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무리와 11월의 시작이 조금은 우울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고. 각자의 길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썸머와 P. 그들과 함께 살던 곳을 정리하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짧지만 정이 들어버린 이 공간을 져버리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셋이서 의자를 끌고 와 꾸역꾸역 앉던 주방도, 다 같이 나란히 누워 시간을 보내던 P의 방에도, 내방과 썸머의 방에도 우리가 늘 있었기 때문이다.
*썸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파리로 갔고, P와 나는 베를린에 남았지만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가는 것을 감수해야 했던 요즘. 사실 기분이 많이 걱정스럽다.
늘 썸머와 함께하던 저녁 식사도 없을 것이며. P의 요란한 노랫소리에 깨어나는 아침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투닥대는 모습이라거나, 내 방 창문을 통해 출근하는 P를 멀리 바라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체감하던 어느 가을날, 썸머와 P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슬퍼졌다.
*썸머가 떠나던 날 낮.
우리는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했고, 평소에 가고 싶던 카페에도 들러 마지막을 기념했다. 느리듯 빠르게 흘러가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만 슬퍼하라는 그 애의 닦달에 못 이겨 우리는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슬픔을 덮고자 하는 농담들은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던 집은 텅 비었고. P가 몰래 사와 건넸던 장미꽃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썸머가 먼저 떠나고, 그녀의 길을 응원하는 마음 반, 계속 같이 있기를 원하던 마음이 반반씩 공존했다. 우리는 다시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거니까. 아프지 말라며 그녀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안아주었다.
나와 P는 그녀를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우리의 앞날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침묵을 깨고서 그는 내게 말했다.
다 괜찮을 거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등을 쓸어주며 다 괜찮을 거라고. 그때 참 안정을 느꼈다. 이별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려운 것도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은 나 자신이 싫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또한 나와 같은 울상을 하면서 말했더랬다. 그 모습이 베를린 곳곳에 남아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앉은 벤치에도, 자주 가던 카페에도, 저 길모퉁이에도 그 모습이 있었다.
내가 이별에 이렇게나 취약한 사람이었다니. 그러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때마다 눈물을 한껏 쏟아 낸다거나, 피를 시원하게 철철 흘린다거나, 누군가를 붙잡고 욕이라도 한껏 뱉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너무 피곤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생에 나를 떠나간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과연 내 옆에 영원히 있을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닌 영원이라는 말은 꽤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내가 보내고 있는 가을은 대체로 그렇다. 다른 계절이 온다면 좀 나아질까. 외로움엔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다. 그의 말처럼 다 괜찮게 될 날이 올까.
*늘 그렇듯, P와 썸머와 함께했던 베를린에서의 생활이 너무 강렬했기에 그들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허전하다. 그들만 있으면 세상만사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흘러가기에 모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그를 텅빈 집에 남겨두고 나오던 날의 기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청춘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두가 한 천장 아래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 냉장고 속 음식물이 썩어가고 먼지가 쌓여 가는 것. 냉기 가득한 방에 다른 사람의 짐이 들어오는 것.
배고픈 배를 채워 넣고 아름다운 말들을 쏟아내며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힘이 닿을 수 없는 시기의 이야기로, 저 멀리 사라져 갔다. 그들과 온몸으로 사랑을 했던 뒤셀도르퍼 스트릿 39번지의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의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외피 뒤에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캐내려 하지 말고 그 순간의 온기에 온몸을 맡기라는 충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우연치않게 떠오른 너는 여전히 어리숙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테지. 난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데 말이야.
한 해가 지나고 또다시 얼었던 것들이 녹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어. 계절도, 이 시대도. 나의 마음도 마찬가지야.
가끔은 너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했어.
당당하고 강한 네 모습을 닮고 싶었어. 나는 솔직함에 어깨가 조금 굽은 사람이고, 두려움에 일정한 속도로만 걷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는 빠르게 달려도 보고, 잠시 주저앉기도 하고, 여름의 더움을 불평하지 않고 더위를 즐겨본다거나, 추워도 따뜻함만 고집하지 않는 K 너처럼 살고 싶다고 오래도록 생각했었어.
네가 떠나고 나는 많이 좌절했어.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 다들 세상에 나 말곤 중요한 게 없다는 데, 중요함을 모르고 나는 가끔 나를 놓치기도 해. 거리를 배회하는 배고픈 길고양이처럼. 모든게 내 세상 같다가도 혹독하게 위험을 피해 가겠지.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어. 모든 일은 별일 아니란 듯. 흘러가는 대로. 나도 어딘가 흘러갈 뿐이라고. 다독이며 그러한 시간속에 나는 너 생각을 했단다.
K, 네 생각을하면 나는 강해져.
내 몸속으로 커다란 철 덩어리가 침투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런 나를 어디선가 너는 지켜보겠지. 아파도 다시 일어나 열심히 살아갈 내 앞날을 말이야. 그렇게 살다 보면. 나도 언젠가 한 번쯤은 네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어. 내가 살아가는 수 많은 날들 속에서도 그 날 만큼은 꼭 믿고싶어.
보고싶고 그립고 많이 생각나는 너를 오늘도 머릿속에서 하염없이 떠올리다가 이렇게나마 작게 오늘을 기린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