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다
Explore tagged Tumblr posts
091522 · 1 month ago
Text
기침은 거의 다 나았다. 웬만해서는 기침을 하지 않아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가슴 통증은 아직 있다. 수영하면 턴하기 직전에는 숨을 좀 크게 마시는데 그때 왼쪽 옆구리쪽 가슴이 조금 아프긴 했다. 하지만 병원 가지 않고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데에, 그리고 따뜻하고 습한 날씨에 감사하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오기 전 목요일에 업체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서는 기침 감기에 걸렸으니 거의 4주만에 나은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술을 한 잔도 안마셨는데 오늘을 기념하여 술을 마셨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 싱가포르 공항에서 짐빔 한 병 사왔는데 그걸 이제서야 깠다. 아이가 먹는 콜라에 조금 섞어 한 잔 했더니 너무 쉽��� 취한다. 첫 잔 마실 때는 좋았는데 취한 기분이 건강하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그리 좋지 않았다. 앞으로 술을 별로 안마실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생각없이 살고 있다. 사진보다는 비디오를 찍고 있다. 그게 뭐가 나은지 모르겠지만 영상에는 글을 달고 싶지 않았다. 굳이 영상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 같아 부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하지만 예전에 사진에는 중언부언을 했었지.) 공사장 소음으로 비디오는 가급적 공사가 시작하기 전인 새벽이나 점심/저녁 식사 시간, 밤에만 촬영하니 단조롭다.(하지만 내 생활이 기본적으로 단조롭지.) 여튼 한번 시작한 거 일 년 정도는 해야 영상 촬영에 대해 나만의 관점이 생길 것 같아 계속 찍어는 볼 생각이다. 한국 정치 뉴스를 계속 보고 있는데 남이 하는 이야기만 들으니까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것 같다. 생각을 안하니 생활도 매우 안정적인 것 같다. 한국가기 전에는 오전 남는 시간에는 공부했는데, 그걸 강박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뉴스를 보고들으며 시간을 보내니까 매우 규칙적이고, 안정적이며, 재미없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 같다. 그나마 요즘은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다가 육체적 건강이 정상이 되는 만큼 정신적으로는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고민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실감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무 편하다고 생각했다. 암튼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한국에서도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않은데다가 아는 몇몇을 만나서는 더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아 그냥 집에 있게 된다.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다시 관광객처럼 동네를 돌아다녀볼까도 생각중인데 가능할런지는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내일은 비자가 완료됐다고 연락을 받아 여권을 받으러 아이 학교에 갈 예정이고, 이번주 중국 출장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중국 프로젝트는 음.. 할말이 많은데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
Tumblr media
17 notes · View notes
wife0605 · 10 months ago
Text
즐거움 1
나이들어 이런 글을 쓰고 하는게 부끄럽고 챙피하기도 하지만 가끔 거짓인지 진실이지는 모르지만 경험담이 있어 읽어보기도 한다. 아내도 읽어본다. 처음에는 미친놈들 이라 했느데 요즘은 그냥 읽어보고 말이 없다.
왜냐하면 50중반에 섹스에 활력이 없고 그냥 생각나면 삽입해서 일처리 하듯 하니 아내도 새로움을 찾고 싶은데 표현은 못하고 그냥 속으로 불만만 쌓여 가고 있다.
그래서 일년전부터 여러 사이트를 통해 아내와 같이 가끔 동영상을 보곤 하는데 아내는 스와핑에 관심을 두는 듯 하고 나는 쓰리섬에 관심을 두고 보다가 함 하자 하면 그냥 한다.
길어봤자 10분이지만 후다닥 하는게 맞다.
나는 자영업자다. 가게에서 아내와 같이 운영한다. 오후 1시쯤 열고 오후8시쯤 닫는다. 주로 배달을 한다. 유행물건도 아니고 필요업체에 납품하는 한마디로 괜찮다.
내가 배달나가면 아내가 가게를 운영한다. 일주일에 몇 번은
같이 배달가기도 하는 그런 업종이어서 자유롭다.
25년을 했다.
아내는 카섹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오다가 늦으면 저녁먹고
스타렉스에서 카섹을 즐기기도 한다.
세월은 섹스의 감각을 무��게 한다.
어느날 아내가 앞으로 그냥 삽입금지라고 한다. 아프니 충분
히 물이 나오면 삽입하라고 한다. 그러겠노라 했다.
하루는 아내가 눈이 동글해져서 여보 내친구 다래가 하는 말
남편과 마사지샵에 갔는데 마사지사 남자가 팬티까지 홀랑
벗기길래 소리를 질렀더니 남편이 옆에서 여기 원래 그렇게
하는거야 팬티에 오일 묻어 하고 남편이 옆에 있는데 멀 그
랴 하면서 엉덩이에 수건하나 달랑 덮고 마사지하는게 아닌
가, 남편은 여자가 아내는 남자가 하는데 마흔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헬스를 했는지 몸이 엄청 좋더라네.
그런데 여자가 남편 등을 맛사지하더니 남편이 코를 골며 잠
이 들자 나가버리더라는 거야.
그런데 맛사지사가 마사지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고 실력
이 좋더라네 . 도중에 손이 음부 근처까지 왔다가 지나가고
엉덩이 항문을 건드리는 듯 살짝 지나가고 아랫배와 허벅지
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되더라는 거야.
남편은 코를 골며 잘 자고 있는데 다래도 스스르 잠이 오기
시작하는데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에
사모님 특별마사지 이시죠. 라는 거야 잠결에 대답을 한거
같기도 하고 헷갈리더라는 거야.
이 마사지사가 에로틱마사지라는 거를 하는데 흥분되서 잠결
인지 꿈인지 기분이 매우 좋더라는 거야.
마사지사가 엉덩이 뒤에 앉아서 음부를 지긋이 눌리는데 숨
쉬기도 힘들고 가만 있었더니 안으로 살짝 들어오는데 꿈 꾸
는거 같아서 몸이 말을 듣지 않더라는 거야 근데 마사지사의
먼가가 점점 깊이 들어오더니 움직이더라는 거야 .
그러다가 갑자기 쑥 빼더라는 거야. 당황스러워 남편을 쳐다
보니 잘 자고 있고 마사지사가 엉덩이를 마사지하다가 음부
가볍게 만지다가 다리를 벌리더니 음부를 빨더라는 거야.
못하게 말을 하려는데 마사지 침구에 얼굴이 파묻혀 말도
신음도 안나오더라는 거야.
너무너무 잘 빨아주더라는거야 그러더니 손으로 음부안을 마
사지해주는데 거의 홍콩갔다 왔다는 거야.
잠시 조용�� 지더니 뒤에서 삽입하여 막 박는데 어억 소리만
지르는데 한참을 하다가 말고 하다가 말고 하더니
안에 사정을 하길래 너무 놀라 얼굴을 들고 보니 남편이더라
는거야 , 여보 나야 뭐 그리 놀래 하더라는거야.
이런 이야기를 아내가 놀란 듯이 하는 것이다.
아내는 마사지 실태를 모르는 듯하다 .
권태시기에 마사지를 통해 마사지사가 어느정도 해주면 마지
막은 남편이 장식하는 거 많이 한다. 요즘 세상이다.
하니 아내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한번 가보자 하니 흔쾌히 좋다 한다.
다래도 해보는데 난들 못하리 해서
막상 하려니 심각해진다. 모르는 ���사지사의 자지가 아내의
보지에 들어간다. 동영상이나 야설에서나 있는 이야기를
직접해보려 하니 정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고 망설이게
야동, 야설과 현실은 다르구나를 느끼게되고
그래서 경험있는 친구들과 업체 꾼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는
데 아내와 마사지샵을 이용하는 부부가 생각보다 있다.
머눈에는 머만 보인다고
그래서 마사지업체를 알아보고 마사지사와 작전계획 세워
아내는 오십중반이다. 실망 스럽지 않겠나 하니 요즘 60대
부부도 오신다라고 걱정마시라고
디데이날 저녁 먹으면서 아내와 술을 좀한다.
아내는 소주한병이면 많이 취하는데 맥주를 하면 많이 흔들
린다. 살살 꼬셔서 맨정신이 힘드니 술 좀 마시고 가자.
내가 더 떨린다.
마사지사에게 삽입시에는 콘돔 착요하라고 했다.
겁나서 쫄았다.
술취해 입성 아내는 저쪽 나는 이쪽 마사지를 하는데
2시간이라고 하자 아내는 알았다고 끄떡인다.
아내는 키가 163정도 몸무게65키로 좀 통통하다.
우리 부부는 매일 오전에 피트니스를 한다. 일주일에 4일
은 반드시 한다. 10년정도 했는데 아내는 50중반에 탄력
있고 아내는 보지가 정말 이쁘다. 인터넷 야동등을 봐도
아내 보지만큼 이쁜 보지는 본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보지 주변은 아주 깨끗하고 보지털도 삼각형으로 환상이다.
식당에서 마사지하다가 본의 아니게 마사지사의 자지가 삽입
될수도 있다는데 당신 괜찮겠어 할 수 있겠어 하니 웃기만
한다. 술김에 하는 말이 기대된다고 하네 그러면서 아랫도리
에 전기 통하는거 같다고 한다.
기분 안좋으면 바로 일어나서 갈거라고 한다.
마사지사에게 예의를 반드시 지키고 부드럽게 하라고 했다.
마사지사는 아내의 머리부터 시작하는데 얼굴 가슴 발가락
종아리 배 허벅지 순으로 부드럽게 한다. 배꼽과 보지부분은
흰수건으로 덮어놓고 사타구니 사이도 맛사지하니 아내의
다리가 부르르 떨리다가 비틀어지지기도 한다.
이제 뒤를 한다. 얼굴은 침구 구멍아래로 파묻고 마사지사의
등 엉덩이를 집중해서 하는데 아내가 꼼짝도 안한다.
잠든거 같은데 마사지사가 아내의 귀에 대고 머라고 말을
하는데 아내는 응답이 음음하는거 같다.
엉덩이 사타구니 안으로 손바닥으로 보지를 마사지 하는데
아내의 몸이 비틀린다. 손바닥, 손가락으로 보지 마사지
농도를 높여간다. 아내의 신음소리 으윽 어응 어응 으음한다.
한참을 하더니 아내의 엉덩이로 잽싸게 올라타더니 좆으로
아내 보지를 짓누르고 문지른다. 아내의 신음이 점차 커진다.
거부하는 몸짓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좆이 보지속으로 쑥들어가더니 돌려된다.
아내의 엉덩이가 위로 올라온다. 세상에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들어올��� 좆을 받는다. 아내가 엎드린 자세로 상하
운동을 하는 적극성을 보인다.
마침내 신음소리가 으으으하더니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울고 있다. 아내가 울고 있다. 마사지사의 좆은 크다.
하기사 크니 이런일 하겠지 단골이 많다고 한다.
마사지사 말로는 17센티 굵기14라고 하는데 내좆 두배는
족히 되어 보인다.
이런 좆질에 아내는 울고 있다. 정숙한 여인처럼 굴더니
마사지사 좆질에 무너져 신음이 아니라 아하아하 차바퀴
굴러가는 소리처럼 울고 있다.
우리부부 성생활에 저런적은 한번도 없었다.
50대 마누라를 저놈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원래는 좀하다가 내가 하기로 했는데 아내가 돌아 눕더니
정상위로 마
원래는 좀하다가 내가 하기로 했는데 아내가 돌아 눕더니
정상위로 마사지사를 올려놓고 섹을 하네.
마사지사도 흥분하여 이제 누님 제대로 해봅시다. 하면서
나보고 형님 이쪽으로 아내가 내 좆을 빨고 마사지사는
열심히 박아된다. 아내는 눈동자가 뒤집혀진다.
흰자가 보인다. 세상에 이럴수가 50대 중반 여자가 눈이
뒤집히다니 앞치기 옆치기 뒤치기하는데 아내는 울음소리
가 너무 크서 챙피할 정도다.
이놈이 아내를 이제 가지고 논다. 다양한 체위로 박는데
보는 내가 기분이 묘하지만 좆은 하늘을 쳐다보네.
한시간 동안 박아대다가 누님 이제 사정합니다. 하니
뒤로 사정하라면서 뒤치기 자세를 취한다. 보지물이 줄줄한
다. 이놈 급속히 박다가 우억우억하면서 사정한다.
아내를 안고 한참 있더니 형님 마무리 하시죠 한다.
그때서야 아내는 여보 하면서 나에게 보지를 벌린다.
흥분되어 박아된다. 속으로 이년 더러운년 다른놈과 씹을
하다니 하면서 박다가 좀 헐렁해진듯한 보지에 싸고 말았다.
그사이 마사지사는 좆을 씻은 듯 와서 제가 사정을 안하는데
누님이 너무 매력있어서 사정하고 말았네요. 하면서 웃자
아내가 마사지사 이리와봐 하더니 좆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
더니 좆을 잡고 빠는게 아닌가, 이런 이런 참 나
한참을 빨더니 잘했어 하면서 가자하네. 기가 찬다.
우리부부는 서로 말한마디 없이 집근처 까지 걸어왔다가
생맥한잔 때리고 가자 하고 생맥 때리면서 기막힌 오늘 일을
허심탄회하게 서로 이야기했는데 아내를 단순하게 아내로만
여기는 나의 관념을 완전히 바뀌게 했고 아내지만 동등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인식과 섹은 섹으로만 끝내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겟다
생각이 들었다.
섹스는 우리부부의 원동력이다. 모든 부부가 그러하겠지만
아내가 그런다. 남자는 정액을 아껴야 한다고 70,80이 되어서도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아내는 할망구가 되어서도 섹을 즐기거라고
한다.
그러니 운동 열심히 아내 관리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 끝
수시로 우리부부의 경험담을 올릴 예정입니다.
아내에게 화이팅을!
32 notes · View notes
neocatharsis · 1 day ago
Text
youtube
[대신해,드리!] 취한다 취해~ 드리 미모에 취헨..🍶🤗 | EP.6교시 수제 막걸리 | #daesinhaeDERY #WayV #NCT #HENDERY
3 notes · View notes
jaehwaniee · 9 months ago
Text
240923 KEN via Twitter •
jaehwany0406
아.. 진짜.. 어떻게 해야 돼?
세탁기 돌린 옷들 다 입고 싶은데..
한 벌밖에 못 입잖아..
아니... 너 정말.. 오또카지🩵
취한다.. 너의 향기에☺️
Ah.. Seriously.. What should I do?
I want to wear all the clothes I washed in the washing machine..
I can only wear one..
No... You really.. Ottokaji🩵
I'm drunk.. on your scent☺️
Tumblr media
3 notes · View notes
lesbiancarat · 2 years ago
Text
youtube
여덟 번째 짠 세븐틴 (SEVENTEEN) EP.09 음악의 신! 세븐틴 매력에 취한다~⭐️
7 notes · View notes
mantecol · 2 years ago
Text
me voy a tatuar en el upite la frase de changbin que abre thunderous ese
소리를 지르는 내가 oh
창빈이란다, 내 자리는 내가 취한다
1 note · View note
wayvment · 16 hours ago
Text
youtube
[대신해,드리!] 취한다 취해~ 드리 미모에 취헨..🍶🤗 | EP.6교시 수제 막걸리 | #daesinhaeDERY #WayV #NCT #HENDERY
0 notes
a-rin-gazor · 9 months ago
Note
끄윽. 어 ㅆㅂ 취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르륵 나가려 한다. 대형 민ㅍ 아니 대형 재앙이 슬금 슬금 움직인다.)
(슬며시 미사에게 키스한다.)
미샤: (꼬옥)....
3K notes · View notes
liinnk16 · 6 months ago
Text
취한다. ‘솔로나라 23번지’를 갑자기 눈물바다로 만든 두 남자의 ‘오열 사태’ 전말에 초미의 관심이 쏠린다. 4일 오후 10시 30분 방송.셰프 레이먼킴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분노했다. 레이먼킴은 4일 자신의 개인 채널에 "2시간 48분. 기네스북에 오를 일일세"라며 "그냥 해보고 싶었나? 21세기 대한민국 헌법과 국민을 우습게 본 자.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자"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 그는 "1. 진짜 되는지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다 2. 딴 애들이 시켰다, 그냥 첫번째 안으로 올리면 한다 2. Martial Law가 무술의 한 종류인 줄 알았다, 계엄의 뜻을 모른다
0 notes
yachtking · 6 months ago
Text
Tumblr media
도원결의(桃園結義)주 3병 + 밤술 한단지
아…취한다 ~~
0 notes
091522 · 3 days ago
Text
많은 동물이 감정이입적 상태의 기본 요소들을 드러내 보인다(이 장에서 나는 ‘감정이입적 상태‘라는 표현으로 공감, 감정이입, 연민 등등을 통칭하겠다). 맨 먼저, 많은 종이 사회적 학습의 토대로 삼는 모방이 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의 어���너머로 도구 사용법을 배운다. 모방 습성이라고 하면 인간을 따를 종이 없는데, 얄궂게도 여기에는 단점이 따른다. 한 실험에서, 침팬지들과 인간 아이들은 인간 어른이 퍼즐 상자를 열어서 속에 든 간식을 꺼내는 모습을 거듭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때 시범자는 안 해도 되는 쓸데없는 동작들을 추가한 방식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후에 스스로 상자를 만질 기회를 얻었을 때, 침팬지들은 상자를 여는 데 필요한 동작만을 따라 했지만 아이들은 쓸데없는 동작까지 다 따라 하는 ’과잉 모방’을 보였다.[*침팬지는 인간보다 미신적 행동에 덜 전염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회적 동물들은 정서 전염에도 수시로 걸린다. 무리를 지은 개들이나 경계 순찰에 나선 수컷 침팬지들 사이에 각성 상태가 공유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무척 엄밀한 상태는 아니라서, 곧잘 다른 행동으로 흘러넘치곤 한다. 예를 들어, 개코원숭이들은 어린 가젤 같은 먹음직한 사냥감을 몰고 있다고 하자. 가젤은 꽁지 빠져라 도망가고, 개코원숭이들은 그 뒤를 쫓는다. 그러던 중 맨 앞의 수컷 하나가 문득 딴생각이 드는 듯하다. ’어라, 내가 막 달리고 있네. 엥? 게다가 꼴보기 싫은 경쟁자 녀석이 내 두를 바짝 따라오고 있잖아! 저 녀석이 왜 나를 쫓는 거지?’ 수컷은 빙글 돌아서 뒤에 오는 경쟁자와 정면충돌하고는 싸우기 시작한다. 가젤은 까맣게 잊은 채.
모방과 정서 전염은 기초 단계다. 다른 동물들도 다른 개체의 고통을 느낄 줄 알까? 어느 정도 그런 편이다. 쥐들은 다른 쥐가 조건 형성을 통해서 특정 공포를 연합 학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스스로 그 공포를 학습하게 된다. 더구나 이것은 사회적 과정이다. 관찰 대상인 쥐가 피험자 쥐와 친연 관계가 있거나 짝짓기를 했던 개체일 때 학습이 더 잘되는 걸 보면 그렇다.
또다른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피험자 쥐가 든 우리에 공격적인 침입자 쥐를 넣어보았다. 연구자들이 잘 아는바, 이런 상황은 피험자 쥐에게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을 겪은 쥐는 한 달이 지난 뒤에도 글로코코르티코이드 농도가 떨어지지 않고, 더 불안해하며, 쥐들의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를 더 많이 겪는다.[*이런 쥐들은 어려운 작업을 더 쉽게 포기하고, 쾌락을 덜 즐긴다. 달리 말해, 설탕물 선호를 덜 보인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나온 중요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다른 대체가 침입자로 인한 스트레스 상황을 겪는 걸 지켜보기만 한 쥐들도 똑같은 악영향을 지속적으로 겪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종들도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충격적으로 보여준 연구는 맥길대학교의 제프리 모길이 2006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이었다. 연구자들은 쥐에게 (투명 플라스틱 벽 너머에 있는) 다른 쥐가 통증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했다. 그러자 자연히 피험자 쥐의 통증 민감도도 높아졌다.[*쥐의 통증 민감도는 ’핫플레이트 시험’으로 측정한다. 실온의 핫플레이트 위에 쥐를 얹어둔 뒤, 조금씩 온도를 높인다. 쥐가 처음으로 온도를 불편해하는 시점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쥐가 그때 발을 바닥에서 떼기 때문이다(그러면 바로 쥐를 내린다). 그 시점의 핫플레이트 온도가 그 쥐의 통증 문턱값이다.] 그다음에 연구자들은 쥐의 앞발에 자극 물질을 주입했다. 그러면 보통 쥐는 발을 핥고, 많이 핥을수록 불편감이 크다는 뜻이다. 자극 물질의 양이 X라면 핥는 횟수가 Z라는 비례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쥐가 X보다 많은 양의 자극 물질에 노출되어 Z보다 많은 횟수로 발을 할튼 다른 개체를 지켜보고 있다면, 피험자 쥐는 제 발을 평소보다 많이 핥는다. 거꾸로 만약 피험자 쥐가 지켜보는 개체가 (X보다 적은 양의 자극 물질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덜 핥는다면, 피험자 쥐도 덜 핥는다. 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곁에 있는 다른 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두 쥐가 같은 우리에서 사는 친구일 때만 고통을 공유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우리는 이 동물들의 내면을 알지 못한다. 쥐들은 다른 쥐의 고통이 안타깝게 느껴졌을까? 이것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자신이 마치 ‘그인 것처럼‘ 느끼는 마음이었을까? 상대의 관점을 취해본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낮을 듯하다. 이런 연구를 설명하면서 ‘감정이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다른 종들도 자신이 아닌 다른 개체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곤 할까?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살펴볼 사실이지만, 많은 종들이 이른바 ‘화해‘ 행동을 취한다. 두 개체가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은 직후에 평소보다 더 높은 빈도로 친애적 행동(털을 골라주고, 몸을 붙이고 앉는 행동)을 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그러면 둘 사이에 다시 긴장 상태가 조성될 확률이 낮아진다. 드 발과 동료들의 관찰에 따르면, 침팬지들은 제삼자의 ‘위로’ 행동도 보인다. 그렇다고 두 개체가 싸운 뒤 제삼자인 어느 착한 침팬지가 두 개체를 똑같이 위로해준다는 말은 아니다. 제삼자는 싸움을 먼저 건 개체가 아니라 피해자에게만 친애 행동을 한다. 이 사실로 보아, 이 행동에는 누가 먼저 긴장을 조성했는지를 아는 인지적 요소와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은 감정적 욕구가 다 담겨 있다. 주로 싸움의 피해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행동은 늑대, 개, 코끼리, 까마귀류(피해자의 깃털을 부리로 골라준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보노보도 마찬가지다. 다만 보노보는 보노보답게 플라토닉한 털 골라주기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와의 섹스까지 곁들인다. 반면 원숭이들은 위로 행동을 하지 않는다.
(635~638쪽)
감정이입에 관한 한, 모든 신경생물학적 길들은 반드시 앞띠이랑 겉질을 통과한다. 우리가 2장에서 처음 만났던 이 이마엽 겉질 구조는 사람들이 뇌 촬영기기에 누워서 타인의 고통을 생각해보는 활동이 시작된 이래로 감정이입을 탐구하는 신경과학 문헌에서 주연을 맡아온 영역이다.
과학자들이 기존에 알던 역할을 놓고 볼 때, 앞띠이랑 겉질이 감정이입에 관계한다는 발견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포유류의 뇌에서 앞띠이랑 겉질이 맡는 역할은 대강 다음과 같다.
*내수용 정보 처리. 3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뇌는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 정보뿐 아니라 몸 내부로부터 오는 감각 정보도 주시한다. 아픈 근육, 마른입, 꾸르륵대는 장으로부터 내수용 정보를 받는 것이다. 만약 내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다면, 그리고 그 감각 때문에 어떤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면, 그게 바로 앞띠이랑 겉질이 해낸 일이다. 앞띠이랑 겉질은 물리적 육감을 받아들인 뒤 그것을 비유적 육감과 통찰로 바뀌게 만듦으로써 이마엽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통증은 앞띠이랑 겉질의 주의를 끄는 핵심적 내수용 정보다.
*불일치 감시. 앞띠이랑 겉질은 결과가 기대와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불일치‘에 반응한다. 만약 내가 어떤 행동과 특정 결과를 결부하여 이해하는데 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앞띠이랑 겉질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기대와의 불일치를 감시하는 이 메커니즘은 비대칭적이다. 만약 내가 평소에 브라우니 두 개를 받을 수 있는 작업을 했는데 오늘은 뜻밖에 브라우니 세 개를 받았다면, 내 앞띠이랑 겉질은 촉각을 세우고 그 사실을 감지한다. 한편 브라우니 두 개 대신에 하나만 받았다면, 앞띠이랑 겉질은 미친듯이 날뛴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케빈 옥스너와 동료들이 쓴 표현을 빌리자면, 앞띠이랑 겉질은 ”진행중인 행동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쳤음을 알리는 다용도 경보다.
예상치 못한 통증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던 기존의 이해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만큼, 앞띠이랑 겉질의 두 역할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다. 설령 예상했던 통증이라고 해도, 우리 뇌는 그 통증의 질과 양이 예상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주시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앞띠이랑 겉질은 통증에 관한 시시한 문제에는 신경쓰지 않는다(아픈 게 내 손가락이야, 발가락이야?). 그런 건 앞띠이랑 겉질보다 덜 세련되고 더 원시적인 뇌 회로의 관할이다. 앞띠이랑 겉질은그 대신 통증의 의미에 신경쓴다. 이 통증은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어떤 성질인가? 그렇다보니 앞띠이랑 겉질�� 통증 지각은 조작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손가락을 핀에 찔리면, 어느 손가락이 찔렸고 통증의 정도는 어떤지를 알려주는 뇌 영역들과 더불어 앞띠이랑 겉질도 활성화한다. 그런데 당신이 실제로는 아무 효능이 없는 연고를 강력한 진통제라고 믿고 손가락에 바른다면 어떨까? 그래도 손가락이 찔렸을 때 “이건 발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아픈 거야”라고 말해주는 회로는 똑같이 활성화하지만, 앞띠이랑 겉질은 속임약 효과에 속아넘어가서 가만히 있는다.
이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앞띠이랑 겉질은 당연히 내수용 및 외수용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 영역들로부터 신호를 받는다. 그리고 역시 논리적인 설계인바, 앞띠이랑 겉질은 감각운동 겉질로 신호를 잡아내보냄으로써 우리에게 아픈 부위를 인식하고 집중하도록 만든다.
앞띠이랑 겉질이 이마엽 겉질에 있을 만큼 세련된 영역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통증이다 6장에서 이야기했던 사이버볼 게임을 떠올려보자. 세 참가자가 뇌 촬영기기에 누운 채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가상의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갑자기 그중 두 명이 한 사람에게만 공을 건네지 않는다. 이렇게 따돌림으르 당한 피험자의 뇌에서는 당장 앞띠이랑 겉질이 활성화한다. 앞에서 앞띠이랑 겉질은 통증의 의미에 신경쓴다고 했는데, 이때 그 대상은 물리적 통증만이 아니다. 앞띠이랑 겉질은 추상적인 사회적 · 정서적 통증에도―사회적 배제, 불안, 혐오, 당황스러움 등등―신경을 쓴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로, 주요 우울증은 앞띠이랑 겉질의 여러 이상과 연관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냥 ‘연관성이 있다’니, 이런 하나마나 한 소리가 있나. 나는 앞띠이랑 겉질에도 여러 하위 영역들이 있다는 사실을 편의상 생략했다. 우울증 환자는 그 영역들 중 일부에서는 활성화 저도가 더 높아지고 다른 일부에서는 더 낮아진 상태를 보인다.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앞띠이랑 겉질 기능 이상이 우울증의 깊고 숨막힐 듯한 슬픔에 핵심적으로 관여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한 앞띠이랑 겉질은 긍정적 공명, 즉 상대의 기쁨이 내 기쁨으로 느껴지는 상태와도 관련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앞띠이랑 겉질이 몹시 자기중심적이고 오로지 자신의 안녕에만 신경쓰는 영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앞띠이랑 겉질이 감정이입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을 때 과학자들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실험에서 줄곧 같은 결과가 나왔으니, 타인의 고통을―핀에 찔린 손가락이든, 슬픈 얼굴이든, 불행한 사연이든―접하고서 감정이입적 상태를 느끼는 피험자들의 뇌에서 항상 앞띠이랑 겉질이 활성화했다. 게다가 이때 타인의 고통이 커 보일수록 앞띠이랑 겉질이 더 많이 활성화했다. 앞띠이랑 겉질은 타인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행동을 하는 데도 중요하게 관여한다.
여기에 신경펩타이드이자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끼어든다. 4장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려보자. 옥시토신은 결합과 친애 행동, 신뢰, 너그러움을 촉진한다고 했다.[*여기에 아주 중요한 단서가 하나 붙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이 효과가 집단 내 상호작용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대가 그들일 때 옥시토신이 우리의 적대성과 이방인 혐오증을 더 부추긴다.] 프레리밭쥐들은 스트레스를 받은 짝을 위로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도 떠올려보자. 두 사실을 결합하면, 자연히 옥시토신이 이런 효과를 냈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옥시토신은 앞띠이랑 겉질에서 작용한다. 만약 연구자가 프레리밭쥐의 앞띠이랑 겉질에서 옥시토신의 효과만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면, 밭쥐들은 위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의 고통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부당성을 예의 주시하는 이기적 앞띠이랑 겉질이 어떻게 제 주변 딱한 이들의 고통을 느끼도록 만드는 이타적 앞띠이랑 겉질이 되는 걸까? 나는 이 장의 핵심 주제, 즉 감정이입적 상태가 알고 보면 얼마나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인가 하는 점과 이 문제가 관련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아야! 이거 아프네” 하는 경험으로부터 자신이 방금 했던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타인의 불행을 관찰하여 ‘저 사람 엄청 아파 보이네, 나는 저 짓을 하지 말아야겠어’하고 배우는 것이다. 앞띠이랑 겉질이 관찰만으로 공포와 조건 회피를 배우는 데 결정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저 사람 기분 더러울 것 같아‘에서 ‘그러니까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로 나아가려면, ’나도 저 사람처럼 저 기분이 싫을 거야’라고 두 자아를 겹쳐서 생각할 줄 아는 단계가 필요하다. 타인이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는 것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학습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앞띠이랑 겉질은 근본적으로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셈이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하는 마음은 거기에 부록으로 딸려오는 셈이다.
물론 앞띠이랑 겉질 외에 다른 뇌 영역들도 관여한다. 앞에서 뇌의 감정이입 회로가 성숙할수록 앞띠이랑 겉질뿐 아니라 섬겉질도 더 많이 활성화한다고 말했다. 성인의 뇌에서는 섬겉질이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편도체도) 앞띠이랑 겉질 못지 않게 감정이입 경험에 적극 개입한다. 세 영역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편도체가 이마엽 겉질로 보내는 정보 중 상당량이 앞띠이랑 겉질을 걸쳐서 전달된다.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여러 상황들, 특히 물리적 통증은 앞띠이랑 겉질과 섬겉질을 함께 활성화한다. 게다가 그 활성화 정도는 피험자의 기본적 감정이입 성향, 혹은 피험자가 그 상황에서 느꼈다고 보고한 주관적 감정이입 정도에 비례한다.
이것은 섬겉질과 편도체의 작동 방식을 떠올려보아도 퍽 납득이 가는 일이다. 섬겉질과 편도체는 아이가 감정이입을 맥락과 인과에 따라 이해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저 사람이 왜 아픈지, 그게 누구의 잘못인지를 감안하는 것인다―에서 차츰 관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고통이 부당함에서 비롯한 경우에는 당연히 두 영역이 관여할 것이다. 그때 우리의 고통이 막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가 그로부터 이득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연히 혐오, 의분, 분노를 느낀다. 심지어 우리는 고통이 부당함에서 비롯했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도 귀인은 찾으려 든다. 앞띠이랑 겉질과 섬겉질과 편도체의 뒤얽힘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패턴이 어찌나 빈번한지, 우리는 인간이 개입하여 못된 짓을 저지른 상황이 아닐 때도, 달리 말해 문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땅이 갈라져서 어느 무고한 피해자를 삼킨 상황에서도 그 비극 이전에 피해자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욕하고, 이런 비극을 초래한 신을 욕하고,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무심함을 욕한다. 그리고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때 누구든 탓하고자 하는 분노와 혐오와 의분의 감정이 순수한 감정이입을 흐리면 흐릴수록 실제 행동으로 돕고 나서기는 더 난망해진다.
(641~645쪽)
이처럼 상대의 범주에 따라 감정이입이 범위가 달라지는 현상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서도 일어나는데, 다만 그 양상이 비대칭적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감정이입과 연민 측면에서 부자들은 대체로 좆같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파헤쳐 보여준 것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대커 켈트너가 수행한 일련의 연구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지위의 전 범위를 대상으로 살펴보았을 때 평균적으로 더 부유한 피험자일수록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덜 느낀다고 보고했으며 실제 동정적인 행동도 덜 드러냈다. 게다가 부유한 피험자일수로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졌고, 실험 환경에서 더 탐욕스럽게 행동하는데다가 속임수나 도둑질도 더 많이 했다. 이 결과 중에서도 언론이 유난히 널리 보도한 내용이 둘 있다.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부유함의 평가 잣대는 그들이 모는 차의 가격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만났을 때 차를 세울 확률이 낮다는 사실, ⓑ실험실에서 사탕 단지를 마련해두고 피험자를 불러들여서 “작업을 마치면 사탕을 원하는 만큼 집어가도 좋다, 그런데 남은 사탕은 아이들에게 줄 예정이다” 하고 말했을 때 부자일수록 사탕을 더 많이 집어가더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원래 이렇게 옹졸하고, 욕심 많고,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걸까? 거꾸로 누구든 부자가 되면 그런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걸까? 켈트너는 영리한 방법으로 조작해보았다. 사전에 피험자들에게 자신이 사회경제적 성공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단서를 주거나(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만드는 단서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만드는 단서를 준 것이다. 그러자 피험자들은 스스로 부유하다고 느낄 때 아이들에게 돌아갈 사탕을 더 많이 집어갔다.
이 패턴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12장에서 이야기했던 체제 정당화 연상에 관련된 여러 오소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일수록 욕심을 좋은 것으로 보기 쉽다는 점, 사회계층을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한 결과로 본다는 점, 자신의 성공을 독립적 행위로 본다는 점 등등. 이런 관점에 따르면, 타인의 괴로움이란 내가 주목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마련이다.
더구나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 도덕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의 고통에 감정이입해보는 것은 특히나 힘든 작업이다. 기억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상대의 불행 앞에서 비단 앞띠이랑 겉질 활성화에만 실패하는 게 아니라 한술 더 떠 중변연계 도파민 경로를 활성화시킨다. 그러니 그런 상대의 관점을 취해보고 그의 고통을 느껴보려는 시도는(쌤통이라고 여기려는 게 아니라면) 자동적이기는커녕 인지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자신과 거리가 먼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데 인지적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이마엽 겉질의 습관적 작동을 방해함으로써) 피험자들의 인지 부담을 늘리는 실험에서도 확인된 바다. 인지 부담을 늘리면 피험자들은 낯선 사람을 돕는 행동을 덜 하게 되는데, 단 상대가 가족인 경우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이른바 ’감정이입 피로’란 우리의 이마엽 겉질이 상대의 관점을 취하기가 쉽지 않은 그들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인지 부담이 걸려서 피로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집단보다 한 개인을 떠올릴 때 더 너그러워지는 현상도 이 인지 작업과 부담 개념으로 설명된다. 테레사 수녀도 말했다. “만약 내가 보는 것이 군중이라면, 나는 결코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보는 것이 한 인간이라면, 나는 행동할 겁니다.” 애초에 감정이입 능력이 형편없어서 감정이입 피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 인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다는 말도 떠오른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다.”
우리 뇌가 가장 확실하게 마음 이론 회로를 활성화하는 상황은 따로 있다. 문제의 불행이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내 기분이 어떨지를 상상해보는 대신, 초점을 옮겨서 그 일을 겪는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를 상상해보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로부터 일인칭이 아니라 삼인칭 시점으로 생각해보라고 지시받은 피험자의 뇌에서는 관자마루이음부가 활성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만둬’ 하고 단속하는 명령 패턴도 활성화한다.
(648~650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2 notes · View notes
iamkenlee-blog · 11 months ago
Text
Tumblr media
"구약성경과 신들"
지난달 '인류 최초의 문명과 이스라엘'을 재밌게 읽어 같은 저자가 쓴 다른 책을 또 빌림. 채 200쪽이 안 되는 짧은 글이라 각 잡고 2~3일이면 해치울 분량이건만 요즘 돈벌이하느라 맘의 여유가 없어 2~3주나 걸렸다.
서두에서 고대 근동 관련 연구가 쌓여감에 따라 일부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위화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이 느껴짐.
가령 모세오경 중 특히 창세기의 경우 신의 부름을 받은 누군가가 써 내려간 기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가, 수메르,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가 남긴 문서에 비슷한 얘기가 등장한다는 사실 확인 후 느낄 당혹감 같은 거. '성경무오류설' 같은 황당한 주장을 믿는 원리주의자일수록 충격은 더 클 듯.
23쪽 "구약 성경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란 제목의 글에서 고대 근동의 종교가 하늘, 달, 바람, 강 등등을 구체적인 신으로 모신 반면, 아브라함의 종교는 이것들을 야훼의 피조물로서만 인식했다고 썼다. 이런 방식으로 고대 근동 신화 연구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새로운 길이 열려 있다는 취지로 글을 쓰신 듯.
장미꽃이 세상 유일 나만의 것인 줄로만 알던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같은 꽃 수천 송이를 보고 풀밭에 엎드려 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라는 '깨달음 = 깨어 닿음'을 체험하게 됐단 것과 비슷한 논리가 아닐지?
물론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흩어진 퍼즐을 특정 목적하에 재조합할 필요가 없어 그냥 재밌게만 읽었다. 그중 내 기억력의 한계를 고려해 제일 인상적인 부분 딱 하나만 남겨 놓으려고.
127쪽에 '신성 재판의 강 이드'란 제목으로 함무라비 법전 2조를 인용했다. "만일 어떤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흑마술을 했다고 증거도 없이 고소했을 경우, 고소당한 이는 강에게 보내 이드(강)에게 던져진다. 만일 이드가 그를 죽였다면 고소한 이가 그의 집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드가 그를 무죄라 판결하여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는 고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마술을 했다가 고소한 이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드에게 보내졌던 이와 그를 고소한 이의 집을 취한다."
우선 사소한 얘기부터. '인류 최초의 문명과 이스라엘'에선 "함무라피"라고 썼는데, 이 책에선 "함부라비"라고 나옴. 그 사이에 저자의 생각에 약간 바뀌신 듯.
인간이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 '이드 = 강의 신'에게 의탁하는 전통은 오늘날 시각에선 말도 안 되는 거지만, 고대인들에겐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는 거로 인정.
내가 흥미를 느낀 대목은 이 전통이 구약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발음이 '에-드'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의미 또한 '심판'으로 확대됐단 점. 131쪽에 "…이런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에-드의 날'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이란 뜻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옮긴다…"라고 썼다.
즉 구약에 '심판의 날' 또는 유사 표현이 등장하는 경우 알게 모르게 '요한계시록'과 연결 지으려는 습관 같은 게 있었는데 실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출처가 있었던 것.
1 note · View note
raniatv1004 · 1 year ago
Text
행동에 관련된 단어 알아보기 ⭕️
조정 *행동* : (1)동물이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기존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행동. 시민 *행동* : (1)요구되지 않을 때도 남을 돕는 행동과 같이 조직의 심리적 환경에 기여하는 행동들. "일탈적 직장 *행동* : (1)직장에서 조직의 규범을 고의로 어기고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나 그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는 위협적인 행동." "발정 *행동* : (1)발정기의 암컷에서 나타나는 성적 행동. 정서적으로 매우 흥분된 상태이며 거동이 불안하여 배회하는 특징을 보인다. 외음부가 팽창하고 수컷이 접근하면 교미 자세를 취한다." "대상 *행동* : (1)자기가 요구하는 바를 얻지 못할 때 그와 비슷한 다른 대상으로 만족을 채우려는 행동. 어떤 대상에 의하여 일어나는 긴장을 다른 대상으로 해소하는 방어 기제의 하나..
2024. 5. 17.
0 notes
koo-life-path · 1 year ago
Text
사회가 건강하지 않았다는 증거 그리고 삶의 방법
사회가 문제 해결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은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안락한 조직은 없었다.
미국 유학 중에도 비슷했다. 유학 1년차 불합리한 경험을 하고 해결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묵살이였고 그 때부터 나는 내 방어력으로 생존해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사 학위 후,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미국 유학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내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과 별개로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그리고 외국인 들은 내 정직함과 성실함을 응원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가짜 응원이나 지지를 하던 친구들과 관계가 멀어 졌다.) 위의 생각이 명확하게 된 계기는 내가 나의 자금으로 개인 연구를 하면서 결과가 도출되고 이 결과를 정리해서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마치 이런 퀄리티의 결과를 처음 경험한 사람들 같았다.) 이제 내게 주어진 문제는 내가 회사에서 일하든 내가 회사를 차리든 한국에서 혹은 외국에서 내가 약 1년 동안 했던 연구 환경과 성과를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만들지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두줄 요약: 1년 동안 연구 결과에 대한 반응 좋다. 이런 환경과 성과를 외부 환경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만들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0 notes
webdraw · 1 year ago
Link
0 notes
textlab · 2 years ago
Text
사회 구조와 시맨틱 전통 (2/3)
Luhmann, Niklas (1980) ‘Gesellschaftliche Struktur und semantische Tradition’. In his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vol. 1). Frankfurt: Suhrkamp.
번역 – 조은하, 박상우 (일역 『社会構造とゼマンティク 1』을 기본으로, 영역 The Making of Meaning을 참고로 함)
4.
차이화 형태의 변화와 사회의 복잡성 증대가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 세계를 변용한다는 단순한 추측을 넘어서는 고찰은, 의미 개념을 분해해서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의미의 이름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29], 모든 접속하는 체험이나 행위에 있어서 선택적인 행동을 강제하는, 합의된 다른 가능성들의 지시 과잉이다. 의미는 “암시적인 형태로” 세계 전체를 접근 가능하게 유지하지만, 참으로 그 때문에 다소라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의 문맥 속에서, 다음 한 걸음의 선택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보다 구체적인 유형화에 앞서서, 모든 의미에 대해서, 다른 가능성들의 지시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차원이 구별된다. 이전의 실재 개념의 의미에 있는 다른 사물적 의미 내용의 지시, 시간적인 거리를 둔 과거와 미래의 것에 대한 지시, 다른 인격이 체험이나 행위에 있어서 어떻게 해서 같은 의미를 구성해 나오는 지의 지시라는 세 가지다. 이것에 대응해서 우리는 세계의 차이화에 변화를 만들기 위한 일반 형식으로서, 또한 선택 질서의 일반 형식으로서, 사물 차원, 시간 차원, 사회 차원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의 구별은 의미 그 자체와 마찬가지, 진화 과정의 결과다. 이것은 어떤 사회가 스스로의 세계 인식의 기초적인 시맨틱을 사용할 때에서 보다 한정된 모든 언명을 본다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일정한 분석적 차원의 분리가 실현된다면, 사회는 어떠한 의미를 사물성, 시간성, 사회성과 결합할 지를 더욱 강하게 정식화 할 수 있다. 복잡성은 시스템을 선택 압력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다면, 또한 의미는 선택성을 조직한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다면, 진화 과정에서 변화하는 복잡성은 각각의 의미 차원에 있어서 시맨틱 상의 상관물을 만들어 낸다고 추측해야만 한다. 선택 압력은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의미에 대해서, 의미의 차원들로 압력을 전한다. 선택은 ‘이것이거나 아니면 저것’, ‘아직 아니거나, 바로’, 그리고 ‘단지 동의 하에…’ 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은 차원 사이에 어느 정도 독립성을 조직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어떤 시점에서 행위 하는 지라는 선택에서는, 어떻게 행위 할 지, 누구의 합의가 중요한지라는 것은, 반드시 도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사회 복잡성이 증대하면, 의미의 기초적 시맨틱 속에서 개개의 의미 차원의 선택 범위가 보다 명확하게 분리될 것이라는 가설을 견지한다. 그와 함께 무엇을 세계의 사물 내용(실재)로서, 시간으로서, 사회성을 위한 형식으로서, 체험과 행위에 방향을 부여할까, 도상적으로, 은유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규정할 여지가 열린다. 그리스 도시들의 발전과 함께 예를 들면 보다 거리를 두고서 언어를 통해서 실재와의 관계9철학), 보다 유연하게 과거와 미래로 확장된 시간의 이해, 특히 고도로 선택적으로 도시의 정치적 통일을 목표했던 사회성의 이해가 생겨났다.[30] 차원 사이의 관계는 느슨하게 되고, 예를 들면 풍부한 역사상의 사건을 보면, 인간이 책임을 질 행동 (예를 들면 nomothesia 입법)에 의해서 중간 접속하는 것이 없이, 시간 그 자체가 사회 관계를 규제한다는 사태를 생각하는 것이 보다 곤란하게 된다. 시간과 진리의 괴리, 혹은 physis(자연)와 nomos(법)의 괴리는, 또한 거기서 하나의 세계 구조가 되고, 거기에 관해서 이론들이 전개되고, 논쟁을 하고, 이론 발전이 진행되게 된다. 모든 의미 차원의 상호의존은, 분석상의 분리를 통해서 재구성되고, 이론적 지식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그 이론적 지식은 더 이상 일상적 체험을 대표하는 것일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구조적인 사회 발전의 시맨틱 상의 상관물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한에 있어서 상관 관계에 관한 이론적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가설은 여기까지 우선, 선택을 통해서 관련성의 상대적 독립성이라는 의미에서, 차원들의 분리의 진전만을 가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 만으로는, 역시 가능하지 않은 차원 고유의 기초적 시맨틱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정식화 되는지는 아직 예측되지 않는다. 우선 예를 들면 단지 인간 본성을 기록하는 이상의 것을 제공하는, 사회성에 관한 시맨틱이 발달돼야만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 부족이 메워질까, 또한 어떠한 기존의 사회 상태의 자극이 시맨틱의 전통을 강고하게 하는 반응을 야기하는가, 추상적 도식으로는 예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 설정을 취함으로써, 말하자면 역사 과정을 방향 규정할 수 있는 감도에 대한 감도가 획득된다. 그래서 계층화한 전체 사회시스템에 있어서, 상류 계급의 계층 분화와 상호행위의 조건들을 보다 엄밀하게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이론적 프레임워크를 더 정확하게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증대하는 복잡성과 증대하는 선택 압력은 개개의 차원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꿔 말해 우발적인 선택성은 사물적, 시간적, 사회적 관점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보다 복잡하게 되는 사회에서 일상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문제를 보다 엄밀하게 규정할 수 있다면, 경험적 검증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이론장치의 정밀화가 더욱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주의해서 본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행동 선택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가, 나아가 어떻게 고도로 우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결정을 정당화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선택성은 각각 경험되고, 구조화되는 지에 대한 예비적 질문이다.
사물적 차원에 대해서는 이 발전을 통한 과정은, 사회의 분해-재합성 능력의 증대에 기반한다고 생각된다. 원자로의 분해 경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경우 매번 분해 불능한 최종 요소의 위치에 오는 것은 가변적이고, 이용할 수 있는 재합성의 가능성에 의존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현상 세계는 더 이상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대 뒤를 보는 개념이 형성되고, 이것은 점차로 세계의 새로운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통제 하에 들어간다. 그래서 과학은 실재의 구성에 대해서 책임을 지니게 된다. 비록 과학 자체는 다양한 다른 요소들, 적어도 종교, 기술 그리고 경제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차원에 있어서는 어떻게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 사이에 생겨가는 차이가 확대되고, 현재에 있는 처리 범위가 시간적으로 단축되고, 그것에 대응해서 변화가 가속화되는 지에 대해 유의한다면, 사물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위한 수용 능력의 증대를 관찰할 수 있다. 시간은 대폭적으로 확대되고, 제한 없는 과거와 제한 없는 미래로 확장되는 범위 속에서, 보다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은 보다 많은 시간과 보다 적은 시간을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에, 선택 과정은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농축된다. 그와 함께 보다 좁게 생각되는 구제사(救濟史, 신성한 개입의 역사)와 행위사(인간 개입의 역사)의 관련에 대신해, 진화와 행위를 시간 속에 위치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사회적 차원에 있는 대응물은, 상호 자유의 승인으로 이끄는 발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인간은 타아(alter ego)라 생각되고, 그것에 의해서 사물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누구라도 자기자신에 대해서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언급과 선택의 자유가 부여된다. 이는 특히, 누구나 스스로 사회성을 상호 우발성이라는 형식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또한 타자에 투영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 관계와 함께 윤리에 있어서 중심적인 개념인 állos(타)와 autos(자) 속에서, 이 사태는 준비된다. 이 개념은 사실 말해져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집단의 형태들과 이중 우발성의 선택적 제어의 형태들은, 사회 질서가 어느 정도의 개성을 가능하게 한느가, 또한 사회 질서가 사회적으로 영향이 큰 결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사적 요소를 인정하는가에 따라서, 언제나 변화할 수밖에 없다. 정치 윤리로부터 사회학 이론으로 이행(그래서 여전히 존재하는 이 변화에 대한 저항)은 이 관점을 통해서 변화한 복잡성 상태의 사후적 기록으로 다뤄진다.
(비현실적이지만) 전체 사회시스템의 복잡성이 연속적으로 증대한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증대하는 선택성에 대한 시맨틱의 보충 대책도 또한 개략적으로 이야기했던 방향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야만인의 습격이나 과하게 확장된 사회 구조의 붕괴와 같은 – 자기 무게에 의해 무너지는 거대한 것들 (in se magna runt)[31] – 것에 의한 착란과 중단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연속적 증대라는 telos(목적)를 이론에 투영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복잡성의 증대가 전체 사회시스템의 제1차적인 차이화 형태에 의존한다고 하는 가정에 모순된다. 차이화 형태는 윤곽이 특히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역사 과정 속에서 서서히 이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단절을 설정한다. 그래서 사물성, 시간성, 사회성이라 보이고, 그러한 것으로 실천되야할 것에 관한 강화된 기본 시맨틱이 성립하는 것은, 전형적으로는 어떤 차이화 형태가 발전된 이후이고, 그 발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그 때 기존의 기초를 통해서 이야기될 수 있던 것을 발전시키는 데까지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근본적 변화 없이 이어질 것이다. 구 유럽의 전통에서 갖춰졌던 것은, 완전하게 중심에 집중한 형태로서 세계 관념, 완전히 창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변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뿐인 미래 관념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질서화 한 그리고 무질서한 자기-언급성을 허용하는 자연적, 그러나 타락한 도덕의 코드를 따른다. 이것은 자신의 차이화 형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제국으로, 정치로부터 종교로 확대하는 것이 가능한, 귀족 사회의 시멘틱적 성과였다. 이것에 대응해서, 실재라는 것은 사물과 그 우연적 변이의 실재이고, 시간이라는 것은 연대기의 시간이고, 사회성이라는 것은 요구되는 행동을 할 권능을 주는 자질의 사회성이다. 근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 시맨틱에 균열이 생겨나지만, 처음에는 기존의 사고 수단이 강조되는 형태로 이뤄졌다. 예를 들면 계층적 사회관 속에서의 교육을 더욱 강조[32]하고, 혹은 미래는 완전하게 창조성이 없다고 생각될 수는 없다 던 Le Roy의 간략한 각주[33]. 이것들은 문화적 성과의 체계적 축적 이론으로 이행했다.
보다 명확하게 시맨틱의 기본적 결정에 초점을 맞춘 분석에서는, 한정성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한정성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가설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에 경계(지평)을 설정해야만 하고, 그에 의해서 조작은 생산적이 될 수 있고, 언제까지도 그 밖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공허함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한정이 설득력을 가지는 형태는, 전체 사회시스템의 차이화 형태와 관련해서, 그 연관을 통해서 설득력을 획득한다. 중세의 구 유럽 사회는 시간적 무한성으로서 세계를 생각할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에 맞서 teleology(목적론)을 통해서 시간적 차원을 한정한다. 마찬가지로 표명된 인간의 자연적 평등에 맞서서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 사회적 차원을 한정한다. 그것 자체로서 사고 가능하고, 잘못을 범해서 일어나는 타락, 혼교, 기형에 대해서, 사물의 본질 형태를 보이는 유형 을 상정함으로써 사물적 차원을 한정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16세기 후반에 형태의 확실성과 설득력을 잃어가거나 잘해야 수용성의 상실에 맞서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의미 차원이 앞에 개략적으로 보였던 복잡성 요구에 따르게 되면서, 한정성의 전통적 입장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가능한 것의 의미 경계는 확대된다. 의미 경계는 새롭게 탐구되고, 새롭게 뒷받침된다. 그것도 기능 시스템 내부의 자기 언급을 통해서다. 그에 따라 전체로서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자유도가 높아진다.
다른 형태로 형성된 사회가 사물적, 시간적,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훨씬 고도한 복잡성을 수용해야만 할 때에는, 단지 회고적으로만 한정성 사이의 연관과 한정성의 문제들을 기능적으로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한 기능의 징후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만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화로 향하는 사회의 전환이 기초적 시맨틱 전체에 혁명을 가져오는 것에 의해서, 역사적 의미를 획득한다. 거기에 조응하는 실재, 시간, 사회 관계의 개념의 정식화를, 전환과 같은 시대의 이론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정식화는 전환에 의해서 생겨난 복잡성과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이 경험적 사실이 되고, 전환에 의해서 가능하고 필요하게 된 선택의 이해에 견뎌낼 수 있는 한정 조건을 확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회의 기존 사실(fait áccompli)이라는 것이 1800년대에 가정하고, 거기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이론을 제공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너무 빠르다면, 그리고 부르죠아지 사회의 이론 자체가 이행적 시맨틱으로서 보여질 필요가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합한 의미의 세 가지 차원의 이해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5.
기본 시맨틱의 개념은, 무엇이 사회 구조 상의 변동과 관련해서 변화하는 지에 대한 질문의 형태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이 질문이 해명되는 것에 대해서, 발전의 구체적 경과나 결과에 관한 예지 불능성을, 동시에 의식해야만 한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발전이 가능한 지에 대한 질문의 형태로, 진화론적 개념을 구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바로 여기서 필요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해서 예견 불능한 것을 발생하는 것이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 진화의 이론에서는, 현재는, 연결할 수 있는 충분히 보증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초는 없다. 그런 한에서 전제해야 할 것은, 진화론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서 단계에서 단계로 나아가는 보편사적 과정을 설명할 야심을 더 이상 가지지 않고[34], 대신에 개인 레벨에서의 학습이론과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그것보다 좁게) 구조변화의 특정 형태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 전제에 따르면 구조변화가 진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구조변화가 변이, 선택, 안정화라는 메커니즘의 차이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경우다.[35] 그 경우에 진화는, 아무리 엄격한 선택과 안정화라는 것도 변이를 완전하게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계속을 보증한다. (또한 전체적 결과로서 진화는 과정이라는 하는 인상을 준다) 유기체 ��화의 경우, 이것은 안정화 가능한 재생산의 에러(돌연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생화학적 기체의 복잡성에 의해서 한정된다. 사회문화적 진화의 경우, 그 대응물은 모든 고정화가 다른 가능성들의 지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체험과 행위의 유의미성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진화 개념이 비교적 명확하게 한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사회의 진화의 이론은 어원이나 개념사의 역사, 이론과 양식의 변화, 교의의 발전 등의 세목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현재는 그러한 기대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는 먼저 개략적으로 보였던 시스템 차이화의 개념과도 모순된다. 출발점이 되는 것은, 전체 사회시스템의 진화가, 장기적으로 보면, 시스템 구조의 정상적 구축과 파괴의 부산물로서 차이화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보다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복수의 환경과 시스템을 자기자신 속에 구축할 수 있는 전체 사회시스템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하위시스템이 사회 내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그것에 의해서 확정할 근거는 없다. 그 방식 역시 구조를 구성하고 파괴하는 진화적 과정에 의해 규제되는지를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진화하는 시스템에서 이렇게 진화를 그린다는 것은, 분석과 언어에 고도한 요구를 부여한다. 복수의 시스템 언급을, 그래서 또한 복수의 시스템/환경-차이화를, 동시에 시야에 넣어야만 한다. 전체 사회시스템의 레벨에서 변이, 선택, 안정화라는 진화 메커니즘의 차이화를, 사회 내부의 진화의 영역에 있는 이 메커니즘의 차이화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나아가 구별을 다룰 뿐만이 아니라, 특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추구해야만 한다. 즉 전체사회의 진화는, 내부 진화를 가능하게 하고, 규정하고, 강제하는 지, 또한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뤄지는지. 전체사회의 진화는 예를 들면 내부 진화의 각각의 메커니즘을 미리 고정하고, 예를 들면 안정화의 조건을 지정하는 것을, 혹은 내부 시스템이 형성되는 사이에, 그 환경으로서 무제한으로 움직이는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부의 복잡성 압력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자체도, 진화로부터 독립해서는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 특히 사회전체의 진화가 어떠한 차이와 형태로 이뤄지는가에 의존한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각각 사회 구조와 시맨틱 전통의 진화적 변화를, 동시적이고 상호 연관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면, 이론의 그런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다뤄야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 틀의 다른 받아들여진 부분에 대해서도, 역사적, 경험적인 세목에 대해서도, 잘 다룰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분석적으로 생각되는 변종을 모두 시뮬레이션한 뒤에, 여러 가능성을 이론적, 경험적으로 오나전하게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론의 전체 틀을 우선 하나의 가능한 실재의 해석으로 응축하고, 그 개념을 철저하게 검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확증되지 않다고 해도, 또한 ‘진화론’이 반증될 이유는 없지만, 진화론의 분석 자원을 일단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요한 감축은 다음과 같은 가설과 함께 도입될 수 있다.
1. 일반적인 사회진화에 있어서, 안정화 기능은 전체 사회시스템의 차이화에 의해서 충족된다. 전체 사회시스템의 차이화는 분리된 각 시스템들과 거기에 고요한 환경들이라는 틀 속에서, 진화의 성과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2. 진화적 개념에서는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이 드물고, 우연한 것이지만, 이런 안정화 기능은 일차적인 시스템 차이화의 형식의 변화에 의해서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질’ 수 있다. 그것과 함께 전체 사회시스템의 외부 환경도 내부 환경도 복잡성이 증대하고, 그것에 의해서 드문 진화의 성과가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한 전제들이 생겨난다.
3. 그 진화의 성과 중 하나는, 사회 내부에서 전체 사회시스템의 외부 환경 스스로 내부 환경에도 의존하는 추가적인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내부 진화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지만, 진화의 형태를 가진 구조 변화로서 사회적으로 계획되고 제어될 수 있지는 않다. 그것은 영향 범주를 좁히는 점에서도, 또한 변이, 선택, 안정화의 기능이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서 수행되고, 그 분리가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도, 사회전체의 진화와는 구별된다.
4. 내부진화는 시맨틱의 진화(사상 진화)거나 하위시스템의 진화일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적 시맨틱의 기능을 충족하는 사상재(idea)가 변화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전체 사회시스템의 하위시스템의 사회구조가, 또한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하위시스템의 사상재가 변화한다.
5. 제1차적 사회 차이회의 형식과 내부진화의 가능성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열려진 지식 상황에서 생겨나는 모든 유보를 지니고) 이하의 가설을 정식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a. 환절 사회에서는 사회 내부에서의 인구학적 진화가 영향이 있지만, 다른 차이화된 사회문화적 진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즉 개개의 가족, 씨족 등에 대해서 다른 사회구조나 문화가 발전하기 위한 근거는 없고, 예를 들면 ‘하위문화’도 없다.
b. 계층 사회에서는 상류계급과 묶여 있는,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문자를 사용하는 계급과 연결해서, 독립된 사상 진화가 일어난다. 그 범위와 속도는, 결정적으로 본질적인 경우에, 문자 체계와 그 (시맨틱, 계층적) 사정에 의존한다.
c. 기능적 차이화 사회에서는 우선 각각의 기능/시스템의 내부 진화가 일어난다.[36] 그것은 이미 계층 사회에서, 특정한 기능 시스템 (예를 들면 법 시스템)를 확실하게 분리했을 때 시작되었지만, 모든 기능 시스템에 있어서 동등하게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사회의 경우, 역사적 이유를 가졌을 수도 있다) 기능 시스템 속에서 형성되는 시맨틱 구조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사상 진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충분한 하위 시스템의 구조적 기반과 기능적 특화를 가지지 않은 시���틱은, 단지 ‘다 써버리는(using up)’ 형식에 의존하게 된다.[37]
이 점에서 이상과 같이 개략적으로 본 이론적 접근의 틀 속에서는 단지 부분적 문제만을 더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정한 시맨틱 복합체에 전념한 모든 개별 연구를 위해서, 하나의 기본적인 질문을 미리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진화하는 전체 사회시스템의 내부에서, 독립적인 사상 진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말을 하기 위한 구조적 조건은 어떤 것인가? 그래서 다음 장에서 사례 연구로 특정한 주제의 복합체를 끌어 내기 전에, 사상 진화의 가능성 조건에 대해서, 미리 몇 가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6.
모든 진화와 마찬가지로 사상 진화도 또한 진화하는 연관, 즉 상호 의존성과 독립성이 병존하는 경험적 실체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이 경우 보존된 시맨틱의 특수한 의미 연관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 순간 현시화되는 것과 함께, 현시화된 의미의 지시 지평 속에 있는 의미로서 다뤄진다.[38] 이 연관은 진화가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에 도달한다면,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것과 함께 변화 속에서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주제화 된다. (그렇지만 반성의 경우에 언제나, 이 주제화도 선택적으로 이뤄진다. 즉 이 주제화는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모두 다루는 것은 아니고, 변화/변화 없음 내지 불연속성/연속성이라는 대립을 이용해서 도식화 한다.)
더욱이 진화가 가능한 것은, 이 진화하는 실체에서, 변화한 구조의 변이, 선택, 안정화의 기능이 분리되는 경우에만, 즉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서 담당 되는 경우만이다. 거기에 더해서 변이를 위한 자극이 일어날 개념성을 충분히 높이는, 매우 복잡한 환경이 필요하다. 나아가 보다 고도한 진화 형식의 경우에는 진화 능력의 내부 조건 쪽을 외부 조건에 비해서 보다 중요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이미 유기체 진화와 사회문화적 진화의 대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타당하고, 사회 진화 위에 구축되는 사회 내적 진화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타당하다.[39] 이러한 사태는 특히 진화하는 시스템의 수가 감소하는 경우에, 진화가 가능하고 가능하게 유지된다면, 진화는 환경보다 시스템에 보다 의존하는 형태로 보증 돼야만 한다는 것에서 생겨난다. 사상 진화의 경우에는, 전체 사회시스템에 의한 의미 있는 사회 환경의 추출도, 사상재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질도, 처음에는 매우 개연성이 낮은 구조변화의 양식이 그 개연성을 높이는 조건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지배적 견해(즉 과학의 진화론[40]에 있는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는 선택 메커니즘보다도 변이 메커니즘의 쪽이 보다 강하게 내생적 조건에 (물론 결코 배타적일 필요는 없지만) 기반할 필요가 있다고 가정한다. 시맨틱은 스스로가 변이를 유발할 수 없기 때문에, 변이를 위한 외부 자극을 언제까지나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41] 그래서 실제, 이미 사고나 문자에 의해서 고정된 사상재라는 형태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자극이 있다. 이야기되는 의미나 대화 속에서 재생산되는 의미의 경우에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듣는 이의 행동 대부분을 흡수하는 것과 달리, 문자재(written material)는 거리를 두고서 독자가 그것을 평가하도록 요구하며 대치한다. 거기에 더해서 요구 수준의 보다 높은 진화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변이를 가속하는 보조 메커니즘, 즉 충분한 빈도가 있는 것과 동시에 구조 적합적 변이의 발생을 보증하는 보조 메커니즘이 존재한다.[42] 이 보조 메커니즘은 계승된 사상재 속에 있는 인지적 비일관성 내지 문제, 특히 해결 불능의 문제에서 발견된다. 나아가 경험이 보여주는 경우에서는, 실천적 지식 내지 이론적 지식을 안정화하고, 체계화하고, 보다 추상적으로 통합하려고 하는 활동 그 자체가 문제 설정을 발생한다. 안정화는 진화적인 문맥에서 본다면, 지양이나 부정이 아니고, 변이 기회의 구조화이다. 사상 진화의 개연성이나 속도는, 지식이 각각 문제 설정의 도움을 통해서 처음으로 체계화되고, 결합된다는 사태에 의해서만 결정적으로 보증된다. 어떤 시맨틱의 구성 요소가 다른 구성 요소들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변이 과정을 함께 공동 조정(co-steer)하는 변형과 매개적 작동을 통해서 만이다.[43] 변이는 음성학적 변화 혹은 새로운 조합 속에서 일어나지만, 오해나 계획적 오용, 오래된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말하자면 보존된 시맨틱이 존재한다고 하면, 변이는 그 처리의 일부이다. 변이는 언제나 일탈을 만들어 내고, 언제나 새로운 시맨틱 전통의 변종을 만들지만, 대개는 실패로 끝난다. 개인이 스스로와 커뮤니케이션할 때 사상재를 억제하거나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성과가 전문가나 관심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시맨틱의 혁신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와 영향력을 발휘하는 역사의 시작 사이에서, 상당한 시간차가 있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44] 선택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변이의 귀결로 설명될 수 없고, 단지 변이의 발생을 시맨틱의 변용 과정으로 전환하는 다른 종류의 가속 요인에 기인한다.
솟아 나는 다수의 변이를 앞에 두고 선택은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이 질문은 차이화되는 기능 시스템이 사상진화의 계기가 되는가, 그것과는 관계없는가 즉 중요한 지식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상황이나 역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답이 달라진다.
시스템 이론적 전제에서는, 다음과 같은 귀결이 나올 것이다. 즉 시스템 내부의 차이화의 정도가 작을수록, 사회 속에서의 진화는 사회 내적 환경과 보다 강하게 연결되는 것에 비해, 기능 시스템이 기능적으로 차이화하면, 선택이 보다 강하게 기능 시스템 고유의 기준과 결합할 기회가, 즉 고유의 도식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프로그램에 결합할 기회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참/거짓의 이항 도식과 이론이, 합법/불법의 이항 도식과 법률이, 미/추의 이항 도식과 양식이[45], 결합된다. 이것이 맞다면, 제1차적으로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 질서로의 이행은, 특히 선택 양식이라는 점에서 사상진화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이해가능성의 요건들과, 그 요건의 일부인 지혜, 철학, 학문과 같이 이해 불능성의 형태들에서 사상진화를 그때까지 보다 명확하게 떼어낼 것이다.
이행 기간은 확실히 매우 길다. 이행 기간은 예를 들면 법의 운용과 수도원에서는, 근대가 시작되는 것 훨씬 이전에 시작되어, 일종의 지적 준비, “전 적응적 진보”로서, 일반화나 변용을 용이하게 하는 기능 고유의 용어가 만들어졌다. 참으로 이 두 가지 영역에서, 기능 고유의 둔화 요구가 눈에 띄게 이른 시간에, 즉 이미 16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에소테리시즘 고유의 비의에 대한 권리가 오늘날 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로서는 기능 시스템에 있는 선택 기준이 특수화하고 내생화하는 경향이 있고, 기능 시스템은 서로에 대해 환경을 구성하고, 그래서 서로 동조하지 않고 진화한다.
사회 내적 환경이 사상 진화의 선택 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설득성과 명증성의 개념을 사용해서 다뤄질 수 있다.[46] 설득적이라는 것은 시맨틱이, 그것 이상의 근거 없이 이해되고, 타자에게도 또한 이해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지점에서, 확정되는 것이다. 명증성이라는 것은 강화된 설득성이다. 명증성이 주어졌다는 것은, 대체 선택지가 배제되었다는 것까지 분명해진 경우다.[47] 설득성과 명증성이 주어진 사회적 문맥이 더욱 특화되지 않는 (즉 나뉘지 않는) 한, 이 경험 내용은 사회 전체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 경험 내용은 보존된 시맨틱을 지탱하는 기초로서 기능하지만, 동시에 변화에 민감하기도 하다. 이 경험 내용은 변이가 제시되는 경우에는 선택적으로 움기이지만, 사회 환경이 변화하는 경우에는 스스로도 변이를 피할 수 없다. 사상 진화는 설득성과 명증성에 의존하고 있을수록, 그 선택 기능이라는 점에서 주권을 덜 가지게 되지만, 그 결과의 사회적 의의라는 점에서 보다 강하게 확신 된다. 심지어 차이화 된 기능 특화의 하위 시스템도, 전체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설득성 압력에서 완전하게는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기능 특화한 하위 시스템은, 시스템 고유의 사상 진화를 시점이나 사물적 내용이라는 점에서 보다 환경으로부터 독립한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도 가능하고, 내부 상황이 혁신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에는, 소위 명증성과 설득성을 통해서 환경을 탐색할 수 있다.
전체 사회시스템의 내부에서 시맨틱 구조의 독립된 진화가 일어난다면, 변이와 선택의 기능과 참으로 마찬가지로, 안정화의 기능도 고유의 형태로 이뤄져야만 한다. 시맨틱 전통의 영역에서는, 이 기능은 지식의 체계화와 도그마화에 의해서 충족된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형식이나 유형은, 단순화된 형태로 학습되고 계승될 수 있으며, 보다 많은 사례를 정리할 수 있다. 보다 추상적인 규칙으로 변환된다. 제도(institution)라는 것은 그것을 나타내는 고대 로마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시맨틱의 질서와 도그마의 연관을 지시한다. 그 경우에 안정성은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도달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서 보증한다. 추상적으로 제어되는 체계학은, 최종적으로 어떤 사물 영역의 모든 문제를 가능한 한 완전하게 파악하는 (혹은 그런 한에서 배제하는) 노력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과 동시에 제어될 수 없는 착란의 원천을 차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48] 하나의 좋은 예가 로마법이 1세기경에 체계화 노력에 의해서, 또한 새롭게 16세기경의 체계화 노력에 의해서 획득한 계승 능력이다. 이 안정화의 형태 자체가 변이와 선택의 도입 가능성을 다시 규정한다. 이 안정화의 형태는 시맨틱 소재를, 안정적임과 동시에 자기비판적인 것, 항상 운동함과 동시에 모든 혁신으로의 접속을 자기 자신 속에서 구하는 것, 무효로 돌릴 수 없이 발전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만든다.[49]
이런 가정이 대강 맞다고 한다면, 사상진화는 특히 그 안정화 양식에 의해서, 사회진화에 대해서 일정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우연한 변이는, 비록 기존의 구조를 통해서 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해도, 시맨틱에 의해서 조종될 수 없는 발생 계기, 그리고 앞으로의 시스템과 조화할 수 없는 발생 계기에 의존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선택은 일반적인 사회적 교제 속에서 생겨나서 그 교제를 지탱하는 설득성에 의존한다. 이것에 비해서, 시맨틱 전통이라 이름 붙인 진화적 구축의 성과는, 자기자신의 외부에 어떤 직접적 상관물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성과는 자기의 안정성을 스스로 보증한다. 그 자기 경험의 양식은, 자명성 내지 도그마의 양식이다. 나아가 진화 메커니즘의 문맥 속에서 안정화 기능의 위치를, 즉 계승 가능성과 가능한 변이와 선택의 제약조건을 동시에 보증하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래서 도그마틱은 사상진화에 있어서의 반성 형식이다. 즉 사상진화가 스스로 실현하는 자기의 완성을 이해하고 성립하는 형식이고, 자기가 독립해 있다는 것을 아는 형식이다. 여기서 출발하면, 18세기에 있는 모든 도그마적인 것의 위기는, 전조로서의 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 위기는 사상진화의 가능성의 사회구조적 조건에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 책의 사회이론적 출발점에서 본다면, 사회 전체의 진화와 동조해서, 사회의 차이화 형태 즉 기능적 차이화에 의해 촉발되고, 사회 내적 진화에 있어서는, 기능 시스템 그 자체로 이어진다. 그것과 동시에 시간 구조나 발전 속도에 대한 요구가 변화한다. 도그마틱을 매개로 한 사상진화는, 근대사회에 있어서 충분한 속도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승된 시맨틱의 사회문화적 진화에 대한 공헌을 모두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공현을 찾고자 한다면, 진화가 더 이상 서로 동조하지 않는 기능 시스템 안에서, 특정한 기능 시스템의 문맥 속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제 기능 시스템은, Kuhn의 과학��명의 분석이 보여줬던 것처럼, 선택 양식에 관해서도 보다 사회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에 의해서 기능 시스템은 전통사회에 있어서 가능했던, 어떤 진화의 성과에 대한 보증 양식을 잃는다.
사상진화의 소재가 기능 시스템 고유의 과학 진화로 옮겨지는 과정은, 그 자체도 그 조건도 복잡한 과정이다. 순수하게 분석적으로 본다면, 아래와 같은 측면이 구별된다.
1. 시맨틱의 발전의 기본문제는, 인식 기능에 보다 적합하게 되고, 객체와 주체를 서로 분리하고, 관계 맺게 하는 것에 따라서 기능 특화된다. 객체 (=인간의 눈 앞에 있는 것)의 기초에 있는 것(subjectum)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주체화’되고, 인식하는 의식으로서 안정화된다. 그렇다면 인식은 ‘단지’ 의식(주체)과 대상(객체)의 사이의 관계만을 다뤄야 한다.
2. 이 기능 특화의 조건 변화에 따라서, 시스템의 성과로서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는 작용이 발전한다. 즉
 a. 주체의 측에서는 경험 처리의 심적 문맥 및 사회적 문맥의 중립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이 중립화는 단지 방어나 제거가 아니라, 다른 여러 의존 관계의 치환에 의해서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고, 새로운 과학 시스템 고유의 감도에 의해서 매개된다. 주체는 거기에 상응하는 시맨틱적, 사회적인 특수 조건을 지닌 과학 연구의 요건에 따라서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래서 주체에게는 특히 이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개성을 획득하는 특별한 기회가 있다.
b. 객체의 측에서는 시스템 형성이(시스템 형성만이), 이항 도식의 치환에 의한 현상적 진리의 실효를 가능하게 한다. 더 이상 존재물에서 출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존재물의 확실성은 반대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의 확실성에 의해서 대치된다.[50]
3. 그러한 작동 조건을 충족하는 시스템이 차이화해도, 시맨틱 전통 전체는 과학화 할 수 없다. 이미 해석된 세계는 시스템 차이화에 있어서 환경이고, 사람은 과학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그 환경에 비판적, 선택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그러한 환경 없이 과학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과학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의 영역에 있어서만,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을 분류할 이유는 없다. 과학의 선택 원리는 시스템과 환경을 연결하는 한에 있어서, 늘 지식이다. 과학은 시스템 내의 규칙을 적용하면서, 자기의 기능을 문제로서 테마화 한다. 이 문제는 외부 조건과 내부 조건의 사이에서 관계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의미에 있어서만 (의식 속에서의 세계의 순수하게 내적인 구성으로서는 아니라), 과학은 새로운 시스템의 자기조직화이다. 즉 최종적으로 언제나 시스템과 환경을 서로 연결하는 관계들의 관계화이다.
이 세 가지의 계기를 서로 연결하면, 사상진화에서 과학진화로의 이행이, 역사적으로 보아 감축적 그리고 증폭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행은, 사상진화의 계속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보존된 시맨틱의 독점적 이용권을 사상진화에서 박탈하고, 풍요로운 의미 내용을 가진 기반을 대체하지 않고, 보존된 시맨틱에 있어서의 설득성의 근거를 변화시킨다. 과학에 의한 감축은 숙명적으로 지식의 증폭을 가능하게 하도록 선택된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