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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추억이 많은 아이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어제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마이클 무어의 <다음 침공은 어디? 핀란드 편>을 보았다. 거기서 핀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이 아이답게 있을 짧은 기간을 보장해주고, 보호해주고, 펼치게 해주는 것이 학창시���이라고 대답했다.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안겨주는것, 그것이 바로 교사와 교육과 모든 보호자들의 역할이다.
그건 죽을때까지 사라지지 않는거니까. 안전하게 해주는 진짜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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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은 불완전함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사랑에 관한, 사랑���러운 정의- 소냐와 오베의 관계는 애니메이션 <업>에 나오는 고집불통 남자와 사랑스러운 탐험가의 러브스토리와 많은 부분 닮았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 36장 “오베라는 남자와 위스키 한 잔”. 프레드릭 배크만(2012). 다산책방. 2015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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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의 멋짐은 어디까지인가
나보다 나이어리고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해도 얼마든지
어떤 부분, 어떤 영역에서는 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델의 자기 분야에서의 성공 그 자치보다도 그녀의 마인드는 정말 본받을 만하다.
특히 여성 전문인으로서, 여성 음악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테일러 스위프트 ‘류’의 셀럽+팝스타를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아델의 포지션을 밝힌 발언이 있었네.
블로그 글에서 접함.
출처: 위 블로그 주인장님의 번역.
멋지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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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now what I am- Ad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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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있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박근혜는 대체 왜?
아침에 막역한 지인이 “박근혜는 자기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진짜 궁금함”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개인이자 공인, 정치인
정치인은 공인이기 이전에 개인이며, 한 인간이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과 그 정신세계 구축에 영향을 미친 사건은 그의 통치 스타일, 정치 활동의 성향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예전에 곤돌레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을 향해 많은 정치비평가들이 “백인 남성의 가면을 쓴 흑인 여성”이라고 말했었다.
탈식민주의 정신분석학자이며 비평이론가인 프란츠 파농은 <검은피부 하얀가면>을 통해서 프랑스 식민 경험이 있는 크레올들을 통해 얻은 통찰을 가지고 피식민자의 “정체성 꾸며내기”(masking)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라이스의 “백인보다 더 백인되기”는 그런 면에서 식민화된 피지배계층이 주류화를 이루려고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지배 논리를 답습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로 해석될 수 있다.
박근혜 정신세계를 분석해보자면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학, 인문학적 소고인 <몸은 기억한다>의 책 소개글 에서는 박근혜대통령을 대표적인 트라우마에 의한 정신질환 환자로 소개한다.
양친을 모두, 20대 꽃다운 나이에 그것도 한국에서는 ���치도 않은 ‘정치적 테러’로 총기 살해 당했으니 개인사적으로는 엄청난 비극을 겪은 것이다.
심지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도 못하게 계속해서 복기하며 재해석과 의미 덧대기를 해 가며 정치적인 무기로 활용해야만 하니 트라우마가 곧 그 삶의 동력(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환자라고 모두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건 아니니 “그럼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겠어”라고 반문하지는 말자.
역시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양태를 ‘배신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한겨례 신문의 글.
배신 트라우마는 곧 능력보다는 충성도를 중시하는 인사정책으로 나타나고, 곧 이어 “복수 컴플렉스”로 발현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역사는 왕들의 ‘일화’를 왜 소개할까
왕들의 치세와 실정, 행적들을 분석할때는 그 왕이 어떤 왕조에서 정실인지 후궁 소생인지부터 시작해 세자시절 어떠했다더라, 등 의외로 정신분석학적인 접근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최근의 조선왕조실록의 아주 작은 부분에 입각해서 재창조한 퓨전사극을 제외한 정통 사극들은 과거의 어떤 사건과 화소들에 초점을 맞추어 왕의 성격 형성, 심지어 치세까지 해석한다.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사도>만 해도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 영조의 젊은 시절의 일화들, 트라우마 혹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지극히 가정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들’이 후에 조선의 역사를 바꾸고 여러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앗아가는 ‘임오화변’으로, 더할나위없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용서도 동정도 답은 될 수 없다
그러고보면 “불쌍한 박근혜 뽑아주자”며 그녀에 대한 동정론을 펼치는 노인들의 몰표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뭐가 불쌍해요!”라고 일갈하기 전에 과연 불쌍한 사람, 자체는 맞다는 걸 인정하자는 것이다.
많은 권력을 누리고도 많은 사람의 희망을 짓밟고 영욕을 또 다시 좇는 사람��지언정 그가 겪은 불행이 희석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개인으로서는 동정을 받더라도, 정치인으로서 용서와 동정에 호소해 치세에 대한 평가를 피해가는 것은 안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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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평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서울여성영화제
올 6월에 개최되는 서울국제 여성영화제를 응원한다.
지난 3월 10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블로그에서 공유한 영화제 만족도 조사 및 평가 결과가 나왔다.
���울국제여성영화제는... ‘각 영화제가 가지는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성과 고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적인 지표’인 특성화 척도 부문에서 또한 1위를 차지했다. 특성화 부문 평가에서는 관객들이 ‘여성영화제를 통해 영화제가 “여성영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가장 잘 체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여성영화제가 영화제의 제 정체성을 잘 실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글에서 특히 와닿는 구절은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한 여성영화제 준비위원회의 소회였다.
지금까지 SIWFF가 이루어낸 많은 성과를 마냥 찬양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더욱 초심으로 돌아가 본진(!)을 가다듬어야 할 것을 역설하면서
108년 전 시작된 여성의 날은 페미니즘이 평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시작부터 보여주었다. 페미니즘은 모든 불평등과 불공평이 사회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평등의 또 다른 이름이자 불평등과 불공평의 반테제로 작동하기에 여전히 유효하다.
라고 본인들이 딛고 선 땅과, 본인들의 눈이 향해야 할 promised land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굳건한 아이디어나 이념에 입각해 시작된 활동이나 행사일지라도 오랜시간 혹은 많은 노력이 투입되면 그 자체로 좋든 싫든 생명력을 갖게 된다. 조직 자체, 활동 자체, 행사의 성공 자체가 많은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사안'들을 후순위로 물러서게한다. 뒤로 밀린 것들이 결국은 뿌리를 이루는 것이고,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측면에서 SIWFF 준비위원회가 초심을 다지면서 '여성'영화제로서 본인들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반갑고 응원하고 싶은 행보다. 6월, 나의 탄생일이 있는 그 달에- 얼마나 역동적이고 문제적이며 가슴이 뜨거워질 영화들이 기다릴지 기대된다.
p.s. 학교 선배인 선영언니가 이번 영화제 예선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셨다고 한다. 반갑고 기쁘다. 곧 페미니즘과 TV 문화와 관련한 단행본도 발간하신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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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기사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부분에 있는 것 같다.
"새 학기를 맞아 초등생 자녀를 둔 중년 엄마들 사이에 '젊은 엄마 따라잡기'가 유행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놀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40대 중·후반 엄마들의 노파심이 낳은 현상이다.
한국 여성의 평균 초산(初産) 나이는 지난해 31.21세까지 높아졌고, 35~39세 여성의 출산율은 2014년 1000명당 43.2명에서 지난해 48.3명으로 올라갔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중년' 엄마가 문제라는 거다. "자 ���거봐, 늙어서 애를 낳으면 너도 애도 좋을게 없어, 그러니 젊을 때 나돌아댕기지 말고 제때제때 결혼해서 젊고 예쁜 엄마가 되란 말이야. 집에서 애를 키우면서"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전제로 하고 있을뿐 아니라. 여성들의 출산 여부, 초산 연령은 지극히 개인이 가지는 건강과 인생에 대한 계획과 주체적 결정에 달려있다. 저널리즘은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고 고발하거나 사회의 지향점을 시민들이 만들어갈 수있도록 토론의 화제를 던져줄 때 의미가 있다. 그런데 기자는 술자리에서나 '-카더라'로 회자될만한 씹을 거리르 던져주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녀들이 젊어보이고 싶은 것이나, 몸짱으로 보이고 싶어서 한달에 수백만원을 헬스클럽에 쏟아붇는 연예인들이나 다를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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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미국 교육부 규제 수정 제시(안)
Open Licensing Requirement for Direct Grant Programs
“SummaryThe Secretary proposes to amend the regulations regarding the Uniform Administrative Requirements, Cost Principles, and Audit Requirements for Federal Awards in order to require that all Department grantees awarded direct competitive grant funds openly license to the public all copyrightable intellectual property created with Department grant funds.These proposed changes would increase the Department's ability to be more strategic with limited resources, broadening the impact of its investments by allowing stakeholders, such as local educational agencies (LEAs), State educational agencies (SEAs), institutions of higher education (IHEs), and other entities, to benefit from these investments, even if they are not themselves recipients of Department funds. An open licensing requirement would also allow the Department to sustain innovations beyond the grant period by encouraging subject matter experts and users to adapt, update, and build upon grant products, stimulating quality and innovation in the development of educational resources. Finally, the proposed requirement would promote equity and access to Department-funded technology and materials and increase transparency and accountability for the Department and its grantees.”
(번역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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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2살인데 31세입니다.
#나이 계산법 배틀
1) 한 해를 넘기면서 다 같이 한살씩 먹는다=>한국나이(먹는 나이)
2) 자기 생일을 넘기면 연령이 1 증가한다=>만 나이(세는 나이)
==>이대로 계산해보면 나는 32살이면서 31세이다.
올해가 시작되고 구정을 맞이하면서 온라인 상에서(특히 나의 뉴스피드에서는) 한국의 ‘요상한’ 나이 계산법에 대한 기사들이 올라왔었다.
그런데 심지어 기사에서조차 유교의 태아존중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잘못 이야기하고 있다. 인용은 어딘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식 나이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편견
지인이 링크를 걸며 소개해 준 글에서 접하게 된 기수식, 서수식 구분법.
한국식나이와 서양식나이 차이점
한국식 '세는 나이'는 엄마 뱃속에 있었던 시기를 세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만 나이에 그냥 열 달을 더하고 말겠지요.
한국식 나이는 나이를 기수가 아닌 서수로 세는 방식입니다. 아주 단순한 차이입니다. 기수는 양을 세는 입장에서의 수를 말하고, 서수는 차례를 세는 입장에서의 수를 말합니다. 즉, 서양식 나이는 기수 방식인 것이고, 한국식 나이는 I'm on my n'th year 라는 의미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간다. 케케묵은 유교 생명존중사상,이 더 멋지니까 태아에서부터 1살로 치는게 맞아, 라는 말은 이제 듣기 싫던 차에 속이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결국 어느쪽의 주장이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도아니고 어느쪽이 비합리적인 구습이다,라고 말할 순 없다는 거다. 관점의 차이니까.
결국 합리성을 양쪽 모두 갖추고 있고 약점도 양쪽 모두 갖고 있습니다. 그냥 관점의 차이입니다. 자신의 나이를 한국식 나이로 외국인들에게 말하고 싶을 때는 I'm on my 27th year 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됩니다.
#춘절을 ‘몇번째’ 맞이하는지
러시아 칼럼니스트 줄리아 크메렌코( Julia Chmelenko)가 쓴 한국의 독특한 나이세기? 매기기? 방식에 대한 글에서는 한국과 중국 등의 동양에서 서수식 나이계산법을 도입하게 된 연원이 보다 문화적인 관점으로 나타나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보다 러시아사람이 그 요상한 연원과 원리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황망하다.
(문화적 관점이라는 걸 강조하려고 했는지 무관한 한복입은 처자의 가야금 연주가...)
춘절과 음력설(구정)을 기점으로 해서 몇번째 맞이하게 되는지를 기준으로 나이를 세게 되어서 서수법에 따라서 나이를 모두함께 +1씩 더하게 된다는 것.
그만큼 ‘살았다’라는 의미의 ‘살’을 붙여주는건 아닐지 추측해본다.
#나는 32살인데 또 31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한국사회에서 초면에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서열정리’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덤덤하게 말해서 내 주목을 끌었다.
“저는 서른살인데, 29세에요”라고.
한국나이로...만나이로..이렇게 표현하지 않고도 꽤 명쾌했던 것 같다(나만 알아들은건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서열정리’에 있다
양비론도 아니고, 양쪽의 관점이 모두 합리성을 어느정도 담보하고 있다면 뭐가 문제냐고?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게 ‘문제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한국의 ‘나이주의’가 문제다. 어디가서 ‘서열정리’를 하면서 나오는 나이문제, “난 빠른 생이라서”, “나 12월 생이라서 억울해” 뭐 이런거.
사족.
입학철이다.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n수생을 무시하는 분위기는 사실 이런 서열정리, 에서 애매한 어떤 규정되기 힘든것에 대한 불편감도 있는 것 같다.
(선배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불편할까. 나이+학번으로 억압할 수 있는 존재가 갑자기 나와 동갑인, 나의 엄청난 나이로부터오는 권위를 노나먹는 두려운 존재가 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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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여성주의 경제공부 모임>(이하 여성주의 스터디)때 얘기했었던 주제였던 것 같다.
기사의 내용은, 산부인과학술지에 발표된 한국 임산부의 암 진단시의 치료와 환자 본인의 치료 의사 표명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한국의 임산부들은 절대적인 비율로 임신 중 암치료르 미루면서까지 태아를 ‘지켜내려’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그런데 이건 기사의 시각이다. 앞뒤로 잘라먹은 맥락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데, 기사 말미에 인용된 논문 저자의 말처럼 “임신 주수와 암의 종류에 따라서 무조건 적인 태아 우선은 위험하다”는 게 논문의 주지이다.
그런데도 기사의 헤드라인은 참 숭고하게도 “'강인한 모성애'..암 진단에도 10명중 8명이 출산”이다.
점입가경은 여기에 3/8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논문과 연구결과를 발표한 병원은 분명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게 여성건강증진의 관점에서 접근했으리라.
그런데 시점에서 모성애 강조는 매우, 많이 황당할 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기사는 낙태를 두고 계속되 온 첨예한 갈등에 ‘태아생명권 존중’이 얼마나 뿌리깊게 얽혀있는지를 방증한다.
태중생명 존중=숭고한 생명 존중이라고는 생각하면서 여성인권과 건강권에 대해서는 함께보지 못하는 시각이 생각보다 너무 지배적이다.
저 기사의 댓글에도 “어머니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 사랑합니다” 이런 식의 맹목적인 모성애 찬양을 볼 때마다 아득해진다.
그녀들이 과연 100% 본인의 의지로 태아를 우선하게 되었을까? 설사 본인의 의지였다고 해도 문화적으로, 그리고 어린시절 답습해 온 어머니의 희생의 문법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신의 신체결정권을 행사한 것일까?
#낙태는 원천적으로 ‘여성의 몸’에 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임신-출산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여성 인권의 문제다.
인권적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국제앰네스티는 위험에 처한 여성들이 낙태할 권리가 아닌, 스스로의 생명을 지켜내고 고통에서 벗어날 선택권를 옹호”한다.
낙태에 대한 국제앰네스티의 성명
#낙태를 죄악시하는 한국문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와는 다른 유교의 ‘태아 우선시’가 반영되어있다.
한 스터디 멤버분의 지적이었는데,
“씨받이,라든가 하는 경우가 아직도 잔존해있는 문화라서 의식 저변에 여성은 태아의 땅/성장환경 정도로 간주된다”
“(배아를 위한 태반만이 중요한 것이다)충분히 배아/태아를 우선하게 되는 거죠. 게다가 그 배아/태아는 곧 아들이 될 잠정체이기 때문이다”
유교의 생명존중사상, 이 무조건적으로 숭앙받기에 너무나 허점이 많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국의 유교-나는 이것을 변종 유교라고 말하고 싶다-에서 존중하는 생명은 지극히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다.
아들이 될지도 모르는, 집안의 대를 이을지도 모르는 ‘고귀한 씨’는 중요하다. 그래서 태아는 중요하지만 태아를 ‘배고’, ‘낳는’ 존재인 여성은 대체가능하다.
중요한건 아이가 어느 ‘아들’의 ‘아들’이 될지를 결정하는 ‘씨’, 그러니까 남자의 정자다. 그래서 아이의 반쪽은 언제든 대체가능하다.
여기서 ‘씨받이’가 정당화된다. 서자를 정실 부인의 아이로 받아들이게 된다. 남편의 씨가 있으면 남편의 아이고, (정실 부인 입장에서는) 나는 남편의 아이를 낳고 기르니까, 그 아이는 (나와 전혀 혈연 관계가 없는 남인데도) 남편의 ‘씨’에서 태어났으므로 ‘내 아이’가 된다.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도 너무나 어이가 없다.
맺음/ 월요일 아침 상큼하게 일어나서 맞이한, 한국의 첫 ‘세계여성의 날’ (나름의) 특집기사였는데 불쾌해졌다. 거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렇게 잘근잘근 화가난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문제적 기사�� 헤드라인, 그리고 문제적 댓글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문화적 맥락과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그 텍스트 들로 정치적으로 편협한 시각이 더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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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년 대학교재 가격의 폭발적 성장
1977년 이후 지금까지 대학 교재 가격은 1,041% 인상됐다고 한다. 얘기인 즉슨, 학과마다 편차는 있을지언정 열배 이상 가격이 올랐다는 이야기. 대학 교재 저작권 관련 분쟁이 심각한 미국의 경우 학생들이 제본한 책을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학 교재의 부담감은 더 크다. 도시 지역에 위치하지 않는 학교는 학교 도서관에서 감당할 수 없는 도서 수요 또한 심각하고. 요즘 대학 교재 공유 운동인 'Open Text Movement'가 미국 내에서 OER 과 Open Access 쪽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보이는 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사회전반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데 배경이 있다. 한국에서도 수년전 대교협이 출판사들을 대상으로 해서 대학 차원에서 한꺼번에 불법 복사물에 대한 부담금을 지불하는 쪽으로 협상 아닌 협상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OER은 전혀 새로운 분야의 공유와 즐거운 미래 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득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그동안 공고하게 구축된 시장구조와 이익구조를 무너뜨리는 개혁이기 때문이다.
https://oerknowledgecloud.org/content/college-textbook-prices-have-risen-1041-percent-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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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지난 2014년 9월부터 G20국가 중 처음으로 ‘컴퓨팅(computing)’ 과목을 만 5세-16세의 전 학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 이미 2000년부터 ICT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쳐 왔으나, 이를 중단하고 새로운 컴퓨팅 과목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에서 근래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놀라운 결정은 북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미국, 그리고 결국은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영국의 새로운 컴퓨팅 과목의 도입 배경과 교육과정 및 동향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 우리나라 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목차> Ⅰ. 서론_1 Ⅱ.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_3 Ⅲ. 영국의 ICT 및 컴퓨팅 교육과정_6 Ⅳ. 교사 지원 전략 및 평가_14 V. 결론_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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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구원 도시인문학 특강 당첨
진중권 님 강연은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에 사고의 기반을 두고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8월 19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무려 서초 남부터미널 옆 서울인재원 숲속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이 강연. ㅎㄷㄷ
" 미학자의 눈을 통해 본 서울은 아름다운가? 이미지 인문학으로 서울을 관통하면 우리는 도시 미학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행사 안내 문구에 꽂혀서 신청한 오랜만의 진중권 님 강연. 요즘엔 신청하는 행사마다 족족 당첨되네. 뭔가 입질(!)이 오는 시즌인가ㅎㅎ 수요일 10시에 양재 숲속강의실까지 가는 길이 녹록치는 않겠지만 자연, 환경, 공간, 내가 살아갈 삶의 터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요즘의 나에게는 놓칠 수 없는 강의임에는 틀림없다.
강연에 가기 전에 배경지식 삼아서 미리 읽어둘 책은
진중권(2014). 이미지 인문학. 서울: 천년의 상상2014.
정수복(2015).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 서울을 생각한다. 문학동네.
아래는 서울연구원의 공지글.
https://www.si.re.kr/node/52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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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열린지식축제" 의 전야 행사로 열렸던 GLAM 프로젝트 행사. 위키미디어 독일 본부에서 열렸던 행사장에서 받았던 책의 제목이 바로 이 말이었다.
<Sharing is Caring>
이 그림에서 1단계(?) 에 있는 사용자는 네 발로 기는, 아직 사람구실(!) 못하는 사용자다. 그리고 점점 직립보행해서 CC-BY 라이선스의 attribution 표시와 함께 오롯이 서 있다.
터민이터 한장면 같기도 하고 인류가 크로마뇽-네안데르탈을 거쳐서 진화한 과정같기도 하고. 묘하네.
물론 all right reserved 와 some rights reserved 사이에는 다양한 법-경제-가치적 역학관계가 있지만 때로운 백마디 말보다 이런 한 장의 그림이 더 설득력있고 직관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법.
Creative Commons introduces a quick and easy guide to six licenses for sharing your work. Because, you know, sharing is c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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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학교 비정규직 처우개선 관련 시위와 파업 등에서 비롯된 문제상황인 장애학생에 대한 인권침해 및 사실왜곡에 대해서.
보도자료 등을 배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 사진과 행동에 대한 묘사로 인해서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일체의 사실 왜곡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장애학생 부모들이 시위를 벌였고, 민주노총이 이를 인정했다.
반가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부당함과 불합리를 겪은 사람은 분명히 잘못된 일에 대해서 표현하고 항의하고->이것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입지나 목소리에 힘이 덜 실리게 될 지언정 분명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이렇게 더디지만 전체 사회가 참된 방향으로 가는게 중요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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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이다.
공립학교가 아닌 국립학교라 하면, 장애학교를 포함해서 국가가 설립한 학교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하면 비정규직 교원과는 또 다른 범주에 속하는, 계약직 사서나 청소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일터.
몇가지 쟁점이 있을 수 있다. 처우개선의 내용 부분과 처우개선을 부르짖는 방법적면에서.
1) 권리 주창의 주체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회계직연합(전회련) 학교비정규직본부로 되어있다. 좀 쌩뚱맞다. 기존의 민주노총의 노동운동의 프레임 안에 들어가겠다는 계산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게임의 법칙을 아는 이들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운동을 하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단체교섭권에 편승하려는 것도 보이고.
2) 일부 국립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을 강조하려다보니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기도 했다.
예를들어 장애학교에서 일하는 특수교육실무사 같은 경우 장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호신술이 필요할 정도로, 자신들의 일이 고되고 위험하다느니 장애학생들은 동물이나 다름없고 그들을 케어하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혹사당하는지 아냐느니..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증장애 아동들을 짐승처럼 그 어떤 조절능력도 없고 위험하고 더러운 존재로 표현한다든가, 엄연히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학생의 사진을 찍어서 유포하고 아이들이 몸을 가누지 못해서 몸부림 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정지 사진으로 찍어서 유포한다든가.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형태 입장의 소수자를 대상화시키고 소비해버리는 행태, 나의 아픔과 나의 결핍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태.
안타깝다. 노동운동은 남성 백인노동자의 권익보호에서 시작해서 여성노동, 흑인노동, 등등 계속해서 그 '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을 키워나가면서 발전해 온 사회운동의 영역이니까. 그만큼 더 안타깝다. 그들이 작은 것을 추구하다가 진정한 존재 가치를 상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여 그 과정에서 상처입은 중증장애학생을 둔 학부모들의 아픈 마음도 치유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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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을 다시 생각하다.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가 다시 결혼해서 고향에 돌아간 친구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한국에서 취직해서 살아가는 친구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가 다시 대학원을 고향에서 다니는 친구
이 친구들은 지금 사전적 의미의 '고향'에 살고있다. 하지만 늦은밤 연락하면 가끔 견딜 수 없이 우울해 한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감정은 '향수병'과 닮았다.
서울 혹은 애틀랜타라는 '타향'은 그들에게 상투적이지만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 그들과 보낸 시간과 함께 머문 공간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는 내 일상을 공유하면 '거기에 있지 않음'을 부러워한다.
낯선곳에서 보낸 시간들이지만, 이전에 보냈던 스무해 남짓한 긴 세월에 비하면 몇분의 일도 안되는 그 시간이 이들에게는 산술적인 그 시간보다 훨씬 긴 것이다. 결국, 특히 한국의 가정분위기에서 진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내 시간'으로 살아낸 몇년의 그 시간이 선명한 인생의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밀도 높은 그 시간, 내가 나 답게 살았던 그 시간을 보낸 곳이 고향이다.
밀도깊은 선명한 시간이 깃든 장소가 고향이고, 그래서 또 다른 향수병이 시작된다. 참 이율배반적이다. 고향을 등지고 필요에 의해 찾게 된 곳이 또다시 고향이 되어서 도시의 실향민으로 살다가 이제는 시간의 실향민이 되는 것일지도.
요즘의 우리는 더이상 집을 짓고 터를 다져서 나의 '곳'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다. 부표처럼 떠나니는 삶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무엇이든 의미를 두거나, 혹은 어느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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