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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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간다 나는 남자다
gandaganda naneungganda naneun namjada silsumaneun naeinsaenga silpaehajin anatda nan neomeojyeoseo pinummullado bureojijin anatda nan honjaraneun oeroume dangdanghage matseobonda dasigeonneun nauigireun, challanhage bitnarira, danhambeondo swipjianta danhambeondo gongjjaeopda naeinsaengeun chiyeolhaetda duryeoulgeo ijeeopda silsumaneun naeinsaenga, silpaehajin anatda nan, neomeojyeo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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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Kennedy in a fedora hat ( Fatty's Reckless Fling / Woman Wanted )
“이제 눈치챘는데, Fatty’s Reckless Fling 첫장면에서 해리 맥코이는 엉덩이에 깃털 꽂히는 남자다! 난 그 옆의 잘 차려입은 신사인줄 알았는데!” (←21년 4월 15일 일기)
“바엔 전부 셋이고 술취한 사람은 누가봐도 1명인데 난 그 술취한 사람이 해리라고 전혀 생각못했다. 난 안 취한 잘생기고 건장한 쪽이 해리인줄 알았으나 그 사람은 그렇게 해리처럼 생기지 않았었고 (중략) 지금 보니 내가 처음에 해리인줄 알았던 바에 있던 잘생긴 남자는 에드거였다!(주연, 민타 남편 역)” (←21년 4월 16일 일기)
“전에 Fatty’s Reckless Fling의 웬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해리로 착각한 후 그 키 크고 잘생긴 남자인 에드거 케네디도 본격적으로 ‘에드거’라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에드거 케네디는 Fatty’s Tintype Tangle에서 루이즈랑 금실 좋은 거 볼 때부터 맘에 들었지만.” (←21년 6월 4일 일기)
#fatty's reckless fling 1915#woman wanted 1935#edgar kennedy#eddy with a cigar#edgar kennedy feature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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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일제히 조명이 켜지면서 튀어나오는 검은 형체들. 소년들은 전부 순식간에 제압당한다. 힘들이 엄청나서 저항도 불가능할 정도)
?: 이게 누굴까나-(소피엘을 잡은 장난기 많은 여성의 목소리)
??: 남자다! 남자들이야! (다니엘을 잡고있는 더럽다는듯 짜증내는 여성)
???: 남자?! ....(츄르릅-하고 입맛을 다시는 살짝 허스키한 저음의 여성 목소리)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청년 네명이 쭈뼛거리면서 들어온다. 어른의 상태여도 그들이 누군지는 입은 옷의 스타일과 외모로 추측이 가능했다. 청년 네명 모두 건장한데다 훤칠한 키에 입은 옷도 어른스럽고 성숙했다.
마태엘은 망토가 달린 검보라�� 자켓을 입고 있었고 소피엘은 그가 소년이었을 떄 입었던 드레스에서 허리의 리본이 없는, 잘 사는 귀족집안의 여자들이 입을 만한 긴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들의 ���에는 자잘하게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었다. 게다가 그 두명의 청년은 26살, 20대 말기의 모습이었다.
다니엘.P (팬텀)은 검고 흰 색깔에 그들의 구역이 세겨진 빨간 로고가 있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다니엘.F(펜튼)은 치마에 피의 꽃과 리본 장식이 풍성하게 달린 긴 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엔 잘 다듬어진 염소수염이 나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33살 30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태엘- 어이.
소피엘- 아하하... 음... (어색하게 웃어보였지만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다니엘.P- 우리 세계를 만든 신께서... 만우절이라고 장난을 쳐서 이런 모습이....
다니엘.F- 너무.... 낮서나....?
(그걸 보고 도망치는 메이드+소동을 듣고 온 친위대 병사 둘)
".......? 뭐야 얘네들"
"(신분증을 달라는듯 손을 까딱까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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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우리가 뷔폐를 먹어야 하는 이유
성경 말씀에 의인이 세사람만 모여도 그자리에 내가 임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뷔폐를 드시는 겁니다 물론 저는 안먹어봤는데
아무도 초대를 안하더라 입니다
다들 지금까지 애 등기에서만 관리하시다 제주가서
본래모습으로 돌아왔더니 성별이 바뀌어서 그런��니다
KBS 나는 그 때도 남자다
그만큼 예산범위 오차범위가 크다 입니다
PD들만 고생 합니다
방송법 제 22조 동류조항 의료법 신설 방송분파법 입니다
국회에서 망치 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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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스템에서 대중적인 것(The Popular)
CULTURAL STUDIES 17(2) 2003, 275-299
Urs Stäheli
번역 – 조은하, 박��우
개요
이 논문은 정치적 시스템에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과 대중적인 것에 대한 시스템 이론적 재독해를 제안한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루만의 반 휴머니즘적 개념은 대중적인 것에 대한 논의의 프레임을 다시 잡는데 도움이 된다. 이는 인코딩과 디코딩의 심급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성(connectivity)’의 특별한 양식에 의해 정의된다. 이질적인 소재들([Mars Attacks!], 군중 심리, 민주주의 이론)에서 끌어내, 대중적인 것의 문제는 기능적 시스템이 시스템의 보편성을 위반하는 무언가를 재현해야만 할 때 제기된다고 주장된다. 시스템이 하나의 시스템이 되기 위해 배제해야만 하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하이브리드’로, 그래서 한 편으로는 더 나아가는 보편화에 대한 기회이자, 다른 한 편 시스템의 보편성 자체의 위협인 하나의 보편성을 지적하면서 재등장한다. ‘대중적인 것’은 그래서 이런 두 가지 차원을 절합하는 하이브리드적 위치를 획득한다.
키워드
Popular culture; cultural studies; Niklas Luhmann; Political system; crowd; inclusion/exclusion
Mars Attacks! (Gems, 1996)의 플롯은 지구의 거주자들이 화성으로부터 온 침공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이야기다.[1] 화성인들은 세계에 잇는 모든 TV를 손에 쥔다. 미국 대통령은 화성 대사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듣는 수많은 청취자 중에 있다. 영부인은 역겨워 하지만, 대통령은 화성인이 온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외계 생명체 – 사람들은 그걸 좋아할 거야’ (Gems, 1996; 27) 비록 와이프가 화성인에 의해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은 이미 사람들이 그가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를 알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그것…음…그들과 만나길 기대할 거야’ 대통령의 파퓰리즘(populism)은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기대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그가 결코 실망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화성인과 대중(the people)이 대통령의 실제 선택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든 TV 스크린에 나타나고, 수많은 군중(crowds)이 사막에 UFO가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의 정부는 화성의 대사와 접촉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최초의 외교적 협상은 실패했다. 화성인들이 평화를 위해 왔다고 강조했지만, 그들은 오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결과적으로 하얀 평화의 비둘기를 죽인다. UFO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흥분하고 즐거웠던 군중은 충격을 받았고, 증발되어 버렸다. 훌륭한 다 문화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처럼, 미국 대통령과 자문들은 이를 단순히 기호적, 그리고 문화적 오해로 읽는다. 그들이 선한 믿음은 그렇지만 결국 두 번째 공식 회의에서의 재난으로 이어진다. 화성인들은 모든 미국 의원들을 날려 버렸다.
Mars Attacks! 은 정치, 파퓰리즘, 대중 문화(popular culture)에 대한 아이러니의 이야기다. 화성인과 미국 정치 시스템의 관계는 포함과 배제의 고전적 문제를 나타낸다. 먼저 화성인은 정치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하게 배제된다. ‘방울뱀과 비명을 지르는 까마귀를 섞은 듯한’ (Gems, 1996; 100), 그들의 이상한 소리, 혹은 어떤 리뷰어가 이야기한 것처럼 목 졸리는 푸들 같은 화성인의 소음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번역 컴퓨터만이 그들의 소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독된 메시지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평화롭게 왔다!’ 번역의 과정은 화성인을 정치 시스템에 포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케이시 장군은 ‘나는 화성인이 외국의 고위 인사처럼 다뤄지길 바란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Gems, 1996; 100; 강조는 저자) 다시 한번 결정적인 것은 화성인의 메시지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 가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전체 세계의 기대다.
Gems의 소설에 기반한 Tim Burton의 영화 Mars Attacks! 은 이에 대해 도착 장면을 시각적 드라마투르기를 통해 보여준다. 실제로 화성의 우주선을 보기 전에, 다가올 사건에 대해 완전한 기대로 가득 찬 얼굴의 수 많은 클로즈-업을 보게 된다. 이는 사막의 군중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흩어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스펙타클한 도착을 기대하고 있는 ‘매스 미디어’를 포함한다. 도착 지점에 있는 군중과 TV 시청자를 하나로 묶는 이 전역적 기대는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화성인을 공식적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외국의 대표라는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게 한다.
그러나 본 것처럼, 화성인을 포함하는 일은 실패한다. 이것은 대사가 연설을 시작하도록 제안 받았을 때 가장 충격적으로 보여진다. 커뮤니케이션 대신에 그는 레이 건으로 의원 전부를 전멸시킨다.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Kessler 교수는 정신을 놓는다. ‘대사님 제발! … 무엇을 하십니까? 이건 논리적이지 않아요! 이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Gems, 1996; 187) Kessler의 말은 포함은 결정적으로 실팼음을 보여준다. 대사의 커뮤니케이션은 비논리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시스템의 지평 안에 놓여 있지 않다. 여전히 이야기의 ‘해피 엔드’는 있다. 왜냐하면 화성인에 맞서 때로 ���공적인 하나의 무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학, 군사, 정치적 시스템의 실패 이후에, 지구 거주자들을 생존할 수 있도록 한 건 늙은 Slim Whitman의 LP다. Whitman의 레코드에 노출되면, 화성인의 머리는 빠르게 폭발한다. 기능적 차이화의 모든 수단은 화성으로부터의 알려지지 않은 침공에 맞서는데 실패한다. 그들에 맞서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건 오직 대중 음악(popular music)이다.
일견하면 이 스토리 라인은 다양한 Cultural Studies의 학파들에 특징적인 ‘문화적 파퓰리즘 (cultural populism)’에 잘 맞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파퓰리즘은, 일상적인 사람들이 상징적 경험과 실천은 대문자 C의 Culture보다더 분적적이고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대중 문화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적 가정이다.’ (McGuigan, 1992: 4) 이런 관점에서 대중적인 것은 저항의 공간이 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헤게머니 블록을 파괴하고자 하는, 구별에서 전복적 편에 있는 파워 블록/대중(people)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Fiske, 1989)[2] 그래서 Mars Attacks! 의 문화 파퓰리즘적 독해는 대중 문화의 전복적 힘을 축하할 것이다. 마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오직 대중적인 것처럼.
그러나 그런 부드러운 내러티브는 Whitman의 아이러니한 사용을 간과한다. 그의 음악이 화성인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은 Whitman이 대중과 특권적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의 매스 컬쳐(mass culture)와 대조하여 ‘진짜’ 대중 문화의 예로 그가 자리잡기 때문도 아니다. Whitman은 ‘확실히 별을 날려 버릴 수 있는 팔세토 창법을 가진 남자’, 그의 밴드 Stardusters[3]의 이름에서 취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가진 남자다. 그래서 그를 그러한 성공적 무기로 만든 것은 그의 목소리가 지닌 형식적 구조다. ‘I’m Casting My Lasso Towards the Sky’는 화성인에 맞서 글로벌한 반격에서 사용된 노래의 하나다. 그것은 오래된 축음기 혹은 거대한 스피커를 갖춘 팬텀 제트기에서 노래를 녹음한 것은 프랑스의 수사였다. Whitman의 요들 보컬은 남겨진 초월의 유일한 형식 – 두 옥타브의 사용 -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대표한다. 그래서 구별의 융합을 상징하면서.[4]
* * *
Mars Attacks! 에 대한 시스템 그리고 담론 이론적 독해는 적어도 ‘대중적인 것’과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결정적인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5]
1. 무엇보다 먼저 대중적 커뮤니케이션(popular communication)과 ‘대중적인 것(the Popular)’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다. 어떻게 우리는 주어진 커뮤니케이션이 대중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
2.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정치의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시스템과 관계될까? 대중적인 것은 그처럼 직접적으로 제도화된 정치에 맞서는 힘일까? 대중적인 것은 정치적 시스템의 붕괴 이후에도 정치에 남아 있을까?
3. Mars Attacks! 은 아직 명시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그러나 화성인의 배제와 포함과 연결된 하나의 구별을 도입한다. 화성인과 대중 사이의 구별이다. 우리는 정치적 시스템에서 대중적인 것을 인식하기 위해 이 구별의 논리로부터 배울 수 있을까?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문화적 파퓰리즘’은 많은 문화 연구의 학파들을 ‘파워 블록’에 속하지 않았다고 정의되는 대중의 억압받음과 불이익의 경험을 다루도록 한다. ‘대중적인 것’은 ‘대중’이 지닌 헤게머니를 지닌 문화적 의미들을 재-절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하나의 이름이다. 대중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재-절합과 전환의 생산적 힘을 통해 특징 지워진다. (cf. 비판적으로 Morris, 1988) 그렇다면 대중은 사회적 동학의 중요한 자리가 된다. 파워 블록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다시 코드화하고 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대중이다.
그렇지만 대중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생산하고 재-절합하는, 우리가 ‘대중’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심급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런 커뮤니케이션은 엘리트와 전문가에 의해 생산되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르다고 다뤄진다. 커뮤니케이션의 탈본질화한 개념에 기반한 Niklas Luhmann의 시스템 이론이 ‘대중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다. 루만의 관점에서는 디코딩이나 인코딩하는 심급이라는 개념 만으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을 특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만(1994; 137ff.)의 커뮤니케이션 개념은 말하는 주체로서 ‘대중’의 가정을 배제한다. 루만이 분명하게 다른 것처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Luhmann, 1995a; 113ff.)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가 송신자에 의해 보내지고, 수신자에 의해 해독되는 일반적 모델로는 개념화되지 않는다. 그보다 커뮤니케이션은 하나의 창발적(emergent) 시스템으로 생각된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는 분석적 문제는 그래서 ‘송신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나 ‘수신자가 정확하게 이해했는가’가 아니라, 그 보다는 ‘어떻게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커뮤니케이션과 연결되는가’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생각하려 했던 포스트구조주의자의 시도와 매우 가깝다. (Derrida, 1988; Grossberg, 1992; Chang, 1996; Stäheli, 2000) 커뮤니케이션은 성공적 커뮤니케이션의 있음 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회적 사건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를 기본적으로 설명하는 취약한 과정이다.
이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문화적 파퓰리즘’에서 발생한 문화 연구내의 수많은 논쟁들을 우회하는데 도움이 된다. (McGuigan, 1992)[6] 매스 컬쳐와 대중 문화 사이의 구별을 생각해 보자. 대중 문화는 종종 매스 컬쳐와 대비된다. 왜냐하면 매스 컬쳐는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그것은 매스 미디어(문화 산업)에 의해 생산된다. 그래서 대중의 진정한 욕구와 욕망에 조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커뮤니케이션이 (대중과 같은) 발화하거나 받아들이는 주체의 정체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의 생산자 개념에서의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대중적인 것의 개념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말하거나 듣는 주체, 이 메시지들을 인코딩하고 디코딩하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그것을 정의할 수 없다.
그보다 여기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특정한 ‘연결성’에 대한 설명이다. 시스템 이론은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사회 시스템에서도 기본적 단위라고 가정한다. 다른 사회 시스템은 다른 형식의 기본적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한다. 그것은 화폐(경제적 시스템), 권력(정치 시스템), 진실(과학 시스템) 등등과 같이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미디어로 코드화 된다. 기능적으로 분화한 시스템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미디어와 자기 언급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무엇일까? 어떻게 이런 형식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능적인 차이화의 아이디어와 연결될 수 있을까? ‘사회적 공동체(societal community)’ (Parsons)나 ‘생활 세계(life-world)’ (Habermas)와 같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그러한 ‘대중적 시스템(popular system)’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하나의 시스템의 보편화(universalization)를 키우기 위해서 기능적 시스템들에 의해 사용된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보편화와 차이의 측면이다. 대중적인 것의 개념은 두 가지 모순된 차원을 쥐고자 한다. ‘그 개념은 언제나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당기면서, 통일과 차이화의 경계 위에서 작동한다.’ (Grossberg, 1998: 200) Grossberg는 지배적인 배제를 위반하는 대중 문화에 대해 말할 때, 대중적인 것의 부가적인 결정적 특징을 식별한다. 대중 문화는 ‘대중으로부터 이미 배제된 사람들에 의해 접근 가능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적인 것은 시스템 이론적 재 개념화를 이끌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통일체(대중)의 구성 혹은 이뤄짐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것은 ‘하이퍼 연결성(hyper-connectivity)’(즉 접근과 이해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정확하게 탈 통일화(de-unifying) 효과를 생산한다.[7]
시스템 이론에서 대중적인 것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의 ‘대중적이지 않은(unpopular)’, 진지한 시맨틱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야만 한다. (Stäheli, 1997) 루만에게 ‘시맨틱’은 좁은 언어학적 개념이 아니라, 그보다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시스템이 사용하는 의미의 반복적 패턴을 지칭한다. (Luhmann, 1980) 대개 시스템 이론은 ‘진지한’ 시맨틱, 즉 기능적 시스템의 통일을 기술할 수 있는 개념적 구별들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Luhmann, 1997a: 866ff.) 예를 들어 국가 혹은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개념의 개념사.[8] 이런 의미에서 Luhmann은 Begriffsgeschichte (Koselleck)의 독일적 전통을 이었다. 이 전통은 시스템의 Reflexionstheorie (반성 이론)에 중요한 중심 개념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 루만은 ‘2등급’의 사상가나 저자들의 문서를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이념사를 반복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분석된 문서들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주체적 위치 (즉 저자 혹은 철학자 등등)에 속한 문서들이다. 그리고 시스템에 특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식별된다. 그렇지만 시스템 이론은 기능적 차이화의 상관항 (혹은 재현)으로 사용될 수 없는 의미 형식들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무관심하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이나 시맨틱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대중적’ 시맨틱을 향한 이런 무관심에 의해 자극 받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화 연구의 내재적인 파퓰리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 시맨틱을 지적하고, 그것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논의는 너무 쉽다. 그보다는 관심 있는 것은 고급 문화와 하위 문화 혹은 루만의 개념을 따르자면, 대중적 시맨틱과 ‘진지한’ (대중적이지 않은) 시맨틱 사이의 구별 자체다. 그리고 어떻게 이 구별이 기능적 시스템에서 사용되는지다. 시스템 이론에서 이 구별은 ‘기능적 차이화’와 ‘탈차이화’ 사이의 구별과 묵시적으로 절합되어 있다. 진지한 시맨틱은 성공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을 나타낸다. 반면에 대중적 시맨틱은 직접적으로 기능적 차이화에 조응하지 않고, 그보다는 탈차이화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대중적인 것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의 특별한 ‘언어들’을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을 예로 든다. 그래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기능적 차이화의 밑면을 지적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능적 차이화 시스템에 기생적으로 거주하는 다른 측면이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기능적 시스템에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시스템에 귀속하는 것은 어렵다. Raymond Williams(1962)나 다른 저자들이 강조했던 건 대중 문화는 넓게 받아들여지고,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시스템의 복잡한 반성 이론으로서 기능하는 (그래서 루만적 개념으로는 진지한 시맨틱의 예인) 민주주의 이론들과 대조적으로, 대중 문화는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을 나누는 선들을 따르는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물론 대중 문화에 대한 많은 전문적 담론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 전문가 그룹은 특정한 기능에 따라 전문화되지는 않는다) 그것의 높은 연결성 때문에, 대중적 시맨틱은 하나의 특별한 시스템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 형식이다. 그들에게 고유한 것은 쉬운 인용 가능성(quotability)이다. 만일 변호사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의미 형식은 성립된다. 그것은 반드시 법적 시스템의 Reflexionstheorie(반성 이론)에 조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더 시스템의 일상적 조작에 관련된다.[9]
점차로 대중적 의미 형식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을 그리기 위해 사용된다. 이것은 시스템의 내적, ‘고급’ 자기 기술에 어떤 영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는 ‘패닉 법칙’을 구성한다. Steven Redhead(1995: 6)는 심지어 그 법칙은 대중 문화 속으로 사라진다고 가정한다.
“간단히 다루자면, 법적(고급) 모더니즘(법의 규칙, 법적 주체, 법적 권리로서 특징 지을 수 있는)은 현재는 어떤 사회적 담론과 실행의 경계를 규제하고 훈련하는 권위자 혹은 권력이라 이야기될 수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조각나고 있다…. 한 때 근대적 법률학 이론에서 지녔다고 보여졌던 법은 지금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1995: 6)
이 인용은 두 가지 이유로 흥미롭다. 첫째 Redhead는 ‘고급/저급 문화’라는 구별과 법적 시스템의 차이화 사이에 비교를 그리고 있다. 시스템의 차이화를 나타내는 것이 그것의 ‘법적(고급)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앞서의 차이화를 위협하는 대중 문화와 대조된다. 대중 문화가 법적 시스템에 침입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는 경계의 갈등이다.[10] 둘째로 기능적으로 분화한 시스템의 진지한 시맨틱은 점차로 대중적인 의미 형식에 의해 재-정의된다. 물론 그들은 특별한 시스템 내에서 재-절합된다. 그러나 그들의 쉬운 인용 가능성은 정확하게 너무나 쉽게 인용됨으로써 시스템의 시맨틱을 오염시킨다.
잠시 동안 기능적 시스템의 전문화된 시맨틱과 많은 다른 시스템들에 의해 사용되는 대중적 시맨틱 사이의 긴장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진지한 커뮤니케이션과의 차이에 의해 정의되고, 진지한 커뮤니케이션은 기능적 차이화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적 차이화에 대해 외재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패러독스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들 안에서 일반화된 대중적 의미 형식을 사용한다. ‘진지한’ 커뮤니케이션과 대조적으로 다른 시스템의 맥락 속에서 대중적 시맨틱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쉽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이 형식적 특징 (접근성, 이해가능성 그리고 특정화되지 않는 하이퍼-연결성)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 안에서 대중적인 것의 구성과 연결되어 있다. 대중적인 것은 어떤 특별한 기능적 시스템의 보편성을 위반하는 탈-차이화되는 보편성의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이다.
포함의 위협과 매력: 정치적 시스템에서의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기능적 시스템은 왜 그러한 대중적인 것을 구성하는가? 시스템 이론에서 무시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것은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에 그렇게 결정적인가? 법적 시스템과 같은 하나의 기능적 시스템이 대중 문화 속으로 분해되어 버린다고 주장하는 Redhead처럼 멀리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탈-차이화를 말하는 것은 효과적인 분석적 전략은 아니다. 이 전략은 새로운 구별을 얻는 것 없이 사용되던 구별 그 자체를 느슨하게 한다. 그 보다는 기능적 차이화와의 연관에서 진지한/대중적인 사이의 구별을 사용하는 데서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개념적 연결에 의해 생산되는 긴장이다. ‘진지한’/’대중적인’과 ‘차이화’/’탈-차이화’ 사이의 구별의 결합은 사회 시스템에 내재적인 동요를 낳는다. 하나의 기능적 시스템의 보편성 문제를 바라볼 때, 구별들은 서로 뒤섞인다. 하나의 기능적 시스템은 특별한 자신의 관찰 도구를 통해서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시스템은 그 자신의 작은 ‘존재론’를 구성하고,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세계가 된다. 예술 시스템은 모든 것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종이로 만든 박스나 불타는 자동차도. 그리고 정치 시스템은 정부의 복지 정책의 실패라는 개념으로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보편적 주장을 가장 분명하게 내세우는 것이 사회 시스템의 자기 기술이다.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다른 시스템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들은 항상 그 자신의 환경으로 보인다. 이 ‘특별한 보편주의(particular universalism)’ (혹은 ‘우발적 보편주의’)는 또한 시민 혹은 기능적 시스템으로의 포함을 규제하는 소비자와 같은 보편적 모습을 재-현현(re-presenting)하는 Akteursfiktionen(허구적 행위자)를 통해서 표현된다. (cf. Hutter and Teubner, 1994) 시스템 이론은 허구적 행위자의 두 가지 다른 버전 사이를 구별한다. 거기에는 수행적 역할(Leistungrollen)과 관객 역할(Publikumsrollen)이 있다. 비록 수행적 역할과 관객 역할 사이의 분명한 구별은 대단히 문제적이지만, 공적 역할의 구조적 기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분석적 도구다. 우선 관객 역할은 대단히 일반화 된다. (즉 시스템에 관계하지 않는 속성은 무시된다, 예를 들면 피부색, 성차) 둘째 그것은 보편적 역할이다. (그가 기능적 시스템에 관계하는 한 포함이 허용된다) 셋째 공적 역할은 다른 기능적 시스템들에서 재-규정된다. (예를 들면 소비자, 학생, 유권자) (Stichweh, 1988: 262)
다음으로는 어떻게 대중적 커뮤니케이션과 대중적인 것의 구성이 정치적 시스템 내에서 그리고 그래서 ‘특별한 보편주의’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치적 시스템과의 관계 속에서만 ‘대중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중적인 것의 가장 자주 이야기 되는 특징 중 하나는 그것 자신의 고향은 없지만 모든 기능적 시스템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시스템의 대중적인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시스템의 대중적인 것’ (Stäheli, 2002) 혹은 ‘과학 시스템의 대중적인 것’도 존재한다. 이 시스템 모두가 매우 다르게 조직화되고 다른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미디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대중적인 것의 문제와 직면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모든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이 포함과 배제의 특별한 형식을 유지해야만 하고, 그것이 탈-차이화된 보편주의의 상상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이론은 어떤 순수하게 기능적인 전제 조건들을 충족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시스템에 포함되는 것으로 자격을 지니게 된다는 가정에서 진행된다.[11] 그래서 예를 들면 그들의 성 혹은 민족적 뿌리 때문에 정치적 시스템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시스템 이론은 계몽의 보편적이고, 포함적인 수사를 공유한다.[12] 여기서 배제에 대한 논의를 다룰 수는 없지만, ‘관객 만들기’의 과정과 관련해서 포함/배제의 모습에 포커스하고자 한다. (Ettema and Whitney, 1994)[13]
시스템 이론이 제시하는 포함의 개념은 포함의 리버럴 모델에 가깝다. 모든 사람은 포함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진짜로 포함될 필요는 없다. 선거나 다른 정치적 문제에 참여하는 것 없이 시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원리상 시스템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렇지만 시스템 이론에서 무시된 것은 포함을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정체화의 모습으로서 시민은 ‘매터링 맵(mattering maps)’과 절합되야만 한다. (Grossberg, 1992) 필요한 것은 ‘포함의 에로틱’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함의 과정은 실패할 것이다. 그래서 포함은 단지 포함된다는 것의 가능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포함되기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 여기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시스템의 알려지지 않은 외부에 대해 시스템의 ‘리버럴 보편주의’를 재현해야만 한다.[14] 이것은 많은 시스템들에 유용하다. ‘과학이 지닌 홍보에 대한 사랑’(Independent, 14 July 1998) 혹은 과학 시스템의 경계에 있는 유명 지식인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 내에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시스템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이질적 요소들의 매스 혹은 하이브리드된 아상블라쥬로서 시스템 외부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포함의 과정 자체는 소급하여 포함된 것을 바꾸고, 아직 차이화되지 않은 것의 상상적인 것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정체화 하는 과정이다. (Laclau, 1990) 단순히 포함 대신 정체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한 포함의 문제가 어떻게 다뤄져야 ��는지를 바꾼다.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에 포함되기를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포함의 수사적이고 담론적인 전략들이 여기서 전경화된다. ‘아직 아닌 것’을 포함하고자 하는 담론적 요구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시스템은 그 자신의 보편주의를 위반하는 어떤 것 동시에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에 여전히 관계하는 어떤 것을 재현해야만 한다.
Mars Attacks! 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이 정체화의 과정과 그와 관련한 뒤얽힌 문제들이다. 화성인은 아직 포함되지 않은 잠재성이다. 그들을 포함하기 위해, 원리상 모든 사람은 포함되어야 한다는 리버럴한 전제는 충분하지 않다.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최선의 면을 가지고 나타내기를 원한다. ‘지구로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담은 깃발들이 있다. 공시적 환영식, 기뻐하는 군중과 심지어 평화의 비둘기를 가지고 있는 예수처럼 꾸민 이도 있다. 화성인이 포함될 수 있다는 옵션을 가졌을 뿐만이 아니다. 지구 거주인들이 정치적 시스템에 포함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를 원한다. 포함되는 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압력은 규범적 가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시스템의 자기 기술이 보편적인 규범적 수사학을 사용하지만. 그보다는 방향을 바꿔 정치적 시스템에 의해 기대된다는 전역적 기대, 전체 세계가 보고 있다는 것이 점차로 보편적인 포함의 필요성을 만든다. 미지의 존재의 포함은, 정치적 시스템의 ‘존재론’을 재-보장하고 재-생산하면서 정치적 시스템 안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생산하는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미디어 이벤트가 된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포함의 전략은 실패한다. 비록 화성 외교관이 시민의 역할을 충족할 뿐만 아니라 외국 고위 관료의 역할을 충족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이런 입장에 무관심했고, 심지어 의회 연설의 마이크 앞에서도 공간적 정위를 무시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화성인이 정치 시스템의 특별한 미국식 버전에 정말로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그들은 단지 기능적 차이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득적인 포함의 실패한 과정이다. 정치적 연설을 하는 대신, 의회가 지워져 버렸다. 여전히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지적한다. 포함의 담론들은 질문의 보편적 인물 (예를 들면 시민)을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인물은 또한 포함되는 것이 매력적으로 되는 수사적 전략들에 의존한다. 그래서 담론의 논리는 시스템이 어떤 것이 포함되어지는 것에 대한 애매모호한 내부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 포함되지 (아직) 않은 것의 이런 구성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한 편으로 그것은 포함에 대한 그것의 잠재성 때문에 기능적 시스템의 보편적 동학을 지원한다. 다른 한 편, ‘아직 포함되지 않은 것’은 시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상상된다. 그것은 아직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은 것이고, 아마도 시스템의 차이화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대중과 화성인
포함의 설득적 양식은 아직 포함되지 않은 바깥을 언급해야만 한다. 여기서 포커스 하고자 하는 것은 포함의 보편적 인물과 ‘아직 포함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별이다. 보편적 포함의 이상은 시민의 총체성에 의해 대표되고, 대중(Volk)의 수사적 인물을 통해 통일된다. 대중은 정치적 시스템의 내부적 구성물이다. 정치적 시스템에서 포함을 조직하는 것은 담론적 장치다. 루만은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주류 이론을 비판했다. 이런 접근들의 오류는 그들이 어떤 기능적 시스템에 대해 선험적인 통일체로서 대중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Luhmann, 1997b: 95) 시스템 이론이 차이화 과정을 조율할 수 있는 기능적 차이화에 대해 선험적인 어떤 심급을 가정할 수 없고, 가정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대중은 정치적 시스템의 내부적 범주다. 특별한 정체성(예를 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대중의 결합을 떼어내기 위해서 시스템 이론은 주된 행위가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인 투표적 ‘관객(audience)’이라는 기술적 개념을 사용한다.
정치적 시스템에 대한 대부분의 시스템 이론적 연구들은 조종과 행정적 절차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춘다. (예를 들면 Willke, 1997) 정치적 시스템의 ‘관객’, 투표자의 인구수는 무시되어진다. 이런 이유 중의 하나는 의심할 것도 없이 시스템 이론이 정치학의 규범적 설명과 단절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규범적 설명들은 시민의 동의 안에서 정치적 시스템의 정당성을 정위한다. 정치적 시스템의 ‘관객’이 더욱 중요하게 되는 것은 오직 포함과 배제의 문제에서 뿐이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의 구조가 반드시 관객의 역할 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Stichweh, 1988), 정치적 시스템에 적절한 설명은 그 관객의 이론을 필요로 한다.
정치적 시스템에서 대중적인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이론에서 루만이 공격한 것을 진지하게 다뤄야만 한다. 정치적 시스템에 선행한 ‘대중’이라는 전제. 물론 이는 주어진 것인 대중에 대한 주장을 재-도입하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 보다는 대신에 담론적 구조와 자연화(naturalization)의 전략들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대중’이라는 생각은 동시에 기능적 차이화의 내부에 그리고 넘어서 위치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기 위한 담론적 도구가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전통적 이론의 실패라고 루만이 공격한 것은 단순하게 이론적 실수난 낡아버린 시맨틱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이 시스템 너머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대중의 내부적 구성을 가정하기 위해 그런 의미적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너머서’는 법적 시스템이나 예술 시스템과 같은 다른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이 아니다. 그 보다는 어떤 차이화에 선행한 것으로 상상되는 하나의 심급이다. 정치적 시스템에서는 그래서 대중(Volk)은 한 편으로는 선거에 참여하고 수행적 역할(예를 들어 정치가)을 하는 내부적 통일체를 대표하기 위한 하나의 공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이는 자연화된 위치를 문제시하는 한, 대중이 된다는 것의 문제, 그 자신의 제도의 역설을 지시한다. 이는 통치를 구성하기 위해 통치를 전제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정치 이론의 잘 알려진 수행적 모순에 조응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마크되지 않은 편은 반드시 대표되지 않는 하나의 불가능한 구별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나의 특별한 시스템의 ‘관객’과 구별의 다른 표시되지 않은 편 사이를 구별해야만 한다. 만일 ‘대중(Volk)’이 시스템의 포함된 정체성의 통일체를 지시한다면, 그러면 마찬가지로 유권자나 정치가 어디에도 조응하지 않는 이 구별의 표시되지 않은 편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더 정확하게 하자면, 그 다른 편은 대중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대중에 앞서 위치한 어떤 것을 도입한다. 대중의 자기 언급적 구성이 자기 언급적 닫힘을 넘어서는 어떤 것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기다. 루만은 포함의 인물로서 ‘대중’이 충분히 고정되었거나 적어도 고정성의 부족이 포함의 과정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대신에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은 스스로 항상 다른 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스나 무리(mob)의 상상, 육체와 육체적 기능들의 그로테스크한 재현들은 이 표시되지 않은 편을 가시화하는 수사적 수단이다. 표시되지 않은 것은 대중의 ‘교육적’ 구성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것으로 재-등장한다.
Mars Attacks! 이 다시 한 번 결정적이 되는 것이 여기다. 대통령이 항상 기대하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정치적 시스템을 보편화 하도록 밀어 붙이는 것은 유권자의 기대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화성인들이 있다. 어느 정도 개인화 되었지만, 그들의 육체, 소음, 행동 논리 어느 것도 정상적으로 개인에게 기대되는 것에 조응하지 않는다. ‘그가 스크린에서 본 것은 악몽에서나 볼 듯한 그런 얼굴이다. 얼굴에는 살이 없다. 이빨, 턱뼈, 흔적만 남은 코뼈, 그리고 거대한 뼈 없는 뇌’ (Gems, 1996: 98f.) 보이는 대로 화성인은 시민의 다른 편이고, 그들은 아직 대중이 아니다. (혹은 시스템 이론의 어휘로는 정치적 관객이 아니다) 여전히 그들은 대중의 편에 도착하기 위해서 횡단해야만 한다. 물론 이는 사회학적 범주로서 황성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스템의 보편적 관객과 그리고/혹은 시스템의 인구의 가정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개념적 문제를 비춰준다. 시스템이 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한 어떤 것을 자신 내부에 상상할 때 발생하는 대중의 재생산 문제, 경계의 문제들이다.[15]
그렇다면 대중이 되기라는 것은 자동적인 과정도, 문제가 없는 과정도 아니다. 그보다 대중은 시스템의 관찰 대상으로서 구성돼야만 한다. 정치적 시스템은 ‘잘-훈련된’ 시민을 필요로 하지(Miller, 1993), 외부에 거주하는 거친 매스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통치성에 대한 푸코식의 연구(Barry et al., 1996)가 시스템 이론적 틀과 호환될 수 있는 것이 여기다. 민주주의적 관객의 창조는 ‘모든 특정한 그리고 특별한 영역들에 대한 거부에 의해 힘들게 “중립적”, “중간의”, “민주적”, “합리적”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에 기반한다. (Stallybrass and White, 1986: 199) 루만이 제안할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이는 스스로 혹은 어떤 진화적 전망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닌 ‘자기 추상’(Warner, 1992)이다. 이는 경쟁적이고 시끄러운 과정, 시스템의 논리가 수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그로테스크한 재현에 대한 개시다.
그런 외부의 불가능한 재현은 무시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보다 어느 정도 한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다. 독일 민주 공화국(GDR)의 붕괴에 대한 짧은 에세이에서 Dirk Baecker(1991)는 이 맥락에서 유용한 하나의 구별을 도입했다. 그는 GDR에서의 ‘혁명’이 ‘매스(mass, Leute)’와 ‘대중(Volk)’ 사이의 구별을 횡단함으로써 기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대중’의 다른 편에 있는, 플로우라는 의미에서 ‘매스’의 탈-영토화된 개념이라고 들뤼즈적인 입장(Deleuze and Guattari, 1987: 220f.)에서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통일된 개념은 통치되지 않고, 신뢰할 수 없고 그리고 위협적인 다중(multitude)과 마주하게 된다. (Beasley-Murray, 2001) 이 ‘매스-같은(Mass-ive)’ 다중에 특별한 것은 정확하게 그것이 모든 기대와 단절하고, 특별한 사회 시스템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단순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스는 ‘필수적인 구별을 만드는 것의 실패’(Williams, 1973: 161)다. 마치 Whitman의 구별에 대한 요들 같은 붕괴처럼.
대중과 ‘외부’로서의 매스 혹은 다중 사이의 구별을 도입하는 것은 대중적인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 ‘매스’의 개념은 해방적인 정치적 주체를 배제하기 때문에 많은 문화 연구자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매스는 ‘결합 없는’ 대중이고, 집합적 기대들을 방해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시된 것은 매스의 통치되지 않는 잠재성을 진지하게 다루자는 것이다. 이 잠재성은 정치 시스템의 ‘공식적’ 담론을 위협하고, 동시에 ‘진지한’ 시맨틱을 끌어들인다. 매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이해와 필요를 가진 주체적 위치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통치되지 않는’ 잠재성을 가진다. 그래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매스와 대중의 구별이 어떻게 절합되는가 (혹은 시스템 이론의 개념으로는 어떻게 그것이 진행되는가)이다.
정치적 시스템에서 ‘관객’은 대중에 조응하고, 공통의 시민성에 의해 특징 짓게 된다. 대조적으로 ‘매스’는 ‘대중’의 내부적 구성과 병치된다. 그러나 또한 전제된다. ‘하나의 사회는 매스(Leute)의 상태에서만 시작할 수 있다.’ (Baecker, 1991: 97) 그래서 ‘대중’과 ‘매스’ 사이에 진동, 즉 비-기능적 전제의 상상적인 것과 기능적 시스템 안에서 이 전제의 재-특정화 사이의 진동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비록 대중은 매스가 아니지만, 구별의 두 편 사이에는 내적 연결이 남아 있다. 대중이 매스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정치적 시스템의 구성적 차이를 위협한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다. 다시 말해 이는 시민의 지속적인 교육 과정, 게다가 포함과 정체화의 부분적으로 실패된 행위로서 결정적인 지화의 ‘미시적 분화’를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브리드 매스
이제 몇 가지 구별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상황에 도달했다. 모든 구별처럼, ‘대중’과 ‘매스’의 구별은 배제에 의해 구성된다. 그렇지만 배제는 단순히 배제된 것에 대한 거절에 의해 작동하지는 않는다. ‘자아에 대해 낯선 상징적 문제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나 거부로 시작하는 것은, 효과에 있어 언제나 복잡한 주입과 부정의 과��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Stallybrass and White, 1986: 193) 그래서 배제의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해야만 한다. 한 편으로는 ‘정체 생산의 근본적인 메커니즘’ 다른 한 편에는 ‘최초의 그로테스크를 배제하기 위한 투쟁 자체에 의한 정치적 무의식 층위에서의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Stallybrass and White, 1986: 193) 그리고 후자가 전자에 비해 훨씬 더 흥미롭다.[16]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는 배제의 소음에 대한 상상적 재현이다. 그것의 -종종 시각적인- 표상을 지금 받는 것은 대중이 되는 것의 소음이다. 배제된 것은 그로테스크한 형식 안에서 표상되고, 완전하게 배제되는 어떤 것이 되는 것 만큼이나 욕망되는 어떤 것이라는 양가적 위치를 차지한다. 배제된 것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포함되어진다. 마치 이미 이뤄진 질서 안에서 불가능한 것의 환상적 표상으로서.
Stallybrass와 White는 카니발에 대한 Baktin의 작업에서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그것은 ‘고급’ 문화 속에 고전적 육체의 규준에 대해 스스로를 복속하지 않는 육체를 지칭한다. 그로테스크 육체는 ‘항상 과정 중에 있고, 그것은 항상 되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움직이고 하이브리드적인 창조물, 불균형하고, 엄청난, 모든 한계를 넘어서 커지는, 음란하게 분산되고 불균형한 것이다.’ (Stallybrass and White, 1986: 9) 이 변형된 육체의 표상은 왜곡된 신체 ���미지와 육체적 경계들의 붕괴에 의해 매료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육체의 개방이거나 혹은 육체의 유동성이다. 배제된 것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수단에 의해 표상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복수의, 부풀어 오른, 거대하거나 과하게 작은…불완전성’의 이미지로 작동한다. (Stallybrass and White, 1986: 9)[17] 이런 그로테스크 하이브리드의 현대적 형식으로 거대한, 꿈틀거리는 뇌를 가진 작고, 마른 인공적 형상의 화성인을 생각해 보자.[18]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는 대중과 그것의 외부 사이에 불가능한 구별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되어 감의 과정 자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이 되어 감의 과정이 조화로운 과정이 아니라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역겨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논쟁점은 정치적 시스템에서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의 역할을 가정하는 것이 매스라는 점이다. 육체에 대한 밀접한 연관으로부터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를 매스로 이동하는 데에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매스 자체는 언제나 고급 문화 혹은 ‘진지한’ 시맨틱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회 질서, 즉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완전한 육체에 대한 잠재적 위협인 육체들의 특별한 분배와 무질서다. 군중 심시에서 표상되는 매스는 고전적 육체가 그로테스크한 육체에 관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한다. 매스는 어떠한 상상 가능한 왜곡에 열려 있는 지속적인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은 비논리적 행위를 대표하고, 화보 같은, 비이성적인 존재 양식에 의해 지배된다. (Le Bon, 1952: 23ff.) 둘째 매스는 배제된 타자에 대한 에로틱한, 환상적인 구성물이 된다. ‘그러한 ‘매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매스란 없다. 단지 대중을 매스로 보게 하는 방식이 있다.’ (Williams, 1962: 300) Williams가 언급한 것은 대중과 매스 사이의 결정적 구별이다. 매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지배적인 문화와 담론에 대한 위협의 상상적 구성이다.
이는 또한 대중이 매스보다 덜 상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매스와의 차이는 (Leute라는 의미에서) 대중은 반-헤게모니적 상상물이다. 그러나 매스와 대중 사이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치는 없다. 그것을 다르게 다루는 것에서, ‘매스’는 ‘정당한’ 그리고 헤게모니적 문화의 지평 안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에 관계하고자 하는 시도다. John Carey(1992: 23)은 마찬가지로 매스를 이해했다. ‘’매스’는 인간 삶의 알 수 없는 복수성을 대체하는 하나의 상상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상상하는 이의 소망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재형상화 될 수 있다.’ 그렇지만 Carey와 대조해, 이 상상적 구성물을 만들어 내는 건 엘리트의 ‘의지’가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담론적 논리의 투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두 가지 논리는 차이화의 논리와 탈차이화의 논리다.
루만의 시스템 이론으로 돌아가자면, 매스는 어떤 사회 시스템에 따라 구성된 배제들의 시끄럽고 추한 복수다. 그렇지만 루만은 배제된 것의 이런 재-등장의 이론적 중요성에 대해 보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시스템 이론은 단지 Stallybrass와 White가 배제의 첫번째 레벨이라 불렀던 것에 대한 설명만을 발전시켰다. 시민을 구성하는 배제는 루만에 의해 분명히 명쾌하게 설명되었다. 민주적 정치 시스템에서, 그것은 정부와 야당 사이에 기본적 구별(즉 그것의 코드)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 배제의 구성적 행위는 기능적 차이화의 형식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을 언급한���. 그것은 기능적 차이화의 생각할 수 없는 외부이다. ‘그렇지만 기능적 차이화에 대한 대안은 없다’ (Luhmann, 1996: 76) 담론 이론적 개념으로 다루자면, 루만(1996)은 예를 들어 차이의 헤게모니 시스템 안에서 더한 차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 운동들을 정확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또한 루만이 새로운 사회 운동들을 정치 시스템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고려했던 이유이다.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 배제된 것은 그래서 그 안에서의 대안이 아니라, 기능적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나 정치 시스템이 배제한 것은 단순하게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 시스템 안에서 ‘하이브리드 시맨틱’으로 회복한다. 기능적 차이화의 작동 질서에 대한 위협을 상징화하는 것은 이질적이고 질서화되지 않은 감성으로서의 매스의 형상이다. 이 하이브리드 시맨틱은 그래서 그들의 탈차이화의 가능성, 차이화의 끝 없는 과정이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공식적인’ 문화 안에서 (혹은 루만이 다룰 것처럼 ‘진지한’ 시맨틱’) 지시한다. 분명한 것은 이 매스의 하이브리드 시맨틱이 자동적으로 해방적이거나 보수적인 정치적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중적인 것의 ‘파퓰리스트’ 개념에 대한 충격적인 차이다. ‘하이브리드 시맨틱’은 포함의 소음 위에, 동시에 그것을 탈안정화하지 않고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보편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 위에 기반한다. 이 하이브리드 시맨틱의 배설적인 괴물과 같은 논리는 그 자신의 주체적 위치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정치적 기획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또한 그러한 ‘하이브리드성’이 반드시 전복적 주체의 위치를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보다 그것은 재-절합의 다른 형식들에 열려 있다. 그것이 시스템의 ‘진지한’ 시맨틱으로 기능적 통합을 할 수도 있고, 파시스트적인 재-절합일 수도 있고, 해방적 정치학의 개념에서 재-절합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건, ‘진지한’ 시맨틱을 손대지 않고 놓아두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시스템의 ‘진지한’ 시맨틱은 매력 있는 그리고 배타적인 수사학을 가지고 이 형식에 반응한다. 테러리즘, 근본주의 운동 (그리고 루만에게는 어떤 새로운 사회 운동의 형식들), 대규모 재해(mass disasters) 그리고 물론 화성인은 정당한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배제, ‘보편적’ 포함의 과정에 의해 생산되는 필연적인 배제의 ‘침묵의’ 행위를 지시하는 결정적인 담론적 수단들이다. 어떤 구별에 대한 위협,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시스템의 진지한 시맨틱을 매료하는 구별의 하이브리드적 몰락으로 생각되는 것은 타자(the Other)에 대한 매료다.
민주주의와 군중 심리학
이번 세기의 출발 시점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매스에 대한 담론을 언급함으로써 배제된 그로테스크에 대한 매료를 그려보고자 한다. 군중 심리학(예를 들어 Gabriel Tarde, Gustave Le Bon)은 배제/포함의 개념을 통해 매료의 이런 이중적 제스츄어를 예시했다. 반민주주의적, 폭력적 그리고 비합리적인 존재로서의 군중은, 포함의 과정에 의해 역설적으로 배제돼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기표가 되었다. 여기서 포함은 군중 심리의 기술 위에, 어떻게 군중을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지식 위에 기반한다. Le Bon(1952)이 제시한 것처럼 짧은 슬로건의 반복, 강한 주장, 시각적 이미지와 열정. Le Bon이 특별하게 강조한 것은 이미지와 시각적 은유의 통합적이고 제안적 힘이다.
이런 기술에 대한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 군중 심리는 위험하고 격렬한 심급으로서 매스를 구성해야만 했다.[19] 그래서 ‘대중(Volk)’/’군중’의 구별은 배제된 통치되지 않는 매스가 시스템 내에서 표상돼야만 하기 때문에 결정적이 되었다. 시스템은 시스템에 독립적이고 (일시적이고 그리고 논리적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매스를 가정한다. 동시에 시스템의 관객으로서 대중은 매스에 대한 시스템의 재-절합에 의해 구성된다. 군중 심리학은 ‘매스’로부터 ‘대중’을 만들어 내고, 매스와 대중 사이의 구별에 대한 안전한 ‘횡단’을 조직하면서, 관객을 교화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술의 저장고로 보일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군중의 개념은 거의 모든 사회 현상을 커버하며 점차 확장되었다. 영국 정치 작가인 Ernest Barker는 충격적인 질문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의회는 단순한 군중인가?’ (cf. McClelland, 1989: 234) 그리고 Le Bon(1952: 186ff.)은 의회 구성원을 하나의 이질적 군중으로 기술하는데 거의 한 챕터를 바쳤다. 그런 질문은 왜 등장할까? 시스템에서 투표하는 관객과 군중 사이에 구별은 무엇일까? 군중은 일반적으로 정치 시스템에서 ‘유권자’로부터 분명하게 구별된다. 여전히 군중 심리학에서 군중에 대한 표상은 유권자와 정치 시스템을 넘어서는 어떤 것의 눈에 띄는 하이브리드다. 일반화된 유권자에 대한 생각과 같이, 전형적인 군중은 특별한 정체성들과의 연결을 잃어버린다. ‘이상적 군중…은 절대적으로 그 자신인 하나의 그룹이다’ 즉 그것은 하위 그룹이 없는 그룹이다. (McClelland, 1989: 233) 군중은 군중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표현하는 일련의 등가물들을 생산하는, 특별한 차이들로부터 하나의 추상이다. 정치적, 성적, 문화적 정체성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로운 유권자 모델에 역설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러한 군중의 형식이다. 그래서 정치적 시스템 안에서 포함을 조직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형상, 유권자의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형상, 투표가 허가되지 않은 모든 사람(즉 모든 비-시민)을 배제하는 형상은, 정치적 시스템의 차이 자체를 무시하는 폭도 같은 히스테릭한 군중인 배제된 것에 대한 잔상과 충격적으로 유사하다. 어떻게 ‘군중’과 ‘유권자’가 그렇게 가깝게 되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이유는 양자 모두 서로 유사한 요소, 즉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시민과 매스의 자기 정체적인 요소를 생산하는 동일한 등가와 보편화의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Laclau and Mouffe, 1984) 양자 모두 텅빈 장소, ‘기표가 부정한 장소’ 그리고 엄격하게 말하자면 ‘의미가 없는(non-sense)의 장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Copjec, 1993: 4) 다른 것은 이 장소가 채워지는 방식이다. Copjec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텅빈 장소는 대중을 한 명씩 셈으로써 개별화한다. 반대로 매스의 요소는 셀 수 없다. 대중의 단일 요소로서 시민이 있지만, 매스의 단일 멤버는 없다.
그렇지만 시스템의 내부적 유권자와 그 외부 사이에 구별은 불확실한 구별이다. 매스는 대중이 될 수 있고, 대중은 매스로 전환할 수 있다. 이 동요의 내재적 가능성은 차이를 안정시키기 위한 담론적 전략을 필요로 한다. 미국 정치 이론가이자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중 한 명인 Mary Parker Follett은 그녀의 프로그램 책인 The New State에서 이런 경계의 갈등을 다룬다. 그 책은 1918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민주주의적 규칙과 매스의 규칙의 착란, 대중을 군중과 동일시하는 것은 많은 대중이 민주주의를 비난하게 이끌었다. (Follett, 1998: 150) Democracy not the Crowd라는 장에서의 이 문장은, 제목이 이미 군중과 대중 사이의 구별을 강조한다. 대신에 그녀는 ‘대중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혹은 전체의 이념을 만들 수 있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생산돼야만 하는 ‘순수한 집단적 의지’를 요청했다. (강조 추가) 그래서 정치적 시스템의 ‘공중(the public)’(혹은 유권자)는 창조돼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시스템의 포함을 위해 필수적인 보편적 공중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외부의 위협에 대한 내부의 이미지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구성은 시스템의 경계 자체의 하이브리드화로 나아간다. 다시 한 번 Follett (1998: 148)을 인용하자면, ‘민주주의를 ‘전체의 규칙’으로 정의할 때, 이는 일반적으로 모두의 규칙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의 의미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는다면, 우리는 군중의 오류(crowd fallacy)에 희생자가 될 위험을 가진다.’ 하이브리드 경계는 ‘모두’에 의해 지시된다. 매스와 정치 시스템에 내부적인 전체 사이의 이동. 비결정성이 만들어지고, ‘모두’의 절합이 다투는 곳이 여기다. Follett은 능동적인 유권자로부터 ‘모두’를 깔끔하게 분리하는 담론을 제시했지만, 민주적 유권자를 인식하는 반대의 담론적 입장들도 언제나 이미 모두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그들의 오물을 선택하는 민주주의’라고 Ezra Pound는 불평했다. William Inge는 ‘민주적 인간은 일종의 유인원이다’라고 썼다. (Carey, 1992: 25에서 재인용) 두 가지 진술 모두 ‘모두’를 쓰레기와 배설물과 절합하는 담론을 표현한다. 민주적 군중에 대한 이런 배설적 담론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패러다임적이다. 배제된 것의 포함이, 포함을 통해 차이를 파괴하고, 단일한 시민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모두’에 대한 이런 내부적 재정의는, 기술적 관객(Luhmann) 혹은 심지어 의회 군중(!)은 그것의 보편적 구축에 기인하여 (그리고 그에 불구하고) 불안정하다. 이런 보편주의는 이미 정치 시스템의 민주적 자기 기술과 함께 주어진다. 원리상 정치 시스템의 포함은 인종, 젠더, 성 혹은 계급과 같은 특정한 정체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시민은 모든 특별한 특성을 포기한 중립적 정체성이다. 보편적 시민은 매스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원리상 매스의 모든 요소는 시민이 되도록 자격을 부여 받아야만 한다. 거대한 그리고 무차별한 매스로부터 점 찍어 나올 수 있다. 정치 시스템에서 매스를 그리는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비결정성은 또한 구조적 비결정성이다. 이미 보았지만, 단순히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매스인 매스로서 ‘타자’를 구성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유권자’와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어떤 특별한 특징을 가지지 않는다.
‘매스/대중’의 구별을 불안정하게 하는 이중적 제스츄어를 관찰할 수 있다. 한 편에서 유권자로서 공중은 매스와 유사하게 된다. 그래서 정치적 시스템에 위협이다. 선거는 결정을 할 때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군중으로서 사회적인 것과 의회의 붕괴로 보인다. 다른 한 편 매스는 질서화하는 구조에 조응한다. Gabriel Tarde는 간결하게 썼다.
‘무리는 낯선 현상이다. 그것은 서로 알지 못하는 이질적 요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열정의 촉발과 함께 이 요소들의 하나로부터 불이 붙어, 이 혼란스러운 매스를 마비시키면서, 일종의 어떤 조직, 어떤 ��발적 세대가 만들어진다. 이 불일치는 응집이 되고, 이 소음은 목소리가 되며, 이 수 많은 함께 모인 군중은 곧 하나의 동물, 이름 없는 하나의 야생 짐승이 된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최종성을 가지고 그 목표로 행진한다.’ (1968: 323)
여기서 매스와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시스템 사이를 동요하는 그림이 잘 그려진다. 열정의 불꽃은 자기 조직화된 시스템을 만든다. 소음은 목소리가 된다. 요소들의 외부적인, 비-사회적인 총합은 갑자기 질서화되고 동질적인 구조를 만든다. 외부적 타자, 사회적 질서에 대한 위협은 내부적인 것이 된다. 자기-정체화된 그리고 자기-조직화된 현상으로서의 무리는 역설적으로 자기-규제적 행위자로서 시민을 구성하는데 결정적으로 되는 자기-조직화의 형상을 보여준다. (cf. Rose, 1994: 77ff.) 관객과 매스 사이의 하이브리드 구별은 그래서 구별의 양 측으로부터 약화된다. 한 편으로 관객 자체가 질서에 대한 위협이고 (즉 전염성의 의사 선택), 그래서 매스가 된다. 다른 한 편 매스는 자기-조직화된 시스템을 예시한다. 그래서 기능적 차이화의 ‘타자’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린다. 대신에 그것은 사회 질서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서 의도치 않게 대표되고, 그래서 사회 시스템의 갑작스럽고 우연한 창조에 대한 시스템 이론의 설명을 닮게 된다. ‘우발성의 경험이 획득한 것은 시스템 내에서 조건 지워졌던 기능들에 대한 우연의 구성과 개방 그래서 구조적 확률로의 우연의 전환이다.’ (Luhmann, 1994: 120)
* * *
정치 시스템에서 대중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요약해보도록 하자.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대중의 혹은 대중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기능적 차이화와 ‘매스’나 ‘화성인’과 같은 형상으로 상징화되는 그것의 단점인 ‘탈-차이화’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정치 시스템의 경우, 일반화된 선거권의 확장과 매스 심리학의 병렬적 도래가 정치 시스템의 어떤 경계에 대한 갈등들에 대한 도전의 시도라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대중적인 것은 시스템에 ‘선행한 것’으로서 구성되는 ‘타자’에 의한 그것의 매료로 표시된다. 마치 매스 심리학에서 기술에 의해 작동해야만 하는 매스처럼. 차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실패로서 상상되는 매스는 정치 시스템에서 하나의 차이가 돼야만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매스는 대중을 만드는 것의 소음, 시스템의 경계들이 가능한 붕괴에 대한 매료를 지시해야 한다.
시스템 이론의 관점에서 이는 기능적인 차이화를 넘어서 어떤 힘으로서 매스의 존재를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중적인 것의 하나의 가능한 구성물인 매스는 또한 ‘인간 존재(human being)’가 사회의 ‘매개’라는 생각에 조응하지도 않는다. (Fuchs, 1994)[20] 그보다는 대중적인 것은 기능적 차이화의 외부, 그렇지만 언제나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의 조작인 것에 대한 상상적 구성을 제공한다. 대중적인 것의 커뮤니케이션은 시스템 내부에서 ‘하이브리드 그로테스크’를 만든다. 대중적인 것은 그래서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 안에서 비-차이화 그리고 탈-차이화의 그림을 제공한다. 그래서 정체화의 소음을 끌어들이고, 내부를 온전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차이화의 다른 편은 구별을 그릴 수 없다는 것으로 그리고 존재하는 차이화들을 향한 그것의 그로테스크한 무차별에 의해 표시된다. ‘우리는 아직 차이가 없는 외계인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차이가 없는 외계인’ (Tim Burton)
[1] Mars Attacks! 은 Jonathan Gems (1996)의 소설에 기반한다.
[2] Cf. 또한 van Zoonen(1998: 189) ‘���회의 지배자, 엘리트, 권력을 쥔 사람들과 내재적으로 그리고역사적으로 불화하는 것이라 대중 문화를 인식하는 것은 왜 대중 문화에서 표상되는 공적 정치가 그렇게 깊게 신뢰 될 수 없는 가를 설명해준다.’
[3] Slim Whitman에 대한 정보는 http://personal/riverusers/com/~flash/swliner.html을 보라.
[4] Whitman이 머리만 터트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정제가 된다. ‘2차 세계 대전의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병사, Audie Murphy는 전쟁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수면 장애를 겪는다. 그를 완전하게 여유를 가지도록 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것은 그가 가진 Slim Whitman 콜렉션을 듣는 것이다. (http://personal/riverusers/com/~flash/swliner.html) Tim Burton은 Whitman의 노래가 나쁜 음악이 아니고 SF 영화에 적합한 이상적인 음악이라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너무 중요한 전체 음파장을 활용한다’ (http://www.roughcut.com/main/drive3dec2.html)
[5] 여기서 제시되는 대중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 시스템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논문은 정치 시스템에 대한 대중적인 것의 관계만을 살펴본다.
[6] 파퓰리즘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Stuart Hall(1981)은 ‘대중적인 것’이 자동적으로 전복적인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7] Laclau(1977)의 대중에 대한 본질주의적 개념에 대한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또한 결정적이다. ‘대중’의 범주는 역사적 주체, 이미 사용되는 지시 대상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대중은 대중적 담론에 의해 호명된다. ‘중요한 것은… “대중”과 “반-대중” 사이의 대립, “빈자와 부자”, “착취자와 착취받는 자” 사이의 투쟁이다. … 모든 파퓰리스트적 수사들은 “대중/반-대중”의 적대 주위에서 돌고 있다.’ (Torres Ballestras in Beasley Murray, 1998: 195) 이 논문에서는 기본적으로 파퓰리스트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비-대중의 구별이 대중/반-대중이라는 개념에서 적대적 방식으로 코드화되는 것은 오직 파퓰리스트의 커뮤니케이션에서다. 또한 대중의 다른 측을 ‘파워 블록’으로 정의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파퓰리즘에 대한 Laclau의 개념의 내용이 아니다. 대신에 시스템 이론적 개념에서 대중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유용한 것은 논의의 논리 자체다. 대중적인 것의 구성은 일련의 등가물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은 헤게머니적 담론에 대해 반대의 입장으로 표시되는 하나의 공통 담론 안에서의 이질적 요소들을 절합한다. 더욱이 대중적 담론의 요소들은 어떤 특별한 시스템에 본질적으로 묶이지 않는다. 등가적 연쇄는 한계를 그림으로써 구성된다. 그래서 이 정체성을 어떤 다른 특별한 정체성들로부터 분리하고 절단한다. 그래서 대중적인 것은 미리 주어진 시스템의 한계를 위반하는 상상적 등가물의 연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cf. Laclau의 경우에는 계급과 그룹의 차이들)
[8] Luhmann의 시맨틱 개념은 종종 담론을 요청하는 대부분의 영역을 덮고 있다. 비록 그것이 물질성과 규정성을 강조하는 푸코적 담론 개념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Foucault, 1985) 그래서 의미적 형식들은 시스템의 자기 기술을 구성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반복적인, 대부분 텍스트 형태의 패턴이다.
[9] Cf. 법과 대중 문화에 대한 연구의 경우는 ‘Picturing Justic’ 컨퍼런스. (University of San Francisco Law Review, 1996)
[10] 이는 시맨틱의 다르게 절합된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시맨틱을 시스템을 위한 구성물로 분석한다면, 앞서 말한 문제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기능적으로 차이화된 시스템에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사용은 시스템의 조작 자체를 위해 구성된다. 대중적인 것을 시스템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이제 대중적 시맨틱에 의해 변형된, 시스템의 자기 기술에 대한 지시 대상이다. 이것은 물론 대중적인 것인 정의에 의해 법적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11] 이 포함은 심리적 시스템이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개인은 커뮤니케이션적인 청원의 구성에 의해 포함된다.
[12] 몇 년 동안 구별의 다른 편, 배제 또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cf. Stichweh, 1988; Luhmann, 1995a, 1997a: 618-33; Göbel and Schmidt, 1998; Halfmann, 1998)
[13] Cf. 또한 R. E. Park의 초기 작업 중에 군중과 공중 사이의 구별. (1972) 공중과 군중은 비형식적 그룹들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그들이 통제되는가에 따른다. 군중에서는 어떤 규범적인 집단 의지가 없고, 오직 내적 충동만 있다. 공중은 논리의 규준을 따르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공중은 비판을 표현한다. 군중은 단지 집합적 충동을 따를 뿐이다.
[14] 이는 분명히 정치 사회학에서 대중적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개념과 대비된다. 정치 사회학은 일반적으로 대중적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정치적 제도와 관객/유권자 사이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은 정치에 유권자를 연결시키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기술하낟. ‘대중적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은 정치가와 유권자, 대중과 그들의 대표 사이에 관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van Zoonen, 1998) 그렇지만, 이것이 정치 시스템에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일까? 의회/정당 정치로부터 유권자로 흐르는 (그리고 그 역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하는 단순히 순환적 권력 구조의 하나의 장치일까?
[15] 마지막 논문 중 하나에서, Luhmann(1997)은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관객의 구성을 조망하는 아직 충분하게 탐구되지 않은 아��디어를 끌어들였다. Luhmann이 시스템의 오토포이에틱한 개념에 더한 것은 그가 모집단의 생물학으로부터 끌어낸 논의였다. 시스템은 개인화된 모집단을 전제한다. 이 모집단은 시스템의 미래 진화에 중심적인 다양성과 세분화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정치적 시스템은 그 모집단을 ‘대중’으로 인식한다. (Luhmann, 1997b: 26) 모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분화는 단지 시스템의 자기 조직화에 의해 생산되는 교란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집단은 이제 변화와 분화의 추가적인 ‘원천’으로 보인다. 이 모집단의 개념은 시스템의 ‘교화되고’ 교육받은 관객과 시스템 외부에 그로테스크한 표상 사이에서 진동하며, 어떤 애매모호함을 품고 있다.
[16] ‘포인트는 레벨 1에서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에 필요한 배제가 동시에 상상적인 것의 수준에서 생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집합성을 통일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해 경계를 정하려는 시도 자체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하이브리드 판타지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Stallybrass and White, 1986: 193)
[17] 배제된 것에 대한 시스템 이론의 메타포가 주요한 메타포로 육체를 사용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Luhmann(1995a: 237ff.)�� 배제된 것을 단지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텍스쳐에서 아크로바틱한 육체에서 혹은 블랙 홀로 관찰했다. 왜냐하면 배제된 것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8] 화성인 스스로는 진화적으로 원시적인 꿈틀거리는 형식(단세포 생명체와 닮은)과 하이-테크 의상과 장비 그리고 지능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형식이다.
[19] Cf. 남아프리카에서 통치 기술로 Le Bon의 군중 심리학을 읽기 위해서는 Durrheim and Foster(1999). 그들이 흥미 있는 케이스 스터디를 제공하지만, 그들의 Le Bon 독해는 그를 정말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Le Bon은 결코 모든 군중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영웅적 군중도 있다고 주장했다. 더 중요하게 Le Bon의 작업은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군중의 상과 자기 조직화에 기반한 상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적 군중은 이질적 요소들로 형성된 임시적 존재다. 그것은 잠시동안 결합된다. 정확하게 세포가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그들의 재결합으로 세포 각각이 혼자 소유한 것과는 매우 다른 특성ㅇ르 보여주는 새로운 존재를 형성한다.’ (Le Bon, 1952: 27) 그래서 군중은 언제나 창발적이고 불안한 현상으로서 생각된다. 그것이 통치를 어렵게 한다.
[20] Peter Fuchs가 ‘제안한 것’처럼 매개/형식 사이의 구별이라는 개념으로 문제를 재정식화하는 것을 주저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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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야 나도 광기라는게 있는 남자다 ??? : 사회야 나도 광기라는게 있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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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멀리 낯선 사람으로 존재하는 이 남자는 종종 이렇게 누구보다, 아니 다른 누구와 비교 할수 없이 가깝게 다가온다. 이 남자의 이런 점이 나는 좋다.
2. 그때의 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다시 돌아 가고 싶지는 않다.
3. 나는 속마음을 감추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지만 자꾸 깊어지는 진심은 농담의 뒷편에 감추웠다.
4. 내가 원하는건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다.
5. 난 아직도 윤석현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심은 말하지 않겠다. 윤석현이 먼저 다가올 때까지 절대로 내가 먼저 다가서지 않을것이다.
6. 그는 이런 남자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제촉하지 않는 남자. 다시 되묻지 않는 남자. 헤어지자고 말해도 한번 붙잡지도 않았던 남자. 원래 그런 남자 였다. 몰랐던게 아니다.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밀어내는 남자 라는걸 몰랐던게 아닌데 내 마음은 자꾸 그에게 더 다가가고 있었다.
7. 질투 하면 찌질한거야? 난 질투 유치 하다고 생각 안해, 질투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야.
8. 난 너 좋아해 윤석현, 생각해 보니깐 나는 한번도 너를 좋아하지 않은적 없었어. 도대체 진심이 뭔지 몰라서 지치고 힘든데 근데도 난 너 좋아해. 미친거지 내가. 거절해도 돼, 난 가짜는 싫어.
9. 그 순간 나는 간절히 원했다. 한번만 사랑이 내 편이였으면 오늘만이라도 제발 오늘만이라도.
10. 무심한듯 행동하지만 내 모든 감각의 촉은 그를 향해 열려있고, 그도 그렇게 보였다.
11. 내가 원했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나쁘다고 말할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말해버렸고 또 말할 것이다. 사랑받고 싶다고, 사랑해 달라고, 말 할수 없어서 나는 그렇게 말해 버렸다. 이제야 그의 진심을 알았다.
12. 그가 미웠다, 서운했다, 서러웠다, 상처받았다, 그러나 그 마음의 끝에는 하나의 답이 남아있다. 난 아직도 윤석현을 사랑하고 있다.
13. 연애가 끝나면 알게 된다. 두사람 중 누가 더 많이 사랑했고 누가 더 작게 사랑했는지. 헤어지고 난 후에
먼저 웃을수 있는 사람이 더 작게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다정하게 웃었다.
14. 윤석현씨 운명이라는게 별게 아냐, 기가막힌 타이밍에 서로의 인생에 자연스럽게 등장해주는거 그래서 서로한테 소중한 사람이 되는거 그게 운명이고 인생이야.
15. 다시 시작해 우리 돌아가자, 너 없이 안되겠어 나는. 니가 싫어하는건 고쳐볼게 솔직해질게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얘기할게 사랑한다고도 자주 말할게.
16. 그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을 ���명하게 알려줘야 했다. 그게,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친절이였다.
17. 언제나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지만 이제서야 분명해진다. 그 연애에서 더 많이 사랑한 쪽은 윤석현이다.
18.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내가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은 오로지 내 행복을 위해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진심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19.
자주 열매를 생각했다.
생각하면 그리워지고 그리워지면 아팠다. 잊으려고 애를 쓰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난 차라리, 그리움에 내 마음을 맡겨버리기로 했다.
20.
나는 열매를 사랑했었다.
부끄러워 볼이 빨개지던 너를 사랑했다.
작은 우산 속에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쉴 새 없이 하던 너를 사랑했다.
동그란 두 눈을 가진 너를 사랑했다.
나를 웃게 만드는 너를 사랑했다.
따뜻하게 나를 바라봐주는 너를 사랑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너를 사랑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너를 사랑했다.
상처 받고 아프면서도 나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너를 사랑했다.
허술한 점이 많은 너를 사랑했다.
흘겨보는 표정이 귀여운 너를 사랑했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던 너를 사랑했다.
내가 힘들 때마다 곁에 있으려 애쓰던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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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26 [Text] 아 내이마가 에얼리언급으로 부푸는 모습을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시작함 잠이 너무오는 탓에 겁없이 못타는 놀이기구를 타는게 아니였음... 그리고 범퍼카를 타러갔는데 사실 나 1종몀허있는 남자다?? 애들이 나한테 운전하며 달려오는데 다피함 후훗 [Trans] Oh, my swollen forehead looks like an alien's now, and I started getting a little bit worried since I didn't sleep much. (I'm) blaming that for getting into rides fearlessly, and maybe I overcame it with that. Then we went to ride the bumper cars... and in fact, am I the only man who has their license?? the kids were all driving forward toward me and running. So I had to avoid them *laughs* Translated by akumanobonnou
ARMY NOTES -This is part three of Yoongi's story about going to Lotte World. The other parts of the story can be found here: pt1, pt2, pt4, pt5, pt6, pt7, pt8.
#bts_twt#2013#march#130326#pre-debut#translation#OP_MY#bts suga#min yoongi#min yoongi 2013#yoongi 2013#yo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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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12.(금)
우리 회사는 여직원 막내가 발렌타인 선물을 하고 남직원 막내가 화이트 데이 선물을 한다. 물론 비용은 여직원 남직원 각각 각출을 하나 막내 입장에서는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19년에는 보고서 편집으로 바쁘고 20년에는 보고서 지표 2개로 바빴고 21년에는 보고서 3개에 □□ 담당이라 바빠서 전산팀 막내를 꼬셔서 2월 부터 부탁해서 데니쉬 쿠키를 선물하고 위에는 로쉐를 얹어 주는 것으로 잘 마감했다. 데니쉬 쿠키인데 원산지는 포르루갈이더라 그럼 포르투갈식 데니쉬 쿠키면 뭐라고 해야하나...
아 저 쿠키 편의점에서 1+1 800원에 판다. 참고로 쿠팡에서는 18EA 1BOX 8,000원 가량에 판다.
전산팀 C가 도와줬고 K는 집에거 쿠키를 구워서 줬다. 섬세한 남자다. 집에서 쿠키도 굽는 남자. 물론 내가 매번 하드 해먹어서 빡치겠지만...
원래는 이것 저것 사서 쇼핑백에 이것 저것 담아주는 건데 거참 귀찮아한다. 나는 잘할텐데. 생각해보니 내 여자에게는 무슨 선물을 했는지 끙.
매일 매일이 발랜타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여간 아쉬웠다. 쇼핑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것이라...
몸이 고단해서 J대리에게 비타민을 삥뜯어 왔다. 아줌마 본인 먹기 싫으면 나에게 잘 던진다. 물론 그것도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럴터.
할라피뇨와퍼는 소스가 캐첩이 아니고 뭔가 다른 달콤한 소스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치킨 너겟은 잘 안 팔린다. 8조각 2,000원의 유혹에 매번 사지만 말이야.
근처 시장의 뜨거운 찹쌀도너츠(도나쓰라고 해야지 어감이 산다) 500냥에 행복해진다. 시장 만세. 제과점가면 1,500원으로도 못사니까.
저녁은 또 짬뽕
오짬은 오징어가 들어간 짬뽕이 아니고 5일 연속 짬뽕이 오짬이렸다. 사실 짬뽕에 오징어 안 들어갈 수가 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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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족 같은 소리하네
화장 안했는데...라는 말과 같다.풀 메이컵 하고도 이거 화장 안한거야.
자기만족으로 노출옷을 입고 팬티나 브라만 걸친채 셀카를 찍었으면 혼자만 보며 만족하지 왜 sns에 올려서 이성들에게 "좋아요" 받으려 할까?
그것도 자기만족 이지만 보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다. 자신이 만족할 이성만 빼고. 부작용으로 생각지 못한 피해를 감수해야한다.
분명 자기만족이란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퍼센트로도 과반이 아닌데도 그걸로 모든걸 커버하려든다.
거의 대부분의 남자가 여자의 노출에 민감하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걸안다. 가르쳐 주지 않아��.그러한 노출에 반응하는건 예민하게 동종인 인간뿐이고 가장 강한 반응은 남자다.
이젠 좀 솔직해 지자.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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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yeol - 190903 Announcer Jang Sunggyu's Instagram update: "난 엑소가 선택한 남자다 지구를 정복한 찬열 군이 나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안 믿겼다 #심장아나대지마 정신을 가다듬고 나니 현실이었다 하지만 바로 맞팔하지 않았다 쉬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밀당 끝에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았다 #선팔 #맞팔의 #좋은예 #엑소 #찬열"
Translation: "I'm the man chosen by EXO. Chanyeol, conquerer of the world, has outstretched his hand to me. I couldn't believe it #Heart, be still. After clearing my mind I checked again and found it was true. But I didn't immediately follow back, I didn't want to look easy. I played hard to get. Finally, pretending to give in, I took his hand #He followed me first #Mutuals #Good example #EXO #Chanyeol"
Credit: jangsk83.
#EXO#EXO K#Chanyeol#190903#exo im#exo k im#chanyeol im#mention#instagram#translation#fs:jangsk83#comeback:Tempo#followup: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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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emilton_special_force #전설 #흥터지다 #샤먼형 #무릎조심하시고 #살앙합네다 #만수무강하십시요 #우리특전대의 #심볼 #정신적지주 #늘 #분위기 #띄우는 #선봉대장 #멋지게 #늙는 #사나이 #남자다 #샤먼댄스 #최고조 #😂🤣👍 #나이60돌파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 #🔥 @hamilton_clubpool (Hamilton Hotel Itaewon) https://www.instagram.com/p/Bz4fFaugLKNGKAUwYwIjS4ns-OW-0-yxVjv1JY0/?igshid=czk8ouk2ya76
#전설#흥터지다#샤먼형#무릎조심하시고#살앙합네다#만수무강하십시요#우리특전대의#심볼#정신적지주#늘#분위기#띄우는#선봉대장#멋지게#늙는#사나이#남자다#샤먼댄스#최고조#😂🤣👍#나이60돌파#나도#저렇게#늙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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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눈썹 🙈 . #남자 분들 #눈썹 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나요 !!!!!!!!!!!!!!!!!🔊 . . 뒷쪽 숱없는 눈썹 때문에 인상이 흐릿해보이고 남자다운 느낌이 15프로 부족했지만... #여의도 #반하다 #원데이브로우 시술로 #이민호 #김우빈 눈썹으로 변신 🎵🎶 . . #남자다 #멋지다 #내남자 도 뭔가 부족해인다면 바로그건 #반영구눈썹 💕💕💕 . 💝여의도반하다 #반영구화장 인증기관💝 인스타 프로필 오픈채팅 문의👆👆👆(Yeouido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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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비정성시.
비 내리는 길 위에서 여자를 휘파람으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아무리 멋진 휘파람으로도 오지 않는 양이다 어머니를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간호사를 휘파람으로 불러 세워선 안 된다 이것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것이 내가 여기 들어온 경위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음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해가 뜨면 책을 덮고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구석으로 가서 나는 암소처럼 천천히 생각의 풀을 뜯을 것이다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
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흉노나 스키타인이거나 마자르이거나 돌궐이거나 위구르거나 몽골이거나 투르크족처럼 그들은 모두 유목의 가문이었다 그들의 삶은 늘 유배였고 그들의 교양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상식은 죽어가는 가축의 쓸쓸한 눈빛을 기억할 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에 많이 태어났고 새벽에 많이 죽었다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은 그때 나를 작곡한 그 남자다 그는 현세에 음악으로 환생한 것이다 까닭에 나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전생을 거듭 살고 있는 것이며 나의 현생은 전생과 같다 나는 다시 서서히 음악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간직한다
예감 또한 음악이다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러나 자신과 가장 닿아 있는, 자아의 연금술이다 나는 지금 방금 내 곁을 흘러간 하나의 시간을 예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생각은 음악이 되고 한 컵의 물이라는 음악을 마시는 동안 내 생각은 어느 먼 초원 스페인 양떼들의 털을 스친다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올까? 목이 마르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여덟 번 말했다
비 오는 날 태어난 하루살이는 세상이 온통 비만 온 줄 알고 죽어간다
비 오는 날 태어나자마자 하수구에 던져진 태아는 세상은 태어나자마자
하수구 속에서 죽어가는 곳이구나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의 어미는 야산의 둔덕에서 하늘을 보며 빗물로 피 묻은 자궁을 씻고 있다 해가 뜨고 개미들이 어미와 태아의 끈이었던 태를 땅속으로 끌고 간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그것들을 꼼꼼하게 관찰한다 비 온 뒤 축축한 땅에 귀를 대면 누가복음이 들려온다 개미의 저녁예배를 듣다가 저녁을 굶었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고 있는 시간은 무간(無間)이다라고 불러본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密酒)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유년은 생의 르네상스다 내가 이슬람교도였다면 나는 하루 여섯 번 유년이라는 메카를 향해 절을 올렸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순간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수면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라보던 물 밖의 멀어지던 빛,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학교에 가지 않고 물속에서 손바닥을 펴 죽은 새들을 건져올리며 나는 그 열락을 기억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까지 어머니의 젖맛이 기억나지 않아 나는 새벽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물어본 적이 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 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時差) 때문이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죽음이 필요했기에 당신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다
방 안의 촛불이 눈 속에 공기를 모두 연소하고 있다
촛불은 다른 불빛들과 이웃하지 않는다 이것이 촛불이 밤에만 피는 까닭이다
1976∼? 나와 생멸을 같이할 행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나의 에테르다
수음을 하는 동안 몇천 년 나는 늙어간다
수음을 하는 동안 나는 나라는 문명이 슬프다
너와 내가 뜨겁게 안는 순간 문득 우리가 죽는다면 몇천 년이 지나 우리는 화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만질 것이다 거칠고 딱딱한 질감에는 슬픔이 담기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분노다 나는 비로소 천 년이 지나 사람들이 우리를 만질 때 돌 밖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야만이다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한 번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생이별하는 것이다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 자는 일이란 저승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생에 다름 아니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내가 한 번 자살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바람이 한 페이지의 얼굴을 넘기며 간다 동풍은 과묵하다 불안은 자기표현의 정직한 양식이다 내가 매일 맞는 주사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간밤에는 부대를 빠져나와 대원들과 어울려 무덤을 팠다 삽날이 두개골에 닿았을 때 나는 낙타를 떠올렸다 사막을 가다가 모래처럼 허물어졌을 낙타, 10리 밖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무덤에 묻혀 있던 그의 뼈를 구워 점을 쳤다 그는 은(殷)나라 사람이었다 시를 썼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절벽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꿈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유배지다
저 자신의 내면을 도굴하는 것이 꿈이라면 사람들은 꿈이라는 실형을 살고 있는 셈이다 위험한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곳을 다녀올 때마다 다른 비석(飛石)을 세우고 온다 그리고 거기서 데려온 기억의 비문을 문득 추억이라 부른다
기억이란 인간의 두 번째 생이다 인간은 기억을 기다릴 뿐 기억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기억은 불구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지금 분홍천(川)이다 저녁만 되면 병동의 사람들은 예배처럼 창을 열고 저 노을을 가슴에 버린다 창살을 통해 마지막일지 모를 일몰을 바라보며 쓴 사형수의 수기보다 더 아름다운 시(詩)는 아직 없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가는 것들에게서 나오는 음악을 베토벤이라고 누군가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베토벤은 저 자신이 음악이었다 그는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절박했을 뿐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귀신이 되는 생도 있겠으나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생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음악을 향해 나의 원시는 바쳐진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詩)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빛을 보아서는 안 될 운명을 가진 뱀파이어 부부가 죽기 전 스스로 햇볕 아래로 기어가 서로 끌어안고 부서진다 단 한 번 빛을 보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수천 번의 밤을 경험했다
밤에 태어났고(T) 밤에 시를 썼다(T) 이 사실만으로도 지구에서는 아득할 만하다(F) A=A-
지구에서는 시인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별에서는 지구가 보인다
사이다에 지렁이를 한 움큼 담그고 마셔버린 나의 이종삼촌은 자신이 목성에서 왔다고 했다 지금도 나주 백병원에 가면 고모할머니가 가져다준 한약 봉지를 하나씩 개수구에 버리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삼촌은 이제 마흔이 다 되어 무섭게 음식만을 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구에 와서 배운 것이 휘파람뿐이라고 했다 전남대학교 천문학과 83학번을 수석으로 입학한 삼촌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 삼촌과 나는 어릴 적 로보캅2를 함께 보고 나란히 화장실서 로보캅처럼 오줌 누던 기억이 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마른 사타구니를 만지며 괴롭다 내게서 꿈이라는 혐의를 빼면 대체로 나는 무죄이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생이 끝장날 것 같다 “개자슥 엄마를 불러!” 면회 온 엄마를 불렀다고 고막이 터지게 맞던 나의 아름다운 후임병(99-71002665)은 누구에게나 거짓말이 늘어갔다
달 뜬 밤 기숙사 창틀에 앉아 비누를 갉아먹다가 실려 온 저 대책 없이 아름다운 옆방 소녀는 밤마다 쥐가 된다 하수구에서 시궁쥐처럼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소녀에게 인공호흡하지 않았다 소녀의 흰 발목과 소녀의 살짝 드러난 하얀 허리 사이에는 시커먼 털들이 무성했다. 젖은 바지는 그 무참함을 가릴 수 없었다.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무성한 허벅지 털의 색감과 질감까지 포용할 수는 없었다. 소문처럼.
방이 좁아서 더 이상 양때를 부를 수 없다 사람과 옷장에도 양떼가 꽉 찼다 내 양들은 물갈퀴를 닮았다
어느 날 망막을 마개처럼 따 올리면 수천 통의 필름이 눈 밖으로 줄줄 흘러나올 것이라 믿는다 눈 안으로 빛이 들어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필름은 눈 속에 살아 잇다 빛이 눈을 아프게 하는 건 눈은 깊고 어두운 성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는 커튼을 치지 않는다 병실은 늘 어둡다
한 번도 꽝꽝 언 하늘에 연(鳶)을 날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나는 놀지 않았다
찬송가를 백 곡 이상 안다고 하는 사람과는 나는 노래 부르지 않았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줄줄이 암기한다는 사람과는 돈거래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불효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뜨거운 서시(序詩)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그대라는 성(城) 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번도 나는 그런 사람을 살아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칸은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소설에 주술을 걸어 그녀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칸은 매일 비명처럼 살아갔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칸의 파오를 찾아가지 못한 지 오래다 나는 칸과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우리에게 생을 증거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우리의 면죄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순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근사한 기분이었다 칸과 나는 자웅동체처럼 웅크리고 자는 습관이 있다 배춧잎 같은 이불 위헤서 깨어나면 그와 나는 SAM이 된다 현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 써야 하는 삶의 조서다 우리는 붙어서 걸었고 매일 고개를 숙이고 조서를 썼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죄짓는 기분이다
마크툽! 기억의 피라미드여 굳건하라 어떤 나든 함부로 파들어가면 묻힐지니 기억은 다 해독하면 곧 달아나야 한다 금방 돌이 떨어지고 벽이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는 기역(氣驛)이 무섭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창을 열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 편지를 읽는다 로비에서 소녀는 달력을 보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환자복을 파고들어 배를 부풀리던 바람은 어디서 온 편지일까?
소녀는음력달이완전히찼을때어두운계단입구에서혼자아이를낳았다내가그녀쪽으로조용히걸어갔을때그녀는거의움직일수없을만큼지쳐잇었다너무어두웠기때문에내가누구인지도그녀는확인할수없는상태였다한손에는태를자른과도가힘없이쥐여있었다나는그녀에게다가오는그림자였고그녀도내가보지못한그림자를가진채누워있었다아이는울지 않았다나는그아이를안고내방으로천천히걸었다그녀가손을뻗어잠깐동안무엇인가알수 없는알타이어를중얼거렸지만이윽고그녀는조용히벽에비친내그림자만만지고있었다나는그아이의몸에밴어머니의피를젖대신먹였다새벽엔가축의젖을물렸다아이의몸에선라일락향이났다사람들의눈은피하기위해나는아침에아이를머리부터천천시삼켰다저녁이며뱉어내서다시쥐의젖을물렸다아이는내안의굴에서낮에는박쥐처럼거꾸로매달려잣고밤엔내가읽어주는나의시를들었다아이는조금씩눈이멀어갔다아이가다자랐을때나는 갈매기의혼을넣어주었고아이는말의몸을빌려달력의초원으로달려갔다아이가떠나기전 내게당신시는영하라고했다나는아이가떠난후쓸쓸해서몽골어를배워보려했지만그만두었다달력에서쏟아지는눈으로방이���었다
눈물은 자기 안의 빙하가 녹는 것이다 차가워지려면 뜨거워지는 헤엄부터 배워야 한다 뼈의 길을 찾아들어 섬광을 남기는 보검처럼. 칼은 뜨거우면서 차갑기 때문에 멀고 갚은 곳까지 흐를 수 있다 밖으로 나오는 울음은 자신을 베기 때문에 차갑다 눈물은 제 안의 썩고 있는 어류(魚類)들이다
하늘은 스콜라 철학처럼 흐른다 구름은 제3의 물결이다 바람은 바카디151처럼 독하다 나무들은 루마니아 전설처럼 고요하다 숲은 한물간 산부인과처럼 조용하다 안개는 논리가 없고 태양은 실천 중이고 호수는 냉소적이다 먹어야 할 알약은 베이컨적이고 경험하지 못한 진실은 아직 내 앞에 평등하고 헤겔보다 나는 기도를 잘할 수 있고 내 기도가 더 형이상학적일 수 있고 1999년 6월 진해부두에서 감전돼 죽은 이병장보다 돌계단은 차갑다 신은 관념을 품어서는 안 되고 나는 코펜하겐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코펜하겐이라는 음악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코펜하겐이 되고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믿는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쓰고 설명하지 않기 위해 나는 울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유산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나고 나를 제대로 발음하고 나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슬픔에 부상당했고 가난에 고문받았고 종교에 암살당했고 밤마다 임 병장의 자지를 만져주며 살아남았고 내신 매일 시로 자살했고 시로 미(美)를 매혹시켰다
방에 침을 퉤퉤 뱉는 또 한 마리 모기의 목을 땄다 모기의 뇌(腦)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중국 전설을 믿고 병 속에 모아놓은 모기의 머리들을 들고 소녀의 방문 앞에 놓았다 열쇠 구멍으로 소녀가 내 뒷들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죽으면 너는 꼭 나를 해부해야 한다 내 가슴을 절개하면 누구 말대로 내 가슴에선 수억의 인류들이 피에 뜬 채 죽어 있을 것이다
죽이고 싶은 버전이 몇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를 썼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버전이 있고
너무 시를 아름답게 보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버전이 있다
굴욕을 연민하는 시인은 제 자신의 삶이 한 권의 시집이어야 하고 그 시집은 자아의 병동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버전이다
시인은 신이 놓쳐버린 포로다 그러나 포로는 늘 프로다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은 너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졌다! 라고 쓰는 것은
단지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에 산다
그것이 너한텐 꽤 중요한가 보다
잠자는 동안에 창밖에서 수천 개의 붉은 눈알들이 나를 내려다본다는 것을 안다 손가락을 다 써버리고 잠든 밤, 내 몸을 빠져나온, ‘내가’ 배 위로 올라타서 두 눈을 뽑고 있는 것을 안다 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는 늦은 아침까지 눈을 뜨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가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오고 나면 나는 겨우 눈을 떠 등바닥에 시퍼런 핏물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국적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다 나는 7월의 클라이맥스를 안다
나는 7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7월의 음악들을 들으면서 죽어갈 것이다 내 유서는 7월 위에 쓴 나라는 시 한 줄뿐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의 7월은 수장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낀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리아 상이 눈물 흘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차에 치인 사람이 바닥에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장례식차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늪에서 얼룩말이 악어 입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다
몇백 마일 떨어진 전깃줄 위에 사람 하나 새들 사이에 끼여 날개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창 속에서 누군가 탈고를 막 끝내고 숨이 멎었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저승사자들이 지하철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출생을 알고 찾아온 아들이 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어미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거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골목의 대문 앞에서 누군가 나처럼 서성거리고
오늘, 음악은 참 희곡 같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어떤 호숫가에 앉아 있었는데 저 멀리서 상여를 메고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호수의 차고 푸른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면 안 된다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그들은 내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지만 그들에게서 냄새처럼 퍼져나오는 음악이 내 목소리를 그들에게 전혀 전달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씩 물속으로 잠겨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상여를 메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들 모두의 얼굴이 내 자신의 얼굴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전부 눈동자가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상여 속의 망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 상여를 닾고 있는 꽃천을 헤치고 관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 나의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한 그루 나무뿌리처럼 뻣뻣하고 말이 없었다. 목이 잘린 어머니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내 머리를 옆구리에 단정히 끼고 있었다. 나의 얼굴이 어머니의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 박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난생처음 나는 나의 울음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 지성사, 2006) 14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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