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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nd Live Who - 혼자 있지 말아요
#러브앤라이브후#Love and Live Who#혼자 있지 말아요#Not alone#잘 있지 말아요#혼자 잘 지내는 법#혼자서도 잘해요#아름다운 이야기#슬픔#아픔#혼자라고 느낄때#슬픈 노래#혼자#혼자 살기#you are alone#우울 노래#우울 눈물#우울해요#우울한 노래#우울증#Spo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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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이 서사도 가능할까요..???
태백산은 흑계파의 다른 지부인 울산 흑계중공업에 파견된 본사의 직원으로, 현제 흑계중공업의 간부인 친구입니다. 느긋하고, 태평한듯 보이지만 은근 속이 깊은 노인이죠. 62세의 나이지만 아직 흑계중공업의 현역 전투병력으로, 주로 골프클럽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이름은 보시는 그대로 한국의 산 태백산에서 따온이름이고, 흑계파에 있는 장백두, 백마산을 통틀어 3대 산이라고 묶어 부릅니다. 셋 다 흑계의 큰형님들 이거든요. 완전히 야생의 시대였던 1세대부터 있던 큰형님들 중 하나죠.
거칠게 생긴 외모와 달리 학생 시절에는 의외로 온순한 친구였습니다. 온순하달까... 우울한 아이였죠. 도망친 아버지 대신 어머니 하고만 같이 둘이서 살았는데,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망간 아빠를 닮았다며 이유없이 욕을 듣고 살았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들어주는 어른 하나 없이 홀로 고독하게 컸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어려워서, 굉장히 꼴통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어요.
학교에서 유일하다싶이 제대로 공부하는 친구는 백산이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백산이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아이라는 이유로 다른 노는 양아치 애들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 백산의 담임교사는, 한번은 교실 내에서 지갑이 사라졌을 때 교실에 유일하게 남아 책을 읽고있던 백산이를 범인으로 지목해버립니다. 억울하게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백산은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사건으로부터 백산은 비뚤어지게 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억울한 시간들 속에서 자신도 그들 편을 듣고 고분고분하게 착하게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버린거죠.
소년원에서 나온 이후로 급격히 비뚤어진 백산은 학교를 자퇴하고 집도 그대로 가출합니다. 원래 부산에 살던 백산은 얼마없는 돈으로 서울행 버스를 탔고, 서울에서 건달들과 어울리다가 흑계파에 대해 알게됩니다. 그 길로 자연스럽게 흑계파에 속하게 되었고, 이철명을 만나게 되죠.
그동안의 삶과 달리 뭔가 잘하면 오구오구 칭찬도 잔뜩 해줬던 흑계파에서 태백산은 안정적인 소속감과 어른들의 따뜻한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 덕에 흑계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라죠. 백산이가 정이 많아진 이유도 흑계의 영향이 큽니다.
태백산이 골프를 배우게 된 계기도 전회장 이철명의 영향이 큰데, 타고난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곧잘 이것저것 부숴먹는 태백산을 보고 이철명은 골프같이 힘조절이 중요한 스포츠를 하면서 힘조절 하는 법을 익히라고 제안했었습니다. 그 때를 계기로 골프에 완전히 정을 붙였고, 지금도 골프클럽을 항상 들고다닙니다.
그런 62세 노인 이렇게 모에화 하는 인간 어떤데
서사글 마무리 어케해야할지 모르겠네 대충 그렇습니다~~(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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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 depression, sh pic and…
손절 당한 뒤로 그 사람의 소셜에 들어가 보는 습관이 생겼다.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아직도 꿈에 나오는데
씨발 한달 쯤 되었으면 잊을 때가 됐지 않나?
그 사람이 우울글을 올릴 때마다 복사해놓는 습관도 생겼다.
그 사람은 그런 걸 곧잘 지우니까
최근 글에서 나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였다.
아닌가? 너무 광범위하긴 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 후 내가 이 지경이 된 것 같다.
내 원래 색과 그 사람의 색을 합쳐 놓은 느낌이랄까?
사실 손절하고 싶냐고 물어본 것도 나였다.
그러니 내 잘못도 있는 셈이다.
일방적으로 손절 당하는 것보다는 그런 게 낫지 않았을까
이�� 면에서 우린 닮은 것 같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보니까 말투도 비슷해졌네
날 까먹었을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우울한 건 나도 안다.
나보다 심한 사람도 있고
정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걸 이점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근데 왜 내가 지랄하는지 모르겠다.
아 말 안했나?
전에 말했던 2주 후, 그게 이번 주말이다.
정확히는 이번 금요일이지만
내가 편집하기 전 글을 본 사람도 있을 텐데
물에 들어가서 긋는다,
이거 내 손목, 팔, 허벅지를 말한 것이다.
내 친구도 자살시도는 안 하는데
뭐 죽지는 않을 거다
물 받아놓고 들어가서 그은 다음에 유튜브나 봐야지
아무튼 날 이렇게 만든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자기와 비슷해졌다고 좋아할까?
이런 거 로망이라고 했는데
뭐, 내 알바 아니지만 궁금하긴 하다.
아무튼 할테니까 방해 말아요
안 죽으니까
까먹을 뻔 했는데 어제 침대에서 엄마 몰래 그은 거
동생도 깨어 있어서 조심 조심 그었다.

허벅지에 4번, 팔뚝 말고 그 위에 뭐냐 그 암튼 거기에 1번
이건 피 나올 때까지 그은 횟수다.
아프긴 했지만 뭐 스릴 있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아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얻었으면 좋겠다.
그래요, 너요.
당신에 대한 이야기로 한 페이지를 쓴 건 놀라운 일이지만 뭐
그만큼 내가 미련하단 소리겠지
암튼 내가 심기 많이 거슬러서 죄송했고
다시 만나면 좋겠네
비슷한 사람 꼭 만나길 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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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이다
삶을 내려놓는다는 건 어떤 걸까
우울은 전염이 될 순 있어도 덜어지진 않는 것 같아 더 슬프다
학생 때 휘성의 2집을 cd-p를 통해 들었다 트랙 한 곡도 지나칠 수 없는 명반이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을 그때 그의 노래를 통해 위로받았고 사랑에 대한 감정에 ‘다시 만난 날’을 듣고 부르던 사춘기의 시절이었다 그때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작고하기 전 SNS에 올라온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그 당시 본인이 얼마나 고통이었고 공연 후 홀로 있는 그 시간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지 등에 진 삶의 무게가 많이 버거웠을까
늘 곁��� 있던 누군가가 떠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상실감을 잊고 살다가 눈앞에 죽음을 맞닿은 순간 내가 알던 사람을 더 이상 눈에 담을 수 없다는 현실의 그 막막한 하루가 시작되는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엔
하늘은 너무 맑고 시간은 무심히도 ���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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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1 12:51
오늘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자는 내내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꿈을 꾸다 깨서 다시 잠들다 몇 시간 되지 않아 꿈에서 깨어나고….. 두 번째 꿈과, 세 번째 꿈의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첫 번째부터 세 번째에 이르기까지 불쾌한 느낌으로 남은 것은 생생히 기억한��.
첫 번째 꿈의 내용은 기억하는데 직장에서 주임님한테 내 다른 성격을 들켜 주임님이 혐오하는 내용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땀을 흘리고 있었고 양말 신은 채로 더러운 진흙은 밟은 것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른 성격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람들과 있을 때와 나 혼자 있을 때의 차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보통 연기를 하니까. 애써 밝은 척, 정적이 괜히 두려워 일부러 먼저 말을 걸기도 하지만 혼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쏟아버린 탓에 지쳐버리고 쉬는 내내 침대 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나는 아직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내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곱씹었다. 그냥 조용하고 우울한 성격이 부끄러워 그것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을까….? 아직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임님의 혐오스러운 표정을 잊지 못한다. 평소에는 절대 화를 내지 않고 항상 웃으시는 분이라 충격이 컸나 보다.
어제는 휴가를 썼고 내일까지 쉬는데 왜 이렇게 지치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해야 이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계속 발버둥 친다. 허나 계속 진흙탕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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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별일이 없어도, 이만 그냥 마음이 따뜻해져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흥미롭고 즐겁다. 따라오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따라오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아마 충분히 그렇게 될 거라고 믿으면 되는 일이다. 내가 해낸 일이 잘못된 길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조금 더 신나서 그것에 몰두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다들 잘해내고 있다. 다들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게 행복하다. 그게 즐겁고 그게 너무 감사하다.
다들 아마 자신의 길을 너무나도 잘 걸어가고 있을 테다. 신뢰의 마음 가득히, 한켠에 접어두고 그렇게. 여유를 가지면서, 웃기도 하고 좀 못난 얼굴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지만 다 자라지 못한 유아적인 어떤 것들에 대한 토로보다도, 결국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즐거웠다가도, 다시 이내 불안에 휩싸이기 쉬운 날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들을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꺼내어보고, 다시 그 먼지를 닦아내본다. 무엇을 하기 위해 해낼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차곡차곡 쌓여가는 마음의 먼지들을 지워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나의 한계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고, 우리는 나아가면서 때로는 우울한 마음에 이내 쏟아내버릴 것이다.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잘해낸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는 했다. 이천이십이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랬던 것이다. 나에게 악이었던 자는 결국 모두의 악이 되었고, 나는 그 악을 조금 더 예민하게 캐치했을 뿐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녀들은 질력나게 알고있었을 어떤 그늘들. 그들의 건강이 우려되는 나날들이 많다. 그녀들을 꼭 안아주고 싶다. 왜 나의 관심은 밖으로만 향해 있을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화수분이 아니다. 그저 계속 쏟아지는 사랑이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나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저 불안 때문에 이렇게 몸서리치고 있는 건 아닌지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은 아마 나의 관심이 필요할 것이고 그 많은 것들을 다 집어먹어도 석연치 않을 것이다. 때때로 그녀들은 외로울 것이고 때때로 그들은 괴로울 것이다. 외로움과 괴로움은 결국 한통속이며, 나는 나의 오롯한 시간들을 결국 잘 보내지 못한 것에 속이 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즐길 필요가 있다.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고통은 고통의 시간대로. 운이 정말 좋게도 나는 많은 좋은 사람들 곁에 아직 서 있고, 그들은 아마 내 편이 기꺼이 되어 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나를 믿을 필요가 있고 그런 믿음을 더 공고히 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나의 믿음을 믿기로 한다. 그저 붙잡을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진다면 내 팔이라도 셀프로 잡고 매달리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내 두 발로 뿌리를 내려야 하고 내 허리로 내 배로 힘을 주어 일어서야 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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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우울한 대학 생활을 했던 뮌스터를 다시 방문했다. 반가웠나? 경악에 가까웠던 것 같다. 너무 다 그대로라. 몇년이 흘렀는데 바뀐 빌딩은 없고 심지어 들어앉은 상점 들도 대부분 그때와 동일했다. 여전히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이 태반 백인인게 답답함을 주었다. 다신 올 일이 없길 바랬다. 이번 기회로 확실히 느낀건 어린 나의 고군분투를 글로 쏟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 19살에 사회적응을 위한 탈피와 범아시안 정체성 설치라는 요구에 앞뒤로 바짝 튀겨진 정신머리 + 듀얼리티 + 우울증에 대하여 개인적이나 다수가 해당하는 영역을 서술하고 공유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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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사람. 노홍철. 그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고 우울한 시간이 있었을 텐데 사람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보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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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란티섹 팔라츠키 František Palacký 의 저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체코 민족 역사>> 중 10권에서 발췌
조사땜에 읽어야되서 스크롤 보자마자 이갈렸는데 이거 왜 흥미진진한데
흥미로운거만 (gpt 그대로 복붙 수정넘귀찮)
1. 귀족연합으로부터 감금-석방 또 감금당하기 전 협정맺는 시점 1394
벤체슬라스는 귀족들에게 과거 감금 사건이나 대립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고 서약함: “그 어떤 말이나 행동, 또는 어떤 다른 수단으로도 복수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협의가 겨우 시작 단계에서 그쳤다는 점이다. 그 협상에 관여한 모든 이들은 그 결과에 실망하였다. 귀족 연합(파니 예드노티치)이 애써 이룬 것도, 요프스트 변경백이 원한 것도 거의 아무 성과 없이 끝났으며, 오히려 그들이 목표로 삼은 바는 예전보다 더 멀어진 듯이 보일 정도였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측근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개혁을 위해 약속되었던 조정을 실행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국왕 직무를 개혁하거나, 재편된 통치 체제를 받���들이지 않았고,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지키려 했다. 요한 공작(장 폰 고를리츠)도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해 기대한 만큼의 보답을 받지 못함을 느끼며 실망하였다. 그 후 벤체슬라우스 왕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오랫동안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는 이전에는 명랑하고 쾌활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이 일 이후로 점점 침울하고 우울한 인물로 바뀌었다. 그의 마음을 점점 갉아먹은 불신은 그를 겁 많고, 머뭇거리는 성격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 고집은 꺾지 않았다. 그는 학문적인 논쟁이나 토론을 좋아하긴 했으나, 정작 지도자에게 필요한 높은 ���상이나 비전, 의지는 결여되어 있었으며, 일각에서 제기된 "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 대신, 실제로는 그가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렸으며, 그것이 곧 그의 과도한 음주와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두 번째 통치기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요프스트와 귀족들과 벌였던 갈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왕권을 다시 회복하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재정을 회복할 방안을 모색하였고, 자신에게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는 귀족들과 재차 협상을 벌이며,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해줄 수 있는 기반을 다지려 했다.
굴욕적이어도 정국안정땜에 서명하는데 이거완전 일진무리한테 이지메 당하고있는거잖아ㅁㅊ 근데 이러고 또 감금당함 뱀같은 욥한테서 디펜스치는데 이거보고 안쓰러움… 물론 연합의 우두머리는 새로운 세계의 롬황 빌드업 중인 욥 (요프스트 변경백은 협상 구조 설계와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주요 주도자였다. 군사적 작전은 일부 귀족과 지기스문트가 분담했다)
2.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겉으로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조용히 행동했다. 이는 단지 그가 자국과 왈라키아(Valachia) 지역에서 튀르크와의 전쟁 등으로 바빴기 때문만이 아니라,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결정적인 힘으로 사태에 개입하려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395년 말, 그는 형인 벤체슬라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형에 대한 다정한 사랑과 충직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결국에는 1394년 2월에 합의된 개혁안들을 다시 추진하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이미 세습된 황제의 왕관을 다시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국왕이 비밀리에 여러 불성실한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황제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을 위해 제국을 보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선친(샤를 4세)에 대한 효심과 존경심으로, 벤체슬라우스는 망설임 없이 행동에 나서 황제 칭호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이라는 친구뿐만 아니라 밀라노 공작이라는 가장 충실한 하인도 둔 지금이 적기이기 때문이다. 지기스문트 또한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형제의 명예는 곧 나의 명예이며, 어떤 이간질이나 불신의 책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형에게 가장 충직하고 헌신적인 동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정감 어린 다짐과 편지는, 자존심이 세지만 마음은 착한 벤체슬라우스 왕을 감동시켜 형제 관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벤체슬라우스는 실제로도 지기스문트의 도움이 절실했던 시기였기에 더 그러했다. 그래서 1396년 2월 2일, 그는 지기스문트를 보헤미아로 초청했고, 지기스문트가 빠르게 도착하자마자, 서로는 신뢰와 형제애를 드러내는 제스처를 아낌없이 주고받았다. 2월 25일, 두 형제는 공동으로 문서를 작성해 요프스트 변경백과 그의 측근들이 보헤미아로 안전히 올 수 있도록 통행보증을 제공했고, 그들이 직접 와서, 수차례 시도되었다 실패한 화해 협상을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하려 했다. 3월 1일, 요한 공작(얀 폰 괄리스)가 사망하자, 벤체슬라우스와 지기스문트는 이미 2년 전에 맺었던 유산 상속 협정을 갱신하였고, 3월 19일, 벤체슬라우스는 지기스문트를 신성로마제국 전체의 대리인(vikář) 및 대리왕(náměstek)으로 임명했다. 같은 날, 벤체슬라우스는 본래 6명의 중재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1394년 Písek 협정에서 합의됨)를 오직 두 사람—지기스문트와 요프스트—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고 선언했다. 이 두 사람은 왕과 귀족 연합 간에 여전히 남아 있던 분쟁, 특히 국가 최고 통치기구의 구성, 국법재판관(kmetů)의 임명, 화폐 발행권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벤체슬라스의 주요 고문으로 여겨진 프로코프 변경백도 이 협상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의 권한이나 영향력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gpt야 너 무슨 말을 하는거니 프로콥:……….😐 뱀 여우같은놈들 사이에 껴서 굴려지는 멘헤라벤체
3.
보헤미아에서 새로 조직된 정부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억지로 짜여진 연합 구조였기에 나라에 지속적인 질서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명목상으로는 최고위직의 관리들이 국왕의 이름으로 통치했지만, 벤체슬라우스 왕은 그들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들에게 복종하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로젠베르크 가문의 인물인 인드르지흐(Henry)는 왕의 호의와 신뢰를 얻으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얻은 것은 단지 일시적인 분노의 유예뿐이었다. 그리고 귀족 연합에게 미움받고 있던 시그문트 훌러(Sigmund Huler)는 그대로 왕실 재무관으로 자리에 남아, 과거의 방식대로 왕실 도시에 대한 관리를 계속 이어갔다. 서로 모순된 명령이 공존하다 보니, 정권 내부에는 분열과 증오, 민중 사이에는 혼란과 불복종이 생겨났다.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벤체슬라우스를 보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통치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공동 통치도 견디지 못하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396년 5월 31일. 바이에른 공 슈테판의 수행을 받아 요프스트 변경백과 귀족 연합의 6인이 카를슈테인 성으로 왕을 방문했을 때, 벤체슬라우스는 격노한 상태에서 그들을 전격 체포해 버렸다.
"네가 슈밤베르크를 부추겨 스트라스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사절들을 잡게 했지! 너는 상인들의 물품을 불법으로 빼앗았고, 너 때문에 귀족들이 나에게 반기를 들고, 내 나라를 망치고, 길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너 하나가 죽는 게, 나라 전체와 백성이 망하는 것보다 낫겠다! 나는 너의 진정한 주군이었고, 너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서약까지 했는데, 그런 나를 납��하고 모욕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널 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있지.”
왕은 즉시 프라하로 명령을 보내 도시의 문을 닫고, 요프스트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게 했다. 그리고 요프스트의 동생인 프로코프 변경백에게도 명령을 내려, 요프스트의 모든 재산과 영지를 접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벤체슬라우스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던 바이에른 공 슈테판이 '자신의 수행원들이 왕을 믿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고 강력히 중재에 나섰기 때문이다. 벤체슬라우스는 마침내 마음을 누그러뜨려 처음에는 요프스트와 포데브라트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석방했고, 며칠 후에는 요프스트와 포데브라트까지 모두 풀어주었다.
벤체 팔랑귀 먼데 순순히 체포당하는 요프스트 카메라플래쉬 받으며 제발로 검찰출두하는 정재계인물 같음
4.
1399년, 요프스트 변경백, 리토미슐의 주교 얀, 그리고 오토 폰 베르고프는 직접 부다(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지기스문트 왕을 찾아갔다. 그들의 목적은 프로코프 변경백에게 무력 공격을 감행하도록 지기스문트를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설득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그래서 1400년 1월 18일, 지기스문트 왕, 요프스트 변경백, 얀 주교(리토미슐), 로젠베르크 가의 인드르지흐, 포데브라트의 보체크, 두베의 히네크 베르카, 오토 폰 베르고프(비리나의 영주), 미할로비체의 얀, 데친의 얀 폰 바르텐베르크, 우스티의 얀 두 형제, 두베의 베네시, 스칼라의 연장자 포타, 파르두비체의 스밀 플라슈카(리헴부르크의 영주), 포텐슈타인의 헤르만(로파타의 영주) 등 여러 귀족들이 프로코프 변경백에 맞서 싸우기로 서약을 맺었다.
지기스문트는 체코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촉구했다: “프로콥은 모든 내분의 원흉이니, 그와 그의 동맹자들이 파멸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5.
벤체슬라우스 왕은 제국의 여러 제후들, 특히 바이에른 공작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여 협상을 하려는 의도에서,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아내 소피에의 대관식을 실행에 옮겼다. 그 대관식은 1400년 3월 15일,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일반적인 의식과 함께 성대히 거행되었다. 하지만 제후들은 이 대관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어느 바이에른 공작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의 여동생 혹은 이모의 대관식을 빛내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콥 변경백은 그 자리에 자신의 원수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감히 참석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지기스문트와 요프스트의 조언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의가 내려졌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독일로 원정을 떠나야 한다. 그의 부재 중 체코 왕국을 어떻게 통치할지에 대한 회의를 1400년 4월 9일에 열기로 함.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필요했던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벤체슬라우스는 자신의 계획을 추진�� 결단력이나 능력이 부족했고, 지기스문트와 요프스트는 오직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추진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문의 위신이나 정치적 위험조차 개의치 않고, 다시 프로코프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1400년 4월부터 8월 말까지 이어졌으며, 승패가 엇갈리는 가운데 벤체슬라우스 왕은 체코를 떠나지도 못했다.
자존감 낮아진거 개불쌍하다진짜
6.
1400년 8월 30일 독일 제국의 선제후들이 그를 독일 왕위에서 공식적으로 폐위한 소식을 들은 벤체는 분노하여 복수를 맹세한다 이 시기(1400년 무렵)에 이르러 벤체슬라우스는 더 이상 혼자서 어떤 결정도 내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조언자들을 동생 지기스문트에게 보내어, 즉시 보헤미아로 와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지기스문트는 오래 망설인 끝에 마침내 움직였고,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쿠트나 호라(Kutná Hora)까지 진군해왔다. 요프스트와 귀족연합(=Jednota panská) 역시 세들레츠(Sedlec) 수도원에 집결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벤체슬라우스를 도와주기 위한 대가로 무엇을 받을 것인가?” 였다. 벤체슬라우스는 단지 전쟁 비용 전부를 부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귀족연합은 자신들의 과거 불만 사항들을 모두 수용하라고 요구했으며,
지기스문트는 더 나아가 슬레지엔(Slezsko)과 루사티아(Lužice)를 본인에게 즉시 양도하고, 보헤미아 통치권 전체를 자신의 손에 넘기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들에 벤체슬라우스는 격분했고, 말을 끌어오게 한 뒤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 참석자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1400년 10월 중순경 회담장을 벗어났다. 그 결과, 벤체슬라우스는 독일 제국 내 마지막 지지세력마저 잃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충성을 지켜온 왕령 도시들(Königsstädte)마저, 도움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또다시 무너졌다고 판���하고 모두 루프레히트(Ruprecht)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왕권 포기를 못해서 에휴 왕권 포기못한 이유 1단순히 자리에서 물러나는게 아니라 합법적 혈통과 왕위 정당성을 부정하는 셈이라 2정체성 3실권 잃어도 재기 가능
프로콥놔두고 왜 하필 둘한테 도움요청을 1프로콥은 외교적 영향력이 제한적 (사실확인 귀찮) 2지기+욥은 병력+외교력이 막강해 국외 지지 기반 형성에 적절한 파트너라 이용
아미친 gpt발언땜에 머릿속에 벤체가 모에화되고있어
7.
1401년 여름, 벤체슬라스의 보헤미아 왕위를 축출하기 위해 모인 세 연합은 프라하 근방에서 6주간 주둔 끝에 협상을 얻어냈다. 독일왕 루프레히트(Ruprecht), 요프스트(모라비아 변경백)와 귀족 연합(panská jednota), 작센 미센 변경백(마르크그라프)들과 결탁한 군사적 압박이었다. 프라하는 이미 100년 동안 적의 무장을 자신의 성문 앞에서 본 적이 없었기에, 이들의 존재는―그들과 항상 따라다니는 오만함과 더불어―프라하 시민뿐 아니라 전 보헤미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이처럼 배신당하고 고통받는 왕에게 동정과 열의를 품은 이들은 점점 더 많아져 이들 연합된 파괴자들을 내쫓기 위해 들고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루프레히트의 군세가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군은 프라하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다. 만약 무모하게 공격을 감행했다면, 프라하의 충성과 보헤미아 귀족들의 군사적 준비태세는 그들을 큰 위험에 빠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적군은 프라하를 포위조차 하지 않고 약 6주 동안 머물렀고, 결국 스스로 평화 협상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1401년 8월 12일, 최종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대주교 볼브람(Wolbram), 로젠베르크의 인드르지흐(Henry of Rosenberg), 비리나(Bílina)의 오토 폰 베르고프(Ota of Bergov), 그리고 리히텐부르크의 얀 크루시나(Jan Krušina of Lichtenburk) 네 명이 왕의 최고 행정 자문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지그문트 왕의 문서에 명시된 원칙에 따라 국내 정치를 함께 운영하고, "왕국 내 진실과 평화를 세울 것"이 요구되었다. 특히, 하급 귀족의 관직 임명이나 국가 재정 지출 등의 사안에서 이들이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왕실 관청들과 도시들은 이 네 명의 귀족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며,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들의 지시에 우선적으로 따를 것을 서약해야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그문트 왕이 보헤미아에서 가지고 있는 권리와 청구권을 전혀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이 합의는 귀족 연합을 만족시켜 왕과 화해하고, 그에 반대하여 결성한 타 세력들과의 모든 연합을 철회하였다. 이로 인해 마이센의 병력도 빠르게 보헤미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벤체슬라프는 요프스트와도 협상하여 루사티아(Lužice) 변경백령 전체를 종신 소유로 넘기고, 많은 현금을 추가로 지급하였다. 프로콥과는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ㄹㅇ정병올만함
8.
그러나 그 협정(1401년 8월 12일 체결된 평화협정)이 실제로 실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협정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분쟁이 발생했으며, 이는 더 이상 수습되지 못한 채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치명적인 분쟁의 진짜 원인은, 이 시기의 역사 전반에 새로운 방향을 결정지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동시대 사료에서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해석에 따르면, 벤체슬라프가 자신의 고집과 나약함으로 인해, 지그문트가 귀족 연합의 입장에 따라 시행하려 했던 개혁이나 조치들에 강하게 저항한 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1402년 3월 6일, ���그문트는 구(舊) 프라하 성 베네딕트 성당 옆 왕궁에서 동생 벤체슬라프를 체포하게 하고, 프라하 성으로 이송하여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벤체슬라프의 체포에 그의 신하들과 일부 고문들도 동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과거 귀족 연합과의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음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칭송되던 “형제간의 우애와 신뢰”는 결국 슬픈 결말을 맞았다. 비록 벤체슬라프가 두 번째로 억류되었을 때는 외형상 큰 소란 없이 이루어졌고, 왕에게 모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여졌으며,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칙령과 문서가 발행되기도 했지만, 왕에게 가해진 폭력의 소문은 곧 나라 전역으로 퍼졌고,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열기와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지기스문트는 이렇게 얻은 권력을 즉각적으로 남용하여,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온갖 횡포와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민중 대다수는 다시 벤체슬라프 편으로 돌아섰고, 심지어 그의 체포에 찬성했던 고문들조차 마음을 바꾸어 지기스문트를 떠나게 되었다.
반면, 귀족 연합에 속한 로젠베르크가, 슈밤베르크가, 슈비호프(Riesenberg)의 귀족들, 미할치가, 베르고프 등의 귀족들은 여전히 지그문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나 자꾸 이상한……생각이………..머릿속에 들어와……….형제ㄱㅊ으로 다정했다가 눈돌아서 난폭해지는 황제ㄱ 광ㄱ+믿었다가 배신당해 채념하는 굴림ㅅ 피폐ㅅ….이게다gpt탓이다
욥 이 사건땜에 벤체 동정여론으로 민심바뀌니까 지기한테 등돌리고 벤체한테 붙은거같음
베르고프가 지기한테 끝까지 충성하는거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전령보낸거임?
9.
당시 지그문트는 그의 적들과 반대자들보다 더 많은 활동성과 용기를 보여주었으나, 동시에 더 많은 비열함도 드러냈다. 그는 이미 1402년 6월 3일, 귀족 연합의 지원을 받아 프로코프의 진영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며, 전날에는 벤체슬라프를 더욱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프라하 성 내 탑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지그문트는 곧 프로코프의 주요 거점이던 높은 성 베즈지예즈(Bezděz) 앞에 진을 치고, 프로코프를 안전 보장 증서(glejt)를 내세워 자기에게 초대하였다. 그러나 프로코프가 이에 따라 오자, 결국 그도 체포해버렸다. 분명한 것은, 지그문트가 당시 무력으로 보헤미아 내 모든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군사적 내분에 요프스트 변경백은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코프가 체포된 이후, 독일왕 루프레히트와의 외교 교섭에 착수한 것으로 보아, 요프스트는 신중하게 처신함으로써 이 피로 얼룩진 배신과 비열함 속에서 왕관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욥이 지능형이라 존을 데리고다녔다 볼수있겠네 1권력 균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며 자신의 입지를 확���하려는 매우 계산된 처신 2벤체슬라스도, 지기스문트도 확고히 지지하지 않았으며, 기회주의적으로 왕권을 획득할 가능성 모색 3누가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가, 누가 지금 우세한가. 요프스트는 이 흐름의 선봉에 서 있는 인물
사학계에서의 욥 평가 1요프스트는 권력 협상의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2그는 정치적 승부수의 순간에 절대 군사행동으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으며, 대신 승리한 진영에 마지막 순간 합류하거나 그들과 타협하여 이득을 챙겼다.
수흐돌때 막타치는거 ㅋㅋㅋ 절묘한 순간에 도와줘서 자길 필요하게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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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더운 장마엔 항상 함께해
가장 외롭고 우울한 날
눅눅한 곰핑이냄새가 아직까지 나는 것 같아

향을 피우려다 초를 켜고
잠깐 다른 상상을 한다
아 정말로 행복하다 정말 그렇다
장맛비 같은 노래
이 앨범은 어째서 이렇게 슬픈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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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요즘 삶에 의욕이 없다..
학교는 차라리 쳐 잘 수 있어서 괜찮은데 학원 가면 막 탈주하고 싶고 진짜 창문 깨고 나가고 싶고... 밥맛은 없지 그림도 잘 안 잡히고 솔직히 침대에 누워있어도 잠 안오고 음악 들으면 그나마 나은데 이거 진짜로 뭐지?
요즘 그림 그리는 꼬라지 보면 내가 정상인이 맞나 싶고(물론 정상인이 아니긴 하지만) 우울한 건 아닌데 그냥 무기력증? 그런거 가틈
내가 인간관계가 파탄난 건 아닌데 존나 혼자인 것 같고 예전에 우울할 때 들었던 철학적인 생각도 들지 않는거 보면 우울한 건 아닌데 진짜 뭐지
원래 학원중에서도 수학이랑 과학은 괜찮았는데 이제는 수학마저 탈주하고 싶어지더라 내가 막 학원이 많은 게 아닌데 국 수×2 과 영 이것 밖에 없는데 왜 이러지
아무튼 뻘소리 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오늘 하루 좋은 일 만 있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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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누�� 토닉워터를 음료수로 마시냐고용ㅠ 알바생이 아마도 술을 안 먹는 친구인가보지. 아 한참을 웃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단골술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역시.. 시키자마자 온더락잔으로 주시는 사장님... 세상살이 결국 센스일까....? 으 나는 센스없는거 치곤 욕은 덜 먹고 산 것 같은데...흐아~~~~ 연초가 나는 너무 싫더라. 우울이 가시질 않네. 그래도 괜찮아. 우울한 나도... 나는 이해해.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나 이해해. 그러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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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크리스마스 기록하기, 나의 삶은 거의 행복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늘 우울감과 적적함이 찾아온다. 삐뚤어진 마음에 아주 아주 추워서 사람들이 못돌아다녔으면 하는 날씨는 얄밉게도 어제부터 점퍼를 안입어도 될정도로 포근하고, 거제에는 몇년만에 눈이 쌓여서 사람들이 설레어 했던 이브였다. 심술이나 안보려한 sns를 무의식적으로 들어가게되노라면 나빼고 지인들은 하나같이 성탄절을 애인들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키워드는 딸기케익인가 보다. 최근 짧은 쇼츠와 릴스로 인해 도마핀중독이 되어 망가져버린 나의 뇌는 영화나 드라마속으로 빠져버려서 하루를 삭제시켜야지한 나의 계획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영양가없는 피드들과 유튜브 속으로 나를 하루 종일 유영시킨다. 혹시 누가 나를 찾지 않을까 기다린 연락들은 역시나 내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고 혹시나 영화 같은 일을 바라며 하루종일 누워있다가 저녁8시가 넘어서야 산책하러나간 내 몸은 다시들어와 배달시키는 것도 귀찮아 집에있는 과자로 식사를 대체한다. 너무 액정화면을 많이봐 찌릿 찌릿한 안구. 하루종일 정크푸드를 먹어서 더부룩한 뱃속까지 괜히 우울한 나의 성탄절에 완벽하게 가미되어서 잉여로운 하루를 완성했다. 혼자 맥주도 한병 마셨는데 오늘따라 맥주한명 마저 소주를 많이 먹었을때 느껴지는 두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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