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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 감명을 주는 창작물에 대한 감상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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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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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인스타그램에서 본 표지에 이끌러 교보문고 온라인 구매
“목소리를 키우라는 건 크게 말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라는 뜻이죠. 우리는 우너하는 게 있을 때 기어이 주저하고 말죠. 난 작품에서 그러한 머뭇거림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자 해요. 머뭇거림은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과는 달라요. 주저한다는 건 소망을 물리치려는 시도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그 소망을 붙들어 언어로 표현할 준비가 되면, 그땐 속삭여 말해도 관객이 반드시 여러분 말을 듣게 돼 있어요"
“나는 생살구의 달콤한 귤빛 살을 한입 베어 불며 학교 놀이터에서 마주치던 여자들, 나와 함께 아이를 기다리던 엄마들을 떠올렸다. 엄마가 된 뒤로 우리는 예전 모습의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버렸고, 아이를 갖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자신이었던 여자들이 그런 우리의 뒤를 따라다녔다. 가는 곳마다 우리 뒤를 쫓는 이 맹렬하고 독립적인 젊은 여자들, 잉글랜드의 빗발 아래 유아차를 미는 우리에게 대놓고 소리치고 손가락질하는 이 여자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
“나는 내 삶에 머잖아 변화가 일리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펼쳐진 죄와 벌의 안무를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 이는 내 삶이 어떻게 바뀌건 그 변화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걸 안 까닭이었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실제보다 더 지혜로워졌다고 느꼈다. 지혜롭고 슬픈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게 작가란 그런 존재여야 했다. 게다가 난 어차피 슬펐다. 내가 쓰는 문장들보다도 더 슬픈 애였다. 나는 슬픈 여자애를 연기하는 슬픈 여자애였다. “
눈 안으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초록 풍경이 쉴 새 없이 스미고, 온 몸을 부드러운 바람이 스쳤다. 초여름의 바람이 이렇게 기분 좋은지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몸을 제대로 움직인 것도, 뻐근한 근육을 느끼는 것도, 팔과 다리가 경쾌하게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다. 어제는 강과, 산, 무성하고 건강한 풀과 나무를 실컷 봤다. 신체의 움직임 덕분에 글을 읽을 힘같은 것도 생겼는지 어제 밤에 읽던 책이 너무 재밌어 오늘 마저 다 읽었다.
4월 쯤인가, 금방 읽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구매했으나 한참 지나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보다 더 읽지 않고 내버려둔 책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만든 것은 곧 써야 할 ‘혐오'에 대한 원고 때문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글감이나 기획을 갖게 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좋은 글감이나 좋은 구성같은 것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엇비슷한 것들을 알게 되면 참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의 모든 변화와 모든 움직임 그리고 그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하는 내 자신 고유의 어휘를 들여다 보고 싶어 졌다. 나는 그것을 얼마나 예리하게 포착할 줄 아는 사람인가. 나는 그것을 얼마나 쉽게 그��면서도 ‘스타일'이 있게 표현할 줄 아는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질문하게 한다.
내게 글을 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좋은 문장이나 훌륭한 문장을 짓는 문장력의 소멸보다, 감각적 예리함이었는데 난 그것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고 방치할 수는 없다. 어쨌건 난 방황 속에서도, 숱한 딴짓과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도 다시 노트북을 켜고 책상에 앉고 침대맡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 하찮은 글을. 이 어리석은 글을 써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부족해서 서글프고 모자라서 앝나까우나 그럼에도 진실하게 쓰고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가여운 이 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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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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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피부, 이건수
미술의 피부, 이건수
2017년 언젠가 도산공원 parrk 서점에서 구매
“그러나 점점 편리해지고 빨라지는 세상은 그와 정비례한 크기로 허무감을 던져준다. 내 육신이 편해질수록, 머릿속의 꿈과 심장 속의 피는 점점 흐려지고 차가워진다. 분명 우리네 인생의 질감은 아는 것만으로도 또는 느끼는 것만으로도 무늬지어지지 않는다. 정신과 몸의 복잡한 쓰임 속에서 나의 개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는 시간과 상황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름지어지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너와 내가 밀고 당기면서 만드러낸 깊은 주름,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삶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중한 증표일 텐데, 지금 이 세상의 관계 맺음의 방식과 기제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주름은 한쪽으로만 쏠려 있다. 
쉽게 말해서 내 몸을 쓰는 불편함을 즐겁게 받아들이자는 얘기, 목적을 위한 수단과 과정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을 때 진실이 다가온다는 얘기다.  ...
자기 인생의 경로와 결과를 마치 스마트폰에서 지식 검색하듯 찾아내어 그 성공의 지름길에 올라타려고 하는 젊은 작가들을 많이 보았다. 실질적인 몸의 쓰임이 없는 디지털 환경에 도취되어서 그런가. 그들의 작품을 스마트하지만 얇다. 쉽고 ㅠ연하며 답안이 선명하다. 그러나 몸짓과 과정이 삭제된 그림 속에선 영민함만 빛난다. 그들에게서 향기로운 땀 냄새와 찬란한 눈물 자국을 느끼고 싶다.”
“어떤 떄는 책의 물질적 존재가미 주는 사랑스러움 때문에 책을 사기도 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정신의 지층들. 탁자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을 때와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방 안의 표정은 너무나 다르다. 중학교 시절의 문고판 서적들과 짤븐 글이라도 읽고 싶어 애절하게 모았던 군대 시절의 시집들까지, 가급적이면 내가 보고 산 책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관심 밖의 짐 덩어리지만, 그 속엔 그것을 사기 위해 조그만 동네 서점을 들락거리며 마음 설레었던 젊은 날의 내 얼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 품을 떠나봤자 그것은 이제 ‘근수의 가치’밖에 안 남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예술의 소통 구조가 고만고만한 이유는 ‘근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허기진 대중들은 까치발을 해가며 경회루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야단이었다. 그 행위를 sns에 올리며 그들 나름의 소박한 소통을 시작한다. 나는 대중들이 몇 장의 야경사진을 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구조보다 대중들이 고즈넉한 밤공기 아래서 정궁의 기재와 우리 것에 흠뻑 취해서 생각과 생활이 변화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묵도 음악이고, 여백도 그림이다.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대중의 에술화’는 한 걸음 가까워진다. 예술에 대한 경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에 ‘예의’를 지키는 대중이 탄생하는 것이다.”
“옛 선비들은 자ㅕㄴ과 벗하지 못하는 삶에 지치면 지베 돌아와 산수화를 꺼내보곤 했다. 창과 창 사이ㅔ 걸어 놓은 족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림 감상법은 마치 서책을 보는 듯 둘둘 말아 놓은 그림을 펼쳐보고 다시 넣어두는 방식이었다. 얼마 전 거그믈 들여서 중국 송나라의 범관도 <계산행려도>복제본을 구입하였다. 산수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의 발원이었으리라. 비단 바탕에 먹가루가묻어있고, 기다란 목관에 보존된 ‘진짜 같은 가짜’ 클래식을 꺼내보면서, 나에겐 비록 가짜이지만 내가 받는 감동은 지나일 거라고 굳게 믿는 뜨거운 의지까지 생겨났다. 나는 스스로 치유된 것이다.
...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마음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삶의 형식에서 생겨날 것이며, 그런 자연의 마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예술을 자주 접하면서 양육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살면서 한 번도 선물을 준 적 없는 인생은 비루하고, 구차하고, 악독하다. 물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핑계를 무색케 하는 명절이 계절마다 존재한다. 인간의 고안물이자 장치로서 명절이 존재하는 이유는 드디어 선물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지속적으로 깨우치기 위해서다. 각종 명절은 우리가 ‘용기 있게’자신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공인된 기회다 
...
뇌물은 갈등하게 만들고 선물은 희망하게 만든다. 뇌물은 숨기고 싶어지고 선물은 드러내고 싶어진다. 뇌물은 상대의 반응을 바라보고 선물은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게 한다. 뇌물은 행위의 효과에 집중하고 선물은 그 행위의 원인에 집중한다. 뇌물의 관심사는 그 이후의 시간이고 선물의 관심사는 그 이전의 시간이다. 뇌물은 이익을 만들고 선물은 추억을 만든다. 뇌물은 머리를 쓰게 만들고 선물은 추억을 만든다. ...
어찌 보면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가 남긴 역사의 선물이다. 그것이 목적성을 담고 있는지 영혼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예술과 선물의 생명력은 너무나 큰 차이를 내며 달라진다.”
“이제 우리는 사람 본래의 속도와 시간을 천천히 체험하고 교감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들어가는 감상의 과정이 필요하다. 극장만이, 미술관만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마지막 장소다. 그 마지막 장소에서 휴머니즈믈 기초로 한 새로운 재생의 출발점이 시작된다.”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수록 좋은 예술이다. 좋은 영화는 졸릴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의 영상을 단초로 하여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자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쁜 영화는 쉴 새 없이 출현하는 이미지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영화, 이미지가 출몰하는 사건의 경과만 목격하고 추적하는 데 급급하게 만드는 영화다. 킬링타임은 킬링 씽킹일뿐이다.”
나쁜 버릇 및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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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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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빈자의 미학
승효상, 빈자의 미학
6월, 침대에 누���
“집은 집답게, 학교는 학교답게, 교회는 교회답게 서 있을 때 그 건축이 담는 삶은 보다 윤리적이 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합목적성에의 추구가 가장 바람직한 건축적 가치로 인식되던 때도 있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토지를 점거해야 하는 건축은, 그 장소가 요구하는 특수한 조건들을 맞추어줘야 한다. 기후와 지리 등의 자연적 조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일궈낸 인문사회적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자리잡고 알맞은 옷을 입을 때, 이는 그 장소에 적확한 건축이 된다. 
...
토지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든 토지는 고유하며, 그 고유성으로 인해 그 가치는 그것의 중요도에서 비교 평가되거나 절하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장소성의 회복은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무가 된다. 토지 속에 담긴 흔적을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 또한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침묵하는 토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토지에 생명을 갖게하며, 이에 비로서 그 장소성은 회복이 된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우리 강토에 휘몰아친 ‘잘 살아보세'라는 편향된 가치 추구가, 왜 잘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분별력 없는 구호가 파행적 정치 모습인 군사독제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너도나도 졸부의 꿈을 이루려 염치도 버리고 정서도 버리고 문화도 버리고 오늘날의 국적도 정체성도 없는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내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뭉뚱그려진 전체 속에서 박제된 껍데기를 가지고 서로의 영역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허무의 모습으로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다.”
“멕시코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에게 있어, 그가 구축한 벽은 노스텔지어이며 그 벽으로 한정된 공간은 침묵이다. 그가 이야기하길 “고독함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고독은 참 좋은 반려이며 나의 건축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이에겐 부적절한 것이다.”
임시저장 포스트만 쌓여 있지만 이건 나중에 인용구 찾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감상 없이 미리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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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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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남,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김혜남,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2월 김과장님의 추천도서, ebook구매
“사는 게 혼란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지면 누구나 방황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싨를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도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너무 힘들어 병적 혼란을 겪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들을 고통스런 상황에 무릎 꿇은 패배자로 볼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과 다시 부딪쳐 싸울 힘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결국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니 그들은 결코 패배자가 아니다. 
서른 살의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당신이 지금은 방황하고 있지만 그 방황은 당신이 최선을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괴테가 말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라고. 그러니 당신은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언제든 실패자가 될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성공한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자칫 잘못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버림받은 인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삶이 중요하고 특별한 것이라는 확신이 바드시 필요하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나 자신의 유일성과 중요성을 발견할 만한 기회를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무위로 돌아갈 ㅅ 있는 나의 노력과 시간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공허와 허무를 낳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살고 있다는 안정감과 자신감,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결국 내가 나 사진을 향해 환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목숨 거느라 너무 많은 ㅂ분을 외양에만 투자하게 되면 내적 성ㅅㄱ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가 나의 진정한 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이상 타인의 시선에 목숨 걸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 “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그래서 고의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좀 더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상실에는 애도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애도의 과정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상실을 맞이하면 처음에는 그 상실을 부정하게 된다. “아냐 그럴 리 없어”라며 고개를 젓고 그것이 내 곁에서 멀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그것이 없는 현실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면서 부노가 치밀어 오른다. 말하자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냔 말야!” 라고 오치는 것과 같다. 상실에 분노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점차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인정하고 슬픔에 잠기게 된다. 이 슬픔의 기건에 우리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얻게 된다.”
“애도 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을 내면에 깊이 간직한 채 새로운 만남을 향해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애도란 충분히 슬퍼함이고 받아들임이다. 그리고 떠내보냄이고 새로운 출발이다. 또한 잃어버림이고, 그 잃은 것을 내 안에 영언히 간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월의 어느 즉흥 치맥의 밤. 김과장님과 효대리님(지금은 효과장님이 되어버린!)과 모여 서른살에 대해 말했다.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땐 그래도 나름 20대였다. 풋풋하진 않았지만 아직 20대라는 감각을 온 몸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때. 서른은 스무살의 연장이었지, 30대라는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서른 하나의 시작은 이상하다. 아주 ���소한 것 까지도 내 삶의 많은 부분이 30대라는 기준으로 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것같다. 
경제적 독립, 정서적 독립, 자율... 언제나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었으면서도 가능한 회피하려고 했던 단어들. 그러니까,ㅡ정서적으론 익숙하지만 체감적으론 낯설게 느껴졌던 어른의 감각이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무릎까지 차올라서 어쩔 줄 모르게 되어 버렸다. 도망갈 수 없게 첨벙거리는 현실감각에 몸이 잠기고 나니, 불편하고,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는데 그 와중에도 삼십년을 살아오던 나의 관성은 여전히 앞으로 돌진하는 맹렬한 접영을 준비하기보다는 유유한 배영을 원하며 ‘나 편하고 나 재밌게’ 를 외치고 있다. 받아줄 사람 없는 어리광과 투정을 나 자신에게 부리면서.
그런 과정 속에서 인간적인 양심을 챙기고 최소한의 모양이라도 갖춘, 그러니까 민폐끼치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다는 의지는 있었기 때문에. 한숨을 팍팍 쉬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골똘히 고민해보는 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경계 없이 하다가, 김 과장님이 나에게 말한 ‘구원’이라는 키워드가 훅 하고 와닿았다. 서른이 되면 독립이라는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고,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필요로 하는데.
지금의 나는 그 시간들을보다 성숙하게 보낼 수 있는  ‘구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있던 차에, 과장님이 “스스로를 구원해야하는데 내가 그때 도움을 받은 책은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야” 라고 말해서, 회사로 돌아와 바로 결제를 하고 다음날 읽기 시작해  하루만에 읽어버렸다. 
솔직히,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는 말 하기는 어렵다. 읽는 내내 레퍼런스가 좀 진부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읽으면 읽을 수록,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굉장히 어설픈 어른으로 살아갈 공산이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대충 다 ��잖아? 라고 넘겨짚을 법한, 사소한 삶의 지혜들을 견과류 씹듯 꼭꼭 깨물어 읽으니. 묘하게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허리를 조금은 더 꼿꼿하게 피고 살아가야지라고 각성은 했달까.
적어도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한 과정을,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정리하려고 노력해야한다는 마음가짐이라도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들어 어쩐지 또렷해진 내 인생의 화두는 성장과 화목이다. 화목은 관계의 관점이고, 성장은 개인의 관점인데. 내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독립이나 자율의 궤에 대해서 어느 해보다 더 심도있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 어른이 되기는 정말로 어렵다
이래놓고 엄마아빠랑 싸우고 집을 뛰쳐나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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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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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3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다시 찾아봄
“이런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 아기가 뒤바뀐다’는 선정적인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관객의 시선과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 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이런 관점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렇게 두 가족의 생활 속 디테일을 어떻게 쌓아 가느냐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려 했다.”
“멈춰 서서 발밑을 파내려가기 전의 조금 더 사소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것. 물 밑바닥에 조용히 침전된 것을 작품이라고 부른다면, 아직 그 이전의 물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흙 알갱이와 같은 것. 이 에세이집은 그런 흙 알갱이의 모음이다. 아직 작은 알갱이 그 하나하나는 분명 몇 년이 지난 후 다음, 그다음 영화의 싹이, 뿌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지금 세 살인 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인 거야. 그렇게 딸에게 말을 걸듯 만들었습니다"
“쟈쟈쟈
기분 좋은 소릴 내며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창작을 하며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상'에 집착하며 홀리게 된 출발점은 틀림없이 여기라 하겠다. “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떄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미뤄두었던 혹은 아껴두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몸을 한동안 구기고 있었다. 영화는 때때로 슬펐지만 대체로 아주 아름다웠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보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난 뒤에는 폭격처럼 밀려드는 그 따스함이 행여나 빠져나갈까봐 두려워져 몸을 구겨야 했다. 간직하고 싶은 따스함을 주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고레에다 영화의 엔딩은 한 번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 같다. 아직 아껴놓고 있는 그의 다른 영화의 엔딩은 어떨 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그의 영화의 엔딩들에서 내가 느꼈던 그 완벽한 마침표의 모양새는 늘 옳았다.
그래서, 그 온기를 더 오래 가직하고 싶고, 더 오랫동안 그가 만든 볕을 쬐고 싶어서 이전에 품절이라 포기했던 그의 책을  다시 검색해봤다. 중고라도 살 작정이었는데 용캐도 새 책이 나와있는 걸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게 된 건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이다.
사실 독서일기를 미룬지 꽤 오래 됐는데, ( 2월엔 열 권쯤은 읽은 것 같은데도) ‘독서 일기 충동'을 부추기는 글들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간만에 시간이 충분했던 이월이었다)
그러나 전업 작가도 아닌 영화감독이 쓴 책은 머리말부터 나에게 ‘독서 일기 충동'을 부추겼고 그 결과 오늘은 짧게라도 독서일기를 남겨야지라고 다짐하고 엄청 놀린 눈을 부릅뜨고 횡설수설 적는 중.
책을 넘기는 내내, ‘좋음'이라는 감정이 온 몸에 번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나도 이렇게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데!’ 라고 작은 탄식을 했지만 내 생각을 ‘빼앗아(?!)’ 간듯한 그에게 느낀 감정은 원망이 아니라 외려 감사함이었다. 올바름에 대해서 일상의 풍요에 대해서 고민할 줄 아는 어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그 바른 성정이 작품으로 글로 드러나 우리들에게 어떤 두드림을 준다는 것은 참 커다란 감사함이다.
감독은 ‘풍요롭다'라는 형용사를 글에서 수시로 반복하는데 책장을 덮고 나서 ‘풍요롭다'라는 말을 잘 쓰는 사람이야 말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제적 풍요로움이 아닌 삶의 풍요로움을 알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을 너그럽게 볼 줄 아는 사람이고 그 너그러움이 나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가 그려내는 겹겹의 일상들을 그야말로 ‘풍요롭게’ 즐기며 그 생활에 스며 있는 인간의 맛을 읽는 것이 그가 만든 영화의 묘미라고 생각하는 나는. 행복이나 슬픔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담담하지만 생기있게 인물들을 묘사하는 그의 작품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곱고 아름답다는 것을 글로도 읽을 수 있어 정말이지 좋았다. 참 따뜻한 사람이다. 글을 읽는 내내, 책장을 넘기는 내내 온기가 몸으로 번졌다. 그 온기가 날아갈까 아까워 몇 번을 돌아와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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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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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2월, 크레마사운드 구매기념 알라딘 첫 ebook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과 돌아오자마자 널브러진 침대 위에서
“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장소와 그 사람들에게 야릇함을 부여하게 된 것은, 마치 그녀가 그들 모두를 자신의 향기로 적신 것처럼, 오로지 그녀의 존재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들 그녀를 루키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녀가 새로운 이름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안도감이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첫 느낌이 더욱더 되살아난다.”
“바빌레, 아다모프, 그리고 발라 박사는 그들의 젊음, 즉 운율이 아름답지만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보헤미안'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에 충실했다. 나는 사전에서 ‘보헤미안'을 찾아본다. ‘규칙도 장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방랑 생활을 하는 자'”
“ 나는 항상 어떤 장소들에는 자력이 있어서 그 부근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면 사람을 끄곳으로 끌어당긴다고 믿었다. 그것도 의구심을 품지 않도록 은밀하게. 비탈길, 햇볕이 내리쬐는 보도 혹은 그늘진 보도여도 충분하다.”
“스쳐지나가고 결국 거리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마는 여자들, 남자들, 아이들, 개들의 그 끊임없는 물결 속에서 때로는 얼굴 하나라도 붙들어놓고 싶었으리라. 그렇다. 보잉의 말처럼, 대도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몇 개의 정점달을 찾아야 했다.”
“사람은 늙지 않는다.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이 마침내 당신에겐 너무나 우습고 덧없어 보여 당신은 그 사람들과 사물들에 어린아이 같은 시선을 보내게 된다”
“이따금 이정표도 없는 넓고 막막한 대지처럼 보이는 이 삶 속에서, 모든 도피선과 잃어버린 지평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더이상 무턱대고 항해한다는 느김을 받지 않기 위해 지표들을 찾고, 일종의 토지대장 같은 것을 작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의 실을 잣고, 불확실한 만남들을 좀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나는 새로운 느낌을 경험했다. 그에게 그 모든 시시콜콜한 일들과 이야기함에 따라 내가 어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는 듯한 느낌을. 그런 건 더이상 나와 상관이 없었고, 내가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하는 동안 그가 메모하는 것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 모든 것에 명백히 적혀있다면 그건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묘비처럼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오늘,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아마 나는 엄마의 비좁은 삶보다 더 멀리 엄마를 이끌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엄마로 하여금 또다른 지평들을 알게 하는 데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르 상 수시' 카페에서 처음으로 샴페인 한 잔을 마신 밤에도 그와 비슷한 도취 상태를 겪었다. 내 생은 내 앞에 있었다. 어떻게 내가 벽에 바싹 붙어 웅크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나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것이다. 아무 카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매일 밤 아파트로 돌아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언젠가는 아파트를 완전히 떠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가질 만남들, 나의 고독에 종지부를 찍어줄 만남들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내 첫 만남이었고 아마도 내가 넓은 바다로 나가는 걸 도와줄 것이다.”
“삶 속에는 건널 수 없는 경계들이 존재한다.”
“말 한마디라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말이 거짓이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더 나았다. 나는 불현듯 거리에서 허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서점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내 생의 한 단락이었다. 나는 문을 닫을 떄까지 종종 그곳에 머물렀다. 책장 가까이에 의자 하나, 아니 커다란 발판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 책과 화보집 들을 뒤적였다. “
“일이 정말 잘못된다 해도, 깨어나기만 하면 돼. 당신은 무적이야. 나는 저쪽, 하늘의 푸르름과 허공만이 있는 그 끝까지 도달하고 싶어. 안달하며 걸었다. 그 어떤 단어가 내 상태를 표현하랴? 나는 극히 빈약한 어휘만을 사용할 뿐이다. 도취? 엑스터시? 황홀? 어쨌든 그 길은 나에게 친숙했다. 옛날에도 그 길을 따라 걸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찾던 것이 단지 행동지침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도망치고 항상 더 멀리 도피하며, 난폭한 방식으로 일상적인 삶과의 관계를 깨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이 뒤에 놓아둔 단역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내 책임을 지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황상태의 두려움을 보였다.”
“나는 궁금했다. 우리는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걸었고, 우리 앞에는 밤 전체가 고스란히 있었다. 리볼리 가의 아케이드 아래에 아직 태영의 흔적들이 남아 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삶에는 부재, 하얀 공백이 생겼고, 그것은 단순히 공허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걸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 새하얀 공백은 환히 퍼지는 강렬한 빛으로 내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끝까지 그럴 것이다.”
김과장님의 추천으로 크레마 사운드에 입문. 지난 번에 주신 샘은 이제 배터리 지속시간이 경악스러울정도로 짧아 제대로 책을 읽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독성도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이번에 새로 산 크레마 사운드는 여러모로 정말 만족이다. 살까말까를 망설이던 찰나에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김희영 교수님이 번역 작업 중이신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ebook 으로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로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 목록을 쭈욱 장바구니에 담아보고 있었는데 파트릭 모디아노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있는 걸 보고는 제일 첫 구매로 삼았다. 사실 독서일기를 시작하고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이 이 곳의 가장 단골 손님이 되어버려서 어리둥절하다. 그는 분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을 수는 없는 작가임에도, 요즘들어 계속 그 사람의 문체와 그 사람의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읽게 되는 것이다. 이번 파리 여행에서도 장주네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사 온 책도 파트릭모디아노였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역시 다른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호해서 규정지을 수 없는 한 사람의 형태와 윤곽을 더듬어가며 완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작법에 있어서의 차별성은 존재하는데 그 방법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독창적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 인물에 대한 그들만의 인상과 단서를 구축해가면서 ‘자클랭' 이라는 여자의 정체성을 지어가는 방식이다.
마치 니트를 짜듯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한 사람의 조직을 구성해가듯이, 자클랭 본인을 포함한 네 명의 사람들이 ‘자클랭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완성해간다.
추리소설마냥 재미있고 흥미로워 빨리 읽어내려가긴 했지만, 이 전에 그의 소설이 주는 아련함이나 습하고 촉각적인 자극이 덜해서 또 읽고 싶은 소설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모디아노 소설은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계속해서 읽게 될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그의 글들은 한 인간을 건축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어, 책을 다 읽고 나면 텅 빈 공터에 등장 인물로 지어진 집 한 채가 지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집의 구성요소들이 여전히 신비롭고 모호하며 시간에 따라 계속 변화해서 다시 뒤돌아보면 사라져있을 것만 같다.
한 개인의 삶은 완성형 건축이 아닌 낡음과 사라짐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는 해변가의 모래성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스라히 사라지고 나타나는 와중에 견고하게 남아있는 뼈대 만은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허물어지지 않을만큼 튼튼하면 좋겠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건축의 과정이라면, 지금 나라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와 있는 것일까?  아직 아무것도 쌓아올리지 못하고, 토지만 다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창문은 넓었으면 좋겠네.
아주 큰~~~창문을 달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햇살도 많이 받고, 나 밖의 많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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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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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장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장주네
1월, 언젠가 사서 읽었던 책을, 패티스미스의 영향으로 반신욕독서로 택함
“세상과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흐름에 휘말린 듯하다. 언제나 조야한 목적을 위해 눈에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꾸려는, 걷잡을 수 없이 나날이 증폭되기만 하는 이러한 흐름에 사로잡힌 세상과 역사를 보고 있으면, 누구든 공포까지는 아닐망정 슬픔 같은 걸 느길 것이다. 눈앞의 세상은 지금 그대로일 것이며, 어떤 행위 하나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향수에 잠겨 다른 우주를 몽상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보다, 아예 그 외양을 부숴 버리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외양에 가해지는 모든 행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좀더 정확히 말해 인간 정신의 - 전혀 다른 모험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우리 내부의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벗어 던지는 일에 몰두하게 될, 그런 우주를 몽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쩄든 이미 알고 있어 가늠할 수 있는 곳이 아닌 미지의 다른 세계로 모험하려는 문명에의 향수를 느끼는 것은, 이런 비인간적인 조건, 즉 돌이킬 수 없는 모양으로 되어 버린 세상 탓일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이 더욱더 견딜 수 없어지는데, 그것은 이 예술가가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치워 버릴 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서도 연유하지 않는다. 독특하고 저마다 다르며 감추어져 있기도 하고 때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이 상처는, 누구나가 자기 속에 간직하여 감싸고 있다가 일시적이나마 뿌리 깊은 고독을 찾아 세상을 떠나고 싶을 때, 은신처처럼 찾아들게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예술은 미제라빌리슴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
“나는 예술에서 이른바 개혁자로 불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잘 모르겠다. 작품이란 미래의 세대들에 의해 이해될 것이라는 소리인가. 왜 그런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 세대가 작품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면 무엇에?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아주 모호하긴 하지만- 모든 예술작품이 가장 웅장한 범위에 이르려면, 무한한 인내와 노력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태고의 밤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작품 안에서 죽은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잘 알고있다.”
“내가 위에서 자코메티의 작품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또한 그의 작품이, 수많은 사람들이 탄탄한 뼈대 위에 살아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지대를 뚫고 들어가 저승의 구멍 난 벽들을 통해 스며 나올 수 있는 기이한 힘을 부여받은 예술- 유려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주 견고한 예술- 이 요구된다. 아무리 사소한 부당함일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작은 고통일지라도- ㅜ군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그로 인한 상처는 너무도 클 것이며, 단지 미래의 영광만을 누리게 한다면 승리라는 것 또한 초라해지고 만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모든 존재와 사물이 인식하고 있는 고독을 죽은 자들에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그 고독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우리의 영광이다.”
“그림 한 점을 검토하려면 좀더 큰 노력과 복합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사물 본래의 모습을 파악해내는 작업은 사실 화가가 - 도는 조각가가- 우리들을 위해 이미 해 놓았다. 우리에게 복원되어 나타나는 것은 재현된 대상이나 인물의 고독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가 그 고독을 파악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연속성이 아닌 비연속성 안에서 공간에 대한 체험을 해야 한다. 
각각의 대상은 무한한 자기의 공간을 창출한다. 
이런식으로 바라본다면 한 폭의 그림은 대상의 무한한 고독이 담겨진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대상 자체의 고독이 아니라, 화폭이 재현해내는 고독이다. 그러므로 나는 화폭 위에 나타난 이미지와 동시에 그 이미지가 재현하고 있는 실제 대상을 그 고독 속에서 포착하길 원한다. 때문에 우선 그림을 그 전체적 의미로부터 하나의 대생으로 분리시켜 보도록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회화라는 큰 가족으로 바라보는 일을 멈추고, 화폭의 이미지가 그림이라는 공간에 대한 나의 체험에 연결되도록, 즉 앞서 묘사했던 대로 각각의 대상들, 존재들 혹은 사건들의 고독에 대한 나의 인식에 맞닿을 수 있도록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고독을 경이롭게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회화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거짓이다.”
“그때 갑자기 고통스러운 느낌, 그 누구라도 다른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아니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오히려 ‘분명히'라는 말에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추함, 어리석음, 악의를 넘어서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때 내 시선에 사로잡힌 빠르고 강렬했던 그의 시선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추함이나 악의를 넘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이 사실은, 바로 그 추함이나 악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생각이 자비가 아닌 하나의 인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살아 있는 것들 -또한 사물들- 이 도피하여 숨어드는 은밀한 장소인 고독은, 셀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모습을 거리에 안겨 준다. 예를 들어, 버스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창 밖의 풍경이 그러하다. 버스는 급경사의 길을 내려가고 있고, 나 역시 하나의 얼굴이나 몸짓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를 타게 된다. 이렇듯 속도감에 실린 시선에 잡힌 사람들의 얼굴이나 몸, 태도들은, 나를 위해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이다.
...... 그리하여 각각의 존재는 더없이 새롭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언제나 마음의 상처가 내린 은총이다. 어렴풋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상처ㅣ만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로 쏠리게 되는 고독을 체험한 것이다. 
......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친숙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그 왕복에 의해 지탱되는 것 같다. 이 오고감은 끝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조각들에 움직이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자코메티는 결코 색조나 음영 또는 상투적인 가치들에 매달리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 안에서만 윤곽을 드러낼 수많은 선들의 그물망 같은 것을 얻어낸다. 그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음영이나 색조 그리고 회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한편의 뛰어난 부조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화폭을 잘 들여다보면 ‘부조'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형상이 얻어낸 것은 차라리 깨부술 수 없는 단단함이다. 그것은 무한히 큰 질량을 갖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자코메티가 이루어낸 형상은 다른 형상들, 즉 움직이고 있는 어떤 특별한 순간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리라든지, 그것만의 고유한 역사가 될 어떤 돌발적인 사건으로부터 특징지어졌기 때무에 살아 있다고 말해지는 그러한 형상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 있지는 않다. 오히려 거의 정 반대로 자코메티가 그려낸 얼굴들은 살아 있을 시간도 더는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 어떤 몸짓도 할 수 없을 만큼 삶 전체를 응축시켜 놓은 듯이 보이며, 너무도 만흔 생을 그 안에 집적하고 있기에 (조금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 마침내 죽음을 포용하게 된 것이다. “
“어떤 그림들에서는 공기가 돌고 있다. 그런데 이 데셍들에서는 뭐랄까 공간이 돌고 있다. 빛도 역시 돌고 있다. 다른 어떤 상투적인 예를 들어 빛과 그림자 등의 가치 대립 없이 빛은 사방으로 퍼지고 몇 개의 선들이 그 빛을 조각해낸다”
“자코메티가 야나이하라의 초상화로 고심하고 있는 동안, 결코 틀리지는 않으나 자꾸 실패하하기만 하는 한 남자의 감동적인 광경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꾸만 더 멀리 출구도 없는 불가능한 어떤 곳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요즈음 들어서야 그는 그곳으로부터 다시 떠올라 나왔다. 당시 자코메티가 해낸 작품들은 그리하여 어두우면서도 눈부신 감탄을 일으킨다.”
“나는 자코메티의 데셍들이 ‘ 더없이 소중한 사물들...’을 그려내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흰 여백이 지면에 서광같은 - 혹은 불빛 같은 - 가치를 주며, 선들은 의미있는 가치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의미를 오로지 여백에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백에 형태와 견고함을 주기 위해 선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잘 살펴보면 우아한 것은 선이 아니라 선이 감싸고 있는 흰 공간이다. 가득 찬 느낌을 갖는 것도 선이 아닌 흰 여백이다.”
“ 자코메티가 자주 반복하는 생각 : ‘가치있게 해야 한다...’
그가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살아 있는 존재나 사물을 하찮은 시선으로 보아 넘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바라보는 하나하나는 각자의 가장 소중한 고독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 결코 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온 힘을 모조리 다 초상화 속에 담아내진 못할 겁니다. 단지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벌써 굉장한 의지와 에너지를 강요하니까요...”
“ 그러므로 자코메티의 예술은 대상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 - 인간과 그의 분비물이라는 관계-를 맺어 놓은 사회적인 예술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한 룸펜의 예술이며, 대상들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고독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순수한 지점에 이르고 있다. 대상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혼자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될 수가 없다. 지금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
어떤 글은 너무 아름다워서 한 장을 읽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글들에 비해 유독 오래 걸린다. 장주네의 글들이 그렇다. 짧은 책에 평이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 문장 한 단어가 지닌 밀도가 엄청나서 몇 번을 다시 읽었다. 한 줄을 읽어도 이렇게 좋을수가 있나 싶어, 책에서 눈을 떼고,  내게 남은 잔상들을 찬찬히 떠올려보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만 했다.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장주네의 글을 보고 하는 말이겠지.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코메티에 대한 내 사랑의 크기가 지금과 다를 때는 분명 아니었다. 나에게 자코메티란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마냥, 무한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이니까. 발걸음을 돌려 다시 보게 하고, 심장에 손을 갖다 대어 쿵쾅거리는 맥박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감상하고, 눈을 감고 떠올리고, 그리고 또 다시 가서 바라보아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좋은. 환상적이고 엄청난 힘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을 쓰다듬으며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자코메티의 작품들보다 완벽한 작품이 또 있을까? 예리함과 투박함을 동시에 지닌 그의 조각을 마주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아픔을 느끼는데 그 아픔은 고통의 과정이 아닌 치유으 과정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가 가진 선천적 고독감, 그의 후천적 장애 같은 특수한 이야기들을 모두 배제하더라도, 자코메티의 작품 앞에 서면 느껴지는 숭고함과 경외로움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특수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 특수함이 무엇인지, 그 특수함이 왜 칼더나 부르델 로뎅이 아닌 자코메티였는지 명확하게 나의 언어로 말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경박할 정도로 직설적이지도 그렇다고 모호할 정도로 추상적이지 않게 가장 아름다운 언어들로 가장 사려깊은 문장들로 빚어낸 글이 장 주네의 것이다.
그가 너무도 사랑한 자코메티와 그리고 그를 너무도 사랑한 자코메티. 그 둘의 애정, 신뢰, 교감이 글의 곳곳에 묻어나서. 글을 읽는 내내 서늘한 와중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추는 자코메티의 아뜰리에 속 두 사람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한다. 
책은 무척이나 짧지만, 그 글이 쓰여지는 데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둘의 수많은 만남과 회고 그리고 퇴고를 통해 그 글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이 그러하듯, 자코메티의 조각을 닮은 장주네의 이 글들은 읽는 내내 어딘가 저미게 아프고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통해서 아름답게 치유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한 거장에 대한 경외감과 애정, 그리고 나아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고찰이 문장에 단어에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비어져 있는 그 여백에 빠짐 없이 모조리 담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존경과 사랑으로 지어진 지나치게 아름다운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절대로 이런 문장은 쓸 수 없을 거라는 허탈감과 초라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고독의 소중함을 떠올릴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고독과 그 고독의 열렬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만의 어휘와 나만의 시선을 담은 글을 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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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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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즈, 패티 스미스
저스트 키즈, 패티 스미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산 책을 집으로 달려오는 버스와 주말의 반신욕 시간에 읽음
“랭보를 읽으며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를 익혀갔다.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문장들을 집어삼켰다. 그를 향한 짝사랑은 이제껏 내가 겪은 어떤 감정보다 강하고 실제적이었다. 내가 일하던 공장에는 무식하고 생활에 찌든 여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외국 책을 읽는 나를 보고 공산주의자 아니냐며 의심하고 신고해버릴 거라 협박했다. 가장 혐오하는 분위기 속에서 생활해지만 랭보를 생각하며 글을 스고 꿈꿨다. 그는 나의 수호천사였고, 공장에서 겪는 일상적인 공포에서 나를 구원해주었다. 천국으로 가는 랭보의 안내서를 나는 빠르게 독파했다. 그를 통해 배운 지시근 내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고,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일뤼미나시옹을 체크무늬 여행 가방에 던져 넣었다. 함께 떠날 준비가 되었다.”
“ 그 당시 세상은 뭔가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불가능의 영역이었던 달에 인간이 착륙한 사건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진주 위에 고무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 다니니 말이다. 그 시절, 처음으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느 때나 그냥 손을 들어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뭘 멈추라는 거지? 아마도 나이 드는 것 말이다.”
“그날 밤 방으로 올라오면서 그 뮤지션들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유대감을 느꼈는데, 예감 같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당시엔 내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시 몇 편 때문에 끙끙대는, 스물두 살의 멀대같은 서점 직원이었을 뿐이다.  
 그날 밤 너무 신났던 나머지, 무한한 가능성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어린 시절 그랬듯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진동하는 패턴들이 물결을 이루며 공간 소으로 사라졌다. 내 인생의 만다라화였다.”
“첼시 호텔에서 흥미로운 사람들을 많이 마났지만, 눈을 감고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항상 해리였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어서도 그렇겠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 시절은 우리가 마법을 믿었던 때고, 해리야말로 마법을 믿는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동안 우리 셋은 맥스 바에 자주 다녔다. 샌디는 맥스에 놀러 가는 일이 별로 수고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침울하고 따부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내 기분도 잘 맞춰주었다. 결국 난 맥스 바에 놀러 가는 일을 로버트와 함께하는 일상쯤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7시 넘어서 서점에서 돌아와서 저녁으로 치즈 샌드위치를 먹고 서로 하루 일과를 물으며 평범한 이야기들을 나누고는 오늘 맥스 바에 뭘 입고 갈지 의논했다.
샌디는 옷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옷차림엔 뭔가 섬세한 자기만의 색깔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딱 그녀의 옷이다 싶은 블랙 드레스가 몇 벌 있었는데, 킹스로드 거리에서 유명한 디자이너 오시 클라크가 만든 옷이었다. 목이 많이 파이고 긴 소매에 바닥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드레스였다. 심이나 패드를 넣지 않았지만 살짝 달라붙는 느김이었다. 샌디의 패르소나와 완벽히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가끔 그녀의 옷장을 통째로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반항적 기질을 타고난다. 낸시 밀포트가 쓴 젤다 피츠제럴드 스토리를 읽으며 그녀의 반항정신과 내 기질이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어린 시절 가게 쇼윈도를 지나치며 어머니에게 왜 저 유리창을 그냥 발로 차 깨부수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고 그런 규칙을 지켜야만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일정한 규칙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 충동을 억제했고, 그런 에어지를 창조적인 예술 행위로 바꾸려 애썼다. 하지마 ㄴ여전히 정해진 규칙에 대한 반항심은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로버트는 샘의 부를 사랑했고, 샘은 로버트가 자기 돈을 사랑하는 걸 좋아했다. 돈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주된 매개였긴 해도, 둘은 다른 곳에서도 관계의 의미를 찾았다. 각자 바라던 것을 상대방이 갖고 있었고, 그런 식으로 서로를 보완해갔다. 샘은 마음속으로 예술가가 되길 열망했지만 재능이 없었다. 로버트는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관계를 통해 상대방의 성취를 맛봤다. 말하자면 패키지 같은 관계였다. 서로를 필요로 했다. 예술가는 창작을 하고 후견인은 예술가를 도움으로써 창작에 참여한다.
내가 보기에 두 남자의 결속은 잘라낼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의 결속은 서로를 강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지만 함께 있을 땐 부끄럼 없이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였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샘과 함께 있을 때 로버트는 자기 본연의 모습일 수 있었고, 샘은 그를 비판하지 않아다. 샘은 절대 로버트의 작품을 자기 뜻대로 한다든가 취향에 안 맞는 옷을 강요한다든가 권력의 도고루 이용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무드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
“필름의 내러티브를 보고 있자니 로버트와 내가 자주 토론하곤 하던 주제가 떠올랐다. 예술가는 신이 내려준 본능적이 감각으로 창작하려고 하지만,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한다. 창작을 하려면 물질세계에 몸담아야 하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 현실적인 창작의 문제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내가 곁에 있으면 그가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로서도 자포자기 하는 마음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었지만, 로버트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홀로 안간힘을 ㅅ다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다니 부끄러웠다. 그는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과학에서 부두까지, 기도 말고는 모조리 다했다. 그점은 적어도 기도만큼은 내가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끊임없이 그를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그에게서 생명만은 빼앗아가지 않기를, 견딜 수 업슨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를 기도했다.”
의도하지 않게 수잔 손택의 책을 다시 읽어 가고 있던 때에 (연속으로 몇 편을 읽을 작정으로 ) 비슷한 시대 같은 도시를 살고 있는 전혀 다른 캐릭터인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즈가 눈에 들어 왔다. 솔직히 말하면 패티스미스는 나에게 ‘우와'의 대상은 아니었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녀에 대한 내 감상이나 인상이 크게 변하지 않은 걸 보면 이 책이 가지는 무게감은 2010 아마존 최고의 책 베스트 10 (근데 정말 최고의 책 베스트라고? 책에 써져 있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다 보니 좀 아이러니하다) 정도로 느껴진 거 같다. 
하지만 6070년대의 뉴욕을 생생하고 거친 목소리로 옮겨 놨다는 점에서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고감도 필름과 저감도 필름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찍어낸 뉴욕의 스냅사진같은 자서전. 동지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예술적 갈증이 문장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시기가 달라진다고 해서 애정이나 열정의 농도가 옅어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자신만의 정답을 향해 저공비행을 하며 대기를 맴도는 것 같은 분위기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 그녀의 삶이 가파르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순간에 오히려 담담해져, 아찔한 변화들에서 오는 부수적인 충격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도 인상적이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라는 연약하고 불완하지만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천재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로가 가진 가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끌어 안을 수밖에 없는 끌림과 숙명을 가진젊고 유약한 두 청춘의 성장기는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각도에서도 참 아름답다.
사랑의 결이 꼭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다는 것. 사랑의 정의는 남녀간의 관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 역시 정말 아름답다. 섹슈얼리티와 릴레이션쉽의 문제를 완벽하게 잘라낼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은 분명 존재한다. ‘초월'이라는 단어는 아무데나 쓰고 싶지 않은 단어임에도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초월적 사랑'이라는 말 이외의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도파민이나 에스트로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연의 실타래가 서로를 끈끈하게 묶어 주고 있다고 믿는,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라고 믿는 그런 관계가 있기도 하며 그런 관계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게 메이플소프라니!!!!!!
 그녀의 삶은 6070년대의 뉴욕을 대표하던 키워드들. 이를테면 앤디워홀, 록, 빈티지, 히피, 집시 그 자체이며  그 키워드들에 스스로 색을 입히고 불을 집혀왔다. 68 혁명이 온 세상에 널리 뿌린 ‘반항'과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온 몸에 문신 새기듯 살아왔지만 스스로가 어떤 ‘키워드'를 만들어 내는 파괴력은 (앤디워홀이나 도널드저드가 그랬듯?) 조금 부족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나 빛난다. 굶주림과 헐거벗음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가진 것이 없어도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값싼 장신구에서 느껴지는 초라함,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그리고 실질적 허기, 뛰어넘을 수 없는 계층적 한계에 굴복하지 않는 ‘록스피릿'과 ‘저항의식' 그 자체가 그녀였으니까.
 모자람을 따뜻함으로 채울 줄 아는 삶과 사람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부족한 자신을 괄시하지 몰아세우지도 않고 보듬을 줄 아는 자존감이 그녀를 빛나는 사람으로 만드는 마법같기도 하다.
마법을 믿는 사람, 마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내려지는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축복을 누렸던 그리고 여전히 누리고 있는 그녀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즐거움.
 너무 풍요롭게, 그래서 익숙하게 여겨왔던 내 생활의 여과분들을 부담이라고 느끼지 말고.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면서, 채워지지 않는 나의 허기와 갈증들을 내가 가진 애정과 열정으로 채워가는 내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내가 읽어내는 시대의 키워드를 나는 어떤 식으로 소화할 것이며 또 그 키워드와 어떻게 호흡할 것인지도 고민해볼 문제다.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이 영원하 로맨스의 시작이라고 말했던 오스카와일드의 말이 떠오르는 밤. 주말 내 이 책을 잘 읽어서 다행이다.
 엄마에게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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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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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건축, 니시자와 류에
열린 건축, 니시자와 류에
1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경희를 기다리면서
“사회는 한 사람만으로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자긴의 의견을 말라고 그것을 들은 사람이 “ 나라면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사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제안하는 개인이 모여 비판과 공간을 반복해간다. 그렇게 개인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사회다. 그런 의미에사 각자가 그들 나름대로의 감수성과 의견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건축과 가구가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발생하는 르코르뷔지에의 공간, 그곳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인간의 삶의 기쁨입니다. 매우 쾌락적이며 인간적이고, 동시에 근다의 생생함을 겸비한 풍요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근대 건축이 다른 세기의 건축과 어떻게 다른지를 나타난 커다란 재산 중 하나입니다”
“ 현대다움이란…
다양성이 하나의 키워드가 됩니다. 모던 스타일이라는 것은 매우 형식성이 강한 디자인인데, 순백의 볼륨이나 수직선, 수평선처럼 한 종류로 맞추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투명성이라는 과제가 있습니다. 투명성이라는 개념은 모더니즘에서 발명된 것이 아닌 더 길고 오래된 역사적 과제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과제라는 것은 련대의 과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어디까지나 우리의 삶의 방식과 감수성, 가치관이 원하고 바라는 디테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관와 연결되지 않는 건축을 무리하게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대단한 건축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자연스러운 상태, 현대의 감수성 그 자체 같은 건축을 지향하고 싶다. 그것은 건축 전체의 사상이이도 하고 디테일의 사상이기도 하다.”
스타일이란 그 사람만의 강한 가치관."이런 식이어야 해”
“그저 같은 말이 반복되는 가사를 덤덤히 반복하는 딜런의  텅 빈 목소리에 압도되어 그 여름은 거의 으 노래만 들으며 보냈다. 그때까지 나에게 영어는 조금도 깊이가 없는 언어였다. 어미도 없고뢀용도 없는 너무 단순한 언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언어가 이렇게 보편적이고 심원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점니 놀라웠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는 단순함이 반대로 복잡한 것을 풍부하게 그러내고 있었다. 그 노래는 점차 신체화 되었고. 이를 깨달았을 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이 역사와 문화의 문맥이 다른 사람에게나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오히려 르코르뷔지에라는 존재의 크기를 이야기한다고 본다.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보면 그 거칠고 야만스러운 건축 방식에 감명을 받게 된다. 그와 동시에 생생한 정신, 삶의 기쁨과 같은 것이 건출 전체에 넘쳐흐르는 부분 역시 감동적이다. 그의 거눅은 항상 쾌락적이며 관능적이다. 우선 그가 만든 여러 주택이 그렇고, 주택이 아니더라도 회사나 교회, 회의장 같은 공공 건축에사도 르코르뷔지에아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바라며 쾌락을 추루한 결과가 직접적으로 건축에 드러난 것이다.
르코르붜지에의 맹렬한 건축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건축 방법에는 어딘가 덧셈 같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고는 한다. 척척 더해가는 다이내믹함, 거친 박력이라고 할까. 더하거나 빼면서 마치 창조와 파뢰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처음부터 전체 계헥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야말로 현재진행형의 예술 창조가 거기에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르코르뷔지에 개인의 거대한 재능을 느끼는 ㄷㅇ시에 굉장히 유럽적인 건축 창조의 자유도 느낀다. 그리고 이 다이너미즘을 통해 인간이 사물을 만드는 행위의 근사함과 인간이 살아가면서 공간을 만들고 공간을 사용하는 항위의 대단함와 기쁨을 강렬하게 느낀다.
기능이나합리선 구성 방법 토지 같은 여러 가지를 모드 초월해 자유로 향하는 르코르뷔지에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많는 온기를 얻었다.
건축사 전체를 보아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좀재를 건축 창조의 중심에 둔 예는 그 이전에도 아후에도 없었다. 또한 인간 존재를 중심에 도고 이렇게 거대한 건축을 창조한 사람도 없었다.”
“생생함이 느껴졌어요. 그 후 몇 군데를 더 돌아보고 좋다고 느낀 점이 있는데, 우선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일본에서 흑백사진으로 보던 것과 달리 거칠고 삶의 기쁨 같은 것이 건물 전체에사 흘러나와 놀랐습니다. 빌라 사부아도 모든 공간, 모든 방에 삶의 기쁨이 있었고, 부엌이나 욕실 같은 곳에도 생생한 생활 모습과 인간의 풍요로운 삶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20세기 초의 생생함은 물온, 새로운 시대의 삶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게 강하게 전해졌습니다.”
니시자와 류에의 작품은 웹상이나 건축서적에서 질릴 정도로 봤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 그의 건축물에 가 본 적은 없다. 뭐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건축가 작품을 ‘직접’ 보는 엄청난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빌리온으로 나마 접했던 후지모토 소우나,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안도다다오, ‘방문'의 가치가 있는 렌조 피아노, 렘콜하스, 장푸르베, 르코르뷔지에 등등… 아껴 놓고 있는 줌터를 제외하면 대 부분은 직접 내 두 발로 밟아 보았고, 생생한 두 눈으로 보았다. (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 미스의 시카고까지)
니시자와 류에의 작품들 역시, 가보고 싶군 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가야지! 라고 결심을 하게 되는 어떤 결정적 계기가 부족했는데 그게 뭘까를 생각하면 차별성의 이슈가 가장 크겠다. 프리츠커 상을 받기는 했지만, 나에겐 아직 ‘거장'의 느낌이라기 보다는 열정과 야심 가득한 건축가로 읽혀지고 있었으니.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늘 살까 했지만 살 만큼 좋으냐 라는 질문엔 약간 머뭇거리게 된다. 좋다! 라고 생각하지만, 후지모토 소우의 글에서 느꼈던 ‘어쩜 좋아’ 라는 간질거림이 덜했다. 안도 다다오 글에서 느껴지는 강한 박력감도 덜했고, 르코르뷔지에 글에서 느껴지는 선각자의 밀도, 줌터의 글에서 느껴지는 사려깊음이 조금씩 결여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끝끝내 이 책을 사지는 않았다.
사실 읽는 내내 좋았다. 좋다, 글이 참 좋다, 생생하고, 자연스럽고, 담백하다! 라고 생각하며 휴대폰 메모장을 켜 좋은 구절을 열심히 적었지만. 생각의 굵고 진한 곡선, 그 만의 건축 어휘라고 불릴만한 독창성이 조금씩 조금씩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엄청나게 좋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건 아마도 이 책이 애초에 어떤 출판을 목적으로 했음이 아니라, 프리츠커상 수상에 맞춰 급하게 계획되어 출간된 이유도 한 몫 하는 거겠지만. 어쨌든, 나노하우스나, 디진, 월페이퍼 등에서 수 없이 봐오던 그의 작품에 대한 이런 저런 사유들을 읽어내는 것은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동양인만이 느낄 수 있는 서양 건축에 대한 소회들을 공감 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었던 점은 이 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검은머리로 아시아적 기후와 지형에 익숙해져 그 특유의 고온다습한 도시를 살아내는 감각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인식에 박혀 있다. 엄청난 서양의 건축물 (그것이 역사적 건축물이던 현대 건축물이던), 시에나나 피렌체 같은 비현실적인 중세 도시, 혹은 파리와 암스테르담같은 계획 도시를 볼 때면, 그 도시의 본질적인 형태 혹은 존재에 대해서 동양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환상'의 꺼풀을 기고 볼 뿐이며, 그 형태의 근본적인 사유(라고 쓰고 나중에 수정하고 싶은데)에 서양인들처럼 가깝게 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하려고 해도 결국 그것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듯,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태생적인 고민 없이 자라온 우리에게는 도시적-건축적 어휘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아말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 경우는 그렇다.
하여, 니시자와 류에가 썼던 ‘열린 건축'의 개념은 그 개념의 시대적 농밀함을 떠나서 나에겐 더 깔끔하고 직접적으로 와닿았고. 그의 사고처럼 명료하고 담백한 문장이 유난히 기분 좋게 책을 읽어내려가게 했던 꽤 괜찮은 책이었다. 
지난 독서 일기들을 보니까 결론이 늘 허망하게 났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쯤되면 슬슬 질려서 아무 말이나 쓰는 것 같다. 책에선 마지막 페이지를 제일 중시하면서 정작 감상의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별로다.
열린 건축의 경우 ‘사 봐야지!’ 하는 책은 아니였지만, 만약 그가 작정하고 건축에세이를 쓴다면 나는 반드시 사 볼 생각이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좋은 목소리는 언제나 더 듣고 싶고 더 귀기울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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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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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12월,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그는 점점 더 어두워만 가는 무감각 속에서 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그를 그 무감각 상태에서 이끌어내고 그의 가슴속에 괴로운 그 무엇을 불러 깨울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
“우리는 공원들을 지나 뉴욕 가로 접어들었다. 거기 강변로의 나무들 아래서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귾어진 관계들을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먼셔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깆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도 지니지 못했다"
“그때 내 속에는 무엇인가  털컥 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방의 정경이 어떤 불안감을, 이미 내가 경험한 일이 있는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저 건물의 전면들, 인적이 없는 거리들, 황혼녘에 보초를 서고 있는 실루엣들이 예산ㄹ에 익숙했던 어떤 노래나 어떤 향기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시간이면 자주 꼼짝도 하지 않고 여기 가만히 서서 감히 등불도 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노리듯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무제브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고장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어둠이 전나무 잎들을 간신히 뚫고 퍼지는 하얀 솜 같은 안개로 차츰차츰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무도 우리를 찾아서 여기까지 올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었다. 우리는 점차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도회사람 옷차림까지도. … 모두 안개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혹은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
“또다른 밤에는 눈이 내렸고 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드니즈와 나는 결코 이 곤경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 깊은 골짜기 소겡서 포로였고 눈이 차츰차츰 우리를 파묻어버릴 것이었다. 지평선을 가로막는 그 산들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었다. 엄청난 당혹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럴 때면 나는 문을 열었고 우리는 발코니로 갔다. 나는 전나무 향기가 배어 있는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는 더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일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풍경 속의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주위의 성당 지붕 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에, 골짜기를 뚫고 뻗은 길이 긋고 있는 더욱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파묻혀 질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프레디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우리들의 사진을 무의ㅣㄱ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얼니 시절의 게이 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떄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앙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감상을 적기에 너무나 적합한 날씨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옮겨 적다 보니 지우개로 슥슥 나를 지워가는 느낌이 들어 아무런 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 해가 시작되자마자 들이 닥친 올해의 첫번째 프로젝트를 마감하고 맞는 첫번째 주말 아침이다. 독서일기를 쓰려고 쌓아둔 책들 중에 뭐를 먼저 쓸까하다가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 집어 들었다. 
책을 챙기고, 바나나 두개를 먹었고, 귤도 한 개 까 먹었다. 바나나는 리즈와 루시와 나누어먹었는데, 말랑한 질감의 바나나를 짭짭 소리를 내며 먹는 두 강아지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바나나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조금 쌀쌀해 녹차를 끓이고, 사기 주전자에 담아와 침대 옆에 두었다. Pollini plays chopin을 들으면서 이따금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눈을 감고 기대면서. 듣고 있다. 지금 나오는  연습곡 17번 memories도 정말 좋다. 
 모디아노의 글을 읽다보면 내 스스로가 수중기 속에 갇혀있는 어느 뿌연 실루엣처럼 느껴졌고, 그 묘연한 실루엣처럼 나 자신의 윤곽도 희미하고 아스라하게 바래져가는 것만 같다.
지워지지 않는, 바스라지지 않는, 잊혀지지 않는 한 개인의 윤곽이란 무엇일까?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고, 뿌연 연기에 가려지지 않고, 또렷하게 자신의 선과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의 단단한 존재감이란 정말 있는 것일까? 나의 존재감을 구성하는 것은 현재의 나 자신인지 아니면 내가 자라고 지나온 흔적의 총합인지를 제대로 분별해내는 일은 어렵다.
그 어려운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게 모디아노의 글이다. 그의 글은 단단하지 않다. 조금만 힘 주어 집으면 곧 헝클어질 것처럼 유약하고 또 습하다. 하지만 그 유약함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성질 덕분에, 그의 문장은 정말로 촉촉하게 흡수된다.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온실속의 식물들처럼, 그가 만든 어떤 분위기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것이다. 과거라는 불확실성, 기억이라는 불완전성 그런 성질들을 가장 뚜렷하게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문장의 특징이다. 
그의 그를 읽다보면, 부정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불(不)의 성질을 통해 결국 한 자아가 찾아가고자 했던 것이 개인의 기억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의 윤곽이었는지 혼동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내 경우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나의 윤곽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몸부림이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은 아닌데. 어쩐지 단어가 과하다.
그런데 정말,  이번에 보고서를 쓰면서, 뭔지 모르게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몸부림이 먼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흔적을 남기는 한 뼘의 성장으로 보일지 되물어 보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엄청난 대의를 위한 일도 아닌데다가, 그렇다고 업적이 되어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일도 아니지만, 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나 낼법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작은 노트북 앞에서 낑낑 거리며 피피티로 100장의 보고서를 쓰고 있었던거다. 어쩌면 내가 했던 고민들, 눈을 감고 차근히 생각해보던 일들의 수고스럽지만 애정있는 가치보다, 이렇게 보고서로 남아버린 실체와 형체가 더 또렷한 나의 윤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를 이루는 것들, 나의 형체를 만드는 일들은 어떤 것일까?
 어딘가에서 주어담은 caramelize 된 칭찬들이나 값싼 인정들도 차곡차곡 쌓이면 나의 결을 쌓이게 하고 그 결들의 유곽이 내 형태가 되는걸까? 아니면 그 역시, 수분기를 빼앗겨 말라서 비틀어지는 낙엽이나 활력을 읽고 시들어가는 꽃처럼, 내 안의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라는 개인을 시들지 않고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담는 조각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 ‘몸부림’ 이라고 말했던 (말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낑낑 거리는 안간힘을 계속 내는 일이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나만의 기운일 지도 모르겠다. 고민하려고 앉아있던 시간들, 조금이라도 더 의미있는 생각을 하려고 웅크렸던 때가 나 스스로에게는 더 나답다고 느껴진 시간들이었으니까.
 한 뼘이 아닌 반 뼘의 성장이더라도, 아니 성장이 아닌 그저 동작에 지나지 않은 몸짓에 불과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어떤 빛이 내 존재를 증명해준다면 나는 그렇게 하는 편이 옳다고, 더 쉽다고 믿고 싶다.
갑자기 울컥해 횡설수설했지만 소설에 대한 감상으로 돌아오면…
모디아노의 소설은 늘 마지막 한 줄이 책의 온 문장을 덮어버리곤 한다. 저녁 빛속으로 지워져 들어가는 개인의 삶. 그 하찮고, 연약한 개인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윤곽을 (설령 그것이 맺음이 있는 윤곽이 아닌 그저 열린 선일 지라도) 혹은 모습을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짓고 싶다면 아직까지 ‘생기로 반짝이는 퍼득임’ 말고 별다른 묘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퍼득이고 또 몸부림치며 살고 싶다. 그 몸부림이 아름다운 선을 남기면 더 좋겠다. 그렇기에 작년에 이어 계속되는 내 삶의 화두는 생기다. 신년의 내 목표는 생기있게 살기 균형있게 살기. 나의 생기는 더 애정있게, 더 오랫동안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려고하는 힘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잘 부탁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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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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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박해천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박해천
12월, 부장님께 빌려드렸던 책을 돌려받아 다시 읽어봄
- ‘서북 모던’ 과 이층양옥 연속체
“길가에서 축대 위의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면 그너머로 정원의 상록수들이 울창함을 뽐내고 그 사이로 2층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집은 전형적인 고급 이층양옥이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가보면 약간 이상한 모양새다. 집이 “다만 넓기 위해 넓기 떄문"일까? 아직 손때 묻지 않은 고급 가구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난잡하게 뒤섞여 있을 뿐 ‘서로 관계를 맺을 맥락"을 찾아보기 힘들다. ...... 이유는 간단했다. 김복실 여사가 내 종족이 요구하는 생활양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의 집 안 풍경을 모방하는 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위 공무원 집에서 본 대로 응접실 벽에 비단을 바르고, 어느 기업 사장의 집에서 본 추상화와 엇비슷한 싸구려 그림을 구입해 집 안에 걸어놓는 식이다. 그녀는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한 후 재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첫 시작은 세 들어 살던 방 두칸짜리 낡은 양철 지붕 집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아랫동네의 방 다섯 개짜리 제법 큰 한옥이다. 이곳에서 ‘현대적인 문화생활'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짱아 엄마의 몫이다 제일 먼저 아침밥의 식단이 바귄다. 이른 아침이면 따뜻한 서울우유가 두 병씩 배달되고, 마가린에 구운 토스트 냄새가 온 집 안에 번진다. 쌀밥은 더 이상 아침 밥상 위에 오르지 않는다. 다음 차례는 냉장고다. 짱아 엄마는 냉장고를 집 안에 들여놓은 뒤 콜라나 사이다, 제과점 케이크나 파인애플 통조림 등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가득 채워 넣는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은 쉼멜 피아노의 몫이다. 피아노야말로 현대적 사물의 위계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가구이면서, 동시에 실내를 울리는 밝고 고운 소리로 소유주의 문화적 교양 수준을 드러내 보여주던 악기가 아니던다. 이제 짱아 아빠는 아침마다 딸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출근길에 나선다.
새로운 일상의 질서가 이러게 집 안��� 안착하자 이제 짱아 엄마가 본격적으로 외출에 나선다.”
“우리의 ( 이층양옥) 소유주들이 도시화산업화라는 두 겹의 변화를 경험하며 제각각 상스오가 하강의 궤적을 그려가던 시점,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역시 고급화와 대중화라는 이원화된 전략을 구사하며 활동반경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초반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남 지역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들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상의 질서를 도입하며 주거 문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게임의 규칙을 바궈놓고 있었다. “
“먼저 여대생이 말한다. 소학교 시절에는 잔 다르크가 되고 싶었고, 중학생 시절에는 음악가의 분이이 되고 싶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은행장의 부인이 되고 싶었으며, 대학 입학생 시절에는 건축 기사의 부인이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아무의 부인도 되고 싶지 않다고. 남자 대학생이 답한다. “용기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 속에서만 보여주는 물건"이며 자신의 세대는 현실에서 용기를 보여줄 기회조차 박탈당했다고. 여자는 세계 챔피언에 오른 권투 선수 정도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한국 남성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응답한다.”
- 쾌솔 질주 본능, 포니 포에버
“ 정부와 국민이 한 몸으로 공업 입국의 전면 작전을 전개해 도달해야 할 조국 근대화의 미래, 전 국민이 증산-수출-건설을 목표로 온 힘을 다해 당도하게 될 그 미래에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신식 부엌과 단독주택의 자리가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군인 출신 대통령은 이 교서에서 내구소비재의 대량생산과 함께 국산 자동차 연간 3만대 생산을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
“그는 흑석동에서 한남동으로 하숙집을 옮기는 친구의 짐을 옮기기 위해, 택시에 처음으로 탑승하게 됩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너는 택시 안에서 “차창으로 밀려드는 강바람"을 맞으며, 반포 나루의 강 풍경을 바라봅니다. 버스와는 비교도 하 ㄹ수 없는 안락한 교통수단은, “도시의 불빛과 하늘에 뜬 초저녁 달빛이 서로 희롱하며 어우러진" 강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은 “쾌적한 쿠션에 몸을 묻고 차창으로 지나치는 사물의 속도감에 취해 말을 잊"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읊조리듯이 조용히 말합니다. “우리도 자기 승용차 타고 다닐 그런 세월이 올까?” 다른 한 명이 답하지요. “언젠가는 올 거야. 우리 민족은 저력이 있어"
드디어 그 민족의 저력이 발휘될 시점이 온 것일까요?
삼십대에 접어든 그들을 수신인으로 삼는 ‘마이카 시대'의 청사진이 갑작스럽게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욕망도 그저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오감의 차원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지요. 아쉽게도 그들의 미각은 겨우 서른 살 나이에 “일찌감치 지치고 늙어버"렸지만 말입니다.”
“소설가 정이현의 표현처럼 “화목한 부부와 귀여운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포니 투' 자가용의 앞뒤에 다정히 나눠 타고 외식하러 나가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중산층으로 불리길 소망하는 모든 엄마들의 로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아등바등하는 삶으로부터 탈피한 남부럽지 않은 80년대식 중산층의 세계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질 채비를 마쳤던 것이지요.
제가 중산층 가족을 연결 고리로 삼아 당신과 함께 구축한 세계, 바로 그 세계에서 우리는 컬러텔레비전과 에어컨과 시스템키친과 나이키 운동화와 가든식 갈빗집과  호텔 뷔페와 대형 교회와 롯데월드와 88올림픽 등의 입체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물질적 풍요를 즐길 줄 아는 새로운 일상의 질서를 창조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
“운전선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기계적 인터페이스는 운전자에게 차량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뿐만 아니라 조작의 인터랙션을 통해 차체와 일체화된 감각을 제공했습니다. 초보 딱지를 떼고 차량을 자기 신체의 확장으로 느끼기 시작한 운전자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지요. “차를 탄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참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차를 타지 않았을 때는 생각지 못했던 전혀 다른 경험들이 새록새록 생"긴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운전 감각의 습득을 통해 경험하는 새로운 채널을 개통하게 된 것이었지요.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이제 ‘운전하는 시선'이라는 현대적 윈도우를 통해 대중교통 이용자나 거리 보행자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도시의 경관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라고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윈도우 내부에서 공간은 귾임없이 확장할 것이며 장소와 장소는 계속 연결될 것이고 머릿속에 저장되었던 도시의 지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갱신될 것이며 시간관념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문화 차원으로 시선을 옮겨보는 것은 어덜까요?...... 당신은 이동의 미디어로서 남에게 뒤쳐지지 않고 도시의 공간을 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저는 집 안에서 욕망의 허기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교육시켰던 반면, 당신은 집 바깥에서 욕망의 방향과 속도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와 당신의 소유주들 상당수는 자신의 전 생에에 걸쳐서 소비문화의 역사적 계통 발생 과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이들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드럼통의 풀빵에서 출발해 마침내 아파트의 마이카에 당도한 이들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그들이 중산층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일상의 질서와 욕망의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감각의 논리를 현대화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일상의 질서란 새로운 욕망의 구조를 요구하고 새로운 욕망의 구조는 새로운 감각의 논리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일사의 질서를 만들어 나갔으며, 소비의 중심축으로서 욕망의 구조를 재편했고, 마지막으로 일종의 과외 선생으로서 감각의 현대화를 도왔습니다."
- 집 안의 괴물들
“물론 그도 자신이 성취한 중산층의 삶에 짐찜한 구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같이 배울 만큼 배운 대졸 사무직 종사자들이 지난 시절 독재 권력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양도하고 그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십 평생을 통하여 이룩하고 지켜온 보석같은 가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
- 마지막 코리안 스탠더드 : 신도시 - 이마트 - 중산층
“P씨 역시 ‘80년대’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산층'이라는 소박한 꿈은 하숙방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어야만 하는 처지였다. 여기에는 ‘운동권'이라고 불리던 선배나 동료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입박으로 내지는 안항ㅆ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미래로 중산층을 꿈꾸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P씨도 민족, 민중, 계급과 같은 이념적 표상에 비하면 ‘중산층'이 지나치게 초라한 기호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게다가 그 기호는 대의나 변혁과는 무관해 보이며 ‘현실 안주'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P씨같은 지방 출신의 명문대생이 목표로 삼을 수 이는 개인적 삶의 형태로 중산층만큼 현실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 ‘민주주의'의 무조건적 신봉자가 되기에 그의 앞에는 너무 많은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념에 무관심해 지기로 작정했다. 이십대의 그를 움직이던 동력에서 ‘이념'을 빼고 나니, 남은 것의 8할이 콤플렉스였다. 바로 촌놈 콤플렉스였다. “
“ 대형 할인점이 제공하는 경험 형식 떄문이었을까? P씨는 이곳에서 카트를 밀기 시작한 이후 ,어느 순간부터 자기 정체성의 골격이 변형되고 있다고 느끼기 작했다. 돌이켜보면, P씨는 철든 이후 줄곧 개인과 사회라는 개념의 격자 사이에 국민, 민족, 민중, 시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렌즈를 차례대로 삽입해보며 자신과 세상의 거리를 가늠해보곤 했다. 그때마다 초점이 흐릿한 안경을 착용한 듯한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신도시에 거주하기 시작한 후에는 ‘보통 사람'이라는 닉네임에 만족하면서도 ‘대기업 봉급생활자' ‘ 명문대 출신의 베이비 붐 세대', ‘신도시 아파트 거주자', ‘야권 성향의 유권자', ‘ 마이카 운전자’등과 같은 다양한 지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직도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대형 할인점에 몇 차례 방문한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P씨는 카트를 미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비자-고객'이라는 정체성이었다. 마치 종교에 귀의해 세례를 받고선 새로운 세상에 눈뜬 것만 같았다. 그 세상은 총천연색의 고해상도로 명료하게 욕망의 이해관계를 표시하는 세상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선명하게 말하고 있는 모더니티가 어째서 ‘아수라장'과 만났는 지는 책을 다 덮을 쯔음이 되어서야 끄덕여진다. 질서-규율-규칙-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같은 ‘근대화'를 아수라장이라는 단어로 수식해야만 했던 이유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성에 대한 각성을 상실하고 효율과 상승만을 강요받으며 전진 혹은 질주했던 우리의 근대화는 아수라장일 수밖에 없다. 전후의 어수선함을 수습하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왔던 발걸음 사이사이에는. 상실한 합리성, 도덕성, 양심, 성찰의 크기만큼의 균열이 생겨나고 그렇게 잔뜩 비틀어진 한국식 모더니티가 탄생한다.
 그 아이러니를 설명하기 위한 묘사는 사실적이며 설명은 서사적이다. 잔혹하리만큼 냉담한 현실들이 문학의 인용을 통해 묘사되는데도 오히려 생생하다. 그 생동감은 박해천 글 특유의 구성력에서 나온다.
 내가 살아보지 않았지만 그 잔해가 여전히 내 발끝에 와서 부딪히고 있는 연속적인 시대에 대한 공감을 자아내는 그의 치밀한 구성덕분에 글을 흥미롭게 읽어가게 한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즐겁게 읽게 된 키워드는 세가지 였는데   1. 일상의 질서 2. 중산층 3. 콤플렉스 가 그것인데 1번은 내게 특히 중요한 부분이라 길게 써보자면.
1. 일상의 질서 
명확하게 ‘질서'라는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지만, 일상의 결, 일상의 질서 즉 일상의 리듬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연구하고 싶은 주제다. 
소소한 일상, 소박한 일상 이라는 의미부여로 어설픈 만족을 하며 일상성에 함몰되어가는 현대인의 일상은 단조로움의 저주에 빠져버리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출근과 퇴근사이의 시간은 블랙홀 같은 무언가에 빨려들어 간 공백처럼 느껴지고, 퇴근후의 삶은 그 블랙홀을 견뎌내기 위한 재충전의 시기처럼 해석된다.
회복해야 하는 것은 소소한 일상이 아니라, 일상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일상, 새로운 축제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며 부여받은 일상을 스스로 깨 부술 수 있는 용기 역시 우리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는 주제다. 
질문 없이 답습되는 반복적인 일상을 의심없이 수용하고. 커피 한 잔의 여유에 일상의 행복을 녹여내며, 반란이나 반동을 꿈꾸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어설픈 낭만의 굴레에 묶어두는 잔인한 일상성의 극복이 내가 깊게 공부하고 싶은 부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일상의 질서'는 너무나 흥미로웠다. 우리가 그토록 견고히 만들어내고자 했던 질서. 혼란 없이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내 생활의 이정표가 테크놀로지, 사회적 시스템에 의존하여 구성되고 있는 것이 오늘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이 일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또 규제하는 오늘날에 대해서도 괜히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2. 중산층, 3. 콤플렉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어 좋았던 부분은, 내가 이마트와의 여러 프로젝트, 홈쇼핑과함께 했던  ‘홈 스위트홈'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들을 모두 마치고 난 후라 공감의 깊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산층의 스탠다드는 높아져만 가고, “본데" “본것"의 퀄리티는 점점 더 글로벌 스탠다드를 향해가고 잇는 21세기.
조기유학, 어학연수, 교환학생, 싸이월드, 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 카페, 페이스북, 카카오톡, 인스타그램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 (해외, 남, 타자) 와 내부( 국내, 내부, 동질적 집단)를 나누어가고 있는 우리.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부의 목소리를 검열하면서 보여주기와 훔쳐보기를 계속하는 우리.
이런 것들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류층 (=건물주)이라는 불로소득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클래스로 상승할 수 없는 중산층은, 그 안에서도 ‘해외파'’국내파'’강남'’강북'’망원동'’이태원'’서촌'’힙스터'’인디”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코드를 생성해 (혹은 해시태그를) 스스로를 구분지어도. 어떤 코드로 그들을 태깅하더라도 결국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여유 있는 혹은 소소하게 행복한 바로 지금의 ‘한 컷'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한 컷들로 패치워크된 어떤 ‘스타일'을 이루는 인스타그램의 한 판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다른 ��드들과 별 다를 게 없는. 달라지고자 노력했지만 묘하게 같은 쳇바퀴를 돌고 있는. “카페/클럽/맛집/핫플레이스/국민아이템”를 반복하는 21세기의 오늘일 뿐이다.
보여주고 싶은 로망과 보여줄 수 없는 현실 사이를 타협으로 메우고 있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중산층의 모습은 결코 완벽하게 재현되거나 실현될 수 없는 로망을 실체 없는 이미지나 한 컷으로만 실현하고자 하는 콤플렉스 그 자체가 아닐까. 
ㅠㅠㅠㅠㅠ써놨던 글이 다 날라가 스스로 엄청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썼던 글을 다시 복기하려니 무척이나 재미가 없지만
내가 세상을 좀 더 알고 이 책을 읽게 되면 또 어떤 면들이 읽힐지 기대되는 참 좋은 참 재미있는 책이다.
ps
이렇게 좋아하는 책의 작가인 박해천 교수님을 어느 봄날 회사에서 초청하여 만남! 소중한 점심까지 함께 먹음! 책보다 훨씬 따뜻하면서 인간적이고 사려깊은 분이여서, 세상엔 이런 어른도 있구나 라며 감동감동.
좋은 책을 쓰는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는 법은 없지만
ㅠㅠ 좋은 교수님을 만난 좋은 제자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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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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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12월, 주말의 침대 독서
 “베란다라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두 사람은 보이는 것 너머로 관객을 이끄는 서사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두 가지 형태의 시각적인 사건들 - 공간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이 중 하나가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잏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그림의 기하학이 우리를 그림 속으로 불러들이고, 그림의 기하학이 시들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다시 서사의 가능성이 제자리를 주장하며 다가오는 것이다. “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거기서 멀어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 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말해준다."
“나는 앞에서 호퍼의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의 빛은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마치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잉태되어 고른 색조로 우러나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여기서 색조란 명암을 포함한 색의 효과를 의미한다) 화가인 내 친구 베일리가 언젠가 호퍼의 형태는 빛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난 그 말에 동감한다. 호퍼의 그림에서 빛은 형태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 그림은 형태를 가장한 빛으로 구성된다. 그의 빛, 특히 실내의 빛은 그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신빙성이 있다.
......
호퍼의 빛이 물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인정하듯 그의 그림들이 기록과 기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사물과 사물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기억은 공기나 빛에 대한 기억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대개 실외보다는 실내를 더 잘 기억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호퍼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림 밖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길과 철길은 추측만 할 수 있는 소실점으로 이어진다. 호퍼는 이런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종종 그림 안에 들여놓는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내면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사고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기억된 이미지들이 세상에 관한 지식으로 변하는 것이니까.”
“그림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부동감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화가와 관객이 함께 사진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그림의 특별한 위트다. 바로 우리가 이 그림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해야 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그림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고 그림이 예우해주는 특별한 경우인 것이다. 우리가 소외당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이 순간은 우리의 것이다. 여행을 멈춘 정적 안에서 우리는 다시 멈춰 있다.”
“이 그림은 소원함의 습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한데 그것은 이들 간에 소원함이 존재할 뿐 아니라 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처량할 정도로 안정된 생활 속에 갇혀 있다. 우리의 시선을 그 둘 중 어느 한 명에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있는 문으로 바로 향하고, 문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닫혀 있다.”
“호퍼의 그림은 무척 낯익은 장면들이지만, 볼수록 낯설고 심지어는 완전히 생소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공간 속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데 그림이 말해주지 않는, 우리로서는 추측만이 가능한 어떤 비밀스러운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무언가 숨겨진 것의 존재감, 확실히 있긴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홀로 있음에 어떤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침범하지 않고 목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듦으로써 말이다.
호퍼의 방들은 욕망의 침울한 안식처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지만, 물론 알 수가 없다. 본다는 행위에 수반되는 침묵은 커져만 가고, 이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고독만큼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
호퍼의 작품을 경험하는 데 있어 마크 스트랜드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머무름과 떠남의 반복이다. 예술사적 의의, 기법,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집착대신 그 그림이 한 사람의 영혼에 공명하는 감정의 동요에 귀를 기울이기를 권한다. (공명 ? 이란 단어가 그의 설명에 닿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석한 바는 그렇다)  그렇게 그림에 머무르고 또 그림으로부터 떠나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호퍼를, 그러니까 < 폐쇄된 공간 속에서 낯익고도 생소한 장면들을 연출 혹은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한 장면> 을 풍성하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라고 말이다.
호퍼에 관한 책은 파리에서도 종종 봤지만 사고싶다고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다. 어느 여름 Maison la roche를 산책하고 16구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우연히 들렀던 어떤 교회 옆의 서점에서 3유로에 도록을 팔고 있어 기쁜 마음에 사 왔던 기억은 있지만 그의 작품 해설이 된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베이컨이나 칼더, 자코메티, 파울클레 라면 손뼉을 치며 사서 읽을테지만 (들뢰즈가 쓴 베이컨은 사실 읽어도 모르겠지만) 호퍼는 내가 읽는 감상 그 이상이 필요할까? 라고 의문을 던져왔던 작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특별히 호퍼를 좋아해서 산 책은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호퍼에 열광할까? 이제껏 호퍼를 싫어한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심지어 한국의 광고에까지 등장할 정도다.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한국의 화가는 자신의 작품이 호퍼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사실 거의 그랬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어휘를 반복한다. “고독" 
 모두가 같은 감상을 내뱉도록 하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훌륭한 작가인지는 모르겠다고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그게 뭐 나쁜거냐고 물으면 답할 수는 없었다. 호퍼가 가진 힘은 인정하지만, 많은 부분 과장되었고 지나치게 신격화 된 건 아닌가? 라는 생각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모두 너무나 고독한데, 정확하게 조각되지 않고 떠 다니던 내면의 불안을 속시원하게 고독으로 명징했기 때문일까?
나마저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요상한 나의 심리 너머, 솔직하게 인정하면 호퍼의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자세히 그 그림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그림 앞에서 넋을 놓는 경험은 결코 희귀한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은 중요치 않다. 만약 한 명이라면 그의 표정에 대한 근거를 재구성하고자 주변을 둘러보며 단서를 찾고 있었고, 두 명이라면 관계의 밀도를 상상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 했다. 
그림에서 다 말하고 있지 않은 어떤 서사의 조각들을 작품의 안과 밖을 통해 끝없이 조립해보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빼 놓고는 작품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쓸쓸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짓지 않았을 표정. 자세, 행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의 일상 속 고독의 순간이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세상에 나와버린 당혹감과, 나만이 이 고독감이라는 이불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이 동시에 밀려든다. 보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꽉 막혀있던 쓸쓸함의 문이 갑자기 턱 하고 열리는 경험이 호퍼의 작품이 주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호퍼를 좋아하는 걸까
소박한 감상을 적어내고자 하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나에게 그다지 감명깊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사놓고 미루고 미루다, 다른 책을 사기 우해 읽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앞으로 또 좋은 울림을 주는 책을 찾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12월은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그간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으며 조용한 감상들을 남겨야겠다.
ps
시카고여행 중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nighthawks를 보고 완전 매료됨. 지나치게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 앞에 서면 아무런 감흥이 없을 거라는 예상을 완전히 깨고. 예전에 피렌체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봣을 때 느꼈던 전율,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자아낸 탄성과 마찬가지로 호퍼의 나이���호크는 간만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작품이었다. 
서사적인 작품을 싫어하는 나에게, 이 작품은 전혀 하나도 서사적이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지나치게 시적이고 지나치게 모호하며 그렇기에 산문적이지 않고 운문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작품.
그래서 직접 마주보고, 느끼는 작품의 생생한 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호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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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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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마스다 미리
어느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마스다 미리
11월, 몰스킨을 사러 갔던 어느 주말의 강남교보문고에서 ‘어른'이라는 감각을 마주하기 싫어 미뤄두던 마스다미리의 이 책을 기어코 집어든 날
“ 나는 펜을 들고 일정을 넣지 않는 날을 일정에 쓱쓱 넣었다. 이것으로 오케이. 간단한 일이엇다. 시간이란 것은 거침없이 흘러가지만, 그러나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 달력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하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이 간장 맛있더라!” 하고 가르쳐주어도 아무도 자기 장바구니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 점이 중년이었다. “어머나, 맛있겠다.” “정말,정말.” 일단 흥미를 보이면서도 오랜 세월 애용해온 자기 취향의 간장은 역시 어려운 것이다. 서로의 역사를 인정하면서 다 큰 여고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내 바로 옆에는 반짝거리는 오사카성.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초승달. 활짝 핀 벚꽃과 뜨거운 다코야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하루. 이런 유쾌한 하루가 앞으로의 인생에도 분명 많이 있을 거라고 기대해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실컷 놀았다. 실컷 놀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다음 날에는 마사지 예약을 해둔 용이주도함. 당연하지. 이제 열입곱이 아닌걸. 열일곱 살로는 돌아갈 수 없다. 어른으로 지내는 것도 즐거워서 벼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이를테면 자전거를 타고 역에서 집까지 달릴 때 같은, 그런 날마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누군가가 애정이 담긴 한마디를 건네주던 기억이 소중하게 떠오른다. 대부분 아주 사소한 일이다. 저녁 반찬을 나눠주러 온 이웃집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게, “그림을 참 잘 그리는구나, 아줌마는 그렇게 못 그리는데" 언제나 칭찬해주었다. 이웃 어른 중에는 만날 때마다 꼭, “예쁜이" 하고 말을 걸어주던 즐거운 아저씨도 있었다.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린 것도, 특별히 예뻤던 것도 아니지만 칭찬을 들어서 기뻤다.
……
“제일 뒤에 서고 착하구나"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금세 힘이 났다. 몇십 년도 전의 일인데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친척집에서 열이 났을 때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던 아주머니의 파 냄새 나던 손, 자전거를 타다 굴러서 울고 있을 때 도와준 마침 지나가던 언니의 다정한 목소리. 아버지나 엄마뿐만이 아니라 많은 바깥세상 사람들이 어린 내게 마음을 써주었다. 그런 많은 ‘애정이 담긴 한마디'의 힘이 어른이 된 내게는 가득차 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 뭐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떄 교과서를 지금도 몇 권 남겨 두었지만, 모두 엄마 글씨로 내 이름이 쓰여 있다. 학교에서 괜히 불안할 떄, 그걸 보며 “엄마 글씨다!” 하고 힘을 낸 적도 있었을지 모른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처음 만난 건 오월즈음?의 점심 회식. 홍대에서였다. 저녁에만 문을 여는 악어라는 술집에 특별히 부탁을 해 점심부터 가서 밥을 먹고 나서 근처의 조용한 카페를 찾아 헤매다가 북카페로 갔다. 콤마였던가, 민음사 혹은 다른 출판사에서 하는 카페였던 기억.
1층에는 회사 사람들과 모여 앉았다.  2층에 있는 화장실로 가던 차에 책장에 가득 꽂혀 있던 “괜찮을까?” 시리즈들을 꺼내 보고, 읽어보면 재밌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곤 어느 봄날 주말 언제나처럼 교보에 갔다가,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의 제목을 보고, 북카페의 기억을 되살려 책을 집으면서 근처에 있던 “뭉클…” 까지 같이 사 왔다. 사두고 며칠간 읽지 않다가, 주말 아침 마당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제일 소중했던 봄날.
꺼내서 읽었는데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서, 좋은 부분을 모두 찍어 지혜, 수인이, 경희, 우진이, 모두모두에게 보내주고. 심지어 지혜에게는 주문을 강요하기도 했다. (착한 지혜는 역시 모두 주문해서 함께 마스다미리의 세계로 빠져 주었다) “주말엔 숲으로"와 몇 권의 책은 원희대리님께 빌려드리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녀의 책들을 주문하고, “주말엔 숲으로” 라던가 “어른 초등학생” “전진하지 않는 날도"와 같은 책들은 계속 반복해 몇 번이나 읽었다. 침대 근처엔 마스다미리의 책을 두고, 잠이 오지 않을 때 읽기도 하고, 짬이 나면 몇 꼭지 다시 읽으며 마음을 정돈하기도 한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마스다미리의 글과 그림이지만, 이상하게 미뤄두고 사고 싶지 않았던 책이 바로 “어느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다. 이상하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는 그 감각을 공감하고 싶지 않아, 책 앞에서 망설이면서 구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는 감각 같은 건, 어른이 되었다고 말해버리는 글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다.
어른은 먼 나라이야기라고 선을 주욱 그어버렸던 건 아니었을지.
그러나 어느 11월, 매일매일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주의 주말. 신년 몰스킨을 사러 갔던 강남 교보문고에서, 다른 외국 작가의 수필집을 사려고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반가운 이름. 친숙한 이름과 망설였던 제목의 부조화를 이겨내고, 몇 장 읽어보니 그 시간의 그 때의 나에게 필요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사 왔다.
마스다미리의 글과 그림은 어리숙함과 부끄러움이 담겨 있어서 정말 좋다. 그 부끄러움이 수치심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수줍음인 걸 알아서 더욱 반갑다. 나약하지 않은 겸손함의 이유는 자신을 튼튼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라는 것도 역시 반갑다. 조금은 소심하게도 느껴지지만, 그 소심함으로 그려내는 일상에 대한 감상에는 그녀만의 온도가 나의 온도는 어느정도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용기를 준다는 것. 데굴데굴 굴러가버리는 일상같지만, 그 안의 따뜻한 알맹이들의 온도는 닳지 않고 은근하게 이어질 거라는 믿음. 좋아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진심의 의미에 대해서도 곱씹을 수 있다.
두려웠던 어른이라는 화두를 무섭지 않게. 가볍게 기쁘게 그려 낸 이 책을 읽다보면, 어른이 되어도 실컷 즐거울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더 견고해진 취향과, 더 두터워진 사람에 대한 이해로 더 즐기고 더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늘어지는 피부나 늘어나는 흰머리 같은 슬픔은 잠시 잊을 수 있을 거다. 어른의 역할이나 의미, 사회 속 어른이라는 무서운 지표에 억눌려 어른의 의미를 확대하기보다는.
냥 이렇게 가볍게 그리고 발랄하게 달라지는 생활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안의 따뜻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건강한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나도 건강한 어른, 따뜻한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
아참,
읽는 내내 사진을 찍어 내가 소중하게 생가하는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다는 점도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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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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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2015년 11월 원희 선배님의 추천에 읽었던 책을, 세 번째 읽은 어느 2016년 11월의 어느 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 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깅ㄹㄱ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 그 사람이 떠나자 엄청난 피로가 나를 짓눌러왔다. 곧바로 집안을 정리하지 못했다. 나는 유리잔, 음식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접시,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방바닥과 복도에 흩어져 있는 겉옷과 속옷 들, 카펫에 떨어진 심대 시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미술관에 소장된 다른 어떤 그림도 내게 주지 못할 힘과 고통을 간직한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걸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증언의 형식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여성잡지에서 흔히 보듯 고백 수기의 형태로 쓸 것인지, 아니면 선언문이나 보고서 또는 해설서의 모양새를 한 꾸밈없는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나는 상사가 요구하는 시간 외 근무를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의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가끔 그 사람에 대한 세세한 기억들,  그 사람이 했던 말들임 문득 되살아나는 일이 있다. ... ...그럴 때면 잠시 동안 거대한 고요함이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된다. 마치 그를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선 몰랐다가 깨어난 순간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 “
“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이 원고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쓰였으므로 이미 읽을 만한 글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쓴 원고가 아직 내 손 안에 있는 한, 글쓰기의 가능성은 아직도 열려 있다. 내게는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는 일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닥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짐노페디 여러 버전으로 재생 목록에 넣어두고 몇 번을 돌려 들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향초도 켰다. 음악은 흐르고, 책장이 넘어가는 사이 사이의 순간에는 발 밑에 잠들어 있는 두 마리 강아지의 숨소리가 정적을 긋는다.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싶을 때 혹은 내 글에 어떤  색감을 수혈 받고 싶을 때 재빠르게 집어드는 몇 권의 책이 있다. 어릴 때는 너무도 많이 읽은 하루키의 수필들이었고 조금 자라서는 사강과 그르니에의 글이였고 이제는 그 리스트에 아니 에르노가 포함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연필을 깎는 소리나, 테이블을 닦는 소리처럼 일상적이지만 힘을 필요로하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문장 속에, 꼭 힘 주어서 말하고 싶은 어떤 단어가 있다. 사치, 열정, 갈망, 욕망, 무질서... 자칫하면 문장이 너무 뜨거워지거나 예민해지지 않게 평평하게 주변을 문질러 그 문장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그녀의 감정과는 반대로.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렇지만 절대로 건조하지 않게 이어지는 문장들을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내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감각의 세포들이 조용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도 지난 1년간 수시로 들끓고 또 반짝이던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의 어떤 이면에는 제대로 해석해 본 적 없는 나의 욕망과 오래 고민했지만 답을 내지 못했던 이유를 모르겠는 집착도 있다. 나는 차마 글로 쓰지 못했던, 또 쓰기 어려웠던 내면의 작은 소용돌이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일일이 포착해 낸 이 생생한 ‘무질서 일기'는 그래서 몇 번을 들춰 보아도 매번 새롭고 또 부러운가보다.
내게는 너무도 건조하고 또 힘들었던 지난 가을. 그리고 이제야 프로젝트를 털어냈다는 안심이 드는 어느 겨울 밤. 처음 이 책을 다 읽어 내려갔던 침대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그 간격들 사이를 조용히 헤아려보면서. 
내게도 더 깊은 열정을 일깨워줄 무언가가. 어떤 이가. 어떤 장소가. 계속해서 나타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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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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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샤를 보들레르
10월, 수인이와 샤브샤브를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던 FIKA 아래층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
“아름다움은 비록 그것이 자아내는 인상이 단일할지라도 늘, 필연적으로 이중적으로 구축됨을 보여주기에 그렇다. 인사의 단일함 속에서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구별하기란 어렵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움의 구성에서 드러나는 다양성의 필연적 성격이 약화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영원불변인 요소와 상대적 부수적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전자의 양이 어느 정도라고 꼬집어 말하기란 극도로 어려우며 후자는 번차례로 혹은 한꺼번에 개입하는 시대, 유행, 윤리, 정열이 될 것이다. 이 두 번째 요소는 흥미와 가벼운 흥분과 입맛을 돋우도록 천상의 케이크를 감싼 포장이나 마찬가지여서 이것이 없는 첫 번쨰 요소란 인간의 본성에 맞게 처리되지 않아서 소화할 수도 음미할 수도 없으리라. 이 두가지 요소가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의 표본을 어떤 것이라도 발견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라고 말하겠다"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가장 생생한, 이리 말하면 철학적 쾌감이 무색하겠지만 가장 오래가기까지 하는 쾌락의 원천인 존재. 남자들의 모든 노력의 대사이자 원인인 존재. 신과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소통불가의 이 존재. (무한한 존재는 유한한 존재를 눈부시게하고 압도하기 떄문에 소통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그 존재는 소통할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차이점은 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눈에는, 자신의 우아미로 정치라는 진지한 놀이를 즐겁게 만들어주고 보다 수월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짐승을 품고 있는 그 존재. 재산 축적과 재산 탕진의 원인이자 수단인 존재. 예술가와 시인이 자신들에게 가장 섬세한 보석을 창조하게 만든 이유이자 방법. 가장 짜릿한 쾌락과 가장 비옥한 고통의 원천인 존재. 
한마디로 여인은 특히 G씨에게는 수컷이 거느리는 암컷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수컷의 두뇌에 자리 잡은 개념 전부를 관장하는 신이고 별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존재 속에 응축되어 있는 자연의 온갖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반짝거림이다. 그것은 화폭이 관람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찬탄과 가장 강렬한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것은 그 눈길에 걸려든 운명과 의지를 전부 쥐고 흔드는 일종의 우상. 어리석을지언정 눈부시게 황홀한 우상이다"
“자연은 인간의 머릿속에 조잡하고 추한 지상의 것들을 쌓아올렸는데, 유행이란 그 모든 것들 위로 떠오른 이상을 향한 취향의 징후로, 또 자연의 숭고한 변형으로, 아니 차라리 영구히 지속적으로 자연을 개선하려는 시도로 여겨져야 한다.  각각의 유행이 미를 향한 새롭고 제법 행복한 노력인 만큼,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 정신에게 끊임없는 갈망의 대상이 되는 이상과 그 어떤 식으로든 가까워지는 것인 만큼, 모든 유행은 매혹적임을,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매혹적임을 지적했던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G씨는 그들보다 덜 능란하나 자기만의 심오한 장점을 가족 있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을 무시하지만 무엇보다 세상 속의 인간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다.그는 도처에서 현재의 삶이 지닌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우리가 독자의 허락을 받아 현대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성을 추구했다. 종종 기이하고 격렬하고 지나치나, 늘 시적인 그는 자신의 그림 안에 삶이란 포도주의 씁쓸하고 독한 맛을 진하게 녹여넣을 줄 알았다"
“ 과거가 흥미로운 것은, 그 과거가 현재였던 예술가들이 그로부터 이끌어낼 줄 알았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로서 그것이 갖는 역사겆 가치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현재의 재현으로부터 끌어내는 즐거움은 현재를 감싼 아름다움에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본질적 특성에서도 기원한다.”
그 책방에서 샀던 책들은 모두 미루지 않고 다 읽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였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때 마침 10월에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을 해설과 함께 다시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그가 쓴 예술 에세이 혹은 비평을 읽으니 그의 시에 사��된 어휘들이 달리 읽히는 거였다.
예리하고 예민하고 거만하고 오만함이 글에서 다 돋아나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의 언어는 번역 본인데도 ( 옮긴이를 보니,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번역한 분이 번역하셨다- 게다가 파리 3대학이라니 야호!) 특유의 첨예함의 날이 무뎌지지 않는다.
현대와 오늘, 소외와 어두움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관찰하고 묘사하고자 했던 보들레르의 의지를 보면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 자체로 알 것 같다.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그의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한 편의 섬세한 풍경화 혹은 정물화가 그려지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정확성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들레르의 시집을 다시 읽으려고 노력했던(노력이라는 말이 꼭 필요할 거다) 이유는, 우울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가 말하는 현대의 우울은 아직까지도 유효했던 것 같다. 
소외와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감출 수 없는 비참함과 태생적인 나약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낭만을 발굴하고자 하는 의지.  결국 우울의 색을 결정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 밤이다.
사실 이번주 내내 야근을 했고, 심지어 어제는 2시 퇴근에다가 오늘도 자정을 넘겨 퇴근했는데
이상하게 뭐라도 남기고 잠들고 싶어 두 다리 사이에 루시를 올려 놓고, 침대 옆에 놓여져 있는 다 읽은 책을 한 권 꺼내 독서 일기를 쓴다.
차가워지는 겨울, 내 시간이라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 밖에 없어 스스로를 돌봐주는 시간이 부족해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아졌던 지난 주였지만, 
이상하게 다시 내가 좋아지고 내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1시 31분의 겨울 밤이다.
잘 지내보자 유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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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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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태어나는 순간, 후지모토 소우
건축이 태어나는 순간, 후지모토 소우
10월, 수인이와 샤브샤브를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던 FIKA 아래층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
“ 사람의 생활이란 모호하며 처음과 끝이 늘 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롭다. 산다는 것은 이름바 ‘기능'이라는 말로는 구별되거나 정리되지 않는다 무언가 불확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또 눈 앞에 펼쳐진 바다나 바람, 어떤 기운은 인간과는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 이런 조건을 갖춘 장소에서 진정으로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집이란 어떠한 것일까?”
“르코르뷔지에가 이미 명확하게 표현했듯, 근대라는 시대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구별하고 분리하고 정리해 그것을 조립하는 시대였다. 즉 기계적인 거축의 시대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근대의 대극이라 할 수 있는 ‘분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에서 미래의 건축을 상상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리라 생각한다. 인간의 생활이란 그리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를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이 분화되기 이전의 혼연일체였던 존재를 예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이'는 새로운 공간을 암시한다. 그리고 ‘사이'라는 공간에 분화되지 않는 건축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 “
“이 공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건축과 도시는 서로를 통해 새롭게 정의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한 도시마저도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어쩌면 내가 완벽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은 결코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닫혀 있지도 않다.
건축은 완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건축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완벽이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아니다. 완벽이란 결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꿰뚫어야만 그 너머로 갈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이 제 1경기장에 머무는 동안 한꺼번에 내 안에 흘러들어왔다. 제 1경기장은 어찔할 바를 모를 정도로 큰 용기를 주는 위대한 건축이다"
“단게 겐조는 결코 완벽함을 지향하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여기에도 무언가 미완성의 느낌이 있다. 미완성이기 에 이런저런 소음을 허용할 수 있으며, 미완성이기에 완벽하다. 모순 같지만 정말 그렇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다. 이 내부 공간은 완벽함을 꿰뚫고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 점이 무섭다. 우리를 동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완벽함을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한 흔적이 전혀 없다. 어느 종착점을 목표로 하고 속도를 줄인 흔적이 전혀 없다. 온갖 요소가 폭주하고 그 끝에 흐릿하게 섞여 만나는 한 점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건너편을 꿰뚫고 나가버렸다. 완벽함이 열려버렸다. “
“다정함이 되어 건축 공간에 넘치고 있다. 이 다정함은 손길을 내미는 다정함이 아니다. 극진하게 여기저기 나서는 다정함이 아니다. 그저 뒤에 서 있는 다정함이다. 사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 그저 곁에 항상 머무르는 다정함이다. 인간의 생활을 가능성이라는 대단히 조잡한 방식으로 정리해서 처리해버리, 꾸며낸 다정함과는 반대로, 생활에 얽힌 이런저런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조용히 받아들여주는 다정함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공간 형식을 점차 버려가며) 추상 공간을 조형하고 그것을 일상생활 속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충동과 연결되어', ‘주택을 만든다는 행위의 내부를 가로막고 있는 인간의 욕망에 관심을 지닌 채, 영원한 것을 만들고자 하고 있다'라고 말한 건축가가 도달한 ‘주택'이란 형식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그의 주택이란 추상성과 일상성이 서로를 정의하고 성립시킨 주택이다.
‘거대한 다정함'을 지니고 생생한 일상을 떠맡은 채 등 뒤에서 지속적으로 받쳐주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새로움을 갖춘 추상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렇게 이 하얀색이 탄생했다"
“시간이 남겨져 있다는 것은 이상할 표현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어디에서건 동일하게 흘러가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느 곳의 어느 시간은 그 장소만의 시간으로 흐른다'는 현상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할듯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간은 그 장소, 그 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했던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 활동을 정리할 수 있는 카테고리는 오직 시간뿐일 것이다. 이사무 노구치라는 시간이 지속되는 장소는 바로 그의 아틀리에였다. 
시간을 남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머릿속에 다도가 떠올랐다. 나의 다도 경험은 정말 수박 겉핥기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매일같이 혼자 차를 우려내던 시기가 있었다. 다도는 예의 그 이상한 몸짓을 통해 이루어진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쓸데없는, 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 동작을 통해 간신히 차 한 잔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매일같이 그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현대와는 다른 감각이 그 동장 속에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성당 안은 어둠이지만 그 어두움은 기분 좋은 어두움이다. 그 어둠 속에 몇몇 빛이 빛 그 자체로 존재했다. 이러한 빛의 실재는 돌의 질감을 지니고 있다. 개구부 주변의 돌이 밝게 빛나고 있지만, 돌이 빛나고 있다기보다는 빛이 돌의 질감과 형태를 몸에 두른 채 공간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때 우리는 ‘빛의 그 자체’와 직접 대면할 수 있다. 이는 무서운 경험이다. 그 빛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빛에 동화될 듯한 기분이 든다. 빛과 사물의 경계가 한없이 애매해져갔으며 서로 녹아들었다.”
“ 숲 속의 식물과 생물은 복잡하고 난해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생물의 진화는 결정론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다양성을 축으로 한다. 자연과 생태계가 그러하듯, 두 주택의 건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흔들림을 만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화적인 논리/ 비논리로 이러한 방식을 이론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의식하는 것은 건축 혹은 숲이라는 성장과정이며, 이는 완벽한 성장이라기보다는 개개의 과정이 서로 엇나가고 스쳐가며 쌓여가는 성장이다. 즉 엄밀한 목표가 있는 성장이라기보다는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해 서서히 근거를 찾아가는 성장이다”
“특별히 아름다운 주변 풍경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이 존재한다. 이렇듯 다양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상들이 시시각각 ‘사이'의 중첩을 통해 관계를 맺어나간다. 손에 든 잔과 이웃집의 지저분한 벽, 푸른 하늘이관계를 맺는다. ‘사이'란 이런저런 타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공유하기 위한 투명한 틀 같은 것이 아닐까?”
 채 읽지도 못한 책들이 침대 옆에 겹겹이 쌓여 있는데도, 바로 전 날 교보에서 잔뜩이나 책을 사 놓고도, 우연히 마주친 좋은 서점을 지나갈 수 없었다. 서점은 크지 않았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다 너무 좋아서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이 서점의 책은 누가 고르는건가요?” 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나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교보를 가는데다가, 보고 싶은 책으 있을 때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지만, 우연히 발을 딛고 들어간 작은 서점에서 좋은 책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은 놓칠 수가 없다. 좋은 서점의 힘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책장에 놓여진 몇권의 책으로 나를 완벽히 설득시켜버리는 것. 
교보에서 산다면 더 싸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서점에서 사는 책은, 바로 지금 이곳이라는 기쁨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지게끔한다.
후지모토 소우의 작품은 이렇게 저렇게 자주 접했던 것 같다. 한때 나노하우스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때 후지모토 소우의 N하우스와 트리하우스는 빼놓지 않고 꼭 나오는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 외에도, 빠리의  FIAC 때 튈르리 정원에 설치했던 many small cubes 는 실물로 접한 유일한 작품이이고 하다. (앞으론 후지모토 소우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여행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올 해는 건축 세미나를 들으면서 읽었던 책들도 있고, 새로운 글쓰기를 접하고 싶어 건축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는데, 연초에는 장누벨(장누벨-장보드리야르의 건축과 철학), 봄에는 안도 다다오의 책들 ( 나 건축가 안도다다오, 안도 다다오의 도시 방황, 안도 다다오 일을 만들다) , 늦봄에는 피터 줌터 (건축을 생각하다, 분위기) 등
모두 빼놓지 않고 좋았음에도 (특히 피터줌터의 책은 느즈막히라도 이 독서 일기에 꼭 올리고 싶을 만큼!) 후지���토 소우의 책이 내게 준 감동만큼 파동이 크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유연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연한 사고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은 견고하게 지니면서도, 사회나 상황을 읽어내는 관점은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파묻히지 않고 자유롭게 유지하는 것. 자유롭게 흔들리지만 절대로 부러지지 않을 단단함. 
후지모토 소우의 유연함은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해 가장 열려 있는 대답을 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같다. 사이와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면서 발굴해낸 것 같은 가장 말랑말랑한 대답.
그래서 이 책은 견고한 언어로 쓰여졌지만, 읽고 나면 온 마음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 극진하게 여기저기 나서는 다정함이 아니다. 그저 뒤에 서 있는 다정함이다. 사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 그저 곁에 항상 머무르는 다정함이다. 인간의 생활을 가능성이라는 대단히 조잡한 방식으로 정리해서 처리해버리, 꾸며낸 다정함과는 반대로, 생활에 얽힌 이런저런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조용히 받아들여주는 다정함이다. >
이 부분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읽게 한다. 내가 계속 머물고 싶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찾아가고 싶게끔 하는 장소에는 늘 ‘다정함’이라는 온도가 있었다. 다가와서 꽉 끌어안아주는 식의 다정함이 아니라, 나의 무게를 천천히 받아들여주는 것만 같은 다정함. 그 공간에서라면 지쳐도 되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힘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공간이 분명 있다.
나에게는 퓌스탕베르 광장이 그렇고, 내 방의 침대가 그렇고, 지혜 집의 쇼파가 그렇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려 놓아도 충분할 것 같다. 이곳에서의 내 삶의 조각들이 ‘무위’로 점철되도라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처럼 마음이 온화해진다.
이런 장소의 온기를 알고 있는 건축가라면, 사람이라면, 그가 하는 생각도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거 환경 요소를 때로는 건축적으로 때로는 일상적으로 풀어내지만. 중요한 것은 ‘-적'이라는 수식어가 아닌, 삶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다. 건축에 관한 그의 말들은, 건축을 지우고 거기에 삶을 넣어도 어색함이 없다. 이 책은 그의 건축철학이 담긴 책이기도 하지만, 어떤 장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수필집이기도 하다.
그가 쓰는 또 다른 책들을 너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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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tome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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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스케치, 장 자끄 삼뻬
뉴욕 스케치, 장 자끄 삼뻬
11월, 계속해서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초겨울의 주말 반신욕 독서
“르네 알렉시스, 아닌게아니라 여기 뉴욕에선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해야만 한다네. 발전해야 한다는 말일세. 가장 보잘것 없는 것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여기선 누구든지 뭔가 <대단하고 great>, <창조적인 creative> 일을 하려고 한다네”
“르네 알렉시스, 서서히 어둠이 내려 뉴욕 시 전체에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불빛들이 들어오는 시간에, 뉴욕 시에 있는 호텔들의 거의 모든 방에 전화 번호부와 성서가 한 권씩 갖춰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계속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to keep in touch>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
  휴식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어느 주말의 아침, 욕조 안에 몸을 나른히 뉘이면서 읽었던 삼뻬. 화장대 옆 선반에 몇 권, 책장 위 액자 속에 한 권, 책장에 가득. 내 방안 곳곳에 있던 삼뻬였지만, 활짝 열어 첫장부터 마지막장 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책이 내게 불러 일으킬 달콤한 정서적 위안을 이미 예상하고 있기도 해서겠지만.
“읽을 게 너무 많아" 라고 미뤄두던 책에게 그 예상가능한 위로라도 받고 싶다며 다시 열어보니. 어설픈 예측이 무안할 정도로 훨씬 더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구석구석 숨어져 있는 그의 따스한 위트, 사소함을 넉넉하게 채울 줄 아는, 말이 아닌 마음을 읽는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그가 그리지 않은 부분까지도 상상하고, 쓰여지지 않은 부분을 음미하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을 하는 능력까지 있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 오래된 추억이 있는 책은 다시 읽을수록 켜켜이 깨달음을 쌓아준다는 기쁨에 폭- 안기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위안을 받았던 독서의 시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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