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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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어머니는 나에게 콘돔을 가지고 있는걸 들켰다.
나는 창피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창피해 하셨다.
내가 더럽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부끄러워 하시고 동감하셨다.
동생이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하며 비난했다. 
어머니는 동생말을 듣고 나를 같이 비난했다.
동생과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가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게 더럽다고 한줄안다. 
나는 어머니의 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줃대, 이유와 감정에 대해 황당했다.
대답을 안 하였더니 이번에는 동생이 어머니의 행동을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포장하였다.
동생과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천하의 불효자 취급을 하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바람 피우는 아빠를 가르키며 늘 성에 때문에 모든것을 이지경으로 만들었다면서 성을 죄악시 했다. 그리고 늘 성을 경멸하였다. 우리에겐 아빠랑 이혼해도 그때는 평생 혼자 시골 변방에서 남은 생을 마감해도 좋다고 (상관없다) 강하게 말하셨으면서, 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그렇게 우리에게 당당히 상처받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던 모습이 전부 다 거짓이였다.
엄마는 이후 자신을 정당화 하셨지만, 난 아직도 엄마가 찝찝하다. 그러고 그 당시에 느꼈던 그 더러웠던 엄마를 향한 감정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집은 지금 한국의 대중들과 다를게 없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선 침묵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나는 한국이 이꼴 난게,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어릴때부터 아이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한심한것이 되었고, 자연적으로 생각을 요하는 직업들은 외면 당하고, 철학, 순수 언어, 같은 학문들은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동시에 문과의 위신과 역할 또한 대중들에게 외면 당했다. 지적인 유희 같은 말은 이미 현대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고대 언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제 대중들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면 정치판이 호떡 돌리듯 휙휙 돌아갔고, 정권이 그렇듯, 사람들의 위신과 지지도도 휙휙 돌아갔다. 이젠 믿을 사람 하나없는 척박한 사회. 고통뿐인 생각들은 주사 맞은 곳에 솜으로 급히 막듯이 온갖 잡것들로 채워 넣었으니. 이제는 사람들은 생각하지를 거부한다. 오직 그들이 급하게 채워 넣은 유튜브, 웹툰, 술, 담배, 커피, 음악, SNS, 게임과 같은 갖가지 형태에 향정신성 물체 같은 (마약같은) 쾌락으로 현재를 즐기기를 바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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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a-aja-hanja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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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d like to support me, check out my ko-fi!
character story:
To be truly just, one must 止 지 stop even 一 일 one thing from being wrong.
Study vocab here!
Vocab:
眞正 진정하다 genuine
正初 정초 beginning of January
公正 공정* fairness
正義 정의 justice ; righteousness
正當 정당하다 be just ; be legitimate
正當化 정당화* justification
正正當當 정정당당하다 be fair and square
不正 부정* injustice
正直 정직* honesty
正말 정말 truly
正確 정확하다 be accurate; be precise
正子 정자 printed letter
正書 정서* print handwriting
訂正 정정* correction ; revision
改正 개정* amendment
修正 수정* revision
校正 교정* correction
正式 정식 regular form
正體 정체 true character
正常 정상 normality
正規 정규 regular ; formal
正 정장* formal costume
正色 정색하다 put on a serious look
端正 단정하다 be decent; neat
正三角形 정삼각형 equilateral triangle
正四角形 정사각형 square
正數 정수 whole number
正札 정찰 price tag
正札 정찰제 price tag system
正面 정면 facade
正門 정문 front door
正比例 정비례* direct proportion
正反對 정반대 exact opposite
正刻 정각 exact time
正午 정오 noon
新正 신정 (solar) New Year’s day
舊正 구정 (lunar) New Year’s day
*can add 하다 to make a verb form
**can add 이다 to make an adjective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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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grl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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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ers MarginChoi & HD BL4CK of LBNC released their collab album "Dark Adaptation".
01. Golden Hour 02. YAY (Feat. ODEE) 03. Untitled (Feat. 넋업샨, 격) 04. The Dangers 05. 알약 (Feat. EPTEND) 06. 정당화 (Feat. Hesper) 07. Where U At (Feat. TOKAI) 08. Wander In Darkness (Feat. Chaboom) 09. Repentance Mix & Master MarginChoi Cover Art Magin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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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yongchul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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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실예배에 주님이 주셨던 말씀은 신명기 27장 5~7절 말씀으로 다듬지 않은돌로 단을 쌓으라 였다 ..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적 부흥을 잃어가고 있는 현제에 그것이 어디서 잘못됬는지를 알려주시고 어떻게 해야 다시 부흥할것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
한국의 교회는 과거의 영적부흥에 취해 과거의 모양만을 유지하려 하고 있지 내실은 텅빈 상태라 하셨는데
그 이유로는 세계최대의 교회 세계최고의 교회라는 타이틀에 갇혀서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만을 지향하다보니
정작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변질되어 드려지는 예배가 열납되지 않으므로 예배를 통한 은혜가 없고
그로인한 성도들의 삶에 말슴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예배의 문을 여는 대표기도를 들으셨는데
지금 행하여지는 대표기도는 최고의 교회에 걸맞는 장엄한 예배가 되기위해 대표기도 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닌 사람에게 하는 기도로 변질되어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기위해 원고를 작성하고 그것을 낭독하기에 급급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돌을 다듬는 것이기에 주님의.제단에 쓸수없는 기도라 하시고
부족하면 구하라 하셨습니다
영성이 부족하면 영성을 구하고 지혜가 부적하면 지혜를 구하라 하시며 너희가 올바른 기도를 하기위해 구하면 내가 줄것인데 너희가 구하지 않고 너희의 능력으로 하기위해 원고를 작성하고 그것을 낭독하며 그것을 정당화 하기위해 여러가지 핑계를.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찢고 지금까지 사람앞에 잘보이려한 모든 행위에서 돌이켜 진실된 예배로 내앞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 전한 말씀의 내용 이었구요 ..
월요일에 출근하는 길에 이번주에 전할 말씀까지 연결해서 주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번주 전할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3~5절 말씀을 주시며 이것을 전하여 알리라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5절의 말씀은 에베소교회에 하신 말씀으로 창찬과더불어 그들이 처음 신앙을 잃어버린것에 대한 책망의.말씀인데 그중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으로 주의를 주시는 부분 입니다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들이 과거의 영적부흥기의 영광에 갇혀 실제로는 성령으로 충만치 못하면서 흉네만 내기위해 성령으로 충만한척 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닌 사람에게 하는 예배와 기도를 계속하면
한국 교회들에게 주셨던 부흥의 촛불을 옮기시겠다 하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었고 우리의 갈길을 인도하시는 말씀 이었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예배로 바꿔야 할것 입니다 ..
부흥 할것인가 쇄락할것 인가는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할것인가 택하여야 할것입니다
저와 저의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를것 입니다..
#광명전통시장 #광명시장 #전통시장 #추천맛집 #광명왕족발 #광명할머니왕족발 은 #광명소셜상점 #미리내가게 #광명8경 #광명동굴 #광명시 #LocalGuides 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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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life-path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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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확신이 드는 선택만 한다.
내가 삶을 사는 방법 중에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하는 방법이 있다.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1번 이상 생각을 해서 내가 나를 설득할 정도 확신이 드는 선택만 한다.
예를 들면, 내가 Google에서 일한다고 나는 행복하지 않다.
어떠한 회사는 내가 어떤 가치로 평가되고 나와 얼마나 오랫동안 같이 일할 지를 고려한 회사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회사이다.
즉, 어떠한 조직에서 나는 the best of them이 아니라 the special one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다.
음식도 마찬 가지이다.
신선한 식재료 그리고 방금 요리한 음식은
나의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렇게 준비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아침 걷고 달리기 운동을 하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한다.
이 아침 rutine도 처음부터 만들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경하며 내가 확신이 드는 방향으로 변경을 했다.
즉,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 한 번에 선택하지 않고 나를 선택할 수 있를 때까지
나의 논리나 생각을 정리해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들어 정당화 할 수 있을 때 나는 그 선택과 결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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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ophile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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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체제 정당화 논리가 잘 표현된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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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8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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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岡克行, ルーマン/社会の理論の革命 (52)
勁草書房, 2006
Ⅵ 조작적 구성주의와 사회 기술의 방법
제16장 구성주의적 인식론
1. 사회의 자기기술 문제
- 루만은 의미를 세 가지 세계 차원, 즉 사물 차원, 시간 차원, 사회적 차원으로 분해. 사회 분화 이론, 사회 진화 이론,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각기 이 세 가지 차원 중 하나에 느슨하게 대응. 루만은 세 가지 개별 이론을 통해 사회를 기술. 앞 장은 그 중 사회 구조에 관계하는 사회 분화 이론, 그것도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에 대해서만 개관. 그러나 제14장 제4절 「사회의 자기 관찰」에서 본 것처럼, 루만의 자기기술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동일 시스템에 대해 많은 자기기술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음. 루만에 의한 사회 기술도 또한 사회의 있을 수 있는 기술의 하나. 사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매일 다수의 사회 기술을 내보내고, 과학도 서로 다른 많은 사회 기술을 제공.
- 그렇지만, 다수의 자기기술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 자체는 또한, 사회에서 실제로 다수의 자기기술이 제공되지만, 사회가 이에 주의하고 있다는 것 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 모든 사회가 자기기술과 사회가 그 의미를 획득하는 문맥, 즉 세계 기술을 만들지만, 루만의 역사 연구에 의하면 사회에 다수의 자기 기술이 나타나는 것은, 근대부터. (1987i, S. 162) 근대사회의 여러 자기기술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술들의 다툼, 상호적 대립.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에 반대인지 찬성인지, 근대사회는 보수파와 진보파로 양분. 그리고 근대사회의 <진보>가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진보를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면서, 진보파는 리버럴리즘과 사회주의파로 분열. 국가 사이의 경제적 경쟁, 군사적 경쟁이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더욱 복잡화. 이 결과 근대사회의 자기기술을 둘러싼 문제는 점점 사회적 중요성이 증가.
- 이를 배경으로 19세기말에 생겨난 아카데미 사회학은, 사회 기술을 스스로의 과제. 그러나 사회 기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불가분하기 때문에, 사회학은 출발 당초부터, 정치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과학으로 사회 기술은 어떻게 가능할 지의 문제를 떠맡음.
- 복수의 이론적인 사회 기술의 병존과 경쟁은, 각기 기술의 정당화 문제, 나아가 진리 문제를 부상. 당시 유럽 후발국에서 제기되었던 새로운 사회 기술은 역사주의를 제창. 복수의 사회 기술이 존재한다는 사회적 사실에서 촉발되어 생겨난 지식사회학적 연구는, 사회 구조에 규정되는 입장들의 이해 관심 차이에 주목했지만,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
- 20세기 종반기 사회학에서는, 상대주의는 쿤의 패러다임론과 리요타르의 포스트 모던론을 사용해 더욱 강화. 그렇지만 사회학에서 쿤의 통약 불가능성 테제에 주목해 그의 패러다임론을 이론의 다원주의(복수주의), 멀티 패러다임론의 주장으로 전용하는 것이 가능했고, “메타 이야기의 종언”은 뒤집어 보면 ‘통일 보고의 부재’, ‘통일적 이야기의 불가능성’이고, 그래서 그것은 역시 인식의 상대주의로 연결.
- 상대주의는, 훨씬 이전부터 상대주의를 올바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상대주의를 절대화하는 것이 되고, 그 의미에서 상대주의 그 자체의 자기 위반. 포스트모던 사회론에 의해 비판되었던 모던 사회론자는 포스트모던론에서 보여지는 이성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유사한 논법을 통해 반비판. 이성을 사용해 이성 공격을 수행한다면, 수행적 자기모순이 침해. 이에 대해서 포스트모던론자는 다음과 같이 재비판. 즉 모던론에서 전제하는 이성도, 역시 이성이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보는 것에 불과하고, 그 이상의 근거는 없다고. 그러나 모던 사회론자에 의한 포스트모던 사회론 비판은 ‘메타 이야기의 종언’이라는 주장을 경험적인 논거로 반증하는 것은 아님. 이러한 경과를 거쳐 포스터모던 사회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사실 사회학에서는 복수 이론의 공존(다원주의)과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유지. 이것이 사회 기술을 둘러싼 싸움 현상. 여기서 사회가 지속해 추구할 목표의 표명과 사회 이론의 과제에 관한 질문을 포함하는 사회의 비판적 이론조차도 경쟁 관계에 있는 복수 이론 중 단지 하나로 취급.
-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사회, 어떻게 정의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루만의 사회 이론은 이 질문에 답하려는 것. 루만의 사고에 의하면, 사회기술에 참가하는 것은 사회학의 과제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학의 책임.
- 그는 우선 사회 개념을 근본적으로 정의. 다음으로 사회를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진화, 분화라는 세 가지 시각에서 분석, 기술. 그 위에 『사회의 사회』의 최종 제5장 「자기기술(복수형)」에서 사회 기술이라는 문제를 주제로, 그 자신의 사회 기술을 포함한 기존의 사회 기술들을 또 한 번, 분석과 기술의 대상.
- 그 때 루만은 제2장 제1절 (3)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사회의 자기주제화, 자기반성, 자기기술 문제에 대해 연구 방향의 큰 축에서, 사회 구조에 주목한 마르크스를 따름. 단지 마르크스는 근대사회 구조를 기능적 분화라는 분화 형식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분절화(Gliederung) 내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구별이라는 형식으로 다룸. 이런 방식은 시대의 제약을 받아들인 것이고, 기능적 분화로의 진전 도중에 있던 상황에서 구조의 파악. 루만은 근대사회를 구조적으로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로 다루는 한 편, 토대/상부구조라는 구별을 사회구조/의미론이라는 구별로 치환하려 함. 루만은 이념사 내지 역사적 의미론에 대해서도 사회 구조와의 관계를 통해 연구. 그 뿐만 아니라, 시간표상이나 세계 이해의 틀도 또한 사회 구조와 연관. 그래서 그의 시간논문의 하나는, 다음 문장을 통해 시작. “철학적 전통의 기본개념들은, 사회 구조가 서있는 것을 허용하는 문제들에 최종적으로 소급되는 소여조건들(Vorgaben)과 아마도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다.” (1990h, S. 95)
- 그래서 사회 구조(사회 분화의 형식)와 사회의 자기기술 관계를 주제로 한 『사회의 사회』의 제5장 「자기기술」은 좁은 의미의 사회의 자기기술들을 다루는 것은 아님. 존재론, 이가 논리학, 세계 구분의 방식, 자연, 기술, 윤리와 도덕, 시간, 주체개념, 우리들과 타자의 이행의 틀(그래서 사회적인 것의 이행의 틀) 등등, 사회와 세계의 이해에 관한 다양한 의미론이, 사회의 기존 여러 자기기술과 엮여져 있기 때문에, 사회의 구조(사회 분화의 형식)와의 관련에서 다뤄짐.
- 제5장 「자기 기술」은 그 때문에 『사회 구조와 의미론 – 근대 사회의 지식사회학을 위한 연구들』의 개괄. 다른 한 편, 근대 사회에 한해서는 근대사회의 중요한 기능 시스템들을 개별로 다루었던 루만의 저작 시리즈 『사회의 이론』 제3부의 각 권 각 관계 부분의 요약이고, 또한 루만이 『사회의 이론』의 부속물이라 불렀던 작품들, 즉 『에콜로지칼 커뮤니케이션 – 근대 사회는 에콜로지칼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가능할까?』 (1985d: 증보제2판 1986), 『리스크의 사회학』 (1991), 『근대의 관찰』 (1992), 『매스 미디어의 실재』 (1995d; 증보제2판 1996d), 『항의 – 시스템 이론과 사회 운동』 (1996b) 의 핵심에 대한 요약. 제5장에서는 또한, 근대 사회의 각 기능 시스템들에 대해 수행되었던 기술들 외에, 근대 사회가 근대 사회에 부여했던 규정들(자본주의 사회, 계급사회, 시민사회, 근대화, 탈공업화사회, 정보화사회, 리스크사회, 세계사회 등등)이 기능적 분화의 진전이라는 근대 사회의 역사적 과정과 관계하여 검토되고, 재기술. 그래서 제5장은 논문 「사회는 왜 그 자신을 포스트모던으로서 기술하는가」 (1995e)를 바탕으로 한 최종 제23절 「소위 포스트코데르네」를 통해 마무리.
- 즉 제5장 「자기 기술」은 루만의 다수 저작들의 관계된 부분에 대한 루만 자신의 요약. 이 책에서 제5장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 루만 사회 이론의 기초에 놓여 있는 시스템 이론적 사고 방식의 구명을 과제로 하는 이 책은, 그래서 이번 장과 다음 장의 두 장에서, 제5장의 중심 과제인 두 가지 문제, 즉 사회의 이론적 관찰이라는 문제와 그 때 전제되는 인식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 우선 이번 장 이번 절에서는 사회 기술의 원리적 한계에 관한 루만의 견해를 간단하게 서술, 사회기술에서 루만이 취하고 있는 입장을 요약. 이어서 제2절에서는 조작적 구성주의의 입장에 선 구성주의적 인식론을 다룸. 다음 제17장에서는 루만의 사회 기술 방법에 대해 정리. 최종 18장에서는 시스템 이론적인 사회파악에서 고찰하고 남은 문제, 시스템 합리성을 다룸.
- 이 책 제15장 제4절 「사회의 자기관찰」은 『사회의 사회』 제5장 「자기 기술」의 모두 부분을 선취해 서술. 루만은 사회의 어떤 자기 관찰과 자기 기술에도 필연적으로 부수하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
- 사회의 관찰과 기술은 커뮤니케이션에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관찰과 기술은 불가능. 사회 기술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 기술. 사회의 기술은 그 위에 거대한 복합성의 자기 단순화. 게다가 사회는 자신의 조작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는 도달할 수 없음. 왜냐하면 사회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이미 그 자체 사회로서 전제되야만 하는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 그렇지만 사회는 사회에 대해 기술하고자 하고 기술. 사회는 그 통일체를 상상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통해, 사회 내부에서 사회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사회는 커뮤니케이션 조작에 의해 생산한 차이, 즉 사회와 사회가 아닌 것과의 차이를, 그 한 측에 있는 사회 속으로 투입해(재진입해서), 관찰을 위한 구별(자기로의 언급과 외부로의 언급과의 구별)로 사용. 그러나 이 구별 그 자체는 관찰에서의 사용에서는 동시적으로는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의미에서 사회의 자기 관찰과 자기 기술도 또한 ‘맹목적’. 그런데 과학에 의한 사회 관찰과 기술이라 해도, 이 한계를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 그뿐 아니라 이미 과학에 의한 과학의 자기 관찰과 자기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 과학에서 사회의 기술에는 원리적으로 이러한 한계. 거기에 더해, 현재 다른 다수의 사회 기술이 제공되고, 상대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기술 상호 사이에 경쟁이 확산. 루만은 그것 또한 사회의 자기 기술 문제로 다루지만, 그 때 상대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이라는 이유 붙이기에는 일찍부터 비판적.
- 첫째, 루만은 이미 사회의 자기기술 문제라는 특정 문맥은 아니지만, 사회학에 있는 다원주의라는 입장이 이용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즉, 일반적 프레임워크가 결여된 많은 이론이 병존하는 사회학에서, “『다원주의』가 통합의 유일의 공식이다. 그것은 과학을 통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잖이 대학의 과학들을 평화로운 상태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죄 없는 거짓말(a white lie)이기를 계속한다”(1983c, p.987).
- 둘째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에서 변화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규정의 틀에는 최초부터 반대.
- 셋째 사회의 자기기술에 관한 견해에서 근대사회에는 많은 자기기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기기술은 불가능.
- 넷째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대주의 문제에 대해, 1990년 5월부터 삼 개월에 걸쳐 대서양을 넘어 비트넷을 사용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나는 이점에 대해서 한 번도 어떠한 공포증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상대주의』라는 문제는, 세계를 존재론적 형이상학과 이가논리학이라는 전통적 전제에서는 역시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이행기의 한 특징이라고 나에게는 생각된다.”(1994a, p.40)
- 루만은 한 편에서 근대사회는 많은 자기기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견해지만, 다른 한 편 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라는 입장 내지 이론적 규정에는 찬성하지 않음. 그 때문에 사회 기술에서 별도의 인식론적 입장과 기술양식을 용의. 그것은 네 가지 테제로 요약 가능.
(1) 어떤 사회의 자기기술도, 그 사회의 구조와 독립적이지 않음. 왜냐하면 사회의 분화 형식이, 의미론적 납득성을 한정하기 때문. 존재론적 형이상학과 이가논리학에 기초를 둔 구유럽의 사회의 자기기술은, 구유럽의 사회 구조에 적합했지만, 그것은 중심도 정점도 사라진 근대사회의 구조에는 적합하지 않음.
(2)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 근대사회는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 때문에, 폴리컨텍스트 혹은 하이퍼콤플렉스 등으로 기술해야만 하고, 어떤 개별의 자기기술 시도도 그 자신의 우발성을 고려에 넣고, 다른 자기기술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만 함.  
(3) 사회의 어떤 자기기술도 커뮤니케이션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어떠한 자기기술도 관찰됨. 루만은 근대사회의 기술에서는, 사회의 다른 기술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라는 자신의 사회기술 틀 속에서 다시 한번 기술. (사회의 여러 자기기술의 재기술) 그 때 루만은, 다른 기술들을 제1계의 관찰 수준이 아니라, 제2계의 관찰 수준에서 관찰. 즉 그러한 기술에서 무엇이 보여지고 보여지지 않는가를 관찰. 그를 통해 현재 있는 사회의 다른 기술들을 루만 자신의 사회 기술의 시야 속으로 끌어들이고, 또 이해가능한 것으로 가져오려 함. 그러나 루만의 재기술도 커뮤니케이션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그것도 물론 사회에서 관찰.
(4) 근대사회는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 때문에 인식론에서도 새로운 사고 방식을 낳지만, 그것을 상대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과 같은 개념에 맡기는 것은 불충분. 인식론도 또한 시스템의 조작적으로 닫힘이라는 기초에서 출발해야 함. 조작적으로 담힘에서 출발하는 구성주의적 인식론은 관찰 이론과 결합해야 하고, 제2계 수준의 관찰과 결합된 구성주의적 인식론은 사회적 차원의 관찰에 적합한 인식론. 구성주의적 인식론은 근대사회 구조에 적합한 인식론.
2. 구성주의적 인식론
- 하나의 보편적 이론, 차이이론적 세계이론으로 구상된 루만의 시스템 이론은 인식이론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함. 그것이 조작에 기초를 둔다는 의미에서 조작적 시스템 이론(operative Systemtheorie), 조작적으로 닫힌 오토포이에틱한 자기언급적 시스템 이론에 의거해 도출된 인식론은 ‘조작적 구성주의(operativer Konstruktivisumus)’ (1991c, S. 73, Anm. 20)의 인식론.
- 이 구성주의는 시스템의 조작적 닫힘이 인식 활동에 부여하는 결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점에서, 종래 다양한 구성주의 이론과 다름. 이 구성주의는 그래서 동일한 점에서 최근 이본 사회학에서 유행하는 ‘구축주의’와도 다름. 이 구성주의는 그러나 조작적 닫힘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어떠한 구성주의 이론과도, 다음의 세 가지 중 적어도 하나는 다름.
- 루만의 구성주의는 첫째 조작과 관찰의 구별을 중시. 그 위에, 조작과 관찰의 구별 의의를 타인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
- 둘째 관념론적 인식론, 혹은 기호론적 내지 언어론적 인식론, 혹은 주관주의적 인식론의 래디컬화로 자기요해하는 여러 구성주의 이론은 최초부터 잘못된 궤도에 있다고 보았음. 루만에게는, 각기 그러한 래디컬화는 불가능. 왜냐하면 관념과 실재, 기호와 지시대상, 혹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전통적 주도구별에 대해, 각기 구별의 한 편을 무시해, (자기 구성된) 관념만을, 혹은 (언급 없는) 기호만을, 혹은 (자기자신을 반성하는) 주관만을 유지하려는 편에서는, 래디컬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1994f, S. 7; 1996a, S. 18, Anm. 9) 구별의 어느 편을 삭제할 때, 구별은 붕괴. 그렇지만 구별 없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은 불가능. 거론되어진 구별이 이미 설득적이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있음. 그 경우 그러한 구별을 다른 구별에 의해 교체하는 노력을 들여야만 함. 루만의 조작적 구성주의는 그러한 다른 구별을 제안하고, 그 의미에서 루만의 구성주의는 ‘래디컬 구성주의’보다 더욱 래디컬.
- 셋째 루만의 구성주의적 인식론은, 신경생리학자 마투라나의 인식론이나, ‘래디컬 구성주의’의 명명자이자 주도자인 심리학자 글라서펠트(Ernst von Glasersfeld)의 인식론과 비교해 눈에 띄는 것처럼, 인식론의 완성도가 다름. 마투라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조건 하의 조작 속행을 늘 인식이라 부름. 글라서펠트는 쟝 피아제의 후계이론을 자칭하고, ‘래디컬 구성주의’는 유럽 이 천년 전통과 연을 끊는 래디컬화라 보지만, 그 ‘래디컬 구성주의’는 주관주의. 그뿐 아니라, 글라서펠트 인식론이 종래 (철학적인) 인식론에 관한 기초지식에 있어 피아제로부터 대폭 후퇴한 것이고, 글러서펠트처럼 ‘인식과 현실의 일치 없음’이라는 논거만을 가지고 ‘래디컬’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할 이유는 없음. (1990, S. 521f.)
- 하버마스가 “사회학자라는 양 가죽을 쓴 철학자”라 평가한 루만은 이 마지막 지점에서 글러서펠트와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아님. 철학적 인식론의 연구에 관해서는, 오늘날 사회학자에서 루만에 필적할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움. 루만은 시스템의 조작적 닫힘에서 유도된 구성주의를 유럽의 철학적 내지 비철학적인 전 인식론사 속에 위치 짓고, 그 의의를 부조하려 노력. (1990) 그렇지만 루만이 노린 것은, 단지 인식 연구의 진전에만 머물지 않음. 조작적 구성주의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근대사회에 적합한 인식론임을 논증, 그래서 조작적 구성주의에 의거해 근대사회와 그 세계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 여기에 사회학자 루만의 또 하나의 노림. 그 때문에 루만은 많은 작품에서 조작적 구성주의를 다룸. 여기서는 논점을 아래의 세 가지로 좁히는 것.
(1) 첫째, 종래 철학 인식론에 대한 루만의 불만을 다룬다는 한정적 목표아래, 루만의 학설사적 회고 일부분을 살펴봄.
(2) 다음 조작적 구성주의의 중심 테제, 즉 인식은 시스템의 조작적 닫힘에도 ‘관계없이’가 아니라 참으로 조작적 닫힘 ‘때문에’ 가능하다는 테제를 다룸. 조작적 닫힘에서의 인식은, 그 자체를 가지고 본다면 토톨로지컬하고 패러독시컬. 그래서 이 토톨로지/패러독시가 어떻게 탈토톨로지화/탈패러독시화되는 것인가가 문제. 해명에서 루만이 채용하는 것이 재귀적인 관찰, 제2계의 관찰.
(3) 일반적으로 구성주의에는 관념론의 혐오가 걸려있음. 루만의 구성주의에서도 마찬가지. 조작적 구성주의는 관념론이지만, 루만은 실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문제를 제3의 논점.
- 제2계 관찰을 길잡이로 하는 루만의 조작적 구성주의는, 사회에 조응하는 인식론. 루만의 분석에 의하면, 근대사회의 각 기능시스템 자신이 실은 이미 제2계의 관찰을 실천. 그러나 이 의미에서 제2계 관찰, 그와 함께 사회 이론인 구성주의 인식론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룰 것.
- 지금 여기서 최후에, 루만이 인지라 불렀던 것의 기출의 정의(157페이지)를 재확인, 인식의 정의를 확인. 루만이 말하는 인지와 인식도 그의 관찰 개념을 기초. 관찰은 언급과 대부분 겹침. 즉 언급과 관찰에서, 구별과 지시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에서 이뤄진 하나의 조작을 의미하는 것. 다음에 구별이 지시되어진 것에 대해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이용되는 경우에는, 언급하는 것은 관찰이 됨. 그래서 관찰이 스크립트화 내지 텍스트화되는 것이 기술이지만, 인지는 이러한 관찰(내지는 기술)에 기초한 시스템 상태의 변화라 정의. 이 인지 개념은 인지 과학의 인지 개념과 합치하는 것처럼 정의. 그 특징은 진위에 대해서는 당장은 무기이고, 진위 물음 이전의 경우에 위치하는 것, 바꿔 말해 진/위의 구별과 코드화를 만들어 내는 고전적 인지 개념에 비해 확장.
- 다음으로 인식의 정의. 루만은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관찰은 그것이 시스템 속에서 반복가능한 결과들을 가지는 경우, 그래서 그런 한에서 인식과 이어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관찰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 용장성을 이용해 산출하는 한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보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 결과로서, 어떤 일정의 관찰이 다른 관찰들을 있는 그러한 것으로 하는, 내지는 있을 수 없는 그러한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이용되는 여러 용장성, 그러한 용장성을 관찰하는 것을 이용해 산출하는 한에서, 관찰하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1990h, S. 40) 이 인식은 과학에서는 최초부터 진/비진의 구별에 의해 코드화. 바꿔 말해 과학적 인식에서는 참된 인식의 추구가 문제. 
(1) 기존 인식론의 문제점
- 루만은 인식론 학설의 회고를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로 시작. 루만은 또한 관찰자의 계보학은 신의 관찰에서 악마��� 경쟁해야만 했던 중세 신학에서 출발하고 (1990, S. 118-121u. S. 491), 특히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신학을 염두에 두고 말함. 즉 (반드시 글러서펠트류가 아닌) “래디컬 구성주의에서 파트너는 전통 인식론이 아니라, 전통 신학(그렇지만 상세하게 말하자면, 정확함에 대한 요구들 때문에, 신학이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을 넘어선 신학)이다.” (1988e, S. 28) 그러나 오늘날까지의 인식론 특히 어디서 풀어야 할 문제를 보았는지를 주요 과제로 하는 것에서는, 제18장 합리성론에 관계된 일반적 한 가지 이외는 근대, 그것도 칸트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
- 인식에 관한 의미론에서 구 유럽에서 근대로 이행이 이뤄진 것은, 루만의 정리에 따르면 수동(passiv)에서 능동(aktiv)으로의 전환. (이하는 1990, S. 493f.) 구 유럽에서 인식은 인상을 받는 것으로 수동적으로 이해. 이 이해에 의하면 인식은 인식되어진 것에 의해 이뤄지고, 그것도 같은 것이 같은 것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으로 초래. 이것은 체험하는 것으로 감축하기 위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설명 방식이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같은 실재에 몸을 맡기는 경우, 인식하는 사람이 착오, 추락, 죄과, 호기심, 혹은 다른 무언가의 결함에서 사도로 빠지지 않는 한, 같은 의미에서 체험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 여기서 인식은 의지, 의욕에 관한 사태가 아님. 이렇게 다루는 방식은, 새로운 것이 부정적 일탈을 의미하지 않는 근대의 과학 운동에서, 능동적,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식의 획득이 목표로 하도록 변하는 것에서, 혹은 확실하다 했던 전승의 비판이 적극적으로 겨냥 되었던 것과 함께, 부적당하게 됨. 이에 있어 처음으로 인식과 대상의 차이와 통일이 문제. 인식 과정과 이 과정의 컨트롤이 명료하게 구별되고, 또한 이 구별이 방법론적으로 조탁되는 것에 의해, 근대의 인식론은 특유의 다음과 같은 문제를 피해야만 함.  
“인식과 대상은 어떻게 해서 만나는가? 인식은 그것이 알고 있는 것 밖에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안다는 것은 외적 세계의 사물들과 일치하고 있는 것을 인식은 어떻게 해서 아는 것일까?” (1990, S. 493)
- 루만은 근대 인식론의 물음을 이렇게 정식화. 그 위에 문제점을 선명하게 부상시키고, 이 물음을 차이이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첨예화.
- 문제는 인식과 대상의 차이와 통일. 루만은 여기서 구별의 패러독시에서 전형적인 한 케이스를 보는 것.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모두, 인식과 대상의 구별을 사용하고, 그 때 이 구별의 양 편을 잘 못 다루지 않을 때, 이 구별은 분명하게 이 관찰에서 관찰을 피함. 이 구별은 단적으로 전제. 이 구별은, 그 때문에 어떻게 해도 과학에서는, 그 구별 자신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음. 왜냐하면 구별을 그 구별 자신에 적용하는 데 있어 마찬가지의 구별을 다시 한 번 전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 그러나 사태는 이렇다면, 인식과 대상이라는 이 구별은,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이용되는 것일까? 이 구별은 어떻게 자기에게 ‘근거 짓기’를 부여하는 것일까? 루만은 여기서 인식론의 미해결 문제를 보고, 이 문제가 기존 여러 인식론에서 어떻게 다뤄졌는가를 조사.
- 루만의 용어로는 구세계에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해석을 가진 세계에서, 사고와 존재를 결합하는 ‘합리성 연속체(Rationalitätskontinum)’ 가정 속에서 보여지는 것. 구세계에서 사고와 존재의 일치를 부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신을 모독하는 것. 왜냐하면 부정은 신이 세계를 만들고, 세계에서 접촉능력이 없는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사고와 존재의 구별(그것들 상호의 일치 혹은 불일치라는 상정에서)은, 이 사고에서는 여기의 기초인 패러독시를 보지 않고 완료되는 맹점으로 역할. 그렇게 가능한 것은, 사고와 존재의 구별이 사고 자신에 의한 구별에 다름아니지만, 사고에 의한 이 구별이 사고에 재-진입되고, 숨겨져 사용되기 때문.
- 존재론적으로는, 어떻게 해도 사고와 존재의 양자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능.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분화, 자립화의 진행과, 그 귀결인 과학의 자율성 높이, 내지 과학에 의한 보편적 인식 요구의 높이들이 진행되면서, 구세계의 코스몰로지컬한 타당 요구들은 의문시. 모든 진리가, 가능한 비진리에 비춰 테스트돼야만 하고, 각기 일반적으로 오류가 가능하다면, 합리성 연속체 가정도 또한 상처가 없을 이유는 없음.
- 루만의 견해로는, 구 유럽의 합리성 연속체의 소실을 메운 것이 의식철학의 래디컬화. 왜냐하면 합리성 연속체와 동시에, 인간의 의식 상태로서 인식이라는 표상이 방기 돼야만 한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과다하기 때문. 철학은 문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존재론적 형이상학은 시작부터 독자에 의한 형이상학으로 작용. 그러니까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 안다, 사고한다, 숙고한다라는 용어는, 인간 영혼의 개체성 표상과 결합. 그래서 누구라도(어떤 독자라도) 자기자신 개체성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개인 각각이 관찰한다는 방식은, 이미 고도로 납득. 이리하여 합리성 연속체의 소실은 의식철학의 래디컬화에 의해 보충돼야만 함. 그것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인식의 주체인 인간이라는 표상을 우리에게 줄 수 있었던 것.
- 그러나 의식철학의 래디컬화는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론상의 문제를 수반,
“의식은 어떻게 자기자신에서 출발해 사물에 도달하는 것일까? 어떻게 ‘나’는 독아론의 위험에 진지하게 맞서고, 그래서 어떻게 ‘나’는 이 위험을 회피할까? 의식은 그것이 알고 있는 것 밖에 알지 못해서, 그 자신의 조작에서만 오류의 가능성을 사용하고, 그 때문에 반성에서 회의의 가능성을 사용하지만, 그것에서 어떻게 ‘나’는 출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일까?” (1990, S. 494)
- 루만은 이 문제에 대해 차이이론적으로 첨예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언급과 부정 가능성들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패러독시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은 논리학적으로는 잔뼈 가득한(logisch unehrlich) 방식으로 밖에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 있어서는 분명하다.” (1990, S. 495)
- 그렇지만 루만에 의하면 “데카르트로부터 버클리, 클로드 부필, 흄, 그래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정말로(ernstlich) 이 문제의 해결들이 탐구 되었던 것이고, 후에 (19세기 후반부터) 사람이 인식론이라 불렀던 것은, 이 방식으로 이 문제 설정에 의해 각인되었다. 상식도 근대 자연과학들의 겨냥했던 성과들도 주체의 외부 세계의 현실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주체는 그것에 있어 입증 곤란의 상황에 빠졌던 것이다.” (위와 같음)
- 여기서는 루만의 『사회의 과학』에 있는 간결한 칸트론(1990, S. 497~500)에만 주목하여, 존 로크를 포함한 그 외 철학자들의 학설 검토는 생략. 칸트론에 대해 본 후, 칸트가 남긴 문제에 그 후 인식 연구가 어떻게 대응 했는지에 대한 루만의 견해는, 보다 간단하게 언급.
- 우선 문제를 재정식화 하자면, 인식은 과학에 의한 인식을 포함해, 실재와 어떻게 자기를 관련 짓는가 라는 것. 그 때 실재 인식의 획득을 겨냥한 과학이 존재하여 현재 실재 인식의 획득이 실천된다는 사실은, 물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님. 문제에 접근하는데 칸트가 선택했던 것은 어프리오리하게 타당하다고 가정돼야만 하는 의식 조작들의 가능성 조건. 왜냐하면 이것 없이 의식은 활동할 수 없고, 의식은 자신을 나눌 수 없기 때문. 그 때 칸트는 경험의 가능성 조건은 경험 자체 속에선 주어지지 않고, 경험 자체 속에 주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 이 출발은 루만의 용어로 말하면 자기언급의 차단. 이 출발은 칸트에게는 이론 건축상 필요한 것. 이리하여 어떤 어프리오리의 필요성이 필요성으로서 어프리오리하게 현상. 칸트가 이 언명을 가능하게 하는 구별, 경험적/초월론적이라는 구별을 선행적으로 투입한 것은 이 때문.
- 만일 사람이 칸트와 같이 물자체로의 도달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실제 테스트는 인식하는 시스템의 자기 테스트, 내부 테스트로서 수행하는 것만이 가능. 그렇다면, 자기 테스트는 어떻게 라는 것이 해명돼야만 함. 그렇지만 사람은 칸트처럼 여기의 문제를 자기언급의 내부적 차단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 가능성의 어프리오리하게 확실한 조건, 다른 것이 의존하는 한 편, 그 역은 있을 수 없는 그러한 조건을 찾아내는 것. 또한 이것에 확신이 없는 경우, 사람은 순환을 넣는 것을 허용. 그 때 동시에 부정을 끌어들여, 그 순환을 가장 첨예한 형식, 즉 모순으로 대신하는 것. 이것은 칸트와 헤겔 이래, 새로운 의미에서 변증법. 여기서 인식에 가장 가혹한 것, 거부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 즉 모순에, 인식이 도전하고, 그래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이 문제. 더욱 단순하게 말하자면, 진리에는 진리의 정확한 반대물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지 않음. 그래서 그 경우 언제나 해결이 보인다면, 그것은 인식이 그 자체로 모순에 대해 관련이 있지 않은 현실과 화해(혹은 모순은 있지 않았다)라는 것을 보임. 이 변증법은, 원래 예전부터의 대화적 변증법에서 보여진 사회적 방법 절차의 사물화로 해서 신간화.
- 칸트는 자기언급의 차단이라는 이론 목표, 의식 분석, 그래서 경험적/초월론적이라는 구별을 가지고 인식 문제에 답하려 했던 것. 루만은 칸트의 답변 방식에서, 시간화와 사회화라는 점에 결함이 있다고 함. 그러나 루만은 칸트의 이 답이 오늘날 설득적이지 않다고 보는 경우에도, 이 답이 관계하는 문제설정의 형식에서 우리 관심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점이 있다 역설. (1990, S. 499) 그것은 책의 에피그래프, 또한 제3장 “사회시스템 이론의 기본 시좌”에서 소개한 “……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질문, 그 중 이 질문을 설정하는 기술. 그것은 인식론적 양상론화. 왜냐하면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가능하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태에 대해, 그래도 아직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기 때문. 칸트는 인식에 대해 그러한 질문을 했던 것. 루만은 칸트의 이 질문에, 이미 당시 시역의 바닥에 잠겨 있던 제3계의 관찰자를 보았던 것. 즉 누가 이 질문을 설정하고 있는가? 제3계의 관찰자가 이 질문을 설정하고 있다고.
-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의 설정에서 우선, 경험적 경험과 경험 소재의 오성적 개념적 처리의 사실적 출현은 의문시되지 않음. 그래서 이 사실적 출현은, 다른 관찰자들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고, 다른 관찰자들과 타협하고, 그러한 관찰자로 돌아 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또 하나의 관찰자가 그 위에 있어야만 함.  
- 그래서 ‘이것’이라는 수준에서 ‘어떻게’라는 수준의 이행, 그리고 이 이행과 결합된 양상론화는, 관찰들을 관찰한다는 거리를 전제. 그래서 제3계의 관찰에서 실제 자신의 인식활동과 타인의 인식활동을 묶는 통일체가 획득. 제2계의 관찰자는,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을 관찰. 제3계의 관찰자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 그래서 그것은 관찰들의 관찰에 기반한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묻는 것.
- 1984년 『사회시스템』에서 아직, 관찰이론은 이론으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2계와 제3계의 관찰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음.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책 제8장의 “사회시스템의 형성”이후 다뤘던 제4부 “사회시스템”에서는, 실질적으로 이미 제2계의 관찰이 적용될 뿐만 아니라, 제3계의 관찰도 그렇게 말해진 것이 아니라 실천된 것을 알 수 있음. 그래서 사회질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루만의 회답 방식에서는, 자아와 타아의 사회적 차이외에 시간문제에 결정적 역할이 부여. 그것은 루만의 사고에는, 인식연구에서도 마찬가지.
- 사실 제3계 수준에 선 인식연구의 경우, 시간차이와 사회적차이, 시간사용과 사회적 거리를 단지 인식 대상으로 다루는 것에 머물 수 없고, 그것을 이미 인식 가능성의 조건 속에 맞춰야만 함. 그래서 루만에게는, 시간에 대해 말하자면, 칸트는 ‘관념론의 논박’에서 시간이라는 논거에 호소했고, 이러한 통찰. 그러나 이 통찰에서 출발해, 엄격하게 조작적 인식 논리에는 아직 도달하지는 않음. 다른 한편 사회성(Sozialität)에 대해, 칸트에게는 답은 보이지 않음. 사회성은 의식이 올바르게 기능한다면, 그 의식이 다른 모두의 의식에서의 기준이라는 가정에 의해 밀어내 짐. 이 가정은 그러나 존재론과 그 논리적 일가의 실재라는 토대 위에서 밖에 타당하지 않은 가정.
- 루만은 이와 같은 인식연구에서도, 조작적 자기언급적 시스템 이론과 폰 푀르스터의 제2계 사이버네틱스를 더 정비한 관찰 이론에서 출발하고, 칸트적 반성의 사정과 그 한계를 또 이 이론에서 판정. 이 관찰 이론에서 본다면, 관찰들에 차이화를 시행하기에 필요한 일련의 복합적 구별들이, 칸트에서는 경험적/초월론적이라는 대립으로 축감. 인식한다는 것의 시간화와 사회화의 구명은 인식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통일이 역시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 있는 것은 조작적 차이와 구별 뿐이라는 점까지는 밀고 나아가지 않음. 때문에 칸트가 설정한 노선은 『프롤레고메나』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장래의 형이상학’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루만 칸트론의 결론. (1990, S. 500)
- 조작에 기초를 둔 오토포이에틱한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을 채용하는 루만의 인식 연구에서, 철학적 인식론과는 꽤나 이질적. 그는 칸트로 종결된 상승 철학자들의 시도에 대해, “문제설정의 형식에 의해 조건 지워졌던 일정의 공동성들”에 주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함.  
“문제가 되었던 것은 늘, 순환적 자기언급의 차단을 근거지우려는 여러 시도였고, 그래서 토톨로지에서 도피였다. 의식에서 이미 시간 문제가 발견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표상들의 계기라는 형식(로크)에 불과하였고, 후성적으로 진행하는 복합성의 구축은 아니었다. 문제의 자리는 늘 어떤 단독 인간의 의식이고,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현실 존재는, 대상들의 현실존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문제화된다는 귀결을 가져왔다. 이 경우에 샛길로 남겨진 것은 ‘인간 그 자체’, ‘이성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라는 유형의 초단수형 뿐이었다. 참으로 여기서 지식 특수적인 여러 패러독시에 관계하는 반성이론이, 그래서 근대사회의 하나의 기능영역 [즉 과학-나카오카]에 있어서의 반성이론이 얽혀 있지만, 그러나 경제, 법, 정치, 교육이라는 평행적 경우와 달리, 이 사회성(Gesellschaftlichkkeit)이 문제설정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형태로 주어진 거리라는 형식이, 이것을 불가능하게 해버리는 것이다.” (1990, S. 500)
- 그래서 철학의 이러한 사회성과 사회성의 결락 문제를 구체적 분석을 통해 제기했던 것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였다. 철학은 간신히 20세기에 들어, 사회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을 사고하는 것에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도 의식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것. 각각의 의식 시스템은 역시 단지 공동으로, 그래서 서로 체크하고 보완하기 때문에 실재를 관찰하는 것만은 아님. 각 의식시스템은 서로 관찰하고, 그것도 각기 다른 의식시스템에는 접근 불가능한 관점을 가지고 관찰. 그렇다면, 인식이론을 기초 짓는 것에서, 전통에 따라 의식의 자기분석을 통한 것은 분명하게 충분하지 않은 것. 타개책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 신칸트파는 문화 어프리오리(짐멜), 가치 어프리오리(젤러), 어프리오리로서의 종교(루돌프 오토), 나아가 사회적 어프리오리(막스 아들러) 등, 어프리오리를 탐구. 그러나 사회적인 것을 여기서 어프리오리로 추가하는 것은 명확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님. 다른 방향에서, 문제 해결 가능성을 예고하기 위해 ‘간주관성’이라는 단어를 도입했지만, 이 타개책도 루만의 견해에 의하면 해결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
- 다른 타개책은 독아론 문제를 상대주의 문제와 교환. 일찍부터 독아론은 불가피하고 동시에 참기 어려운 것이지만, 20세기에는 상대주의가 불가피하고 동시에 참기 어려운 것. 사회학에서 상대주의의 대표자는 만하임. 그 밖에 역사주의가 주창. 사람은 역사적-사회적 조건들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인식을 할 수 있고, 인식활동의 인식에서도 마찬가지. 그에 대해 역시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 그러나 루만의 견해에는, 여기서 상대주의나 역사주의와 같은 개념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런 것에는 반대 개념이 결여하고, 혹은 분실되었기 때문. 그래서 그러한 틀에서 사람은 역시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
- 이상 약간 간략한 요약이지만, 루만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인식연구는 정체하고, 그런 중에 고전적 텍스트 연구나 인식이론의 비교연구가 지배적. 루만은 이러한 반성상태에 딱 맞는 것이, ‘패러다임’ 개념이라 말함. (1990, S. 503) 왜냐하면 패러다임 개념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고, 어떻게 해도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자기언급의 절단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 스펜서-브라운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은 ‘제1구별(the first distinction)을 통해 출발하기 때문에 이 구별이 최후까지 반성 되지 않는 채로 방치.
- 그래서 20세기 후반의 여러 과학이론, 즉 예를 들어 포퍼에서 쿤까지의 과학이론, 또한 상호작용주의(내지는 에스노멘톨로지) 연구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적 과학연구는 말하자면, 음으로 양으로 문제/문제해결이라는 도식을 채용하고, 과학 실천에 따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 과학 그 자체에 불가피한 패러독스라는 문제, 인식론의 전통에 있어 불가피한 반성이론, ‘가능성의 조건’을 시야 밖에 두었던 것.
- 그래서 루만이 인식연구에서 과학이론 이상으로 주목한 것은, 근년,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으로 확립된 연구들. 그 원천은 다양. 물리학이나 인지생물학과 나란히,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연구가 일정 역할을 하고, 뇌생리학이나 인지심리학과 함께, 다수 주체가 서로를 관찰할 때에 논리적 문제의 연구가 일정 역할.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러한 연구자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양자역학의 관측문제(관찰문제)와 괴델의 논리학의 불완정성 증명에서 출발한다는 사실.
- 양자역학은 루만의 해석에 따르면, 물질의 비결정성 테제와 모든 일상적 확실성이 확률주의적 확실함을 가지지 않는다는 테제로 받아들여져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물리학자들은 비결정성 혹은 규정 불가능성에 있어 물질 성질이 지시되는가를 논의하는 것은 드물고, 또한 그것에 만족. 예를 들면, 부정성(또는 비결정성)이나 확률성은 관찰자의 상태로서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자역학은 관찰 이론으로 해석돼야만 함. 그래서 실제, 그 방정식은 관찰들에 기반해 다른 관찰들을 예측하는 것 만이 가능. 그 물리학적 법칙들의 내용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 그것은 관찰자를 물리학적 표상으로 기술. 기술 가능성의 한계는 물리학적 법칙 자체의 구성부분. 그것을 조사하는 데 보족적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음.
- 괴델의 논리학적 발견들, 내지 그 후의 계산복합성에 관한 연구는, 위에 조응 하고, 관찰자에 있어서는 외부에서 밖에 제거할 수 없는 비결정성이 있다는 것, 이 제거에 충분하게 복합적인 기계를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 논리적 이유와 유한한 계산능력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 복합적인 시스템은, 그것이 무모순임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 루만은 이를 일반화해 ‘무모순’이라는 술어는 시스템의 자기기술로서 사용할 수 없다 말함.
- 루만은 양자역학의 성과, 괴델의 증명, 거기서 출발하는 인지과학적 연구에서 인식이론에 관한 귀결을 이끌려 하는 것. 그것은 사회질서 형성의 해명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시간과 재귀성을 고려에 넣은 것이고, 진화론적 성격을 가진 것. 그렇지만 철학자 사이에 진화론적 인식론은 순환적 기초 부여를 사용한다는 부정적 의견. 또한 구성주의 대 실재론이라는 논쟁이 부활. 루만은 그러한 논의에는, 늘 언제나 인식론의 자기근거 짓기 요구에 의해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음. 그래서 괴델 이후 아직도 이러한 논의가 유효한가라 반문하고, 인식연구가 바로 직면하는 토톨로지/패러독시 문제에 다른 해결을 구하려 했던 것. 이하 루만 인식론을 골자를 보고, 논문 「구성주의의 인식 프로그램과 미지로 머무르는 실재」(1990h, S. 31-58)에서 날실을 구하고, 다른 저작들을 씨실로서 참조.
(2) 조작적 닫힘으로서의 인식
- 루만은 구성주의 인식론 추구에서 “인식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질문을 이어받음. 그러나 루만은 인식한다는 문제의 점검에서, 이 물음이 아니라, 이 문제는 어떠한 구별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나 라는 물음을 가지고 시작. 어떻게 해서 인식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는 구별의 도입에 의해서라고 답���는 것이 가능함. 그러나 이 물음은 잘못해 너무 빠른 답으로 이끌린다는 이유에서, 루만은 그것을 회피. 그렇다면 인식한다는 문제는 어떠한 구별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일까? “구별한다는 것을 구별한다”라는 구별.
왜냐하면 “사람이 인식한다는 것을 인식하려는 경우에 이미, 인식한다는 것을 물론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대한 질문은 그것에 있어, 구별하는 것의 구별로의 질문, 그래서 분명하게 자기함의적 문제설정으로 변환된다. (근거 부여를 한다, 그래서 비대칭적으로 생각되는) 관련으로부터 통일로의 이행은, 조작적으로 이용된 차이로의 물음에 대한 사고를 바꾸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은 그것에 있어 순환과 패러독스는 역시 물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는 아니게 관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1990h, S. 34)
- 루만의 이해에 의하면, 인식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초월론적/경험적이라는 구별에서는, 자기언급적 순환의 회피라는 역할이 부여. 분석철학에서 이 구별은 분석적/종합적이라는 구별로 치환되었지만, 콰인 이후 이 구별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이해.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식한다고 하는 것의 자기 근거 부여의 순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왜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인식은 인식이 인식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 루만은 그것이 가능한 근거를 시스템/환경이라는 구별과 이 구별 문맥에서 조탁된 시스템이론이 제공한다는 견해. 시스템이론의 연구들과 시스템이론에 의한 인식획득은 잠재적으로 인식론에도 관계하고 있고, 인식론적으로도 중요. 루만의 인식론은 이제까지 보았던 루만의 모든 시스템이론적 연구의 복습 양상. 루만은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연구는 반드시 초월론적인 상으로 수행되어질 필요는 없다 라는 입장. 오늘날 실제,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연구들은 언제나 다른 연구들, 예를 들면 신경생리학적 혹은 과학사적 연구의 부차적인 결과로서 생겨남.
- 우선 폰 푀르스터가 지적하지만, 뇌는 외적 세계를 질적으로 전혀 접촉하지 않고, 양적으로는 조금 밖에 접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이전부터 알려짐. 그 후, 근년의 신경생리학과 뇌연구에서 분명하게 되었지만, 신경시스템이 관찰하는 것은, 자신의 생체 상태 변화 뿐이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관찰하지 않음.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모든 작용들은, 순수하게 양적으로 코드화되고, 그 양은 순수하게 내부적 처리과정에 비한다면, 조금 밖에 역할을 하지 않음. 그 외에, 도래하는 자극은 그것들이 예외적으로 약간 길게 유지되는 내부기억(단기기억)에 변화되는 경우를 제하면, 바로 사라짐. 그래서 시간도 또한, 복합적 작업과정내의 내부경제에 관여. 뇌의 작업양식에서 결정적인 것은, 닫힘(폰 푀르스터)이고, 외부정보(내지 외부 데이터)인 것을 선별을 수행한 채 내부로 통하는 것은 아님. 이러한 종류의 관점들은, 인식이론적으로는 이용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시스템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인식활동에 있는 ‘조작적 닫힘’이라는 기본전제가, 이제 새롭게 놀라움을 만들었던 것에 불과.
- 이러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루만의 인식론 테제는, 그래서 닫힌 시스템만이 인식하는 것이 가능. 지식사회학나 과학연구도 이 사이에 유사한 표상들을 얻음.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거부해서 ‘구축주의(constructionism)’를 선택해야 한다는 논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 “constructivism에 의거하는 한, 인간의 「기관 움직임」을 첫째로 생각하는 constructionism이 불식하려 했던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온존하고 있다. 또한 언어에 의해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가 라는 과정�� 쫓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사회적, 문화적 본질주의를 채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루만은 다음과 같은 입장. 예를 들면 자연적 세계는 과학적 지식의 구성에서는 작은 역할밖에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이 뇌연구에서 이어받아 읽고, 그래서 뇌연구에 대한 양자선택으로서 읽는 것은 아닐 때, 우리들은 많은 논쟁들을 절약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뇌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인가, 아니면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인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는 동안에 뇌가 그렇다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언어는, 그래서 또한 이 역의 것을, 라는 것의 확인이 중요한 것이다.”(1990h, s. 37, Anm. 16) 그럼에도, 인식하는 것은 환경에 대해 사물에 조응하는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그럴 수 있음. 그러나 그 사람도 조작적 닫힘이라는 사태를 앞에 둘 때, 이론을 전개하는 데서는 패러독시, 즉 인식하지 않는 시스템만이 인식하는 것이 가능. 혹은 사람은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만, 보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패러독시로부터 출발해야만 함.  
- 철학적 인식론은 이러한 과학적 연구들과 유효한 접촉관계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 여기서 시스템이론, 그 중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이 매개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루만의 견해.
- 그래서 차이이론적 시스템이론에 의한 이 매개와 조정의 효과는 시스템과 환경 관계라는 문맥에서 나오듯, 실재의 탈존재론화. 그러나 실재가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그렇지 않다면,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무언가 또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무언가도, 사람이 구별을 통해 다루는 것이 가능한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기 때문. 이론이 주창되는 것은 단지 실재의 존재론적 서술의 인식론적 관련성. 인식하는 시스템이 외적 세계로의 접근을 조금도 획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외적세계의 존재를 다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보다 많은 수긍성을 가지고서, 외적세계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할 것. 양쪽의 배리언트는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 양자 사이에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 그러나 여기서 외적세계가 의심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이 외적세계를 다루는데 사용하는 존재/비존재라는 명백한 구별만을 의심. 그래서 그 때 귀결은 왜 참으로 이 구별을 통해 시작되야 하는가, 왜 이 세계는 참으로 이 구별을 통해 깨져야 하느냐는 질문.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이 구별에 대해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을 제안.
- 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 “인식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선 환경과의 연결을 떼어내는 시스템의 조작으로 라는 것. 그래서 여기에 덧붙여 늘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을 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 당장의 답에서 자기언급과 재귀성의 가정이 추가. 이 종류의 조작은 그 조작을 선취해 소급하고, 같은 시스템의 조작 네트워크의 문맥 속에서만 가능. 그래서 어떤 조작도 이 재귀적 네트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성립하지 않음. 동시에 그러나 네트워크 그 자체는 조작이 아님. 전체는 전체 속에서 다시 한번 활동적이 되는 것은 불가능. 어떤 조작도 여기서는 시스템 통일을, 그래서 그것을 통해 시스템 전체를 재생산. 어떤 조작도 닫힘과 가둠을 재생산. 그러나 조작 내지는 아무것도 진행하지 않고, 그래서 인식한다고 하는 것도 또한 진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조작도 다른 조작들 속에 하나로 있다는 이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함. 왜냐하면 어떤 조작도 다른 방식으로는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참으로 조작으로는 있을 수 없기 때문.
- 그 때문에 시스템은 관찰자가 본다면 패러독스이고, 다수로서만 하나인 통일. 그렇지만 시스템의 자기관찰에서도, 다른 것이 해당될 이유는 없음. 그러니까 시스템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무엇이 가능하게 하는가를 인식하려면, 그 시스템은 패러독시에 부딪히게 되는 것. 그래서 루만의 생각에서는, 모든 인식론은 이 패러독시의 해소를 통해 시작돼야만 함.
-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에서 또 하나의 귀결은 어떤 시스템도 자신의 경계 외부에서 조작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시스템이 새롭게 조작을 접속할 때마다 시스템은 자신의 경계를 각각에 따라 상정. 이로부터 시스템은 자기자신을 그 환경과 결합하기 때문에 자신의 조작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과. 경계는 불연속성을 보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지지 않음. 사람이 무엇을 인식으로 관찰한다면, 혹은 무엇을 인식으로 지시하려면, 거기서 하나의 조작이 생각되야 한다면, 강제적으로 다음이 중요. 즉 환경과의 관련에서 접촉능력이 없고, 그래서 이 의미에서 맹목적 조작이 문제가 되야 한다는.
- 그렇다 하더라도 인식론에 의해 원칙적인 문제가 남아 있음. 즉 여기서 분명하게 되는 것이 전체로 인식으로서 지시하는 것은 가능하고, 더해서 적절한가라는 문제.
- 이 문제의 답에서 루만이 사용한 것은, 다시 순환을 끌어들인다는 조작과 관찰의 구별. 조작은 하는 것을 함. 조작은 생겨날 때 생겨나는 것. 그래서 조작의 조작으로의 접속 속행의 성공이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를 성취. 이에 대해 관찰은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구별을 가지는 조작. 그래서 조작과 관찰의 구별은, 자신에 있어 관찰의 계기로서 다시 나타남. 관찰은 한 편으로 그 자체 하나의 조작이고, 다른 한 편으로 조작과 관찰의 구별과 같은 구별의 처리. 그래서 여기서 접속하는 논리는, 순환의 전개로만 구축되고, 이 전개는 구별이 그 구별에 의해 구별되어지는 것의 한 쪽으로 재진입에 의해 수행되는 것. 그렇게 해서 조작과 관찰 관계의 토톨로지와 패러독시가 전개되고 해소되는 것. 그래서 단순한 조작에서 이러한 구별된 관찰이라는 조작이, 시스템에서 다시 사용가능한 결과들을 수반할 때,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인식에 이어짐. 관찰이 용장성을 이용하고, 그래서 또한 용장성을 만들어 내는 한, 그러한 관찰은 인식하는 것.
- 그래서 이러한 관찰 개념을 도입한 루만의 구성주의로의 걸음은, 시스템 순환에는 구별과 지시에서의 상관항, 그래서 이 의미에서의 관찰에 의한 상관항이 없다는 통찰을 가지고 나아감. 환경은 구별도 논리적 수식도 부정도 포함하지 않고, 환경은 그것이 있는 것처럼 단순하게 있다고 하는 것. 그래서 환경(바꿔 말하자면 외부세계)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의심은 없지만, 그러나 환경에 정보가 미리 주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님. 보통 정보라 불리는 것은 언제나 구별을 갖지 않은 환경에 구별을 삽입해 지시하는 시스템의 관찰 조작에 의해 획득되는 성과. 그런 의미에서 정보는 순수하게 시스템 내부적 구성물, 관찰자에 의한 구성물. 관찰하는 것, 그래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구별에 기술되지 않은 외적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에 그 상위성만을 덧붙임.
- 관찰이 이렇다면, 인식하는 것도 당연 시스템 속의 외적세계를 카피하는 것이 아니고, 모사하는 것도 아니고, 대리-재현(repräsentieren)하는 것도 아님. “인식하는 것은 환경에 대해 닫힌(그러나 참으로 환경 속에 ‘잠겨 있는’) 시스템의 분화, 자립화라는 기초 위에서 수행되어진 결합적 이득들의 실현이다. 시스템은 구별 사용의 도움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강해지고, 그것 이외에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 때 이것은 또한 시스템에 있어 세계이고, 그래서 그것에 있어 실재인 것 모두는 구별을 경유해 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1990h, S. 41)
- 그래서 구성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에, 관찰개념을 추가한 루만의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은, 다음과 같이 답하는 것이 가능. 즉 시스템의 자기기여가 관찰, 인지, 인식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환경에 이 자기기여에 조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 이 자기기여와는 구별하는 것.
- 그 때 각각의 관찰이 그 구별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의 관찰 맹점은, 그 관찰의 세계보증. 예를 들면 사회적 실재는, 다수의 관찰자들이 관찰을 하는데, 그들의 상위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일치해 수여되는 것으로서 관찰되어진 경우. 그래서 어떤 관찰자가 다수의 관찰자를 (자기자신을 포함하거나 아니거나)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에만, 사회적 실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 그래서 세계라는 것은 어떤 시스템에서도, 시스템과 환경(자기언급과 외부언급)의 구별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들의 차이의 통일로 받아들여져야만 함.
- 같은 것을 역방향으로 말한다면, 세계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그것 자신의 부정을 포함하고, 세계는 세계에 있어서만 부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없는 개념. 그렇기 때문에 의미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그것들에 의해 지시되고 있는 것을 그 반대개념으로부터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 실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1998e, S. 42f.) 실재는 인식과 대상의 차이의 통일이고, 실재의 부정은 실재적 조작으로 밖에 수행되지 않고, 실재를 반대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 그래서 실재도 또한, 차이가 없는 개념. 의미, 세계, 실재는 이러한 무차이성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서 지시되는 것은, 각각의 기초에 있는 매우 특수한 구별에서만 정의되는 것이 가능. 그래서 여기서 매우 특수한 출발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지적한 시스템의 조작적인 닫힘과 환경 속에서의 잠김이라는 조건의 탓. 인식은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 참으로 이러한 조건 때문에 행해지는 점에서, 인식은 특히 있는 그대로가 아닌 조작양식이라는 것을 새롭게 입증.
- 그래서 현재성/가능성(의미), 시스템/환경(세계), 인식/대상(실재)라는 구별은, 각각의 구별의 한 편에만 재-진입 가능한 구별. 그래서 세계는 시스템 속에서만 유효한 정위 개념이고,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가 시스템에 재-진입. 마찬가지로 인식과 대상의 차이는 인식에 내재적 구별이고, 그것에 조응해 실재는 양측을 덮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정은, 인식자체의 수행 속에 기초를 둠. 그래서 이렇게 있는 다른 것의 통일이라는 패러독시는, 재-진입에 의해 불가시화되고 해소가 수행. 그렇지만 그러한 패러독스를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은 관찰자 뿐. 그렇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인식이론은 루만의 생각에 의하면, 패러독스로부터 도피해서는 안됨. 또한 루만이 목표로 한 인식론은 시간의 문제와 사회성을 고려에 두는 것이 돼야만 함.  
(a) 시간 차원의 문제
- 사회시스템 구조의 경우 시간과 관계하는 사건/구조-이론에 대해 다루었음. 인지적 시스템에도, 사건/구조-이론이 적합. 인지적 시스템은 생성과 함께 다시 그 곁에서 사라지고 사건이라는 기초 위에서 조작. 게다가 여기서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의해 교체돼야만 함. 그 때문에 인지적 시스템의 구조는 있는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이행을 규제해야만 함. 그래서 이 것에도 환경에는 등가물이 없음. 환경은 시스템과 같은 템포와 리듬으로 변화하지 않음.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는 인지에 기초하는 것으로만 이야기. 또한 환경에서는 있는 것에 있어서 다른 것을 용이하게 일으키는 오토포이에틱한 구조가 아님. 그렇다면 시스템과 환경의 시간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루만은 이미 구조적 커플링(제10장 제3절)에서 나오는 동시성(Gleichzeitigkeit)에 의해 답하려 함.
- 시스템의 실재 기초는 조작과 그 조작을 담당하는 실재 조건들의 동시성. 시스템이 비편재적 과거나 비현재적 미래에 무엇을 더한다면, 시스템 각기 현재적 현재에 있는 환경의 동시성은, 배제 불가능한 조건으로 유지. 그래서 동시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동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스템의 인과적 포치 속에 받아들여지��나, 시스템에서 역시 동기화될 이유는 없는 것. 그러나 동시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그 때문에 바로, 참으로 시간구별이 더해지기 위한 조건. 시스템은 시간으로의 관계에서 자기자신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 위치 짓는 것이 가능. 혹은 또한, 지속 내지 영원과의 관계에 있는 시간으로 자기자신을 위치 짓는 것이 가능. 그래서 그로부터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고, 시간은 시스템과의 관련에서 구성. 시스템에 의해 처리 불가능하게 유지되는 것은 시스템의 어떤 조작에서도 그 순간마다 재수립되는 동시성.
- 매번 눈 앞의 지금에서 현재적인 시간투영은, 시스템과 환경의 이 동시성으로 생겨남. 그 때 주어진다 상정되는 어떠한 것의 반응이 문제가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고도로 발달한 인식을 하는 시스템에서는 그 외에 예측을 하는 것도 가능. 물론 그것은, 시스템은 미래의 현재를 지금 이미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님. 시스템은 이 불가능성을 구성을 통해 다리를 건넌다는 것이 가능한 것. 시스템은, 외적 세계에서는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지나버린 것과 장래 올 것과의 차이를 사용해, 자기자신의 정보처리를 조직화하는 것. 루만은 예측을, 기억으로 컨트롤 받는 상상력의 산물, 자기자신의 과잉된 가능성들을 자기자신으로 구성한 ‘적합적이다’는 기준에 따라 선발하는 것의 산물로 다루려고 했던 것. 이렇게 본다면, 예측을 수행하는 시스템은 스스로 만들었던 리스크에 직면한 것으로, 그로부터 이익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
- 인지적 시스템은 이러한 동시성이라는 제약으로 수행. 그 때문에 인지적 시스템에서는, 동태적 안정성에 불과한 것이고, 안정성에 도달하기 위해, 오토포이에틱하게 재생산되어야 하는 순간적 현실 존재밖에 존재하지 않음. 그에 조응 해 인지시스템에서는, 세계는 과거와 미래를 지니고 있는 세계로서, 바꿔 말해 비현재성이라는 양태에 불과한 형태로 지속으로서 주어지는 것. 또한 그에 조응해서 인지 시스템은 그 역사를 기결의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 가능한 것. 다른 한 편, 미래는 실제로는 가능성들이 있는 것은 아니라, 모두는 그것이 있는 것처럼 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위협과 유혹을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됨. 인지적 시스템은 이에 의해 동시에, 비현재적인 것을 일절 불변으로 다뤄지는 것처럼 되고, 그에 의해 인식은, 외부세계의 변화들을 용어적으로는 일정 불변의 것에 의해서 대리표현(repräsentieren)할 가능성을 획득. 인지적 시스템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예를 들면 운동을 지시하는데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을 자신의 변화에 의해 모의할 필요는 없음. (1988e, S. 34f.) 그래서 인지적 시스템은 또한 기재, 즉 현재적 접근에서 밖에 이용할 수 없다고 기술물을 사용. 타인의 관찰을 관찰하는 것에서 수행되는 일종의 대리학습도 또한 같은 것에 의존.
- 루만은 세계를 세 가지 차원, 즉 사물적, 시간적, 사회적 차원으로 전개. 이것도 구성이지만, 이 전개도 또한 어떠한 현재화에서도 동시적으로 주어져 있는 세계의 동시성이라는 것에 계류.
(b) 사물적 차원의 문제
- 인식의 사물적 차원에 대해서, 한 측면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 루만은 필립 하이더의 지각 미디어론을 칼 바이크들의 ‘느슨한 커플링’론과 결합해 ‘미디어와 형식’이라는 구별론을 제안. 그 때 하이더의 지각론은 공기(청각)와 빛(시각)이라는 미디어를 다루었던 것. 이 지각론에서 떨어져 있는 것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 조건과 그 때 미디어가 문제로 되었다는 것이 가능. 여기서 인식의 사물적 차원의 한 측면은 이 문제에 관계.
- 하이더에 의하면 사물이 보이기 위해서는 빛이라는 미디어가 필요하고, 소리가 들리기 위해서는 공기라는 미디어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빛 그 자체를 보려 한다면 사물은 보이지 않고, 공기 그 자체의 소리를 분명하게 하면 사람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음. 그래서 지각이 가능하게 되는 데 외적 세계는 하나의 상대적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돼야만 함. 이것은 루만에 의하면, 외적 세계에는 느슨한 연결과 강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학적 기체, 즉 미디어적 기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시스템은 이 차이를 사용하여 이 차이의 한 쪽, 즉 형식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 그래서 하이더의 지각론을 루만은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 느슨한 연결과 강한 연결의 차이, 미디어와 형식의 차이가 지각 가능성의 조건. 그러나 지각에서는 이 차이 그 자체는 지각 가능하지 않음. 여기서 나아가 제2계 관찰 이론을 적용하면, 지각이 이렇다는 것은, 지각을 수행하는 관찰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고, 지각 이론은 제2계의 관찰에서 가능.
- 루만은 나아가 미디어/형식-차이의 다단계적 구조에 주목하여, 이 차이의 인식론에 의해서의 일반적인 의의를 시사. 다단계적 구조 분석에 따른다면, 어떤 수준의 형식은 다음 수준에서 미디어로 사용가능. 예를 들면 음성이라는 형식은 음을 미디어로 하지만, 여기서 형식인 음성은 문장 형성이라는 다음 수준에서는 말에서 미디어로 사용, 나아가 여기서 문장이라는 형식은 다음 이론형성이라는 수준에서는 다시 그 미디어로 사용. 반대로 어떤 수준의 미디어 그 자체를 인식으로 한다면, 역시 그 미디어를 형식으로 하는 다음 수준의 미디어가 전제돼야만 하고, 나아가 이 후자의 미디어 자체의 인식에서도 같은 것이 반복. 일반화해 말하면, 인식을 하는 시스템이 인식을 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물리학적이고, 다른 어떤 종류인 느슨한 커플링과 굳은 커플링이라는 차이가 필요하다는 것.
- 미디어/형식론은 전통의 질료/형상(형식)론과 유사. 그러나 질료/형식의 질료는 최종적으로는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됨. 이에 대해 미디어/형식의 미디어는 각각 느슨한 혹은 굳게 연결된 미디어적 기체를 그 때마다 전제해야만 하고, 인식은 느슨한 연결과 굳은 연결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 한에서 가능하다는 것.
(c) 자기 테스트로서의 재귀성과 구성물
- 존재와 사고의 합리성 연속체는, 존재와 사고 일치의 이상을 전제. 루만의 구성주의에서는 이 합리성 연속체가 해소되는 것만이 아님. 합리성 연속체의 보충을 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초월론적 입장도 방기. 나아가 인식의 가능성 조건을 어프리오리하게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 것 같은 주관적 의식능력이라는 가정도 방기. 그러나 그러한 취급 방식을 외부에서 자극(혹은 동요)과 안에서 자기결정이라는 구별에 의해 치환하는 것으로는 불충분. 이 구별은 안/밖-차이에 있는 한가지 다른 정식화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 그렇다면, 폰 푀르스터와 마투러너를 이은 루만의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이론에서 본다면 남겨진 것은, 그래서 위의 가정을 대신해야 하는 것은 관찰조작과 인식의 재귀성.
- 재귀성은 조작 결과에 다시 같은 조작을 적용하는 것, 그래서 재귀성은 자신의 조작 결과를 다음 조작의 기초로 사용하고, 조작에 의해 끌어들여지도록 기획되는 것을 이전 조작에서 나오는 것에 의해 공동결정해 가는 과정. 그래서 재귀적 함수는 경우에 따라 ‘고유치’에 연결. 루만은 폰 푀르스터의 재귀성론에 마투러너의 오토포이에시스론과 훗설의 의미지시론과 포개, 거기서 의미시스템(사회시스템과 심적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론을 이끌어 내는 것.
- 재귀성의 실행은, 의미시스템에서는 어떻게 해도 수미일관성 테스트의 계속적 수행을 필요. 그래서 지각과 기억의 작용 연구에서 이미 보인 것처럼, 이 테스트에서는 이미 신경생리학적 수준에서, 이항적 도식화가 필요. 이 도식화가 수용과 거부의 가능성을 용의하는 것. 시스템 자신의 조작에서 산출되는 시스템상태는 그 때 거기에 이어진 조작의 적합성과 부적합성의 기준으로 역할. 그 때 환경에서 시스템으로 작용을 전하는 자극이 동시에 작용.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자극되어져 있는 자기의 부정지성에 의해서이고, 조작을 하는 시스템이, 한층 더 조작의 접속과의 관련에서 수용과 거부를 가능하게 하는 이항적 코드를 사용해 수행되어진다는 계기적 자기테스트. 이미 뇌는 그렇게 기능하고 있고, 심적시스템에서도 사회시스템에서도 같은 것이 해당. 참/비참이라는 도식의 코드화는, 비상하게 발달한 특수한 상황에 이용되는 이항적 코드화의 하나. 여기서 참만이 접속능력을 가짐.
- 이항적으로 도식화된 재귀성은, 폰 푀르스터의 용어로는, 시스템의 그 때마다의 상태에 기인하는 조작의 계속적 ‘계산’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 이것을 관찰에 관련해 말하면, 이 구조는 관찰의 계속적 관찰을 가능하게 함. 이것은 우선, 조작 결과가 유효한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같은 조작을 반복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이것은 의미단위들의 ‘농축’에 연결되고, 그렇다면 의미단위들의 확인은 단 하나의 조작으로는 역시 포착할 수 없음. 그러나 그러한 복제 속에서 또한 많건 적건 괴리도 끼어들게 됨. 사람은 같은 것을 다른 시점, 다른 상황에서, 다른 관점으로 관찰하고, 그래서 ‘재확인’. 이것은 농축된 의미의 한층 더 강화로 연결되고, 최종적으로는 다양한 관찰에서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의한 지시의 추상으로 이어짐. 그것을 루만은 ‘구성물(konstrukt)’(1990, S. 515)이라 부름.
- 아까 “시스템의 그 매번의 상태에 기초를 둔 조작의 계속적인 ‘계산’”이라 말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과정. 구성물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오토포이에시스의 구조적 결과. 세계의 의미적 구성(구축)은 이렇게 성립하고, 거기서 어떠한 하나의 조작에서도 자유처리 가능하지 않은 것 같은 힘을 획득. 수학에 있는 재귀적 함수 개념을 사용하여, 사람은 여기서도 ‘고유상태’에 대해 또한 말하는 것이 가능. 여기서도 환경과의 일치라는 방호는 어떻게 전제되는 데도 없이 이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 만을 전제.
(d) 잠재의 관찰
- 의미개념을 도입해서 폰 푀르스터의 재귀성론을 더욱 발전시켰던 이 재귀성론은, 지식의 통상적 진화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 루만은 여기서 모든 관찰의 구별 의존성이라는 테제를 적용. 그렇다면, 재귀적 관찰을 가지는 강화된 가능성들이 시야에 들어옴. 통상의 이해는 관찰의 관찰이란, 주체가 객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선에 따라, 어떤 관찰자가 ‘무엇’을 관찰하고 있는가라는 것에 향함. 이에 대해 구성주의는 관찰대상인 관찰자가 ‘어떻게’ 관찰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의 관찰을 고찰. (1990h, S. 14~30) 구성주의적 전환은, 재귀적 관찰의 고찰에서 질적 변화를 수반. 왜냐하면 사람은 이렇게 해서 관찰대상의 관찰자가 무엇을/어떻게 관찰할 수 없는 것인가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그 때 관심은 관찰자의 맹점, 즉 관찰자가 사용하는 구별로 향함. 사람은 대상인 관찰자가 관찰에 사용하는 구별을 관찰하는 것이고, 바꿔 말해 이 구별을 구별하는 것. 대상인 관찰자 자신은 그 관찰수행에서 이 구별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이 관찰의 관찰(제2계의 관찰)에서, 제2계의 관찰자로서, 제1계의 관찰자(대상인 관찰자)에게는 무의식 내지 커뮤니케이션 불가능한 것을 관찰. 사회학의 용어로, 관찰은 이제야 피관찰자에게 잠재적 구조와 기능에 향함. 인식의 사회성이라는 측면에 주목.
- 루만의 역사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잠재관찰의 기술 자체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님. 그것은 어쩌면 최초 소설(예를 들면 근대소설의 효시의 하나인 리차드슨의 『파멜라』)에서 실천되고, 다음 반계몽에서, 나아가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실천. 즉 내 편이 무언가를 잘 안다는 태도로 실천되었고, 제1계의 관찰자 편에서는 그에 의해 소박한 것의 영역으로 배치되지만 혹은 모르고 무언가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는 누군가로서 다뤄 짐. 내 편이 잘 알고 있다는 태도는 무언가 감춰져 있다는 회의에 의해 양분을 얻고, 각인은 세계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을 위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 행위 하는지 알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정신분석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학은 이 회의 원칙을 일반화하여, 이 세계 속에서 추가 권능을 가진 것으로서 자기를 확립하는 것이 가능.
- 루만은 이러한 잠재 관찰이 초월론과 병행해 발전했다는 것에 주의. 즉 최초 18세기말, 다음 100년 후 신칸트파 최전성기에 더욱 집중적. 이는 초월론 철학이 무언가 보완해야 할 것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시사. 루만의 구성주의 인식론은 다시 100년후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왜냐하면 재귀적 관찰의 개념은 잠재 관찰을 포함하기 때문.
- 루만은 이 문제를 퇴임 강의 「’무엇이 실정인가’와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가’ – 두 가지 사회학과 사회의 이론」 (1993b; 이것을 일부 보완한 1993c)에서 다룸. (이 외에 1997, S. 1080~1082u. S. 1109~1128을 참조) 거기서 상세하게 다뤄지는 것처럼, 제2계 관찰의 개념, 재귀적 관찰 개념은 잠재 관찰을 충분히 가능하게 하는 것만이 아님. 이 개념은 동시에 잠재 개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선입견에서 해방. 즉 현실에 있는 것 같은 세계, 과학의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세계는 잠재적 구조에서 어떤 잘못되게 주어져 있다는 것과 같은 선입견으로부터. 왜냐하면 모든 관찰은 지시에 구별을 사용하지만, 그 구별의 통일은 불가피하게 맹점이기 때문. 전통의 틀 속에서, 여기로부터 필연적 잠재를 추론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구조적 잠재는 아님. 잠재는 모든 관찰이라는 조작, 구별이라는 조작에 기초. 그래서 그것은 조작적 잠재. 바꿔 말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존재 피복성(被覆性)’(Seinsverborgenheit) (하이데거)이 아니고, 어떤 종류의 존재론적 비밀도 아님. 사람이 구별의 선택에서 선택이 가능한 혹은 또한 선택한 것이 가능하지 않은 잠재. (1993c, S. 257) 세계에서는 관찰 조작 이전, 구별 이전에도, 감춰져 있는 것은 또한 주어지지 않음.
- 제2계의 관찰 개념, 재귀적 관찰 개념은 특히 고전적 지식사회학에서 유포되는 가정, 즉 잠재적 구조, 기능, 관심은 모든 오류에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해도 인식 왜곡에 이어진다는 가정을, 방기 가능. 사람이 구별에서 사용하는 구별을 동시적으로 구별하는 것의 불가능성은, 인식의 근본 조건 그 자체. 구별의 선택이 잠재적 관심과 상관하고 있는가는 제2계의 관찰 수준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제.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라는 주장은, 그 때에는 이 주장을 제출하는 사람에 있어 다시 관찰. 그래서 루만의 이 주장도 완전히 마찬가지.
- 본래 중요한 물음은, 이상에 따르면, 관찰의 재귀성을 이 방향에서 확장하고, 다른 관찰자들이 관찰할 수 없는 것에 끊임없이 관찰을 집중하는 시스템은 어떠한 ‘고유상태’에 수렴하고 있는가 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잠재 관찰의 재귀로써 어떠한 종류의 실재, 어떠한 종류의 시스템의 자기상태가 산출되는가는, 또한 광범위하게 미지라는 것이 현상. 우리는 또한 급한 대로 쓸 수 있는 명찰밖에 가질 수 없음. 예를 들면 다문맥성(귄터), 다원주의, 내지는 ‘토의’의 생성과 소비의 포스트모던한 임의성 등이 이야기. 루만의 구성주의에서는 여기에 있는 것은 제1차적으로는 인식론적 문제이고, 어떤 인식도 그것이 기초에 두고 있는 구별에의 의존성이라는 것에 의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조적 한정이라는 문제.
- 구성주의적 인식연구는 이제까지 생물학, 신경생리학, 심리학에 의해 선도. 그 결과들이 사회학적 인식연구에 유효한 기초를 제공. 루만의 생각에는 “『자연화된 에피스테몰로지』라는 콰인의 프로그램은, 사회학의 분만큼 보충돼야만 한다. 이 프로그램은 그것에서 시작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본래적으로 수행한다. 우리가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사회라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산물이고, 이 시스템에 의식은 참으로 그 때마다 현재적으로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미소한 부분에 있어서 밖에 관여하지 않는다. 무엇이 의식되는 것으로 되는가를 아는 데에서 인물을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케이스이고, 전형적으로는 지각이 중요하게 되는 경우(예를 들면 법정에서의 증언)이다. 근대사회의 지식 스톡은 그 타당요구에 있어서도, 그 발전가능성의 평가에 있어서도 의식과정에 관여하는 것에 의해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이 스톡은 커뮤니케이션의 인물이고, 그래서 이 점에서 놀라운 것은 세계는 그것이 근대과학에 있어서 구성되었던 것처럼 있다는 것인 것 보다도, 이 구성의 조건들의 것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늘 계속해서 속행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이것은 의식(어떤 의식?)의 능력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아니라, 인쇄나 그 후 전자적인 데이터 처리가 연 중간 보관의 가능성으로부터 설명된다.” (1990h, S. 54) 일상 세계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차이를 고려에 넣는다면, 사회라는 수준을 불가피하게 선택해야만 함.  
(e) 패러독시 문제
- 패러독스는 거기 담겨 있는 부정 때문에 결정 불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관찰자를 경직상태에 빠뜨림. 전통적 인식론은 일관해 순환적 자기언급을 차단하려 시도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자기언급에 붙은 토톨로지와 패러독시를 회피하기 위한 것. 20세기 철학에서는, 형식적 시스템의 구축에서 패러독스를 금지하기 위해 계형이론이 제안되었지만, 오늘날에도 패러독시 배제를 근거 지으려는 다른 길이 모색. 이에 대해 루만은 인식하는 것에서 불가피하게 패러독시 금지는 불가능하고, 패러독시 배제를 근거 지으려는 길은 없다고 생각. 왜냐하면 형식적 시스템의 구축을 하고,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법칙』에서 보였던 것처럼, 이미 제1 착수에서 구별과 지시의 구별을 함의한 구별을 사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 거기서 루만은 폰 푀르스터나 랄프 레프글렌이 개척한 방향에 따라, 패러독스란 계산을 계산하는 기구에 있는 하나의 문제로 고찰. 패러독스를 직시해 논리(학)적으로 이론이 있을 수 없는 해결을 찾는 것은 어떻게 해도 예스와 노의 진동에 의한 마비에 빠질 수 밖에 없음. 그래서 루만은 직시에 대신해, 패러독스를 옆에서 보는 것, 즉 그것 자체가 패러독스인 경우인 관찰하는 것을 관찰하는 길을 선택. 그에 의해서 관찰하는 것에서는 패러독스가 어떻게 불가시화되는가를 관찰.
- 이와 관련해 루만은 패러독스 문제로의 접근을, 패러독스는 관찰자를 경직상태에 빠트리는 것에 연관하여, 그리이스 신화 고르곤 세 자매에 대한 페르세우스의 접근에 예로 들음. 고르곤의 직시를 피해야만 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사가 아니었던 메두사가 아님. 중요한 것은 스테노(독일어로는 쥬테노)와 에우리알레(독일어로는 오이류알레). 그래서 루만은 패러독스를 관찰하는 방법을 ‘쥬테노그라피’라 이름 붙임. (논문 「쥬테노그라피」(1988i)와 그것을 확대한 「쥬테노그라피와 오이류알레스틱」(1991e)을 참조) 다른 한 편 패러독스에서 탈출하는데 논리적 해결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거기가 아니라 패러독스의 구별을 다른 구별에서 불가시화하는 것에는 행운과 창조와 발명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그것을 뮤즈들에 비유. (논문 「고르곤과 뮤즈 - 구별의 탈구축에 대해서」(1995h)를 참조)
- 관찰을 관찰하는 루만의 쥬테노그래피에서는 관찰자들이 관찰에서 방해가 되는 패러독스를, 그래서 참으로 이항적 코드의 패러독시를, 어떻게 불가시화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 그래서 제2계의 관찰이라는 사고는 괴델의 결과들과 양립. (1990, S. 508) 왜냐하면 이 사고는 불완전성 문제를, 여기서 보는 것처럼 외부에서의 관찰에 의해 해결하려 하기 때문. 이에 대해 이 사고는 순환성 문제에 다음과 같이 답하는 것. 즉 이 사고는 관찰자에 대해, 다른 관찰자들이 그들의 순환을 어떻게 전개하는가를 관찰하는 것처럼 지시하고, 다음으로 다름 아닌 그도 또한 자기언급 문제를 구별에 의해 분해해야만 한다는 오톨로지컬한 추론으로 그를 밀어 넣는 것.
- 이러한 제2계의 관찰을 통해 관찰자의 맹점이 인식이론에 끌어들여질 때, 분명히 거기에 정신분석적 감염이나 사회학적 이데올로기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님. 또한 월리엄 제임스나 막스 베버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국 비합리적 가치투기로의 고무만 있는 것은 아님. 루만의 견해로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를 보는 것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인식이론의 체계적 주춧돌이고, 인식이론의 근거 짓기 대신 어프리오리하게 나타나는 경우의 것이다.” (1990h, S. 49)
- 때문에 루만의 조작적 구성주의에서 패러독시 문제는 그 위치 값을 역전. 어떤 관찰자도 (그래서 물론 루만도) 관찰의 기초에 구별을 두고 있는 것에 의해 패러독스에 말려든다는 확인에 가치가 놓임. 그래서 관찰자는 관찰의 시작도 끝도 관찰하는 것이 – 다른 구별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는 – 불가능한 것이 분명. (1990g를 참조) 그렇지만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또 한 번 나타남. 이미 칸트론에서 다룬 것처럼, 그 때문에 바로 루만은 칸트의 질문과 기술을 중요시했고, 이 물음에 제3계의 관찰을 통해 답했던 것.
- 루만의 타개책에 논리학자들은 만족하지 못했겠지만, 이 타개책에서 패러독시 문제는 재귀적 조작에서 그러한 조작의 네트워크를, 이 조작의 재생산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오토포이에틱한 시스템에 대한 지적을 통해, 즉 제4부에서 보았던 심적 시스템과 내지 사회시스템, 제5부에서 보았던 과학시스템을 시작으로 하는 각 기능시스템에 대한 지적을 통해 해결. 왜냐하면 그러한 시스템에서는 같은 시스템의 다른 조작으로의 지시(Verweisung) 없이는 조작은 존재하지 않는 것. 예를 들면 논리학자가 시스템의 모든 조작에 관련한 전칭명제를 형성하고, 전칭명제를 자기언급의 고전적인 크레타적 패턴으로 나란히 할 때에도, 논리학자는 역시 다음 조작을 위해 출발점으로 하나만 조작을 생산. 그가 이것을 다투려 할 때, 그는 패러독시에 의해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3) 조작적 구성주의와 실재
- 구성주의 대 실재론이라는 논쟁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미리 다루고 싶은 것이 세 가지.
- 하나는 실재(Realität)의 것으로 당장 무엇을 표상하는가 하는 문제. 루만은 1987년 회의에서 “당신은 실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
“나는 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구 유럽적으로 사고하는 경향, ‘res’는 물(Ding), 즉 단위체와 관계가 있다고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성주의적 – 이 표현을 나는 좋아할 수는 없지만 – 인식론에서는, 단위체는 자신의 조작들을 통해 주어진 것을 단위체로 종합하는 것이 가능한 시스템과 언제나 상관적이기 때문에, 실재는 무언가 혹은 미지의 것을, 다른 단위체들과 구별되는 단위체들에 의해 덮여 있다고 하는 이 의미에서, 늘 어떤 시스템의 생산물이다. 이것은 그러나 시스템이 독아론적으로 조작한다는 것은 아니고, 시스템이 무언가 다른 어떤 것 없이 단독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실재의 창발은, 단위체들을 생산하는 것이 기능하는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다.” (1997g, S. 131)
- 이렇게 루만은 실재를 그 어원인 <res>와 결합하여 생각하고, 거기에 오토포이에틱 시스템이론의 입장에서 재해석을 더함. 그 때 저항의 경험으로 실재라는 널리 알려진 정의는 시스템 조작에 있어 저항과의 관련에서 고쳐 다뤄지는 것.
- 다음 구성주의와 관념론을 각기 어떻게 이해하는가 문제. 루만은 과학(학문)은 과학(학문) 자신의 분해 능력에 반응하고, 그것은 이미 플라톤, 즉 일상경험을 단순한 독사로 돌리는 한편, 그 배후에 있는 실재로의 질문을 세웠던 플라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봄. 그래서 그러한 반성 노력에 우선은 <Idealismus (여기서는 또한 관념론이라 해석될 수는 없는 이데아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근대과학에서 본다면, 이 <배후에 있는> 실재라는 것은, 인식 그 자체라는 것이 점점 확실하게 판명. 루만 해석에 의하면, 이는 <주체>라는 관념을 변화하는 한 편, <Idealismus (이것은 실재론에 대립되었던 관념론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였다)>라는 이름을 간신히 20세기에, 소수파의 사람들에 의해, 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환되었던 것. (1990h, S. 32f.; 1990, 510) 카와모토 히데오(河本英夫)씨는 “루만에 의해서 구성주의라는 것은, 관념론의 20세기적 명칭이다” 이야기하지만, 루만이 말했던 것은 정확하게는 이러한 문맥.
- 세째로, 근대 <주체> 개념의 이 전환과 함께 생겨난 인식론의 두가지 입장, 즉 주관주의 인식론과 객관주의 인식론의 실재 이해. (1988e, S. 9f.; 1990, S. 530; 1990h, S. 50) 객관주의자는, 실재는 다면적이고, 그러니까 실재는 어떠한 개별의 관찰 입각점에서도 전부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가능. 그래서 관찰 입각점의 변환으로 벗어나야만 하고, 순차적으로 내지는 분업적으로 관찰해야만 함. 주관주의자는 이에 대신해, 다수의 퍼스펙티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 이러한 퍼스펙티브는 각기 제약된 관찰이 가능하지만, 사람이 보는 데 사용하는 퍼스펙티브를 보는 것을 배제하고, 곤란하게 함. 많은 눈, 그것에 의해 많은 정동, 이것이 도덕의 계보학에 있는 니체의 전제.
- 이 세 가지 점에 관련해 서술한다면, 루만의 조작적 구성주의는, 인식과 실재의 관계를 래디컬화하여, 양쪽 입장을 넘어서려는 것. 역시 측면 혹은 퍼스펙티브의 복수성에서 생겨나는 곤란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님. 그래서 문제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로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 복수성은 측면에 있는, 퍼스펙티브에 있는, 그것들은 모두 인지의 산물이고, 각기 인식에 사용하는 구별에 의해 조건 지움. 게다가 이미 참으로 구별한다는 것을 통해, 인식은 인식할 수 없는 모든 것에서 자기를 차이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것은 실재적으로 조건 지워진, 실재적 조작. 인지적으로 모든 실재는 구별을 경유해 구성돼야만 하고, 그래서 이를 통해 구성되어 유지. 구성된 실재는, 실재 또한, 지시되는 것으로서의 실재는 아님. 그래서 이도 또한 인식 가능하지만 그러나 다시 구별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인식에서는 매번 구별 역할을 완수하는 것만이, 실재 보증이고, 실재 등가물. 그래서 구별이 실재를 보증한다는 것은, 그 구별 자신의 조작적 통일 속에 있음. 그러나 참으로 그 통일로서, 그 구별은 그 구별로서는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 – 어떤 다른 구별을 사용하는 것 없이는 (그래서 그 후자의 구별은 그 때 역시 실재 보증을 인수.)
- 이는 외부세계의 실재로의 관계가, 인식조작의 맹점을 통해 수립된다는 결론에 이어짐. 이 결과를 전통에서 <관념론>의 이름을 통해 유통될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하나의 결정적 변화가 인식.
- 이제까지 인식론은 인식과 대상의 구별에서 출발하고, 그러니까 이 구별에서는 답해지지 않는 문제, 즉 인식은 어떻게 그 대상에 이르는가 라는 문제를 가짐. 그것을 통해 그 문제는, 최종적으로는 인식과 대상의 차이의 통일에 있고, 하나의 답은 변증법의 주장 속에 주어짐. 이에 대해, 루만의 논거에 근거할 때, 인식과 대상의 구별은 이것은 이것 대로 하나의 구별에 불과하고, 그래서 하나의 구성이고, 이 구성에서 세계가 상처가 나고, 잘려 나뉘어지고 관찰. 이 구별의 통일은 사람이 이 구별을 사용해 관찰과 기술을 생성하는데 있어 이용하는 맹점이고, 그것 이외의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음.
- 그러나 구성주의를 가지고, 이것은 늘 실재적 환경에 있는 실재적 과정이고, 그래서 늘 또한 환경에 의한 제한에서 진행한다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할 때, 루만 입장의 인식연구에서 더욱 더 추구돼야만 하는 것은, 어떻게 시스템은 그러한 제한을 시스템 자신의 복합성 상승 조건으로 변형하는 것을 이루는가 문제. 그 때 인식의 비임의성은, 이 변형과정의 진화적으로 컨트롤되는 선택성 이외의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것. 어떻게 해서도 사회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자의나 임의라 해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음. (1990, S. 100) 그렇다면, 그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고, 사회이론은 그 관찰자와 그가 사용하고 있는 구별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환경에 의한 제한의 복합성 상승조건으로의 이 변형과정은, 환경 속에 손을 뻗는 시스템의 조작을 전제하지 않고, 그래서 오랜 의미에서의 인식을 전제하지 않음. 그 대신 제한을 복합성 상승의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 시스템 과정의 성과로 생겨나는 모든 것은, 그 시스템에 의해 인식이라고 전제해야만 함.
- 그래서 관념론의 옹호라는 인식과 달리, 구성주의적 인식은 근거를 찾지 않는 것으로만 보임. 구성주의적 인식은 통일로부터 차이로의 전환을 반성. 구성주의적 인식은 구별을 통해 시작하고, 구별을 통해 끝나는 것. 이는 인식의 사항에서 외적 세계로서 이 인식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의해 무리하게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그러하는 것.
- 끝으로 저항의 경험으로 실재라는 기존의 실재 이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조작은 환경에 손을 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계에 관한 루만의 견해(1995b, S. 455~468; 1995c, S. 168~170; 1996a, S. 17~20u. S. 159~163; 1997, S. 23u. S. 127f)를 끝까지 확인.
- 인식은 언제나 실재와의 관계를 예시. 실재적 세계가 있다는 것은, 전통에서 전제되었고, 오늘날에도 전제. 그러나 칸트 이래, 실재적이라는 경우의 것을 사람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에 대해 전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답. 즉 그것은 인식의 노력이 만나는 저항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이 저항은, 이 저항이(그래서 그것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사람이 더 구성해야만 할 때에도 또한, 실재를 알리고 있음. 저항에 주의하지 않으면, 인식은 마음대로의 것을 그려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한정을 부여하는 지점에 주의하지 않고, 그 때문에 학습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음.
- 루만은 실재 지표로서의 저항이라는 이 사고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음. 그렇지만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 이론에 따라 저항을 다른 장소에서 구함. 즉 저항은 외부세계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 속에만 있다는 것. 그래서 폴 드 망과 블라드 고지치(Wlad Gozich)와 맞춰지기 때문에, 이점에서 구성주의 이론과 탈-구축주의 이론은 생각이 일치. 드 만은 유고집 『이론에의 저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은 언어에 관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고지치의 같은 책 서문 「페이퍼 매트 위의 호랑이」에서는 보다 예리하게 “언어에 대한 언어의 저항 그것이 다른 모든 형태 저항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라 표현. 루만은 같은 것을 시스템 조작들은 같은 시스템의 다른 조작들에 있어 저항을 주의한다고 표현. 신경생리학적 의미에서 기억은 각기 현재적으로 수행되는 수미일관성 테스트로부터 성립. 의식은 그것이 생각하는 모두를 믿을 이유는 없음. 의식은 부정이라는 조작양식을 사용.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테이션에 대해 이의. 어떤 경우도 저항은 시스템에 특수한 조작 상호의 관계에 있어 문제로 나타남.
- 사회라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이의, 즉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커뮤니테이션의 저항만이 문제. 그것 만이 실재를 실재로 지시하고, 그것 만이 시스템에 대해 학습, 진화, 자기조직화를 가능. 루만은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 이론에 따라 실재를 이렇게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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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tv7004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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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배 “대선 끝나면 바로잡든 뭘 하든 끝” 이기면 모든 것이 정당화...결과 뒤집기 공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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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holystory-blog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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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교회 담임목사의 특징
1.설교권의 독점 2.인사권의 독점 3.부교역자들을 파트너가 아닌 종으로 여김 4.작은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음 5.자기 성경해석에 절대성 부여 6.교인들을 교회안에만 묶어 놓음
7.축복권의 강조 8.종교를 이용해 두려움을 심어주고 조종하려 함 9.비성경적 비상식적 권위 강조 10.세습의 정당화 11.사역자와 평신도와의 이원론적 차별 강조 12.사생활을 극도로 숨김 13.균형없는 종교행위 강요
14.종교의 사유화 15.투명하지 않은 재정관리 16.교인들을 등급화 함 17.소수 특정한 교인들과의 잦은 만남 18.진리 보다는 체험과 간증을 앞세움 19.교회의 약점과 부족한점을 의도적으로 감춤 20.반대 세력을 권력으로 누르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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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hofar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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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관리위원회, 사가잉지역 공습, 저항세력 소탕하기 위한 공격 정당화
[애드쇼파르] 2023년 4월 11일 미얀마 국가관리위원회 공보팀 쪼민툰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가잉지역 Kant Baru 타운십 민간인 지역에 대한 전투헬기 공습에 대해 국민통합정부가 개최한 행사를 겨냥한 공격이었다고 밝히며 이번 공습은 지역 평화 안보와 지역 안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국민통합정부의 행정관리사무소 개소식에 대한 공격을 통해 국민방위군 대원들을 사살한 것이며 이들은 국가관리위원회를 반대하는 이들이라고 하였다. 3월부터 저항세력들이 이 마을장을 암살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저항세력에 합류하도록 강요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지역에 무기 보관소가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공격을 하면서 폭발로 인해 민간인도 사망을 했다고 주장을 하며 민간인 사상자에서 대해선 공격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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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a-araucari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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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퇴사하며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신고했다. 밤낮휴일 불문하고 터무니없이 일했으며 추가수당 조차 받지 못했다. 회사는 ’이 업계는 당연해‘라는 식. 잘못됐음을 잘못됐어요 호소하면서도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다. 정당한 방식으로 내가 한 일과 시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도 왜인지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망할놈의 회사가 나를 사축으로 만든 것이지..
노예를 탈출하며 앞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취업해 이런 노동 환경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불쌍한 희생자를 생각해며 내 목소리를 냈다. 혹여나 회사가 망할까 찰나의 걱정까지 드는 걸 보며 내 자신이 얼마나 일 아닌 수행을 해왔는지 느껴졌다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명확한 법률 위반이고, 우리는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도 법률 위반이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 법을 지킨다고 회사가 망하면 그런 회사는 그냥 망하면 된다.“
코로나의 창궐과 백신패스의 도입으로 (기저질환으로 인한) 백신 미접종자로서의 직장 선택의 폭은 거의 없음에 가까웠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알바도 백신 접종자만 뽑던 상황에서 그당시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 부디 부디 내 선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음을 바라며 . 진술도 곧이다
2022.10.04 제주에서
p.s.
2022.11.04 모든게 무사히 끝났다. YAHO
라는 코멘트를 덧붙일 수 있기를
p.s.
2022.11.22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은 더욱 커진 것과 다름없다.
근로감독관도 문제다.
노무사를 선임했고, 근로감독관은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에 신고했다. 때로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해야한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게 이리도 힘든 일이라니… 한국의 장점 중 하나는 분명 ’빠른 일처리‘라 생각했지만, 터무니도 없다
이제는 될대로 되라 식이다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고 나는 조금씩 내 삶을 찾는다.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p.s.
2023.03.08
정말 놀랍게도 1월 말에 연락이 없는 근로감독관에게 연락을 했더니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라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2월 중순 토요일 아침 대뜸 근로감독관이 변경 됐다는 문자를 받았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확인한 결과는 인사이동 시즌이라 근로감독관이 변경 됐다는 것.
변경 후 직접 연락이 갈 거라는 답변을 받았지만 2월 말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3월이 됐다. 이제는 거의 무념무상 . 전화를 해서 직접 알아냈다. 근로감독관의 답변은 “아직 조사중. 다시 연락드리겠다“
이 건을 가지고 6개월을 보내는 걸 보는 노무사 아저씨는 웃으시고 나를 도와주시는 대마님은 나더러 이재명이란다. ㅋㅋㅋㅋㅋ 웃기네
외국 일처리 나무랄 것 없다.
한국도 결국 소시민들과 권리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한참이 걸린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2023.04.05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됐다고 한다
난 쉬고 넌 못쉬고 넌 안돼고
아직까지 내가 이번 경험을 통해 뭘 느꼈는지 정리가 안된다.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고, 인생이 계속해서 쉽지만 않다 . 되레 어려운 격이지 이쯤되면…
잘 놀아줘야겠다 다음은 없다
참 오래도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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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me1241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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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다시보기 '구경이' 리뷰
드라마 다시보기 '구경이' 코믹 탐정극
  JTBC - 구경이   편성 : JTBC 토일드라마 출연진 : 이영애, 김혜준, 김해숙, 곽선영, 백성철, 조현철 外 ​장르 : 하드보일드, 블랙 코미디, 스릴러, 범죄 방송일자 / 방송시간 : 21. 10. 30(토) 첫 방송 / 토,일 저녁 10시 30분 방송회수 : 12부작 연출 : 이정흠 / 극본 : 성초이   드라마 다시보기 '구경이' 줄거리(1)   남편의 죽음 이후로 집에 쳐박혀 게임에만 죽자살자 매달리는 구경이다. 씻지도 않고 제대고 먹지도 않은 채 게임 속 가상 현실에 빠져 살고 있다. 그런데 예전에 근무하던 경찰 후배 나제희(곽선영)가 찾아와 보험금 관련 조사 도움을 요청한다. 나제희는 보험 조사관이며, 큰 사건을 해결하여 위태로운 본인의 자리보전을 위해 추리가 뛰어난 '구경이'에게 도움을 요청한것이다.   오랜시간동안 밖에 나가질 못해 본인 비밀번호로 잊어먹을 정도로 방구석 폐인이 되어버렸다. 그런 '구경이'를 움직일 수 있는 걸 아는 나제희는 '구경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세팅한 후 반 강제로 보험금 조사를 응하게 만든다. 신들린 추리로 사건을 해결나가려는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바로 케이라는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구경이'는 본격적으로 케이를 추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용국장(김혜숙)과 손을 잡게 된다. 이 사건으로 더 위태로워진 나제희 팀을 살리기 위해 보험금 관련 사건들을 해결하며 실적을 올리게 된다. 케이를 잡기 위해서는 나제희 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구경이'는 송이경을 만나게 되는데 구경이는 송이경을 알고 있었고, 송이경 또한 '구경이'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송이경이 학교를 다녔을때, 학교에서 경비아저씨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을 조사하러 경찰이었던 '구경이'가 학교를 방문했을때 송이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이경이 다니던 학교에 '구경이' 남편이 선생으로 있었다.   구경이 인물관계도   드라마 다시보기 '구경이' 줄거리(2)   '구경이와 한 팀이 되어 케이를 뒤쫓는 사람들, 나제희와 산타(백성철), 그리고 경수(조현철)는 '구경이' 못지 않게 개성이 있다. 홀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제희는 어렵게 살고 싶지 않아 성공하고픈 욕망이 큰 사람이였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보일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제희가 마냥 나쁜사람으로 비춰지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경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위선이나 혹은 본인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거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되면은 알 수 있게 된다. 산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말을 할 수 없어 AI 목소리로 대신하여 말을 한다. 그렇다고 말을 못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구경이'를 게임에서 만났다고 하지만, 실제로도 '구경이'를 엄청 챙긴다.   '구경이'가 말도 안되는 일을 할 때도 반대의 의견을 내놓기도 하지만 결국 '구경이'가 원하는대로 다 해준다. 막판에 산타가 '구경이'를 엄청나게 챙기는 이유에 대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알수 없게도 그 이유는 진짜가 아니었다. 닉네임 산타 처럼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구분이 안되는 사람인것은 분명하다. 처음엔 이 팀에서 제일 도움이 안될 것 같지만 결국 큰 일을 해내게 되는 경수이다.   구경이가 처음부터 경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수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후로 '구경이'는 경수를 제대로 불러주게 된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느린 듯 했지만, 정작 본질과 중요한 요소를 잘 기억하고 지키는 사람은 경수였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보면서 내내 경수가 죽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던것 같다. 만약 나제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용국장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법을 어기고, 도덕성에 어긋나고,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도 결과만 좋으면 됐다.   그 안일하고 뻔뻔한 생각이 지금의 용국장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결과는 다 좋았으니 내 방식이 나쁘지 않다는 오만함의 태도는, 용국장이 김부장(정석용) 뿐 아니다. 본인 아들 둘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알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오만한 행동은 돌이킬수 없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드라마 다시보기 '구경이' 줄거리(3)   구경이 이미지2 케이가 살인을 하는 이유는 드라마에서 다양하게 나오게 된다. 복수를 위해, 혹은 나쁜짓을 했기 때문에, 본인의 사람이 싫어하기 때문에 등등 이유들은 다 핑계라는 걸 알 수 있다.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갖다 붙인 것이라고 밖엔 생각이 안든다.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쁜짓을 했던 사람들만 고르는 것이다.   혹은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서 해당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조력자 건욱(이홍내)과 함께 케이가 했던 모든 행동들은 누가봐도 옳지 않다. 본인이 지키고 싶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했다고 하지만, 결국 그녀의 곁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혼자 남겨진 케이가 '구경이'를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걸 보면 알 수 있다.   만화적인 연출과 게임에 나올법한 CG가 사용되어진 덕분에 드라마는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가 다루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살인의 정당성" 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많다고 볼 수 있으나 살인에 이유가 있다면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걸까?   '구경이' 이 드라마에선 아니라고 말한다. 살인이 정당화가 된다면, 여러 이유들이 난무하여 사람의 목숨이 쉽게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살아하는 사회가 과연 안전하다고 볼수있을까?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러한 상황은 케이가 용국장과 손잡은 후 행한 살인으로 알 수 있다.   결국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살인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것이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또한 이 드라마를 이끄는데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특이한 캐릭터 '구경이'를 소화해낸 배우 이영애의 연기력도 좋지만, 주변 인물들 또한 대단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코믹함이 적절하게 섞여 부담없이 볼 수 있게 해준 드라마이다. 코믹+추리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꼭 보길 바란다.   드라마 다시보기는 링크사이트 링크스타 에서 드라마 사이트를 확인하시고 시청하시는걸 추천드립니다.   # 드라마 다시보기 미남당 # 드라마 다시보기 보좌관2 Read the full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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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hyunkiduk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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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기관을 신뢰하십시오. 당신은하지 않습니다 설명이 필요하거나 당신의 감정을 정당화 누구에게나 그냥 자신을 신뢰 내부 안내, 그것 가장 잘 압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 시도하지 마세요. 그냥 살아 삶 그리고 행복해요 힘내세요 계속 믿어 💪🙏💯 https://www.instagram.com/p/CoZqvJyvJt6pQEypCyzImO5reBI8R2BEYhC8so0/?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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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ukabi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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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annycool75: 기사내용 꼼꼼히 읽어봤는데 산업용 올리는거 OK,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올리는거 OK, 단계적으로 서민경제 충격을 완화하는 대안을 제시하는게 맞지 본인 반대표 던진것 정당화 시키느라 이전 정부 머리채 잡는건 안부끄럽냐? #김한규
— 🎗예를 들면, (@zizukabi) Dec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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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peworker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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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p 🚢 혹은 gone a well 모두 같은 뜻 으로 지구는 둥글다 입니다 모두 같은 곳 을 말합니다 지구 천체는 시간당 30KM 에 속도로 자전을 합니다
즉 제가 말하는 중앙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서남 아프리카 모두 같은곳 우리가 사는 현재 이곳 제주를 뜻 합니다
다만 세계 기축이 되는 중심은 언제나 이곳 미국 이라는 겁니다 그 외에 나머지 지역은 모두 해외 불법체류자 입니다
국제화 시대에 해외여행 과 교류는 자신들의 꿈이자 모험일뿐 현실도피 에서는 매우 위험한 도전 이라는 거죠 북미주 캐나다 와 동남아시아 중국국경 러시아 모두 여행 금지구역 입니다
인간의 존영과 존엄성을 파괴하는 곳 즉 살인이 정당화 되어 있는 곳 입니다 사람은 주간과 야간이 라는 시간이 바뀌면 서로의 상대시간 을 무시합니다
즉 꿈이자 망상 혹은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기 위한 성형수술인 으로 자각 나의 소유를 탐내기 위한 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셈이죠
즉 내재산 사휘적 지위 혹은 재물이나 아내 등을 뺐으려고 온 불청객 이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날아와 나와 닮은사람이라며 내려와 자신은 미국인 이다 하면서 내 아내에게 접근 이를 모른는 아내가 나와 다른자와 같이 잠을 잤다는 것을 이유로 죽인다는 겁니다
이를 정당화한 것이 형법 제38조1항 야간주거침입죄 입니다 그래서 입감을 시켰는데 안돌아가고 그곳에 계속 남아서도 자신의 사회성으로 구속을 주장 하니 형법 제 35조1항을 내세워 동종 누범으로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곳인 본국 집으로 올때는 수형과 재판 그리고 수감시절에 뼈아픈 기억 고통이 따라와 전해지는 겁니다 그걸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건데
제가 MIC를 잡고 여러분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NGO활동을 사실 UN 에서 사비로 하셔야 하는 겁니다 이를 시정연설 이라고 합니다
도민이나 지금 새로 들어온 앞으로의 도민분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청중앞에서 연설하는 자리죠
전 자료를 이 곳 SNS Tumbler 에 전하는 거지만 SNS 에서도 도플갱어 에 공격을 받고 있지요 그리 썩 잘난 외모도 아니고 국제화 표준인 English 를 구사하지 못 하죠
대인이나 청중앞에 나설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 입니다 가족을 잃었고 사회성을 도둑 맞았으며 아내또한 잊혀진 채로 혼자 살아가는 뒷 간 늙은이 일 뿐 입니다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혼자남은 제 삶에 모습입니다 아내를 찾아 이 곳 까지 왔지만 모두 꿈 이더군요 그래서 조용필 님의 노래가 가슴에 와서 닿습니다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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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ckyandsavory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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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을 그리워할수록, 그걸 지탱해왔던 기둥들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약속, 규칙, 양보, 거래, 상호이해, 자제, 존중의 힘으로 배낭을 메고 낯선 도시로 떠날 수 있었고, 한밤중에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사먹을 수 있었다. 그 힘이 제도화 된 것이 법이다.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최서한의 선線’ 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善’ 이기도 하다.
공정하기만 하다면 독약이라도 기꺼이 들이켤 듯한 분위기가 이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정의, 역사, 진실, 섭리 … … 크고 아름다운 말일수록 백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법은 결국 한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오래된 생각이다. 법�� 오래전 사람들이 공유했던 생각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서로 공유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그리고 진짜 나쁜 건 알만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신성불가침인 나라에 살고 싶은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8세 어린이가 탄광에서 15시간씩 '적법하게’ 근로계약에 따라 노동하던 찰스 디킨스 시대의 영국으로 갈 일이다. 그런 이들 중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본 이는 드물겠지만.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코만, 또는 뒷다리나 꼬리만 보지 말고 코끼리 전체를 체게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법은 평등하지 않다.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할지 모르지만, 법 자체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적인 목적이며, 헌법을 정점으로 한 법질서는 모두 이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인간을 위한 도구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국가는 굶주리지도, 피 흘리지도 않는다. 굶주리고 피 흘리는 것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역사를 들먹이며 민족이나 국가같이 개개인간을 초월한 위대한 존재가 있고 개인은 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전체주의고 파시즘이다.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인간이 진짜로 존엄하긴 한가?
쓰레기 같은 인간, 개 같은 인간, 개만도 못한 인간, 살 가치가 없는 인간… … 뭔가 개가 기준인 것 같긴 한데 여하튼 인간은 다양하게 평가받고 있다.
짜증이 나더라도 인격자답게 참기 바란다. 교과서라는게 원래 그런 법이다. 좀더 풀어 설명하면, 인간은 이성에 바탕을 둔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얘기다.
이성 자율성 윤리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도덕적 자율성에 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양심에 따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존재이므로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란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
인간들끼리 서로 인간이 존귀하다, 존엄하다 해주다보니 이를 자연법칙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실체를 가지고 인간사회를 규율하게 되는 이른바 '상호주관적 실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오히려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율적 이성을 가졌기에 존엄한데, 그런 인간이 스스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택을 했다면 그의 행위에 걸맞은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그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방법이라는 논리다.
'군중'의 분노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동족 간 잔혹 행위, 친족 살해, 아동 성폭행 등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위협하는 행위들에 대한 자동적인 거부감과 분노를 진화시켰다. 이 분노에 기초한 응보형은 여전히 범죄를 벌하는 근본이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형제 폐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국민을 죽이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우선은 원칙의 문제다. 국가에 ��법적으로 국민을 살해할 권한이 부여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응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형을 집행하듯이 공공복리를 목적으로 일부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때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감정의 문제도 있다. 끔찍한 범죄에 대한 우리의 분노 감정이 사형을 정당화 한다면, 사형 집행에 대한 감정 역시 정확해야 한다. 불편한 것들은 무지의 베일 뒤에 가려두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무책임하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집행하는지도 잘 모른다. 우리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목에 두꺼운 끈을 두른 사형수의 발밑 바닥이 갑자기 열리며 사형수의 경추가 분리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끈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신에서 무엇이 흘러나오고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 보지 못한다.
배부른 소리가 인간사회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결핍이 변화를 낳는다. 모두가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안에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우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인간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내가…내가 좋아서 형광펜 그어놓았던 부분을 그것도 엄청 추려서 쓰고 있었는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재미있으니까 읽어보세요.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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