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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기
jojetorasakana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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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에서 오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다. 대개 남에게 받고 싶은 형태를 베풀기 마련이라, 저 사실을 인지 하면 꽤 많은 사례의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기대만큼 대접을 못 받거나 채워지는 게 없다면 당연히 실망감은 피치 못한다. 아무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고 그게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오롯이 감정은 자기 몫이란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선에서 베풀어야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건 여유에서 비롯되며, 그 여유는 자신만이 만들거나 찾을 수 있겠지 의지로 행한 행동이나 말 경우엔 남 탓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탓할 존재가 있다면 그게 버릇이 되고 마치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얼마나 무책임한가?
어떤 이가 되고 싶은가? 보다 어떤 이로 살 것인가에 더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어느 정도 틀이 만들어진다. 그 틀은 영원하지 않겠지만서도…
모든 건 순간이고 빠르게 바뀌어 간다. 그 순간을 바라보고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도 안 하는 게 좋다.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될 순 있지만 변하는 것에 무서워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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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nproject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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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최선
그 때에 내가 그렇게 행동했던 게 진짜 최선이 맞았을까.
사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놓은 것처럼 그렇게 도망쳐버렸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감정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 때의 나는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을거야. 그땐 그게 최고인 줄 알았거든,
나 아닌 다른사람들이 척척 길을 가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서
아파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다가 그렇게 돌아서고 혼자만 아는 세상에 틀어박히는 게 내가 아는 방법 중에 최선이었거든.
-Ram
*최선
최선을 다했냐고?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묻는다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상황들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내 다짐을 꺾지 않으려고 수많은 것들을 외면했고, 내 안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것들을 애써 눌렀지. 근데 최선을 다해도 변하지 않는 것, 바뀌지 않는 것,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었어.
늘 후회 없는 선택을 한다고 믿었는데, 아무렴 난 사람인지라 벌리고 나서 후회되는 순간이 아예 없었다곤 말하진 못하겠다. 아등바등하는 시간들이 있었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다 놓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어도, 아득바득한 밤을 지새울 때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우의 수와 앞날들을 생각해 선택할 때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저녁 노을에 비친 긴다란 그림자처럼 미련과 후회가 가끔은 뒤따랐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가보려고.
-Hee
*최선
운동을 끝내고 잠시 숨을 고르다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도 지형은 호흡이 잘 돌아오지 않는다며 박스 구석에 누워만 있었다. 같은 동작을 했지만 나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더 많은 횟수를 수행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운동을 몇 년이나 꾸준히 해왔으니 고작 몇 개월 다닌 나보다야 잘 하는 게 당연하다지만 한 시간 가까이 헥헥거리는 지형을 보며 먼저 든 생각은 보다 멀쩡한 내모습이 좀 쪽팔린다는 것이었다. 언제 내가 저렇게 몸도 못 가눌 만큼 스스로를 힘껏 몰아붙인 적이 있기나 했던가. 내가 저렇게 하고 싶다고 할 수는 있을까.
그 뒤부터는 매번 운전해서 집에 돌아가는 것도 힘들게 느껴질 만큼 온 힘을 다 쓰려고 했다. 체력도 회복력도 떨어지는 초보자의 과욕이었다. 하루만 살 것도 아니고 선수할 것도 아닌데 매일 이렇게 할 수는 없겠다는 나약한 마음이 며칠만에 염증처럼 볼록하게 솟았다. 운동 끝나고 집 가서 달리 뭘 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게 마음먹고도 최선에 도달할 수 없는 현주소라니. 그럼에도 자꾸만 하다 보면 또 될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막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Ho
*최선
일부러 최선을 다 안 한 적이 있다. 혹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의 최선을 숨겼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 그러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실컷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나는 내 마음에 집중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 그래도 되더라고. 큰일 안 나더라고.
내가 상처받는 것만 생각했는데, 사람들도 상처받기 싫어하지.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기 힘들다면 적어도 내가 받은 호의는 돌려주자. 좋은 기회와 인연은 용기가 있고, 마음이 바른 자상한 사람들이 가지지.  
'그냥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서, 최선을 다하고 그러다 보니 결국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이뤄내며 확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 최선을 다해볼게!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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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im · 11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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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것이 엄마가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듣기 좋은 말이나 끊임없이 지지하는 말을 해주는 식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걸 평소에 잘 봐두었다가 그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편안하게 배려받는 느낌을 받게 해 주는 식이었다. 엄마는 누군가 찌개를 먹을 때 국물이 많은 걸 좋아하는지, 매운 걸 잘 못 먹는지, 토마토를 싫어하는지, 해산물을 안 먹는지, 먹는 양이 많은 편인지 어떤지를 시시콜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먼저 무슨 반찬 접시를 싹 비우는지를 기억해뒀다가 다음번엔 그 반찬을 접시가 넘치도록 담뿍 담아서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갖가지 다른 음식과 함께 내어놓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혼자 브루클린 창고에 누워 있는 나의 손을 잡아 주려고 이 남자가 일이 끝난 새벽 세시에 뉴욕까지 차를 몰고 달려왔을 때, 사랑이 바로 이런 거란 걸 더없이 절실히 느꼈노라고 말했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이 남자는 몇 번이고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를 날아 내게로 와주었고, 6월부터는 연일 하루에 다섯 번씩 해대는 전화를 받아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 결혼이 좀더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용감하게 걸어나가는 데 오직 이 남자 하나뿐이면 된다는 확신을 준 게 바로 이 시련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셸 자우너 - <H마트에서 울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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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rowk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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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을 벌이는 후보들
경합을 벌이는 후보들집권 자민당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드문 기회를 감지한 의원들은 이달 말 대선 경선에 필요한 최소 20명의 지지자를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9월 3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집권 1년 만에 물러난다는 깜짝 발표 이후 붐비는 현장이 나타났다. 그는 COVID-19 위기를 처리하는 데 대한 최악의 대중 지지율에 시달렸습니다. 오피사이트 여전히 당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의 전임 총리인 아베 신조(Shinzo Abe)는 9월 3일 “신 아베노믹스(New Abenomics)” 프로그램으로 아베의 경제 개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한 다카이치 사나에(Sanae Takaichi) 전 통신상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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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lbi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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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hanall12345/22275335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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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worship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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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 Wednesday’ devotional in Korean: 재의 수요일
Jeehae Yang is a friend and worship leader, originally from South Korea, who is pursuing her doctorate in Worship Studies at 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 (www.iws.edu).  I’ve previously featured some of her Advent devotionals written in Korean, here is her new devotional for Ash Wednesday.  See her bio (in English) below her devotional (i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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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순간을 경험하며,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고, 오늘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사순절의 여정이 시작된다(주일은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로 늘 기쁨의 날이다).
재의 수요일? 사순절? 재의 수요일의 메세지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이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지를 불어본 적이 있는가? 작은 입김에도 흩날리는 것이 먼지다. 또한 집에 흙이 있는 것을 그냥 두는 사람은 없다. 쓸어버린다. (그러고 보면 흙은 다른 생명을 살리는 데에 사용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담기 위한 용도(그릇)로 사용될 뿐이다.)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은 교회력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시간으로 시작되었다. 초대 교회는 귀중하게 여기던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 전에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세례를 준비하고, 새롭게 세례 받는 교인들과 함께 감격의 부활주일을 맞이하였다.
즉, 사순절은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세례지원자들을 위한 마지막 준비단계로서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디다케’와 같은 문서는 입교문답 교육과 금식 기간을 거치면서 세례를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 베풀자와 세례 받을 자, 그리고 할 수 있는 다른 이들도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세례 받을 자를 미리 하루 혹은 이틀 금식하도록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이란 의미는 전체 신앙 공동체가 각자의 세례를 향하여 순례를 하는 과정에서 회심한 입교인의 세례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전체 공동체가 세례 언약을 갱신하는 기회로 삼게 되었다.
세례의 영성은 회개와 개종에 기초한 것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이 변화는 전체 인생 속에서 계속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지속적인 행위이다. 초대교회 당시 세례 의식은 문자적으로 죄에 대하여 등을 돌리기로 결단하는 성도들에게 강력한 체험과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당시 사제는 세례 받을 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사탄과 그의 모든 일들과 절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세례를 받는 자는 사탄이 있는 방향을 상징하는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나는 사탄과 그의 모든 일들과 절교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나서, 그와의 관계를 끊는 표시로서 사탄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신천지 구분법으로 "이만희 개**'라고 말하면 신천지 아닌걸로 인정해준다던데😅)
오늘날 세례식에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은 사탄과 절교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그의 모든 약한 영적 세력들과도 절교하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타락시키며 파괴하는, 이 세상의 악한 권세들과 절교하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악한 욕망들과 절교하겠습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섰으며 그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합니까? 당신은 그분의 은혜와 사랑만을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당신은 그를 당신의 구주로 따르고 섬기기로 맹세합니까? (혹시 부활절에 세례를 준비하시는 분이 있다면 꼭 위의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사모하는 사순절이 되시길요)
그래서 이 40일의 사순절 기간은 초대교회가 성례전적인 삶 속에서 교회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순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엄숙한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부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으로 지키게 되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위의 질문들을 묵상하며 세례갱신의 기간으로 삼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세례를 준비하는 것과 더불어 이 기간에 우리는 금식을 통해 다시 살기(부활) 위해 내면의 독소를 빼는 영성훈련을 할 수 있다. 금식과 기도, 그리고 자선은 음식이나 시간, 혹은 돈처럼 가치 있는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을 움켜쥐고 있는 죄악을 내버릴 때 우리는 그 죄악 대신에 긍정적인 대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사순절의 영성은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악으로부터 돌아서라고 요청할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대신하는 덕목들을 향하여 나아갈 것도 함께 요청한다.
버려야 할 내면의 독소들 나태함- 우리를 대항하여 역사하는 악한 권세를 이기도록 하는 영적인 순례를 선택하는 것을 가로막는 게으름 나약함- 의존적이고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삶의 태도 권력욕-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권세 아래 복종시키려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삶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주장 무익한 말- 다른 사람들을 헐뜯으며 말을 걸설적인 방법보다는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부정적인 말의 힘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무익하고 부정적인 말들이 넘치고 있는데, 그 대신 아픔과 죽음사이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치되어야 하는 성품 자비/신실함- 이 단어는 무관심의 반대의 뜻을 담고 있으며 흠이 없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 단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된 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겸손- 흠이 없는 삶의 열매가 바로 겸손이며 삶의 전 영역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승리를 보여준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의도하시는 대로 삶을 이해한다. 인내- 인내는 삶의 깊이에 담긴 그 난해함을 용납하면서 지금 당장의 즉각적인 변화를 고집하지 않는다. 사랑- 교만의 반대로서 신실함과 겸손, 그리고 인내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릴 때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줄 안다.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의 허물을 알게 하시고 내 형제들을 판단치 않게 하소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사순절 기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회개하는 새로운 심령을 창조하는 것”이다. 사순절은 나의 내면에 있는 죄악들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이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관계로 들어가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런데 예배가 참회로만 끝난다면 우리는 각자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질식하고 말 것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 이 인사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셨던 이 인사말 속에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 속에 버티고 있는 어둠은 결코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깔려있다.
그러고보면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기만 하는 조용하고 침묵하는 기간이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찾고, 적극적으로 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성품을 닮으려하는, 오히려 활동적인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로버트웨버)",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주승중)" 요약 및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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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hae Yang graduated from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and Seoul Theological Seminary (M.div) and completed worship leadership (M.A.) course at Dallas Baptist University. After completing course work of the Doctor of worship studies at Robert Webber Institute of worship studies, she is currently studying worship studies (Ph.D) at the Practical Theology Graduate School in Korea. She lives in Korea, and is a minister of young-adult ministry in Shinchon Evangelical Holiness Church. She is delighted to study worship, live a worship life, and live in a worship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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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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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원리와 약속
김환식 장로 / (고린도후서 9:1-15) 바울은 헌금의 원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즐겨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을 하는데(6절),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7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인색함’과 ‘억지로’와 대조되는 ‘즐겨 내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은 억지로 내는 것과 즐겨내는 것을 대조하기 위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함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관대하게 즐거이 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언급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헌금하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더 많은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8절). 또 바울은 이렇게 헌금하는 자를 ‘씨 뿌리는 자’로 비유하면서 “씨와 먹을 것을 주시며, 뿌릴 것을 더 많이 풍성하게 주심으로 많은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말한다(9-10절). 여기에서 바울은 재물이 쌓고 늘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기 위한 수단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헌금은 단순한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이제 한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됨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재물을 통해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섬김의 동기는 그들을 향한 불쌍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섬김과 구제는 은혜의 반응일 뿐이다.(끝)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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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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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93%B0%EB%A9%94_%EC%86%8C%EC%84%B8%ED%82%A4 )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p15) 흐릿한 먹빛 세계를, 몇 개의 은색 화살이 비스듬히 달리는 가운데 흠뻑 젖은 채 마냥 걸어가는 나를, 나 아닌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시가 되기도 하고 하이쿠가 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줄 때 비로소 나는 그림 속의 인물로서 자연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내리는 비가 괴롭고 내딛는 발이 피곤하다고 마음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시정(市井)의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이나 연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정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꽃이 지고 새가 우는 흥취도 마음에 일지 않는다. 혼자 쓸쓸하게 봄날의 산을 걷는 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더욱 알 수 없다.(p27) 두려운 것도 그저 두려운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면 시가 된다. 무서운 것도 자신을 떠나 그저 단독으로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림이 된다. 실연이 예술의 제재가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실연의 고통을 잊고 그 부드러운 면이나 동정이 깃드는 면, 수심 어린 면, 한 발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실연의 고통 그 자체가 흘러넘치는 면을 단지 객관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데서 문학과 미술의 재료가 된다.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실연을 창조하여 스스로 억지로 번민하고 쾌락을 탐하는 자가 있다. 보통 사람은 이를 평하여 어리석다고 하고 미친 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불행의 윤곽을 그리고 기꺼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려 넣고 자신만의 별세계에서 기뻐하는 것과 그 예술적 입각점을 얻는 점에서는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세상의 허다한 예술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보다 어리석다. 미치광이다. 우리는 도보 여행을 하는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힘들다, 힘들다, 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전에 했던 여행을 자랑할 때는 불평스러운 것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 재미있었던 일, 유쾌했던 일은 물론이고 옛날 불평했던 일까지 재잘거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는 굳이 스스로를 속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보통 사람의 마음이고 지난 여행을 이야기할 때는 이미 시인의 태도가 되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네모난 세계에서 상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모서리를 마멸하여 세모 속에 사는 이를 예술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p47) 하지만 한 가지 일에 들어맞고 한 가지 사물로 화하는 것만이 시인의 감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때는 한 잎의 꽃이 되고, 어떤 때는 한 쌍의 나비가 되고, 어떤 때는 위즈워스처럼 한 무더기의 수선화가 되어 마음을 비바람 속에 교란시키는 일도 있겠지만, 뭔지도 모르는 사방의 풍광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명료하게 의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천지의 밝게 빛나는 대기를 접한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현 없는 거문고를 마음으로 듣는다고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무한한 지역을 배회하며 아득한 곳을 방황한다고 형용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하든 다 그사람의 자유다. 열대산 목재로 만든 책상에 기대어 있는 나의 멍한 심리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p87) 적어도 색의 배합이 이 마음의 일부를 나타내고, 구부러지고 곧은 선이 얼마간 이 마음을 표현하여 전체의 배치가 얼마간이라도 이 정취를 전한다면, 형태로 표현된 것이 소든 말이든 속은 소도 말도 아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도 상관없다. 상관없기는 한데 도저히 안 된다. 사생첩을 책상 위에 놓고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궁리를 해도 도저히 안 된다. (p91) 나는 천장을 보는 자세로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기대고 투명한 물 속의 가벼운 몸을 되도록 저항력이 없는 곳으로 띄워보았다. 영혼이 해파리처럼 둥둥 떠 있다. 세상도 이런 기분이면 편할 것이다. 분별의 자물쇠를 열고 집착의 빗장을 벗긴다. 될 대로 되라며 온천물 안에서 온천물과 동화해버린다. 흐르는 것일수록 살아가는 데 힘들지 않다. 흐르는 것 안에 영혼까지 흐르게 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보다 고맙다.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익사자는 풍류다. (p101) 일본의 제비꽃은 자고 있는 느낌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기이한"이라고 형용한 서양인의 표현은 도무지 맞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내 발이 멈췄다.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 나는 풀을 요 삼아 태평한 엉덩이를 살짝 내려놓았다. 이런 곳이라면 대엿새 움직이지 않고 이대로 있어도 아무도 불평할 것 같지 않다. 자연의 고마움은 여기에 있다. 정작 때가 오면 사정도 미련도 두지 않지만, 그 대신 사람에 따라 달리 취급하는 경박한 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p134)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코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또 뚝 떨어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동안 연못의 물이 붉어지리라 생각했다. 꽃이 조용히 떠 있는 근처는 지금도 약간 붉은 듯하다. 또 떨어졌다. 땅 위에 떨어진 건지, 물 위에 떨어진 건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뜬다. 또 떨어진다. 저것이 가라앉는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해마다 남김없이 떨어지는 수만 송이의 동백꽃은 물에 잠겨 빛깔이 풀리기 시작하고 썩어 진흙이 되고, 이윽고 밑바닥에 가라앉는 것일까. 수천 년 후에는 이 오래된 연못이,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떨어진 동백꽃으로 메워져 원래의 평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커다란 꽃이 피를 칠한 도깨비불처럼 떨어진다. 또 떨어진다. 뚝뚝 떨어진다. 한없이 떨어진다. (p137) 선은 행하기 어렵고 덕은 베풀기 어려우며 지조는 지키기 쉽지 않고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안타깝다. 굳이 이것들을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나 고통이다. 그 고통을 무릎쓰기 위해서는 고통을 이겨낼 만한 유쾌함이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한다. 그림이라는 것도 시라는 것도 또 연극이라는 것도 이 비참함 속에 틀어박힌 쾌감의 별칭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취를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행동은 장렬해지기도 하고 우아해지기도 하며,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가슴속의 한 점을 차지하는 최상의 취미를 만족시키고 싶어진다. 육체의 괴로움을 도외시하고 물질상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용맹하게 정진하는 마음을 달려 인도를 위해서라면 삶아 죽이는 극형도 달게 받을 것이다. 만약 인정이라는 좁은 입각점에 서서 예술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예술은 우리들 교육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들어 사악함을 피해 옳은 길로 나아가고 부정을 물리치고 정의의 편에 서며 약자를 돕고 강자에 맞서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일념의 결정체로서 찬연히 빛을 반사하는 법이다. (p163) 벌렁 드러눕는다. 모자가 이마에서 미끄러져 잔뜩 뒤로 젖혀진다. 곳곳에 30에서 60 센티미터쯤 풀보다 키가 큰 작은 명자나무들이 무성하다. 내 얼굴은 바로 그 한 나무 앞에 떨어졌다. 명자나무 꽃은 재미있다. 가지는 완고하여 일찍이 구부러진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곧은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다만 곧고 짧은 가지에 곧고 짧은 가지가 어떤 각도로 맞부딪치고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분홍빛인지 흰빛인지 알 수 없는 꽃이 한가하게 핀다. 부드러운 잎사귀도 어른어른 걸쳐져 있다. 평하자면 명자나무 꽃은 꽃 중에서 어리석고도 깨달음을 얻은 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혼자만의 수수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내세에 환생하면 아마 명자나무가 될 것이다. 나도 명자나무가 되고 싶다. (p166) 드디어 현실 세계로 끌려나왔다. 기차가 보이는 곳을 현실 세계라고 한다.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집어넣어진 인간은 모두 같은 속력으로 동일한 정거장에 멈추고 그리하여 똑같은 증기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 눕든 일어서든 멋대로 하라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동시에 이 몇 평의 주위에 철책을 치고 그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 된다고 위협하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몇 평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던 자가 그 철책 밖에서도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련한 문명의 국민은 밤낮으로 그 철책을 물고 늘어지며 포효하고 있다. 문명은 개인에게 자유를 주어 호랑이처럼 사납게 날뛰게 한 뒤 다시 우리 안에 던져 넣고 천하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구경꾼을 노려보며 드러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평화다. 우리의 쇠창살이 하나라도 빠지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된다. 제2의 프랑스 혁명은 그때 일어날 것이다. 지금 개인의 혁명은 이미 밤낮으로 일어나고 있다. 북유럽의 위인 입센은 이 혁명이 일어날 만한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구쳉적으로 그 예증을 보여주었다. 나는 기차가 분별없이 모든 사람을 화물과 마찬가지로 알고 맹렬히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객차 안에 갇혀 있는 개인과, 개인의 개성에 털끝만치의 주의조차 주지 않는 이 쇠바퀴를 비교하며, 위험하다, 위험해, 하고 주의를 주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명은 이 위험이 코를 찌를 정도로 충만해 있다. 앞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서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기차는 위험한 표본 가운데 하나다.(p182-183) 갈색의 빛바랜 중절모 아래로 텁수룩한 수염의 산적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나미 씨와 산적은 엉겁결에 마주보았다. 쇠바퀴는 덜커덕덜커덕 돌아간다. 산적의 얼굴은 곧바로 사라졌다. 나미 씨는 망연히 떠나는 기차를 바라본다. 그 망연함 속에는 신기하게도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연민'이 가득 떠 있다. "그거예요! 그거!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p185) <해설: <풀베게> 무렵의 소세키, 비교의 망령 혹은 잔여_황호덕> <풀베개>는 소세키가 문학가로서 큰 전환기에 쓴 작품이자, 평생 그가 문제로 삼았던 동서 비교문명론 및 근대적 삶과 예술의 문제에 대한 사고가 집약된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p186) 기차에 내릴 수 없다면, 기차를 멈출 수 없다면, 가능한 것은 기차를 저 자연의 그림 안에 욱여넣는 수밖에 없다. 외발적 개화와 따라잡기에 이은 신경쇠약을 근심하는 일-일본인, 메이지인으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었던 소세키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노예임에 대한 자각을 지닌 가짜 인디펜던트와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려다 멸망한 식민지 사이에서, 서양의 양자로서의 자신과 세상에 지쳐 미증유의 것을 고향에서 찾으려 하는 돌아온 탕아 사이에서 소세키는 풀을 베고 누운 잠시의 '여유'를 향유한다. 그 향유는 문명 안의 계산이 아니라 두고 온 것이라 믿어지는 동양 혹은 자연이라는 잔여의 자리에서 찾아졌다. 잉여(surplus=남는 것)가 아니라 '잔여'(residual=남겨진 것)인 것이다. 모델로 추정된 값과 경험적 관찰로 얻은 값 사이의 차이(잔여)에 의해 그림은, 소설은 완성된다. 적어도 그 잔여는 아직 아무도 환급받으려 하지 않는 잔여였는데, 왜냐하면 세계 화폐에 의한 계산이 끝나야만 찾을 수 있는 저금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세키로서는, 이 잔여를 계산하는 비교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가 의도한 자기 본위의 소설에 가닿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p198) 197 - 나쓰메 소세키 , ' 풀베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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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separation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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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천천히 가길 바랐던 5월이 금세 지나갔다. 봄 특유의 선선하고 산뜻하던 날씨가 점점 습해져 가는 것을 보니 정말 여름이 오려나 보다. 참 힘들고 고민 많던 5월이었다. 계획한 것은 많고 많았지만, 반은 이루기도 반은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하다는 건 가장 컸던 고민이 해결되었기 때문 아닐까! 남들에 비해 힘든 일도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그동안 버텨줘서 고마워. 무너질 때도 많았지만, 지금의 나를 더 응원해 주고 싶다. 6월은 나를 더 사랑해 주기!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더 많이 베풀기.
마음에 담아놓던 것들은 5월에 남겨두고 6월에는 좋은 것만 가득 담을 수 있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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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벼워지니 운동 할 의지도 그리고 여유도 생기나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해서 운동은 생각도 안 했었는데. 매일 두 시간씩 걷다 보니 이제 무기력증도 많이 사라졌고, 습관처럼 걷게 된다. 항상 같은 플레이 리스트만 들으며 걷는데 그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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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중 하나인 향수 수집하기. 향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작년부터 향수를 모으게 되었다. 한창 흘러가는 대로 살았었을 때 향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힘들 때 향을 맡으면 편안해진다고 느껴서일까〰 사실 내가 무슨 향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브랜드나 설명이 마음에 드는 향으로 모았었는데, 이제야 내가 찾던 향을 찾았다,, 요새 불면증이 조금 심해졌는데, 어제 샤워하고 이불에 뿌리고 잠들었더니 한 번도 깨지않고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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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다시 들린 좋아하는 카페. 비가 왔어서 그런지 더욱 운치 있었다. 오늘은 사람이 좀 많았어서 아쉬웠지만 파라솔 아래에서 얘기하고 있으면 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말차 커피 최고.. 다음에는 샹그리아 마셔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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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이런저런 얘기 하며 앉아있던 공원. 항상 느끼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친구들은 정말 소중한 존재인 것 같다. 내가 더 잘할게🕊
요즘 들어 더욱 나를 믿어주고 예전부터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 나 자신조차도 나를 믿지 못할 때도 있는데. 이 곳에서도 많이 배우고 항상 힘도 많이 얻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 !
작년, 재작년 텀블러에 글을 쓸 때의 나는 항상 우울했던 것 같다. 힘들거나 우울할 때면 이 곳에 털어놓으러 오고는 했는데, 뭔가 행복한 글을 쓰는 건 오랜만이다. 예전 글들을 보면 자책만 하고 나를 엄청 미워했었네. 그래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 문득 행복이라는 단어가 참 따뜻해 보인다. 나도 행복해야지,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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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14 제목: 귀머거리 소경된 자 역대하 35장 6: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너희 형제들을 위하여 준비하되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행할지니라 . ●관찰 요시아 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어린양과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준비하고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잡게 하였다. .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 ●나에게 주시는 교훈 백성편에서 보면 한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주는데로 양고기를 실컷 먹었을 뿐이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가운데 초대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 고기가 잘익었네.. 탔네.. 앞다리가 먹고 싶네.. 이렇게 본질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에 마음이 팔려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베풀기 원하시는 그 영혼의 양식을 먹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할례와 십자가 죽음으로 나를 내어드려야 한다. . ●적용 신명기 강의가 계속 되는 가운데 그냥 신학적 지식과 정보를 아는 시간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에 나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자. . ●말씀기도 하나님.. 눈에 보이고 느끼고 감각하는 일에만 발빠르고 당신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일에는 귀머거리 같고 소경과 같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스스로 우둔하여지려는 마음을 깨우시고 당신이 공급하시는 생수를 마시며 열매 맺으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복음#말씀#기도#묵상#성경#교회#기독교#사랑#QT#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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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light-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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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새벽 우연히 방영하던 다큐 3일-노량진 편을 봤다. 그때 나온 나레이션 한 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것은 스무살 부터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숨길 줄 알게 될 때 어른이 되는건 아닐까’라고. 이 기준이라면 오랜 시간동안 아이였다가 몇 달 사이에 어른이 된 것 같다. 내 마음은 요동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잘 견뎌내는 일. 이유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날 혼자 씩씩하게 길을 걸으며 미래를 희망하는 일. 몇 달 사이에 나에게 일어난 나름대로의 성장이라면 성장인 변화다. 나는 단단해지고 있음이 확실하고, 지금의 모든 과정과 일들을 부디 시간이 지나 추억하며 웃음 짓는 날이 올거라고 믿으며 견디는 수 밖에 없다.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줄 사람도 나. 나를 위로하고 채찍질할 사람도 나라는 걸 안 이상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지. 가족들에게 든든한 맏이가 되기 위해,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친구들에게 더 많이 베풀기 위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잘 살아야지. 누구보다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고 주어진 삶 안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오늘도 이렇게 위로마이셀프! 내일 하루도 웃으며 활기차게 보낼 수 있도록 화이팅.
_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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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inwald-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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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한국 문화, 음식 맛집, 유적 위인 및 관광정보 ��의 주요 기사 및 헤드라인을 일렬 요약한 포스트 입니다. 개인정보 보관용 이었지만, 원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모두공개로 전환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기사를 참조 하시면 됩니다. (기준시간 : Korea, September 27, 2017 at 06:06AM) 호텔 뉴스 북한 이용호, 뉴욕 숙소호텔서 입장 발표 한경닷컴 북한 이용호, 뉴욕 숙소호텔서 입장 발표 ... 리 외무상은 숙소인 밀레니엄힐튼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간략한 입장문 또는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길에 오를 ... 북한 “트럼프 위협은 선전포고…자위권 발동” 천명 - 한겨레 국무부 “북한에 선전포고 한 적 없어”…리용호 외무상 위협 일축 - VOA Korea 북 외무상 “미국, 북한에 선전포고...전략폭격기 격추 권리 생겨” - VOA Korea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호텔신라 덕에 재기한 제주 식당들 '밥상 나눔' 봉사 한국일보 호텔신라의 사회공헌프로젝트 '맛있는 제주만들기' 덕분에 재기에 성공한 제주 지역 식당 주인들이 자신�� 받은 도움을 베풀기 위해 봉사활동을 벌이고 ... 호텔신라·맛있는 제주만들기 식당 주인, 추석 '맛있는 밥상' 나눔 - 중앙일보 경제 호텔신라 '맛있는 제주만들기' 참여 식당들, 지역 독거노인 상대 봉사 나서 - 조선비즈 호텔신라·맛있는 제주만들기 식당, 나눔 봉사활동 - 연합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한인 호텔 소유주들 다 모여라” 미주 한국일보 미주한인호텔협회(KOAHA)는 오는 10월3일(화) 오전 10시30분 LA 다운타운 J.W. 매리엇 호텔(900 W. Olympic Blvd, LA.)에서 '제5회 미주한인호텔협회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무한리필 뉴스 단가 낮추자…메뉴 간소화·꽃다발 소박하게 대전일보 첨부사진1 대전 서구 둔산동의 한 일식집. 4만원이던 코스 요리 가격을 3만원으로 낮추고 무한리필 방식으로 바꿔 청탁금지법 위배 부담을 낮췄다. 조수연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생방송 투데이' 맛있는 비밀 레시피 제보자, 전주 우아동 '바다꽃게탕' 부산일보 특히 국내산 암꽃게를 사용해 만든다는 간장게장 메뉴는 수제떡갈비를 무한리필로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영양돌솥밥 또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돌솥과 달리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양재시민의숲 맛집 27년 전통의 소고기전문점 “남우정” 무한리필메뉴로 인기 엑스포츠뉴스 무한리필에서 제공되는 부위는 꽃등심, 토시살, 부챗살, 갈비살, 등과 같은 특수부위도 함께 포함된다. 모든 메뉴는 좋은 국내산 숯과 더해져 장어와 소고기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인간문화재 뉴스 한국 전통춤의 대가 김묘선 '춤인생 50주년' 대공연...10월21, 22일 이틀간 디지털데일리 [디지털데일리 박기록기자] 우봉 이매방 선생의 제자이자 국가 무형문화재(제27호)인 승무의 대가인 김묘선의 춤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이 열린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전북도 '자랑스러운 전북인' 대상 7명 선정 세계일보 수상자는 경제 대상에 김형식 (주)해전산업 대표를 비롯해 문화예술 대상에 김동식 선자장(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체육 대상에 서정일 도체육회 상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마산성신대제' 전승·보존행사 개최 경남일보 마산성신대제보존회(회장 임영주)는 지난 23일 오후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마산성신대제(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38호)를 전승, 보존하기 위한 행사로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지역축제 뉴스 <축제 뒷이야기> 막 내린 홍성역사인물축제, 6인의 위인 되살아나다 오마이뉴스 지역민과 방문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내 축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올해 역사인물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한국은행 제주, '지역축제 개선방안 세미나' 개최 Headline jeju 한국은행 제주본부(본부장 장한철)는 26일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에서 '제주관광산업 재도약을 위한 지역축제문화 개선방안'를 주제로 한 '2017년 하반기 ... 제주 축제 거기서 거기…“스토리 입혀 이미지 팔아야” - 뉴스1 제주의 문화예술적 특성을 반영한 축제에 적극적인 홍보전략 필요 - 한라일보 축제 많은 제주…관광객 방문 동기 부여는 한계 - 한라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국순당, 횡성한우축제 홍보에 '백세주'가 나섰다 전자신문 올해로 13번째 맞는 횡성한우축제는 지난해 90여만명이 다녀 간 국내 대표적인 지역축제 중 하나이다. 올해는 10월19일부터 23일까지 횡성군 섬강둔치 ... 국순당, 횡성한우축제 홍보지원. 10만병의 백세주에 홍보문구 인쇄 - 스포츠조선 국순당, 횡성한우축제 홍보도우미 활약 - 서울파이낸스 국순당, 횡성한우축제 활성화 나서 - 팝콘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관광지 뉴스 홍철호 "인천공항 관광지 광고 대신 성형외과 광고 늘어" 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인천국제공항에 국내 지역이나 명소, 특산물 등 관광홍보 광고물은 급감하는 대신 그 빈자리를 성형외과 병원 광고가 차지하고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유명관광지 부산 흰여울마을 주민 엇박자 행정에 반발 연합뉴스 7층 건물신축에 주민 반발하는 흰여울마을 (부산=연합뉴스) 부산 영도 해안 절벽 위에 자리 잡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흰여울마을(중간 도로 오른편)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우리나라의 1950~1990년대 관광풍경은···기록물 40점 공개 중앙일보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관광의 날(9월27일)을 계기로 9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기록으로 보는 그때 그 시절 관광풍경'으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축제 뉴스 국내 최대 다문화축제 '맘프' 29일 개막 한겨레 국내 최대 다문화축제인 맘프(MAMF)가 29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경남 창원시 용지문화공원과 성산아트홀에서 열린다. 같은 기간 용지문화공원에선 축제 ... "아리랑-다문화 공존 축제 '맘프'에 함께 해요" - 오마이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축제 뒷이야기> 막 내린 홍성역사인물축제, 6인의 위인 되살아나다 오마이뉴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홍주읍성 일원에서 '그들을 알고 싶다!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홍성역사인물축제가 막을 내렸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막 내린 홍성역사인물축제, 6인의 위인 되살아나다 오마이뉴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충남 홍성군 홍주읍성 일원에서 '그들을 알고 싶다!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홍성역사인물축제가 막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게스트하우스 뉴스 복면 쓰고 게스트하우스 식당 턴 10대 동창생 머니투데이 경찰에 따르면 10대인 이들은 지난 10일 오전 2시20분쯤 모자·두건 등으로 얼굴을 가린 뒤 제주시 소재 한 게스트하우스 식당에 침입, 소형 금고에 보관된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젊음이 밑천 … 농촌서 창업 도전한 도시 청년들 중앙일보 이들은 '까마귀 등 애완 조류 사업'(사진) '견훤 아트상품 개발 사업' '청춘 게스트하우스 사업' 등 이름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사업 아이템을 갖고 있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불타는 청춘' 임성은, 보라카이 럭셔리 하우스 공개…“9년째 거주 중” 서울경제 임성은은 1층은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하고 자신은 주로 2층과 3층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어 남자 멤버들의 숙소는 1층, 여자 멤버들의 숙소는 2층으로 ... '불청' 임성은, 보라카이 집공개…3층 저택에 '입이 쩍' - 조선일보 '불타는 청춘' 임성은, 보라카이 3층집 공개…멤버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사냐" - 중부일보 [ 밤TView] '불청' 임성은과 함께 보라카이로..2017 마니또 게임 - 스타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장인 뉴스 사위 위해 6층 아파트에 개인 에스컬레이터 설치한 장인 뉴스1 사위를 위해 6층 아파트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장인이 화제다. 그러나 그 에스컬레이터가 불법 건축물이어서 철거될 위기라고 중국의 경제신문인 중국 ... “사위야, 엘리베이터 놨다”…못말리는 장인 - 동아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장인 별세 중앙일보 【리버풀=AP/뉴시스】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장인이자 배우인 앤서니 부스가 25일(현지시간) 85세로 사망했다. 사진은 1997년 7월 15일 블레어 당시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Oh!쎈 컷] 조보아, 화보장인의 B컷…러블리 매력의 정석 Korea Daily [OSEN=장진리 기자] 조보아가 날로 예뻐지는 '슈퍼 그레잇'한 비주얼을 과시했다. 조보아의 소속사 싸이더스HQ는 26일 공식 SNS를 통해 조보아의 화보 B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여행 뉴스 미국 여행하는 북한 사람 없는데도 '입국 금지국'에 북한 포함시킨 진짜 이유(WP) 허핑턴포스트 미국을 여행하는 북한인은 거의 없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인 여행 금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왜 그랬을까? 북한인 여행 금지령은 다소 ... 미국 여행하는 북한사람 없는데 왠 여행금지? - 동아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미국·유럽 항공권 사실상 매진… 100만명 추석 해외여행 뉴스플러스 올 추석 연휴 때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내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루 평균 10만명 규모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임시 공휴일(10월 2일)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박진배의 생각하는 여행] 추억이 어린 오랜 벗… 헨리 포드 올드 카 페스티벌 조선일보 미국 미시간주(州)의 디어본(Dearborn)에서 해마다 9월 둘째 주말에 '헨리 포드 올드 카 페스티벌(The Henry Ford Old Car Festival)'이 열린다. 이 행사는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지역행사 뉴스 포항·영덕지역 교회, 음악회·부흥회 등 10월 행사 '풍성' 경북일보 포항·영덕지역 교회, 음악회·부흥회 등 10월 행사 '풍성' ... 포항과 영덕지역 교회들이 결실의 계절을 맞아 사랑의 음악회, 목요집회, 연합부흥회, 전도잔치 등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굵직한 행사는 모두 서울서… 한국거래소(KRX), 부산화 의지 실종 국제신문 부산에서 다양한 금융 관련 국제행사가 열리면 지역 마이스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만 거래소가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게 지역 마이스업계의 입장이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포항제철소, 추석맞이 전통시장 장보기 행사 실시 경북일보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안동일 소장은 “전통시장의 이용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명절맞이 행사뿐 아니라 부서행사 준비 등에도 전통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역사 뉴스 [시론]소홀해선 안될 가야역사문화권 정비 경향신문 가야사연구자로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고 역사적 사실로 정리하는 일에는 언제나 무한한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 과정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불상에서 화승총까지… 鐵의 역사를 만나다 조선일보 통일신라 보원사지 여래좌상. 고려 청자철채운학문매병. 사자의 꼬리처럼 휘었다는 페르시아의 칼 샴쉬르. 시기도 목적도 다른 이 물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막 내린 홍성역사인물축제, 6인의 위인 되살아나다 오마이뉴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충남 홍성군 홍주읍성 일원에서 '그들을 알고 싶다!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홍성역사인물축제가 막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비앤비 뉴스 [인터뷰] 샤오미, 에어비앤비에 투자를 결정한 그사람 플래텀 그는 샤오미와 에어비앤비, 샤오홍슈 등에 투자를 결정한 당사자이며, 설립된지 얼마 안 되었던 무명의 기업 '위시(Wish)'의 가치를 알아본 인물이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2017 디지털이노베이션대상] 4차산업 혁명 시대, 위대한 기업으로의 도약 찬스 한국일보 택시 한 대 없이 운송 서비스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 '우버 택시'. 자사 소유 호텔이 하나도 없는 세계적인 숙박 서비스 업체 '에어비앤비'.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공유경제와 도시] (5) 재난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힘 세계일보 지난 2012년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았던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시를 덮쳤을 때의 일이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오래 활약해온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모텔 뉴스 봉화경찰, 모텔에 침입 금품 훔친 50대 구속 중앙일보 26일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1일 오전 1시 54분께 봉화읍의 한 모텔에 들어가 휴대전화 1대(시가 90만원 상당)를 훔치는 등 지난달 16일부터 지금까지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님과함께2' 송은이, 김영철과 단둘이 모텔 "넘어오면 안돼" 스타뉴스 이어 두 사람은 모텔을 찾았다. 이들은 숙소에 둘만 남자 어색해했다. 김영철은 송은이가 "조금이라도 누워있을까?"라고 묻자 "같이?"라고 반색했다. '최사' 굿바이 김숙 윤정수, 가상 아닌 진짜로 '또' 만나요[종합] - 스포츠조선 '님과함께' 김영철, "양말 만 벗어?" 19금 토크 - 비즈엔터 '님과함께2' 일출 송은이 일탈 김영철의 동상이몽 - 일간스포츠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봉화서 모텔 객실 침입 금품 턴 50대 구속 뉴스1 A씨는 지난달 21일 오전 1시54분쯤 봉화군의 한 모텔 객실에 침입해 투숙객의 휴대전화 등 90만원 상당의 금품을 터는 등 최근까지 주택과 모텔에서 220여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지진 뉴스 北 지진 규모 나라별 제각각…”관측소 위치·산출방식 달라” Science Times 북한에서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지진 규모를 둘러싸고 각국 기관별로 서로 다른 측정값을 내놓고 있어 혼란을 낳고 있다. 이 같은 혼란은 기관마다 관측소의 ... 北 지진 때마다 다른 측정값 왜?…"나라·기관별로 산출식 다르다" - SBS뉴스 “핵실험이 백두산 화산에 영향 주려면 규모 8.0 이상 돼야” - 한겨레 日정부 "北 23일 지진은 '자연지진' 판단“ - 뉴스1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지진이 쓸어내린 세계문화유산들 시사저널 (회원가입) 400년 가까이 수많은 지진을 견뎌낸 멕시코의 '천사들의 모후 대성당(Our Lady of Angels Church)'이 무너져 내렸다. 9월19일(현지시간) 멕시코의 수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북 주민, 풍계리 지진을 7차 핵실험으로 오인 자유아시아방송 인공위성업체 플래닛이 촬영한 제6차 핵시험 하루 뒤 위성사진- 북쪽 갱구와 산 정상 사이 능선을 확대한 핵시험 전후 비교사진으로 오른쪽 사진에서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SNS 뉴스 진화하는 사이버 불링…해외서버·익명 SNS·공기계 이용 한겨레 청소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이버불링'(온라인 공간에서의 집단 괴롭힘)이 진화하고 있다. 추적이 쉬운 카카오톡 등 국내 메신저 대신 해외에 서버를 둔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음란 판치는 SNS 텀블러… “우리는 미국 회사” 심의도 거부 한국일보 최근 몇 년 사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텀블러에 성매매, 음란물 등 게시물이 급증해 우리나라 규제 당국이 유해 정보 차단 협조를 요청했지만 텀블러 ... [단독] SNS서 '아동 포르노 ·몰카' 대놓고 팔아도 속수무책 - 매일경제 몰카 영상부터 음란물까지…SNS 텀블러, 음란정보 온상으로 급부상 - 케이벤치 텀블러 창립자는 누구?…"양대 강자 SNS에서도 살아 남은 젊은 갑부였는데" - 아시아경제 전��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카드뉴스] "현금 아니면 안 받아요"…SNS 마켓 탈세 논란 연합뉴스 해당 미용실 원장 외에도 탈세 의혹을 받는 SNS 마켓이 많기 때문입니다. 현금만 받는 판매자는 소득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소비자들은 지적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생활의 달인 뉴스 '생활의 달인' 초밥의 달인, 고등어초밥 비법은?…논현동 '오도루' 서울경제 25일 방송된 SBS '생활의 달인'의 '숨어 있는 맛의 달인' 코너에서는 초밥의 ... 한편 달인의 가게는 '오도루'로 서울 강남구 학동로12길 14에 위치해 있다. '생활의 달인' 옥수수 인절미의 달인…평창 '장평떡방앗간' - 서울경제 '생활의 달인' 맛집은 어디? 평창 옥수수 인절미·벌초·라면·스시 - 국제신문 '생활의 달인' 평창 옥수수 인절미 달인… 달콤·고소·쫀득함에 중독, 떡이야 카라멜이야? - 부산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리뷰] '생활의 달인', 벌초의 달인…'조상을 기리는 마지막 예우, 벌초' 톱스타뉴스 25일 방송된 SBS '생활의 달인'에서는 조상을 기리는 마지막 예우를 갖추는 일이라 벌초에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벌초의 달인 김진태 씨가 방송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생활의 달인, 수원 라면의 달인...사골 맛국물 '이라면' 현대건강신문 가로_사진.gif △ 25일 방송된 SBS 생활의 달인 숨어있는 맛의 달인 코너에서는 김순태, 강희재, 임홍식 달인이 라면 하나로 수원을 평정한 이두현 달인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행사 뉴스 격 높아진 10·4 열돌 행사, 현직 대통령 첫 참석 한겨레 26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기념행사는 정권 교체 이후 처음인데다 '10주년'이라는 의미가 더해지면서 대대적으로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文, 10·4 행사에 참석…현직 대통령 중 처음 채널A 문재인 대통령이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10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비밀이던 대화록이 공개되면서 매우 논쟁적으로 돼 버린 정상회담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서울북앤컬쳐클럽 '고은과의 만남' 행사 한국일보 서울북앤컬쳐클럽은 30일 오후 4시 서울 명동 서울글로벌문화체험센터에서 고은 시인이 참석하는 '고은과의 만남' 행사를 연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여행지 뉴스 추석무휴! 집 벗어나 연휴에 떠날만한 수도권 여행지 골라봤다 중앙일보 라이프 명절에 귀성객이 빠져나간 수도권은 한적하고 여유로워진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은 연휴에 방문할 만한 대표적인 서울 근교 여행지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인스타그램 최고 인기 촬영 여행지는 어디? 국민일보 글로벌 이미지 공유 서비스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진 촬영 장소는 디즈니 월드인 것으로 조사됐다. 26일 여행 플랫폼인 트래블버드는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홍도, '섬총사' 네 번째 여행지...천연기념물 지정 섬 국제신문 25일 방송된 tvN '섬총사'에서는 홍도로 여행을 떠나는 김희선, 강호동, 정용화의 모습이 그려졌다.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 홍도는 빼어난 절경으로 섬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유네스코 뉴스 문체부, 유네스코 반도핑 총회서 '안전한 평창올림���' 홍보 한국일보 한국이 유네스코(UNESCO) 국제스포츠반도핑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부의장국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한국은 25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 노태강 차관, 유네스코서 평창올림픽 안전 강조 - 아시아경제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 학술대회 개최 뉴스로(NEWSRO) 한편 가야고분군은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데 이어 2015년 3월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가야 ... 김해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추진 위한 학술대회 개최 - 이데일리 2020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 뉴스인부산 (보도자료)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등록문화재로 '가닥' 잡히는 태릉선수촌 한국일보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가 훼손 능역을 복구하라고 권고하면서다. 이를 위해선 조선 13대 국왕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핫플레이스 뉴스 전주 막걸리 골목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전주 여행 필수 코스 산업일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모여있는 전북에 수많은 인파가 방문하고 있다. 긴 연휴가 예정된 이번 추석에 가족·연인·친구들과 함께 떠날 여행지를 찾고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라이프 트렌드] 한번 예약으로 리조트 두 곳을 자유롭게 … 로맨틱 허니문 만들기 중앙일보 프라이빗한 허니문을 보내고 싶어 하는 허니무너에게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클럽메드 피놀루 빌라다. 섬 전체를 투숙객만 사용할 수 있어 신랑·신부가 오붓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시사기획 창' 난개발·치솟는 땅값에 몸살 앓는 제주의 안타까운 민낯 서울경제 하지만 지금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그야말로 '핫 플레이스'가 됐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적한 해변에는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카페 1 ... [미리보기] 시사기획 창 : 환상의 섬, 그늘진 민낯 - KBS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위인 뉴스 막 내린 홍성역사인물축제, 6인의 위인 되살아나다 오마이뉴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충남 홍성군 홍주읍성 일원에서 '그들을 알고 싶다!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홍성역사인물축제가 막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토머스·스피스의 미국, 올해도 웃을까…프레지던츠컵 28일 개막 SBS뉴스 2016-2017시즌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판도를 이끈 동갑내기 친구 저스틴 토머스와 조던 스피스가 미국-인터내셔널 팀의 대항전 프레지던츠컵에서 ... 스피스ㆍ토머스 절친 듀오 앞세운 美골프, 7연승할까 - 한국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하이트진로 총파업… 주류업계 '도미노' 우려 세계일보 최근 맥주업계 1위인 오비맥주가 파업에 들어갔다 극적으로 타결된 데 이어 이번에는 소주업계 1위인 하이트진로가 파업에 돌입했다. 일부 지방 소주사들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해외여행 뉴스 미국·유럽 항공권 사실상 매진… 100만명 추석 해외여행 뉴스플러스 올 추석 연휴 때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내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루 평균 10만명 규모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임시 공휴일(10월 2일)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뉴스체크|경제] 추석 해외여행 100만명 JTBC 이번 주말부터 추석연휴가 시작이 되죠, 길게는 열흘까지 이어지는 연휴 기간에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코리아세일페스타, 中관광객 급감·해외여행 사상 최대에 '흥행 부진' 우려 뉴시스 여기에 긴 연휴가 이어지면서 110만명에서 최대 130만명까지 해외여행을 떠날 것으로 예측돼 내수 진작 효과마저 불투명하다. 장기간의 연휴를 앞두고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맛집 뉴스 '귀성길 휴게소 맛집' 여기 전화하면 한 번에 알 수 있다 중앙일보 과거 연휴 기간 접수된 고객문의 전화를 분석해 휴게소 맛집, 차량 무상점검센터와 같은 고객문의가 많은 생활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새롭게 구축했다. "귀성길 휴게소 맛집? 114에 물어보세요" - 연합뉴스 귀성길 휴게소 맛집? 114에 물어보세요 - 서울경제 귀성길 휴게소 맛집이 궁금하다면.. "114에 물어봐" - 이데일리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식신, 맛집 검색 결과에 발렛파킹·주차장 정보 제공 한경닷컴 식신 앱에서 검색한 맛집 리스트에 주차장 및 발렛파킹 및 지원 여부가 표시된 모습. / 사진=식신 제공. 맛집 정보 서비스 식신은 맛집 검색 결과에 발렛파킹( ... 맛집앱 식신, 주차 정보 보여준다 - ZD넷 코리아 국민맛집앱 '식신' 발렛·주차 정보 제공 - IT조선 식신, 맛집 발렛·주차장 정보 제공 - 전자신문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생생정보' 전복 해물탕 맛집, 위치는?…제주 '대원가' 서울경제 26일 방송된 KBS2 '2TV 생생정보'의 '삼색삼맛' 코너에서는 전복 해물탕 맛집, '대원가'가 소개됐다. 이곳은 살아있는 전복부터 문어, 피조개 등 해산물이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방문객 뉴스 사드 보복 직격탄…제주·강원 피서지 방문객 급감(종합) 이데일리 한국은행이 25일 강원도 환동해본부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내놓은 지역경제보고서를 보면, 올해 7~8월 중 동해안 지역 해수욕장 방문객 수는 2244만명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한국산업인력공단 강원지사, 방문객에게 '청렴드링크' 제공 중앙일보 【원주=뉴시스】권순명 기자 = 한국산업인력공단 강원지사(지사장 최종윤)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시행 1년을 맞아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임시 개원 백두대간수목원, 10만 번째 방문객 맞았다 서울경제 임시 개원 백두대간수목원, 10만 번째 방문객 맞았다 ... 에서 가족과 함께 수목원을 찾은 정현출(여·55)가 10만 번째 방문객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명가 뉴스 (불붙은 강남 재건축 수주전)②현대vs.GS, '반포주공1단지' 놓고 '이전투구' 뉴스토마토 본문에는 △건설명가? 하자명가! △선정 후 말 바꾸기 △할인분양 강요! 입주시 유치권 행사 △무이자 약속, 유이자로 둔갑 등 악의적으로 쓴 기사들이 담겨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생생정보통 뉴스 [2TV 생생정보 맛집 위치&가격] '장사의 신' 울산 울주 언양불고기, 대학로 단호박해물찜, 강남역 왕 ... 글로벌이코노믹 사진=KBS 2TV '생생정보' 421회 맛집 리스트 (무한리필 맛집, 생생정보 스페셜, 생생정보통, 2TV 생생정보통 맛집 방송정보). [글로벌이코노믹 백지은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관광객 뉴스 문동신 군산시장 "관광객 300만 시대 반드시 열겠다" 오마이뉴스 그의 희망대로 전북 군산은 2016년 관광객 200만을 돌파했다. 이에 문 시장은 "헬로 모던(Hello, Modern)을 캐치프레이즈로 군산의 대표 축제인 '시간여행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부산 관광정책조정회의, '크루즈 관광객 유치 방안' 논의 중앙일보 이번 회의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최근 국제정세 등 민감한 요인으로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감소폭이 커짐에 따라 '부산 ... 부산방문 크루즈 관광객 유치 흔들림없이! - 피디언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발리 아궁화산 관광객은? “일정 줄이고 있다” 폭발 일어날 경우 공항 폐쇄 조치 서울경제 또한, 인도네시아 당국은 관광객들에게 화산으로 인한 즉각적인 위험은 없다고 밝혔지만, 관광객들 일부는 발리에서의 여행 일정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 발리 화산분화 우려 지속…대피주민 5만7천명 넘어서 - 연합뉴스 발리 아궁화산 분화 임박...5만 7000명 대피 - 이데일리 '발리 화산 분화 임박' 소식에 여행객 취소 급증 - YTN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항공권 뉴스 '항공사-여행사 윈윈' 올윈에어 항공권 B2B 구매시스템 스포츠경향 차별화된 가격결정 방식을 내세운 항공권 B2B 플랫폼으로 50여개 주요 항공 국가의 특허를 모두 취득했을 정도로 기존의 판을 바꿀 만한 새로운 시스템.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티몬×플라이트그래프, 온라인 항공권 시장 '다구간'·'빅데이터'로 잡는다 전자신문 티몬이 항공권 예약 서비스 스타트업 '플라이트그래프'와 온라인 항공권 시장 ... 티몬은 차별화한 항공권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 5월 플라이트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추석 연휴 맞아 '가족단위 여행' 항공권 검색 전년대비 10배 증가 스포츠경향 글로벌 여행가격비교사이트 스카이스캐너가 지난 2년간 수천 만 건의 구매내역을 통해 한국에서 출발하는 왕복 항공권 검색 추이를 분석했다. 그 결과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무형문화재 뉴스 국내 최대 다문화축제 '맘프' 29일 개막 한겨레 방글라데시 국립예술단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바울 음악을 29일과 30일 성산아트홀에서 공연한다.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이주민을 뽑는 ... "아리랑-다문화 공존 축제 '맘프'에 함께 해요" - 오마이뉴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충북무형문화재 전수공예전]'온고지신' 전통공예 매력에 흠뻑 충청일보 [충청일보 신홍균기자] 충북 청주시한국공예관이 충북무형문화재 전수공예전을 이 공예관 2·3층 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미래를 개척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이성계의 힐링캠프' 양주 회암사지서 왕실축제 한국일보 이 밖에 양주무형문화재 합동공연과 경기도립국악단, 의정부시립무용단, 경기소리보존회 양주시지부, 극단 민들레, 예원예술대 실용음악과 학생들의 공연 ... 양주시,'제1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개최 - 메이킹뉴스 (풍자) (보도자료) (가입) (블로그)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국보 뉴스 서산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 학술세미나 대전일보 시 관계자는 "이 세미나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가 재조명될 수 있는 역사·학술적인 토대가 마련됐다"며 "조속히 국보로 승격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사회단체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경남 밀양시 영남루 국보 승격 추진 세계일보 시는 지난 2013년 밀양영남루 국보승격 자료조사와 학술용역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력을 해 오고 있으며, 2014년 11월 영남루 국보 승격 심의 결과 부결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서산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 위해 학계와 머리 맞댔다 세계일보 시는 25일'서산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보원사지에서 개최했다.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서산 보원사지는 현재는 폐사됐지만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면세점 뉴스 중 사드보복에 면세점 첫 폐업 경향신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면세점업계에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는 업체까지 등장했다. 중국의 사드 보복에 결국… 폐업하는 면세점 처음으로 나와 - 조선일보 사드 보복에 '면세점 첫 폐업' 나왔다···평택항 하나면세점 영업 종료 - 경향신문 사드보복에 폐업까지… 문 닫는 면세점 더 나올까 - 한경닷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결국 문닫는 면세점…사드보복 이후 첫 폐업 매일경제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이후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결국 폐업하는 면세점이 나왔다. 26일 면세점업계에 따르면 평택항에 ... 문 닫는 면세점 나왔다···하나면세점, 30일 영업종료 - 뉴시스 매출은 줄고, 수수료 늘고…중소중견 면세점 '폐업공포' - 헤럴드경제 [단독] 사드보복으로 문닫는 1호 면세점 나왔다 - 헤럴드경제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신세계, 면세점 영업 호조” 아시아투데이 9월 현재 신세계의 면세점 일매출은 40억원 후반을 기록중이다. 이지영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영업안정화 시 면세점 영업이익률이 5%까지 가능할 것” ... [오늘의 종목] 신세계, 면세점 日매출 40억원↑..."현시점, 매수기회" - 서울경제 신세계, 눈에 띄는 면세점 수익 증가 - 아시아경제 신세계, 면세점 매출의 고공행진-NH - 한경닷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특보 뉴스 문정인 특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보다 엄중한 상황" 중앙일보 문정인 특보는 26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10주년 기념식' 특별강연에서 “1976년 미루나무 사건 당시 미국이 행동은 ... 문정인 “시간은 우리 아닌 북한 편, 빨리 남북대화하라” - 한국일보 문정인 "文대통령은 보수정부 9년의 희생양" - 프레시안 문정인 "北, 핵무력 가진 국가…북한과 빨리 대화협상 해야" - 중앙일보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정치의 봄' 준비하는 충북 시민사회 한겨레 1978년 충북대 독서모임연구회를 이끌었던 김재수 청주 우진교통 대표, 김형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정무특보 등은 청주시장 선거 출마가 점쳐진다.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김영우 국방위원장 "여야, 김관진·문정인·정의용 국감 증인 채택 하지 않기로 합의" 조선일보 국회 국방위원장인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은 이날 라디오에 출연해 “간사 간 협상을 통해 김관진 전 국방 장관과 문정인 청와대 통일외교안보특보, 정의용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보물 뉴스 서산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 학술세미나 대전일보 시 관계자는 "이 세미나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가 재조명될 수 있는 역사·학술적인 토대가 마련됐다"며 "조속히 국보로 승격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사회단체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서산시,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 위해 학계와 머리 맞댔다 세계일보 시는 25일'서산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승격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보원사지에서 개최했다.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서산 보원사지는 현재는 폐사됐지만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일러스트 550점 무료로 쓰세요…'국민저작물 보물찾기' 연합뉴스 국민저작물 보물찾기' 공모사업은 높은 가치가 있음에도 사장돼 활용되지 못하는 저작물을 발굴해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부 사업 ...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을 통해 무료 일러스트 550점 공개 - 국제신문 "저작권 걱정 없이 무료 일러스트 550점 사용하세요" - 뉴스1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예약 뉴스 [뉴스] PC MMORPG의 부활! '군타라 온라인' 사전 예약 및 티저 영상 공개 인벤 이에 앞서 사전 예약은 오늘부터 사전 예약 페이지 에서 진행된다. 군타라 온라인은 사전 예약 페이지와 함께 홍보 영상도 공개했다. 티저 영상에는 또 다른 ... 플레이위드, 군타라 온라인 사전 예약 시작…티저 영상 공개 - 매일경제 플레이위드 '군타라 온라인', 사전예약 모집 및 티저 영상 공개 - 게임포커스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인터뷰] '데스티니 차일드 일본 사전 예약 목표는 200만 명!' 스테어즈 임원진 인터뷰 인벤 이번에 개최된 TGS2017에 DMM GAMES 부스에 자리를 잡은 데스티니 차일드는 현재 일본에서 사전 예약을 진행 중이며, 수많은 캐릭터 일러스트가 존재 ...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뉴스] 주연테크, 게이밍 노트북 'L7S-16H' 6차 예약 판매 실시 인벤 지난 6월 출시한 리오나인 게이밍 노트북 L7S-16H은 출시 이후 가격과 성능에 대한 고객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면서 3개월 동안 총 5번의 사전 예약 ... 주연테크, '리오라인' 게이밍 노트북 6차 사전예약 프로모션 - 이데일리 주연테크, '리오라인' 게이밍 노트북 6차 사전예약 프로모션 - 이데일리 주연테크, 리오나인 게이밍 노트북 6차 예약판매 프로모션 진행 - CCTV NEWS 전체기사 관련성 없는 검색결과 신고 검색결과 더보기 | 알림 수정 핫플래이스 뉴스 '마리나베이샌즈 수영장' 강남에서 보게될까 한경닷컴 (보도자료) (가입) 이소은 기자의 핫플레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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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jonghyun1-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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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애하기 좋은날 봤네요.... ※대구공연/대구뮤지컬/대구연극/대구독립영화/대구문화/대구인디/대구재즈/공연후기※
여자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신하는 남자 – 지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랑할수 있다는 여자 – 시연 나만 왜 이렇게 바뻐 – 멀티
기억을 잃은 갑과 연애를 조작하는 을?!!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그리고 '기타 등등'을 연기한 배우까지 총 세 명이서 알차게 무대를 구성하더군요.  한정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역시 소극장 무대만이 가진 매력이었습니다. 추돌사고에 휘말린 남자 주인공은 가득 차고 단 하나 남은 2인실 병실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2인실에 먼저 입원하고 있던 이는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였죠. 거기다 여자친구는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 기억 상실로 인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좋게 헤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가 사고까지 겪은 모습에 남자 주인공은 마음이 동하면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여자친구에게도 들려주죠. 잠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는 하나 어쨌든 당사자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 그리고 달콤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둘 사이의 분위기는 다시 좋아지나 싶었지만, 어쨌든 둘은 무슨 이유에서든 한 번 헤어졌던 사이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설마 이 공연의 목적이 '커플 브레이킹'이겠습니까? 그건 당연히 아니고, 연인 사이에 누구나 한 번쯤 겪을 트러블이나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여자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연애 중이거나 연애를 했던 이들에겐 공감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연극 "연애하기 좋은 날"은 젊은 연인들 사이에 투닥투닥 거리는 심리적 요인을 연극으로 잘 표현했는데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젊은 감각으로 가볍고 재밌게 풀어냈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연의 기억상실증은 지후의 노력으로 돌아오고 둘은 또 투닥투닥 하다 헤어지죠 지후와 시연, 이 둘은 왜 또 헤어졌을까요? 다시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가볍고 재밌는 연극 "연애하기 좋은 날"입니다
연극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어요 막 웃다가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여러모로 많이 생각하게되는 연극이였네요 커플분들 보면 좋을거 같네요
공연 잘 보고 왔어요... 다들 수고하셨어요. 하모니아 아트홀 1관에서 쭉하고 있습니다....
Daegu culture   http://cafe.daum.net/dg-ct  오로지 공연에 관한 정보및 모임만 있습니다.
밴드 대구문화발전소  http://band.us/#!/band/49860918 실시간으로 공연정보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밴드 Daegu culture  http://band.us/#!/band/64021127  다양한 공연정보 있어요
한번 둘러보시고 가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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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garbag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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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1
나에게 무뚝뚝하던 사람이 갑자기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면 그 계기가 뭔지 궁금하다 뭐지? 내가 뭘 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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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5kim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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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주석적 평가와 제안
http://reformanda.co.kr/xe/index.php?document_srl=96105&mid=Archive&order_type=desc&sort_index=regdate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주석적 평가와 제안
       권연경 (안양대학교)        들어가는 말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 바울신학계의 화두로 등장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각자의 입장이 무엇이든, 새 관점은 바울에 관한 진지한 논의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개혁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새 관점이 종교개혁의 핵심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종교개혁의 유산은 여러 “전통” 중 하나를 넘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진리”로 전제된다. 그러기에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성경적 복음으로부터의 이탈과 다르지 않다. 그런 마당에, 이런 “성경적 전통”에 물음을 다는 새 관점을 긍정적으로 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새 관점이 종교개혁 이후 복음의 요체로 간주되어 온 칭의론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종종 복음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는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새 관점 자체가 복음에 대한 이탈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도전이든 이유 없이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관점이 싫든 좋든, 우리는 새 관점이 바울의 글들과 그 역사적, 신학적 배경에 대한 치열한 탐색의 결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처럼 다양한 전통의 학자들이 “새 관점”이라는 하나의 큰 공감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그 속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주석적 설득력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진지한 연구도, 넓은 공감을 획득한 관점도 잘못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식은 우선 그들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본문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 주장들을 냉정하게 검증하는 것이라야지, 그저 우리 “종교개혁”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1)
I. 새 관점의 발흥
1. E. P. Sanders와 초기 유대교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 칭의론은 시종일관 모세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간의 대립 속에서 제시된다(갈 2:16-21; 롬 3:21-26). 따라서 칭의에 관한 논의는 불가불 율법 및 유대교에 관한 논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을 뿌리로 삼는 “전통적” 관점에 의하면, 바울 당시 유대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율법주의적 종교였다. 그 순종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된다는 점에서 공로주의로도 규정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은혜와 믿음을 무기 삼아 유대교의 이러한 한계를 폭로하였다. 구원의 궁극적 근거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2) 간간이 이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런 관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1977년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였다.3) 이 책에서 샌더스는 광범위한 초기 유대교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초기 유대교가 결코 율법주의적(legalistic)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유대교는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이 은혜로운 선택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율법 준수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획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노력이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열성(nomism)은 근본적으로 은혜로운 언약(covenant)의 태반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샌더스는 이런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 불렀다.
샌더스의 주장은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물론 이 반향 내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한다. 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로 규정된 전통적 유대교 상을 포기하고 언약적 신율주의의 관점을 적극 수용하였다.4)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다양하게 피력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 목소리는 샌더스가 일 세기 유대교의 다양성을 과소평가하고, 그 다양성 속의 주요 흐름이었던 율법주의적 경향을 너무 무시했다는 쪽으로 모아졌다.5) 2. 달라진 유대교, 달라진 바울 - Sanders와 Dunn, 그리고 새 관점의 시작하지만 샌더스로부터 출발한 충격의 파장은 유대교보다는 바울신학 쪽에서 더 심각하게 감지되었다.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유대교를 율법주의라 보았다. 이와는 달리 샌더스는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일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면, 바울이 비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유대교 내에서 문제점을 찾지 못한 샌더스는 배타적 사고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예수가 구원의 해답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해답일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율법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의 생래적 문제가 아니라 그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6) 물론 바울은 율법을 다각도로 비판하지만, 이는 율법의 본질에 대한 일관된 숙고의 산물이 아니라, 상황적 필요에 따라 고안된, 따라서 신학적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임기응변식 논증들이다. 이후 저서들에서7)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적 배타성을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 율법 자체에 관한 논증이라기보다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열린 것이라면, 일체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바울 특유의 “극단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8)
“새 관점”(New Perspective)라는 용어를 고안한 던 (J. D. G. Dunn)은 샌더스의 유대교 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하지만 그의 바울 해석에는 낙제점을 매긴다.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는 잘 설명했지만, 이를 바울과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던은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와 바울 사이에 근본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없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던은 바울의 비판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misunderstanding)를 겨냥한다고 보았다. 곧 율법 속에 보편성의 기조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이를 배타적 정체성의 표지, 곧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의 수단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란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겠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이방인을 구별하던 신분표지로서의 율법을 가리킨다. 당시 이런 사회적 기능이 두드러졌던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이 핵심 쟁점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런 언약의 표지들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국한하려는 배타적 태도 혹은 정체성의 표지로서 율법이 수행했던 사회적 기능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울의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이해하려는 흐름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 부른다.9)         잘 알려진 대로, “새 관점”은 어떤 특정 학파가 아니라 바울신학계에 나타나는 공통된 흐름을 포착하는 표현이다.10) 바울의 칭의론 및 율법 비판을 유대인-이방인 관계의 문맥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새 관점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입장 자체를 하나로 엮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 나름의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11) 한 때 “새 관점”에 입각한 바울 해석을 내어 놓았다가, 이제는 보다 전통적인 해석으로 회귀한 왓슨(Francis Watson)은 “새 관점”의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12)        1. 믿음과 행위의 이항대립에 근거한 개신교적 바울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칭의나 구원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진다고 보는 기독교 대(對) 구원을 행위의 산물로 간주하는 유대교라는 대립은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2. 70년 이전의 유대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고, 율법의 순종은 바로 이 은혜 언약의 틀 속에서 이해되었다. 율법은 “getting in”을 위한 것이 아니라, “staying in”을 위한 것이었다.
3. 헬라 문화 속의 소수 그룹으로서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상징하는 특정 요소들(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이 자연스레 두드러지게 되었다.
4.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자비에 관한 이런 유대적 신념을 긍정하면서 또한 반대한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불변한 것으로 긍정하면서도, 그는 구원의 가능성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하는 데는 반대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진술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만이 참된 의인이라는 신념을 반박하는 것이고,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다.
5.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시대착오적인 신학적 전제를 바울의 텍스트에 주입한 탓이다. 바울의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전제 없이 역사비평적 방법을 충실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13)
II. 새 관점과 옛 관점의 충돌        1. 새 관점과 칭의론의 사회학적 문맥        새 관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울의 칭의론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개진되고 있음을 중시하는 것이다.14) 부분적으로 이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샌더스의 주장에 기댄 것이지만, 스텐달이나 라이트의 경우에서 보듯, 이런 통찰 자체는 초기 유대교보다는 바울의 텍스트 자체를 관찰한 결과라 할 수 있다.15) 실질적으로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얽혀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가령 칭의에 관한 갈라디아서의 주제적 진술(2:15-16)은 유대인/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안디옥 사건과 이어져 있다(2:11-14). 특히 “우리는 원래 유대인이지 이방 죄인이 아니지만”이라는 15절의 수사적 양보 구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또 아브라함을 성경적 논거로 삼는 이신칭의의 원리는 “모든 이방인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는 성경적 약속(cf. 창 12:3)과 이어지고 이는 바울에 의해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3:7-8).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속량을 의미하는데(3:13), 이는 이신칭의라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것 및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 사건이었다(3:14). 
로마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칭의론이 개진되는 1-4장에서 바울은 구원과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1:18; 2:2, 5-6, 11-12; 3:10, 12, 19, 22). 물론 로마서의 문맥에서 “모든”은 보다 구체적으로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도”라는 의미를 갖는다.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도”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1:16), 이는 행위심판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다(2:9-10). 할례자라도 율법을 어기면 무할례자로 취급되고, 무할례자라도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 취급을 받는다(2:25-29). 칭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할례자나 무할례자 모두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것이다(3:30).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3:29). 16) 무할례자일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었던 아브라함에게서 보듯, 이신칭의의 복은 할례자 뿐 아니라 무할례자에게도 공히 적용된다(4:9-12).
믿음의 의와 미래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5-8장에서는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17) 하지만 9-11장에서는 이것이 아예 핵심 주제가 된다. 이방인들처럼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것이다(11:30-31).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다”(11:3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이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10:12). 따라서 그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10:12). 빌립보서 3장에서도 율법에서 난 의는 유대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3:5).
이처럼 바울의 칭의론이 대부분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울의 칭의론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것임을 시사한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관점에서는 칭의론의 배경 역할을 하는 이 사회적 정황이 아예 무시되거나, 기껏해야 칭의론에 부가된 별개의 논리 정도로 치부되었다.19) 하지만 칭의론과 그 실질적 문맥인 사회적 정황을 연결하지 못하고서는 그 교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20)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 관점에 기울면서도 새 관점이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21) 이 부분에서 새 관점이 지금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못한 차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면서 보다 균형 있는 바울 이해를 도모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새 관점의 모호함과 칭의론의 구원론적 성격        그렇다면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약점을 극복하고, 바울 칭의론의 전모를 제대로 규명해 낸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판단은 부정적이다. 바울의 논증이 자리한 사회적 정황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새 관점의 공헌은 분명하지만, 바울의 칭의론이 드러내는 신학적 혹은 구원론적 차원을 해명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그저 편향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학적 차원과 구원론적 차원이 함께 어우러지는 상황에서, 신학적 차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애초에 사회학적 설명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새 관점 학자들이 제안하는 개념의 틀들이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가령 새 관점 학자들은 종종 바울의 칭의론을 보편성-배타성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파악한다.22) 하지만 유대교는 배타적이었고 바울은 수용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일세기 유대교는 배타적이기도 했지만, 또한 수용적이기도 했다.23) 할례를 비롯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지만, 개종은 언제나 가능했다. 역으로, 바울의 복음 역시 믿음이라는 절대적 조건을 단다는 점에서 마냥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24) 할례의 요구가 배타적이라면, 믿음의 요구 또한 마찬가지다. 또 이방인의 환영이 보편적이라면, 이방인의 개종을 반겼던 유대교도 다를 바 없다. 결국 유대교와 바울의 차이는 보편성/배타성의 차이가 아니라 수용을 위한 실제적 조건(할례냐 믿음이냐)의 차이다.
새 관점의 전략적 개념인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다. 던은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the law per se)나 선행 자체(good works per se)가 아니라 “유대인의 특권과 민족적 독점의 수단으로서의 행위들”(works as a Jewish prerogative and national monopoly)을 반대한 것이라고 말한다.25) 하지만 이런 구분도 바울의 관점을 정확하게 관찰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적 특권이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새롭게 정의한다(롬 9:6-8, 11). “할례”가 마음의 할례로, 정체성의 기준이 “외면”에서 “내면”으로 새롭게 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원리 앞에서 외적, 인종적 구별은 무의미하다(롬 9:24). 하지만 이 존재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씨”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불린다(갈 3:7, 25; 6:16). 기존의 특권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새로운 정체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원천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종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재편이라는 사회학적, 혹은 교회론적 논리 이면에는 그런 재편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원리, 곧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26)
보다 주목을 끄는 것으로는 칭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구원론적 이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샌더스는 언약 안으로 “들어감”(getting in)과 언약 안에 “머무름”(staying in)을 구분하고, 유대교의 율법적 열성을 후자와 연결함으로써 율법주의라는 누명을 벗기고자 했다.27) 한 걸음 더 나아가 던에 의하면, 바울의 관점 역시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를 반영하고 있으며, 28) 그에게 있어서도 칭의란 최초의 받아들임이 아니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시점과 관계없이 누군가가 언약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29) 보다 최근 새 관점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라이트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면서, 바울의 칭의 개념은 결코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포로와 회복”이라는 언약적 흐름에 바탕을 두고 “누가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냐?”를 다루는 교회론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30)        하지만 이러한 구분들 역시 피상적이라는 판단을 피하기 어렵다. 샌더스의 경우, “들어감”과 “머무름”의 구분이 실질적인 것이 되려면 이 들어감이 최종적인 판결이어야 하고, 이후의 순종이 그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엄연히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심판은 언약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순종은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심판을 통과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샌더스 자신도 이 들어감이 “구원받을 공동체 안으로의 들어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상 정체성 문제가 구원의 문제와 구분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31)        그렇다면 이런 구분을 바울에게 확장하여 그의 칭의론을 교회론적 개념으로 제한하려 한 던과 라이트의 시도 역시 동일한 한계에 직면한다. 칭의 개념이 법정적 선언인 것은 맞지만, “따라서 구원론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미리 준비된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틀을 바울에게 덧씌운 것이다. 웨스터홈(Westerholm)이 잘 논증한 것처럼, 실제로 율법과 칭의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은 칭의가 그저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 뿐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죄와 그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보다 깊은 차원과 맞닿아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에서는 전통적 관점이 분명 옳았던 것이다. 32)
그런 점에서,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새 관점 학자들의 주석이 종종 전통적 관점의 입장에 접근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던은 바울의 칭의론이 언약 백성의 신분에 관한 논증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막상 로마서의 칭의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는 바울이 이방인의 수용이라는 (사회학적) 관심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존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차원에서 칭의론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다.33) 곧 민족적 정체성에 의존하여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결국에는 행위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태도와 유사한 것 혹은 그 한 부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34) 역시 새 관점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바클레이(J. M. G. Barclay)와 롱기네커(Bruce Longenecker) 역시 (갈라디아서에서)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서 출발한 바울의 신학적 사유가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앞에서의 인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지평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35)        III. 옛 관점과 새 관점의 만남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 관점이 칭의론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및 죄와 구원의 문제로 간주하는 옛 관점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에는 근본적인 신학적 관심과 보다 실질적인 사회학적/교회론적 관심사가 동시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 두 관심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따로 취급할 수 있는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칭의론의 요체라면, 바울은 왜 이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이라는 사회학적 논점과 연결하는 것일까?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이 그의 주 논점이라면, 그는 왜 이를 신학적 개념과 논리로 확장하는 것일까? 이 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칭의론 해석은 가능한 것일까?        1. 전통적 관점 내의 긴장        이런 물음과 함께, 새 관점이 바울신학계에 끼친 긍정적 효과의 또 다른 측면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새 관점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에 의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던 계시적 연속성, 곧 구약/유대교와 기독교,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관통하는 “연속성”(continuity)에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36) 사실 종교개혁 이후 구원론 논의를 주도해 온 “행위언약 vs. 은혜언약”의 이분법으로 인해, 두 언약 사이의 차이는 실제보다는 과장되거나 잘못 표현되기 쉬웠다. 복음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첫 언약에 담긴 은혜의 무게가 과소평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바울의 복음 속에 담긴 윤리적 책임의 중요성 또한 상대화되었다. 참된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는 식의 사후적 변호가 덧붙기는 하지만,37) 기본적으로 믿음 자체는 행위와 무관한, 심지어는 행위와 상반된 개념으로 상정되기 쉬웠다.38)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칭의가 이처럼 개인 구원의 문제로 국한되면, 바울의 칭의 논증이 나타나는 실제 문맥,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라는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신학적 주장이 왜 굳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라는 사회학적 진술과 결합되는지를 해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하다. 전통적 관점은 사회학적 진술들을 포함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확대되거나 혹은 그 논점을 수정해야 한다.
바울서신 내에 전통적 관점과 어긋나 보이는 진술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강화시킨다. 우선 믿음 자체가 그렇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 말하지만, 정작 바울은 “믿음의 행위”(to. e;rgon th/j pi,stewj, 개역에는 “믿음의 역사”로 번역)를 이야기하며(살전 1:3; 살후 1:11), 이를 “사랑의 수고”나 “소망의 인내”와 같이 취급한다.39)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역설하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믿음은 “사랑을 통해 효력을 발휘하는” 것(5:6), 혹은 성령을 통해 맺는 열매의 하나로 제시된다(5:22, 개역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자�� 사역의 목표를 “믿음의 순종” (u`pakoh. pi,stewj)으로 제시한다(1:5; 16:26).40)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의 의도는 무엇일까? (행위가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므로) 행위는 하되, 그 행위가 칭의/구원의 원인인 양 착각하지는 말라는 교리적 교정인가?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믿음이 행위와 나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바울은 이 둘을 대비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41) 가령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했다면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열매로 간주하지 않았을까?(롬 8:4)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조차 믿음과 행위가 공존하는 것이라면, 믿음과 대조되는 “율법의 행위”가 믿음과 공존하는 “행위”와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지만, 또한 순종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용하지 말아야 할 “율법의 행위” 혹은 “모세의 율법”(4:21; 5:1, 4)과 복종해야 할 “그리스도의 법”(6:2)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무엇일까? 할례나 절기규정이나 안식일 규정과 같은 의식적 요소를 빼고 말한다면, 율법을 행하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론 학자들은 많은 제안을 내어놓는다. “양적” 순종과 “질적” 순종 혹은 “외적” 순종과 “내적” 순종을 구분하기도 하고, “자기 의”로서의 순종과 “믿음”의 순종을 구분하기도 한다. 혹은 “율법 행함”과 “새로운 순종”이라는 구분도 제시된다.42) 하지만 이런 설명들은 모두 추상적이며, 실질적 행동 차원에서 그 둘의 차이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성령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있지만,43) 그렇다면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구체적 행동을 관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르는 삶과 다를 수 없다(롬 8:4; 고전 7:19; cf. 겔 36:26-28).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율법)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역설한 후 다시 순종을 요구하는 바울의 행보가 윤리를 팽개칠 위험과 새로운 율법주의의 위험 사이에서 “칼날을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44) 하지만 바울이 정말로 “행하지 말라”와 “행하라” 사이에서 위험한 칼날을 타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들어왔던 갈라디아인들이 “행함이 없으면 영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했겠는가??(5:21; 6:8) 이는 그저 방종을 막기 위한 경고를 넘어, “행위 아닌 믿음으로”라는 이전의 논점 자체를 뒤집는 진술이 아닌가? 구원과 무관한 “율법의 행위”와 구원과 관계있는 행위 사이에는 중요한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논증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는 셈이 아닌가?45)
행위 심판의 논리를 고려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전통적 관점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행위 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정작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2:13). 물론 이런 진술은 바울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4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이 심판이 자기 복음의 일부임을 분명히 선언한다(2:16, kata. to. euvagge,lio,n mou dia. Cristou/ VIhsou/).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도 분명히 인식했던 것처럼, 바울은 종말론적 구원 혹은 영생에는 순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롬 2:6-11; 갈 5:21; 6:7-9; 고전 6:9-10; 롬 6:19-23; 8:13).47) 불순종에 대한 멸망의 경고도 적지 않다(고전 10:1-13; 갈 5;21; 고전 6:9-10; 엡 5:5 등).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야고보적” 신념은 그의 “믿음-은혜”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미 주어진 칭의가 결정적이므로 미래의 심판은 이미 결론이 난 “요식행위”에 불과한가? 삶에 근거한 심판이 남은 한 현재의 칭의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둘을 함께 보듬을 다른 논리가 있는 것인가?48)
우리가 바울서신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면, 종말론적 구원이 신자들의 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 점에 관한 한 바울의 진술은 너무도 명확하다. 적어도 결과적으로 볼 때, 바울이 역설하는 믿음과 은혜는 행위와 대조되거나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을 바꾸어 볼 수 있다. 바울이 폐기처분한 “율법의 행위”가 과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믿음과 은혜가 “행위 없이”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믿음과 은혜를 통해 강조하려고 하는 본래의 취지는 무엇일까? 첫 번째 물음은 바울이 신학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구체적 상황 자체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 물음은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 자체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새 관점의 가능성        전통적 관점과는 달리,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행함”을 강조했던 율법주의와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역시 언약적 은혜를 몰랐던바 아니기 때문이다.49) 이렇게 하여 일단 율법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 관점의 학자들은 은혜와 순종을 다함께 강조하는 바울의 관점 역시 은혜로운 언약의 틀 속에서 율법에 순종하고자 했던 유대교와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물론 언약과 순종의 매개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점에서 복음은 구약/유대교와 다르다. 하지만 구원의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순종이 함께 얽히는 구조 자체는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50)        바울 복음을 언약적 신율주의라 부를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바울연구자들은 행위심판 사상이 바울신학의 한 요소이며, 종말론적 구원에는 순종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특히 율법과 복음의 단선적 이분법을 벗어나, 특히 구속사적 관점 하에 율법과 복음 사이의 근본적 연속성을 존중하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런 합의를 더욱 반갑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51) 하지만 최근 이 점을 강조하는 새 관점 학자들에 대한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비판은 성경의 본문에 기초한 차분한 논증보다는 거의 “반대를 위한 반대”의 수준에 근접하는 것으로 보인다.52)        그런 점에서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첫 단추는 바울서신을 포함하여 신구약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행위심판의 원리 및 (공로는 아니지만)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행위의 필요성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아니라53) 바울이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전체 메시지에 비추어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다.54) 그런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해석에 내재된 긴장 혹은 모순의 요소를 한층 선명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보다 균형 있는 바울 이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IV. 바울의 칭의론과 일 세기 유대교        1. 바울과 일 세기 유대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바울의 칭의론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전통적 해석은 칭의론의 문맥으로 제시된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바울의 구원론 내에 잘 해소되지 않는 긴장 혹은 모순의 위험이 엿보인다. 반면 그런 약점을 보완하면서 나타난 새 관점은 오히려 바울 칭의론의 신학적 차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한 실질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에 대한 새 관점의 강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전통적 관점과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이에 대해서는 선명한 해법을 발견하기 어렵다.55)
필자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바울의 칭의론에 드러나는 두 가지 상이한 현상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울 칭의론의 비판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그 배후에 분명한 신학적 대화상대자를 상정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실제로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적 선동자들일 것이고, 로마서의 경우는 2장에서 비판되는 자칭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이 대화상대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울이 개진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도 달리 이해된다.
바울 칭의론의 대화상대자를 일 세기 유대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따라서 새 관점의 대두 이후 초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논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인상을 풍긴다. 새 관점 학자들은 초기 유대교 내의 율법주의적 논조를 축소하고 “언약적 신율주의”를 그리려 하는 반면,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거기에 담긴 율법주의적 흐름을 강조한다.56)
하지만 여기에는 방법론적 비약이 존재한다. 최근의 연구들은 초기 유대교 내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일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대교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특정한 경향이 바울이 비판한 바로 그 입장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유대교를 넘어, 바울 자신의 논증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성격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바울 이해를 위한 노력은 결국 바울의 텍스트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별 서신의 “미시적” 상황과 일세기 유대교라는 “거시적” 배경의 관계도 보다 신중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가령 갈라디아서에는 “선동자들”이 나타난다. 관점에 따라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일 수도 있고 언약적 신율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이 반드시 당시의 주된 흐름과 일치하는 이들일까? 당시 유대교의 주류와는 다른 독특한 입장을 가진 이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57) 결국 이 역시 갈라디아에서 발생한 목회적 위기 자체에 관한 보다 세밀한 탐구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 바울서신과 “율법의 행위”        위 논점을 구체화시켜 보자. 바울 칭의론의 가장 결정적 개념의 하나가 바로 “율법의 행위”(e;rga no,mou, works of the law)이다. 양 진영 모두에서 이 “율법의 행위”는 일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집약하는 핵심 코드로 활용된다. 일견, 이 개념에 대한 두 관점의 해석은 매우 상이해 보인다. 전통적 관점은 그 속에 담긴 공로주의 혹은 율법주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경향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전자는 율법을 “행하는” 것 혹은 행하려는 것을 문제시하고, 후자는 이 율법이 “유대적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두 입장 사이에 놓인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관점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곧 두 관점 모두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도덕적) 준수를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순종이 완전할 수 없어서 문제가 되거나(전통적 관점) 혹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새 관점), 비판되는 이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전반적 실천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의문시되지 않는다.58) 사실 율법의 사회학적 기능을 부각시킨 던의 초기 진술들은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의 요소로 국한하는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다. 당연히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율법의 행위”에서 율법의 도덕적 요소를 배제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59) 물론 이런 항변의 배경에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을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는 생각, 곧 할례 등의 특정적 요소들과 도덕적 계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 깔려 있다.60)
하지만 이런 “공통의 합의”가 바울이 다루는 상황과 일치하는 것일까? 필자는 여러 번, 율법주의자건 언약적 신율주의자건, “율법 준수에 열심인 유대인들”이란 그림은 바울 자신의 명시적 진술들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바울이 그려내는 갈라디아의 위기는 전통적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로는 설명하기 어렵다.61) 바울은 선동자들이 할례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고(6:13), 갈라디아인들 역시 그럴 의사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한다(5:3). 이런 진술들로부터 강성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읽자면, 갈라디아서의 칭의론은 율법준수에 열심인 이들이 아니라 할례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율법 준수에는 무관심한 이들을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이는 통상적 유대교의 그림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옛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통상적 유대교 상을 배경으로 놓고 바울의 논증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불가불 바울 자신의 진술을 반대로 해석하거나62) 혹은 모순된 해석을 내어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63)
로마서에서의 유대인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서 2-3장의 신랄한 비판은 분명 율법의 “소유”나 할례를 근거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지키지는 않는, 혹은 아예 지킬 의사도 없어 보이는 상황을 겨냥한 것이지, 율법을 지키려고 나름 애를 쓰지만 완벽함이라는 기준에 못 미치는 안타까운 모습(전통적 “율법주의”)이나, 64) 율법을 잘 준수하지만 그것을 배타적 국수주의로 채색해 버린 서글픈 상황(“새 관점”)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바울의 비판이 시종일관 문제 삼는 것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지 순종의 “수준”이나 순종의 “의도”가 아니다. 물론 바울의 칭의론은 로마서 2-3장의 비판을 발판으로 삼아 개진된다.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론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는 2-3장에서 묘사된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65)        우리의 이러한 관찰은 할례나 절기 준수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움직임과 잘 어울린다. 물론 이는 초기 유대교에서 율법이 하나의 전체로 이해되었으며, 할례가 결코 다른 도덕적 계명들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통상적 신념과 어긋난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례를 “새 창조적 삶”(갈 6:15-16)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고전 7:19)과 구별하는 바울 자신의 어법에 주의하는 것이다.66) 바울의 비판은 할례를 강요했던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이 율법의 “다른” 계명들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는 강요하면서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6:13). 할례 역시 율법의 일부지만, 바울은 이 둘을 선명히 구분한다. 무할례자들의 율법 실천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해지듯, 로마서에서도 할례는 “율법의 요구들”(ta. dikaiw,mata tou/ no,mou)을 실천하는 것과 선명하게 구분된다(롬 2장; 8:4). 여기서도 우리의 출발점은 할례와 율법 실천을 구분하는 바울의 논법이라야지, 할례가 율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전제여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적어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문맥에 관한 한, 바울의 논증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할례, 음식규정, 절기 규정 등으로 예증되는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 준수와 구분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67)
전통적 의미의 율법주의자들이든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이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등장한 유대인들은 그런 “모범생” 부류는 아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은 할례나 율법의 소유나 절기준수와 같은 “외면적” 근거로 선민적 정체성을 내세웠던 사람들, 그러면서도 정작 율법 실천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 정체성은 결여했던 위선자들이다. 바울의 율법 비판이 실질적인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면,68) 우리의 결론은 분명하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율법 실천에 열성적인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언약적 은혜론자들,” 곧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구원의 필수적 조건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의 “값싼 은총 교리”를 배경으로 한다.69)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은혜와 믿음을 역설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70)        IV.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믿음과 행위의 구분에서 시작하는 전통적 칭의론에서는 순종의 구원론적 가치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 대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구도를 포기하고 보다 사회학적 논리로 무장했던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과 윤리에 관한 보다 실질적인 해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주의자들의 바울 해석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긴장의 원인이 되는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새 관점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율법주의에서 언약적 신율주의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를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 실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우리는 바울이 실제 율법을 잘 지키려는 사람이나 그런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관찰하였다. 바울의 비판이 “율법 준수”와는 사뭇 다른 과녁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1.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가?        바울 칭의론의 한 축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 율법에 대한 도덕적 실천에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바울의 명시적 진술은 율법 비판에 대한 실질적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저마다의 제안을 내어 놓는다. 물론 대부분의 설명들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를 근거로 학자들이 추론한 것이다. 하지만 의구심이 생긴다. 자신의 핵심적 논지를 숨긴 채 에둘러 말하는 것이 바울의 논증 방법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논점은 입 안에 감추고서, 자기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대화상대자들로 하여금 그 논지를 추측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논쟁의 방식은 아니지 않는가?
가령, 전통적인 관점의 대답은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구약의 인용문 한 군데를 제외하면(갈 3:10; 신 27:26) 그런 생각을 직접 표현한 적이 없다. 율법에 관한 로마서의 긴 논증에서는 이런 인용문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정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바울의 입에서 그런 진술이 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율법의 행위”의 문제점이 사실은 율법 행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실은 “충족되지 못한” 율법의 행위/요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71) 왜 바울은 그 핵심적인 대목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일까?72) 반대로, 새 관점의 주장처럼 바울이 율법의 사회적 기능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이라면, 바울은 왜 한 번도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일까? 또 많은 학자들은 율법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참 해답으로 오셨고 이로 인해 율법은 종말론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라고 말한다.73) 하지만 회심 이전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 언약이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마당에, 그리스도의 존재가 무슨 해답으로 인식되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cf. 히 8:7) 74) 어쩌면 우리가 바울의 명시적인 진술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율법의 행위 속에 어떤 교리적인 독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75) 이 관찰은 중요하다.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론자의 주장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이 “율법의 행위” 자체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할례, 곧 율법의 행위들은 무의미한 것(갈 6:15) 아니면 무력한 것이다(갈 5:6). 로마서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다”는 실질적 한계에 직면한다(롬 8:3). 그래서 율법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갈 4:4) 아니면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의문/글자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된다(롬 2:29; 7:6; 고후 3:6).76)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에 내재한 교리적 혹은 사상적 독소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 무능력, 곧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이다(롬 8:3). 말하자면 율법은, 혹은 “율법의 행위들”은, 나쁘다기보다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를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한다(3:2-5). 율법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칭의의 열쇠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3:21). “율법의 행위”에 속하는 할례나 무할례는 신자들을 의의 소망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다(ivscu,ei, 5:6). 로마서는 육신을 무대로 활동하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율법의 연약함은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그려 보인다(3:20; 5:20; 7:1-15; 8:3).        2. “오직 믿음으로”        믿음이 참된 해답이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무할례 역시 실질적 해답은 아니다. 할례를 받는 아니든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 바울이 믿음에 관해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갈 3:2-5, 14, 5:5).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놀라운 주장 역시 같은 의미다(3:13-14; 4:5-7).77) 물론 이 때 성령은 종말론적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에 이르는 열쇠로 묘사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5:5), 육체의 일들 대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며(5:19-25), 육체가 아니라 성령 안으로 씨를 뿌림으로써 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수확한다(6:7-9).78) 그래서 성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5:16-18, 25), 그리고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 믿음의 달음질을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는다(6:10; cf. 5:7).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유대적 정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이 무익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생각하는 대안은 유대적 정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의 정체성 확보, 곧 외적 조건들이 아닌 참된 순종에 기초한 내면적 백성됨이다. 그래서 참된 대안은 무할례가 아니라 불순종의 존재를 순종하는 존재로 바꾸는 “마음의 할례”다(2:29; 렘 4:4; 9:25-26; 신 10:16; 30:6). 이는 불순종으로 왜곡된 첫 언약과는 달리, 순종을 가능케 하는 새 언약의 표지다(렘 31:31-34). 물론 이 마음의 할례는 사람��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영으로 되는 것이지 의문/글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라 말한다(2:29). 돌판에 율법을 기록했던 옛 언약과는 달리, 성령을 통해 마음 판에 율법을 새기는 새 언약은 에스겔에게 주어진 언약회복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다(고후 3장; 겔 36:25-28; 시 37:31; 40:8; 사 51:7). 생명의 성령을 통해 죄와 사망의 길에서 해방되고, 또 성령을 따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진술은 바로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한 선언이다(8:2-4). 바로 이 새 창조와 갱신의 문맥에서 사죄의 선포가 이루어진다 (렘 31:34 ; 겔 36:25). 바로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 가능해진다(8:1).79)
이러한 변화는 믿음의 작용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성령과 연결되는 것처럼, 로마서에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한 부활의 믿음이었다(4:17-22; cf. 히 11:11, 17-19). 바로 이런 부활신앙 차원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결되고,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린다(4:23-25; cf. 갈 3:6-7).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 부활신앙으로 집약된다(롬 10:9-10).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4:25).80)        물론 생명의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 부활, 곧 새 창조의 역사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은혜로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 개념이 능력 개념과 가까운 이유가 여기 있다.81) 그러기에 할례나 무할례 같은 “외적,” “육신적,” 혹은 “인간적” 조건들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는 무력한 수단들이라는 점에서 칭의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4:1-12).
문제는 이런 인간적인 혹은 “육신”에 속한 “가짜 해답들”을 진짜 해답으로 착각할 경우다. 유대인들의 경우 이는 육신적 할례와 외면적 정체성이 구원을 담보한다는 착각으로 나타났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이라는 논지와 결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무익한 것을 첨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믿음을 포기하고 성령을 버렸다는 것이다.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상실하는 것(갈 5:15, 26), 믿음과 성령으로 유지되었어야 할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라지는 것(4:19), 이것이 바로 위기의 본질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잘 살고 있다면 할례를 받든 말든 문제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갈라디아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끝마치려 하는” 배교의 위험에 처했고(1:6; 3:3), 이런 위기의 실제적 원인은 다름 아닌 할례 문제였다. 칭의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로마서에서는 할례가 긍정적으로(칭의의 확증) 해석되는 것과는 달리(3:1-2; 4:11),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 자체가 믿음의 부정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의 이런 특수한 정황 때문이다(5:2-4). 그래서 바울의 궁극적 해답은 “할례 받지 말라”는 상황적 조치를 넘어,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본질적인 요구로 집약된다(5:16-25). 그것만이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이라 불리는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율법에 대해 가진 복음의 차별성은 생명의 성령의 역사다(3:1-18). 바울은 이 차별성을 “능력”이라 불렀고(롬 1:16; 고전 1:18, 24; 2:1-5),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임재”를 나타내는 “성령”에 대한 신념으로 집약된다. 바울의 이런 신념이 율법과 관련해서는 “성령과 의문”의 이항대립으로, 보다 윤리적 문맥에서는 “성령과 육체”의 이항대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음과 생명을 주지 못하는 온갖 인간적인 가치들과의 대결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의 언어는 바로 이런 초월적인 창조의 역사, 첫 창조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마지막까지 이르는 생명의 역사를 향한 초대다.        1) 어떤 해석이 (자신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외쳤던 개혁주의자들보다 “전통”에 집착했던 예전 카톨릭의 논법에 가깝다. 전적부패 교리를 믿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신학적 거장들 역시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직 성경”을 믿었던 칼빈은 이런 비판적 검증의 태도를 “예의 없음”과 혼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행 17:11에 대한 그의 주석을 보라). 교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서적 호소보다는 sola scriptura 원리에 대한 실천적 고백이 더 필요해 보인다.
2)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Weber, Bousset, Bultmann 등과 같은 이름들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최근 이런 전통적 관점을 대변하는 주요 연구서로는 T.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Grand Rapids: Baker, 1993); S. Kim, Paul and the New Perspective: Second Thoughts on the Origin of Paul'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2002); S.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Grand Rapids: Eerdmans, 2004); “Justification by Faith Is the Answer: What is the Questio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70 (2006)), 197-217 등을 들 수 있다.
3)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4)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바울 이해가 샌더스의 유대교 묘사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곤 한다. 가령, J. D. G. Dunn, “New Perspective on Paul,” i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1990), 183-214; H. Räisänen, Paul and the Law (1987) 등.
5) 대표적으로, D. A. Carson et al. eds.,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2001). 또한 Frank Thielman, Paul and the Law: A Contextual Approach (1994), ch. 2.
6) 이 문장은 자주 인용된다. “In short, this is what Paul finds wrong in Judaism: it is not Christianity.” Palestinian Judaism, 552. 그는 바울이 유대교의 “난국”으로부터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from plight to solution”), 그리스도라는 해답으로부터 유대교라는 문제로 이행했다고 말한다(“from solution to plight”).
7)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Minneapolis: Fortress, 1983); Paul (Oxford: OUP, 1991).
8) Räisänen Law, 1987은 바울의 율법 비판이 전혀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Tübingen: Mohr-Siebeck, 1984), 336-358; S.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Grand Rapids: Eerdmans, 2004), 164-177.
9) Dunn, “New Perspective on Paul”; New Perspective on Paul: Collected Essays (Tübingen: Mohr-Siebeck, 2005); Romans. 2 Volumes (Dallas: Word, 1988);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Hendrickson, 1993);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10) 몇몇 대표적 이름을 들자면, Krister Stendahl, E. P. Sanders, J. D. G. Dunn, N. T. Wright, T. L. Donaldson, Don Garlington, C. Stanley, J. M. G. Barclay 등.
11) 최근 새 관점에 대한 복음주의적 비판의 주 목표물인 라이트(N. T. Wright)는 자신을 비판적 새 관점론자로 생각한다. 가령, “New Perspectives on Paul” (paper presented at the 10th Edinburgh Dogmatics Conference, 25-28 August 2003).
12) F. Watson, “No New Perspective,” (An unpublished paper delivered at the British New Testament Conference, Manchester, September 2001). TULIP으로 요약되는 칼빈주의 오대교리에 빗대어, 왓슨은 이런 다섯 가지 특징을 동일한 방식으로 요약한다 (Total Travesty, Unconditional election, Loyalty to the law, Inclusive salvation, Presuppositionless exegesis).
13) 새 관점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M M. Mattison, “A Summary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D. Garlingto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Appraisal Two Decades on” (모두 (       
http://www.thepaulpage.com
에서 볼 수 있다).
14) 가령, 칭의론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에서 생겨난 개념임(Stendahl); 바울의 율법 비판은 배타주의라는 “사회적” 기능에 집중(Dunn), 칭의 개념 자체가 구원론 아닌 “교회론적” 개념으로 재정의 됨 (Wright).
15) 샌더스 이전의 사례로는 M. Barth, “Jews and Gentiles: The Social Character of Justification in Paul,” in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5 (1968), 241-267; K.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hiladelphia: Fortress, 1976). 바울을 유대인-이방인 관계 속에서 읽었다는 점에서 어떤 학자들은 Stendahl을 “새 관점”의 실질적 선두로 간주한다. N. T. Wright 또한 자신의 관점이 샌더스 이전에 형성된 것임을 자주 강조한다. 물론 이 흐름은 Wrede와 Schweitzer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Westerholm, Perspectives, 101-116.
16) 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3장 28절과 29절은 접속사 “혹은”으로 연결된 동일한 논증이다.
17) 물론 이는 사회학적 관점만으로는 로마서의 전모를 드러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Cf. Kim, New Perspective, 55.
18)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칭의론이 거의 대부분 유대교 비판 및 유대인/이방인의 하나됨이라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너무 뻔해서 오히려 잘 안 보인다”는 라이트의 관찰은 정당하다. “New Perspectives,” 3.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대인/이방인 문제는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였다. 본래 구원은 유대인의 것이었고, 이방인의 구원은 할례를 통한 개종을 전제했다(15:1). 최초의 선교 역시 유대인들에게로 국한되었다(행 11:20). 하지만 무할례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역사는 유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수용하도록 이끌었다(11:18). 이때부터 교회 내에는 성령을 받은 이상 할례가 무용하다는 “열린” 입장과 일단 들어왔으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이는 결국 예루살렘 공회의로 이어졌다(행 15장). 물론 이 회의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는 태도일 것이다.
19) 가령 M. Seifrid, Christ, Our Righteousness (Downers Grove: IVP, 2000), 68: (행위와 할례라는) “two distinct issues”; Kim, New Perspective, 56: “the corollary of the main point”; S. Westerholm, Perspectives, 281, n. 46, 392; T.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145, 147. 그렇다면 바울이 두 가지 별개의 이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자세한 논증은 필자의 “‘율법의 행위’는 율법 준수를 포함하는가?” '신약논단' 14/3(2007), 특히 693-698 참고.
20) Cf. Leslie Newbegin, Signs and the Rubble: The Purpose of God in Human History (Grand Rapids: Eerdmans, 2003), 26: “We have to find a view [of salvation-history] which does justice to both aspects of the problem-individual and social-and which resolves the apparent contradiction between them.” N. Perrin, “Review Article: A Reforme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WTJ 67 (2005), 386에서 재인용.
21) Andrew Das, “Beyond Covenantal Nomism: Paul, Judaism, and Perfect Obedience,” Concordia Theological Journal 27 (July, 2001), 234-252; Mark A. Seifrid, Christ, Our Righteousness: Paul's Theology of Justification (Downers Grove, IL: IVP, 2000) 등.
22) D. Boyarin, A Radical Jew (1994); Terence Donaldson, Paul and the Gentiles: Remapping the Apostle's Convictional World (Minneapolis: Fortress, 1997); 프랑스의 철학자 Alan Badiou는 “보편주의의 정초”라는 관점에서 바울의 텍스트를 해석한다. 현성환 역,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서울: 새물결, 2008). 아래 각주도 참고.
23) E. C. Park, Either Jew or Gentile: Paul's Unfolding Theology of Inclusivit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9-20.
24) D. Boyarin, A Radical Jew: Paul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Berkel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는 바울의 관점을 “특수한 보편주의”(particularistic universalism)이라고 불렀다.
25) Dunn, “New Perspective,” 200.
26) Watson, “Not the New Perspective,” 5. 물론 이는 전통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전형적 비판이다.
27) 가령, Sanders, Law, 18, 20; Paul, 50.
28) Dunn, Theology of Paul, 632. 그는 M. Hooker, “Paul and Covenantal Nomism,” in M. Hooker et al. eds., Paul and Paulinism. C. K. Barrett FS. (London: SPCK, 1982), 47-56을 따르고 있다.
29) “New Perspective on Paul,” 183-214.
30) Wright, Climax, 137-156; Wha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119, 130, 132; Paul: Fresh Perspectives (London: SPCK, 2004), 110-122, 139-140; “The Shape of Justification” (available online at
http://www.thepaulpage.com/the-shape-of-justification
): “not God's act of changing the heart or character of the person [but] God's declaration that the person is now in the right, which confers on them the status ‘righteous’.” 정확히 말하면, “칭의”가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 바울 복음 자체의 구원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가령, J. V. Fesko,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 T. Wright” available online at
http://christianity.com
. 구원론적 차원 자체를 상대화하는 일부 새 관점 학자들에 대해서는 라이트 자신도 비판적이다. 그의 독특한 용어 사용 방식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기우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1) 졸저, Eschatology, 7에서 지적한 바 있다. 또한 Peter Enns, “Expansion of Scripture,” in Variegated Nomism, 98.
32) Westerholm, “Justification by Faith is the Answer - What Is the Question?” Concordia Theological Journal 70 (2006), 197-217. Simon Gathercole은 새 관점 학자들이 칭의 교리의 신학적 “내용”(content)과 그 사회적 “적용”(application)을 혼동했다고 본다. “What Did Paul Really Mean?,”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7, 2007), 22-28(26). 새 관점 학자의 하나인 Don Garlington은 이 점에서 라이트를 비판한다.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Appraisal Two Decades On,” 12-13; 최흥식, “왜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통한 칭의를 부정하는가?” 『신약논단』 11/1 (2004년 봄), 181-203 (186, 203).
33) Dunn, Theology of Paul, 372: “Paul expounds justification by faith in a way which not only addresses the argument over the terms of Gentile acceptance, but also presses beyond to provide a fundamental statement of human dependence on God.”
34) Dunn, “Works of the Law,” 113. Cf. Kim, New Perspective, 63.
35) J. M. G. Barclay, Obeying the Truth: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88), 246-247. 새 관점주의자로서 그는 유대인/이방인 관계가 핵심 논지이며, 믿음과 행위에 관한 진술은 부차적인 것이라 여긴다. Bruce Longenecker, The Triumph of Abraham's God: The Transformation of Identity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98), 180-181.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전통적 읽기와 새 관점, 또 구속사적 관점과 묵시론적 관점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36) 구속사적 “연속성”은 던의 신학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새 관점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는 라이트의 경우 창조와 이스라엘 선택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하나의 큰 “스토리”라는 “언약적” 틀에서 바울을 해석한다. 박문재 역,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고양: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 Climax; Paul: Fresh Perspectives (London: SPCK, 2004).
37) 이런 논리는 야고보적 반대에 대한 변호와 해명의 차원에서 주로 등장하며, 구원론 자체의 진술에서는 통상 믿음과 은혜가 행위의 대조 개념으로 제시된다. 종종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는 진술로 해결하지만, 고린도나 갈라디아에서 보듯, 참된 믿음이라고 해서 반드시 순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신자들 편에서의 단호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갈 5:24; 고전 9:24-27; 롬 8:13).
38) 많은 경우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인내의 필요성보다는 구원의 확실성에 관한 교리로 이해되고, 행위심판은 구원 아닌 상급을 결정하는 절차로 이해되곤 한다.
39)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믿음과 사랑이 혼용되거나 혹은 단일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에 관해서는 졸저, '행위 없는 구원? - 새롭게 읽는 바울의 복음' (서울: SFC, 2006), 119-124 참고.
40) “믿는 것이 곧 순종”이라는 해석은 바울의 어법을 무시한 것이다(5:18-19; 6:12, 16).
41) 칼빈에 의하면, 믿음과 행위가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함께 있는 것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이 구분은 개념적 수준에 머문다.
42) 졸저, Eschatology, 205, n. 100을 보라. Klyne Snodgrass, “Justification by Faith - To the Doers,” NTS 32 (1986), 72-93의 경우도 “율법주의적” 순종과 “성령의 인도에 따른” 순종이라는 추상적 이분법에 호소한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신한 개념이 아니라 양자의 실제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43) Kim, New Perspective, 161.
44) C. K. Barrett, Freedom and Obligation (London: SPCK, 1985), 46; Barclay, Truth, 140-145.
45) 물론 이것이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서 느낀 루터의 고민이었다. 문제는 바울서신 내에서도 이런 식의 긴장 혹은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양자의 통합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야고보를 상대화함으로서 일관성을 확보했다. 물론 칼빈은 그런 해법 대신 믿음과 행위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말로 “해결”한다. 각주 41 및 52 참고.
46) 미처 버리지 못한 유대교의 잔재라는 주장도 있고, 원론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원리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런 판단을 위한 명확한 주석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최근에는 옛 관점과 새 관점을 막론하고 이 진술은 종말론적 칭의로 해석된다. 가령, Westerholm,. Perspectives, 267.
47) 이는 신약에서 가장 일관되게 드러나는 주제 중 하나다. 야고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 행함과 천국을 연결하는 마태복음, 심판의 경고와 함께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히브리서, 행위심판의 원리 아래 인내와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떠올릴 수 있다.
48) 바울신학의 중심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being-in-Christ) 혹은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라고 보고, 칭의 교리는 “종속적 층”(subsidiary crater)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던 Schweitzer는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삼는 이들은 “윤리를 도출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속 개념”만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행위 뿐 아니라 행위 ��반을 거부하는 믿음 개념으로는 윤리 이론으로 가는 통로를 찾을 수 없다”(225). 이를 위해서는 “원래 선행을 산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사람이 어떻게 칭의를 통해 선행의 능력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지만” 칭의 교리 자체는 그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295).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아무 염려할 것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중심적 구속 교리에서 윤리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225). Tran. by W. Montgomery,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Lond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1931). Schweitzer의 설명은 칼빈이 성화와 칭의를 구분하고, 이 모두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과 상통한다.
49) 새 언약의 “새로움”은 하나님의 태도가 요구에서 은혜로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가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이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다. Cf. William Dumbrell, 장세훈 역, '새 언약과 새 창조' (서울: CLC, 2003/1985), 105-149. 전통적 관점을 옹호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인정된다. 일부 개혁주의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 계시의 연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구약 이후의 “유대교”에서 심하게 왜곡되었으며, 따라서 복음은 이렇게 왜곡된 종교와는 상반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R. Gaffin, “A Reformed Critique of the New Perspectiv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2 (2000), 121-141. 하지만 바울은 유대교 아닌 율법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유대교가 은혜를 몰랐다는 주장은 많은 경우 고대 유대교에 대한 “공감적 읽기”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50) Dunn, Theology of Paul, 365-366; Wright, Climax, 156. 또 “An Evening Conversation on Paul with James D. G. Dunn and N. T. Wright” (
http://www.thepaulpage.com/Conversation.html
)에서 두 사람은 행위심판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 개혁주의 진영에서 오히려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한다.
51) 칭의를 믿음과 연결하는 칼빈도 행위가 구원의 “종속적 원인들”(causae inferiors, inferior causes)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혹은 구원의 서정에서 신자의 선행은 영생에 이르는 필수 단계이기도 하다. “행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도 아니라”(기독교강요 3.16.1)는 칼빈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졸저, “칼빈의 칭의론과 ‘행위’: 행위 관련 구절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 '신학지평' 22 (2009), 221-244. Cf. 칼빈에게서 “종속적 이행칭의 교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제안하는 Steven R. Coxhead, “John Calvin's Interpretation of Works Righteousness in Ezekiel 18” WTJ 70 (2008), 303-316; “John Calvin's Subordinat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Works,” WTJ 71 (2009), 1-19.
또한 Gathercole, Where Is Boasting (Grand Rapids: Eerdmans, 2002), 124-134; K. Yinger, Paul, Judaism, and Judgment according to Deeds (Cambridge: CUP, 1999), 143-182.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도 대부분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가령, Schreiner, “Old Perspective,” 147-151. 야고보서의 메시지를 생각하면 여기에 토를 달 이유는 없을 것이다.
Cf. Wright, “New Perspective on Paul” (6-7): “I am fascinated by the way in which some of those most conscious of their reformation heritage shy away from Paul's clear statements about future judgement according to works. [중략] But he is still clear that the things he does in the present, by moral and physical effort, will count to his credit on the last day, precisely because they are the signs that the Spirit of the living Christ has been at work in him. We are embarrassed about saying this kind of thing; Paul clearly is not. What on earth have happened to a sola scriptura theology that it should find itself forced to screen out such emphatic, indeed celebratory, statements?”
52) 개혁주의의 이름으로 행위심판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이루어진다. 가령, Richard Phillips, “Five Arguments Against Future Justification According to Works,” Reformation 21 (2009). 라이트를 겨냥한 이 글에는 설득력 없는 자의적 주석이 자주 보인다. 그의 칼빈 읽기 또한 정확하지 않다. 가령, 그는 롬 2:6-13 전체를 “맞지만 실현불가능한” 원칙으로 보는 것이 “개혁주의적” 입장이라 강변하지만, 칼빈은 이를 “율법”과 관련된 13절로 국한하고, 6-11절은 신자들의 선행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다. 7절 주석에서 칼빈은 사탄의 공격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T]he Lord will give eternal life to those who, by attention to good works, strive to attain immortality” (Battle의 영역). 행위의 필요성에 관한 칼빈의 선명한 입장에 비해,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루터란보다 더 루터란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같다.
53) 최근 일부 개혁주의 내에서 라이트를 신학적 주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하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신학적 작업이 개혁주의의 지평을 넓히는 소중한 기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들린다. 가령, Douglas J. Green, “N. T. Wright-A Westminster Seminary Perspective” (March, 2004) available online at
www.ntwrightpage.com/Green_Westminster_Seminary_Perspective.pdf
; Rich Lusk, “A Short Note on N. T. Wright and His Reformed Critics” available at
http://www.hornes.org/theologia/rich-lusk/a-short-note-on-n-t-wright-his-reformed-critics
.
54) 이러한 작업은 더 나아가 마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및 요한계시록과 같이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순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신약 내의 다른 전통들과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55) 전통적 입장에서는 유대인/이방인의 문제가 “부차적”인 반면, 새 관점에서는 믿음과 행위에 관한 “일반화된” 논증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과연 바울이 상이한 두 쟁점을 오가고 있는 것일까?
56) 가령, T. Schreiner, The Law. 앞에서 언급한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다소 신중하다.
57) 가령 Walter Schmithals는 갈라디아서가 율법과는 무관한 영지주의적 논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Judaisten in Galatien?,” ZNW 74 (1983), 27-58. 라이트는 갈라디아서의 본문에 유념하면서, 선동자들이 요구한 “율법의 행위”는 바리새적 태도나 쿰란공동체가 요구한 “율법의 행위”와 달리 “the most basic and Israel-defining precepts of the written Torah itself: sabbath, food laws, circumcision”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그는 바울서신의 구체적 정황에 한결 더 민감한 면모를 보여준다. “4QMMT and Paul: Justification, ‘Works,’ and Eschatology,” History and Exegesis: New Testament Essays in Honor of Dr E. Earl Ellis for His 80th Birthday, ed. Aang-Won (Aaron) Son. (New York and London: T&T Clark, 2006), 104-132.
58) 라이트 역시 로마서의 문맥에서는 이를 “토라 준수” 혹은 “토라의 실천” 개념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QMMT,” 122, 130; Climax, 149-150.
59) J. D. G. Dunn,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358, n. 97.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다소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듯하다.
60) Cf. P. J. Tomson, ‘If This Be from Heaven...’: Jesus and the New Testament Authors in Their Relationship to Judaism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1), 350.
61) Eschatology in Galatians, 214-212에서 처음 개진하였다. 사실상 같은 논점을 다소 다른 형태로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은 율법준수를 요구하였는가?” '한국기독교신학논총' 56 (2008), 59-85에 소개하였다. 이 점에서 필자의 관점은 Michael Cranford, “The Possibility of Perfect Obedience: Paul and And Implied Premise in Galatians 3:10 and 5:3,” NovT 36 (1994), 242-258과 유사하다. 물론 필자는 구원론적 차원을 배제하려는 그의 경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62) J. Barclay, “Mirror-Reading a Polemical Letter: Galatians as a Test Case,” JSNT 31 (1987), 73–93; Obeying the Truth, 36-74. 이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졸저, Eschatology, 207-209. 6:12-14를 “율법 준수와 믿음의 대조”라 말하는 김세윤의 언급도 이해하기 어렵다. Kim, New Perspective, 152.
63) 6:13과 5:3에 대한 학자들의 모순된 주해를 지적한 것은 Eschatology, 209-211, 특히 각주 129. 칼빈의 경우, 5:3절은 할례를 입문의식으로 삼아 율법 준수를 권장한 거짓 사도들과 관련된다. 여기서 할례가 율법 준수의 의무와 결합된다는 사실을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바울이다. 또 6:13은 율법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실상 “의식들”(ceremonies)에만 열심을 내고 율법 지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의 “신실하지 못함”(insincerity)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는 통상적 의미의 “율법주의자”와는 다르지 않은가?
64) 유대인들이 언약적 신분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do not)는 것이지 노력하지만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다”(cannot)는 말이 아니다. 주석가들은 자주 이 점을 곡해한다. 가령, D. Moo, Romans, 147-148; A. Das, “Beyond Covenantal Nomism,” 246; Kim, New Perspective, 58, 143; Westerholm, “Justification,” 214.
65) “‘율법의 행위’는 ‘율법 준수’를 의미하는가?” '신약논단' 14/3 (2007 가을), 679-708; “마음의 할례와 행위” '신약연구' 7/2 (2008), 311-340. Cf. Cranford, “Abraham in Romans 4: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NTS 41 (1995), 71-88. (이 글 자체는 로마서 4장에 관한 것이다).
66) Dunn, Theology of Paul, 365: “분명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선행’을 결부시키지 않았으며, 이 두 표현들은 서로 다른 하부구조 속에서 작용하였다.”
67) 물론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그들 나름의 “행위”로 구성된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눅 18:11-12). 하지만 예수나 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사람에게 보이려는”(마 23:5) 혹은 “사람에게서 칭찬을 기대하는”(롬 2:29) 이런 태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마 23:3, 23; 막 7:6-13). 물론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상황에서는 그런 위선적 “덕목”조차도 전제하기 어렵다(롬 2:21-24).
68) T.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Condordia Jounal (Spring, 2009), 145: “Paul does not waste time in his letters to critique problems that did not exist.”
69) 바울의 주장은 모두가 죄 아래 있으므로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라는 외적 표지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죄의 심각성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할례 등의 “외적” 자랑거리들(빌 3:4-6)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견해는 Ulrich Wilckens의 관찰과 상통한다. 그의 견해는 Westerholm, Perspective, 154-159에 요약되어 있다.
70) 상술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비판은 순종 없는 삶을 외적 종교성으로 덮으려 했던 이스라엘을 향한 구약 선지자들의 준엄한 질책들 (가령 사 1:10-20; 렘 7:1-11),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심판을 피할 것으로 기대했던 유대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했던 세례요한의 비판(마 3:7-12; 눅 3:7-14) 및 “말만하고 행하지 않으며”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웠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곧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팽개친” 이들,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막았던”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시대를 넓히자면, 루터와 칼빈 역시 비록 “행위”라는 포괄적인 틀을 생각했지만, 그들의 실제 비판은 대부분 당시 교회의 “비도덕적” 행태 및 이와 결합된 공허한 “의식들”(ceremonies)에 집중되었다.
71) Westerholm, Perspectives, 316.
72)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바울의 관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위 각주 61과 65에 제시된 Cranford의 논문들 참고. 할례와 같은 “외적” 조항들에만 집착하는 이들에게 율법 “전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순종의 수준이 “완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73) 가령, Wright, “Gospel and Theology in Galatians,” in L. A. Jervis et al. eds., Gospel in Paul: Studies on Corinthians, Galatians, and Romans for Richard N. Longenecker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222-239; Garlington, “New Perspective,” 10, 14, 18 등.
74) S. Westerholm, “Justification by Faith - What is the Question?”
75) 사도행전의 바울은 “무할례자”였던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세언약 아래 놓이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행 16:3). 로마서에서 무할례자 아브라함은 칭의 후 할례를 받았지만(창 15:6; 17장), 이는 은혜로부터의 추락이 아니라 도리어 칭의를 인증하는 절차였다(롬 4:11).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가 그리스도와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2:21; 5:2-4), 이는 교리적 원칙이 아니라 갈라디아의 상황을 반영하는 조치다. 곧 할례가 믿음의 부인을 의미한다는 교리적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 할례 때문에 정작 중요한 복음의 진리,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5:6)과 “성령을 따르는 삶”(3:3)이 훼손당하는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할례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건강을 해치는 상황이어서 할례를 금하는 것이지, 할례 자체가 교리적으로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Eschatology, 191-204.
76) Scot Hafemann, Paul, the Law, and the History of Israel (Tübingen: Mohr Siebeck, 1995), 438-451.
77) 바울은 자주 십자가를 새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졸저, “죽음의 변형: 초대 부활공동체의 죽음 이해 -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신약연구' 8/4 (2009), 639-672 참고.
78) 성령이 (현재적) 칭의의 증거이긴 하지만,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실제 논점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을 이루어진 칭의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는 의의 소망”의 열쇠로 묘사한다(5:5; 3:3과 빌 1:6). 칭의는 본래 미래적 개념이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런 미래적 칭의 개념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갈 2:17; 5:5; 롬 2:13; 4:24; 5:19; [P46에 의하면] 빌 3:12. 또 “칭의”와 “구원”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약 2: 14, 24).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의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 상속” 및 “영생”과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반면 칭의 개념을 현재로 확장하는 로마서에서는 “구원”이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다(5:9-10). 물론 이는 사상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동일한 사상이 다소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복음서의 “지옥”이 바울서신에서 “죽음” “멸망” “썩어짐” 등의 개념으로 달리 표현되는 것과 같다).
79) 졸저, “마음의 할례와 행위” '신약연구' 7/2 (2008), 311-340.
80) '행위 없는 구원', 235-285.
81) '행위 없는 구원', 286-342.        권연경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        오성종 교수 (칼빈대학교)        1. 권연경 교수(= 이하에서 ‘저자’)는 발표논문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 - 주석적 평가와 제안”에서 최근 국내외 신학계에서 활발한 토론이 되고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찬반양론에 대한 간단명료한 소개와 함께 사려 깊은 문제제기와 나름대로의 신중한 대안제시를 하고 있다. 저자는 ‘바울의 칭의론에 관한 새 관점’(= 이하에서 ‘새 관점’)에 관하여 논의하려할 때,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해석과 전통적 교리에 대하여 비판과 수정을 제안하려는 입장을 보이면, 대화도 해보기 전에 처음부터 경계하며 전통수호를 위한, 경직된 (수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우리나라의 신학계와 교계의 분위기를 염려하며 극히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어떤 해석이 (자신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외쳤던 개혁주의자들보다 ‘전통’에 집착했던 예전 카톨릭의 논법에 가깝다”고 우려하면서 “교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서적 호소보다는 sola scriptura 원리에 대한 실천적 고백이 더 필요해 보인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적어도 ‘한국개혁신학회’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는 외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2. 저자의 논문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저자는 논문에서 새 관점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새 관점의 비구원론적 칭의론 해석의 약점을 지적하고, 또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적 칭의관의 정당성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자의 윤리적 삶과 행위의 종말론적 의미를 소홀히 하였던 약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치우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성경신학적 사색과 함께 치열한 학문적 논쟁을 전개하면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대안적 해석의 길을 가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은혜의 선택사상에 근거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태도로 율법을 준행해야 최후심판 때 구원을 받는다는 초기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은 신자가 성령을 통하여 순종의 표시로 율법준수와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에 유의하기를 제안한다. 교회사 안에서 흔히 등한시되어왔던 이 구절들에 근거하여 진지한 신학적 사색을 할 때에 율법과 복음, 믿음과 행함, 칭의와 심판의 이분법적 곤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저자는 바울이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와 의식적 율법행위만 강요했던 갈라디아와 로마교회의 유대인 선동자들을 비판한 것은 선민적 정체성에 근거하여 “값싼 은총 교리”와 외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던 자들에게 향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소용이 없고 다만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이 중요하므로, 성령을 따라 의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사실 오늘날 한국과 서양의 기독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행함과 순종의 삶이 없으면서도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었으니 열매없는,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서도 최후 심판 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허망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저자와 함께 우리는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며 심판 날을 대비하여 종말론적 소망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과 선행의 삶을 힘써야 한다고 촉구하는 바울과 신약의 여러 저자들의 교훈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때라고 본다.        4.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저자에게 질문할 것을 적어본다:        (1) 새 관점은 루터나 칼빈이 초기유대교를,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의 은혜의 복음에 대조되는, 율법의 행위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한 공로주의적 율법주의 종교라고 이해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저자도 이러한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루터나 칼빈이 이신칭의론을 말할 때 초기유대교를 비판한 것도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유대주의자들 내지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가끔 가다가 부정적인 평가를 언급했을 뿐이다.        (2) 또 저자는 전통적 관점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에 매여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관통하는 ‘연속성’(continuity)”을 바로 보지 못하던 것을 새 관점을 통해 교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음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첫 언약에 담긴 은혜의 무게가 과소평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바울의 복음 속에 담긴 윤리적 책임의 중요성 또한 상대화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신구약성경과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던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과 복음’은, ‘율법과 은혜’나 ‘율법과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과 함께, 실제로 자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강조되어 나란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때 루터는 단지 칭의론과 관련시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의 교훈이나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등한히 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데는 어떤 율법의 행위나 선행도 소용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효능이 있으며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조하여 sola fide와 sola gratia를 말한 것이다. (루터의 롬 3:28의 번역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대한 변증서인 ‘번역자가 보내는 회신 편지’[1530년]와 ‘1531년 갈라디아서 강의’ 참조!) 한편 루터는 갈라디아서 5:6의 주석에서 “믿음에 사랑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참되게 믿는 것일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3) 바울의 칭의론 진술에서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의 칭의 교훈을 읽었던 전통적 관점은 유대인/이방인의 사회학적 갈등 문제 취급의 문맥에서의 (사회학적 의미가 있는) “율법의 행위” 즉 할례와 음식법과 절기법의 준수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론을 가르친 바울의 본래적 의도를 새 관점에서부터 배워 논점을 수정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언은 적어도 칼빈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칼빈은 바울의 칭의론 진술의 사회학적 배경을 정확하게 고려하였고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그러한 의미로 바로 이해하였음을 그의 주석에서 증거해준다. 루터에 대해서 변증한다면,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거의 강해설교 성격이어서(예를 들면, 2:16과 2:20은 각기 10쪽을 훨씬 넘는 분량임!) 당시 치열했었던 투쟁적인 상황 속에서 교황파의 오류를 지적하며 예언자적 정신으로 주석을 쓴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시대적 교회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는데도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교회에게 외쳤던 예언자적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4) 저자는 “종교개혁 이후 구원론 논의를 주도해 온 ‘행위언약 vs. 은혜언약’의 이분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행위언약’을 모세의 율법언약으로, ‘은혜언약’을 복음으로 이해하여 말하고 있는데, 용어들의 개념이해에 혼동이 있는 것 같다. 언약신약에서 고유하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행위언약’으로는 타락 전의 아담과의 언약을 가리켰고, ‘은혜언약’으로는 창 3:15를 비롯하여 일체성과 연속성을 가진, 이후의 모든 언약들(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새 언약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던 것이다.         (5) 저자는 “칭의는 본래 미래적 개념이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런 미래적 칭의 개념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면서 해당 성구로 (본문비평상의 문제가 있는 빌 3:12을 제외하고) 다음 구절들을 예로 들었다: 갈 2:17; 5:5; 롬 2:13; 4:24; 5:19. 이 중 ① 갈 2:17의 경우δικαιωθῆναι는 부정과거 수동태 부정사로서 문법상으로나 문맥상으로 확실하게 미래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맥상 오히려 지상에서 현재적으로 ‘의롭게 됨’ 내지는 ‘의인으로 인정받음’(passivum divinum!)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도 믿음으로 현재 의인이 되었으므로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할 수 있다는 뜻임). ② 롬 2:13의 경우 δικαιωθήσονται는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므로 미래에 일어날 칭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내세의 종말에 율법준수 여부에 따라 칭의가 주어질 것이라는 유대교적 관점을 따라 논하고 있는 문맥 가운데 있는 것이므로(Fitzmyer 등과 함께)), 바울 고유의 기독교 칭의론에 대한 진술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③ 롬 4:24의 경우 μέλλει λογίζεσθαι는 표면상으로는 명백하게 미래에 칭의가 이뤄질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 시간적인 미래의 사건을 나타낼 수도 있고 논리적 미래의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문맥에 속하는 5:1에서 신자의 현재적 칭의(δικαιωθέντες,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의 축복된 현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논리적 미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Moo 등). ④ 롬 5:19의 경우 δίκαιοι κατασθήσονται에 대해서도 4:24과 똑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Moo 등과 함께)). ⑤ 갈 5:5의 경우 “우리는 ἐλπὶς δικαιοσύνης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종말론적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1) (윤리적인) 의로운 정도/상태에 따라 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 2) 현재의 칭의 사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공개적으로 선언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 3) 롬 5:9에서와 같은, 칭의받은 자가 내세에 받게 될 ‘구원’에 대한 소망; δικαιοσύνης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4) ‘의롭게 된 자’(abstract for concrete!)가 장차 누리게 될 것을 소망함, 또는 5) ‘(이미 이루어진) 칭의’의 축복이 바라는 소망(genetivus epexegeticus!) 등. 이들 중 1)과 2)는 문법적으로는 가능성이 있겠으나 바울에게서 그와 같은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으므로, 그리고 3)은 ‘칭의’와 ‘구원’의 두 개념이 바울에게서 일반적으로 상호교환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므로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4) 또는 5)의 해석이 바울의 전체의 칭의론 진술들과 가장 잘 조화될 수 있다고 본다(Fung 등과 함께)). 그러므로 해석의 여러 가능성을 두고 논란이 있는 갈 5:5을 예외적으로 미래적 칭의를 말하는 구절로 인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6) 저자는 Wright와 Barrett 등과 같이 신자에게 현재적 칭의가 개시의 의미로 있고 최종적 칭의가 심판 때에 확인의 의미로 있게 될 것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신자의 칭의가 믿음과 동시에 (중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 성령의 내주 등의 은혜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지상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사건으로 바울서신에서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여러 구절들이 있다: 고전 6:11; 고후 5:21; 빌 3:9; 롬 3:21-26; 5:1,9; 8:30. 특히 갈 2:15-4:31까지의 바울의 칭의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은혜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다 같이 칭의를 얻어 아브라함의 자손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성령을 받으며 칭의를 얻게 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롬 4장에서도 신약시대에 믿음으로 의롭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인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현재적으로 칭의를 얻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바울의 칭의론 진술들에 기초하여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권하고 싶다.        (7) 저자는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르는 삶과 다른 수 없다”고 말하면서 롬 8:4을 참조시키고 있는데,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신학적 사고는 아닌 것 같다. 바울은 분명히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뤄진다”(롬 8:4),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갈 5:18), ”사랑은 (이웃사랑의) 계명들/율법의 완성이다“(롬 13:8-10; 갈 5:13-14) 등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 말들이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거나 계명/율법의 실천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못된다. 오히려 성령으로 사는 삶과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행함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고 더 포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 22:40에서 예수께서 사랑의 계명 위에 모든 계명들이 매달려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와 바울의 교훈이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은 사람이 아니다“는 진술의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저자는 바울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키지 않고 믿음과 대조시켜 ‘율법의 행위(ἔργα νόμου)’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을 뿐임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 말하지만, 정작 바울은 ‘믿음의 행위’(ἔργον πίστεως)”(살전 1:3; 살후 1:11)를 말하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준수의 '행위들' 또는 윤리적/선한 행위들(예: 엡 2:10)을 말할 때는 흔히 복수 ἔργα(‘works,’ 독어: ‘Werke’)를 쓴다(롬 2:6; 3:20; 4:2; 갈 2:16; 엡 2:10; 딤전 2:10; 딤후 4:14). 반면에 추상명사로 ‘활동/사역’을 말할 때는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단수 ἔργον(‘action,’ 독어: ‘Betätigung’)을 쓴 예가 많다(예: 롬 2:7,15; 14:20; 고전 3:13-15; 갈 6:4; 엡 4:12; 살전 1:1; 살후 1:11)(W. Bauer 사전 및 L. Mattern, Das Verständnis des Gerichtes bei Paulus 참조!). 살전 1:3과 살후 1:11의 경우는 후자의 용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롬 14:22-23에서처럼 믿음에서 나온 활동/행동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9) 저자는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고 있는 πίστις를 ‘믿음’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성령을 통해 맺는 열매의 하나로 제시된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했다면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열매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관성이 강한 해석과 적용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구절에서 성령의 열매로 열거하고 있는 단어들은 모두 성령에 의하여 오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성품을 나타내는 말들이므로, 이 구절에서 헬라어 πίστις는 (‘믿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어번역성경과 주석가들을 따라 ‘faithfulness/fidelity’/‘신실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저자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서로의 짐을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권면하는 말에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과 실제로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때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앞에서는 계속하여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여왔기 때문이다. 즉 율법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3:10),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이제 더 이상, 감독하며 규제하는 ‘몽학선생’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3:23-25),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율법에서부터 속량함을 받아 자유케 되게 하려 하심이며(4:4-5; 5:1), 율법 아래 있으려 하는 자들은 종과 같은 신분으로 있는 자나 마찬가지이다(4:21-31)는 등으로 거듭 거듭 강조하였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불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바 있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을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조: 갈 5:13-14; 롬 13:8-10; 마 22:36-40; 요 13:34; 14:21; 15:12; 요일 3:23; 약 2:8)(Fung 등과 함께). “짐을 서로 지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1) 성경에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및 책임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양자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없는 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바로 그러한 성격의 대상들 중 칭의와 내세심판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된다고 보고 싶다. 그런 대상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논리적 사색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한 단계에서 멈추는 겸비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신자의 칭의와 행위심판과의 관계에 대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한다:        ①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따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예정된 자이며(엡 1:3-6)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이다(롬 8:29-30, 10:9-10). ② 한편 신자는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살아가도록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 1) 선한 일을 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엡 1:4-5; 2:10); 2) 세상에서 빛이 되고 열매를 맺도록(엡 5:8-9); 3) 은사를 주시어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엡 4:7-16); 4)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갈 4:5-6, 롬 8:14-16, 살전 4:7-8); 5)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롬 8:29). ③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로 칭의를 받았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다(롬 5:1-11). 그리고 동시에 신자는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해주실 것을 보장받았다(롬 8:12-39). ④ 다른 한편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도 말씀 한다: 1)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2)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을 받은 자라고 지칭을 받은 자인데도(갈 3:26; 4:5-6) “(지속적으로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οἱ τὰ τοιαῦτα πράσσοντες, 현재분사!)”과 “(지속적으로) 육신을 위해 심는 자(ὁ σείρων, 현재분사!)”는 내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며 영생을 누리게 되지 못할 것이며(갈 5:21, 6:8),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가 우상제물을 먹고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전 8:11). ⑤ 그러나 참 신자는 내세의 심판과 관련하여 가질 바람직한 태도는, 육신을 따라 살았다가 내세 심판 때 버림받을까 봐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서 인정받고 상급 받기 위해 절제하며 (달려갈 길을 달리는 자세로) 사명에 충실하고 성화를 이루기 힘쓰면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고전 3:8-15; 4:4-5; 9:18-27; 15:58; 고후 5:10; 갈 6:7-10; 살전 3:13; 5:23-24; 빌 2:12-13; 딤후 4:7-8). 한편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already, but not yet)’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울의 구원론적 용어 사용과 모순될 때가 있다: “이미 구원받았으나, 완전한 구원은 내세에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항상 교의학의 구원론에서 말하는 대로의 포괄적인 ‘구원’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원받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문맥을 따라 구체적인, 그러나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죄의 용서와 중생을 가리키면서(엡 2:5,8; 딤후 1:9; 딛 3:5), (명령형을 사용하여) 성화를 통한 구원을 가리키면서(빌 2:12; 딤전 4:16), (미래시제를 사용하여) 내세에 있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의 구원 내지는 최종적 구원을 가리키면서(롬 5:9-10; 13:11; 고전 5:5; 딤후 4:18) 사용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무시간적으로 적용되는 또는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는) 근본적인 구원 내지는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키면서 ‘구원/구원하다’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롬 1:16; 8:24; 9:27; 10:1,9,10,13; 11:11,14,26; 고전 1:18,21; 7:16; 9:22; 10:33; 15:2; 고후 2:15; 살전 2:16; 살후 2:10; 딤전 1:15; 2:4,15; 딤후 ).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이미 구원받았으나, 완전한 구원은 내세에 있게 될 것이다”는 구호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마지막의 용례의 부류의 경우에서다. 그러나 신자의 칭의에 관하여는 바울의 용어 사용관습에 따라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의 구호를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언행에 대한 “의롭다 칭함 받음” 여부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마 12:36-37; 약 2:21-24), 바울의 경우와는, ‘칭의’를 가리키는 단어는 같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지나치게 잦은 연속된 의문문은 논리적 사고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산만하게 하고 논리의 주관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특히 9-10쪽에서 의문부호로 끝나는 문장이 연속하여 15개가 나온다(처음에 연속하여 8개, 몇 문장 후에 다시 4개, 또다시 몇 문장 다음에 3개).        권연경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        소기천(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신학 교수/예수말씀연구소 소장)        1. 요약        1) 저자의 새 관점에 대한 논지        1977년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는 광범위한 초기 유대교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초기 유대교가 결코 율법주의적(legalistic)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유대교는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이 은혜로운 선택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 준수는 필요하지만 이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획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율법에 대한 열성(nomism)은 근본적으로 은혜로운 언약(covenant)의 태반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샌더스는 이런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 불렀다. 이러한 샌더스의 주장은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로 규정된 전통적 유대교 상을 포기하고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샌더스로부터 출발한 충격의 파장은 유대교보다는 바울신학 쪽에서 더 심각하게 감지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를 율법주의라 보았다. 이와는 달리 샌더스는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면, 바울이 비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새 관점”(New Perspective)라는 용어를 고안한 던 (J. D. G. Dunn)은 샌더스의 유대교 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하지만 그의 바울 해석에는 낙제점을 매긴다.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잘 설명했지만, 이를 바울과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던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바울 사이에 근본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새 관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울의 칭의론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개진되고 있음을 중시하는 것이다. 바울의 칭의론이 대부분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울의 칭의론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것임을 시사한다.        2) 저자의 옛 관점과 새 관점에 대한 논지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약점을 극복하고, 바울 칭의론의 전모를 제대로 규명해 낸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부정적이다. 바울의 논증이 자리한 사회적 정황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새 관점의 공헌은 분명하지만, 바울의 칭의론이 드러내는 신학적 혹은 구원론적 차원을 해명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그저 편향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학적 차원과 구원론적 차원이 함께 어우러지는 상황에서, 신학적 차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애초에 사회학적 설명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새 관점 학자들이 제안하는 개념의 틀들이 피상��인 경우가 많다.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 관점이 칭의론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및 죄와 구원의 문제로 간주하는 옛 관점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에는 근본적인 신학적 관심과 보다 실질적인 사회학적/교회론적 관심사가 동시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 두 관심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따로 취급할 수 있는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3) 저자의 옛 관점과 새 관점에 대한 비판        바울의 칭의론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전통적 해석은 칭의론의 문맥으로 제시된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바울의 구원론 내에 잘 해소되지 않는 긴장 혹은 모순의 위험이 엿보인다. 반면 그런 약점을 보완하면서 나타난 새 관점은 오히려 바울 칭의론의 신학적 차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한 실질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에 대한 새 관점의 강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전통적 관점과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이에 대해서는 선명한 해법을 발견하기 어렵다.        4) 저자의 대안제시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바울의 칭의론에 드러나는 두 ��지 상이한 현상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울 칭의론의 비판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그 배후에 분명한 신학적 대화상대자를 상정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실제로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적 선동자들일 것이고, 로마서의 경우는 2장에서 비판되는 자칭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이 대화상대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울이 개진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도 달리 이해된다. 바울 칭의론의 대화상대자를 1세기 유대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따라서 새 관점의 대두 이후 초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논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인상을 풍긴다. 새 관점 학자들은 초기 유대교 내의 율법주의적 논조를 축소하고 “언약적 율법주의”를 그리려 하는 반면,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거기에 담긴 율법주의적 흐름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방법론적 비약이 존재한다. 최근의 연구들은 초기 유대교 내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1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대교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특정한 경향이 바울이 비판한 바로 그 입장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유대교를 넘어, 바울 자신의 논증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성격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은 할례나 절기 준수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움직임과 잘 어울린다. 적어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문맥에 관한 한, 바울의 논증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할례, 음식규정, 절기 규정 등으로 예증되는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 준수와 구분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의 구분에서 시작하는 전통적 칭의론에서는 순종의 구원론적 가치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 대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구도를 포기하고 보다 사회학적 논리로 무장했던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과 윤리에 관한 보다 실질적인 해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주의자들의 바울 해석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긴장의 원인이 되는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새 관점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율법주의에서 언약적 신율주의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를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 실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비판이 “율법 준수”와는 사뭇 다른 과녁을 향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율법의 행위 속에 어떤 교리적인 독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의 주장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이 “율법의 행위” 자체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믿음이 참된 해답이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무할례 역시 실질적 해답은 아니다. 할례를 받는 아니든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        2.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제기        1977년에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책으로 시작된 1세기 유대교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없었더라면 “새 관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legalist religion)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샌더스는 그의 책에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1세기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이해해 왔으나 이러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고대 유대교 문헌들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하여 소개한다. 바울을 포함한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율법준수는 언약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과 충성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바울신학과 샌더스의 주장은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누구라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는 아래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 바울이 당시 유대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유대교가 율법주의 종교가 아닌데도 바울은 율법주의 종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지금까지 교회가 바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잘못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한 종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 사실 바울신학의“새 관점”을 둘러싼 논쟁은 바울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된 것이라기  보다는 1세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질문들        1) 레이제넨(Heikki Räisänen)이 Paul and the Law에서 주장한 것처럼, 바울은 당시 유대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매우 일관성이 없고(inconsistent) 자기모순적(self-contradictory)인가?        2) 제임스 던은 Paul and the Mosaic Law이란 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바울을 변호한다. 바울이 비판하고 반대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체성 표지”(identity marker)였던 할례, 음식물에 관한 규정, 안식일 법과 같은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을 다른 민족으로 분리한 배타주의적 태도였다는 것이다. 즉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는 이와 같은 유대인의 표지를 열심히 지키고 강조하는 것이지, 모든 율법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그런“유대교의 테두리를 보여 주는 율법”(boundary makers)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유대교 안에“머물러 있으려고”(stay within)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점, 즉 유대인들의“민족적 자만”(national pride)을 비판하였을 뿐,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3) 과연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 단지 할례, 음식법, 안식일법을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를 비판한 것인가? 새 관점의 문제점은 과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다. 새 언약이 주어짐으로써 옛 언약은 끝나고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체(replace)하였는가? 아니면 두 언약이 다 유효한 것인가? 과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가?        4) 바울이 믿음에 관해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잘 살고 있다면 할례를 받든 안 받든 문제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칭의와 성령의 사역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개혁신학회
제28회 정기학술심포지엄
Korea Reformed Theological Society - The 28th 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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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24k-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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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Look Inside The Ark
April 19 Don’t Look Inside The Ark 언약궤(성궤)안을 들여다 보지마세요.
http://www.josephprince.org/daily-grace/grace-inspirations/single/dont-look-inside-the-ark/
1 John 2:2 And He Himself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whole world.
요한일서 2: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In the movie, Raiders Of The Lost Ark, the people who tried to look inside the ark were struck dead. What was inside the ark that brought judgment to those who looked into it?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인디아나존스 나오는 영화)에서, 성궤의 안을 들여다 본 사람들은 다죽임을 다했습니다. 성궤안에는 무엇이 그들을 심판해서, 들여다 본 사람 전부를 죽게 했을까요?
The Bible tells us that the ark held the two tablets of the Ten Commandments, the pot of manna and Aaron’s rod. (Hebrews 9:4) These items were tokens of man’s rebellion. The two tablets of the Ten Commandments represented man’s rejection of God’s standards. The manna represented man’s rejection of God’s provision, and Aaron’s rod, man’s rejection of God’s appointed priesthood. 성경에서는 성궤안에 십계명이 적힌 두개의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있다고 써있습니다. 이 물건들은 인간의 반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적힌 두개의 돌판은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인간의 반항을 상징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반항하는 상징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정해준 제사장에 대한 인간의 반항을 상징합니다.
Hebrews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돌판들이 있고
God did not want to look at these tokens of rebellion. He wanted to be merciful to His people, so He instructed them to place the items in the ark and to cover the ark with its mercy seat, which is also the place where the blood of the animal sacrifices was sprinkled.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런 반항의 상징을 보는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물건들을 성궤에 넣고 뚜껑으로 덮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뚜껑을 은혜의 보좌(시온좌)라고 하는데 희생제물의 피를 그위에 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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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a year on the Day of Atonement, the high priest would enter the Holy of Holies to sprinkle on the mercy seat the blood of the animal that had been sacrificed. The two cherubim on the mercy seat stood as guardians of God’s righteousness and holiness. 일년에 한번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안으로 들어가서 은혜의 보좌 (셍궤의 뚜껑)에 희생제물의피를 뿌립니다. 그 뚜껑에는 천사가 둘이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지키는 자같이 서있습니다.
Representing God’s eyes too, they looked at the blood on the mercy seat. As long as the blood was there, the entire nation of Israel was forgiven. God’s judgment passed over them and they were blessed for another year. (Leviticus 16) 은혜의 보좌(성궤의 뚜껑)은 하나님의 눈을 상징해서, 그 희생제물의 피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도 상징합니다. 그 은혜의 보좌위에 피가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가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해동안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Leviticus레위기 16:34 이는 너희가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Today, the blood sprinkled on the mercy seat is not the blood of bulls and goats, but the precious, eternal blood of the Son of God! (Hebrews 9:12) Jesus is our “mercy seat” for “He Himself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whole world”. The word “propitiation” in the original Greek text is the same word as “mercy seat”. (Romans 3:25, Hebrews 9:5) 오늘날, 은혜의 보좌 앞에 뿌려진 피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보혈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은혜의 보좌"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대신 속죄물이 뿐만 아니라, 온세상을 위한 속죄물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속죄물"은  헬라(그리스)원어 에서는 "은혜의 보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Hebrews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Romans 로마서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Hebrews 히브리서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Beloved, God does not see your sins and count them against you because He sees His Son’s blood. He sees His Son’s perfect work that has more than satisfied Him. God does not want you to see your sins either. He does not want you to look inside the ark by focusing on your sins. He wants you to focus on Christ and His finished work!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보고거나 묻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하신, 독생자 예수님이 행하신 완벽한일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보는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죄에 촛점을 맞추어서, 법궤안을 들여 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을 바라보기 원하십니다!
Thought For The Day Don’t focus on your sins. Focus on Christ and His finished work. 당신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마세요. 그리스도와 그의 완성된 작품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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