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Jean Buridan
textlab · 1 year
Text
長岡克行, ルーマン/社会の理論の革命 (47)
勁草書房, 2006
제13장 사회 시스템에 있어서 모순과 컨플릭트
- 동일성에서 시작해 동일성으로 끝나는 이론이나, 차이로 시작해 동일성으로 끝나는 이론이 아닌, 차이로 시작해 차이로 끝나는 이론, 그러한 사회 이론을 루만은 구상. 그 사회 이론의 ‘서장’인 『사회 시스템』도 이런 이론 구상에 따라 구축. 좁은 의미에서 사회 시스템 이론의 출발점은, 개인들의 심적 시스템은 서로에 대해 불투명하고, 개인들의 퍼스펙티브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 심적 시스템 사이의 이 차이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차이, 여기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이중 우발성 문제. 이중 우발성 문제를 촉매로 해서 사회 시스템은, 심적 시스템과의 차이를 통해 형성. 다른 한 편 『사회 시스템』에서 마찬가지로 좁은 의미의 사회 시스템 일반 기술은, 9장 「모순과 컨플릭트」로 마무리. 이는 차이의 고찰로 끝난다는 것.  
1. 모순
- 9장에서 다뤄진 중심 과제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영역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1984, S. 491)라는 명제. 이 명제가 사회적인 것과 사회에 관한 루만의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견해. 사회적인 모순과 컨플릭트와 이어지지 않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음. 개인들의 심적 시스템은 서로에 대해 불투명하고, 개인들의 퍼스펙티브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 심적 시스템 사이의 이 차이 때문에 사회 시스템은 형성되지만, 사회 시스템은 심적 시스템을 융합하는 것은 아니고, 개인들 사이의 퍼스펙티브의 차이를 폐기하는 것도 아님. 그렇다면, 아마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필요. 이미 『권력』(1975, S. 5)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사회 시스템은 잠재적인 컨플릭트 상태로 있는 것이며, 시스템 분화의 정도와 사회적 진화에 따라, 이 잠재적인 컨플릭트가 현재화하는 정도만이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 이에 더해 『사회 시스템』 제9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 “순수하게 논리학적 수단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에서 모순을 제거하고, 이렇게 해서 사회적인 것의 이론에서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1984, S. 491) 바꿔 말해, 루만은 모순은 분석적 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속에 실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음. 따라서 루만은 헤겔 이래 잘 알려져 있는 입장, 즉 “무모순의 대상을 전제로 해야만 하는 논리학을 통해서는, 과학의 환경에서 사회적인 것을 배제해버린다” (1984, S. 490)는 입장을 계승. (이 점에 대해서는 1990, S. 490f를 참조) 그렇다고 할 때, 위험한 문제를 함께 끌어들이는 것을 회피. 사회적 생활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진행하지는 않는다면, 사회적인 것의 이론도 또한, 논리학적으로 무모순하게 정식화될 수 없다는 것.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의외겠지만, 루만은 사회 연구에 있어 사회적 모순의 위치 값을 최대한으로 강조하고, 그에 맞설 수 있는 종래의 사회 이론에서도, 관계하는 선결 문제가 반드시 명료하게 해명될 이유는 없었음. 즉 모순은 뭔가에 있어, 어떠한 움직임을 하는가, 나아가 사람은 각각 어떠한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의 영역이 모순을 포함한다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 해명이 소홀하였음.
- 루만은 이 문제, 특히 사회적인 것이 모순을 담고 있다는 건 어떠한 의미인가, 거기에 있는 모순의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이미 보았던 오토포이에틱한 사회 시스템 이론의 일부분을 사용해 해명. 사회 시스템 이론의 일부라는 것은, 이미 몇 번에 걸쳐 다뤘던 조작과 관찰의 구별. 『사회 시스템』(1984)에서 그것은 ‘구성과 관찰의 구별’, 나아가서 ‘오토포이에틱한 재생산과 관찰의 구별’이나 ‘오토포에틱한 조작과 (자기) 관찰의 구별’이라 불림.
- 『사회 시스템』에서 오토포이에틱한 재생산과 관찰의 구별에 주목해 다음을 확인.
“우리들은 알고 있지만, 이 구별에서 생각되는 것은 배제 관계가 아니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한 다른 조작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오토포이에틱한 시스템은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고, 다른 시스템을, 그래서 또한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는 자기 생산이고, 그 관찰은 구별에 정위하고, 지시로써 조작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을 야기하는 것에 의해, 이렇게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재생산된다. 그 때 커뮤니케이션 (혹은 다른 행위)이 행위로서 귀속되고,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어떤 규정된 행위자로 귀속되고, 다른 행위자에 귀속되는 것은 아닐 때, 그래서 그런 한에서, 관찰은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1983, S. 491f.)
- 이 확인에 기반해 오토포이에틱 시스템에 있는 모순의 일반적인 기능이 도출.  
“문제가 되는 것이 오토포이에틱한 조작인가, 그렇지 않으면 관찰인가에 따라, 모순은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다. 오토포이에틱한 조작 (이것은, 관찰이 적어도 가능할 수 있는 경우에는, 늘 더욱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의 문맥에서는, 모순은 접속 조작을 선출하는 어떤 일정의 형식을 형성한다. 사람은 모순에 대해서는, 모순으로서 경험되지 않는 사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러나 반응한다. 뷔리당(Jean Buridan)의 당나귀랄까, 결정될 수 없다고 눈치챌 때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당나귀는 참으로 그 때문에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관찰자에게 이 상황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에게는, 그리고 그에게 만이, 모순은 결정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가 관찰을 속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구별(의 양 측)을, 서로 배제하는 지시로 덮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은 모순에 의해 멈춰진다. 그래서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관찰의 관찰에 적합하다. 그러나 참으로 이것은, 그 때에는 무언가를 하는데 충분한 이유다.” (1984, S. 491f.)
- 이에 조응 하여 의미 시스템(심적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에서 모순은 이중의 기능을 가짐. 모순에 조우한 관찰을 스톱 시킨다는 기능과 나아가 이에 관련해 이에 의해 유의미하게 되는 접속 조작을 환기한다고 하는 기능. 모순은 오토포이에시스와 관찰이라는 두 종류의 조작을 분리하는 것과 함께 결합하는 매개적 기능을 완수. 모순은 관찰에 접속하는 조작의 스위치를 끊는 것과 동시에, 특별하게 이 경우에 요구되는 조작의 스위치를 넣는 것.
- 루만은 우선 의미를 미디어로 하는 오토포이에틱 시스템 이론에 기반해 모순 기능의 해명을 저울질. 그래서 모순의 ‘변증법적’ 기능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기능을 진화이론적 퍼스펙티브에 기반한 설명으로 교체. 의미 시스템의 진화는 자기 생산과 관찰을 전제. 진화는 일탈적 자기재생산을 통해 실현. 그래서 진화는 관찰이라는 조작에서의 추론 결과가 아님. 진화는 논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관찰이 참으로 좌절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로서의 접속 조작은 나아가 속행된다고 하는 것을 전제. 진화는 결정 불가능성을 경유. 진화는 결정 불가능성을 통해 부상하는 찬스를 형태 발생의 찬스로 이용.
- 그 위에 루만은, 의미의 지시 구조까지 돌아가 그로부터 모순 가능성의 조건들, 모순 하는 것이 연 의미 지평에서 드러나 모순의 통일로 총합 되는 조건을 묻고, 그 결과를 다시 자기 언급적 오토포이에틱 시스템의 이론 구상 속에 받아 들임. 그 때 사회성을 다루는 데 적합한 논리학으로 고트하르트 귄터(Gotthard Günther)의 다치 논리학을 수정하여 도입. (예를 들면 1990, S. 490ff.을 참조) 루만 사회 시스템 이론의 모순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심적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에서 시스템에 있는 모순의 구성 및 모순과 동조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래서 심적 시스템이 모순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회 시스템으로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 루만의 사회 시스템 이론에 있는 모순의 취급은, 이 견해 때문에 헤겔과 달라짐.
- 모순과 조우해도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가 단절될 이유는 없음. 시스템의 재생산은 다른 궤도로 이끌리는 것에 불과. 오토포이에시스는 더욱 더 진행. 루만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을 최초로 정식화한 것은, 헤겔 ‘변증법’의 신 구상의 공적이다” (1984, S. 509) 그러나 심적 시스템과 사회적 시스템의 차이에 주목하는 경우, 바꿔 말해 사회적인 것과 사회 연구를 목표하는 경우,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발전된 것 같은 구상’과 갈라서는 것은 어쩔 수 없음. (1984, S. 497) 심적 시스템에서 모순 하는 것은 그 동시 존립의 불가능성이라는 것에 있어서 동시에 의식되어지고, 모순 하는 것은 의식 그 자체의 사태로서 반성. 그러니까 의식은 모순을 자기자신으로 귀속. 그 결과 의식은 실재와 의식의 관계를 컨트롤하는 것을 통해 모순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 이에 대해 사회 시스템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라는 그 실존을 가지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은 거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순을 산출. 모순은 그것이 커뮤니케이션되는 것에 의해 생성하고 현실화. 그래서 모순은 늘 구조와 요소(사건)의 관계를 전제한다는 것을 시사. 이는 루만에 의해 그대로 컨플릭트 개념 규정에 사용.
2. 컨플릭트
- 루만은 사회 시스템에 있는 컨플릭트를 다음과 같이 정의.  
“우리가 어떤 커뮤니케이션에 이론(異論)을 주창하는 경우에 늘 컨플릭트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한다. 어떤 모순은 커뮤니케이션될 때 함께 정식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순은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모순의 조작적인 자립화다. 그래서 기대가 커뮤니케이트되고, 그래서 이 커뮤니케이션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커뮤니케이트 되갚음이 되는 경우에만, 컨플릭트는 존재한다. 그 기대는 거부하는 사람의 행동에 관련할 필요는 없다. 그 기대는 제삼자와 관계 하려하고, 혹은 기대가 전달된 사람이 믿지는 않는-그러나 그가 그것을 말하는 한에서의 것이지만- 상태 기술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984, S. 530)
- 커뮤니케이션에서 받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된 선택 의미(정보)를 이해(오해)하는 것과, 그가 그 선택을 그 자신의 행동 전제로서 받아들이는 것 내지는 거부하는 것은 구별해야만 함. 전자가 성립하는 한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실현. 후자는 이 실현에 의해 커뮤니케이션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 커뮤니케이션은 받는 사람의 심적 시스템에서 상태 변화를 일으킴. 그러나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사상의 일부가 아니고, 커뮤니케이션 사상에 접속해 심적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액트.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와 전달의 차이를 전달의 수용이나 거부라는 차이로 변환한다.” (1984, 205)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수용하는 지 거부하는 지라는 선택을 생산.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은 거부될 가능성을 낳는 것이고, 그것이 커뮤니케이션될 때, 그것이 컨플릭트.
- 사회 시스템 이론이 컨플릭트와 투쟁에 눈을 막고, 사회를 조화롭게 그린다는 것이 정설. 그에 대해 일찍부터 루만의 견해에 의하면 “시스템 이론의 진짜 십자가는, 사회 변동의 문제나, 사회적 컨플릭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라는 문제”(1969a, S. 264). 루만에게는 컨플릭트를 주제로 둔 사회학 이론도, 대부분 컨플릭트 개념 자체가 유감스러운 것으로 선명하지 않게 규정. 그 정의에서 두드러진 것은 “컨플릭트에 의한 구조적 조건들(그래서 그런 한에서 ‘가능한’ 컨플릭트)과 행동 수준에서의 컨플릭트를 하나의 개념으로 모으려는 노력”. 루만은 “이것을 잘못된 개념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사람이 컨플릭트의 구조적 야기(그러한 개념 형성의 주도적 동기)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려 하는 경우에는, 컨플릭트 개념을 그것과는 독립해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84, S. 531, Anm. 62) 컨플릭트 연구에서 함의 되는 가능한 대립들, 컨플릭트의 사회 구조적 조건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 그 때문에 『사회 시스템』에서는 “구조적 유인을 함께 컨플릭트 개념에 수용하려 하는 ‘컨플릭트 이론’, 혹은 그 어딘가 ‘계급 컨플릭트’나 ‘지배 컨플릭트’만을 본래 의미의 컨플릭트로 통용 시키는 ‘컨플릭트 이론’”(1984, S.535)에 대신하는 컨플릭트 이론을 제안.
- 루만의 컨플릭트 이론은 단지 컨플릭트의 ‘해결’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컨플릭트의 ‘좋은 마무리’를 찾으려 하는 것일 수 없었음. “컨플릭트 이론가들은 더욱 더, 그래서 그��이 반대의 것을 단언하는 경우조차 컨플릭트 없는 사회라는 몽상에 대해 지지를 한다. 컨플릭트는 그 자신의 해결을 위한 힘을 동원한다는 것이, 일부에서 가정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가능한 만큼 피해가 없는, 가능한 만큼 ‘평화적’인 컨플릭트 규제를 위한 방도를 찾는다. 그것들은 많건 적건 정치적 프로그램, 즉 질서화 움직임을 변하지 않게 유지하기 때문에 폭력을 줄이는 컨센서스를 늘리다는 프로그램이다. 그것들은 정치적 프로그램으로서 그것들 고유의 권리를 (그래서 또한 과학적인 지원에 대한 권리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협력의 용의라는 어떤 느낌의 좋은 이론으로서 자천을 하는 이론 구상이 아니라, 있는 그렇게는 아닌 것의 상태화에 관심을 지닌 이론 구상의 틀 속에서, 어떤 다른, 보다 포괄적인 물음의 설정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래서 ‘컨플릭트 해결’은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컨플릭트 재생산의 부산물, 그것도 상세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전체적으로 회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 같은 하나의 부산물이 된다.” (1984, S. 536)
- 루만이 제안했던 컨플릭트 이론은, 시스템 이론적 퍼스펙티브를 일관해서 적용하고, 컨플릭트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의 통상성’, 그 의미에서의 ‘상태화(常態化)’라는 관점으로부터 고찰하려 함. 컨플릭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중 우발성의 특별한 (언제라도 가능한) 실현이고, 커뮤니케이션이고, 이것들 모두로 하는 특별한 종류의 사회 시스템”(1984, S. 531)이기 때문. 그 때문에 여기서도 이중 우발성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호 앙진(昻進)을 통한 ‘강화(Steigerungen)’, 그 때의 ‘조건 붙임의 가능성 (Konditionierbarkeit)’, 그 결과로 생겨나는 ‘효과들의 누적’ 가능성에 주의. 컨플릭트의 경우 “그 야기의 계기와 그것 자신의 질서의 촉매는, 이중 우발성의 부정판이다. 즉 당신이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바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을 통한 자기 언급. (1984, S. 531f.)
- 이 컨플릭트 이론에 의해, 사회 시스템 이론이 대립과 컨플릭트와 투쟁을 경시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그린다는 평가는 루만의 사회 시스템 이론의 경우에는 완전하게 사라짐. 컨플릭트 이론 자체와 사회 이론에서 사회의 어떤 컨플릭트를 특히 주목할 지에 대한 것은, 상대적으로 독립적. 루만에 의하면 컨플릭트의 고찰에서 ‘컨플릭트의 구조적 조건들’과 ‘행동 수준의 컨플릭트’는 구별 돼야만 함. 루만의 “컨플릭트 개념은 단지 추측되고, 단지 관찰되는 대립들에 대해 확실하게 두드러진다. 어떤 일반적 모순 상태, 어떤 이해 대립, 어떤 상호적 훼손(자동차가 다른 자동차에 긁히는 상처를 내는)은, 아직 컨플릭트는 아니다.” (1984, S. 530f.) 그렇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의 일반 이론인 『사회 시스템』에서는 사회에 있는 다양한 모순 상태, 이해 대립, 그 밖의 대립들, 나아가서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는 언급되어도, 사회 이론 수준에 있는 개별의 컨플릭트의 구조적 조건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음. 그것은 사회 시스템의 일반 이론을 적용한 사회의 구체적 분석에서, 그래서 사회의 각 기능 시스템과 조직의 분석에서, 또한 에콜로지 문제나 리스크 문제의 분석에서 주제로 다뤄 짐.
0 notes
edsonjnovaes · 3 years
Text
Asno de Buridan
O nome está associado ao filósofo e religioso francês do século XIV Jean Buridan (1300 – 1358 ou 1295 – 1356), justamente porque esse paradoxo é uma paródia provocativa, considerando que ele acreditava que diante de duas opções equivalentes, o caminho era o da não escolha, da suspensão do juízo. Demasiado Humano “Expositio et Quaestiones”, em Aristóteles De Anima, por Johannes Buridanus,…
Tumblr media
View On WordPress
0 notes
forgottengenius · 11 years
Text
Abu'l-Barakāt al-Baghdādī
Abu'l-Barakāt Hibat Allah ibn Malkā al-Baghdādī  c. 1080 – 1164 or 1165 CE) was an Islamic philosopher and physician of Jewish-Arab descent from Baghdad, Iraq. Abu'l-Barakāt, an older contemporary of Maimonides, was originally known by his Hebrew birth name Nathanel before his conversion from Judaism to Islam towards the end of his life.[1]His writings include the anti-Aristotelian philosophical work Kitāb al-Muʿtabar ("The Book of What Has Been Established by Personal Reflection"); a philosophical commentary on the Kohelet; and the treatise "On the Reason Why the Stars Are Visible at Night and Hidden in Daytime". Abu'l-Barakāt was an Aristotelian philosopher who in many respects followed Ibn Sina, but also developed his own ideas.[2] He proposed an explanation of the acceleration of falling bodies by the accumulation of successive increments of power with successive increments of velocity. His thought influenced the Illuminationist school of classical Islamic philosophy, the medieval Jewish philosopher Ibn Kammuna,[3] and the medieval Christian philosophers Jean Buridan and Albert of Saxony
Life
Abu'l-Barakāt, famed as Awḥad al-Zamān (Unique One of his Time), was born in Balad, a town on the Tigris above Mosul in modern-day Iraq. As a renowned physician, he served at the courts of the caliphs of Baghdad and the Seljuk sultans.[5]He converted to Islam in old age. Abu'l Barakat does not refer to his conversion in his writings, and the historical sources give contradictory episodes of his conversion. According to the various reports, he converted either out of "wounded pride", fear of the personal consequences of the death of Sultan Mahmud's wife while under his care as a physician or fear of execution when he was taken prisoner in a battle between the armies of the caliph and that of the sultan. Ayala Eliyahu argues that the conversion was "probably motivated by convenience reasons".[6][7][8][9]Isaac, the son of the Abraham Ibn Ezra and the son-in-law of Judah Halevi,[9] was one of his pupils,[6] to whom Abu'l-Barakāt, Jewish at the time, dictated a long philosophical commentary on Ecclesiastes, written in Arabic using Hebrew aleph bet. Isaac wrote a poem in his honour as introduction to this work.[5]
Philosophy
Experimental method
Al-Baghdaadi described an early scientific method emphasizing repeated experimentation, influenced by Ibn Sina, as follows:[10]
"Because of the frequency of the experience, these judgements may be regarded as certain, even without our knowing the reason [for the phenomenon]. For there is certain knowledge that the effect in question is not due to chance. It must accordingly be supposed that it is due to nature or to some modality thereof. Thus the cause qua cause, though not its species or mode of operation, is known. For experimental science is also constituted by a knowledge of the cause and by an induction based on all the data of sensation; whereby a general science is reached. ... But in the cases in which an experiment has not been completed, because of its not having been repeated in such a way that the persons, the time and the circumstances varied in everything that did not cause the determining cause, whereas this cause [remained invariable], the experiment does not prove certain knowledge, but only probably opinion."
Motion
According to Alistair Cameron Crombie, al-Baghdaadi was a follower of the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teachings of Ibn Sina.
proposed an explanation of the acceleration of falling bodies by the accumulation of successive increments of power with successive increments of velocity.[11]
According to Shlomo Pines, al-Baghdaadi's theory of motion was thus
the oldest negation of Aristotle's fundamental dynamic law [namely, that a constant force produces a uniform motion], [and is thus an] anticipation in a vague fashion of the fundamental law of classical mechanics [namely, that a force applied continuously produces acceleration].[12]
Al-Baghdaadi's theory of motion distinguished between velocity and acceleration and showed that force is proportional to acceleration rather than velocity.[4][13] The 14th-century philosophers Jean Buridan and Albert of Saxony later refer to Abu'l-Barakat in explaining that the acceleration of a falling body is a result of its increasing impetus. Abu'l-Barakat also modified Ibn Sina's theory of projectile motion, and stated that the mover imparts a violent inclination (mayl qasri) on the moved and that this diminishes as the moving object distances itself from the mover.[4]Al-Baghdaadi also suggested that motion is relative, writing that "there is motion only if the relative positions of the bodies in question change." He also stated that "each type of body has a characteristic velocity that reaches its maximum when its motion encounters no resistance."[3]
Space and Time
Al-Baghdaadi criticized Aristotle's concept of time as "the measure of motion" and instead redefines the concept with his own definition of time as "the measure of being", thus distinguishing between space and time, and reclassifying time as a metaphysical concept rather than a physical one. The scholar Y. Tzvi Langermann writes:[3]
Dissatisfied with the regnant approach, which treated time as an accident of the cosmos, al-Baghdadi drew the conclusion that time is an entity whose conception (ma'qul al-zaman) is a priori and almost as general as that of being, encompassing the sensible and the non-sensible, that which moves and that which is at rest. Our idea of time results not from abstraction, stripping accidents from perceived objects, but from a mental representation based on an innate idea. Al-Baghdadi stops short of offering a precise definition of time, stating only that 'were it to be said that time is the measure of being (miqdar al-wujud), that would be better than saying [as Aristotle does] that it is the measure of motion'. His reclassification of time as a subject for metaphysics rather than for physics represents a major conceptual shift, not a mere formalistic correction. It also breaks the traditional linkage between time and space. Concerning space, al-Baghdadi held unconventional views as well, but he did not remove its investigation from the domain of physics.
In his view, there is just one time which is similar for all beings, including God. Abu'l-Barakāt also regarded space as three-dimensional and infinite.[14]
Psychology
He upheld the unity of the soul, denying that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it and the intellect.[14] For him, the soul's awareness of itself is the definitive proof that the soul is independent of the body and will not perish with it.[2] On his contributions to Islamic psychology, Langermann writes:[3]
Al-Baghdadi's most significant departure in psychology concerns human self-awareness. Ibn Sina had raised the issue of our consciousness of our own psychic activities, but he had not fully pursued the implications for Aristotelian psychology of his approach. Al-Baghdadi took the matter much further, dispensing with the traditional psychological faculties and pressing his investigations in the direction of what we would call the unconscious.
Works
He wrote a critique of Aristotelian philosophy and Aristotelian physics entitled Kitab al-Mu'tabar (the title may be translated as "The Book of What Has Been Established by Personal Reflection"). According to Abu'l-Barakāt, Kitāb al-Muʿtabar consists in the main of critical remarks jotted down by him over the years while reading philosophical text, and published at the insistence of his friends, in the form of a philosophical work. The work "presented a serious philosophical alternative to, and criticism of, Ibn Sina".[15] He also developed concepts which resemble several modern theories in physics.[3]Abu'l-Barakāt also wrote a short treatise on the intellect, Kitāb Ṣaḥiḥ adillat al-naql fī māhiyyat al-ʻaql (صحيح أدلة النقل في ماهية العقل), which has been edited by Ahmad El-Tayeb.[16]All that we possess in the way of medical writing by Abu'l-Barakāt are a few prescriptions for remedies. These remain in manuscript and are as yet unstudied.[17]
Legacy
Abu'l-Barakāt's thought had a deep influence on Islamic philosophy but none on Jewish thought. His works were not translated into Hebrew,[14] and he is seldom cited in Jewish philosophy, probably because of his conversion to Islam.[7]
The famous theologian and philosopher Fakhr al-Din al-Razi was one of Abu'l-Barakāt's eminent disciples. The influence of Al-Baghdadi’s views appears especially in Al-Razi’s chief work Al-Mabāḥith al-Mashriqiyyah (Oriental Discourses). Abu'l-Barakāt influenced certain conceptions of Suhrawardi.[18].[4]
0 notes
francepittoresque · 2 years
Photo
Tumblr media
EXPRESSION | Être comme l’âne de Buridan ➽ https://bit.ly/3jfWZLb Être complètement indécis entre deux parties ou deux avantages. L'âne dont il est ici question est celui dont parle le philosophe français du XIVe siècle Jean de Buridan
4 notes · View notes
claudiosuenaga · 4 years
Text
Os 700 anos do nascimento de Nicole Oresme, fundador da ciência moderna em plena Peste Negra
Tumblr media
Neste ano de 2020 completam-se os 700 anos do nascimento (em dia e mês desconhecidos, de família desconhecida, na aldeia de Allemagne, atual Fleury-sur-Orne, perto de Caen, diocese de Bayeux, na Normandia), de Nicole Oresme (falecido em 11 de julho de 1382 em Lisieux), o verdadeiro e legítimo fundador da ciência moderna.
A lembrança e invocação do seu nome e de seu legado agora são mais do que oportunas e apropriadas, já que ele viveu, tal como nós hoje, em tempos de pandemia, ele da Peste Negra, a mais devastadora da história, que ceifou de 75 a 200 milhões de vidas na Eurásia (o pico ocorreu entre 1347 e 1351), ou cerca de um terço da população europeia da época, o que causou muitos atrasos e perdas, quer sejam humanas, científicas, culturais, religiosas e artísticas.
Portanto, o fato de Oresme ter realizado seus feitos intelectuais prodigiosos em tal época, de impactos econômicos e sociais negativos e baixa produção científica, por si só já chega a ser extraordinário, ainda mais por ter se notabilizado não só na matemática como em vários campos do conhecimento, como a filosofia, a psicologia, a economia, as ciências físicas e naturais, a astronomia, a astrologia, a teologia e as artes musicais.  
Um dos filósofos escolásticos mais eminentes do século XIV, Oresme estudou Arte em Paris por volta de 1340 com o filósofo e religioso francês Jean Buridan (1300-1358), o chamado fundador da escola francesa de filosofia natural, e com Alberto da Saxônia (1320-1390), e lá recebeu o Magister Artium. Ele já era um mestre regente em artes em 1342 durante a crise da filosofia natural do frade franciscano, filósofo, lógico e teólogo escolástico inglês Guilherme de Ockham (1285-1347).
Em 1348, Oresme era um estudante de teologia no Colégio de Navarra da Universidade de Paris (uma instituição para estudantes pobres, patrocinado e subsidiado pela realeza, o que torna provável que ele veio de uma família de camponeses). Em 1356 doutorou-se, e no mesmo ano tornou-se grão-mestre (grand-maître) do Colégio de Navarra. Em 2 de novembro de 1359, tornou-se "secretaire du roi", e no ano seguinte se tornou capelão e conselheiro de Carlos V (1338-1380, rei a partir de 1364). Em 23 de novembro de 1362, ano em que se tornou mestre em teologia, Oresme foi nomeado cônego da Catedral de Rouen. Na época desta nomeação, ele ainda lecionava regularmente na Universidade de Paris. Por volta de 1369, iniciou uma série de traduções de obras aristotélicas a pedido de Carlos V, que lhe concedeu uma pensão em 1371. Como a maioria de seus contemporâneos eruditos, Oresme escreveu principalmente em latim, mas a pedido do rei Carlos V, também escreveu em francês, fornecendo versões francesas de suas próprias obras e de obras selecionadas de Aristóteles. Durante seu mandato nesses sucessivos cargos na Catedral de Rouen (1362-1377), Oresme passou muito tempo em Paris, especialmente no contexto de cuidar dos assuntos da Universidade. Embora muitos documentos comprovem a permanência de Oresme em Paris, não podemos inferir que ele também lecionava lá naquela época. Por causa do trabalho incansável de Oresme para Carlos V e a família real, com o apoio do rei, em 3 de agosto de 1377, Oresme alcançou o posto de Bispo de Lisieux. Parece que Oresme não fixou residência em Lisieux até setembro de 1380, e pouco se sabe dos últimos cinco anos de sua vida. Oresme morreu em Lisieux em 11 de julho de 1382, dois anos após a morte do rei Carlos, e foi sepultado na Catedral.
Oresme demonstrou que as razões propostas pela física aristotélica que negavam o movimento da Terra não eram válidas, e quase dois séculos antes de Copérnico (1473-1543), invocou o argumento da simplicidade de Ockham a favor da teoria de que é a Terra que se move, e não os corpos celestiais. Em seu Livre du ciel et du monde (1377), Oresme discutiu uma série de evidências a favor e contra a rotação da Terra em seu eixo. A partir de considerações astronômicas, sustentou que se a Terra é que estivesse se movendo e não as esferas celestiais, todos os movimentos que vemos nos céus seriam exatamente iguais às das esferas. Ele rejeitou o argumento físico de que se a Terra estivesse se movendo, o ar seria deixado para trás, causando um grande vento de leste a oeste. Em sua concepção, a terra, a água e o ar compartilhariam o mesmo movimento. Quanto à passagem bíblica que fala do movimento do Sol, ele conclui que "esta passagem está de acordo com o uso habitual da linguagem popular" e não deve ser tomada literalmente. Ele também observou que seria mais econômico para a Terra girar em seu eixo do que a toda a imensa esfera das estrelas. No entanto, ele reconheceu que nenhum desses argumentos era conclusivo e que muitos continuariam sustentando que “os céus se movem e não a Terra".
Abaixo, desenhos e diagramas de Oresme em seu Livre du ciel et du monde:
Tumblr media
No campo da matemática, Oresme desenvolveu a primeira prova da divergência da série harmônica, algo que só foi replicado mais de três séculos depois pelos irmãos suíços Jakob (1654-1705) e Johann (1667-1748) Bernoulli. Ele também trabalhou a noção de probabilidade sobre sequências infinitas, algo que só seria desenvolvido cinco séculos depois. Desenvolveu a noção de frações incomensuráveis, frações que não podiam ser expressas como potências umas das outras, e elaborou argumentos estatísticos probabilísticos quanto à sua frequência relativa. A partir disso, ele argumentou que era muito provável que a duração do dia e do ano fossem incomensuráveis ​​(irracionais), como de fato eram os períodos dos movimentos da Lua e dos planetas, e observou que as conjunções e oposições planetárias nunca ocorreriam exatamente da mesma maneira. Oresme sustentou que isso refutaria as afirmações dos astrólogos que pensavam que sabiam “precipitadamente e com exatidão pontual, os movimentos, aspectos, conjunções e oposições”.
Em sua crítica à astrologia em seu Livre de divinacions, Oresme não nega as influências dos corpos celestes nos eventos terrestres em todas as escalas, mas afirma, de acordo com uma opinião comumente aceita, que os arranjos dos corpos celestes poderiam ser eventos puramente simbólicos. Quanto à previsibilidade de grandes eventos como pragas, fomes, inundações e guerras, clima, ventos e tempestades, bem como medicina, com influências nos humores, os quatro fluidos aristotélicos do corpo, Oresme critica tudo como sendo mal direcionado, embora aceite que a previsão é uma área legítima de estudo e argumenta que o efeito sobre o tempo é menos conhecido do que o efeito sobre grandes eventos. Ele observa que os marinheiros e fazendeiros são melhores em prever o tempo do que os astrólogos, e ataca especificamente a base astrológica da previsão, observando corretamente que o zodíaco se moveu em relação às estrelas fixas (por causa da precessão dos equinócios) desde que o zodíaco foi descrito pela primeira vez em tempos antigos.
Em suma, Oresme manifesta dúvidas, mas aceita a existência das influências físicas das estrelas e planetas (incluindo o Sol e a Lua) na Terra. Ele aceita coisas que um céptico moderno rejeitaria, e rejeita outras - como a capacidade de conhecimento dos movimentos planetários e os efeitos no clima - que são aceitas pela ciência moderna. Quanto ao que constitui grande parte da prática astrológica moderna, isto é, consultar as estrelas para saber qual o melhor momento para fazer coisas relacionadas ao amor, negócios, política, jogos, etc., Oresme as classifica como artes "totalmente falsas".
Alguns historiadores defendem que Oresme é o criador da Geometria Analítica, antes de Descartes (1596-1650), por ter representado graficamente em Tractatus de configurationibus qualitatum et motuum (1370), sua mais importante contribuição para a matemática, leis que confrontavam a variável dependente (latitudo) com a independente (longitudo), à medida que se permitia que esta última fosse objeto de pequenos acréscimos. Por uma questão de clareza, Oresme concebeu a ideia de visualizar esses conceitos como figuras planas, aproximando-se do que hoje chamaríamos de coordenadas retangulares. A intensidade da qualidade foi representada por um comprimento ou latitudo proporcional à intensidade erigida perpendicular à base em um determinado ponto da linha de base, que representa o longitudo. Oresme propôs que a forma geométrica de tal figura pudesse ser considerada como correspondendo a uma característica da própria qualidade. Oresme definiu uma qualidade uniforme como aquela que é representada por uma linha paralela à longitude, e qualquer outra qualidade como diferente. Qualidades uniformemente variadas são representadas por uma linha reta inclinada ao eixo da longitude, enquanto ele descreveu muitos casos de qualidades não uniformemente variáveis. Oresme estendeu essa doutrina a figuras de três dimensões. Ele considerou essa análise aplicável a muitas qualidades diferentes, como gostosura, brancura e doçura. Significativamente para desenvolvimentos posteriores, Oresme aplicou este conceito à análise do movimento local onde o latitudo ou intensidade representava a velocidade, o longitudo representava o tempo, e a área da figura representava a distância percorrida.
Ele mostra que seu método de calcular a latitude das formas é aplicável ao movimento de um ponto, desde que o tempo seja tomado como longitude e a velocidade como latitude; quantidade é, então, o espaço percorrido em um determinado tempo. Em virtude dessa transposição, o teorema do latitudo uniformiter difformis tornou-se a lei do espaço percorrido em caso de movimento uniformemente variado. Assim, Oresme se antecipou em dois séculos às deduções de Galileu Galilei (1564-1642) sobre os movimentos uniforme e uniformemente variados e o teorema da velocidade média e a lei da queda dos corpos.
Com seu Tratado sobre a origem, natureza, lei e alterações do dinheiro (De origine, natura, jure et mutationibus monetarum), um dos primeiros manuscritos dedicados exclusivamente à questão econômica, Oresme trouxe uma visão interessante sobre a concepção medieval de dinheiro, afirmando ser ele um produto originário do mercado e não do Estado, que ele era uma mercadoria a mais e não apenas um meio de troca, e por isso, originalmente, certificadores privados informavam seus clientes sobre a pureza do metal usado nas moedas. Ele asseverou que a inflação nada mais é do que o resultado da falsificação da pureza dos metais mediante um decreto do Estado, uma vez que este nacionalizou o dinheiro. Esta teoria econômica tem pontos em comum com a contemporânea Teoria Austríaca do Ciclo Econômico, que só surgiu quase sete séculos mais tarde. Precursor da ciência da economia política, Oresme já admoestava que a inflação é predominantemente uma criação do governo e que prejudicava o comércio e a economia e implicava o declínio da civilização, abrindo o caminho para a tirania. E ainda recomendava que para evitar isso, deveria-se impedir que o governo se intrometesse com o dinheiro...
Oresme foi também um psicólogo notável. Usando um método empírico, descobriu o "inconsciente" psicológico e sua grande importância para a percepção e o comportamento, e investigou todo o complexo de fenômenos da psique humana. Estava certo da atividade dos "sentidos internos" (sensus interior) e da construtividade, complexidade e subjetividade da percepção do mundo. A mente inovadora e ousada de Oresme antecipou conceitos essenciais da psicologia dos séculos XIX e XX, especialmente nos campos da psicologia cognitiva, psicologia da percepção, psicologia da consciência e psicofísica.
Oresme compôs um tratado especial sobre a percepção e sua desordem e delusão (De causis mirabilium), onde examinou todos os sentidos (visão, audição, tato, olfato, paladar) e funções cognitivas. Com o mesmo método utilizado pelos psicólogos do século XX, nomeadamente através da análise de delírios e desordens, Oresme já reconhecia muitas leis essenciais da percepção, por exemplo a "Gestaltgesetze" (lei da forma) 500 anos antes do filósofo austríaco Christian von Ehrenfels (1859-1932), limites de percepção (maxima et minima), etc.
Amigo mais jovem do compositor, matemático, diplomata, militar, musicólogo, filósofo e poeta francês Philippe de Vitry (1291-1361), o famoso teórico musical, compositor e bispo de Meaux, Oresme pode ser considerado o fundador da musicologia moderna. Oresme lidou com quase todas as áreas da musicologia no sentido moderno, como a acústica, a estética musical, a fisiologia da voz e da audição, a psicologia da audição, a teoria musical da medição, a teoria musical, a performance musical e a filosofia musical.
Em sua obra musicológica Configuratio qualitatum and the functional pluridimensionality, Oresme antecipa os diagramas musicológicos contemporâneos e, o mais importante, a notação musical que igualmente quantifica e representa visualmente as variações de um sonus de acordo com determinadas medidas de extensio (intervalos de tempo). A esfera da música não apenas forneceu à teoria de Oresme uma legitimação empírica, mas também ajudou a exemplificar os vários tipos de configurações uniformes e diferentes que Oresme havia desenvolvido, notadamente a ideia de que as configurações dotavam qualidades de efeitos específicos, estéticos ou não, que poderiam ser capturados analiticamente por sua representação geométrica.
Este último ponto ajuda a explicar a abordagem estética abrangente de Oresme aos fenômenos naturais, que se baseava na convicção de que a avaliação estética da experiência sensorial (graficamente representável) fornecia um princípio de análise adequado. Neste contexto, a música voltou a desempenhar um papel importante como modelo da "estética da complexidade e do infinito" favorecida pela mentalité do século XIV.
Oresme buscou os parâmetros do sonus experimentalmente tanto no nível microestrutural e acústico do tom único quanto no nível macroestrutural da música uníssono ou polifônica. Na tentativa de capturar analiticamente os vários parâmetros físicos, psicológicos e estéticos do sonus de acordo com a extensio, Oresme desejava representá-los como as condições para os graus infinitamente variáveis ​​de pulchritudo (beleza) e turpitudo (obscenidade), ou da “beleza da nudez”. O grau em que ele desenvolveu este método é único para a Idade Média, representando a descrição matemática mais completa dos fenômenos musicais antes de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1638) de Galileu.
Digno de nota neste empreendimento é não apenas a descoberta de “tons parciais” ou sobretons três séculos antes do padre, teólogo, matemático, teórico musical e filósofo francês Marin Mersenne (1588-1648), mas também o reconhecimento da relação entre sobretons e tonalidade de cor, que Oresme explicou em uma detalhada teoria físico-matemática, cujo nível de complexidade só foi alcançado novamente no século XIX pelo matemático, médico e físico alemão 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
Finalmente, devemos também mencionar a compreensão mecanicista de Oresme do sonus em seu Tractatus de configuratione et qualitatum motuum como um tipo específico de movimento descontínuo (vibração), da ressonância como um fenômeno harmônico, e da relação de consonância e dissonância, que foi mesmo além da teoria da consonância da coincidência bem-sucedida, mas errada, formulada no século XVII.
A demonstração de Oresme de uma correspondência entre um método matemático e um fenômeno físico (som) representa um caso excepcionalmente raro, tanto para o século XIV, em geral, quanto para a obra de Oresme em particular, marco no desenvolvimento do espírito quantificador que caracteriza a época moderna.
Com sua "teoria das espécies" muito especial (multiplicatio specierum), Oresme formulou a primeira e correta teoria da "mecânica ondulatória do som e da luz", 300 anos antes do físico, matemático, astrônomo e horologista neerlandês Christian Huygens (1629-1695), ao descrever um puro transporte de energia sem propagação de material. O termo "espécie" no sentido de Oresme significa o mesmo que nosso termo moderno "forma de onda". Sua outra proeza foi descobrir a curvatura da luz através da refração atmosférica, crédito que só foi dado três séculos depois ao cientista inglês Robert Hooke (1635-1703).
Em sua estética musical, Oresme formulou uma moderna "teoria da percepção" subjetiva, que não era a percepção da beleza objetiva da criação de Deus, mas o processo construtivo da percepção, que causa a percepção da beleza ou da feiúra nos sentidos. Portanto, pode-se ver que cada indivíduo percebe um outro "mundo". Muitos dos insights de Oresme em outras disciplinas como matemática, física, filosofia, psicologia estão intimamente ligados à "Música Modelo" (incomum para o pensamento atual). O Musica funcionou como uma espécie de "Computador da Idade Média" e, neste sentido, representou o hino abrangente da nova consciência quantitativo-analítica do século XIV.
Enfim, muitas visões essenciais da autoimagem dos tempos modernos, tais como sua compreensão da incomensurabilidade das proporções naturais, da complexidade, da indeterminação, da infinita mutabilidade do mundo, etc., foram antecipadas por Oresme. E embora isso não seja confirmado, Oresme teria ainda especulado sobre a possibilidade de haver outros mundos habitados no universo.  
Por todos os seus feitos e para todos os efeitos, somos tentados a desconfiar se Oresme, tal como outros gênios como Leonardo da Vinci (1452-1519), não seria uma espécie de viajante do tempo que foi parar naquela época por acidente ou para lá enviado para alterar de alguma forma a história usando o conhecimento e/ou a tecnologia de seu próprio tempo, seja para o bem ou para o mal, criando uma história alternativa como resultado.
Bibliografia recomendada:
Duhem, Pierre. "Nicole Oresme",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11,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Taschow, Ulrich. Nicole Oresme und der Frühling der Moderne, Halle, Avox Medien-Verlag, 2003.
Nicole Oresme's De visione stellarum (On seeing the stars): a critical edition of Oresme's treatise on optics and atmospheric refraction, translated by Dan Burton (Leiden; Boston: Brill, 2007).
Nicole Oresme and The marvels of nature: a study of his De causis mirabilium, translated by Bert Hansen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85).
Questiones super quatuor libros meteororum, in SC McCluskey, ed, Nicole Oresme on Light, Color and the Rainbow: An Edition and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ritical notes, of Part of Book Three of his Questiones super quatuor libros meteororum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isconsin, 1974).
Nicole Oresme and the kinematics of circular motion: Tractatus de commensurabilitate vel incommensurabilitate motuum celi, translated by Edward Grant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1).
Nicole Oresme and the medieval geometry of qualities and motions: a treatise on the uniformity and difformity of intensities known as Tractatus de configurationibus qualitatum et motuum, translated by Marshall Clagett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8).
Le Livre du ciel et du monde. A. D. Menut and A. J. Denomy, ed. and tran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8.
De proportionibus proportionum and Ad pauca respicientes. Edward Grant, ed. and tran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6.
The De moneta of N. Oresme, and English Mint documents, translated by C. Johnson (London, 1956).
Tumblr media
2 notes · View note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Crazy Christian Eights
0 notes
frimleyblogger · 6 years
Text
What Is The Origin Of (208)?...
What Is The Origin Of (208)?…
Tumblr media
Morton’s fork
For those of us who subscribe to the concept of free will or self-determinism we can spend a heck of a lot of time weighing up the pros and cons of the various courses of action. Sometimes we may conclude that we have been presented with a Hobson’s Choice – a phrase we looked at many moons ago – in which only one option is really available and we either have to take it or lump it.
View On WordPress
0 notes
kennethfinton · 6 years
Text
7 THOUGHT EXPERIMENTS
http://bigthink.com/scotty-hendricks/seven-thought-experiments-thatll-make-you-question  APRIL 19, 2018
by SCOTTY HENDRICKS
The Veil of Ignorance
This experiment was devised by John Rawls in 1971 to explore notions of justice in his book A Theory of Justice.
Suppose that you and a group of people had to decide on the principles that would establish a new society. However, none of you know…
View On WordPress
0 notes
adsodamelk · 2 years
Text
장 뷔리당(Jean Buridan, 1295년 경 ~ 1363년)은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기반을 닦은 프랑스의 신부이다. 뷔리당은 관성의 근대적 개념으로의 첫 걸음이자, 중세의 과학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인 임페투스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그의 이름은 뷔리당의 당나귀로 알려진 사고 실험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0 notes
lifes-a-dick · 6 years
Text
Determinism vs Free Will and Sherlock’s two falls.
When he jumped from the rooftop, Sherlock was carrying out an action that looked like his own free will but which he actually had no choice in. Determinism in philosophy says that humans cannot act or behave in any other way than they do. Everything that is going to happen is already determined by past events. We have no true freedom, only the illusion of it.
Sherlock couldn’t not fall from Bart’s, because Moriarty ensured through his own suicide that Sherlock would have no choice but to kill himself too. In Causal Determinism, cause-and-effect means that any event is completely determined by prior states. Sherlock knew that Moriarty killing himself gave him no other option, that by that one action (the cause) he must now die (effect). 
Continue under the cut ...
From John’s view Sherlock chose to jump. But the audience knows that he was ‘pushed’. So there are two perspectives - from John’s, Sherlock seemed free to do as he wished, but from the other view we could see every action that lead inevitably to the result.
Tumblr media
His fate was inescapable, and you could trace that fate back to the beginning of Moriarty’s “game”. One long chain of cause-and-effect that lead ultimately to Sherlock’s death, no matter what he tried to do to stop it. Sounds like Death in Samarra, doesn’t it?
The opposing philosophical idea to Determinism is Free Will, which says that we do have control over our actions, that they are not already determined, that we are capable of choosing between different outcomes. That we are truly free.
Perhaps this is the point of Sherlock’s second fall, the one from the waterfall in TAB, where he is very clearly making his own decision to jump. It is certainly suggested in his expression as he falls that this is Sherlock re-writing his own story the way he wants. Not the way it was forced to be. He still takes the leap, but this time it was of his own free will. 
Tumblr media Tumblr media
If Determinism were true, it would be like being trapped, being forced to play out a part that is already written. However, free will suggests that we truly have some control over the way our lives turn out. This subtext in Sherlock is very much about being trapped into doing what is expected of you versus being free to do what you wish.
The story of Death in Samarra from TST could be another intentional reference to Determinism. It tells a story about the course of the universe being fixed, and that we therefore cannot outrun our fate. What happens, must happen.
Guess what else in TST is about Determinism???! Sherlock’s speech about predicting the future. Because if Determinism is true then the future is theoretically calculable. What Sherlock says in TST is all over the Wiki page on Determinism:
The theory holds that the universe is utterly rational because complete knowledge of any given situation assures that unerring knowledge of its future is also possible. - x (wiki page)
If it were actually possible to have complete knowledge of physical matter and all of the laws governing that matter at any one time, then it would be theoretically possible to compute the time and place of every event that will ever occur. - x (wiki page)
If you could attenuate to every strand of quivering data, the future would be entirely calculable, as inevitable as mathematics. - Sherlock in TST
Sherlock in TST (despite his Free Will fall in TAB), seems dedicated to a Deterministic - completely rational - view of the world.  This is another example of Sherlock fully embodying his facade in S4.
“I’m Sherlock Holmes, I wear the damn hat”
Facade!Sherlock (Hat Man) would be quite happy to exist in a universe where everything were predictable and calculable. It would give him a feeling of control, and it would give him what he craves - the potential to know everything. The potential to deduce anything, including the future. To know everything would be to have nothing to fear.
The determinism vs free will debate is very often focussed on how each effects moral responsibility. If Determinism were true - and Hard Determinism precludes any free will in any of our actions - it would relieve Sherlock of responsibility for his behaviour.  And it would relieve him of the guilt of knowing that he had had the freedom to make other choices. It isn’t his fault that John suffered because of his faked death, or because of his failure to confess his love, because he had no free choice in any of his actions. 
“Jean-Paul Sartre suggested that people sometimes avoid incrimination and responsibility by hiding behind determinism: "...we are always ready to take refuge in a belief in determinism if this freedom weighs upon us or if we need an excuse"” x
Even after Mary made what she thought were random (free) choices in TST, she was unable to get ahead of Sherlock, because in S4, Hard Determinism is real and “no human action is ever truly random”.
Every one of her movements had been determined already, because humans cannot act or behave in any other way than they do. This is how (symbolically) Sherlock found her.
Tumblr media Tumblr media
“On one hand, if determinism is true, all our actions are predicted and we are assumed not to be free; on the other hand, if determinism is false, our actions are presumed to be random and as such we do not seem free because we had no part in controlling what happened.” x
Moftiss’s writing on Doctor Who deals with this stuff a lot because stories with time travel in them constantly need to decide whether our actions can alter the future, or whether history is fixed. Moffat’s solution in DW is a combination - there are “fixed points” - certain moments in the universe’s history which must always happen as they do, but then there is flexibility too...
Tumblr media
But getting in to the way Moffat handles this in DW is a whole other meta.
[I genuinely came across this entire idea from reading an example of determinism versus free will which used a freaking DIVING BOARD as an exampl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concepts. The example said that Determinism is like someone being pushed from the diving board, and Free Will is like someone making their own decision to jump off it (Sherlock’s fancy gay little diving move before he jumps in TAB???!). It made me wonder whether the diving board analogy is like a common philosophy textbook example or something, and if Moftiss have referenced it?? I was unable to re-find where I read this diving board analogy (damn it!).]
Now flash forward from TAB to TFP, where the theme of the episode is I Want To Break Free.
In TFP we get an odd mixture of determinism AND free will represented in the scenes where Eurus forces Sherlock and John and Mycroft to make choices.
Being forced and being allowed to choose should be opposite ideas according to our Determinism vs Free Will subtext. So what’s happening in TFP in Eurus’s game is that we are tricked into believing our characters are being given choices, when they are really trapped in a psychopath’s game! These are NOT choices they are being given. They are prisoners - they have no free will.
I think this is telling a story once again, about the illusion of free will, JUST like Sherlock’s fall from Bart’s did. (SO did the Cabbie’s pill game in ASiP, btw! The cabbie gave his victims a choice, but it wasn’t a very good choice. Choose the gun, or a 50/50 chance at death. The cabbie’s victims were doomed to die though. The existence of any choice in the matter was an illusion.)
The determinism vs free will subtext is not so much simply Moftiss’s opinion on an ongoing philosophical debate, but rather they are using it as a commentary on the way we are made to believe that we are free, when we are not.
“None are more hopelessly enslaved than those who falsely believe they are free” - Johann Wolfgang von Goethe
John is “not free” either (but at least he knows it now). These texts are always about Sherlock, remember. It was just texting, but I wanted more!
Tumblr media
I’ve only seen this text message interpreted in terms of John being “not free” because in his heart he is with Sherlock (and as a reference to TPLoSH’s “I am not a free man”). 
But reading it in terms of Free Will frames this text message as being more about our freedom to choose our future, and that John here knows that he can’t outrun his own Death in Samarra which is his heteronormative/no-homo ending that he gets in S4. “Things won’t end well”. Nope. No they did not. “It was nice to get to know you a little”. Because friends are as close as John and Sherlock are going to get (for the time being).
Back to TFP, in the room with only the gun, Sherlock is forced to choose between John and Mycroft, but chooses not to choose, which @tendergingergirl explained here is an example of Buridan’s paradox, another little piece of philosophy referenced here.
On a surface level, clearly Sherlock could simply not bring himself to murder his brother, and so turned the gun on himself.
Tumblr media
But the subtext of it - in terms of determinism vs free will - is that killing himself was the only free choice left available to Sherlock. It was what Eurus didn’t want him to do, and she was probably hoping it wouldn’t occur to him. Because it was the one choice left open to Sherlock which would represent a genuine act of Free Will, as it was neither of the two “choices” that were given to him. Neither of those were truly choices. But killing himself was. 
(And with the Cabbie in ASiP, Sherlock did the very same thing. He chose the gun instead of one of the two bottles of pills. But the gun was a fake, in a similar way to how a tranquilizer gun is fake. In ASiP Sherlock ended the Cabbie’s game by essentially getting up and walking away. In TFP he’s managed to escape Eurus’s game the same way - by finding a loophole. He didn’t kill Mycroft, he was able to make a different choice. Of course it didn’t seem like a good choice, but it was a loophole and it allowed him to symbolically escape, proving that perhaps he is indeed Freer than he thought.)
So while Sherlock shows this obsession with Determinism in TST, it seems he is rediscovering his desire for freedom in TFP.
Instead of playing Eurus’s game, Sherlock flipped the chess board. He knew, or had just figured out, that Eurus didn’t want him to die yet, and so Sherlock realised that he held the power over her. There’s a bit of a hint in one of Moffat’s Doctor Who episodes....
“The first rule of being interrogated is that you are the only irreplaceable person in the torture chamber. The room is yours, so work it. If they're going to threaten you with death, show them who's boss. Die faster.” - Heaven Sent (2015), written by Steven Moffat.
So the direction here is good - we’re moving from Sherlock in TRF doing as he is forced, to in TAB and TFP doing what he chooses. From things carrying on as they always have been (determinism), to rewriting history (free will)...
“You wrote your own version, as I remember. Appointment in Sumatra. The merchant goes to a different city and is perfectly fine.” - TST
@justanotherone16 tagging you because philosophy! 
More meta: A Leap of Faith by @raggedyblue and our musings on Reduction ad absurdum here and here and also Mind the Gap again by @raggedyblue. I’m betting there’s more metas out there about this stuff but these are the ones I found. Thanks for reading! :-D
[This is a bit like my Murder, not Suicide meta, but that was in the context of the suicides of gay men that were “murders” perpetrated by homophobic society]
74 notes · View notes
eglise22 · 3 years
Text
La Voix dans le désert
Tumblr media
Nous connaissons bien la légende de l'âne de Buridan qui, amené à choisir entre l'eau et le foin finit par mourir de faim et de soif, faute de pouvoir choisir.
Notre vie contemporaine est parfois comparable à la situation de cet âne dans le mal de choisir. De plus en plus, nous avons tellement de sollicitations, tellement de voix qui tonnent dans nos oreilles que nous pouvons avoir du mal à entendre, à choisir et surtout à bien choisir.
En cette fin d'année, au milieu de mille, s'il y a une voix à écouter et à entendre, c'est certainement celle de Jean, le fils de Zacharie. Hier, il prêchait dans le désert de Judée non loin du Jourdain où il baptisait. Aujourd'hui, il prêche dans les déserts de nos villes et campagnes, au bord de l'eau, sur nos plages bretonnes ou en pleine terre. Il prêche surtout dans nos cœurs. Et son message demeure toujours le même :
« Préparez le chemin du Seigneur, aplanissez sa route. Tout ravin sera comblé, toute montagne et toute colline seront abaissées ; les passages tortueux deviendront droits, les routes déformées seront aplanies ; et tout homme verra le salut de Dieu. »
Nous sommes peut-être très habitués à célébrer la fête de Noël avec des rituels liturgiques, familiaux et gastronomiques très précis et transmis de génération en génération. Mais si nous voulons que la venue du Messie au milieu de nous ne soit pas une fête en plus, nous avons certainement à réentendre cette voix du prophète nous appeler à préparer les voies du Seigneur.
Les enfants ont cette belle habitude du calendrier de l'Avent où ils découvrent jour après jour quel effort faire, quelle voie du Seigneur faut-il préparer hic et nunc pour accueillir au-delà des cadeaux de papa Noël, la grande joie du Nouveau-Né.
Et nous, adultes, quels engagements prenons-nous pour bien vivre ce « petit Carême » dans une attente active du Sauveur ?
A l'image de la nouveauté qu'apporte chaque cadeau de Noël, l'écoute attentive de la Voix dans le désert est un appel toujours renouvelé à accueillir Dieu qui a pris chair dans notre chair pour nous ouvrir à la vie divine.
Que Dieu lui-même raffermisse nos pas à la rencontre de Celui qui vient !
via Communauté pastorale du Littoral Ouest https://ift.tt/3oAyWtP
Tumblr media
0 notes
francepittoresque · 6 years
Photo
Tumblr media
[EXPRESSION] Être comme l’âne de Buridan ► http://bit.ly/Expression-Ane-Buridan Être complètement indécis entre deux parties ou deux avantages. L'âne dont il est ici question est celui dont parle le philosophe français du XIVe siècle Jean de Buridan
4 notes · View notes
philosophy-uml · 3 years
Text
[4.17.6] John Buridan on the Signification of Propositions
[4.17.6] John Buridan on the Signification of Propositions
John Buridan (Jean Buridan 1301-1358) in Summulae de Dialectica writes about types of terms, signification, and supposition: Propositions are made up of terms.Terms can be spoken utterances, written inscriptions, and concepts in mind.Spoken and written terms are parts of Spoken and written propositions.Spoken and written terms and concepts can be categorematic and syncategorematic.  The former…
Tumblr media
View On WordPress
0 notes
trevorsekw759 · 3 years
Text
What Is Treking? Equipment, Best Period, Leading Places
Whether you desire it lengthy or short, you can constantly boost the intensity or size. Broad and nearly degree strolling trails on the valley flooring, near to negotiations, leading through wooded areas. The renowned Eagle Walk is a long-distance hut-to-hut trail that traverses the flabbergastingly beautiful Austrian State of Tirol. Load with outdoor camping or staying in huts in mind and also appreciate the real back-to-nature ambience.
Tumblr media
What about strolling for a hr with a city park? We call that "city walking" yet, although it cures our treking impulse a little, I truthfully don't think about that actual walking. The tracks are fairly flat and also we typically stroll those trails at a slower pace than we do when we are hiking. If you are taking a trip in bear country, bring bear spray. The 52 Walk Challenge web site assists you make a commitment to trek weekly for a year. As well as health, wellness, etc. If you have questions or intend to meet various other hikers, I recommend searching Facebook or Reddit for hiking teams in an area near you.
youtube
Trekking usually lasts a minimum of two days, but more likely longer than that.
Throughout the initial year of this blog I realized that adventure indicates various points to different people.
Strolling courses are normally concrete, crushed rock, asphalt, as well as sand.
Petrarch's implication that he was the first to climb mountains for satisfaction, as well as Burckhardt's persistence on Petrarch's sensitivity to nature have actually been often duplicated given that. There are additionally numerous recommendations to Petrarch as an "alpinist", although Mont Ventoux is not a hard climb, as well as is not generally considered part of the Alps. This implied claim of Petrarch and Burckhardt, that Petrarch was the very first to climb up a mountain for enjoyment considering that classical times, was disproven by Lynn Thorndike in 1943. Mount Ventoux was climbed by Jean Buridan, on his means to the papal court in Avignon before the year 1334, "in order to make some meteorological monitorings". Treking is a long, energetic stroll, generally on routes or paths in the countryside.
I obtain a great deal of questions about knapsacks to bring pets ... particularly Dachshunds. There will come a day when he can no longer stay up to date with our walks. I have actually watched for a backpack to lug him so we are prepared when that day comes. My definition of hiking most definitely needs it to be more exhausting than a "normal" stroll. Elevation, to ensure, and also a particular sturdy high quality of wild. You'll never ever miss out on a write-up from us about pet wellness, dog pleasant traveling, as well as outdoor camping as well as hiking with canines.
What Are The Health Benefits Of Treking And Also Travelling?
Evaluate your physical problem by hiking for 5 hrs as well as see if you prepare to attempt walking. On top of all the physical as well as mental boosts, treking as well as hiking can additionally make you extra imaginative. Spending quality time outdoors and saturating all the Vitamin D from the sunlight can boost your mind.
The French far away course GR 65 (of the Grande Randonnée network), is an essential alternative course of the old Christian expedition means. The establishment of this and also comparable national forests aided to improve accessibility for all outdoors lovers. The Countryside and Rights of Method Act 2000 considerably expanded the right to stroll in England and also Wales. Among one of the most substantial advantages of hiking is to see the https://www.outsidetimes.com sensational landscapes and natural sight that you can enjoy. Additionally, there are likewise amazing parks around the city that provide outstanding landscapes. Strolling in the park also enhances positive self-image as well as self-worth as you get to fulfill individuals from your community or neighboring areas.
Devices
Besides the size, the altitude gain of the hike likewise plays a significant role in determining how tough the hike is. A very general rule of thumb is that you can hike 400 m (~ 1312 feet) of altitude gain per hour. That's trustworthy on exactly how high the slope is as well as the difficulty of the surface however it's a basic guideline. Perfect for wild animals enjoying, treking tracks snake via canyons close to the swirling Rio Grande in the US-Mexico borderlands. Your holiday accommodation throughout of your trip need to be strong.
Tumblr media
Added Gear Youll Demand For A Walk Vs A Walking
If you're brand-new to treking, start with shorter, flatter walks and function your way up from there. Additionally, if you have actually never ever treked before it may seem difficult the first couple of hikes that you do. Yet having claimed that, you can also trek as long as you desire. Thanks To Edgar BetancourthMost treking tours usually finish in the same area that you started. These are typically half-day to one-day scenic tours, as these hikes in the German Alps.The terrain differs from fairly flat to high. Prior to you go on any type of hiking trip, see to it you have a topographic map of the area.
0 notes
bunkerblogwebradio · 3 years
Text
Liberdade e guerra
Em seu livro A Anatomia do Estado, Murray Rothbard escreveu:
Assim como as duas interrelações humanas básicas e mutuamente exclusivas são a cooperação pacífica ou a exploração coerciva — produção ou depredação —, a história da humanidade, em particular a sua história econômica, também pode ser considerada uma disputa entre estes dois princípios.
Essa disputa tem sido unilateral. No mundo antigo, impérios dominavam a vida política. Sistemas impiedosos baseados na escravidão, no roubo e na guerra eram a regra ao redor do mundo.
Uma exceção, em um território rodeado por impérios desse tipo, eram as tribos de Israel. Mesmo alertados pelo próprio Deus sobre a miséria que enfrentariam caso renunciassem voluntariamente à liberdade que gozavam sob o regime descentralizado dos juízes em favor de um rei terreno que os governasse, eles clamaram pela própria escravização.
É instrutivo que a recompensa que os israelitas julgavam justa, não obstante seu alto preço, fosse a de ter um rei que os liderasse em batalha. Tendo Saul como rei, Israel não mais desfrutou de períodos de paz como quando sob a liderança dos juízes; esteve constantemente em guerra.
Como Samuel havia alertado, Saul tomou seus filhos como soldados, suas filhas e seus empregados como escravos, suas melhores terras, suas colheitas e seus rebanhos, assim reduzindo os israelitas à servidão.[1]
Os israelitas não seriam o último povo a sucumbir ao canto de sereia da guerra. A respeito da importância da guerra como um instrumento para o engrandecimento do poder do estado em sua disputa contra a liberdade, Rothbard escreveu:
Em uma guerra, o poder do estado é levado ao extremo, e sob os slogans da "defesa" e da "emergência", ele pode impor uma tirania ao público que, em tempos de paz, enfrentaria franca e aberta resistência. Desta forma, a guerra provê muitos benefícios a um estado e, de fato, todas as guerras modernas trouxeram aos povos envolvidos um permanente legado de maiores encargos estatais sobre a sociedade.
A guerra não apenas amplia enormemente as transferências de riqueza da sociedade para o estado para que este fortaleça seu regime, como também promove a ideologia pró-estado.
Como o estado vive parasiticamente da produção de seus hospedeiros, aqueles que se beneficiam destas transferências de riqueza devem ser sempre uma minoria da população. As vítimas do estado têm de ser a maioria e, portanto, sua aceitação da depredação promovida pelo estado deve ser cuidadosamente engendrada, caso contrário será o fim desse mesmo estado.
A legitimidade do estado deve ser fabricada e mantida por meio da ideologia. Do despotismo oriental à hegemonia americana, o estado nunca falhou em atrair, com seu poder e riqueza, aqueles que se esforçassem para criar sua apologia.
Mas mesmo toda a litania de alegações — que nossos governantes são sábios e seus governos são beneficentes, que nossos governantes nos protegem de perigos terríveis, que nossos governantes mantêm a coesão social, que nossos governantes preservam a tradição gloriosa de nossos ancestrais, que nossos governantes incorporam os interesses da sociedade, que nossos governantes são designados por Deus, que nossos governantes trazem ciência e razão à sociedade, que nossos governantes são capazes de controlar a economia e assim por diante — nunca conseguiu explicar como é possível transformar hegemonia em associação voluntária, tributação em oferenda espontânea, coerção em liberdade de escolha, homicídio em massa em defesa, regulação econômica em prosperidade e enriquecimento de todos.
Se o estado é a fonte de onde jorram todas as benesses sociais, então por que seus apologistas estão sempre tentando fortalecer seu poder instigando um sentimento de culpa nos bem-sucedidos e de inveja nos mal-sucedidos?
Nós libertários conseguimos ver através das mentiras e dos sofismas da ideologia pró-estado porque soubemos aceitar a verdade promovida por aqueles que sempre defenderam a liberdade. Extrapolando da nossa experiência, podemos ver que a ideologia anti-estado é condição necessária para se estabelecer e manter a liberdade. As vantagens que ela tem sobre a ideologia pró-estado são que, primeiro, ela recorre aos interesses da maioria, e segundo, ela se apóia na verdade a respeito da natureza da ação humana.
Ao passo que a liberdade é consistente com a ação humana, o estado está fundamentado em uma flagrante contradição, a saber: a ideia de que a única maneira de haver uma instituição que proteja nossos direitos é criando uma instituição que se baseie totalmente na própria violação dos nossos direitos.
Os antigos israelitas seguiam uma ideologia que possuía muitas das qualidades necessárias para manter o poder estatal restringido, como, por exemplo, uma lei superior à qual todo homem estava sujeito, e um sistema de governo descentralizado. Por algumas gerações, os reis de Israel foram um tanto quanto contidos pela lei superior. Mas à medida que a perversidade dos reis posteriores foi aumentando, a lei superior foi sendo finalmente abandonada, até que as liberdades dos israelitas foram extintas.[2]
Levaria muitos séculos para que o mundo testemunhasse outra faísca de liberdade. Ela foi acesa sob Sólon, em Atenas, e sua brasa brilhou mais vivamente durante o reinado de Péricles. Mas a liberdade durou somente enquanto Péricles e sua geração estiveram vivos.
De acordo com Lord Acton, o sistema ateniense não foi capaz de proteger as minorias e de colocar o estado sob o domínio da lei. A democracia de Atenas, no final, levou ao conflito de classes, o que destruiu o sistema. A Guerra do Peloponeso extinguiu tanto Péricles quanto a chama da liberdade ateniense.[3]
Em Roma, os estóicos redescobriram o conceito de lei superior à qual todos os homens estão sujeitos. Em sua maior formulação, nas mãos de Cícero, Sêneca e Fílon, os estóicos afirmaram que há uma comunidade universal dos filhos de Deus e que Sua voz deveria ser obedecida. A liberdade seria alcançada por meio da obediência das leis naturais de Deus. Com uma ideologia melhor que a dos gregos, a nova batalha pela liberdade durou bem mais em Roma do que em Atenas. Mas ela nunca atingiu na prática as elevadas expressões alcançadas na teoria.[4]
Como Acton escreveu,
Indivíduos e famílias, associações e dependências eram material mais do que suficiente para o poder soberano consumir para seus próprios objetivos. O que o escravo era nas mãos de seu mestre, o cidadão era nas mãos da comunidade. As mais sagradas obrigações desapareceram ante as vantagens públicas. Os passageiros existiam para sustentar o navio.[5]
No auge de seu poder, antes que as guerras do império abortassem sua liberdade e prosperidade embrionárias, Roma encontrou uma esperança de liberdade nos homens livres das comunidades teutônicas. Quando seus líderes foram convertidos ao cristianismo, eles converteram seu povo. Após a queda de Roma, seus governos descentralizados persistiram uma vez que a Igreja resistia à centralização do poder estatal, permitindo um longo período de incubação para o nascimento da liberdade.[6]
A vez da liberdade chegou durante o século X, quando os escandinavos interromperam suas invasões agressivas à Europa e passaram a praticar o livre comércio de forma pacífica.
No século seguinte, o Mediterrâneo estava seguro para a navegação europeia. Veneza e as cidades do norte da Itália prosperaram expandindo suas rotas comerciais e levando a divisão do trabalho às cidades do interior. As cidades hanseáticas fizeram o mesmo no norte da Europa. Como escreveu Henri Pirenne, a Europa tornou-se uma região de cidades construídas pelo capital.[7]
O florescimento do comércio na Europa foi fortalecido pelo desenvolvimento de uma ideologia pró-liberdade, elevada a um apogeu inédito pela doutrina cristã do indivíduo. O próprio Deus havia encarnado e vivido como um homem. Jesus Cristo sofreu e morreu para assegurar a salvação de cada indivíduo. No Céu, Deus glorificará cada pessoa com um corpo espiritual para viver em comunhão com Ele e com o próximo. Nações prosperam e entram em decadência, mas o indivíduo viverá pela eternidade.
Como mostrou Harold Berman, no século XI, a Igreja reformulou o direito canônico em linhas mais favoráveis à propriedade privada e ao contrato. A lei canônica funcionou como um fermento para os diferentes sistemas legais, tanto o civil quanto o comercial.[8]
Berman escreveu:
Talvez a característica mais distintiva da tradição legal ocidental seja a coexistência e a competição dentro da mesma comunidade de jurisdições diferentes e de sistemas legais diferentes. É essa pluralidade de jurisdições e sistemas legais que torna a supremacia da lei necessária e possível.
O pluralismo legal originou-se na diferenciação entre o governo eclesiástico e os governos seculares. A Igreja declarou sua independência do controle secular, sua jurisdição exclusiva em determinados assuntos, e sua jurisdição concorrente em outros assuntos ... A lei secular, por sua vez, estava dividida em vários tipos concorrentes, incluindo a lei real, a lei feudal, a lei senhorial, a lei urbana, e a lei comercial.[9]
Na medida em que a proteção legal da propriedade privada ia sendo lenta mas decisivamente ampliada da Igreja e dos mercadores para qualquer indivíduo, o progresso econômico foi levado às massas. A pequena revolução industrial, engendrada pela proteção da propriedade privada e dos contratos, atraiu a atenção de estudiosos que queriam explicar o funcionamento da economia florescente.
Jean Buridan e Nicolas de Oresme escreveram trabalhos no século XIV explicando a atividade econômica tendo como moldura a sociedade como uma ordem natural surgida do funcionamento das leis que Deus imprimiu à natureza das coisas. A lei natural também formou a base para leis feitas pelo homem na alta Idade Média. Como Berman escreveu:
Na era formativa da tradição jurídica ocidental, a teoria da lei natural predominou. Era consenso geral que o direito humano, em última análise, derivava, e deveria ser aprovado, pela razão e pela consciência. De acordo não apenas com a filosofia do direito da época, mas também com o próprio direito positivo, qualquer lei positiva, fosse ela editada ou baseada em costumes, deveria estar em conformidade com a lei natural, caso contrário ela careceria de validade como lei e poderia ser ignorada.
Esta teoria era baseada tanto na teologia cristã quanto na filosofia aristotélica. Mas ela também estava baseada na história da luta entre autoridades eclesiásticas e seculares, e na política do pluralismo.[10]
Quando irrompiam guerras no contexto desta ideologia cristã pró-liberdade, elas meramente desaceleravam, em vez de interromperem por completo, o ímpeto da liberdade. A Guerra dos Cem Anos veio para consolidar o poder estatal e fomentar a ideologia pró-estado. As forças reacionárias eram fortes o bastante para inaugurar a era do absolutismo monárquico. A ascensão do estado-nação começou a ameaçar a liberdade no Ocidente como até então nada havia ameaçado antes, desde o poder estatal de Roma.
Assim como autores mercantilistas vocalizavam a ideologia pró-estado nos séculos XVI e XVII, os pós-escolásticos revidavam com suas visões pró-liberdade.
A Escola de Salamanca desenvolveu uma visão sobre política e economia fundada na lei natural. O fundador da escola, Francisco de Vitória, argumentou que todos os indivíduos merecem a mesma proteção legal para suas pessoas e para suas propriedades. Como Tom Woods escreveu:
Vitória afirmou que o homem não podia ser privado da sua capacidade civil por estar em pecado mortal, e que o direito de possuir coisas para uso próprio (isto é, o direito à propriedade privada) pertencia a todos os homens, mesmo que fossem pagãos ou tivessem costumes considerados bárbaros. Os índios do Novo Mundo eram, portanto, iguais aos espanhóis em matéria de direitos naturais. Possuíam as suas terras de acordo com os mesmos princípios pelos quais os espanhóis possuíam as deles.[11]
A visão da lei natural dos escolásticos foi elevada por Hugo Grócio em sua obra sobre o direito internacional no século XVII, e a ideologia pró-liberdade foi posteriormente refinada nas obras sobre direitos naturais de Locke e Jefferson nos séculos XVII e XVIII.
A América provou ser terreno fértil para a ressurreição da liberdade. O poder estatal não foi capaz de reprimir as tendências de pessoas possuidoras de uma ideologia pró-liberdade de viverem respeitando a propriedade privada e os contratos, no território aberto e nos governos descentralizados da América do Norte colonial. Estados-nações tiveram de se contentar com limitações ao seu poder diante das possibilidades que suas vítimas tinham de escapar de suas depredações.
Durante o seu apogeu no século XIX, o liberalismo clássico espalhou os frutos da liberdade, da paz, da prosperidade e da prosperidade humana. Mas a ideologia pró-liberdade refinada pelos liberais clássicos não estava livre de impurezas.  Seu defeito fatal estava patente na centralização do poder estatal através da constituição americana, que impunha um formato de estado-nação sobre o sistema de governos descentralizados dos 13 estados. Como Hans-Hermann Hoppe escreveu,
A filosofia política liberal clássica — como personificada por Locke e mais proeminentemente demonstrada na Declaração de Independência de Jefferson — era antes e acima de tudo uma doutrina moral.
Inspirada na filosofia dos estóicos e dos pós-escolásticos, ela estava centrada ao redor das noções de soberania do indivíduo, apropriação original de recursos naturais (sem dono), na propriedade e no contrato como sendo um direito humano universal implícito na natureza do homem enquanto animal racional. No ambiente de governantes monárquicos (reis e príncipes), esta ênfase na universalidade dos direitos humanos colocou a filosofia liberal em radical oposição a todo e qualquer governo estabelecido.
Para um liberal, todo homem, rei ou aldeão estava sujeito aos mesmos princípios universais e eternos de justiça. E um governo, ou ele conseguia justificar sua existência como sendo um contrato entre proprietários privados, ou ele não poderia ser justificado de forma alguma.[12]
Tragicamente, da genuína proposição de que uma ordem social liberal requer que seus membros utilizem violência defensiva para suprimir a agressão contra a pessoa e a propriedade, liberais clássicos incorretamente concluíram que deveria haver um provedor monopolístico dessa violência defensiva.
De acordo com a visão de que o estado é essencial para uma ordem social liberal, os liberais clássicos permitiram que o poder estatal mantivesse um ponto de apoio que ele mais uma vez utilizaria para atacar a liberdade.
Esse momento veio em 1914. Como Rothbard escreveu,
Mais do que qualquer outro período, a Primeira Guerra Mundial foi o crítico divisor de águas para o sistema empresarial americano. A economia transformou-se em um "coletivismo de guerra", uma economia totalmente planejada e conduzida amplamente pelos interesses dos grandes negócios e por meio da intervenção do governo central, o qual serviu como o modelo, o precedente e a inspiração para o capitalismo corporativo de estado pelo restante do século XX.[13]
Como um prelúdio para a sua destruição na Grande Guerra, a ideologia pró-estado havia desferido um ataque frontal à liberdade no século XIX. Hunt Tooley registrou a função das ideologias no ímpeto à guerra em seu livro The Western Front.[14] Como Ralph Raico observou[15] em sua crítica ao livro de Tooley:
Tooley lida habilmente com as correntes intelectuais e culturais da Europa pré-guerra. Contribuindo para a propensão à violência havia o anarco-sindicalismo de Georges Sorel e uma forma degenerada de nietzscheanismo; porém, acima de tudo, havia o darwinismo social — na realidade, somente Darwinismo —, que ensinava o conflito eterno entre raças e tribos de humanos e de outras espécies.
Mesmo na América, a ideologia pró-estado havia conseguido degenerar o pensamento cristão durante a Era Progressista, despindo-o de sua forma pró-liberdade.
Richard Gamble documenta esta degeneração em seu livro The War for Righteousness.[16]  Como Raico escreveu em sua crítica ao livro de Gamble,
Ao final do século XIX, protestantes progressistas, frequentemente influenciados pela Teoria da Evolução, estavam pregando pela transformação sucessiva da igreja, depois da sociedade americana, e finalmente do mundo todo. Ao rejeitarem o calvinismo tradicional, eles rejeitaram também a distinção agostiniana entre a Cidade de Deus e a Cidade do Homem.
A Cidade do Homem deveria ser transformada na Cidade de Deus, aqui na Terra, por meio de uma alteração do cristianismo, o qual deveria ser redefinido como uma doutrina socialmente ativista.[17]
A Grande Guerra liberou as forças coletivistas do socialismo e do fascismo ao longo de todo o mundo ocidental. Como Raico escreveu,
A Primeira Guerra Mundial foi o ponto de inflexão do século XX. Se ela não houvesse ocorrido, os Hohenzollern da Prússia muito provavelmente permaneceriam como chefes da Alemanha, com seu arsenal de reis e nobres subordinados encarregados dos estados germânicos menores.
Com qualquer vitória que Hitler pudesse ter obtido nas eleições do Reichstag, poderia ele ter erigido sua ditadura totalitária e homicida em meio a esta poderosa superestrutura aristocrática? Altamente improvável.
Na Rússia, os poucos milhares de comunistas de Lênin confrontaram o imenso exército imperial russo, o maior do mundo. Para que Lênin tivesse qualquer chance de sucesso, aquele exército deveria ser antes pulverizado, que foi exatamente o que os alemães fizeram. Portanto, um século XX sem nazistas ou comunistas. Imagine isso.
Foi o ponto de inflexão na história da nação americana, que sob a liderança de Woodrow Wilson transformou-se em algo radicalmente diferente do que havia sido antes.[18]
Em nenhum outro lugar a transformação radical foi mais evidente do que no direito. A tapeçaria legal do Ocidente, tecida por mais de um milênio, foi esgarçada e fendida na Primeira Grande Guerra. Harold Berman escreveu,
Quando os diferentes regimes legais de todas essas comunidades — locais, regionais, nacionais, étnicas, profissionais, políticas, intelectuais, espirituais, e outras — são engolidos pela legislação do estado-nação ... [isso] é, de fato, o maior perigo representado pelo nacionalismo contemporâneo.
As nações da Europa, que se originaram de sua interação umas com as outras no contexto da cristandade ocidental, tornaram-se cada vez mais separadas entre si no século XIX. Com a Primeira Guerra Mundial, elas se separaram violentamente e destruíram os laços comuns que as haviam mantido previamente ligadas, ainda que frouxamente.
E, no final do século XX, ainda sofremos com a historiografia nacionalista originada no século XIX, que apoiou a desintegração do patrimônio legal comum ao Ocidente.[19]
Mesmo na terra onde a liberdade ardia com maior brilho, a guerra provou ser uma força potente para o retrocesso. Como Rothbard escreveu:
Historiadores têm geralmente tratado o planejamento econômico da Primeira Guerra Mundial como um episódio isolado, ditado pelas necessidades da época, e tendo pequena significância posterior. Mas, ao contrário, o coletivismo de guerra serviu como uma inspiração e um modelo para um temível conjunto de forças destinadas a moldar a história da América no século XX.[20]
A Primeira Guerra Mundial destruiu a economia mundial que havia sido construída durante o século XIX sob o liberalismo clássico. Como Maurice Obstfeld e Alan Taylor demonstraram em seu livro Global Capital Markets: Integration, Crisis, and Growth, o nível de integração da economia mundial subiu de moderadamente baixo em 1860 para moderadamente alto em 1914.
A Grande Guerra desintegrou a economia mundial, retornando-a a um nível substantivamente abaixo daquele vigente em 1860. E, ao final da Segunda Guerra Mundial (que foi uma continuação da Primeira Guerra Mundial), o nível de integração era metade do nível de 1860. O nível de integração da economia mundial só foi superar aquele de 1914 no século XXI.[21]
Os governos levaram 70 anos para realizar aquilo que a liberdade fez em questão de dias.
A Grande Guerra destruiu o padrão-ouro clássico e introduziu uma era de moedas fiduciárias de papel. Hiperinflações e depressões foram o resultado. Como Steve Hanke e Nicholas Krus documentaram, dos 56 episódios de hiperinflação da história apenas um ocorreu antes de 1920.[22]
E como George Selgin, William Lapstras e Lawrence White demonstraram, os cem anos de política monetária do Federal Reserve resultaram em mais instabilidade econômica e financeira do que o menos insolvente sistema bancário americano existente antes de o Fed ser criado.[23]
A Grande Guerra aniquilou o mundo liberal clássico e iniciou um século de ascensão do estado coletivista. A civilização ocidental, tendo dado à luz a liberdade e a alimentado, sacrificou sua cria antes que ela tivesse tido a oportunidade de atingir a maturidade ao redor do mundo.
Em vez de liberdade, a hegemonia americana espalhou o corporativismo pelos quatro cantos da Terra.
Como nós, nossos predecessores trabalharam para divulgar a ideologia pró-liberdade durante dias negros, quando a liberdade havia sido eclipsada pelo poder estatal. Sua estratégia envolvia a criação de instituições independentes.
Christopher Dawson, em seu livro The Crisis of Western Education, demonstrou que os movimentos intelectuais da Renascença e do Iluminismo se desenvolveram ao largo do estado. Dawson escreveu:
Na Inglaterra e nos Estados Unidos, a tradicional relação entre a igreja, a escola e o sistema medieval de independência corporativa conseguiu sobreviver, não obstante os ataques de reformadores políticos e educacionais.
Os abusos do antigo sistema e a negligência da educação primária certamente não eram menos flagrantes na Inglaterra do que no continente europeu.
Mas a força do princípio do livre-arbítrio e a ausência de um estado autoritário fizeram com que o movimento reformista na Inglaterra seguisse um caminho independente e criasse suas próprias organizações e instituições.[24]
Para restaurar a liberdade em nossa era, devemos erigir empreendimentos genuinamente privados e instituições educacionais independentes. Por meio de organizações como o Instituto Mises, podemos fazer a nossa parte no século XXI para reverter essa maré do estatismo coletivista que se ergueu no século XX, exatamente como nossos predecessores fizeram ao reverter o absolutismo no século XVIII. Não devemos repetir seus erros.
Desta vez, nossa ideologia pró-liberdade deve abraçar suas implicações lógicas e rejeitar completamente a ideia de estado. Somente assim pode todo o potencial da vida, da liberdade e da propriedade ser concretizado na prosperidade de toda a raça humana.
[1] I Samuel 8.
[2] I Reis e II Reis.
[3] Lord Acton, Essays in the History of Liberty, Vol. 1, (Indianapolis: Liberty Classics, 1985), pp. 12-13.
[4] Acton, Essays in the History of Liberty, pp. 24-25.
[5] Acton, Essays in the History of Liberty, p. 18.
[6] Acton, Essays in the History of Liberty, pp. 30-33.
[7] Henri Pirenne, Medieval Citie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25); idem,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Medieval Europe (London: Routledge, 1936); and Acton, Essays in the History of Liberty, pp. 35-36.
[8] Harold Berman, Law and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9] Berman, Law and Revolution, p. 10.
[10] Berman, Law and Revolution, p. 12.
[11] Tom Woods, Como a Igreja Católica Construiu a Civilização Ocidental (São Paulo: Quadrante, 2010),
[12] Hans Hoppe,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Publishers, 2001), p. 225.
[13] Murray Rothbar, War Collectivism: Power, Business, and the Intellectual Class in World War I (Auburn, Ala.: Mises Institute, 2012), p. 7.
[14] Hunt Tooley, The Western Front: Battle Ground and Home Front in the First World War (New York: Palgrave McMillan, 2003).
[15] Ralph Raico, Great Wars and Great Leaders: A Libertarian Rebuttal (Auburn, Ala.: Mises Institute, 2010), p. 230.
[16] Richard Gamble, The War for Righteousness: Progressive Christianity, the Great War, and the Rise of the Messianic Nation (Wilmington, Del.: ISI Press, 2003).
[17] Raico, Great Wars and Great Leaders, p. 193. Itálicos no original.
[18] Raico, Great Wars and Great Leaders, pp. 1-2.
[19] Berman, Law and Revolution, p. 17.
[20] Rothbard, War Collectivism, pp. 34.
[21] Maurice Obstfeld and Alan Taylor, Global Capital Markets: Integration, Crisis, and Grow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2] Steve Hanke and Nicholas Krus, "World Hyperinflations," Cato Working Paper (Washington: Cato Institute, 2012). A exceção foi na França, durante a Revolução, em 1795.
[23] George Selgin, William Lastrapes, and Lawrence White, "Has the Fed Been a Failure?" Cato Working Papers (Washington: Cato Institute, 2010).
[24] Christopher Dawson, The Crisis of Western Education (Steubenville, Oh.: Franciscan Press, 1989), p. 67.
0 notes
laurent-bigot · 6 years
Text
Ce n’est pas le moindre des paradoxes de l’Occupation à de nombreux jeunes acteurs de se révéler au public. La plupart rapidement au vedettariat au cours des années 50, mais si on excepte quelques chefs-d’œuvre fulgurants, Ils seront souvent mal employés.
Danielle Darrieux
Bernard Blier
Pierre Brasseur
Suzy Delair
Jean Marais
Danièle Delorme
Pierre Fresnay
François Perrier
Daniel Gélin
Dany Bobin
Micheline Presle
Martine Carol
Simone Signoret
PIERRE FRESNAY, en 1945, fut victime de la campagne déclenchée contre Le Corbeau, où il avait trouvé son meilleur rôle, avec celui du capitaine de Boieldieu de La Grande Illusion. Il était alors au sommet de sa gloire, un des tout premiers acteurs français, après une première carrière, qui comprenait entre autres le Marius (1931) de Korda et sa suite, La Dame aux camélias (1934) d’Abel Gance, Adrienne Lecouvreur (1938) de L’Herbier et L’Assassin habite au 21 (1942) de Clouzot. Après quelques mois d’interdiction succédant à quelques semaines de séjour à Fresnes, il effectuait sa rentrée dans Fille du diable (1945) de Decoin et retrouvait rapidement sa place au premier rang des vedettes françaises. De nouveaux triomphes personnels l’attendaient, dans des films parfois inégaux. Parmi ceux-ci, on doit rappeler sa mémorable composition de saint Vincent-de-Paul, dans le Monsieur Vincent (1947) de Maurice Cloche écrit par Jean Anouilh ou son savoureux Offenbach de La Valse de Paris (1949) de Marcel Achard. Son meilleur rôle de cette seconde période fut sans doute celui de Dieu a besoin des hommes (1950) de Delannoy. Après cela, le niveau des films dans lequel il parut commença à baisser. On peut encore retenir le curieux Défroqué (1953) de Léo Joannon et le vieux marquis des Aristocrates (1954) de Denys de la PatelIière. Fresnay, qui avait débuté à la Comédie-Française et continué de jouer au Boulevard, retourna au théâtre. II fit d’admirables créations, surtout Le Neveu de Rameau de Diderot et Mon Faust de Valéry, dont la télévision a gardé le souvenir. Il mourut en 1975, à Paris (où il était né en 1897).
MONSIEUR VINCENT de Maurice Cloche (1947) avec Pierre Fresnay, Aimé Clariond, Jean Debucourt
MARIUS réalisé par Alexander Korda (1931), écrit par Marcel Pagnol d’après sa pièce éponyme, représentée pour la première fois en décembre 1927 sur la scène du Théâtre de Paris, Marius est le premier volet de la trilogie marseillaise de Pagnol. Avec Raimu, Pierre Fresnay, Orane Demazis
LE CORBEAU – Henri Georges Clouzot (1943) – Pierre Fresnay
DANIELLE DARRIEUX (née à Bordeaux en 1917) avait été une des grandes vedettes d’avant-guerre et de l’Occupation grâce à des films comme Mayerling (1936) de Litvak où elle incarnait une inoubliable Marie Vetsera, ou à ceux qu’elle interpréta sous la direction de son mari Henri Decoin, Retour à l’aube (1938), Battements de cœur (1939) et Premier Rendez-vous (1941). Elle avait excellé dans des rôles de jeunes filles modernes, enjouées et mutines, mais qui finissaient toujours par tomber dans les bras du beau jeune premier. Dotée d’une voix agréable, elle susurrait souvent de jolies mélodies, un peu sirupeuses comme le voulait le goût de l’époque et généralement promises à un grand succès, comme la célèbre “chamade” de Battements de cœur. Après trois ans d’interruption, Danielle Darrieux revint à l’écran en 1945, pour une seconde carrière encore plus brillante que la première. Épanouie, mûrie, ayant pris de l’autorité, c’est alors qu’elle interpréta quelques-uns de ses plus beaux rôles, comme la reine de Ruy Blas (1947) dans le film de Cocteau et Pierre Billon ou la fantasque Amélie de Feydeau, dans Occupe-toi d’Amélie (1949) d’Autant-Lara. Mais c’est surtout grâce à Ophuls qu’elle put se surpasser, dans La Ronde (1950), Le Plaisir (sketch de La Maison Tellier d’après Maupassant, 1951) et surtout l’exquise Madame de (1953) d’après Louise de Vilmorin, où elle était une épouse frivole qui finissait par mourir d’amour. Elle fut également remarquable dans La Vérité sur Bébé Donge (1951) où elle retrouvait Decoin, dont elle avait divorcé dix ans plus tôt et dans Le Bon Dieu sans confession (1953) d’Autant-Lara. Elle est décédée en octobre 2017.
OCCUPE-TOI d’AMELIE de Claude Autant-Lara (1949), adapté de la pièce éponyme de Georges Feydeau avec Danielle Darrieux, Jean Desailly, Julien Carette
MADAME DE… de Max Ophuls (1953), adapté du roman éponyme de Louise de Vilmorin paru en 1951 avec Danielle Darrieux, Charles Boyer, Vittorio De Sica, Jean Debucou
RETOUR A L’AUBE – Henri Decoin (1938) – Danielle Darrieux, Pierre Dux, Jacques Dumesnil, Pierre Mingand
PIERRE BRASSEUR (1905-1972) tourna beaucoup et aussi de temps en temps n’importe quoi avant de parvenir à imposer son talent exceptionnel. Réserve faite de la gifle mémorable du Quai des brumes (1938) de Carné, ce n’est qu’avec les années 40 qu’il commença à trouver l’occasion de s’employer. Ce fut surtout grâce à Jacques Prévert qui écrivit pour lui quelques rôles sur mesure, destinés à mettre en valeur un abattage extraordinaire. On en eut un premier aperçu avec le peintre alcoolique de Lumière d’été (1942), le meilleur film de Grémillon, où il éclipsait ses nombreux et remarquables partenaires. Mais c’est l’année suivante qu’il allait rencontrer le rôle de sa vie, avec le fameux Frédérik Lemaître des Enfants du paradis (1943-1945), le chef-d’œuvre de Carné-Prévert. Dans cette évocation d’un “monstre sacré” du romantisme, il fut éblouissant, truculent et gouailleur à la fois, émouvant et sobre quand il le fallait, bref acteur complet et génial. Après cela, il parut presque effacé dans Les Portes de la nuit (1946) de Carné-Prévert, bien qu’il y fût excellent, mais eut l’occasion d’un nouveau grand numéro dans Les Amants de Vérone (1948) de Cayatte-Prévert. Il fut aussi un savoureux Barbe- bleue (1951) pour Christian-Jaque et un héros de Sartre dans Les Mains sales (F, Rivers, 1951), Après un truculent Buridan dans La Tour de Nesle de Gance (1954), et un pittoresque Juju pour René Clair (Porte des Lilas, 1956), il incarna de nombreux rôles jusqu’à sa mort (Les Bonnes causes, Christian-Jaque, 1962), mais plus rien de très marquant. Il fut marié à Odette Joyeux, dont il eut un fils, le comédien Claude Brasseur.
LES BONNES CAUSES est un film franco-italien réalisé par Christian-Jaque et sorti en 1963 avec Pierre Brasseur, Marina Vlady, Bourvil
LUMIERE D’ETE de Grémillon (1943) avec Madeleine Robinson, Paul Bernard, Madeleine Renaud, Pierre Brasseur
LES PORTES DE LA NUIT – Marcel Carné (1946), Pierre Brasseur
SIMONE SIGNORET (née Simone Kaminker en 1921, à Wiesbaden et morte en 1985 à Autheuil-Authouillet (Eure)) fut une des premières jeunes actrices à s’imposer comme vedette au lendemain de la Libération. Figurante et secrétaire du journaliste Jean Luchaire sous l’Occupation elle décrocha quelques petits rôles, avant d’être lancée par les films d’Yves Allégret, son premier mari, Les Démons de l’aube (1945) et surtout Dédée d’Anvers (1947) qui fit d’elle une grande vedette, dans un rôle pourtant assez conventionnel de fille de maison close, emploi qu’elle tint plusieurs fois dans sa carrière. Elle fut également fille “mauvaise femme”, ambitieuse et sans scrupule dans Manèges (1949), film très noir, le dernier qu’elle fit pour Yves Allégret, dont elle divorça peu après. Après deux ou trois films anglo-saxons sans intérêt, et quelques productions françaises très médiocres, on la retrouva dans La Ronde (1950) d ‘Ophuls et surtout dans son plus grand rôle, Casque d’Or (1951), le chef-d’œuvre de Jacques Becker. Faisant un curieux couple avec Serge Reggiani, elle y était belle, simple et émouvante, dans son personnage de fille du peuple, amoureuse et heureuse de vivre. Malheureusement, ni Thérèse Raquin (1953) de Carné, ni Les Diaboliques (1954) de Clouzot, ni La Mort en ce Jardin (1956) de Buñuel n’eurent la même valeur. Avec un film anglais assez moyen de Jack Clayton, Les Chemins de la haute ville (Room at the Top, 1958), Simone Signoret obtint un Oscar. Puis elle vieillit et changea d’emploi, tirant un parti parfois un peu appuyé des changements physiques apportés par le passage des ans. Mariée à Yves Montand, elle le suivit dans ses prises de position politiques. On lui doit un livre de souvenirs : “La nostalgie n’est plus ce qu’elle était.”
THERESE RAQUIN de Marcel Carné (1953) avec Simone Signoret, Raf Vallone, Sylvie, Jacques Duby, Roland Lesaffre
CASQUE D’OR de Jacques Becker (1952), inspiré de l’histoire vraie d’Amélie Élie, surnommée « Casque d’or », avec Simone Signoret, Serge Reggiani, Claude Dauphin
DEDEE D’ANVERS d’Yves Allégret  (1948) avec Bernard Blier, Simone Signoret, Marcello Pagliero, Marcel Dalio
JEAN MARAIS (né en 1913 et décédé en 1998), grande révélation du cinéma de l’Occupation avec L’Éternel Retour (1943), fut pendant plusieurs années le jeune premier idéal du cinéma français. Son nom demeure étroitement lié à celui de Jean Cocteau, et c’est au cinéaste-poète qu’il doit le meilleur de sa carrière. Prince charmant et monstre émouvant dans La Belle et la Bête (1945), “ver de terre amoureux d’une étoile” dans Ruy Blas (1947), anarchiste épris de sa victime dans L’Aigle à deux têtes (1947), enfant gâté des Parents terribles (1948), poète maudit d’Orphée (1949), cette série de rôles incomparables lui valut une popularité comme il y en eut peu dans le cinéma français. Sa voix étrange et sa blondeur irrésistible en firent l’enfant chéri de plusieurs générations de spectatrices. Tout cela achevait d’irriter une critique qui le bouda longtemps et fut longue à lui reconnaître un talent qui pourtant était réel. D’autres cinéastes que Cocteau surent l’utiliser, de Christian-Jaque (Voyage sans espoir, 1943) à Jean Renoir (Elena et les hommes, 1956) en passant par René Clément (Le Château de verre, 1950) et Yves Allégret (Nez-de-cuir, 1951). Jean Marais se reconvertit ensuite avec bonheur dans le film de cape et d’épée, sous la direction d’André Hunnebelle : Le Bossu (1959), Le Capitan (1960), Le Miracle des loups (1961). Son dernier grand rôle fut dans Peau d’âne (1970) de Jacques Demy.
L’AIGLE A DEUX TETES de Jean Cocteau, adapté de sa pièce éponyme (1948) avec Edwige Feuillère, Jean Marais, Silvia Monfort, Jean Debucourt, Jacques Varennes
LE SECRET DE MAYERLING de Jean Delannoy (1949) avec Jean Marais, Dominique Blanchar, Jean Debucourt, Silvia Monfort, Jane Marken
LE SECRET DE MAYERLING est un film français consacré au drame de Mayerling, réalisé par Jean Delannoy et sorti en 1949 avec Jean Marais, Dominique Blanchar, Jean Debucourt, Silvia Monfort, Jane Marken
MARTINE CAROLE, née Maryse Mourer (1920-1967), fut pendant une dizaine d’années la star d’une période un peu creuse du cinéma français. Blonde, éclatante, un rien de vulgarité qu’excusait un côté bonne fille, elle parut dans de nombreux films, souvent médiocres, mais dont elle assurait le succès. Un succès qu’elle poursuivit pendant des années, entre ses débuts (1943) et sa consécration en 1950, par tous les moyens : un faux suicide, des idylles tapageuses, un grand sens de la publicité. En 1950, ce fut enfin Caroline chérie, assez platement réalisé par Richard Pottier, mais l’héroïne du best-seller de Cecil Saint-Laurent, au prénom prédestiné, semblait avoir été inventée pour elle. Son charme blond, appuyé par des dialogues impertinents d’Anouilh, fit merveille. Plus tard, mariée à Christian-Jaque, elle interpréta pour lui une série de films, bâtis à peu près sur le même principe : Lucrèce Borgia (1952), Madame du Barry (1954), Nana (1955). Ce furent ses plus grands succès commerciaux avec un niveau au-dessus, Les Belles de nuit (1952) de René Clair. Il est permis de juger plus intéressante son interprétation dans un film méconnu de Lattuada, La Pensionnaire (La Spiaggia, 1954). Enfin, elle restera toujours dans le souvenir des cinéphiles, grâce à un seul film, mais quel film ! Lola Montès (1955), le chef-d’œuvre sans égal de Max Ophuls, où, brune pour une fois, elle confirmait un vrai talent qui soutenait une photogénie éclatante. Ensuite, ce fut le déclin rapide, les épreuves, les trahisons de la mode, bref une fin de carrière désolante, dénouée par une mort tragique. On peut encore en extraire un dernier film : Austerlitz (1960) d’Abel Gance, où elle incarnait Joséphine de Beauharnais.
LE DESIR ET L’AMOUR  d’Henri Decoin (1951) avec Martine Carol, Antonio Vilar, Françoise Arnoul
CAROLINE CHERIE de Richard Pottier (1951), avec Martine Carol, adapté d’un roman de Cécil Saint-Laurent avec Martine Carol, Jacques Dacqmine, Marie Déa
LOLA MONTES  Max Ophüls (1955) avec Martine Carol, Peter Ustinov, Anton Walbrook
FRANÇOIS PÉRIER (né en 1919 et mort en 2002), grâce à un personnage charmant de jeune premier fantaisiste, connut une très grande popularité dans les années 40. Entrevu dans Hôtel du Nord (1938) puis révélé au théâtre, c’est sous l’Occupation qu’il devint vedette, avec Lettres d’amour (1942), petit chef-d’œuvre méconnu d’Autant-Lara, Le Camion blanc (1942) de Léo Joannon ou Bonsoir mesdames, bonsoir messieurs de Roland Tuai (1943). Il confirma les mêmes qualités d’esprit et d’intelligence dans Un Revenant (1946) de Christian-Jaque, Le Silence est d’or (1947) de René Clair ou dans Souvenirs perdus, de nouveau avec Christian-Jaque (sketch de Jeanson, 1950). Il étendit, avec un égal succès, son registre vers la gravité avec l’excellent film de Jean Faurez, La Vie en rose (1947) et avec Orphée (1949) de Cocteau, où il fut un étonnant Heurtebise. La suite de sa carrière fut plus décevante sauf Les Nuits de Cabiria (Le notti di Cabiria, 1956) de Fellini, et il se consacra surtout au théâtre où il continue de triompher.
ORPHEE est un film français réalisé par Jean Cocteau, sorti en 1950 avec Jean Marais, François Périer, Maria Casarès, Marie Déa
LE CAMION BLANC est un film français réalisé par Léo Joannon, sorti en 1943 avec Jules Berry, Blanchette Brunoy, François Périer
UN REVENANT – Christian-Jaque (1946) – Louis Jouvet, Jean Brochard, Gaby Morlay, Ludmila Tcherina, François Périer
SUZY DELAIR (née le 31 décembre 1916 à Paris) commença à la fois Comme figurante et Comme chanteuse de music-hall, débutant dans des établissements populaires parfois modestes. C’est dans un de ces lieux qu’il affectionnait que Clouzot la découvrit et prit sa carrière en main, en même temps qu’il allait partager sa vie une dizaine d’années environ. Il la fit débuter à la Continental en 1941, dans Le Dernier des six écrit par lui mais réalisé par Georges Lacombe, puis dans L’assassin habite au 21, qu’il réalisa lui-même en 1942. Dans l’un et l’autre, elle incarnait Mila-Malou, la petite amie volcanique de l’inspecteur Wens, joué par Pierre Fresnay. D’emblée, elle imposa ce personnage “d’une incroyable vulgarité”, qui prenait sous la direction de Clouzot un style assez “flamboyant” (Jacques Siclier). Toujours avec Clouzot, elle eut son plus grand rôle, dans Quai des Orfèvres (1947), celui de la chanteuse Jenny Lamour trépidante sur scène, et dans la vie adorant son “biquet” (B. Blier). Un rôle où elle avait mis beaucoup d’elle-même, de ses souvenirs de début et de sa vie avec Clouzot (on se souviendra de son numéro: “Avec son tralala” ). Elle fut aussi Lady Paname (1949) pour Henri Jeanson, dans sa seule mise en scène, un personnage assez voisin du précédent et la partenaire de Laurel et Hardy dans leur dernier film, Atoll K (1951). La même année elle faisait un duo irrésistible avec François Périer, dans le sketch de Jeanson réalisé par Christian-Jaque pour Souvenirs perdus. Dans le registre dramatique, son plus grand rôle fut celui de la fille cynique de Pattes blanches (1948), chef-d’œuvre encore trop ignoré de Grémillon. Par la suite, il faut encore mentionner Gervaise (René Clément, 1955) et Rocco et ses frères (Rocco e i suoi fratelli, Visconti, 1960). Simultanément, Suzy Delair poursuivait une brillante carrière au théâtre, lyrique particulièrement. Mais on doit regretter que le cinéma français n’ait pas su employer davantage ce tempérament dramatique exceptionnel, fait d’une authentique verve populaire.
QUAI DES ORFÈVRES – Henri-Georges Clouzot (1947) – Louis Jouvet, Suzy Delair, Bernard Blier, Simone Renant
PATTES BLANCHES de Jean Grémillon (1949), avec Suzy Delair, Fernand Ledoux, Paul Bernard, Arlette Thomas et Michel Bouquet
LADY PANAMA est un film français réalisé par Henri Jeanson, sorti en 1950 avec Louis Jouvet, Suzy Delair, Jane Marken
MICHELINE PRESLE est née Micheline Chassagne à Paris, en 1922. Elle connut ses premiers succès au début de la guerre et de l’Occupation avec Paradis perdu (1939) de Gance et La Comédie du bonheur (1940) de L’Herbier. Ce furent ensuite deux films du même, Histoire de rire (1941) et La Nuit fantastique (1942), suivis de deux créations importantes qui ne sortirent qu’après la Libération, Félicie Nanteuil (1942) de Marc Allégret et Falbalas (1944) de Jacques Becker. Jeune fille ou jeune femme, parfois hésitant entre les deux, tous ses personnages sont marqués de sa forte personnalité et d’un talent aussi heureux dans le registre comique que dans le dramatique. Ces qualités se confirmèrent dans le fameux Diable au corps (1946), d’Autant-Lara, ou dans L’Amour d’une femme (1953) de Grémillon. Les Américains la remarquèrent et elle fut engagée à Hollywood où elle ne fit pas grand-chose, sauf “le plus mauvais film de Fritz Lang” (Pierre Rissient). Par contre, elle fut excellente dans un fameux film anglais de Losey, L’Enquête de l’inspecteur Morgan (Chance Meeting, 1959). Longtemps fiancée à Louis Jourdan, elle fut aussi mariée avec Bill Marshall, ex-mari de Michèle Morgan.
BOULE DE SUIF de Christian-Jaque (1945) avec Micheline Presle, Louis Salou et Berthe Bovy
LE DIABLE AU CORPS – Claude Autant-Lara (1947) avec Gérard Philipe, Micheline Presle, Denise Grey, Jean Debucourt
LA BELLE DE PARIS (Under My Skin) Jean Negulesco (1950) avec John Garfield et Micheline Presle
BERNARD BLIER (né en 1916 et décédé en 1989) a imposé sa rondeur joviale dans d’innombrables films. Élève de la classe de Louis Jouvet au Conservatoire, il débute au théâtre et décroche quelques petits rôles au cinéma à la veille de la guerre (Hôtel du Nord, Le Jour se lève). Il atteint le vedettariat pendant l’Occupation, dans plusieurs films où il impose une drôle de silhouette de jeune premier maigre (à cause des restrictions) et au front dégarni. On le découvre ainsi dans L’Assassinat du Père Noël (1941) et La Symphonie fantastique (1941) de Christian-Jaque, dans La Nuit fantastique (1941) de L’Herbier, dans Marie Martine (1942) d’Albert Valentin et dans Les Petites du quai aux Fleurs (1943) de Marc Allégret. Après la guerre, sa silhouette s’épaissira progressivement de film en film, ce qui ne l’empêche pas de garder la vedette jusqu’aux abords de la quarantaine, dans des œuvres aussi diverses que Orfèvres (Clouzot, 1947), L’Ecole buissonnière (Le Chanois, 1948), Sans laisser d’adresse (Le Chanois, 1950) ou Le Dossier noir (Cayatte, 1955). L’âge venu, Bernard Blier deviendra un remarquable acteur de composition, dans les registres les plus variés, passant du drame à la comédie avec le même succès, et ses rôles ne se comptent plus. Il excelle dans la méchanceté où son apparente bonhomie lui permet de saisissantes créations. Il a été plusieurs fois dirigé par son fils, le réalisateur Bertrand Blier Buffet froid 1980.
HÔTEL DU NORD – Marcel Carné (1938) – Louis Jouvet, Annabella, Arletty, Jean-Pierre Aumont, Bernard Blier
LE SEPTIEME JURE de Georges Lautner (1962) d’après le roman de Francis Didelot avec Bernard Blier, Danièle Delorme
QUAI DES ORFÈVRES – Henri-Georges Clouzot (1947) – Louis Jouvet, Suzy Delair, Bernard Blier, Simone Renant
DANIÈLE DELORME (Danièle Girard) a débuté à seize ans, dans de petits rôles que lui confiait Marc Allégret dans ses films. Elle se fit remarquer dès Les Petites du quai aux Fleurs, (1943), aux côtés d’un autre débutant Gérard Philipe. Après quelques silhouettes encore épisodiques dans divers films, elle fit ses débuts de grande vedette grâce à Colette, qui la choisit pour incarner Gigi (1949) dans la version de Jacqueline Audry. Encadrée de deux fameux monstres sacrés, Gaby Morlay et Yvonne de Bray, elle était parfaitement à l’aise, et ce fut la gloire immédiate. Son physique et sa voix de ravissante ingénue, un peu acide, firent merveille dans toute une série de films de valeur malheureusement inégale. A part Miquette et sa mère (1949), seule tentative comique de Clouzot, les meilleurs furent encore ceux de la série de J. Audry-Colette : Minne, l’ingénue libertine (1950) et Mitsou (1956), On peut aussi y ajouter Sans laisser d’adresse (Le Chanois, 1950), La Jeune Folle (Y. Allégret, 1952) et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Duvivier, 1955). D’abord mariée à Daniel Gélin, elle épousa ensuite le réalisateur-producteur comédien Yves Robert, dont elle partage les activités. Productrice avisée, on ne compte plus ses succès. De temps à autre on la retrouve dans un film, toujours étonnamment juvénile, notamment dans les œuvres de son mari (Un Eléphant ça trompe énormément, 1976).
MIQUETTE ET SA MERE d’Henri-Georges Clouzot (1950) – Bourvil et Danièle Delorme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de Julien Duvivier (1956) avec Jean Gabin, Danièle Delorme, Gérard Blain, Lucienne Bogaert, Germaine Kerjean
GIGI de Jacqueline Audry (1949), adaptation du roman éponyme de Colette, Gigi avec Danièle Delorme, Gaby Morlay, Jean Tissier, Franck Villard
DANIEL GÉLIN (né en 1921 et décédé en 2002) a mis près de dix ans avant de devenir un des jeunes premiers les plus aimés du public des années 50. Quasi-figurant à la veille de la guerre, il obtient quelques bouts de rôle, souvent minuscules, pendant l’Occupation. On l’entrevoit ainsi dans Premier Rendez-vous (1941) de Decoin ou dans Lucrèce (1942) de Léo Joannon. Après 1945, ses rôles s’étoffent dans des films secondaires comme Martin Roumagnac (1946) de Lacombe ou Le Mannequin assassiné (1947) de Pierre de Hérain. En 1949, Jacques Becker en fait une vedette, en lui confiant le rôle principal de Rendez-vous de juillet, son grand film sur la jeunesse d’après-guerre. Son succès personnel est très grand, et le pose en rival de Gérard Philipe alors en pleine gloire. Leur confrontation dans La Ronde (1950) d’Ophuls, semble même tourner à son avantage. Plusieurs bons films vont achever de consacrer Daniel Gélin qui, dans la vie, forme avec Danièle Delorme le nouveau couple-vedette du cinéma français. Ce sont d’abord deux délicieuses comédies de Jacques Becker, son metteur en scène fétiche : Édouard et Caroline (1950) et Rue de l’Estrapade (1952). Ce sont aussi le grand succès de Delannoy, Dieu a besoin des hommes (1950), le troisième sketch (Le Modèle) du Plaisir d’Ophuls (1951) et Napoléon de Guitry (1954), dans lequel il incarne Bonaparte jeune. Comme réalisateur, Daniel Gélin a dirigé Les Dents longues (1952), avec Danièle Delorme et lui-même en vedettes, film qui n’était pas sans qualités.
RENDEZ-VOUS DE JUILLET Jacques Becker (1949) avec Daniel Gélin, Nicole Courcel, Brigitte Auber, Maurice Ronet
RETOUR DE MANIVELLE de Denys de La Patellière (1957), adapté du roman éponyme de James Hadley Chase avec Michèle Morgan, Daniel Gélin, Bernard Blier, Peter van Eyck
LA RONDE de Max Ophüls (1950), le scénario du film est tiré de La Ronde, une pièce de théâtre de l’écrivain autrichien Arthur Schnitzler avec Jean-Louis Barrault, Danielle Darrieux, Daniel Gélin, Fernand Gravey, Odette Joyeux, Gérard Philipe, Simone Signoret, Simone Simon
DANY ROBIN (née en 1927) commença par décrocher un premier prix du Conservatoire de danse et se produisit à l’Opéra. Puis elle étudia la comédie et décrocha également un premier prix de Conservatoire. Marc Allégret la fit débuter dans un petit rôle de Lunegarde (1944), puis on la remarqua dans Les Portes de la nuit (1946) de Carné et dans une scène du Silence est d’or de Clair (1946). Le public apprécia rapidement son jeu aigu et son physique de blonde ingénue souriante. Elle forma longtemps un couple idéal avec Georges Marchal, beau jeune premier à la mode, et tourna de nombreux films, où malheureusement les chefs-d’œuvre sont rares. De son abondante filmographie, il faut retenir : Les Amoureux sont seuls au monde (Decoin, 1947), La Soif des hommes (S. de Poligny, 1949) en compagnie de Georges Marchal et de la pathétique Andrée Clément, Deux Sous de violettes (1951), un film réalisé par Jean Anouilh, trop oublié des historiens, La Fête à Henriette (Duvivier, 1952), Julietta (1953), jolie réussite de Marc Allégret d’après Louise de Vilmorin, Frou-Frou (Genina, 1954). Dans Napoléon (1954) de Guitry, elle était Désirée Clary, la fiancée abandonnée de Bonaparte. Plus tard elle fut la partenaire de Peter Sellers, dans un film anglais tiré d’une pièce d’Anouilh, Les Femmes du général (The Waltz of the Toreadors, 1962). Elle fut aussi une des rares Françaises à avoir l’honneur d’être dirigée par le grand Hitchcock dans L’Etau (Topaz, 1969).
LA FETE A HENRIETTE de Julien Duvivier (1952) avec Dany Robin, Michel Auclair, Michel Roux, Henri Crémieux, Louis Seigner
LES AMOUREUX SONT SEULS AU MONCE d’ Henri Decoin (1948) avec Louis Jouvet, Dany Robin, Renée Devillers
JULIETTA de  Marc Allégret (1953) avec Jean Marais, Dany Robin, Jeanne Moreau, Denise Grey
A voir également
VISAGES FAMILIERS DU CINÉMA FRANÇAIS (partie 1)
  Ce n'est pas le moindre des paradoxes de l'Occupation à de nombreux jeunes acteurs de se révéler au public. La plupart rapidement au vedettariat au cours des années 50, mais si on excepte quelques chefs-d’œuvre fulgurants, Ils seront souvent mal employés. Ce n'est pas le moindre des paradoxes de l'Occupation à de nombreux jeunes acteurs de se révéler au public.
4 notes · View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