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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kwontayseek-blog · 15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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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ishable Evidence of Biblical Creation 불멸의 증거(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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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igstar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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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리안 보도자료] ‘외계인(ET) UFO’ 날아 오는 ‘불사(不死) 행성’으로 초대합니다!...8월 6일(화) ‘트랜스미션(DNA정보 우주 전송)’ 실시
[라엘리안 보도자료] ‘외계인(ET) UFO’ 날아 오는 ‘불사(不死) 행성’으로 초대합니다!...8월 6일(화) ‘트랜스미션(DNA정보 우주 전송)’ 실시
[라엘리안 보도자료] ‘외계인(ET) UFO’ 날아 오는 ‘불사(不死) 행성’으로 초대합니다!...8월 6일(화) ‘트랜스미션(DNA정보 우주 전송)’ 실시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24(AH78)7.23
‘외계인(ET) UFO’날아 오는
‘불사(不死) 행성’으로 초대합니다!
-라엘리안, 8월 6일(화) 일반인 대상‘트랜스미션(DNA정보 우주 전송)’실시
-“‘세례의 원형’인‘트랜스미션’은 우주에서 온 엘로힘(Elohim)을 인류의 진정한 창조자, 그리고 라엘(Rael)을 엘로힘의‘최후의 메신저’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격이 주어진다”
우주인(외계인, ET)‘엘로힘’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대표 오승준)가 오는 8월 6일(화요일) 오후 2시부터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에 일반 희망자들의 DNA정보를 원격 전송하는 이색적인‘트랜스미션(Transmission of Cellular Plan, 세포설계도 전송)’행사를 진행한다.
‘외계인에 의한 과학적 창조론’을 옹호하는 라엘리안은“인류를 포함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신(神)도 진화(진화론)도 아닌, 우리 은하계 내 다른 태양계의 행성에서 온‘엘로힘(Elohim :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이 고도의 DNA합성을 통해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했으며, 엘로힘은 미개한 인간들에 의해 신격화 되고 신비화 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라엘리안의‘트랜스미션’은‘세례의 원형’으로서 엘로힘을 인류의 진정한 창조자로 인정하는 절차이며, 엘로힘이 예언자 라엘(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 창시자)을 통해 모든 지구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 <지적설계-설계자들로부터의 메시지>(도서출판 메신저 간행)를 이해하고 라엘을 엘로힘이 보낸‘최후의 메신저’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격이 주어진다.
현세에 엘로힘의‘마지막 예언자’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 중인 라엘은“트랜스미션 의식을 통해 엘로힘은 당신의 마음을 일깨워주고, 당신이 항상 각성상태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엘로힘이 당신의 사후(死後) 전 생애를 평가할 때 긍정적인 평가에 도움을 줘 엘로힘에 의해 과학적으로‘재생’될 기회를 높여줄 수도 있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난 1973년 12월 13일 프랑스 중부에 있는 클레르몽 페랑의 사화산 지대에서 엘로힘의 대표(야훼 불사회의 의장)와 처음 만나 인류의 기원과 미래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받은 라엘은 2년 뒤인 1975년 10월 7일 그들의 우주선(일명 UFO)을 타고 우리 은하계 내 다른 태양계에 위치한 엘로힘의‘불사(不死)의 행성’을 직접 방문한 바 있다.
라엘이 체험한‘불사의 행성’은 기존 종교에서‘천국’‘낙원’‘극락’ 등으로 불려지던 곳으로서 실제로 그곳에는 모세, 붓다, 예수, 마호멧 등 엘로힘의 고대 예언자들과 함께 많은 지구인들이 과학적으로 재생돼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신도 영혼도 진화도 없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순환하며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초자연적인 신(神)과 비물질적인 영혼, 그리고 그러한 영적 상태로 구원받아 모여 산다는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천국의 참 의미’는 엘로힘에 의해 선택받아 그들의 고도로 진보한 과학에 의해 육체로 재생돼 새로운 삶을 누리는‘불사의 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 태양계 밖 외계에 실제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엘로힘의‘불사의 행성’에 초대돼 재생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첫 걸음은 먼저 엘로힘을 우주에서 온 우리들의 진정한 창조자들로 인정하는‘트랜스미션’절차를 밟는 일이다.
‘트랜스미션’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엘로힘에 의해‘지적설계’된 우리 인간은 각자 고유한 DNA 코드, 즉 세포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거대한 전자기파의 발신기와도 같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고유의 파동(전자파 또는 전자기파)을 방사하며 진동하고 있다. 지구의 과학기술은 아직 생명체의 개별 파동을 주변의 배경 음으로부터 분리해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않았지만, 우리들 보다 2만 5000년이나 진보한 과학문명을 이룩한 엘로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쉽게 가능하다.
라엘 또는 라엘리안 가이드는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와 지구인(트랜스미션 대상자) 사이를 연결할 수 있도록 특별히 승인받은 사람들로서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 개성, 특징을 포함해 DNA 코드가 가장 뚜렷이 담겨 있는 이마 부분에 전기적 접촉을 좋게 하기 위해 물을 적신 손을 댐으로써 트랜스미션 대상자의 파동을 엘로힘의 컴퓨터에 전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그 사람의 DNA 코드가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에 자동 등록돼 관리된다.
한편‘8월 6일’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로서, 라엘리안들은 그같은 비극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핵무기와 핵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매년 이 날을 새해 첫날로 지정(라엘리안 AH<after Hiroshima> 연도, 서기 2024년 8월 6일은 AH 79년)해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AH 연도는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 : 과학에 의해 진실, 진리가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8월 6일(화) 지역별 트랜스미션 안내(연락처) ───────────
> 서울,경기,인천,강원/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본부/ 010-7559-1000
> 대전, 충청/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대전충청지부 / 010-5896-8765
> 전주, 전북/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전주전북지부 / 010-2458-8640
> 광주, 전남/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광주전남지부 / 010-2293-9469
> 대구,경북/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대구경북지부 / 010-5556-8076
> 부산,울산,경남/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부산경남지부 / 010-4998-3121
> 제주/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제주지부 / 010-2429-2250
※트랜스미션(Transmission of Cellular Plan)의 과학적 설명 ─────
결코 우연이나 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엘로힘에 의해‘지적설계’된 우리 인간은 각자 고유한 DNA 코드, 즉 세포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거대한 전자��파의 발신기와도 같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고유의 파동(전자파)을 방사하며 진동하고 있다.
지구의 과학기술은 아직 생명체의 개별 파동을 주변의 배경 음으로부터 분리해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않았지만, 우리들 보다 2만 5000년이나 진보한 과학문명을 이룩한 엘로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쉽게 가능하다.
라엘 또는 라엘리안 가이드는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와 지구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도록 특별히 승인받은 사람들로서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 개성, 특징을 포함해 DNA코드가 가장 뚜렷이 담겨 있는 이마 부분에 전기적 접촉을 좋게 하기 위해 물을 적신 손을 댐으로써 트랜스미션 대상자의 파동을 엘로힘의 컴퓨터에 전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그 사람의 DNA 코드가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에 자동 등록된다.
>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email protected]
엘로힘 (Elohim)
기독교 성경에는 하느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오래 전, 외계에서 빛 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일명,UFO)을 타고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지구에 세워질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 귀환할 예정이다.
엘로힘의 모든 메시지는 한국에서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구 우주인의 메시지) 등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www.rael.org 에서는 E-Book을 즉시 무료다운로드 할 수 있다.(스마트폰 이용시, 구글Play 스토어에서 '지적설계' 무료앱을 다운받을 수 있음)
라엘리안 무브먼트 (Raelian Movement)
지난 1973년과 1975년 엘로힘과 접촉한 '마지막 예언자' 라엘이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엘로힘을 맞이할 지구 대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창설한 세계적인 비영리*무신론 종교단체로, 현재 전 세계 120여개국에 13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주인의 대사관
우주인 엘로힘의 메시지를 알리는 것과 더불어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또 다른 사명은 창조자 엘로힘을 맞이할 대사관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여러 나라에 대사관 프로젝트 유치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런 행운을 얻은 나라는 동시에 엘로힘의 특별한 보호를 누리며 다가올 천 년 동안 지구의 정신적, 과학적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가상 대사관 투어 >> https://3dvisit.etembassy.org/
※참고 영상 : RaelTV 한국 “우리는 외계문명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나요?”
-제1탄 : It’s Time(때가 됐다)-They are here(그들은 여기에 있다)
youtube
-제2탄 : It’s Time-They are waiting(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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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탄 : It’s Time-They are watching(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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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탄 : It’s Time-They are God(그들은 신이다)
youtube
-제5탄 : It’s Time-They sent Prophets(그들은 예언자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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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탄 They are Ready(그들은 준비되었다)
youtube
AH (after Hiroshima) 연도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그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은 기독교력이나 이슬람력, 불교력 등이 아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AH연도 사용을 유엔(UN)에 제안했다.
AH연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특히 유일신 종교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전쟁, 테러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계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www.icacci.org
※라엘리안 ‘무한의 상징’에 대한 설명
youtube
RAEL.ORG / 보도자료 / 국제라엘리안뉴스 / 라엘아카데미 / 과학미륵 / 엘로힘리크스 /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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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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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문화
Niklas Luhmann, Christian Morgner (ed.), Margaret Hilley, Christian Morgner and Michael King (trans.) The Making of Mean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번역 – 조은하, 박상우
1.
왜 사회 과학은 이론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개념에 동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충분한 시도들이 있었다.[1] 심지어 수많은 개념화와 상이한 정의들에 대한 개요도 있다.[2]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개념에 의해 다뤄지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행위의 상징적 기초(Parsons)부터 인간의 창작물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전자 기계나 몸에 새긴 타투, 고급 문화 그리고 모든 문화, 가장 고대 부족의 문화, 현대 사회의 문화까지 다룬다. 만일 문화의 생물학적 개념을 더한다면, 그것은 모든 교육된 행동을 지시하고, 사회생물학, 진화론 그리고 비유전적 전달 문제를 통해 사회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3] 사회적인 어떤 경계들 안에서도 문화 개념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른 대상들과 영역과 대조되는 세계의 존재론적 영역으로서, 어떤 특별한, 분류가능한 대상들의 집합으로서 문화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개념의 완전한 범위는 과학적 개념들이 요구하는 간결함에 모순된다.
물론 확실히 구별을 통한 개념 형성 없이 할 수는 없다. 이 개념들이 배제한 것, 그들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구별이 주요 문제들, 예를 들면 하늘과 땅, 혹은 문화와 자연을 기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 그렇지만 일차적 관찰이 작동하는 영역으로부터 제2계 관찰로 개념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관심은 대상의 세계를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이고 어떻게 관찰자가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는지 문제에 대한 특정한 형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 만으로는 물론 충분하지 않다. 문화의 경우 우리가 다루려는 제2계 관찰의 형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적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시 한번 이 특별한 초점은 갈림길에 이어진다. 행위 개념에서 문화 개념을 끌어내고 문화가 모든 행동의 필수적 구성부분을 구성한다고 제시하는 Parsons와 같은 방식으로 이론적 추론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개념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이 개념을 통해 다른 것들 속에서 문화를 관찰한다. 우리는 다른 길, 즉 역사적 분석의 길을 선택하고자 한다.
문화의 개념이 19세기 후반에 비로서 그것의 현대적 사용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많이들 주장된다. 문화 개념을 위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가정될 수 있는 상징들과 기호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언어학적) 기호의 일반 이론-기호학-은 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전 세계는 이미 인공적 기억의 이론에 대한 극히 정제된 이론을 발전시켰다.[5] 이 이론은 무엇이 성취될 만한 기억인가-즉 문화의 전달-를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주제적이고 도상적 재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그렇게 하기 위한 문화 개념이나 심리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 수행 사이의 어떤 차이를 그릴 필요는 없다.[6] 기억의 능력을 개선하기위한 이런 기호 조작의 인공성은 이미 숭배 이미지에 대한 종교적 묘사와는 분명하게 다르다.[7] 또한 숭배 이미지가 단순히 이미지의 도상적 타당성을 사용하는 환상 즉, 시뮬라크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수반되는 의심에서 차이가 난다. 초기 근대에 이런 전통의 두 가지 노선은 끝이 난다. 부분적으로는 인쇄술의 결과로, 시스템으로서 예술의 차이화에 의해. 시스템으로서 예술은 자신의 범주, ‘예술의 새로운 아우라로 신성한 것의 오래된 아우라를 교환하는 것’에 따른다.[8] 처음에는 상징과 기호의 사용의 넓이를 커버할 수 있는 후속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다. 단지 기호의 사용에서 새로운 자유만을 강조했다. 부분적으로는 concettismo[9]와 가장/위장(simulation/dissimulation)에 대한 17세기 논쟁에서, 부분적으로는 수학적 기호에서 변수의 도입에서, 즉 숫자와 수리적 관계에 대한 오래된 상징적 이해에 종언을 알린 새로운 대수학에서. 그래서 유인자로서 행동하는, 즉 18세기가 마침내 문화로서 지시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공백이 여기서 발생한다.
특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문화/양성(cultivation)의 개념이 취향(taste)의 절대적 개념을 대체했다.[10] 취향에 대한 어떤 객관적 범주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 비평의 속박되지 않는 증식을 억제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서의 증가는 여전히 사회의 층위에 연결된 개념이 더 낮은 계층에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논제의 개념에서 이는 더 이상 예술과 매너에서 ‘아름다운 환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의역될 수 없는 관심들을 포함하기 위한 확장을 필요로 한다. 계몽의 썰물을 따르면서, 이제 본성상 개인적인 것으로 고려되는 생각과 감정들의 군집을 위한 사회적 개념을 어떻게 찾는지에 대한 것이 문제다. 문화에 대한 이런 관심의 출발은 동시에 전-계몽적 유럽의 수사학이 종언을 고했음을 나타낸다.
어떻게 기호가 기능을 하고, 그것들이 역사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고 그 기능을 채울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더욱 더 의심스럽게 된다. 포커스는 개입 변수로서 언어로 이동한다. 첫째로, 어떻게 언어가 사용되는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부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회 영역에서 제2계 관찰로 전환되어지는 시기다. 그리고 개념들의 전사가 무엇이건, 이를 위한 개념들이 일차적 중요성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이는 비밀스러운 지배자, 법관, 혹은 적어도 정치의 관찰자로서 공공의 의견에 대한 개념에 적용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자연법을 대신하고, 관찰적 법률 제정에 대한 시맨틱, 능력과 절차를 제공[11]하는 헌법의 개념에 적용된다. 적어도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개념에 적용된다.[12] 그것은 어떻게 관찰되는 관찰자들이 (어떤 이유건) 그들이 받아들였던 생각에 의해 이끌려지는지를 관찰한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검토한다면, 필연적으로 추출하기 원하는 것을 개념에 넣게 되는, 행위 개념에서 끌어낸 것보다는 더 적합한 문화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지점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검토해야 할 첫번째 주제는, 지역적, 역사적 관찰 지평의 확장과 함께 18세기는 상대적 관심을 키웠고, ‘흥미 있는(interesting)’ 비교를 통해서, 그 당시 ‘재치(wit)’라 불리던 것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 재치는 떨어져 있는 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13] 과학과 예술에서 주제와 성취에 대한 오랜 논쟁, 가장 최근에는 유명한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는 혁신과 고유성 개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궁극적으로 토론은 전통 혹은 혁신 중 하나에 우위를 줄 필요를 지시하는 스톱 사인 아래서 멈추게 되었다. 전통적인 주제와 지식의 저장고를 카피하는 것만은 가능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것들을 반복하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14] 이런 상황에서 비교의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화하는 관점은, 동시에 더 많은 문제가 출발될 수 있는 더 나은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활력을 되찾는 효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비교는 이 전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다른 유럽 국가에서 귀족의 탄생을 만들어 내기 위한 다양한 범주 사이에서의 비교 같은 것. 그것은 무엇보다 귀족성을 인식하고, 위계와 평등성을 정의하는 법적, 정치적 관심에 기여한다.[15] 18세기에 이런 비교의 관심은, 일반적인 비교의 주제들로부터 추출되어 혼자 서게 된 문화 개념의 돋보이는 것에 대해 반대되어 더 넓고 깊어진다.
조응 하는 변화가 역사적 인식 영역에서 관찰된다. 적당한 수준에서 한계 안에서, 역사의 지식은, 귀족에 대해, 연설가에 대해서, 다양한 작업 영역의 예술가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기대되어졌다. 그렇지만 이익이 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되는 역할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너무 많은 불필요한 박학, 과한 관심과 과시하는 지식에 대한 경고가 존재해 왔다. 이런 변화가 18세기 중반에 신속하게 이뤄졌다.[16] 이제 쌓이고, 검토되고,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조직된 것은 공공의 혹은 장인적 역할들에 대해 필요한 것을 넘어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인쇄를 위해서 생산되었다. 그것은 문화로서 가시화되었다. 심지어 이제 종교도 문화적 현상으로서 비교될 수 있었고, 묵시적 혹은 공공연히(Lessing의 Nathan) 그것에 의해 동등한 것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 종교 개념 자체를 문제삼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종교의 이전의 궁극적 관련성을 상대화 한다. 종교는 의미적 혁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에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문화가 메타 레벨에 위치한다. 이 메타 레벨은 선행한 것들의 관계들을 고려함에서 비결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고, 그들이 말하는 ‘가치들’의 다양성과 상이한 우선성을 양립한 채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문화는 위계적으로 우위에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계승자(비록 헤겔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신 자신보다도 종교의 필요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지만)로서 극점의 위치들을 뒤섞는 것에 의해서 의의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문화를 더 일반적인 기호 사용의 관점에서 언어로 환원하는 언어에 대한 관심의 발전은, 이런 같은 트렌드의 한 부분이다. 이제는 문제가 되는 객관적 지시대상에도 불구하고 혹은 정확하게 그 때문에 언어에 주어지는 새로운 관심은 모두 분노가 된다. 이것이 아마도 낭만주의 예술 이론에서 시의 지배가 뿌리를 내린 이유이고, Kant가 ‘개념 없이 단순한 감각을 통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음악은… 문화보다도 더한 향락이다’[17]라는 의견을 제안하기까지 한 이유다. 어떤 경우에서 언어와 관계된 노력들은 더욱 더 문화들을 비교하는데 관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언어들은 서로 번역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들의 직접���인 본성을 통해서 언어 비교를 장려한다. 그들은 단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말을 다룰 뿐만 아니라, 더욱 더 글쓰기를 다룬다.[18] 이는 쓰여진 언술들이 사회적 제약이 덜한 채 자유로운 방식으로 형식화될 수 있고, 더 강하게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람들이 행동하고, 또한 그들이 인식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회적 상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이 쉽게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19] 관찰에서, 우리는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비교는 우리가 더 많은 복잡성을 발생할 수 있는 삼극체적 조작(triadic operation)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훨씬 더 멀리 가는 파급 효과를 가진 정보다. 비교되는 아이템들을 서로 구별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차이의 동일함, 즉 차이에도 불구한 유사성을 보장하는 비교의 관점이 선택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삼극체적이다.[20] 어떤 것이 다른 것 안에서 같은 것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반성을, 그래서 (그것을 실행하게 되자 마자) 더 큰 추상,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비교 지점의 필연적인 우발성의 인식을 장려한다. 비교의 지점들은 이미 다른 관찰자일 수도 있는 관찰자를 대표한다. 그래서 사회적 속성의 문제들은 하나의 다른 층위, 즉 문화적 통찰의 층위에서 등장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제2계 관찰의 층위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면 문제는 이렇다. 누가 비교하고, 어떤 목적으로 비교하는가?
밀집된 그리고 확장된 비교에 대한 관심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리고 이어지는 반성에서의 관심, 그리고 반성에 대한 반성(특히 Kant, Fichte와 낭만주의)은 우리의 역사적 가설에 따르면 문화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관심의 등장을 다루는 어떤 것을 가지게 된다. 개념적 선명함에 대한 의존 없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은 관찰과 기술을 위한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문화의 이해를 전달한다. 비교에 대한 관심은 이전 사회가 그 자신과 세계를 정의하던 모든 본질과 자연 형식들을 정복하고 상대화 한다. 18세기에 가시화 된, 그리고 처음으로 진보로서 가시화될 수 있는 사회 변화에 비추어, 이런 본질들의 코스모스 그리고 종과 형에 대한 배열은 어쨌건 버려져야만 했다. 이제 새로운 의심들 때문에, 무엇보다 지식, 도덕, 취향의 판단과 관련해 필수적인 노력들은 더 이상 오랜 분류에 맞추고, 그것에 통합되어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형이상학(Kant) 혹은 새로운 신화학(소위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랜 시스템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저자들과 특히 Friedrich Schlegel에서)에 대한 추구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공하지 않은 채 이 욕망의 대상에 대한 웅변적 표현들을 제공한다. 잠시동안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요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그러나 그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는 경험을 반영한다.[21]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재구성되는 사회는 아직 적합하게 기술될 수 없었다. 종합에서의 모든 노력을 주체로 이동하는 초월론 그리고 독일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대략적인 관념론(approximative idealism)’과 떨어져, 대립 자체를 표현하는 공리주의적 혹은 유물론적 징조를 가진 급진적 서유럽 개인주의는 오래된 분류와 연결을 부식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현은 이런 추상이 예술, 시, 그리고 미학과 마침내 사회에 대한 관심-댄디의 경멸스러운, 자기-치장의 이미지-를 생산하며, 언어적 의미에서 ‘흡수할 수 없는 채’로 남아있는 것을 확산한다. 기호에(상징, 언어, 대본 그리고 그들의 배가)에 대한 갱신된 관심은 기대되는, 17세기의 혼란, concettismo, 위장과 비틀기, mannerism등을 줄일 하나의 표현 수준을 찾았다. 문제는 더 이상 존재와 외양 사이의 차이를 해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론을 통해서 이런 차이를 통제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또한 여전히 긍정되고, 또한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나타내 지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착란(confusion)’에 대해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 이상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단지 역사가 되었다면, 이제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을 문화 내에서, 태초에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한 이래 인류학적 불변성 속에서 형식의 교체로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 언어 사용은 그렇지만 비교에 대한 관심에 의존하는 문화 개념을 만들어 내지 않고서 이 변화를 따른다. 스스로 문화 개념이 일종의 Kollektivsingular(‘집합적 단일성collective singular’; Koselleck)으로 자신의 삶을 취하는 것에, 그것을 어떤 다른 것에 대한(Cicero의 cultura animi와 같은, 도야된 것에 대한) 지시로부터 떼어내는 것에, 그것은 인간 발전의 한 차원, 그 자체 유효한-말할 수 있는- 삶의 양식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이제 어떤 속성 없이 수행된다.[22] 영국에서, 이 문화의 개념화는 진보의 가장 문제적 형식으로 보이는 산업 발전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23] 프랑스 혁명의 변화를 피할 수 있는, 구 사회 질서의 전통으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풀려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정식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두 경우모두, 동시에 문화(혹은 도야)는 사회적 위치와 연결된 새로운 속성, 더 이상 탄생을 언급하지 않지만, 추가로 산업적 생산을 통해서 획득한 부에 의해 완전하게 결정되지도 않는 속성을 형성한다. 역사적 지역적 개념에서 문화적 비교 지평의 확장은 분명히 보이고, 통합된다. 그렇지만 사회적 진화의 이행 단계는 아직 ‘인간 존재’의 개념에 대한, 그래서 성층화에 대한 지시로부터 분리된 사회적 개념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문화 개념의 이점은 적지 않게 실증적 지시 대상, 즉 고상한 관념화를 피할 수 있고, 만일 그와 만나면, 다시 문화적 현상으로 그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존재’의 개념은 그 자체 너무 추상적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삶과 죽음을 완전하게 무시할 수 있고, 문화적 형식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형식의 전환은 문화적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어째서 18세기 후반에 비교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으로 보았는 지에 대한 이유다. 문화 -미래, 수요, 그리고 조응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열려 있는-는 그래서 범위 안에 항상 존재했던 자연적 인간의 완전성에서 구별되는 완전성의 형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전제들의 전체적인 검토는 또한 이런 관찰의 수준이 단지 형식이 변화할 때에만 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오직 18세기에 등장하고 그리고 나서 보편적이 된 하나의 개념임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문화는 역사와 지역적(‘민족 국가적’) 차이를 비교 재료로 통합하는 전역적 프로젝트이다. 문화 개념은 국민 국가의 개념을 증가시킨다. 문화의 개념을 통해서 민족 국가/국민 신분 개념은 향상된다. 사실 심지어 그것은 현대적, 강조된 버전 안에서 만들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24] 이런 관점에서, 문화는 항상 존재했던 어떤 것의 외양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이전의 존재론적 그리고 범주적 불변성, 동일한 척도로 과거와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그것을 해체하고 동시에 대체한다.
이 모든 것에 따라 문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복제하는 이중화(a doubling)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푸는 것이 불가능한, ‘정체성’의 문제를 정식화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하게 그것이 문제화되는 방식이다.[25] 누군가가 칼로 스스로를 베고, 신에게 기도하고, 바다에 가고, 계약을 맺고, 대상물을 꾸미는 일들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추가로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을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현상과 비교한다면 2차적으로 관찰되고 기술될 수 있다. 문화는 모든 현상의 재조합을 위한 개방된 지평을 제공하면서 모든 현상을 분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별 경우를 넘어서서 진행되는 결과를 가진다. 한번 분해되고 재구성되어지는 것은 대상의 사용에 대한 적절성에 대한 타협 없이 반복해서 분해될 수 있다. 인식의 직접적 행위와 문제에 대한 도덕적 접근은 유지된다. 무언가를 안다고 믿는 것, 도덕화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해가능한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것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능하다. 저주가 문화적으로 제한된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고 이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되지 않고 저주할 수 있다. 사회는 단지 두 레벨, 즉 일차적 양식과 이차적 양식 안에서 병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가능성을 준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간섭에도, 조합들이 가능함에도,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는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그런 특별한 기호, 인용, 아이러니, 패러디로서 표시될 필요가 있다.
3.
그래서 문화는 이런 분해와 재구성을 버티지 않으면 안 되는, 다양하게 변하는 시장 조건들 아래에서 조차, 혹은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익이 계산되고, 초월적 전망을 가지고 여전히 발견될 수 있는 종합을 제공하는 불변성의 원리들을 찾는 과정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체가 아닌 원리 위에서 수정되는 앞서의 (독창적) 정신성의 이런 지지가, 비교의 대상, 그리고 복잡성에 더 적합한 다른 조직의 방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의 대상이 되는 문화 현상일까?
높은 효율성, 비위계적 조직을 위한 모델을 찾는 것은 뇌의 신경생리학이나 혹은 더 정확하게는 기억의 가능성을 위한 뉴론의 조건을 고려하도록 한다. 뮤즈를 염두에 둔 전-계몽적 유럽 전통은 기억을 언급할 때 밀랍판의 은유를 사용했다. 이 밀랍판 위에 문자들이 새겨지고, 보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인상[26]을 만들어 내는 어떠한 사건 없이 이런 방식으로 학습되고 기억된다.[27] 인상이 다시 삭제되는 것이 가능한 사실 쉽게 되는 것도 정확하게 이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구조는 복잡한 구별을 필요로 한다. 즉 두 가지 종류의 물건, 밀랍과 첨필이고, 그것 중 어떤 것도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Plato가 상세하게 설명한 것처럼[28],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 없이 구별을 그릴 수 있는 능력과 인쇄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특질 모두를 설명한다. 인상들의 한계는 그들을 구별하는 것을 가증하게 하는 조건이자 동시에 다른 기억의 기억들이 달라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기억은 다른 사건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것에서 사회 시스템으로 기억의 비위계적 구조의 사고를 이동하는 것은 이미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렇지만 밀랍의 은유는 여전히 내적 조직의, 기억의 조작 양식의, 자기 삭제와 자기 확인의 문제를 방해한다. 이에 대한 여지는 더 나아간 구별, 위계와 이단성의 구별에 의해 생산된다.[29] 위계적 질서는 이행적으로 구조화된 위계(즉 ‘이상한 고리’ 없는 하나의 위계)에 부과된 복잡성의 장벽을 넘어서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이 질서의 손실로 이어질 지 아닐지는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따른다면 기억이란 무엇인가? 뇌와 문화를 비교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의식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재생산 하는 것으로 기억의 일상적 이해를 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별한 능력에 대한 이런 극히 좁은 개념은 신경생리학적 (혹은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생물학적) 목적에 적합하지 않고, 사회 시스템의 기억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회 시스템의 기억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부정하게 하는 유혹으로 이끈다. 의식이 의식적으로 기억으로 경험한 것[30]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억의 기능이나 그 가능성의 조건 모두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구성하고 사용하는 것은 시스템의 특별한 능력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스템이 생산하는 기본적인 오토포이에틱한 조작 방식의 부산물, 시스템이 그것의 조작을 시간화 하는 한, 즉 나타나고, 나타나는 중이며, 곧 사라지는 사건들의 형식 속에서 자신의 조작을 생산하는 한, 시스템이 의존하게 되는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부산물로의 기억은 시스템의 조작 양식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실현되야 하고, 따라서 나타나는 현재 안에서만 사용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스템의 과거나 미래에 대해 작동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어떤 것을 찾아서 과거로 파고들어갈 수 없고, 그것을 표면으로 들고 나올 수 없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제약된 기억의 조작에 대한 조건은 이미 존재상 뉴론 수준에 있고, 더욱이 의미가 요구되는 증거 속에 존재한다. 우선적으로 이 조건은 물질적 그리고 지시적(종종 ‘상징적’이라 이야기하는) 조작의 병렬적 사용에 놓여 있다.[31] 물질적 개념으로, 조작(심지어 가장 높은 수요가 ‘의미’를 만드는 것일 때조차도) 세계 속에 하나의 홈을 만들고, 차이를 만든다. 이런 조작들은 그것들이 그들 자신보다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자 마자, 그리고 이 타자를 그 자신과 연결하자마자 지시적 효과를 가진다. 기억을 형성하는 시스템에서, 이는 자기-언급과 이질적-언급(hetero-reference) 사이를 지속적으로 요동치게 한다. 지속적인 물질화 없이, 예를 들어 잉크가 없는 펜을 가지고 쓸 때[32], 거기에 어떤 메모리도 없을 것이고, 세계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스템이 어떤 지시 대상 없이 작동하고, 어떤 것에도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대신에 단순히 그것이 그 순간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가 적용된다. 물질화와 언급적 수행 사이의 차이가 그 시간-의존적 오토포이에시스의 조건으로서 시스템에 부과되는 방식은 진화적 성취를 통해서 증가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럴 커뮤니케이션이 글쓰기에 의해 보완될 때처럼. 이에 기반한 해법들은 시스템의 기억 능력의 확장을 결정한다. 물론 이 능력은 환경이 충분한 다양성을 제공할 때만 사용될 수 있다.
기억을 사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매 순간 새롭게 재생산하기 때문에, 기억은 어딘가(예를 들어 ‘밀랍’에) ‘저장되는’ 가능한 기호들의 항구적 집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거대한 조작적 능력들이 항상적으로 풀려날 수 있고, ‘재-포화(reimpregnate)’ 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33] 이런 이유 만으로, 기억은 적절하게 조직화 되는 한 과거의 것들이 저장될 수 있고, 다시 검색될 수 있는 일종의 아카이브로는 인식될 수 없다. 기억 이론은 단순하게 시간을 전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풀어 놓기 위해서 처음 장소에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은 연속적으로 잊혀진 것과 기억하는 것 사이를 구별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풀어 놓기 위해서는 항상적으로 잊는 것을 구조적으로(즉 기억 자체에 의해) 강요 받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시스템이 완전하게 붙잡는 것에 이르기 때문이다.[34] 그렇지만 이런 억압 행위는 예외적인 경우에서 억제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외적인 혹은 내적인 이유로, 정체들을 응집하고, 필요할 때 그것을 불러내기에 적절하다. 기억하는 것은 그래서 반성적 성취다. 그것은 억압의 억압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시스템이 스스로를 현재에 맞춰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이런 대단히 선택적인 재호출은 단지 필요할 때 기억하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이 반드시 기억이 환경적 자극에 응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것이 또한 그런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이 시스템의 지속적인 적응에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종종 이미 재호출된 것은 호출하기가 더 수비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혹은 생태적 조건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응축된 의미를 선호하고 반복함으로써 기억은 어떤 패턴에 고정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이런 패턴에 대한 약속은 동시에 어떤 종류의 시스템도 익숙해진 이전의 패턴을 승인하는 동일한 형식 위에서 환경에 의해 관찰되고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래서 기억은 모든 시스템의 조작에 대해 하나의 효과를 가진다. 그리고 기억이 원래 있던 시간과 장소와 함께 재호출되는 과거의 색인에서 기억되는 조작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서로 떼어내서 데이터를 조직하는데 관계되는 시간-기반 도식이 없을 때조차 그리고 특히,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35] 이것은 기억이, 과거가 쓸모 없어졌다는 것을 주목하는 데 실패하고, 현상을 통제에 대한 환상을 제공하며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미래의 개념, 어떤 미래 상태나 사건의 선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재에 관계된 조작, 혹은 생물학적 개념을 사용하자면 직접적 상관 관계[36] 혹은 기대 반응이면 충분하다.[37] 물론 하나의 시스템이 현재와 과거를 구분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한 동기화를 위한 조망은 고려할 만큼 확장된다. 미래를 향한 이런 지향은 확실히 문화 의존적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미래의 평가에 의존하게 하는 리스크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다시 한번 이것은 기억이, 어떤 시스템이 관계되더라도, 보상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것은 모든 조작의 일시적 본성을 보완하고, 결과적으로 잊혀진 것과 기억하는 것 사이의 구별에서 가능한 선택의 자유를 높은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4.
여전히 문화의 역사적 개념을 위한 중요한 구성물들이 부족한다. 문화란 사회 시스템의 기억이고 특히 사회의 시스템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38] 다른 말로 하자면 문화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재귀성에 대한 의미 형식이다.[39] 그러나 현대적인 문화 개념의 기초 위에서만 이렇게 이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의 모든 출발들은 이미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 사회 시스템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혹은 어떤 단어이건)라는 사고의 도움으로 이 사건들의 상태를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그것들은 세계가 자신에게 보여지는 그대로 신뢰해야만 했다. 그것은 존재와 외양, 혹은 진실과 오류 혹은 기만과 같은 명백한 구별의 수단을 통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구별들은 그것들의 ‘강한’ 쪽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그려진다. 그것들은 존재 혹은 진실과 같이 구별의 한 쪽을 구별 자체를 이끄는 요소로 사용해서 위계적으로 개념화된다. 외양은 어느 정도 실제처럼 보여야만 하고, 오류의 정식화는 그 자체로 진실의 언술이다.
‘문화’ 개념은 문제에 대해 이런 해법을 우선하고, 그것을 우발성으로 놓아 자신과 모든 것을 관찰한다. 반성이 필요한 것(보편적으로 유용한 가치들과 같은)을 찾으면 찾을수록, 결과적으로 우발성(예를 들어, ‘가치 사이의 트레이드 오프’)을 더욱 많이 생산한다. 결과적으로 이전에 양식 이론에 의해 포착되고 ‘필수적인’ 혹은 ‘불가능함’으로 표상되었던 것들은 이제 동의를 요구하게 되었고, 조응하는 수요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비교되어지는 것은 그래서 또한 다른 방식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그래서 우발적이라는 개념을 수반한다. 이런 힌트를 따를 때, 우리의 시선이 다른 형식을 비추거나 다른 가능성을 비출 때 언제나 문화가 존재에 들어선다. 이것이 문화가 출발부터 우발성의 결함에 고통받는 이유이다.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 즉 축구 경기를 의도적으로 따르든가 혹은 꽃병의 장식을 찬미할 필요가 있다. 어떤 놀라움도 그래서 감탄(admiration) 혹은 놀라움의 형식 안에서 표현되지, 특별한 모습의 상대적 정체화 혹은 형식의 특정한 선택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는 시도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탄과 놀라움은 단지 우리들에 의해서 회고적으로 문화로서 기술되는 경험의 ‘전(前)문화적(precultural)’ 형식들이다. 그래서 낭만주의(특히 Ludvig Tieck)가 아이러니한 방식 속에서만 연속적인 감탄/경이/놀라움/공포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40]
회고적으로 본다면, 비교는 문화를 발생하지만 아직 문화의 개념이나 문화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발생하지는 않는다. 거기서 문화가 다뤄지고 논의되는 커뮤니케이션 레벨의 가능성 만이 현상을 그룹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발생한다. 그것은 다시 비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래서 이는 먼 세계들, 역사적 문화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에소테릭한, 엑조틱한, 먼, 그리고 원초적인 것, 특히 예술로서, 그리고 정통적이지 않은 지성으로서 새로운 매력을 포함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비교될 수 있는 모든 것 사이의 비교가 상대화 될 때,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계를 정의할 수 있었던 존재의 묶여진 형식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때. 이것은 어떤 제한 역시 역사를 돌아보면서 문화가 정식화 되고, 세계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관점에서부터 오는 역사적 상황이다. 문화의 절합과 형식화는 비교 관찰의 기초 위에 반성을 통해 불변적 형식들을 대체한다.
이 비교 관찰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에서의 차이에 다리가 놓여진다. 문화가 하나의 주제가 되는 방식은 그것의 출발점으로서 유럽을 가진 하나의 세계 사회가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문화는 어떠한 장소와 어떠한 시간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반성은 여기서 지금 이뤄져야 한다. 즉 현대 유럽에서. 현대 유럽은 스스로를 비교를 만들어 냄으로써 비교 속에서 긍정한다. Schiller의 개념에 따르면, 현대 문화는 무드 상 ‘센티멘탈리스트’이다. 그리고 이 현대 문화만이 오래된 문화들을 ‘소박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Hegel은, 고전 예술이 그 당시가 아니라 오직 지금에만 그처럼 인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으로’ 상징적이라고 이야기한다.[41] 
문화의 신격화는 사회 기억의 재질서화로 이끈다. 물론 글쓰기의 도움을 통해서. 앞 부분에 언급되었던 모든 기억의 특징들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현재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되는 것과 잊는 것 사이의 진행중인 구별은 그 자신의 시간 위에 기반하고, 과거와 미래의 비현재적 시간 지평을 가로질러 자신의 증류법을 배분한다. 이 과정은 재귀적이고, 그 자신의 시스템의 산물처럼 역사의 결과물들을 투입물로서 시스템 안으로 돌려 넣는다. 스스로를 위계의 꼭대기에 놓아 둘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작하는 유연한, 위계적 수준에서, 더 이상 고정점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훨씬 나아가는 비교를 위해 의미를 제공하는 범위에 유용함을 입증하는 일반화는 통제한다. 신성한 대상들, 시간과 지역에 따라 범주화되는 대상들은 예술로서 박물관 안에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요하다면 그 자신의 도플갱어(doppelgänger)로서 이해될 수 있다.  
고유함과 비교 불가능함의 의미에서 정체성, 진정성, 진실성 그리고 독창성 등은 문제 있는 개념들이 된다. 이는 비교 가능성의 보편성에 대한 대가가 치러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되는 대상들로 표시된다. 이제 이것은 자기-배양(self-culturing) 속에서 사회가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가장 확고하게 스스로에 의해 채택되는 차이의 개념들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것들이 그들 자신에게, 분리된 실체로서 개인에 대해 적용될 것임을 안다. 사회에 대해서 이것은 대조의 형식들이다. 거기서 그 자신으로부터 희망 없음, 아포리아, 리얼리티는 숨겨진다. 이것 중의 어떤 것, 아이덴티티, 진정성, 진실성, 독창성, 고유성 등은 커뮤니케이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시도는 그 자신을 해체한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적 요소는 수행적 요소, 발화에 의한 정보에 의해 반박되기 때문이다. 이는 개별적 사안에서 누군가가 정직하게 행동하는지 아니면 위선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심을 던질 뿐만 아니라, 정직과 위선을 구별하는 가능성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이 가능성이 커뮤니케이션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은 그들이 어떤 것을 다루는 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후에 그들이 사실상 기만적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42]
따라서 문화의 시맨틱은 우발성으로 커뮤니케이션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덮는다.[43] 그것은 모든 ‘필수적인’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을 풀어 놓는다. 그리고 이것 역시 왜 문화가 단지 현대 사회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현대 사회만이 스스로를 구조적인 우발성으로 반성할 수 있는,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반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첫번째 사회다. 진정성에 대한 모든 주장은 커뮤니케이션 불가능성으로 철수하거나 혹은 어떤 사람 혹은 그룹들, 인정 혹은 분파들의 특이점으로 다뤄진다.[44]
시간적 차원에서, 이는 끝 없는 미래, 시작도 끝도 없는 미래, 알려진 것 위에 기반한 모든 조작이 지연되는 미래로 문제들을 지연시키는 것에 해당한다.[45] 이런 미래는 그렇지만 잠복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한 미래를 포함한 세계는 관찰 불가능한 것, 심지어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음을 보장한다. 이는 시스템의 구별과 정체화에 대한 어떤 저항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
5.
문화가 비교하는 것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서 나아가지만 여전히 그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다른 시간, 다른 나라, 다른 ‘세계들’을 잠식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안에서 비교, ‘비교의 제3자’의 관점을 고착시킨다. 문화는 그래서 반성에 의해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반성을 조건 짓는 자기반성에 의해 구별된다. 따라서 그것은 유럽적인 것,을 적어도 출발점에 남겨둘 수 있다.
1800년대, 이는 그 당시 나이브한 역사적 유럽 중심주의를 분명히 인식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합리성의 사고나 인권, 국가,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개념처럼 세계적으로 유용하다고 오늘날 가정되는 다양한 개념들에 영향을 미쳤다. Husserl의 비엔나 강의(1935년 5월 7일, 10일에 열린)는 회고해 본다면 놀랍게 보이는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상황이라는 면에서 이해될 만한데, 그의 관심은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만 구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미 출발점에 놓여 있었던 인간 이성의 telos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통해서.[46]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사회의 조건 아래서, 이런 포스트 식민주의적, 문화적 제국주의는,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에 대한 어떤 대체물도 사회는 가지지 않은 채 모순과 거부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정치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사용은 소박함을 갖춘 지도적 문화 원리들을 다시 주입하고, 그것들을 비교와 반성을 포기하면서 충돌과 교란된 변수들로 변형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만을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즉 시간적 관점에서, 비교를 수행하는 문화로 지시 대상을 돌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를 출발점으로 삼고, 그리고 나서 각각의 경우에 그것이 수행되어지는 현재 속에서 비교를 위치한다. 우리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전통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들을 환영하건 아니면 싸울 수 있는 한 우리는 문화를 가져왔다.[47]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래 된 우리의 문화는 새롭게 보이고, 반면에 글쓰기를 통해서 작동되는 초기 사회의 어린 문화들은 오랜 문화로 나타난다. 이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진보의 사고(그 자체 오래 된) 속에 여전히 뿌리를 두고 있다. ‘post-‘나 ‘neo-‘ 같은 전치사의 증가는 하나의 한계에 도달 했음을, 그리고 이 한계는, 주문 잔고처럼, 모든 것을 post-ism이나 neo-ism으로 바꾸며, 오래 된 것보다 새 것이 좋다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상업적 그리고 지적 광고 양 쪽으로 사용 돼야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즉 어떤 경우에도, 비교 관찰은 단지 현재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이런 시간적 자기 언급의 필연성에 대한 더 추상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문화, 이중화, 비교라면, 그러면 조작적 닫힘의 문제는 이 수준에서 해결될 필요가 있다. 그 경우에 문화는 사회가 구별되는 내적 재귀와 외적 언급을 통해 ‘이중 닫힘(double closure)’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48] 예측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시간적 차원이 공간적 차원보다 전체적으로 특히 경계가 정해진 지역들, 국민 국가들, 그리고 인종들을 통해서 복잡성을 다룰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적어도 모든 차이화된 기능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욱이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 비교는 서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역들과 덜 사회적으로 유리한 혹은 불리한(‘발전의 필요’로서 지시되는)지역들을 골라내는 매우 특별한 의미 만을 가진다. ‘문화’의 의미적 운반이 산업 혁명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의 무모함에 대해 논쟁을 하기 시작하는 반면, 오늘날에는 현대 사회의 진화적이고 구조적인 있을 것 같지 않음(improbability)을 조망하는 지역적 비교를 사용하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을 수 있었다. 이는 문화가 오늘날 제공하는 상징적(결합적) 측면[49]을 표상하는 것 만이 아니라 타자, 이 같은 문화의 악마 같은(분열된)[50] 측면을 반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문화는 관찰자의 관찰을 위한 하나의 관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미 존재한 현상으로 관찰을 이끈다. 물론 관찰된 관찰자는 또한 미래에 그들의 관점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다. 이런 우회를 통해서 미래가 그림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는 특히 현대 사회에 적용된다. 그것은 문화 자체의 관찰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기 관찰, 즉 문화의 개념에도 적용된다. 문화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에 관계된 역사적 개념으로서 문화를 드러낸다. 그래서 ‘문화’를 대상과 같은 레벨 위의 한 사실로 고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다른 대상으로부터 문화적 인공물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이를 시도하려고 했던 모든 정의의 실패, 그리고 스스로의 역사적 분석은 보편주의적 관점의 ‘문화’가 사회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공한다.  
  
[1] 가장 유명한 예로는, 문화와 사회 시스템 개념에 대한 Alfred L. Kroeber와 Talcott parsons 사이의 논쟁을 보라.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3 (1958), pp. 582-583. 또한 Alfred L. Kroeber and Clyde Kluckhohn, Culture, New York 1963.
[2] 예로 Alfred L. Kroeber and Clyde Kluckhohn, Culture: A Critical Review of the Concepts and Definitions, Papers of the Peabody Museum, American Archeology and Ethnology 47:1 (1952), pp. 1-223; Leon J. Goldstein, On Defining Culture, American Anthropologist 59 (1957), pp. 1075-1080; Albert Carl Cafagna, A Formal Analysis of Definitions of Culture, in Gertrude E. Dole and Robert L. Carneiro (eds), Essays in the Science of Culture in Honor of Leslie A. White, New York 1960, pp. 111-132; Leslie A. White, Definitions and Conceptions of Culture, in Gordon J. DiRenzo (ed.), Concepts, Theory, and Explanation in the Behavioral Science, New York 1966, pp. 91-110.
[3] E. g. Robert Boyd and Peter J. Richerson, Culture and the Evolutionary Process, Chicago, 1985.
[4] 만일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런 구별을 특별히 다시 한번 포착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별의 다른 편에 따른 어려움에, 자연 개념에 따른 문제들로 달려들게 될 것이다. 게다가 또 Niklas Luhmann, Über Natur, i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vol. 4, Frankfurt am Main 1995를 보라. 물론 Odo Marguard가 제안한 것처럼, 문화와 자연 사이의 구별을 문화로 재-진입함으로써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가능성도 남아 있을 것이다. Zur Bedeutung der Theorie des Unbewußten für eine Theorie der nicht mehr schönen Künste를 보라. Odo Marquard, Aesthetica und Anaesthetica: Philosophische Überlegungen, Paderborn 1989, S. 35-46에 재출판으로부터 인용되었다. Freud로부터 100여년 전,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은 ‘정신’을 생산함으로써 그 자신을 넘어서다고 가정했다. 대표적인 예로서 Karl Philipp Moritz, Das Edelste, Schriften zur Ästhetik und Poetik, Tübingen 1962, S. 13-19에서 인용.
[5] Frances A. Yates, The Art of Memory, Chicago, 1966을 보라.
[6] 그렇지만 무너진 홀 안에서의 위치에 기반한 가수 Simonides의 죽음의 식별이라는 기반 이야기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한다.
[7] 이 주제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은 Hans Belting, Lik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 trans. Edmund Jephcott, Chicago, 1994.
[8] Belting, Likness and Presence, p. 484
[9] 편집자 주 – Concettismo는 ‘conceptism’의 이탈리아어. 이는 스페인 바로크에 유래한 특징적인 문학 스타일을 지칭하며, 또한 17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 스타일은 재치 있는 은유, 패러독스, 그리고 말장난의 사용으로 특징된다. 
[10] 이런 방향으로 이뤄진 세기 후반에서의 변화에 대해서는 Joan Pittock, The Ascendancy of Taste: The Achievement Joseph and Thomas Warton, London 1973을 보라. 다음 장에 반성과 관련해서, Thomas Warton이 영국 시에 대한 확장적인 비교 역사적 연구를 출판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 History of English Poetry, 4 vols., 1774-1789.
[11] 이에 대해서는 특히 Niklas Luhmann, Verfassung als evolutionäre Errungenschaft, Rchtshistorisches Journal 9 (1990), pp. 176-220.
[12] Antoine Louis Claude Destutt de Tracy, Eléments d’idéologie, 5 vols., Paris 1801-1815, reprint Stuttgart 1977에서의 원래 의미에서.
[13] Jean Paul, Vorschule der Ästhetik, Werke vol. 5, München 1963, S. 169에서의 전체적으로 막연한 이 정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 없는 비판. (비록 정확하게 그것이 트릭이지만!) 그렇지만 p. 201에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Der Witz ... nimmt an keinem Wesen Anteil, sondern nur an dessen Verhältnissen; er achtet und verachtet nichts; alles ist ihm gleich, sobald es gleich und ähnlich wird; ...” (재치는… 어떤 존재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존재의 조건만을 다룬다; 그것은 어떤 것도 존경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재치에게는 비슷하거나 유사한 한에서 모든 것은 같은 것이다.)
[14] 상세하게는 고려할만한 차이를 가진. 그래서 독서와 독자를 반영하는 소설의 상대적으로 전통에서 자유로운 수행보다는 시의 전통에 이끌린 이론에서 더욱 그렇다.
[15] ‘문화’의 발명 이전에 비교를 위한 다른 맥락은 소위 의식(儀式)학(the science of ceremony)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Friedrich Wilhelm von Winterfeld, Teutsche und Ceremonial-Politica, Frankfurt-Leipzig 1700; Johann Christian Lünig, Theatrum Ceremoniale Historico-Politicum, 2 vols. Leipzig 1719-20.
[16] 영국에서 회화, 음악 그리고 시 영역에 대해서는, Lawrence Lipking, The Ordering of the Arts in Eighteenth Century England, Princeton, NJ 1970, introduction pp. 6ff.
[17] 그래서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2013, § 53.
[18] 특히 낭만주의에서. 하나의 예를 들자면, Ludwig Tieck의 초기 소설 William Lovell은 글쓰기로 주어진 사고들, 즉 주요 캐릭터와 보조 캐릭터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로만 이뤄져 있다. 인쇄된 텍스트는 그 자체 글쓰기일 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을 글쓰기를 이중화한다. 일종에 형식 안으로 형식의 재진입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의 쓰여진 의견들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의견들은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변하고, 작가의 내러티브에 독립되어, 어떤 사회적 규칙에 의해 통합되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vorüberfliegender Gefüle’ (떠다니는 감정들)의 충동 하에서 행동한다. 그것은 (공유된) 이성에 의해 ‘in eins zu schmelzen’(하나로 녹아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고딕 노벨의 보통 문채(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 배후에서 비밀리에 당겨지는 줄들)는 사용되고 동시에 아이러니에 의해 가치를 잃는다. 의견들은 결말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혹은 잘해야 기적적인 것, 숭고한 것, 그리고 공포스러운 것이 최종적으로 현세의, 전기적 설명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질 때에만 잘해야 그렇게 될 수 있다. 의미를 찾는 독자들은 ���들 자신의 장치들에 남겨진다. 심지어 같은 시기 유행이 되었던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의해 조건이 정해졌던 ‘해석학’ 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에 의해 환상을 깨게 되었다. Ludwig Tieck, William Lovell, in Frühe Erzählungen und Romane, München 1963, p. 378의 인용을 보라.   
[19] 우리의 방법론적 접근은 전개의 일반적 과정을 뒤집는 비전통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 주제의 섬세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서 ‘검증’하는 이론적 가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차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등장하는 검증 가능한 사실적 언술에서 출발해서 그리고 나서 이론의 발전을 위해 이 언술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뒤바뀜은 인식론적 기반으로서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를 채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20] 이에 대한 방법론적 조건은 기능과 기능적 등가물과 같은 개념 하에서 발전되었다. Niklas Luhmann, Funktion und Kausalität, Soziologische Aufklärung vol. 1, Opladen 1970, pp. 9-30. 문화에 대해서 더 큰 중요성을 아마도 가지고 있는 삼극 구조(지시, 지시된 것 ‘해석자’로서의 기호)에 대한 동일한 사고는 기호학에서 발견될 수 있다. Niklas Luhmann, Sing as Form, Dirk Baecker (ed.), Problems of Form, Stanford, CA 1999, pp. 45-69. 우연히 모든 수학적 방정식은 방정식의 양 편에서 구별되는 것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21] ‘Aus der matten Wirkung der Mythologie auf die neuere Dichtkunst, und so aller Götterlehren, der indischen, nordischen, der christlichen, der Maria und aller Heiligen ersieht man die Wirkung des Unglaubens daran’ (더 최근의 시학에 대한 신화학의 희미한 영향, 모든 신성한 가르침, 인디언, 노르딕, 기독교,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 [비교의 관점을 지적한다. N.L.]의 희미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잇는 믿음의 부족의 효과를 본다) Jean Paul, Vorschule der Ästhetik, p.73.
[22] 라틴과 독일에서의 발전의 요약에 대해서는 Hans Peter Thurn, Soziologie der Kultur, Stuttgart 1976, pp. 10ff. 유사한 명명화 과정은 국가 개념에 대해서 이전에 삼세기에 걸쳐 발생했었다. 그래서 이런 언어적 가능성들이 반드시 새것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의 개념을 포함해서 1800년대 경에 더욱 자주 사용되게 되었을 뿐이다.
[23] 그래서 Raymond Williams, Culture and Society 1780-1950, Penguin, Harmondsworth, Middlesex, 1961판 본에서.
[24] 이에 대해서는, Bernhard Giesen (ed.), Nationale und kulturelle Identität: Studien zur Entwicklung des kollektiven Bewußtseins in der Neuzeit, Frankfurt 1991에 실린 논문들을 보라.
[25] Jacques Derrida, L'autre cap: Mémoires, réponses, responsabilités, Liber (le Monde edition) 5 (October 1990), pp.11-13 (11): ‘Le propre d'une culture, c'est de n'être pas identique à elle-même’ (문화의 구별은 그 자체 동일하지 않다)
[26] 이 중요한 추가는 Aristotle, Peri Psyches 424 a 18-20
[27] Plato, Theaeteus Cff.
[28] Socrates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Theaeteus 192 A-C.
[29] Warren S. McCulloch, Embodiments of Mind, Cambridge, MA 1965.
[30] 이는 심리 실증적 연구가 취하는 전형적인 접근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Ulric Neisser and Eugene Winograd (eds.), Remembering Reconsidered: Ecological and Traditional Approaches to the Study of Memory, Cambridge, 1988.
[31] 세포와 시스템에 대해서, Howard H. Pattee, Cell Psychology: An Evolutionary Approach to the Symbol-Matter Problem, Cognition and Brain Theory 5 (1982), pp. 325-341
[32] Dostoevsky에서 처럼, 희미한 마음(a Faint Heart)
[33] 그래서 Heinz Förster, Das Gedächtnis, Vienna 1948. 또한 Heinz von Föerster, Quantum Mechanical Theory of Memory, in Heinz von Föerster (ed.), Cybernetics: Circular, Causal, and Feedback Mechanisms in Biological and Social Systems: Transactions of the Sixth Conference March 24-25, 1949, New York 1950, pp. 112-134
[34] Heinz von Föerster, Quantum Mechanical Theory of Memory는 특히 이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Karl E. Weick, The Social Psychology of Organizing, New York 1979, pp. 205-231
[35] 예를 들어 Heinz von Föerster, What is Memory that it May Have Hindsight and Foresight as weil?, in Samuel Bogoch (ed.), The Future of the Brain Sciences, New York 1969, pp. 19-64.
[36] 그래서 Gerd Sommerhoff, Logic of the Living Brain, London 1974, pp. 73 ff
[37] 그래서 Robert Rosen, Anticipatory Systems: Philosophical, Mathematical and Methodological Foundations, Oxford 1985.
[38] 예를 들면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 (그러나 잊는 것보다는 기억하는 것에 더 무게를 부여하면서), Aleida Assmann and Dietrich Harth (eds.), Mnemosyne: Formen und Funktionen der kulturellen Erinnerung, Frankfurt 1991; Jan Assmann, Cultural Memory and Early Civilization, Cambridge 2011; Aleida Assmann, Arbeit am nationalen Gedächtnis: Eine kurze Geschichte der deutschen Bildungsidee, Frankfurt 1993.
[39] Karl Weick은 이에 대해서 ‘집합적 마음’ 개념의 변형을 선호했다. 이 ‘집합적 마음’은 어떤 본질적 실체로서 상상되어서는 안되지만, 참여자의 의식이 접근 불가능하게 남아 있는 상호작용의 교차를 통해서 발생되고 유지될 수 있다. Karl E. Weick and Karlene H. Roberts, Collective Mind in Organisations: Heedful Interrelating on Flight Desks,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38 (1993), pp. 357-381. Daniel M. Wegner, Ralph Erber and Paula Raymond, Transactive Memory in Close Relationship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1 (1991), pp. 923-929에서는 ‘자연적’ 커플이 인공적으로 묶인 하나보다 기억하는데 더 좋은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를 독립 변수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차이를 도입하면서, 순수하게 심리학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40] admiratio에서 자극(irritation)으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Niklas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vol. 4, Frankfurt am Main 1995, pp. 55ff.
[41]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vol. 1, Werke in zwanzig Bänden, vol. 13, Frankfurt 1970, pp. 393 ff.
[42] Tieck, William Lovell, p. 549에서 윌리엄 로벨에 의해 에밀리아가 유혹되는 장면을 보라. ‘Oh! man rede mir doch künftig nicht von Menschen, die sich verstellen. Was ist Aufrichtigkeit in uns? (오! 미래에는, 진의를 숨기는 인간 존재들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요. 우리에게 정직이란 무엇인가요?)
[43] Dean MacCannell and Juliet F. MacCannell, The Time of the Sign: A Semiotic Interpretation of Modem Culture, Bloomington Ind. 1982, pp. 29에서는 ‘인간은 문화를 통해 모든 필요한 의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쓴다. 이로부터 문화는 결코 진정한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고, 오직 반성을 통해서만 등장한다는 것이 이어진다. (p. 73)
[44] 그래서 Niklas Luhmann and Peter Fuchs, Reden und Schweigen, Frankfurt 1989를 보라. [역자 주: 서론의 영어 번역은 New German Critique, 61 (1994), pp. 25-37에서 Speaking and Silence로 출판되었다]
[45] Niklas Luhmann, The Future Cannot Begin: Temporal Structures in Modem Society, Social Research 14 (1976), pp. 130-152
[46] 유럽적 맥락을 넘어서 문제를 비교하는 것은 거의 언급할 가치가 없이 경계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때문에 우연히 격렬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Ziguner, die dauernd in Europa herumvagabundieren’ (유럽을 계속 떠 돌아다니는 집시)는 이 유럽적 맥락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 존재의 모든 다른 그룹들은 그들 자신의 지적 자기-보전의 이름 하에 유럽화될 것이다. ‘während wir, wenn wir uns recht verstehen, uns zum Beispiel nie indianiseren werden’ (반면에 우리가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를 들어 인도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dmund Husserl, Die Krisis des europäischen Menschentums und die Philosophie, Husserliana vol. VI, Den Haag 1954, pp.314-348 (p. 319와 320 인용)
[47] Karl Mennheim은 이를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구별에서 표현했다. 전통주의를 통해(물론 그 자체 현대적 개념인) 관례적인 것의 반성 되지 않은 연속성을 표현했다.
[48] 이중적 닫힘 개념에 대해서는 Heinz von Foerster, Observing Systems, Seaside CA. 1981, pp. 304ff. 그리고 Heinz von Foerster, Für Niklas Luhmann: Wie rekursiv ist Kommunikation?, Teoria Sociologica 1:2 (1993), pp. 61-88 (78 ff.). 또한 Dirk Baecker, Die doppelte Schließung der Organisation, Teoria Sociologica 1:2 (1993), pp. 147-187.
[49] 그래서 강하게 확산되는 견해는, 무엇보다도 더 상호주의적 (행위 이론) 개념과 의미론적 상징적 (문화) 개념 사이의 주된 논쟁이 문화의 이런 상징-관계된 정의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더 최근의 설명에 대해서는 Bernhard Peters, Die Integration moderner Gesellschaften, Frankfurt 1993, pp. 67ff. 그리고 Raymond Williams, The Sociology of Culture, New York 1982.
[50] 역자 주 – 여기서 루만은 고유의 그리스적 의미 ‘함께 가져오다’와 ‘나누다,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symbolical’과 ‘diabolical’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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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holystory-blog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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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참기독인이라는 정체성을 이런데서 찾기도했다.
“남들이 뭐라해도, 난 상관안해. 난 기독교인이니까”
“과학시험에 진화론 문제 나오면 거부해야 해, 왜? 난 창조론을 믿으니까”
“학교에서, 회사에서 선배가 아무리 술을 권해도 난 마시지 않아, 왜? 난 참된 기독교인이니까”
“공예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석해야 해,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회사는 절대 가면 안돼”
“세상 노래 들으면 안돼. 특히 락, 헤비메탈, 랩 같은 건 사탄의 노래야”
“기독인이 운영하는 회사(특히 이랜드) 제품 이용해야 해”
뭐, 이밖에 수도 없는 암묵적인 규칙과 강요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아가며, 스스로를 감금해 왔다.
예수가 살았던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려는 생각(세계관)은 어디서 온 걸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은 믿으면서, 왜 삶의 방식은 그런 믿음과 대치되는 것을 선택하는 걸까?
#답은_그대_마음과_양심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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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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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조지
월러 샤푸르지 에들지
아서 왕 귀네비어
루이자 호킨스 딸 메리 루이즈 아들 앨런 킹즐리
g e t 에들지 조지 어니스트 톰슨 에들지 프레더릭 브룩스 아버지 철물상 윌리엄 브룩스
윈 양재사 윈의 아들과 프레더릭 열차 유리창 파손 혐의 스펙
다다브하이 나오로지 1892년 6월 6일 파르시 구자라트 조로아스터교도 문체르지 보우나그리
셜록 홈즈 아서 코난 도일?
베추아나 bechuana 반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인을 가리키는 19세기 말
도라 찰스워스 해리 찰스워스 동생(가상의?) 마리 로이드(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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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다윈과 공동으로 진화론 수립
캠벨 경위 앤슨 지서장 업턴 경사 파슨스 경사 헨스퍼드의 로빈슨 경사
그레이터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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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rmorning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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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부터 닭까지. @midmorningarchive_art 진화론, 알이 병아리로, 병아리가 닭으로 되어가는 과정. . #진화론 #알 #병아리 #닭 #그림 #Drawing #낙서 #Doodle https://www.instagram.com/p/CZ2kXmMhd53/?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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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xboy76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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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세계사 #koohakseo #청아출판사 #studiahumanitatis #renessainance #신항로 #종교개혁 #predestination #절대왕정 #rousseau #독립전쟁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 #lamarseillaise #garibaldi #bismark #산업화 #1848년 #진화론 #세계대전 #de’tente #세줄평 19/8/21-9/20 세계사 2는 근대부터 2차대전 이후의 서양사가 그 대상이며 르네상스,절대왕정,#시민혁명 ,복고체제 ,산업화,제국주의, 세계대전 등을 시간 순으로 다루고 있다 世界史2は、近代から2次世界大戦後の西洋史がその対象であり、#ルネッサンス 、絶対王政、市民革命、復古体制、産業化、#帝国主義 、世界大戦などを時間順に扱っている 19세기의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의 대립을 따로 떼어 인간은 합리 추구의 존재인가 불합리를 따르는 존재인가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19世紀の理性主義と反理性主義をわざと扱い、人間は合理を追求する存在か不合理に従う存在かを深く扱っている 세계 대전의 폭력 사회를 미국의 폭력으로 제압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평화와 전쟁은 결코 먼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교훈이다 世界大戦の暴力社会をアメリカの暴力で制圧し、平和を維持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平和と戦争は決して遠いものではないのを示す教訓だ (Nagoya-shi, Aichi, Japan) https://www.instagram.com/p/B2psO4pgcKx/?igshid=1mbd9racn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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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deygogogo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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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t Regrann from @jtbclecture ・・・ Original post from JTBC: https://www.instagram.com/p/BzxVFwml7iG/?igshid=1jwvbts06lrga ・・・・・・ ・・・ ・・・ ・・・ ・・・・・・ ・・・・ 다윈의 진화론 수업으로 닦은 기본기 이제는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어볼 시간! 인류가 고도화된 문명을 누릴 수 있었던 기반은 과학 기술보다는 '공감력'? . 문명을 '공감'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 . **교수님의 '침팬지어' 단기 속성 레슨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장대익 교수가 말하는 진화의 비밀 공감해야 인간이다 7월 17일(수) 밤 9시 30분 <차이나는 클라스> 본방사수! #JTBC #차이나는클라스 #차클 #장대익 #인싸라면 #침팬지어 #팬트후트 #panthoot #제인구달 #침팬지 #역지사지 #공감 #눈 #공막 #공감 #공감력 #영장류 #진화론 #찰스다윈 #남보라 #홍진경 #지숙 #강지영 #덕원 #오상진 #최서윤 #이용주 #117회 #본방사수 ・・・・・・ ・・・ ・・・ ・・・ ・・・・・・ ・・・・ @jisook718 ・・・・・・ ・・・ ・・・ ・・・ ・・・・・・ ・・・・ #김지숙 #지숙 #JiSook #KimJiSook #ジスク #智淑 #金智淑 #레인보우 #Rainbow #レインボー #RAINNOUS #레인너스 #kpop #kdrama (在 Hong Kong) https://www.instagram.com/p/B0M2u1bl4Fd/?igshid=1myansv9b5e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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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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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있는 건 아니다 기원 2000년을 앞두고 믿을만한 몇 사람들이 모여 지나간 천 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 사람을 추리고 짧은 해설을 붙인 (1,000 Years, 1,000 People)이란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그 서열 네 번째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편집자는 그를 ‘현대과학의 창시자’라고 언급 하였다. 1633년 1월 22일 로마 미네르바 교회에 마련된 종교 재판소의 추기경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갈릴레오는 그가 17년 동안에 걸쳐 연구한 천문학 이론인 지동설을 그들의 억압에 못 이겨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전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과학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고 가르치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지동설을 고집하다 맞아 죽는 것 보다는 그 주장을 철회하더라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추기경들 앞에서 선서를 마치고 나오면서 갈릴레오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것이란 바로 지구를 말한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지동설 이론은 346년만인 1979년 11월 10일 교황청의 비공식적인 사과를 받았다. 물론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인정한 시기는 그로부터도 몇 십 년이 흐른 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의 위대성은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커다란 박해를 받았음을 우리는 숨길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찰스다윈의 진화론 또한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말라는 진화론을 가르쳤다 하여 생물 선생은 재판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그 재판을 속칭 ‘Monkey trial'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웃지 못 할 이야기다. 기성 종교가 과학에 도전해서 번번이 패했으면서도 그들은 신앙이 과학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밝히려고 악을 쓰다가 모두 패배하였다. 크게 보면 오늘 박해 받는 이론이나 주장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닐 수가 있다는 것이다. 1633년에 있었던 일이 1979년에 가서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교황의 사과를 받았다는 것을 볼 때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 비록 패배해도 내일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일단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20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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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tayseek-blog · 15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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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증거를 대어보라니까 묵묵부답ㅡ그러나 인간 창조의 증거는 3운법칙으로서 초등생도 검증 가능하니 역사적 유명 인물의 생애를 중요 연대를 따라 산술 정도로도 얼마든 분석해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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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igstar · 6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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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리안 보도자료] 당신을 우주에 실존하는 ‘천국’으로 초대합니다!...4월 7일 희망자 DNA코드 우주 원격 전송
[라엘리안 보도자료] 당신을 우주에 실존하는 ‘천국’으로 초대합니다!...4월 7일 희망자 DNA코드 우주 원격 전송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24(AH78).3.26
당신을 우주에 실존하는
‘천국’으로 초대합니다!
-라엘리안, 4월 첫째 일요일(7일)‘지구 최초 인간 창조일’기념, 희망자 대상 DNA코드(세포설계도) 우주 원격 전송 의식 진행
-“지구 상 최초의 인간은‘1만 3000여년 전 4월의 첫 번째 일요일’생명창조 실험실에서 창조됐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신(神)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한 진화의 산물도 아니라, 우리 은하계 내 다른 행성에서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룩한 우주인(외계인/ET) 엘로힘(Elohim :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의미)이 DNA(유전자) 합성을 통해 창조(지적설계)했다.”
이같은 외계문명에 의한 과학적 생명창조론을 주장하는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대표 오승준)가 4월 첫째 일요일인 오는 4월 7일 오후 2시부터 전국의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DNA정보(모든 생명정보가 담겨 있는 개인의 고유한 유전자코드)를 우주에 실존하는 외계 행성으로 원격 전송하는‘라엘리안 트랜스미션(세포설계도 전송)’의식을 진행한다.<아래 지역별 트랜스미션 안내 참조>
라엘리안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창조자 엘로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그들의 메시지를 앞장서 전파하고 있는 라엘(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 창시자)은 “지구 상 최초의 인간은 지금부터‘1만 3000여년 전 4월의 �� 번째 일요일’에 한 생명창조 실험실에서 창조됐다”고 밝힌다.
이른바‘인류생일 기념일’에 행하는 라엘리안 트랜스미션은‘세례의 원형’으로서 엘로힘을 인류의 진정한 창조자들로 인정하는 절차이며, 그들이 라엘을 통해 모든 지구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라엘을 엘로힘이 보낸 ‘최후의 메신저’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격이 주어진다.
예언자 라엘은 “‘트랜스미션’을 통해 엘로힘은 당신의 마음을 일깨워 주고, 당신이 항상 각성상태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엘로힘이 당신의 사후(死後) 전 생애를 평가할 때 도움을 줘 엘로힘에 의해 과학적으로‘재생’될 기회를 높여줄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1973년 12월 13일 프랑스 중부 클레르몽 페랑의 한 사화산구에서 엘로힘의 대표(야훼 불사회의 의장)와 처음 만나 인류의 기원과 미래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받은 라엘은 2년 뒤인 1975년 10월 7일 그들의 우주선(일명 UFO)을 타고 다른 태양계에 위치한 엘로힘의‘불사(不死)의 행성’을 방문한 바 있다.
라엘이 직접 체험한‘불사의 행성’은 기존 종교에서‘천국’‘낙원’‘극락’ 등으로 불려지던 곳으로서 실제로 그곳에는 모세, 붓다, 예수, 마호멧 등 엘로힘의 고대 예언자들과 함께 많은 지구인들이 과학적으로 재생돼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기원은‘과학’이며 신도 영혼도 자연발생적인 진화(진화론)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초자연적인 신과 비물질적인 영혼, 그리고 그러한 영적 상태로 구원받아 모여 산다는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의 참된 의미는 엘로힘에 의해 선택받아 그들의 고도의 생명과학으로 재생된 육체로 새로운 삶을 누리는‘불사의 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구 밖 외계에 실제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엘로힘의‘불사의 행성’에 초대돼 과학적으로 재생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첫 걸음은 먼저 엘로힘을 별 너머 우주에서 온 우리들의 진정한 창조자들로 인정하는‘트랜스미션’을 받는 일이다.
오승준 한국 라엘리안 대표는“장차 전 세계적으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엘로힘을 인류의 창조자들로 받아들이게 되면 엘로힘은 지구 상에 건설될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적으로 귀환, 인류가 그들처럼 고도의 황금문명을 꽃 피울 수 있도록 2만 5000년 앞선 그들의 과학지식을 물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라엘리안 트랜스미션(Transmission of Cellular Plan)’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코 우연이나 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엘로힘에 의해‘지적설계’된 우리 인간은 각자 고유한 DNA 코드, 즉 세포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거대한 전자기파의 발신기와도 같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고유의 파동(전자기파)을 방사하며 진동하고 있다.
지구의 과학기술은 아직 생명체의 개별 파동을 주변의 배경 음으로부터 분리해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않았지만, 우리들 보다 2만 5000년이나 앞선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룩한 엘로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쉽게 가능하다.
라엘 또는 라엘리안 가이드는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와 지구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도록 특별히 승인받은 사람들로서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 개성, 특징을 포함해 DNA코드가 가장 뚜렷이 담겨 있는 이마 부분에 전기적 접촉을 좋게 하기 위해 물을 적신 손을 댐으로써 트랜스미션 대상자의 파동을 엘로힘의 컴퓨터에 원격 전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그 사람의 DNA 코드가 엘로힘의 수퍼컴퓨터에 자동 등록된다.
※4월 7일(일요일 오후 2시부터) 지역별 트랜스미션 안내(연락처) ───
> 서울,경기,인천,강원/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본부/ 010-7559-1000
> 대전,충청/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대전충청지부 / 010-5896-8765
> 전주,전북/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전주전북지부 / 010-2458-8640
> 광주,전남/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광주전남지부 / 010-2293-9469
> 대구,경북/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대구경북지부/010-5556-8076
> 부산,울산,경남/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부경지부/010-4998-3121
> 제주/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제주지부 / 010-2429-2250
>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email protected]
엘로힘 (Elohim)
기독교 성경에는 하느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오래 전, 외계에서 빛 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일명,UFO)을 타고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지구에 세워질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 귀환할 예정이다.
엘로힘의 모든 메시지는 한국에서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구 우주인의 메시지) 등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www.rael.org 에서는 E-Book을 즉시 무료다운로드 할 수 있다.(스마트폰 이용시, 구글Play 스토어에서 '지적설계' 무료앱을 다운받을 수 있음)
라엘리안 무브먼트 (Raelian Movement)
지난 1973년과 1975년 엘로힘과 접촉한 '마지막 예언자' 라엘이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엘로힘을 맞이할 지구 대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창설한 세계적인 비영리*무신론 종교단체로, 현재 전 세계 120여개국에 13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주인의 대사관
우주인 엘로힘의 메시지를 알리는 것과 더불어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또 다른 사명은 창조자 엘로힘을 맞이할 대사관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여러 나라에 대사관 프로젝트 유치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런 행운을 얻은 나라는 동시에 엘로힘의 특별한 보호를 누리며 다가올 천 년 동안 지구의 정신적, 과학적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가상 대사관 투어 >> https://3dvisit.etembassy.org/
※참고 영상 : RaelTV 한국 “우리는 외계문명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나요?”
-제1탄 : It’s Time(때가 됐다)-They are here(그들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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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탄 : It’s Time-They are waiting(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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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탄 : It’s Time-They are watching(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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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탄 : It’s Time-They are God(그들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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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탄 : It’s Time-They sent Prophets(그들은 예언자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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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탄 They are Ready(그들은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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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after Hiroshima) 연도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그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은 기독교력이나 이슬람력, 불교력 등이 아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AH연도 사용을 유엔(UN)에 제안했다.
AH연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특히 유일신 종교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전쟁, 테러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계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www.icacci.org
※라엘리안 ‘무한의 상징’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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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EL.ORG / 보도자료 / 국제라엘리안뉴스 / 라엘아카데미 / 과학미륵 / 엘로힘리크스 /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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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7012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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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ted from @jtbclecture (@get_regrann) - 다윈의 진화론 수업으로 닦은 기본기 이제는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어볼 시간! 인류가 고도화된 문명을 누릴 수 있었던 기반은 과학 기술보다는 '공감력'? . 문명을 '공감'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 . **교수님의 '침팬지어' 단기 속성 레슨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장대익 교수가 말하는 진화의 비밀 공감해야 인간이다 7월 17일(수) 밤 9시 30분 <차이나는 클라스> 본방사수! #JTBC #차이나는클라스 #차클 #장대익 #인싸라면 #침팬지어 #팬트후트 #panthoot #제인구달 #침팬지 #역지사지 #공감 #눈 #공막 #공감 #공감력 #영장류 #진화론 #찰스다윈 #남보라 #홍진경 #지숙 #강지영 #덕원 #오상진 #최서윤 #이용주 #117회 #본방사수 https://www.instagram.com/p/Bz7HJkwlHZC/?igshid=1bl55mg6q7f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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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seungkeon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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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1859년 에서 진화론을 주창한 이래로 창조론과 진화론은 반복되는 논쟁거리였다. 이 오래된 논쟁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그 양태가 바뀌어왔지만 그러면서도 변치 않는 어떤 일관된 맥락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을 두고 종교에 눈이 멀어 과학과 이성을 부정하는 이들이라고 한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향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아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을 묻는다면, 진화론이 정론이다. 창조론은 신화로서 연구될 가치는 있을지는 몰라도, 과학의 일원은 아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창조론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이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진화론자가 생각조차 못 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다. 오늘날 진화론조차도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척 흥미로운 지적인데, 믿고 싶은 것을 과학으로 오해하는 창조론자들의 모습을, 그것을 비판해온 진화론자가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출현한 생물들, 특히 동물들 가운데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말한다. 진화론자들이 인간을 동물들 가운데 가장 우월한 존재로 보는 근거는, 인간이 진화의 시간표에서 가장 마지막에 서 있다는 해석에 있다. 즉, 우리 인간이 돼지나 소보다 더 많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이다. 진화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닭이나 원숭이도 그들 나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시대에 우리와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합당한 진화론적 해석이다.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미완성품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다른 동물의 개선품도 아니다. 다른 동물들을 인간보다 진화가 덜 된 모자란 존재로 여기는 것은, 단지 우리가 진화론을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할 점은,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진화론적 믿음이 다른 동물들을 철저히 도구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이자 이 땅의 주인이므로 다른 생명체들을 용도에 맞게 써도 되는 권한이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가져온 전 지구에 걸친 병폐는 여기서 굳이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이미 쉽게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진화론은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명체들의 뿌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적 정론이다. 하지만 그 과학이란 것도 사실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활용하는 방법, 달리 말해 진화론을 해석하는 우리 인간의 자세다. 우리가 진화론을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린다면, 그것은 창조론이 과학이라고 우기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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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adultmen-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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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물고기 / 진화생물학과 로봇공학을 넘나드는 로봇 물고기 태드로의 모험
다윈의 물고기 – 존 롱 지음, 노승영 옮김/플루토
왜 하필 로봇 물고기야? 4대강이 먼저 떠오르는 그 로봇 물고기는 아니다. 물론 진짜 물고기가 아니면서 어딘가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가짜 물고기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말이다. 학자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5억 년 전에 지구가 생겨나고, 약 30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이 나타났다고 여긴다.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간단한 단백질 합성물이었으리라 여겨지며, 이 단순한 물질이 지금의 200만 종에 가까운 다양한 생물로 진화하고 분화했다. 그것도 인간에게 발견된 것만 200만 종이다.
19세기 말 다윈이 본격적으로 ‘진화’의 개념을 소개한 이래 진화론은 더 이상의 경쟁이론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학문적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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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exo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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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 181206 Actress Jung Ryeowon's Instagram update: "보다가 중간에 춤추고싶어 뛰쳐나가게 하고싶은 이영화무엇. ㅠㅜ 배우님들 미친발연기(탭댄스)👍 감독님의 미친 진화론👍 아. 맞다. 인간적으로 데이빗 보위는 반칙. ㅠㅜ 너무 잘봤어요. #스윙키즈"
Translation: "A film that made me want to burst out dancing while watching. ㅠㅜ The actors' crazy foot acting (tap dance)👍 The director's crazy progression👍 Ah. Right. The use of David Bowie's music was like cheating. ㅠㅜ I watched it so well. #Swing Kids"
Photo links: 1, 2
Credit: yoanalo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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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msaemi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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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적 탐구방법 vs 연역적 탐구방법
글을 보다 헷갈려서 다시 의미를 찾아봄
귀납적 탐구방법
자연현상에사 관찰한 결과를 종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
관찰 > 대상, 주제 선정 > 탐구 방법 고안 > 참구 수행. 자료 수집 > 해석 > 결론 도출
여러가지 구체적닌 사례를 모아서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하는 방법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현현상응 이해하는 방법
가설 X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가능성.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윈의 진화론
연역적 탐구방법
가설을 설정한 후 가설을 검증
자연 현상 관찰 > 문제 인식 > 가설 설정 > 탐구 설계 > 탐구 수행 > 결과 분석 > 결론 도출 > 일반화
일반적인 사실이나 원리에서 개별적인 상황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증명할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방법
현대의 과학적 연구는 대부분 연연적 탐구방법을 사용할 듯.
간단 비교
귀납법 : 관찰/실험 -> 이론/가설
연역법 : 이론/가설 -> 관찰/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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