북부권 관관 중심지 제천….!
한국 한방바이오산업 중심지인 제천…!
청품명월의 고장, 자연치유도시 제천..!
지금부터 제천 관광을 시작해 볼까요..?
(코스별 아래 URL을 클릭하면 자세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제1코스)=의림지***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11호)
제천 의림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인공저수지 중의 한 곳입니다.
하지만 3대 인공저수지들 중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고
지금까지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저수지는 의림지뿐입니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졌고 700년 뒤 박의림이 개축했다고 합니다.
대충 계산을 해도 15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인공저수지입니다.
긴 세월만큼이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저수지로써 호서지방이란 말이 있을 정도지요.
호서지방이란 말은 이곳 의림지 서쪽, 즉 현재 충청남, 북도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제천 시내와 인접해 있는 의림지는 우거진 노송숲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제천시민들의 산책과 휴식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제천 10경 중 제1경입니다.
의림지에는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노송들이 압권.
약 1500여 년 전에 건설된 인공저수지라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고즈넉하게 저녁 한때를 보내고 있는 시민의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보입니다.
새벽안개를 맞으며 셔터를 누르면 좋은 사진이 나올 포토존.
이곳을 한 바퀴 돌면서 제천 시민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는 의림지라 생각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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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제2코스)=청풍문화재단지***
청풍호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제천10경 중 제4경인 청풍문화재 단지입니다.
본래 수려한 경관속에 있었으나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역이 되자 
문화재들과 전통 가옥들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해 놓은 곳으로 관광객들 발길이 이어지는 관광명소입니다.  
보물급 문화재를 비롯하여 옛 가옥에서는 추억속에 묻혀버린 어린 시절을 되새겨 볼 수도 있습니다.
민속촌을 겸한 역사 유적지라 하겠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피어 꽃대궐을 이루는 곳입니다만…
이 역마살도 꽃대궐은 아직까지 한 번도 카메라에 담아보질 못 했습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늘~생각은 있었으나 워낙 멀리 있다 보니… ㅜㅜ
바로 아래에는 청풍호 유람선 터미널이 있습니다.
이곳 청풍문화재단지와 바로 연계되는 코스입니다.
입구인 팔영루 앞입니다.
마치 민속촌 같은 분위기지요.
공원 같으면서도 유적지, 그리고 민속촌이기도 합니다.
정상에 있는 망월루.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입니다.
망월루에서 내려다보는 청풍호.
아래로 보이는 다리ㅏ 청풍대교입니다.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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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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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청풍면 읍리.
      ***(제3코스)=청풍호 유람선***
인근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청풍호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습니다.
청풍나루 선착장입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관람하고 그냥 갈 수 없는 체험장입니다.
유람선에 몸을 실으면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배가 옥순봉, 구담봉을 거쳐서 장회나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요.
선상에서 제천10경 중 제5경인 금수산과 제8경인 옥순봉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내륙의 바다라 불릴 만큼 많은 담수량을 보이고 있는 곳으로 청풍호 유람선 투어는 필수 코스라 하겠습니다.
전국 그 어디에서도 내륙의 호수에서 여기처럼 유람선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월악산국립공원 일원을 카메라에 담기 좋은 체험입니다.
피서가 시작되기 전이라 좀 한산하게 유람선을 탔습니다.
그날 마지막으로 운항하는 유람선이었고요.
수시로 유람선이 오고 갑니다.
충주나루, 월악나루, 이곳 청풍나루, 장회나루를 연결하는 유람선도 있고요.
앞에 보이는 다리가 옥순대교.
청풍나루 건너에는 청풍랜드 번지점프장이 있습니다.
옥순대교에서 보는 옥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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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문화재길 54. (청풍문화재단지 주차장을 함께 이용해도 됨)
***(제4코스)=자드락길(정방사 코스)***
제천 자드락길은 청풍호반을 끼고 걷는 길을 말하는데요.
나도 처음에는 자드락이란 말을 몰랐습니다.
사전을 찾아봤더니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이라는 뜻으로 순우리말입니다.
제천 자드락길이란?
제천시에서 청풍호 주변을 따라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도록 한 힐링길을 말합니다.
월악산국립공원 일원의 아름다운 산과 청풍호반을 눈에 넣으며 걸는 길입니다.
마니아들로부터 인기를 많이 얻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지난여름에 이 정방 사코스를 블로그에 포스팅했더니 많은 이들이 검색해 오더군요.
제1코스부터 제7코스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드락길 전 구간을 모두 거닐어 볼수는 없었고, 나는 제2코스인 정방사코스만 탐방을 해 봤습니다.
고즈넉한 힐링길이었습니다.
입구에서 2km 남짓 되는 거리를 올라오면 정방사.
바위 품에 안긴듯한 산사입니다.
​대웅전 일부가 암반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곳 정방사에서 서쪽을 보면 청풍호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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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정방사코스) = 충북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제5코스)=금월봉***
금월봉은 작은 거인이란 말과 어울릴 듯한 곳입니다.
작지만 크게 감상할 수 있는 오묘한 곳이지요.
안내판에는 바라만 봐도 소원이 이뤄지는 작은 금강산이라 적혀 있습니다.
멀리서 무심코 바라보면 마치 공사장에 쌓아 놓은 돌무덤처럼 보입니다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으로 착각이 들 만큼 기암괴석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청풍호반을 달려 제천 시내로 향하다가 차만 멈추면 되는 곳에 있습니다.
제천 여행 중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곳입니다.
저녁 무렵에 지나다가 무심코 차를 멈췄던 금월봉.
돌무덤처럼 보입니다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만물상이 따로 없지요.
저녁 무렵이었기에 실루엣이 가능했습니다.
반대쪽에서 본 협곡.
작게 보면 협곡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크게 보면 대협곡이지요?
오묘하게 생긴 금월봉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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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 산15-1.
***(제6코스)=송계계곡***
나 개인적으로는 예부터 발자국을 많이 남겨온 곳입니다.
아이들 어릴 적 여름이면 늘 이곳에서 텐트를 치곤했고 후로는 수차례 월악산 등산을 했으니까요.
​단체를 이끌고 송계계곡에서 여장을 푼 다음 미륵리 – 수안보로 이어지는 여정도 많이 했던 계곡이고요.
월악산 아래 깊은 골짜기인 이곳은 현재 제천 10경 중 제7경으로 선정되어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계곡으로 특히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아온 지 오랩니다.
금년 피서철에도 내 블로그를 검색해 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행정구역 상은 충주시입니다만 계곡 상류로 오르면 미륵대원지와 하늘재가 있습니다.
미륵대원지는 송계계곡 중간에 있는 덕주사와 덕주성과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에 얽힌 사연이 있는 곳입니다.
피서철 전인데도 벌써 송계계곡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피서철에는 물보다 사람이 많을 곳.
사진 왼쪽 숲이 캠핑장입니다.
송계계곡에는 곳곳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월악산국립공원 측에서 관리하고 있는 풀옵션 캠핑장.
계곡 상류에 있는 미륵대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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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수���면 송계리.
***(제7코스)=박달재***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
온종일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추억의 가요지요.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랑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곳 박달재는 제천으로 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또 38번 국도 박달재 아래로 터널이 생겨서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38번 국도로서의 기능은 그러할지 몰라도
현제 이곳은 제천시에서 많은 공을 들여서 자연휴양림과 조각공원 등 시설을 갖춘 힐링지가 되었습니다.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 옛길을 따라 박달재 정상에서 힐링도 하고
맛집에서 도토리묵, 두부요리 등을 먹는 기분은 골짜기 맛집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현제 제천10경 중 제2경으로 선정되어 있는 관광지입니다.
박달재 옛길 입구입니다.
38번 국도 충주쪽, 제천쪽 모두 이런 문이 세워졌습니다.
터널로 진입하기 전 우측으로 오르면 됩니다.
정겨운 글씨 정겨운 목조각품입니다.
박달과 금봉.
자세한 내용은 아래 URL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박달재 조각공원.
위에는 휴양림도 있습니다.
터널로 급하게 달리 게 뭐 있나요?
박달재 옛길로 올라와 이런 곳에서 잠시 여유를 갖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location.target = "_blank"; location.href="http://www.selfwedding.com/";
  *네비게이션 =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지금까지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 가볼만한곳 7선을 엮어 봤습니다.
제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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