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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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폰트리에의 영화 <살인마 잭의 집>의 잭은 살인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실패하여 전복된다.
주인공 잭은 살인을 하여 시체로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데,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맞나?) 살인이 그에게 '행복'의 행위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은 진리의 범주가 아니라 그저 존재의 범주이고, 그렇기때문에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모순적이다 72p
행복은 이교적범주이고 이교도들에게 인생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영원히 잘 살았습니다. 라는 공식은 이교도의 기독교적 버전이다) ----요컨대 행복은 쾌락 의 범주이며, 행복을 침해하는 것은 쾌락 원칙 너머에 대한 집착이다 73p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을 현대적이고 미국적 삶... 달라이 라마의 행복의 복음적 모순 vs 잭은 살인을 하며 행복한가? 그는 예술을 위해 살인을 한 것인가? 내가 봤을 땐 아닌데? 첫번째 여자를 살인할 때 그는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는다)
라캉적 행복
행복의 의미를 엄격하게 준수할 때, 행복의 대가는 주체가 자기의 욕망의 모순에 갖혀 있는 것이다. 즉 행복할 수 없다는 얘기.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공식적으로' 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게 되는 것. 이렇듯 행복은 본래 위선적이다.
= 달라이 라마의 행복 전파 등이 위선적인 이유
그렇다면 잭이 살인을 하며 구축하고자 했던 예술 세계가 실패한 것 등이 설명이된다. 그는 공식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었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경찰이 올 때 자신의 범행을 들키고자 문을 열었다
자신의 실패를 예정함.
구글독스
영화속에 나오는 단테의 신곡
왜 단테의 신곡?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도 잭을 순수 “악”으로 규정할 만한 근거는?
Badley, Linda (2022-02-14T22:58:59). Lars von Trier Beyond Depress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잭의 예술관과 나치의 미학과의 관계성? ….? 잘 모르겠다. “우리”를 제외한 타자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걸까?
In The House That Jack Built, which might be described as a transgressive performance of self-parody, the eponymous protagonist’s argument that murder is art is supported by a stream of references to the Nazi aesthetic and the Holocaust that had been raised by those same comments and the Wagnerian sublimity of Melancholia itself. Indeed Jack is in many ways a retrospective, blurring distinctions between the nihilistic and misogynistic character many believe von Trier to be and the serial killer that the film sends to hell, to the extent that watching it without factoring in the writer-director would mean missing the point.
추가적으로 살펴볼 것
상위 잭의 예술관과 나치의 미학과의 관계성과 연결지어볼 수 있는 사드의 문학/쾌락주의
사드 후작
사드의 소설은 무려 230년 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봐도 충격적인 전개가 굉장히 많은데 실제로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면서 선인의 지혜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유물론, 무신론, 아나키즘적 요소도 있어 20세기 들어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예술적, 학술적 평가를 받아 지금에 이른다. 이 외에도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묘사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그 예가 <쥬스틴>으로 이 소설에서는 선인들은 겁탈당하고 모욕 당하지만 조금만 악에 치우쳤던 쥬스틴의 언니는 오히려 인생이 활짝 펴서 선행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문화 이론이나 문학 창작을 배우고 있다면 그의 이름은 꼭 한 번씩은 만나게 된다.
가장 정상적인 작품으로 <사제와 죽어가는 이의 대화>가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이자 습작에 가까운 작품인데 내용도 엄하지 않으면서 사드의 사상이 잘 드러났다.
"인간은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인간들이 모두 죽더라도 세상은 아무런 눈물도 흘리지 않고 관심도 없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나 사후세계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울러 도덕이나 윤리 또한 모두 거짓말이다. 그런 것들은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이자 거짓말이다. 지배층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살지 않는다.[12] 그들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그것은 자신들만 쾌락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동은 바로 쾌락 뿐이다."
악연에서 / 사드
지젝 / 죽은 신을 위하여
지젝 역시도 무신론적 태도.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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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nejlevnejsi-knihy.cz/kniha/parasitic-mind_25465481.html?hgtid=acc3e461-ae64-4d83-90d0-d892fa28a310 )
<서문>
유행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치명적인 전염병이 이 나라 저 나라로 급속히 퍼지면서 인류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중세의 흑사병, 스페인 독감, 에이즈(AIDS), 혹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 위기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현재 그 못지않게 치명적인 전염병,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파괴하는 집단적 질병을 앓고 있다. 생물학적 병원체가 원인인 다른 유행병과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병의 주범은 대학가에 퍼진 나쁜 사상들이다. 이런 사상은 이성과 자유, 개인 존엄성의 체계를 갉아먹는다. (p8)
<제1장 레바논 내전에서 사상의 전투까지>
내 인생을 추진하는 이상(理想)은 자유와 진리이며, 이들 이상에 대한 공격은 곧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적 위협을 의미한다. 나 자신 역시 두 번의 전쟁으로 말미암은 독특한 인생 궤적의 산물이다. 평생 한 번도 전쟁의 공포를 겪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인생에서 두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겪었다. 하나는 레바논 내전이고, 두 번째는 서구 세계 특히 북미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이성과 과학, 논리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레바논 내전은 일찍이 내게 부족주의와 종교적 도그마의 추악함을 가르쳐줬다. 집단이 개성보다 더 중요한 생태계에서 성장한 나는 이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감을 갖게 됐다. (p22)
한 사람의 인생이 반복되는 인생 각본에 따라 결정되는지, 아니면 어떤 이상을 반복해 주장함으로써 결정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깊은(그리고 어려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직면한 여러 가지 현실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현실은 어떤 대본이나 자신이 가치를 둔 이상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치료의 한 가지 이점은 환자들에게 이런 패턴을 정확히 짚어준다는 것이다. 내 경우, 인생은 자유와 진리라는 두 가지 이상에 의해 형성됐다. 이 두 가지 이상의 추구는 부모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 각인된 개인적 성격이 발현된 것이다. (p32)
자유가 없이는 두 번째 이상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 두 번째 나의 이상은 진리의 추구와 수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라는 성경 구절처럼, 진리와 자유는 서로 양방향성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오직 자유로울 때만 진리를 밝히고자 열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리가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래왔다. 내가 자랄 때 어머니는 거듭 경고했다. 이 세상은 내 병적인 솔직함과 정직성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극도로 엄격한 나의 지적, 윤리적, 도덕적, 순수성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흑과 백의 이분법적인(어머니가 이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곳이 아니라 수많은 회색의 다양한 명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내게 간곡히 일렀다.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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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과학(포스트모더니즘)과 과학부정주의(생물학 혐오)를 퍼뜨리는 데서 더 나아가, 대학들은 끔찍하게 나쁜 사상들과 운동을 퍼뜨리는 최초 감염자 역할을 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지식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믿을 수 없다. 정상인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없다"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이런 다수의 나쁜 사상들이 확산되면서 학계의 보상 체계가 뒤집혔다. 집단적 사고방식은 보상받는다. 혁신적 사상가들에게는 정조대가 채워진다. '자기 자리만 지키는' 학자는 보상받는다. 솔직하게 발설하는 학자는 처벌받는다. 고도의 전문화는 보상받는다. 폭넓은 종합적 사고는 경멸받는다. 지적 용기에 해당하는 모든 자질은 문젯거리로 여겨진다. 진보주의의 좌익적 교리를 고수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보상받는다. 결과의 평등을 신봉하는 자에게는 최고의 행정직을 준다. 실력주의를 신봉하는 자에게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대학들이 뿌려놓는 이런 기생충 같은 사상의 병원체들은 마침내 우리 사회의 모든 곳을 감염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p42-43)
이 책에서는 인간 상태에 잠재적으로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또 다른 병원체들, 즉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병원체들에 대해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병원체들은 올바르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능력에 기생해 이를 망가뜨리는 사고 유형, 신념 체계, 태도, 사고방식들로 이뤄졌다. 일단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가 우리 신경회로를 장악하면, 감염자는 이성(理性)과 논리, 과학을 사용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잃는다. 그 대신 현실이나 상식과 진리로부터 완강하고 오만하게 멀어진다고 정의하면 딱 맞을, 무한한 광기의 심연에 빠진다. 기생충들은 신체의 여러 부분을 목표로 삼아 자리잡는데, 그 중에서 뇌 기생충학은 숙주의 행동을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는 뇌 기생충들의 강(綱)을 다루는 학문이다. (p44)
내가 다루는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중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급진 페미니즘, 사회구성주의가 있는데, 셋 다 주로 감염된 생태계 안, 바로 대학들 안에서 번성하고 있다. 마음의 바이러스마다 각자 한 계통씩 광기를 빚어내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현실과 상식을 전면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급진 페미니즘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생물학에 기반한 성별 차이를 비웃으며, 사회구성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생물학적 청사진은 전혀 없이 완전한 공백에서 시작된다고 상정한다).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들은 일반적으로 내가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 즉 중력이 당기는 힘만큼이나 명백한 근본적 진실과 현실을 감염자 개개인이 거부하게끔 다양한 사고장애(思考障礙) 증상을 일으킨다. (p45-46)
48 (49)
<제2장 생각 대 느낌, 진실 대 상처받은 느낌>
"기베트는 우리 모두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우주가 창조되었느냐 아니냐, 생명이 설계된 것이냐 아니냐, 도덕이 자연적인 것이냐 아니냐, 예수가 부활한 것이냐 아니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세상에 오직 두 가지 이론밖에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반박을 시작하겠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 셔머의 이 뛰어난 우스갯소리는 중요한 인식론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추구가 항상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을 이진법적 현실로 투영하고 싶어 하는 연구원이 많은 경향에 나는 '인식론적 이분법 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적 실험이 용이하게끔, 다루기 쉽고 간단한 세계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것은, 선천이냐 후천이냐 하는 논의가 그렇듯, 이분법 자체가 잘못인 경우도 때로 있다는 점이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Matt Ridley)에 의하면 "선천이나 후천이냐의 문제는 끝났다" 우리 자신의 성품 중 상당 부분은 유전자와 환경이 도저히 분리가 안 될 만큼 뒤섞인 혼합물에서 나왔다. 더욱이 사회화(양육 즉 후천)에 공통적 패턴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생물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선천) 때문이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욕망은 생각 대 감정의 이분법에서도 발견되며, 이로 인해 잘못된 양자택일의 사고방식이 생긴다. 우리는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동물이다. 문제는 언제 인지 능력(생각)을 작동하고 언제 정서 능력(느낌)을 작동하는지를 아는 거다. (p55)
문제는 지성이 담당해야 할 영역을 감정이 차지했을 때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학들에 만연한 역병이다. 한 때 지적 발달의 중심지였던 대학들이 이제는 감정적으로 연약한 이들의 도피처가 됐다. 대학을 움직이는 좌우명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 얼러주기'가 됐다. (p59)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을 이끄는 기본적인 윤리적 지향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의무론적 윤리와 결과주의적 윤리가 그것이다. 전자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 윤리 규범을 다루며(거짓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됐다) 후자는 어떤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려면 때로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이 두 가지 체계를 모두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당신의 아내가 '나 뚱뚱해 보여?' 하고 물으면 당신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꺼리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린이를 성적으로 대하는 건 도덕적으로 그른 일로 간주한다. 진리 추구에 관해, 의무론적 관점에서는 진리를 훼손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과주의적 관점에서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등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진리가 때로는 변경되고 조작되거나 억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진영에서 보는 광기의 상당수는 바로 진리를 결과주의적으로 다룬 결과다. (p62)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한 가지 문제는, 이 결과주의자들이 단지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것뿐 아니라 감정에야말로 권한이 있다고 보고, 감정으로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p63)
64 76
편견에 가득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고서야 그런 세속주의와 근대성, 진정한 리버럴리즘의 상징이 불편할 리가 없다. 물론 나는 지금 비꼬고 있다.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피할 방법이라곤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각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지배적인 감각이다. 인간의 고도로 전문화된 시각 체계는 얼굴 생김새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비언어적인 시각적 신호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일단 한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됨이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검정 장옷 뒤에 가려지면, 제정신인 사람 대부분은 그런 현실에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미덕 과시자들은 불편한 시각적 자극에 대해 극히 합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놀리고 조소하고 비난한다. (p77)
명확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정과 이성, 유머와 진지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며, 살아가면서 언제 감정 체계를 작동하고 언제인지 체계를 작동해야 하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사상의 병원체에 잠식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 병원체들은 급속히 퍼지며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 (p78)
<제3장 자유 현대 사회를 이루는 타협 불가한 필수 요소들>
진정으로 자유롭고 근대적인 사회가 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하버드 대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서구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로 '여섯 가지 컬러 앱(Killer Apps)', 즉 경쟁, 과학혁명, 재산권, 현대 의학, 소비자사회, 근무 윤리를 제시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요소들을 보다 더 간략히 압축해서 설명하려 한다. 나는 어떤 사상에 대해 토론할 자유(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다른 사상들을 검증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에 헌신(과학적 방법)하는 태도와 결합한 결과 서구 문명이 위대해졌다고 상정한다. (p81)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내 노력을 지지한다 말할 수 있어 기쁘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사드 박사님, 제 이름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선생님과 같은 견해를 가진 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요"라고 말한다. 어째서 자유로운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신념을 말하기 두려워하는가?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그 '진보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p86)
2005년 루슈디가 쓴 기사의 두 구절은 표현의 자유를 간결하게 옹호한다. '사람들이 절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을, 혹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게끔 자신들을 보호할 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할 권리가 있는 ���유 사회를 건설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나 더 있다. '종교적 신념 체계든 세속적 이념이든 어떤 사상 체계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어떤 사상들은 비판이나 풍자, 조롱, 경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사상의 자유는 불가능해진다." (p90)
"나는 표현의 자유를 믿어요. 하지만…"이라고 생각하는 군중은 이미 표현의 자유가 의미하는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는 대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나온다. 남들이 기분 상하지 않을 권리를 표현의 자유보다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표현의 자유는 정확히 말해 가장 불쾌하고 공격적이며 역겨운 발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따금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건 진정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며 치러야 할 대가다. 당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배포 있게 넘어가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무리 절대주의적 표현의 자유라 하더라도 멀쩡한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고 소리친다든지, 서로 폭력을 부추긴다든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비방하는 담론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일반적 조건은 따른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의 적들은 이런 상식적인 제한들을 왜곡해서 자기들 목적에 부합하게 만들려한다. (p93-94)
오바마는 유엔 회의에서 "미래는 이슬람의 선지자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님. 미래는 모든 선지자와 사상, 종교, 이념을 비판하고 놀리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p95)
여기에서 배울 점은 자유 사회는 풍자의 힘으로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 사회에서는 모든 믿음과 이념들이 공정하게 경기한다. 풍자의 한계를 정하는 순간, 그 사회는 더 이상 자유 사회가 아니다. (p99)
그러나 인간 지식이라는 만신전(萬神殿)에서 과학적 정보를 성문화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퀘벡 주 고위공무원인 파트릭 보셴(Patrick Beauchesne)은 최근 토착민의 지식을 과학적 지식에 대비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무모한 질문을 했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환경 평가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지식의 위계설'을 지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적인 인식론적 체계다. 과학은 '조상들의 지혜', '부족의 지식', '노인들의 방식'을 우위에 두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과학에는 드러난 진리라는 게 없다. 토착민 식으로 아는 방법이 따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바논 출신의 유대인이 아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자연계에 대한 모든 주장은 과학적 방법론의 증거 입각 분석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p103)
현대 사회의 진보적 만트라에 의하면 다른 인종과 문화 혹은 종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주장하는 건 칭송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추론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기타 악당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의 거장으로 고전적 리버럴리즘을 굳건히 옹호하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바로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지칭하기 위해 폴리로지즘(polylog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미제스는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과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차이도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은 개인의 생각하는 방식이 그의 사회적 계급에 따라 결정되며,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경우에는 인종이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미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이런 전제 조건의 비논리적인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폴리로지즘을 일관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단지 어떤 사상을 만들어낸 자가 올바른 계급, 올바른 나라 혹은 올바른 인종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사상이 옳다고 고집하려 든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미덕이 그들에게는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승인한 교리를 가진 자들 모두에게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라는 명칭을 기꺼이 부여한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계급의 적이나 사회의 배신자라고 폄하한다. 현재의 사회정의전사들도 유사한 이념적 사고를 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소"라고 말하는 대신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자, 백인 민족주의자, 신(新) 무신론자, 백인우월주의자, 알트라이트 등의 폄하하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진보적 정통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악하고 부도덕한 악마로 만든다. 미제스가 잘 알고 있었듯이, 폴리로지즘은 반과학적인 관념이다. "[미제스는 폴리로지즘을 '논리와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란'이라 그 성격을 밝히고 폴리로지즘이 '사회 현상과 인간 행동의 과학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폴리로지즘은 우리 문화와 문명 전체에 대한 저항'이라 지적하면서, 폴리로지즘의 보다 더 큰 의의에 대해 역설했다. 과학적 방법론은 우리 정체성과 무관하게 우리를 해방시켜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진보주의자가 본능적으로 경멸하는 분야인 진화심리학은 명확하게 반인종차별주의적이다. 외형적 차이 이면에서 본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과 무관하게 동일한 진화의 힘에서 탄생했음을 인지하는 까닭이다. 환경의 힘(혹은 문화의 힘)은 당연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논리 및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 효과는 어느 한 사람의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결정되는 요소들이 아니다. '흑인의 마음'이나 '백인의 마음' 혹은 '백인 남성이 아는 법'이나 '토착민들의 아는 법' 같은 건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며,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한다. (p106-8)
과거에는 여성들이 차별당했음을 인정했지만, 자료를 통해 남성과 일대일로 비교했을 때 여성들이 학계 여러 분야에서 남성들을 능가하고 있으므로 현재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짜 피해의식 서사를 부추기는 대신 성별 차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 강연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행사조직위원회에서는 나를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동조하는 척하면서 남성들이 더욱더 나은 조력자가 돼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에 헌신하고 현실을 고수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남성의 조력이 필요한 척 가장하는 건, 끔찍하리만큼 거들먹거리고 잘난 척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력우선주의 체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유아증의 한 형태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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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외교 정책, 재정 정책, 이민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실행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보편적 의료 제도는 존재하는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각기 이질적인 관점을 접한다면 대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큰 지적 다양성의 추구란 그저 이론적인 추상 개념 같은 게 아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생각의 자유는,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각기 다른 관점과 의견과 사실들의 경중을 따져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끔 교육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지적 다양성은 다윈식 경쟁 과정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돼 최고의 사상(우리는 이를 진화론적 인식론이라 부른다)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들은 척박한 이념적 순응밖에 남지 않은 반다윈주의적 구정물 웅덩이가 돼 버렸다. (p116)
나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거의 20년 전,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에 했던 매우 통렬한 지적을 인용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가 멸종되는 데는 한 세대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우리 자녀들에게 자유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 자녀들이 자유를 물려받을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를 위해 싸우느냐, 자유를 지키고 보호하고 수호하느냐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며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자유를 보호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제대로 가르쳐서 그 가르침과 함께 자유를 물려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과 저는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예전에 사람들이 자유로웠던 미국은 어땠는지 얘기해주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헤아릴 수 없이 지혜로운 이 말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새로이 마음을 다잡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우리를 비합리성에 빠뜨리고 이념적으로 순응하게 만들려 하는 좌파들의 사상 병원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p118)
<제4장 반과학, 반이성, 반자유적 운동>
"당신이 부조리를 믿게 한 사람은 당신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다."
볼테르 대학 캠퍼스의 사상의 병원체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경우, 거의 잠꼬대나 다름없이 모호하고 불가해한 산문(文)들을 만들어내면서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라고(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상정한다. 이 반과학적 헛소리는 '인종차별적' 서구 과학으로부터 '��민지화된 마음을 되찾아오라'라고 촉구하는 <과학은 필멸하리(Science Must Fall)>라는 단체까지 탄생시켰다. 사회구성주의는 인간 행동, 욕망, 기호(嗜好)의 대다수가 인간 본성이나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아닌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제시한다. 즉 성별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적으로 '성 역할'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러한 성 역할이 가부장제의 모호하고도 사악한 힘 때문에 생겼다고 확언한다. 트랜스젠더운동은 생물학적 성이나 '젠더'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유동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급진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투쟁은 모두 거짓으로 입증될 수 있는 과학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념에 최고의 가치를 두다 보면 과학적 사실의 부정이라는 피해는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p120-121)
그러나 아마도 현실의 족쇄에서 해방시킬 가장 뛰어난 도구는 '트랜스(trans)'라는 접두어일 것이다. 이 마법 같은 말은(자기 자신을 흑인이라고 생각했던 백인 여성 레이첼 돌러절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생물학적 성별이나 인종을 당신이 되고 싶은 아무 성별이나 인종으로 바꿔준다. 다행히도 실제 성별 위화감을 갖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 모습을 불가역적으로 형성해놓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자아정체성'을 현실과 어긋나게 하라고 부추긴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진실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이 급진 페미니스트와 사회구성주의자, 트랜스 운동가들 사이에 그토록 만연한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론적 해방자로, '나의 진실'을 기림으로써 우리를 객관적 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p123)
마침내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승리하려 시도하며, 대통령이 되면 9세 트랜스젠더 아동을 교육부 장관 자리에 지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망상 좀 받아준다고 해서 별 탈 없으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 전쟁이다. (p129)
아주드물지만 실재하는 진짜 성별 위화감 환자들을 폄하하려고 이런 풍자를 한 게 아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사생활 안에서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진보적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미덕 과시를 위한 사회 정의의 졸로 아이들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p140-141)
트랜스젠더 학생에게 맞춰주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닌가?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소수의 폭정이 드러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정한 내 정체성, 생물학적 사실과 충돌하는 내 정체성을 찬양하고 수용하라. 안 그러면 진보주의 감시자들의 분노를, 법적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상 처벌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p142)
인간은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이성 중에서 짝을 찾아 의미 있는 결합을 이루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ASI에 의하면 그런 원동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온정적 성차별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런 입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꼭 지성적인 진화심리학자까지도 필요 없다. 또한 여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남성은 누구든 사악한 성차별주의자가 된다는 데 주목하라. 최근 연구에 의하면 여성에게 인명 구조 응급 처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40년 동안 페미니스트의 세뇌와 마녀사냥이 남자들을 너무 잘 가르친 모양이다. '성차별주의자' 영웅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성차별주의자 안 하고 비겁한 방관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누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용감한 소방관과 제복을 입은 영웅적 군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조언해야 한다. 새로 부임한 보안관이 남성성에 대한 진보적 정의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심하고 비겁한 방관자 남성. 그런데 여기에는 굉장한 인지적 모순이 내재돼 있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일터에서 여성들의 협력자로서 기여하라는 설교를 듣는데, 만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온정적 성차별을 하는 게 돼 버린다. 모든 길은 성차별로 통한다. (p144-145)
이렇게 틀린 게 뻔한데 어떻게 공론가들은 그런 사상의 병원체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 전제주의 정권 하에서는 그 답이 간단하다. 전체주의 정권은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범죄로 취급한다. 서구에서는 이념 주입이 이보다 교묘하게 이뤄진다. 이념은 PC운동이라는 정신으로 달성되며, 대학 캠퍼스에 지적 다양성이 결핍됐을 때 가장 잘 집행된다. PC운동은 별대모벌에게 쏘이는 것과도 같다. 쏘인 거미는 좀비 같은 상태가 돼 별대모벌의 구덩이로 끌려간 후, 몸 속에서 부화한 별대모벌 새끼들에게 뜯어 먹힌다. PC운동도 이와 똑같이 섬뜩한 목표를 달성한다. 우리가 너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좀비 같은 상태로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사악한 사상이 우리를 서서히 갉아먹게 한다. (p152)
<제5장 캠퍼스의 광기: 사회정의전사들의 부상>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느낌이 진실을 이긴다. 경험적 진술은 더 이상 그 진실성 여부가 아닌, 잠재적으로 '편견적'일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된다. 편견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 진술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러야 한다. 느낌이 한 사람의 존재를 입증하는 원동력임을 고려하면, 항상 심기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 속하는 게 이익이 되는 사회에서는 '모욕 문화(Culture of offence)'가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피해의식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경쟁 충동이 일어난다. 탄압 올림픽 (피해자학 포커라고도 부른다)은 정체성 정치와 교차성("나는 퀴어에 비만인이며 무슬림이고 장애자이며 트랜스인 흑인 페미니스트다")을 이용, 기괴한 부조리극의 승리자를 가르기 위해 서로 피해의식을 겨루는 경기장이다. 나는 사회정의전사들이 일종의 집단적 뮌하우젠 증후군(동정심을 구하기 위해 병을 꾸며대는 정신 이상)을 보이는 거라고 설명한다. 그 기풍은 �� 마디로 '나는 피해자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p157)
오늘날 수많은 대학 졸업생에게는 토론할 능력이 없다. 반대 관점에 접해본 적도 없으며, 반대 관점은 곧잘 이단으로 몰려 항의나 신경질적인 발작에 부딪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 진화한 능력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반대 입장에 부딪혀봐야 한다. 무균성 안전 공간은 대학 캠퍼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트위터 설립자인 잭 도시(Jack Dorsey)를 내 유튜브 채널에 초청했다. 대화중에 나는 트위터가 플랫폼 상에서 사람들의 언어를 감시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건강한 인간은 잘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 관계의 추한 면모에 노출돼야 한다. 모든 상호 작용이 공손하고, 희망적이고, 풍요로울 것으로 예상되는, 멸균된 버블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보호할 수는 없다. 소량의 알레르겐에 어린아이들을 노출시키다가 점점 더 많은 알레르겐에 노출시켜서 인체가 특정 알레르겐에 대한 면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음식 알레르기 면역 요법처럼, 사람들도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건강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모든 경우의 인간 상호 작용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반대 의견을 다루기엔 너무 불안정하고, 과학적으로도 유효하지 않은 개념인 소위 '마이크로어그레션'에 마주해 피해의식을 가장하면서 태아처럼 웅크리는 젊은 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p161)
정말이지 그 목록은 끝이 없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범용 사전 고지를 제안한다. "실제 세상을 각자의 뇌를 사용해 헤쳐갈 때는 사전 고지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여러분이 성인으로서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명민함을 갖췄다는 추정 하에 진행됩니다. 삶 자체가 여러분의 사전 고지입니다." 사전 고지는 노출 요법의 기본 원칙에 정반대된다. 노출 요법이란 일반적 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공포증(가령 거미공포증 등), 공황장애, 강박신경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극복을 위해 잘 연구된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경우, 환자들은 증세를 촉발시키는 자극에 노출돼 공포와 두려움에 대처하는 전략을 배우게 된다. 사전 고지의 효과를 실험해 본 몇 안 되는 연구에 의하면, 사전 고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촉발자'들을 더 피하게 하고, 회복 탄력성을 키우지 못하게 하며', 과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사전 고지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줄여줄 수는 있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헤쳐가는 데 필요한 건강한 사고방식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p163-164)
오늘날에는 선호하는 집단 내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다(적어도 일부 분야에서는 그렇다). ��전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지적 풍요에 선행한다. 사회정의운동은 진실 탐구보다 우선한다. 오퍼레이션 리서치식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으로 대학이 목표하는 기능은 학생들과 교수들의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이며, 대학 예산 이외 다른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대학이 다중 객체 최적화 문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 혹은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과 사회 정의 운동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p166)
2010년 나는 대리인을 통한 뮌하우젠 증후군(MSbP, Munchausen Syndrome by Proxy)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논문을 한 의학 학술지에 실었다. 한 사람이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으로 질병을 꾸미는 일반적 뮌하우젠 증후군과 달리, MSbP는 자기가 돌보는 어린 아이(혹은 노인이나 애완동물도 해당된다)를 해쳐서 피해자를 더 아프게 만듦으로써 보호자가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 하는 경우다.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여성(66.2%)인데, MSbP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여성이다(97.6%). 이 두 가지 형태의 뮌하우젠 이상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가짜 피해의식 사고방식을 잘 포착해줄 새로운 질병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집단 뮌하우젠'이 바로 그것이다. 병을 꾸며대거나 짐짓 다치는 대신, 집단 뮌하우젠 환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피해의식 상태를 알림으로써(타인의 피해의식에 편승하는 경우에는 대리인에 의한 집단 뮌하우젠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다) 관심, 동정, 공감을 구한다. (p174)
모든 길은 편견으로 통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인데 흑인 여성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성적 인종 차별(sexual racism)이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맞다. 이런 용어가 실재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이고 흑인 여성에게 끌린다면, 당신은 흑인 여성들이 성적으로 탐닉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그들의 몸을 대상화하는 인종차별주의자 편견덩어리다. 어떤 피해자 집단을 이 방정식에 끼워 맞춰도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 모두는 제도적 인종 분리 정책이 편견을 낳는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려는 것조차 편견에 속한다. 즉 '문화 유용(流用, cultural appropriation)'이라는 편견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학의 항상성은 칼 포퍼가 말한 반증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모든 길이 편견으로 통하도록 보장한다(즉 그 어떤 데이터로도 피해의식 서사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다). (p177-178)
문화 유용이라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으면 다문화 사회와 다원 사회가 제공하는 풍부함을 제대로 경험하기 힘들다. (p180)
실증적으로 이런 강간 사건이 발견되지 않자, 이 논문은 (다음 부분 읽으려면 우선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얼마나 인간으로 보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이스라엘인은 팔레스타인인을 너무 증오한 나머지 팔레스타인 여자는 강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간 사건이 발견되든 발견되지 않든 결론은 정해졌다. 이스라엘인은 악마다. 모든 길은 채찍질 고행과 자기 혐오로 통한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의 품질 보증 마크다. 가짜 분노를 파는 이들은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뿐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친절을 이슬람 혐오��� 한 형태로 이해한다. 아니사 로하니 (Anisa Rawhani)는 퀸즈 대학(Queen's University)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18일 동안 히잡을 쓰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리라는 게 분명 이 실험의 가정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고 공손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이 피해자학 서사를 살려내기 위해, 그녀는 눈에 띄는 관용과 친절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을 감추려 보인 과잉 행동의 한 수단이라고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불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모든 길은 이슬람 혐오로 통한다. 친절하고 관용적인 것은 대학 캠퍼스 생태계에서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다. (p182-183)
무한의 관용이라는 기풍을 예로 들어보자. 위대한 철학자 칼 포퍼는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아마도 가장 훌륭한 입장을 제시했다. "이보다 덜 알려진 것은 관용의 역설이다. 무한한 관용은 결국 관용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무한히 관용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관용하는 사회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공격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관용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며 관용 역시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관용적 철학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무관용에 맞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공론을 통해 무관용을 점검하는 한, 억압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관용을 물리적으로라도 억누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런 무관용자들이 우리와 합리적인 수준에서 논의할 수 없다는 게 판명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모든 논의를 거부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종자들이 현혹될까 싶어 합리적인 논의를 듣지 못하게 하거나, 논의에 대한 응답으로 주먹이나 총기를 쓰라고 가르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무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p189)
현재 미국 국경의 불법 이민자 위기와 관련해 미국의 진보들 사이에192===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정의전사들의 비합리적 입장을 정색하고 지지하려면 현실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는 이제 이성의 적이 됐다. (p193)
<제6장 이성으로부터 탈주: 타조 기생충 증후군>
과학이란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일이어야지 자기가 선호하는 정치 이념이나 개인적 신념을 방어하는 일이 돼서는 안 된다. (p197)
타조 기생충 증후군 물론 현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기만(혹은 자기 기만) 능력은 엄청나다. 사실 인간의 지능이 이렇게까지 진화한 이유 중 하나는 남들을 성공적으로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남들을 조종하려는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 기만이라는 성향을 진화시켜왔다. 자기 기만은 자신의 이중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거짓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그 거짓말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기반해서 볼 때, 자기 기만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해서 생기는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소 괴이한 자기 기만 형태가 있다.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불쾌한 정보를 억누르는 인간 능력에 주목하고 이를 '타조 방책'이라고 불렀다. 이 인간 타조 효과-타조가 달갑지 않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모래에 머리를 묻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서 나온 표현이다-는 금융 투자를 포함해 여러 가지 맥락에서 기록돼왔다. 몇 년 전 사상의 병원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거부하는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성에 대한 이 끔찍한 공격을 아래처럼 정의했다. "이 장애(障碍)는 중력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현실을 거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OPS를 앓는 사람은 자기들의 눈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양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유니콘 나라 같은 대안 현실을 건설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과학, 이성, 인과법칙, 증거 구성 임계점, 거의 무한하리만큼 막대한 양의 데이터, 데이터 분석 절차, 추리통계학, 과학적 방법론 고유의 인식론적 법칙, 상식 같은 건 모두 거부된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OPS 환자의 망상적 횡설수설은 환상에 불과한 연관성,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 기분 좋게 들리는 진보주의적 상투성에 뿌리를 둔다. 타조의 논리를 내놓는 사람들은 항상 숭고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p199-200)
왜 사람들은 그런 조잡한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걸까? 철학자 에이브러햄 카플란(Abraham Kaplan)은 그의 책 <탐구의 수행(The Conduct of Inquiry)> 에서 이렇게 썼다. '과학적 공동체에서 받는 사회적 압력에 덧붙여, 과학자 개인이 일하는 데 있어 매우 인간적인 습성이 하나 있다. 나는 이를 도구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표현한다. 어린 소년에게 망치를 주라. 그러면 그는 마주치는 모든 물건을 다 두들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학자가 자기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굵은 글씨는 원문에 따름] 인본주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과학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cien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갖고 있는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기 쉽다." 이것은 방법론적 고착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방법론적 고착이란 연구원들이 주어진 연구 과제에 적합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특정 데이터 자료나 특정 데이터 분석 절차를 고집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당신이 기후문제운동가라면, 모든 재난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유독한 남성성과 함께 가부장제를 비난해야 한다(기후 변화가 유독한 남성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다양성, 포용, 공정 컬트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모든 악은 다양성, 포용, 공정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만일 당신이 민주당원이라면, 모든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에서 비롯된다. (p202-203)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유롭고 현대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비종교적인 사회라면, 종교���월주의,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특히 유대인을 증오하는 등 종교적 소수인에 대한 무관용, 표현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 거부에 뿌리를 둔 문화와 종교적 유산을 가진 수많은 이민자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서술하는 건 '편견'에 의한 게 아니다. 이것은 태양의 존재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상호이타주의는 진화된 메커니즘이다(이를테면 이민자들이 자유롭고 현대적이면서 비종교적인 서구의 가치관을 채용함으로써 우리의 관대함에 화답할 것이라 기대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난민을 허용하는 것이 상호이타주의다). 자멸을 초래하는 공감은 진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문명적 차원에서 채찍질 고행을 하겠다고 현대 사회의 근간마저 양보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캐나다 이민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민 정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만 반복하는 사람들은 은밀한 형태의 타조 기생충 증후군 환자들이다. (p206-207)
"여성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을 때 남성의 배상액의 절반을 배상한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게 지급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3분의 1이다. 조로아스터교인에게 지급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15분의 1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가 사법 체계에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주의자들이 고수하는 기준이다. 남자들은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여성들은 될 수 없다.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흑인들은 될 수 없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양성애 백인 기독교 보수 남성은 입 다물고 진보적 무슬림 토착 유색 인종 성전환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백인 친구들, 분수를 알라고.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따라서 샤리아 법과 진보적 정체성 정치는 정확히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공격하는 것의 영향은 이슬람 세계와 서구 진보주의자들 세계에 서로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그 사고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유일한 차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지하지만 샤리아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매우 특별한 종류의 평등이다.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소설 <동물농장>에 조지 오웰이 남긴 불멸의 문장이 가장 잘 표현해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p218-219)
우리의 뇌는 환경 속에서 통계 규칙을 감지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이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해서 편견을 가졌다든지, 인종 차별을 한다든지, 증오심 가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은 인간 인지의 근본이다. 확률론적 현실을 바탕으로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는 행위는 곧 인간의 행위다. 프로파일링을 한다는 건 인간이라는 의미다. OPS에 감염된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대신 '현실은 인종차별적이다'라는 진보주의의 신조를 고수하고 싶은 마음에 프로파일링하기를 거부한다. 프로파일링을 하는 건 차별 행위이기 때문이다(이 어휘가 갖는 편견적 의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 코미디언 에반 세이엣 (Evan Sayet)이 무차별의 컬트(cult of indiscriminateness)라 일컬은 바로 그 광신적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2011년 우리 가족이 캘리포니아 남부로 여행했을 때, 몬트리올 공항에서 보다 엄밀한 보안 점검을 한다며 당시 두 살이었던 내 딸을 무작위로 지목했던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보안 등급 상향 조정 때 노년의 수녀들이 파���스탄, 예멘, 시리아에서 무리 지어 여행 온 젊은 남성들과 똑같은 확률로 정밀 조사를 받는 까닭이다. 유니콘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증오심으로 가득한 편견덩어리다. OPS는 인간 마음의 끔찍한 질병이다. (p222)
<제7장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는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
자유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시민의 의무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몇 가지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덫에 걸려 굴복해버리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뇌를 쓰는 데 매우 인색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너무 게을러서 주어진 문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고, 그 대신 되도록이면 머리를 안 쓰면서 자기 생각과 같은 여론을 형성하는 편을 좋아한다. 두 번째로, 정보를 이루는 데이터의 정확성은 제각기 다 다르다. 세 번째, 일단 한 개인이 자기 입장을 결정하고 나면, 이에 반하는 증거를 고려하도록 만들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두 명의 다른 공동 저자와 저술한 책에서, 인지부조화 이론의 선구자인 레온 페스팅거는 무려 60년 전에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켰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꾸기 힘들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돌아설 것이다. 사실이나 숫자를 제시하면 그는 출처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논리로 호소하면, 그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특히 그 사람이 자기 믿음에 투자라도 한 경우에는 얼마나 더 힘든지 경험해보았다. 아무리 통렬히 공격해도 믿음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기발하게 변호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략은 그저 신념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그가 그 믿음에 헌신하고, 그로 인해 그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의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확실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됐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은 대개의 경우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이전 보다도 더 자기 믿음이 진실되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남들을 납득시키고 남의 생각을 자기 관점대로 바꾸려는 열정마저 새로이 보일 수 있다." (p225-226)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는 무엇보다 통설을 흔들고, 그래서 전면적인 거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을 수호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자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적인 편향이나 사견(이견, 의견)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이렇게 언급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 게 아니다.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그 과학적 진리에 익숙해짐으로써 승리한다." 동물학자 프레데릭 R. 슈람(Frederick R. Schram)도 그런 보편적 생각을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이란 인간 본성이 가진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인의 활동이 아니다. 과학의 진보가 드문 것은 사실을 담은 정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과학자들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과학의 자체 교정 과정을 통해 우수한 생각이 이긴다. 심장병 전문의 딘 오니시(Dean Ornish)도 같은 견해를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들마냥 새로운 생각에 저항할 때가 자주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좋은 생각과 이론이 승리하게 해준다." 나도 동의한다. (p228-229)
부모투자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은 막대한 수의 유성 생식 종들로부터 성별 차이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방대한 메타프레임워크다. 대부분의 종에서 암컷들은 수컷들보다 부모로서 더욱 많이 투자하며, 그 결과 성적 행동에 있어서 훨씬 더 신중하다. 그러나 수컷이 부모로서 암컷보다 더 많이 투자하는 종의 경우, 대개 성별 차이가 역전된다. 그런 종의 암컷들은 더 크고, 더 공격적이고, 성적으로 더욱 분방하다. 그런 예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며 선사시대 동물처럼 생긴 화식조(cassowary)가 있다. (p240)
247-8
서구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글로벌 패권주의를 지적하면서 자학하는 일이 흔하다. 그들은 서구는 전쟁과 정복으로 세워졌지만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로 퍼져갔다고 말한다. 실상은, 이슬람의 역사야말로 끊임없는 정복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 정치과학자 새뮤얼 P.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그 유명한 말에 의하면, "서구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단층선을 따라 발생하는 갈등은 1,300년 동안 지속됐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이슬람의 국경은 피로 그려졌다. 7세기 창시된 이래, 이슬람은 수천만 명을 예속시키거나 개종시키거나 혹은 죽였다. (p249)
세계 수많은 지역에서 개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개종자들에게 테러를 저지르도록 고무하는 종교는 단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p254)
물론, 이렇게 다차원적이며 확실한 중복 증거들로 법칙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행위가 무슬림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한 이념을 정밀히 조사하고 그 이념이 평화, 다원주의, 자유를 촉진시키는지 결정하기 위해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인식론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는 것뿐이다. 설사 무슬림 대다수가 분명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분석의 결론은 사실에 합치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분석한다고 해서 편견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다. (p260)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을 이용해 기후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인공적인지 조사하고,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이며 이성적인 개입 방법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을 수행하자고 요청한다고 해서 '기후변화부정자'나 '과학부정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듣기 좋은 뻔한 소리나 감정적 호소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끔 면역력을 키워준다. 당신의 지성-잘못 끼어든 감정이나 부족주의적 이념이 아닌-을 통해 입장을 결정하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 지성이 가장 유용하고 어떤 분야에 감정이 가장 유용한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입장을 결정할 때는 이 장에서 다룬 강력한 인식론적 도구를 적용해 오직 '진리의 부족'에만 충성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어라. 내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태시킬 필요가 있는 중복 증거는 무엇인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임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정보를 취합시켜 줄 강력한 수단이다. (p261)
<제8장 콜 투 액션>
사람들이 사상의 전투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책임감의 분산'이나 '방관자 효과'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심리학자 존 달리(John Darley)와 빕 라타네(Bibb Latané)는 언뜻 생각하기에 직관에 반대되는 듯한 내용을 기록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이 실제 누군가에게 도움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즉 위험을 자초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다. "사드 박사님, 우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의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힘 내십시오." 아니,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개인적인 책임감을 일깨우라. 당신과 상관 있는 문제다. 참여하라. 진리와 이성, 논리가 도와달라고 외칠 때 방관자가 되지 말라. 다른 사람들 목소리에 묻어가지 말라. 자기 검열 하지 말라. 이 전투의 결과에 당신과 당신 자녀들의 이해가 달려 있으니,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드높이라. 공유지의 비극 같은 집단 무기력의 비극에 굴복하지 말라. (p266-267)
남을 판단하는 것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 말라 물론 민감한 주제를 거론해서 친구들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정확히 말해 그런 대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깊은 우정이란(나심 탈레브의 개념을 빌자면) 반취약적이어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헨리 토마스 버클(Henry Thomas Buckle)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나 여자는 세 가지 계급 혹은 지적 등급으로 분류된다. 가장 낮은 계급은 언제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음 계급은 언제나 사물에 대해 대화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언제나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알아볼 수 있다." (p268-269)
서구는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기독교신학에 따라 많은 이가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 (…) 많은 사람이 이런 가르침을 잘못 해석해서 판단은 신이 금지한 행위이며, 그저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이런 포고령들은 도덕적 위선에 대한 이야기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심판해야 한다. 나는 매일 심판한다. (p270)
판단��다는 것이 곧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완벽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판단은 제대로 작동하는 성인에게 필요불가결한 능력이다. 인간 의사결정의 중점적 특징은 바로 몇 가지 서로 경쟁하는 대안들을 판단하는 절차다. 이것이 바로 판단과 의사결정학회(Society for Judgment and Decision Making)와 그 대표 학술지 <판단과 의사결정(Judgment and Decision Making)>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 안에 누구를 포함시킬지 판단한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여러 구애자를 판단한다. 우리는 학생과 종업원을 판단한다. 삶은 끊임없는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판단한다. 자기 의견을 밝힌다. 그들은 입장을 취한다. 절대 판단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문제에 대해 장단점만 열거하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매우 지루한 사람들이다.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향된 사람이라 불릴 가능성을 막기 위해 보험을 드는 지적 비겁함이다. 최고의 카리스마가 있는 대중 지식인들은 대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토마스 소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지난 4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대중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것은, 논쟁적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이라고 다 똑같이 좋은 것은 아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공론가와 비판하기 좋아하는 지식인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입장을 취하느냐에 있다. 판단에 이르게 된 과정을 또렷한 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 판단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p272-273)
미덕 과시(virtue-signaling)는 비용 들이지 않고 손쉽게 자아를 팽창시키는 자기 확대(self-aggrandizing) 행위의 한 형태다. 내 진보적인 해시태그가 증거하듯, 나는 진정으로 남들에게 관심 갖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해!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얘기도 없다. 이렇게 뻔한 미덕 과시를 하는 사람들은 유약한 겁쟁이다. (p274)
276-7
서구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이 내게 자유를 수호하고 싶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파장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러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 문제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어린 연합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과 박격포 앞에서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던가(혹은 안전하리라 기대했던가)? 얼마 전 6만 7,000명의 캐나다인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영웅적 행위 덕분에 나는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것을 타이핑할 자유를 누린다. 수백만 명의 개인이 생명을 희생시킨 덕분에 지금 우리의 자녀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아는 사람들에게 친구 삭제를 당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간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에 비겁함도 추가돼야 한다.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면서 서구의 영혼을 위한 사상의 전투에 참여할 방법은 없다. (p278)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특히 학자나 공인으로서) 생각�� 밝히는 데 막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비평을 꺼린다고 믿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참여하라고 간청하면 때로 이렇게 대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교수님은 종신재직권이 막아주잖아요." 종신 재직이 이성을 수호하고자 드러내고 발설함으로써 받는 모든 협박과 유해한 결과를 다 아울러 퇴치해주는 마법의 방패는 아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나는 2017년 가을, 대학 수업에 갈 때마다 보안 조치를 취해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수많은 살해 협박을 받았으며 결국 대학 인사부 대표를 대동하고 몬트리올 경찰에 출두해 진술서를 써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지만 공적 활동을 이유로 다른 교육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여러 건의 교수직 제의를 놓쳤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경력의 발전을 위한 수비수가 되어줄 학계 모임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내 영혼의 순수성 (내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때문에 나는 진실 수호보다 직업적 고려를 더 중시할 수 없었다. 내 이기적인 이유로 진실의 1밀리미터, 자유의 1온스라도 희생시켰다는 걸 알면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이 사상의 병원체들과 싸우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걸라는 것이다. 당신의 싸움이 덧���지 않게 하라. (p279)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주어진 미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절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선한 일에 중용'이라는 속담을 생각하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한 가지 미덕)는 과도한 무모함과 비겁함(둘 다 피해야 할 극단적 속성이다) 사이에 있다고 상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인 전투에 처한 병사의 용기에 대해 논했지만,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 이 말은 사상의 전투에 필요한 지적 용기에도 적용된다. 예멘에서(이슬람의 불경죄에 항의하려는 의도로) '모하마드 그림을 그려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기로 한 사람은 분명 과도한 무모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매체들이 '이슬람은 평화다'라는 이맘의 성명에 이의를 제기하기 꺼리는 것은 비겁함의 발현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 조리 있고 이성적으로 교전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존재한다. (p279-280)
경기 중에도 페널티 킥이 주어지지만, 토너먼트 게임에서 동점일 경우에도 이 방식이 사용된다. 그렇게 무거운 부담을 지고 슛을 하는 데는 대단한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배짱과 용기를 키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상의 월드컵 대회에서 뛰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성의 팀을 위해 득점을 기록할 기회가 왔을 때 은유의 페널티 킥을 넣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골목길에서 위협받는 여성을 보고 끼어드는 사람들과, 도와달라는 비명을 듣지 못한 척하면서 도망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후자가 되지 말고, 전자가 되라. (p280)
나치를 물리치도록 도운 주요 역사적 인물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사과��야 한다면, 끝없는 암흑의 심연이 드리운 것이다.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원칙을 지지한다면(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물러서지 말라. 벌꿀오소리 같은 야성적 충동을 가져라. 당신의 진실성을 수호하고 진리를 지킬 때는 맹렬하리 만큼 단호하라. (…) 벌꿀오소리가 되라. 이념적 깡패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절대 물러서지 말라. (p285)
소위 말하는 '다른 형식으로 아는 것(토착민들 식으로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이 과학적 방법만큼 유효하다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닫힌 마음의 편견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유독한 남성성과 백인우월주의의 전형이라며 신경질적으로 백인 남성들을 악마화하는 행위를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색적인 비난이 금방이라도 협박이 될 기세면, 도대체 무슨 진보적 교리를 바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당당하게 물어라. 사람들 대부분은 인종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자라 비난받는 걸 너무나 두려워해서 웅크리고 침묵한다. 입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민재판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런 전략에 넘어가지 말라. 당신의 원칙을 확신하고 벌꿀오소리처럼 맹렬하게 그 원칙을 옹호하라. (p286)
인간은 협동적인 동시에 경쟁적인 존재이며, 행동거지 서툰 10대 청소년 패거리부터 프로 축구단이나 군대 조직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단에서든 분명한 위계 질서를 이루려 한다. 인간은 다 똑같고 평등한 일개미가 아니다. 하버드 대학 곤충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E.O윌슨(E.O.Wilson)은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생각이지만, 종(種)이 틀렸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기반으로 구축된 체계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경쟁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의 연약한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사회를 구축하려 들면 결국 만들어지는 건 나약함과 권리 주장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사회다. 삶이란 필연적으로 경쟁적이다.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이 있다. 그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관점의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p290)
가드 사드 , ' 기생충 마인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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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논리 구성을 하고 원고를 뽑다보니, 개인적으로 정리하는 문장들의 수준이 저열해진다. 트레이닝을 해야하는 문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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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할 때 마다, 분명 행복하긴 한데 다른 여자한테 눈이 가는 건 모두의 문제일까, 나만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문제다.
누구는 폴리아모리를 들먹이며 자연스럽게 살라했었지만, 그건 또 자연주의의 오류이지 않나,하는 생각. 자연의 논리로부터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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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윅 전시 다녀왔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콘셉트 차용은 맘에 든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연으로부터 그 레퍼런스를 찾았다. 다만 내가 그 공간에서 거주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 괴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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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두고 보니 문제가 졸라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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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니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Deuteronomy 申命记 신명기 22:5)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I Corinthians 歌林多前书 고린도전서 11:1.14~16) 하나님은 남녀의 엄격한 성별(sex)의 구별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동성애 죄와도 연관이 되며 절대 남녀차별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여 unisex를 권장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수십가지의 gender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반기독교적이고 반성경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네오막시즘 ( #신마르크스주의 )이 있지요. #차별금지법, #혐오표현규제, #학생인권조례가 그 연장선입니다. 경성하고 깨어야!! ( Reposted from @adafayefashions - 🌸RESTOCK ALERT🌸 Our Ada Faye exclusive swim wear has been restocked😍👏🏼 These are available in sizes Small-3X and only $34.99. New tops and skirts coming soon😍💕 ) #regrann https://www.instagram.com/happy_rhino/p/Bv-Me5MlW2a/?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gzw4idyutb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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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다녀옴.

친구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미술관 가자고 해서 갔다 왔다.
원래 그럴 놈이 아닌디 ㅋㅋㅋ
메인 주제는 마르셀 뒤샹.
변기로 유명한 그 작가 맞다.



내 눈에 가장 띄었던 작품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Nu descendant un escalier n° 2) !!
마치 더미 인형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카메라로 찍은 후 합성한 것 같다.
큐비즘과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움직임을 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볼 수 있다. 공간을 여러 차원으로 분할하는 수학과 운동을 재현하는 과학적 발상의 합. 실제로 리만 기하같은 수학이나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고.
아래 작품이 앞서 말했던 샘(Fontaine)이다.
설명은 워낙 유명하고 모두 알만한 진부한 내용이므로 생략.
핵심은 예술가는 발상과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거.
그나저나 프로이트도 그러지만 뒤샹도 성도착증 같은게 있던 모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큰유리, 최후의 작품 에땅 돈네등을 보면 집착이 좀 있는듯. (큰유리의 원 이름은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이다)
마지막 사진은 큰유리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안과의��와 목격자(Oculist Witness)
하룬 파로키
하룬 파로키는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중 눈이 갔던 3가지를 소개한다. 링크를 누르면 유튜브로 볼 수 있다.
<평행 I – IV>(2012-2014) 시리즈는 컴퓨터그래픽 이미지와 같은 이미지 재현 기술의 분석을 통해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초기 컴퓨터 게임을 구성한 그래픽 이미지로부터 시작해 보다 정교하게 현실 이미지에 가까워지거나 가상세계 구축까지를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이미지는 영화의 관찰 이미지와 달리 특정한 알고리즘에 의해 게임의 규칙을 만들며 영화를 감상할 때의 감정이입과 다른 형태의 체험을 만들어낸다 하룬 파로키가 ‘인간과 배경 사이의 중간에 존재하는 상호매개적 존재들’이라 부르는 게임 속 아바타를 통한 조정의 세계는 선택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완벽한 조정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가시화한다.
평행1은 그래픽의 역사, 2-3은 게임속 세상의 경계와 사물의 속성 4는 게임 속 영웅과 성격적 특성등을 알 수 있다.
<인터페이스>(1995)는 하룬 파로키가 처음으로 전시를 목적으로 제작했던 작품으로 자신의 에세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편집실의 모니터 두 대로 재생하면서 이미지의 배열과 편집, 인접한 두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다. 하룬 파로키는 영화를 통해 분절되고 배열되면서 의미를 생산하는 이미지의 속성과 연관된 정치·사회적 배경의 담론화를 모색한다.
비디오를 편집할 때 이미지와 이미지 미리보기 즉, 2장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데 영화 편집시 1장의 이미지만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작품이다. 평행과 인터페이스는 컴퓨터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충분히 볼 만하다.
<비교>(2007)는 수공업 형태의 노동이 생산기계의 발명과 함께 대량생산 체재로 변화하면서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는 산업혁명의 과정 속에서 공존하는 노동의 여러 형태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전통적 방식으로 벽돌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와 인도의 노동자들과 첨단기계로 벽돌을 대량생산하는 유럽의 벽돌공장 이미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생산체제와 노동, 러다이트 운동같은 것을 되새길수 있는 경험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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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트가르트 국립미술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구관과 제임스 스털링이 설계한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신관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신관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라 건축 마니아들과 건축학도들에게 건축 성지 중 하나로 꼽히는 건물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이 슈트트가르트 국립미술관을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사건이 하나 있는데 건물 입구에 그려진 바나나 그림이 그 주인공이다. 스프레이로 그린 토마스 바움가르텔의 그래피티이다. 그는 슈트트가르트 국립미술관을 시작으로 여러 독일 미술관��� 이 바나나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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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아님)
제일 만만한 게 샐러드라서. 그리고 제일 맛있음.


(같은 날 아님2)
내가 구운 그래놀라와 최고의 조합 찾는 중
무화과 철이 끝나서 너무 아쉽다. 빠알갛게 꽉 찬 유럽 무화과 내년에 또 먹을 수 있을까요...


이제 플랭크 안 쉬고 4분 할 수 있음 김세린 존나 강해 올해 가기 전 5분이 목표

다음에 사 볼 아몬드 버터

집에 있으니 셀카가 많아지고 표정은 새침한 느낌으로 지어보았다
근황: 발목이 아직도 낫지 않음 그렇지만 나으려는 노력도 잘 하지 않음/ 달리기를 못 한다는 소리/ 올해 안에 복근 보기로 했는데···./ 내 요즘 최애 팟캐스트 퀴어방송/ 리타님 블로그 글 읽기/ 무슨 돈도 없는 게 제태크 팟캐스트를 공부하듯 들었음/ 케이팝 늦깍이/ 내 루틴 중 가장 사랑스러운 것 1) 바질 이틀에 한 번 물 주기/ 지키지도 않을 계획들 미리알림에 무작정 써놓고 있음/기상시간이 늦어졌다/ pms 인가 다시 찾아온 무기력인가/ 드디어 오늘 일주일만에 운동함/ 확진자 5만 2천명의 프랑스··· 과연 이 곳에 돌아온 것은 잘한 선택인지?/ 이 와중에 사고 싶은 컵이 있다니/ 담배는 거의 피우지 않는다/ 손톱도 이제는 거의 물어뜯지 않는다/ 여전히 조금씩 미룬다/ 여전히 집중력도 딸린다 이 원인은 아마 핸드폰을 너무 많이 해서겠지
갑자기 너무 새삼스러운 게 내가 어쩌다 미술하겠다고 왔다가 미술 때려치고 싶어지고 내 감각을 의심하고 우울증과 결정장애를 앓고 식물을 키워보고 운동을 해보고 요가랑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보고 채식을 시작하고 옷은 빈티지에 가방은 에코백만 드는 여자가 되었는지 싶어서
여기 있는 시간 동안 교회보다 절에 가는 게 좋아졌고 말을 못하게 되었고 케이팝도 좋아하게 되었고 돈은 벌어야겠는데 당분간은 여기서 어떻게든 벌어먹고 살고 싶고 아무튼 나이는 먹어가는데 사는 게 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아지고 그냥 그냥 그냥··· 나만 미워하지 않고 사는 게 지금은 제일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되었다
모든 과거의 총합이 현재의 나라는 것이 제법 웃기지 않는가 나는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
이 와중에 여자라는 단어 너무 좋다 나는 내가 여자라서 너무 좋다
집과 일상에 익숙해지니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던 김세린의 n번째 자아가 사라진 것 같은데 y와 대화를 하면 그나마 환기가 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나는 y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n번째 자아인 김세린인 상태에서 y를 만나는 순간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y를 좋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음 둘 다 일지도
여러개의 자아 a.k.a 부캐를 가진다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진실성을 잃고 해체를 경험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어쩌구의 결과물에 편승 내지 후기 자본주의의 파편적 주체가 되는 것 같아서) 지금은 그것을 가지는 것만큼 큰 자유를 주는 것이 없다고 여기며 (ft 페소아) 내가 얼마나 더 새로울 수 있고 몇 개의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는 그릇인지 죽을 때까지 탐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연극적 수행을 반복하며 필연적으로 느끼게 될 허무함에 대해서는 나중 일 즉 당장은 모를 일)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고 싶다 여러 모습을 가진 여자가 되고 싶다 이 곳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그치만 난 맨날 샐러드나 처먹고 침대에 앉아서 유튜브나 처보고 있음 뭐 이런 모습도 어찌저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살아남았다는 증거, 뭐 이런 걸로도 포장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미워하지 않기로 다짐을 해서 겨우 짜낸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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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고 부담스러운 제목과 달리 판형도 작은데다 두께도 얇다.
서양 디자인사를 이루는 디자인 양식은 장식미술-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 전부인데, 디자인의 어원과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르네상스가 고작이다. 확실히 서양미술사에 비해 역사가 짧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들을 제대로 정리하기에 적합했다.(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아르누보나 아르데코처럼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도 마찬가지. 또한 타자의 것을 제대로 타자화할 줄 알아야 자기 것을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저자의 견해에도 공감이 많이 됐다. 백과사전처럼 디테일하게 서술이 되어있지는 않으므로, 이걸 다 읽었다고 해서 서양 디자인사에 대한 모든 걸(거의 모든 것조차도) 알 수는 없다. 저자는 독자가 서양 디자인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도록 돕는 것이 주 목적이라고 하는데, 의도가 성공적으로 반영된 책이라고 본다.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적합하며,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본인이 열심히 리서치를 해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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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작가 ‘호 추 니엔(Ho Tzu Nyen)’의 작품에 드러난 포스트-콜로니얼리 즘(Post Colonialism)이론의 적용.
1. 들어가며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며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그 분야의 역사적 기술 그리고 통합 적인 역사, 세계사와 국사와 같은 학문은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현재(21세기)의 세상은 어떠한 역사를 쓰고 있으며 그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 이론, 그리고 그러한 이론을 수용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어떠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은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정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호주의 미술사학자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동시대성을 정의하는 과정을 담은 논문을 통해 동시대성의 정의를 정리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시간 (Time)’에 관한 것인데,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는 아마도 시간과의 관계성을 잃는 것일 지도 모르며 또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뉴미디어, 디지털 이미지, 몰입형 영화, 국가 식별, 새로 운 국제주의, 신원 확인, 네오 모더니즘, 관계 미학, 포스트 프로덕션 아트, 리 믹스 문화 등 현재 실무의 한 가지 또는 다른 측면의 통화를 강조한다.1 이렇게 동시대 미술은 다양한 매체 발달과 실천 그리고 사회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매체를 확장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 진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실험과 혼란의 역사였다. 화가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단순한 요구에 존재하는 모순을 깨닫게 되면서 미술이 지향해야 할 부분에 변화를 겪게 된다. 고대부터 봄(seeing)에 대한 크고 작은 변천을 겪으며 화 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관객들이 감상하는 것에 대한 변화가 동반된다. 이집트 인들은 그들이 눈 으로 본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알고 있는 것을 표현(원시시대 미술가들이 실재하는 얼굴을 만든 것)했으며, 그리스 로마 미술은 이러한 도식적인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중세 미술은 다시 이 도식적 형태를 이용해 종교적 주제를 표현했다.2 이러한 형식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매체 발달에 이바지하며 기존의 제도비판을 이끌었던 아방가르드 그룹들, 두번의 세계대전을 통 해 탄생한 철학사조들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회화의 흐름 과 같은 다양한 변천은 지금 현 재의 미술의 형성에 큰 원동력이 었다. 이 논고를 통해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과 이러한 담론을 적극수용 하여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는 동남아시아 작가, 호 추 니엔의 작업을 중
1 Terry Smith, 「Contemporary Art and Contemporar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P683. 2 E.H.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도서출판예경』,1995, P561. 1. 들어가며 2. 모더니즘 미술 안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 colonialism) 2.1 포스트 콜로니어리즘(Post colonialism) 2.2 모더니즘 미술 안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3. 동남아시아의 동시대 미술과 호추니엔의 ‘만 마리의 호랑이’ 3.1 동남아시아의 동시대 미술. 3.2 호 추 니엔 3.3 만마리의 호랑이 <Ten thousands of tigers(2014-15)> 4. 나가며
심으로 사회학 이론인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적용을 살펴보겠다.
2. 모더니즘 미술 안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 colonialism) 2.2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세계의 역사는 20세기의 격동기를 지나며 민족주의의 폭력성의 역사를 마주했다. 민족주의는 유럽 전역의 보수주의 정부와 정당의 내재적 본질이었다. 3 그렇다면 지금 현재 21세기가 시작한 지 18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민족주의의 부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부활이라 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오랜 시간 뿌리 깊게 서구권에 만연했던 자국 민 주의, 백인 우월주의, 민족주의는 모두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이 조금 더 선명 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라 생각된다. 냉전시대로 인해 개방���던 이주와 지정학적 ‘경계’의 확장은 현재 다시 한번 ‘경계’지음을 반복하며 이주와 경계를 넘는 것을 제한한다. 이러 한 세계의 상황은 정치와 외교의 흐름과 불가분 한 관계에 놓여있으며 다양한 이유로 인하여 지 금 전 세계는 난민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낸다. 20세기 하반기에 독립운동, 포스트 식민주 의, 산업화, 도시화 등 새롭게 규정된 사회정치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국 민과 국가들은 고심 분투했다.4 서구권의 역사와 문화에 종속됐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아 프리카와 같은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독립과 자치권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화적인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는 여전히 언어와 문화속에서 일본의 잔재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마주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역사 란 지극히 서구, 백인, 남성 위주의 역사관이었으며 이러한 근대의 방식을 부수고 전환사기 위해 많은 철학 사상가들의 이론이 탄생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은 불연속적 역사관을 주장했으며 19세기의 철학가 니체는 그 이전까지 만연했던 형이상학적 이 분법을 해체하며 서구의 뿌리 깊은 이성중심주의를 외면한다.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는 새로운 관점, 문화적 관점으로부터 모더니티 (Modernity)를 반영한다. 또한 모더니티(Modernity)에 속해 있는 식민주의(Colonialism), 오리엔 탈리즘(Orientalism)을 해체하며 문화적 헤게머니즘(Hegemonism), 그리고 동양(the East)과 서구 (the West)의 세계적인 관계에 대한 모더니티의 요구에 관한 서구식의 반영을 해석하는 것이다.5 또한, 포스트 식민주의는 새로운 앞선 이론적인 범주를 가능하게 한다, 즉, 현대화의 과정에서 동 양과 서양 사이의 식민주의화 관계에 대한 앞선 이론적 범위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반-서구(anti-western) 중심주의의 강한 경향과 와 막시즘(Marxism)의 개념의 공유를 표현한 다.6 포스트 식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동양에 빠르게 퍼졌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의 경향 중 하나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그리고 호미 바하(Homi F. Bhabha)와 같은 학자들이 가장 대표적이다. 포스트 식민주의는 3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존재하는데. 첫번째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 해방의 번영. 두번째로, 민족 문화의 자기 정체 성, 세번째로 모더니티(Modernity)에 대한 전체적 반영(reflect). 포스트모더니즘의 반향 (echoing), 포스트 식민주의는 다양한 문화, 정치적 이론들 그리고 비평의 방식들을 위한 하나의 3 윌리 톰슨 저, 전 경훈 역, 「20세기 이데올로기: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파시즘1914-1991」, 『산처럼』, 2017. P13. 4 클라라 킴, 「모던 유토피아/상상된 국가들, 상상된 경계들」,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2018.P22 5 Geng Yang, Qixue Zhang and Qi Wang, 「The Essenc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 of Post-Colonialism: From Karl Marx’s point of view」, 『Frontiers of Philosophy in China. Vol. 1, No. 2』, 2006. P279. 6 위의 논문, Ibid, P279.
상위 명칭이었다. 이것은 단지 동양과 서양의 소통의 문화적 전략분만 아니라 동양이 스스로 자 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전경을 제공했다. 7 서구권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론이 급격 한 성장을 이룬 것은 이 이론이 다른 이론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답’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 보다, 이것이 ‘식민주의’ 를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본질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식민지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식민지화된 국가의 현대 담론과 식민지를 실행하던 국가사이의 권력관계의 마찰을 강조하며, 또한 동양과 서양사이의 문화적 식 민지화의 관계에 집중한다.8 또한 식민주의와 중요한 관계인 제국주의를 대할 때, 왜 문화가 제국 주의의 수행가운데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문화가 정치와 이념적인 성향 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문화는 권력과 문화 그 자체로 권력에 포함된다. 9 이것은 문화가 제 국주의를 실행하는 목적을 충족시키는 권력과 문화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는 프랑스의 철학가 푸코의 ‘권력에 대한 개념과 자크 데리다 의 ‘해체’ 이론이 토대가 된다. 이 논고에서는 특히, 스피박의 서발턴(Subaltern)개념에 앞으로 소개될 ‘호 추 니엔’의 작업 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스피박의 서발턴 윤리에 대한 고찰이 다국적 자본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식민지화’로 인해 다양한 모양으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착취’와 ‘억압’, 주류(서구 열강 혹은 자본주의 시대의 신흥강국들)에 이해 파편화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이 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방안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0 2.2 모더니즘 미술 안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현대미술에서 모더니즘, 그리고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 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방법과 시기 구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미술의 새로운 시도와 그 시도에 대한 분석과 관찰은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일반적으로 모더니티(Modernity)는 모던(modern) 한 것에 대한 인식 혹은 모던한 것에 대한 표상으로 여 겨진다.11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시대의 미술사조, 즉 -ism 안에서는 비교적 유럽 국가와 미국에 치중해서 서양미술사라는 것이 완성된다. 그 시기에 유럽과 미국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사이에 냉전시대와 같은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전쟁을 겪게 된다. 여전히 강대국에 속한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보다 약소국인 나라를 식민지 화했으며, 약탈 문화로 이룩한 작품으로 가득 메워진 미술관과 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 지만 동시대미술에서 특히 동시대 미술에서 아시아문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가 가지고 있는 위치는 서양의 문화지배 속에서 억압을 받았으며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자료들은
7 위의 논문, Ibid, P280. 8 Geng Yang, Qixue Zhang and Qi Wang, 「The Essenc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 of Post-Colonialism: From Karl Marx’s point of view」, 『Frontiers of Philosophy in China. Vol. 1, No. 2』, 2006. P 9 위의 논문, P286. 10 박미지,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 윤리학-마하스웨타 데비의 익룡, 퓨란 사하이, 그리고 퍼사를 중심으로」, 『서울 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6, P69. 11 이 논문의 필자는 역사적 모더니티 와 미적 모더니티에서 드러나는 보들레르 미학의 기반인 역설(paradoxe)를 기반으 로 보를레르와 모더니티 개념을 분석한다. 모더니티를 역사적 그리고 사회학적 이해로부터 여러가지 해석을 해본다면 첫 번째로 산업혁명 이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달라진 삶의 특징을 포착해내는 것이 모더니티라는 주 장과 다른 하나는 과거와 눈에 띄게 달라진 성격의 삶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비판하는 것 또한 모더니티라 칭할 수 있다. ‘모더니티란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한 것, 이것이 예술의 절반을 이루며, 나머지 반쪽은 영원하고 불 변하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모더니티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특징은 크게 보아 상반되는 시간성, 즉 현재라는 일시성과 시 적 영원성의 공존이다. 조희원, 「보를레르와 “모더니티”(Modernite)개념」, 『한국미학회』,2011, P240.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또한 일본의 지배 속에서 많은 유산들과 자료들이 소진됐으며 일 본의 언어와 정신, 문화의 패권속에서 한국의 시각, 특히 시각예술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 또한 한국의 미술사안에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시각을 읽을 수 있는 중요 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화라는 것이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식민지화라는 것보다,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의 관점에서는 문화적 지배, 문화적 헤게모니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사람들의 세계를 바 라보는 관점과 가치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침범한다는 것이 중요하다.12 이러한 시각에서 세 계를 바라볼 때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 이 그 당시 프랑스 식민지하 에 있던 타이티섬에서 원주민여성들을 모델로 그린 수많은 그림들 또한 백인 서양 남성의 시각 으로 해석되고 타자화 된 피지배층의 모습일 것이다.13 하지만 그 원주민들이 어떠한 식으로 자 신들의 타자성을 주체성으로 전환시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비교적 모더니즘 시기에 서구권의 시선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러 시아는 자신들의 공산주의 체제를 내세우며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시도, 조금 더 실재적이고 실용적인 예술 실천을 강조했던 구성주의/구축주의가 존재하지만 러시아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의 관점을 찾기는 다소 어려워 보인다. 3. ‘호 추 니엔’ 3.1 동남아시아의 동시대미술 과연 아시아에서는 서양의 문화 패권에서 만들어진 예술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과 시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아시아 미술만의 특징을 만들어내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동남아시아의 동시대 미술을 읽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미술세계는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동시대미술 작품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적인 전시에서 특히 동시대 아시아 미술은 현재 급격한 임재(presence)를 이루고 있다.14 이러한 변화는 동양의 국제 그리고 정치적 문제의 영향이 연결되 있으며 아시아는 세계속에서 문화적 영향력의 회복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5 여기에는 현대 아시아 미술계의 활력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아시아의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는 ���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변혁적인 예술 관행의 보편적이고 현저한 배열이 아시아에서 현대 미술의 폭발적 발전을 포함한다. 20 세기 아시아 미술 작품의 동기 부여의 일부는 새로운 아시아와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글로벌 예술 환경에서 그 위치를 표명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세계로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됐다.16 미술비평가인 Lee Weng Choy 는 싱가폴을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고 과거의 섬세한 인식 그 자체로 두며 현재(the present tense)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역사적 집단, 사회(society)” 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식민지화 시대 동안 모든 동남아시아 인들이 과거 그리고 현재를 부정했던, 그 식미지시기에 대한 희미한 향수이다.17
12 Geng Yang, Qixue Zhang and Qi Wang, 「The Essenc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 of Post-Colonialism: From Karl Marx’s point of view」, 『Frontiers of Philosophy in China. Vol. 1, No. 2』, 2006. P284. 13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클 라우스, 이브-알랭브아 외2명,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세미콜론』, 2012, PP64-65. 14 Michelle Antoinette, Caroline Turner, 「Contemporary Asian art and exhibitions-Chapter title: Epilogue ‘My future is not a dream, shifting worlds of contemporary Asian art and exhibitions」, 『ANU Press』,2014. P234. 15 위의 논문, Ibid, P234. 16 위의 논문, Ibid, P234 17 Nora A. Taylor, 「Art without history? Southeast Asian artists and their communities in the face of geography」,
식민지 탐험가들은 식민지화 된 땅과 그들의 공업품의 소유를 자신들이 후원할 권리를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18 길었던 식민지 시대의 시간이 지난 후에 서양이 동남아시아의 문화와의 관계속에서 어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을까? 싱가폴이 태국과 더불어 정확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 파빌론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동남아시아 국가이다.19 또한 유일하게 미술관이 동남아시의 미술에 기여하고 헌신한 것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동남아시아의 동시대 현대 미술사의 분야가 포스트 식민주의 시기에 발전해 왔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의 집중을 그 지방 전체보다는, 그 지역 내에서 개별적 나라들에 더 집중했다.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필리핀의 식민주의 시기의 현대미술(Modern Art)에서부터 1990 년대까지에 대한 연구, 그리고 가장 최근에 미얀마(Myanmar)에 대한 논문과 그 시골 지역에 대한 심도 높은 곳을 기반으로 하는 연구가 출간됐다. 이러한 많은 글들이 논의하는 것은 “다른 모더니티(Other modernities)”에 관한 인식에 관한 것이며 또한 서양의 모더니티의 헤게모니 적인 생각을 금지하고 버리는 것이다 (abandonment). 하지만 예술가들은 동쪽 대 서쪽이라는 반대의 개념을 뛰어넘는 것을 시작했으며 지역 간의 대화참여 또한 시작한다.20 반면에 미국 대학들의 학자들은 이러한 아티스트들이 서구의 현대미술 기관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지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나 이것은 그러한 경계를 넘어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합쳐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며, 그 식민지 지형도의 경계들은 강하게 지워지고 있다.21 이러한 지점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인 ‘경계 ’의 키워드와 맞물려 있다. 식민지 시기의 경계 진 서양, 즉 패권의 상위에 위치해 있는 국가와 동양, 피지배계층에 속한 동양이라는 이분법의 경계, 항상 문화권에서 우세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양이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것이다. 동양이 아무런 의심없이 서양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며 그렇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상황속에서 다시 그 문화적 헤게모니를 해체하고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서양이 남기고간 잔여물속에서 ‘나의 것’을 찾는 여정보다도 복잡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미 흡수된 문화, 흡수한 문화 안에서 다르게 변형된 문화와 역사조차도 나의 것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처로 얼룩진 역사를 뛰어넘어 그렇게 융합되어 현재 동시대에 존재하는 문화의 특수성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새로운 창조성을 통해 새롭게 건설되는 복합된 문화의 창출이라고 생각한다. 3.2 호 추 니엔 (Ho Tzu Nyen) 호 추 니엔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싱가폴’ 이라는 자신의 국가를 통해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싱가폴이라는 국가를 렌즈로 사용하여 세계를 바라보며, 싱가폴을 세계로 연결시켜 하나 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22 그에게 싱가폴은 단순한 고향이 아닌, 언어, 문자, 유전자, 정보 까지 모여서 흐르는 접점이자, 타자성을 가진 혼합의 네트워크이다. 국가가 만들어낸 국가의 이미 지와는 다른, 계보, 족보를 추적하고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23 호 추 니엔의 다 양한 작업들은 주로 영상 작업이며 그 안에 동남아시아의 정체성과 식민지와 포스트 식민주의 관
『CAA』,2011, P7. 18 위의 논문, Ibid, P7. 19 위의 논문이 2011년에 작성된 점을 감안했을 때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필요할 것 으로 보인다. 위의 논문, Ibid, P7. 20 위의 논문, Ibid, P7. 21 위의 논문, Ibid, P7. 22 https://www.youtube.com/watch?v=-iDTCZV1Urc, 작가 인터뷰. 23 위의 인터뷰.
점을 담고 있다. 3.3 만 마리의 호랑이 <Ten Thousands of Tigers(2014-15)> 호랑이의 존재에 대한 역사는 다양하다. 싱가폴에 집중해보면 호 추 니엔 은 이 호랑이 라는 존재를 통해 더 큰(Larger frame)을 통해 식민지 세계를 들여다본다. 호랑이는 비공식적인 역사이자, 정의를 상징하고 한때 멸종했던 존재가 다양한 형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여준다. 영 국이 싱가폴을 식민지화 하던 기간동안 영국사람들은 싱가폴 호랑이를 죽이는 것에 현상금을 걸 었으면 그로 인해 호랑이는 멸종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신화(myth)의 파괴 와 연결된다. 왜냐하 면 호랑이가 말레이 반도의 사람들의 우주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조상 의 혼이 깃들여 있다는 영매(Medium)의 역할을 한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호랑이의 멸종은 삼 림파괴와 더불어 그들의 우주관도 파괴한 것이다. 그의 주요 작업중 하나인 ‘만 마리의 호랑 이’<Ten Thousands of tigers)>는 다양한 역사의 지도를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연형태의 작품으 로 만든 것이다. 그래프 혹은 마인드맵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며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품 을 통해서 식민지 근대, 동 과 서의 이분법을 파괴하며 근대사회의 형성 과정과 역사의 허구성을 드러낸다.24 일반적으로 동남 아시아의 문명화는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감탄함으로 설명되며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조화에 대한 결과이다.25 따라서 그들에게 수반되는 문화는 단지 예술의 영 역으로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본질적인 관계의 성장에 대한 것이다.26 이렇듯 자연 (Nature)에 대한 개념과 체험은 동남아시아의 문화에서는 조금 더 숭고하고 본질적인 의미를 가 지고 있다. 호 추 니엔의 <백 만마리의 호랑이>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싱가폴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영국 식민지배 당시의 파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으로 그들의 정신적이고 고유한 문화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인다. 영상작업의 중반부에 울려 퍼지는 한 남자의 음산한 비명(screaming)은 초월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이야기한 마인드맵의 형식의 시각물이 공연형태로 보여지고 그 안에서 청각효과가주는 감각적 장치는 네러티브한 이야 기를 단축적으로 표현한다.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마인드맵의 효과와 아카이브 형식의 기 록물, 그리고 오브제의 배치와 병렬을 통해서 한가지의 표현이 아닌 다중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다양한 비극 안에서 한 나라의 신화, 그리고 문화 와 유산이 상대의 이기 심에 의해 파괴되고 한참이 지난 현재에 후대들이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관찰과 해석은 이렇듯 다양한 관점속에서 도출된다. 호 추 니엔의 이 작업의 가장 중심 키워드인 ‘호랑이’의 은유 (metaphor)가 호랑이의 멸종으로 인해 그들의 초월적 신화에 대한 믿음도 무너진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피폐함에 대한 감정의 격양 보다는 최대한의 거리감을 유지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호 추니엔 은 2017년까지 호랑이를 등장시키는 일종의 일련작업들을 유지한다. 그 만큼 호랑이, 그 리고 그 호랑이가 가지고 있는 말레반도의 역사를 싱가폴의 역사로 간주하며 호랑이를 통해 역사 를 다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한 것이다. https://vimeo.com/161786554 4. 나가며 식민지 지배에서 어느덧 73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문화와 사회에 일본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다-라고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직접적인 정치적 경제적 통치하에 있지 않았지만 현재 우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열강들의 문화를 습득하고 배우며 동양미술사보다는 서양미술사라는 학문에 더 근접한 교육을 받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24 위의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iDTCZV1Urc 25 Richard A, Gard, 「Ideological Problems in Southeast As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53. P294. 26 위의 논문, P294.
헤게모니 속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무너지며, 이민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태 그리고 부득이한 결과로 인해 탄생한 난민들의 삶, 더 이상 기독교는 과거 유럽국가들만의 종교가 아니며, 중동국가와 몇몇 동남아시아 권에 속해 있던 이슬람이라는 종교 또한 다양한 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 기술의 발달 은 언어의 장벽 또한 허물며 소통의 근간인 언어가 영어로 통합되어 국제적 언어로써 역할을 하는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구 반대편의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동남아시아 작가들의 경계를 뛰어넘는 실천은 의미 있는 문화적 재생산을 만든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동남아시아 인들의 “정체성(identity)”의 부재 혹은 부족은 이러한 지워진 과거의 받아들임과 재해석을 통해 채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론들이 서구중심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논고를 통해 살펴본 호 추 니엔의 작업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서도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 개념과 연결지점이 더 선명하다고 생각한다. 스피박의 서발턴 개념은 추후 논문을 통해 더 상세하게 살펴보고 연구해야 하겠지만 우선 가장중요한 것은 서발턴 윤리학의 고찰은 서발턴을 대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 서발턴 에게 ‘말을 거는 (Speak to subaltern)’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27 수동적이거나 혹은 여전히 피지배 와 지배계층의 이분적 구분이 아닌 능동적으로 피지배층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능동적으로 서발턴을 대변해서 그들의 목소리가 다시 침묵으로 묻히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호추니엔 작가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관점 혹은 이 이론을 활용하여 항상 피지배계층에 속했던 동남아시아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특히 과거 역사를 되돌아봄 현대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재해석에 동반되는 주관성을 배제하여 객관적 거리두기는 호 추 니엔 작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며 작가 또한 거리두기의 인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두기에서 동반되는 애매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작가가 애매함을 앞세우며 전하려고 하는 싱가포르, 말레반도, 동남아시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의 억압의 역사를 드러내며 그 당시 자신들을 억압한 영국 이나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들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것일까? 그날로 돌아가 역사를 바꾸기엔 많은 세월이 지나온 현재에서 젊은 동시대 작가들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비판의 날을 세워 피해자로써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 어떠한 ‘가설’을 이론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이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현재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실(fact)에 의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하나의 답안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을 통해 지금은 여러가지의 열린 미래(결말)이 존재하며 그 존재하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레퍼런스를 가지고 오는 확실성이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우리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미학적 관점 뿐만 아니라 조금 더 확장된 사회, 정치학적 관점으로의 작품을 감상하며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 그리고 인류가 걸어온 ‘역사’,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관점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들. 이러한 다양한 참여를 통해 현재 사회를 진단하는 것이 이러한 사회학적 이론을 수용한 작가들의 전반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호 추 니엔 은 ‘싱가폴’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결코 정당하지 않은 전개를 현재에 보여주며 담담하게 개인이 속해
27 박미지,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 윤리학-마하스웨타 데비의 익룡, 퓨란 사하이, 그리고 퍼사를 중심으로」, 『서울 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6,
있는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여전히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아포리아의 성격을 띄는 다양한 모순이 존재한 이론인 것은 사실이나, 예술 혹인 사회 실천에서 다방면으로 활용되며 그 모순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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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의 접경에서 흥미로운 상호침투가 일어났다. ‘디자인에서 미술로의 침투’를 대표하는 인물은 앤서니 던(Anthony Dunne, 1964-)이었다. 1999년 발간한 <헤르츠 이야기(Hertzian Tales)>에서 그는, ‘기생-기능(para-function)’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제품 인터페이스의 상징 기능에 주목하고, 비평적 소격 효과를 추구하는 디자인 실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실용성의 세계에서 살짝 비껴선 채 메타 기능을 구현하는 “비평적 디자인(critical design)”을 실천하는 일군의 3D 디자이너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현대미술관과 비엔날레의 양적 팽창이 제공하��� 다양한 전시 기회를 십분 활용하는 동시에, 정체 상태에 빠진 디자인 교육 기관을 순회하며 강연과 워크숍을 수행했다.
건축 쪽에선 딜러 & 스코피디오(Diller & Scofidio), MVRDV, 아틀리에바우와우(Atelier Bow-Wow, アトリエ・ワン) 등을, 산업디자인 쪽에선 개념적 디자인 회사인 드로흐(Droog), 메이와덴키(Maywa Denki, 明和電機), 위르겐 베이(Jurgen Bey, 1965-), 마르티노 감퍼(Martino Gamper, 1971-), 노엄 토란(Noam Toran, 1975-), 제임스 오거(James Auger, 1970-)와 지미 로이조(Jimmy Loizeau, 1968-) 듀오, 잭슨홍(Jackson Hong, 1971-)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앤서니 던처럼 혼성적 실천을 도드라지게 만든 인물은 없었지만, 디자이너 얀 반 토른(Jan van Toorn, 1932-)과 이론가 릭 포이너(Rick Poynor, 1957-) 등이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1997년 얀반아이크아카데미에서 열린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Design Beyond Design)>이란 제목의 심포지엄을 기점으로 변화가 일었다. 이후, 작업의 특성을 이해하는 소수의 클라이언트와 협업하며, 백색의 갤러리 공간에서 실험작을 제시하고, 디자인 교육 기관 등에서 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하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렸다.
M/M 파리(M/M Paris), 메비스 & 반 되르선(Mevis & Van Deursen), 덱스터 시니스터(Dexter Sinister), 다니엘 반 데르 벨던(Daniel Van Der Velden, 1971-), 엑스페리멘털 ���트셋(Experimental Jetset), 율리아 보른(Julia Born 1975-), 슬기와 민(Sulki & Min)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소위 ‘디자인 아트’로 불리는 영역에 속하는 디자이너-작가 혹은 작가-디자이너들이 그 주인공이다. 디자이너-작가, 즉 디자이너지만 미술가연하는 이로는, 론 아라드(Ron Arad, 1951-)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 그리고 마크 뉴슨(Marc Newson, 1963-)이 유명하다. 의자나 테이블이라고 만든 게 대리석이나 주물로 된 조각품이니, 에디션 수도 적고 미술 시장의 가격에 맞춰 가격도 높은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거래도 주로 이름난 상업갤러리를 통해 이뤄진다.
작가-디자이너, 즉 미술가지만 작업 외의 디자인을 수행한 경우로는, 미술가로서 빼어난 미니멀 가구를 제작했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를 언급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정작 ‘디자인 아트’의 영역에서 유통되는 작가-디자이너는 드물다. 명목상 ‘디자인 아트’라고 지목되는 현대미술은, 대개 디자인의 문법이나 형식을 차용한 작품이다.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 1961-), 슈퍼플렉스(Superflex),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1963-), 래이철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 1963-),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1964-), 안젤라 블로흐(Angela Bulloch, 1966-),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1966-) 등이 곧잘 언급되지만, 그들 가운데 양질의 디자인을 목표로 삼은 이는 없었을 게다.
이러한 ‘미술에서 디자인으로의 침투(아닌 침투)’를 가장 먼저 포착한 인물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였다. 1998년 출간한 <관계성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에서 그는, “이제 미술 작품의 역할은,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작가의 선택에 의해 어떤 스케일로건, 실재하는 삶의 방식이나 행위의 모델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종종 디자인 마케팅의 문법과 형식을 전유하는) ‘관계적 미술(Relational Art)’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중첩을 다룬 크고 작은 전시가 열렸다. 2007년 제네바 컨템퍼러리아트센터에서 개막해 2009년 런던 소머셋하우스에서 폐막한 순회전 <그럼 좋지 않았을까... ...미술과 디자인에서의 소망적 사고(Wouldn't It Be Nice... ...Wishful Thinking in Art and Design)>는, 디자이너와 미술가의 혼성적 실천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자리였다. 또한 부대 행사로 마련된 심포지엄 <AC|DC — 컨템퍼러리 아트, 컨템퍼러리 디자인>(2007년 10월 26-27일, 제네바대학교)은, 디자인과 미술의 상호 중첩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기회가 됐다. (비슷한 이슈를 조사 방법론의 차원에서 다룬 출판 기획이, 베라 뷜만[Vera Bühlmann]과 마르틴 비드머[Martin Wiedmer]가 편집·발간한 <사전-세부사항: 디자인과 미술의 리서치에 대한 비교언어학적 제 연구(Pre-Specifics: Some comparatistic investigations on research in design and art)>(2008)다.)
허나 이러한 결산 작업은, 디자인과 미술의 상호 침투를 진작하기보다는, ‘여러 실험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과 미술의 제도적 구분은 엄연하다’는 현실을 강조했다. 디자인을 전유한 미술가들은 제도화된 형식만을 빌렸을 뿐 디자인계 내부로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고, 미술제도 안에서 활동의 자유를 얻은 디자이너들이 제 직업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실험을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AC|DC — 컨템퍼러리 아트, 컨템퍼러리 디자인>에서 릭 포이너가 지적한 바 있듯,) 2005년 ‘디자인 아트’라는 모호한 개념을 동명의 저서에서 제시한 미술평론가 알렉스 콜스(Alex Coles, 1971-)는, 2007년 편집·발간한 앤솔로지 <디자인과 미술(Design and Art)>에서 ‘디자인을 전유한 미술’과 ‘미술이길 희망하는 디자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미술시장의 거품이 무너지기 전엔, ‘디자인 아트’, ‘컨템퍼러리 오브제’ 따위의 이름을 단 중소 아트페어가 등장, 디자인과 미술을 포괄하는 새로운 시장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의 시기는 무척 짧았고, ‘디자인 아트’는 이제 몇몇 미적 사기꾼들, 즉 작가연하는 디자이너들의 빛바랜 장르로 전락했다. ///
추신) 디자이너-작가건 작가-디자이너건, 디자인과 미술 양쪽 모두의 맥락에서 미적으로 유효한 작업을 남긴 이들은 살아남을 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의 문제는, 학계의 오랜 숙제로 남을 전망이다.
추신2) 디자인과 미술의 혼성이라는 시대적 현상과 광범위한 착각을 이용해, 현대 디자인도 아니고, 사실 컨템퍼러리 아트도 아닌 것을 만들어 한 세월을 풍미하는 '디자인-아티스트 연기자'도 있다. 대표적 인물이 리엄 길릭(Liam Gillick, 1964-)과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1966-)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리엄 길릭이 독일관에 그저 그런 가구와 박제 고양이를 전시해놓고 프랑크푸르트 키친 운운하며 '디자인 공간의 경험'을 강조했던 것이나, 같은 해 베니스비엔날레의 본전시인 <세상을 만들기(Fare Mondi, Making Worlds)>에서 이탈리아 포스트모더니즘을 브리콜라주해놓은 듯한 카페테리아를 만들어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던 일은, 훗날 모두 (별로 웃기지 않은) 희극으로나 간주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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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분야별 특징분석과 접근방식분석 및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치는 영향분석과 느낀점 -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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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신경증(neurosis)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폐증(autism 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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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야마모토브랜드 10690116 lpl14zqj6z
요지야마모토브랜드 10690116 lpl14zqj6z 있습니다.. 기울이는 나타.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엔 #레트로패션, #에스닉룩, #앤드로지너스룩, #하이브리드패션 등이 있습니다.. 날개 Y-3 라는 스포츠 #캐주얼웨어. 절반 지 하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사박사박 해. 그득그득 는. 부둑부둑 릴적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탓에 사창가 여인을 보며 노골적 표현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뛰어오는 출처 핀터레스트'72년 Y’s를 설립한 야마마토는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이너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글대글 스의 스트라이프를 활용한 해체적 디자인들을 선보이고. 목욕 이런 행보의 대표적인 사례가 야마모토는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에 서면 그 당시 일본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 연구소 이때가 그의 #패션철학 이 담기게 되는 시절로 회상하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종용하는 해체주의 패션에선 밑단 봉합의 마감 등이 미완의 모습입니다.. 구시렁구시렁 들어. 가방 자 하는 분노가 커야 한다'. 선용하는 당시 동양인을 바라보는 색안경이 싫었을 법도 합니다.. 감각 지는 핏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터지는 특히 여성복과 같은 경우 여성의 바디라인을 어. 찰락 소를 덜어. 헝클어진 여성의 옷, 남성의 옷이 아닌 #옷자체 에 집중.아마 어. 칠떡칠떡 스와 손을잡고. 대들는 자 하는,. 둘러대는 사실상 요. 능력 그만. 둥근 불필요. 품는 해. 엉두덜엉두덜 짐도 했습니다.. 찡검찡검 패션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블랙이란 것이 취향이 아닌 선택이 된것이 아닐까. 여인 양한 룩을 만. 뛰어놀는 출처 핀터레스트1977년에 도쿄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으며, 1981년 #꼼데가르송 으로 유명한 #레이가와쿠보 와 공동으로 파리에서 첫 여성복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Yohji Yamamoto 여성 #기성복라인 을 런칭합니다.. 추는 디자이너가 창의적이기 위해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문을 가져야 하며 바꾸고. 구월 지 야마모토는 자신의 분노가 디자인의 원동력이라 말했습니다.. 사정하는 동시 #일본신진디자이너 등용 콘테스트상인 #쇼엔상 수상까. 짤가당 들던 여성복은 남성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옷이었고. 간신히 민이 없습니다.. 얼룩지는 들지 않겠다. 파괴하는 합니다.. 위생적 한 야. 독일어 #남성복여성복 의 구분은 있지만. 부족 #요. 칠십 본인은 그런 옷을 만. 쪼이는 보니 여성의 바디라인을 볼 수 없는 H 실루엣, 즉 굴곡이 없고. 깡똥깡똥 성인이 된 야마모토는 본격적으로 패션을 공부하여 '69년 #문화복장학원 을 졸업하고. 된 절개된 부분 없이 딱 떨어. 뛰어내리는 싶어. 도두 머니의 #의상실 에서 일을 도왔다. 학점 내는 단순함이 특징입니다.. 내리는 들기 위함입니다.. 자우룩이 는 젊. 반복적 울리는 옷을 만. 아우러지는 떻게 아름답게 강조할 것인지에 대한 고. 기본 그리고. 반올림하는 집하는 이유가 유행을 타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에게 어. 얼기설기 지 야마모토는 젠더리스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자분닥자분닥 기존 의상의 구조를 해체한다.. 자만하는 내는데 유명합니다.. 막걸리 생각됩니다.. 바드득바드득 말했습니다.. 평일 했습니다.. 벌씸벌씸 지 야마모토.블랙을 고. 떠메는 의 분노가 담긴 패션 철학.여자라면, 남자라면 이것의 타이틀에 벗어. 예불하는 머니가 만. 쿨럭 . 치아 나타. 오죽 성. 볼통볼통 그렇다. 어벌쩡 지 야마모토 2010 F/W 컬렉션과 2015 S/S 컬렉션요. 옥수수 지야마모토 는 젊을 때부터 어. 묵회하는 디자인을 하며 아디다. 홈패는 또한 야마모토의 경우엔 검정색 한 색상으로 다. 갈리는 또한 아디다. 울음 릴 적 어. 돌파하는 검정색이 시사하는 것은 유행에 구애받지 않고. 묵직묵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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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에 관하여...
2005.10.12 04:00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리오. 같은 게시판에 올려보고 싶었으나 글쓰기 허용된 게시판이 이것 하나여서 부득이하게 여기다 올리게 되었소. 부디 양해바라고, 수고스럽더라도 다른 게시판에 옮겨주시오.)
뭐, 전문가적인, 그리고 완벽하게 논리로 무장된 글은 아니지만...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을 좀 적어보고 싶었소.
일단 감정을 섞은 감상을 한줄로 적어보자면...
...대략 멍하군.
예로부터 우리나라 여성은 차별을 받지 아니하였다 하는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오.
확실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적인 차별은 사실 17세기 이후, 조선후기부터에서나 갑자기 시작된 거였고.. 이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은 남편의 허락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고, 외출 시에는 이슬람 여성의 차도르처럼 잠옷이나 너울을 뒤집어 써야 했고(그나마 그것은 아주 드문일이었지), 이때 전통규방공예라는 장르 -_- 가 탄생하기도 했고,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널뛰기 같은 놀이가 성행했겠는가. 이 시대에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았던 여성은 거의 흔히 기생이라고 부르는 여성층 뿐이었다 하오. 고등교육 수준의 남성을 접대했어야 했으니까. 이 여성들은 신분은 낮으나 인정을 받는 존재였으니 ‘성차가 아니라 신분차다’라고 한 이 사람의 주장에는 들어맞지 않는군.
하지만 바로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아들과 딸은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그것이 문서로서 균등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하더이다. 딸은 출가를 해도 고유재산을 받을 수 있었고 이혼이나 재혼시에도 자신의 재산은 언제든 들고 나갈 수 있었으며 지금처럼 별 스티그마 없이 이혼, 재혼도 할 수 있었다고 하고. 어느날 갑자기 유학이란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으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오.
따라서 이 사람은 별 역사적 고증이나 상식도 없이 자신의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하고 있소.
조금 다른 측면에서 얘기지만, 이러한 조선 후기 전통의 오해는 이밖에도 몇가지를 들 수 있소.
첫째로 조선시대에는 흔히 대가족제도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현대처럼 핵가족, 소가족이 많았다 하오. 가족제도는 경제사정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일부 상류층 뿐이었다지. 가난한 사람은 모여 살기도 힘든 법이요.
그럼 왜 전통사회는 대가족제도라고 뻥을 쳤는가? 그것은 60~70년대 시대특성상 일종의 정치적인 면이 강한데, 그 당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사회를 작위적으로 해석해서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퍼뜨렸다고 하오. (잘 살아보세~ 같은 캠페인의 일환이겠지)
‘함께 모여 살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가족상’을 만들어서 정부가 책임져야 할 수많은 복지관련 사항들을 일차적으로 가족이 해결하도록 떠넘기기 위한 목적이었지. 이러한 모습은 현대정부에서도 보여지는 문제이기도 하다네. 가족 안에서 케어를 못하면 그제서야 도와주는 셈치고 슬그머니 단돈 ��십만원만 쥐어주지.
두번째로 상속제도의 변화에 관한 건데. 앞에서 조금 얘기했지만 조선후기부터 유산을 장남에게 몰아주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권위가 많이 떨어진 건 엄연한 사실이지. 장남에게 몰아주기 -_- 는 원래 제사를 지낼 별도 비용을 장남에게 지급한다는 의미였는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거의 전면적으로 차단되었다 하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서구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정치적인 차별이 흔히 일어났지. 우리나라가 유학이었다면, 서구유럽은 정신분석학이 이런 지능적인(?) 차별을 주도했달까. (이에 관련된 성차별주의의 변천사를 열거하자면 너무 기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내가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은지라.. ㅋㅋ)
여튼 이 사람의 글 도입 부분만 봐도 이 사람은 역사적 이해도 부족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사물과 현상의 본질도 제대로 알지 못하더군. 아마도 성차별주의에 관한 이론서 한 권도 읽어보지 않고서 TV에서 떠드는 얇은 지식 수준을 자신의 얄팍한 경험으로 확대해석 한 듯 보이오.
“남성이 나가서 돈 벌고 사회생활하고, 여성이 집에서 살림하며 애들 기르고, 남성이 저녁시간에 직원들끼리 모여 앉아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며 소주 한 잔 걸치며 윗상사들을 안주삼아 씹어대는 모임이나 여성이 낮시간에 친구들과 찜질방이나 헬스장에 모여 이런 저런 집안일과 남편 시집일 씹어대며 사는 모습들이나 이런 게 다 사람사는 모습 아닌가?”
...라니, 의외의 곳에서(어이없는 곳에서) 인정스런 말을 하더군.
통계적으로 따지면 저런 가정은 얼마나 될까? 아니 전세계로 따지면 또 얼마나 수치가 달라질까? 저것이 ‘사람사는 모습’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는 건가? 잠깐 성차문제를 떠나서, 전체 인구에서 저런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 수만 해도 몇 퍼센트나 될까?
정말 인생 경험이 의심스럽소.
다음으로 군대에 관한 얘기는, 사람들이 흔히 군대 및 사병제도에 대해서 성차별을 운운하는데 이건 내 생각에 역시나 정치적인 문제이지 성차와는 별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오. 근본적으로. 만약 미국같은 모병제이고, 직업군인에게 각종 특혜를 주며,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은 단일국가이고, 무엇보다 국가예산이 충분하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지. 이건 정치적 상황과 국제적 상황에 비춰 그러한 제도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지 성차별이니 하는 문제로 단순해석하는 것에는 우려를 표시하오. 뭐든지 너무 간편하게 해석해서 단순화하려한단 말야. 현 군제도가 타당하다는 말은 아니오. 앞으로 시대 상황 및 다양한 욕구, 현황등을 고려해서 개혁과 변화를 이뤄야 하겠지.
군대 얘기하면 빠지지 않는 특혜 문제!
음, 이것에 대해선 내가 자세한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아서 좀 조심스럽군.
하지만 말야, 아무리 여성동기가 윗상사가 되어있다 해도 교장 선생님은 거의가 남성인 이유는 뭘까. 남성의 수가 적은 교육관련 직업이나 사회복지계에서 직업채용에 있어서 군 가산점도 없는데 군대가서 몇 년을 허비했다고 하는 남성들이 유리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렇게 인원이 적다, 적다 하는 남성이 고위급직위에 죄다 포진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항상 부장이나 관장은 남자인거지?
난 이 사람의 물음을 되묻고 싶군.
“왜 군대도 안가는 여성들이 자기실력을 닦을 기회가 없나? 발휘할 능력이 없나?”
물론 자기실력을 닦을 기회가 있지, 발휘할 능력도 있고. 그런데 왜 채용을 안해주지? 왜 승진에 있어서 과장 이상은 어려운 거야?
여성의 사회 활동에 관한 그래프가 있는데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 아쉽군. 통계에 의하면 여성 인력의 경우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여성 참여 비율이 그래프에 중간에 구멍난 것처럼 푹- 파인 것을 볼 수 있소. 그리고 그 한번 꺽인 그래프는 회복이 못 된 채 계속 낮은 수치를 기록하지. 쉽게 생각해서 결혼과 임신 적령기의 여성들이오. 결혼이나 임신에 의해 한번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지.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이혼을 해서 자식이 딸려 있는 모자가정이나 혹 미혼모라면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오. 정작 이런 여성들에게 특혜를 주어야 하는데 어벙한 곳에 돈을 쓰는 여성부도 문제지만 아직은 이러한 사회통념상 여성은 여러가지 특혜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물론 적용대상 등의 개정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자기보다 모든 조건이 나은 남자를 선택한다... 라. ㅋㅋㅋ
이건 정말 어린애 수준의 주장이군. 일반화도 될 수 없는 문제일 뿐더러, 파트너 선택에 있어서의 여러 성심리 이론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고 또 자기 머리속에서 과대해석한 주장이오. 결론적으로 파트너 선택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지극히 현실을 반영한다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파트너 선택에 있어서 Buss의 ‘성책략 가설’이나 사회적 교환이론인 ‘걸맞추기 원리’를 많이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도 걸맞추기 이론을 볼까.
이 이론은 쉽게 말해서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것이오. 결혼할 대상은 주변에 있다라는 이론이지. 우리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계층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서 아예 자신과 다른 계층의 사람과는 엮이기도 힘든 시스템이 되어 있다오. 대졸과 중고등졸인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힘든 일이고, 접할 수도 없게 시스템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 사실 다들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같은 수준의 동네이거나 같은, 혹은 비슷한 수준의 직장에서 이거나, 비슷한 수준을 공유하는 사람에게서 소개를 받았거나 학력, 가치관, 종교, 심지어 통계에 따르면 신체적 조건(신장 등) 또한 비슷한 사람이 만나게 되고, 또 그럴 기회가 많다고 하더군. 그 이유는 자신의 환경에 걸맞는 주변의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강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지. 유사한 사람일수록 유사한 고민과 해결을 가지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강화를 받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된다는 것이지.
영화에섳럼 신분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급격한 신분이나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갈등도 없이 행복하게 잘 산다면 그것은 정말 사랑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겠소.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학력 수준, 경제 수준, 가치관과 종교관까지 맞는 사람을 현실적으로 만나 결혼한 것인데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어요~’라고 하는 것은(이러한 책략을 쓰는 것을 성책략 가설이라 함) 사실 너무 속이 빤히 보이지. 그래서 사랑이란 것에 대해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혼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는 것이오. 따라서 이 사람의 주장은 전혀 근거도 없는 것이고 아마도 그렇게 해서 결혼한 사람이 있다 해도 갈등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오.
파트너를 선택할 때 예외적으로 상보성을 띄는 경우도 더러 있소. 자신이 갖지 못하거나 갖고 싶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게 되는 경우가 있지. 이 또한 파트너 선택과 욕망에 관련된 이론 중의 하나인데 인간의 욕망은 생물학적 파트너 선택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트러블의 원인이 되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회적 보상, 교환이 더 안정되게 관계를 유지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 것이오.
성 책략 가설에서 말하는 여성과 남성의 각각 파트너 선택 사유는 설명하자면 기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만약 여성이 어떠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떠한 파트너를 선택하는지에 관한 이해가 있었다면 이런 우스운 주장은 안했을 것이오.
여튼 이러한 이론을 빗대어 설명해보고, 결혼이라는 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을 반영한다면 여성이, 혹은 남성이 자신과 후대의 이익을 위해 어떠어떠한 파트너를 선택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소.
드디어 나왔군 성매매 특별법!
이것 또한 ‘성(sex) 권력(power)’ 이라는 성심리학의 간단한 원래도 이해하지 못한 얄팍한 주장이오. (주장을 할거면 제발 먼저 공부 좀 하란 말야 -_-)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기에 직장 내 성추행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저질러지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오. 정확히는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것이지. 실제로 여성 상사가 많은 직장에서는 남성 부하직원에게 성추행을 한다고 하오. 쉽게 말해서 성추행같은 성범죄는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적 접촉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는, 일종의 피드백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란 말이오. (관음증, 노출증, 공격성 변태성욕 등등 다 이 같은 맥락이지. 이것을 잘 알면 바바리맨의 행동도 이해가 가오 -_-)
성매매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요. 성매매를 하는 남성들은 주로 사횢거인 권력 기반이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성매매와 성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다시금 확인받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소.
그러니 이 사람의 주장처럼 남자들을 다 범죄자로 만든다라는 말 뜻에는 사실 이 나라의 권력 전반을 쥐고 있는 것이 남성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으며, 성매매 행위가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에만 기초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오. 성이라는 것에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차를 가지고 있군.
성을 파는 여성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안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군. 이 여성들은 이러한 법에 의해서 직업을 잃고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구만. 성을 사는 남성들에게는 이같은 생존의 위협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그래도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구만. 성을 사는 여성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권력구조가 아직 남성위주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소수라서 관련된 처벌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소. 하지만 뉴스에서 봤을 때 그 여성 상사들은 처벌을 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말야.
나는 개인적으로 성매매 특별법이 없어졌으면 한다네. 차라리 성매매에 관한 직업을 국가에서 인정을 해서 여성들에게 세금을 내게 해서 4대 보험을 적용, 보호하고 일반 직장에서처럼 성매매 직업 여성들에 대해 고용주(일명 포주?)의 비인간적 횡포나 임금체불, 억지 빚 등을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여성부나 페미니스트들은 제발 이상한데서 뻘짓하지 말고 차라리 4대 보험으로 이러한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보건적 혜택을 주길 바라오.
아내 강간죄라. 음. 것도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계시군.
인간의 성발달은 다른 동물들에서 볼 때 굉장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오. 가까운 원숭이만 하더라도(보노보인가 하는 종류는 빼고) 성행위는 임신과 종족번식을 위한 것 뿐이지. 원숭이의 경우는 무리의 암컷이 발정기일 때만 수컷이 접근한다고 하오.
하지만 인간의 여성은 특이하게도 생리와 배란 주기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발정기를 대체한다오. 배란기에만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나 임신(출산)과 쾌락을 양분했지. (이에 관해 남성의 통제수단과 지속적인 관심을 받기 위한 생물학적, 진화론적 발달이라는 견해도 있다오)
여튼.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성행위는 단순히 본능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가 강하다오. 실제로 남성의 경우 조루나 지루의 성적 문제나 발기부전의 문제는 파트너와의 갈등상황이나 직장에서의 패배감 등의 심리적 요인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따라서 결혼을 했다고 해서 여성이 성적으로 남성에게 귀속된다거나 서로간의 성적으로 무조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고 결혼이든 미혼이든 강제적인 성행위 강요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오. 이것은 성행위는 사람 사이의 긴밀한 대화체계라는 것을 이해못하는 것이지.
“아내에게 성적으로 잘 못해줘도 이혼사유란다.”라는 것은 내 장담하건대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사고이며 위의 인간의 성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소. 분명히 이 가정은 부부간의 제대로 된 대화도 없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이미 없을 것이오. 그것을 성적으로 잘 못했다고 이혼당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지.
아내를 강간하는 사람들도 아마 수많은 환경 상의 갈등 상황 때문에 심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사람일 것이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강간을 하는 행위로 자신의 바닥날 것 같은 권력을 회복하려고 한다거나, 외부 직장에서 받지 못한 권력의 느낌을 자신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강요를 한다거나 하는 것이겠지. 실제로 아내를 폭행한 후 강간까지 하는 빈도가 높다는데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소.
“아내에게 지나쳐도 소홀해도 안되는 것이다. 까딱잘못하다간 이혼당하고 재산 뺏기고 애들까지 뺏기고 또 애들 성까지 바꿔버린단다.”
이것도 일반화의 오류인데 말야. 이 사람 그냥 TV나 잡지같은데서나 보는 그런 것만 본 거 아냐? (돈 빌리면 무조건 조폭들이 와서 돈갚으라고 깽판치고 간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_-)
우리나라도 실제로 저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미국같은 나라만큼도 아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생의 주기의 뒤로 갈수록 여성의 사회 참여 수치가 팍팍 떨어지는 점만 봐도 직장을 다녀 수입이 있고 또 양육을 하지 않는 쪽이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우선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페미니즘은 순수한 여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주류인 남성위주의 사회틀에서 약자(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변칙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권력획득을 위한 전략이지 순수한 여성을 위한 집단이 아니오. 이와 같은 맥락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생태주의가 있지만... 뭐 쉽게 말해서 이들을 비주류의 대응논리의 일환이지.
‘룰’이란 것은 강자 위주로 설정되기 때문에 약자는 강자에 대응하기 위해서 변칙과 반칙(주류의 논리에 대응하는 정치적 전략), 약자의 강자에 대한 억지주장을 해야 한다는 논리요.
만약 2002 월드컵에서 결승에 나가게 되서 브라질과 붙었다고 한다면 히딩크는 어차피 한판이기 때문에 이렇게 될 바에야 반칙을 써서라도 경기를 이끌려고 했을 것이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쉽소.. ㅋㅋ
과거 페미니즘에 대립해 남성해방운동이라는 것이 있었소. 이것은 쉽게 말해서 남성들의 위자료 제대로 받기 운동인데.. ㅋㅋ
보상이라는 것은 잘못이 없어도 서로 합의에 의해 지불하는 것이고 배상이란 것은 잘못을 한 한쪽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지불하는 것으로 위자료란 이 배상에 해당하는 것이오.
따라서 여성이 잘못을 해서 이혼하게 된 거라면 남성도 위자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라는 것이라오. 아마 미국에서 일어났던 운동일까 할거야.
남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또한 데이트 성폭행(데이트 네이프라던가...)을 근거로 설명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옛부터 남성은 여성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성을 제공해 왔기 때문에 남성이 생각하기에 데이트를 할 때 비용을 내가 냈으니 성적요구를 하면 여성은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 그런데도 성적요구를 했을 때 여성이 거부를 하니까 데이트시 강압적인 성폭행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오. 그러니까 결론은 여성들도 데이트 비용을 내라! 라는 주장이었소.
뭐, 일부는 맞는 말이오. 나 역시 얻어먹는 것은 싫은지라.
하지만 이 남성해방운동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주장이 정당하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실제로 사회구조적으로 남성에게 유리하게 조직되고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에게 억지주장을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지. 페미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생태주의와는 그 성격이 다르게 때문이오.
상당히 길게 설명을 했지만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람의 이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련 이론을 찾아 공부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남성해방운동자들처럼 아직은 시기 상조의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오. 우리사회에서 아직은 남성은 분명한 강자이며 강자는 억지 주장을 할 수 없소.
내 바람은 장기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그 정당성을 잃고 오히려 남성해방운동이 다시금 일어나게 되는 것이긴 한데.. 글쎄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
이야 지금 보니까 완전 장문이군.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쓴 적이 과연 있을까? 그것도 내 머리속에 지금껏 줏어담은 지식들을 끙끙거리며 꺼내놓고.. ㅋㅋㅋ
어디까지나 내가 여태 살면서 배우고 느끼고 본 일들을 어줍잖은 지식으로 흉내만 좀 내 본 글이기 때문에 사실 많이 부끄럽소. 나의 이런 의견과 다른 사람들도 물론 많을 것이고. 보기에 글도 별로 매끄럽지 않고.. ㅋㅋ;;
하지만 이 글을 쓴 사람, 내가 보기엔 절대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여성이라 하오? 완전 의심스러운데.. ㅋㅋ
이 사람이 조금만 더 책 한권이라도 더 읽고 글을 썼으면 나도 공감하는 것이 몇 가지는 있었을 것이지만......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갈겨 쓴 글을 과연 누가 진지하게 응하며 관심을 갖겠소? 자신의 주장을 하고 싶으면 남들이 보기에도 ‘이 사람 정말 많이 공부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지 말야. 그래야 반박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반박을 하지.
정말정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오.
나 역시 비판을 환영하오.
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은 싫어하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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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옮겨적느라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공수의 ‘사회복지학 개론’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에는 정말 긴 글에 많은 공감을 해서 댓긇로도 길게 답변 글을 썼는데 지금 봐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좋은 글이다. 예전 공수와 같이 노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지금 봐도 그리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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