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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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하다
공허해 하지 말고
그저 주면서 받아들이길
성원 언니가 내게 느꼈을 그 둔감함
나의 예민함
나만 예민함
이러는데 나에게 다가오는 둔감한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나
그를 사랑할수록 끝없이 외로워질 것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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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탄생화, 미모사
- 섬세함 속에 숨겨진 강인함
미모사(Mimosa pudica)는 1월 26일의 탄생화로, 꽃말은 '예민한 마음'이다. '예민한 식물(Sensitive Plant)'로도 불리는 미모사는 손길에 반응해 잎을 접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이는 외부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작고 섬세한 외형과 달리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미모사는 예민함 속에서도 내면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이다.
#미모사 #탄생화 #예민한마음 #MimosaPudica #SensitivePlant #야생화 #치유농업 #자연치유 #꽃말 #1월탄생화 #풀꽃치유산업연구소 #시니어스마트폰활용교육 #김동영디지털교육강사
Caption: 예민하고 섬세한 생명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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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하게 정의 내리기 싫지만 불안회피형이 맞고
원인1. 부모
주 패턴은 아버지 사업 때문인지 집에 오면 이유 없이 맞거나 이유 없이 자상하곤 하거나 교회에서는 자상한 가장의 모습이며 대표격이지만 가정에서는 폭력적이라든가. 여전히 그 분노조절장애 양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신의 업적을 부정하면 굉장히 분개하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생 코뼈를 부러뜨린다든지 강아지를 때린다든지 사실 강아지는 아마 우리의 어릴 적이 아닌가 싶다. 방 안에 가둬 놓고 기절하기 전까지 맞는다든지 엄마는 그런 폭력적인 일에서 항상 아빠 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안전기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음. 와중에 반항적인 기질을 보존하며 자랐는데, 그래서인지 허튼 이유로 맞는 경우가 많았고 수틀리면 맞기도 했지만, 어릴 때는 그런 식으로 항상 아빠 퇴근 시간이 되면 아빠가 오지 않는 이유를, 혹여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집에 오면 또 이유 없이 맞지 않을까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는 기억이 남아 있다.
엄마 같은 경우는 양육자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TV에 빠져 있거나 전화통화를 하느라 바쁘면 우리는 무시받기 일쑤였는데, 사실 그런 고로 내가 책을 스스로 읽게 된 연유도 있지만, 그런 경험이 외면으로 받아들여진 기억이 있다. 어떻게 보면 자립심을 길러 주기도 했겠지만, 방임이기도 하면서 정작 통금 시간이라든가, 옷차림 등 어떤 면에서는 끔찍이 해를 당할까 걱정하면서도 (혹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라든가) 막상 해를 입으면 내 ��을 하거나(네가 그렇게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네가 늦게까지 돌아 다��기 때문에 등)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통제된 방임이란 실은 자신들 걱정거리를 덜어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며. 사실 그렇게 나 자신을 가두면서 과보호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규율과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벌 받는 것이 마땅하게끔 훈육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자랑하는 상 같은 이야기를 들어 주면 기뻐하다가도 언제는 막상 '그래서? 뭐? 그 다음엔? 그걸로 뭘할 건데?'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도대체 그 놈의 상이 뭔지 무가치하게 만드는 기분도 쉽사리 경험했다. 엄마에게 받은 선물은 진짜 손에 꼽을 만큼 없다. 아빠는 용돈이라도 쥐어줄까 하면 엄마는 그래 케잌 정도는 항상 미역국도 당연한 건 아니지만 다른 특별히 추억할 건 없다. 그 와중에 명품백은 항상 바라는 게 엄마 모습이었달까. 그게 우스갯소리인지 아닌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선물을 고심해서 우리에게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나는 자기연민으로 쓸 건 아니지만 사랑받는 기분은 아니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이건 마치 내가 대학교 훈장을 엄마 아빠를 위해 노력한 것도 없잖은 이유었고, 엄마 아빠에게는 그게 그랬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모두의 훈장을 띄어 놓고 어떻게든 모나 보이지 않으려 살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정작 엄마 아빠의 뜻대로만 자라는 건 특별히 경계한다. 자기연민이 아닌 이유는 수없는 가정 폭력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온 위인들 덕에 내비칠 수는 없지만 솔직히 번듯한 가정에 비해서 어린 시절을 자주 비교해보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건 다 내가 지금 나 스스로를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생각의 회오리다. 만약 내가 떳떳하고 내적인 성공, 외적인 성공을 모두 이루었다면 과거는 자랑스러운 성장 발판만 된다.)
나는 살면서 이 둘을 관찰했다. 동시에 나 자신이 성격파탄자로 변모한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면서도 나름의 감정 조절하는 법을 이런 식의 글을 남기면서 깨쳐 왔는데, 어릴 때는 밖에서는 무기력한 채로 모든 관계도 회피하다가 집에 와서�� 말싸움하느라 하루 종일 보내는 그런 사춘기를 보냈달까. 아니라면 게임에 빠져서 8시간이고 13시간이고 중독자의 모습으로 보냈다.
나는 솔직히 나를 성격파탄자로 정의하는 부모님의 모습과 교회에 얽힌 자식의 도리에 대해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기에 혈연을 쉽사리 끊겠다 하냐 싶은 그 어떤, 그렇게 독실하지만도 않으면서 ��다른 통제된 방임. 즉 교회라는 울타리 안과 그 커뮤니티 내에서의 피상적인 모습에 대한 사유가 따랐다. 부모님들이 연을 맺고 꾸려온 가정이고 계획에 어긋나는 자식의 모습은 인정할 수 없는 걸까? 싶은, 어떤 이상세계를 꾸려 놨지만 그 곳을 파열내는 자식새끼는 자식새끼가 아니라면서까지도 지켜 가고 싶은 그 놈의 천국에서 온전한 가정, 축복과 영화 속에 이상적인 모습. 나는 현실세계와 그 이상세계의 간극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고 있었고, 사실 그건 그렇게 대수로운 건 아니었으며, 인간이 일관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 전제를 깔고 살아온 게 맞다.
그래서 생각하면 이렇게 모순적인 세계관을 또 다시 깨닫게 하면서 내가 관찰자로 얻는 이점은 뭔가 싶으면, 도무지 이 비틀어진 세계관의 전달. 기록 뭐 이런 이야기를 써내리는 것. 사실 모순은 너무나 비일비재해서 땅바닥에 채이는 돌만큼이나 의식적이면서 무의식적인, 깨달으면 당신 앞에 놓인 생애조차 모순덩어리인데도 정작 남의 흠에서 발견하고자 하면 까무러치는 특징을 지녔다.
사실 알지 않으면 편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살아온 사람으로써, 방관자의 입장이다가 한복판에 피해자로써 놓이게 되니 무참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또 피해자는 언제고 관찰자일 수도 있었으며, 내가 이런 애착관계의 양상을 알아보는 것도, 후대가 있다면 답습하지 않게끔 나 자신을 경각시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리적 생채기가 없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사실, 안 그래도 주변 사람의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써 자아성찰은 끊임없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되뇌는 습관이 있는데도 죗값을 되묻는다면, 그 일이 메아리처럼 24시간 반복되는 경험을 해봐라. 출구가 없는 정신 속에서 차라리 원망할 대상을 찾는 일이 더 빠르다고도 생각했다.
이 일은 트라우마와 정신병으로 치부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하지만 주변부를 맴도는 기운이나 그 예민함 때문에 원인 모를 집단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게 삶의 목표가 되었다면, 심지어 그 집단이 디지털 세계의 자아를 쥐잡듯이 파내면서 관람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건지?
불안정회피 성향의 분석적 관점, 원인, 소아기의 애착관계 형성 등을 통해 지금 내 패턴, 관계 형성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돌이켜 보면. 나는 주변 사람에게 바라는 게 없다. 또한 그 친구들도 나한테 바라는 게 없어진다. 언젠가라도 떠나려면 떠나도 되지만 언젠가는 이런 문제로 하루종일 골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넌더리가 나버리고 그 문제 자체를 차단시켜서 갈등을 제거하는 일이 먼저인 것이다.
어학연수와 다르다는 것은 사실 이유를 붙이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또 다시 수렁에 빠진 느낌이고 여기서 어떤 안정적인 대상을 찾지 못하는 이상 혼자 살아도 무방할 만큼 인생 자체가 또 다시 공허해서 모든 연을 끊어 버리고 싶다. 차라리 그렇게 되면 모두가 떠나간다 해도 모를 만큼이 되어 버리니까. 이게 회피형의 모습이고, 실은 인간관계와 인간 자체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거절 당하는 것이 두려운 양상이 불안형이다.
내가 도서관에 간 이유는 외로움을 달래러 간 것이라 보면 된다. 그 대상이 게임에서 옮겨간 것일 뿐이고, 자기계발해야만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부모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나는 항상 내가 멍청해 보이는 것이 싫었다.)(하지만 우리가 모든 분야를 통달하는 건 그냥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 꼴을 보자면 내가 옳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온 건지도 잘 모르겠고. 차라리 잘 보이고 싶은 모든 대상을 제거해버리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가끔 든다. 모든 의무와 책임이 싫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회 관계망에서 건전하고도 안정적인 생활상을 영위하는 일반적이고도 이상적인 그 모습을 내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이런 모습이 가장 두려움인데, 실은 이것도 자기연민으로 번진 각색이고 실은 내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고, 인생은 굴곡이 있고, 나는 또 사실 아직 대단히 인생의 풍파를 경험해보진 않았다. 내적인 고갈과 파열이 있었지만, 물론 나는 이를 사소히 여기지 못하고 증폭시켰지만, 과연 가끔은 큰 충격에도 내가 잘 맞서서 일어날 수 있는지 많은 의심이 든다. 도대체 어떻게 살기 위해 이렇게 태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람의 세계에 몸 담그지 않고서는 작은 파열도.
하지만 또 건너편에는 무슨 그따위 일도 트라우마로 여길 수 있냐면서, 하지만 인간이 원인 없이 친절했다가 불친절했다가 지 멋대로인 패턴을 특히 아빠에게서 많이 발견했기 때문에 지금 경험하거나 내가 그렇게 행동하거나 하는 그 모습은 어느 정도 용인된다고 해야 한다면, 이건 나름 장점인지 단점인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양상을 보이든 조금은 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매우 주의 깊게 생각하려 든다. 그러면 이전 관계에 있어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되며, 우리는 이것을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자책. 하지만 살면서 나는 내 감정, 타인의 감정에 빗대어 그 갈등을 일으킨 문제의 뿌리는 그 당사자에게만 맺힌 일은 아닐 수가 있다는 자산을 얻었다. 너무나 복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원인을 생각해볼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강화하는 이유도 지난 소아기의 과거 회상과 지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과 언질들, 그러니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내고 싶어만 했고, 계속 탐구해 오려고 한 바 더욱 더 골몰하게 되었기 때문에 갇혀 버린 것이다. 생각의 소용돌이에, 도대체? 왜?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패턴은 내 인생 자체를 관통하지만, 어떤 이유를 찾아야만 발 뻗고 드러누워 잘 수 있는 그런 숙명의 근원적 물음 마냥 추궁하는 것이다.
심리학이 내게는 유용한 신호였기 때문에, 눈치? 사람의 심리? 더욱 어릴 적에는 공명하며 읽지 않았나 싶은 그런 생각. 지금에 들어서는, 그런 신호는 또 1:1 관계로 맺어짐으로써, 특히 신체 신호의 경우 강박적으로 변할 수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신체 신호와 같은 것에 집착하다 보면 의사 소통 본질에는 집중할 수 없거나 의심의 수렁에 빠진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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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오는데 엄마 심부름도 꼬박꼬박, 말 잘 듣네.
이러케 말 잘 듣는 아들이 어딨서.
그리고 담날 연차라 밤산책 하는데 발견한 귀여운 다육이 무인 판매점!! 짱귀


퇴사 언급하기 전 마지막 연차.
회사 업무 때문에 쉬는 날임에도 아침부터 스트레스 이빠이 😡


엄마 아빠가 가고 싶다던 양식집이 문을 닫았길래
갈 길 잃은 우리는 바다 구경이나 하고 옴.
결국 주례에 새로 생겼다던 코지하우스에서
이것저것 많이 시켜먹음.
아빠가 잘 먹으니 좋더라❤️🔥

지금도 퇴근길인데 죽을 맛이다.
퇴사하기 전이라 그런지 뭘 하든 예민함.
웃을 날이 더 많으니까 괜차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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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하나 하나 정리해보면:
0. 공부. 학업생활을 아예 못하고 있다.
1. 우울. 우울하지 않을 때도 있긴 하다. 근데 우울했다고 기억한 적이 많다. 죽고싶었던 적도 많다. 옛날부터 그래서 이게 우울인지 몰랐던 것 같다. 스트레스 취약성. 비관주의와의 공명.
2. 불안. 초조한 이미지가 강하다. 불안함이 크다. 신경성. 예민함. 자극을 크게 받아들임. 공황을 겪은 적도 있다.
3. ADHD. 어쩌면 자기 행동에 대해 통제를 잘 못하는 점이 있다. 이게 불안 해소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가까운 것만 잘 보는 것”도 있다. 없다고 할 수는 없다.
4. 강박. 강박적인 사고를 안 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완벽주의. 확고함. 버리지 못하는 나의 “의지”. (심지어는 이걸 이렇게 하나 하나 써 보고 나를 계속 끼워맞추려는 것도 강박이 아닌가?)
5. 열등감. 애정결핍. 사랑받지 못한다는 불안. 자기혐오. 대인 관계 문제. 가면. 인간관계 문제. 상처를 얘기하지 못하는 성격. 타인에의 두려움. 적개심. 도리어, 상처에의 기억.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듬. 가면 속에서의 삶. 가면을 통한 생존. (이전 종합심리검사에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모든 검사와 마찬가지로.)
- 모범생 콤플렉스, 열등감 콤플렉스, 애정결핍.
어쩌면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마저 사랑을 구걸하려고 하는 것만 같다.
- 극단적인 사고.
나도 나를 잘 못알아볼 정도로 흉측하다. 그래서 나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뭐 어째야 되는 건 지를 모르겠다.
- 겁쟁이.
- 난 정말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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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t reading 마이너아르카나 "컵 시종"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림에 대한 해석」
10후반의 젊은 사내가 멀리 파도가 보이는 길한가운데 서있습니다. 파란색 모자에 꽃이 그려진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은 오른손에 황금색 컵을 들고 있고 컵속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푸른모자: 그의 순수함과 청결함을 상징합니다. 푸른색은 종종 하늘과 바다의 색으로 여겨지며, 신비와 영혼을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푸른색 모자를 통해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표현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푸른색 모자는 또한 컵의 시종의 젊음을 상징합니다. 푸른색은 종종 젊음과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푸른색 모자를 통해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기회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꽃 장식의 화려한 옷: 그의 감수성과 창의성을 상징합니다. 꽃은 종종 아름다움, 사랑, 영혼을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꽃이 그려진 화려한 옷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 있고 예술적인 감성을 표현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꽃이 그려진 화려한 옷은 또한 컵의 시종의 개성을 상징합니다. 꽃은 종종 개성, 독창성을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꽃이 그려진 화려한 옷을 통해 자신의 개성과 독창성을 표현하고, 세상에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물고기: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물고기는 종종 풍요, 번영, 영혼의 성소를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물고기를 통해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표현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물고기는 또한 컵의 시종의 영적 성장을 상징합니다. 물고기는 종종 영적 지혜와 통찰력을 상징합니다. 컵의 시종은 물고기를 통해 자신의 영적 성장을 표현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황금컵: 첫째로, 황금잔은 풍요와 성장, 부와 행운을 상징합니다. 황금은 보통 부자와 성공, 풍요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지며,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고 번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수련과 창조적인 역량을 통해 부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황금잔은 대우와 축복의 상징입니다. 타로에서 컵은 대우와 상호작용, 감성적인 연결을 나타내는 카드이며, 황금잔은 컵이 갖고 있는 대우의 진부분인 선물이나 축복을 더욱 강조합니다. 셋째로, 황금잔은 감정적인 풍부함과 로맨스, 깊은 연민과 흥미를 상징합니다. 로망틱하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타로 점술의 컵은 실존적인 감정들과 관련된 카드라고 할 수 있는데, 황금잔은 이러한 감성과 연민에 깊은 비중을 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키워드」
설명 정방향 컵' 시종이 정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새로운 시작, 창조적인 역량과 용기, 대우와 축복, 융통성과 미적 감각 그리고 창조성과 예민함 등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 카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철저한 수련, 적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나타내며, 성취와 성장 그리고 부와 행운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러한 경쾌하고 확신 있는 에너지와 기운은 그 자체로 축복과 대우입니다. 역방향 '컵' 시종이 역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창조적인 역량의 부족, 자신감의 결여, 감성적인 불만이나 상처, 비관적인 사고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초점을 잃는 경향이 있으며,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거나 극도로 비관적인 마음으로 내적 성장에 대한 접근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역방향의 '컵' 시종은 감정적인 변화와 기민함, 도전적인 속성을 지니며, 조심이 필요한 상황을 알리기도 합니다. 키워드 정 방향 - 새로운 시작, 기회 - 호기심, 상상력, 감수성 - 예술, 음악, 창의력 - 열정, 노력 역방향 - 기회의 상실 - 우유부단, 무관심 - 감정적인 불안정 - 창의력의 저하

「해석」
설명 정방향 '컵' 시종이 정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새로운 일자리나 직장으로의 전환, 즉 이직에 대한 긍정적인 징조입니다. 이는 새로운 시작, 대우와 축복, 창조적인 역량, 그리고 융통성과 미적 감각, 예민함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직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생각하며, 적극적인 태도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망이 필요합니다. 역방향 '컵' 시종이 역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새로운 직장이나 일자리를 찾는 것이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부족한 자신감, 미래의 불확실성 및 불안, 그리고 실제 상황에 대한 예민함 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키워드 정 방향 -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는 경우, 좋은 기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고자 하는 경우, 자신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직장에서 감수성을 깨우고, 예술과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직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방향 -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는 경우, 원하는 조건의 직장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고자 하는 경우, 자신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지 못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직장에서 감수성이 둔화되고, 예술과 음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 열정과 노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설명 정방향 '컵' 시종이 정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참된 연애, 진실된 감정의 전개, 그리고 새로운 애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원만한 인간관계와 ��첩함, 예민함, 섬세함 등을 나타내며, 애정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장려됩니다. 이러한 카드는 사랑에 대한 애정과 함께, 믿음과 에너지, 희망과 새로운 시작의 희귀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역방향 '컵' 시종이 역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부적합한 애정, 불만, 갈등, 그리고 감정적인 소외 등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약화, 불안한 애정, 그리고 결전적인 상황이나 이별의 인사 등을 예고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상황을 재조명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안정과 조화로 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키워드 정방향 -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기존 관계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열정과 노력으로 사랑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역방향 -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거나, 기존 관계가 발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 열정과 노력이 부족하여, 사랑을 키워나갈 수 없습니다.
설명 정방향 '컵' 시종이 정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풍부한 재물과 부의 시작, 성장, 진보, 창조적인 역량과 직관, 대우와 축복 등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역량, 적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나타내며, 성취와 성장 그리고 부와 행운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러한 카드는 누구에게나 부가적인 금전적 지원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상황을 나타냅니다. 역방향 '컵' 시종이 역방향으로 나타난 경우, 이는 재물과 부에 대한 실망, 부족함, 낭비, 불안, 그리고 높은 비용이 드는 예기치 않은 상황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신의 자산에 관심을 두거나 재정적인 이용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입니다. 이 카드는 재물과 부에 대한 도전적인 상황을 암시하며, 조심이 필요한 상황을 알리기도 합니다. 키워드 정방향 - 새로운 기회나 소득이 생길 수 있습니다. - 창의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 감수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방향 - 새로운 기회나 소득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 창의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 감수성이 둔화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 열정과 노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재물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카드와 비교」
타로카드 컵의 시종과 별카드는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카드입니다. 하지만, 두 카드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질문의 내용과 상황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컵의 시종은 새로운 시작, 기회, 호기심, 상상력, 감수성, 열정, 노력을 의미합니다. 컵은 물의 원소와 관련이 있으며, 감정, 사랑, 영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컵의 시종은 감정과 사랑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별카드는 희망, 영감, 행운,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별은 하늘의 원소와 관련이 있으며, 영혼, 신성, 종교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별카드는 영적인 성장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컵의 시종과 별카드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카드입니다. - 모두 새로운 시작, 기회, 희망, 영감을 의미합니다. 컵의 시종과 별카드의 차이점은 ���음과 같습니다. - 컵의 시종은 감정, 사랑, 창의성을 강조합니다. - 별카드는 영혼, 신성,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컵의 시종은 새로운 감정적인 경험이나 관계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프로젝트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별카드는 영적인 성장이나 깨달음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신호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컵의 시종과 별카드는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카드입니다. Read the full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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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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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예민함에서 오는 섬세함은 가끔 나를 아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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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있던 며칠 동안이 내게 해독의 시간과도 같았다. 숱한 외로움에 흔들어 놓았던 감정들도 며칠 간은 잠잠했다. 현실에 부딪혀보니 별 수 없었겠지.
그날 밤, 내가 목격한 그것은 욕망만 남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할 수 밖에 없는지 깨닫게 했다. 수년을 보고도 나는 왜 지금에서야 그것을 깨달았는가.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 또한 그 구렁텅이에 함께 뒹굴었던 존재였음을, 눈과 귀가 멀어버린 내 자신과 찰나 목격했던 모든 것에 염증을, 구역질이 나버렸다.
결론을 냈다. 아니 결론이 났다. 이리 마음이 돌아설 줄은 몰랐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는 없다. 역시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선을 넘기 전에 알았더라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넘어보지 않고는, 먹어보지 않고서는 지금의 결론을 도출 할 수 없었을 거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 아니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이용한 악한 어른의 욕망, 마치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채우려 했던 가여움. 애써 감추기 위해 생겨버린 날섬의 예민함. 그 모든 것이 차곡 채워진 오늘.
답은 여기도 저기도 없다. 굳이 답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도 살아온 삶에 대해 누군가의 답안지를 모델 삼아 채점을 매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종종 악몽을 꾼다. 남들은 재입대하는 꿈은 꾼다 하지만 나는 매번 얼마남지 않은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으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준비 되어있지 않은 상황들이 꿈 속까지 따라다니며 조급하고 두렵게 만든다.
일단 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여기도 저기도 아니다.
잠시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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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예민한 성격이 싫다. 예민해서 좋을게 하나도 없다. 예민함 + 게으름은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냥 계속 고통받기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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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
* 간접적인 가정 폭력 묘사가 나옵니다.
서연은 가족들과 화해한 이후에도 알 수 없는 화가, 종종 끓어올랐다. 울면서 울면서 토했던 것들은 감기가 아니라 가래뿐인 것 같았다. 매일 화가 나는 건 아니었는데, 맞지 않는 부분이 속속 드러나는 시기마다 집을 뛰쳐나가고 ���었다. 친구들에게는 이러지도 않는데. 가족들에게만 마음이 좁아졌다. 앞으로는 잘 지내보자 악수를 건넨 뒤에도 손에 들린 짐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내가 화가 많은 사람인걸까? 과제를 끝내고 누워서 내내 생각했다. 생각은 쏜살같이 달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이었다. 만약 뒤끝이 없는 성정이라면 모두가 좋은 성격으로 탈바꿈했다며 좋아할 수 있는 걸까? 그래 많이 변했지. 이제는 화 안 내고 이러더라. 웃으면서 하루를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이제는 누구도 서연에게 소리치고 윽박지르지 않았다. 누구도 서연의 머리채를 잡거나 회초리를 집지 않았다. 누구도 접시를 던지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고 회초리를 부러뜨리고 접시를 깨뜨린 사람들은 서연에게 죄 사과했다. 사과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준 악영향을 시인하고 머리 숙였다. 서연은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과를 받았고, 서연은 용서했다. 이거면 되었다고. 항상 두려웠던 가족의 틈이 이제는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사실 서연은 그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오래 미워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모두가 서연의 눈치를 살피고 서연에게 용서를 구하고 죄책감으로 행동하는 그 시간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또 이런다면 다음은 없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런데도 서연은 이따금씩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가족들이 싫었다. 문을 그냥 열어버리든 노크하든 상관없이 화가 치밀었다. 가능하다면 그 문을 잠가버리고 방에 갇히고 싶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단 것이든 쓴 것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언젠가는 방 곳곳에 흡음재를 덕지덕지 붙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꼭 사춘기가 스물 중반이 되어서도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의 사과를 반드시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서연도 잘 알았다. 사과를 받기로 했더라도 꼭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가족의 틈에선 그게 잘 안 됐다. 어차피 평생 봐야 하는데……. 가족의 연을 끊을 정도로 서연에게 남은 화가 크지 않은데. 이제는 다들 서연에게 윽박지르지도 화내지도 않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과를 받아들였는데……. 가족 간의 화해는 으레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로 모두 끝나는 것처럼 그려진다. 사람의 화라는 것은 순간순간 자주 과소평가되는데도. 누군가의 오열 앞에서 번번이 딸이 가지고 있는 화는 작아졌다. 그래서 그때는 그 상황만을 모면하고자 손을 내민다. 뒤돌면 화가 난다. 하지만 화해 이후에 화를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서연의 화는 그렇게 서연 안에서 축소된다.
서연은 그 화를 축소해서 변덕이 심해진 마음에서 나오는 짜증이라고 일축한다. 그렇게 일축하고 나면 서연의 짜증은 온전히 서연의 것이 되었다. 그 화와 짜증은 서연의 몸에만 쌓였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분투다. 계속 자기만의 방에 짜증을 한 움큼 쌓아 두고, 저의 방에 들어와 서성거리는 그림자에 대답한다. 공부를 핑계로 대답을 소홀히 한다. 누군가가 나가고 나면 의자에 축 늘어져서 핸드폰을 댓 번 확인했다.
서연은 언제고 침범되지 않을 독립된 창과 공간이 필요했다. 자기만의 방이 단순히 자신이 홀로 쓰는 방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서연에게 필요한 방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지도 들어오지도 않는 방이었다. 짧게나마 경험한 독립 생활은 쓸쓸하고 버거웠지만, 다시 돌아온 본가 생활은 컨트롤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힘��웠다. 그래서 어느것도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누군가의 귀가를 기다리는 집. 서연은 그런 집이 부러웠다. 서로의 공간을 지키며 살아가는 집. 집에는 혼자 살더라도 근처에 누군가가 살아서 그 지역이 우리의 집이 되는 시간. 그럴 수만 있다면 서연은 혼자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집을 쓸고 닦고 분리수거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본가를 빠져나간다면. 언젠가 마주할 과거를 쓸어 담고 보듬다가 분리배출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와 과거에 가진 우울을 보듬는다는 것은 그 시절도 아름다웠다며 추억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그때의 우울을 보듬고 이제 지향할 점을 새로이 잡는 일이었다.
이제 서연은 가족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연의 분노가 그들과의 과거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울컥 치미는 화가 저의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고. 화를 내다가 끝끝내 회피했기에 남은 화가 쪼개져서 분기마다 차오르는 거라고. 하지만 회피도 저의 탓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엄마언니아빠 모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그들의 방조나 합리화나 폭력을, 순간은 용서했더라도 응어리가 남을 수 있다고.
그리고 서연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집에서 영영 나가기로 다짐한다. 서연과 늙어서도 함께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을 끊어내기로 한다. 독립된 창을 가지고 그 창으로 세상을 보며 과거를 예기치 않게 마주하더라도 일주일 내내 슬퍼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서연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문을 잠갔다가 다시 푼다.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을 그려봤다. 서연은 공용기기가 없는 저의 방을 그리다가 잠에 들었다. 쪼개져 나온 화가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퍼진다. 서연은 꿈에서 얼음을 깼다. 쪼개져 나온 얼음은 뜨거운 빛에 녹였다. 이내 땅으로 땅으로 물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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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적절한 휴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근 일주일 간을 쓰지 못했던 연차 휴가로 보내면서, 밀려있던 집안일들을 하나씩 끝내고 가볼까 했던 고향행도 취소하고 온전히 집에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위해서 온전한 날들을 보냈던 게 언제였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생각이 안나는 것 보니 최근 2년 간은 전혀 없었던 듯 하다. 원래 혼자 있기보단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던 것도 있었지만, 일과 삶의 균형 중 일에 철저하게 일에만 맞춰진 시간들을 보내다보니 어딘가 모르게 삐뚤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일에 내 삶이 치우친 생활은 월.화.수.목.금은 회사. 토.일 주말은 그저 잠으로 보내기. 그러면서 제일 먼저 줄이기 시작한 것은 사회적 관계인데, 점점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립되면서 지내게되고 이는 악순환의 고리처럼 반복되었다. 체력의 고갈 -> 피곤함 ->사회적 관계 감소 -> 우울함, 예민함, 불안함 동반 -> 수면 부족 -> 집중력 고갈 등 업무 영향 -> makeup 하기위한 노력 -> 또 다시 체력의 고갈의 반복. 같은 팀의 한 분이 내게 옆에서만 봐도 번아웃이 온 것 같다고 한 두번 말했을 때도 인지를 못하다 이후 점점 내가 경계하는 나의 모습이 보이는 걸 깨닫고서야 인지했다. 나에겐 쓰지 못해 유효기간이 다 되어버린 휴가 그리고 유효기간이 임박한 휴가들이 남아있었는데, 임박하게 팀장님께 말씀드려 휴가를 쓰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휴가 돌입 첫째 날은 왠지 모를 불안에 휩싸여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냈고, 둘 째날 부터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메일 그리고 노트북을 보지 않으려고 그 동안 쓰지 않았던 나의 노트북을 꺼냈다. 막상 노트북을 열었을 때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그저 마우스 커서만 빙글빙글 돌렸는데, 일단 넷플릭스부터 켰다. 매번 작은 화면으로만 보다가 꽤 큰 화면으로 보니 결과는 매우 만족. 뭘 볼까 하다가 설국열차, The Fast&Furious hobbs & shaw, 분노의 질주7, The Fast&Furious Tokyo Drift, The Big short, 하트시그널3 등등.. 거의 24시간 중 8-9시간은 넷플릭스 나머지는 유투브로 틀어놨던 것 같다. 최대한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위주로.(휴가가 지나갈 수록 점점 컨디션을 찾으면서 여러가지로도 봤다) 그러다가 영화보면서 먹는 걸 좋아했던 게 생각나 보면서 이것저것 먹기도 했고, 먹다가 배부르면 보리랑 놀아주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다시 영화보다 잠드는 특별할 일 없는 하루들을 보냈다. 하지만 웃기게도 나에겐 더할나위 없이 특별한 하루들이었는데, 잊고 있었던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나에게 해주고, 보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온전하게 집중했던 일주일. 휴가 막바지 쯤엔 전보단 컨디션이 좋아졌으며, 조금 더 일 외적으로 나를 위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일주일 만에 완전한 선순환을 바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집중하여, 온전한 휴식을 잃어버린 삶은 다시 돌아가 내가 원하고 하고자 하는 일 더 나아가서는 본연의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나는 나의 보호자로서 나를 보호하고 잘 돌봐줄 의무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선 나는 다시 돌아오는 월요일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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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는 종종 팬케이크나 프렌치 토스트를 만든다. 어젯밤에는 커다란 식빵 덩어리를 두툼하게 잘라 달걀과 우유를 섞은 물에 푹 적셔놓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버터를 두른 팬에 노릇노릇 토스트를 굽고, 슈가파우더와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려 달콤하게 한 입. 신경�� 예민해져 끊은 모닝 커피가 그리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메이플 시럽을 한 스푼. 점심을 먹고 나서 졸음이 쏟아지는 두 시 경에는 샷을 추가한 따뜻한 라떼에 시나몬 파우더를 솔솔.
이토록 카페인을 사랑하는데 내 몸은 좀처럼 (커피의)카페인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카페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며 지금도, 커피와 닮은 무언가를 마신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만한 것. 뜨거운 물에 홍삼진액 한 스푼, 그리고 꿀 한 스푼. 잔에 담긴 모습은 영락없는 아메리카노다. 꿀을 넣어도 가려지지 않는 씁쓸하고 진한 맛이 어딘가 분명, 커피와 닮은 구석이 있다.
낮은 혈압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높아져 정상 수치에 가까워질 거라고 했다. 예민함도 나이가 들수록 떨어져서 평균치에 가까워질 수는 없는 걸까? 살아갈수록 점점, 더 많은 것들에 예민해진다. 둥글게 살려고, ‘좋은 게 좋은 것’을 외치며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쉽지가 않다. 예민함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지만, 예민함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신경을 무너뜨린다. 일상이 무너진다. 내 마음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본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커피와 함께했던 평온했던(혹은 그렇게 믿었던) 일상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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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는 예민함 그 자체다.
로봇청소기 윙윙거리는 소리, 핸드폰에서 나는 큰 소리 등 온갖 소음에 화가 나고 거기에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을 일도 무지 언짢아 혼자 성질을 삭히곤 한다. 이부자리를 락스물로 세탁한 것이 덜 빠진 게 화근이었지 싶다. 바이크에서 내리다가 화상입은 다리는 한 달이 넘도록 낫지 않고 온 몸은 무슨 알러지 환자마냥 가렵다.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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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쿤데라는 말한다. 모든 사랑의 만남은 떠내려옴과 건짐의 오래된 신화라고. 누군가 대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오고 누군가가 마침 그때 강가에 있다가 그 대바구니를 건진다.
우리도 그랬던 거야, 당신이 떠내려올 때 마침 나는 거기에 있었고, 내가 떠내려올 때 마침 거기에 당신이 있었던 거야. 당신은 나를 건지고 나는 당신을 건지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마침 그때 거기에’라는 오래된 우연의 신화로 시작된 거야, 라고 나는 말한다.
(...)
기쁨으로 프루스트의 사랑론을 이해한다:
“사랑의 기쁨은 그 사람의 발견만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들어 있던 나도 몰랐던 나들의 발견이다. 세상에, 내 안에 이런 비밀스러운 부드러움이 있었다니, 이런 다정함, 이런 친절함, 이런 예민함, 이런 애착과 기쁨이 있었다니.... 그러나 사랑의 기쁨은 역시 그 사람의 발견이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 혼자였다면, 나는 내 안의 놀라운 비밀들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테니까.”(마르셀 프루스트, 기쁨의 나날들 중)
또 바르트의 독서론을 이해한다:
“사랑의 기쁨은 한 권의 책과 만나는 기쁨이다. 그 책을 읽는 독서의 기쁨이다. 사랑하는 한 권의 책이 없었다면,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부호가 없었다면, 나는 내 욕망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내 안에 있었지만 있는 줄 몰랐던, 사교계 안에서 그토록 찾았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내 욕망의 장소를 만날 수 있었을까. 고독의 흔적들이 욕망의 기쁨으로 울리는 내 육체의 초인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롤랑 바르트, 독서에 대하여, 카메라 루시다 중)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던 필연적인 것이 또 있다. 당신이 떠내려오고 내가 당신의 대바구니를 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떻게 막아볼 길 없도록 이미 시작되는 것이 있다. 벌써 시작되고 이미 출발해서 아무리 재빠른 이후의 노력들도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리 간절한 멈춤에의 소망도 너무 늦어버리는 그런 필연적인 것, 다시는 되돌릴 수 없도록 치명적인 것이 또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은 나의 애무를 기뻐하지 않는다. 나의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깊이 잠들지도 않는다. 오래된 인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심히 나를 통과해서 창문 밖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다시 대바구니를 짜고 있었던 걸까. 다른 그 누군가에게 새롭게 건져지고 싶었던 걸까. 이미 벌써 당신은 떠내려갔고 마침 강가에 있던 누군가가 당신의 대바구니를 건졌던 걸까. 그렇게 내게는 이별이, 당신에게는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었던 걸까.
(...)
당신은 본래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이별의 주체였다. 당신은 그 누구와 함께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와도 함께 있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와 이미 이별하고 있었다. 당신이 만나서 사랑하고 싶은 존재는 언제나 단 하나의 존재, 천진스러워 고독한 당신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을 강물 삼아 늘 떠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없는, 당신만이 알고 있는, 오로지 당신 만이 존재하는 그 어느 곳으로....”
_김진영,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p.15~21.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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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상념(Night Thoughts)
밤의 상념(Night Thoughts)
이성휘
창밖으로 초생달이 보이는 방 안에 온갖 기물들이 꾸물꾸물거린다. 백열전구 아래로 펼쳐져 있는 테이블 위엔 천장까지 뻗은 식물의 화병과 촛대, 주전자, 이름 모를 새가 자리하고 그 사이로 물고기들이 유영 중이다. 기우뚱하게 놓여져 있는 테이블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책더미와 원뿔이다. 커다란 쥐들이 기어다니고, 뾰족한 송곳들이 튀어나온 안락의자 옆으로는 뱀이 지나다닌다. 벽쪽 선반 위의 사물들을 통해 이 방의 주인을 짐작하건데, 그는 분명 조형을 다루는 사람이리라. 또, 화분 위에 앉아 있는 부엉이처럼 밤을 지새우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리라.
<스위치 온>(2019)은 이 그림의 작가인 박미라가 지새운 밤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멜랑콜리한 상념의 바다다. 불면이 일으킨 상념은 예민한 감정과 감각, 그리고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자신을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주변을 산책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검은 그림자들을 들추어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감정이 취약해지고 예민함이 가장 고조되는 ‘밤’이라는 시간을 주목했다고 말한다. 사실 밤에는 감정과 감각이 예민해지고 고조된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멜랑콜리가 유럽 문학을 잠식했을 때, 밤은 당시 문학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예컨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이 쓴 시집 『밤의 상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밤, 흑단의 왕좌에서 일어난 암흑의 여신! 캄캄한 위엄 속에서, 이제 잠든 세계를 향해 그녀의 왕홀을 뻗는다. 침묵, 완전한 죽음! 그리고 암흑, 완전한 심연! 눈도, 듣는 귀도, 사물도 보이지 않는다. 창조는 잠이 들었다. 삶의 평범한 맥박조차 정지한 채, 자연도 멈추어 있다. 끔찍한 일시정지! 그녀의 끝에 대한 예언. 그리고 그녀의 예언이 곧 가득차게 하라. 운명! 장막을 내리라. 나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에드워드 영의 시는 당시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의 시에 나타난 생생한 이미지들의 분출, 감정의 격렬한 표현, 밤, 죽음, 무덤과 같은 모티프는 멜랑콜리, 운명, 매혹적인 죽음과 같은 낭만주의의 테마의 시초가 되었다.
박미라의 밤 역시 멜랑콜리하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그의 그림은 가느다란 선으로 촘촘하게 매꾸어간 섬세한 드로잉들만큼이나 불면의 밤을 채워나간 작가의 상념들을 상기시킨다. 여러 대의 선풍기가 돌아가는 가운데 누워있는 인물은 마치 땅에 사지가 붙들린 듯 널부러져 있다. 바람이 그의 얼굴에 닿기는 할까? 들불이 붙은 듯 일렁이는 풀들이 불안하다. 그 풀들 사이로 개미들이 나타나 인물의 몸을 뒤덮을지도 모른다. 사실 작가는 개미들이 피부 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를 것만 같은 느낌에 대해서 말한 적 있다. 밤은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있는 시간이다. 저 일렁이는 풀들이 피부의 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드로잉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는 뿔과 구멍이다. 먼저 뿔은 사슴과 같은 동물의 뿔이 되기도 하고, 물고기의 촉수가 되기도 하고, 곤충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되기도 하고, 안락의자에 솟은 송곳이 되기도 한다. 또 사람의 손이자 장갑의 형태로도 등장한다. 총체적으로 이 뿔의 형태는 드로잉 안에서 동물, 식물, 사물을 시각적으로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티프다. 동시에 예민함이 고조되어 있는 촉각을 암시한다. 저 장갑의 손끝을 보라. 음습한 기운이 손가락을 감싸는 느낌이 상상되지 않는가? 박미라가 그린 뿔은 한밤중에 극도로 고조되어 있는 예민함 그 자체다. 한편, 작가의 드로잉에서 구멍은 한결 같이 진한 검정색으로 표현되는데, 시각적으로는 납작한 평면 작업에 깊이감이라는 환영을 부여하고, 동시에 흑백으로 이뤄진 드로잉 그라데이션에 강약의 톤을 완성한다. 내용적으로는 창문이나 연못, 밤하늘 등 다른 세계로의 연결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앙상한 나무들이 빼곡한 숲 한가운데 뚫려 있는 구덩이를 그린 <연결된 시작>(2018)은 제목에서부터 다른 세계로의 연결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이 검은색에 대해서 “검은색 풍경은 빈 공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많은 의미와 이야기들이 꽉 채워진 공간을 상징한다.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화려한 칼라를 배제한 채 모노톤의 드로잉만으로 작업하는 박미라에게 검정색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이는 기술적으로는 펜의 강약 조절, 선의 굵기나 간격 뿐만 아니라 선을 채우지 않는 부분, 즉 흰색을 어디에 적용하고 어떻게 다루느냐까지 포함하는 문제다. 궁극적으로 드로잉 화면 위의 정서는 검정색과 흰색의 대비, 긴장 관계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위치 온> 작업을 보면, 벽난로와 식탁 러너, 그리고 카페트가 유난히 희다. 전��� 공간에 드리워진 통일된 명암이 있더라도 이 사물들을 밝은 색조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화면은 시선의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기물들은 배경 속으로 뭉개지는 것이 아니라, 만약 우리가 한눈이라도 판다면, 그 사이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만 같아 보인다. 그 자체로 머리속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한다.
한편, 펜을 이용한 세필 드로잉으로 밀도를 채우면서 대형 작업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박미라는 캔버스 또는 벽화 드로잉이나 애니메이션 프로젝션을 통해서 작업 스케일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있다. 때문에 작가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종이만을 작업의 지지체로 고집하지 않고, 합판이나 시멘트와 같은 거친 소재 위에도 드로잉을 시도하는 것은 중요해보인다. 이 거친 지지체들이 작가의 밤의 상념에 멜랑콜리 뿐만 아니라 또다른 격렬한 모티프들을 불러 일으키길 희망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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