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추상
56perc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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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썬 추상 클래스로 Comparable 타입 선언하기
파이썬 추상 클래스로 Comparable 타입 선언하기
파이썬에서 타입 어노테이션을 붙일 때, 제네릭 타입에 대해서는 typing.TypeVar 를 사용하면 일반적인 타입 T를 가정하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타입 T에 대해서 특정한 성질을 만족하게끔 하는 조건을 넣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리스트에 대한 버블 정렬 기능을 함수로 구현한다고 하면, 인자의 타입은 list[T] 와 같이 타입 T를 원소로 하는 리스트라고 명시할 수 있는데, 이 때 정렬을 위해서는 순서나 대소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하므로, 타입 T 는 x > y 와 같이 대소를 비교할 수 있는 타입이어야 합니다. 파이썬에서는 특정한 성질을 가지는 타입들을 묵시적으로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며 통칭하며, iterable 이나 awaitable 등의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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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kimartspace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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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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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 이상한 모자 겨울잠쥐dormouse
해밀턴 4원수
장미나무를 칠하고 있는 투 파이브 세븐 정원사 / 저년 머리를 잘라라(여왕과 앨리스) / 홍학과 고슴도치로 크로케 경기를 하는 앨리스 / 체셔고양이의 목을 베는 문제로 망나니와 왕이 다투는 중
하트여왕(거트루드 왕비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햄릿의 어머니)
앨리스가 홍학을 든 채 공작부인과 대화중 / 자고 있는 그리폰(사자 + 독수리) / 짝퉁 거북
짝퉁 거북 (말놀이 그림놀이) 응접실 게임(parlor game 빅토리아 시대의 게임) 라파엘전파와 존 러스킨(시인 테니슨 브라우닝 키츠 ;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앨리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짝퉁 거북과 그리폰 / 앨리스에게 바닷가재 춤을 시현 중인 짝퉁 거북과 그리폰 / 거울을 보며 몸치장증인 바닷가재 /
바닷가재 카드리유(quadrille) 랍스터 카드리유 랜서스 카드리유 창기병 카드리유 말놀이 사교춤
전령사 관복을 걸친 흰 토끼가 나팔을 불고 있다 / 법정 진술을 위해 급히 당도한 이상한 모자 / 입정 때만큼이나 잽싸게 내빼는 이상한 모자 /
타트도둑을 찾아라(아이들의 놀이) 석판과 빅토리아 시대의 학교
말 그대로 앨리스가 거인이 되는 바람에 배심원석이 뒤집히고 만다 / 생각에 잠겨있는 왕/ 너희들이 카드밖에 더 돼? /
아무 의미도 없어요(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와 추상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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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0000ken · 6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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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yamullah Jamming and Listening Station /// 나야물라 잼 및 청취 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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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atorial Proposition: The jamming station of Nayamullah and the OK Studio of Julian Abraham "Togar" are the starting point in the pavilion development. Through both installations, the pavilion is imagined as a space for call and response, listening and playing, being with each other and in solitude. The pavilion's location in the National Asian Cultural Center, as one of the free admission spaces within the 15th Gwangju Biennale, provides another context on how a communal space could look when resources are abundant.
큐레이토리얼 제안: 나야물라의 잼 스테이션과 줄리안 아브라함 "토가르"의 OK 스튜디오는 파빌리온 개발의 출발점입니다. 두 설치물을 통해, 파빌리온은 호출과 응답, 듣기와 연주하기, 함께 있음과 고독의 공간으로 상상됩니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의 무료 입장 공간 중 하나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위치한 파빌리온은 자원이 풍부할 때 공동체 공간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맥락을 제공합니다.
Nayamullah is a group of researchers and a band connected through a shared interest in Danarto's works. Nayamullah has produced radio programs and composed songs based on Danarto's stories and works in an effort to keep Danarto's spirit, thoughts, and aesthetics alive. Danarto (27 June 1941 in Sragen, Central Java – 10 April 2018, Jakarta) was an Indonesian writer and artist renowned for his interdisciplinary approach in theatre, literature, music, and visual art. His extensive style ranged from abstract, magical realism, and Sufism to concrete poetry.
Nayamullah took on one of Danarto’s methods, Teater tanpa penonton (Theatre without spectators) to reconnect with other Danarto’s ideas, thoughts, and works through songs and sounds. Danarto introduced this idea at least twice. First in practice and as the name of a theatre group that he assembled to perform his 1978 ‘Bel Geduwel Beh’ play. And, later on, he elaborated Teater tanpa penonton through a lecture with the same title in the 1980 Theatre Meeting in Jakarta.
Nayamullah jamming station is a continuation of Danarto's Teater tanpa penonton where visitors are invited to shift from being spectators into players as they choose to pick up any instrument and jam. The listening station plays various recorded jamming sessions from Nayamullah and Julian Abraham "Togar" as reference points. The signage is part of OK Studio, the ongoing series of work by Julian Abraham "Togar"—a place for music and events and to imagine the role of public space. The Nayamullah iterations span through the Indonesia’s National Cultural Week (2023), The Acquiescent Allies exhibition (2022), and Istanbul Biennale (2022).
Photo Credit: Yudha Kusuma P.
나야물라는 다나르토의 작품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로 연결된 연구자들과 밴드 그룹입니다. 나야물라는 다나르토의 정신, 사상, 그리고 미학을 살아있게 하기 위해 다나르토의 이야기와 작품을 바탕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다나르토(1941년 6월 27일 스라겐, 중부 자바 - 2018년 4월 10일, 자카르타)는 연극, 문학, 음악, 시각 예술에서 학제간 접근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작가이자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광범위한 스타일은 추상, 마술적 사실주의, 수피즘에서 구체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나야물라는 다나르토의 방법 중 하나인 테아터 탄파 페논톤(관객 없는 연극)을 채택하여 노래와 소리를 통해 다나르토의 다른 아이디어, 사상, 작품들과 다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다나르토는 이 아이디어를 최소 두 번 소개했습니다. 첫 번째는 실제로, 그리고 1978년 '벨 게두웰 베'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그가 구성한 극단의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후, 1980년 자카르타 연극 모임에서 같은 제목의 강연을 통해 테아터 탄파 페논톤을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나야물라 잼 스테이션은 다나르토의 테아터 탄파 페논톤의 연장선으로, 방문객들이 관객에서 연주자로 전환하여 원하는 악기를 선택해 즉흥 연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청취 스테이션에서는 나야물라와 줄리안 아브라함 "토가르"의 다양한 녹음된 잼 세션을 참고 자료로 재생합니다. 이 표지판은 줄리안 아브라함 "토가르"의 진행 중인 작업 시리즈인 OK 스튜디오의 일부로, 음악과 이벤트를 위한 장소이자 공공 공간의 역할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나야물라의 반복적인 활동은 인도네시아 국가 문화 주간(2023), 순응하는 동맹자들 전시회(2022), 그리고 이스탄불 비엔날레(2022)를 통해 펼쳐졌습니다.
사진 제공: 유다 쿠수마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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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land · 1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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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앨리스 우세희작가 초대전   2024년 7월 16일 - 8월 15일
마음속 크고 작은 감정을 느낌대로 캔버스에 반영하는 우세희 작가의 비구상작품 순간의 느낌들을 화면에서 재확인 하면서 관람자의 느낌도 반영되길 바래본다
#갤러리앨리스 #우세희 #초대전 #또하나의자화상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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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iatv1004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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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로 끝나는 단어 알아보기 ⭕️
"추상 구문 *이름* : (1)프로그램 언어의 구문 규칙 가운데 구상 구문에서의 구분 문자와 같이 본질적이지 않으며 문법상으로만 필요한 형식적 어구(語句)를 제거하고 배열하는 규칙 이름. (2)개방형 시스템 간 상호 접속 기본 참조 모델의 최상위층인 응용 계층에서, 파일이나 레���드의 구성ㆍ속성ㆍ데이터형 따위의 데이터 의미를 규정하는 데 사용되는 표현 형식 이름. 종단 시스템 간의 데이터 전송에서는 응용 계층과 표현 계층 사이에서 전송 구문으로의 변환이 이루어진다." 전체 주소 도메인 *이름* : (1)호스트와 도메인의 이름을 합친 전체 도메인의 이름. 물리적인 아이피 주소를 나타내는 것이다. "객체 *이름* : (1)객체 지향 프로그램에서 클래스의 한 인스턴스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식별자. 변전소 자동..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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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tam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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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바튼, 피프티 사운즈 Polly barton, Fifty Sounds 01
서문
 점심시간인데 나는 라임색 올빼미로부터 온갖 잔소리를 듣고 있다. ‘아시나요!’ 올빼미는 내 시야를 가로지르며 젠체하고 으스댄다. ‘미국 내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보다 듀오링고로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더 많답니다!’
 지금은 2019년이고 나는 곧 여름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에 따라 나는 디지털 세상 속의 허깨비나 다름없는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마스코트로부터 이탈리아어 어휘와 문법, 온갖 잡지식을 배우고 있다. 듀오링고가 존재한다는 건 최근에야 알아냈지만, 알고 보니 23개국의 언어 학습 코스를 갖추고 전 세계적으로 3억 명이 사용하고 있어, 경이로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처음에는 마스코트인 듀오의 날갯짓을 보고 일본에서 만든 것인가 생각했지만, 위의 잡지식 퀴즈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이 회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듀오링고는 루이스 폰 안과 세버린 해커의 ‘무상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발명품이다.
 듀오의 울음은 소리가 없지만, 야단법석으로, 반쯤은 미친 것처럼, 디즈니 악당처럼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다. 아시나요! 아시나요! 아시나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몰랐다. 적어도 큰 눈망울에 긴 속눈썹을 가진 듀오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몰랐다. 화면에 10번째 팝업이 뜰 무렵부터 나는 이 잡지식 퀴즈에 정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이 퀴즈와 마주칠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약간의 찝찝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점심 시간을 듀오와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듀오의 학습 방식에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다. 공립학교의 언어 교육과 듀오의 학습 모델을 비교하는 것이 일견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언어 중점 어플리케이션과는 달리, 듀오링고는 오디오 콘텐츠가 전혀 없지는 않다. 실제 사람들이 말하는 클립이 있어, 사용자가 마이크에 대고 문장을 말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사용자들이 적어도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 그리고 입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상호작용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레벨 잠금 해제 구조는 게임 생태계에서 가져왔는데, 이 때문에 사용자가 언어를 진정하게 통달하기보다는 그저 레벨 통과 전략에 집중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언어 교육에도 같은 비난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점수 받기를 위한 의미 없는 노력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험 출제자나 녹색 올빼미가 원하는 대로 언어를 배우게 되지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언어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 언어 교육에 다가가고 즐길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왜 듀오의 잡지식이 왜 나에게 불안감을 주며 그 호탕한 자존심을 나는 못마땅해 하는 걸까? 내 불편함의 근원이 지극히 불합리하게도, 듀오가 ‘학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단어는 다양한 강도로 수행되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데 정당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의 태도가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나의 관대하고 합리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하루 5분 또는 20분 동안 듀오링고에서 ‘언어 학습’을 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나는 분개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결국에는 발을 구르는 이를 다치게 하는 발도장을 찍으며 세상이 진짜 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고 정해버린다.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또 다른, 훨씬 덜 안정적인 형태의 학습, 듀오링고의 야단스러운 네온 색깔에 대항하는 라듐과도 같은 학습 방법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언어 학습 방법은 감각의 폭격에 대한 것이다. 그건 뭔가에 홀리거나 악령이 들리고, 몸을 뺏기는 것과도 같다.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의 물결과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통제 불능의 방식으로 산발적인 연상 이미지들의 공격으로 귀를 막고 싶어지지만, 실제로 귀를 막는다고 해도 머릿속은 반향실로 남게 된다. 나를 매료시키는 언어 학습은 출퇴근에 활기를 주고 ‘연속 5번 정답! 잘하고 계세요!’ 같은 메세지로 도파민을 분출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고, 다음에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자신의 자존감을 거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해서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입증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유아기 때 분명 경험했는데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학습의 일종이다. 때로는 너무 어려서 그 경험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그 자체에 정말 불안정한 무언가가 있어서 존엄하고 수치심을 두려워하는 우리 인간은 그 경험의 기억을 억압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목표나 경계를 모르는 학습 방법으로, 흔히 ‘몰입형 학습’이라고도 일컫는다. 수영을 한 번도 배운 적도 없으면서 용감하게 바다에, 그것도 알몸으로 뛰어드는, 고독한 인물이 떠오르게 하는 학습법이다.
 독선적인 말투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몰입’이야말로 바로 내가 일본에 갔을 때 겪었던 거다. 몰입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가기 전에 알았더라면, 일본에 갈 만한 배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잘했다면서 나 자신의 등을 두들기고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나 자신은 안 그런다고 생각한다. 녹색 올빼미의 오만함과 마주하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는 내 마음 한구석에 이런 경험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마음은 이성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출퇴근길에 친화적인 이 앱의 목표 중심적 합리성에 분노를 느낀다.
 특히 내가 듀오에게 말해 주고 싶어 안달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알고 있니! 완전 초보자로 외국어에 몰입하면, 목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목표가 무엇인지 개념화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없어! ‘읽는 법 배우기’나 ‘유창해지기’ 같은 중요한 목표는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를 찔러 볼수록 점점 더 의미가 없어 보이기 시작해!
 외국어에의 몰입은 소리의 폭격이다. 이걸 붙잡고 배우기 시작할 거라고 자기 자신이 선택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뒤에는 벼락치기의 폭격으로 변한다. 일단 이것 배우고, 이것도 배우고, 또 이것도 배우고. 일단 기초부터 시작하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물결 속에 던져질 때 머릿속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모르는 언어로 생활하다 보면 이 ‘기초’라는 범주가 이론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괄하는지 점점 분명히 보인다. 인사말과 일상적인 대화는 당연히 기초며, 기초적인 동사 형태를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숫자가 기초 중의 기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색깔, 옷,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목, 동물, 날씨와 관련된 모든 것, 사람을 묘사하는 형용사들처럼 말이다.
사실 모든 사물이 기초 어휘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어렸을 때 모국어로 처음 배울 곰인형, 유모차, 신발끈과 같은 단어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면 더욱 걱정될 것이다. 그리고 정의, 우정, 쾌락, 악덕, 허영과 같은 추상 명사처럼 가장 근본적으로 보이는 어휘들도 있다.
 이 외국어가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와 완전히 다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말하기의 ‘기초’를 숙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기초가 글자의 형태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어는 표음 문자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묶어서 가나로 통칭한다)가 각각 46자씩 갖춰져 있고, 중국 한자에서 유래한 칸지 2136자가 공식적으로 ‘통용 문자’로 간주되어 총 세 가지 형태의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점에서 끝없는 선물을 주는 언어다. 즉, 당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깨닫게 해줄 기초 어휘가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거다.
 지난주(정말이다) 나는 ‘올빼미’를 뜻하는 한자를 찾아봐야만 했다. 완전히 모르는 한자는 아니고, 어디선가에서 배웠다가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맞다, 이건 자주 사용되는 한자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번역가가 아닌가. ‘올빼미’ 정도의 기초 어휘는 알고 있어야만 했다.
 올빼미 한자를 절망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2분 전의 내가 기억만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어떻게 나무에 앉은 다리 없는 새1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해 했는데, 일본어를 배운지 2년이 조금 넘었던 시절, 런던의 소형 일본 출판사에 막 취직했던 오래 전의 일을 불현듯 떠올렸다. 어느 날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책상으로 다가오는 선배 직원 O를 보았다. O의 손에는 직원들이 휴가를 신청하거나 보고할 때 제출하는 서류 두 장이 들려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바로 내가 최근에 작성한 서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폴리 쨩,’ 그는 내 옆의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음모를 꾸미는 것 같기도 하고 설교하려 드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얘기 좀 하자. 한자 사용이 엉망이네.’
 ’아,’ 이것 말고는 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들을 말에 대한 걱정이 앞섬과 동시에, 선배 직원이 직접 시간을 내서 나를 따로 교육해 준다는 것에 으쓱해졌다.
 ‘어떨 때는 완벽하고, 또 어떨 때는 아무 것도 안 맞네.’
 말하면서 O의 눈은 내 컴퓨터 모니터 위를 표류했는데, 그 화면 가장자리에는 내가 한자 몇 개를 작은 포스트잇 메모지에 써서 붙여 놓았다. 그 중 하나는 ‘까마귀’였던 것을 기억한다. ‘새’와 같아 보이지만 눈을 뜻하는 획 하나가 빠져 있다.2 지난 주에 부탁 받은 번역 자료에서 나온 실수인데, 그때는 몰랐던 차이였다. ‘저건 필요 없어.’ O는 까마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는 다른 포스트잇 메모지 위로 손가락을 맴돌며 내가 필요할 것들과 필요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매의 눈으로 문제가 된 서류를 다시 보았다.
 ‘이것 봐.’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에 뭐라고 썼는지 보렴. 가장 중요한 게 빠졌네.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 버리니까 한자는 일부분을 이런 식으로 빼먹으면 안 돼. “문제”라고 쓰려고 했는데 “몬”이라고 썼잖아.’
 내가 따라잡기 힘들어 한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고는 적대감이 느껴지는 선명한 영어로 한 글자씩 말했다. ‘’몬’은 ‘문’이라는 뜻이야. 너 ‘문’이라고 썼다고.’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역시 그의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쓴 서류에는 ‘건강 문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결근’3이라고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 만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에피소드는 그때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즉, 나는 항상 문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절에서나 볼 수 있는 크고 우뚝 선 문이다. 나는 그 빗장 앞에 서서 문지기들의 환영을 받기도, 빈축을 사기도, 쫓겨나기도 하면서 가끔씩 드나들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때도, 언제든지 다시 밖으로 밀려나거나, 내가 몰랐던 기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는 없다는 걸 항상 의식하고 있다. 가끔은 내가 일본어 학사 학위를 땄거나 제대로 된 어학 코스, 혹은 박사 과정을 밟았다면, 즉 기초를 쌓는 과정을 어떻게든 나보다 더 큰 시스템에 맡겼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자문한다. 대답은, 조금이다. 뒤통수를 맞고, 문의 다른 편에 서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닫는 게 조금은 책임감이 덜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학습이 주로 독학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 무언가를 숙달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들을 직접 알아차리거나 누군가 알려주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 한, 학습이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모두 언어에 노출됨과 그 노출을 인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특히 전에 경험한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와 문화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그 다름을 알아채고, 분노하거나 흥미를 느끼고, 이국적으로 바라보고는 마음껏 흡수하고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로 둔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충만함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고, 꿀꺽 삼키고, 뱉고, 수면 위에 떠오르기 위해 물장구를 치느라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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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oungseob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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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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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위의 기호:
재가입, 재구성, 재생산으로서 팝
Soziale Systeme 10 (2004), Heft 2, S. 292-324 © Lucius & Lucius, Stuttgart
Eckhard Schumacher
번역 – 조은하, 박상우
요약: 팝 문화에 대한 논고에서, Fuchs/Heidingsfelder는 불복종, 전복 이론과 거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 이론적 관점에서 팝 현상을 검토하면서 성과 있을 수 있는 다른 기존의 접근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코멘트에서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데, 이는 이들의 이론 틀에 대한 보완을 가능하게 할 거이다. 이 주제들은 1. 팝의 맥락 안에서 관찰 가능한 기호의 개념과 재가입의 과정, 2. 진보적 도발이 아니라 재구성의 원리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 모델, 3. 미디어의 성향과 담론적 관례들에 의존하는 특정한 음악과 기술의 연결로 록앤롤(그리고 팝)의 이해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팝”을 통해 언급되는 것에 대한 논의는 다루기 쉬운 가정들의 집합 주위를 돌고 있었다. Peter Fuchs와 Markus Heidingsfelder 역시 그들 개괄의 출발점에 그것들을 놓았다. 한 편으로 팝은 정의하기 어렵고, 개념적 범주를 회피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다른 한 편, 팝은 거의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거의 어떤 것이라도 팝이 될 수 있고, 팝이 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예술, 엔터테인먼트, 정치와 진단적으로 국가를 드러내는 기술로서 과학과 같은 보다 넓은 맥락에서 생생하고, 어느 정도 중복된 집합의 사례들을 통해 제시되는 이 두 가지 가정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너무 밀접해서 지름길이 불가피하다. 한 편으로 개념적 애매함은 팝의 개념을 다루는 데서 불명료함에 대해 비난을 받는다. 다른 한 편, 거의 모든 것에 팝의 라벨을 붙일 수 있다는 관찰이, 특정한 현상을 차이화 해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확성이 부족한 개념이라는 증거로서 사용된다. 두 가정을 더욱 연결하게 하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적어도 거의 모든 시기에 묵시적으로 정식화 되는 주장으로, 이 주장을 통해 팝의 개념에 역사적 지표가 부여된다. 각각의 상황을 다룰 때, 종종 쇠락의 내러티브 형식 속에 나타나는 이 주장은 마찬가지로 단순해 보이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다른 언급된 가정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보인다. 팝은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Fuchs/Heidingsfelder가 그들의 이론 틀에서 거리를 두려고 했던 전복 이론의 맥락 안에서는, 이런 관점의 충분한 사례가 있다.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출판물, 상세한 광신주의 혹은 자비로운 무지의 영역 안에서 팝 역사에 대한 공통된 기원 신화를 영속화 화는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다. Fuchs/Heidingsfelder가 이런 배경에 맞서 언급된 가정들의 다양한 버전을 제시할 때, 주된 목적은, 어떤 다른, 개념적으로 더욱 정확하고 이론적으로 유지 가능한 팝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조작되는 사회 시스템”(320)이라 팝을 시스템 이론적으로 재정식화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그리고 문화 과학적 접근에 관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존의 팝 이론과 비교해서, 저자들이 “흐려진 추상”(292)이라 묘사한 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 관찰된 부정확함이나 일반화를 다룰 것이라는 기대는, 그들의 이론 틀 내에서 단지 부분적으로만 충족될 뿐이다.
Fuchs/Heidingsfelder가 불복종과 전복 모델에 맞서 정식화 했던 비판 지점들은, 단지 이 접근들에 대해 덜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만 공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연구의 폭과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문화 연구와 이론적으로 정교한 팝 저널리즘의 맥락 안에서 이들 그리고 다른 접근에서 놀라울 정도로 차이를 두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도전적이다. 한 편에서, 다른 기존의 접근에서 거리두기는 Fuchs/Heidingsfelder가 제시한 것만큼 언제나 중요하지는 않다. 다른 한 편, 그들의 거리두기 방식 역시 현상의 복잡성과 특정성을 포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관찰 관점과 이론적 모델을 애매하게 한다. 
1. 재가입
영미권 문화 연구 안에서 팝에 대한 개입의 결정적 지점으로 저항과 전복이 응결되었던 강조점은 종종 다른 관점에서 팝 현상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데 관계된 이론적 전제들을 쉽게 간과하게 만든다. 예를 들자면 일반적인 팝 이론에 대한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틀로 이야기되는 1979년 서브컬쳐 연구에서 Dick Hebdige는, 문화 현상에 대한 분석에 있어 Barthes나 Eco의 작업들에 따라 정식화한 기호학적 접근들과 Althusser와 Gramsci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했다. 그는 언어학으로부터 언어를 넘어서는 다른 담론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방법의 적용이 문화 연구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 것이라 주장했다.(1997, 10) 이 주장은 슈퍼 이론인 기호학의 적용을 통해서 기대되는 이론적 시야의 확장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팝 현상이 언어, 미디어, 혹은 담론적 맥락 안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팝 현상은, 단어 기반의 커뮤니케이션에 제한된 기호 개념을 통해서 적합하게 포착될 수 없는 미디어 네트워크와 미디어의 변화 과정에 의해 성격을 갖추게 된다.
이런 배경과 달리, Fuchs/Heidingsfelder (296) 처럼 팝 시스템을 팝 뮤직으로 제약하거나 “특정한 미디어”인 노래를 특성화 하는 것 모두 감축으로 나타나는데, 차이화에 있어서 이 감축의 이점은 제시된 개괄의 틀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Fuchs/Heidingsfelder는 “일차적으로, 노래는 텍스트, 소위 ‘가사’를 통합한다”고 쓰는데, 이는 그들의 분석을 일차적으로 가사 속에서 관찰되는 정보 압축의 형식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또한 정보 전달 양식으로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특권화 하는 것은, 적어도 묵시적으로 논의의 이어지는 단계들을 규정한다. “언어적 연쇄”에 부여된 “엄밀성과 구별”은 전제된 외침의 “막연함”과 병치된다. 거기서 Fuchs/Heidingsfelder는 더 이상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사이의 구별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예술의 진화 과정의 반전의 지표를 통해 분석한다. “그래서 팝 에서는 외침이 감정의 진실, 육체, 그리고 모든 관계된 지각의 가능성을, 어떤 반성 이전에 대변한다.”(300f.)
그렇지만 Fuchs/Heidingsfelder가 보여준 것처럼, 노래 가사는 정보 전달 기능으로 제한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외침은 “정보 압축” 혹은 “정보의 불특정화”(303)의 순간으로 한정될 수 없다. 비록 Hebdige에 의해 사례를 들었던 기호적 접근이 그런 고정화와 환원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님에도, 그런 접근의 확장된 기호 개념, 기호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존재하는 기호의 재기능화로서 팝을 개념하는 기호 개념은 여기서 관찰된 의미 작용 과정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기호가 재코드화 되고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게 되고, 도발적 잠재성을 갖추게 되는 과정(Hebdige, 1997, 17f.)이, 동시에 다양한 층위에서 작동하고, 하나의 미디어에서 멈추지 않으며, 다양한 미디어 혹은 형식 사이의 관계를 통해 동작한다는 것은 더욱 자명하게 된다. Paul Morley와 함께 Fuchs/Heidingsfelder가 주장했던 것처럼, “외침”은 사실 “말의 사용 없을 때조차 어떤 특정한 것”(300)을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문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말할 수도 있으며, “감정의 자연스러운 외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소란, 피드백이나 소음 등을 커뮤니케이션적으로 재코드화 하는 것을 통해서 고려할만한 수준까지 구성될 수 있는 미디어의 구성을 지시하는 파괴적 요소로 기능할 수도 있다. 서브컬쳐 형성과 관계된 그런 탈맥락화와 재가입의 전략들이 정치적 행위로 이해될 때, Fuchs/Heidingsfelder가 거리를 두고자 했던 혼란이 빠르게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계 짓기를 통해서, 기호학적인 접근들이 Fuchs/Heidingsfelder가 도발의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탐구하기 위한 차이화 된 도구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렇지만 이 재가입의 과정은 도발 양식에 제한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차이의 커뮤니케이션” ((Hebdige, 1997, 102)
2. 재구성
분명한 차이를 제외한다면, 다른 면에서 눈에 띄는 동일성이 이들 접근들 사이에서 드러난다. Hebdige처럼 Fuchs/Heidingsfelder 역시 팝 이론의 이론 틀을 프로토타입의 특정 시점에 따라 조직된 팝 역사 모델에 기초해서 발전시킨다. Hebdige가 저항적인 팝 문화의 최고점으로 1970년대 후반 펑크 록을 제시했던 역사적 내러티브를 통해서 전복 테제를 실체화 했다면, Fuchs/Heidingsfelder 역시 자신들의 팝 역사의 개관에서 록앤롤을 출발점으로 삼는 특정한 역사적 배치에 따라 “도발의 연쇄”(310)로서 팝 역사를 해석했다. Fuchs/Heidingsfelder는 빅 밴드의 시대가 “시스템의 이륙”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Nik Cohn의 분류에 따라, “모든 것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감상적이었던 pre-Pop의 시대”로부터 구별을 수행했고, 이런 결정의 직접적인 결과가 “록앤롤의 상속자인 ‘록’의 도발적 잠재성”은 “이제 완전히 스스로를 소진”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인 것이다. (310)
시스템의 진화에 대한 경험적 출발점이자 종말점으로 기능하는, 이런 식의 경계들 안에서는, “도발의 연쇄”는 확실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경계를 다르게 설정한다면, 역사는 다른 역사적 묘사, 다른 커뮤니케이션 조작을 통해 구성되어 다르게 이야기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바로 분명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 Swing과 Bebop 사이에 등장했던 상호 언급은, “pre-Pop의 시대”에도 모든 것이 반드시 “부드럽고, 따뜻하고, 감상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차이화의 다른 척도들을 드러낸다. 이는 Thomas Meinecke의 소설 "Musik"의 등장 인물 Karol이 수행했던 팝-뮤직 연구에서 생생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20세기 대중 음악을 조사하고 분류하는데, “달콤함”과 “뜨거움”이라는 구별에 기반해 관찰될 수 있는 “재맥락화, 재코드화, 재가입”에 따라서 수행한다. (Meinecke, 2004, 353) 이를 통해 팝은 다른 역사적 배치 속에서 구성될 수 있다. 팝의 역사는 그래서 스스로를 소진하는 도발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다시 포맷되고, 대치되고, 겹쳐지고 최소한의 차이에 의해 표시되는 지속적인 반복인 재강비의 과정에 대한 관점을 개방한다. Fuchs/Heidingsfelder가 주장하듯, ”주식으로 계산한다는 것”이 예술의 가능한 종말의 기호로 읽힐 필요는 없다. “이제 끝났다. 록 신화와 주제들은 재구성되고 있다.” (310) 심지어 록앤롤의 초기 조차 언제나 팝을 형성했던 기존 패턴의 재구성의 다양한 변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Hebdige에게 록앤롤은 단지 “흑인 가스펠과 블루스”와 “백인 컨츄리와 웨스턴”을 뒤섞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이었다. (1997, 49) 조금 다른 언급을 가지고, 이런 의미에서 Cohn은 록앤롤을 “두 가지 전통, 흑인의 R&B와 백인의 낭만적 웅크림, 화려한 비트와 백인 정서의 혼합”이라 기술했다. (1989, 54)
이런 관저에서 팝 문화는 스스로를 도발의 진화로 형성하기 보다는 기존의 형식과 구조를 흡수하고, 그것들을 수행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지속적인 재활용의 원리를 통해서 형성했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 팝 아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cf. Lippard, 1968), 팝은 기호와 기호 시스템을 통해서 인식 가능한 하나의 예술로 나타난다.
3. 재생산
Fuchs/Heidingsfelder가 “일반적인 팝 존재론”(304)과 자신들의 이론 틀 사이에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획이 이런 맥락에서 선호된 강조점을 고수하기 때문에, 분명한 구별 짓기와 함께 또한 수렴을 향한 운동도 존재한다. “비-자의적 초점”으로 육체를 규정하고, “록앤롤의 비트”를 통해서 음악은 결과적으로 “생명 그 자체”가 된다(313ff.)는 뒤 이은 가정은 이런 방향을 보여준다. 이는 “실체화”에 대한 주장에 대한 더 많은 사례들이나 라이브 공연의 기능에 대한 이어지는 언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실재…뛰고 구르는 것”으로 “애매하지 않게” 번역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미디어 이론과 미디어 역사로부터의 연구들을 통해 시스템 이론적 경험을 보완하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최근에는 대중 음악의 이전 모든 형식과 다른 록앤롤의 도래와 함께, 음악과 기술의 관계가 관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고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강조되어왔다. “록의 도래와 함께… 중요한 것은 노래가 아니다. 록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음악과 기술의 특별한 실체,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함께 담는 것, 그리고 레코드에서 ��한히 반복되고, 오직 레코드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cf. Gracyk, 1996, 37f.) 1930년대, 40년대 재즈나 포크 뮤직의 녹음은 기본적으로 라이브 공연 음악을 보존하거나 혹은 재생산하는 기능이었다면, 록앤롤은 기본적으로 녹음 스튜디오에서 기원한다. 단지 레코드만이 라이브 공연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낸다. 공연은 레코드의 기준과 일치하는 것이고, 레코드를 통해 알게 된 것을 재생산할 때 특히 성공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소급하여 인증한다. (cf. Auslander, 1999, 62ff.) 록앤롤 노래가 구성되는 기술과 음악의 엮임은 적어도 이중 기능이 속하는 현전의 형식과 마주한다. Fuchs/Heidingsfelder가 쓴 것처럼, 그것은 “명시적으로 성적, 육체적 수사”를 전개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거기서 육체는 예를 들어 팝이 가능한 “현전의 경험”을 위한 기호가 될 수 있다. (307, 317) “일반적 팝 존재론”들 조차도 확실히 이런 해석에는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라이브 공연은 또한, 동일성 효과, 일탈 혹은 파열을 통해 진정성, 가치 그리고 높은 질을 승인하기 위해, 현전의 다른 형식, 특히 록앤롤의 경우에는 레코드에 대한 지시 기능 역할을 할 수 있다. 레코드/라이브 공연으로 여기서 개괄한 사례로만 한정할 수 없는, 미디어의 배치와 역사적으로 특정한 표현 형식들 사이의 그런 뒤얽힘 속에서만, 록앤롤, 더 넓게는 팝이라는 개념으로 지시된 것은 구성될 수 있다.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들을 그리고 명백한 기능적 과제들을 정립하는 것의 어려움은 적어도 그런 복잡성에 기인한다. 추가적으로 팝 컬쳐는 단지 기구-매개적 규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본질적 결정의 불가능성이 주어진다면, 조응하는 담론적 위치에 의존해 형성된다. 1950년대 이후 관찰되는 정의와 개념들에 대한 논쟁은 이런 관점에서 수반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팝 컬쳐의 일부분이다. 미디어 이론적 혹은 미학적 관점에서 팝을 포착하려 시도하는 접근들은 그래서, Richard Meitzer가 Frank Sinatra를 “팝 씬의 선두 주자”이자 “록 슈퍼스타”로 특별하게 재규정을 하려는 데서 보였던 것처럼, 사회학적인 방향의 이론들과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1970, 270) 록을 사전에 지배하는 형식으로 고려하는 역사적 배치 속에서는, Meitzer가 쓴 것처럼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록으로 맥락화 가능하다.”
Literatur
Auslander, Philip (1999): Liveness. Performance in a Mediatized Culture. London/New York: Routledge.
Cohn, Nik (1989): Ball the Wall. Nik Cohn in the Age of Rock. London: Picador/Pan Books.
Gracyk, Theodore (1996): Rhythm and Noise. An Aesthetics of Rock. Durham/London: Duke UP.
Hebdige, Dick (1997 [1979]):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London/New York: Routledge.
Lippard, Lucy R. (Hrsg.) (1968): Pop Art. München/Zürich: Droemer Knaur.
Meinecke, Thomas (2004): Musik. Frankfurt a.M.: Suhrkamp.
Meitzer, Richard (1970): The Aesthetics of Rock. NewYork: Something Else Press.
Dr. Eckhard Schumacher
Kulturwissenschaftliches Forschungskolleg >Medien und kulturelle Kommunikation
Universität zu Köln, Bernhard-Feilchenfeld-Str. 11, D-50969 Kö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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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lom10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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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er tataricus
思い出 抽象 遠くの君を思う
추억 추상 이별 기억 먼 곳의 너를 생각한다
Memories Abstract
I mi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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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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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그리움, 한(恨)
가끔 땅고 음악을 지배하는 슬픈 선율을 한국인의 한(恨)과 연결 지으려는 글이나 주장을 목격한다.
'사과 = Apple'처럼 눈에 보이는 거는 1:1 대응이 가능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추상 명사의 경우, 가령 '愛 = Love'라고 해도 될지를 생각해 보면 느낌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는 '愛 ≒ Love'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같은 논리로 슬픈 선율이 많다고 해서 무턱대고 '恨'을 갖다 붙여버리면 의미상 혼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봄.
한국인에게조차 恨은 "그게 뭔데?" 물어보면 답변하기 매우 어려워하는 말 중 하나다. 게다가 비슷한 듯 아닌 듯, '살(煞 or 殺)'이란 말도 있다. "한풀이", "살풀이"처럼 용례도 비슷하다.
살(煞)은 상당히 종교(=무속)적이다.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기분 나쁜 느낌이나, 나에게 닥치는 악운이 귀신의 장난질 때문이라고 보는 거. 아마도 '살풀이'는 살이 붙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기원 의식이고, '굿'은 흉살을 달래서 떨어지게 하는 의식인 거 같다.
한(恨)은 심(心) + 간(艮)으로 파자할 수 있다. 다시 艮은"(상전으로부터) 시선을 아래로 향해 눈 마주침을 피하는 모습"이라고 함. 그래서 '어긋남'이란 의미가 나온 듯하고, 윗사람이 뭔가를 못 하게 막았다는 거에서 '그침 or 한계'란 뜻이 나온 듯. 이로부터 '한 = 마음이 어긋난 상태 or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그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을 공부한 분이라면 '艮'이란 글자에서 팔괘 중 산(山)을 의미하는 간괘(☶)를 금방 떠올릴 것. 보다시피 음효 2개 위에 양효 1개가 겹쳐 있는 괘다. 음효 2개를 일종의 마그마로 보고, 양효 1개가 이걸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센 거로 해석할 수 있다.
양효 입장에서 보면 "굳건하다"란 뜻이지만, 음효 입장에선 양효에 가로막혀 분출하지 못한 채 속에서 끓고 있는 것. 따라서 한(恨)은 꽉 막혀 답답한 상태에 놓인 음효를 마음에 비유한 게 아닐까 나 나름 해석.
이처럼 한(恨)은 욕망, 욕구, 바람, 희망 등등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한 모든 감정을 아우른다. 내 윗세대는 가난해 학교를 못 다닌 분들이 많다. 이런 게 한이 맺힌다. 무협 영화에서처럼 부모 죽인 원수에게 복수를 못 해도 한이 맺힌다. 하지만 유행가에서처럼 연인과 잘 사귀다 이별했다고 한이 맺힐까? 내가 보기에 슬프긴 해도 그렇진 않을 듯.
땅고 가사중에는 조강지처 같은 애인 버리고 딴 여자 쫓아갔다가 버림받고 되돌아와선 "내가 미안해~ ㅠㅠ"하는 어이없는 게 많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천의 안개(=Niebla del riachuelo)' 같은 슬픈 감정을 제대로 녹여낸 명곡이 속속 등장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땅고 저변을 흐르는 정서를 '한맺힘'과 연결하는 거는 좀 넌센스 아닐지?
이에 비해 포르투갈 어촌에서 기원한 파두(Fado)는 다르다. '검은 돛배(=Barco negro)'가 파두의 대표곡 중 하나로 회자되는 이유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라는 명가수 목소리와 더불어 가사 때문이라고 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날마다 수평선을 바라본다. 어느 날 수평선 너머로 남편의 배가 보였다. 배에는 남편의 죽음을 뜻하는 검은 돛이 달려있었다."
한국에도 '연오랑 세오녀', '망부석' 같은 설화가 있듯이 세상 거의 모든 어촌 마을에는 뜻하지 않은 이별로 인한 슬픔을 노래한 이야기나 민요가 전해오는 것 같다. 이거는 한(恨)과 상당히 통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망각이 아닌 '그리움'이란 정서가 진하게 우러나온 것이 파두 아닐까 함.
사라 브라이트만은 2003년 '하렘(Harem)'이란 음반을 발표했다. 여기에 수록한 동명의 곡이 사실은 파두라는 걸, 내가 수업 참여중인 벨리 댄스 선생님이 2018년에 이곡에 안무를 한 영상이 있어서 대화를 나누다 처음 앎.
원곡은 프레데리코 드 브리토(Frederico de Brito)와 페레 트린다데(Ferrer Trindade)라는 두 사람이 작곡한 '바다의 노래(=Canção do Mar)'이나, 1955년 개봉한 영화 '리스본의 연인들(=The Lovers of Lisbon)' 사운드트랙에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고독(=Solidão)'이란 제목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
번역기 돌려보니 '바다의 노래'는 "너와 함께 웃고, 춤추고, 살고, 꿈 꿀 수 있다면 나는 잔인하게 포효하는 바다를 향해 나가지 않을 것. 그러니 내가 떠나지 않게 좀 잡아줘"라는 내용인 듯했고, '고독'은 땅고에서도 흔히 보는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는 내용으로 보임.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하렘'은 "불타는 모래, 갈망의 바람, 거울에 비친 오아시스는 타오르는 불을 비추네, 내 마음 속엔 물이 마르지 않아"로 시작하는 마음의 갈증에 관한 내용.
벨리 댄스 공연을 시청하면서 이것이 파두와 연결되리라곤 예상을 못했으나 의외로 춤동작 뿐만 아니라 정서적 면에서도 잘 어울리는 듯.
공연 시작에 앞서 'Saudade'란 자막이 뜬다. 스페인, 포르투갈 양 언어에서 모두 '그리움'이란 뜻으로 쓰인다.
이게 또 미묘한 것이, 파두 정서 일부를 표현하는 말인 동시에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에선 보사노바를 구성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거든. 대표적으로 까를로스 조빙이 지은 '사무치는 그리움(=Chega de Saudade)'이란 노래.
가끔은 슬프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파두와 달리 보사노바는 슬픔과 그리움이란 감정을 흥겨운 선율 속에 감춘다. 그래서 어떨 땐 파두를, 또 다른 날엔 보사노바를 들으며 카타르시스(=한풀이)를 체험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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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aku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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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일본 오늘의 탄생화 개미취
국화과 참취속(Aster, シオン属)의 여러해살이풀
영어 : Tatarian aster
​일본어 : 시온 / シオン(紫苑)
​시온은 중국명인 한자 紫菀(자완/자원)을 음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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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특산 벌개미취
영어 : Korean starwort
별명 : 별개미취, 고려쑥부쟁이
일본어 : 초센시온 / チョウセンシオン(朝鮮紫苑, 조선 개미취), 초센요메나 / チョウセンヨメナ(朝鮮嫁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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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kimartspace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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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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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너무 늦엊다고 생각되는 날들의 그림들
클로드 모네 카미유 동시외 조르주 큶레망소(총리 친구) 수련 연작 의뢰 유작 인상파 수장
모리스 허쉬필드 폴란드 태생 미국 뉴욕 이민 유대인 나이브 아트 앙리 루소 루이 바뱅 앙드레 보샹 그랜마 모지스(애나 메리 로버트슨) 미국 뉴욕 그리니치 농부 집안 출신
수잔 발라동 남성 여성 누드화 서커스단 곡예사 그림 모델 활동(로트렉 르누아르 드가 등) 로트렉이 발굴 드가에게 그림을 더 배우고 화가로 활동 / 르누아르의 머리��� 땋는 소녀 모델 / 모리스 위트릴로(아들)
앙리 마티스 야수파 색채의 자율성과 평면성 /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추상 회화의 거장이 될 칸딘스키 몬드리안에게도 영향을 줌 /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양대 거장
폴 세잔 사과 정물 / 미술의 규칙들을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음 / 앙브루아즈 볼라르(화상) 세잔의 그림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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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hnkim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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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학문과 지식이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당시에 제시하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학자들이 인생의 실제적인 문제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연구 결과물들을 중대한 것으로 여기고서 진지하게 발표하는 것을 보고서, 거기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학문 앞에서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내가 제기한 의문들과 학문들의 대답이 부합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학문의 잘못이 아니라 내 무지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한 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문들은 이 의문을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이 독자적으로 제기한 질문들에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대답을 해주는 듯이 보였는데, 이것은 실험 학문들이고, 그 정점에는 수학이 있습니다. 다른 한 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문들은 이 의문을 인정하지만 대답해 주지는 않는데, 이것은 추상 학문들이고, 그 정점에는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추상 학문들에 관심이 많았고, 나중에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내 안에서 점점 힘을 키우고 자라나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게 해법을 찾아내라고 절박하게 요구할 때까지, 나는 학문들이 주는 거짓 대답들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톨스토이 [ 고백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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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ojunh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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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展(금샘미술관)_20230315
부산 금정문화회관 금샘미술관 제1전시실에서는 이건희 작가의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16m 크기의 대형 작품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종이와 재봉을 통해 만들어진 추상 작품들에서 공이 많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문하셔서 직접 감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3월 26일, 금샘미술관 제1전시실), http://www.artv.kr/?p=9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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