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anp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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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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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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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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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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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est naked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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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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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그린이가 아침에 일어나 꿈을 꾸었다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약 3주 전에 나는 코로나엑 감염이 되었고, 그 일이 있기 전엔 다니던 정신과 남자원장의 가당찮은 그루밍 시도에 지쳐 있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선을 넘는 발언을 했고 또한 내 애인에게도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분노가 치밀어 올라와
그에게 더이상 이 병원에 오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진료 의뢰서와 처방전과 3주치 정도 되는 약을 넉넉히 받아왔고 슬슬 병원을 어디로 바꿔야 할까 고민을 하던 차에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다.
감염 이틀차에 호흡곤란과 심한 가슴통증으로 119까지 와야 했으나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보건소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산소포화도만 간단히 검사하더니 문제 없는것 같다며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순간 나는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숨 쉬기가 버겁고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답답하고 아픈데, 왜 산소호흡기 한 번 씌워주지 않았을까,
왜 그냥 냉정하게 가버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점점 더 서러워져서 엉엉 울고 말았다.
결국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나의 증상은 오미크론에 감염된 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기엔 나에겐 커다란 공포였다.
10년 전에 바다에서 사고가 나 폐렴과 폐부종을 앓고 난 후로 폐에 문제가 생기면 얼마나 힘이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폐렴이 재바랄까봐 너무 두려웠다.
병원에 입원한지 3일만에 퇴원했다.(여기에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다.)
그 후로 약이 떨어져 정신과를 찾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결국 터져버린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린이에게 사는게 너무 고통스럽다고 힘들다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
심지어 재택근무를 하다가 회사로 복귀하라는 요청까지 받아서 더 힘들었다.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니 점점 욕을 더 많이 했고, 짜증이 나면 결국 불특정 다수를 저주하는 말로 끝났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그린이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꿈에 나와 또 다른 친구와 자신이 함께 물에 빠졌는데, 자신은 몸에 힘을 빼면 쉽게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물속에서 자라는 풀에 깊이 감겨 있어서 도저히 구해주러 내려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랬다간 본인도 죽을것 같았고, 예전에 내가 물에 빠져서 죽을뻔 했을때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고 되려 편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저렇게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인데 그냥 놓아주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대로 두고 수면위로 홀로 올라왔다고 했다.
꿈 얘기를 하고 그린이는 펑펑 울었다. 나는 등을 쓰다듬어 주며 “그린이가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구나~”, “얼마나 마음이 안좋았으면 꿈에서 그랬을까~”, “그린이 고생했다~” 하면서 위로해줬다. 위로를 하는 동안 그린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아기같이 크고 서러워졌다.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살면서 있었을까.
정말 과분하고도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많이 끌어안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좋은 것을 나눌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애인아….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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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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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일지 세번째
2022.03.20. 일요일
3주에 걸쳐 연달아 세번째 상담이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보니 일단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잠도 많이 못 잔 상태였다. 약도 못 먹고 갔다.
선생님께 이야기한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은 이런 것들이다.
엄격한 엄마와의 관계, 남동생과 나에 대한 차별, 어린시절과 십대때 겪었던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
엄마는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거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나와 장난을 치거나, 놀아준 적도 없다.
스킨쉽도 물론 거의 없었다. 그저 길을 걸을때 의례 손을 잡을 뿐이다. 어린 아이니까. 그런게 느껴졌었다.
남동생은 너무 귀엽고 이쁘고 재간둥이어서 부모님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다. 나는 그러니까 외톨이었다.
늘 가정안에서 소외감을 느꼈었다. 그런게 일상이었다.
난 일곱살이 되기 전부터 홀로 방을 썼는데 남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잤다. 나는 혼자 방에서 놀다가 안방에서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웃음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일까 나도 가볼까 해서 방문을 열면 웃음소리가 뚝 그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럼 나는 아 내가 괜히 끼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그런 꿈도 꿨었다. 꿈 속에 휠체어를 탄 남자가 나왔고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며 소외시켰다. 그때 나는 서러움에 북받쳐서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소외시키지 말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 꿈을 꿀 정도였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긴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늘 부족하고 허기지고 갈증이 났다.
12살 무렵부턴 내 빨래는 세탁기에 돌려주지 않았고 방학이 되면 하루에 두 번 청소를 시켰다.
오전과 오후에 나눠서 해야 했고 엄마가 일 끝나고 돌아오시기 전엔 아빠 밥상 차려드리는건 기본이었다.
엄마는 늘 나를 보고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셨다. 한 가족에게 “물화” 당하는 기분이란 좋을리가 없다.
안그래도 늘 소외당하는 기분에 시달려온 외로운 아이였다.
늘 어른들 말씀 잘 듣고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을 의식하며 컸다.
첫 성폭력을 겪었던 이야기를 꺼낼때 나에겐 과다 기억 증후군 같은게 있다고 했다. 아주 심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심한 편이다. 어린시절 두살 반즘 기억부터 아주 세세하게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성폭력을 당했을때의 기억도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들의 생김새, 나잇대, 나에게 한 말들, 행동들, 장소, 모두 정확히 기억난다.
여기에 또 쓰면 지겨우니까 넘어가겠다. 당시 나는 다섯살이었고 두 남자에게 이삼일에 걸쳐서 유치원 건물의 남녀공동 화장실에서 성폭력을 당했다.
열여덟 살때엔 채팅에 빠져 만남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는데 성경험이 없던 나는 어처구니 없게 그루밍으로 인한 강간을 당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도 모르는것 같다. 나는 그가 사는 동네인 대전에 놀러 갔었고.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밤이 늦었으니 차도 없어서 집에 못 돌아간다. 위험하니 모텔을 잡아주겠다. 그래서 나는 모텔에서 홀로 잠��� 자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갈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걱정이 된다며 내가 자는 모습만 보고 돌아가겠다며 모텔방 안으로 따라 들어와 결국엔 나와 성관계를 하려고 했고. 당황한 나는 뿌리치려 했지만 당시 나는 몸무게가 44키로도 안나가는 157센티의 외소한 인간이었다. 반대로 그는 덩치도 컸고 그냥 무게만으로도 나를 압사시킬 수 있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더이상 방황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순응했고 그날 나는 피를 철철 흘렸고, 그것을 본 그는 씨발 개좆같게도 뿌듯해 하며 나를 씻겨주었고 다음부턴 아주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는 사는 곳이 멀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그의 연락을 피하며 결국엔 귀찮으니 연락하지 말라며 끊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 경험에 대해 입원했던 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던 중 레지던트에게 얘기했다가 2차가해를 당한다.
레지던트는 나에게 말했다.(여자였다.)
“그런데… 고등학생때 성교육 받지 않아요? 그걸 강간인지 왜 몰랐어요?” 라고 했다.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하도 어처구니 없는 말인지 똥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것 같은데 아마도 무심하게 몰랐는데요? 라고 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을때 특히 가정안에서 소외당한 것에 대해 살림 밑천 취급을 당한 것에 분노 하셨다. 분노 할 순 있다. 그런데 난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는 것에도 이제 별로 공감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에겐 그저 지나간 일이다. 나는 나대로 살고 있고. 가족 그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고 지내지 않고 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고 있는 남동생과 연락이 끊긴진 매우 오래되었고,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20년이 다 되어가고… 엄마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나만 생각하라고 했다. 그것이 나를 돕는 길이라고. 내가 살 길이라고.
나도 잘 안다. 나만이 겪은 나만의 일이고, 나만이 오랫동안 근심하고 잠못 이루게 하고 괴롭게 하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대한 갈등이다.
아니지 울타리도 아니다. 나는 그 울타리 안에도 없었다. 매일 울타리 손잡이를 잡고 여차하면 뛰쳐나갈까 아니면 쫓겨날까 불안해 하던 아이었다.
내가 제일 두려운건 내 처지도 처지지만 남동생과 그의 가족. 그리고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비참하고, 병들고, 배고프게 살까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을까봐, 그리고 또 그것이 나에게 또 어떤 근심과 슬픔을 가져다 줄까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다.
아무리 내가 가족 안에서 소외 받고 관심과 사랑에 대한 결핍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하며 컸다고 해도 좋은 기억도 있는 법이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아플때 병원에 데려가고, 때 되면 영양제나 보약도 먹이며 나의 건강을 무척이나 신경 써주었던 어머니란 사람.
그는 미적감각도 좋았고, 손재주도 뛰어나서 요리든 무엇이든 못하는게 없었다. 머리도 좋았다. 일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어렵지 않고 확실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요리는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잘했고. 덕분에 나는 나름대로 좋은 미각을 얻었다.
어깨너머 본것과 먹어본것이 있다고 요리를 하면 그럭저럭 잘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요리하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요리를 하는 행위에 화가 난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요리에 집중을 한다기 보다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에게 자세히 말씀 드렸다.
혼자 쌀을 씻을때 조차도 화가 난다고. 내가 먹으려고 밥을 짓는 건데 그게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물론 내가 한 요리를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다.
사람들이 나의 요리를 좋아하고 맛있게 먹어주니 다음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지 라는 연쇄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얼마전까지 또 쌀밥을 못먹었다. 거부반응이 심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다.
흰쌀밥은 더더욱이 먹기가 싫고, 겨우 먹으면 현미밥이나 보리밥 이런 종류였다. 그런데 어쨌든 쌀이 싫어진다.
그 외에 열심히 씹어서 삼켜야 하는 행위 자체도 버겁고, 음식을 씹어서 넘기는 것도 모래를 씹는 것처럼 느껴져 먹고자 하는 의욕이 완전히 상실된다.
그나마 애인이 나에게 채소를 어떻게든 먹게 만들어서 다행스럽게도 먹긴 먹는다.
하지만 내가 건강을 생각해서 체중을 줄이겠다. 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그동안 체중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것도 20키로그램이나.
이제는 예전처럼 많이 못먹는다. 입맛이 조금 돌아오긴 했어도 음식을 먹는동안 뭔가 이제 불편하다 싶으면 숟가락을 놓게 된다.
정말 골치아프다. 이런 패턴이 올때마다 나의 건강상태는 크게 바닥친다.
정신상태가 글러먹어 졌으니 몸도 같이 상하는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듯. 다행히도 요즘은 식욕이 조금 좋아졌다.
현재는 다음 상담을 예약 했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어서 상담을 취소했고,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잠시 입원 했었다.
회사에도 다시 복귀해야 해서 몹시 스트레스 받는 중이다.
죽음의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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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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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감성적인 팟캐스트 인트로를 만들려 했으나…
완성된걸 보면 어둠의 힙합이다…
나의 천성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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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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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산불이 넘실 거린다. 내가 저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래야 살 수 있는데 저 산에 불이 났다. 나의 뒤를 악착같이 쫓는 악귀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쥐어채는 악귀들 나는 달리면서 냉담하게 머리카락을 자른다. 긴 치마를 벗어버린다. 내 눈에만 보이는 악귀들인데 누가 상관하랴 뛴다. 하염없이 달린다. 산은 점점 새빨갛게 물들고 뜨거운지도 모르고 그 속으로 내달린다. 내가 이곳에서 죽던 살던 아무도 알바 아니다. 내가 이곳에서 살던 죽던 아무도 알바 아니다. 관심이란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쫒는 것들인 것이다. 저것들은 악귀다. 비를 내려주세요. 제발 비를 내려주세요. 폭우가 내려 모른것들이 다 휩쓸려 가버리게 해주세요. 다 죽여주세요. 물에 ��겨 익사시켜 주세요. 다 죽여주세요. 그것들을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 - 박시안
왜 이런 시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가 나서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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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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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좋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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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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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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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어슬프게 그려 놓았던 것을 내맘대로 리뉴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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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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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3.일요일
지난 주 일요일에 첫번째 상담을 받고 심리 상담소에 두번째 방문이다.
이후로 꿈 일기와 상담 일지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두 번째 상담 일지다.
일주일 동안 나는 웬만하면 짜증내지 않기, 화내지 않기를 다짐하며 일하면서도 그린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꼽고 웬만하면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에 가기 전 날. 일주일 동안 그린이의 배앓이 때문에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고 날씨가 많이 푸근해졌고 바람도 훈훈하게 불어와서 함께 한강공원을 걷기로 했다.(생각보다 많이 걷게 됐지만)
함께 걷게 될때엔 집에 있을때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린이에게 내가 첫 상담을 받고 온 후 약간의 변화가 있었냐 물었더니 눈에 띄는 변화는 크게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동안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없는 삶과(사실 없진 않았다. 지쳐서 쓸 수 없었지.) 무기력에 일기 쓰기를 등한시 했는데 이젠 자주 써야겠다고 말했다. 예전엔 나의 일기를 보며 과거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을 보며 상태를 비교하며 완벽히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객관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써야 할게 점점 많아진다. 본격적인 무기력 증상이 심화되기 전에 나는 어쩜 그리도 열심히 일기를 써왔을까. 할 말은 많은데 말 할 곳이 없어서 그랬을까? 속에서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걸어다니는 활화산인데 분출 하고 분출해도 늘 갈증이 나서 그랬을 것이다. 그 외에도 글을 열심히 쓰면 쓸수록 글솜씨가 늘어나니 그런 부분에서 성취감을 느끼는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선생님을 뵈었고 잘 지냈냐고 물으셨을때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말씀 드렸다.
그린이가 스트레스 때문에 배앓이를 심하게 했고 나름대로 케어하는데 집중했다고 했다.(그린이가 나에게 해준거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그린이가 겪는 스트레스 중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게 나의 생활습관인것 같아서(같은게 아니라 그게 맞다.) 더욱더 마음이 안좋고 죄책감이 들었다.
선생님께 한의원에 다녀오기 전에 뜸을 주문해놓았었고 어제 처음 집에서 뜸을 해봤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뜸을 해주었고, 오늘 아침엔 오른 손목과 손바닥 중앙에 직접 뜸을 해보았는데 꽤 좋았다.
처음 뜸을 해본건 스트레스가 심하면 바로 신체화 증상으로 위장에 탈이 나서 토사곽란을 종종 겪었는데 어떤 날은 거의 탈진할 정도로 심하게 탈이 나서 거의 기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배 전체를 감쌀 정도의 커다란 왕뜸을 올려 주었다. 뜨겁지만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기분 좋은 느낌과 빠르게 통증이 가라앉는걸 느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한약 두 포 정도를 먹고 바로 식욕도 생겼고, 다음날 부턴 멀정해졌던 좋은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그린이에게 뜸에 대해 알려주었고 뜸을 사서 해보았는데 우린 꽤 만족하고 있는 중이라 선생님께 이 부분에 대해 말씀 드렸더니 아주 잘했다고 하셨다. 선생님도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하라고 독려해 주셨고 신체화 증상으로 여러가지 통증이나 증상에 시달리는 나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셨다.(이상한 건 아니다. 마사지 법 같은 것이다.)
내가 대체 의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아주 정확한 이유가 있다. 네살이 채 안되었을 무렵 이미 다른 아이들은 태열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나만 태열이 가라앉지 않아 두피에 온통 염증이 퍼졌었고, 병원에도 가보고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도무지 낫질 않았다고 했었다. 결국 시간이 약이었던 것인지 낫긴 나았는데 엄마의 말씀으로는 내가 머리카락이 안날줄 알았다고 하셨다. 지금 내 머리카락은 멀정하고 두피도 건강하고 탈색과 염색을 즐길 정도로 이상없다.
그 이후로는 한낱 어린 아이가 두통이 잦았다. 진통제를 다 줄 수 없던 엄마는 알약을 쪼개서 주시곤 하셨다. 그때부터 나의 두통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자주 체하는건 기본이었고 배도 자주 아팠다. 생리 불순은 초경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제일 심각한건 화병이었다. 지금까지 화병으로 한약을 세 번 먹었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렸다.
선생님께선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기 전의 이야기를 물으셨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제 지겨워서 여기다 다 적을 수도 없다.
그냥 이런 표현을 했다.
“내가 아주 작은것이라도 무언갈 해보려고 열심히 성을 쌓아 놓으면 누군가가 와서 발로 휙 차서 뭉개버리곤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버린다는 거에요.”
더 구체적인 상황을 듣고 싶어하셔서 말씀 드렸지만 여기엔 쓰지 않겠다. 너무 지리멸렬하다.
폐쇄병동에 첫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고 나서 며칠 안되어 바로 위경련이 일어나 일주일간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무슨 검사를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그 흔한 위에 염증도 없었고 너무 깨끗했다.) 담당 선생님께선 해줄 수 있는게 진통제 놔주는 것 밖에 없어서 답답하다고 하시며 퇴원을 권하셨다. 차라리 속시원히 배를 열어 종양처럼 떼어낼 수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까지 말했다. 당시 조금만 기름이 들어간 것, 단백질이 들어간 것을 먹으면 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경련이 일어났다. 퇴원하고 나선 바로 양배추즙을 먹기 시작했고 이후 한 달 동안은 거의 흰죽만 먹었다.
먹는게 무서웠다. 이유도 몰랐다. 물론 정신병원에서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되긴 했었다. 정신감정을 받을때 검사를 진행하던 여성 레지던트에게 열여덟살에 겪은 성폭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그땐 그게 강간인지도 몰랐다. 그루밍이 뭔지도, 가스라이팅이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그때 나의 생각은 아 죽을지도 모르니 그냥 이 상황에 순응하자. 그것 뿐이었다고.” 그때 레지던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고 선생님께 얘기했다.
“고등학생때 성교육 안받아요? 그게 강간인지 왜 몰랐어요?” 라고 말했다고.
선생님은 고개를 푹 숙이시면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나는 검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내 병실로 돌아가 조용히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바닥 타일에 칫솔 손잡이 부분을 날카롭게 갈기 시작했고 밤이 됐을때 자해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긁어도 상처가 나지 않아 싱거워진 마음에 서랍에 갈아둔 칫솔을 넣어두고 잠에 들었었는데 처음 폐쇄병동에 입원한 순진한 나는 소지품 검사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내가 잠이 들었을때 칫솔을 발견한 간호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찾아오셔서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 보라고 하셔서 솔직히 말씀 드렸고 그래서 너무 화가나서 자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잘 안됐다고 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입을 틀어막으시며 너무 놀라셨고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보고 하겠다고 하셨다.
이후에 의사 선생님과 보호사 분들, 간호사 선생님들 등등이 우르르 몰려 오셨고, 우리 병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몹시 미안해 하셨다. 그 레지던트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받고 싶냐고 말씀 하셨지만 나는 그 사람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다. 그리고 사과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났고 주치의 선생님은 레지던트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주셨다.(정확히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 기억이 안난다.)
그 이후엔 조금씩 병원에 적응하며 환자들과도 친해지고 그럭저럭 잘 지내긴 했지만…. 남자 환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 힘들었고 특히 함께 밥을 먹는것이 힘들었다. 거의 고역이었다.
같은 병실을 이용하는 친해진 다른 환자들이 나에게 보이는 관계 집착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기에 결국 자의로 퇴원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정도로 나에게 신체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것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정신과에서 약물 처방을 받기 시작했을때도 한참을 위 통증에 심하게 시달릴 때였다. 잠도 잘 못 잘 정도였다. 그런데 정신과 약을 처방 받아 먹기 시작한 후로 통증이 나아졌다. 정말 … 어이가 없었다.
선생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다.
나는 그동안 여러가지 생각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고.
온갖 취미를 만들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좋아서 뜨개질도 열심히 하고, 심지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이용해 스탠드업 코메디까지 했었고 팟캐스트도 했었다고.
가장 상처받는건. 사람들이 나에게 끈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끈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글도 10년 넘게 지금까지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고.
앨범을 내지 못한것. 그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고, 아팠다고.
끊임없이 이사를 다니며, 정신병증에 시달리고, 통증에 시달리고, 주거 불안에 시달리고, 무엇하나 마음 놓고 뭔가에 집중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기회가 없었다.
누구도 내가 되어볼 순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내 신발을 신어 보라고 권하지도 않겠다. 그딴것 필요없다.
하지만. 함부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가난과 아픔과 결핍에 대해서 아무리 스스로 잘 안다고 해도.
그 모양과 크기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위로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지 않았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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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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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트레이싱을 통해서 그림을 그린다.
말하자면 색칠하기 연습이나 마찬가지인데.
오래동안 묵혀 놓았던 스케치에 색조 작업을 했다.
아이패드는 너무 대단해.
뭐든 할 수 있다.
음악도 만들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등등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최적의 전자기기인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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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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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이와 만난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우리는 정말 어이없게도 클럽하우스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 전엔 뒤늦게 서른살이 넘어서 성적 지향성에 대해 정체화를 한 나는 많이 외로운 상태였다.
꾸준히 헤테로 남자들만 만나 왔었고, 옆이 비는게 싫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었었다.
그러다 스물아홉 되던해에 이젠 정말 인내심이 바닥 났다고 느꼈고 당분간 연애를 안하기로 했었지만…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건 아니었고…
서른살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약물복용을 시작하면서 체중은 급격히 늘어났다.
그렇게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가고 그린이를 만나게 되기 전까진 체중 감량하기 전까진 당분간 연애는 없다. 라는 생각으로 지냈었다.
사실 탑엘이니 뭐니 그런 만남 어플도 시도해 봤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하락하다 보니 뭐가 되질 않았었다.
오래동안 병과 싸우다 보니 지쳐있었고, 돈도 없었고, 그저 뭘 하기가 두려운 상태였다.
그러다 클럽하우스를 하게 되었다.
클럽하우스에서 퀴어들만 모여 대화할 수 있는 모임이 있어 그곳에서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던것 같다.
그렇게 성사된 우리집에서의 파티.
그때 그린이를 실물로 처음 보았다.
현관문을 열어주는데 조그마하고 까만 머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 짙은 속눈썹��� 가진 여자가 들어왔다.
당시 나는 3년동안 함께했던 고양이 푸딩이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슬픔으로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몸도 점점 안좋아지고 있었다.
다들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자고 갈 사람들이 남았는데 그린이가 내가 침대에 함께 누운 친구 사이로 같이 이야기 하자며 끼어들었다.
그러다 잠에 들었고, 이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다시 깨어나 침대로 돌아왔는데……(이후 생략..)
다음날 나는 혹시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 농락 당한것이 아닐까 하는 순진한 마음에 직접 만들어 자주 쓰고 다니던 아끼던 니트 모자도 선물로 대뜸 주었다.
이후엔 뭐 이렇다….
우린 사귀기로 하고, 갑자기 집도 합치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사실 함께 산지 2개월 동안은 각종병에 시달려서 거의 사람 구실을 못했다.
그린이의 지극정성 간호 덕분에 이젠 현재도 미래도 살펴보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재밌고 웃기고 예쁘고 요염하고 재능 넘치는 나의 애인 그린이.
되도록 오래. 아주 오래. 함께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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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anp0125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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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ChillWave를 만들고 싶었으나 어둠의 힙합비트를 만들었다.
개러지 밴드로 가이드를 잡아 본건데 로직으로 옮겨서 더 다듬은 후에
재미있는 랩을 넣어 보려고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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