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고
Explore tagged Tumblr posts
Text
김소연, 「쉐프렐라」
발만 따뜻해도 살 것 같아 전기 스토브에 언 발을 갖다대며 너는 잠이 든다 신이 너의 잠 주변을 건달처럼 배회한다
1월이 벌써 다 갔네 1월은 항상 그래왔다고 곧 2월이 온다고 말했다 2월도 항상 그러리란 걸 너는 예감한다
전기세를 걱정하며 딸칵 하고 너는 스위치를 끈다 너의 어긋난 불안이 교합되는 소리 같다
너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기대 앉은 불행이 볼품없이 납작해진다 신도 네 곁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일까
축축하고 고소한 하품 냄새가 온 방에 가득찬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이제 신의 가호조차 필요가 없겠구나
주변을 맴도는 신에게 마실 것을 건네주듯 농을 건넨다 목을 축이는 자에겐 목청을 높였던 흔적이 있다는 걸 아냐고 묻는다
창밖을 보다가 너는 유리창을 본다
창밖은 똑같고 유리창은 매번 다르다 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도 오래 간직해준다 그리고 너에게 그걸 보여준다
너는 다만 명랑하고 싶다 웃음소리로 1월을 끝내고 싶다 2월을 웃음소리로 보내고 싶다
저 식물은 이름이 뭐지 쉐프렐라 아르보리콜라 쉐프렐라 악티노필라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너는 고개를 젖히며 웃는다 머쓱해진 얼굴로 신이 우리 곁을 떠난다
3 notes
·
View notes
Text

먼 훗날 마당에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시골집, 집안은 나의 취향과 너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아담한 집에 가면 귀여운 고양이와 너가 반겨줄 거라 생각하면 축축하고 물기 많은 삶이라도 햇빛에 바싹 마른 이불처럼 포근할 거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난 기억해. 추운 방에서 콩 한쪽 나눠 먹는게 사랑이라던 너의 말에 눈물 뚝뚝 흘리던 나를 말이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낭만적인 사랑을 하게 해줘서 고맙고, 너가 안아줬던 많은 밤은 날 여전히 살게 한다고.
14 notes
·
View notes
Text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의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외피 뒤에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캐내려 하지 말고 그 순간의 온기에 온몸을 맡기라는 충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중에서.
3 notes
·
View notes
Text










11월 마지막 주 포토덤푸 •🌀
연말이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어느 해는 연말이 마냥 신나고 즐거운 반면, 또 어느 해는 연말이 참 외롭다.
3년 전 뒷맛이 씁쓸했던 그 크리스마스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어두컴컴했던 내 첫 자취방에서 나는. 하루종일 불도 켜지 않고는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했다. 축축하고 컴컴한 내 방. 눅눅하고 축 쳐지는 드라마.
다섯 걸음 정도 걸으면 현관에 다다르는 그 좁은 방안에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 정도의 우울감을 경험한 건 난생 처음이었다.
크리스마스는 내게 잘못한 게 없었으나, 크리스마스의 존재 자체가 내겐 너무 잔인했다. 그날 나는 외로움과 우울감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 방 안에서 탈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서는 커피빈으로 향했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시켜먹었던 것 같다. 테이크아웃 해오는 길에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말아야지.' ‘발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이런 어두컴컴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지 않을거야.’ 그날 나는 홀로 남는다는 게 어떤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다음 해 겨울, 나는 친구들과 함께 따스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올해는 다행히도 연말이 반갑다. 올 한 해가 유독 쉽지 않았기 때문에 끝맺음이 반가운걸까?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들의 덕분일까. 아마 둘 다겠지. 끝맺음이란 무엇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3 notes
·
View notes
Text
오래 물고있어 누글누글 축축하고 눅눅해진 담배에
불을 붙여 탄내가 날때까지 빨아냈다
캡슐은 녹아버려 톡 소리도 내지못하고
내 아랫입술에 스며들었다
나는 말했다
불이 안붙어
담배피고싶은데..... 불이 안붙어
소년은 말했다
네 입술이 데일때까지 폈다고
이젠 그만해도 되겠다고
0 notes
Text
비오는 날 방바닥에 식초를 뿌리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1 note
·
View note
Photo

#습하고 #축축하고 #열기는후끈후끈 #비오다해뜨다난리 #이럴땐세균들세상 #더러운건못참아 #냄새도못참지 #확실한성능의자동차에어컨필터_대한초미세먼지필터로 #세균걱정싹~ #냄새걱정싹~ ㆍ ㆍ 근데가격은웰케싼거얌!!! ㆍ ㆍ #대한자동차에어컨필터가_최고얌 https://www.instagram.com/p/CfS2KtQvKvz/?igshid=NGJjMDIxMWI=
#습하고#축축하고#열기는후끈후끈#비오다해뜨다난리#이럴땐세균들세상#더러운건못참아#냄새도못참지#확실한성능의자동차에어컨필터_대한초미세먼지필터로#세균걱정싹#냄새걱정싹#대한자동차에어컨필터가_최고얌
0 notes
Text

편지도 태우고 소리내서 울어도 봤지만
아직 놓지 못한 건 마음 속에 남은
축축하고 차가운 네 손과 따뜻한 품
그리고 담배 연기를 뿜을 때 후 후 강하게 내뱉는
네 습관이 밴 나를 상기할 때 울컥 심장이 아플 뿐.
그다지 아프지 않다. 생각할 뿐
7 notes
·
View notes
Text







어쨌든 나는 세상에 존재했고, 지금도 이렇게 있어. 외롭고 축축하고 차갑지만, 나를 보는 이들보다 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래도 있으니까. /습지의 사랑
40 notes
·
View notes
Text
집 재계약 했다. 북향의 우리집. 가장 큰 창이 옆 건물에 가려져 종일 한 뼘만큼의 볕 밖에 들지 않는 서늘한 우리집. 처음 이사했을 땐 사람이 오래 살지 않았었는지, 또 그 오래 전 세입자는 집에서 담배를 얼마나 폈던 건지, 축축하고 탁한 냄새를 빼느라 몇 주를 무진 고생했더랬다. 무언가에 쫓기듯 본가에서 나오지 말고 천천히 신중히 집을 알아볼 걸, 하며 후회했다. 이사 온 후부터 일신에도 괴로운 일들이 벼락치듯이 쏟아져서 당시 나는 모든 게 잘못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를 짚어가다가 이 집의 '기운' 따위를 탓하는 비논리를 행하기도 했다. 오로지 내가 차곡차곡 저지른 것들의 결과를 거두어들일 뿐이었으면서. 어쨌든 존나 버틴 끝에 그 시기가 지나갔고, 그 사이에 나는 매일 몇 시간씩 찌든 때를 청소하고 가구와 물건들�� 들여놓으면서 살 만한 집구석을 만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턴 집에서 '쉴 수가' 있게 되었다. 울고 욕하며 걸레질을 하던 곳이 여기라니. 새삼 재계약 한 감회가 남달라진다. 공 들인 만큼 정이 들었고 동네에 익숙해져서 이제 대개는 집에 만족한다. 가끔씩 해가 화창한 날에야 겨우 빛 한 조각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몸을 구겨서 앉아있는 고양이를 볼 때는 마음이 다르지만. 너른 햇빛 안에서 뒹굴며 그루밍을 한다거나 좋아하는 공을 멀리 던져주면 아주 신나할 테니까.
집... 넓고 볕이 잘 들고 냄새가 나지 않고 관리실에서 찾아와도 고양이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집.. 집이라는 주제를 떠올리면 늘 생각이 다양해진다. 극히 현실적인 계산에서 극히 비현실적인 상상의 나래까지... 결론은 늘 슬프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사면서 꽃집에서 무진장 애교 많은 고양이를 만났다. 냐아아앙!하면서 나한테 걸어올 때 심장이 쿵했다. 사장님이 우리가 고양이 예뻐하니까 고양이가 낳은 새끼들도 보여주겠다며 안에 있는 아기들을 꺼내서 보여주셨다. 고양이가 잘 키워서 아기들도 건강하단다. 이 꽃집 지나면서 초록이 우거진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그 안엔 이런 귀여운 사장님과 건강한 고양이들이 있었구나.


갑자기 에어팟을 샀다. 이불 빨래 한다고 빨래방에 앉아있다가 에어팟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스토어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일 사러 갈까 했지만, 왠지 건조 시간 40분 안에 맞춰 사오고 싶어서 달려갔다. 노이즈캔슬링을 처음 경험했다. 귀에 꽂고 먹먹해짐과 동시에 우오왁! 하는 탄성을 질렀고 잠깐 멀미가 났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뽑혀가는 느낌. 기술의 발달에 조금씩 뒤쳐지는 나는 늘 이렇게 급가속을 내고 얼마간 부대껴하는 것 같다. 이 신문물은 앞으로 내 생활을 어떻게 바꿀까?
15 notes
·
View notes
Text
내 세상이 행복하기위해 상대를 용서를 하는 것은 마치 불난 곳에 물을 끼얹어버린 느낌? 생쥐처럼 물에 젖은 느낌. 결국 남은건 축축하고 따끔거리는 찜찜한 기분만 남네. 좋은게 맞는건가. 하는 생각들
9 notes
·
View notes
Text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안전가옥

여름밤에 읽기 좋은 축축하고 서늘한 이야기들.
이 책은 안전가옥에서 나오는 오리지널 쇼트 시리즈 중 두 번째로 나온 책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심너울 작가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도 읽어봤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정적>이 제일 좋았다. 이 시리즈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것도 꼭 읽어보시길!) 요즘 내가 제일 관심 있는 출판사와 작가님의 만남이라 더 끌렸다. 조예은 작가님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가 워낙 강렬했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봐온 작가같이 느껴진다.
요즘에는 책을 읽어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책도 미루고 미루다가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서 왜 진작 더 빨리 읽지 않았을까 후회했을 정도로 좋았다. 책이 재밌으니 글도 마구마구 쓰고 싶어졌다.
이 책에 처음 관심이 갔던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다. <칵테일, 러브, 좀비>라는 책 제목을 보고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좀비가 이제는 좀 식상한가? 싶다가도 아직도 들으면 흥미로운 주제인 건 확실하다. 더군다나 칵테일과 러브 라니. 글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이거보다 더 찰���인 제목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단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읽고 내가 모르고 죽을 이 세상의 멋진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이 단편을 읽으며 나는 영화를 볼 때만큼의 짜릿함을 느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기를 같이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마지막 단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내가 좋아하는 타임리프 소재인데 스포일러라 말은 못 하지만 정말 한편의 잘 짜인 영화 시나리오 같았다. 이런 타임 패러독스는 언제나 짜릿하다. 결국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무함이란.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내가 그만큼 삶을 잘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베스트셀러 책들만 찾아서 읽다 보니 가끔은 벅찼다. 앞으로는 내가 읽고 싶은, 내가 직접 고른 책을 더 많이 읽고 싶다.
20200621.
40 notes
·
View notes
Text

당신에게
아침에 장대비 내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누가 창문에다 도토리 수천 알을 쏟아붓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우려했던 것처럼 난 이파리가 거센 빗줄기에 맞아 휘청대고 있었지요. 마룻바닥에 난을 내려놓으니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없지요. 그냥 나 혼자 저를 어여삐 여기며 꿈결인가, 하며 바라보았어요.
장마예요. 길고 지루한.
어릴 땐 습하고 눅눅한 기운 때문에 장마가 싫었는데 요새는 퍽 좋아합니다. 장마 때 혼자 집에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은둔자가 된 것같이 느껴지거든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비로소 숨을 만한 곳을 겨우 찾은 은둔자의 긴장 섞인 안도감, 이어 느껴지는 조금의 지루함과 피로.
이런 기분 재미있잖아요?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당신을 생각합니다. 사실, 편지를 시작하기가 힘들었어요. 예전의 당신과 내 모습을 회상해보다 왠지 치아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기도 했어요. 꼬박 보름을 망설이다 이렇게 펜을 들었네요. 아마도 어리석고 철없던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때 나는 어렸고, 오래 죽어 있었고, 가끔 살아나면 소란스러웠지요. 당신은 나를 오래 보았죠. 물 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요동치던 나를 알아봤지요. 하필.
하필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참 좋네요. 어찌할 수 없음, 속절없음이 사랑의 속성일 테니까. 사랑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할게요.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850년 전 개암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다 개암 한 알이 이마에 톡 떨어져 그만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알았다고요. 먼 먼 훗날, 내가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오래 어두워질거라는 사실을요. 실제로 당신을 만나고 퍽 좋았던 나는 어찌할 도리 없어, 흙 속에 두 손을 깊이 넣었던 것 같아요. 열 개의 손톱에 흙이 촘촘히 박히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냄새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요. 흙은 손을 부드럽게 덮어주었고, 그게 내 사랑의 뿌리가 되었지요. 나는 주저앉은 채로 자랐고, 기어코 초록이 되었고, 꽃도 피웠지요. 그래요. 나는 사랑이 자신의 몸을 통째로 써서 나무를 심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도 나무의 견고한 부동성 때문이겠지요. 그건 ‘깊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요.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방 안을 둘러보며 당신이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더듬어보았지요. 내 손, 잘린 사랑의 뿌리로 자리를 더듬어보며 바랐던 것 같아요. 당신이 내내 생생하기를, 그래서 어여쁘기를, 그 시절 혼자 괴로워하다 참기 힘들어지면, 이런 제 심경을 친구에게 메일로 전한 적도 있었는데요. 그 때 메일을 보니 나는 이렇게 썼더군요.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늙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진 몸 구석구석이 너무 빨리 사그라지지 않고
내내 건강하기를 바라.
나와 별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내내 생생하게 나쁘기를 바라. 나는 그 사람 삶이
캄캄하고 축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아.
나는 지나치게 나이를 많이 먹지 못했다는
비밀을 하나 갖고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늙었단다.
사람들은 모르지, 내 백발을.
가끔 그 사람의 생각이 들려.
그리고 귀를 잊지.
사랑했었던 것 같아.
달리 할말은 없어.
가끔 당신 생각이 들려 귀를 잊으려 했지요. 나보다 훨씬 커진 내 귀를 고흐처럼 자를 수 없으니까 잊으려고, 잊기 위해 애썼던 거겠지요. 참, 속절없는 일인데 말이죠. 그러나 얼마나 다행이에요. 시간은 흐르고,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귀는 작아지고 우리는 떨어져 있어 서로를 다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간들이었고, 퍽 도움이 됐던 경험이었어요. 진심입니다.
기억해요? 당신이 생각보다 어두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나뭇잎에 매달려 끈질기게 초록, 초록이 되려고 애썼던 일이요. 나는 다 기억해요. 당신이 내 앞에서 문고리처럼 도드라졌던 것. 아주 딱딱하고 화난 것처럼. 나는 놀라서 당신을 비틀어 잡았고, 문이 열렸고, 그 때부터 당신은 내 속으로 수없이 이양되었죠. 나중에는 열린 문을 어떻게 닫아야 할지 몰라 오래 방황했어요. 당신을 비우려고, 비우려고 애를 써도 잘 안됐던 것. 이양된 당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수도, 혹은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 수도, 혹은 당신이 나를 멀리서 너무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맞아요. 난 이파리가 거센 비를 피하지 못해 휘청거렸듯이 나도 한 시절 당신에게 호되게 빠져 휘청거린 적 있었네요. 그때 나를 누군가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면, 아마 그 사람을 증오했을 거예요. 누가 사랑에 빠진 자를 말릴 수 있겠어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경험하고 지나가야 할 일정량의 고유 경험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다 겪지 못하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또 헤어지던 순간은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그 일을 나는 긍정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이제 나는 사랑이 흙 속 깊이 손을 파묻어 사랑의 뿌리로 삼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피어나는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사랑은 평생에 딱 한 번뿐일 테니까요. 그보다 사랑은 연약한 뿌리, 공중에서 부유하는 뿌리를 서로 보듬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뿌리는 아주 약하고 흔들리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잘 포개지면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 누가 사랑을 한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이 말을 쓰고 나서 혼자 활짝 웃습니다. 사랑은 한곳에 심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생각한 내가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비가 멈추었네요. 장마가 지나고 나면 여름은 더 맹렬하게 푸른 독을 뿜어내겠죠? 다행이에요. 계절이 반복��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게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이에요. 자꾸 잡아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거예요.
당신, 죽지 말아요. 생생하게 살아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언제나 당신을 가슴 깊이에서 응원합니다. 항상 내 안부를 걱정해주는 당신,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안녕.
2013. 여름.
귀한 연꽃 향을 담아.
/박연준, 하필이라는 말
17 notes
·
View notes
Text
침대에 앉아 창 바깥을 내다보는데 어느 순간 내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오후 네 시였다 권태가 그만 슬픔으로 변해버리는 시간, 모든 것이 무상하고 남루해지는, 이유 없는 슬픔이 몰려드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그런 하루
31 notes
·
View notes
Text




From NY, London. 그냥 나편하게 불러주는 사람들.
오랜만에 새벽까지 놀았다. 축축하고 더운 여름날 새벽
4 notes
·
View notes
Text
발송된 기억
발송된 기억 르미
연아 안녕. 나 경아야. 언제나 편지의 시작은 어색한 것 같아. 어제까지 안녕하고 인사하고 놀고 게임 하고 웃었던 사이에서도 편지로 만나는 건 유독 간지러워. 처음 고양이를 만나 그 혓바닥의 까끌함을 느꼈을 때처럼. 같은 인사이고 같은 혓바닥인데도 느낌이 다른 거야. 싫은 건 아니고, 이걸 어떻게 대해야 할지 흠칫하게 돼.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지. 많은 인사를 종이로 건네고 답을 받는 시간 동안 말이야. 앞으로는 자주 편지를 쓰고 우리를 기록해보려고. 일기는 분명 소소하게 시작된 것인데 나한테는 곧 거창해져서 일상을 담지 못하고 거대한 일들만 담게 돼.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게 되고. 그렇지만 편지는 이미 발송해버린 것이라서 지울 수 없잖아. 좀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내 기억을 네게 위탁하는 거야. 가끔 나를 대신 기억하고 웃으면서 나를 이야기해주라. 이거 부담 주는 거 맞아.
연아 너와 저번에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 너는 평소에도 생각이 많아서 화제가 휙휙 바뀌는 동안에도 네 생각을 곧잘 정리해서 내게 나눠주잖아. 반대로 나는 공상은 많은데 온갖 데에 떠버린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해서 바로 대화하지 못하게 돼. 정보의 홍수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지. 그래서 나는 너랑 대화하고 방에 들어오면 뒤늦게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 그래야 생각을 정리해서 말로 꺼낼 수 있어. 네가 말한 나의 신중함은 나의 부족한 점에서 비롯된 거야. 누군가는 내게 자주 뒷북친다고 말하더라.
어쨌든 그때 얘기했던 도미노 이론 말이야. 하나가 잘 되면 잇달아 잘 되고 하나가 잘못되면 잇달아 잘못된다는 믿음. 누군가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 신념도 어쩌면 과도하게 긍정적인지 모른다고 말했었지. 현실에서는 첫 단추를 잘 끼운다고 해도 뒤 단추를 잘 끼운다는 보장이 없는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의 단추도 거의 제대로 끼울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결국엔 지금의 실패가 이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내가 앞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이 실패의 연장선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돼.
너는 그 실패의 기억이 너를 가끔 묶는다고 했잖아. 그게 너의 속에 결함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내 눈의 너는 항상 그 실패를 보고 아플 정도로 씹어내서 삼키는 사람이었어. 네가 소화할 수 없는 실패나 우울은 그것이 너무 비대해서였겠지. 누구나 한계치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건 네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는 거야. 유당불내증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소화할 수 없는 물질이나 기억이 있다는 거지. 아니면 글루텐처럼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오래 걸리는 것들도 있을 거야.
실패와 관련해서 집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요즘은 다양한 패션의 시대잖아. 내가 어쩌다 패션 유튜브를 봤는데 요즘은 일부러 단추를 어긋나게 채워 입기도 하더라.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입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내가 잘못 끼운 단추도 내가 의도한 대로 해석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리고 사실 옷은 너무 많잖아. 요즘은 심지어 패스트패션이라고, 환경에 도움이 안 되는 산업이 되었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물론 환경에는 패스트패션이 좋지 않은 거지만 내 실패에 대해서는 패스트패션을 추구해보는 게 어떤가 싶었어. 단추를 잘못 끼워도 나의 의도대로 해석해보고, 잘못 끼운 게 영 이상하면 다른 옷을 찾아 입어보는 거야.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나의 실패를 실패로 남지 않게 하는 거야. 나는 분명 실패했지만 그게 나의 영원의 실패는 아닌 거야. 우리도 그럴 거야. 우리는 어딘가에서 실패하겠지만 그게 우리의 평생은 아니겠지. 그게 나와 너의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를 영원히 얽지는 않을 거야.
이제 나는 가끔 큰 실패나 결함이 생기면 과감하게 리폼하거나 버려보려고. 물론 어렵겠지, 나 패션 감각이 완전 꽝이잖아. 그래도 해보려고. 나의 것과 너의 것을 합쳐도 보고. 잘라도 보고, 카라를 덧대보고, 단추를 여러 개 달아보고, 그것도 안 되면 다른 옷을 찾아볼 거야. 나는 그렇게 우리가 그것들을 입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
이런 말들을 네게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너와 핑퐁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 내게 예지 능력이 있어서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뭐 예지 능력이 없으니까 너와의 대화가 더욱 의미 있는 거겠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네가 상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서로가 말하고 싸우고 웃고 우는 중이니까.
첫 번째 편지라서 그런지 너무 딱딱하고 뒤죽박죽인 것 같아. 편지 쓰는 연습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해보지 못해서인가 봐. 글 쓰는 것도 습관이라던데 습관을 좀 들여봐야겠어. 과하게 진지한 편지를 받아줘서 고마워. 본가에서 얼른 출발할게. 주말에 보자. 내가 자켓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 가도 웃으면 안 돼.
언젠가는 패피가 될 수 있겠지?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안녕. 나 경아. 사실 나 저번 편지를 보고 네가 웃거나 진지하다고 놀릴 줄 알고 잔뜩 쫄아 있었어. 물론 네가 누군가의 진심을 우스워할 사람은 아니지만, 저번 편지는 좀 심했잖아. 분명 종이에 편지를 썼는데 뚝딱뚝딱 목각 소리가 나더라고. 네가 내 앞에서 편지를 뜯으려고 들 때는 마음의 레고가 잔뜩 쏟아지는 것 같았어. 네가 내가 쓴 문장을 하나하나 낭독했다면 나는 그 레고를 다 맨발로 밟고 울었을지도 몰라.
너는 지금쯤 주은 언니랑 경유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 사실 조금은 부러웠어. 유럽에 가서 맛있는 걸 먹거나 돌아다니는 것보다도 여행을 친언니랑 간다는 게. 고등학생 때 너는 외동인 나를 부러워했잖아. 언니가 있어 봤자 싸우기만 한다고. 먹는 거로 싸우고 생활패턴이 달라서 싸우고 집안일로 싸우고. 친구를 데려오는 일도 멋대로 하지 못한다고. 나는 그때도 네가 언니와 여러 가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워했는데. 너는 언니와 싸우면서도 영화를 자주 같이 보러 가고 둘이서 외식하고 친구처럼 지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언니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네가 언니와 티격태격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게 부러웠던 것 같아. 역시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 잔뜩 궁금해하고 일반화하고 바라게 되나 봐. 연아 너는 아직도 외동이 부러워? 나는 여전히 네가 부러워.
너는 지금 유럽에 있고 네 숙소는 매번 ���뀔 테니까 나는 그동안 여러 장의 편지를 써놓을 거야. 기왕이면 네가 간 각 나라의 엽서에다가 답장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 진심이야. 웃으면서 넘길 생각하지 마.
여행을 간 동안 유럽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납작 복숭아를 사 먹고, 네가 좋아하는 빈티지 필름 카메라를 잔뜩 구경하고 왔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평안과 일상을 기도하고 있을게.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뭣도 아니지만 여러 신에다가 내 바람을 이야기해볼게. 너와 언니에게 교통 지연도 차별도 맛없는 음식도 없기를.
필름 인화하면 꼭 자랑해줘,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좋은 오후! 나 경아야. 이렇게 편지 앞에 내 이름을 밝히는 게 반복되니까 괜히 생략해도 될 것처럼 느껴져. 그래도 내 이름을 꼭꼭 써다가 붙여야 다른 편지와 뒤섞이지 않겠지? 편지는 그 순간에도 물론 의미 있지만 아주 먼 훗날에 상자에 뒤섞인 것을 다시 볼 때 의미가 더 크잖아. 나도 가끔 중고등학교 때 애들이 써준 롤링페이퍼나 편지를 다시 보거든. 솔직히 그때만 썼던 유행어나 그때라서 쓸 수 있었던 날 것의 애정표현을 보면 웃기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해. 편지는 시절을 포착해서 담아두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귀여운 편지를 발견하면 종일 웃기고 좋더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연아 유럽에서 돌아오면 신발장에서 다섯 걸음을 걷고 왼쪽으로 돌아 열 걸음을 더 걸어. 그러면 오른쪽에 네 옷을 담아두는 장롱이 보일 거야. 장롱의 네 번째 서랍을 열고 찢어진 청바지를 들어서 그 밑을 보렴.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그림 작가의 포스터를 넣어뒀어. 네 방 빈 벽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왔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너는 그분의 그림 모두를 사랑하니까 아마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어제는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그리고 오랜만에 싸웠어. 뭐 크게 싸운 건 아닌데. 연아 나는 엄마를 습관처럼 사랑하고 있어. 나는 이게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 아마 평생 지울 수 없을 거라고 여겼어. 근데 엄마랑 떨어져 사는 5년간 습관이 어느 정도 사라졌나 봐. 엄마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돼. 엄마가 가진 생각이나 미련 같은 것들. 내게 투영해서 바라고 있는 도 넘은 기대 같은 것들. 그런 게 하나씩 보이고 명확해져.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아예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아마 평생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이건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진 숙명인 것 같기도 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게 됐어. 습관적 사랑은 습기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비가 오면 그 순간은 옷이랑 몸이 다 젖잖아. 근데 비가 평생 오는 곳은 없으니까, 결국엔 젖은 몸이나 옷은 마르게 될 거야. 나는 엄마 옆에 서서, 젖은 수건을 방 안에 매달고 있어. 특별히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내 옷이 눅눅하게 남아서 내가 그걸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게 하는 거야. 눅눅한 옷은 사람을 괜히 ���경 쓰이게 하잖아. 옷에 어떤 냄새가 나는지 자주 맡게 되고. 원래대로라면 비가 그치고 언젠가는 맑아져서 하늘이 개고 건조해질 텐데. 그게 계절의 숙명인 건데. 나는 억지로 가습기를 틀고 젖은 수건을 걸고 방에 물을 뿌리고 있어. 습관적으로 엄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비단 엄마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옷이 말라야 하는 것 같아. 옷이 더이상 눅눅하지 않고 다 말랐는데도 내가 그걸 신경 쓴다는 게 진짜 관심이고 사랑인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마음이 메말랐다거나 사람이 건조하다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져. 마음이 축축하고 사람이 눅눅해지면 사랑은 금방 곪고 곰팡이 피는데. 곰팡이는 금세 전이되어서 다른 사랑도 쓰지 못하게 만드는데. 나는 사막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그래서 거실에 제습제를 하나 놔뒀어. 물먹는 하마 말이야. 여름이기도 하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포장지를 뜯지 않은 제습제를 놔두려고. 연아 우리는 서로를 건조하게 사랑해보자.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말이야.
나는 이제 밥을 먹을 거야. 오늘은 귀찮아도 든든히 챙겨 먹고 싶어서 닭고기를 우유랑 카레에 재우고 양념을 만들고 채소를 썰었어. 뭐 만드는 것 같아?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까 내가 답할게. 닭갈비야. 내일은 남은 닭갈비로 볶음밥을 해 먹으려고. 네가 없으니까 닭갈비가 왕창 남아서 볶음밥을 두 번 해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닭갈비 맛있겠지?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안녕. 나 경아야. 내일이면 네가 유럽에서,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날이야. 너는 미피 세상이라면서 여러 사진을 보내줬지. 네덜란드의 특산품은 풍차와 튤립과 미피인 걸까? 그렇다면 한국의 특산품은 뭘까? 찍어다가 정말 많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그게 아몬드랑 김 같아. 여러 가지 맛 아몬드랑 김이 명동에 한가득 진열되어 있더라. 네가 한국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뭐야? 나는 네 답이 열무국수나 냉면일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질래.
한국은 완전 찜통이야. 그래도 조금은 더 선선한 곳에서 찜기로 이동하는 네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네가 덥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네가 얼른 한국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이중적이지.
이때까지 메시지로는 전하지 못한 것들을 편지에도 마음에도 머리에도 가득 저장해뒀어. 나는 성정이 느리니까 아주 천천히 이야기해볼게. 그러다가 용량이 가득 차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지도 몰라. 그래도 언젠가는 다 이야기할 수 있겠지?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내일 네가 먹을 수 있도록 열무김치랑 낙지 젓갈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내일은 순두부찌개를 넉넉히 끓여서 남겨두고 갈게. 일하러 가야 해서 너를 마중하거나 같이 점심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저녁은 같이 먹자. 양식 먹으러 가자고는 안 할게. 메시지로 양식 먹자고 한 장난의 답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웃겼어. 그 장난으로 너한테서 들을 일년치 욕을 다 들은 것 같아.
나는 자기 전에 조금씩 글을 써보고 있어. 연이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생긴 습관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적는다는 건 언제나 어려워. 모든 세계관을 촘촘히 짠 뒤에도 글을 쓰는 건 여전히 힘들어. 나의 시선이 그에 대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 내 치졸한 마음이 나를 그보다 상위에 두고 그를 동정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내 궁색한 마음을 다듬고 줄이는 중이야. 언젠가 좋은 글을 쓰게 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언제는 글도 써지지 않고 인물을 보는 내 시선도 옹졸해서 글을 그만둘까 싶기도 했어. 그런데 사실 어디에라도 있을 사람처럼 그 인물을 꾸며내서 살아 숨 쉬게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일도 마찬가지야. 종교가 탄탄해지는데도 수천 년이 걸렸는데 뭐. 지구가 태어난지 몇억 년이 지났는데도 평등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내가 며칠 만에 신처럼 모든 것을 꾸미고 직조하고 만들어내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언젠가 내 글이 부끄럽지 않을 때 즈음에 네게 내 글을 보여줄게. 지금 당장 글을 보여준다고 해도 너는 나를 비웃지 않을 테지만, 나의 열등한 마음이 네 이야기를 꼬아 들을 것 같거든. 언젠가는 네 글도 보고 싶다. 네가 그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네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 시각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
연아, 나는 이제 자야겠어. 내일 일찍 일어나서 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찌개를 끓인 김에 나도 아침을 챙겨 먹고 가려고. 내가 유럽에서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한식을 선사해볼게. 주은언니도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내일 집에서 보자. 일 끝나자마자 달려갈게. 언니도 너도 멀미 없이 도착하기를 바라.
냉동실에 아이스크림도 있어,
경아가.
3 notes
·
View notes