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thaul
sothaul
一日一文
35 posts
글쓰는 일로 먹고 살고 싶은 솟얼입니다.
Don't wanna be here? Send us removal request.
sothaul · 9 years ago
Text
‘브런치’로 이사
https://brunch.co.kr/@sothaul 애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자객 섭은낭 -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평범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무협이라면 그렇게 흥미진진한 액션류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예상들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액션 시퀀스만큼은 흥미진진했다.
무협이란 장르로 <자객 섭은낭>을 포장하기엔 여기엔 그 단어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장르명으로든 그냥 그 단어로든 대중이 생각하는 ‘무협’은 어느 정도 편향돼 있다. 부흥기였던 80년대 무협이나 혹은 <와호장룡>이나 <영웅> 같은 작품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객 섭은낭>은 전형적인 무협물과는 거리가 멀다. 시대극에 무협이란 요소를 살며시 얹은 정도다. 조정과 ‘위화’라는 번진의 관계를 다루면서도 극적인 전개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부분에서 인물간의 관계를 다루지만 막상 갈등이 엄청나게 크게 벌어지진 않는다.고요와 정적. <자객 섭은낭>이 가진 미덕은 그것이다.
그렇기에 상업영화에 익숙한, 혹은 그 때의 ‘무협’을 상상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당연히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건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 안의 미학적인 부분만 따지자면 이 영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장면이 기막힌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눈이 가는 것은 영화 내내 유지되는 카메라워크다. ‘초미세’라는 말이 붙어야 적당한 트래킹은 그 움직임마다 세밀한 리듬을 유지한다. 간단해 보이는 컷에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그런 카메라워크가 매순간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객 섭은낭>의 특별한 미장센은 ‘장막’을 통해 숨김의 미학을 뽐낸다. 호희와 계안의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베일로 가리고 드러내는 과정으로 어떤 뚜렷함이 아닌 모호함을 추구하는 건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와도 맞닿았다. 자객, 검은 옷의 여인으로 불리는 섭은낭은 계안의 사촌이기도 하다. 검을 위해 마음을 비워하는 것과 과거 특별한 친분이 있는 계안의 곁에 남는 것. 그 두 가지에서 고뇌하는 섭은낭의 심정이 영화 속에서 장막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물론 꼭 장막이 섭은낭의 심정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장막을 통해 샤오시엔 감독은 장면에 겹겹이 층을 배치해 깊이를 부여한다. 그런 장면에서 인물은 뒤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몇 번 씩 희미하게 가려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영화는 몽환적인 색깔을 부여하기도 한다.
단���히 언어로만 말하기에 <자객 섭은낭>은 영화 속 요소를 종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것은 배우의 무표정함이나 유독 강렬하게 구현된 검의 소리, 미술적 요소로 채워진 실내와 그자체로 아름다운 자연의 대비 등 독특한 화면비 4:3으로 표현된 이 세계는 직접 보는 것이 최고의 경험이 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자객 섭은낭>은 예술영화다. 결단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할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에 펼쳐지는 미적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영화만큼 독보적인 경험은 없을 것이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 -메타포가 메타포를 뭉개는 아이러니
꽤 신중하지 않았을까. 감독이자 각본가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그런 만큼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이 영화엔 역사의 의식과 그를 위한 메타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구든 들어봤을 법한 일제시대의 얘기와 신민 의식. 그것이 이 영화 곳곳에 투영돼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친다. 그저 '기대치에 못 미친다'가 아닌 '아예 기대와 다른' 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이자 단점이다. 왜 이해영 감독은 그런 비틀기를 시도했을까.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직설적으로 말해 이 영화가 남들의 기대처럼 흘러 갔다면 최소한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해영 감독의 빼어난 미장센(이는 촬영감독 덕일지도 모른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오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권력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로도 예쁜 여학생 무리, 거기에 박보영과 박소담이라는 방점. 실제로 중반까지는 이 영화가 그럴싸하면서도 예쁜 영화로 된다.
아마 이해영 감독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후반부 전개에 담겨있을 것이다. 뭉개진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이 잊고 있는 그것. 그걸 SF적 상상력과 결합했을 때, 혹은 소녀적 감성과 결탁했을 때 다시 한 번 상기할 만한 여운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역사적 ���실을 포용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완전히 비뚤어져버린다. 은유적 방식을 통해 전달되던 스토리에 역사적 사실과 극적인 상상력이 접목됐을 때 그것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게 특이한 냄새를 풍��다. 결국 역사가 역사를 집어먹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경성학교>가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영화에 소녀적 감성이란 점에서 유사한 <장화, 홍련>을 생각해보자. 이름에서부터 설화를 따온 이 영화는 정반대로 지금에 있을 법한 심리를 그려내며 마지막까지 있을 법한 얘기로 둔갑시킨다. 그것이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다. 공포라는 것이 단순히 귀신이나 살인마 등 이질적 존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성학교>는 그 점에서 공포영화로서도, 팩션물로서도 실패한다. 여기서 공포는 결국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귀결되고 역사는 송두리째 파괴된다. 만일 <경성학교>가 아예 팩션으로 달렸다면 의외로 시원한 쾌감을 안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적 아픔을 은유로 승화하려 했고, 그것은 우리가 아는 역사보다 도리어 약했기에 이질감을 자아내고 만다.
<경성학교>는 그래서 더욱 아쉽다. 좋은 의도가 살아날 수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예쁜 여배우들과 아름다운 미술과 연출로도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영화는 역시 만들어져봐야 알 수 있는 모양이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로봇, 소리’ 부족해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
 <로봇, 소리>는 나름대로 잘 만들어졌다. 꽤 오랜 시간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적절한 방향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공개된 시놉시스보다 훨씬 폭넓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영화에 큰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본 관객이나 마케팅하는 입장이나 중점을 부성애와 로봇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 소재를 전면으로 내세우면 비판을 피할 길이 없기도 하다.
 어쨌든 <로봇, 소리>는 다루기 무척 어려운 소재를 절제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최대한 덜 상업적이면서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감정으로 변환시킨다. 이성민이 연기한 해관이 딸의 진실과 마주하는 그 순간, 무척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전까지 다소 유쾌한 분위기와 무거운 분위기를 절묘하게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로봇, 소리>는 시종일관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무척 SF적이지도 않다. 상상력은 SF에 기반을 두되 사회적인 관계와 배경을 고스란히 적용시켰다. 때문에 유머는 일상적이며 통용되는 감정 역시 누구나 공감할만하다.
특히 빛나는 건 이성민과 이희준의 열연. 이성민은 정말 완벽에 가까운 연기적 완급을 보여줘 관객을 웃게 했다가도 금방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희준은 국정원 요원이라는 틀을 완전히 부수며 직업인으로서의 요원을 정확하게 묘사해 극의 현실성을 더한다.
 그러나 <로봇, 소리>가 완벽에 가까운 것은 딱 중간부까지다. 해관이 딸의 주변인물들을 통해 진실을 마주한 이후부터는 영화가 종잡지 못하게 흔들린다. 애초 영화 설정인 ‘위성 로봇’이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움직임을 개입시키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수습하고자 후반부에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그 전까지 잘 쌓아왔던 것과 달리 얼렁뚱땅 전개가 눈에 보일 정도이며 지나치게 극적인 후반부를 만들긴 하지만 그것 역시 주어진 상황일 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소재를 다루는 탁월한 감각에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영화다.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주목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쿵푸팬더3> 재미와 난잡함이 왜 공존하는건데
 전작을 건너뛰고 극장에서 신작을 보게 됐음에도 다행히 전혀 거슬리는 것이 없어 참 다행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왜 이렇게 숨가쁘게 달리는지 알 수가 없다.
 <쿵푸팬더3>는 전작과 거의 동떨어졌음에도 마치 연속되는 느낌을 가졌다. 누가 보면 <퀀텀 오브 솔러스>라고 여길 정도다. 마치 전작의 승리 이후 이틀 만에 사건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급하다. 정작 현실적인 시간으로는 5년 만의 복귀임에도.
 좋은 점부터 찝어보면 <쿵푸팬더3>는 만화의 느낌을 극대화한다. 오프닝과 중반부의 화면 분할 연출은 시원한 감각의 영상으로 관객들의 호흡을 흥분되게 한다. 캐릭터들의 만담 역시 세밀한 감정선보다 개성에 중심을 두고 시도때도 없이 쏟아낸다. 지루하다 느낄 틈이 거의 없다.
 장면을 그릴 때의 감각도 빼어나다. 포가 카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적이어서 따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니메이션의 자유자재인 색감 조정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분명히 아쉬운 건 그 컨셉이 명확해 영화가 속도감만 느껴진다. 중국을 배경으로, 그것도 무협을 원천으로 두면서도 느긋한 여유가 없다. 계속 웃기려고 하고 계속 말하고 계속 부딪힌다. 그러다가 갑자기 ‘교훈 타임’으로 넘어가더니 감정적인 자극을 권한다. 그 순간 영화는 전형적인 성장물보다도 떨어지는 묘한 느낌을 남긴다.
 사실 액션도 신선하단 느낌이 사라졌다. (2편을 안봤다고 하더라도) 1편의 정통 무협과 변칙 액션이 뒤섞였던 신선함은 그저 타격을 과시하는 액션으로 변모해 답습이란 느낌 이상을 주지 않는다. 시원한 감각은 있어도 참신한 발상은 없다.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내가 픽사 작품을 “드림웍스적이다”라고 표현했던 게 후회됐다. <쿵푸팬더3>에 비하면 (평균적인) 픽사의 작품도 훨씬 참신하고 기발하다.
 <쿵푸팬더3>는 분명히 재밌다. 짧고 강렬하게 관객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조금 멀리서 보면 커다란 상투성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조금 더 발전했더라면, 고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작품을 뒤덮는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헤이트풀 8 - 타란티노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요컨대 ��질을 하다보면 한 번쯤은 ‘아, 내가 외국인이었으면’하는 순간들이 온다. 어릴 적 프로레슬링을 실제로 보고 싶다고 느꼈을 때나 엄청 좋은 평을 받는 게임이 한글화가 안 되었거나. 그러나 이번처럼 단 한 작품만으로 ‘내가 미국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느낀 경우는 없었다. <헤이트풀 8>은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다.
 ��  물론 <헤이트풀 8>은 (지나치게 얌전하지만) 번역도 꽤 잘 돼있고 어쨌든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다보면 분명 한국인으로도 100% 이해 안 되는, 혹은 재미를 느낄 수 없는 부분들이 보인다. 이 작품을 별로라고 생각하면 이런 부분들도 쉽사리 지나가겠지만 흥미를 느낀다면 이 부분들을 만끽할 수 없다는 걸 탄식하게 된다.
    단도적입적으로 이 영화는 ‘웨스턴’이다. 미국의 시대극이다. 그리고 타란티노는 (전작에서 그랬듯) 이 영화 속 인물 하나하나에게 그 역사에 적합한 캐릭터성을 부여한다. 그들의 억양, 사상, 행동 등은 모두 당시 시대상과 지역 특색에 맞게 구축돼있다. 그 각각이 자체로도 색깔을 내기는 하지만 기본 지식이 있다면 훨씬 더 재밌을 것으로 보인다.
    간단한 예로 오스왈도(팀 로스 분)가 잡화점 내부를 미국 각 지역으로 구분할 때, 그것은 미국의 기본 지식이 있는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긴장감-재미(내가 이해를 못했기에 그것인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없어도 <헤이트풀 8>은 그야말로 완벽한 영화다. 영화로서의 예술을 극치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프닝롤에서부터 느껴지는 ‘영화’에 대한 애정과 점차 속도감이 느껴지는 전개는 호불호는 갈릴지라도 굉장한 장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난 타란티노 작품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구체적인 평가는 어울리지 않다. 굳이 뽑자면 배우들의 연기,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작중 유쾌하면서 서늘한 분위기 등 그가 항시 배치시켰던 장점들과 몰입감이 그대로 있는 편이다. 그 요소들이 이 영화를 ‘걸작’에 올려놓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타란티노의 팬들에게는 흡족한 선물임은 틀림없다.
여러 가지 작품에 비유되고 있는 작품인 만큼 혼합적인 느낌을 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추리극이라기엔 허술하고 단순한 스릴러라기엔 다채로운 이 매력의 영화를 나는 '타란티노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명명하고 싶다.
1 note · View note
sothaul · 9 years ago
Text
셜록 : 유령신부 - 팬심이 과하면 팬들도 화낸다
 ‘닥터 후’ 뉴 시즌도 열심히 보고 ‘셜록’도 열심히 본 나로선 스티브 모팻을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는 모팻이라면 <셜록 : 유령신부> 역시 괜찮은 작품이 나올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원작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강했던 걸까. <셜록 : 유령신부>는 드라마의 교두보라기에도 애매하고 스페셜 에피소드라기엔 지나치게 세심해 도통 이해불가한 요소들을 나열한다.
 물론 TV에서 방영된 ‘셜록’도 원작의 요소를 엮어가며 셜로키언들을 열광케 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사건이 떡밥은 남기되 한 에피소드로서 완결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편에서는 그 완결성이 현저하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즌 4에 대한 예고가 거대해서 완결성 자체를 희석시키고 만다.
 홍보에 낚여서 봤다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애초 ‘셜록’을 전혀 모르면서 낚시 마케팅이라는 둥, 왜 극장개봉이냐는 둥 투덜거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BBC(와 모팻)는 애초부터 그런 ‘낚시’를 위해 마케팅을 했으며 한국 수입/배급사도 응당 그 홍보 방식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완결성이 있었다면 그런 불만은 없었을 터. 전반부의 ‘유령신부’ 사건과 후반부의 (사건의 진상말고) 극적인 진실이 엮어지면서 ‘유령신부’의 결말/해결은 몹시 흐지부지되고 만다. 앞으로 시즌 4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단순히 복선만을 위한 에피소드가 아니라면 좀 더 정돈되게 두 에피소드를 엮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드라마 ‘셜록’의 팬이라면 응당 즐겁게 만끽할 순 있다. 나 역시 몇 번의 웃음과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긴 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스페셜 에피소드라고 인정하고 싶진 않다. 독자적인 작품이라기보다 시즌 4가 나와야 해석할 수 있는 (팬심 섞인) 별책부록이지 않을까.
2 notes · View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굿 다이노 - 픽사의 기술적인 기념비가 될지어다
 작년에 <인사이드 아웃>으로 호평을 받았던 픽사가 꽤 짧은 텀을 두고 극장에 돌아왔다. <굿 다이노>는 예고편을 공개했을 때도 공룡과 소년이란 소재 덕분에 애니메이션과 공룡 팬들에게 주목받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초기 공개했던 ‘무성영화 급’ 대사없는 영화의 이미지는 아니다. 오히려 그간 픽사 영화들에 비교해보면 훨씬 직접적인 대사도 많고 농담도 적지 않은 작품 중 하나다. 그런 의미로 드림웍스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고.
 이래저래 나에게는 <라이온 킹>을 연상케 했다. 아들 앞에서 죽은 아빠(심지어 높은 곳에서 그것을 보는 아들), 하이에나 무리를 연상시키는 소도둑떼와 익룡들 등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궁금하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확답은 없는 모양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쓰였지만 색을 통해 인물의 끈끈함을 표현했는데 ��로와 스팟은 서로의 피부색을 눈동자 색이다.명확하진 않지만 다른 인물들은 제각각인걸 보면 의도한 듯 보인다.
 처음 ‘인간과 강아지’라는 설정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세상에 농작하는 공룡이라니. 초반부는 그 느낌이 너무 괴랄해 어색할 지경이었지만 좀 지나면 캐릭터들에게 이입되면서 견딜 만했다. 다만 이것이 ‘인간-공룡/개-인간’이란 은유로서 거듭나고 싶었으면 후반부의 극적인 재회는 없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건 기술적 성취 때문이다. 그간 픽사가 인물의 그래픽으로, 예를 들면 설리반의 털이나 <업>에서의 동물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이번 작품은 자연 풍광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최적화돼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항상 극장에서 챙겨봤지만 이번만큼 롱쇼트(가 많았던 적도 없지만)에 감탄을 한 적은 드물었다.
 결론적으로 <굿 다이노>가 픽사 최고작품이 되기는 힘들다. 지나치게 대사 위주에 에피소드적이며 덜 여물어진 티가 나기 때문. 그러나 분명 기술적인 면에서는 일종의 척도로 뽑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 - 올바른 극장판의 예
 원작을 잘 모르고 그렇다고 미리 사전 정보를 많이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포스터와 캐릭터들에게 이끌려 극장을 찾았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선 딱 느껴졌다. 
 “정말 원작을 잘 알고 있구나”
 아무리 <더 피너츠>를 본 적 없어도 다른 매체에서 되는 패러디나 짦은 영상, 업로드된 원작은 살짝 본 적 있다. 거기서 봤던 움직임이나 캐릭터의 성격 등 이 영화는 그것들을 담아내는 데 치중한다.
 이른바 ‘극장판’이란 명목 하에 억지로 스케일을 크게 잡거나 추가적인 변화를 가하지 않았다. 3D 그래픽에서도 ‘손맛’을 느끼게 하고자 고안된 방법들도 정말 작품의 질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정갈하게 마무리하면서 원작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도 훌륭했다.
 다만 그만큼 이 작품은 원작에 빚지고 있는 게 많다. 93분이란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만큼 다소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았다. 특히 극 중 극인 스누피의 소설이 유독 극의 흐름을 잘라내는 느낌을 준다. 귀여움의 약발이 한시간 이상은 먹히지 않는 것.
 그럼에도 꽤 귀엽고 따뜻한 작품이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혹은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볼 것을 넌지시 권해보고 싶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 단평
(참고로 본인은 극장판을 7일 전에 봤다.)
<내부자들> 때 언급했던 단점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심지어 더 심해진 부분도 종종 있다.
일단 정치적 메시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잖게 들 수도 있다. 특히 이강희가 일본어를 사용하는 장면은 보수층=친일파라는 의식을 살며시 내비치는 듯해 보여 굳이 필요했나 싶다.
 오프닝 역시 안상구에 대한 정보를 더 주긴 하지만 “제가 영화 보러 온 건 아니잖아요”라는 인터뷰이의 말이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얘기다’라는 관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여 도리어 우스웠다. 엔딩 역시 인물의 입을 빌려 관객의 분노를 자아내는 수준의 것에 불과했고.
또 장면이 추가돼서 전혀 다른 느낌을 내는 부분도 있지만 장면 연출에선 다음컷과 미묘하게 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해 계륵인 장면도 있었다. 굳이 있어야 되나 싶은 부분도 적지 않았고.  예컨대 50분이나 늘어났음에도 <킹덤 오브 헤븐> 급 대격변은 아니었다. 대체로 장면에 대한 설명이나 전후관계 설명이 많아 좀 더 강렬한 느낌을 원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고로 개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던 극장판의 손을 들고 싶고 은유가 사라진 이 버전은 ‘아직도 내부자들을 안 본 사람’ 정도만 추천하고 싶다. 
0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내부자들 - 모두를 외부자로 만든 이분법
 여기저기서 들려온 호평과는 달리 조금 어색했다. 이 영화가 가진 장점만큼이나 내게는 단점도 크게 다가왔다. 일부 평들은 ‘<베테랑>처럼 시대의 답답함을 청량감있게 날려준다’고 했지만 내가 느낀 이 영화의 흥행요소는 반대다. 시대의 더러움이 명배우들을 통해 재현됐다는 것. 그것도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서.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로 보인다.
 이 영화는 <베테랑>과 길을 달리한다. ‘갑질’ 정도의 문제를 넘어 사회 속 정경유착을 정면으로 묘사하며 그것을 해결하는 인물 중 범죄자가 있다는 것이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다.  분명 이 영화가 가진 진취적인 접근법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은연중에 커다란 이분법을 남긴다. 바로 보수-중장년층-권력층은 변태적 욕망의 노예이나 진보-청년층-노동자는 그런 부분을 거세했다는 것을 통해. 이 지독한 이분법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 이 영화가 가진 허상, ‘순수한 정의는 승리할지도 모른다’라는 가능성은 단순한 망상으로 드러난다.
 영화를 천천히 복기해보면 이 영화 속 인물들 중 ‘섹스’에 미친듯이 홀린 인간은 전부 늙은 권력층이다. 그들은 젊은 여성들을 부리며 술자리에서 성기로 농담 따먹기나 한다. 반면 이 영화의 젊은 인물들은 정말 여자라곤 관심도 없어보인다. 깡패인 안상구조차 볼뽀뽀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 유장훈이나 악당인 조상무는 아예 여자와의 관계를 그려지지 않는다.
 좌파적인간인 나조차 이 방법은 꽤 치사해보였다. 아직도 성관념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이분법으로 악당을 묘사한다는 건  비겁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늙은 남자배우가 벌거벗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릴 관객이 있을 텐데 그런 인물들이 모여서 변태짓을 하는 걸 그리다니. 영화적인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자극해 분노를 사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현실임을 모르는 건 아니다. 또 원작에 기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를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부분을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저 재밌다고 넘길 것이 아니라 다시 고민해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만 넘는다면 영화는 꽤 그럴싸하다. 연출 역시 호흡을 길게 빼지 않고 적당히 치고빠지기를 잘하고, 배우들은 과연 명배우들답게 주조연 가릴 것 없이 훌륭하다. 액션장면이 많진 않지만 재치있게 표현돼서 인상깊기도 했다. 다만 극 후반에 힘이 빠졌는지 다소 지루해지는 것은 아쉽다.
4 notes · View notes
sothaul · 9 years ago
Text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 잘 만든 또 하나의 상품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여러모로 잘 만든 영화다. 미국 현지의 압도적인 평이 대변하듯 이 영화는 지난 프리퀄 삼부작의 애매한 정당성을 단박에 완벽한 시리즈로 포용해줄 정도다. 
 그러나 좀 더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그렇다고 “작품”이란 단어가 어울리는지 고민해볼 문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스타워즈”라는 팬문화를 정확하게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스타워즈가 현재 영화로서만 기능하고 있는가?”
 스타워즈 판권을 디즈니가 사고 그걸 J.J. 에이브람스가 만든다고 했을 때 수작이 나올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깨어난 포스>는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갖는 잔상은 온전하게 “단 한 편”의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시리즈”를 아우르는 잔상도 아니다. 확연하게도 에이브람스(및 제작진)는 이 영화를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의 변용으로 만든다.
 알다시피 에이브람스는 <스타트렉 더 비기닝>로 성공적인 리부트를 했었다. 거기서는 기존 “스타트렉” 시리즈를 뒤엎고 결합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때문에 그 이전 시리즈를 알던 팬도 모르는 영화 팬도 그 자체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깨어난 포스>는 <새로운 희망>의 재현을 목표로 한 듯 기본 구조부터 세세한 장면까지 오마주와 변형을 반복한다. 결국 이는 기존 팬들에게는 특별함을 주지만 신규 팬들에게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구식’으로 보인다.
 물론 나는 “스타워즈”의 팬으로, 그리고 SF영화의 팬으로 이 모든 것을 즐겼다. 하나 누군가 <깨어난 포스>가 어떤지 묻는다면 나는 한 번 더 되물을 것이다.
 “원래 스타워즈 시리즈를 좋아하시나요?(혹은 아시나요?/보셨나요?)”
 분명 신날 만큼 잘 만들고 훌륭한 복원이었다한들 그것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리뷰는 이미 본 사람에게는 이로울지 몰라도 안 본 사람에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애초 “스타워즈”가 아이콘인 이상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선 반복적인 관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것이 속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꽤 흥분되는 경험을 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쯤에서 좀 더 칭찬을 하자면 이 영화는 굉장한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그리고 우수한 후속작이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스타워즈”의 질감을 살려주고 영상은 이 영웅담을 황홀할 정도로 포장한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확실히 이 영화는 상품이다. 그것도 소유욕에 안달날 만큼 잘 만든. “스타워즈”는 신화가 됐고 그것의 상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널렸다. 디즈니와 에이브람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누구라도, 스타워즈를 좋아한다면 이 상품을 사야만 할 것이다.
1 note · View note
sothaul · 10 years ago
Text
크림슨 피크 - 때깔은 좋은 공포멜로
 사실 전작 <퍼시픽 림>에서부터 마음 놓았다. 어쩌면 코지마와 합작하려는 “사일런트 힐”이 좋은 복귀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일런트 힐”이 엎어지고 <프로메테우스>로 준비하던 <광기의 산맥>이 엎어지면서 어쩌면 델 토로의 계획은 완전히 꼬였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델 토로는 팀 버튼과 비슷한 부류의 감독이다. 디자인만으로도 주목받는 감독. 팀 버튼은 지난 전시회로, 델 토로는 디자인 저서로 자신들의 팬덤이 두터움을 증명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커리어마저도 비슷해진다. 시대가 지날수록 명작이 되는 몇 작품을 뒤로 하고 서서히 수작은커녕 평작을 찍어내고 있으니까.
 <크림슨 피크>는 기존의 델 토로의 장점과 단점이 정말 극대화된 작품이다. 영상적인 면에서는 흠잡을 게 없을 정도다. 으스스한 유령의 집 분위기를 형상화한 저택 디자인이나 종종 등장하는 유령의 디자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폐허와 저택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표현한 알러데일 홀은 “호그와트” 이상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크림슨 피크>가 전적으로 실패한 건 부족한 서브텍스트이다. 끊임없이 이디스가 말하는 “유령은 과거, 상징”이란 것이 정작 이 작품에는 묻어나지 않는다. “과거”인 것은 맞으나 그것을 “상징”으로 승화하지 못한다. 보다 분명하게 이중적인 스토리를 지녔던 감독의 작품 <판의 미로>와 놓고 본다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층적인 의미를 포용하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지나친 복선이 전개를 예측하게 만들고 그 결과 힘빠지는 인물의 퇴장만이 남는다. 작품의 분위기와 엔딩으로 봤을 때 분명 여운이 남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남매의 비극적인 운명과 달리 상투적인 성격묘사는 그런 여운을 느끼는 걸 죄책감 들게 한다.
 그럼에도 대단한 건 배우들이다. 특히 주인공 삼인방은 각자 맞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한다. 톰 히들스턴은 매력적인 토마스 샤프를 보여준다. 원래 이 역할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였다고 하는데, 이 대본 그대로 그가 연기했다면 글쎄, 분명 아쉬웠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라 생각할 정도다. 미아 바시코프스카 역시 이디스라는 섬세한, 그리고 예민한 역할을 잘 보여주어 관객에게 공포감을 전달한다. 그러나 역시 제시카 차스테인이 가장 빛나는데, 공감하기 힘든 인물을 공감하게끔 할 정도로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 클라이막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 같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작까지 겸하면서 돌아온 영화가 다소 미적지근한 작품이라는 건 팬으로서 아쉬움이 크다. 자신이 남긴 <판의 미로>라는 명작을 언제쯤 다시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이제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설 뿐이다.
0 notes
sothaul · 10 years ago
Text
스펙터 - 시리즈를 존중하려다가 스스로 빠진 함정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 007은 본 적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이번 시리즈는 <퀀텀 오브 솔러스>부터 꾸준히 극장에서 보았다. DVD로 뒤늦게 본 <카지노 로얄>이 가장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이번 작품이 공개된 이후로 계속 미적지근한 반응만 받고 있는 걸 알지만 <스펙터> 역시 오랜만에 아이맥스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평가들은 대체로 옳다는 걸 절감했다. 전반적으로 영화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상영시간에 비해 스토리도 빈약하고 볼거리도 많은 편은 아니다. 물론 <스펙터> 역시 로케이션의 아름다움, 차분하면서도 적당히 유머있는 분위기, 멋진 본드카와 예쁜 본드걸 등 기존 작품의 장점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스펙터>가 지난 9년간 이어진 “다니엘 크레이그 007”의 완결편과 같다는 점이다. 적당히 좋아서는 안 될 작품이란 말이다. <스카이폴>로 007 시리즈 전체를 방점을 찍었고 이제는 남은 이야기를 멋지게 끝내며 <퀀텀 오브 솔러스>에 모자랐던 부분까지도 채워줘야 했다.
 <스펙터>는 일종의 탐정놀이라고 볼 수 있다. 단서가 던져지고 주인공은 단서를 찾아 이동한다. 그러면 또다른 단서가 생기고 그 단서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어떤 진실에 다다른다는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007 시리즈”는 일반적으로 이런 씬 구성을 갖는다. 먼저 장소에 대한 마스터 쇼트(과 자막), 그리고 007이 이동하는 몇 가지 쇼트,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몽타주, 그리고 또다시 마스터 쇼트. 이런 고전적인 편집구성은 템포가 굉장히 빠른 다른 액션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다. 이런 설명적인 구성이 007 시리즈를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 지나치게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과정이 좀 더 알차게 보여지려면 주인공이 끊임없이 위기에 겪거나 ���예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야 했다. 그러나 <스펙터>에서의 007는 “날 사라지게 해줘”를 실현시킨 Q 덕분에 오히려 어떠한 압박도 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임무 수행을 해나간다. 007이 멀쩡하면 <스카이폴>처럼 본부가 위기라고 겪어야 하는데, 위기가 다가오는 걸 끊임없이 떡밥만 던질 뿐, 실제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007이 돌아온 클라이막스에서다. 그러다보니 <스펙터>는 전체적으로 템포가 느려지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스펙터”가 내세운 계획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계획 자체는 문제가 없다. 정보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후 정보력을 통해 세계를 지배한다. 여기서 이 영화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건 ‘정보’가 물질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정보가 얼마나 큰 권력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는 다 안다. 그러나 그 큰 권력으로 표현되는 ‘정보’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모른다. <스펙터>에서의 정보도 마치 모든 걸 부릴 수 있는 듯 포장되지만, 실제로 그들의 정보력은 나약한 악당들의 처지 덕에 제대로 힘써 보지도 못한 채 몰락하고 만다. 그 권력을 만들기 위한 ‘힘’은 매우 강력하게 그려지면서도 멍청하게 그 힘을 도리어 수단을 위한 수단으로만 쓰는 것이 관객에겐 어처구니없게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문제는 “스펙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제작진 스스로 4부작(다니엘 크레이그 007)의 모든 배후를 스펙터로 지목하면서도 그 강력함을 무엇으로 표현해야할지 헤맨다. 그러다보니 그 수장인 ‘오버하우저’를 연기한 크리스토프 발츠의 캐스팅도 의문이다. <스카이폴>에서 실바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최소한 금발로 등장하며 기존과 다른 이미지로 관객에서 낯설음을 준다. 그러나 오버하우저는 그림자 속 실루엣으로 엄청나게 비밀스럽게 등장하면서도 그 뒷면엔 정말 익숙한 발츠가 존재할 뿐이다. 심지어 그에게 주어진 명분조차 그렇게 적당한 것도 아니다.
 모든 단점에도 <스펙터>가 정말 나쁜 영화인가. 모든 기대감을 접고 본 관객으로서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다소 처지긴 해도 여전히 만원으로 세계 여행을 하는 기분은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카지노 로얄> 때부터 줄곧 이야기의 완결을 기다려온 팬으로서는? ‘그렇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아쉬운 영화이다.
0 notes
sothaul · 10 years ago
Text
검은 사제들
 한국의 엑소시스트라. 다른 창작계에서는 종종 묘사되었지만 어째서인지 영화에서는 낯설기도 하다. 최근들어 무당과 관련한 작품은 등장하였지만, 신부의 엑소시즘은 참 오랜만이긴 하다. 그것도 굉장히 호평받은 단편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니, 관심이 없던 작품이라도 일말의 기대는 생길 수밖에 없다.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서 (지금은 냉담자지만) 아직도 사도신경정도는 외울 정도인 나로서도 <검은 사제들>의 태도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다.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은 사실상 미약할 뿐더러 의식의 시작부터는 김윤석/강동원/박소담이란 배우들의 열연에 굳이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그럴싸하게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느껴질 만큼 신경을 많이 썼다. 도입부의 설정 소개나 작중 인물들의 행동도 세심했다.
 본격적인 의식 시작을 하면서 영화는 긴장감을 가지며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공포를 적절히 배합하여 보조사제가 느낄 두려움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박소담의 힘이 컸다.
 그러나 좋은 단편영화적 감각이 반드시 좋은 장편영화 감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작품이 증명한다. 단편영화를 안 본 이상 얼마나 다른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시나리오에서도 보였을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이 작품의 제작이 조금 성급했거나 제작의 입김이 더 쎘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본적으로 <검은 사제들>이 취하는 태도는 후반부에 응집되어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인정받을 수 있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고된 과정을 지나가야만 한다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전반부의 많은 시간은 낭비된다. 
 구조로 봤을 때 <인셉션>과 유사하다. 기본적인 설정을 소개하는 도입-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통한 결전준비-반동인물과의 결전이라는 전개과정은 무척 유사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 주인공의 접점이 미비하다는 결점으로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일종의 성장물이면서도 최준호 부제의 성장은 사실상 그 자신의 의지만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극적인 공감을 얻는 것에 실패한다.
 또한 모든 과정에서 위기가 거의 없다. 의식 직전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두 인물이 겪는 극적인 위기는 하나도 없다. 그나마 최준호 부제가 종을 못 찾는 것 정도인데 그것도 간단한 우연으로 해결되고, 김 신부가 겪는 위기는 전혀 없다. 오로지 그들은 위기의 암시만을 겪는다. 김 신부 신체의 상처/스승의 사령이나 최 부제의 트라우마/감시명령 등만 있을 뿐, 그것을 극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이 없다. 때문에 전반부 전체가 그럭저럭 볼만할 뿐, 실질적인 재미는 전무하다.
 최후의 결전 역시 비슷하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세 사령을 없애고 악령을 마주하기까지 분위기는 그럴싸하지만 배우들의 힘든 표정과 연기만 나열될 뿐,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그러다보니 악령이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위기가 일시에 찾아오고 전과 다른 전개의 힘으로 이 영화 전체가 괜찮아보이는 속임수를 쓴다.
 이 후반부도 아쉬운 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의식 과정을 연출하면서 잘 보여줘놓고 악령이 돼지에 빙의된 이후 돼지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작중 전체 분위기를 해치는 엔딩장면(<부러진 화살> 이후 이렇게 감 떨어지는 엔딩도 오랜만이다).
 전체적으로 평이하지만 그래도 한국영화계에서 드문 장르물을 선점했다는 것은 호의적이다. 그러나 만일 후속작이 나온다면 좀 더 “검은 사제들”다운 이야기로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0 notes
sothaul · 10 years ago
Text
마션 - 다시 활기를 얻은 거장
  SF영화라면 소식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마션>만큼은 참 소식이 느렸다. 예고편이 뜰 때쯤 ‘아, 이런 영화가 개봉하는구나’ 했고, 한 4차 예고편이 나왔을 때야 ‘리들리 스콧 감독 꺼였네?’라고 알았다. 오매불망 <프로메테우스 2>를 기다렸기에 조금 밍숭맹숭했다.
 그런데도 참 다행인 건 그런 밍숭맹숭한 기분, 기대해야 하나 싶었던 기분을 모조리 날릴 만큼 멋진 작품이란 사실이다. 그것도 요 몇년간 “지나치게 ~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SF영화의 동향을 뛰어넘을 만큼. 
 물론 <마션>이 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원작을 모르고 봐도 꽤 잘 옮겼다고 느낄 ‘각색 작품’이다. 그래서 온전하게 그 구조와 특성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SF영화로서 흥행하고 있지만 그 반응이 폭발적이지 않은 건 그 지점에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어떤 흥분, 신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건 SF영화, ‘리들리 스콧의 SF영화’에서도 도드라지는 <마션>만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의 한줄평에서 말하듯 이 영화는 의외로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어떻게 우주 난민을 그린 영화가 쾌활할 수 있는 걸까.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하고 있다.
 하나는 주인공의 성격이다. 하드SF든 소프트SF든 SF영화 주인공은 다소 어두운 캐릭터로 기억된다. 스톤 박사, 쿠퍼, 빈센트, 네오 등 인간 주인공은 물론이고 기억에 남는 캐릭터도 다스 베이더, 스미스 요원, 할 9000과 같은 어두운 면모를 가지는 편이다. 스콧 옹의 작품이야 데커드, 리플리, 데이빗 같은 인물들이 즐비하고. 그런 면에서 마크 와트니는 정말 아무런 소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관객들 앞에 던져진다. 인트로에서 그는 그저 말많은 수다쟁이처럼 보이다가 고립되고 난 후 전문가로 보여진다. 관객이 동경하는 전문가적 자세와 동시에 기록을 남기면서도 농담을 섞어가고 희망을 놓치지 않는 점은 극도의 시너지를 낸다. 특히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장면들을 기존의 연출 스타���이 아니라 기록카메라에 저장되는 영상 방식을 그대로 취해 마크가 건네는 독백식 대화를 구현한다. 관객은 그 대화 속에서 마크의 성격을 알게 모르게 공감하게 된다. 또 극의 70퍼센트 이상, 엄밀히 말하면 모든 극의 장치가 마크 와트니의 “행동”에서 시작한다. 때문에 이 영화 전체가 ‘마크 와트니의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매우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도 (마치 전염되어가는 하품처럼) 유쾌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의 확장이다. 마크 와트니의 가족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크와 NASA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물론 생존과 탈출이라는 전개상 가족의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마크는 부모님 얘기를 단 한 번 꺼낼 뿐이고 심지어 지구와의 첫 통신에서도 부모님은 언급하지 않는다. <마션>은 의도적으로 가족의 단위를 넓게 확장하고 있다. 바로 마크의 팀원들까지로. 
 따지고 보면 뭐 당연한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팀원들의 선택과 희생은 곧 가족영화에서는 익숙한 전개이고, 굳이 가족으로 설정하지 않더라도 그정도는 팀원( 곧 친구)이니까, 라는 설득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러나 2013년의 SF <그래비티>, 2014년의 <인터스텔라>와 <마션>을 동일한 선상에 둔다면 그 가족의 부재는 독특한 요소가 된다.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는 가족이 없어서 의지를 잃어가고 있고, 반대로 <인터스텔라>는 부녀의 서로간의 관심 덕에 인류를 구해내는데 <마션>에서는 있는 가족도 투명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이 흐름상에서 보면 <마션>은 더이상 가족의 유무, 혹은 가족의 부재를 가족 단위의 확장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보다 팀원을 찾는 마크, 공동체적 단위로 연설하는 NASA, 화성으로의 복귀를 결정하고 나서야 등장하는 팀원들의 가족 등 그런 의미를 내포하는 단서는 다양하다.
 이런 극중 분위기에 맞춰 스콧 감독도 적잖게 연출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위에서 언급한 실제 카메라의 앵글 차용이나 타임랩스의 몽타주적 사용, 현대 음악 사용 등 스콧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래도 SF영화의 거장답게 퀄리티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듯 단점 역시 뚜렷하다. 극중 확실한 터닝포인트는 없이 계속되는 장소 변화는 영화의 긴장감을 다소 흔드는 경향이 있다. 초반부 마크의 생존기는 긴장감 속에서 유머를 섞으며 조절을 잘하지만 점차 NASA 내부의 문제로 확산되면서 그 긴장감이 와해되는 감도 없지 않다. 또 짧게 지나가는 인물 소개는 바이럴 영상을 안 본 사람들에겐 와닿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자막을 이용하는 외국영화다보니 빠르게 읽지 못하면 놓칠 가능성도 크고. 
 그래도 좋은 작품임은 확실하다. 초반부의 재미는 정말 확실하고 극중 맷 데이먼의 연기는 커리어 중에서도 단연 손꼽힐 만큼 좋았다. 감히 말하자면 그가 연기한 마크 와트니를 싫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또 변화한 리들리 스콧의 연출력 역시 일품이고, 무엇보다 이 만원의 화성여행을 피할 필요가 있을까.
0 notes
sothaul · 10 years ago
Text
사도
 역덕후도 아니고 (근현대사를 제외한) 국사는 오히려 역알못에 가까운 입장에서도 이 영화는 무척 기대되었다. 좋아하는 배우 1순위인 송강호와 최근 연기자의 입지를 단단히 한 유아인, 그리고 알게모르게 흥미가 갈 수 밖에 없는 스토리까지. 사극 드라마도 안 보는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궁금했다.
 의외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평범했다. 커다란 과장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갈등이 극대화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을 나열하면서 너도 나도 보여줄 뿐,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몫이었다. 그 과정은 치열한 두 사람의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꽤 담백했기 때문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기대했던 것과는 지나치게 달랐다. 내심 이준익 감독만의 사극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황산벌>의 독특함이나 <왕의 남자>의 기묘한 코드 사용 같은. 그러나 <사도>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그냥 사도세자의 얘기였고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였다. 좋은 사극이었지만 시선을 확 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대부분은 배우들의 연기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는 영화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애초 두 배우와 사방에 포진한 조연배우들 모두 실력파인 것을 생각하면 계산에 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연출적 계산에 호응하듯 송강호/유아인의 연기를 개별적으로도, 파트너로서도 뛰어나다. 다만 (내가 평소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연기를 이르듯) 두 사람이라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만일 <베테랑>이 <사도> 이후에 개봉했으면 유아인의 평가는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필 <베테랑>에서 정말 잘했기에 이 영화의 연기가 내겐 다소 묻히는 감도 있었고.
 이 영화의 최고 장점은 단연 배우들의 연기인데 그 중에서도 최고로 뽑고 싶은 건 ‘세손’ 역을 한 이효제이다. 어린 아역임에도 깊이 있는 세손 역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 영화의 비극, 즉 아버지와 아들이란 테마가 한층 두터워질 수 있었다. 많이 지적하는 ‘후반부의 사족’이란 점도 이미 세손을 이효제가 충분히 소화했음에도 굳이 그 유명한 배우를 통해 남은 감정을 소화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부분도 있다.
 아쉽게도 영화적 성취를 지난 흥행작들보다는 적다고 생각한다. 메시지가 무척 뚜렷했던 <암살>이나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하여 현실을 타파한 <베테랑>과는 달리, 그리고 이전 사극 흥행작들이 각자 자신만의 색을 냈던 것과 달리 계획적인 연출은 아니었다고 느꼈다. 다만 테마 자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것을 볼 때 장기적으로는 다시 분석해볼 만한 요소는 있다고 본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