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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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Somos Cómplices Los Dos 、☘️🧸#적어도 나는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친다는 걸 알아#yunjin moodboard#mb#moodboard#aesthetic moodboard#alternative moodboard#coquette moodboard#dark moodboard#edgy moodboard#grunge moodboard#indie moodboard#kpop icons#kpop layouts#kpop moodboard#messy moodboard#random moodboard#soft moodboard#vintage moodboard#y2k moodboard#fresh moodboard#minimalistic moodboard#gg moodboard#gg layouts#gg icons#yunjin icons#yunjin layouts#lesserafim moodboard#lesserafim icons#lesserafim layo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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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ylist]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cover by ji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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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from me to you


every letter you didn't send to jimin
word count : 0.9k words
genre : angst; you loved jimin more than you ever imagined, and it hurts that you still do; non-idol! karina x gn! reader
t/w : none :) other than a relationship breaking apart and there's absolutely nothing that can be done about it
a/n : unrequited love, something so ever ethereal yet burns a hole in your heart and leaves a scar you will never forget. but does it hurt more when it becomes unrequited? since it wasn't from the beginning, and you had a taste of that person's love.
— 26/01/2014 | sunny ☀️
to my dearest jimin,
happy first anniversary! it's been 12 months, 365 days, 8760 hours, 525,600 minutes since you said yes under those bright stars on this very day last year. time has gone past so fast yet so slow, when I look into your eyes, everything around us seems to slow down and allow me to drown myself in those galaxy-like orbs of yours. you know I've never been expressive with my words hence this letter but still, I can never find the very words to convey my love to you. however, these four words might actually just do the trick.
I love you, forever.
your love
— 11/04/2015 | spring sun 🌸
to my crybaby jimin,
don't get mad just from reading 'crybaby' but I can't help but call you that. not after you so adorably sniffled while watching 'the notebook'. I just wanted to squeeze those cheeks of yours but I knew you were going to be upset for breaking the mood, so I held myself back. okay, this was definitely not the purpose of this letter, but oh well, I just wanted you to know you're the cutest.
happy birthday, my baby jimin! once my baby, forever my baby. I hope you had a blast today after been to the amusement park, cafes and even the late night movie later before the end of your big day. I have never been more blessed with a gift like you to be in my life and better, as my girlfriend.
once again, happy birthday. let's spend this day together in the years that are to come. I love you, forever.
your beloved
— 08/07/2015 | cloudy ☁️
to my precious jimin,
I know I'm in the wrong so I am not going to make up any excuses to justify what I did. you felt hurt and neglected by my actions and nothing can ever undo those wounds. but will you let me make it up to you? if you need time to think, take as long as you need because I'll be right here waiting until you give me a chance to prove my love for you that never faded. if anything, I only find myself loving you more than I did the day before.
work has doubled in amount but I should have known to try harder to spend time with you despite that. it is my responsibility to do that, yet I chose the easy way out and hurt you. I'm so sorry, baby. please forgive me. I love you so so much, I love you, forever.
your dumb bear (still in regret)
— 17/03/2016 | rainy 🌧️
to my wonderful and amazing jimin,
there is nothing special about today, surprise! although there isn't a special occasion today, I want to let you know that every day that I spend with you is special and every moment we have together is engraved in memory forever no matter what happens.
I know I can be cheesy but I feel like every time I tell you that I love you, it just feels more overwhelming and unbelievable. so unbelievable that I have the most beautiful; in and out; person in the whole world as my girlfriend. it would be better if one day, it would change to my wife. I can already tell how your face would start burning up and the tip of your ears cutely beet red. even though I had told you I love you numerous times, it never feels enough. I love you, forever.
yours forever
— 02/10/2017
to my lovely jimin,
it's been five years since we've been together, and I know how you are when something or someone upsets you. if you don't talk to me or even be next to me, I would not know what to say or do to help you, honey. we promised to never go to bed with complicated feelings, regardless of whether it be about us or someone else. you said it is not good for the health if we keep our feelings bottled up.
if it's about me, please, please tell me what I did wrong. tell me what I need to fix so that you would not be upset. please, talk to me, jimin. let me be by your side as I always did. I love you, forever.
— 19/01/2018
to my one and only jimin,
please take me back, I love you so much. please don't leave me all alone in this shared home of ours. it's too painful to see the memories of us, filled with happiness and joy. let me still call us, us. please, please come home and whisper sweet nothings like you used to, say that everything was all a prank. that you went overboard with the joke. please bring me into your embrace and stroke my back, tell me everything's alright, we're alright.
I love you, jimin, you know that right? I love you, forever.
yours
.
.
.
.
you know, I've always imagined us walking down the aisle as I take you in my hand and swear the oath to be each other's seasons, side by side all the way through our future days together. but sadly, all I could do now was clap for you, your happiness with your lover, staring at each other so lovingly on the pedestal. if you were happy, so would I be.
because I've always loved and will love you forever, my jimin.
#karina#yu jimin#aespa#aespa angst#aespa imagines#aespa scenarios#karina x reader#aespa x reader#Spo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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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런 생각을 한다.
가식이었어도, 역겨웠어도 '사람이 먼저다', 든 뭐 역겹게 국밥을 먹다가 정치인이 쳐 우는 거든, 인본주의적인 슬로건이 무척이나 중요했다는 깨달음을 느낀다.
사람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사람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체면을 상실하게 시작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도덕'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숨어있던 일베충들이 쏟아져나오고, 온갖 혐오와 일빠들이, 괴물들이 쏟아져나오자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언어들이 바깥에서 사용되었다. 매일 매일이 이태원 압사사건이 일어나던 그 밤 같은 분위기로, 모두가 흥분한 채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기억되어야 할 만한 역사는 그야말로 뒤안길로, 육사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과 같은 독립 영웅의 흉상을 철거한다고 한다. 한미일 협정에 따라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로 버려졌다. 우리는 일본과 화해했다고 한다. 미국은 오염수를 용인했다고 했다. 오늘은 오염수가 방류되었지만 그 커다란 슬픔에 대해 사람들은 '회를 먹지 못함' 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나는 당장 자연이 오염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초밥을 먹는다, 회를 먹는다며 사람들은 자신의 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세상이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것을 본다. 나는 오늘도 머리를 말리며, 2023년, 붕괴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자각했다.
다만
일전에 내가 살아오며, 조금 더 어린 시절에 내가 느낄 수 있었던
이렇게 세상이 망가지기 전에, 도덕이 존재했고, 타인이 존재했고, 양심이 존재했던 시절에.
오글거림 이전에 낭만이 있었고, 이미지즘뿐인 가짜 낭만이 아닌, 책임이 동반된 낭만이 있었던 그 시절에. 내가 가장 젊었다는 것에, 그 시절의 기억이 내게 있다는 것에
다행이었다.
감사했다.
그, 젊은 날에 내가 친구들과 벚꽃이 흩날리는 홍대길을 걸었다는 것과,
우리가 모두 어리숙하게 만나, 술집에서 만나. 악수로 어색한 인사를 하고, 다 같이 클럽갔던 밤에, 내게 물 사러 가자고 하던 내 친구의 과 선배 대신, 널 사랑했던 일을 기억한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던 그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소녀시대의 BABY BABY를 흥얼거리는, 벽에 기대어 선 네 옆 모습을 바라보던 그 밤, 그냥 그런 밤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랑은 충분했다.
그리고 다음 밤에 우리는 용산4구역 철거현장으로 데모를 갔고, 그 주변을 지키는 또래의 전경들을 경계했다.
데모를 갔다. 우리는 데모를 했다. 우리는 반항을 했다. 그래도 소녀시대가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너를 사랑했고, 내 빨간 노트에,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가사를 적었다. 혜화역 도어스에서 훌쩍거리며 약간의 술을 먹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면서 끄적이던 가사였다.
내 낭만은 우리가 악수로서 끝난 것이었다
사랑한다고 느낀다 여전히
지구가 이렇게 끝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밤에 혼자 눈물 흘리기엔 난 아직도 어리다.
;-)
미안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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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에게서 이영광에게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창비, 2013) 수록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랭보의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문장이 포함돼 있는 다음 대목 전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 모두 알다시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해. 여자들은 안전한 자리를 바랄 수밖에 없어.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마음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은 내팽개쳐지지.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차가운 멸시뿐인데, 그게 오늘날 결혼의 양식이야.”(‘착란 1’ 중에서)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안주(安住)를 지향하기 때문에 진지한 사랑의 실험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동의할 수 없는 편견이 이 대목에 담겨 있다. (다른 시 ‘콩트’(conte)에서도 “사랑의 놀랄 만한 혁명성”을 실험하는 ‘왕자’는 궁���의 여자를 모두 살해한다.)
물론 저 말들은 시인 자신의 육성이 아니라 ‘착란 1’의 화자(여자)가 인용하고 있는 연인(남자)의 말이지만 그 연인을 랭보라 볼 근거가 시의 다른 대목에 많으므로 저 발언도 랭보가 한때 몰두했던 생각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숙한 여성관은 제거하고 그의 취지라고 할 만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부르주아적 논리와 관습에 오염되어 단지 이익의 거래가 되었을 뿐이며, 사랑의 아름다운 귀결로 간주되는 결혼이란 차가운 멸시를 먹고 사는 괴물일 뿐이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현대적 사랑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시도하는 (알랭 바디우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랭보의 저 구절은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다.
‘사랑의 재발명’이라는 매력적인 발상의 기원이 랭보에게 있음을 짚어둔다는 게 그만 서론이 길어졌다. 랭보가 말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재발명이다. 어떤 가치/제도의 재발명을 주장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다. 기존의 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재발명이 아니라 발명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무너뜨릴 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를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이의 그 두렵고 힘찬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시인 이영광의 네 번째 시집 <나무는 간다>에는 ‘사랑의 발명’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 3년밖에 안 된 이 시를 300년이나 3000년은 된 시처럼 아득한 마음으로 읽어보는 때가 나에게는 있다.
그렇게 아득해지는 것은, 이 시가 어느 저녁 술집에 마주 앉아 절박해져 있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처럼 보여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그는 지금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그냥 죽어볼까 생각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살다가 살아보다가”라고 했으니 여하튼 최선을 다할 것 같기는 하되 예감은 좋지 않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겠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때가 곧 오리라는 뉘앙스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무의미).
그런데 왜 그는 하필 다른 길을 두고 구덩이를 파고 누워 곡기를 끊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일까. 나는 제 무덤을 파고 거기 산 채로 기어 들어가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해 본다. 어렸을 때 ‘자신을 죽이다’(kill myself)라는 영어 표현의 강력한 실감에 놀란 적이 있는데(‘자살’이라는 말은 ‘suicide’가 그렇듯이 내게는 관��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 사람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일. 이 죽음은 신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관객을 염두에 둔 최후의 저항처럼 보인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 때 인간이 무책임한 신을 모독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그것이지 않은가.
화자에게 그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속으로 무심코 저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도 놀라버렸을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한다. 내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라는 말을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말로 조용히 바꿔보았을 한 사람 말이다.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 의해 사랑이 발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정이 아닌가? 사랑과 동정을 혼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우리는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요즘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권여선의 소설 ‘봄밤’을 읽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영광과 권여선을 함께 떠올리고는 한다. 1965년에 태어나 안동에서 자랐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니다. 작품으로 판단하건대, 인간의 약함을 누구보다 연민하지만 그 안에 자기를 용서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섞지 않는 두 사람이어서다. 그렇다.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먼저 인간 모두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냥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디선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시의 ‘너’는 산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그래서 이 시의 ‘나’ 역시도 이렇게 시를 쓰면서 내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로 읽었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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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액이다. ‘증오’는 ‘죽음’으로 이끄는 고름이다. 그러나 피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혈관을 타고 거침없이 순환되어야 한다. 피의 흐름을 억누르면 위험하고 지독한 재앙을 낳을 것이다. 억눌리고 억제된 사랑이 증오로 바뀌면 그런 사랑을 주는 자와 받는 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를 받는 자 모두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지 않겠는가? 그대의 생명의 나무에 누렇게 뜬 나뭇잎은 사랑이 모자라 그리 된 것이니, 그 나뭇잎을 탓하지 말라. 말라서 비틀어진 나뭇가지��� 사랑에 굶주려 그리 된 것이니, 그 나뭇가지를 꾸짖지 말라. 썩은 열매는 증오를 삼켜서 그렇게 된 것이니, 그 열매를 나무라지 말라. 오히려 생명의 수액을 극히 일부분에게만 주고 전체에게 주지 않아서 수액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 그대의 어리석고 인색한 마음을 탓하라. 자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랑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자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자아도 진실하지 못하다.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은 그 자체가 ‘사랑’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대는 진정한 자아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사랑’이라는 황금열쇠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 <미르다드의 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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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 hermana se va a casar y hoy me enseñó los votos para ese día, eso me hizo recordar el día que nos casamos, los nervios, los preparativos, nuestros votos... Dios NUESTROS VOTOS! Creo que pocas veces en la vida puedo decir que me siento algo cursi y ese día sentí que sacaba miel por los poros... Y pensando en ello, a veces me preguntó si pude cumplir algo de todo aquello, de eso que esperaba fuera nuestra relación. Porque incluso en aquella época obscura lejos de ti, puedo decir que siempre esperé que volvieras y poder cumplir el estar para siempre contigo.
No sé, creo que me puse muy sentimental y ya sabes empiezo a llorar jajaja... Pero realmente, espero algún día poder cumplir todo lo que dije aquel día.
Bueno esto es solo una pequeña nota, terminaré diciéndote que te amo 💖
Pd. Creo que todo eso me hizo pensar en esta canci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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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파괴적이 될 수 있다. 사랑이 모두 깨어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지만 세상은 고통에 빠져있다. 엄마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신과의사나 심리학자들에게 물어보라. 모든 정신질환을 엄마와 아이의 관계로 해석한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성직자들과 정치인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지만 모든 사랑이 반드시 깨어있는 것은 아니다. 깨어있는 사랑만이 자비가 된다. 그 사랑은 전혀 다른 특질을 갖는다. 자유를 안겨준다. 전적으로 자유를 안겨주는 데 기여한다. 그런 사랑은 자유에 대해 말할 뿐만 아니라 그대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유를 향한 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는 노력을 기울이게끔 도와준다. 사랑은 있을 수 있지만 깨어있지 못한 사랑은 파괴적이다.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랬다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는 연인을 사랑하고 연인은 그대를 사랑한다. 그런데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파괴만 남을 뿐이다. 사랑은 괜찮지만 그대는 괜찮지 않다. 깊은 무의식 속에서 뭔가가 계속 그대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을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사랑이 앞서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자각이 먼저다. 사랑이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야한다.
- <오쇼 메디테이션 36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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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개인성, 개인주의 (4/4)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and 3. Niklas Luhmann
번역 – 조은하, 박상우
ⅩⅠ.
개인적 자기-언급의 전개, 탈-토톨로지화 그리고 비대칭성의 형성에 대한 두 번째 예는, 시스템 안으로 시스템/환경 구별을 결합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비대칭적, 비가역적 관계들을 위한 그 자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일 ‘개인’이 어떤 디딤돌, 어떤 확실성을 찾을 수 없다면, 심지어 반성 안에서의 정체성도 아닐 수 있다면, 환경과의 차이를 수용하고, 디딤돌 혹은 더 큰 확실성을 찾기 위해서 경험을 획득할 수 있는 조사로서 환경에 대한 요구를 활용하는데 해법이 있을 수 있을까?
일반적 개념에서, plaisir/ennui 도식을, 심적 시스템의 구성을 이끄는 근본적 규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을 개념화하려는 18세기 인간학은, 정확하게 이 주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1] ‘요구’ 개념은, 구조안에서 더 강력하게 환경-관계된 그리고 충족/비-충족으로 전해지는 동일한 구별을 언급한다. Plaisir/ennui와 관계해서, 17세기는 이미, 문제가 되는 인간 존재만이 그 혹은 그녀에게 plaisir 혹은 ennui을 줄 수 있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이를 위한 어떤 객관적 범주, 어떤 규칙 그리고 어떤 규준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것에 대해 행하는 요구, 그들이 그들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충족 혹은 비충족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전제조건과 관계하고, 오늘날에도 조응 하는 인류학적 이론이 부족한 하나의 과정이다.
법적 교리와 이런 교리에 의해 영향 받은 실정법 안에서, 이 과정은 ‘주체적 권리’의 개념에 대한 언급에 의해 추적될 수 있다.[2] ius의 고전적인 기본 개념은 권리와 의무의 균형과 관계가 있었지만, 이점과 부담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없이, 그 자신의 개념에 대해서만 유용한 일방적인 법적 관계로 축소된다. 그래서 균형은 사회로부터 훨씬 더 기대된다.
이런 특정한 법적 발전을 버팀목으로, ‘개인’을 향한 사회적 정향성의 더 급진적인 변화를 발견한다. 즉 그는 이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요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만일 이 주제의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이해’의 시맨틱과 마주할 것이다. 이해의 개념 안에서 17세기는 요구와 자기-언급성의 개념을 하나의 통일체로 결합했다.[3]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의 하위 영역에 대한 것일 뿐, 개인성 요구를 이끌지는 않았다. ‘이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4]는 슬로건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기 위한 범주로서 역할을 했다. 만일 그들의 이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을 그들에게 남겨둔다면, 정치적 계산을 위한 객관적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언급적 결정은 주관적인 요구를 사회적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만든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해를 규정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배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것은 즉 질서의 성립을 위한 자원을 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경제와 정치를 위한 기초인 것이다.
이런 ‘이해’의 사용이 정치적인 이론적 자원들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시에 다른 방향을 따르는 다른 논의들은 경제적 영역으로 이해를 옮긴다. 사랑과 이해는 반대되는 것이며, 상호 공존할 수 없는 지향이고, 그래서 사랑은 결혼과 일치될 수 없다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처럼.[5] 비록 사랑이 요구를 들을 수 있도록 표현하고, 그 요구를 위한 기초로서 그것이 고통을 사용함에도, 사랑은 스스로를 이해가 아니라 열정으로, 계산이 아니라 책임질 수 없는 욕망으로 규정한다. 사랑의 문제에서 그것은 ‘오컬트’에 따르는 공통점과 ‘경향’을 다루기 때문에, 점성가가 자문을 할 수 있다. 이는 결혼에 대해서는 이뤄지지 않는데, 여기서는 이해가 작동하기 때문이다.[6] 사랑과 이해의 이런 차이에 더해서, 이기주의/이타주의 구별은 18세기까지 잘 유지되었다. 이 구별은 Descartes(!)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기-언급을 이기주의로 돌린다.[7]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이해를 마지막에 두는 동기 (그리고 따라서 동기의 개념론이)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더욱이 점점 더 사람들은 여전히 권리와 의무 사이에 관계적 조응, 혹은 자연적 통일성을 찾고자 한다.[8] 17세기 말에 이르러, 특히 ‘자기-애’의 영역에서, 자기-애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인다는 의미에서, 반성적 구성이 지배적이 된다.[9] 그래서 자기-애와 타자에 대한 사랑의 이런 종합 안에는 이해가 포함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종합이 자기-이해와 타자의 이해 사이의 차이의 기반 위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을 때 조차도, 그것은 반복해서 기본적으로 이해를 이해하는, 혹은 심지어 경제적 개념에서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다시 불을 붙인다.[10] 무엇보다도, 특히 18세기에는 자신 안에 하나의 동기로 이해를 이해하고, 물리학의 역학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행위의 일반 이론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L'homme agit nécessairement pour son intérêt personnel”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의 개인적 이해에서 행위 한다)는 것이 전형적 요구이다.[11] 그리고 드러난 이해의 부족은 특별한 이해의 기초 위에서 설명될 수 있었다.[12] 따라서 도덕적 문제는 자기-이해의 극복에서 이해들 사이의 관계로 옮겨간다. 이런 행위-이론적, 일반화 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이해 개념과 대조되어,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를 미뤄둘 수 있다는 의견은, 이해에 대한 규범적인 반대 개념으로 후퇴했다. 18세기 후반, 사람들은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공공의 이해’ 혹은 ‘이성의 이해’(Kant)를 말했다. 그렇지만 상호교차의 선들이 설정되었고, 이해의 시맨틱은 일반화되었으며, 모든 이해들을 하나의 이해, 개인성의 이해로 뒤섞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이해’ 시맨틱의 역사는 과도한 거친 단순화에 대해 우려를 보여준다. 요구-지향적 개인주의가 역사적으로 반성-지향적 개인주의를 대체한다고, 그리고 그것에서 이어진다고, 반성의 실패로부터 발생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더욱이 양자는 공생의 다른 형식들로 들어가며, 역사적으로 서로 나란히 진행된다. 심지어 ‘이해’의 시맨틱을 넘어서, 예를 들어 사랑의 낭만주의적 개념 안에서 그것들은 서로 (그리고 그들의 실패를!) 연결시키면서, 이 시도들을 연구하는 것은 가능하다.[13] 궁극적으로, 그것은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이런 관계들의 출발점을 결정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요구를 가지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동일해야만 하는가? 혹은 동일성은 요구와 사라의 절차 속에서만 ‘형식화’ 되는가? 적어도 Bildung의 향상의 시맨틱은 이것이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호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만일 개인성이 반성을 통해서 생산된 정체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면, 가치 있는 행동을 지적하는 개인화의 제도적 가이드라인은 폐지될 것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충동성에 남아 있고[14], 동시에 그 정체성이 구성되는 것을 타인에게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타인의 요구와 맞서게 된다. 그렇지만 ‘개인’이 그 자신과 이에 대한 사회 사이의 차이를 요구한다면, 그리고 차이의 시맨틱이 이를 위해 준비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 기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동일성과 차이가 함축되었다는 사실에서, 시맨틱 자신의 수단이, 개인의 기본적 개념으로서 요구와 반성 사이에서 하나의 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이 논쟁은 사회 구조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다음 부분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발전은 일차적으로는 요구-기반 개인주의를 더욱 적절하게 하고, 이는 사회 자체가 기능적 차이화를 통해서 조직화된다는 사실과 이어진다. 따라서 사회는 포섭과 참여에 대한 조건을 규정하는 것을 각 기능 시스템에 남겨 두고, 그래서 반복적으로 ‘개인’이 개인성에 대한 요청을 탐색하도록 초대한다.
모든 자기-언급과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개념적 관계에서의 순환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가 동일성을 통해서 혹은 차이를 통해서 개인화에 대한 충동이 진행되는 것을 허용하는지는 문제가 된다. 정보의 어떤 획득과 처리 과정은 스스로를 지향하는 차이를 필요로 한다. 차이의 제시는 그래서 정보의 질을 처리하는 작동 과정 안에 놓여 있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도, 존경, 관심 그들의 필요, 승인에 대한 요청 등등이 충족되는지 여부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에 대해 알게 된다. 이 정보 처리 과정의 맥락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동일성을 부여할 수 있다. 심지어 이 동일성의 의미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과 어떻게 다른 지가 그들에게 접근 가능하지 않을 경우에 조차. 동일성의 인식이 이 과정의 부분으로서 발전하는 반면, 이것이 요구-충동적 정보를 찾거나 전환할 능력에 대한 요구조건은 아니다. 반대로, 개인이 되고자 하는 그리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단순한 호소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의 도움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차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의 차이기 전에는 구별되는 단위로서 규정될 수 없다.
개인이 환경으로부터 차이를 비대칭적으로 다루고 발생할 수 있는 형식은 요구, 무언가 그 자신보다 다른 것이 되는 요구다. 요구는 이차적 차이, 즉 그것의 있는 그대로와 그 자신에 일치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개인’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 사이의 차이로 시스템/환경 차이를 보완한다. 이 이차적 차이와 함께, ‘개인’은 시스템과 환경 사이의 일차적 차이를 조작하고자 한다. 단지 시스템과 환경 사이의 관계가 비대칭적이 된다.[15] 요구는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이를 통해 반성이 작동하기 위한 그것의 적절성은 단지 오늘날이 되서야 주제화 되었다.
그래서 요구의 사회적 정당성은 단순한 이해의 승신보다 깊어지고 있다. 또한 지난 이 십년 동안 더 분명하게 되면서, 아무도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요구, 더 이상 그들이 만족하기 위해 목표로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는 요구들을 포함한다. 자기-실현에 대한 요구는, 누군가를 사회에 통합하도록 그리고 기대에 통합되도록 도와주는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지점까지 끌고 갈 수 있거나 사실상 끌고 갈 수 있다. 요구 발생적 개인주의는, 어떤 이해도 가지지 않은, 그리고 이 격언에 따라 살아갈 것에 대한 요구를 포함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제한 없는 정체성 속에서 살 수 있고, 정확하게 이것 때문에, 사회에 대한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결정에 도달하는 것에 더욱 의존적이 된다.
이 모든 것 이후, 더 이상 이름을 가지는 것, 누군가가 무엇인가 (혹은 전통적으로 말하자면 누구로 태어났는가)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요구의 형식 속에서, 그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적어도, 누군가 드러내는 것에 대한 승인은 승인에 대한 요구로서 부족한다. 자기-기술로 만들어진 부정성은 사회적 그리고 시간적 차원을 가진다. 반면 사건 차원에서 그것은 개인적으로 특화된다. 그런 결점이 없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반성의 이유는 절대적으로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역으로 반성은 이런 결점을, 그 자신과 그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차이로 생산한다. 개인성은 불만족이다.[16] 그런 개인성의 논리 안에서, 궁극적으로 타인은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없다는 요구가 놓여 있다. 이런 원리는 개인성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자신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만 형성도리 수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의주의에 맞서는 과거의 논의가 적용된다. 즉 ���것은 이론가들이 모순에 빠지는 이론, 혹은 그것을 옹호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없는 이론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지식 수준에 다라서, 이것은 단지, 자기-언급 자체가 시스템이 스스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는 패러독스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17] 더욱이 요구에 대한 반성은 정확하게 이런 자기-해방을 위한 조작적 형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모든 것이 돌아갈 출발점은 발견 가능한 정체가 아니라, 요구, 개인일 것에 대한 요구 그리고 개인으로서 견뎌야 한다는 요구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Duns Scotus의 differentia individualis를 다루는 것이나,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의 구별을 통해 ‘개인’의 ‘이것’을 정의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개인일 것에 대한 요구는, 요구를 발생하는 그래서 지식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원리, 세계를 시험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가 된다.
요구-지향적 개인성은 단순한 정체성-기반 개인성보다 더욱 강하게 사회적 삶과 뒤섞이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리고 왜냐하면 차이가 강조되기에.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토톨로지를 통해서 승인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함을 통해서 승인된다. 요구는, 누군가 스스로 그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외부적으로 다뤄진다. 거기서 요구들은 거부되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부과되는 한계를 가진다. 이런 면에서, 개인화의 이런 형식은 복지 국가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예민한 도구로서 조직, 법, 화폐 속에서 일을 한다는. ‘개인’은 적어도 정상적으로 스스로를 이런 전제조건에 버린다. 거기서 동시에 경력이 가능해진다. 문학은 우리에게, 개인이 이 맥락에 대해 반성한다면, 즉 그들이 자아의 시스템과 그들 자신의 자기-기술 안에서의 사회적 환경 사이의 차이를 포함한다면, 어떤 종류의 반성이 결과를 낳을지를 말해준다. ‘개인’은 그래서 (그 자신의 요구의 충족과 비충족에 대해서) 그 자신의 무의미함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가지 마지막 노력, 그 자신의 무의미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요구를 주장하려는 노력을 할 가능성을 남겨둘 것이다. 말하자면 T. S. Eliot의 The Cocktail party에서 Edward Chamberlayne처럼, 이 질병은 어떤 요구를 치료제로 정당화하기에는 너무 일반적이다.
자기-선택 요구에 대한 요구까지 포함해 모든 요구는, 그래서 ‘개인’과 사회 사이의 차이에 기반한다. 그렇지만 통일체로서 ‘그’ 사회가 ‘그’ 개인과 마주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이것은 이미, 비대칭적인 것으로 그 관계를 해석하고, 상호 상태의 가정을 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은 남겨놓지 않는다. 이것이, 동일성의 개인적 형성에 대한 사회적 상대항, ‘개인적’ 동일성의 수단으로서 ‘집합적’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18] 집합적 정체성과 개인적 정체성 형성 사이의 연결은 무엇보다 사회화와 포섭의 조건의 차이화를 통해서 중단된다. 이 때문에, 개인화에 대한 사회적으로 검증된 모델, 예를 들면 우수함 혹은 적당함의 모델, 형식의 능력 혹은 통달의 모델 등이 부족한다. 그래서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권위 역시 부족한다. 이것은 이미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요구들에 대한 다소 다른 논의에 불과하다. 즉 개인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개인화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
기능적으로 차이화 된 사회는 개인화된 경험을 소리 내기 위한 도구로서 요구를 하고 요구를 사용하기 위한 ‘개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어떤 대안을 제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실망스러운 경험을 제공하거나 조응 하는 요구의 조정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구는 개인성에 기반한다는 요구를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개인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고, 스스로에게 타자를 제공할 수 있다는 타당성의 문턱을 낮춤으로서 자신의 진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각 개별적 인격에 대해서, 전체로서의 사회는 단지 심호한 복합성, 즉 그들이 소유할 수 없는 정보, 시스템 구성의 전체성 안에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정보로만 나타난다.[19] 어떤 수단으로도 알 수 없는 정보는 정향, 학습 그리고 자기-동일화를 배제한다. 그렇지만 비록 그들이 세계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모를 때조차도, 스스로와 타자에 대한 그들 자신의 요구를, 어떤 경우인가를 규정하기 위한 탐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면서, 그들 자신에 대해 개인을 되돌려 준다.
그 부문적 차이화를 통해서, 사회는 이런 종류의 많은 시험 선택들을 ‘개인’에게 제공한다. 학교에서 개인은 이미, 나이에 기반한 학급에서 같은 조건 하에서 출발하면서 타자와 비교해 얼마나 좋은 지 나쁜 지를 알 수 있다. 스포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기회에 대한 모든 주장은 차이의 경험을 증가시킬 뿐이고, 그것은 가정된 평등에 맞서게 된다. 사회는 성인 개인에게 수입, 고용 혹은 실업을 제공하고 이에 기반해서 대단히 개인화된 구매 결정(개인적 획득은, 모두에게 가능한 재화의 공유보다도 훨씬 높은 가치를 가진 특성적 결과를 가지며)을 제공한다. 그것은 양질의 그러나 개선가능한 의료 지원과 법적 보호를 제공한다. 그것은 개인에게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 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어느 정도까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정보와 대단히 분산된 문화적 공여물을 선택할 수 있는 폭 넓은 전형적 매스 미디어를 제공한다. 적어도 그것은, 친밀한 행위의 이점과 불이익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고 성적 만족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한다.
이런 기능적 영역으로의 사회의 분할은, 개인이 스스로를 개인화해야 한다는 요구조건에 대응한다. 이런 목적에서 개인은 반성의 도움 없이 혹은 정체화에 대한 언급 사항들 없이 혹은 범주적 명령으로 통일된 그리고 일관된 원리 혹은 법령 없이, 오직 차이의 경험만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들이 상대적인 개인 자신의 삶의 기반에 관계되고, 개인의 관점에서 정당화 되는 한, 다양한 요구들이, 친족 관계나 시장, 아무리 ‘인간화 되어도’ 업무 활동에서 정치에서,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한 형식과 차원들을 도발한다. 특정화는 비교를 가능하게 하고, 비교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선택된 타자보다 더 나쁘게 된다. 이는, 개인으로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 환경에 만족하는지 혹은 불만족스러운지 혹은 그들이 실제로 향상을 갈구하는지 혹은 수동적으로 스스로를 맡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완전하게 열어놓게 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새로운 ‘인간 종’을 낳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일반적으로 형성되자마자 병리로서는 보이지 않게 되는 어떤 병리의 발생을 기대하기 쉬울 것이다.[20] 어떤 경우건, 대단히 개인화 된 개인의 삶의 형식이 등장하고, 개인으로서 개인이 기대한 것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모든 기능적 시스템에서 이해 가능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가 등장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충족은 하나의 목표, 꿈,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야만 하고 적어도 받아들여지는 요구가 된다. ‘나’라고 말하는 개인과 모순되기는 어렵게 된다. 저항은 우회를 위해 전환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구의 개인화가 사회 시스템의 다양성(수많은 차이 요소)를 거대하게 증가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진화적 관점에서, 이는 시스템의 과도한 특정화를 낳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더 많은 진화를 위한 위험을 지닌다.
다시 사회적 시스템의 차이화는 그렇지만 이 문제에 조응 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특정화된 요구에 대해 매우 다른 가능한 적응 선택지를 보장하고, 그리고 개인적 기능 시스템에서 높은 수준의 실망을 흡수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적응한다. 기능 시스템 자체는, 그들의 피보호자의 개인성을 육성하고 재생산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전체 인구 전반에 더욱 평등하게 각 인물의 개인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방향에서나 아니면 개인적 이해에 더 깊은 적응의 방향에서,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의 제안에 대한 향상을 테스트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것은 ‘포섭’[21]으로 언급되었고, 배제와 ‘한계성’ 같은 상대항이 형성되었다. 이런 개념들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요구조건을 또한 어떤 사회적 기능을 충족하는데 전문화된 사회 시스템들에서 발생하는 결과적 문제들을 언급한다. 이제 포섭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이 기능 시스템에 위탁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총합적 개념은 재정식화 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공동체에서 사회로, 혹은 공동체에서 집합성으로, 그리고 이는 조화로운 전체라는 낡은 관념이 단지 낭만적으로 혹은 노스탤지어로 단지 대립항으로서만 호출된다. 동시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향하는 무한한 방향성에서의, 개인성에 대한 요구는 원리상, 그 요구가 그런 평등 혹은 보상 같은 지원 아래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에 의해 은폐된다. 요구와 기능 사이의 차이는 그래서, 정당화 될 필요와 같은 이런 위로 향하는 궤적 없이 상승을 위한 동기로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개인성의 확인으로부터 나온다.
18세기 초부터, Jean Blondel[22]은 동태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유럽이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보다 우월하다고 썼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애의 원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Blondel은 이미 이런 세계 질서가 다른 지역에 더 큰 이익과 더 큰 해를 끼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발생한 경험에 기반해서 우리는 단지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ⅩⅡ.
개인, 개인성, 개인주의의 시맨틱이 관념 세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 물론 관념의 독립적 진화는 정교한 관념 복합물과 함께 발생한다. 어떤 것이 개인으로서 기획된다면 언제나, 그에 대한 이유와 이 기획의 한계에 대한 문제가 등장하고, 그로부터 개인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개인/개인성의 시맨틱이 정치 개념의 소용돌이 속에 포착될 때, 개인주의의 문제가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부정에 대한 하나의 잠재성과 더 큰 변화 즉 더 큰 선택��� 가능하게 하는 차이의 정의를 일으킨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 개인성, 개인주의’의 연속은, 또한 더 많은 개념의 추가가 의미 있는 언급의 영역을 확장하는, 그러나 동시에 원래의 용어를 전환시키는 진화적 연속을 구성한다.
역사적 소재 속에서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언급 지점을 발견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사회구조적 진화 이론의 일반적 가정에 따르면, 관념의 진화와 사회구조적 진화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고, 사회구조적 진화가 관념의 선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23] 이것은 특히 성층적 차이화에서 기능적 차이화로 사회의 근대적 재구성 속에서 가시적이 된다. 관념의 가변성은 증가하고, 더 많은 부정의 가능성이 허용된다. (특히 종교적 제약의 몰락을 통해서) 우발성은 더 많이 개념 안으로 통합된다. 결과적으로 각 선택은 더 많은 선택성을 얻는다. 동시에 선택은 타당성에서의 손실과 이익을 통해서 사회구조적 진화에 더욱 엄격하게 묶이게 된다. 관념은 역할을 하지만 그들의 후속적 적응을 통해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전히 매우 일반적인 가설이다. 또한 시맨틱이 취하는 그리고 다양화하는 주제적 문제에 의존해서 패턴이 다양하게 갈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만일 전기가 경력에 의해 개인화 되고, 요구에 대한 인내 한도가 낮아지고, 요구에 대한 정당화가 개인화 된다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게 될 결과들을 또한 탐구할 필요가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이 심지어 더 많은 어려움을 키우면서, 압력에서 승인으로 더 높은 일탈을 사회화에서 발생할 것인가? 실망의 정도가 불균형적으로 커지고, 실망을 흡수하는 일상의 메커니즘은, 특히 종교와 법에서 이를 견딜 수 있을까? 혹은 사람들에게 이런 압력을 덜어내기 위해, 절차를 통한 정당화, 참여의 형식 그리고 소비의 자유에 대한 환상 같은 발명이 존재하는가? 증가되는 개인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쨌건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상호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사회의 상호 침투를 가능하게 할 때, 어떤 사회적 형식이 적합한 지 그리고 무엇이 진화에 의해 제거될까? 그리고 이 과정의 선택성은 특별한 기능 시스템과 그것의 환경에 대한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비록 개괄은 불가능하지만, 여기서 이 거대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하자.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개인성의 속임수와 사회에 대한 충격에 관련한 일련의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개인성은 개인적 사람들이 타자에 대해 그들의 특별한 성격을 부과할 수 잇는 정도까지 발전하고 강화되었다. 이는 견딜 만하지만 바로 뒤집어질 수 있는 것 안에서 성장한다. 대단히 개인화된 출발점이 더 많은 행동의 전제조건이 되면 될 수록, 더 적절한 개인성이 준비될 필요가 있다. 개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의무가 된다. 단지 고유성 안에서만 ‘개인’은, 타자에게 그들의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일관성과 확신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로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래서 18세기에 믿었던 권리와 의무의 기본적 통일체로 돌아가는 것이다.[24] 한 인물로서, ‘개인’은 사회적 주소, 사회적 담론에서 그 자신의 동일성의 보장자가 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문제를, 예를 들면 그룹 회의에서 요구에 대해 개방하면서, 드러낼 필요가 있다.[25] 그래서 ‘개인’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거짓된 혹은 과장된) 전기�� ���요로 한다. 이는 요구될 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잘 준비된 자기-기술을 지니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그래서 이해를 (혹은 어떤 특별한 이해가 없을) 가진다는 것, 자신에게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비극이 될 수도, 치료를 통해 다뤄질 수도, 연금을 위한 자격일 수도 있다. ‘개인’의 고유성과 존재의 비교 불가능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전제다. 거의 모든 문맥, 병원의 환자로서, 행정 기관에서 흥인 혹은 거부에 대한 지원자로서, 백화점의 고객으로서, 학생으로서, 공무를 수행하면서 군역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으로써 혹은 도제로서, 그것이 전형화 되는 반면, 이는 여전히 유형화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방식에서 일어나고, 유형은 단지 개인이 특별하게 조사되고 더 많은 행동에 대한 전제로서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는 정도까지 통제한다.
개인의 개인성은, 타자가 그들의 개인성과 그들의 삶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의존한다. 개인은, 모든 미리 규정된 근거 없는 요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방어할 수 있는 반면, 대신에 그들 자리에 생겨날 수 있는 문제들에 더욱 더 복종하게 된다. 기대하기에 타당한 것의 임계점에서의 이런 변동은, 과대평가하기 어려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충격을 가진다. 사회 시스템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다. 그것들의 형성과 한계는, 주제, 시간-구속, 관심 그리고 언제나 의심, 주저, 사람들이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서로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협상가능한 타협의 측면에서, 타당한 것에 대한 기대를 통해서 무엇보다 먼저 발생한다. 마침내 사회적 질서로 숙성되는 것은, 상호성의 기본적 규칙이나 ‘도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것에 의해 통제된다.
모든 개인이 타자에 대한 자신을 그리고 자신만을 강요할 수 있는 극단적 경우를 가정해보자. 개인으로서, 자신의 요구를, 같은 자유를 요구하는 개인들과 마주해서만 자유롭게 규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관계된 세계, 그들의 이해, 그들의 향유가 구성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공식적 시맨틱이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자기-결정의 권리, 그리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타자의 요구를 인정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이 결과는 무엇일까? 여기서는 세 가지 가설로 제한하고, 어느 정도까지 오늘날의 사회가 기술된 조건들에 이미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제도화된 개인성을 가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실증적 연구에 맡기고자 한다.
첫째, 이런 조건하에서 요구는 점차로 조직을 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법적으로 관리된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새로운 종류의 종합이 자유와 조직,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등장한다. 이 효과는, 동일한 것이 경력에 대해 mutatis mutandis를 적용한다는 사실에 의해 높아진다. 동시에, 이것은, 모든 기능적 영역에서 개인성의 사회적 포섭은 점차적으로 조직을 통해 매개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이런 시스템 유형의 특정한 구조적 선택성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26] 결과적으로, 조직은 사례의 개인성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력 하에 놓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루기 힘든,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비용이 드는, 그리고 불투명한 조건들의 뒤섞인 거미줄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개인은 그래서 그들의 요구를, 그들이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기관에 제시하게 된다. 더욱이 그들이 자신의 요구 안에 더 많은 개인성을 포함할 수록, 이 요구들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들은 더욱 당황스럽게 된다. 이것은 부패, 조직 내에 인맥, 혹은 상호적인 그리고/혹은 후원인-피후원자의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즉 조직을 훼손하고, 개인적 자기-결정을 제약하는 것만으로 변할 수 있었다.
둘째, 더 많은 행위-관계 기대가 개인적 사람들에 대한 언급에 의해 풀려나면 날 수록, 사회는 믿을 수 잇는 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다른 가능성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기대의 확실성의 높은 수준의 개인화는 인물에 대한 적확하고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만일 모든 기대가 이런 방식으로 지지될 필요가 있다면, 요구 조건은 빠르게 실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인격적 기대의 발전 역시, 예를 들면 역할과 관련해서, 다중적 역할을 조율할 수 있는 정확한 행동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혹은 심지어 근본적 가치를 향한 태도의 수용성과 관련해서 가능하게 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행위 기대의 개인화는, 단지 다수의 동일시와 기대 유지 수준을 분리하는 맥락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마치 역으로 가치/프로그램/역할/인물에 따라 이런 차이화의 형식이, 단지 다른 누구도 아닌 특정한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대들을 추려내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수준들을 떼어 냄으로써, 그런 배치는 문제가 되는 행동과 그것의 도덕적 가치 평가 사이의 단순한 구별을 전복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동일한 도덕성의 가능성에 대한 결과는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상호침투의 높은 수준에서의 개인화는 또한 사회 시스템의 시스템-내부적 연결을 느슨하게 하는 것으로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사회의 특징에 필수적인 것은 아닌 반면[27], 이전 사회에서 그것은 일상 생활에 대한 거대한 총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중요성과 연결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근대사회는 기능적 시스템의 생활 관련성에서 거대한 증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부터 참여의 낮은 수준을 결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이 사회적 기능 (노동 분업)에 대한 (ⅰ) 낮은 개입과 함께 자신의 기여에 (ⅱ)높은 의존성과 (ⅲ)높은 특수화는, 기대되지 않은 축적을 통해 (ⅳ)효과의 발생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치, 경제 교육의 수용성을 심각하게 테스트하는 사회 운동에 대해,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집합적 현상을 놀랍게 나타나는 그리고는 부드럽게 다시 사라져 버리는 유행. 더 간결하게 정식화 하자면, 사회적 연결의 완화와 통제 완화는, 참여의 축적과 분해의 다수 우발적 과정을 이끈다. 개인으 더욱 더 그들의 사회적 조정에 개입되고, 그러나 결과로 또한 더욱 일탈하거나 덜 신뢰하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강하지만 빠르게 분해되는 연결은, 사회적 시스템이 이 배치에 대응하는 형식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건의 상태는 17세기부터 관찰되었다. 그 때는 그것은 매우 넓은 의미에서 ‘유행’으로 언급이 되었다.[28] 오늘날에는 ‘유행’이라는 개념은 계획된 과도적 현상 그리고 일시적인 것에 대한 특별한 설득력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유행은 충동적 힘을 행사한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그것은 그것에 맞설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29] 집합적 연결의 파동은 훨씬 더 근본적이고 문제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참여 능력을 흡수하고, 사회 시스템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그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그것의 등장은 통제도리 수 없고, 어떤 복잡한 정보 과정에 의해 수반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의 요구조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세가지 핵심 국면들, 조직을 향한 요구의 이동, 기대의 식별을 위한 수준의 차이화, 그리고 집합적이지만 단지 일시적인 연결은 높은 수준의 개인화가 사회에 미치는 효과를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과 환경이 근대사회에 발생했고, 그것이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구별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들의 중요성과 그것들이 진화에 대한 근대사회의 기회에 영향을 미친 정도는 다른 문제다. 아마도 근대 개인주의의 지배적 시맨틱은, 이런 관점에서 그 효과들을 과대 평가하고 사회를 과도하게 관찰하게 될 것이다. 단지 정교한 사회 이론만이 이런 일방성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세한 연구 대상과 마주한 불확실성이 그러나 다시금, 그런 이론의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바로 보여준다.
ⅩⅢ.
우리의 탐구는 개인/개인성/개인주의라는 주제에 대한 특별한 사회학적 관심에서 출발했고, 이런 이유로,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이론을 위한 전망을 평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적인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개인’ 자체의 개념에서의 변화에 정확하게 조응하는 완화, 추상, 그리고 분해를 향한 발전을 수행했다. 17세기 초반에는, 행위의 관찰자가 이 행위의 목적으로부터 쉽게 읽어낼 수 없는 동기의 문제가 이미, 사회의 궁극적 ‘요소’로서 개인의 자연적 특성에 기반해 사회에 대해 자연적 설명을 하려는 시도가 폭발했다. 잠시 동안, 개인이 그들을 함께 추동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시급한 동기와 이익의 계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하면서, 계약 이론에 의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18세기에, 이런 시도 역시 거의 폐기되었다. 남은 것은, 예를 들면 자유라는 형식 안에서, 인간 개인성이 사회가 인정하거나 비판해야 할 것에 따르는 가치라는 관념이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자기-결정과 자기-실현을 개인’을 위해 가능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의 실패는 비판의 원인이 되고, 이 비판은 필요하다면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사회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고, 사회는 조응하는 대응에 관한 이런 종류의 단일한 충동에 반응할 수 있기에는 훨씬 더욱 복잡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관념 역시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사회적 시맨틱의 수준에서 자연, 계약, 가치, 이런 연속은, 사회구조적 진화가 강제로 ‘개인’의 포섭에서 배제로 이동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자연, 계약, 가치’의 연속은, 시맨틱이 사회구조적 진화에 어떻게 양보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연속에서 마지막 결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계약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보다 ‘개인’의 자기-결정된 자율성을 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법적 시스템 안에서 제한된 범위에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그 우발성을 제거하는 행위 모델을 일반화한다. 가치 관념은 단호하고, 호칭적으로 ‘개인’을 인식하고, 실제적 조건을 한탄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구조와 동학이, 단순히 인간 존재의 측정에 따라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것보다 ���전히 다른 문제들 (혹은 더 주의 깊게 다루자면, 많은 다른 문제들)을 발생한다는 것을 거의 간과할 수 없다. 개인적 인물에 대한 사회 시스템의 관계는 다른 것 중에서 그 환경에 대한 시스템의 문제이자, 다른 것 중에서 하나의 에콜로지적 문제다. 19세기 사회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사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시장 이론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는 가장 적절한 사람들과 사회 시스템을 선택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주장했다고 보이는 진화 이론에 의해,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에콜로지적 문제를 억압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사회 이론은 여전히 부족하다.
‘개인’의 자율성 시맨틱을, 사회의 시맨틱만큼 심각하게 다루거나, 생명 그리고 심적 시스템의 자기언급적 닫힘과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한 이론들을 사용해서 과학적으로 재구성했다면, 사회 이론이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 가시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개인’에 대한 이 근대 개념은, 이 개념을 통해서 스스로를 엄밀하게 할 것이 요청될 수 있는 사회에 속한 것이다.
[1] 이어지는 시기에 풍부한 의미론적 변형들의 단 하나의 사례를 주는 것은, “Somas, antes que otra cosa, un sistema nato (sie!) de preferencias y desdenes”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선호와 싫어함의 타고난 시스템이다) José Ortega y Gasset, Estudios sobre el amor, 1939, Madrid 1973, S. 127에서 인용.
[2] Niklas Luhmann, Subjektive Rechte: Zum Umbau des Rechtsbewußtseins für die moderne Gesellschaft, i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d. 2, Frankfurt 1981, S. 45-104.
[3] 이해의 개념과 관계되어 있는, Hobbes의 관한 논쟁에 대해서는 Bernard Gert, Hobbes and Psychological Egoism, Journal of the History of ldeas 28 (1967), S. 503-520. 특히 Shaftesbury의 대단히 성공적인 논쟁은, 자기-언급의 해석에 끌어내는 이기주의/이타주의의 도식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개념 발전에서 불명료함의 전형이다.
[4] J. A. W. Gunn, “Interest Will Not Lie”: A Seventeenth Century Political Maxime,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29 (1968), S.551-564. 또한 Politics and the Public Interest in the Seventeenth Century, London 1969; Felix Raab, The English Face of Machiavelli: A Changing Interpretation, 1500-1700, London 1965, S. 157 ff.
[5] 이에 대한 언급으로는, Niklas Luhmann, Liebe als Passion: Zur Codierung von Intimität, Frankfurt 1982, S. 79, 83 ff., 95 ff.
[6] Annibale Romei, Discorsi, Ferrara 1586, S. 25 ff.; Virgilio Malvezzi, Ritratto del Privato politico christiano, Opere del Marchese Malvezzi, Mailand 1635, S. 92에서 인용.
[7] Robert Spaemann, Reflexion und Spontaneität: Studien über Fénelon, Stuttgart 1963, S. 117 f.
[8] 중농주의적 맥락에 대해서는, Paul-Pierre Le Mercier de La Rivière, De l'ordre naturel et essentiel des sociétés politiques, London, Paris 1767, Paris 1910 신판, S. 8 ff에서 인용.
[9] 이에 대한 언급은 Niklas Luhmann, Frühneuzeitliche Anthropologie, i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d. 1, S. 162-234, insb. S. 178f.
[10] 이런 경향에 대해, 어느 정도 과장되었지만 Albert O. Hirschman, Leidenschaften und Interessen: Politische Begründungen des Kapitalismus vor seinem Sieg, Frankfurt 1981.
[11] Abbé Pluquet, De la sociabilité, Yverdon 1770, Bd. 1, S. 126 ff. 또한 Paul-Henri Thiry d'Holbach, Système de Ia Nature ou des lois du monde physique et du monde moral, Buch 1, Kap. XV, Paris 1821에서 인용, Hildesheim 1966 재출판, S. 374 f.
[12] 이런 주장은, 더 이상 원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동기의 평범성과 진부함으로 이어지는 행위에 대한 인간학적으로 세속화된 비판의 맥락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La Bruyère, Abbé de Villiers, Abbé de Bellegarde u. a.).
[13] Alfred Schier, Die Liebe in der Frühromantik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Romans, Marburg 1913; Paul Kluckhohn, Die Auffassung der Liebe in der Literatur des 18. Jahrhunderts und in der deutschen Romantik (1922); 3. Aufl. Tübingen 1966.
[14] Ralph Turner, The Real Seif: From Institution to Impuls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1 (1976), S. 989-1016은 과거 수십년의 발전을, 문제가 되는 ‘개인’의 면면들에 대한 제도적 규정에서 충동적 규정으로의 이동으로 해석한다.
[15] 개인이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요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대칭적으로 뒤집은 것이지만, 환경과의 관계를 재-대칭화하는 것은 아니다.
[16] 이 점을 주의하는 이론은 그래서 물론 더 많은 구별을 만들어 내도록 자극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소외론으로 이론의 사회적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선택은 3계 관찰 수준, 즉 관찰자의 자기-관찰에 대한 관찰 수준에 놓여 있다.
[17] Yves Barel, Le paradoxe et Je système: Essai sur le fantastique social, a. a. 0.
[18] 개인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의 드문 한 가지 예는, 이것을 없애서는 안 될 요구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개인적 정체서의 각각의 모델은, 이것이 긍정적 관계이건 부정적 관계이건, 집합적 정체성과 권위의 분출적 개념과의 관계에 의해 특징 규정할 수 있다” Burkart Holzner/Roland Robertson, Identity and Authority: A Problem Analysis of Processes of Identification and Authorization, in: Roland Robertson/Burkart Holzner (Hrsg.), ldentity and Authority: Explorations in the Theory of Society, Oxford 1980, S. 1-39 (26).
[19] 정보 이론은 ‘형태발생적’ 분석 개념에서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복합성의 개념을 채용한다. 이 개념은, 어떻게 구조화된 시스템의 발전이 이에도 불구하고, 즉 비정보에 대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노이즈 원리로부터 질서’를 통해서 발생할 수 있는지를 포착하고자 시도한다. 이에 대해서는 Henri Atlan, L'organisation biologique et la théorie d'information, Paris 1972; ders., Entre le cristal et la fumée: Essai sur l'organisation du vivant, Paris 1979; Jean Pierre Dupuy, L'Autonomie de l'homme et la stabilité de la société, Economie appliquée 30 (1977), S. 85-111; Giovan Francesco Lanzara/Francesco Pardi, L'interpretatione della complessità: Metodo sistemico e scienze sociali, Neapel 1980.
[20] 이것은 특히 ‘신경증’에 대해서 진행된다. 그것은 수요에 의해서, 즉 누군가가 적절하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관계를 기대한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Karen Horney, Tue Neurotic Personality of Our Time, New York 1937; Snell Putney/Gail j. Putney, Tue Adjusted American: Normal Neuroses in the Individual and Society, New York 1964
[21] Talcott Parsons, The System of Modern Societies, Englewood Cliffs, N.J. 1971, S. 92 ff.; Niklas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d. 1, Frankfurt 1980, S. 31 f. u.ö.; ders., Politische Theorie im Wohlfahrtsstaat, München 1981, S. 25 ff.; Rudolf Stichweh, Inklusion in Funktionssysteme der modernen Gesellschaft, in: Renate Mayntz et al., Differenzierung und Verselbstäridigung: Zur Entwicklung gesellschaftlicher Teilsysteme, Frankfurt 1988, S. 261-293; ferner oben S. 169ff.
[22] Des hommes tels qu'ils sont et doivent être: Ouvrage de sentiment, London-Paris 1758, S. 166 ff.
[23] Niklas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Bd. 1, Frankfurt 1980, S. 48 ff.
[24] oben S. 41ff., 239.
[25] 이런 요구 조건 뒤에 있는 도덕적 압력은 비판적 목소리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용어에서 구성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Philip Rieff, 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 Uses of Faith After Freud, New York 1966; Sigmund Koch, The Image of Man Implicit in Encounter Group Theory, Journal of Humanistic Psychology 11 (1971), S. 109-128. ‘개인’이 될 것에 대한 요구가 개인에 대해 맞서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특히 여기서 충격적이다. 이 모든 것은 더 많은 사회학적 분석을 요구할 것이다.
[26] 이에 대한 확장된 연구는 Dieter Grunow/Friedhart Hegner/Franz-Xaver Kaufmann, Bürger und Ver waltung, 4 Bde., Frankfurt 1978 (insb. Bd. 2 - Friedhart Hegner, Das bürokratische Dilemma - S. 130 ff.).
[27] John F. Embree, Thailand - A Loosely Structured Social System, American Anthropologist 52 (1950), S. 181-193; Hans-Dieter Evers (Hrsg.), Loosely Structured Social Systems: Thailand in Comparative Perspective, New Haven 1969.
[28] “ce qui concerne le goût, le vivre, la santé et la conscience” (취향, 살림, 건강 그리고 의식에 관한 것)을 언급하면서, Jean de La Bruyère, Les caracteres ou les mœurs de ce siècle, Œuvres complèes (éd. de la Pléiade), Paris 1951, S. 59-478 (386)에서 쓰고 있다. La Bruyère는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 대결의 예를 사용해서(p. 391) 면제된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시민에 대한 해방/참여/폐쇄와 같은 복합성에 대해, 그런 유행의 순환의 다양성을 그리기 위해서 조깅이나 초월 명상을 언급할 수 있다.
[29] 이것 역시 오래된 논의다. Jean Baptiste Morvan de Bellegarde, Reflexions sur le ridicule et sur les moyens de l'éviter. Aufl. Paris 1699, S.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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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 라방때 광수 편 들어준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솔로 18기 전략 컨설턴트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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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라고 느끼는 감정이 사랑하는 게 아닐까 사람은 왜 사랑을 하고 살아야 하고 참 간사한 동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들 .. 우리는 사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걸 해내는 거야 사랑하기 때문에 밤이 깊어도 보고 싶다며 달려 가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헤어질 것처럼 싸우는 거고 모든 문장 앞에 사랑하기 때문에가 있다면 가능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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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로맨스 웹툰
완결 로맨스 웹툰이 원작이다. 완결 로맨스 웹툰 바로가기: https://bit.ly/3T3N4LL 한서진(현빈 분)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강태성(전인화 역)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또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운명의 커플이기도 하다. 여기에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를 통해 청춘의 사랑과 우정을 리얼하게 그려낸 권혁수 감독의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영화 속 극 중 태성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극복할 수도 가질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은 보는 이들까지 가슴 뭉클해지게 한다. [펌] Canon EOS 400D 캐논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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