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
Explore tagged Tumblr posts
Text
youtube
"Benny Goodman - Goody Goody"
땅고 지인이 페이스북에 "친구가 구디역 근처에 스튜디오를 차렸다"는 취지로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올림. '구디역'이 어딘지 몰라 구글 검색했더니 '구로디지털단지역'의 준말.
기왕에 전철역 줄임말을 찾아보니 '고속터미널역 = 고터', '가산디지털단지역 = 가디'라고 동일한 패턴으로 줄여 부르는 반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경우 "동역문"보다는 "디디피(=동대문 디지털 플라자)"를 선호하는 듯? 구식 사람인 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보다는 '동대문운동장', '구로디지털단지' 보다는 '구로공단'이 더 익숙하지만서도.
문득 유시민 씨가 구로공단과 이화여대 앞을 비교하며 "콘트라스트"라고 표현한 글을 인터넷��서 읽은 기억이 떠올라 다시 찾아보니 출처가 '어떻게 살 것인가' 책 243쪽인가 보다.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재인용.
"…구로동 야학교사 시절을 생각하면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저녁 무렵 구로공단 진입로와 이화여대 앞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격할 수 있었던 강렬한 콘트라스트다.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가 된 구로공단 진입로에는 고된 하루 일을 끝낸 여성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퇴근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도 웃는 사람도 드문 침묵의 행렬이었다. 그 시각 이화여대 앞 골목은 강의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여학생들로 붐볐다. 그들은 봄날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양쪽 모두 스무 살 갓 넘은, 동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나는 둘 모두를 보았다. 모든 면에서 그들은 달랐다. 옷차림, 피부, 표정, 걸음걸이까지, 마치 인종이 다른 것 같았다…"
우연히도 "구디"라는 귀여운 어감의 애칭까지 얻은 현재, 그 동네 과거를 상상하긴 어렵다. 또한 나는 우연히 발음이 같은 빅밴드 시절 스윙 재즈를 좋아한다. 1936년 마티 말넥 (Matty Malneck)이란 재즈 바이올린 연주자가 작곡한 '구디 구디(Goody Goody)'란 곡. 최초 녹음은 '테드 월리스와 스윙 킹즈(=Ted Wallace and His Swing Kings)'란 스윙 밴드가 했다고 하지만, 내가 이걸 알게 된 거는 같은 해 베니 굿맨(Benny Goodman) 악단도 녹음했기 때문.
개인적으로 밀롱가에서 AM(=Alternatvie Milonga)으로 이런 스윙 재즈 나오면 좋으련만 아마도 땅고인들 취향은 아닌 듯? 가령 '미국인이 되고프냐(=Tu Vuo Fa L'americano)', '라짜렐라(Lazzarela)'처럼 미국 냄새가 덜 나야 좋아하는 거 같다.
1 note
·
View note
Photo

우리에게 이런때도 있었지. #공돌이 #공순이 라는 말이 흔했던 그 시절 #1960년 #1970년 #구로공단 이 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이 있었을까 하던 시절이 있었다. https://www.instagram.com/p/BxO5qXElPkZ/?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42zqsdq9tyl8
0 notes
Text
데이트하고 왔습니다.
차 없으면 연애하기 힘들다고해서
이번에 97년식 아반떼 린번 뽑았구요
여성분 집앞까지 매너있게 픽업!
첨에 못알아보셨는지 자꾸 어딜 가시길래
뒤에서 크락션 이빠시 눌러서 겨우 태웠네요.
구로공단 공장길 쪽으로 드라이브 쏴악~하구
근처맛집 공장 월식사 전문 자매식당에서
제육정식 두개 시켰는데 잘 못드시길래
제가 남은거 다 조졌죠ㅋ
후식으로 코스모스다방 쌍화차 계란띄워서
두잔 시켰는데 노른자 목에 넘어갈때
헛구역질 하시드라구요~ 귀여워 ^^♡
무사히 데이트 마치구 집앞에 내려드리구
오늘 즐거웠다고 카톡 남겼는데
차단 되있네요. 머죠 이 먹튀는?!
4 notes
·
View notes
Photo

독산동 구 구로공단 개발안된 공장들(독산역과 가산디지털단지역 사이에서) https://www.instagram.com/p/CNW--PWlWfa/?igshid=ibpwdyzz39p6
0 notes
Photo

오늘 교육 돌면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을 갔다 왔는데 참 잘되어 있네요^^ https://www.instagram.com/p/B5Htd4Kl5_R/?igshid=1dh1sc365g82k
0 notes
Text
[최범의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3) ‘미술수출’에서 ‘디자인 서울’까지…경제 위한 도구 전락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712062140005
국가주의의 그림자
1967년 9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디자인센터를 방문해 남긴 휘호 ‘미술수출’.
1967년 9월1일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디자인센터를 방문해 휘호를 남긴다. ‘미술수출(美術輸出).’ 이것은 당시 국가 최고 지도자가 디자인계에 내린 명령이었다.
■ ‘미술수출’이라는 명령
‘미술수출’은 ‘미술을 수출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술은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미술이 아니고 ‘응용미술’, 즉 지금의 디자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수출��� 의미도 디자인을 수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수출을 위해 디자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수출’은 ‘수출을 위한 디자인을 하라’는 일종의 교시였다. ‘미술수출’, 나는 이 네 글자가 지난 50년간 한국 디자인의 유일 이념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일 이념은 유일 체제를 낳게 마련인데, 그것은 바로 국가 주도 ‘디자인 진흥 체제’이다.
박 대통령은 매달 개최되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수출품 포장이 부실하여 클레임이 제기된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1969년 기존의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를 수출디자인센터로 개칭하고, 그와 별도로 한국수출품포장센터를 설립하였다가, 1970년에는 다시 이 둘을 통합하여 한국디자인포장센터를 출범시켰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1991년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으로 개칭되었다가 2001년 현재의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으로 되었다.
이 유구한(?) 기관의 명칭들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 디자인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수출품의 포장, 바로 그것에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골판지나 크라프트지 같은 포장지 생산이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주요 사업이기도 했었는데, 구로공단 내에 생산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정부에서 설립한 디자인 진흥기관의 이름에서 ‘포장’이라는 글자를 떼는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이다.(2001년의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 진흥의 출발이 수출품 포장이었고, 진흥기관의 명칭에 오랫동안 포장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국가 차원 디자인 정책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중요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의 공공 부문이 디자인을 이해하는 기본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정신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러한 정신은 수출품 포장에서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근래의 간판개선사업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미술수출’이었다.
■ 경제 개발과 ‘동원된 디자인’
사람들은 디자인처럼 말랑말랑하고 소프트한 분야는 국가 권력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오늘날 디자인은 소비사회의 꽃으로서, 산업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고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 교환되며 개인의 욕구와 취향을 충족시켜줌으로써 사적 영역을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은 최종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적 영역이 결코 공공 영역과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공공 영역에 의해 창출되고 끊임없이 포위되어 있는, 그리하여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일상적 경험인 사회에서 그것은 결코 순수하게 사적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처럼 사적 영역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페미니즘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때 디자인은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상의 디자인 경험은 개인적이지만 그것의 생성과 작용은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한국 디자인은 경제 개발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동원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 다른 분야와 다르지 않다. 사회학자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면서 “그것은 ‘근대화(개발, 산업화, 발전 혹은 성장)’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혹은 그렇게 인식되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이다. 근대화가 지체되어 그것이 국민적·민족적 달성 과제로 되어 있는 특성과 그것을 ‘전투적’으로 달성하고자 하고,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특성이 개발동원체제에는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동원은 바로 민족적·국민적 목표를 전투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위로부터의 전략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후마니타스)
그러니까 박정희의 ‘미술수출’은 그러한 위로부터의 전략적 행위의 일환으로서 디자인을 동원하기 위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산업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실무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온 것이 한국 디자인 역사의 커다란 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의 영향력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했지만, 디자인에서도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저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무튼 박정희는 한국의 윌리엄 모리스였고,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박정희는 ‘미술수출’ 이념의 고안자일 뿐 아니라 경부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디자인하는 등 직접 실행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기념관을 가보면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를 지낸 박정희는 다소 전인적인 면모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웬만큼 그리고 풍금도 잘 쳤던 것 같다. 그는 ‘새마을노래’와 ‘나의 조국’을 직접 작곡, 작사하기도 했다. 북한 최고의 미술평론가가 김일성(“우리의 미술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미술로 발전시키자”)이고, 최고의 영화이론가가 김정일(1973년 <영화예술론> 집필)이라면, 박정희는 그 둘을 합쳐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디자인은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도구였으며, 디자인 진흥 정책은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자체가 국가에 의해 창출된 영역이며,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 집단의 형성 자체가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모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상공미전을 돌아보고 있는 박 대통령.
사실 ‘미술수출’을 하나의 디자인 이념으로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디자인 고유의 철학이나 가치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디자인을 수출 위주의 경제 성장 도구로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디자인관 이외의 디자인관이 이 땅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자인 혁명’이니 ‘디자인 강국’이니 하는 말들도 결국은 디자인의 경제적 가치를 절대시한다는 점에서 그 세련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미술수출’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박정희가 그런 교시를 내린 것 못지않게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는 데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박정희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그와 다른 디자인 이념을 제시한 디자인 전문가는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볼 때 한국의 디자인이란 그러한 일극체제에 통합된 기능적인 하위영역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디자인의 관료주의화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디자인 진흥정책이 결과한 것은 디자인의 관료주의화였다. 디자인의 관료주의화라는 말은 얼핏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역시 디자인과 같이 부드럽고 크리에이티브한 분야가 어떻게 관료주의화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디자인처럼 부드럽고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조차 관료주의화되었다는 것이 사실은 진짜 문제이다.
앞서 나는 박정희의 ‘미술수출’을 한국 디자인의 유일 이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유일 이념을 구현한 유일 체제로서 ‘디자인 진흥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러한 유일 이념과 유일 체제가 결과하는 것은 디자인의 관료주의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관료주의는 좁은 의미의,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즉 공공 부문에 한정된 것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디자인 관료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 영역만이 아니라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영역(아니 차라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의 디자인 제도 전반(정책, 교육)의 성격을 한마디로 관료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한 사회의 디자인은 제도화된 영역 이외의 생활세계 영역이 존재하고 이것은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한국 디자인의 관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사회가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를 만들어온 사회에서는, 디자인 사회가 국가의 디자인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디자인 정책이 디자인 사회를 창출해온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 영역의 디자인 사회 자체가 국가의 디자인 정책에 의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수출’이라는 이름의 국가 디자인 정책.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제1회 상공미전 개막식.
그래서 한국의 디자인 진흥 정책은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자체가 국가에 의해 창출된 영역이며,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 집단의 형성 자체가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모전(멀리는 조선미술전람회,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1960년대부터는 상공미전-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디자인 제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대학의 교수가 되는 과정 자체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디자인 사회의 경쟁과 선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방적으로 권위를 부여한 제도적 장치(공모전)에서의 등용과 해외 유학을 통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구성된 디자인 대학 교수집단은 산업 관료집단과 파트너가 되어 디자인 진흥 체제를 구동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띤 디자인 진흥 체제야말로 ‘미술수출’로 상징되는 유일 디자인 이념의 실제적인 구현체였던 것이다.
제1회 상공미전 포스터.
“정책이란 국가가 하기로 혹은 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든 것”(토머스. R. 다이)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보면, 결국 한국 디자인과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1960년대 이후 한국 국가가 디자인과 관련하여 무엇을 하기로 혹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는가 하는 것이 되겠다. 이것은 한국의 권위주의 국가가 현대디자인에 끼친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라는 형태를 통해 표출되는 국가의 디자인 행위는 그 반대편, 즉 대중의 생활세계 디자인과 비교해볼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디자인 정책은 그 반대편인 생활세계에 대한 방기와 무책임, 나아가 혐오와 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디자인 진흥 체제는 대중의 생활세계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보다 국가 주최의 공모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환경을 가진 사회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모두 거기에 순응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세계 디자인이 왜 이렇게 황폐한지에 대한 대답도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는 자원을 독점하고 선별적으로 분배하며, 국가 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에 보상을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 국가에 충성하는 디자이너는 점점 많아지는 반면 생활세계를 아름답게 하는 데 관심을 갖는 디자이너는 갈수록 줄어든다. 국가주의 디자인이 빚은 결과는 이런 것이다. 1960년대의 ‘미술수출’에 의해 착근된 디자인 의식은 지방자치시대에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고 최근의 ‘디자인 서울’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래서 한국 디자인에 드리운 국가주의의 그림자는 여전히 길게 꼬리를 드리우고 있다. 아니, 아직 그것을 꼬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0 notes
Text
'꼰대세대'?
'꼰대세대'?
누가 이 들에게 과연 버르장머리 없이 '꼰대세대,라고 함부로 말할수가 있겠는가???
지금 60대~80대 밥 먹듯이 굶고 살아온 개발 세대들이 살아온 길~!!!
1. 그들은 <호롱불> 세대었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2. 그들은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한겨울도 '뒤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일''을 봤다.
3. 그들은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 양동이로 물길어 ''항아리''에 담아놓고 마셔야 했다.
4. 그들은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5. 그들은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6. 그들은 <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7. 그들은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8. 그들은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9. 그들은 <보자기> 세대였다.
98%는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10. 그들은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는 '새총'을 만들었다.
11. 그들은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빵'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12. 그들은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13. 그들은 <주판> 세대였다. 100%가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14. 그들은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졸업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15. 그들은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16. 그들은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17. 그들은 <사글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대부분이 "사글세 단칸방'' 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18. 그들은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 하고 가난이 지긋지긋하여 그 가난을 이겨내고자 ''목숨'' 걸고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19. 그들은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당시 세계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자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
20. 그 들은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결혼하여 갓태어난 핏덩이 자식을 떼어놓고 평균 5~6년씩이나 열사의 나라 '중동사막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돈''을 벌었다.
핏덩이가 5살이 되어 처음본 아빠를 몰라보고 모르는 낯선 동네 아저씨가 엄마 곁에 다가오는줄 알고 울면서 경계하며 엄마와 떼어 놓는 진풍경도 벌어진 세대들이었다.
* 이러한 고난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무능한 정치와 쇄북정책 등 무능한 왕권국가 형태가 크게 작용한바 크다.
이 가난의 역사의 탈피는 누가 뭐라해도 60대~80대들 소위 개발서대들 그 들이 몸을 던져 쉼 없이 열심히 일을 했으므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분들을 "꼰대"라 말 하는가?
이들은 지금도 재활용 휴지를 줍는 ''부모''도 있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일요일과 쉬는 날이라는 개념도 없이 쉬지 않고 매일 매일 열심히 일을 한 세대들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었던 세대들인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 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0 notes
Photo






구로공단 반세기 기념 특별전 <가리봉 오거리> 전시 도록 서울역사박물관
0 notes
Text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 구로공단, 한국 김현주.....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 구로공단, 한국 김현주…..
한해가 지나가는건 정말 빠르네요 많은소식이있었는데 김현주 볼까요? 나아가 내 가족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을 조명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정치인들의 관점에서만 주로 서술돼온 대한민국 대신 우려 주변의 수없이 많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도 충분히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어요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애 넷 딸린 대한민국 아줌마’ 내 엄마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에 대한 우리 가족의 대체적인 시선이 그렇다. 별생각 없이 엄마에게 밥해달라고 하고, 짜증도 엄마에게 푼다. 가끔씩 걸려오는 엄마 전화는 무시하기 일쑤다. 늘 옆에 있지만 그래서 소중함을 못 느끼는 존재, 그게 엄마다. 2015년 한가위를 맞아 ‘엄마’란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전업주부인 우리…
View On WordPress
0 notes
Photo

1980년대 #한국수출산업단지 #구로공단 지금의 #구로디지탈단지가 예전엔 이랬다. 그러게 생각하보니 지금은 없어진 종로통 의 #화신백화점 #쁘랭땅백화점 등 지금은 없어진 그것들을 내가 다 기억을 하는거보니. 나도 이제 좀 살았나보구나. ㅎ 예전엔 #동물원 이 #창경원 에 있었지 https://www.instagram.com/p/BwacR-7FUFM/?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h5b7jw9rzfx8
0 notes
Text
🇰🇷 누가 이분들에게
“꼰대세대”라고 하는가?
🇰🇷 누가 이분들에게
“꼰대세대”라고 하는가?
🥀 지금 60~70~80 세대들은 ‘젊은시절’이렇게 살아왔고,
지금의 캥거루 세대들을 키워왔다.~
1. 그들은 <호롱불> 세대이었다.
“전깃불”이 없어 “호롱불”을 켜놓고,
‘앉은책상’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2. 그들은 <측간> 세대이었다.
“실내 화장실”이 없어 살을 에이는 듯한 한겨울 새벽에도 ‘마당 한구석탱이’에 있는 ‘재래식변소’에서 “볼일”을 보아야만 했다.~
3. 그들은 <우물> 세대이었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머리에 얹거나 물지게로 물길어 “항아리”에 담아놓고 먹야만 했다.~
4. 그들은 <가마솥> 세대이었다.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부엌한구석’에서 “목욕”을 해야만 했다.~
5. 그들은 <손빨래> 세대이었다.
“세탁기”가 없어 ‘한겨울’에도 개울에 나가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해야만 했다.~
6. 그들은 <자전거> 세대이었다.
“자가용”은 물론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자전거’타고 다녀야만 했다.~
7. 그들은 <고무신> 세대이었다.
“구두”는 물론 ‘운동화’도 없어 “한겨울”에도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녀야만 했다.~
8. 그들은 <까까중> 세대이었다.
“이발소”에 갈 ‘돈’이 없어 일년내내 ‘까까중머리’를 하고 다녀야만 했다.~
9. 그들은 <보자기> 세대이었다.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녀야만 했다.~
10. 그들은 <고무줄> 세대이었다.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 ‘고무줄’로 “새총”만들고 “줄넘기”를 하면서 놀아야만 했다.~
11. 그들은 <강냉이> 세대이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갈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 ‘학교’에서 “강냉이죽”을 끓이거나, “강냉이빵”을 만들어 ‘급식’을 제공하는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12. 그들은 <주경야독> 세대이었다.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등을 하고서 밤이 이슥해서야 “학교숙제”를 해야만 했다.~
13. 그들은 <주판> 세대이었다.
“컴퓨터”가 없어 다섯알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해야만 했다.~
14. 그들은 <일제고사> 세대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평가”했다.~
15. 그들은 <입학시험> 세대이었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루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16. 그들은 <공돌이 공순이> 세대이었다.
너무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를 해야만 했다.~
17. 그들은 <삭월세> 세대이었다.
“신혼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삭월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다녀야만 했다.~
18. 그들은 <월남전> 세대이었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돈을 벌어와야만 했다.~
19. 그들은 <광부.간호사> 세대이었다.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만 했었다.~
20. 그들은 <중동노동자> 세대이었다.
‘국가와 가족’을 위하여 이역만리 ‘중동지역’에서 땀흘러가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국가와 가족을 위하여 일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누가, 이분들에게 “꼰대”라고 하는가?~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부모”가 된다.~
가족을 위하여 불을 피우고 집안에 “못”을 박는 “부모”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부모”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부모”는 “어린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울타리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싸운다.~
부모는 자식에게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들일 뿐이다.~~
-<옮>-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