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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 Sun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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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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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기
작품에 스며든 욕심의 무게 덜어내기
* 이 글은 월간지 <몸> 6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 중에 한 가지는 작품의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다. 나로부터 파생되는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욕심의 양이 있다. 그 욕심의 양은 나 자신만 알고 있으며,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어 발표되고 난 후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 작품의 실제 무게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욕심은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마치 일정한 양을 담을 수 있는 컵에 많은 물을 담으면 흘러넘치듯이 과한 욕심은 작품의 기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과거의 나로부터 욕심의 그릇을 넓혀온 현재의 나의 작품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나의 예술적 작품을 위해 욕심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을까? 이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를 도울 수 있는 나름의 보편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1. 잠시 작품에 “거리두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를 통해 우리는 사람 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실행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감정과 소통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만들고 있는 작품에 욕심이 덜어지지 않고 계속 채워지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의 거리두기와 같이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를 두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작품과 나 자신의 거리두기에서 우리는 미처 생각지 못한 디테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는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순간이 바로 본인의 작품을 객관화되어있는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타이밍인 것이며 어쩌면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던 가장 기본적인 생각과 초심을 일깨워 주는 과정인 것이다. 작품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거리를 두는 과정이야말로 작품의 주인에게 매우 필요한 과정이다.
<사진 1>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의 거리두기를 떠나 실제 연극과 미술치료에서 거리두기(Distancing)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강력한 정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여 자신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2. 다른 예술장르를 “관찰하기” 거듭된 변화의 시기를 거쳐 많은 작품들이 자신의 장르에 집중하지만 타 예술장르의 영향을 많고 탄생하는 작품들이 많아졌으며 그만큼 생각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주된 장르에서 파생되는 작품일지라도 타 예술장르에 대한 관심과 관찰이 필요하다. 한 장르의 깊이를 표현해야 하는 작품 외에 대부분들의 작품들은 자신이 가진 하나의 장르에서만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시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표현하는 작품은 내가 가진 장르에서 시작되지만 그 안에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영감은 수많은 타 예술장르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타 예술장르가 가진 생각이 내가 가진 장르에서는 절대 할 수 없음이라는 생각의 단절이 아닌 타 예술장르를 통한 영감을 가지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도, 실험하는 과정은 작품의 색을 더하여 나의 작품, 장르에서도 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2> 관찰은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언급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중 철학에서는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목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계기와 목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3. 역할을 “나누기” 작품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나감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덜어지지 않는다면 작품과 연관된 일들을 내 손으로 너무 많이 잡아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이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욕심을 덜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다. 현실적인 문제인 시간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욕심이 수많은 것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정리를 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나의 작품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은 무수히 많다. 작품 제작을 떠난 기획과 홍보, 그리고 이 외에 작품에 필요한 전문적인 요소들 또한 작품을 위한 작업인 것이다. 다양한 제작 파트에는 그 분야에 따른 훌륭한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고 그들의 역량과 생각을 공유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것으로 작품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수 있다. 제작 파트보다 더 디테일하게 나눈 역할의 분담이 필요하다면 작품을 위한 역할을 분배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위의 거리두기와 관찰하기가 내면의 욕심을 비울 수 있는 방법이라면 지금의 나누기는 외적으로 현실적인 욕심을 덜어낼 수 있는 과정이다.
예술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많은 것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없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오감을 떠나 육감이 필요한 장르이다. 예술 속에서 탄생하는 작품은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대화할 수 있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그만큼 예술가는 다양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가야 한다. 아집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고집과 욕심으로 만들어지는 좋은 작품들이 앞으로도 많이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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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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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대처, 표출의 다양성
이에 따른 예술작품에 접근하는 관객의 확장
* 이 글은 월간지 <몸> 5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2020년이 흘러가는 속도는 지금까지 겪은 여느 해보다 빠른 속도로 시대가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인 감염질환은 우리의 삶과 예술에도 급격하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언젠가는 변화를 겪으리라 생각했던 부분들이 예상치 못한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마치 영화 속 2020년 모습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이다. 물론 다양한 영화 속 2020년의 삶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타임머신 등이 등장하였지만 현실성이 내포되어 있는 지금의 예술의 표현 방법은 영화 속 미래 모습을 대비한 빠른 변화의 발걸음같이 느껴진다. 삶의 여러 부분에서도 느껴지는 이 변화를 우리의 예술로 더 깊이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더욱 치밀하고 탄탄한 대처법을 만들어 나아가야 함이 분명하다.
예술적 표현을 표출하는 방법은 지금의 코로나19 감염질환 시기 초기보다 다양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는 미뤄진 공연도 많지만 예술가들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 사라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사라지지 않는 공연,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많은 관객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많은 방법 중 지금의 시기에 가장 활성화 되어가고 있는 방법은 온라인 플랫폼이다. 온라인 플랫폼을 대표적인 매체로 이용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이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작품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공연뿐만이 아닌 영화처럼 편집을 이용해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이나 출연자들의 예술적 표현에 집중하여 작품의 형태를 수정하여 보여주는 방식 등 참신한 방법의 모습들로 예술표현의 표출은 진행되고 있다. 그 중 국립현대무용단의 <혼자서 추는 춤>은 개인적으로 현상황을 반영한 이색적이고 참신했던 아이디어이자 작품이다. 온라인 플랫폼 안에서는 관객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예술가들에게는 참여하여 표현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공하는,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의 온라인 플랫폼은 관객들에게 매우 용이한 접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예술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입장으로 생각해본다면 매우 공평한 접근 매체인 것이다. 공평한 무용 예술을 얻는 것, 공평한 음악 예술을 얻는 것 등 우리의 마음속 한편에 차지하고 있는 ‘형평성’을 자유로운 예술이 담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이뤄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격변한 예술의 표현 매체속에 우리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평등과 자유로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 플랫폼이 형평성과 자유로움을 내포하고 있지만 바쁜 삶, 어려운 삶의 이유로 이 조차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넘어야 하는 허들이 가득하다. 예술을 하는 우리는 지금의 과정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예술을 접하는 이들에게 전달할 평등과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경험해야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예술적 표현이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처, 표출하는 방법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함과 동시에 예술작품에 접근하는 관객 층의 다양성이 확장되고 있음 또한 인지하며 준비, 실행해야 한다. 또한 예술가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서는 예술가들과 관객들의 형평성과 자유로움을 더욱 넓혀줄 수 있는 대책, 지금의 허들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간과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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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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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전달 방식의 변화
시기가 전달하고 있는 변화의 방법
* 이 글은 월간지 <몸> 2020년 4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를 살아가면서 또 겪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라는 큰 재앙에 우리의 예술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까지 꽁꽁 얼어버렸다. 예술인들에게 전송되는 문자는 재난 문자와 계획된 공연의 취소 통보가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고충, 고통이 귀에 들릴 정도로 많은 피해를 안고 살아야 하는 시간을 우리는 버티고 견디며 이겨내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화예술을 드러내는 공간과 시간은 모두 사라졌고, 소속이 없는 예술인들의 경우에는 무기력함을 떠안은 채 이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작품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일의 즐거움이 그립고, 그 순간에 대한 소중함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외출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지금 예술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집이라는 실내공간에서 시간을 활용하기 위한 내부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무기력, 우울 등 갖은 부정적 생각들이 바이러스만큼 개인에게는 큰 영향으로 침범하고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그림을 그리는 등 문화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좁혀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알고 보니 그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치유가 되고 힐링이 되는 문화예술이 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서로 거리가 생긴 요즘 예술가들은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이 문화생활을 자연스럽게 행하고 내면에 대한 치유를 할 수 있도록 예술의 방법을 공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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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직접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며, 개인의 생활 안에서 자발적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음은 예술을 통한 시간의 치유, 마음의 치유일 것이다.>
국가재난인 이 시기에 문화예술에 대한 또 다른 변화 혹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 그중 무관중 공연이라는 공연 진행 방식도 생겨났다. 공연을 위한 대관과 일정이 잡혀있는 예술인의 경우에는 작품을 위한 공연 취소만큼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연은 진행하나 관중이 공연장에 오지 않아도 온라인을 통해 작품을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 오프라인으로 공연을 진행할 때에 관객 홍보의 문제가 큰 어려움이기도 하다. 많은 좌석을 채우기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이다. SNS로 소통이 빠르게 되는 시대에 다행히 관객과 예술작품 간의 소통을 이뤄낼 수 있는 지금의 온라인 시대에 감사함을 표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공연뿐만 아니라 전시장의 경우에도 작가 혹은 전시의 관계자가 관객 대신 관람을 영상을 통해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도 진행이 되고 있다. 물론 이 방식들이 직관을 통한 감각의 경험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문화예술이 가진 임무는 직관을 통해 내적 움직임을 유도해야함도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무관 중으로의 공연, 전시는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은 순간,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록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예술이 아니더라도 그중 한 가지는 명확히 존재해야 개인의 예술이 아닌 외부로 표출되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 상황을 위해 사람들이 뛰고 땀을 흘리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술인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다. 우리가 힘들다며 국가나 사회를 비난하는 일은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모두를 위해 그리고 예술인들을 위한 도움을 만들어내고 조금씩 행하고 있다.
이 글은 4월에 읽는 당신에게 보이지만 지금의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조금은 더딘 소통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예술가들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힘을 쓰고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다. 2020년 3월의 봄의 기운은 여전히 정직하게 돌아왔지만 예술을 위한 준비는 다른 해보다 유독 느리고 더디다. 세상이 예술의 표현을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쉼표를 던진 시기이다. 모든 일은 쉬지 않고 계속 달릴 수는 없다. 한 번쯤은 쉬어가면서 자신이 가진 예술을 다시 한번 회고하고 예술관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들이 가득한 2020년의 봄으로 다듬는 계절이 되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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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전시에서 아티스트 백남준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조금은 게으른 시간을 통해 이것저것 궁리할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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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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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는 서서울예술교육센터에서 Teaching Artist로도 활동중입니다. 내가 가진 예술을 표현하는 삶과 더불어 나의 예술을 함께 공유하여 누군가에게는 예술적 놀이를 혹은 치유가 되는 시간들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시도하는 경험은 가장 진하며 마음 속에 더욱 깊이 새겨집니다. Teaching Artist의 역할로 함께하는 많은 아이들의 세상이 진한 예술적 경험으로 쌓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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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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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3일에는 양선용 프로젝트의 두번째 이야기인 <접근,다스름>을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작은 규모로 발표를 하였고 올해 2020년 다시한번 양선용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작곡발표회를 준비합니다.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실험,시도로 하나씩 나아갑니다. #양선용프로젝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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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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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하며 살아가며 꼭 도전해보고 싶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 하나하나에 감사함을 담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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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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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예술
수단이 아닌 감성의 경험을 위한 예술
* 이 글은 월간지 <몸> 2020년 3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아니 놀이터라는 공간이 많이 사라졌다. 어린 시절 놀이터라는 공간은 예술을 하기에 확장된 생각을 열어준 공간이기도 하였다.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한 놀이의 시간들은 어쩌면 예술을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10~20년 전의 아이들의 놀이와 지금의 아이들의 놀이는 다르다. 접하는 매체가 변화하고 다양해졌다. 크게 바뀌지 않았으면 했던 아이들의 순수함과 감성도 놀라울 만큼 달라져있다.
얼마 전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중, 고등학생들의 생활이 담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함께’ 하는 공동체의 개념보다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았으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기회, 시간조차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중에서 몇몇 아이들의 예술은 진로의 수단으로 예술을 접하고 있다. 과연 수단이 된 예술의 과정이 기존의 교육에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감성과 감정에 영향을 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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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다양한 예술작업의 재료를 얻기 위해 찾아갔던 프랑스 파리에 있는 작은 놀이공원에서는 작은 포크레인을 컨셉으로 한 놀이기구를 통해 직접 모래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쉽게 지나칠 풍경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모습 자체에는 1.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체험하는 방법 2. 모래, 미니 포크레인 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소스를 가지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방법을 아이들은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익숙한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모래 가득한 놀이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스마트폰이 자리 잡은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아이들을 위한 예술의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체를 무작정 막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내가 경험한 프랑스 파리 아이들처럼 예술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방법은 우리가 배웠던 지난 예술교육 방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의 예술의 경험의 방식에 빗대어 지금의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이제는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히려는 방법일 뿐이다.  원초적인 예술교육보다는 예술을 기반으로 한 아이디어로 지금 성장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일부이다. 예술작품을 만들듯이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 그것은 함께하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교육을 받고 지금은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움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느끼지 못한 감정적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 경험들을 쌓으며 앞으로의 아이들에게 예술적 경험의 기회를 우리는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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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교육을 교육으로의 접근한다기보다는 놀이의 개념으로 접근한 서서울예술교육센터 내부에 걸린 아이들의 작품을 보면 예술적 경험, 놀이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지닌 궁금증, 생각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순수하고 직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가진 생각의 물음표를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궁금증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그 것이 아이들의 내면의 성장과 기존 교육의 간접적 영향을 주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힌트가 될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접근하기 이전에 어른이 된 우리들의 경험을 잊지 않아야 한다. 다양한 공간에서는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보는 미술이 아닌 체험을 할 수 있는 미술관, 듣는 음악이 아닌 음악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공간 등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기회들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성인들의 감성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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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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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예술이라는 컨텐츠의 영향
* 이 글은 월간지 <몸> 2020년 2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수많은 콘텐츠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시대이다. 손쉽게 사람들에게 예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그 모두를 경험하기엔 방대한 양의 콘텐츠가 존재한다. 예술인이 연습하는 모습부터 고충, 즐거움 등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으며 이를 통해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예술에 대한 거리감과 접근성이 많이 줄어들기도 하였다. 예술작품을 콘텐츠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모든 것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자극적인 것들, 솔직하다 못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며 모두를 인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2020년을 맞이한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작품을 새롭게 구상하고, 추진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시대의 흐름을 등한시할 수 없기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부분에 대한 조사를 하기도 한다. 그중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는 계속 입안에서 맴돌며 올해의 작품에 관한 연결성을 생각한다. 사람들이 접하는 예술이라는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영향을 주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작품으로 하여금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를 전달한다거나, 하나의 주제에 관해 다른 의견도 존재함을 예술적 표현으로 깨닫게 된다. 그만큼 예술 콘텐츠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에는 위로, 위안과 같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단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예술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은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는 것, 이처럼 예술 콘텐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보듬어주거나 대화를 하거나 혹은 위안,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다가온 2020년, 어쩌면 숫자만 빠르게 변화하였을지도 모를 새로운 해이다. 해는 바뀌었으나 예술 콘텐츠는 흐름에 따라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작품 안에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며,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전달해야 할까?
예술가의 성격과 마음까지도 그대로 드러나는 무대라는 공간처럼 예술 콘텐츠 자체에도 솔직함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멋으로 포장된 작품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시대이다. 솔직해야 예술 콘텐츠를 지속력이라는 힘을 얻게 될 것이고, 선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함이 결여된 세상이 되풀이될수록 솔직함이 드러나는 작품은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만 자신의 솔직함에 취해 나타나는 무례함과 아집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컨트롤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과정에서의 많은 기획과 홍보에도 선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솔직함이 묻어나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많은 작품을 경험하였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반짝임이 가득한 포장으로 둘러싸인 작품의 홍보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간혹 보게 되는 작품의 홍보 디자인들을 보면 예전보다 직설적이지만 솔직함이 묻어나는 디자인 작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눈을 보게 되는 좋은 현상으로 느껴진다.
솔직하지만 자신의 표현에 대한 선한 고집을  표현한 화가 장욱진의 말은 1976년의 써 내려간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작품을 만들며 살아가는 나를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준다.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점잖다는 것을 싫어한다. 겸손이란 것도 싫다. 그러는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솔직한 오만함이 훨씬 좋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편협하다거나 심하면 미친 사람으로 돌리기도 한다.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면 어떠랴, 그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편하다.”  
- 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수필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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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장욱진 화가의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
10년 전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지독한 악함을 깨달았을 것이고, 2020년이라는 지금의 시대에도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상상하지 못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함이 묻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의 10년, 20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욱 지독한 인간의 악함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방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변질되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을 우리는 택해야 하지 않을까? 올해 콘텐츠에 많이 드러난다는 선한 영향력이라 것을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예술작품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조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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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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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ies but Goodies
빠른 흐름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옛 것들
* 이 글은 월간지 <몸> 2020년 1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2020년, 지난 2000년이 그랬듯이 숫자가 주는 생소함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래서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이 아직은 어색한, 그 어느 해보다 새로운 해가 열렸다. 우리는 얼마나 빨리 달려온 것일까? 2019년의 연말과 2020년의 신년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언급되는 추억의 이야기들은 추억이라는 이유에 그리움의 색이 입혀져 있던 것인지 우리의 마음에는 가깝게만 느껴진다.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나간 옛 것들이 좋은 의미로 남겨져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옛 것들은 여전히 좋은 기억에 남아있다.
음악을 들어야 할 때면 LP를 찾아야 했고, 시대를 지나 테이프와 CD를 접하고, MP3 플레이어를 거쳐 이제는 핸드폰 안에서도 음악은 거뜬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편리함은 빠른 시기를 통해 다가왔다. 하지만 지난 옛 것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LP의 사운드가 그리워 LP와 턴테이블을 찾는 사람들, 지금의 음악을 LP로 제작하는 과정의 역행. 테이프를 꽂아 듣던 워크맨도 다시 출시되는 지금의 시대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움만으로 제작되는 흐름만은 아니다. 지난 옛 것들에 남아있는 예술적인 매력을 기억하고 다시 찾는 것이다. 최고의 음질로 듣는 음악이 최고의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LP가 지난 노이즈가 음악예술의 소스이며, 현시대에는 어색한 소리를 가진 악기로 연주를 하는 것이 음악 예술이 되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본다면 과연 새로운 것들이 최고라는 말이 정답일까.
지금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것들 창작하고 있다. 새로운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안에는 옛 것들이 기둥이 되어 받쳐주고 있다. 항상 흔들리지 않고 창작하는 힘을 주는 것이 옛 것인 것이다. 창작의 과정에서 ���리는 옛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 기둥이 될 수 있는 옛 것이 지닌 의미와 깊이를 잘 지켜내고 있을까? 옛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도 쉽게 휩쓸리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다. 옛 것을 지켜내는 삶과 사람도 쉽게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지켜내기 위해 살아온 삶을 알아주지 않는 시대이다.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창작을 뒷받침해주는 옛 것을 지켜내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옛 것을 가꾸는 것도 앞으로 우리의 창작의 임무일 것이다.
지난 2019년까지의 예술, 그리고 꾸준히 만들어나갈 2020년의 예술을 우리는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빠른 변화가 있음에도 새로운 것들을 탄생하게 했던 옛 것이라는 씨앗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것들이 새롭게 변화하여 New-tro(뉴트로)라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New-tro(뉴트로)라는 단어는 옛 것을 잊지 않고 존중을 하며, 현시대에 맞춰 변화를 준다는 의미를 지닌 사회적 경향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이에 맞게 예술도 그 흐름을 등한시하지 않는 작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와 관객의 관심을 고려했을 때 지금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작품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한 면에서 옛 것이 담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품은 꽤나 매력적이다. 한 세대의 관객이 일방적으로 타깃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원하는 세대부터 옛 것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세대까지. 이 이야기는 결국 받아들이는 문제와도 직결되기도 한다. 나 자신과는 반대의 세대가 가진 생각과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술은 편협적인 정치나 삶과도 다르지 않다.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는 마치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느껴지는 상대적인 속도와도 비슷하다.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에 적응하면서 나의 상대적인 속도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 흐름의 주어에 어떠한 분야가 들어가냐에 따라 흐름을 움직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새로운 흐름 뒤에는 다시 돌아오는 옛 것이라는 무한의 순환 반복이다. 지금은 다시 돌아온 옛 것에 대한 의미의 되새김이 필요한 시대이다.
옛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옛 것에만 머물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침몰한 옛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또한 새로운 것만 받아들이고 옛 것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 또한 무너질 것이고 변이된, 껍데기만 남은 새로운 것들만 쌓일 것이다.
* 글의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며 떠올린 두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현시대의 움직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술작품에 많은 관심을 두고 감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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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화가 서세옥의 작품.  옛 것과 현대의 움직임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 1. 춤추는 사람들, 2003, 닥지에 수묵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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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화가 서도호의 작품. 현대의 움직임에 옛 것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 2. Gate-Small, 2003, Silk, Stainless Steel, tube (출처 : Koo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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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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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곡가님, 작곡가님의 다른 포트폴리오 소식도 여기서 볼 수 있는건가요? 좋은 글, 마음을 울리는 곡들 기다릴께요~~ 캬아~~!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의 좋은 활동과 음악 많이 들려드리고 알려드릴께요!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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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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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녹아들어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하여.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12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글을 써 내려가기 전 다양한 하루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 혹은 경험을 통해 글의 큰 틀을 구상하곤 한다. 이번 글을 쓰기 전에도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느끼고 생각하며, 정리하였다. 지난 11월 21일 영국의 록 밴드 Coldplay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있는 공간에서 2회에 걸친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이 퍼포먼스는 Youtube를 통해 진행되었고, 각 공연 당 약 30분가량의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2회의 퍼포먼스 중 <Coldplay : Everyday Life Live in Jordan – Sunrise Performance>는 우리가 라이브 공연을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시간과 무대, 관객을 과감히 깨뜨렸다. 물론 세계적인 락밴드이며 큰 예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였지만 이를 떠나 이 퍼포먼스가 지닌 의미와 공연예술로서의 과감한 시도에 우리는 집중해야 했다. 그들이 과감히 틀을 깬 시간, 무대, 관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간. 해뜨기 30분 전에 시작한 공연. 그들은 과감히 새벽 4시에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자연만이 숨 쉬는 시간. Sunrise라는 조명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며, 공간에는 없지만 전 세계의 많은 관객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시간을 찾아 집중하는 것.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이라는 거대한 틀을 깨본다면 새로운 퍼포먼스를 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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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틀을 깬 새벽 4시 >
무대. <Coldplay : Everyday Life Live in Jordan – Sunrise Performance>의 공간은 야외지만 쉽사리 퍼포먼스를 올리기에는 어려운 공간이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자연의 공간에 맞추었고, 무대에 올려진 무대 장비(피아노)마저도 공간에 맞춘 플랜은 우리가 행하는 무대예술을 그대로 야외로 옮겨놓은 무대이다. 물론 수많은 퍼포먼스가 더욱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자연 그대로에 맞춘다는 것에 우리는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무대라는 공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조금은 새로운 퍼포먼스를 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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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라는 공간은 제한이 없다 >
관객. <Coldplay : Everyday Life Live in Jordan – Sunrise Performance>는 라이브를 하는 그 공간에 관객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 퍼포먼스를 이번 앨범(작품)의 공연이라고 칭하고 있다. 관객은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 이 공연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의 준비과정부터 모든 것들 공유한다. 현실적으로 공연을 준비할 때면 관객을 쉽사리 포기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결과물의 한 부분으로 관객 수를 평가하기도 한다.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표현하는 지금의 시대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이 관객이 아니다. 관객 없이 관객과 함께하는 것. 우리가 틀을 깨기 위해 다시 한번 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다.
<Coldplay : Everyday Life Live in Jordan – Sunrise Performance>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작품 활동이 곧 자연을 위한 활동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시간에 따른 하늘이라는 자연의 변화는 조명이 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은 곧 무대였다. 그리고 주변에 들리는 새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른 소리를 곧 작품을 만들어주는 또 다른 음향이었던 것이다. 환경에 대한 그들의 계획적인 작품 발표는 앞으로 공연이 지속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는 또 다른 시작의 표현일 것이다.
이번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Coldplay의 퍼포먼스가 중점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틀을 깨기 위한 요소들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으며 정리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많은 틀을 깨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감하게 깨지 못하는 것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해에 만들었던 작품들을 발표하기까지의 과정과 기반이 되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반성할 수 있는 순간이다. 2020년에는 조금 더 틀을 깰 수 있는 과감한 작품이 함께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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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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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관한 사담(私談)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11월 호에 기고된 에세이 입니다.
고독에 관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고독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단어를 영문으로는 보통 Loneliness와 Solitude, 두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국어사전에 제시된 뜻은 Loneliness와 흡사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고독은 Solitude의 의미를 지녔다. Loneliness는 고독의 사전적 의미처럼 외롭고 쓸쓸함이 담겼고, Solitude는 홀로 있는 혼자서 잘 이겨내는 즐거운(?) 고독을 뜻한다. Loneliness가 수동적 고독이라면 Solitude는 자발적 고독에 해당되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Solitude와 Loneliness는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하나도 불필요한 존재를 가진 고독은 없다. 내 의지가 어떻게 나의 내면을 이끌어가냐에 따라 고독의 범주에서 Solitude와 Loneliness로 구별되어 움직이게 된다. 가령 하나의 주제가 있고 그에 따른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한다면 Solitude가 필요한 시점이 나타난다. 하지만 거듭된 반복과 연습, 작업과정 사이에는 Loneliness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처럼 같은 고독이지만 느끼기를 달리하는 두 가지 고독의 감정이 있다.
꼭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 한 번쯤을 느껴보는 고독이란 것. 흔히 농담 삼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라는 말처럼 고독이라는 것도 한 번만 느껴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혼자서 나아가야 하는 일, 혼자서 작품을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끝이 쉽게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면 더욱 고독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고독을 알기에 사회를 아는 것이고, 그만큼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고독을 느끼며 지속적인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함정은 번아웃(Burnout)이 나타나는 시점이다. 시기를 잘못 잡고 나타난 번아웃(Burnout)이라면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자칫하다간 시기를 잘못 잡고 나타난 번아웃(Burnout)의 꼬리를 물고 소위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딜레마의 상태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기도 한다. 결국 자신을 컨트롤하여 번아웃(Burnout)을 방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쉬지 않는 달리기를 하다 갑자기 멈춘 느낌. 달리던 길 앞에 갑작스러운 절벽이 나타난 느낌. 이러한 느낌들이 나에게는 번아웃(Burnout)의 느낌이었지 않나 싶다. 번아웃(Burnout)의 순간이 오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방법이 가장 명확한 방법이겠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감기나 몸살에 찾은 병원에서 내려주는 진단처럼 규칙적인 생활, 잠을 푹 자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으로 산다면 예방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나가야 함에도 머릿속이나 내 신체가 불안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일시정지를 하는 선택이야말로 번아웃(Burnout)을 방지할 수도 있다. 일시정지가 된다고 해서 작업의 능률이 떨어진다거나 작업이 실패하지는 않는다. 일시정지 후 마음과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작업의 일종이다. 쉬자. 많은 사람들이 쉼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는 고독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작업하는 그 순간에도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을 고독. 우리들의 노력 뒤에는 현실적인 Loneliness(외롭고 쓸쓸한 고독)가 존재하겠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과정들이 우리들 내면에는 Solitude(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고독)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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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amoto Ryuichi의 Solitude는 그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해 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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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작가 볼테르(Voltaire) 또한 ‘행복의 최상은 바쁜 고독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그 또한 Solitude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
 사담 속 사담 : 항상 글을 쓰며 생각한다. 사회 비판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글로 하는 중요한 대화이겠지만 글을 읽으며 독자의 감정과 이성을 정리할 수 있는, 혹은 글을 통해 자신이 하는 일과 삶에 대하여 또 다른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항상 글을 써나가는 나의 본질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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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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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파리
삶 속에 녹아든 예술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10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여행을 좋아한다. 그 지역이 국내든 해외든 어디론가 떠나서 많은 감정과 생각을 담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담아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예술적 영감이 되거나 그 다음 작품의 시작인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일의 목적이 아닐뿐더러 작업을 위한 떠남도 아닌 2019년 올해의 진정한 휴식을 위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깨달을 수 있는 요소가 많은 나라이기에 최대한 많은 예술적 경험을 하고 올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하나의 오페라 관람과 많은 미술작품 감상, 수없이 펼쳐져 있는 건축과 언어의 예술,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던 예술이 곧 삶인 나라 프랑스.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의 예술을 특히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나라가 가진 예술작품은 모두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움이 스며드는 한국무용과도 유사한 느낌이다.)
도착하자마자 강렬한 느낌이 온 것은 눈으로 보이는 프랑스 파리의 건축물이었다. 통일된 창문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닌 각 창문의 프레임에도 그 건물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작은 창문 주변으로 둘러싼 아름다운 곡선들, 혹은 창문 프레임과 함께 춤추고자 하는 듯한 발코니의 철골 등. 하나의 건물에 나타나는 성격들은 직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프랑스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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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ves Saint Laurent 을 표현하려는 YSL Museum의 건축물 >
그리고 사전예약하여 관람했던 Yves Saint Laurent Museum은 그가 패션 디자이너임을 떠나 다양한 예술과 협업을 시도하던 과정을 보게 된, 엄밀히 말하자면 교훈이라고 느낄 정도의 생각을 담아온 예술적 경험이었다. 화가, 발레 등 다양한 예술과의 협업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패션이라는 장르에 집중을 하지만 결코 독단적인 예술을 하지 않는 예술세계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보이는 것이 예술이지만 느낀 것이 많은 공간이다. 이처럼 삶 속에 녹아든 예술적 집중력의 무게중심을 적절히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일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였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집중을 잃지 않는다면 예술을 하고 있는 나도 얻게 될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무대연출이 돋보였던 오페라 <I Puritani>를 감상하기도 하였는데 Vincenzo Bellini라는 클래식 작곡가의 옛 작품이지만 현대적으로 해석한 무대연출을 보며 흔히 말하고 도전하는 전통의 재해석에 대한 본질과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전통을 해치지 않으며 재해석으로 예술을 접하는 이에게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재해석이란 단어를 던지며 많은 양념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 간소화, 본질만 남기는 것이 치우치지 않는 전통의 재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Ctrl+c, Ctrl+v 방식의 표현법이 아닌 시대를 맞춰나가는 재해석으로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비단 오페라 작품만이 아닌 건축물에서도 심지어 수없이 걸었던 파리의 수많은 바닥의 놓인 돌에서도 느껴졌다.
편협적인 생각만 가지지 않는다면 비교는 내가 서있는 공간, 나라에서도 충분히 에너지가 될 수 있는 생각들일 것이다. 더군다나 유럽이라는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세상을 접하고 왔으니 비교를 하는 것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우리가 잘하는 것과 취약한 점. 비교를 하지만 그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각자만이 가진 예술 방식의 성격이자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흔들리지 않고 더욱 강력해야 하는 것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정리 혹은 개선이 필요하다. 마치 옛 고유의 성격을 지닌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요즘 시대의 변화의 방법만이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이 온전히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없을 것이며 전통을 그저 지키는 것이 전통에 대한 기나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대는 변한다. 우리의 말이 한글일지라도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는 조금씩 언어가 바뀌고 있다.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결국 모두가 함께 호흡해야 강해지는 숲속의 나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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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계단의 형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숙소의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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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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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관하여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9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던 일상적인 어느 날, 한 명의 예술가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사실 지금 완성되고 공개된 그 작품을 함께한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아. 작업을 하면서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거든. 의견 충돌의 빈도수는 점점 잦아졌고 작품을 끝낸 이후로는 더 이상 서로의 생각을 알아버린 것처럼 암묵적으로 연락하지 않아.”
어쩌면 그 한마디는 내가 무심코 흘려보낼 수도 있던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완성된 작품을 봤던 한 명의 관객이었고, 그 예술가와 많은 대화를 하는 관계자-라면 관계자라고 말할 수 있는-이기에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작품 뒷이야기에 조금은 놀랐다. 더 나아가 그 일로 하여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관계 속에서의 회의감을 느꼈다는 그의 말 한마디는 걱정이 되는 동시에 관계 속의 좋지 않은 과정을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더 깊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다툼 혹은 의견 충돌을 겪으며 더욱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이겠지만 관계의 ��말이 좋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작품인 것을 생각한다면 작품이 ‘희.노.애.락’ 중 하나에 집중하는 작품이라도 그 과정에는 한 사람의 삶만큼이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있을 것이다. 그것을 견디며 완성하는 것이 작품이다. 마음이 쉽게 맞춰지지 않는 사람과 과정을 함께하는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완성되어야 하지만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안에는 각자의 역할이 주어진 담당자들이 있다. 담당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전문적인 능력이 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전문가의 능력이 있고 나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는 부분은 누군가에게는 전문적이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그 과정 안의 사람 관계가 모두가 원활하고 따뜻하지 않다. 작품 완성이 일차원적인 목표라면 오히려 원활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그 순간에는 과정보다는 상황으로 인식될- 에 직면하는 순간 마음과 생각은 이기적이고 편협적인 색으로 물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다스려 나 자신의 생각을 제 3자와 같은 생각처럼 중립의 위치에 서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결국 서로의 이기심으로 다툼을 발생할 것이고, 다툼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작품을 생각하기 이전에 사람 관계가 틀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간은 사람과의 관계없이는 살 수 없다고는 하지만 관계에 의존하는 삶 또한 건강하지 못한 삶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상황보다는 혼자만의 생각이 공존하는 시간이나 혹은 더욱 집중하는 고요한 두 명의 대화가 흐르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작품을 만드는 순간 또한 그렇다. 개인의 작업의 시간을 즐기며 그 순간의 집중을 매우 좋아한다. 개인 혹은 둘의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매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작품생활을 위해 1. 예술을 함에 있어서 사람 관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2. 작품을 향한 나의 애정과 욕심을 되뇌고 반복하여 날카롭지 않게 다듬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생각은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작업 속의 사람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과정에서도 반복이 필요하겠지만 나의 내면에서의 반복 또한 등한시해선 안될 요소이기도 하다.
(최근 감상했던 박서보 작가의 작품에는 반복을 통한 표현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이는 겉으로 보이는 박서보 작가만의 묘법을 통하여 내면의 반복을 통한 다스름이 보이는 작품으로 표현된다면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표현하는 애정과 욕심은 함께하는 예술가들에게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애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배려 혹은 의견을 수렴하려는 마음 없이 고집을 부리려 한다면 그 고집은 아집이 되어 작품이 고스란히 스며들 것이다. 결국 좋지 못한 마음은 작품에 오랫동안 머물 것이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욕심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작업을 함께하는 예술가들과 공존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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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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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8월 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타인과의 예술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지는 과정과 요청. 그 모든 과정에 정당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마음의 욕심은 이해하나 그 작품을 추진하면서 필요한 예술가들에게 요청과 동시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같이 만들어 나가자는 꾸며진 말로 유혹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계속해서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게 되고 자신을 낮게 평가하게 되는 생각이 자라나기도 한다. 마치 그럴듯한 사유는 보상을 떠나 결국 이처럼 한 예술가의 생각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 중 한 가지는 궤변이다. 궤변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존재하는 위험요소이다. 궤변은 겉으로는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포장하는 허위 가득한 변론이다. 궤변은 그 사람의 확고한 사상이 아니다. 실로 이 사회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변질된 이치가 숨겨진 생각들이다. 궤변으로 감정에 약한 예술가들을 흔든다.
이는 요즘 흔히 언급되는 “가스라이팅”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시작된 용어다. 거부, 반박, 전환, 경기, 망각, 부인 등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에 대한 통제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 한다. 이 자체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자신감, 자존감 등의 자신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행위가 흔들리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의 교묘한 말들로 생각을 흔드는 경우가 많다. 이는 더 나아가 현실에서는 예술가가 가진 재능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보상과 연결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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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Patrick Hamilton의 작품 연극 <가스등(Gas Light)>
예술작업 과정에서 정당하게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주변 예술가들에게서 고민상담을 많이 듣곤한다. 고민끝에 내리는 이야기들의 끝에는 항상 ‘당신의 재능은 인정받아야하며, 그에 대한 보상은 정당하게 받아야한다’는 말이다. 교묘한 말이 없이도 솔직하고, 정당하게 재능을 인정하고 대우해주는 사람은 많이 존재한다. 긍정보다는 부정인 것들이 더욱 크게 느껴지듯이 불공정한 소수의 사람들로 인해 대부분이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는 시각이 생겨났을뿐이다.
예술이라는 직업의 환경은  열악한 경우가 많다. 열악한 경우를 배경으로 지금과 같은 정당하지 못한 보상에 관해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위해 또 다른 예술가들과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면 정당한 보상을 조건으로 올바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상을 줄이고 줄인 보상을 토대로 자신의 권익을 키워나가려고 하는 것만큼 잘못된 과정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많은 국가단체 혹은 지원 단체에서 요구하는 것이 계약서의 문제이다. 계약서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귀찮은 문서로 치부하고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떠한 상황에 나타날지 모르는 분쟁을 위해 계약서는 반드시 작성을 하고 예술작업을 하는 것이 옳다. 계약 과정에서 논의하는 부분은 결국 분쟁이 일어나는 항목들이 대표적으로 나열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라는 말과 함께 계약서를 교묘하게 넘겨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시대는 매우 많이 변했으며 시대와 함께 우리의 생각도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당연히 받는 것은 더욱 강력하고 명확해졌다. 그 바닥, 이 바닥이 다 그렇다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 한 사람이 변한다면 미래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올바른 변화를 갖자. 그것이 그 바닥, 이 바닥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가장 흔히 쓰이는 말, 재능기부. 그 말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하고 싶을 때 통하는 행위라고 본다. 요청하는 사람의 말에서 먼저 재능기부의 냄새가 섞인 말들이 내뱉어진다면 그것은 재능을 재능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단지, 시간과 여유, 혹은 선한 성격을 이용한 요청인 것이다.
앞으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역지사지의 마음. 상대의 재능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인정일 것이다.
내용 참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가스라이팅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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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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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그리고 요령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7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방법과 요령, 이 두 가지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반복과 지구력이 있다면 누구나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음악을 만들며 각 작업 상황에 맞는 작업 방법과 요령을 오래전부터 작업을 하고 있는 나도 여전히 터득하고 있다. 방법과 요령은 계속 반복할수록 다듬어지고 쌓이기 마련이니 예술 작업을 하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어도 묵묵히 쌓이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 나의 담당 교수님을 통해 예술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철학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지금의 나에게 약이 되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도 언급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음악이 지금(당시 학창시절)은 비록 학교라는 특정 장소 안에서 배우고 있는 단계이지만 이 수업과 교재 안에 글씨로 쓰여있는 ‘~학(學)’이라는 용어는 사실 예술세계에서는 옳지 못한 말이다.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은 하나의 방법, 요령 그리고 음’악(樂)’인 것이다. 지금 터득하는 배움을 ‘학(學)’으로 이해하지말고 ‘악(樂)’으로 이해하여 예술활동을 하였으면 한다.”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솔직한 말이 어디 있을까.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는다. 이 말은 음악에서만 한정된 말이 아니다. 모든 예술작업에서 통용될 수 있는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음악을 한다. 음악을 통해 무용이라는 장르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방법과 요령을 무엇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물론 개개인의 방법과 요령이 있겠지만 작품을 만들어나가며 여러 상황에 대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고 그에 따른 몇 가지 상황을 고민끝에 정리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무용에 맞춰나가는 음악. 움직임과 동선이 정리된 상황에서 음악은 그 움직임과 동선을 음악 안에 녹인다. 이 경우는 나에게 영화음악을 만드는 작업과 흡사함을 느끼곤 한다. 특정한 동선의 움직임과 동선의 길이를 체크하고 그 길이 따른 템포, 리듬을 만든다. 느낌에 대한 파악은 어렵지 않으나 정해진 길이에 맞춰야 하는 부분에서 항상 많은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이와 반대로는 음악에 맞춰나가는 무용을 두 번째 상황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보통 기존의 음악을 무용음악으로 사용할 경우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을 제작해야 하는 경우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에게는 작품을 위한 음악을 제작하는 시간이 축소되나 확정된 음악에서 안무가는 제한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라는 염려스러움이 따르곤 한다. 하지만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음악의 흐름을 원활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청각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기도 한다.
글에서는 두 가지의 경우로 한정 지어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디테일한 과정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 두가지의 상황으로 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의 경우는 음악 작업과 무용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가정하에 만들어낸 개인적인 방법과 요령이다.
작품을 만들어나가며 어느덧 나 자신이 추상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 표현이 상대 예술가와의 대화를 연결 짓고 있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가진 전문적 용어를 내뱉는다 하여도 상대 예술가가 전문적 용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에 이를 수 있겠지만 추상적 표현을 통한 대화는 나만의 작품 과정의 방법이며 요령인 것이다. 작품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는 온통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대화를 습득하는 각 예술가 자신에게는 그들만이 가진 음악적 요령 혹은 안무에서의 요령으로 번역이 되어 다시 자신의 장르로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추상적 표현을 통한 대화, 그것이 타 장르와 함께하는 음악 작업의 방법이자 요령이다.
반복되는 작업과정 속에서 상대 예술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전문적 용어들을 듣게 되고 이를 습득하여 이해하는 방법, 그 과정을 ‘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배움’이기 때문에 ‘학(學)’이라고 정의는 내릴 수 없다. 단지 방법과 요령이라는 필수불가결한 ‘배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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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suny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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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같이 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월간지 <몸> 2019년 6월호에 기고된 에세이입니다.
다양한 위치에 선 사람들이 음악,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배우고자 한다. 이전에 비해 SNS 플랫폼이나 스마트폰의 모임어플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모이고 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러한 움직임은 마음과 행동, 배움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다.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상상했던 예술의 세계와 직접 접하고 시도해보는 예술의 과정에는 정답도 끝도 없어서일까, 생각보다 오랜기간 배우고 터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뿐더러 그들의 행위에서는 생각치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 또한 많은편이다.
그럴땐 가끔 생각한다. ‘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였을까?’
예술이라는 바닥에서 음악을 너무도 당연하게 습관처럼 생각하고 만들고 행동하는 내가 생각보다 창의적이지 않은, 뻔한 내용으로 작품이 흐를 때도 있다. 여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겨울의 시린 바람을 맞이한 것처럼 꽁꽁 얼어버리고 가벼운 산책과 운동, 독서로도 해결되지 않는, 도대체 이 답답함을 어디서 해결해야할지 도저히 모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그 순간 나는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소위 전문가라 불리우지 않는 애호가와의 대화를 통해서 생각속에 깨지지 않았던 생각을 깨뜨려 끄집어내기도 한다. 순수하고 솔직한 생각들이 결국 예술가들의 머릿속을 열어주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에 닿아 있을 때 순수함이 간직되는 이유에서 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예술가도 애호가도 아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예술을 배제시킨 맥락없는 주제로 시작하는 대화를 해보기도 한다. 대화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찰 때가 많은데 놀랍게도 그 순간 신선한 소재와 마주치기도 한다. 결국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은 우리네의 삶 속에, 더 가까이 말하자면 우리의 옆에 앉아 늘 말걸어 주고 있던 것들이다. 소소하고 소박했던 것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나를 반성한다.
그렇게 예술에 발담그지 않아 더 신선할 수도 있는 예술을 취미로, 특기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술작업은 어떠할까?
이미 시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의 취지를 가진 공연은 많이 생겨났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이 곧 예술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며, 살을 맞댈 수 있는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다. 그들과 어울렸을때 발생하는 순수한 시너지, 그리고 순수한 시너지에서 발생되는 긍정적인 감정의 소모가 예술이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예술의 깊이를 통한 표현, 오랜시간 푹 고아낸 곰탕처럼 깊이있는 예술이 물론 내가 해야하는 표현의 가장 가까운 솔직함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역량을 바지주머니에서 고스란히 꺼내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황한 설명보다 간결한 말 한마디가 가진 응집된 힘을 가졌듯이 진지하고 깊이 있는 예술은 진한 힘의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간결한 말 한마디 같은 예술. 예술가들과 예술을 배우고자하는 사람이 어우러져 또 다른 예술을 만들어나가는 예술. 이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면 서로 상생하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재미있는 예술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당신과 나. 같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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