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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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물성 육체라도 짐승은 그 일시적 아름다움이 대대로 연이어지는 자체가 창조의 아름다움으로서 훌륭히 통하나 인간만은 범죄로 인한 동물적 육체라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결과이기에 추악함 일색뿐 일점의 아름다움도 없는 죽음뿐임을 명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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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추악함 속의 환희를 찾는 과정 자체의 체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름다움에 굶주린 식신이다.
마지막에 남은 건 자기 자신 뿐이라서 스스로를 먹어치운다.
그때의 깨지지 않는 정적은 추악함 뿐이다.
더 이상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못하는 그 날.
//
그렇다. 이 삶은 나방이다. 어둠 속 초롱불에 매혹되어 이미 어둠에 매혹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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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과도기라는 말
응 그래요 납득이 가요
이미지는 의미를 읽히게 하기 위함도 있지만
망가뜨리기 위해서도 쓴단다
망가진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작업
진정성은 좋은 것이지만
덜 쏟아내면 좋겠단다 그것이 현대시란다
위인을 추모하는 시를 쓰느라
위인전에 얼굴을 처박고 잠든 아이들
추악함 속에서 미학을 찾으라던
시인이 너무 일찍 죽어 버려서
미학은 미학답게 씌어져야만 하는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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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 병 Dis-ease [lyrics+vocab]
Uh, 뭔가 놓친듯해 커피 한 모금으로 불안함을 해소 An endless rest 내게 갑자기 다가온 불편한 행복 24 hours 시간 참 많아 하루 종일 잠자도 지금은 no problem 몸 부서져라 뭘 해야 할 거 같은데 마냥 삼시 세끼 다 먹는 나란 새끼 내 죄, 쉬는 내 자신을 물어뜯는 개 Don’t do that 외쳐봐도 성과에 목매 매일 E'r'yday do my thang, damn if I fail 계속 으르렁대 썩은 동아줄을 tap 불안전해 이건 병 물리적인 건 직업이 주는 stun, ow!
➼ 놓치다 - to let go, lose ➼ 커피 - coffee ➼ 모금 - sip ➼ 불안함 - uneasiness ➼ 해소 - ease, reduce ➼ 불편하다 - to be uncomfortable ➼ 잠자다 - to sleep ➼ 부서지다 - to break ➼ 삼시 세끼 - three meals a day ➼ 죄 - sin ➼ 쉬다 - to rest ➼ 자신 - oneself ➼ 물어뜯다 - to bite ➼ 외치다 - to shout ➼ 성과 - result ➼ 목매다 - to strangle oneself ➼ 으르렁대다 - to growl ➼ 동아줄 - rope ➼ 물리적 - physical ➼ 직업 - one’s occupation
Maybe 내가 아파서 그래 생각이 많은 탓 I hate that 단순하지 못한 치기 어린 나 나도 참 어려 몸만 어른 절뚝거려 인생 걸음 One for the laugh Two for the show Just like I'm so fine
➼ 아프다 - to be sick ➼ 탓 - fault ➼ 단순하다 - to be simple, trivial ➼ 치기 어리다 - to be immature ➼ 어리다 - to be young ➼ 몸 - body ➼ 어른 - adult ➼ 절뚝거리다 - to limp ➼ 인생 - life ➼ 걸음 - a step
Everyday 나를 위로해 다 똑같은 사람이야 ain't so special Ayy, man keep one, two step 차분하게 모두 치료해보자고
나의 병 벼벼벼벼병 버려 겁 거거거거겁
➼ 위로하다 - to console ➼ 똑같다 - the exact same ➼ 사람 - people ➼ 차분하다 - to be calm ➼ 치료하다 - to cure ➼ 병 - disease, illness ➼ 버리다 - to throw away ➼ 겁 - fear
마음에도 방학이 필요해 아 그냥 일은 일로 해 I'm ill, 그래 내가 일 그 자체 쉼이란 친구 oh, I never liked him 얼마를 벌어야 행복하겠니? 이 유리 같은 병이 때리지 니 머리 병든 게 세상인지 난지 헷갈려 안경을 벗어도 어둠은 안 흐릿해져 이 시간 뒤에 어떤 라벨이 붙건 부디 그게 전부 너길 바래 너의 너, 너
➼ 방학 - vacation ➼ 일 - work, one, sounds like “ill” ➼ 쉼 - rest ➼ 벌다 - to earn money ➼ 유리 - glass ➼ 병 - can also mean bottle ➼ 때리다 - to hit ➼ 병들다 - to be sick ➼ 헷갈리다 - to be confusing ➼ 안경을 벗다 - to take off one’s glasses ➼ 흐릿하다 - to be vague, cloudy ➼ 라벨 - label ➼ 붙다 - to attach ➼ 전부 - everything
다들 병들이 많아 내가 헷갈리는 건 인간이란 본디 추악함을 가진다는 것 마음의 병의 가짓수들만 400개가 더 되는데 해당 안 되는 자 거 별로 없단 것 Yo 병든 게 세상인지 나인지 단순히 바라보는 해석들의 차인지 그게 다인지 I don't know 누군가를 바꿔보는 것 그것보다 빠른 것은 내가 변화하는 것
➼ 인간 - human ➼ 본디 - by nature ➼ 추악함 - ugliness ➼ 가짓수 - number of different kinds ➼ 해당 - apply, be relevant ➼ 해석 - interpretation ➼ 차이 - difference ➼ 다 - all ➼ 바꾸다 - to change ➼ 변화하다 - to change
Sick and tired, but I don’t wanna mess up 'Cause life goes on, through the fire 걸어갈게 더 나답게, woah Walk it, walk it, walk it 밤이 되면 내 두 눈 감고서 Walk it, walk it, walk it 내가 알던 날 다시 믿을래 자 일어나 one more time 다시 아침이야 오늘을 나야 해 가보자고 one more night 이 끝에 뭐가 있을지 몰라, ayy Woo 영원한 밤은 없어 난 강해졌어 불꽃이 터져 I will never fade away
➼ 걸어가다 - to walk ➼ 눈을 감다 - to close one’s eyes ➼ 믿다 - to trust ➼ 일어나다 - to get up ➼ 영원하다 - to be eternal ➼ 강해지다 - to get stronger ➼ 불꽃 - fireworks ➼ 터지다 - to expl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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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터지는군 #김어준씨의 #예측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실존했던 #댓글부대 #정권의 #추악함 #만천하에 #드러나다 #국정원개색희 #미쳤구만 #대선조작도 #모자라서(Soongsil University Statio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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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2006.10.05 21:40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일종의 혁명이다.
자신을 위해 (껍질을 깨고 나오는) 혁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혁명이라는 것은) 남을 위한 변명일 뿐인가.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그 모든 (정신적) 경계선들.
말 뿐인 혁명들은 (바뀌지 않는 것은) 모두 허상이다.
나는 사실을 공표하는(이야기하는) 것과
(이미 알려진) 인식된 것들을 부수는 것과
너에게(어머니에게) 있어 어떤 (말해서는 안 될) 금기가 있다면
그걸 폭로하는 것을 즐긴다.
나의 폭로는 비인간적이며 이기적인 (부정적인) 욕망이다.
너에(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이 내 앞에 발가벗겨진 (사실을 드러낸) 채 나뒹굴 때
나는 그 (이미 입을 통해 밝혀지고 알려졌기에) 더럽혀진 살점을 살짝 들어올려 잘근잘근 씹어대길 (분해시켜 버리기를) 원한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 밝히기를 원하는) 추악함, 비열함
내가 가진 유일한 (추악한) 공포이자
나에게 가장 (밝혀지지 않았기에) 소중한 것
폭로는 (어떤 계기를 통해) 부추겨지는 것일까,
남에게서, 어떤 계기로부터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밝히고 싶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이중성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
차라리 울어버려라, 아니 웃어라
미치광이처럼 너에게 쏟아지는 모든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씹어 삼켜라
(어떤 시기에 폭로하고자 하는) 계산된 욕망, 준비된 폭로
그 모든 가능성들
내가 너의(어머니의) 금기를 너의(어머니의) 앞에서 이야기했을 때
내가 너와(어머니와) 가장 가까웠고
누구보다도 너를(어머니를) 사랑했을 때
폭로
나의 추악함, 비열함
내가 가진 유일한 공포이자
나에게 가장 소중한 나의 금기
-
내게는 예전에 수없이 반복되던 어머니와의 싸움이 있고 난 후, 좋지 않은 일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서 오히려 폭로하는 것을 약간 즐기게 되어 버린 면이 있다.
잘 꺼내지 않는 이야기들을 일기처럼 올린 것이 이런 쓸모없는 글들이라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글도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을 캐기 좋아하는 어떤 양아치들. 천지에 그런 이들이 널렸지만, 그 중에서도 심한 양아치들은 살아가며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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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0.2017
꿈이 작가라는 친구를 보고 처음엔 웃었다. 고등학교 동창,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였기에 왕래가 잦은 사이는 아니였다. 20대가 넘어서 가끔 드문 드문 보던 녀석은 언젠가부터 글을 쓰고 있었고 누군가는 장래를 이뤄가던 우리의 나이에서 녀석은 꿈이 작가라고 말을 했다. 무언갈 꾸준히 습관적으로, 강제성 없이 해온, 취미라 칭할 수 없는 무언갈 쓰며 감정을 적고 소비하는 이 행위가 이번달로 벌써 딱 2년이 됐다. 감정을 정리 하기 위해서, 생각을 깊게 하기 위해, 나를 달래기 위해 시작했으나 남는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내면을 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마주하며, 자신의 지리멸렬할 정도의 구차함과 추악함, 무지함을 꺼내보고 받아들이고 변명을 하거나 자기 반성이였다. 좋게 말하면 자아성찰이고 나쁘게 말하면 구질구질하고 구차한 일. 친구가 쓴 글을 보며 내가 쓰는 글들과는 다른 종류의 글이기에 어떤 코멘트나 평가를 할 수도, 하지 않았다. 나는 판타지 같은 쪽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글을 쓴다고 말하며 작가가 꿈이라고 말하는 친구의 글을 보며 아냐 나도 나인데,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흥미와 재능은 달라. 다른 길을 찾아봐 라고 말을 해줄 순 없으니까. 슬프게도 친구의 글은 그런 것이였다. 본인이 흥미는 있지만 노력과 재능은 전혀 없는 그런 흔하디 흔한 일상 어디에서 볼 수 있는 현실 같은 것. 타인이 가진 흥미, 취향, 사는 방법이나 개개인들이 말하는 것들에 별 흥미가 없어진 나로서는 그들에게 해줄 조언이나 얘기 역시도 없다. 내 인생만으로도 벅차고 복잡하고 정신 없고 무엇보다 내가 왜 내 시간 뺏기며 목에 핏대세워가며 개개인의 삶에 관여하나. 뭘 위해서. 나는 내가 충분히 비겁하고 내로남불이며 타인에게 관여되는 순간 책임지지 못할 일들을 내가 스스로 발을 담그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늘 선을 긋는 편이다. 여긴 내 인생이고 내 삶의 영역이니 터치 하지 말고 나 역시 당신의 삶과 생각에 터치 하지 않을테니 스스로 갈 길 가자라는 식으로.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무리 친구라고 한들 그 사람의 생각에, 꿈이라고 말하는 것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있을까. 꿈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그건 친구의 몫이고 노력이며 삶의 영역이다. 조언을 얻고자 한다면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해보라고 그게 꿈이고 간절한 것이라면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보고 자신보다 더 치열하게 글을 쓰며 삶을 포기할 정도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고 그보다 더 절박하게 글을 쓰라는 것, 매일 버려지는 수백, 수천의 원고들보다 더 깊이 있고 울림이 있는 활자를 써보라는 것, 삶의 모든걸 다 내던지고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 낭만을 외면하는 시대에서 어떤 것이 낭만이고, 어떤 것이 낭만을 대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 꿈을 얘기하면서 누군가에겐 절박함이고 현실임을 잊지 말고 그 사람들의 꿈까지 비웃음 거리로 만들지 않을 만큼 ‘지금보다 훨씬 많이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노력하라는 것. 나는 비겁하고 재능이 없어서 글로 업을 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뿐이다. 그 사람들보다 똑똑하지 않았고, 재능도 없었고, 현실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 매일을 불구덩이를 걸어다니는 기분임에도 글에 매달렸던 걸 봤을 뿐이다.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다. 취미로, 일기로, 감정 소비를 하기 위해서 적어온 내 활자들은 내 삶의 몇가지 해소 방법중 하나였을 뿐. 나로 인해 다른 이의 절박한 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꿈이라는 친구의 얘기에 웃었다. 비웃음인지, 실소였는지, 나의 오만함이였는지 아직 모르겠다. 몇 년 전, 시나리오를 쓰다 아사한 어느 작가의 뉴스 기사가 떠올랐고 글을 빙자해 낭만을 비웃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가 가진 글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며 글을 쓰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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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찬양 뮤직비디오/MV<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속 이야기>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네 https://reurl.cc/25obm 1 하나님! 제 마음속엔 당신께 하고픈 말 가득합니다 제 마음 열어 준 당신 말씀에 당신의 음성 들었고 진리인 그 말씀, 샘물처럼 제 마음 적셨습니다 말씀 묵상하니 밝고 평안한 마음 든든하고 기쁩니다 말씀 실천하며 깨달은 수많은 진리 말씀에서 본 당신의 공의와 거룩 그리고 진실한 사랑 갈수록 느껴지는 사랑스러움 참으로 사랑받기 합당하신 분 하나님 믿으며 평안, 기쁨 누려 당신과 더 가까워집니다 2 하나님! 날 선 검 같은 말씀, 제 마음 꿰뚫어 깊은 곳의 추악함 파헤칩니다 사탄 성품 가득해 교만하고 이성 없으며 거짓말로 당신을 속이는 타락한 자 욕망이 가득해 당신과 거래하려 했습니다 심판이 없었다면 대적함으로 지옥에 갔겠지만 심판, 형벌 있어 정결케 되고 구원받았습니다 진리 선포하시지 않았다면 주님 믿어도 공허하니 심판은 타락한 인류에게 큰 의미 있음을 보았습니다 진리 추구하며 정결케 함 받아 그 사랑 보답하겠습니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단편영상 찬양 MV 모음: https://kr.easternlightning.org/video-catego…/mv-series.html 더 보기: https://kr.easternlightning.org/video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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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 Thoughts about Photography and Myself" #Page1
컬러별 펜처럼 사진도 스타일별로 뽑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황별 꽃조합은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조합들이 있을까? (부케,연인간 선물, 노인의 집, 가정에서의 꽃다발, 학원, 성당 화환, 병원 입원실 창가에 놓인 꽃, 경비실의 작은 화분 등)
보는 사람마다 그 사진 주인이 그 사진을 찍기 위해 갖췄을 구도/자세를 다 세면 얼마나 다양하고 어렵고 새로운 자세들이 나올까?
사진 단 한장의 위엄? 강한 존재감으로 한 존재의 공감대를 울리는 것은 얼마나 힘든일일까? 얼마나 노력하고 시도해야 가능할까?
특정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어떤 사진형태에 담으려면 최소 몇장의 사진이 찍혀야 그 역동적인 면이 보이는 사람에게 전달될까?
내가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내가 계획한 프로젝트로, 또 내가 촬영 감독으로서 진두지휘하며 촬영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내가 만일 성공하였을때 지금 이 책상에 앉아 daydreaming 했던 이 순간들을 하나하나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을까? 지금 소중했던 사람들, 물건들, 존재들은 그때에도 같은 가치로서 남아있을까?
붓을 잡은 사람, 북을 잡은 사람, 연필을 거머쥔 사람, 망원경을 치켜 드는 사람, 카메라를 움켜쥔 사람. 평생 다른것들을 당신들 손에 거머쥔 그 손들은 그 일이 다했을때 같은 손모양으로서 남아있을까?
10대가 끝나기 전, 내 사진들로, 내 힘으로 사진 전시회를 열어 나의 20대를 맞이하고 싶다. 내 10대에 있어서 가장 영향을 미친 나만의 사진들 말이다. 각 10년이 흐른 후 나는 서서히 변하겠지. 사진밖에 없던 나의 인생을 나의 힘으로 열어보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작가 이지훈으로서의 삶은 얼마나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매 10년간 바뀌어 가고 있을까? 내가 꾸준히 좋아하고 작품들을 애청하는 작가가 존재하듯이 훗날 나를 10년마다 찾아주는, 나를 좋아해주는 전시자(?)도 있���까.. 과연?
삼촌.. 우리 삼촌도 사진찍기를 참 좋아하셨던것 같더라.. 엄마는 카메라를 보면서, 사진작가를 꿈꾸는 막내 딸내미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스쳐가고 어떤 감정이 들까? 삼촌은 기타도 좋아하시고 우리 언니들에게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세상을 소개시켜주시고 또 내 영원한 사진멘토인 아빠에게 사진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그분은 어떻게 사진을 좋아하게 되셨을까? 어떤 사진의 매력에 빠지게 되어 누군가를 가르쳐줄 만큼 사진을 사랑하게 되신걸까? 지금도 곁에 계셨다면 나의 사진에 대한 열망에 어떤 생각을 하시고 나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자주 가셨을까, 그리고 기뻐하셨을까? 오늘은 괜히 엄마께 죄송하다.
내가 유일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찍는 사진들, 유일하게 내 미래에 기대를 걸어보고 도박을 해볼 수 있는 사진이라는 미래가 나중에 가서야 나를 배신하거나 내가 사진을 배신하고 다른것에 흥미를 가지면 어떡하지? 나에게 있어서 사진과 작가와의 관계는 연인관계같다. 한편이 배신을 하면 흐트러진다. 무슨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길 바랄뿐.
인간의 추악함, 추태, 이기심, 사악함을 그답게, 또 그 반대의 순수, 사랑, 신외와 믿음, 설레임을 그대로 들어나게 사진 프로젝을 해보고 싶다. 이 프로젝트로서 사회에 일어날 파장 및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평가함으로서 어떤 심경과 충격을 줄지 매우 궁금하고 소통의 과정이 다방면으로 매우 조심스러울 것이라 예상이 된다. 뭐, 언제나 조금의 신선함과 충격은 좋은 원동력이니까.
살면서 내가 사진만을 고집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작품을 함께 하고 공을 들이고 같은 프로젝트에 임할 수 있을까? 사람에 지나친 정을 보이는 내가 이런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중요한, 칼같은 면이 필요한 직업을 잘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벌써부터 받을 상처가 두렵기도 하다
What if photos are possible to pick out each style per day like a colored pen I can choose
How many evental flower-match might exist by each event? (wedding bouquet, flower in an elderly person’s house, ordinary house decorations, church floral wreath, hospital room decoration etc)
How many body positions and angles and challenging postures might be found in order to take various types of pictures?
How big of a power and influence can a single picture carry? How hard is it to make somebody feel sympathy over a single picture? How many times should I try and fall to make it possible?
To capture certain motions as a photo, how many pictures would be the least to connect to save that motion?
Will the day come when I get to work as a main press with a project I made in a studio I designed, directing all the shootings?
Would I remember all these moments of myself sitting in the desk daydreaming?Will the precious things I now value deep stay the same then?
People who grabs paintbrush, camera, pencil, telescope all have a same hand shape after their jobs they went through are done when they grabbed all sorts of different materials in their life?
Before starting my 20s,
"오늘은 random thoughts about photography and ME 를 써내렸다. 내가 이렇게나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얽혀 사는지는 몰랐다. 나 자신에 매우 놀랄 수 있었고, 복잡한 생각, 상상들은 한층 덜어낼 수 있었던 반면 또 몇가지 생각들이 새로 올라와 조금은 또 착잡해진것 같기도 했다. 의미있는 글쓰기였던 것 같다." “Today, I had a chance to jot down some random thoughts about photography and myself. I had no idea how I lived with such a complicated mind throughout life. I was quite surprised by myself and I could make my complicated thoughts or imaginary a bit less. On the other hand, I kind of got a little busy-minded also on the other side. I really was a meaningful writing for myself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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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픽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비유는 돈 드릴로의 <마오 ll>에 나온다. 그 책에서 드릴로는 한창 집필 중인 책을 가리켜 작가를 쫒아다니는 추악한 기형의 아기로 묘사했다. 아기는 늘 작가를 따��� 기어 다니는데(이를테면 작가가 식사를 하려고 찾은 식당에서 문득 바닥을 질질 기며 나타나거나, 아침에 침대 발치에서 그날 맨 먼저 보이는 얼굴이라거나), 추악한 기형이고, 뇌수종이 있고, 코가 없고, 팔이 뭉툭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 지능이 덜어지고, 입에서는 뇌척수액이 질질 흐르고, 작가를 향해 늘 앵앵거리고 우물거리고 울어대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 추악함 때문에 틀림없이 얻어낼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작가의 온전한 관심을.
기형의 아기 비유는 완벽하다. 왜냐하면 픽션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느끼는 거부감과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잘 포착했기 때문이다. 픽션은 늘 끔찍한 결함을 안고 탄생한다. 당신의 모든 희망을 배반했다고 할 만큼 추악하다. 완벽한 구상에 대한 잔인하고 역겨운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해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얼러주고, 그것의 축 처진 턱에서 흐르는 뇌척수액을 한 벌 밖에 안 남은 깨끗한 셔츠의 소맷자락으로 닦아주는데, 깨끗한 셔츠가 한 벌뿐인 까닭은 당신이 한 삼 주째 빨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이 챕터 혹은 인물이 드디어 아귀가 맞아들어 이야기가 제대로 되어갈 아슬아슬한 대목인 탓에 당신은 그것 말고 다른 일에 시간을 쓰기가 겁나기 때문이고, 왜 겁나는가 하면 일 초라도 딴 데를 봤다가는 그것을 영영 놓치고 말아서 아기 전체가 영영 추악한 상태에 머물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신은 기형의 아기를 사랑하고,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살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을 미워한다. 정말로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형이고, 역겹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에서 종이로 출산이 이뤄지는 와중에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일이 그것에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결함은 당신의 결함이고(왜인가 하면 만약 당신이 더 나은 픽션 작가였다면 당신의 아기는 당연히 유아복 광고 카탈로그에 나오는 아기처럼 완벽하고 분홍색이고 뇌척수액도 잘 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추악하고 지저분한 숨결 하나하나가 모든 차원에서 당신에 대한 참혹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이 죽었으면 좋겠다. 비록 당신이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사랑하고, 닦아주고, 얼러주고, 그것이 제 자신의 그로테스크함에 숨이 막혀 즉어버릴 것만 같은 순간에는 그것에게 심폐소생술까지 가하면서도.
이 상황은 아주 엉망이고 슬프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감동적이고 고결하고 근사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정한 관계다. 그리고 그 기형의 아기는 추악함이 절정에 달한 순간조차 어쩐지 당신이 스스로 가장 좋은 부분일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건드리고 깨우는 때가 있다. 당신의 모성적인 부분, 당신의 어두운 부분을. 당신은 당신의 아기를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형의 아기가 세상으로 나갈 시점이 되었을 때, 남들도 그것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니 당신은 약간 진퇴양난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당신은 아기를 사랑하고 남들도 그것을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곧 남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봐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은 말하자면 사람들을 좀 속이고 싶다. 당신이 내심 완벽함의 배반이라고 여기는 것을 남들은 완벽하다고 봐주기를 바라니까.
아니면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기적적이고, 완벽하고, 광고할 준비를 싹 갖춘 채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그 시각과 느낌이 옳고 정확한 것이다. 즉, 당신은 자신이 말장 틀렸기를 바란다. 기형 아기의 추악함은 당신만의 괴이한 망상이나 환각에 불과하다고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면 곧 당신이 미쳤다는 얘기가 된다. 당신은 그동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남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그것의 추악한 기형성에 움찔했던 셈이다. 이것은 당신이 적잖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사실은 이보다 더 나쁘다. 이것은 또한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그리고 사랑한) 것에서, 스스로 낳은 것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틀림없이 당신 자신인 것에서 추악함을 보고 경멸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 최후의 최선의 희망, 여기에는 그저 당신이 형편없는 부모라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종의 금찍한 자기 공격, 자기 고문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현실이다. 자신이 완전히, 정신 나간 수준으로, 자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틀렸으면 하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는 여전히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재미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니,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리고 그 재미의 본질에 관해서라면, 나는 내가 소화전만 할 때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좀 희한한 이야기 하나를 줄 곧 떠올린다. 중국이라나 한국이라나 아무튼 그런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산이 많은 어느 시골 마을에 늙은 농부가 살았다. 농부에게는 외동아들이 있고 애지중지하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어느 날, 애지중지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 농사일에도 꼭 필요한 말이 마구간인가 뭔가의 잠금쇠를 풀고 산으로 내뺐다. 늙은 농부의 친구들이 모두 몰려와서 이 무슨 낭패인가 하고 한탄했다. 그러나 농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애지중지하던 말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야생마들을 잔뜩 몰고 함께 산에서 돌아왔다. 농부의 친구들은 다시 몰려와서 말이 도망친 일이 알고 보니 행운이라 얼마나 기쁘냐고 축하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농부는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옛 중국 농부라기보다는 너무 유대인스러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그렇다. 그래서 이제 농부와 아들은 야생마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제 등에 탄 아들을 거칠게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아들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농부의 친구들은 다시 몰려와서 농부를 위로하며 몹쓸 야생마들이 대체 무슨 불운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늙은 농부는 으쓱하며 말할 뿐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중국인지 한국인지 아무튼 그런 나라의 왕의 군대가 마을로 찾아와서, 어디선가 벌어질 찰라인 모종의 끔찍한 피투성이 전투를 위해서 열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신체 건강한 남자를 모두 징집해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의 부러진 다리를 보고는 일종의 봉건시대의 병역면제 등급 같은 것을 적용하여, 그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늙은 농부와 함께 남겨 두었다. 행운일까? 불운일까?
이 우화는 단신이 작가로서 재미의 문제와 씨름할 때 붙잡는 지푸라기와 같다. 맨 처음, 당신이 처음 픽션을 쓰기 시작할 때, 글쓰기는 전적으로 재미일 뿐이다. 딴 사람이 그 글을 읽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당신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 쓴다. 당신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하시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쓴다. 그런 일은 정말 가능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행운이 찾아와서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글로 돈을 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글이 전문가의 솜씨로 조판되고 제본되고 광고되고 리뷰되어 심지어 강신이 (한 번쯤) 아침 지하철에서 전혀 모르는 왠 예쁜 여자가 그것을 읽는 모습까지 목격한다면, 글쓰기는 전보다 좀더 재미밌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동안은. 그러나 이제 상황이 차츰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데, 더구나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당신은 이제 남들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느낀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러고 싶다. 당신은 이제 자신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쓰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 자위 행위란 외롭고 공허한 것이므로 -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자위를 대신할 동기가 되어줄까? 당신은 남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았고, 남들이 당신이 쓰는 새 글도 좋아해줬으면 하고 스스로 간절하게 바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개인적 재미라는 동기는 남들의 호감을 받고 싶다는 동기,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을 좋은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동기로 교체되었다. 자위가 아니라 이제 유혹의 시도가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유혹의 시도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거절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이 재미를 상쇄시킨다. ‘자아’가 정확히 무슨 뜻이든, 아무튼 당신의 자아가 게임에 끼어들었다. 혹은 ‘허영’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글이 대체로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남들이 당신을 훌륭한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마음에 기울이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이해할 만한 일이다. 당신은 이제 글쓰기에 아주 많은 것을 걸게 되었다. 이 일에는 이제 당신의 허영이 걸려 있다. 그리고 당신은 픽션 글쓰기의 까다로운 점을 하나 발견한 셈이다. 애초에 이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허영이 꼭 필요하지만 그 어느 정도를 조금이라도 넘어선 허영은 치명적이라는 문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쓰는 글의 90퍼센트 이상은 남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압도적인 욕구가 동기가 되어 쓰이고 그 욕구에 영향을 받은 글이다. 그 결과, 글은 허접스레기가 된다. 허접스레기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야한다. 예술적 진실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허접스레기 작품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할 테니까 그렇다. 작가적 재미의 진화 과정에서 이 단계에 다다르면, 이전에는 글쓰기를 북돋는 동기였던 것이 이제 글을 쓰레기통에 처박도록 만드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자 일종의 딜레마이고, 이 때문에 당신은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자시 자신 안에 갇혀 있는다. 그동안 당신은 울부짖고, 이를 악물고, 불운을 한탄하며, 이 일의 재미는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고 씁쓸해한다.
이 대목에서 잘난척을 해보자면, 이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든 당신의 원래 동기로, 즉 재미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재미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면, 당신은 지난 허영의 시기에 격었던 추악하고 불운한 딜레마가 알고 보면 당신에게 행운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되찾은 재미는 허영과 두려움의 불쾌함을 거치면서 변형된 재미이고, 당신은 이제 그 불쾌함을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나머지, 다시 발견한 재미가 이전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재미를 새롭게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픽션 쓰기는 이제 당신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 말로 알고 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장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처음에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부분,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이제 글쓰기의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억이다. 그리고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의 본질(1998),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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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11 여러분, 내 사악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완벽한 사기와 극심한 추악함이다. 잠시라도, 가장 화가 났을 때조차도 나는 사악하거나 악의에 찬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그저 하릴없이 참새들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위안을 찾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인정하고 마는 사기와 추악함 말이다. 내가 거품을 물고 화를 낼 때 나에게 어떤 인형이나 설탕을 넣은 차를 가져온다면 아마도 난 맘을 추슬렀겠지. 심지어 영혼까지도 온순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자신에게 이를 갈며 화를 낼 것이고 수치심 때문에 몇 달을 불면으로 고생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습관이다. p. 11-12 난 사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인도 선인도 비열한 인간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곤충도 될 수 없었다. 영리한 인간은 진정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바보만이 뭔가 될 수 있다는, 심술궂고 그 무엇으로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면서 지금까지 난 이 방구석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렇다. 19세기의 영리한 인간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꼭, 본질에 있어서 개성이 없어야 한다. p. 29 의식의 직접적이고 합법적인 열매는 무기력, 즉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p. 68 나는 나의 무한한 허영심 때문에 혐오감에까지 이르는 엄청난 불만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명확히 깨달았다. 때문에 난 타인에게 의식적인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자신의 얼굴을 증오하고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며 그 얼굴에 어떤 진지한 표정이 있는지 의심해 보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내 자신을 속물로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번 가능한 한 자신을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표정은 좀 더 평온하게 보이도록 대단히 노력했다. 난 생각했다. ‘추한 얼굴이 되도록 놔둬라. 대신에 그것이 평온하고 표정이 풍부하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매우 현명하게 보이도록 놔둬라.’ 그런데 난 이 모든 완벽함을 내 얼굴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p. 68-69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모든 동료들을 시기했고 모두를 경멸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갑자기 내가 그들을 나보다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경멸하고, 한편으론 나보다 높게 평가하는 일이 그때 불현듯 일어났다. 성숙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한 무한한 요구 없이도, 그리고 질투에 이르는 순간조차도 자신을 경멸하지 않으면서 허영심에 불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들을 경멸하거나 존중하면서 내가 만난 각각의 사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낼 수 있을지에 관한 실험까지 했다. 그런데 언제나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것이 날 몹시도 괴롭혔다. p. 183 그녀는 모든 정황으로부터, 여자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내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던 것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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