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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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imdonjuin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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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추억을 재현해도, 아무도 눈물짓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곳엔 그 때의 내가, 그 때의 니가 없기 때문이야.
추억은 사건과 인물에 동시에 깃드는 것.
림보(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갈 때, 그 사건 하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그 때의 내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추억 하나 있다면, 죽음도 별거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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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1point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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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괴물> 재밌죠. 사람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인데요.
12.3내란 이후 최상목 권한대행 100일 시간 동안 벌어진 파시스트의 행태를 보며 어쩌면 작금의 현실이 파시즘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의 정직한 현실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출신, 학벌, 부동산, 계급에 목숨 바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한국인의 욕망에 완성형은 장기집권 독재를 위한 내란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버하는 걸 수 있고 과몰입일 수도 있어요. 어제 퇴근하고 들어와 얼른 탄수화물을 먹고 신경안정제, 소화제,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저는 독재 파시즘 국가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인생 책이 안네의 일기입니다. 안네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2차 세계대전, 히틀러, 나치, 파시즘, 유대인 학살을 공부했어요. 10대 시절에 저를 사로잡은 이 책으로 제 나름의 역사관이 생겼고 아시다시피 역사관은 개인의 가치관과 연결이 됩니다. 전 세계에 어디에나 있을 안네는 지켜져야 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있어요.
탄핵 각하되고 군대와 경찰을 자기 사람으로 갈아치운 후 임기 5년에서 20년으로 늘린 럭키 윤석열이 터키 대통령이란 사실을 어제 알았습니다. (럭키 윤석열 다음은 럭키 김건희인가요.) 우리나라는 대통령 자격 박탈로 탄핵 인용되겠지만 국힘당과 전광훈의 극우세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구속 취소 뉴스에도 겁먹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김건희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무리가 법을 초월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능히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동안 그래왔던 한국 현실이 있었잖아요. 국힘당 공천을 받고 싶어 탄핵무효를 부르짖는 전한길과 그동안 어떻게든 윤석열 라인을 타고 싶어 했던 진중권은 한국의 이면을 보여주는 인물이자 현상입니다.
동성애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아이라서 여성이라서 노인이라서 없는 존재 취급하면 그만인가요. 우와 열,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눠 정책을 펼치는 지도자는 언제나 당신의 편에 서있을 것 같은가요? 제가 장담하나 할 수 있어요. 우열한 정상 시민에 머무르고자 약자를 먹어치우는 괴물을 자청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어른입니까? 저는 나이가 마흔셋인데 정신은 열아홉 스무 살 어딘가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 비해 조금 더 짊어지는 의무와 책임이 있고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연기력이 늘었다는 것 정도 아닌가요. 그런데 아이와 어른이 다른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죠. 어른은 폭력을 대물림하지 못하게 끊어낼 수 있습니다. <괴물> 영화 속.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산을 뛰어올라가던 엄마와 남교사의 행동만큼은 할 수 있어요. 스스로에게 다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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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yun84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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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봤다. 아내가 보고 싶어해서 10년 전쯤에 봤던 걸 다시 봤다. 옛날에 봤던 걸 다시 보면 그땐 못 봤던 걸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그랬다.
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끼는 듯하지만 내심 못마땅해한다. 너무 어린 나이의 아들은 그 나이 답지 않게 어른스럽다. 아버지의 마음에 어떻게든 들고 싶어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안하게 한다. 아들은 뜬 눈으로 잠자리에 누워 눈알을 굴린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부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새는 밤이라니.
아니 이런 장면이 있었다니. 아니, 나의 어린 시절이 저기 있네?
어쩌면 이 사진은 내가 어린 시절에 바랬던 어느 장면을 찍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짜증스럽지 않은, 나에게 대체로 만족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언제 이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분노를 터뜨릴지 모른다는 불안함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이토록 신기하고 흥미로운 세상을 안심하고 만끽하는 그런 장면.
하지만 애석하게도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있는 삶 같은 건 없다. 나도 그랬던 것뿐이고 아버지도 그랬던 것뿐이다. 따지고보면 사진 속 주인공들의 사연도 사실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들 그렇게 엇비슷하게 산다. 그냥 뭐, 이제와서는 조금 가슴이 저릿하고 아쉬울 뿐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어른이 되면서, 나는 나대로 살아가고 아버지��� 아버지대로 사니까. 더는 무서움에 떨며 이불을 뒤집어 쓰던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그걸로 됐다.
오래 전 아버지 생각은 그만하고, 나나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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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rinyan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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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 75> 아침해를 다시 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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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프닝 타이틀부터 75라는 숫자가 블러처리 되어있다. 타이틀 시퀀스에서 제목 폰트와 무빙도 서사를 암시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나이, 75'
22년도에 BFI영화제에서 <슬픔의 삼각형>과 함께 예매하려다가 비행기 시간표 변경떄문에 티켓팅을 포기한 영화다. 그 뒤로 잊고 지내다가 작게 알음알음 홍보가 뜨길래 검색해보니 시간에 맞게 COEX 쪽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침 그 날 저녁에 맡은 수업도 없고, 점심에는 드라마 연출부하는 친구와 삼성역 근처에서 피자먹는 약속이 있어서 여러모로 동선과 시간이 절묘하게 딱 떨어졌다. 딱 맞게 착착착! 이럴 때 느끼는 소소한 쾌감을 가지고 기분좋게 보러갔다.
영화가 75세 이상 안락사를 정부가 적극 장려하는 디스토피아적 코드의 SF 영화라그런지 보다가 불편한지 나가는 분들도 있었다.
서늘하고, 먹먹했지만 SF 하면 떠올리는 미래적인 느낌보다는 '진짜 요즘의 일본 사회 젊은 세대의 머릿속에 저런 생각들이 은연중에 깔려있나?'그런 질문이 스쳤다. 현실적이라서 더 무섭다.
전에 이 영화의 단편 버전을 몇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오랜만에 신인 감독들의 옴니버스형 단편들을 모아 제작을 맡았다길래 챙겨보았는데, 그 중 이 작품만 장편화가 된 것이다. 그 때는 장편서사 보다는 단편 소설의 한 장면 같았는데 장편화된 버전에서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과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따라가다보니 이야기가 훨씬 깊어졌다.
안락사 당한 노인들의 소지품을 수거해서 분류하는 장면은 <쉰들러 리스트>의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유럽의 수용소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공장의 모습과 흡사했다. 영화를 보고 몇 일이 흘렀는데 여운과 잔향이 남아있다. 내 삶을 거꾸로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영화라는 무지개를 쫓아 청춘을 공중에 흩뿌리고 있는 건가? 언젠가 다가올 죽음과 유한한 시간성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지내는 게 맞을까?
얼마전 카페에서 옆 테이블 아주머니들이 커피잔을 탁 내려놓으며 농담조로 하시던 소리가 기억난다.
'나이드는 건 슬픈데, 돈 없이 나이드는 건 더 슬퍼.'
'그건 아주 서글프지.'
그 땐, 내가 사는 동네가 워낙 학원가라 각종 공부 정보 공유와 서로의 엄친아, 엄친딸 자랑과 비평 삼매경이 흔하게 들리는 장소성의 맥락에서 나온 수다떨기 테마주 하나라고 그냥 넘겼는데... 이 영화와 연결지으면 절대 웃긴 농담이 아니다.
슬픈농담. 왜 나이드는 것을 서글프게 여기는 사회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걸까?
평생 중학교 역사 선생님을 하다가 얼마전 은퇴한 엄마를 보며 노인이 된 엄마의 모습을 종종 상상한다.
영화 이야기를 하니 일본은 원래 그렇다며, 예전 사무라이 무사 계급 정권-군국주의 시절부터 노인들이 노동력 떨어지면 조용히 산에 버리고 오거나 유기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카더라설이라 신빙성 문제가 있어서 검색을 해 보니 일본 고전문학의 한 설화가 나온다.
우바스테야마 (姥捨て山)는 '할머니를 갖다 버리는 산'이란 뜻으로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노인 유기 설화이다.
〈시오리형〉(枝折り型) 설화 -> 입을 줄이기 위해 늙은 부모를 업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올라가는 동안 부모는 계속해서 시오리(산���나 숲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통과한 길을 표하는 일)를 만들거나, 혹은 쌀겨를 땅바닥에 뿌린다. 그 모양을 본 아들이 궁금하여 왜 그러냐고 물으면 부모는 “네가 산을 내려갈 때 헤메지 않게 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에게 가책을 느낀 아들은 부모를 데리고 산을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난제형〉(難題型) 설화 -> 어느 번의 영주가 연로하여 노동을 할 수 없는 인구는 불필요하므로 산에 유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감히 법을 어길 수 없어 울면서 늙은 부모를 산에 갖다 버리려다가, 결국 버리지 못하고 몰래 집의 마루 밑에 숨겨둔다. 얼마 뒤, 이웃 번에서 몇 개의 어려운 문제를 내면서, 이 난제를 풀지 못하면 쳐들어와 멸망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그런데 마루 밑에 숨어있던 늙은이들의 지혜로 문제를 풀게 되고, 노인들의 가치를 알게 된 영주는 법을 철회하고 노인들을 소중히 대우했다는 이야기다. (출처: 위키백과)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인데 고려장이 일제국주의 시절 조작된 걸 수도 있다는 가설이 단순 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근거 1, 2는 될 수도 있겠다. 어릴 때 도쿄나 오사카에 갔을 때 제일 놀랐던 건 지하철 탔을 때 일본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물론, 몸이 불편한 사람이 도의상 우선 사용하는 좌석같은 형태가 있지만 노약자석이 '무조건적'으로 보편화 되어있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생소한 풍경이었다. 전쟁과 식민지 프론티어를 늘리던 시절의 사상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일까? 서늘하고, 씁쓸하다.
그러나 일본사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사회도 장유유서, 노인공경이 사회적 슬로건으로 형식적으로나마 사람들의 에티켓에 베여있지만... 어쩌면 겉포장에 자기만족일 뿐 우리가 사는 커뮤니티의 내장 속속들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무관심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 가을 성북 청춘 불패 영화제에서 '집'이라는 공간에서 존재와 커뮤니티의 풍조를 고찰하는 영화들을 하나의 섹션으로 되어있어 본 적이 있는데 내 옆자리 감독님이 '노인 고독사'에 관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수상에 이름을 올렸다. 그 고독사 현장의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며 홀로 남겨 죽은 이의 빈자리와 지난 시간을 거스르는 메세지 강한 작업이었다. 유품정리사들이 맡는 냄새란 어떤 것일까? 그 사람이 젋고, 건강하던 시절의 사는 모습은 어땠을까? 나는 가끔 뉴스나,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소재로만 그것을 슬쩍 볼 뿐 지속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금은 더 직접적으로 나와 내 이웃의 인생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확신있게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하면 지금의 삶을 다른 각도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스위스로 안락사 여행을 택하는 소재의 영화가 근래에 종종 개봉하고 있다. 정말 내 스스로 나의 끝을 선택하고 싶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 속 기계 오작동으로 병원에서 나와 해를 바라보는 미치 할머니의 뒷모습을 담은 샷은 이 영화의 백미, 절경이다. 황혼은 시간을 모르고 보면 떠오르는 아침 해 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지만 석양은 아침처럼 강렬한 해를 보며 새로운 하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78세 여성 미치는 내일 다시 아침을 맞이할 자유를 꿈꾸며 해를 마주한 채 내일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뻔하더라도, 나는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아무리 디스토피아라도 자신만의 한 줄기 빛, 유토피아는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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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gri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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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을 보고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둥둥 떠다닌다. 한국에 살 때는 영화를 보고 집에 오자마자 하현이나 하빈이에게 쏟아냈을 텐데 내 생각을 가감없이 쏟아낼 수 없어서 그들이 보고싶었다. 그래도 여기에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효주가 있어서 다행이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효주에게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효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솔직히 오랜만에 우는 김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같이 꺼내어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영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볼수록 그가 하고자하는 말이 참 여전하고 갈수록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를 더 선망하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호함. 우리는 어떤 사건과 사람에 대해, 선과 악에 대해 결코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 거기에 더해서 이 영화에서는 "당신이 실어나르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영향들을 만들어내는지 알고는 있냐"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괴물은 우리가 뱉어내는 말들일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해내는 '미나토', 선생님으로서의 '호리'와 개인으로서의 '호리', '요리'의 초연함, 부모의 말을 고스란히 삼켜야했던 아이, 너무 빠르게 덮혀버리는 것들, 이 사회를 수없이 겪은 교장선생님의 놓아버리기, 강요되는 편견과 정상성의 폭력, 실어나르는 것, 어떤 사건에 대해 쉽게 단정 지어버리는 것, 사람들의 괴물찾기, 우리가 알고있는 것에 대한 왜곡 가능성,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십 정보들.
날 가장 울게 만든 것은 요리라는 아이의 초연함 이였다. 아이가 속해있던 학교와 집이라는 사회에서 아무런 죄 없이 괴로운 어떤 영향들을 그대로 삼켜내야만 했던, 심지어 그런 것들을 혼자 삼켜내면서도 여전히 씩씩하고 초연한 아이의 모습이 나를 너무 울게 했다. 그런 요리가 너무 강인해보여서 어느 면에서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날 가장 괴롭게 만든 장면은 흘러내리는 진흙을 치우는 손의 속도보다 흘러 덮혀지는 흙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무리 치워도 진흙이 끝없이 덮혀지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사회를 너무 현실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실제로 뇌가 아렸다. 가끔 나는 진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덮히고 너무 쉽게 변형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속도가 진실을 보려는 노력의 속도보다도 너무 빨라서 실제로 진실이 금방 흐릿해져버린다. 심지어 이제는 사람들이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기는 하는가 싶다.
우리가 실어나르는 말들이 얼마나 진실이고 얼마나 왜곡되어 있을 수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고 말을 실어나르고 있는지, 우리는 뱉어내는 말들로 얼마나 많은 괴물을 낳고 있는지,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어떤 편견에 갇혀 있는지, 내가 속한 사회와 떠다니는 정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지 생각해볼 만한 질문들이 복잡하게 떠다닌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일 하고 싶다는 마음에 방향을 넌지시 던져준다. 이 전에 내가 단순히 나의 아이에서, 더 넓은 범위의 아이들로 목표를 넓혔고, 그리고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어쩌면 나는 아이들을 돕는 힘을 모으는 일을 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때는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줄만한 사람인가. 가르침?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가르치는 것인가? 그건 아니였다. 단순히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어린 시절처럼 어른이 부재한 또 다른 어린 미현이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였다. 내가 그러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것을 위해?
아무튼 영화보고 떠다니는 생각들을 그냥 좀 적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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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wayfromme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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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건드릴 것인가 (사카모토 류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창작자의 마음을 유추하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스스로가 느낄 때 영화는 세계를 담을 수 있음을 믿게 된다. 오해로 점철됨은 결국 보지 않은것을 보았다고 믿지 말라는 경고 같았고, 그럼에도 보여지는 내밀한 진실은 영화만이 가질 수 있은 마법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겨지고 스스로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자. 착각하지 말고, 진실을 향해, 한 사람은 한 세계임을, 고유함에 관하여, 사카모코 류이치를 기억하며 怪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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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shopxshop6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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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멀티테이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에 출연한 그는 독특한 가장 역할로 등장해 인상깊은 연기로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특히 일본인인 그가 ‘하얼빈’에서 일제 억압을 상징하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 역할을 맡아 그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자국의 역사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실존 인물을 흔쾌히 맡은 그의 용기에 국내 관객들도 많은 응원을 보냈다.우민호 감독은 ‘하얼빈’의 매체 인터뷰를 통해 릴리 프랭키의 캐스팅 과정을 털어놓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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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uam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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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매의 잔잔한 일상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일시 : 2023.11.3. 금. 19:30장소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연출 : 이준우출연 : 박하선, 서예화, 강해진, 설가은, 오한결, 이정미, 이강욱제작 : 라이브러리컴퍼니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관람했어요. 원작은 고레에다 히로카즈これえだひろかず是枝裕和 감독의 영화지요. 2015년에 개봉을 했었네요. 벌써 8년이나 지났어요. 당시 이 영화를 보고 참 잔잔한 기분이 좋았었는데 이제는 내용도 다 잊고 생각도 안나더라고요. 연극을 보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무대로 가져온다는게 참 신선합니다. 흔한 작업은 아닌데 말이죠. 고레에다 히레카츠이 이미지를 쓰게 되는 날이 올줄이야….트위터에서 훔쳐왔습니다. 하도 오래되서 어떤 분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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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back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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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느 가족’
올해 칸느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영화의 한국 개봉 제목에 불만의 소리가 많은 듯 하다. ‘만비키 가족’이 원제인 영화는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개봉했다. 좀도둑을 뜻한다는 ‘만비키’를 ‘어느’로 대체하는 게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이 가족은 어떻게 보면 가족을 도둑질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원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제목이다. 하지만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래 ‘어떤 가족’으로 하려다가 ‘어느 가족’으로 고쳤다는 뒷얘기를 듣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어느’ 가족에게나 다가갈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세계에서 가족은 해체를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어야 한다. 동시에 원래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유사 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어느 가족’의 경우 각자의 사유로 해체를 경험한 구성원들이 모여 이룬 유사가족이다. 착각은 말아야 한다. 혈연의 굴레를 벗어난 이들이 이룬 대체 가족의 따스함을 긍정하기만 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유사 가족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허술한 발판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를 묘사하는데 더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순간들은 불안한 시스템위에서 영속적일 수 없다. 극중에 등장하는 불꽃놀이처럼. 더욱 슬프게도 이들은 불꽃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소리로 들을 뿐이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한 시절에도 이들 가족은 본질(불꽃)은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번 더 변속을 시���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곳은 ‘아무도 모른다’가 데려갔던 데를 빼닮았다.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라기 보다는 먹먹함이다. 우리는 이 먹먹함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아들 쇼타(죠 카이리)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막내 린(사사키 미유)의 클로즈업 숏으로 끝난다. 이건 마치 “이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장차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질문이 왜 우리를 먹먹하게 하는가.
린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로부터 학대받던 아이이다. 추운 날씨의 저녁에 집밖에 홀로 방치된 아이를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사무가 따뜻한 고로케를 전해줄 때 린이 받은 것은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신이 원해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친엄마는 린을 집 밖에 내쫓지만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함께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린의 팔에 있는 상처는 노부요의 그것을 닮아 있다.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그들은 모녀가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아키(마츠오카 마유)는 언니로, 하츠에(키키 키린)은 할머니로 자리잡는다. 우리가 영화의 전반부를 통해서 목격하는 것은 린이 어떻게 가족을 재구성해 나가느냐에 다름아니다. 중반에 벌어지는 쇼타의 사건을 계기로 린이 가졌던 이 유사가족은 다시 해체되고, 친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과 미디어는 세상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간악한 유괴범들에게서 벗어나 엄마의 품으로 돌아간 아이의 이야기로.... 처음 오사무에게 발견되었던 때와 같은 곳에서 린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다.
쇼타는 오사무, 노부요 부부가 낳지 않았지만 함께 살고 있다는 점에서 린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인물이 그려지는 방식과 구조는 정반대이다. 린의 경우와 달리 우리는 쇼타의 친부모에 대해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알 수 없다. 영화의 전반부를 통해 린이 가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보았다면, 후반부를 통해서는 쇼타가 가족에게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벗어나는 과정을 보게 된다. 린이 시바타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비로소 행복해지기 시작했다면, 쇼타는 린이 오기전까지는 의문없이 행복했었다.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들어온 린을 보며 비로소 가족이 행하는 온갖 나쁜 일에 윤리적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가족 구성원 모두 ��감을 갖기엔 영 미심쩍은 인물들이다. 애초에 할머니의 연금에 부정하게 의지해 모인데다, 아버지란 사람은 노동의 의지가 전혀 없는 좀도둑이고 엄마 역시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다. 린에게 옳지 못한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 이 영화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그 지점부터 아마 쇼타는 린을 ‘동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린을 보호하고자 한 ��타의 행동은 필사적이었으나 결국 그로 인해 이 가족은 전체가 해체된다. 사실상 플롯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쇼타와 오사무의 장면은 영화의 요약이기도 하다. 눈내리는 밤 어둠속에서 예전처럼 두 사람은 눈사람을 함께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메라는 날이 밝고 해가 뜨자 흉물스럽게 녹아 내린 눈사람을 기어이 보여주고야 만다. 감옥에 있는 엄마는 쇼타를 불러내 처음으로 어디서 데려왔는지를 알려준다. 제지하는 아버지에게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정말로 나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느냐 묻는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답하고 이제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로 돌아가겠노라 말한다. 이 장면들이 이어진 후 마지막 씬에서 쇼타가 하는 대사에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자신이 일부러 잡혔다는 내용이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이는 쇼타가 오사무에게 건네는 최선의 위로이다. 그러니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그러니, 멀어지는 쇼타의 뒷모습에 어떤 안부를 더해야 하는가. 저토록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는 린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가.
말을 할 수 없으니 더 먹먹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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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kou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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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imdonju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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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악독한 괴물이 숨어있을지 범인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저 괴물 탓을 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의 치졸함도 부박함도 잔인함도 몰이해도 이기심도 그냥 우리의 단편화된 뒷모습인 것을. 괴물이라는 망토를 썼다는 것을. 그럼에도 빛나는 햇살 아래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는 너희를 봤을 때, 다 인간이구나. 그냥 이건 인간영화 였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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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jinaaa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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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 to watch:
Barbara - Christian Petzold
Transit - Christian Petzold
Martin Eden - Pietro Marcello
Promising Young Woman - Emerald Fennell
In the Aisles - Thomas Stuber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 증국상
메기 - 이옥섭
모어 - 이일하
The Power of the Dog - Jane Campion
The Lost Daughter - Maggie Gyllenhaal
A Summer's Tale - Éric Rohmer
Pauline at the Beach - Éric Rohmer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 박찬욱
Water Lilies - Céline Sci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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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ybi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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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혼자서는 채울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꽃도 암술과 수술만으로 부족하고 곤충이나 바람이 있어야 수정된다.
생명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공간을 다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아마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총합
하지만 우리는 서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을 알게 모르게 조각나는 것과 함께 무관심으로 있는 관계
세상이 불안정하게 만들어진건 왜일까?
꽃이 피어있다. 가까운 곳에 곤충의 모습을 한 타인이 빛을 쫓아 날아 다닌다. 나도 어떤 때는 누구를 위한 곤충이었을까?
당신도 어느 때는 나를 위한 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공기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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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rinyang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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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두려움과 공포는 잠시 뿐이고, 곧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삶을 잠시 멈추고, 푹 쉬며 나를 돌아보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름엔 장편소설을 한 편썼다. 세 편의 중단편이 옴니버스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구성인데 <장밋빛 새벽에> 는 원래중편 누벨라였고, <슈팅백>은 시나리오를 위한 트리트먼트, <4 피트 박스>는 미대에서 그린 설치미술 작품을 위한 드로잉이었다. 가만히 집에 있었더니 그간의 노트와 스케치북들을 펼쳐보게 되더라. 늦겨울 초봄 무렵부터 일상생활 틈틈이매일 몇 시간씩 쓰고, 마무리 정리작업을 하던 7월엔 최소한의 외출 외엔 내 방 책상 데스크 앞과 글쓰던 카페를 벗어나지않았다.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를 바라며 한 출판사에 투고했는데 결과는 겨울에 발표라고 한다. 결과가 어떻든 난 이 과정에 만족한다. 가슴이 조금 넓어졌다고 느낀다. 늘 ‘서른 즈음엔 해야지’ 하고 미루던 작업들을 꺼내서 하나씩 해 나가는 게즐겁다.
해야한다고 못을 박아둔 개인 작업들 중엔 문학도 있고 미술도 있는데, 사람들과 함께 하다보면 매 순간 함께하는 ‘그 사람’들과 꼭 함께 만들어야하는 작품도 있다. 이번 가을에는 같이 연기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작은 단편 영화 한 편을 찍기로 했다. 작은 영화지만 보이는 메세지와 열정은 아주 뚜렸했으면 좋겠다. 스물 초반도 아니고, 아직 서른도 아닌 그 중간어디즈음에서 불확실한 상황에도 꿈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녹여내고 싶다. ‘인연’이란 건 불교 다니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일상의 매 순간들속에 작은 감사함들을 느끼는 일이 많아질 수록 그 말의 의미가 조금 더 각별해진다. 현재에 충실하고, 있는 그대로 포옹할 줄 아는 지혜를 갖기를 원한다.
첫 소설이 될 줄 알았던
<청춘혁명(The Youthquakers )>은 제일 먼저 쓰지를 못했다. 이마 두 번째 소설로 완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경험이나 주변의 실제 벌어진 일들을 소설로 옮기는 일은 감정적 거리감이 필요한데 아직 시간이 덜 흐른 것 같다. 아마 세 번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1934 Ms.Lee 이여사> 를 먼저 쓰기로 했다. 한국 드라마틱한 근대사를 아우르자면 철저한 역사고증을 위해 녹취와 역사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지만 그래도 완벽한 픽션이기에 감정적 부담은 덜 하다.
영화를 찍을 땐 그 대본에만 온 집중을 하느라 다른 잡생각이 나지 않지만, 촬영을 마치고나면 찾아오는 공허감에 마음이갈팡질팡할 때가 있다. 문학은 그런 시간을 메우기 위한 내 나름의 습관이다. 다른 이의 세계를 읽기도 하고, 내가 상상한세계를 종이위에 풀어나가기도 하면서 캐릭터를 경험하는 시간이 촬영장 밖으로도 연장된다. 그리고 내가 뭘 그려야할지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요즘은 크게 페인팅을 벌리지 않고 있는데, 대신에 작은 드로잉들을 계속 하고 있다. 부담이 없어서 좋다.장수가 모이면 몰아서 페인팅을 할 계획이다.
<도쿄타워>를 보면서 왜 무사시노 미술대학 나온 사람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단골출연하는 칸영화제 배우가 되었을까? 하는 물음의 답을 봤다. (*릴리 프랭키는 도쿄타워 작가이면서 영화배우고, 그림을 그리며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중이다.)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도 하고, 그림들을 그려 팔거나 촬영장에 가서 출연료나 광고모델비를 받으며 생활은 어찌어찌 흘러간다. 그냥 매 주, 매 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냥 다 한다. 불안하다. 대신에 작품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날은 없이 산다는 거, 딱 그거 하나 좋다. 작년 이맘때즈음 퇴사를 하고, ���작정 한독립영화 촬영장에 가서 연출부도 하고 단역도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1년을 살아보니까 다음달엔 ‘어떡하지?’ 전전긍긍하면 그 다음주엔 반드시 해결할 구멍이 생겼다. 남들한테 막 추천할 만한 삶은 아닌데, 그래도 스스로는 삶의 구력이 생기면서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은 환경탓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태도를 선택하는지에 달렸다. 주어진 궤도와 속도에 맞춰 끙끙 거리기 보다는 여기 저기 구경하면서 내 맘대로 사니까 정신 만큼은 자유롭고 편하다. 월급 받을 땐그만큼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쓸데없이 물욕만 커졌는데 요즘은 크게 사치만 안하면 만족하고 산다. 물건 갖는 것 보다 작품 만들며 사는게 더 좋으니까 뭐 하나는 포기를 해야한다. 사람은 손과 팔이 두 개 뿐이라 원을 하나밖에 못만든다. 그 품 안에 안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필요한 그 한 두 가지를 위해 다른 건 희생하기 마련이다. 그게 건강이 될 수도있고, 돈이나 기회, 직장,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 시간, 휴식, 창작욕이 될 수도 있다. 뭘 안고 갈 건지는 내가 선택하면 된다. 거기에 맞은 책임을 지면서. 어른이 되는 준비를 하는 건 온갖 달고 쓴 것들을 다 먹고 소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뭐가 나에게 좋은지, 안 맞는지 알게 되겠지. 한 번 뱉어낸 건 다신 입에 넣지 않게 되는 것 만으로도 쓴 경험엔 가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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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befor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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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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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전에는 근처에서만 이사를 했는데 처음으로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게되었다고 하자 작은 누나랑 엄청 울었다. 동네 놀이터와 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는게 슬펐었던 것같다. 종업식이 끝나고 집에 오니 집이 텅 비어져있었고 이사를 가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영영 이 동네를 오지 못할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직도 살고 있��� 고향같은 이 동네로 돌아왔다.
6학년이었던 작은 누나가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작은 누나는 들떠보였다. 재클린 윌슨의 잠옷 파티를 재밌게 읽은 작은 누나가 책 주인공처럼 잠옷 파티를 하게되서 그랬을 것이다. 작은 누나는 친구들과 볼 영화 비디오를 대여했고 과자도 샀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친구네 부모님의 반대로 작은 누나의 잠옷 파티는 전날 취소되었다. 주인을 잃은 과자와 영화 비디오. 하는 수없이 작은 누나는 나와 과자를 먹으며 비디오를 틀었고 티비에는 아무도 모른다가 재생이 되었다.
아이들이 나오는 실화 바탕의 일본 영화라고만 작은 누나에게 듣고 영화를 봤다. 아무도 모른다는 처음으로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였고 그때 당시��� 본 가장 어두운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 작은 누나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왜 이런 영화를 친구랑 잠옷 파티하면서 볼려했냐고 묻자 작은 누나도 이런 영화인 줄 몰랐다 했다. 평점이 높고 아이들이 주인공이라서 골랐다고 했다. 차라리 잠옷 파티가 취소된것이 다행이라고 서로 말했다. 만약 잠옷 파티가 취소가 안되었으면 나는 초등학생때 아무도 모른다를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무도 모른다를 본 것은 값진 경험이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영화 정보를 찾아보게 되는 자양분이 되었다. 잠옷 파티를 반대한 작은 누나의 친구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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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teatro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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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よりもまだ深く(태풍이 지나가고), 2016 _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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