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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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고질적인 히스테리는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다. 출산기계로서의, 자궁으로서의 자신의 육체성에 대한 부정이 히스테리의 근원이다.
남성의 전형적인 폭력성은 반면 심신 이원론의 원리를 철저히 수용하는 것에서 나온다. 대가리와 ㅈ대가리 사이에 놓인 심연의 이분법��� 대해 철저히 복종할때 남성은 세상의 주인이 된다. 아무튼 여성은 자궁과 자아의 분열에 대해 깊은 우울에 빠지는 반면 남성은 좆과 뇌의 대결에서 딱히 승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관념론적 명제는 역으로 생각하지 않는 비존재로서의 본능적 육체성을 비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바이지 않을까? 따라서 근대적/모더니즘적/남성적 모델의 훌륭한 사상적 토대가 되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이성적 동물이 결코 아니며 이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자랑이다. 동시에 그녀의 한계이다.
관념과 현실의 차원은 뒤집혀져 물구나무선채로 다음과 같은 역설을 바라본다: 현실에서 여성의 무기력한 수동성은 거부할 수 없는 생물학적 사실에 대한 관념적 저항에서 나온다. 남성의 능동성은 외려 그에 대한 철저한 복종에서 나온다. 여성의 신경질적 투쟁은 남성의 즐거운 복종을 이길 수 없(었)다.
내친김에 조금 더 먹물을 끼얹자면, 주어진 자연적 사실에 복종하는 존재를 동물로 간주하고, 반대로 자연에 대한 부정성을 통해 투쟁해가는 존재를 인간으로 정의했던 헤겔학자 코제브의 도식에 따르면,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는 도덕적 존재가 될수있다.
남성은 자신이 알고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모르고, 여성은 자신이 이미 알고있는 사실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론적 무지야말로 현실세계에서 남성이 가진 권력우위이다(부럽다?). 그리고 상당수 남성들이 베이스로 깔고 있는 여혐의 본능적 토대가 아닐까한다 '저기 자궁이 말한다!'고 그들은 정확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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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La colegiala) 노래에 관한 메모
얼마 전 하이페리온 앙상블에서 루벤 펠로니가 노래한 '여학생 & 미국인이 되고프냐 메들리'를 링크한 김에 잠깐 덕질력이 발동돼서.
'여학생'은 1935년에 만든 '남자를 타도하라(=Abajo Los Hombres)'라는 페미니즘 계열 영화 주제곡이었고, 작곡자는 안또니오 마타스(Antonio Matas)란 인물이고 '안또니오 마타스와 리듬들(=Antonio Matas Y Su Ritmo's)'이란 악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왠지 '인순이와 리듬터치'가 떠오르네)
영화에 직접 출연해 노래한 가수는 까르멜리따 오베르트(Carmelita Aubert)란 분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912년에 태어났다. 영화 제작자는 발렌틴 곤쌀레스(Valentín R. González)라는데 'CNT-FAI'라는 아나키스트 연합에서 활동할 정도로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 영향이 아닐까 싶은데 오베르트 역시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페인 정부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 원곡이 따로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한 '성 제임스 병원(=St. James Infirmary)'. 다른 제목으로 '도박꾼 블루스(=Gambler's Blues)'. 마타스가 표절한 건지 다른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서도.
끝으로 AI에 요��한 '여학생' 가사 전문. 참고로 하이페리온 앙상블 가사와는 다르다. (남자 가수가 부를 수 있는 내용이 아님)
-=-=-=-=-=-=-=-=-=-=-=-=-=-=-=-=-=-=-=-=-=-=-=- Yo soy una pobre colegiala, que jamás salí de su pasión, por doquier y siempre tuve a gala, ser la dueña de mi corazón. 나는 가난한 여학생, 한 번도 내 열정에서 벗어난 적 없어. 어디서든, 항상 자랑스러웠어. 내 마음의 주인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Estudié la físigeografía, la retórica cursé en un mes, del violín conozco la armonía, y además un poquito de francés. 지리와 물리도 공부했고, 수사학은 한 달 만에 끝냈어. 바이올린의 화성도 알고 있고, 거기다 불어도 조금 할 줄 알아.
Nunca tuve amores, del amor no sé el sabor, pero quiero a un hombre, que me diga qué es amor.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사랑이 어떤 맛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걸 알려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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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주입시켜주실 여왕님구해요..✌️❤️✌️
넷카마도 받아요 넷카마여도 여자인척해주세요..
트윗에서왔어요
라인:serimom
또는 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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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ecommend you guys read this article to know better about the game workplace within korea
monggeu participated in the interview
#project moon#its so fucking horrible#principally the part where female workers are asked to sign a contract where they wont post anything too “controversial” in their sns#but male workers dont receive the same contract#feminism#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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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페미니스트들의 호소에 응답하자!🇵🇸🇵🇸
"파업을 일으키는 것은 가자 학살을 지지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와 전략적 목표를 뒤흔들 정도의 풀뿌리 조직화와 전략적 계획표가 필요한 큰일이란 점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페미니스트 집회가 전세계의 도시들에서 일어날 것이란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집회시위들이 식민주의의 목소리나, 여성권의 문제를 가자의 학살을 정당화하고 시온주의 정치체의 범죄들을 소위 “핑크워싱에 사용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로 점철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상기한 주장들이 시온주의 정치체가 일으키는 집단학살 전쟁의 필연적 결과로 발생된 가자지구 여성들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침해의 문제를 묵살하는 추악한 행태 역시 거부하는 바이다. ... 3.8 여성의 날에,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적 통치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범세계적 총파업을 함께 조직하자. 3.8 여성의 날을 가자에 대한 집단학살 전쟁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시온주의 정착민 식민주의 기획을 끝장내고자 하는 운동을 심화, 확산하는 하루로 삼자. 3.8 여성의 날까지 선전, 선동에 힘쓰고 일상의 평온을 뒤흔들면서, 가자의 여성들 없이는 페미니스트 투쟁도 없다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이 세상에 각인시키자! (호소문 중)"
👉가자지구를 위한 파업을 촉구하는 페미니스트 호소문 전문 보기[링크]
👉2024 3.8 여성파업 조직위원회는 위 호소문에 응답하며 다음 행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3.8 여성의날 이전에 인증샷 캠페인>
▷집중기한 : 3월 5~7일 ▷방법 : 인증샷 이미지와 함께 사진을 찍고 SNS에 아래 해시태그와 함께 올려주세요.
#freepalstaine #womenstrike #WomenStrike4Gaza #womenstrikeforpalestine #StopTheGenocide #팔레스타인연대여성파업 #여성파업
via
#freepalstaine#womenstrike#WomenStrike4Gaza#womenstrikeforpalestine#StopTheGenocide#팔레스타인연대여성파업#여성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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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미국과 거래하는 모든 회사는 여성할당제를 없애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지시했단다. 돈 앞에는 장사 없다고 유럽의 대기업들도 손해를 안 보려 여성할당제를 폐지하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기업의 비율이 매우 높으니 사실상 전세계 여성의 권리가 후퇴 중인 것이다. 이제 더이상 남의 나라 얘기라며 웃을 일이 아니다. 한국처럼 보수적인 국가들이야 예전과 큰 차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인권과 평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던 기업들마저 이익 탓에 무너진다면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국가와 이에 속한 기업들은 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테니 여성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매한가지이다. 트럼프는 여성에게 재앙 그 자체인 새끼인데 그래도 이 새끼나 혹은 비슷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여성이 많다. 단지 트럼프가 트랜스젠더를 부정하고 성별이분법을 강화했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여성이 늘어난 탓이다. 얼마 전 트럼프는 군에서 복무 중인 트랜스젠더를 강제 전역시키기도 했다. 그 자리를 여군이 채울까. 일부러 남군을 세워서 여군의 비율을 더 줄이겠지. 아, 그 전에 동성애자부터 색출할지 모르겠다. 트럼프 임기 동안 동성 결혼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일부 주는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제약을 가한 직후 동성 결혼도 불허했다) 예측이 있어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데 설마 싶겠으나 임신중단권도 뒤집은 마당에 현 미국 연방대법원이 무슨 짓인들 못할까.
트랜스젠더 권리 박탈, 성별이분법 강화→동성 결혼 무효화→여성 권리 후퇴 이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는데 슬슬 눈치챈 여자들은 트랜스젠더가 밀리면 우리도 밀리는 거라는 현실을 알아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여자들이 트랜스젠더가 무슨 상관이냐,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어, 우리는 그들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 차라리 총 든 시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와 우리를 지켜주는 편이 낫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요사이 자주 목격되는 상황이다) 이딴 망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속았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그리 힘드냐. 젠더 전쟁에서 트랜스젠더가 최전선에 있으니 권력을 유지하려는 남성들은 당연히 최전선을 공격하려 하고 각종 미디어를 동원해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을 강화, 공포를 유발함으로써 최전선을 무너뜨리기에 성공한 것이다. 다른 성소수자들도 깍뚜기로 쓸려가고 있는데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성소수자 중에도 트랜스젠더를 외면한 이들 많았잖아. 특히 시스 레즈비언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트랜스젠더 추방에 목소리를 높인 자가 적지 않았다. 대놓고 소리지르지 않았어도 방관한 자 또한 많았다. 언제는 트랜스여성이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더니 막상 성별은 여자와 남자 둘뿐이라 하지 않나, 트랜스남성이 소녀들을 혼란스럽게 해 성전환으로 유도함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며 트랜스남성이 트랜스여성에 비해 가시화되지 않는데, 이는 트랜스여성이 남성 권력을 갖고 있어서라는 모순을 동시에 내뱉고 너희들 머릿속 교통 정리나 해라.
이런 비생산적인 말싸움만 하면서 최전선이 무너진 뒤 그 다음 후방이 공격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조차 이해를 못하면 페미니즘이고 뭐고 때려치워. 이미 페미니즘 따위 잊고 아무말 대잔치 하는 데 중독된 상태 아닌가. 남성 권력이 여성과 소수 집단에게 가하는 실질적 위협을 막기에 다함께 총력을 모아 방어해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이 나라는 웬 레즈비언 연애 프로그램에 벗방한 사람 한 명 나왔다고 난리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남자들은 아무 타격 없이 돈까스, 제육볶음 타령이나 하고 있지. 페미니즘 리부트 때부터 무언가 어긋났어. 최근에 당시를 회상하며 트랜스젠더를 두고 페미니즘 진영이 갈라진 사건이 오늘날 퇴보를 불러왔다고 지적하며 자성을 촉구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나도 마음같아서는 그때로 돌아가서 강력하게 외치고 싶다.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루머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라고! 미러링은 별 효과 없고 페미니즘을 깊게 사유하여 실천할 기회를 앗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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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주데(Radu Jude)와의 인터뷰 :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에 관하여

지난해 로카르노 영화제 폐막식에서, 라두 주데와 나는 레드카펫 입구에 모인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여성. 삶. 자유 Woman Life Freedom”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2022년 이란 여성들의 봉기를 상징하는 구호��다. 그날 아침, 주데는 자신의 신작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황금표범상은 이란 감독 알리 아흐마드자데의 <크리티컬 존 Critical Zone>이 차지했다. 무대 매니저의 큐를 기다리며 바리케이드 뒤에 서 있던 주데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도 자기 차례 올 때까지 줄을 서 있었겠어요?” 몇 분 뒤, 우리는 피아차 그란데 앞에 섰다.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고, 현수막을 찍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우리 머리 위 거대한 스크린에는 UBS라는 스위스 은행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은, 영화제 내내 화제가 되었던 주데의 신작에 어울리는 결말처럼 느껴졌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정치가 하나의 평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스펙터클로 작동하는 포스트모던 현실의 아이러니를 정제된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중심 줄기는 안젤라(일린카 마놀라케 분)라는 인물을 따라간다. 그녀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부쿠레슈티 전역을 누비며 독일 자본의 가구 공장에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을 캐스팅하러 다닌다. 목적은 ‘산업 안전 영상' 출연자를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영상은 교묘하게도 해당 기업의 면책을 위한 도구다. 안젤라는 동시에 ‘보비차(Bobita)’라는 조악한 인스타그램 캐릭터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한데, 이 캐릭터는 앤드류 테이트를 패러디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가 로카르노에서 첫 상영된 날, 앤드류 테이트는 부쿠레슈티에서 가택 연금 해제 조치를 받았다. 그녀의 무한 질주와 분투는 1981년 루치안 브라투 감독의 영화 <안젤라, 계속 달려요 Angela Moves On>와 교차 편집되며 이어진다. 이 영화는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독재 시절, 여성 택시운전사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는 아주 빽빽한 레퍼런스들 중 일부 미디어 아티팩트만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우리의 세계화된 세상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열린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막다른 골목임이 드러나는 미로라는 것을 보여준다.<불운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처럼, 이번 영화도 불쾌하고 거칠다. ���대의 장면들은 날카로운 흑백 하이 콘트라스트로 찍혔고, 일상적인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무딘 장갑 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풍자 예술가나 ‘더러운 좌파’들이 진정성 대신 아이러니 속으로 숨는 반면, 주데는 그 모든 장면 속에 진짜 연민과 감정의 깊이를 새긴다. 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유머 뒤에 감춰진 현실의 날카로움에 찔려 상처 입고 나올 것이다. 그의 농담은 아무리 기상천외해 보여도 실제 세계에서 뿌리를 뽑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 폐막식 하루 전 아침, 라두 주데와 긴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그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영화의 중심 모티프인 ‘운전하는 여성’에 대해 묻고 싶어요. 당신은 이미 이 모티프를 영화의 ‘척추’처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후에 같은 모티프를 가진 오래된 영화를 찾았다고 들었어요. 운전은 지저분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에서도 중요한 요소였고, 자동차는 영화에서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잖아요—안이면서도 밖이고,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니까요.
맞아요. 그리고 이 영화의 두 번째 파트에서는, 그 남자가 자동차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죠.
흥미로워요. 자동차는 후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끊임없는 이동’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1981년의 영화에선, 그것이 오히려 자율성과 독립성의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혁명 이후 시대에 자랐어요. 그때는 외국 영화 제작사들이 루마니아에 들어와서 싼 노동력과 저렴한 로케이션을 이용해 영화를 찍곤 했죠. 루마니아 영화계의 훌륭한 기술자들은 그 현장들에서 훈련받았고, 저 역시 수년 동안 그런 현장에서 일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문득 그 경험들이 어떤 ‘전형적인 힘’을 지닌 이야기들이라고 느껴졌어요. 그것들은 포스트 전체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거든요. 차우셰스쿠 독재가 끝난 후,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고, 당국은 “자유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말했죠. 말만 들으면 아주 근사하잖아요. 자유로울수록 더 나아질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죠. 어떤 건 정말 그렇게 돌아가지만, 어떤 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요. 시장을 완전히 풀어두면, 결국 모든 게 사고파는 대상이 되어버려요. 공원이든, 학교든, 의료든, 원래 공공의 것이었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죠.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야기 중 하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한 한 프로덕션 어시스턴트의 실제 사례예요. 저는 처음부터 도시를 배경으로 한 로드 무비를 만들고 싶었고, 루마니아에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돈 드릴로의 소설 <코스모폴리스>도 생각났죠. 제 영화의 전반부는 마치 <코스모폴리스> 같아요. 하지만 여긴 리무진을 탄 백만장자가 아니라, 형편없는 고물차를 타는 노동계급 여성이 주인공이죠. 그녀의 삶 전체가 그 자동차에 달려 있어요.
로드 무비는 보통 자유를 향한 여정이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장르를 어느 정도 뒤집는 것 같아요.
맞아요.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이지 라이더 Easy Rider> 같은 영화들 말이죠. 제 영화에서는 그 여정이 '노동'과 연결돼 있어요. 고다르가 말했듯이, 영화 속에선 ‘노동’을 거의 볼 수 없잖아요. 노동이 개입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자유가 아니게 되죠. 이건 마치 심사위원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해요. 영화 보는 건 즐겁지만, 심사위원 자격으로 앉아 있으면 상황이 달라요. 만약 영화가 별로인데도 5분 만에 나갈 수 없다면… 그건 고문이 될 수도 있죠.
노 코멘트 할게요!
노 필름 코멘트! (웃음) 저는 루치안 브라투의 영화 <안젤라, 계속 달려요 Angela Moves On, 1981>를 봤어요. 처음에 보면 그렇게 전복적인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각본을 쓴 사람이 에바 시르부라는 여성 작가였고, 요즘 젊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읽어요.여성이 운전하고, 전형적인 남성 직업을 수행하며, 그 일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물론 영화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지만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는 전복적인 요소들이 꽤 많아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게요. 주연 배우인 바실레 미스케는 헝가리인이에요. 차우셰스쿠 정권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고, 헝가리계 소수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그래서 헝가리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자체로 전복적 행위였어요. 하지만 그의 이름은 크레딧에서 바뀌었죠. 진짜 이름은 라슬로 미스케(László Miske)였지만, 영화 크레딧에는 바실레 미스케(Vasile Miske)로 나왔어요. 제가 그에게 왜 그렇게 됐는지 물었더니, 당시 검열 당국과 큰 논쟁이 있었고, 결국 “루마니아 농민 같은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영화에서는 그 가짜 이름에 줄을 긋고, 진짜 이름을 다시 표기했어요.
당신 영화들에는 항상 ‘영화’나 다른 미디어 오브제들이 실질적인 정치의 매개로 등장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 The Happiest Girl in the World, 2009>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건 광고 촬영에 대한 영화잖아요.
맞아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의 후반부에서도 그때와 같은 촬영팀과 다시 작업했어요. 거의 리메이크처럼 느껴졌죠.
와, 정말요? 생각해보면 감독님은 다양한 미디어 오브제들을 같은 레벨 위에 올려두는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 안에서도 감독은 4K 촬영을 고집하고, 온갖 ‘고급 예술’ 레퍼런스를 인용하잖아요.
그런데 결국 엉망진창인 걸 만들죠.
맞아요. 그는 멜리에스가 겨자 광고를 찍었고,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도 자기네 공장을 홍보하는 광고였다고 말하죠. 당신은 영화와 광고, 심지어 <불운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에서는 소셜미디어와 섹스 테이프까지—이 모든 걸 하나의 이미지 스케이프 안에 넣잖아요. 그 접근에는 어떤 ‘수평성’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선,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매체에 상관없이 전부 동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걸까요?
맞긴 한데, 좀 더 뉘앙스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이 이론은 굉장히 풍부하고 매력적이긴 한데, 위험하다고까지는 아니어도, 그만큼 정확하진 않기도 해요. 아마도 당신이 프로그래머이자 평론가니까, 그 관점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감독이고, 동시에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에요. 그래서 이미지를 볼 때도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작동해요. 관객으로서 저는 움베르토 에코가 했던 말을 떠올려요. “중요한 건 무엇을 연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구하느냐다.”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상관없어요.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게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제가 창작자의 입장이 되면, 이미지를 만든다는 건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비평은 어떤 것이든 다룰 수 있지만, 창작에 있어서는 모든 게 모델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브라투의 영화나 연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분석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에도 흥미로운 점은 있죠. 이게 제 방식이에요. 리처드 브로디의 책 제목처럼, “모든 것이 시네마다.” 그런 도구들로 세상을 보면, 세상 전체가 영화처럼 보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관련 일화 중 하나는, 나움 클레이만이 에이젠슈테인의 책장에 대해 이야기한 거예요. 그 책장엔 책들이 제목이나 분야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대요. 대신 몽타주의 원리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죠. 그래서 나폴레옹 전기 옆에 유전적 돌연변이 관련 책이 있었고, 율리시스 바로 옆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었대요. 그 책장이야말로, 그가 찍지 못한 가장 위대한 영화들이었던 거죠.
저는 뭐든 다 봐요. 부쿠레슈티 지하철에 있을 때도, 거기 TV에서 나오는 광고를 보거나, 웹캠 화면을 들여다봐요.
그렇다면 감독님에게 ‘영화’만의 고유한 특성이란 뭘까요?
전 정말 단순하게 생각해요. 현실을 기록하고, 그걸 움직이는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 그게 영화죠.
하지만 그건 광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맞아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그 모든 게 영화의 한 형태예요.
광고도 영화라고 믿는 건가요?
그럼요. 움직이는 이미지라면 그건 영화예요. 물론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면 ‘어떤 게 더 낫다, 못하다’를 따지겠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요. 그래도 공통의 기준이 있다면, 대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누군가와 그런 얘기를 하다가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영화인’이라고 하긴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제가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를 내 인생에서 본 영화 중 가장 끔찍한 영화 중 하나, 그리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를 “멍청이”라고 했어요. 자긴 그 영화를 보고 울었는데, 어떻게 그게 나쁜 영화일 수 있냐는 거죠.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감동을 줬기 때문에 좋은 영화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 더 이상 논쟁은 불가능해요. 그 사람이 자신만의 버블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어제 우리가 바비(Barbie) 얘기하면서, 감독님이 그 영화는 광고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잘 만든 광고요! (웃음)
그리고 당신은 요즘 광고에 대한 영화, 포스트-차우셰스쿠 시대의 광고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들었어요.
네, 이미 완성됐고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이에요. 철학자인 크리스티안 페렌츠-플라츠와 함께 만들었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광고’라고 부르는 게 비하적 의미인가요? 무언가를 팔기 위해 만든 이미지도 영화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건 단지 ‘설명하는 말’일 뿐이에요. 예술의 역사를 보면, 화가들도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광고를 그렸잖아요. 그러니 그 자체가 부정적인 건 아니죠. 물론 질문이 “그걸 좋아하냐, 아니냐”로 바뀐다면 다른 문제겠지만요. 루마니아의 젊은 평론가들과 영화감독들이 바비가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걸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영화에서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단어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어떤 어린 소녀가 그 단어를 처음 듣고, 관심을 갖게 되고, 주디스 버틀러를 읽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아요. 예전엔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라는 영화를 정말 싫어했어요.
전 15살에 그 영화 정말 좋아했어요.
그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이런 식으로 얘기했죠. 이 영화 덕분에 젊은 세대들이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듣게 됐고, 이제 서점에 가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게 될 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여긴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의 행성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영화가 ‘최소 공약수’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버틀러를 읽게 하고 싶다면, 단지 “가부장제”라는 단어 하나 알려주는 게 목표가 되어선 안 되죠. 정말 버틀러를 읽게 하고 싶다면, 그녀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참 악순환이에요.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를 때도 있죠. 저는 특히 루마니아에서 엘리트주의적 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요. 하지만 제 대답은 이래요. 저는 오랫동안 상업 방송에서 일해온 사람이에요. TV 쇼부터 홈쇼핑까지, 살 빼는 벨트 광고 같은 것도 다 찍어봤어요. 회의가 열리면, 윗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죠: “우리 시청자들은 멍청한 가정주부, 알코올 중독자, 한심한 놈들이야. 그러니까 그들한테는 쓰레기를 던져줘야지.” 그게 어떤 사람들에겐 관객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감독이 “나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말할 때, 그게 오히려 엘리트주의처럼 들려요. 관객을 열등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관객이 바보라서 제가 말하는 걸 이해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게 엘리트주의라면, 저는 대중을 경멸하는 사람보다는 그런 엘리트가 낫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안젤라는, 자신이 보비차로서 하는 말들에 대해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녀는 그건 풍자(satire)라고 답하죠. 근데 제가 흥미롭게 느낀 건, 그걸 풍자로 만들어주는 게 그녀의 말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필터의 조악함, 그 글리치 자체라는 점이에요. 이 불완전한 시뮬레이션 덕분에, 안젤라는 앤드류 테이트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할 수 있었죠. 그건 감독님의 영화의 방식과도 비슷하다고 느껴져요. 감독님의 영화들은 종종 비판하려는 대상을 영화 안에서 구현하면서도, 그게 비판이라는 걸 관객이 잘 못 알아챌 수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영화 속 어떤 인물은 로마니인(Romani people)에 대해 정말 끔찍한 말을 해요.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오히려 용기를 얻을 수도 있죠. 그럴 때, 이미지를 어떻게 와해시키고, 그것을 스스로 반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저는 ‘풍자(satire)’보다는 ‘캐리커처(caricature)’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요. 캐리커처에는 사실주의가 없어요. 과장된 표현이 너무도 명백해서, 그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방식 자체가 비판이 되는 거죠. 물론 당신이 말한 ‘불완전함’의 효과도 그런 비판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해요. 하지만, 필터가 완벽했다 해도 영화 전체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이미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맥락 속에서만 존재하거든요. 그 맥락에서 떼어내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죠.
제가 만든 영화 중에 <기차의 출구 The Exit of the Trains, 2020>라는 작품이 있어요. 루마니아 홀로코스트의 사진들로 구성된 영화죠. 그 영화에는 20분 가까이 이어지는 학살 장면이 나와요. 공동작업을 한 역사학자 아드리안 치오플란카가 사진을 찾다가 우리는 정말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학살 장면이나 폭력 이미지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누가 이런 이미지를 영화에 썼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걸 즐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제가 생각하기엔, 영화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경계의 끝을 시험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실험을 현실이 아닌, 예술의 맥락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럽 펀딩 위원회에서는 제 영화가 좋다고 하면서도, 보비차의 영상은 전부 빼달라고 했어요. 그 장면들이 이야기 전개에 아무 기여도 안 하고, 영화는 그 없이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저속함(profanity)'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궁금해요. 특정한 욕설 말고, ‘신성하지 않음’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서요.
음... '저속함(vulgar)'이라고 해볼까요.
저는 '저속함'보단 ‘신성하지 않음’, 그러니까 ‘성스러움의 반대편’, 그 개념 자체에 더 관심이 있어요.
신전 밖에 있는 것들이죠.
맞아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신성한 게 단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조롱당하죠. 최근에 죽은 고다르에 대한 농담도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그걸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한텐 고다르는 거의 신 같은 존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은 그를 조롱하죠. 그게 저는 감독님의 영화의 ‘신성모독성’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져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지적인 조잡함(intelligent crudeness) 같은 게 있어요.
저는 일반화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정말 웃을 수 없는 것들도 있고, 그건 결국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저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을 향해선 저속하게 굴지 않으려고 신경 씁니다.
그러니까, ‘펀치 다운(punching down)’은 하지 않는다?
맞아요. 그건 제가 절대 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고다르의 경우엔, 그는 스스로를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는 조력자살을 택했죠. 루마니아는 매우 종교적인 나라라서, 그가 그렇게 죽었을 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하냐”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입장에선, 그건 고다르다운 농담 같았어요. 최후의 농담. 저는 진심으로 믿어요. 예술은 더 많은 것들이 시험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하고, 정치 담론에서 요구되는 조심성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해요. 일상 윤리를 예술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술의 90%는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캔슬 컬처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에요. 전 캔슬 컬처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매일 마음속에서, 실천 안에서, 보는 것과 읽는 것 안에서 사람들을 캔슬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모두를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 대해 묻고 싶어요. 루치안 브라투의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어떻게 연결됐나요?
어렵진 않았어요. 옛 영화에서 안젤라 역할을 맡았던 도리나 라자르(Dorina Lazar)는 루마니아에서 워낙 유명한 배우고, 연극도 많이 해요.
그녀의 반응은 어땠어요?
그건 말할 수 없죠. 왜냐하면… 우리가 그녀를 살짝 속였거든요. (웃음) 그녀가 그러더라고요. “당신 영화들 스타일 아는데, 저속한 건 안 나가요.” 그래서 제가 “걱정 마세요. 저속하지 않아요”라고 했죠. 지옥에 가서 벌 받겠네요. (웃음)
그럼, 감독님의 영화에서 ‘저속함’의 역할은 뭔가요?
그건 사회에 대한 반영이에요. 제 기준엔 ‘저속함’이라는 건 없어요. 타인을 착취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만이 문제죠. 예컨대 포르노도, 상호 합의된 관계라면 도덕적 의미에서 '음란물'이라고 할 수 없어요. 저에게 진짜 저속한 건, 권력을 이용해 누군가를 굴욕시키는 거예요. "씨발"이나 "창년" 같은 단어보다 훨씬 더 저속하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겐 그 반대예요. 그래서 여전히 ‘저속함’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쾌감을 주는 힘을 가진 말이에요.
결국, 도리나를 속인 거네요?
안 그랬으면 그녀는 절대 출연 안 했을 거예요. 그녀가 “대본 볼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제가 “음... 이건 즉흥적인 영화라 대본이 없어요.”라고 했어요. 그녀는 제가 쓴 대사 중 하나는 끝내 거절했어요. 그 장면은 젊은 안젤라가 늙은 안젤라에게 “공산주의 시절은 어땠어요?”라고 묻는 장면이에요. 실제 있었던 배우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분은 예전 인터뷰에서 “50년대는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말했대요: “50년대는 최고였지. 매일 발기했거든.” 근데 도리나는 그 대사를 절대 못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그 대사 진짜 좋았는데!
출처 : https://www.filmcomment.com/blog/interview-radu-jude-on-do-not-expect-too-much-from-the-end-of-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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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무비나잇
호러영화를 여러개 봤다
첫 째로 스크림, 둘 째로는 컨저링, 셋 째로는 제인 도...
개인적으로 컨저링은 호러물에서 사랑 논하고 가족애 논하고 인류애 논하는게 살~ 짝 짜쳤다... 그리고 추가로 실화 기반이라고 해놓고는 실제와는 별로 관련없이 워렌 부부 뽕빨물 같아서 흥미가 식음... 오히려 감독의 연출 실력이 훨씬훨씬 돋보이는 영화...
스크림은 뭐 슬래셔다 보니 좋아하지 않는게 더 힘들음 ㅋㅋ 슬래셔 연출 자체가 공포 영화의 정수 같아서... 그래도 플롯 트는거나 페미니즘 영화인가 싶을만큼 활약해준 여기자랑 시드니가 섹시하고 멋져보였다... 특히 첫경험 상대가 싸이코 살인마 였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 것 같은 그 연출 자체로 첫 경험이 그다지 좋지 못한 나에게 위로가 되었음
제일 흥미로웠던건 제인 도!
잘 만들어진 Coc 호러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았음... 생각보다 평점이 좋지 않아서 찾아봤는데, 특유의 Coc 전개, 뭐랄까... 알고보니 오컬트적으로 이랬답니다 하는 판타지 진상 공개식 플룻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이 이런 부분에서 어색해한듯... 나는 사건이 전개되는 맵 자체가 작아서 그런가 유난히 티알피지 플레이하는걸 지켜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음... 물론 자료조사한거랑 진상이랑 완벽히 매치된 느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진않고이거말곤답이없으니어림잡아때려맞춤) 그래도 나이스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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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체성을 소유하는 대신 사용해야 하는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메모
왜 정체성을 소유하는 대신 사용해야 하는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메모
이연숙(리타)
1.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1977년 미국의 컴바히강 콜렉티브The Combahee River Collective라는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단체의 선언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사회주의자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이들은 “인종 억압, 성 억압, 이성애 중심주의, 계급 억압”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인 분석 및 실천의 계발”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들은 이런 “억압의 총합이 우리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고 썼다.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로서는 백인 여성과 다르고, 반인종주의자로서는 흑인 남성, 백인 남성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억압의 경험이 바로 ‘흑인 여성’의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받는 [추상적] 억압”을 없애기 보다 지금 자신들이 흑인 여성으로서 겪고 있는 억압을 분석함으로써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이 가능하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겪는 억압에 초점을 맞춘” 정치학, 이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의 정의다. 이들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흑인 여성이 “떠받들어지는 것, 여왕 대접, 열 걸음 뒤처져 걷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당연하게도)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되기 위함이다. “흑인 여성 해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우리에게 충분히 관심을 갖는 이들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는 통렬한 현실 인식은 이들로 하여금 다른 누구도 아닌 흑인 여성이 겪는 특수한 억압의 경험을 동력으로 삼는 정치를 고안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최근 많은 이들이 정체성 정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자신들의 정체성만이 중요하고 다른 이들의 정체성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이들은 인종 억압, 성 억압, 계급 억압과 같은 “모든 억압이 우리 삶에 동시에 들이 닥친다”는 것을 강조하며 각각의 억압이 어떻게 다른 억압과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흑인 여성이 어떻게 다른 억압 받는 존재들과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역설했다.
이들은 특히 (레즈비언들이 이성애자 여성, 남성과 극단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레즈비언 분리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주의는 너무나 많은 것과 사람들, 특히 흑인 남성들, 여성들, 어린이들을 뒤에 남겨둔다. (...) 분리주의는 다른 어떤 것은 무시한 채, 계급과 인종의 문제를 부정하고 여성 억압의 성적 근원만을 찾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시에 작동하는 억압들” 중 “다른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고자 했고, 오히려 “여성들, 제3세계인들, 노동자들의 삶에 지장을 주는 어떤 상황이든 개입”하려 했다. 『오인된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정체성 정치를 중심에 둔 대중 운동을 비판한 저서를 쓴 아사드 하이더는 당시 컴바히강 콜렉티브에게 정체성 정치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컴바히강공동체에게 (...) [정체성 정치는] 정치가 정치와 연관된 개인들의 구체적 정체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라는 개인의 특수한 권리를 위해 정체성 정치를 고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교차성을 분석함으로써 주류적인 프레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이해하고 또한 그러한 이해에 뒤따르는 저항적 실천을 구상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고안한 것이다. 아사드 하이더는 컴바히강 콜렉티브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데미타 프레이지어의 회고를 인용한다. “저는 컴바히강공동체나 제가 참여했던 여타 흑인 페미니스트 단체가 오로지 우리 흑인 여성에게 관심있는 이슈만 주목해야 한다거나 레즈비언/바이섹슈얼 여성으로서 오로지 레즈비언의 이슈만 주목해야 한다고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정말 중요하게 기록해야 할 점은, 컴바히강공동체가 한 지역에 가정폭력을 겪은 여성들을 위한 대피처를 세우는 일에 공헌했다는 점입니다. (...) 저희는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연대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대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이해 혹은 감각은 정체성 정치라는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서는 더 큰 것, 이를테면 ‘공동체’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서 고안되었음을 증거한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다시 읽는다. 정체성은 ‘나’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대피처”로 사용될 수 있을 때에만 유용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체성 정치의 위험과 쓸모를 일찌감치 생산적으로 논의한 더글라스 크림프의 글인 「당신에게 동의해요, 걸프렌드」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1991년 쓰여진 이 글은 『셀룰로이드 클로젯 Celluloid Closet』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활동가이자 영화사가 비토 루소의 장례식에서 출발해 ��성애자 권리 운동의 역사와 전략을 거쳐 <양들의 침묵>의 동성애 혐오적 재현과 해당 영화의 주연인 조디 포스터에 대한 레즈비언과 게이의 상반된 반응을 예리하게 분석한 뒤 종국에는 ‘정치적 동일시’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결론으로 끝맺는다. (유명인 클로짓 동성애자를 아웃팅 시키는) ‘아웃팅 outing’과 (동성애 혐오 표현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맞받아치기 bashing back’라는 동성애자 운동의 전형적인 저항 전략을 넘어서, 그리고 (조디 포스터에 대한 상반된 반응으로 요약되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본질적이라 가정되는 입장 차이를 넘어서, 퀴어 정치학은 어떤 방식으로 공동의 전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가 아닌 정치적 목표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가 가능한가? 그는 어떤 연예인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를 두고 열띤 가십을 나누는 부치들을 예시 삼아 정체화란 언제나 타자와의 동일시라는 점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체성은 단순히 자신을 긍정하는 선언이 아니다. 정체성은 언제나, 타자와 맺는 하나의 관계다. (...) 정체성이 언제나 관계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정체성 정치를 고정된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가 아니라 관계적 정체성들에 기반한 정치로 다시 말들어나갈 수 있다. 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드는 정치적 동일시들을 통해 형성되는 정치로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 정체화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것 그 이상이다. 정체화는 내가 동일시하고 있는 누군가를 언제나 포함하고 있다. 정체화를 통해 우리는 (자각하든 말든) 누군가의 편에 이미 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역동을 “우리 내부의 적대를 악화”하기 보다 “연대를 확장하기 위해” 쓸 수는 없을까? 그가 제시한 정치적 동일시를 통한 정체화란 내가 어떤 성적 지향과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그러므로 누구와 함께 세상에 맞서 싸울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관점을 기반에 두고 있다. 퀴어라는 정체성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으로 등장했다.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된 누구든 환영하는 이 이름은 단순히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적 소수자의 총합을 뜻하지 않는다. 퀴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적인) 비규범적인 섹슈얼리티를 긍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주의로부터 벗어나서) 퀴어로서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할 것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컴바히강 콜렉티브를 포함한 흑인 해방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과의 동일시를 통해 동성애자 권리 운동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정체성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피난처”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 될 필요가 있다.
2.
오늘날 정체성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특히 기계적 정치적 올바름을 고수하는 이들로부터의 강도 높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맨 처음 정체성 정치와 행동주의 예술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풍기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요컨대 정체성 정치는 이러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움 닫기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적 거리두기는 내게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자신과 다른 정체성이라 여겨지는 이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것도 주로 중산층) 여성의 문제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문제에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마찬가지로 퀴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의미하는 수식일 뿐인가? 누가 ‘우리’라는 공동체에 들어올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언제부터 페미니스트와 퀴어의 주된 업무가 되었나? 상황은 모두에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정체성은 모두에게 점점 더 한계처럼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2016년 이후 집단적으로 각성한 비교적 젊은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생물학적) 여성의 경험을 통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특수한 내용을 구성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근원을 실증적이라 가정되는 여성 범주에 위치시키려는 의지와 관련된다. 민족이나 인종과 마찬가지로 성별 역시도 실제로 누군가에게 귀속된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축적된 이해 관계와 이데올로기의 효과라는 사실은 종종 이런 의지에 의해 잊혀진다(“결국 이론(들) 없이 인종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 더 중요한 것은 학문적 인종주의의 이론화가 인종이라는 기표를 둘러싸고 제도화되는 공동체의 결정화 속에서 완수하고 있는 기능에 대해 묻는 것이다”). 성별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요한 것으로서 재구성하는 테크놀로지 때문에 중요해진다(“젠더는 재현이다. 이는 젠더가 개인의 물질적 삶에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젠더의 재현은 곧 젠더의 구성이다.”). 나는 지금 특정한 민족이나 인종, 성별에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차별과 혐오가 재생산하는 상상적인 근원을 초역사적인 실재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물론 분리가 불가능한 것처럼 묶여 있기에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우리는 지배 구조에 항거하는 대부분의 운동이 끓는 점을 돌파하기 위해 학대받고 착취당한 그들의 먼 조상을 상상해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최근 국내 퀴어 예술가들이 ‘퀴어’라는 이름이 수입되기 전 이미 일탈적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있던 ‘선���’들을 찾아 나서는 것도 바로 이런 대항 역사에 대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그 어떤 권리나 심지어 보호조차 적절히 보장하지 못하는 2023년의 한국에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관점은 어쩌면 그 자체로 시기상조인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시기이기에, 다시 말해 특정 정체성으로 호명될 수 있는 집단 뿐만 아니라 아직 이름이 없는 다른 모든 소수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기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정체성 정치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에게 정체성이 필요한가? 정체성은 내가 받은 고통을 보다 정밀하게 세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다른 이들의 고통과 만나기 위해서 고안된 도구다. 그것은 소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되기 위해서 발명된 개념이다. 또한 정체성은 아직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장소다. 그리고 그 장소는 일시적인 “피난처”일 뿐 처음부터 그 장소의 소유자로서 정통성을 승계받은 이가 자비롭게 개방한 공동 주거 단지가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정체성을 우리 자신과 분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경험이 남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범주를 확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약자의, 피해자의, 특정한 정체성을 이루는 조건으로 한계 지으라는 압력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약 우연한 마주침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우리와 비슷해 보이는 이들만 환영하게 된다면 가장 기뻐할 이들이 누구일지 생각해보라.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정체성이 우리 사이의 구획을 더 촘촘하게 나누고 강화하는데에만 일조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잘 싸우기 위해서 차라리 그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 자신을 지키는 무기였던 그것이 본래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다른 이들을 위한 “피난처”의 재료임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들은 우리를 억압하는 이들의 무기와 아무런 차이도 없는 그저 무기일 뿐이다. 이쯤해서 나는 내가 최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 중 한 부분을 언급하려 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퀴어 정체성에 기반한 행동주의 예술에서, 특히 그것의 교육적인 측면에서 가장 실재적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유튜브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창작자들이다. 심지어 위험을 감수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교육적인 효과를 거두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퀴어 예술가인 이반지하와 같은 인물들은 이 분야에서 대표적일 뿐만 아니라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다음 세대라 할 수 있을, 드랙킹 퍼포머로 활동하던 ‘아장맨’이 개설한 유튜브 채널인 ‘아장쥐’는 그가 레즈비언 하위문화에서 겪은 경험과 감정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최근 게시된 <젊은 보수비언 (보수적인 레즈비언)의 슬픔>이라는 영상에서 그는 그가 매우 보수적인 편이라고 밝히며 20대 중반까지 비규범적인 외모와 성향의 타인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레즈비언들을 전형화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은근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뭐 정체화 하셨거나 아니면은 정체화 한지 오래 되셨거나 하시는 퀴어 분들! 퀴어라고 해가지고 이제 “내가 남들보다 많이 알아~” (비퀴어들한테) “니가 뭘 알아! 내가 남들보다 시야가 얼마나 넓은 줄 알아!?” 이렇게 자만하면 안 되고, 언제나 스스로의 빻은 면모를 발견해 가지고 이제 발견하면 두들겨 패 가지고 함께 저희 함께 모두와... 커뮤니티의 모두와 지지하고 연대하고 사랑해 가면서 살아야 된다 이거죠...” 누군가에게는 거슬릴 수도 있는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아장맨’이자 ‘아장쥐’는 특유의 과하게 여성스러운 말투와 제스처를 ‘수행’해가며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전형화된 ‘보수적인 레즈비언’의 예시로서 제공한다. 그에게 정체성이란 자신의 “빻은 면모를 발견”하게 해줄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그런 면모를 자동적으로 해소시켜 줄 정답을 되지 못한다. 그는 정체성을 통해서 무엇보다 “모두와 지지하고 연대하고 사랑해 가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배운다. 도대체 그러지 못한다면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인용 출처:
「컴바히강 콜렉티브 선언문 The Combahee River Collective Statement」를 가리킨다. 한국어 번역은 아래 도서를 참조했다. 브리앤 파스 엮음, 양효실, 이라영, 이진실, 한우리, 황미요조 역,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 페미니즘 매니페스토, 폭발적으로 저항하는 언어들』 중에서 「컴바히강 집단 선언문」, 바다출판사, 2021, 435-448p. 아래 직접 인용은 별 다른 표시가 없는 한 모두 해당 텍스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사드 하이더, 권순욱 역, 『오인된 정체성』, 두번째테제, 2021, 28p.
Demita Frazier, 「Rethinking Identity Politics」, Sojourner(september 1995), 12p. 『오인된 정체성』에서 재인용, 30p.
더글라스 크림프, 김수연 역, 『애도와 투쟁』 중에서 「당신에게 동의해요, 걸프렌드!」, 현실문화, 2021, 231-267p. 아래 직접 인용은 별 다른 표시가 없는 한 모두 해당 텍스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이매뉴얼 월러스틴, 김상운 역, 『인종, 국민, 계급: 모호한 정체성들』, 두번째테제, 2022, 67p.
테레사 드 로레티스, 에일(페미니즘 번역모임) 역, 「젠더의 테크놀로지」, https://en-movement.net/195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에 나온 대사를 마크 피셔가 인용한 것이다. 마크 피셔,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역,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https://playtime.blog/2019/03/03/적이-누구인지-기억하라/
아장쥐, <젊은 보수비언 (보수적인 레즈비언) 의 슬픔>, https://www.youtube.com/watch?v=ywbkH_TK2Is
[출처] 왜 정체성을 소유하는 대신 사용해야 하는가?|작성자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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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Not Sorry - Official Trailer (2024) Louis C.K.
그래... 영화를 만드는 건 자유니까... 출연하는 건 자유니까... "Women are"이란 표현이 나온 것부터 찝찝했다. 고소만 당하면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되냐? 당연히 그중 나쁜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 그런 사람들은 죄값을 치르는 게 맞지. 근데 '고소 당한 사람을 여전히 팬으로서 좋아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논리에 안 맞는다. 루이스 C.K.처럼 자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고소 당한 전적을 들먹이면서. 그래, 난 루이스 개그가 좋은데 뭐 어찌라고. 진짜 루이스 C.K.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면 바로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겠다. 근데 여자 몇 명이 '루이스가 저희한테 그랬어요'라고 했다는 게 증거냐? 앞뒤도 안 맞고 제대로 된 정황도 없고.
누가 나보고 악의적으로 '김수현은 나한테 성희롱을 했다'고 고소한다 치자. 난 한 기억이 당연히 전혀 없으니까 그 사람의 말이 맞다는 증거도 없을 테고. 근데 그렇게 고소당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가해자가 되는 거야?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고? 내 커리어도 끝?
이런 걸 보는 건 그런 기분이다. '자긴 자연 미인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근데 어디랑 어디는 고쳤잖아요ㅋ...' 하는 댓글이 달리는 거. 자연 미인이든 아니든 진실은 그들만 알겠지. 근데 진짜 자연 미인으로 유명한 연예인들도 있고. 그런 분들에게도 저런 댓글이 달리는 건 국룰. 그 분이 스스로 자연 미인이라고 하는데 왜 당신들이 아니라고 해? 그럼 못생긴 연예인이 자기 외모를 비하한다고 가정하면 '저는 원래부터 못생겼어요' 할 때 '예쁜데/잘생겼는데 일부러 고쳐서 못생겨진 거잖아요ㅋ...' 하는 댓글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난 아직도 페미니즘에 얽매인 사람들을 보면 괴롭다. 그렇게 외치는 여자들한텐 "전쟁 날 때 여러분은 남자분들과 꼭 함께 나가세요. 제가 지원서 같이 써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 손 꼭 잡고 응원해주고 싶다. 2024년에 저런 페미니즘 코드가 여전히 먹힌다고? 지금쯤이면 페미니즘은 구시대적 유물이라고 인정할 때가 된 거 아니야?
저기에 나오는 남자 분들도 똑같다. 그냥 루이스의 커리어를 박살 내려고 하는 거거나, 여자들의 편을 들어주면 인기를 얻게 될 거라 착각하거나, 자기 인생에 영화 하나 찍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거나. 저기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있냐? 다 누군지 모른다. 여러분은 아세요? 조지 칼린 정도의 커리어를 쌓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면 저런 인터뷰에 응했을 것 같아? 그럴 필요도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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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nejlevnejsi-knihy.cz/kniha/parasitic-mind_25465481.html?hgtid=acc3e461-ae64-4d83-90d0-d892fa28a310 )
<서문>
유행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치명적인 전염병이 이 나라 저 나라로 급속히 퍼지면서 인류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중세의 흑사병, 스페인 독감, 에이즈(AIDS), 혹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 위기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현재 그 못지않게 치명적인 전염병,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파괴하는 집단적 질병을 앓고 있다. 생물학적 병원체가 원인인 다른 유행병과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병의 주범은 대학가에 퍼진 나쁜 사상들이다. 이런 사상은 이성과 자유, 개인 존엄성의 체계를 갉아먹는다. (p8)
<제1장 레바논 내전에서 사상의 전투까지>
내 인생을 추진하는 이상(理想)은 자유와 진리이며, 이들 이상에 대한 공격은 곧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적 위협을 의미한다. 나 자신 역시 두 번의 전쟁으로 말미암은 독특한 인생 궤적의 산물이다. 평생 한 번도 전쟁의 공포를 겪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인생에서 두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겪었다. 하나는 레바논 내전이고, 두 번째는 서구 세계 특히 북미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이성과 과학, 논리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레바논 내전은 일찍이 내게 부족주의와 종교적 도그마의 추악함을 가르쳐줬다. 집단이 개성보다 더 중요한 생태계에서 성장한 나는 이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감을 갖게 됐다. (p22)
한 사람의 인생이 반복되는 인생 각본에 따라 결정되는지, 아니면 어떤 이상을 반복해 주장함으로써 결정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깊은(그리고 어려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직면한 여러 가지 현실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현실은 어떤 대본이나 자신이 가치를 둔 이상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치료의 한 가지 이점은 환자들에게 이런 패턴을 정확히 짚어준다는 것이다. 내 경우, 인생은 자유와 진리라는 두 가지 이상에 의해 형성됐다. 이 두 가지 이상의 추구는 부모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 각인된 개인적 성격이 발현된 것이다. (p32)
자유가 없이는 두 번째 이상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 두 번째 나의 이상은 진리의 추구와 수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복음 8장 32절)'라는 성경 구절처럼, 진리와 자유는 서로 양방향성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오직 자유로울 때만 진리를 밝히고자 열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리가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래왔다. 내가 자랄 때 어머니는 거듭 경고했다. 이 세상은 내 병적인 솔직함과 정직성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극도로 엄격한 나의 지적, 윤리적, 도덕적, 순수성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흑과 백의 이분법적인(어머니가 이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곳이 아니라 수많은 회색의 다양한 명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내게 간곡히 일렀다. (p36-37)
39
반과학(포스트모더니즘)과 과학부정주의(생물학 혐오)를 퍼뜨리는 데서 더 나아가, 대학들은 끔찍하게 나쁜 사상들과 운동을 퍼뜨리는 최초 감염자 역할을 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지식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믿을 수 없다. 정상인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없다"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이런 다수의 나쁜 사상들이 확산되면서 학계의 보상 체계가 뒤집혔다. 집단적 사고방식은 보상받는다. 혁신적 사상가들에게는 정조대가 채워진다. '자기 자리만 지키는' 학자는 보상받는다. 솔직하게 발설하는 학자는 처벌받는다. 고도의 전문화는 보상받는다. 폭넓은 종합적 사고는 경멸받는다. 지적 용기에 해당하는 모든 자질은 문젯거리로 여겨진다. 진보주의의 좌익적 교리를 고수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보상받는다. 결과의 평등을 신봉하는 자에게는 최고의 행정직을 준다. 실력주의를 신봉하는 자에게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대학들이 뿌려놓는 이런 기생충 같은 사상의 병원체들은 마침내 우리 사회의 모든 곳을 감염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p42-43)
이 책에서는 인간 상태에 잠재적으로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또 다른 병원체들, 즉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병원체들에 대해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병원체들은 올바르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능력에 기생해 이를 망가뜨리는 사고 유형, 신념 체계, 태도, 사고방식들로 이뤄졌다. 일단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가 우리 신경회로를 장악하면, 감염자는 이성(理性)과 논리, 과학을 사용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잃는다. 그 대신 현실이나 상식과 진리로부터 완강하고 오만하게 멀어진다고 정의하면 딱 맞을, 무한한 광기의 심연에 빠진다. 기생충들은 신체의 여러 부분을 목표로 삼아 자리잡는데, 그 중에서 뇌 기생충학은 숙주의 행동을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는 뇌 기생충들의 강(綱)을 다루는 학문이다. (p44)
내가 다루는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중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급진 페미니즘, 사회구성주의가 있는데, 셋 다 ���로 감염된 생태계 안, 바로 대학들 안에서 번성하고 있다. 마음의 바이러스마다 각자 한 계통씩 광기를 빚어내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현실과 상식을 전면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급진 페미니즘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생물학에 기반한 성별 차이를 비웃으며, 사회구성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생물학적 청사진은 전혀 없이 완전한 공백에서 시작된다고 상정한다).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들은 일반적으로 내가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 즉 중력이 당기는 힘만큼이나 명백한 근본적 진실과 현실을 감염자 개개인이 거부하게끔 다양한 사고장애(思考障礙) 증상을 일으킨다. (p45-46)
48 (49)
<제2장 생각 대 느낌, 진실 대 상처받은 느낌>
"기베트는 우리 모두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우주가 창조되었느냐 아니냐, 생명이 설계된 것이냐 아니냐, 도덕이 자연적인 것이냐 아니냐, 예수가 부활한 것이냐 아니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세상에 오직 두 가지 이론밖에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반박을 시작하겠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 셔머의 이 뛰어난 우스갯소리는 중요한 인식론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추구가 항상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을 이진법적 현실로 투영하고 싶어 하는 연구원이 많은 경향에 나는 '인식론적 이분법 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적 실험이 용이하게끔, 다루기 쉽고 간단한 세계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것은, 선천이냐 후천이냐 하는 논의가 그렇듯, 이분법 자체가 잘못인 경우도 때로 있다는 점이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Matt Ridley)에 의하면 "선천이나 후천이냐의 문제는 끝났다" 우리 자신의 성품 중 상당 부분은 유전자와 환경이 도저히 분리가 안 될 만큼 뒤섞인 혼합물에서 나왔다. 더욱이 사회화(양육 즉 후천)에 공통적 패턴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생물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선천) 때문이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욕망은 생각 대 감정의 이분법에서도 발견되며, 이로 인해 잘못된 양자택일의 사고방식이 생긴다. 우리는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동물이다. 문제는 언제 인지 능력(생각)을 작동하고 언제 정서 능력(느낌)을 작동하는지를 아는 거다. (p55)
문제는 지성이 담당해야 할 영역을 감정이 차지했을 때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학들에 만연한 역병이다. 한 때 지적 발달의 중심지였던 대학들이 이제는 감정적으로 연약한 이들의 도피처가 됐다. 대학을 움직이는 좌우명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 얼러주기'가 됐다. (p59)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을 이끄는 기본적인 윤리적 지향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의무론적 윤리와 결과주의적 윤리가 그것이다. 전자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 윤리 규범을 다루며(거짓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됐다) 후자는 어떤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려면 때로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이 두 가지 체계를 모두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당신의 아내가 '나 뚱뚱해 보여?' 하고 물으면 당신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꺼리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린이를 성적으로 대하는 건 도덕적으로 그른 일로 간주한다. 진리 추구에 관해, 의무론적 관점에서는 진리를 훼손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과주의적 관점에서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등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진리가 때로는 변경되고 조작되거나 억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진영에서 보는 광기의 상당수는 바로 진리를 결과주의적으로 다룬 결과다. (p62)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한 가지 문제는, 이 결과주의자들이 단지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것뿐 아니라 감정에야말로 권한이 있다고 보고, 감정으로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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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가득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고서야 그런 세속주의와 근대성, 진정한 리버럴리즘의 상징이 불편할 리가 없다. 물론 나는 지금 비꼬고 있다.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피할 방법이라곤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각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지배적인 감각이다. 인간의 고도로 전문화된 시각 체계는 얼굴 생김새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비언어적인 시각적 신호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일단 한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됨이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검정 장옷 뒤에 가려지면, 제정신인 사람 대부분은 그런 현실에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미덕 과시자들은 불편한 시각적 자극에 대해 극히 합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놀리고 조소하고 비난한다. (p77)
명확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정과 이성, 유머와 진지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며, 살아가면서 언제 감정 체계를 작동하고 언제인지 체계를 작동해야 하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사상의 병원체에 잠식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 병원체들은 급속히 퍼지며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 (p78)
<제3장 자유 현대 사회를 이루는 타협 불가한 필수 요소들>
진정으로 자유롭고 근대적인 사회가 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하버드 대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서구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로 '여섯 가지 컬러 앱(Killer Apps)', 즉 경쟁, 과학혁명, 재산권, 현대 의학, 소비자사회, 근무 윤리를 제시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요소들을 보다 더 간략히 압축해서 설명하려 한다. 나는 어떤 사상에 대해 토론할 자유(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다른 사상들을 검증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에 헌신(과학적 방법)하는 태도와 결합한 결과 서구 문명이 위대해졌다고 상정한다. (p81)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내 노력을 지지한다 말할 수 있어 기쁘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사드 박사님, 제 이름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선생님과 같은 견해를 가진 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요"라고 말한다. 어째서 자유로운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신념을 말하기 두려워하는가?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그 '진보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p86)
2005년 루슈디가 쓴 기사의 두 구절은 표현의 자유를 간결하게 옹호한다. '사람들이 절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을, 혹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게끔 자신들을 보호할 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할 권리가 있는 자유 사회를 건설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나 더 있다. '종교적 신념 체계든 세속적 이념이든 어떤 사상 체계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어떤 사상들은 비판이나 풍자, 조롱, 경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사상의 자유는 불가능해진다." (p90)
"나는 표현의 자유를 믿어요. 하지만…"이라고 생각하는 군중은 이미 표현의 자유가 의미하는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는 대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나온다. 남들이 기분 상하지 않을 권리를 표현의 자유보다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표현의 자유는 정확히 말해 가장 불쾌하고 공격적이며 역겨운 발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따금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건 진정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며 치러야 할 대가다. 당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배포 있게 넘어가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무리 절대주의적 표현의 자유라 하더라도 멀쩡한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고 소리친다든지, 서로 폭력을 부추긴다든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비방하는 담론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일반적 조건은 따른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의 적들은 이런 상식적인 제한들을 왜곡해서 자기들 목적에 부합하게 만들려한다. (p93-94)
오바마는 유엔 회의에서 "미래는 이슬람의 선지자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님. 미래는 모든 선지자와 사상, 종교, 이념을 비판하고 놀리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p95)
여기에서 배울 점은 자유 사회는 풍자의 힘으로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 사회에서는 모든 믿음과 이념들이 공정하게 경기한다. 풍자의 한계를 정하는 순간, 그 사회는 더 이상 자유 사회가 아니다. (p99)
그러나 인간 지식이라는 만신전(萬神殿)에서 과학적 정보를 성문화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퀘벡 주 고위공무원인 파트릭 보셴(Patrick Beauchesne)은 최근 토착민의 지식을 과학적 지식에 대비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무모한 질문을 했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환경 평가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지식의 위계설'을 지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적인 인식론적 체계다. 과학은 '조상들의 지혜', '부족의 지식', '노인들의 방식'을 우위에 두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과학에는 드러난 진리라는 게 없다. 토착민 식으로 아는 방법이 따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바논 출신의 유대인이 아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자연계에 대한 모든 주장은 과학적 방법론의 증거 입각 분석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p103)
현대 사회의 진보적 만트라에 의하면 다른 인종과 문화 혹은 종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주장하는 건 칭송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추론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기타 악당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의 거장으로 고전적 리버럴리즘을 굳건히 옹호하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바로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지칭하기 위해 폴리로지즘(polylog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미제스는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과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차이도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은 개인의 생각하는 방식이 그의 사회적 계급에 따라 결정되며,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경우에는 인종이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미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이런 전제 조건의 비논리적인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폴리로지즘을 일관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단지 어떤 사상을 만들어낸 자가 올바른 계급, 올바른 나라 혹은 올바른 인종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사상이 옳다고 고집하려 든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미덕이 그들에게는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승인한 교리를 가진 자들 모두에게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라는 명칭을 기꺼이 부여한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계급의 적이나 사회의 배신자라고 폄하한다. 현재의 사회정의전사들도 유사한 이념적 사고를 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소"라고 말하는 대신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자, 백인 민족주의자, 신(新) 무신론자, 백인우월주의자, 알트라이트 등의 폄하하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진보적 정통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악하고 부도덕한 악마로 만든다. 미제스가 잘 알고 있었듯이, 폴리로지즘은 반과학적인 관념이다. "[미제스는 폴리로지즘을 '논리와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란'이라 그 성격을 밝히고 폴리로지즘이 '사회 현상과 인간 행동의 과학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폴리로지즘은 우리 문화와 문명 전체에 대한 저항'이라 지적하면서, 폴리로지즘의 보다 더 큰 의의에 대해 역설했다. 과학적 방법론은 우리 정체성과 무관하게 우리를 해방시켜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진보주의자가 본능적으로 경멸하는 분야인 진화심리학은 명확하게 반인종차별주의적이다. 외형적 차이 이면에서 본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과 무관하게 동일한 진화의 힘에서 탄생했음을 인지하는 까닭이다. 환경의 힘(혹은 문화의 힘)은 당연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논리 및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 효과는 어느 한 사람의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결정되는 요소들이 아니다. '흑인의 마음'이나 '백인의 마음' 혹은 '백인 남성이 아는 법'이나 '토착민들의 아는 법' 같은 건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며,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한다. (p106-8)
과거에는 여성들이 차별당했음을 인정했지만, 자료를 통해 남성과 일대일로 비교했을 때 여성들이 학계 여러 분야에서 남성들을 능가하고 있으므로 현재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짜 피해의식 서사를 부추기는 대신 성별 차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 강연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행사조직위원회에서는 나를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동조하는 척하면서 남성들이 더욱더 나은 조력자가 돼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에 헌신하고 현실을 고수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남성의 조력이 필요한 척 가장하는 건, 끔찍하리만큼 거들먹거리고 잘난 척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력우선주의 체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유아증의 한 형태다. (p111)
114-5
한 나라의 외교 정책, 재정 정책, 이민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실행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보편적 의료 제도는 존재하는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각기 이질적인 관점을 접한다면 대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큰 지적 다양성의 추구란 그저 이론적인 추상 개념 같은 게 아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생각의 자유는,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각기 다른 관점과 의견과 사실들의 경중을 따져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끔 교육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지적 다양성은 다윈식 경쟁 과정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돼 최고의 사상(우리는 이를 진화론적 인식론이라 부른다)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들은 척박한 이념적 순응밖에 남지 않은 반다윈주의적 구정물 웅덩이가 돼 버렸다. (p116)
나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거의 20년 전,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에 했던 매우 통렬한 지적을 인용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가 멸종되는 데는 한 세대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우리 자녀들에게 자유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 자녀들이 자유를 물려받을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를 위해 싸우느냐, 자유를 지키고 보호하고 수호하느냐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며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자유를 보호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제대로 가르쳐서 그 가르침과 함께 자유를 물려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과 저는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예전에 사람들이 자유로웠던 미국은 어땠는지 얘기해주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헤아릴 수 없이 지혜로운 이 말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새로이 마음을 다잡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우리를 비합리성에 빠뜨리고 이념적으로 순응하게 만들려 하는 좌파들의 사상 병원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p118)
<제4장 반과학, 반이성, 반자유적 운동>
"당신이 부조리를 믿게 한 사람은 당신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다."
볼테르 대학 캠퍼스의 사상의 병원체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경우, 거의 잠꼬대나 다름없이 모호하고 불가해한 산문(文)들을 만들어내면서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라고(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상정한다. 이 반과학적 헛소리는 '인종차별적' 서구 과학으로부터 '식민지화된 마음을 되찾아오라'라고 촉구하는 <과학은 필멸하리(Science Must Fall)>라는 단체까지 탄생시켰다. 사회구성주의는 인간 행동, 욕망, 기호(嗜好)의 대다수가 인간 본성이나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아닌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제시한다. 즉 성별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적으로 '성 역할'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러한 성 역할이 가부장제의 모호하고도 사악한 힘 때문에 생겼다고 확언한다. 트랜스젠더운동은 생물학적 성이나 '젠더'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유동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급진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투쟁은 모두 거짓으로 입증될 수 있는 과학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념에 최고의 가치를 두다 보면 과학적 사실의 부정이라는 피해는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p120-121)
그러나 아마도 현실의 족쇄에서 해방시킬 가장 뛰어난 도구는 '트랜스(trans)'라는 접두어일 것이다. 이 마법 같은 말은(자기 자신을 흑인이라고 생각했던 백인 여성 레이첼 돌러절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생물학적 성별이나 인종을 당신이 되고 싶은 아무 성별이나 인종으로 바꿔준다. 다행히도 실제 성별 위화감을 갖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 모습을 불가역적으로 형성해놓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자아정체성'을 현실과 어긋나게 하라고 부추긴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진실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이 급진 페미니스트와 사회구성주의자, 트랜스 운동가들 사이에 그토록 만연한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론적 해방자로, '나의 진실'을 기림으로써 우리를 객관적 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p123)
마침내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승리하려 시도하며, 대통령이 되면 9세 트랜스젠더 아동을 교육부 장관 자리에 지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망상 좀 받아준다고 해서 별 탈 없으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 전쟁이다. (p129)
아주드물지만 실재하는 진짜 성별 위화감 환자들을 폄하하려고 이런 풍자를 한 게 아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사생활 안에서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진보적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미덕 과시를 위한 사회 정의의 졸로 아이들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p140-141)
트랜스젠더 학생에게 맞춰주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닌가?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소수의 폭정이 드러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정한 내 정체성, 생물학적 사실과 충돌하는 내 정체성을 찬양하고 수용하라. 안 그러면 진보주의 감시자들의 분노를, 법적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상 처벌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p142)
인간은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이성 중에서 짝을 찾아 의미 있는 결합을 이루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ASI에 의하면 그런 원동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온정적 성차별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런 입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꼭 지성적인 진화심리학자까지도 필요 없다. 또한 여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남성은 누구든 사악한 성차별주의자가 된다는 데 주목하라. 최근 연구에 의하면 여성에게 인명 구조 응급 처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40년 동안 페미니스트의 세뇌와 마녀사냥이 남자들을 너무 잘 가르친 모양이다. '성차별주의자' 영웅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성차별주의자 안 하고 비겁한 방관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누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용감한 소방관과 제복을 입은 영웅적 군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조언해야 한다. 새로 부임한 보안관이 남성성에 대한 진보적 정의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심하고 비겁한 방관자 남성. 그런데 여기에는 굉장한 인지적 모순이 내재돼 있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일터에서 여성들의 협력자로서 기여하라는 설교를 듣는데, 만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온정적 성차별을 하는 게 돼 버린다. 모든 길은 성차별로 통한다. (p144-145)
이렇게 틀린 게 뻔한데 어떻게 공론가들은 그런 사상의 병원체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 전제주의 정권 하에서는 그 답이 간단하다. 전체주의 정권은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범죄로 취급한다. 서구에서는 이념 주입이 이보다 교묘하게 이뤄진다. 이념은 PC운동이라는 정신으로 달성되며, 대학 캠퍼스에 지적 다양성이 결핍됐을 때 가장 잘 집행된다. PC운동은 별대모벌에게 쏘이는 것과도 같다. 쏘인 거미는 좀비 같은 상태가 돼 별대모벌의 구덩이로 끌려간 후, 몸 속에서 부화한 별대모벌 새끼들에게 뜯어 먹힌다. PC운동도 이와 똑같이 섬뜩한 목표를 달성한다. 우리가 너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좀비 같은 상태로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사악한 사상이 우리를 서서히 갉아먹게 한다. (p152)
<제5장 캠퍼스의 광기: 사회정의전사들의 부상>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느낌이 진실을 이긴다. 경험적 진술은 더 이상 그 진실성 여부가 아닌, 잠재적으로 '편견적'일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된다. 편견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 진술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러야 한다. 느낌이 한 사람의 존재를 입증하는 원동력임을 고려하면, 항상 심기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 속하는 게 이익이 되는 사회에서는 '모욕 문화(Culture of offence)'가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피해의식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경쟁 충동이 일어난다. 탄압 올림픽 (피해자학 포커라고도 부른다)은 정체성 정치와 교차성("나는 퀴어에 비만인이며 무슬림이고 장애자이며 트랜스인 흑인 페미니스트다")을 이용, 기괴한 부조리극의 승리자를 가르기 위해 서로 피해의식을 겨루는 경기장이다. 나는 사회정의전사들이 일종의 집단적 뮌하우젠 증후군(동정심을 구하기 위해 병을 꾸며대는 정신 이상)을 보이는 거라고 설명한다. 그 기풍은 한 마디로 '나는 피해자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p157)
오늘날 수많은 대학 졸업생에게는 토론할 능력이 없다. 반대 관점에 접해본 적도 없으며, 반대 관점은 곧잘 이단으로 몰려 항의나 신경질적인 발작에 부딪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 진화한 능력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반대 입장에 부딪혀봐야 한다. 무균성 안전 공간은 대학 캠퍼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트위터 설립자인 잭 도시(Jack Dorsey)를 내 유튜브 채널에 초청했다. 대화중에 나는 트위터가 플랫폼 상에서 사람들의 언어를 감시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건강한 인간은 잘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 관계의 추한 면모에 노출돼야 한다. 모든 상호 작용이 공손하고, 희망적이고, 풍요로울 것으로 예상되는, 멸균된 버블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보호할 수는 없다. 소량의 알레르겐에 어린아이들을 노출시키다가 점점 더 많은 알레르겐에 노출시켜서 인체가 특정 알레르겐에 대한 면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음식 알레르기 면역 요법처럼, 사람들도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건강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모든 경우의 인간 상호 작용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반대 의견을 다루기엔 너무 불안정하고, 과학적으로도 유효하지 않은 개념인 소위 '마이크로어그레션'에 마주해 피해의식을 가장하면서 태아처럼 웅크리는 젊은 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p161)
정말이지 그 목록은 끝이 없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범용 사전 고지를 제안한다. "실제 세상을 각자의 뇌를 사용해 헤쳐갈 때는 사전 고지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여러분이 성인으로서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명민함을 갖췄다는 추정 하에 진행됩니다. 삶 자체가 여러분의 사전 고지입니다." 사전 고지는 노출 요법의 기본 원칙에 정반대된다. 노출 요법이란 일반적 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공포증(가령 거미공포증 등), 공황장애, 강박신경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극복을 위해 잘 연구된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경우, 환자들은 증세를 촉발시키는 자극에 노출돼 공포와 두려움에 대처하는 전략을 배우게 된다. 사전 고지의 효과를 실험해 본 몇 안 되는 연구에 의하면, 사전 고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촉발자'들을 더 피하게 하고, 회복 탄력성을 키우지 못하게 하며', 과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사전 고지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줄여줄 수는 있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헤쳐가는 데 필요한 건강한 사고방식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p163-164)
오늘날에는 선호하는 집단 내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다(적어도 일부 분야에서는 그렇다). 안전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지적 풍요에 선행한다. 사회정의운동은 진실 탐구보다 우선한다. 오퍼레이션 리서치식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대학이 목표하는 기능은 학생들과 교수들의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이며, 대학 예산 이외 다른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대학이 다중 객체 최적화 문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 혹은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과 사회 정의 운동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p166)
2010년 나는 대리인을 통한 뮌하우젠 증후군(MSbP, Munchausen Syndrome by Proxy)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논문을 한 의학 학술지에 실었다. 한 사람이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으로 질병을 꾸미는 일반적 뮌하우젠 증후군과 달리, MSbP는 자기가 돌보는 어린 아이(혹은 노인이나 애완동물도 해당된다)를 해쳐서 피해자를 더 아프게 만듦으로써 보호자가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 하는 경우다.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여성(66.2%)인데, MSbP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여성이다(97.6%). 이 두 가지 형태의 뮌하우젠 이상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가짜 피해의식 사고방식을 잘 포착해줄 새로운 질병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집단 뮌하우젠'이 바로 그것이다. 병을 꾸며대거나 짐짓 다치는 대신, 집단 뮌하우젠 환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피해의식 상태를 알림으로써(타인의 피해의식에 편승하는 경우에는 대리인에 의한 집단 뮌하우젠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다) 관심, 동정, 공감을 구한다. (p174)
모든 길은 편견으로 통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인데 흑인 여성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성적 인종 차별(sexual racism)이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맞다. 이런 용어가 실재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이고 흑인 여성에게 끌린다면, 당신은 흑인 여성들이 성적으로 탐닉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그들의 몸을 대상화하는 인종차별주의자 편견덩어리다. 어떤 피해자 집단을 이 방정식에 끼워 맞춰도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 모두는 제도적 인종 분리 정책이 편견을 낳는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려는 것조차 편견에 속한다. 즉 '문화 유용(流用, cultural appropriation)'이라는 편견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학의 항상성은 칼 포퍼가 말한 반증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모든 길이 편견으로 통하도록 보장한다(즉 그 어떤 데이터로도 피해의식 서사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다). (p177-178)
문화 유용이라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으면 다문화 사회와 다원 사회가 제공하는 풍부함을 제대로 경험하기 힘들다. (p180)
실증적으로 이런 강간 사건이 발견되지 않자, 이 논문은 (다음 부분 읽으려면 우선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얼마나 인간으로 보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이스라엘인은 팔레스타인인을 너무 증오한 나머지 팔레스타인 여자는 강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간 사건이 발견되든 발견되지 않든 결론은 정해졌다. 이스라엘인은 악마다. 모든 길은 채찍질 고행과 자기 혐오로 통한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의 품질 보증 마크다. 가짜 분노를 파는 이들은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뿐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친절을 이슬람 혐오의 한 형태로 이해한다. 아니사 로하니 (Anisa Rawhani)는 퀸즈 대학(Queen's University)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18일 동안 히잡을 쓰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리라는 게 분명 이 실험의 가정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고 공손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이 피해자학 서사를 살려내기 위해, 그녀는 눈에 띄는 관용과 친절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을 감추려 보인 과잉 행동의 한 수단이라고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불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모든 길은 이슬람 혐오로 통한다. 친절하고 관용적인 것은 대학 캠퍼스 생태계에서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다. (p182-183)
무한의 관용이라는 기풍을 예로 들어보자. 위대한 철학자 칼 포퍼는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아마도 가장 훌륭한 입장을 제시했다. "이보다 덜 알려진 것은 관용의 역설이다. 무한한 관용은 결국 관용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무한히 관용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관용하는 사회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공격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관용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며 관용 역시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관용적 철학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무관용에 맞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공론을 통해 무관용을 점검하는 한, 억압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관용을 물리적으로라도 억누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런 무관용자들이 우리와 합리적인 수준에서 논의할 수 없다는 게 판명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모든 논의를 거부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종자들이 현혹될까 싶어 합리적인 논의를 듣지 못하게 하거나, 논의에 대한 응답으로 주먹이나 총기를 쓰라고 가르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무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p189)
현재 미국 국경의 불법 이민자 위기와 관련해 미국의 진보들 사이에192===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정의전사들의 비합리적 입장을 정색하고 지지하려면 현실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는 이제 이성의 적이 됐다. (p193)
<제6장 이성으로부터 탈주: 타조 기생충 증후군>
과학이란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일이어야지 자기가 선호하는 정치 이념이나 개인적 신념을 방어하는 일이 돼서는 안 된다. (p197)
타조 기생충 증후군 물론 현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기만(혹은 자기 기만) 능력은 엄청나다. 사실 인간의 지능이 이렇게까지 진화한 이유 중 하나는 남들을 성공적으로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남들을 조종하려는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 기만이라는 성향을 진화시켜왔다. 자기 기만은 자신의 이중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거짓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그 거짓말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기반해서 볼 때, 자기 기만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해서 생기는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소 괴이한 자기 기만 형태가 있다.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불쾌한 정보를 억누르는 인간 능력에 주목하고 이를 '타조 방책'이라고 불렀다. 이 인간 타조 효과-타조가 달갑지 않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모래에 머리를 묻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서 나온 표현이다-는 금융 투자를 포함해 여러 가지 맥락에서 기록돼왔다. 몇 년 전 사상의 병원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거부하는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성에 대한 이 끔찍한 공격을 아래처럼 정의했다. "이 장애(障碍)는 중력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현실을 거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OPS를 앓는 사람은 자기들의 눈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양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유니콘 나라 같은 대안 현실을 건설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과학, 이성, 인과법칙, 증거 구성 임계점, 거의 무한하리만큼 막대한 양의 데이터, 데이터 분석 절차, 추리통계학, 과학적 방법론 고유의 인식론적 법칙, 상식 같은 건 모두 거부된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OPS 환자의 망상적 횡설수설은 환상에 불과한 연관성,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 기분 좋게 들리는 진보주의적 상투성에 뿌리를 둔다. 타조의 논리를 내놓는 사람들은 항상 숭고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p199-200)
왜 사람들은 그런 조잡한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걸까? 철학자 에이브러햄 카플란(Abraham Kaplan)은 그의 책 <탐구의 수행(The Conduct of Inquiry)> 에서 이렇게 썼다. '과학적 공동체에서 받는 사회적 압력에 덧붙여, 과학자 개인이 일하는 데 있어 매우 인간적인 습성이 하나 있다. 나는 이를 도구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표현한다. 어린 소년에게 망치를 주라. 그러면 그는 마주치는 모든 물건을 다 두들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학자가 자기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굵은 글씨는 원문에 따름] 인본주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과학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cien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갖고 있는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기 쉽다." 이것은 방법론적 고착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방법론적 고착이란 연구원들이 주어진 연구 과제에 적합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특정 데이터 자료나 특정 데이터 분석 절차를 고집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당신이 기후문제운동가라면, 모든 재난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유독한 남성성과 함께 가부장제를 비난해야 한다(기후 변화가 유독한 남성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다양성, 포용, 공정 컬트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모든 악은 다양성, 포용, 공정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만일 당신이 민주당원이라면, 모든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에서 비롯된다. (p202-203)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유롭고 현대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비종교적인 사회라면, 종교우월주의,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특히 유대인을 증오하는 등 종교적 소수인에 대한 무관용, 표현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 거부에 뿌리를 둔 문화와 종교적 유산을 가진 수많은 이민자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서술하는 건 '편견'에 의한 게 아니다. 이것은 태양의 존재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상호이타주의는 진화된 메커니즘이다(이를테면 이민자들이 자유롭고 현대적이면서 비종교적인 서구의 가치관을 채용함으로써 우리의 관대함에 화답할 것이라 기대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난민을 허용하는 것이 상호이타주의다). 자멸을 초래하는 공감은 진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문명적 차원에서 채찍질 고행을 하겠다고 현대 사회의 근간마저 양보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캐나다 이민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민 정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만 반복하는 사람들은 은밀한 형태의 타조 기생충 증후군 환자들이다. (p206-207)
"여성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을 때 남성의 배상액의 절반을 배상한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게 지급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3분의 1이다. 조로아스터교인에게 지급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15분의 1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가 사법 체계에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주의자들이 고수하는 기준이다. 남자들은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여성들은 될 수 없다.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흑인들은 될 수 없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양성애 백인 기독교 보수 남성은 입 다물고 진보적 무슬림 토착 유색 인종 성전환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백인 친구들, 분수를 알라고.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따라서 샤리아 법과 진보적 정체성 정치는 정확히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공격하는 것의 영향은 이슬람 세계와 서구 진보주의자들 세계에 서로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그 사고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유일한 차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지하지만 샤리아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매우 특별한 종류의 평등이다.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소설 <동물농장>에 조지 오웰이 남긴 불멸의 문장이 가장 잘 표현해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p218-219)
우리의 뇌는 환경 속에서 통계 규칙을 감지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이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해서 편견을 가졌다든지, 인종 차별을 한다든지, 증오심 가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은 인간 인지의 근본이다. 확률론적 현실을 바탕으로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는 행위는 곧 인간의 행위다. 프로파일링을 한다는 건 인간이라는 의미다. OPS에 감염된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대신 '현실은 인종차별적이다'라는 진보주의의 신조를 고수하고 싶은 마음에 프로파일링하기를 거부한다. 프로파일링을 하는 건 차별 행위이기 때문이다(이 어휘가 갖는 편견적 의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 코미디언 에반 세이엣 (Evan Sayet)이 무차별의 컬트(cult of indiscriminateness)라 일컬은 바로 그 광신적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2011년 우리 가족이 캘리포니아 남부로 여행했을 때, 몬트리올 공항에서 보다 엄밀한 보안 점검을 한다며 당시 두 살이었던 내 딸을 무작위로 지목했던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보안 등급 상향 조정 때 노년의 수녀들이 파키스탄, 예멘, 시리아에서 무리 지어 여행 온 젊은 남성들과 똑같은 확률로 정밀 조사를 받는 까닭이다. 유니콘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증오심으로 가득한 편견덩어리다. OPS는 인간 마음의 끔찍한 질병이다. (p222)
<제7장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는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
자유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시민의 의무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몇 가지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덫에 걸려 굴복해버리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뇌를 쓰는 데 매우 인색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너무 게을러서 주어진 문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고, 그 대신 되도록이면 머리를 안 쓰면서 자기 생각과 같은 여론을 형성하는 편을 좋아한다. 두 번째로, 정보를 이루는 데이터의 정확성은 제각기 다 다르다. 세 번째, 일단 한 개인이 자기 입장을 결정하고 나면, 이에 반하는 증거를 고려하도록 만들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두 명의 다른 공동 저자와 저술한 책에서, 인지부조화 이론의 선구자인 레온 페스팅거는 무려 60년 전에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켰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꾸기 힘들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돌아설 것이다. 사실이나 숫자를 제시하면 그는 출처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논리로 호소하면, 그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특히 그 사람이 자기 믿음에 투자라도 한 경우에는 얼마나 더 힘든지 경험해보았다. 아무리 통렬히 공격해도 믿음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기발하게 변호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략은 그저 신념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그가 그 믿음에 헌신하고, 그로 인해 그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의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확실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됐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은 대개의 경우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이전 보다도 더 자기 믿음이 진실되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남들을 납득시키고 남의 생각을 자기 관점대로 바꾸려는 열정마저 새로이 보일 수 있다." (p225-226)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는 무엇보다 통설을 흔들고, 그래서 전면적인 거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을 수호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자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적인 편향이나 사견(이견, 의견)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이렇게 언급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게 아니다.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그 과학적 진리에 익숙해짐으로써 승리한다." 동물학자 프레데릭 R. 슈람(Frederick R. Schram)도 그런 보편적 생각을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이란 인간 본성이 가진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인의 활동이 아니다. 과학의 진보가 드문 것은 사실을 담은 정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과학자들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과학의 자체 교정 과정을 통해 우수한 생각이 이긴다. 심장병 전문의 딘 오니시(Dean Ornish)도 같은 견해를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들마냥 새로운 생각에 저항할 때가 자주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좋은 생각과 이론이 승리하게 해준다." 나도 동의한다. (p228-229)
부모투자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은 막대한 수의 유성 생식 종들로부터 성별 차이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방대한 메타프레임워크다. 대부분의 종에서 암컷들은 수컷들보다 부모로서 더욱 많이 투자하며, 그 결과 성적 행동에 있어서 훨씬 더 신중하다. 그러나 수컷이 부모로서 암컷보다 더 많이 투자하는 종의 경우, 대개 성별 차이가 역전된다. 그런 종의 암컷들은 더 크고, 더 공격적이고, 성적으로 더욱 분방하다. 그런 예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며 선사시대 동물처럼 생긴 화식조(cassowary)가 있다. (p240)
247-8
서구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글로벌 패권주의를 지적하면서 자학하는 일이 흔하다. 그들은 서구는 전쟁과 정복으로 세워졌지만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로 퍼져갔다고 말한다. 실상은, 이슬람의 역사야말로 끊임없는 정복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 정치과학자 새뮤얼 P.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그 유명한 말에 의하면, "서구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단층선을 따라 발생하는 갈등은 1,300년 동안 지속됐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이슬람의 국경은 피로 그려졌다. 7세기 창시된 이래, 이슬람은 수천만 명을 예속시키거나 개종시키거나 혹은 죽였다. (p249)
세계 수많은 지역에서 개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개종자들에게 테러를 저지르도록 고무하는 종교는 단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p254)
물론, 이렇게 다차원적이며 확실한 중복 증거들로 법칙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행위가 무슬림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한 이념을 정밀히 조사하고 그 이념이 평화, 다원주의, 자유를 촉진시키는지 결정하기 위해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인식론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는 것뿐이다. 설사 무슬림 대다수가 분명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분석의 결론은 사실에 합치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분석한다고 해서 편견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다. (p260)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을 이용해 기후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인공적인지 조사하고,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이며 이성적인 개입 방법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을 수행하자고 요청한다고 해서 '기후변화부정자'나 '과학부정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듣기 좋은 뻔한 소리나 감정적 호소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끔 면역력을 키워준다. 당신의 지성-잘못 끼어든 감정이나 부족주의적 이념이 아닌-을 통해 입장을 결정하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 지성이 가장 유용하고 어떤 분야에 감정이 가장 유용한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입장을 결정할 때는 이 장에서 다룬 강력한 인식론적 도구를 적용해 오직 '진리의 부족'에만 충성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어라. 내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태시킬 필요가 있는 중복 증거는 무엇인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임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정보를 취합시켜 줄 강력한 수단이다. (p261)
<제8장 콜 투 액션>
사람들이 사상의 전투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책임감의 분산'이나 '방관자 효과'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심리학자 존 달리(John Darley)와 빕 라타네(Bibb Latané)는 언뜻 생각하기에 직관에 반대되는 듯한 내용을 기록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이 실제 누군가에게 도움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즉 위험을 자초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다. "사드 박사님, 우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의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힘 내십시오." 아니,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개인적인 책임감을 일깨우라. 당신과 상관 있는 문제다. 참여하라. 진리와 이성, 논리가 도와달라고 외칠 때 방관자가 되지 말라. 다른 사람들 목소리에 묻어가지 말라. 자기 검열 하지 말라. 이 전투의 결과에 당신과 당신 자녀들의 이해가 달려 있으니,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드높이라. 공유지의 비극 같은 집단 무기력의 비극에 굴복하지 말라. (p266-267)
남을 판단하는 것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 말라 물론 민감한 주제를 거론해서 친구들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정확히 말해 그런 대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깊은 우정이란(나심 탈레브의 개념을 빌자면) 반취약적이어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헨리 토마스 버클(Henry Thomas Buckle)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나 여자는 세 가지 계급 혹은 지적 등급으로 분류된다. 가장 낮은 계급은 언제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음 계급은 언제나 사물에 대해 대화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언제나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알아볼 수 있다." (p268-269)
서구는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기독교신학에 따라 많은 이가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 (…) 많은 사람이 이런 가르침을 잘못 해석해서 판단은 신이 금지한 행위이며, 그저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이런 포고령들은 도덕적 위선에 대한 이야기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심판해야 한다. 나는 매일 심판한다. (p270)
판단한다는 것이 곧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완벽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판단은 제대로 작동하는 성인에게 필요불가결한 능력이다. 인간 의사결정의 중점적 특징은 바로 몇 가지 서로 경쟁하는 대안들을 판단하는 절차다. 이것이 바로 판단과 의사결정학회(Society for Judgment and Decision Making)와 그 대표 학술지 <판단과 의사결정(Judgment and Decision Making)>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 안에 누구를 포함시킬지 판단한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여러 구애자를 판단한다. 우리는 학생과 종업원을 판단한다. 삶은 끊임없는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판단한다. 자기 의견을 밝힌다. 그들은 입장을 취한다. 절대 판단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문제에 대해 장단점만 열거하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매우 지루한 사람들이다.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향된 사람이라 불릴 가능성을 막기 위해 보험을 드는 지적 비겁함이다. 최고의 카리스마가 있는 대중 지식인들은 대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토마스 소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지난 4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대중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것은, 논쟁적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이라고 다 똑같이 좋은 것은 아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공론가와 비판하기 좋아하는 지식인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입장을 취하느냐에 있다. 판단에 이르게 된 과정을 또렷한 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 판단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p272-273)
미덕 과시(virtue-signaling)는 비용 들이지 않고 손쉽게 자아를 팽창시키는 자기 확대(self-aggrandizing) 행위의 한 형태��. 내 진보적인 해시태그가 증거하듯, 나는 진정으로 남들에게 관심 갖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해!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얘기도 없다. 이렇게 뻔한 미덕 과시를 하는 사람들은 유약한 겁쟁이다. (p274)
276-7
서구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이 내게 자유를 수호하고 싶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파장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러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 문제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어린 연합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과 박격포 앞에서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던가(혹은 안전하리라 기대했던가)? 얼마 전 6만 7,000명의 캐나다인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영웅적 행위 덕분에 나는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것을 타이핑할 자유를 누린다. 수백만 명의 개인이 생명을 희생시킨 덕분에 지금 우리의 자녀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아는 사람들에게 친구 삭제를 당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간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에 비겁함도 추가돼야 한다.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면서 서구의 영혼을 위한 사상의 전투에 참여할 방법은 없다. (p278)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특히 학자나 공인으로서) 생각을 밝히는 데 막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비평을 꺼린다고 믿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참여하라고 간청하면 때로 이렇게 대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교수님은 종신재직권이 막아주잖아요." 종신 재직이 이성을 수호하고자 드러내고 발설함으로써 받는 모든 협박과 유해한 결과를 다 아울러 퇴치해주는 마법의 방패는 아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나는 2017년 가을, 대학 수업에 갈 때마다 보안 조치를 취해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수많은 살해 협박을 받았으며 결국 대학 인사부 대표를 대동하고 몬트리올 경찰에 출두해 진술서를 써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지만 공적 활동을 이유로 다른 교육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여러 건의 교수직 제의를 놓쳤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경력의 발전을 위한 수비수가 되어줄 학계 모임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내 영혼의 순수성 (내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때문에 나는 진실 수호보다 직업적 고려를 더 중시할 수 없었다. 내 이기적인 이유로 진실의 1밀리미터, 자유의 1온스라도 희생시켰다는 걸 알면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이 사상의 병원체들과 싸우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걸라는 것이다. 당신의 싸움이 덧없지 않게 하라. (p279)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주어진 미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절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선한 일에 중용'이라는 속담을 생각하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한 가지 미덕)는 과도한 무모함과 비겁함(둘 다 피해야 할 극단적 속성이다) 사이에 있다고 상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인 전투에 처한 병사의 용기에 대해 논했지만,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 이 말은 사상의 전투에 필요한 지적 용기에도 적용된다. 예멘에서(이슬람의 불경죄에 항의하려는 의도로) '모하마드 그림을 그려라'라고 적��� 티셔츠를 입기로 한 사람은 분명 과도한 무모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매체들이 '이슬람은 평화다'라는 이맘의 성명에 이의를 제기하기 꺼리는 것은 비겁함의 발현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 조리 있고 이성적으로 교전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존재한다. (p279-280)
경기 중에도 페널티 킥이 주어지지만, 토너먼트 게임에서 동점일 경우에도 이 방식이 사용된다. 그렇게 무거운 부담을 지고 슛을 하는 데는 대단한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배짱과 용기를 키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상의 월드컵 대회에서 뛰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성의 팀을 위해 득점을 기록할 기회가 왔을 때 은유의 페널티 킥을 넣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골목길에서 위협받는 여성을 보고 끼어드는 사람들과, 도와달라는 비명을 듣지 못한 척하면서 도망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후자가 되지 말고, 전자가 되라. (p280)
나치를 물리치도록 도운 주요 역사적 인물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사과해야 한다면, 끝없는 암흑의 심연이 드리운 것이다.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원칙을 지지한다면(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물러서지 말라. 벌꿀오소리 같은 야성적 충동을 가져라. 당신의 진실성을 수호하고 진리를 지킬 때는 맹렬하리 만큼 단호하라. (…) 벌꿀오소리가 되라. 이념적 깡패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절대 물러서지 말라. (p285)
소위 말하는 '다른 형식으로 아는 것(토착민들 식으로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이 과학적 방법만큼 유효하다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닫힌 마음의 편견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유독한 남성성과 백인우월주의의 전형이라며 신경질적으로 백인 남성들을 악마화하는 행위를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색적인 비난이 금방이라도 협박이 될 기세면, 도대체 무슨 진보적 교리를 바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당당하게 물어라. 사람들 대부분은 인종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자라 비난받는 걸 너무나 두려워해서 웅크리고 침묵한다. 입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민재판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런 전략에 넘어가지 말라. 당신의 원칙을 확신하고 벌꿀오소리처럼 맹렬하게 그 원칙을 옹호하라. (p286)
인간은 협동적인 동시에 경쟁적인 존재이며, 행동거지 서툰 10대 청소년 패거리부터 프로 축구단이나 군대 조직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단에서든 분명한 위계 질서를 이루려 한다. 인간은 다 똑같고 평등한 일개미가 아니다. 하버드 대학 곤충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E.O윌슨(E.O.Wilson)은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생각이지만, 종(種)이 틀렸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기반으로 구축된 체계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경쟁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의 연약한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사회를 구축하려 들면 결국 만들어지는 건 나약함과 권리 주장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사회다. 삶이란 필연적으로 경쟁적이다.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이 있다. 그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관점의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p290)
가드 사드 , ' 기생충 마인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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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perion Ensemble & Ruben Peloni - La colegiala, tu vuo fa l'americano"
며칠 전 대선 당일에 놀러 간 밀롱가(장소)에서 '여학생(=La colegiala)'과 '미국인이 되고프냐(=Tu vuo fa l'americano)'를 이어 붙인 연주가 나오던데, 그날 만난 '썸댓땅고' 채널 애청자 중 한 분이 흥겨워 좋다며 무슨 곡이냐고 물어보길래 제목 알려줌. 두 곡 모두 2023년 개인 출판한 '멜로디 어페어'에서 다룬 곡이라 바로 답변할 수 있었다.
'여학생'은 1935년에 만들어진 '남자를 타도하라(=Abajo Los Hombres)'라는 페미니즘 계열 영화 주제곡이었던 걸 엔리께 로드리게스 악단이 연주한 덕분에 가끔 밀롱가(장소)에서도 나오긴 하지만 장르를 엄밀히 말하면 폭스트롯(Fox Trot)에 해당한다.
'미국인이 되고프냐'는 1958년 개봉한 '토토, 페피노와 광신도들(=Totò, Peppino E Le Fanatiche)'이란 이태리 영화에 쓰였고, 작곡가 레나토 카로조네(Renato Carosone)가 영화에서 직접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클립이 유튜브에 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무방비적으로 파고드는 미국 문화에 맞서 이태리 문화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의 가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1999년 개봉한 영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서 나와 처음 들었다.
밀롱가에서 나왔던 곡은 연주 단체를 몰라 AI한테 검색해 보라 시켰더니 '하이페리온 앙상블'이란 땅고 밴드가 2014년 발매한 '기억(=Remembranzas)'이란 음반 수록곡으로 객원 가수로 보이는 루벤 펠로니(Rubén Peloni)가 노래했다.
오늘날 퀵스텝(Quickstep)으로 불리는 춤곡을 20세기 초엔 폭스트롯이라고 했고, 그 시절 '슬로우 폭스트롯'이라 칭했던 게 지금은 폭스트롯이 돼 헷갈린다. 이 명칭에 관해선 크게 세 가지 썰이 있는 거 같다. 첫째,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버논 & 아이린 캐슬 부부가 선보인 캐슬웍(=Castle Walk)이 변형됐단 설, 둘째, 해리 폭스(Harry Fox)라는 보드빌 쇼 연예인 이름에서 왔단 설, 셋째, 랙타임 시대에는 캐멀웍(Camel Walk), 터키트롯(Turkey Trot), 그리즐리베어(Grizzly Bear) 같이 동물 이름을 딴 춤사위가 유행했는데 폭스트롯도 그중 하나란 주장.
밀롱가 음악은 아바네라 전통을 이어받긴 했지만 BPM만 따지면 초기 폭스트롯 음악과 유사성이 있어서 이거에 맞춰 밀롱가 스텝으로 춤추는 거는 아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외려 이게 훨씬 편하다.
밀롱가(음악)은 땅고에 비해 레파토리가 부족해 나오는 게 거의 정해져 있다. 이 식상함을 보완하기 위해 '밀롱가 AM(=Alternative Music)'으로 폭스트롯을 고려해 봄 직하지 않나 싶긴 하다.
핑계 삼아 평소 내가 즐겨 듣곤 했던 폭스트롯을 비롯, 포크, 재즈, 롹, 보사노바, 힙합 등등을 아우르는 밀롱가 얼터너티브 딴다를 심심할 때마다 나름 구성해 썸댓땅고에 올려놓을까도 싶긴 한데, 난 몸공부 일환을 겸해 땅고 추러 다니는 거라 디제이 할 뜻은 없어서 좀 주제 넘은 짓은 아닌지, 해도 될지 왔다갔다 한다. 구식 사람이라 요즘 유행가는 모르니 대체로 20세기에 나온 거 위주로. 1딴다 3곡씩, 총 100 딴다 = 300곡 정도 선곡은 가능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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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가 나를 구속하고 통제하고 바꾸려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연인관계일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일것이다.
- 내가 가지는 문제의식은 이성과 단둘이 연락을 하거나, 만남을 가지는것 정도에 있다.
- 이성이 껴있는 자리에서는 너가 없더라도 알아서 행동을 잘하는가? 는 솔직히 고민해본적이 없다. 사실 그냥 회사내 모임이나 회식자리가 다인데, 내딴에는 신경쓴것들이 너에게 미치지 못했을수도 있겠다. 난 노력했다고 했는데 넌 서운해 하기도 했으니깐. 그건 내가 너의 기준에 못미치는 모자람 또는 서로의 기준이 다름 또는 나의 배려부족 이겠다.
- 하지만 너가말한 운동복을 왜 하필 그런걸 입는지, 수영복을 큰걸 입었으면 좋겠고 와 같이 직접적으로 나의 선택에 강요당한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내가 너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큰것같다. 그건 서로 생각의 다름이 맞다. 그래서 더이상 싸우기싫어 너의 눈치를 보며 맞춘 시간들에서 답답함이 알게모르게 쌓였던것같다. 너에게는 아무렇지 않은건데 나에게는 아니어서 내식대로 할때마다 너는 또 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서운했으니 한명에게 맞춘다는건 지속성이 없었다. 모임같은건 네 터치가 과하다고 생각했고 너에겐 나를 믿을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한테는 답답함이었나보다.
- 너는 사실 옷보다 행동을 바꾸줬으면 한다곤 했지만 결국 내가 느낀건 옷들이었다. 행동을 바꾸는건 무의식중에도 의식이 필요한 일이다. 사실 나는 나의 행동들이 뭐가 그렇게 크게 잘못됐는지 모르는게 다름인것 같다. 너입장에서는 문제의식 없는거겠지. 노브라에 반팔입고 겨드랑이 보이는거, 티셔츠 목이 헐렁하다고 하는거, 그런것들이 내기준 너무 세세하고 과한거지.. 백번생각하면 조금 이해가는 정도..
- 그리고 너가 그렇게 나에게 보수적인데에는 너에게 신뢰나 믿음을 주지 못함인데.. 너와 내가 달라서 믿음을 주지 못했던것들과,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해서 신뢰를 주지 못했던것들이 있을것같다. 전자는 너를 만나기전의 나의 언행들일것같고 후자는 너를 만나면서 굳굳이 싫다는데 카페가고 밥먹고 했던 그런 일들일것 같다. 후자는 후회도 되지만 전자는 어쩔수 없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2. 너와 내가 자꾸 부딪히는 이유는 내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너와 나의 이슈를 바라봐서 일것이다.
2-1. 페미니즘이 상대방보다 우위가치에 있는가?
- 너가 말했듯이 나도 내가 가장위에있고 그 다음 상대방인건데, 페미니즘도 내 가치관중에 하나니깐 나에 포함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만약 너와 내가 그 가치관에 생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면 되는데, 너가 말했던것처럼 그 가치관에 대해서는 서로가 너무 적대적인거지. 처음에는 너랑 그래도 서로 이해를 하고 존중이 된다고 생각해서 만났건데 나는 나대로 너가 부정적으로 뱉는 말들이 쌓이고 너는 너대로 내가 들이미는 잣대들 때문에 더 부정적이어지고. 그래서 존중이 안되는게 문제인것 같다. 둘중 한명이 덜 민감하거나 둔하면 문제가 없을까 싶긴한데 그렇지도 않고. 너가 부정적인 말을 뱉게 된데에는 어쩌면 내가 먼저 잣대를 들이밀거나 은연중에 너를 그런 뷰로 보거나 너는 우리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것들 예를들어 옷 같은것도 나는 페미니즘 관점으로 끌고간다고 생각해서 더 그랫던것같다. 너는 그냥 나를 생각하면 그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데.
2-2 그렇다면 내가 가치관문제가 아닌 단지 너와 나의 이슈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자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자유가 상대방보다 중요한가? 지금 느끼는 내 감정은 그러하다. 생각이란게 나중에 바뀔수는 잇곗지. 하지만.지금의 내 감정을 속이거나 부정하진 말자. 지금의 나는 날 믿어주는 사람. 그래서 구속하지 않는 사람. 나도 상대를 그렇게 대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 맞지 않나 싶다. 물론 그냥 날 믿어준다는게 절로 그러라는건 아니고. 상대를 의심하거나 안좋은 잣대를 들이밀거나 존중하지 않는 식의 태도는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지금은 그렇것도 쌓이고 서로 다름도 쌓여서 상대는 서운함을 나는 답답함만을 느끼는 관계같다. 결정적으로 젠더 가치관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연애할때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고. 많이 싸우고 많이 다르다는걸 느끼고 나니 무언갈 노력하기 보다는 그만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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