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Explore tagged Tumblr posts
haihachinadolls · 1 month ago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Khám phá các món kem ngon độc đáo ngày hè ở Jeonnam (phần 1)
Kem khoai môn sọ Gokseong – món kem ngon nâng tầm hương vị quen thuộc
Khi chút nắng cuối xuân dần tạm biệt, thì không khí mùa hè sôi động đang đến gần. Bên cạnh việc lên kế hoạch chu du Jeonnam và chìm đắm trong những lễ hội, sự kiện hè tươi vui trên toàn khu vực tỉnh, thì tìm hiểu và trải nghiệm ẩm thực hè chắc chắn cũng làm bạn vô cùng phấn khích. Đặc biệt, khi nhắc tới mùa hè, có một món ăn mát lạnh với hậu vị ngọt ngào, xua tan cái nóng tức thì mà hầu hết mọi người đều ưa chuộng, đó chính là kem. Vậy kem tại Jeonnam hấp dẫn ra sao? Hãy theo chân mình tìm hiểu qua chuỗi bài viết về các món kem độc lạ tại Jeonnam nhé!
Ở phần 1 này, chúng ta cùng nhau dừng chân ở huyện Gokseong và thưởng thức món kem khoai môn sọ (곡성토란아이스크림), một loại kem có thành phần chính là khoai môn sọ (토란) – đặc sản trồng trên vùng đất Gokseong tươi tốt. Người Hàn hay gọi khoai môn sọ bằng cái tên ngộ nghĩnh là “trứng của đất” (땅의달갈) bởi hình dáng tròn trịa, đi kèm vị ngậy riêng biệt khác hẳn khoai tây, chúng được tin dùng do công dụng tăng cường chức năng gan thận, ngăn ngừa lão hóa vì sản sinh ra axit glucuronic. Bên cạnh đấy, khoai môn sọ cũng chứa nhiều protein, carbohydrate, vitamin C lẫn khoáng chất tốt cho cơ thể.
Dựa trên giá trị hữu hiệu đối với sức khỏe, đồng thời nhằm nâng tầm hương vị quen thuộc từ khoai môn sọ, những người làm việc tại Mika 129 (미��� 129) – quán cà phê nổi tiếng đã quyết định “khai sinh” nên món kem khoai môn sọ độc đáo này. Hơn thế nữa, món kem khoai môn sọ của họ còn từng đoạt giải thưởng lớn khi tham dự Triển lãm thực phẩm chợ truyền thống Gwangju-Jeonnam tổ chức năm 2018.
Lựa chọn giống khoai môn sọ hữu cơ, Café Mika 129 cung cấp tới thực khách món kem khoai môn sọ chất lượng, giữ nguyên vị ngon gốc của nguyên liệu. Do đó, nếu du lịch Gokseong đừng quên thử ngay món kem khoai môn sọ ở Café Mika 129 bạn nha!
Địa chỉ: (Mika 129), 856 Gokseong-ro, Gokseong-eup, Gokseong-gun, Jeollanam-do, South Korea
Giờ hoạt động: thứ 2 – thứ 7 (từ 10h – 16h), đóng cửa mỗi chủ nhật
Photos by Official Blog Naver of Gokseong County, miiinaamiii / photo-AC
JeollaNamdo SouthEast Asia Office Tỉnh Jeollanam
0 notes
soundlight · 2 years ago
Text
[공유] 제철 토란+다시마 먹었더니, 내장 지.. : 네이버블로그
0 notes
pgk1130 · 4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가을이서서히 다가서오고있다 #봉암사#문경봉암사#토란잎#토란이파리#토란(봉암사 (鳳巖寺)에서) https://www.instagram.com/p/CTUnR4whepM/?utm_medium=tumblr
1 note · View note
kim-daehwan0 · 8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물방울 #비 #토란(Chungcheongnam-do에서)
0 notes
paulchang1 · 8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화명수목원의 콜로카시아(토란) Colocasia at Busan Hwamyeong arboretum #화명수목원 #화명동 #부산 #부산여행 #busan #korea #southkorea #꽃 #식물 #botanicalgardens #flower #콜로카시아 #부산민박 #광안리민박 #도라와요홈스테이 #flowerstagram #arboretum #hwamyeongarboretum #dorawayohomestay #dorawayo #arboretum #hwamyeongarboretum #colocasia #토란 #인도 #동아시아(화명수목원에서)
0 notes
girlgroupinsta · 6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190331 / official_lvlz8_: [#지수] 대만 러블리너스분들! 제가 여기 milk shop이라는 곳을 미주랑 배틀트립 대만편 때 갔었는데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오늘 사먹어봤는데 이 맛이 아니에요ㅠㅠ 배틀트립 방송엔 안 나갔었는데... 막 토란 들어간 거라는데 밀크티 맛이구 타피오카도 들어가있었어용 어떻게 시키는 걸까요 이거 안 먹구 한국 가면 슬플 것 같은데ㅠㅠ 내일 꼭 사먹을 거예요 알려줄 러블리너스..???? 멤버들한테두 줬는데 이 맛이 아니야 요거는 케이가 좋아할 맛이에요 우유맛만 나고 토란 알갱이만 들어있어용 어떻게 시켜야 밀크티맛에 타피오카랑 토란까지 먹을 수 있을까요 흑흑
8 notes · View notes
sayholee · 3 years ago
Text
13 Nov - Lunch
생선구이, 문어, 더덕무침, 배추김치, 게 토란 된장국
0 notes
ob-directory · 3 years ago
Text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의 접경에서 흥미로운 상호침투가 일어났다. ‘디자인에서 미술로의 침투’를 대표하는 인물은 앤서니 던(Anthony Dunne, 1964-)이었다. 1999년 발간한 <헤르츠 이야기(Hertzian Tales)>에서 그는, ‘기생-기능(para-function)’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제품 인터페이스의 상징 기능에 주목하고, 비평적 소격 효과를 추구하는 디자인 실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실용성의 세계에서 살짝 비껴선 채 메타 기능을 구현하는 “비평적 디자인(critical design)”을 실천하는 일군의 3D 디자이너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현대미술관과 비엔날레의 양적 팽창이 제공하는 다양한 전시 기회를 십분 활용하는 동시에, 정체 상태에 빠진 디자인 교육 기관을 순회하며 강연과 워크숍을 수행했다.
건축 쪽에선 딜러 & 스코피디오(Diller & Scofidio), MVRDV, 아틀리에바우와우(Atelier Bow-Wow, アトリエ・ワン) 등을, 산업디자인 쪽에선 개념적 디자인 회사인 드로흐(Droog), 메이와덴키(Maywa Denki, 明和電機), 위르겐 베이(Jurgen Bey, 1965-), 마르티노 감퍼(Martino Gamper, 1971-), 노엄 토란(Noam Toran, 1975-), 제임스 오거(James Auger, 1970-)와 지미 로이조(Jimmy Loizeau, 1968-) 듀오, 잭슨홍(Jackson Hong, 1971-)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앤서니 던처럼 혼성적 실천을 도드라지게 만든 인물은 없었지만, 디자이너 얀 반 토른(Jan van Toorn, 1932-)과 이론가 릭 포이너(Rick Poynor, 1957-) 등이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1997년 얀반아이크아카데미에서 열린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Design Beyond Design)>이란 제목의 심포지엄을 기점으로 변화가 일었다. 이후, 작업의 특성을 이해하는 소수의 클라이언트와 협업하며, 백색의 갤러리 공간에서 실험작을 제시하고, 디자인 교육 기관 등에서 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하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렸다.
M/M 파리(M/M Paris), 메비스 & 반 되르선(Mevis & Van Deursen), 덱스터 시니스터(Dexter Sinister), 다니엘 반 데르 벨던(Daniel Van Der Velden, 1971-), 엑스페리멘털 제트셋(Experimental Jetset), 율리아 보른(Julia Born 1975-), 슬기와 민(Sulki & Min)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소위 ‘디자인 아트’로 불리는 영역에 속하는 디자이너-작가 혹은 작가-디자이너들이 그 주인공이다. 디자이너-작가, 즉 디자이너지만 미술가연하는 이로는, 론 아라드(Ron Arad, 1951-)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 그리고 마크 뉴슨(Marc Newson, 1963-)이 유명하다. 의자나 테이블이라고 만든 게 대리석이나 주물로 된 조각품이니, 에디션 수도 적고 미술 시장의 가격에 맞춰 가격도 높은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거래도 주로 이름난 상업갤러리를 통해 이뤄진다.
작가-디자이너, 즉 미술가지만 작업 외의 디자인을 수행한 경우로는, 미술가로서 빼어난 미니멀 가구를 제작했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를 언급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정작 ‘디자인 아트’의 영역에서 유통되는 작가-디자이너는 드물다. 명목상 ‘디자인 아트’라고 지목되는 현대미술은, 대개 디자인의 문법이나 형식을 차용한 작품이다.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 1961-), 슈퍼플렉스(Superflex),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1963-), 래이철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 1963-),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1964-), 안젤라 블로흐(Angela Bulloch, 1966-),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1966-) 등이 곧잘 언급되지만, 그들 가운데 양질의 디자인을 목표로 삼은 이는 없었을 게다.
이러한 ‘미술에서 디자인으로의 침투(아닌 침투)’를 가장 먼저 포착한 인물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였다. 1998년 출간한 <관계성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에서 그는, “이제 미술 작품의 역할은,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 있지 않고, 작가의 선택에 의해 어떤 스케일로건, 실재하는 삶의 방식이나 행위의 모델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종종 디자인 마케팅의 문법과 형식을 전유하는) ‘관계적 미술(Relational Art)’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중첩을 다룬 크고 작은 전시가 열렸다. 2007년 제네바 컨템퍼러리아트센터에서 개막해 2009년 런던 소머셋하우스에서 폐막한 순회전 <그럼 좋지 않았을까... ...미술과 디자인에서의 소망적 사고(Wouldn't It Be Nice... ...Wishful Thinking in Art and Design)>는, 디자이너와 미술가의 혼성적 실천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자리였다. 또한 부대 행사로 마련된 심포지엄 <AC|DC — 컨템퍼러리 아트, 컨템퍼러리 디자인>(2007년 10월 26-27일, 제네바대학교)은, 디자인과 미술의 상호 중첩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기회가 됐다. (비슷한 이슈를 조사 방법론의 차원에서 다룬 출판 기획이, 베라 뷜만[Vera Bühlmann]과 마르틴 비드머[Martin Wiedmer]가 편집·발간한 <사전-세부사항: 디자인과 미술의 리서치에 대한 비교언어학적 제 연구(Pre-Specifics: Some comparatistic investigations on research in design and art)>(2008)다.)
허나 이러한 결산 작업은, 디자인과 미술의 상호 침투를 진작하기보다는, ‘여러 실험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과 미술의 제도적 구분은 엄연하다’는 현실을 강조했다. 디자인을 전유한 미술가들은 제도화된 형식만을 빌렸을 뿐 디자인계 내부로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고, 미술제도 안에서 활동의 자유를 얻은 디자이너들이 제 직업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실험을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AC|DC — 컨템퍼러리 아트, 컨템퍼러리 디자인>에서 릭 포이너가 지적한 바 있듯,) 2005년 ‘디자인 아트’라는 모호한 개념을 동명의 저서에서 제시한 미술평론가 알렉스 콜스(Alex Coles, 1971-)는, 2007년 편집·발간한 앤솔로지 <디자인과 미술(Design and Art)>에서 ‘디자인을 전유한 미술’과 ‘미술이길 희망하는 디자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미술시장의 거품이 무너지기 전엔, ‘디자인 아트’, ‘컨템퍼러리 오브제’ 따위의 이름을 단 중소 아트페어가 등장, 디자인과 미술을 포괄하는 새로운 시장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의 시기는 무척 짧았고, ‘디자인 아트’는 이제 몇몇 미적 사기꾼들, 즉 작가연하는 디자이너들의 빛바랜 장르로 전락했다. ///
추신) 디자이너-작가건 작가-디자이너건, 디자인과 미술 양쪽 모두의 맥락에서 미적으로 유효한 작업을 남긴 이들은 살아남을 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의 문제는, 학계의 오랜 숙제로 남을 전망이다.
추신2) 디자인과 미술의 혼성이라는 시대적 현상과 광범위한 착각을 이용해, 현대 디자인도 아니고, 사실 컨템퍼러리 아트도 아닌 것을 만들어 한 세월을 풍미하는 '디자인-아티스트 연기자'도 있다. 대표적 인물이 리엄 길릭(Liam Gillick, 1964-)과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1966-)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리엄 길릭이 독일관에 그저 그런 가구와 박제 고양이를 전시해놓고 프랑크푸르트 키친 운운하며 '디자인 공간의 경험'을 강조했던 것이나, 같은 해 베니스비엔날레의 본전시인 <세상을 만들기(Fare Mondi, Making Worlds)>에서 이탈리아 포스트모더니즘을 브리콜라주해놓은 듯한 카페테리아를 만들어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던 일은, 훗날 모두 (별로 웃기지 않은) 희극으로나 간주될 테다.
1 note · View note
minorerror · 3 years ago
Text
Tumblr media
점심시간에 달려가 심은 잎채소 모종. 지난번 얻은 밀 옆에는 서비스로 온 토란, 뒤로는 꽃상추, 아삭이 상추, 치커리, 딜, 참취, 곰취, 당귀, 당근 등이다.
Tumblr media
이 각도에서도 한 번 더.
Tumblr media
푸르고 꽃이 진다. 벚꽃의 계절은 짧다.
0 notes
Text
스코어게임 ☏ zlzvkt.wke101.com び
Tumblr media
스타카지노 ”-영화 속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찍는 것이 또 다른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특유의 표정·동작·연기 등을 연구하고,
황금레이스 김 감독도 그런 구상을 하고 있고,
브이카지노 고개를 돌린 그 순간 지성의 시선이 머문 곳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지민이 서 있다.
12벳넘버게임 최반도와 마진주가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주장했던 미팅에서 실제로 두 사람은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 누가 봐도 첫 눈에 반한 남녀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맥스카지노 지난달 26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동계올림픽 개폐회식장이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혀 있다.
빅휠 앞서 소속사 스타쉽엔터테인먼트측은 “정세운의 데뷔앨범은 PART.1과 part.2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스보벳 우거지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돼서 운영도 해봤는데, 미얀마 토란 값이 3배나 뛰면서 부도 직전에 정리했다.
5 notes · View notes
jhqwrhbajuf · 5 years ago
Text
더 벤치워머스 ♂ 근대의 농사풍습½
근대의 농사풍습 표준어 원문 근대에 들어와 자본주의적 관계가 가일층 발전하게 되면서 농업도 점차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근대에 와서도 비록 농업에서는 생산관계가 의연 지배적이었고 농사풍습에서의 변화도 미미하였으나 근대적 농사풍습은 서서히나마 형성되어 갔다.근대에 농사에서의 변화는 우선 재배품종이 확대되고 부분적으로 품종개량이 진행된 데서 표현되었다. 농민들은 오랜 기간 농사를 지어오면서 축적한 경험과 다수확품종을 얻기 위한 탐구과정을 통하여 이 시기에 와서 작물의 품종을 늘이거나 개량하였다.농민들은 전 시기에 재배하던 품종을 계속 재배하면서 이미 있던 종자를 우량종으로 개량하기도 하고 밖으로부터 들어온 새 품종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벼의 경우만 보아도 종래에는 올벼로서 구황되오리, 자채, 저공 등이 있었다면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밖에 닭우리, 버들오리, 풍랑되조 등이 새로 나타났다. 밭벼로서는 본래부터 재배해 오던 우득산도, 칠산도, 보리산도 이외에 메밀벼, 검은벼, 서도 등 새로운 품종을 재배하게 되었다.19세기 후반기에 다른 나라들과의 거래가 빈번해 지면서 밖으로부터 새로운 벼품종도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벼품종으로서는 석와도, 향도, 은도미, 청상통미, 사봉미 등이 있었다. 근대에 재배품종이 새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재배해오던 작물도 더욱 개량되어 널리 재배되었다. 1888년에 지석영이 쓴 『중맥설』이 나오고 남부지방에서 2모작체계가 보편화되면서 밀, 보리, 특히 보리를 많이 재배하게 되었다. 콩인 경우에도 장단대두, 부산대두, 안변대두 등으로 불리우는 우량종 콩이 황해도, 경기, 함경도, 경상도 등 콩 생산지들에서 대대적으로 재배되었다. 특히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면서 채소 작물구성이 현저히 확대되었다.이 시기 재배된 채소와 과일로는 배추, 무, 가지, 오이, 호박, 참외, 수박, 고추, 파, 마늘, 부추, 미나리, 생강, 토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대도시주변에 채소와 과일 농지가 확대되고 그 재배가 집약화되면서 평양무, 개성배추, 서울배추, 평양의 금참외, 서울참외 등이 특산물로서 이름이 높았다. 농사에서의 변화는 다음으로 새로운 광물질비료와 ‘금비’를 주게 된 것이었다.1)근대과학기술이 보급되면서 농민들은 농작물의 풍작을 보장하자면 유기질 거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근대에 편찬된 농서들은 이전시기와는 달리 광물질 비료를 많이 들고 있다. 1885년 안종수가 쓴 『농정신서』에서는 동물성, 식물성 유기질비료와 함께 염초, 토류황, 생석회, 진흙 등 12종의 광물질 비료를 들고 있다.1909년에 편찬된 농업통속 서적인 『실리농방신편』에서는 광물질 비료를 석희, 염류, 목회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속하는 12종의 비료와 그 효능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농서들에 광물질 비료들이 소개되고 있은 것은 이미 광물질 비료의 유익성을 체험한 실천적 경험이 창조되고 점차 농사에 도입 보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이 시기 농사에서의 변화는 또한 관개수리시설이 일정하게 건설되고 논농사를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부패무능한 조선통치자들의 악정과 통치제도의 문란으로 수많은 관개시설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강력한 항의와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적지 않은 관개시설들이 복구 또는 신설되었다. 연안 남대지가 1890년과 1901년 2차에 걸쳐 지방사람들의 부역노동에 의하여 복구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0년 함주지방 사람들에 의하여 폐기되었던 이곳의 조양보가 보수되었다.이밖에 경상도와 개성, 단천 등지에서는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자체로 관개공사를 벌였다. 이처럼 근대에 와서 관개시설이 일정하게 건설된 결과 논면적이 늘어나고 단위당 소출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관개시설의 건설은 주로 통치자들의 식량약탈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농민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고 농업생산은 의연히 중세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 벤치워머스 얼간이 삼총사의 파란만장한 게임이 시작된다! 난쟁이 똥자루 거스, 게이 비디오 점원 리치, 멍청한 신문 배달원 클라크는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조금 모자라고 답답한 인생들이다. 우연히 동네 야구장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넬슨이라는 소년을 구해주게 된 삼총사는 넬슨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멜이 자신도 소외된 대상이었다며 3인조 야구팀을 결성해서 지역의 초등학교 야구팀들을 상대로 콧대를 꺽어줄 것을 제안받게 된다. 그리고 토너먼트로 우승 팀에게는 자신이 투자한 미국 최고의 구장들과 맞먹을 만한 규모의 구장을 상으로 내걸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삼총사는 벤치의 영원한 후보선수라는 의미의 '벤치워머스'를 팀명으로 정하고 소외된 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는 취지의 야구 경기를 하기로 한다. 멜은 유명 메이저 선수였던 레지 잭슨을 불러 삼총사를 위한 야구 특별훈련에 돌입하는데...
0 notes
iasuhfiu · 5 years ago
Text
☞테러리스트 Ⅳ 해충(害蟲)의 피해 ☞
해충(害蟲)의 피해 홍수, 가뭄, 폭풍, 서리, 폭설, 흙비, 지진, 폭우, 우박, 안개, 이상 기후 등 다양한 기상 이변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와 더불어 해충들의 이상 번식 역시 우리 조상들의 삶에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우리 조상들은 해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세계인을 괴롭히는 해충 2012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리비아 등에서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농가에 큰 피해를 입혔다. 2011년에는 호주와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떼의 습격이 있었다. 특히 호주에서는 8㎝가 넘는 커다란 메뚜기가 농장과 목초지를 초토화시켜, 호주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를 표현한 1689년의 동판화. 메뚜기는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두 배에 달하는 작물을 먹어치우는 식욕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과 기근 등의 피해 시에 메뚜기떼가 발생해 더욱 큰 재앙이 되기도 한다. 해충들 가운데 인간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메뚜기다. 메뚜기는 평소에는 단독생활을 하는 순한 곤충이지만, 무리를 이루면 맹렬한 공격성을 갖는 무서운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다. 메뚜기떼의 발생은 가뭄으로 먹이가 줄어드는 등 한곳으로 몰려야 하는 상황에서 주로 발생한다. 메뚜기는 한자로 황(蝗), 황충(蝗蟲), 비황(飛蝗)으로 표현하는데,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누리 피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도 해충 때문에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누리 피해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가 기록되어 있다. 누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음력 7월과 8월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메뚜기는 약 140여 종(種)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앙을 일으킨 누리는 주로 ��무치로, 가을철 곡식을 수확할 시기에 주로 활동하며, 건조한 기후에 이어 습기와 따뜻한 온도가 맞게 되면 대규모로 번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종이라고 한다. 이들은 논보다는 산에 인접한 밭이나 휴경지에서 서식할 수 있는 종이고, 유전적으로 대규모로 발생할 요인을 갖고 종이다. 또 애메뚜기 종류들도 삼국시대에 큰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도 한다. 삼국시대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높고, 1년 농사를 짓고 경작지를 한 두 해 묵힌 후 다시 농사를 짓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요즘 논에서 볼 수 있는 벼메뚜기는 삼국시대에는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누리로 인해 주로 피해를 입은 작물은 보리나 콩이 아니라, 가을에 수확하는 벼나 조였으며, 특히 조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397년 7월 신라 하슬라(강릉 일대)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생겨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거나, 465년 신라 사벌군(상주)에 누리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기록 등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나라에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발생한 누리의 피해가 서로 공통되는 바가 적어, 누리의 피해가 광범위한 지역이 아닌 국지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다만 고구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1~412) 15년 7월 ‘누리와 가뭄이 있었다.’, 신라 실성이사금(實聖 尼師今, 재위: 401 1)~417) 5년 7월 ‘나라의 서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는 기록은 405년에 동시에 발생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동시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면, 피해지역은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122년과 399년 신라, 62년 고구려, 208년 백제에서 발생한 누리에 대해서는 황이 아닌 특별히 비황(飛蝗)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누리가 이동하여 피해를 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누리의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 메뚜기는 한자로 황충(蝗蟲), 비황(飛蝗),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가뭄으로 인해 메뚜기떼가 발생하면 식량생산이 줄어들어 기근이 발생하고, 이는 전염병의 창궐 등과 맞물려 끔찍한 재앙으로 다가왔다. [출처: gettyimages]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 안될 때에 누리가 발생하여 논밭에서 자란 곡식을 다 갈아먹으면 농민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져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된다. 754년 누리가 발생해 곡식이 귀해지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향덕(向德)이란 자는 너무 가난해 아버지를 봉양할 수 없어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이기도 했다. 흉년의 피해가 다음해에도 이어지자 당시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사람,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가난한 자들에게는 곡식을 나눠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조치를 해주었다. 571년 고구려 평원왕은 누리떼가 발생하자, 당시 짓고 있던 새 궁궐인 장안성 축조를 중지시켰다.굶주린 백성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 생겨났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을 위로해 주거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면서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누리의 발생은 정치를 잘못한다는 신호로 여겨져, 왕으로 하여금 정계 개편을 단행하게 만들기도 했다. 720년 신라 성덕왕은 누리가 발생해 농사에 큰 피해가 생기자, 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중시(中侍) 사공(思恭)을 물러나게 하고 파진찬(波珍湌)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는 정계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769년 5월 누리와 가뭄이 발생하자 혜공왕은 백관들에게 각자 아는 인물을 천거하게 했다. 이러한 삼국시대 왕들의 조치들은 고려,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시대 황충은 곡식에 피해를 입혀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나쁜 해충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 22회, [고려사]에 57번 기록된 황충 기록 가운데는 이상한 것이 등장한다. [고려사절요]에는 1133년(인종(仁宗) 11년) 황충이 경기의 산과 들에서 소나무를 먹고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뭄과 황충이 동시에 벌어진 이 해의 황충 기록에는 누리뿐만 아니라,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의 피해도 같이 기록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1191년 8월 해주에서 발생한 황충은 벼농사를 해친 벼멸구일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1016년 7월 비황(飛蝗)이 발생한 사건은 전형적인 누리의 피해로 볼 수가 있다. 1016년 현종은 누리의 피해가 발생하자 죄수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도 계속되자 대궐의 정전(正殿)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감상선(減常膳-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들 때에 임금이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의식)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또 세금을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228년 고종(高宗)은 누리로 인해 농사가 망치는 일이 벌어지자 신하들을 보내어 여러 곳의 신사(神祠)에서 재앙을 멈추게 해달라고 빌고, 또 불교의식인 반야도량(般若道場)을 궁궐 안에 있는 선경전(宣慶殿)에서 27일 동안 베풀어 종교적인 힘으로 이를 물리치려는 노력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재해 대책 1536년(중종(中宗) 31년)에는 3도(道)에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들을 뒤덮어 남아난 곡식이 없을 정도였다. 오랜 가뭄 끝에 누리의 피해를 입은 후에는 다시 장마가 범람해 산과 언덕이 무너지고,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흙더미에 깔리는 참혹한 재해가 잇달아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9월 신하들은 중종에게 강무(講武-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일)를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중종은 재해를 만나 매사에 한층 삼가는 것은 지당하지만 임금이 재해에만 마음을 써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폐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했다.적은 수의 메뚜기는 좋은 간식거리지만, 수백ㆍ���천ㆍ수억 마리의 누리는 인간이 당장 어쩌지 못하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벌레를 많이 죽이면 조화로운 기운(和氣)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잡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잘못된 말이 민간에 퍼지기도 했고, 누리의 발생은 임금이나 관리의 덕이 부족해 발생한 탓이므로 임금과 수령이 덕을 닦아서 물리쳐야 한다는 믿는 선비들도 있었다.1447년 세종은 요망한 기운은 덕(德)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 선비들의 생각을 두고 글자에만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해충이 발생하는 즉시 잡아서 묻어버리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해충으로 인한 재해를 없앨 수 있는데 민간에서 이런 이치를 모르고 처음에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큰 우환이 된다고 하였다. 세종은 누리떼가 번식하지 못하도록 발생 초기부터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황충이 처음 나오는 상황을 조사해 보고할 것을 주문했다.세종의 이와 같은 조치는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누리떼의 발생을 미리 예방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누리가 먹지 않는 토란 등을 다른 작물과 함께 심고, 겨울철에 메뚜기 알을 찾아 박멸하며, 발생 시기를 관찰해 즉시 죽이거나, 떼를 지어 날을 때에는 낙하지점을 알아내서 포살하고, 긴 장대에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아 자신의 논밭에 오지 못하게 쫓아내거나, 볏짚을 태운 재나 석회를 살포하고, 누리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아침에 포살하는 등의 방법을 제시하였다.세종은 1444년 공주에서 누리가 발생해 곡식을 해치므로 군대를 출동해 잡게 했는데, 잡은 것이 60여 석이나 되었다. 농민들은 누리가 발생하면 물론 잡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누리를 제대로 막기란 불가능했다. 백성들은 하늘에 빌거나, 하늘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날씨가 추워져 저절로 누리가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 피해를 끼친 누리 1604년(선조(宣祖) 37년) 6월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강원도 간성(杆城- 고성군) 지역에는 황흑색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전답에 두루 깔려 곡식을 남김없이 다 갉아먹었으므로, 며칠 사이에 들판이 불타버린 땅과 같이 변하고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다고 하였다.1437년 (세종(世宗) 19년) 2월 기록에는 작년에 중남부 지역 4개 도(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농사를 짓지 못했는데, 특히 경기도의 안성과 충청도의 공주(公州)·신창(新昌)·아산(牙山)·회덕(懷德)·직산(稷山), 전라도의 전주(全州)·함열(咸悅)·임피(臨陂) 등의 고을은 모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금년 봄에는 역질(��疾- 강한 유행성 전염병)마저 유행해, 백성들이 자기 손으로 소와 말을 잡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보리 뿌리를 캐어 먹이를 하며,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여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도 있고, 혹은 아이를 길에 버리어 아이가 쫓아가면 나무에 잡아매고 가는 자도 있다는 참혹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누리는 가뭄이나 역병, 홍수 등 다른 재앙과 겹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누리의 피해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충청도, 영남과 호남 등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 백성들을 괴롭힌 송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261건의 황충 발생기사 가운데는 고려시대와 마��가지로 곡식을 해치는 벌레뿐만 아니라, 소나무 등 산림을 해치는 해충들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황충이 모두 누리는 아니었고, 일부는 나방이나, 벼멸구, 송충이도 황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곡식에 피해를 주었던 나방(왼쪽)과 소나무에 큰 피해를 입혔던 송충이(오른쪽). [출처: gettyimages] 황충 외에 가장 많이 역사에 기록된 해충으로는 송충(松蟲)이 있다. 송충이가 피해를 입히는 소나무는 고려와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관리되고 보호되는 나무였다. 송충이 주로 먹는 소나무 껍질은 백성들에게 최후의 구황(救荒)식품이기도 했던 만큼, 국가에서 송충이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1101년에는 고려에 송충이가 크게 번식했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1102년 5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교의 행사인 초제(醮)를 올렸고, 다음 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의 산신과 3곳의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송충이가 없어지기를 빌기도 했으며, 군사 5백 명을 풀어서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조치를 취했다.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 송충이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1403년 태종 임금은 송충이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승추부(承樞府), 순위부(巡衛府) 등 여러 관청의 장인과 관리가 사람을 내어 1만 명이 참여하였고, 한 사람이 석 되(升) 정도를 잡아 땅에 묻었다. 태종은 송충이의 재앙은 인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신하들은 이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여러 날에 걸쳐 송충이를 잡는 일을 한 끝에 송악산의 여러 골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잡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송충이를 잡는 일은 본래 승추부의 일이었다.이렇게 송충이를 잡았어도 또 다시 발생하자, 태종, 세종 등은 여러 관청의 관원들과 노비 등을 징발하여 수시로 송충이를 잡게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송충이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시기에 다시 큰 피해를 입혔다. 1685년 숙종은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의 군졸들을 다 동원해 경계를 나누어 송충이를 잡아 없애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1702년에는 한양 인근 산에서 송충이가 번식하자, 3일 동안 사람들을 뽑아 잡은 송충이의양이 3,972석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숙종은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해 특별히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기양��(祈禳祭 - 재앙을 쫓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해충 제거와 백성들의 피해 정이품 소나무.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궁궐 수리 등의 이유로 특별히 보호를 받기도 했다. 특히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는 세조(世祖)에게 도움을 준 인연으로 벼슬을 받았다. 송충이는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나쁜 해충이었다. 송충이를 잡기 위해 백성을 동원하다 보니, 백성들의 피해가 커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1729년 영조는 ‘송충이를 잡는 일은 폐단이 커서 백성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 송충이를 잡느라 백성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금원(禁苑- 대궐 안의 동산)의 소나무 잎을 상하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하고서, 군졸들을 시켜 사직단 주변의 송충이만을 잡게 하고 나머지는 놔두라고 명하기도 했다.하지만 1755년 한양의 사산(四山- 인왕산, 낙산, 남산, 북악산)에 송충이가 크게 번지자,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동원되어 잡았다. 임금의 명이 철저히 지켜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특히 왕릉(王陵) 주변 숲에 송충이가 발생하면, 백성들은 농사일을 제쳐놓고 군사들과 함께 송충이를 잡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송충이는 백성들의 비상시 먹거리인 소나무 껍질을 없애고, 땔감인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등 이래저래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벌레였다. 한국사에 익숙한 해충 미국의 작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은 그녀의 대표작 [대지(The Good Earth)]에서 중국에서 발생한 메뚜기떼의 피해를 생생하게 묘사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메뚜기떼의 피해를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20세기 이후에는 방충제(防蟲劑)와 농약(農藥)의 사용으로 인해 해충으로 인한 피해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을 위협한 자연재해의 하나로, 해충 특히 누리와 송충이의 피해는 매우 컸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井上秀雄, [고대조선사서설], 영락사, 1978;문태영, 윤일, [삼국사기의 蝗에 대한 문화곤충학적 해석], [고신대학교 논문집] 5집, 2000;윤일, [조선시대 충청권에서 발생한 황충에 대한 문화곤충학], [자연과학] 13-1, 대전대학교, 2002;문태영, 윤일, 남상호, [역사서에서 곤충기록의 형태], [자연과학] 14-1, 대전대학교, 2003;박해철 외, [조선왕조실록과 해괴제등록 분석을 통한 황충의 실체와 방제 역사], [韓應昆誌] 49-4호, 2010.[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1년 오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92년보다 1년 앞당겨 보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기록뿐 아니라, 신라 측 기록도 1년을 앞당겨서 보아야 한다. 실성이사금의 즉위년은 402년이 아닌 401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 아침, 2011년. 53~63쪽 참조.주석 레이어창 닫기 주석 1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1년 오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92년보다 1년 앞당겨 보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기록뿐 아니라, 신라 측 기록도 1년을 앞당겨서 보아야 한다. 실성이사금의 즉위년은 402년이 아닌 401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 아침, 2011년. 53~63쪽 참조. 테러리스트 서울에 상경한 사현,수현 형제. 고아였던 이들은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성장한다. 명석한 두뇌에 완벽한 실행력으로 서울경찰청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형과 이제 경찰대학을 수석졸업한 동생.그러나 이들 형제의 앞길을 동생 수현이 초임지에서 과잉방어란 명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3년형을 마치고 나온 수현은 친구 상철이 범죄조직의 하수인에게 끌려가 죽음을 당하면서 새생활을 시작하려던 그의 결심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평생의 꿈과 친구마저 잃은 수현은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인 암흑가의 보스 임태호란 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젊은이의 건전한 이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뒤틀린 세상을 부수기위해 무법의 테러리스트로 변신한다. 한편 사현은 사회에서 일대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동생 수현이란 사실을 알고 난처해지는데......
0 notes
wbtiger · 5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국일따로국밥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의 명성과 전통을 가진 집이다. 70여년.대단한 세월이다. 따로국밥.하면 바로 떠올려지는 게 이 집이고 대구맛집.하면 바로 떠올려지는 몇 집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3년 전이던가? 두어번 방문했을 때 그 전보다 많이 못 해 진 맛에 실망을 한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다시 예전 화끈하면서도 구수한 맛을 회복했다. 토란도 적당히 푹 삶아져서 토란 싫어하는 사람도 잘 드실 듯. 결국은 이 따로국밥 이라는 게 선지국인데. 마샬비가 볼 때 대구권에서 선지국.따로국밥하면 3대를 꼽을 수 있겠다. #국일따로국밥 #대덕식당 #자인식당 이렇게이다. 국일이 가장 구수하고 깔끔하고 대덕이 맛이 진하고 자인이 맛이 아기자기하고 상차림도 아기자기 정갈하다고 할 수 있겠다.(대구 국일따로국밥에서) https://www.instagram.com/p/CAsVzFAns_a/?igshid=1x0ma1rxef63r
0 notes
sayholee · 3 years ago
Text
30 Oct - Lunch
Porcini orzo
Salad - 감, 토란, 오이, 양식송이버섯, 새우
0 notes
mtmiso · 6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토란탕 생전 처음 끓여본 토란탕 @a01035322859 샘께서 주신 토란 알레르기가 있어 손질하는데 조심스러웠어요. 유투브 영상을 보고 토란알을 손질 살뜨물에 담궈 아린맛을 뺀 후 소고기 무랑 넣고 끓였는데... 토란탕이 아주 맛 있습니다. (Seoul, South Korea에서) https://www.instagram.com/p/B3nfxihF8PKrrtSCmpeDDg-ya3aobb46InKyqA0/?igshid=odlzjr0zlu3r
0 notes
ahnara · 5 years ago
Photo
Tumblr media
[2020년 2월 14일 ~ 2월 16일 홈그라운드 2월 오픈스튜디오-아뿐또.쎄오 운영 및 예약 안내] ⠀ 저는 2014년, 이 요리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다니던 식당을 위해 잡 인터뷰를 하려고 그를 불렀습니다. 이제 오래 전이라 희미하지만, 간결하고 적절한 그의 이력서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함께 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는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었고, 과묵했고, 손이 무척 빠르고 야무지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간 해왔던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에 뚝딱 만들어 낸 맛깔난 스페인 요리는 그 후로도 만나면 늘 먹고싶은 음식이 되었습니다. ⠀ 함께 했던 식당을 뒤로 하고 저는 홈그라운드를 만들었고, 요리사는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좋은 동료와 함께 호흡을 맞춰 일해왔습니다. ⠀ 약 5년의 시간동안 서로 지켜보았고, 많은 분이 알고 있는 요나의 <재료의 산책>, <효자동 두오모>, <꼬메이베베>, <아까 h>, <베무쵸칸티나> 그리고 저희, <홈그라운드>에서 늘 정확하고 빠른 손으로 업무를 지원하던 그녀가 자기의 이름 혹은 브랜드를 가지고 요리하는 날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자주 그를 두드렸던 것 같습니다. 😂 ⠀ 정확하고 심지 굳고 씩씩하게 맛깔난 음식을 준비하는 그와 꼭 맞는 이름을 가지고 첫 번째 팝업 식당을 홈그라운드의 2월 오픈스튜디오에서 선보입니다. ⠀ 그간의 다양한 경험과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 만든 요리를 홈그라운드 2월 오픈스튜디오에 오셔서 함께 즐겨주셔요.❤️ ⠀ <APUNTO.SEO 아뿐또.쎄오 by 장서령> @apunto.seo a punto 1.필요한 준비로, 준비가 되어   2.때를 맞추어, 안성맞춤으로 ❤️ 메뉴 안내 (🌿: 비건 메뉴 가능 | 재료수급 사정에 따라 메뉴에 변동이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 -pan con tomate | 빤 꼰 토마떼 (2pc) 🌿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마늘과 토마토, 올리브유를 듬뿍 얹은 스페인의 대표 토스트 5,000원 ⠀ -tortilla de patata | 또르띠야 데 빠따따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 10,000원 ⠀ -ensalada de queso cabra | 앤살라다 데 께소 까브라 :염소치즈와 비나그레따 샐러드 12,000원 ⠀ -pollo con salsa mojo rojo | 뽀요 꼰 살사 모호 로호 :카나리아의 매콤한 고추소스와 닭구이 18,000원 ⠀ -arroz meloso | 아로쓰 멜로쏘 🌿 :국물이 자작한 밥 요리 15,000원 ⠀ -romesco con verdura asada | 로메스코 꼰 베르두라 아사다 🌿 :카탈루냐 지방의 대표 소스. 스페인식 쌈장과 야채구이 8,000원 ⠀ -berenjena con miel | 베렝헤나 꼰 미엘 🌿 :튀긴가지와 꿀 12,000원 ⠀ -champiñones al ajillo | 참피뇨네스 알 아히요 (5-6pc) 🌿 :마늘과 올리브유를 넣고 바글바글 끓인 초리소 양송이버섯 구이 9,000원 ⠀ -croquetas | 크로켓따스 (2pc)🌿 :고구��� 토란 크로켓과 두유마요 7,000원 ⠀ -ceviche de salmon con guacamole y nachos | 세비체 데 살몬 꼰 과카몰레. 나초 :연어세비체와 과카몰레, 나초 15,000원 ⠀ -pimientos de padrones | 삐미엔또스 데 빠드론네스 🌿 :꽈리고추 볶음 8,000원 ⠀ -tarta de queso pais vasco | 따르따 데 께소 빠이스 바스코 :스페인 북부 바스코 스타일의 치즈케잌 8,000원 ⠀ ——— ❤️ 쾌적한 식사를 위해 매 식사 시간 당, 14인석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예약을 원하시면, [이름! 연락처! 방문 일자와 시간! 인원!]을 적어 DM 혹은 [email protected] 으로 메일 주셔요. 🤗 1인 1만원의 예약금이 있으며, 매일 오전 10~11시 DM 확인 후, 예약 안내를 드립니다. ⠀ 2월 14일 금요일 12시 30분~2시30분 14인 5~7시 14인 7~9시 14인 ⠀ 2월 15일 토요일 12시 30분~2시30분 14인 5~7시 14인 7~9시 14인 ⠀ 2월 16일 일요일 12시 30분~2시30분 14인 5~7시 14인 7~9시 14인-대관예약됨(예약불가) ⠀ ⠀ ⠀ (홈그라운드에서) https://www.instagram.com/p/B8YnZGCh9NL/?igshid=1ovdifo8nl1hy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